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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콘텍스트-퀜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사 방법론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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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2
  • • Title
  • : 의미와 콘텍스트-퀜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사 방법론과 비판
  • • Author/Translator
  • : 제임스 탈리 엮음/유종선
  • • Year
  • :
  • • Publishers
  • : 아르케

About Author/Translator

조지프 페미아/리버풀 대학 정치이론 및 제도 학과 선임교수
키스 그레이엄/브리스톨 대학 철학 교수
마틴 홀리스/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철학 교수
존 키인/센트럴 런던 공과대학 통신정보센터 정치학 교수 겸 연구원
케네스 미노그/런던 정치경제대학 정치학 교수
퀜넨 스키너/케임브리지 대학 정치학 교수
네이선 타코브/시카고 대학 정치학 부교수 겸 단과대학 부교수
찰스 테일러/맥길 대학 정치학 및 철학 교수
제임스 탈리/맥길 대학 정치학 및 철학 교수

유종선(역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국 존수 홉킨스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울산대학교 사회과학부(정치학전공)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Confucius, Chu-Hsi and the Learning of T’ien-chu”(박사학위 논문), “조선 후기天 논쟁의 정치사상”, “신국제질서의 도전과 대응”(공저), “조선시대 개혁사상 연구”(공저), “미국사 100장면” 등이 있다.

Abstract

 

Table of Contents

제1부 서론
서론
제1장 펜은 힘센 칼이다 : 퀜틴 스키너의 정치분석-제임스 탈리
제2부 퀜틴 스키너의 해석이론
제2장 사상사에서의 의미와 이해
제3장 동기 · 의도 · 해석
제4장 ‘사회적 의미’와 사회적 행위의 설명
제5장 정치사상과 정치행위 분석에서의 몇 가지 문제
제6장 언어와 사회변동
제3부 비판
제7장 꽃으로 말하세요-마틴 홀리스
제8장 발언수행적 기술은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키스 그레이엄
제9장 사상사 연구의 ‘수정주의적’방법에 대한 한 역사주의자의 비판-조지프 페미아
제10장 지식사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 :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케네스 미노그
제11장 퀜틴 스티너의 방법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네이선 타코브
제12장 역사철학의 남은 테제들-존키인
제13장 갈등의 해석학-찰스 테일러
제4부 후기
제14장 나의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 장세룡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

장 세 룡*영남대학교 사학

Ⅰ. 서론 Ⅱ. 마키아벨리의 자유 Ⅲ. 고전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Ⅳ. 자유국가 이념의 성쇠 Ⅴ. 결론

Ⅰ. 서 론

1997년 11월 12일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근대사 흠정강좌(Regius) 교수로 취임하며 행한 강연은, 여러모로 1958년 10월 31일 아이제어 벌린(1909-1997)경의 옥스퍼드 대학 Chichele 강좌 교수 취임 강연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 당시 벌린은 이 강연에서 많은 혼동을 유발하는 용어인 자유에 관한 개념의 본질과 범주를 명료화하기 위해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과감하게 도입하였다. 여기서 벌린은 자유를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로 구분하고, 공동체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역사적 변혁의 실천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폭압적 권위의 정당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비판하였다. 그 반면에 개인의 사생활에 몰두하는 사생활 중심주의(privatization)를 긍정하는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내면적 발전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더 진실하고 인간적인 이상이자 이 시대의 중요한 가치로서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변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내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누리는 것, 한마디로 ‘간섭의 부재’(absence of interference)가 성취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강제적인 ‘폭력 또는 지배의 부재’ 같다. 적극적 자유는 행위의 목적적 수행에 초점을 두고, 소극적 자유는 행위를 위한 기회의 부여에 의미를 둔다. 그 결과 전자는 민주적 참여와 권력의 원천에, 후자는 삶에서 간섭받지 않는 영역의 확보와 권력의 제한에 관심을 쏟는다. 그 후 과연 두 종류의 자유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바람직한지 여부와 특히 소극적 자유 개념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필자는 이를 편의상 맥캘럼으로 대표되는 분석적 비판, 맥퍼슨의 좌파적 비판, 테일러의 고전적 비판으로 구분한다. 맥캘럼은 소극적 자유를 긍정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는 이원론이 아니라 삼원론적 관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즉 누군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x가 a를 행하거나 z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자유에 관한 진술의 기초 논리로서 삼각 관계야말로 모든 자유 개념에 해당된다고 분석하였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에 관한 일관성 있는 진술을 위해서 행위자와 장애물과 목적성이라는 3변수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적 해석이다. 이에 벌린은 억압자에 대해 투쟁하는 사람과 국가의 관계를 예로 들며 이때 자유에 대한 갈망은 비물질적인 것이므로 결코 삼원적 관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맥퍼슨은 자유란 자신의 고유한 주인이 되는 능력, 이성의 제국과 결합하는 능력, 공적 권위의 행사와 통제에 참여하는 권리로 구성된다고 보고 벌린이 자유의 사회적 조건 곧 어떤 경제 체제가 개인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소홀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벌린은 자유에 대한 자연권을 정치사회에서 특정의 경제 체제를 지지하는 것과는 분석적으로 구분한다. 그 이유는 저항권과 비간섭을 추구하는 권리는 어떤 경제 체제에서든 침해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체제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테일러는 벌린이 구분한 자유의 변수가 적극적 자유의 개념에서는 급진화되어 있고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서는 온건화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즉 전자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는 것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도록 강요하는 좌파 전체주의 이론과 연결시키는 반면 후자는 물리적’법적으로 외부적 장애물의 부재로만 정의함으로서 모든 내적 장애물 ― 환상, 허위의식 또는 부조리한 공포 등 ― 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소극적 자유는 어떤 결정적 목표나 목적의 추구와는 무관하고 오직 자유로운 행위의 기회가 존재하는지 여부에만 주목하는 기회(opportunity) 개념인바 도리어 자유는 어떤 결정적 목표의 추구에 참여하는 실행(exercise) 개념으로 볼 것을 제안하였다. 이점에서 테일러는 적극적 자유에 더 호의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자율적 행위와 결합된 어떤 정전적(canonical) 규범 형식이 제공되는 사회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위의 논의들은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개념들의 확장을 위한 철학적 분석에 치중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이에 반하여 철저하게 역사적 입장에서 두 개념의 존립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구가 제기 되었다. 그것이 근대 사상사에서 마키아벨리와 홉스 등의 자유 개념을 축으로 삼아 특히 공화주의 이념의 성쇠와 자유주의 이념과의 상호 삼투 관계를 추적한 스키너의 연구들이다. 여기서 필자는 정확히 40년을 사이에 두고 한 시대의 사상사를 상징하는 인물인 벌린이 고인이 된 바로 그 달에, 한 탁월한 역사가가 자유의 개념에 관한 신중한 제안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라고 판단한다.

Ⅱ. 마키아벨리의 자유

스키너 역시 지금까지 사상사에서 두 가지 자유 개념의 유효성에 일단은 호응하면서 그 개념들이 근대 사상가들에게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에 주목해 왔다. 그 결과 그가 특별히 학문적 공략의 대상으로 주목한 홉스는 물론이고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도 중심적인 자유는 소극적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홉스의 자유 개념이 소극적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고 사상사의 통념이기도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자유 개념이 소극적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통상적으로 시민적 휴머니즘 나아가 공화주의 이념과 연관시키는 사상사의 해석과 결부시켜 판단할 때 이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공화주의 이념은 흔히 적극적 자유의 옹호와 강력한 친화성이 있다고 설명되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키너는 근대 사상사에서 또 다른 자유 개념의 역사 즉 공화주의의 전개와 그와 관련되는 자유의 전망이 출현하는 과정에 많은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므로 취임 강연에서 공화주의적 자유의 개념,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국가와 시민적 자유에 관한 신-로마인(neo-roman) 이론의 전개 과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은 결코 뜻밖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논쟁적인 벌린과 달리 스키너의 논리 전개는 매우 우회적이다. 그는 오직 담담하게 17세기 중반 영국혁명의 과정에서 신로마인 이론이 사상가들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되었던가를 서술 ― 스키너 본인의 말을 인용하면 고고학적 ‘발굴’(excavation) 행위를 ― 하고 있을 뿐이다.(p.112) 그리고 이런 발굴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지루한 반추(ruminate) 과정을 거쳐 마지막 부분에서 벌린의 자유 개념이 표방하는 전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과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성사가의 자세를 논하며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하고 있다.

스키너는 지금까지 자유의 개념에 대한 연구에서 자신의 목적을 현재의 사회 및 정치적 논증에서 채용하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는 데 두어 왔고, 그 전제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들에 내포된 개념들의 일관성에 관해 직관하는 능력을 요청한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거나 친숙하지 않은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검증해보면, 이들이 때로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서 상호 작용하였다는 것을 보충하는 이익을 주리라고 ‘겸손하게’ 기대한다. 사실 사회적 자유를 소극적인 기회 개념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실행 개념으로 생각할 것인가의 문제는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논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특히 인간의 번영(eudaimonia)에 관한 객관적 개념을 확립할 수 있는지, 나아가 과연 합리적인 것이 도덕적인지 묻는 도덕철학의 문제와 관련된다. 스키너는 대체로 이 문제가 적극적 자유론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함축을 선호하는 테일러나 볼드윈의 관점과 친화성을 지닌다. 사회적 자유에 관한 스키너의 전제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연유가 여기 있다. 이 전제를 따르면 첫째 자연주의적 윤리 체계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인간적 목적을 지닌 도덕적 존재이다. 둘째 스콜라 정치철학적으로 인간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본성을 지니므로 우리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이란 전제에서 스키너가 지향하는 자유는 당연히 적극적 자유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벌린과 그를 지지하는 견해가 공동체에 봉사하는 덕성을 지닌 시민의 공공 정신과 자유의 연관성을 폐기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근대 사상사의 한 전통에서 ‘공적 봉사의 덕성’과 ‘개인적 자유’는 오늘날에는 마치 비일관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스키너에게 벌린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은 그 뿌리가 자유를 ‘장애물의 부재’(absence of opposition) 상태로 본 홉스와, 자유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행하거나 금지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로크에 있다. 그리고 홉스 이후의 계약론적 자연권 이론에 나타나는 사회적 자유에 관한 독단주의를 교정하는데 정치적 자유에 관한 마키아벨리-해링턴적인 스토아적 사고방식이 유용하리라 기대한다.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T의무론U을 따라 어느 정도의 개인적 자유의 연속적 보장은 자발적인 공적 봉사에 있다고 보고 개인의 자유는 자유로운 공화정 하의 자치 공동체에서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홉스는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중적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고 주장한바 이는 그후 소극적 자유의 옹호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반복된 견해이다. 또한 홉스는 고전 역사와 철학에서 늘 명예롭게 언급된 자유와 그 영향을 받은 자들의 정치적 저술과 논문에서 언급된 자유는 특정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의 자유’라고 확언하였다.

그러나 스키너가 보기에 이는 홉스가 고전 공화주의가 표방하는 명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신중하게 왜곡하려는 시도였다. 왜냐하면 공화주의의 본질은 국가가 ‘자유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개인적 자유도 박탈당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개인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서 핵심적 요소인 이익과 권리에 바탕 둔 개인적 자유와는 의미가 크게 다르다. 도리어 그것은 시민이 전심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 곧 외부의 힘이 강요하는 굴종에 대해 공동체를 방어하는 투쟁 능력에 의존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모든 시민이 정치체(body politics)의 의결에 동등하게 참여하여, 상층 시민이 민중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러한 공적 봉사를 수행하는 데 시민에게 요청되는 세 가지 자질이 있으니 그것은 자유를 방어하는 용기와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유 정부를 유지하는 덕성 그리고 절제와 질서의 준수이다. 이는 결국 조국과 자유를 지키는데 필요한 자질이며 키케로적인 분별력과 정의, 용기와 절제가 핵심적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전시의 정의와 평화시의 정의를 구분한 것은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다. 마키아벨리의 출발점은 번영이나 인간의 진정한 이익의 문제에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다양한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하도록 촉진하는 ‘기질’에 대한 고찰이다. 스키너는 위와 같은 부분에 대한 논의를 간과한 소극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현재의 논의가 혼동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 권리에 관한 이론이라는 견해인 바 이는 실제로는 독단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고전 공화주의 이론 역시 개인적 자유에 주목하였으므로 자유가 반드시 특정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생각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자유 개념은 벌린식으로 말하면 ― 역설적으로 ― ‘소극적 자유’의 이론이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는 이익에 바탕 둔 개인적 권리의 개념에 대해 특별히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부패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이익과 의무는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비록 공동체에 참여하는 용기와 분별심을 요청받지만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그것을 흔쾌히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인간은 부패하기 쉽다.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부패의 극복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이기적인 시민들이 덕성을 실현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해답은 이기적 행동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강요하는 법률에 있다. 법과 개인적 자유를 연관시키는 계약론이나 고전 공리주의와 달리 고전 공화주의에서 법의 정당화는 개인적 자유의 보존과 무관하다. 법은 단지 자유국가의 제도를 떠받침으로써 그것이 없으면 굴종으로 전락할 일종의 개인적 자유를 창조하고 보존할 것이다. 이때 법의 메커니즘은 시민이 자유로워지도록 덕성의 계발을 강제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스키너의 자유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키너는 공화주의적 자유 이론이 홉스-벌린식의 소극적 자유의 분석과 결합할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회적 의무의 요청을 확대함으로써 진실로 벌린이 목적으로 삼은 ‘사회적 삶의 최소한의 요구와 양립하는 최대한의 비간섭의 영역의 선택’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한다. 스키너가 보기에 현대 자유주의는 이기심과 개인적 권리의 영역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공적 영역이 휩쓸려갈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이의 대안으로 이분법적인 적극적 자유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공적 영역에 책임을 지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는 자유의 실천을 제안한다. 영국혁명기 자유 이념의 대립과 삼투 관계를 설명하는 그의 취임 강연은 바로 이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Ⅲ. 고전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

신로마인 이론의 계보를 추적하며 스키너가 주목하는 상황은 내란이 발발하여 의회파와 왕당파가 주권의 본질적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하던 1642년 이후 시기이다. 이때 파커(Henry Parker)는 국가적 긴급시에 국가와 법의 문제에서 최고의 판결권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원천이며 충족 원인인 주권자 인민의 대표자 의회에 놓여져야 한다는 견해를 천명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에 왕당파는 즉각 왕은 성서에 바탕 둔 주권을 지닌 인격이라고 반격하였다. 이후 헌정 위기가 지속적으로 심화되자 왕당파들에게서 새로운 반론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그것은 주권의 담지자인 군주의 자연 인격은 신체 기관을 지닌 자연 인격이 아니라 국가의 인공 인격이라는 견해로 표현되었다. 이런 견해는 이미 로마법학자들에게 선례가 있었던 것이지만, 근세 자연법학자 특히 T자연법과 만민법U(1670)에서 국가를 복합적 도덕 인격으로 고찰한 푸펜도르프, 그리고 T리바이어던U(1651)에서 국가는 주권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 수행 또는 대표되는 인공 인격으로 규정한 홉스에게서 선명하게 나타났다. 동시에 홉스는 국가권력과 신민의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탐색하였다. 그리고 목적의 추구를 위한 능력의 행사에서 방해받지 않는 것을 자유의 첫째 조건으로 설정하였다.(p.5) 또한 국가의 주요 의무는 동료 시민의 권리침해로부터 방어해주는 것 곧 모두에게 동등하게 법의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자유가 시작하는 곳은 바로 이 법의 적용이 끝나는 곳이다. 법이 금지하지 않는 영역에서 시민은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시민적 자유가 보존된다. 이런 견해는 내란 발발 직후 왕당파 법학자들(Griffith Williams, Dudley Digges, John Bramhall, Sir Robert Filmer)이 이미 채택한 것이나, 홉스에게서 훨씬 단순하고 강고하게 제시되었다.

홉스에게 법의 강제력은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반드시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국가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은 “법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하는 것이고 행위자가 소홀히 할 자유를 지닌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이 교의는 유물론자이며 결정론자인 홉스가 동작하는 물체만이 오직 현실을 형성한다고 믿은 사실에 뿌리를 둔다. 그 결과 첫째 한 인간의 자유란 신체가 그의 힘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수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행동을 외부적 방해 없이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행동에서 의지야말로 종극 원인이고 신중한 숙고의 마지막 원인이다. 홉스에게 자유에 대한 두 번째의 조건은 법에 대해 복종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복종은 강제를 전제로 하고 이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법률이 복종을 강제할 때 이것이 반드시 행위자의 의지에 반하여 행위토록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복종은 불복종의 의지를 포기하도록 이끄는 데서 나온다. 즉 복종하려는 의지를 획득하고 따라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숙고토록 이끎으로서 실현된다.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왕당파와 노선을 같이하는 신민의 자유론이지만 그러나 두 가지 대비되는 결론으로 이끈다. 첫째 시민적 자유는 법의 침묵에 의존한다. 둘째 준수해야하는 법이 없는 한, 신민으로서의 자유를 보유한다. 즉 물리적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한 신민의 자유는 보존된다. 홉스의 이런 분석은 시민적 자유는 자유국가(civitas libera)에서 실현된다는 고전 공화주의적 관념의 사상적 전통을 능가하려는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p.9)

자유국가에서 실현되는 시민적 자유의 관념은 로마의 법률적’도덕적 주장의 특징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 공화주의적 자유의 변호자들에 의해 부활하고 특히 마키아벨리의 T리비우스론U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휴머니스트적 가치가 수용됨과 더불어 후기 엘리자베드 시대에 비이컨(Richard Beacon)이나 베이컨 같은 정치적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인용되고 연극과 시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혁명기의 의회파가 이 관념을 강조한 이래 18세기까지 정부에 대한 가부장권론 및 사회계약론과 경쟁하였고, 스튜어트 왕조를 비판한 네빌(Henry Neville)과 시드니(Algernon Sidney) 같은 자들과 18세기 전반에 볼링브로크 그리고 후반에 프라이스(Richard Price)의 집단에서 표명되었다. 특히 공위기에 니덤은 신문 Mercurious Politicus의 편집자(1651.9-52.8)로서, 밀턴은 T자유국가 건설론U(The Readie and Easie Way to Establish a Free Commonwealth, 1658) 등의 신로마인적 및 공화주의적 저술의 가장 풍부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이들 신로마인 이론가의 특징은 시민적 자유를 논하면서도 엄격하게 정치적 의미에서 논한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근대 시민사회의 개념이 미흡한 반면 신민의 자유와 국가권력간의 관계에는 관심을 집중하였다.(p.17) 이들에게 자유란 곧 다수의 특수한 시민적 권리들이 억압받지 않고 향유되는 것과 동등시되었다. 그런데 이는 고전기나 르네상스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개념이다. 마키아벨리도 권리에 대한 용어는 채택하지 않았고 개인적 자유란 오직 질서 잡힌 정부로부터 파생되는 이익이라고 서술할 뿐이었다. 이들은 또한 급진적 종교 이론과 결합하여 밀턴의 T국왕 및 행정관직 보유권U(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1649)에서처럼 자유의 상태는 인류의 자연 조건으로 규정한다(해링턴은 예외). 나아가 원초적 자유는 신이 제공한 천부의 권리이며 정부가 추구해야할 목적인 자연적 권리라고 상정하였다. 이들은 자유의 보장 곧 시민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두 개의 기본 가정을 지니고 있었다.

스키너는 바로 이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이들의 분석이 특정 이념의 선전자 또는 한 사상의 학파로까지 보이게 한다고 그 비중을 높이 평가한다. 이들이 공유한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자유는 시민적 결합의 자유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초점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의 자유’나 ‘자유 정부’(밀턴) ‘국가의 자유’(해링턴) ‘국민들의 자유’(시드니)에 맞추어졌고 모두 자유국가의 탁월함을 옹호하는데 일치하였다. 사실 이들이 전체 공동체의 자유를 공언한 것은 고전적 정치체에 대한 관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이들이 유기체적 국가관을 표방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이런 은유적 표현은 자유국가를 자유 인격처럼 자치의 능력에 의해 정의하거나, 자유국가란 다름 아닌 정치체의 활동이 전체 구성원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공동체를 의미하도록 만들었다.(마키아벨리, 니덤, 시드니)(p.26) 이런 가정은 한편 신로마인 이론가 대부분이 보증하는 헌정적 함축을 전달한다. 곧 국가가 자유롭다면 법률은 시민 그리고 정치체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법률이나 지배를 인민의 동의에 바탕 두는 것이 권력의 자의와 횡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란 함축이 내포되어 있다. 신로마인 이론가에게 인민의 자유는 각 개별 시민들의 의지를 합친 총계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 정부란 다름 아닌 각 개별 시민이 법의 제정과 폐지에 참여권을 행사하고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정부는 실현하기 어렵다. 대중은 걸핏하면 동요하기 쉽고 그들을 집결하기란 더욱 어렵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그것은 바로 대의제도라는데 의견이 합치되었다. 그러나 입법기관의 유형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일부는 하원 중심의 단원제(Francis Osborne, 니덤, 밀턴), 일부는 상원 우위의 양원제(해링턴, 네빌, 시드니)를 선호했고 왕정복고 이후에는 후자의 견해가 우세해졌다.(p.34)

시민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특징적 관심 가운데 주목되는 점이 또 있다. 그것은 시민 자신이나 전체 공동체 이외의 어떤 이의 의지에 의한 지배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마키아벨리가 자유로운 도시와 자유롭지 않은 도시를 구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관념은 확대되어 훌륭한 법률과 자유를 누리는 고대 로마에 대한 찬사,(John Hall) 군주정 치하는 왕권에 예속되고 노예 신분이 되는 것이란 확신,(밀턴) 자유민과 노예민의 대비(시드니)로 나타났다. 본래 노예제에 관한 전거는 T로마법 학설집U(Digest)에 있다. 여기서 굴종의 본질은 자신에 대해 판결(sui iuris)하면 주인이며 타인의 판결에 예속되면 자유의 결핍이란 명제와 연결되었다. 노예는 개인적 자유가 결여된 존재로 본질적으로 타인 곧 주인의 권력안에(in potestate domini) 있게 되는 것이다.(p.41) 이 문제는 고대 로마의 모랄리스트와 역사가들(살루스트, 세네카, 타키투스)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이기도 하다. 신로마 저술가들은 자유의 소유 또는 상실에 대한 고찰에서 주로 이들의 노예제 분석을 논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로마의 자유국가에 관한 관심을 근대로 전달한 물길은 리비우스였고 마키아벨리를 통해 해링턴에게 전달 되었다. 리비우스에게 자유는 타인의 의지에 종속됨 없이 자신의 힘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상실은 노예로의 전락과 동등시되었다. 그리고 자유 없는 공동체는 타국의 지배 또는 권력 아래서 사는 것이었다. 신로마인 작가에게 예속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선택한 목적의 추구에서 자연적 신체처럼 의지대로 행동할 능력이 박탈당한 경우, 둘째 자유 인민에 대한 의지의 박탈인 바 그것은 폭정의 분명한 표시였다. 그러므로 1642년 1월 찰스 1세의 명령으로 하원의원 5인의 체포를 시도한 것은 정당성 없는 힘의 행사로 공적 자유를 손상시킨 폭거였다. 그 이유는 전체 정치체의 대표자보다는 어떤 개인의 의지에 예속되거나 혹은 되기 쉽다면 그 자유는 박탈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적 예속의 조건은 첫째 정치체가 예속화하는 것, 둘째 한 국가 내의 헌정 체제가 지배자에게 자유재량권과 대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후자의 조건은 바로 자유의 본질에 대한 파괴와 직결된다고 인식했다. 특히 밀턴은 찰스1세를 옹호한 T국왕의 존엄한 심상U(Eikon Basilike, 1749)을 논박한 T심상 파괴자U(Eikonoklastes, 1749)에서 군주의 자유재량권은 자유국가를 노예의 상태로 만드는바 공적 자유는 대권의 현실적 행사가 아니라 대권의 존재 그 자체에 의해 위험해 진다고 강조하였다.(p.52) 따라서 그들은 인민의 동의를 받고 제정된 법에 복종하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대권에 대한 안전판이 부과되는 혼합 정부를 선호한 것이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T리비우스론U에서 공화정이든 군주정이든 모두 자치가 가능하고, 원칙상으로는 군주도 자유국가의 통치자가 될 수 있음을 긍정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를 불신하고 자유국가는 공화정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상존하고 있었다.(존 홀, 오스번)

Ⅳ. 자유국가 이념의 성쇠

이 결과 자유국가에 대한 신로마적 이론은 고도로 체제 전복적인 이념이 되었다. 당연히 신로마인 이론은 적대적인 비평의 십자포화를 맞게 되었고 그 공격의 선두에 홉스가 있었다. 자유국가의 확립과 개인적 자유 간에 연관성 설정은 단순한 혼동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나선 홉스에 따르면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오류는 시민의 자유가 아닌 국가의 자유에 관심을 가진 데 있다. 그러나 스키너가 보기엔 도리어 홉스의 비판이 오류이다. 비록 신로마인 이론이 국가의 자유에 주목한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본래는 시민적 자유는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유국가는 공동체에 영광과 위대함을 가져다준다는 이념은 적어도 살루스트에서 시작하여 마키아벨리를 이어 해링턴과 니덤과 밀턴에게 반복되었다. 그러나 살루스트는 자유국가의 위대함이 도리어 탐욕을 가져와 실패하는 사례에 주목하였고 술라는 그런 사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공위기에 많은 이들은 크롬웰을 술라와 비교하였다.(p.65) 그런데 이런 비교는 점차 자유국가 자체보다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체제의 능력에만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신로마인 이론에 대한 홉스의 비판이 나오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이에 맞서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정치적 기관과 자연적 기관의 유비를 통해서 공동체의 자유 상실은 막바로 개인의 자유를 상실하도록 이끈다고 응수하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국가나 동료 시민의 권력이 당신에게 법이 부과하거나 또는 금지하지 않는 어떤 행동의 수행 또는 금지를 강요하거나 강조할 경우이다. 곧 신민의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는데 법의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시민적 자유의 상실은 강제의 현실적 부과가 아니라 정치적 예속이나 종속에 떨어지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대권이나 자유재량권을 지닌 정부 하에 사는 것 자체가 노예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의 연속적 향유를 그들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고 행동의 권리는 언제든 삭감되고 철회되기 쉽기 때문이다.(홀, 오스번, 니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강제나 박탈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가능성의 상존에 있다. 예로서 상비군을 유지하는 자유재량권은 시민적 자유의 보존 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필요한 것은 통치자와 시민이 모두 동등하게 법의 제국에서 법에 복종하는 체제에서 사는 것이다. 자치정부에서 법의 제정에 시민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만이 만인의 자유를 보증한다.(p.74)

그러나 홉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였다. 아마도 홉스는 공적 자유와 사적 자유간의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또는 거부한 것 같다. 다수 비평가들도 역시 동등한 참여권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 비판은 첫째 개인적 자유의 정도는 우리의 힘이 물리적이나 법적으로 억압받거나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동을 수행하는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행동의 수행이 억압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자유 그 자체를 자유의 안전판과 보존자로 보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비판은 한 시민으로서 자유의 정도는 권력의 행사에서 법의 강제적 도구에 의해 억제받지 않고 남겨지는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판에 따르면 시민적 자유에서 문제는 법의 제정에 참여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법이 제정되었고 그것이 당신 행동을 사실상 억압하는가 여부에 있다. 이 말은 곧 개인적 자유와 특정 정부 형태 사이에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신로마인 이론에서도 자유의 정도는 선택한 목표의 추구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억압이 있는지 여부에서 측정되어야 함을 인정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로마 이론과 자유주의 해석간의 차이점은 전자는 종속의 조건에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억압의 원천이며 형식이라는 입장인 데 비해, 후자는 힘 또는 강제의 위협만이 개인적 자유를 간섭하는 억압의 유일한 형식이란 입장이다. 문제는 억압(constraint)의 관념이다. 이는 홉스가 T리바이어던U에서 신로마인 이론을 풍자적으로 언급한 데 대한 해링턴의 도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홉스는 루카(Lucca) 시민들이 망루에 ‘Libertas’라고 써놓고 스스로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 치하의 백성들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조롱투로 말한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유를 위해 문제가 되는 것은 법의 원천(source)이 아니라 그것의 범위(extent)란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한 데 있다.(p.85) 곧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해링턴은 술탄 치하에서는 신민의 자유가 술탄의 선의에 의존하므로 루카의 시민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응수한다. 술탄의 법과 의지는 하나이고 같다는 바로 그 사실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효과를 가지므로 국가가 민주정이든 군주정이든 마찬가지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반박한 것이다.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고전 시대의 탁월한 인물들의 견해를 주로 원용하였다. 그리고 통치자와 정부에 대한 조언자이며 자문관으로서 공동선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양심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시민적 자유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시민적 자유가 사라지면 덕스런 시민으로서의 의무 수행은 제한을 받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p.87)

영국사에 대한 휘그적 해석에서 토마스 모어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모어는 T유토피아U에서 정부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이러한 시민적 자유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지배자는 늘 충고보다는 아첨꾼의 말만 솔깃해할 뿐이다. 이는 궁정이 부패의 온상이라는 타키투스적 견해와 연결되어 왕정복고 이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은 자문관의 지위는 군주의 전제화에 비례하여 노예의 조건으로 전락한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공적 봉사의 삶은 이제는 가장 나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p.91) 남은 것이 있다면 아첨도 추종도 억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 덕스런 행동은 중지되고 공공선을 추구할 능력은 상실된다. 신로마인 이론가들에게 자유의 결여는 물론 강제나 힘에 의한 것도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종속의 조건과 요구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평가에 바탕을 둔다. 권세가에게 아첨하며 시혜를 받아 사는 좀팽이 정치가들에 대한 혐오(시드니, George Wither)는 ‘비위에 거슬린다’(obnoxious)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궁정의 아첨배들과 대비되는 가치를 지닌 인물로서 진정한 남성이며 고결한 독립심을 지닌 지방 향신의 용기와 강건함은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영광은 너무나 빨리 덧없이 지나갔으니, 고전 공리주의의 흥기와 함께 자유국가 이론은 평판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논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유국가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사회적 가정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심지어 부조리하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부르주아들에게도 궁정 예법이 확산되고 향신은 이제 촌닭처럼 보이는 판이었다. 더욱 뼈아픈 것은 자유에 대한 기초적 이론을 혼동하였다는 지적이다.(William Paley, Sir William Blackstone, J. Bentham)

인간 행동에 대한 외적 장애물의 부재는 곧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데도 시민의 자유가 오직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은 자유라는 단어의 공통적 사용에서 비롯된 혼동의 산물이란 비판을 받게된 것이다.(p.97) 그러므로 개인적 자유는 정부의 형식과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것은 군주가 아니라 대의제도와 입법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로마인 이론은 소극적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분석에 의해 부식되고 이어서 자유주의 이론으로 간주되어 사라졌다. 벌린에 대한 스키너의 비판이 제기될 실마리는 다시 여기서 비롯된다.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오직 강제적인 간섭에 의해서만 위험하게 된다. 어떤 종류의 독재 또는 어느 정도로는 자치정부의 부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 자유와 민주정적 통치간에 필연적 연관성이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스키너에 의하면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보면 결국 핵심 문제는 어떤 권위를 행사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권위가 누구의 수중에 놓이는가에 있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것은 종속 상태와 자치정부의 결여는 자유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해석으로 이끈다. 이것은 본래는 신로마인의 이론인 것이다. 왜 이런 논리적 오류가 나타나게 된 것인가? 이것은 벌린이 지적 전통의 주류에 속하는 사고방식을 따라 자유국가에 대한 신로마인 이론을 불신한 고전 자유주의자들의 노선을 패권적으로 추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p.117)

Ⅴ. 결 론

스키너는 벌린의 견해가 공동체에 봉사하는 덕성을 지닌 시민의 공공 정신과 자유의 연관성을 폐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근대 사상사의 한 전통에서 공적 봉사의 덕성과 개인적 자유는 실제로는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그의 목표는 정치적 자유에 관한 신로마인적 또는 마키아벨리-해링턴적인 사고방식이 홉스 이후의 자연권론이 내포한 사회적 자유에 관한 독단주의를 교정하는데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개인의 자유는 자유로운 공화정 하의 자치 공동체에서만 보장될 수 있었다. 반면에 홉스 이후의 소극적 자유의 옹호자들에게는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 반면에 공화주의의 본질은 국가가 ‘자유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개인적 자유도 박탈당한다는 자유국가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때 개인적 자유는 이익과 권리에 바탕 둔 소극적 자유에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도리어 시민이 전심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 곧 외부적 굴종에 대해 공동체를 방어하는 투쟁 능력과, 모든 시민이 정치적 공동체의 의결에 동등하게 참여하여 상층 시민이 민중을 강제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러한 공적 봉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질은 용기와 덕성 그리고 절제와 질서의 준수이다.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의 진정한 번영이나 이익의 문제에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다양한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하도록 촉진하는 ‘기질’에 대한 고찰이다. 나아가 그는 소극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현재의 논의가 혼동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 권리에 관한 이론이라는 견해인 바, 고전 공화주의론 역시 개인적 자유에 주목하였기에 이는 독단에 불과하다. 자유가 반드시 특정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생각할 의무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론은 (역설적으로) 소극적 자유의 이론이다. 그러나 비록 공동체에 참여하는 용기와 분별심을 요청받지만 우리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존재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기적인 시민들이 덕스럽게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법률이다. 법과 개인적 자유를 연관시키는 계약론이나 고전 공리주의와 달리 고전 공화주의론에서 법의 정당화는 개인적 자유의 보존과 무관하다. 단지 법은 자유국가의 제도를 떠받침으로써 일종의 개인적 자유를 창조하고 보존한다. 이때 법의 메커니즘은 시민이 자유로워지도록 덕성의 계발을 강제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스키너의 견해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샤베트는 스키너가 우선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가 귀족과 민중의 계급적 조화와 통합을 모색한 데서 나온 것임을 간파하지 못했고, 다음으로 개인주의와 계약론 대 공화주의와 시민적 의무를 설정하였으나 루소에서 보듯 양자의 혼합이 이뤄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스피츠도 첫째 스키너가 자유를 한 가치가 아니라 속성으로 곧 그 자체의 선이 아니라 한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정념 정도로 보는데 이는 스키너가 자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교에 초점을 맞추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탓이 아닌가? 둘째 좋은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른 개인들간의 공존은 가능한가? 그것을 위해 덕성의 필요성이 정당화된다면 이 경우 선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규칙만 공유하는 것 아닌가? 셋째 스키너에게 덕성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은 자유로워지도록 법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덕성스런 존재이기를 강제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넷째 스키너의 근대주의는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구조에 대한 공리주의적 개념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정확한 해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스키너는 그의 취임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첫째 그는 공화주의적 자유 이론이 홉스-벌린식의 소극적 자유의 분석과 결합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사회적 의무의 요청을 확대함으로써 진실로 벌린이 목적으로 삼은 ‘사회적 삶의 최소한의 요구와 양립하는 최대한의 비간섭의 영역의 선택’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한다. 스키너가 보기에 현대 자유주의는 이기심과 개인적 권리의 영역이 과도하여 공적 영역이 휩쓸려 떠내려갈 위험이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이 이분법적인 적극적 자유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공적 영역에 책임을 지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둘째로 스키너에게 벌린의 소극적 자유에서 문제의 핵심적 초점은 결국 어떤 권위를 행사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어느 정도의 권위가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종속 상태와 자치정부의 결여는 자유의 결핍으로 이끈다는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 스키너는 이런 오류가 지성사가들이 주류 사상을 패권적으로 수용한 탓에 발생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제 스키너가 원하는 지성사가, 우리의 가치와 조상들의 낯설어 보이는 가정을 더 깊은 수준에서 조화시키는 고고학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고 반드시 홀로 초연한 역사가의 모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현재의 가치와 신념에 관한 판단에 적합한 정보를 찾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성취하는 자세는 정보를 끊임없이 소처럼 반추하는 것이다. 스키너가 우회와 반추의 지성사를 옹호한다면 벌린은 직설과 도전의 지성사가란 말인가? 실제로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지성사가들이 처해져 있는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지성사가는 현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도전적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성의 역사가 별로 설자리가 없는 시대에 지성사가는 호고적인 자세로 과거의 사상을 파고들든지, 아니면 희망을 잃지 않고 과거를 반추하며 현재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직설과 도전의 지성사와 우회와 반추의 지성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타당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이사야 벌린’

악은 ‘열광’에서 시작해 ‘의심’에서 멈춘다!

[프레시안 books]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이사야 벌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21 오후 6:43:28

이사야 벌린(1909~1987년)을 철학자 또는 사상가로 심각하게 고찰하는 사람은 국내에 별로 없다. 영어권에서도 그는 인간으로서 매력이 있었다든지, 피상적으로 영리했다는 평은 받지만, 어떤 깊은 교훈을 남긴 철학자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자신이 40대에 철학에서 무슨 개척자적인 업적을 남길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사상사 연구로 전공을 삼았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의 내면에서는 비록 사회적으로 영광을 누리면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결국 피상적인 수다쟁이의 과분한 삶으로 끝나지 않았는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의 문필과 강연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 입장은 일관해서 고수했다. 이 복잡다단한 인물의 생각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는 것은 본디 무리한 일이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다원주의와 경험주의에 초점을 맞춰 본다.

벌린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선이 하나의 목표로 수렴된다는 발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보았다. 이는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벌린은 계몽적 합리주의에서 이러한 오류의 근원을 찾았고, 따라서 마르크스를 칸트의 직계 후예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바로 칸트의 글에서 찾아낸 문장을 가지고 계몽주의적 유토피아의 발상을 반박하는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삼았다.

“인간이라는 휘어진 목재로는 그 어떤 곧은 것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 <이사야 벌린>(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지음, 이화여대 통역번역연구소 옮김, 아산정책연구원 펴냄) ⓒ아산정책연구원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인용되는 ‘자유의 두 개념’에서 적극적 자유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은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이뤄진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무수히 자주 봉착한다. 이에 관해, 자아가 더 나은 상태였다면 더 좋은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생각에만 몰두하게 되면, 마치 모든 개인적 선택 상황에서 더 좋은 선택을 인도할 어떤 표준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발생한다. 판단력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의 기술인 양, 연구와 훈육을 통해 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처럼 비친다.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판단의 기술에 따라 모든 개인들의 선택을 인도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찾아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어떤 위대한 선들은 공존할 수 없다. 그것이 개념적 진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고, 모든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수반할 수 있다.” 개인적 선택이 여러 갈래로 이뤄지는 현실을 뭔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떤 단일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싶어 한 사람들을 생트뵈브는 비꼬아서 “위대한 요약꾼”이라 불렀고, 부르크하르트는 “끔찍한 요약꾼”이라 불렀다. 벌린은 바로 이들 요약꾼들의 기획 안에서 현대 전체주의의 모든 근원을 발견했다.

다원주의적 세계관은 벌린에게 있어서 경험주의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사람들은 외모와 가치와 소원과 목표에서 다양한 것이 경험적인 진실이다. 물론 삼라만상이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잡다한 현상을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면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 다양한 현상들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저변에서 작용하는 어떤 원리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이고, 이러한 지식이 있어야 문명이 가능하고, 사회의 진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지식은 어떤 개별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원리이지, 모든 삼라만상의 저변을 관통하는 원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어떤 지식을 획득했다고 한다면, 바로 그 만큼 모르는 것도 더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즉 증거 또는 근거가 확보된 만큼, 안다고 말하는 취지가 경험주의의 요체라고 벌린은 받아들였다. 이는 경험주의에 관한 가장 건강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아울러 지식인입네 하면서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해럴드 라스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 등은 유태인 선배 중에 벌린의 냉정한 시선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는 태도, 남들이 확실하다는 듯 말하는 것에 대해 확인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회의주의로 오인된다. 그는 20세기라고 하는 격동의 100년 가운데 88년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와중에서 실제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방관자처럼 지낸 적이 아주 많았다. 이 때문에 그의 다원주의를 상대주의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는 결코 상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맹목적인 상대주의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은 결정론이 성립하지 않는 이치와 완전히 닮은꼴이다. ‘역사적 불가피성’에서 벌린은 결정론에 대한 지극히 간단하고 명쾌한 반론을 제기한다.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결정론의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 논증은 그가 학창 시절에 존 L. 오스틴과의 대화 중에 들은 것이다.

“나는 살면서 결정론자를 만나본 적이 없네. (…) 자네는 본 적이 있나?”

모든 일은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동기나 소원 또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결정론이다. 따라서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결정론자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선택을 위해 고심하고, 타인의 행동에 관해 화를 내기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맹목적인 상대주의자들 역시 똑같은 괴리에 빠져 있다. 모든 일이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든지 대안에 비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생활에서는 선택을 위해 고민하고, 결과 여하에 따라서 원래 선택을 후회하거나 보람 있게 느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속을 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벌린은 그러므로 회의주의자도 아니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불확실한 일에 관해 확신할 수 없었다. 특히 20세기에 벌어진 야만의 대다수가 불확실한 일에 관해 자기네끼리 지어낸 믿음을 마치 확신인 것처럼 퍼뜨리고 우겨대는 풍토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했다. 이러한 풍토에 반대해서, 벌린은 “더 많은 신앙, 더 강한 리더십, 더 과학적인 조직이 아니”라, “구세주와 같은 열정의 감소, 더욱 개명된 회의주의, 제각각인 개성에 대한 더 많은 관용, 가까운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의 보다 빈번한 사용” 등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조주의와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논리적으로 정연하지 못한, 유연하며 심지어 모호한 타협”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거의 태생적인 자유주의자였다. ‘자유의 두 개념’에서 소극적 자유를 중시했다는 이유로 그를 하이에크와 같은 시장주의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한국에는 있지만, 그는 케인스 편의 뉴딜 자유주의자였고, 진보적 국제주의자였다. 다만 윈스턴 처칠이나 앨리스 루스벨트 같은 보수파 명사들과 친분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들에게서도 장점을 찾아내 인간적으로 존중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태인이면서도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신의 내면 때문에, 일종의 채무감 비슷한 정서에서 시온주의의 합리적 명분에 동조했다.

벌린은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유태인 목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 혁명기에 페트로그라드로 이주했다가, 볼셰비키 정권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영어를 익혀야 했고, 영국의 학계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영국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억지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국의 문화를 존경해서 동화를 선택했다. “타인에 대한 정중한 존중과 반대 의견에 대한 관대함이 자존심이나 민족적 사명보다 낫다는 생각, 자유는 효율성과 양립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나친 효율보다 자유가 낫다는 생각, 아무리 합리적이고 사심이 없다고 해도, 모든 면을 포괄하는 체계의 엄격한 적용보다, 그리고 항의의 여지가 없는 다수결의 원칙보다, 다원주의와 비체계성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낫다는 생각” 등등, “심오하고 독특한 영국다움”을 숭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여우”(타협하고 적응하는 인간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고슴도치”(자기 뜻을 고수하고 관철하는 인간형)에 대한 동경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인격화된 신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일생 동안 종교적인 회의주의자로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은 존경했으며 스스로 유태교의 기념일들은 고수했다. 아울러 자신을 겁쟁이라고 비판하는 항간의 목소리에 대해, 어쩌면 자기가 겁쟁이일지도 모른다고 끝없이 자문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영토를 나눠 줘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다가, 죽음을 3주일 앞두고 성명서를 작성해서 이스라엘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가 사망한 3일 후인 1997년 11월 7일에 이스라엘 신문에 게재되었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1987년에 전기를 쓰겠다고 벌린을 찾아가서, 10년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록했다. 전기 작가의 이러한 열정도 경탄할 만하지만, 동시에 전기 집필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는 지식인 사회의 풍토도 나는 부럽다. 더구나 이 전기는 이그나티에프 혼자의 성과가 결코 아니다. 저자 자신이 감사의 말에 일일이 열거하고 있듯이, 수많은 사람들과 기관들 그리고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편지와 자료와 기억들이 합해져서 이와 같은 전기가 나올 수 있었다.

특히 헨리 하디는 불과 20대 중반의 젊은 시절부터 벌린의 저작들을 편집하는 작업에 일생을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벌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등, 구술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 상태로 남아 있던 수많은 원고들을 교정하고 보완하고 분류해서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나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펴냄)을 번역할 때 사소한 사항들을 그에게 문의해서 친절한 답변을 들었던 고마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그나티에프도 인정하고 있듯이, 문필가로서 벌린의 위상은 하디에 의한 편집과 출간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두서없고 장황한 달변가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전반적으로 유려하고 쉽게 읽힌다. 단, 오타가 제법 많고, 고유명사의 음역이 뒤죽박죽인 대목도 적지 않으며, 명백한 오역도 눈에 띈다. 이 서평에 인용된 문구들 중에는 번역본과 다르게 내가 번역한 대목들이 있다(’20세기의 정치 사상’에서 인용한 문구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의 번역을 따랐다). 몇 가지 현저한 것들만 적시해 본다.

① 쥘 베른을 줄스 반스로 적었다. 헤르첸을 게르첸, 헤르젠 등과 섞어 쓰고, 모들린을 막달란과 섞어 쓰고, 콜더를 캘더와 섞어 쓰고 있다.

② 바론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남작, 바론 군즈베르그는 군츠부르크 남작, 바로니스 주트너는 주트너 남작부인으로 적는 편이 낫다고 본다.

③ 아르크엔젤(61쪽)은 아르한겔스크, 레트인(69쪽)은 라트비아인, 필수드스크(70쪽)는 필수드스키 또는 피우즈츠키, 졸업생(117쪽)은 대학원생을 가리킨다.

④ 221쪽, 여왕의 남동생은 왕비의 남동생(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당시 왕비였다)이고, 국왕의 만찬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만찬이다.

⑤ freedom과 liberty를 구분한 역주(374쪽)는 정확하지도 않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 freedom은 liberty에 비해 일상어인 반면에 liberty는 일상어에서보다는 학자들 사이에서 더 많이 쓰인다고 구분하는 편이 낫다.

⑥ “벌린은 시내 카페와 식당에서만 파시스트 당원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108쪽)는 “벌린 평생에 파시스트 당원을 직접 본 것은 여기 시내 카페와 식당에서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는 뜻이다.

⑦ “악마와 대항할 때는 악마의 무기로 싸워야 하기 때문”(336쪽)는 “악마의 무기로 악마와 싸우는 셈이기 때문”이 낫다.

⑧ 381쪽, “(…)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주의의 개념으로부터”는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의 개념으로부터”라고 써야 하고, “그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은 “나머지는”으로 쓰는 게 낫다.

이그나티에프의 원고는 출판 전에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읽고 의견을 보태주었다. 한국의 출판계 사정에서 이러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특히 번역을 중요한 지성적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척박한 토양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번역본이 나온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국의 지성적 토양이 조금은 더 비옥해질 수 있다고 기대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인들의 선택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에 관해서는 벌린도 백분 동의했을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1161009&Section=06

공론장 이론의 정치적 이해 : 아렌트, 하버마스,월쩌를 중심으로,김경희

Title 공론장 이론의 정치적 이해 : 아렌트, 하버마스,월쩌를 중심으로
Authors 김경희
Issue Date 1996

국 문 초 록

 

 

본 논문은 공론장 이론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한다. 정치는 일반 대중과는 무관한 몇몇 권력층과 국가기관에서 행해지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거창한 일로 여겨져 왔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 공론장 이론은 정치는 함께 모여 토론과 행동을 통해 우리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가운데 생기는 우리 주변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아렌트의 공론장 이론과 하버마스의 근대 부르주아 공론장의 구조변동, 그리고 월쩌의 공론장 이론에 대한 정치적 해석의 3부분으로 구성된다. 아렌트에 의하면 공론장은 공동의 일이 생기면 필요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끼리 모여 논의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우리 주변에 항상 잠재해 있는 공간이다. 참여자들의 평등한 행동과 발언이 막히거나 사라지면 그것도 곧 사라지는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을 가지는 살아 있는 열린 공간인 것이다. 이런 생동하는 공론장을 역사적 관계 속에서 조망한 것이 하버마스의 공론장 논의이다.

그는 근대 자유주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 과정을 역사적 상관관계 속에서 기술한다.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행동하는 자발적 결사로서의 공론장을 정차의 핵심 공간으로 이해한다. 봉건적인 절대 권력의 밀실 정치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제도화시킨 것 은 이러한 자발적 결사가 기반이 된 자유주의 시기 부르주아 시민층의 공론장이었다. 그러나 자원의 독점과 복지 제공 등을 통해 사적 부문과 공적 부문이 상호 침투하게 된 복지국가와 그 사회에서는 공중의 토론은 사라지고 행정기관과 거대 기업의 전시, 조작 활동만이 남게 되었다. 이에 하버마스는 비판적 의사 소통 과정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공론장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월쩌가 논파한 화석화되어 그 봉사자에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복지국가와 관료 체계와 엘리트주의에 대항하는 열린 공간의 정치이다. 지역 공동체와 시민사회의 기초인 여러 연합, 단체, 그룹들의 자치와 참여로 이루어지는 민중에 의한 권력 점유를 통해 비판, 저항, 참여의 정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참여와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론장의 정치는 정치를 우리와는 동떨어진 거대한 일로 바라보지 않게 하고 끊임없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처해 나가는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기게 한다.

공론장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무엇인지를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권위를 최고라고 주장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지 보호되고 유지되어야 할 최소한의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항상 그 순간의 현실의 모순에 관심을 둘 뿐이다. 공동체의 성원들과 문제를 같이 숙고해 나가고 그 해결을 찾아 나가는 곳이 공론장인 것이다.이것이 거대한 계획 속에서 모든 것을 담지한 자세한 설계도를 가지고 해 나가는 큰 정치가 아니라 좀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고쳐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과정으로서 공론장의 정치인 것이다.

 

 

 

 

 

주요어: 공공성, 공론장, 공적 토론, 정치, 자유주의 공론장, 복지국가,

사적 영역, 문자세계 공론장, 정치영역의 공론장, 밀실 정치,

광장 정치, 공공성, 공적 토론, 발언, 비판, 행동, 시민, 대중,

시민사회, 권력, 열린 공간, 저항, 공론장의 활성화,

공론장의 재봉건화, 살롱.

목 차

 

제 1 장. 서 론 1

 

제 2 장.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 7

1)행동의 영역으로서의 공론장 7

2)공론장의 권력 12

 

제 3 장.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1) 17

1) 부르주아의 출현과 공중의 탄생 18

2)밀실의 정치에서 광장의 정치로 23

 

제 4 장.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2) 30

1)토론하는 주체에서 수동적 주체로 30

2)재봉건화된 공론장과 공론장의 부활 34

 

제 5 장. 공론장 이론에 대한 월쩌의 해석 42

1)저항과 참여의 정치 42

2)비판의 정치 48

3)열린 공간의 정치 – 시민 정치 51

 

제 6 장. 결론 59

 

참고문헌 62

ABSTRACT 69

제 1 장. 서 론

 

투표는 국민의 정치 참여의 정도에 따라 성숙되어져 왔다. 그러나, 그 참여의 장(場)인 정치는 국민과는 유리되어 있는 것 같다. 국민은 자신들을 정치의 주인으로 생각하기는 하나 그것은 생각뿐이고, 실제로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생각한다. 이 모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모순 속에서 정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이에 필자는 ‘정치’가 우리들의 삶에 앞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님을, 그것은 우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정치는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 스스로 해 나가는 ‘우리’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런 의도 하에 본 논문에서는 ‘공론장(Public Sphere, Public realm)1)’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공론장이란 정치 문제에 대한 공론, 여론 형성의 제도적 장소로서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대 정치의 핵심 공간이다. 봉건시대의 귀족, 전제 정치에 대항하여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이 참여하여 스스로 만든 곳이 바로 공론장이다.

본 논문은 한나 아렌트(H.Arendt)의 인간의 의사 소통 여부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잠재적인 공간으로서의 공론장 개념과 근대 공론장의 발생과 변화 과정을 기술한 위르겐 하버마스(J.Habermas)의 공론장 이론 그리고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구체적 정치를 사고하는 마이클 월쩌(M.Walzer)의 열린 공간의 정치 – 시민 정치 – 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조건』(The Human Condition)이란 저작을 중심으로 살펴 볼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은 기존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정치와 권력을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정치를 입법부나 행정부 같은 확고 부동한 국가기구에서 행해지는 거대한 일이나, 이 속에서 행해지는 투입-산출-피드백 같은 유형화되고 고정화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기존의 것이었고, 여기서 권력은 한 기관이나 개인에 집중되어 있거나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정치가 우리 인간들 주변에 항상 잠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모여 공동의 일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정치의 영역은 탄생한다고 말한다. 거대한 조직, 건물, 인원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는 비록 적을지라도 함께 모여 의사 소통과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여기서부터 통제적이며 억압적이지 않은 소통적 권력이 나온다. 아렌트에게 정치와 권력은 항구 불변의 것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참여 속에서 만들어지는 열린 공간과 개방적인 집단의 권력, 힘인 것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은 그의 저서 『공론장의 구조변동』(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하버마스는 봉건 군주 권력에 대항해서 당시 생성 발전하고 있던 시민 사회의 자유 부르주아층이 그들의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자유주의 공론장의 생성 발전 과정과 개입주의, 복지 국가의 발전에 따른 공론장의 쇠퇴 과정을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공론장의 쇠퇴에 대항해 그것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공론장의 부활을 주장한다. 한편, 월쩌는 그의 논문과 저서들에서 현대사회 속에서 거대화된 국가, 관료, 사회조합 권력들의 억압과 독재를 지적하고, 이들에 대한 저항과 그 저항 속에서 배태될 수 있는 소영웅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주장한다. 이러한 저항과 비판의 정치는 열린 공간 속의 참여를 통해 서로의 차이와 독자성을 인정하는 시민과 그 자발적 결사들의 정치인 ‘소(小)’ 정치로 우리를 인도한다.

필자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근대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이 어떻게 전제 권력에 대항하여 공론장이란 자신의 정치 공간을 만들어 냈으며, 또 이것을 통해 어떻게 근대 입헌 국가를 수립했는지의 과정과 국가와 사회 권력의 침투 속에서 공론장이 어떻게 해체, 소멸하여 가는지의 변화 과정을 ‘대’정치와 ‘소’정치의 대립, 투쟁 속의 생성과 변화를 통해 살펴 볼 것이다. 이것은 월쩌에게서 열린 공간의 정치로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될 것이다.

근래 한국에서도 하버마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러나, 논의의 초점은 보편적인 담화 구조에 대한 철학적 작업인 합리적 의사 소통 행위론에 주로 맞추어 지고 있을 뿐, 공론장에 대한 논의는 거의 전무하다. 94년도 한국 정치학회 발표 논문인 황태연 교수의 “하버마스 공론장 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론의 재현”은 하버마스의 최근 저작인 『사실성과 유효성』(Faktizitaet und Geltung)(92)을 중심으로 공론장 이론을 재구성한 것으로 그나마 체계적인, 한국 정치학자의 논문이다. 서구에서도 동구권 몰락 후 그의 공론장 이론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62년 교수자격 취득논문인 독일어 원본이 89년에야 영어로 번역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혹자는 하버마스를 그의 대저(大著)인 『의사 소통 행위이론』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중심으로 그의 논의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후기 이론 가운데에는 이 초기 저서의 문제의식들과 긴장 관계가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선진 복지국가와 조직 자본주의의 분석에 있어서『공론장의 구조변동』과 합리적, 비판적 공론화의 과정은 하버마스의 논의 발전에 중심 범주로 자리를 잡게 된다.2)

다른 한편, 하버마스는 점점 구체적 현실과는 유리된 ‘보편적 의사 소통 구조’에 천착하게 되는데 이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내재한 모순의 발현이라고 보여진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대한 관심의 중간 결과물이며, 89년에 열린 학술회의의 논문들을 묶어 낸 『하버마스와 공론장』(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ed. Craig Calhoun, The MIT Press, 1992)에서 칼룬(C.Calhoun)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범주에 대한 언급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담화의 질 또는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참여의 양 또는 그것에의 개방성(위의 책, p4)이다. 하버마스는 이 둘의 긴장관계속에서 전자로 기울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이 민주적 의사형성을 위한 기초로서의 공론장의 제도적 건설, 구성에서 모든 언설에 보편적으로 함축된 타당성 요구로 이동한다”는 것(p31)이며, 이는 곧 “민주주의를 위한 역사적으로 특수한 기초공사 작업에서 인간 의사 소통의 초역사적 능력에의 의존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p31)이다. 다시 말하면, 하버마스는 ‘역사(歷史)’에서 ‘이론(理論)’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에 착목하고, 하버마스의 역사에서 이론으로의 이동에 대항하여 사회, 역사적 분석, 기술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시도하려 한다. 그것은 이상적으로 구성되는 의사 소통 구조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정치를 구성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공론장에 초점을 맞추어 하버마스의 긴장관계를 정치학적으로 재전유하려는 것이다. 공인의 참여 속에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정치의 장으로서 공론장을 정치는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권력투쟁일 뿐이다’라는 식의 주어진 어떤 것,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통념에 반대하여 주체들의 참여 여하에 따라 생성, 소멸되는 역동적인 것으로 보려 한다. 이에 월쩌는 좋은 모범을 제시한다. 월쩌는 철학 이론을 거부한다. 끊임없는 역사,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현실의 모순에 대처한다. 만병통치약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필요한 처방을 한다. 억압과 독재에는 저항을, 저항 속에 나타날 수 있는 영웅주의에는 비판을, 획일화에는 차이를. 미리부터 있던 정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생동하는 정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철학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로서의 철학을, 정치철학을 보는 것이다. 철학은 현실의 풍부함을 다 포착할 수 없으며, 철학이 현실이 되려 할 때 그것은 독재로 다가왔다. 이에 정치는 현실의 복잡성 속에서 철학의 한계를 보려 한다. 철학 속의 이념, 이상은 등대(guiding light)로서 칠흑 같은 세상에 하나의 지표,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버마스와 그에 대한 연구에서도 비추어지듯이 기존의 입장은 철학에서 정치를 보려고 하였다. 그 결과는 좀더 정교한 것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이론화의 과정이었으며, 차이를 담지한 구체적이며 복잡한 인간의 삶에 대한 무시였다. 이제 이 논문은 부족하지만 정치에서 철학을 보려 한다. 그것은 획일화의 과정도, 추상화의 과정도 아닌 다양성 속의 차이와 우연을 인정하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열려진 대화의 과정일 것이다

다음 2장에서는 인간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치의 영역으로서 공론장을 볼 것이며, 3장에서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발생한 새로운 정치의 공간으로서 자유주의 부르주아 공론장의 역사와 구조를 살펴볼 것이며, 4장에서는 자본주의 발달과 그에 따른 개입주의 국가의 등장으로 인한 공론장의 변화와 그것에 대한 하버마스의 대안을 살펴 볼 것이며, 5장에서는 개혁이나 혁명의 정치가 아닌 열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와 저항의 정치를 살펴 볼 것이다.

끝으로 이 논문의 한계는 첫째, 아렌트와 하버마스간의 이론적 연관성을 충분히 밝히지 못한 점이다. 둘째, 하버마스의 초기 저서인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후의 이론발전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논문의 논의가 지금의 하버마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밝히지 못하였다. 셋째, 월쩌의 논의를 그의 전(全) 저작들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지 못했다. 필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생긴 이 밖의 많은 한계들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겠다.

 

 

제 2 장.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

 

아렌트에게 인간은 같이 모여 살면서 발언과 행동을 통해 서로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존재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이 모여 공동의 일을 해 나가는 곳, 그곳이 공론장이다. 따라서, 그 곳은 인간이 함께 의사 소통을 해 나가며 그 가운데 생기는 권력으로 스스로를 유지, 보존, 만들어 나가는 우리 주변에 항상 잠재해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장소이다.

다음에서는 공론장에서 행해지고 그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의 행동과 그것을 통해 공론장에서 생성되고, 그것을 유지시키는 권력을 살펴보면서 행동과 권력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공론장의 성격에 대해 알아보겠다.

 

 

1)행동의 영역으로서의 공론장.

 

아렌트에 의하면 공적(public)이라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 공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모든 이들이 듣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광범위한 공개성(publicity)을 지닌다.3) 모든 것이 모두에게 공개되는 드러남(appearance)의 영역인 것이다.

둘째,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고, 우리 자신만의 사적 영역과는 구분되는 한에서 공동의 세계(common world)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우리 주변의 환경이며, 그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된다.4)우리를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함께 모아 주는 공동의 영역인 것이다.

이렇듯 공공의 영역은 서로 다른 다양한 위치와 입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각 관점들(perspectives)과 상태들(aspects)에 의존하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공론장은 구성원 모두의 공통성(common nature)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입장의 차이와 관점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같은 문제와 대상에 항상 관여하며,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의해 보장된다.5) 즉, 자신을 타인들 앞에서 드러내며(appear), 그러는 가운데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공론장인 것이다.이렇게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공론장을 생성, 유지시키는 것이 행동인 것이다.

인간을 조건 지워진 존재(conditioned being)6)로 보는 아렌트는 이런 인간조건속에서 인간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동(action) 3가지로 나눈다.

첫째, 노동은 인간의 성장, 신진대사, 노쇠 등의 생물학적 과정에 부응하는 행위이다. 전적으로 인간적 삶(life)의 필요(necessity)에 따르는 행위이다.7)

둘째, 작업은 인간 존재의 비자연성에 부응하는 행위이다. 자연 세계와는 다른, 물질을 생산하여 만든 인공적 세계를 제공한다. 이렇게 인간의 사용을 위해 인공물을 만드는 작업의 인간 조건은 세속성(worldliness)이다.8)

셋째, 행동은 어떤 다른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 일어나는 행위이다. 오직 한 인간(Man)만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들(men)이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응한다. 이 행동의 인간 조건은 다원성(plurality)이다.9)

노동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며,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동일한 순환 과정을 수행하고, 이것을 위해 소비하며, 소비 수단을 제공하는 행위이다.10)몸으로 노동을 하며 인간 몸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소비하는 일회적이며 반복적인(repetitive) 행위이다.11) 한편, 인공품을 생산하는 작업은 손으로 수행된다. 완성된 물건 등을 사용하며 목적했던 대상이 완성되면 그 과정이 끝난다.12) 미리 어떤 것을 만들 것이라는 모델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업에 착수하며, 제작(fabricating)과 작업이 대상과 자연을 물화(reification)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파괴(violating)와 폭력적인(violence) 요소를 지니고 있다.13)

아렌트에 의하면, 노동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동 속에서 인간은 타인과 또는 세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남으려는 적나라한 필요에 대면한 자신의 신체와 오직 함께 있을 뿐이다.14)

 

인간 신체의 신진대사 활동으로부터 인간의 공동 행위- 같이 먹고 마시는 등의 행위 -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에서 나오는 사회성(sociability)은 평등이 아니라 단지 같음(sameness)에서 나온 것이다.15) 이에 반해 정치적 평등 다시 말해 공론장에 참여하는 평등은 어떤 측면들과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서 평등해질 필요가 있는 똑같지 않은 자들의 평등인 것이다. 따라서 다원성을 전제로 하는 공론장의 평등은 노동의 경우처럼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평등이나 죽음 앞에서의 평등처럼 많은 것들을 하나로 일원화하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16)

작업 또는 제작은 오직 혼자만의 세계를 조직하고 만든다. 시장(Market)이란 공공 장소가 있으나, 그것은 생산품을 진열하고 교환하는 장소일 뿐이다.

 

세계의 건설자며 물품의 생산자인 작업하는 인간(Homo Faber)은 오직 그 들의 생산품들을 교환함으로써만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물건들 자체가 고립(isolation)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17)

 

이런 점에서 노동과 작업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 둘은 타인들에 의해 보여지고 들어지는 것에서 오는 실생활과 공동 세계의 매개를 통해 얻어지는 객관적 관계가 부재하는18), 나 이외에 인간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사적 세계에 속한 것이다. 반면, 행동은 이와는 달리 관계적이며, 정치적이다. 그것은 인간사회 밖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타인의 항구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19)

타인과 함께 있으므로 행동과 발언은 촉발되며, 유효한 것이 된다. 나와 남이 같다면, 말도 행동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다양성은 발언과 행동의 기본 조건이며 발언은 동등한 인간들 사이에서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말과 행동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자신의 독 특한 성격을 활발히 드러낸다. 인간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 이러한 말과 행동의 드러내는 특질(revelatory quality)은 사람들이 단지 타 인과 함께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20)

 

또한 아렌트는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말과 행동은 관계들을 형성하고, 그물망들(webs of relations)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 행동의 불확실성, 무경계성 그리고 비예측성 등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사의 영역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든 존재하는 관계들의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21) 인간 행동의 불확실성(uncertainty)은 여기서 배태된다.22) 모든 행동이 그 의도 대로될 수 만은 없다. 변화하는 관계망 속에서 의도와 행동은 변형되기 때문이다. 곧 행동하는 이는 자신의 일을 마음먹은 대로 완수해 나가는 영웅(hero)이 아니라, 행위자(doer)며 동시에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감수자(sufferer)이기 때문이다.23) 인간들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행동은 동시에 반행동(reaction)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둘 사이에만 제한될 수 없고 다수간에 이루어지는 행동들은 관계들을 형성하게 되고, 모든 제한과 경계를 파괴하고 뛰어넘는 내적 경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행동의 무경계성(boundlessness)이다.24) 또한 행동의 드러냄과 상호 연관성은 행동의 다른 특징인 비예측성(unpredictability)을 낳는다. “사람 속은 모른다(darkness of the human heart)”라는 말은 인간의 항구성에 대한 근본적 불신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행동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25)

이와 같은 특징들을 가진 행동을 통해 드러냄의 영역이며, 상호관계 속의 공동의 영역인 공론장이 출현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공론장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즉, 공론장은 어떤 경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정된 장소만이 공론장이 아니며, 특정한 인물만이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참가자들 사이의 평등한 행동과 발언을 통해 창조되는 공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참여하면 생겨나고, 흩어지면 사라지는 잠재적(potential) 공간이 공론장인 것이다.26)

 

2)공론장의 권력

 

아렌트에 의하면 잠재적 공간으로서 공론장을 유지시키는 것, 그리고 모여서 행동하고 발언할 때 생성되는 것이 권력(power)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함께 모여 행동하면 발생하고, 흩어지면 소멸한다:

 

권력은 발언과 행동이 분리, 분산되지 않은 곳, 발언들이 공허하고, 행동이 야만적이지 않은 곳, 발언들이 의도들을 가리지 않고 관계들을 드러내는 곳, 행위가 관계들을 파괴하지 않고 확립하거나, 새로운 관계들을 창조하는 곳에서 생성된다.27)

 

잠재적인 공론장에서 잠재적인 권력28)이 나온다. 이것은 강제(force)나 물리적인 힘(strength)처럼 불변(unchangeable)하며, 측정 가능(measurable)하고 신뢰할 수(reliable)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도구처럼 비상시를 위해 저장할 수도, 축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오직 그 실행(actualization)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이다.29) 따라서 권력은 타인과 함께 나눌 수 없는 개인에 주어진 자연적 소질인 물리적 힘과는 달리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참가자 전체의 힘인 것이다:

 

권력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권력은 집단에 속하며 집단이 함께 유지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30)

 

권력 발생의 단 한가지 물적 요소는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은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제한적(boundless)이다.31) 잠재성에서 연유하는 물적 요소에 대한 비의존성과 많은 참가자들의 의지와 의도들간의 동의는 이 힘의 경계를 알 수 없게 만든다.32) 상대적으로 적은 수지만 잘 조직된 그룹이 거대한 타집단과 제국을 지배한 사실이나 물리적 폭압에 대항한 수많은 민중 봉기들에서 좋은 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똑같은 이유로 권력은 그 힘의 축소 없이 분할될 수도 있고, 견제와 균형을 통한 권력의 상호작용이 권력을 증대시킬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활발함과 생동성에 달려 있다.33) 이러한 권력은, 자신의 동료 시민에 대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소수에 의해 독점된 강제(force)가 대신할 수 없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시킬 수는 있어도, 그 대안이 될 수는 없다.34) 여기서는 다양한 인간들의 평등한 발언과 행동 속에서 생기는 공론장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행동에서 기인하는 정치의 영역으로서 잠재적인 공론장은 무경계성, 비예측성, 불확실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근본적 모호함을 피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었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플라톤(Plato)의 시도였다.35) 아렌트에 의하면 플라톤은 행위의 세계인 공론장의 내재적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더 믿을 만하고 견고한 개념들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지배(rule)와 제작(fabricating)의 개념이다. 지배는 몇몇은 명령하고 나머지는 복종할 때 인간들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함께 살 수 있다는 개념이며, 제작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모델이나 아이디어에 따라 생산품을 만들어 내는, 의도와 결과가 명확하고 정확히 일치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 둘은 다수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행동하는 공론장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한 개념이다. 이러한 모호성을 극복하고 완벽을 향하고자 한 플라톤의 시도는 『공화국』에서 구체화된다. 철인 왕의 지배로 대표되는 『공화국(The Republic)』에서 플라톤은 선(善)한 정체(政體)의 건설을 위해 장인(craftsman)이 자신의 설계도를 가지고 척도와 표준을 적용해 조각을 만들듯이 아이디어를 적용해 도시를 만들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항해, 객관적 확실성(objective certainty)을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인 것이다.36) 이러한 객관적 확실성의 추구는 하나의 정해진 목적, 이상을 위해 다양성을 제거하게 되고, 그 결과는 공론장의 소멸로 나타난다. 그러나, 생산 과정의 힘이 결과물에 다 흡수되고 소진되는 작업과는 달리, 행동은 한계가 없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물질적 성쇠나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할 수 없는 것도 행동 자체가 끝이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37) 이러한 행동을 통해 생성되는 공론장은 언제나 다시 생동하는 정치 영역을 형성한다. 공론장의 모호함은 약점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거기서 나오는 자유를 장점으로 가지는 열려진 공간인 것이다.

이렇듯 공론장38)은 미리부터 국회의사당 같은 특정 장소에 만들어진 강력한 조직체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일이나 그 밖의 일이 생기면 필요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끼리 모여 논의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우리 주변에 항상 잠재해 있는 공간이다. 참여한 사람들의 평등한 행동과 발언이 막히거나 사라지면 그것도 곧 사라지는, 생성, 소멸의 과정을 가지는 살아 있는 열린 공간인 것이며 여기서 나오는 권력만이 독재와 폭압에 맞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열린 권력이다. 우리들이 어디를 가건 그곳이 폴리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39)

그런데, 『인간 조건』에 나타난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은 상호 모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규정에서 나오는 본질론적이며비역사적인 측면과 모여서 행동하면 생성되는 관계적이며 연대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행동, 노동 그리고 작업을 구분하고 전자인 행동을 정치와 공적 영역에, 후자 즉 노동과 작업을 사적 영역에 고정시킴으로써 역사 속의 구체적인 현상과 그 변화를 무시하고 인간 본연의 행동만이 일어나는 공론장, 정치영역을 고집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정되고 협소해진 추상화된 공론장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공론장은 또한 공적 토론과 행동에 의해 구성되는 관계적이며 과정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모순적이고 비역사성이란 함정을 가지고 있는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을 넘어 하버마스는 잠재적인 정치의 공간으로서 공론장 개념을 역사적 관계 속에서 드러낸다.40)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현대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41)라는 질문에 근대 자유주의 공론장의 발생과 변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그는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행동하는 -자발적 결사로서의- 공론장을 정치의 핵심 공간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지금의 민주주의가 어떠한가를 보기 위해서 공론장의 발생과 변화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현대 복지국가의 공론장을 조작되고 화석화된 공론장으로 바라본다. 공중의 토론은 사라지고 행정기관과 거대 기업의 전시(展示), 조작 활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 화석화된 공론장의 기원은 생동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시민층의 공론장이었다. 그것은 봉건적인 절대 권력의 밀실정치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제도화시킨 공론장이었다. 그러나 이 생동하는 공론장은 항구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자유주의 시기 자신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론을 조직하고 참여했던 시민들과 그 속에서 생성되었던 공론장은 이제 국가의 복지 수혜자로 수동적이 된 시민 대중들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자발적 결사 속에서 유지되는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의사 소통 과정이 이 공론장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정치 참여는 아렌트가 말한 “좁게 한정된 정치 영역에서만 가능한 행위”42)는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 초기의 살롱을 가능케 하고 그곳에서 행해졌던 문화 토론 같은, “사회, 문화적 영역에서도 가능한 행동”43)이었다.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 속에서 정치의 장인 공론장과 그것을 생성시키는 행동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었다.

다음에서는 하버마스가 기술한 자유주의 공론장의 성쇠(盛衰)를 통해 잠재적인 정치 공간의 역동성을 살펴보고 공론장의 재활성화는 어떻게 가능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 3 장.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1)

 

하버마스는『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공공”(Public)이라는 말을 다양한 의미로 쓴다. 예를 들면 “닫힌, 배제된 사건들에 대하여 모든 것에 열린”것으로44), “관공서, 공권력 등의 국가와 관련된”것으로45),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것으로46), “공작의 문장, 휘장 같은 영주권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으로47), “모든 신민”으로48), “도시의 일반인들”로49), “비판적 토론에 참여하는 사인(私人)들”로50) “부르주아 헌정 국가의 주체, 국민들”로51),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하는 형태”로52), “문화를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이들”로53), “문화를 소비하는 이들”로54), “교육받은 층들”로55),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적 개인들”로56), “투표할 수 있는 이들”로57), “시민으로서 공론장을 매개로 정치권력을 합리적 권위로 바꾸고자 하는 이념에 따라 시민사회의 필요와 국가를 연결 지우는 이들”로58), “조직된 사적 개인들”로59), “여론의 주체”로60), “그룹 의견”으로61), “자율적인 집단”으로62), “공적 의사 소통이 조직되어 공적으로 표현된 어떠한 의견이라도 곧바로 효과적으로 반응, 반론할 기회가 있는 곳”으로63) 등이 그것들이다.

이 다양한 의미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가능하다.

첫째, 중세의 영주권의 상징성을 띠는 것들. 둘째, 국가와 관련된 것들. 셋째, 여론의 주체인 시민으로서 정치권력에 대항해 공론장에서 비판적이며 합리적 토론을 매개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근대 시민들과 관련된 것들.

이러한 공공이라는 말의 다의미성은 정치구조의 산물로서 역동적인 역관계속에서 변화해 온 정치구조를 보여준다. 정치의 행위자로서 인간과 그들이 행동하는 공간, 그리고 그 인간과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념, 상징, 속성 등의 표현에 사용된 이 공공이란 말의 다양성은 앞장에서 아렌트가 말한 공론장의 역동성, 정치의 역동성을 관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다음에서는 정치의 장으로서 공론장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그 쇠퇴를 근대 자유주의 공론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부르주아의 출현과 공중의 탄생

 

하버마스에 의하면 자유주의 부르주아 공론장은 발달하는 도시의 시민계층이 봉건권력과 전제군주에 직, 간접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즉 사유재산의 소유와 평등 관계를 상정하는 상품관계는 초기 자본주의 인간에게 시장(市場) 속에서는 재산 소유자로서, 가족 내에서는 경제활동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인간이라는 자기 이해를 가지게 한다. 부르주아(bourgeois)와 인간(Homme)으로 생활하는 초기 부르주아는 가족관계내에 생성된 인륜성을 지닌 보편적 인간이란 역할과 재산 소유자의 역할을 동일시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영역인 사적 부문(private sphere)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근대 공인(public man) 으로 탄생된다. 이들은 살롱(Salon)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문자매체들을 매개로 봉건권력에서 해방된 문화에 대해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토론을 하였고, 이렇게 발전한 문자매체 공론장과 정당등의 자발적 결사를 중심으로 전제 국가에 대항한다. 그 결과 공론장의 이념인 공공성(Publicity)을 제도화시킨 부르주아 입헌(立憲)국가가 탄생한다. 권위의 전시(display)와 복종만이 있던 근대 이전의 밀실의 정치, 정치의 황무지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정치의 공간이 생성된 것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세계의 공론장은 무엇보다도 문자 세계로부터 출발하였다. 다음에서는 비판적, 합리적 토론을 통해 형성되는 공공장소로서 문자 세계의 공론장(public sphere in the world of letters)이 지닌 사회적 조건과 특징, 역사적 발전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다.

농노를 장원 경제체제에 묶어 두었던 봉건 제도의 몰락은 생산 수단을 생산의 주체 소유로 돌려 주었다. 경제 활동은 자신의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 수익을 올려 가계(家計)경제를 재생산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이러한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가족 구조도 변하게 되는데, 그것은 봉건적인 대가족 제도에서 부르주아 핵가족 제도(patriarchal conjugal family)로의 변화이다.64) 이러한 핵가족화 현상의 중심에는 삶의 개인화(사사화, privatization of life) 현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가옥 구조의 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높은 홀이 구식이 되고, 식당과 응접실이 한층 높이로 낮아지며,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쓰였던 예전의 ‘홀’(old hall)이 보통 크기의 여러 개 의 방으로 나뉘어졌으며, 뜰이 축소되었고, 마당이 집중앙에서 뒤로 이동했다.65)

 

이전에는 ‘집 전체’를 위해 기능했던 모든 방들이 도시의 근대적인 사적 거주 양식에서는 극단적으로 제한되었으며, 가족 모두를 위한 공동의 방이 작아지거나 사라졌다. 대신 가족 개개인들을 위한 방들이 점점 늘어 났으며, 그 용도에 맞게 꾸며졌다.66) 가정 내에서 가족의 분리(solitarization)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67) 한편, 가족은 시장과 떨어진 공간을 구성하였으며, 시장에서 상품 소유자로서가진 자율성(autonomy)이 가족에서는 인간(human being)으로 나타났다. 가족을 구성하는 데 있어 자발성(voluntariness), 사랑의 공동체(community of love), 자기계발(교육, cultivation) – 자유 의사에 따라 가족을 구성하며, 이것은 사랑으로써만 가능하고, 거기서 서로 돕고, 발전시킨다는 – 이란 중심 관념 속에서 가족의 친밀성(intimacy)이 상정되는데, 하버마스는 이것이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는 인륜성(humanity)의 원천이 된다고 말한다.68) 이렇게 경제 영역과는 분리된 가족내의 독립적인 존재며, 순수한 인간으로서 그들은 다른 일반 인간들과 순수한 인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의 문학적 형태가 편지와 일기인 것이다. 전자는 감정과 영혼의 자기 표현이며, 자신과 타인간의 심리적 이중관계의 표현이었다. 후자는 자기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로 타인으로 상정된 자신과의 대화였다. 이것은 핵가족의 친밀한 관계속에서 발견되는, 청중과 타자를 향해 있는, 공개성을 지향하는 주체성(subjectivity)의 실험들이었다.69)

개인화된 초기 부르주아 가족에서 공개성을 지향하는, 인륜성을 갖춘 주체, 공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 주체가 거실에서 나와 한 지붕 아래에 있는 살롱이라는 공공장소에 들어가 일반적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읽었던 문학작품 등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살롱은 어떤 곳인가? 근대 초기에 도시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문화의 중심이 왕, 왕실에서 도시의 부르주아 층으로 옮겨진다. 이것은 궁중을 대체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데, 하버마스에 의하면 그것이 영국에서는 커피 하우스(Coffee house)이며, 프랑스에서는 살롱(Salon), 독일에서는 다과회(Tischgesellschaften)인 것이다. 당시 후견인 관계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자유롭게 된 것과 인쇄술의 발달이 시기적으로 일치하면서 왕성한 지적 활동에 힘입은 문학, 철학서적 등이 시장 관계에 편입되었고, 그것들이 유통될 수 있었던 곳은 당시 이곳 뿐이었다. 이것이 독서 능력있는 청중을 지향하는 시민주체들의 토론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국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각각의 차이점70)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적 개인들 사이에 토론을 조직하였다. 둘째, 여기서는 공통의 인륜성을 지닌 동등한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졌으며 – 시장법칙과 국가의 법률은 작동 불능 상태였다.- 세째, 종교, 국가권력이 해석의 독점권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까지 문제삼을 수 없었던 것들을 문자매체들을 매개로 토론 하였으며, 이에 따라 네째로 이것이 구성한 공중은 원칙상 포괄적인 것으로 확립되었다. 즉, 토론되는 안건들의 일반성으로 인하여 누구나 평등하게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accessibility), 그 토론은 항상 외부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71)

이렇게 볼때, 살롱으로 대표되는 공적인 장소에서 구성되는 공중은 재산 소유자로서 자신의 사적 자율성이 확보된 자였으며, 교육받은 교양인들 즉, 귀족, 금융 부르주아, 법률가․의사․교수 같은 신흥 부르주아, 철학자, 예술가 등을 구성원으로 하였다.72) “귀족적 출신 배경보다는 오히려 재치와 지성, 인품이 사회적 출세의 열쇠가 된”73) 이곳에서 이들은 교양인으로서 동등한 인간으로 만났으며, 예술과 문학, 정치 등 모든 것에 관해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을 나누었다.

자본주의 관계속에서 성장한 시민층으로 이루어진 공중이 살롱에서 벌였던 토론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버마스는 그것을 문화비평가들의 문화비평속에서 태어난 문화토론이었다고 말한다.

왕권과 신성(神聖)의 숭배라는 단일 목적에서 벗어난 예술이 시장 관계에 편입되면서 평민들도 자유로이 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과 기호의 대상이 되었다. 민중들에게도 문을 연 콘서트와 극장, 박물관은 소위 평민들의 판단․의견(lay judgment)을 제도화시켰고, 평민들은 토론과 대화로 예술품에 접근했다.74) 한편 이런 일반인들의 판단에 대한 반발로 사회적 특권과 자신들의 전문화된 능력을 결합시킨 전문가, 감식가(connoiseur) 그룹이 생겨났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살롱에서 문화토론을 통한 문화비평이 생겨난다.

 

살롱은 작가와 공중간에 중재역할을 했다. 진지한 비평가인 양 그것은 저작가의 자만과 세상의 무관심 모두를 바로 잡고자 했다.75)

 

더 좋은 논증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고 더 많은 반대 논증을 존립 기반으로 한 이 문화비평은 일종의 토론, 대화로서 더많은 대화자, 토론자, 청중을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의 하나가 예술․문화 비평 저널인 것이다.76) 이것들은 살롱이나, 커피하우스, 다과회에서 토론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토론과 독서를 통해 비판적인 잡지와 문학 인쇄물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전적으로 문자 세계 공론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77)

이렇게 가족의 내부 영역에서 생성된 공개성을 지향하는 주체는 교양 있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살롱이라는 공적 장소와 그곳에서 성장해 신문, 잡지등으로 형성된 공론장에서 그들과 똑같은 인륜성을 지닌 인간들과 함께 일반적 관심을 가지고 모든 문제에 관해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문자 세계의 공론장에서 행동하는 공인은 신문, 잡지 등의 발달을 매개로 정치 영역의 공론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2)밀실의 정치에서 광장의 정치로

 

하버마스에 의하면 문자 세계의 공론장을 태동시킨 시민사회의 발전은 절대 군주제와 대립하게 된다. 이 권력투쟁은 자의(voluntas)에 기반을 둔 절대 권력으로 대표되는 비밀, 밀실 정치와 합리(ratio)에 기반을 두고 공공성․공개성을 대표하는 입헌정치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 투쟁에서 근대 시민층은 기존 문자 세계의 공론장을 이용하여 사회의 요구를 국가에 연결시킨 결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제도화한 부르주아 입헌국가를 탄생시킨다.

상업, 무역의 발달에 따른 교역국간의 시장, 사회,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은 사적 편지에서 시작된 통신, 신문 등의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지식인들간의 의견교환과 토론을 위해 발간된 비영리, 순수 학술적인 잡지 또한 점차 그 참여자와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산업과 시장의 성장으로 자신의 세를 확장해 가던 시민사회는 당시 국가의 규제 정책등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절대주의의 규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상황 속에서 하나의 공중으로 용이하게 묶인 식자 세계 공론장의 시민층은 자신들의 제도들을 이에 대한 저항과 비판에 사용하기 시작78)했으니 그것이 정치영역에서의 공론장( The Public Sphere in the Political Realm)의 태동이다.

한편,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다양한 집단 – 예를 들어 자본내의 분화로서 금융, 상업자본과 산업, 수공업 자본, 그리고 그들간의 경쟁 – 의 발생은 확대되어 가는 시민사회속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단체, 조직 등의 형성을 가능케 했고, 그것이 정당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당시 발전하고 있던 신문, 잡지 등의 도움을 얻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했으며, 기존권력 – 특히, 왕권- 과의 대결속에서 의회의 성립을 가능케 했다.79) 이 과정에서 시민층이 자신들의 권력과 입지를 강화하고, 세력의 확장을 위해 내세운 것이 바로 부르주아 헌법의 이념이었고, 그것이 헌정(憲政)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법의 이념은 당시 문자 세계 공론장의 공인, 시민들이 정치영역에 나오면서 내세운 이념으로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미 문자 세계의 공론장에서 인륜성을 지닌 평등한 하나의 공중(the public)으로 묶인 이들은 그들에게 가해져오는 국가권력과 통제, 제한들에 대항해 공개성과 비판적 공공토론과의 연계속에 자유, 평등의 이념을 내세웠다. 교환, 교역의 자유, 사유재산 소유의 자유, 언론,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규제를 인간의 평등과 자유라는 이념하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즉, 공론장의 기본 구조로서의 재산 소유자의 역할과 인간 존재로서의 역할을 동일시하였던 것으로, 이것은 당시 시민사회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자 세계 공론장의 기능전환으로 인해 공개성, 비판적, 합리적 토론 등이 정치영역의 공론장의 객관적 기능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로 묶여 드러난 것이 ‘법’의 이념이다. 이러한 자유, 평등, 인륜성의 이념들은 공론장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진리며 규범으로, 그리고 그들의 권리이자 이성을 지닌 모든 인간들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이성을 지닌 인간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공론장의 이념이었으며, 이러한 인간들의 토론을 통한 합리적인 의견, 합의가 진리이고, 그것에 의해 국가가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적 토론은 의지(voluntas)에서 합리(ratio)로의 전화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합리는 개인들의 논의의 공적 경쟁 속에서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이의 이익에 필요한 것에 대한 합의(consensus)로서 존재한다.80)

 

이것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81)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장속에서 상품 소유자로서 자율성을 획득한 시민이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한 자연법적 존재가 되는지를, 그리고 나아가 그 기반하에 어떻게 헌정 국가가 수립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공론장의 기능들은 법에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기본권들로는 첫째로, 합리적 비판적 토론에 참여하는 공중의 영역(의사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 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과 이 영역내의 사적 개인들의 정치적 기능(청원권, 선거의 자유 등)과 관련된 것, 둘째로 가부장적 핵가족의 은밀한 영역에 기 반한 자유로운 인간 존재로서 개인의 지위에 관한 것(개인적 자유, 사생활 불간섭(inviolaility of the home) 등등). 세째로 시민사회 영역에서 재산 소 유자들의 상호행위에 관한 것(법 앞에 평등, 사유재산 보호 등등). 법에 명 시 된 기본권들은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영역들을 보호했다. 즉, 한편으 론 신문, 정당같은 공론장의 제도, 기구들과 다른 한편으론 가족, 재산 같은 사적 자율성의 기반들을 보호했다. 그것은 결국 시민이란 정치적 존재와 상 품 소유자란 경제적 존재인 사적 개인들의 기능을 보호했던 것이다.82)

 

그렇다면, 이러한 공론장의 발전과 그 안에서의 공인, 시민들의 활동에 의한 정치변화의 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 이전의, 공론장 태동 이전의 정치를 보아야 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근대 이전은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구분없이 둘이 하나로 합쳐져 있던 시기였다.83) 제도적으로도 사적 영역과 구분되는 공적 영역이 없었다. 영주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공적(public)’이라 불렀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 시기 정치의 핵심개념은 전시(representation)였다. 정치권을 이루고 있었던 영주, 귀족층과 교회는 단지 민중들 앞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 드러내었다. 장대한 행렬과 행사, 여러가지 문양과 의식 등 그 모든 것84)은 민중들 앞에서 그들이 지배, 군림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확인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쇼와도 같은 것이었다.85) 교회 또한 화려하고 복잡한 의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예배행사를 통해 그들만이 신의 대행자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소위 이러한 전시적 공개성(publicness of representation)86)은 민중들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즉 관중을 필요로 하는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하나의 쇼와도 같은 밀실정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영주들은 그들의 음침한 성안에서 전쟁수행 여부와 세금 징수액 등을 마음대로 결정해 시행했고, 교회는 자신들의 권위가 나오는 성경을 소수 성직자들만의 언어인 라틴어로 만들어, 알아듣지도 못하는 민중들 앞에서 떠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시기의 정치는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을 그 수행자며 담지자들인 민중들 앞에서 보여주기만 하고 그것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전시(display)의 정치 였다고 할 수 있다.87)

반면, 이제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사회의 발전을 토대로 생겨난 문자 세계의 공론장과 정치세계의 공론장을 통해 정치의 핵심으로 등장한 공중과 공론장 그리고 공개성, 공중은 사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채, 보편적 인간으로서 일반이익을 위해 사고, 토론했으며, 그들이 공론장을 통해 생산해 낸 의견은 진리로, 입법(법)의 기초로 간주되었다. 공론장과 그 기능의 입헌적 제도화를 통해 공공성, 공개성은 국가 기구들의 절차(procedures) 등을 조직하는 원리가 되었다.88) 이렇게 공론장은 기존의 밀실정치의 폭력과 자의(will)를 백주에 드러내 광장으로 끌어 내었고, 공인, 주민들 앞에서 정치와 정치행위를 드러내어, 그것의 정당성을 부과해 주는 새로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89) 공개성을 통한 공론장의 자유로우며,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낸다는 이념은 입헌국가의 수립속에 제도화되었고, 그것은 지배의 궁극적인 해체(dissolution of domination)90)를 의도한 것이었다. 공중들은 사회 속에서 자발적 결사를 조직하였고, 그것을 통해 국가와 사회 사이에 공론장이라는 정치의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근대 이전의 민중이 배제된 ‘보는’ 정치, ‘들러리’의 정치에서 직접 참여하고 간섭하는 ‘주인’의 정치로 변한 것이다.

절대주의의 의지와 밀실의 지배에 대항하여 공개성의 원리를 내세운 정치 영역의 공론장의 객관적 기능은 문자 세계 공론장의 범주에서 나온 자기 이해와 수렴될 수 있었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상품, 시장 관계를 보호하려는 상품 소유자의 입장과 보편적, 일반적인 개인의 자유라는 이해가 당시의 정치투쟁 속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중은 역사 특수적 의미를 지닌다. 자유주의 시기의 공중은 교육받은 재산 소유자층이었다.91) 그리고 이들의 이해관계가 여론, 공론으로 되어 일반이익이 되었다. 공적, 비판적 토론을 통해 계급이해가 일반이익의 외관을 띠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물적 기반과 그 이념은 모순 관계에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 보호와 그들의 지배 속에서 계급 차별과 지배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공개성과 법의 이념이 제도화된 것이다.92) 이제 이 모순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제 4 장.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2)

 

19, 20세기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에 의해 수많은 거대 기업이 등장한다. 그에 따른 노동자 대중의 등장과 그들 간의 대립, 계급투쟁으로 인해 국가가 사회에 개입하게 되고, 경제 규모의 확장에 따른 관료제 등의 발달로 야경 국가에서 개입주의 국가로의 변화가 일어나며, 국가와 사회의 상호 침투가 일어난다.93)이 가운데 공적 권위와 거대 기업으로 대표되는 사(私)권력이 공론장에 침투하게 된다. 그 결과 문화소비로 수동적, 무비판적이 된 공중은 자신의 정치의 장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그들의 비판적 참여 속에서만 가능한 공개성의 이념을 전도시켜 공, 사권력의 대중조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공론장은 대중으로 변한 공인의 손을 떠나 권력의 전시장으로 변하였고 그것은 공론장의 재봉건화를 초래하게 된다.

아래에서는 공론장의 확장과 해체과정을 우선, 사회, 경제적 변화에서 일어난 공론장의 주체의 변화와 제도들의 변화, 그리고 그 이념(ideology)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토론하는 주체에서 수동적 주체로

 

자유주의 시대에 정치 세계의 주체는 부르주아이다. 상품(재산)소유자로 시장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사적 자율성을 누림으로써 살롱에서 자유롭고 합리적인 공적 토론을 하였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는 자유․평등․인륜성을 내세우며 사회적 배타성과 응집력을 지닌 교육받은 시민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제 선거권의 확대와 기층민중들의 진출로 인해 정치의 주체는 국민 대중으로 이동했다. 이 가운데 예전에는 사적 영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 갈등이 공론장에 침투했고, 집단의 이해관계가 자율적인 시장경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가 부문에 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공인의 확대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상호 침투에 의해 일어난 현상으로 사적 영역의 핵심인 가족 영역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자.

하버마스는 자유주의 시대의 상품 교환과 사회적 노동(social labor)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주식회사 등의 대기업의 발달과 그것의 사회 속에서 지위 향상과 역할 증대로 인해 거대 기업은 한 사람의 기업이 아닌(소유가 아닌) 사회제도와 같은, 또한 직장(職場)은 유사 공적 영역( quasi public realm)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직장이 독립적이 될수록 가족은 더 그 자신 속으로 후퇴하게 된다.94) 한편,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전의 가족 재생산이란 역할을 수행했던 가족의 재산이 개인적 수입, 임금으로 대체됨으로써 부양, 교육, 비상시 대책, 노후 보장, 의료 등 가족의 비상시 자기 구제와 자기 부양을 국가가 책임지게 되었다. 가족은 기초적인 전통, 관습 전달 기능과 가치 형성 전달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공적 제도가 가족 내에 침투하게 되자 가족은 임금과 여가의 소비자, 공적 부조의 수혜자가 되었으며, 국가에 넘겨준 일련의 사적 조절(private control)기능은 이제 지위 보장(status guarantees)기능으로 대체되었고, 그로 인하여 사적 자율성은 소비의 기능에서 유지되게 되었다. 사회나 국가의 침투로 산산이 부서지고 남은 것은 이제 집약된 사생활의 내적 공간(inner space of intensified privacy)이란 환영만이 남게 된다.95) 이렇게 침해된 가족의 내적 영역(intimate sphere)은 집의 건축적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개인 가정의 독자성은 사라지고 살롱과 손님 응접실의 소멸로 공론장과의 개방적인 관계는 위협받는다:

 

집들내의 문들이 사라진 것처럼 이웃들간의 장벽도 사라진다. 큰 유리 로 된 전망창을 통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잘 볼 수 있다.96)

 

내부영역은 타인의 시선앞에 드러났고 사회통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적 소통형태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사적인 삶이 공공성(public)을 지니는 것과 비례하여, 공론장도 사적 영역의 성격을 띠게 되어, 이 두 영역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중의 비판적, 합리적 토론도 이러한 재봉건화(refeudalization)의 희생물97)이 되며, 사회성(socialiblity)의 한 형식인 토론은 공동체․동족관계(community involvement)의 물신주의98)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하버마스는 이것을 문화를 토론하는 공중(culture debating public)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공중(culture consuming public)으로의 변화로 표현한다.99)청중과 외부세계를 지향했던 행동하는 인간에서 여가시간 등의 소비에서 유지되는 수동적인 고립된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자율적인 직업영역에서 분리된 여가100) 및 소비의 영역은 문자 세계의 공론장을 대체하게 된다. 이제 이 공론장은 문화소비 영역으로 변한 공론장을 통해 가족의 내부영역으로 침투하는 대중매체의 통로가 되었다. 더 이상 사적이지 않은(deprivatized) 친밀성, 내밀성의 영역은 대중매체에 의해 침투 당했고, 문학잡지는 대중선전지(the popular advertises-financed illustrated magazines)로 바뀌었다.101) 이러한 일련의 문화소비 공중, 대중의 행위는 일정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바로 문화의 상품화, 상업화 현상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신문과 잡지는 부르주아 헌정 국가 설립시기에 정치권력에 대항해 보편이념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헌정 국가의 수립으로 일정정도 그들의 목표가 달성되고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일어나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상업화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중의 하나가 ‘광고(advertisement)’를 통한 상업화이다.102) 이후 이것은 모든 미디어(media)에 파급되어 문화의 형식과 내용면에서의 상품화 뿐만 아니라 대화와 토론도 규격화, 형식화, 상품화시켰다. 가히 전 영역으로 퍼진 이윤추구의 논리속에 이루어진 상품화를 통해 대중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광고를 무기로 소비정향의 대중에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103)대중은 언로를 봉쇄당한채 매스미디어를 수용만하게 되었다:

 

그들은(새로운 언론매체) 공중의 눈과 귀를 그들의 주술(spell)하에 두고, 동시에 그 거리를 없앰으로써 그들의 감독(tutelage)하에 두었다. 무엇에 대 해 이야기하고 반대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104)

 

이제 사회의 기준은 대중문화가 되었고, 소비성향의 대중들은 이전의 교양있는 독서공중105)의 비판적 토론 대신 소비자로서 그들 각자의 기호와 선호(tastes and preference)를 교환하는 말, 대화를 주로 하게 되었다.106)소비문화에 침투당한 공론장이 내부영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토론 대신 나오는 욕설이나 지연․학연으로의 담합, 그리고 심지어 대학 강의실에서의 토론, 대화의 빈곤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일반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자발적 결사 속에서 비판적 토론을 행했던 공인은 매스미디어와 소비문화의 홍수 속에 묻힌 문자매체의 공론장속에서 비판과 합리의 정신을 잃고 수동적인 대중이 되었다.

 

 

2)재봉건화된 공론장과 공론장의 부활

 

과거 공․사 영역의 명확한 분리 속에서 사적 이익들 간의 경쟁이 시장에 남아 있었다면, 이제 이 영역들의 상호 침투로 특수 이익, 사적 이익간의 경쟁이 공적 영역에 유입되었다. 대중과 공론장이 분리되고 매스미디어가 대중문화를 선도하게 된 이 시대에 있어 광고는 공론장의 주요 기능이 되었다. 이제 토론은 경쟁하는 이익들간의 전시효과만을 내게 되었고, 과거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공공 토론과 지배의 합리적, 합법적 기초를 연계시키고, 그 행사의 비판적 감독까지 수행한 공개성, 공공성(publicity)은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의 동의와 최소한의 묵인을 얻으려고 사용되었다. 즉 비판적 공개성(publicity)에서, 환호와 묵인, 만장일치의 분위기를 조작해 내려는 조작적 공개성(manipulative publicity)107)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론조작(opinion management)과 공중의 배제속에 사적 이익들간의 상호이익을 위해 비밀협상 등의 방법을 취하는 정치 흥정, 거래 등이 나타나게 된다.108)이제 공론장은 공인의 손을 떠나 공적 권위와 사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공, 사부문의 상호 침투로 공론장에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한다. 우선 기존의 공중이 새로운 제도들에 의해 대체되거나, 성격변화가 일어난다. 그 하나가 정치적 전달자로서의 형태를 띠는 사적 이익들의 집단적 조직체인 이익단체․ 결사들이며, 다른 하나는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공중을 넘어 공적 권력의 기관, 조직으로 변형된 성격을 지니기 시작한 정당이다.109)이와 함께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집중으로 거대 기업화된 신문, TV, 라디오 등의 미디어는 공론장내에서 성장한 사권력의 복합체로 드러난다. 또한 복지를 매개로 거대화된 국가관료제도는 공론장의 주요 행위자가 되었다.

상업화된 미디어는 공론장을 사익을 위한 선전의 영역으로 바꾸었고,110) 각 이해관계들과 결사들의 통합체였던 당은 각 사익들이 경쟁하는 곳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기관으로 확립된 공론장인 의회도 서로의 의견을 토론하여 공공의 결정을 내리는 곳에서 공중에 자신들의 이익을 전시하는 곳으로 되었다:

 

의회는 전체 국민 – 이 공개성의 장에서 라디오와 TV를 통해 특별한 방식 으로 참가하는 – 앞에서 정부와 당이 자신들의 정치강령을 국민 앞에 내보 이고 정당화하는 ‘공적 연단 (Public Rostrum)’이 되었다.111)

 

이제 사권력과 공권력은 변화된 공론장에서 조작과 전시의 공개성을 취하게 된다. 그들은 대중선전(public relation)을 통해 공공복리라는 이름 하에 자신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숨긴다. 선전을 통해 공적 이해관계와 자신들의 작업을 일치시킴으로써 동의의 조작(engeering of consent)을 유도해 낸다.112) 그들이 장악한 대중매체를 통해 뉴스나 사건을 만들어 내고 관심을 끄는 사건을 이용함으로써 여론 형성 과정에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113)공공성 작업(Publicity work)114)으로 불리우는 이런 작업들은 공적 토론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동의가 아니라 선전을 통한 전시(representation)에서 얻어지는 수동적 대중의 환호와 암묵적 동의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비판적 공공성에서 전시 공공성으로 그리고 봉건적 공공성으로 변화한 것이다.

 

공론장은 그 속에서 공적인 비판적 토론이 행해지는 곳이라기보다는 그 앞에서 공적 명성, 인기(prestige)가 전시될 수 있는 곳(court)이 되어 버렸 다.115)

 

이에 정치적 결정은 힘있는 사적, 공적 권력간의 밀실의 흥정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민의 자치의 장소로서 공론장이 사라지고 권력체들의 밀실이 들어서게 되었다. 정치의 주인이었던 공중이 점점 정치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자본의 규모와 국가부문이 커지게 되자, 이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상호 침투하게 되었고, 여기서 과거 자율성을 지닌 채 비판적, 합리적 토론으로 기존 국가권력에 대항해 정치의 주인으로 섰던 공인은 이제 자신의 일을 국가에 맡긴 채 임금과 여가, 국가서비스를 소비하는 대중으로 전락해 버렸다.116) 여기에 과거 공인의 계몽과 지배의 합리화를 위해 같이 싸웠던 미디어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생존에 급급한 채, 광고를 무기로 국민들의 눈을 현혹시키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국가부문과 정치인들 그리고 이익집단으로 조직된 사적 이익들은 비판적 토론을 통한 일반이익으로의 합의 대신 협상 등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나눠가지거나, 그들의 이익추구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제 정치는 공인의 손을 떠나, 광장을 유사 광장화 시킨 채, 그들만의 새로운 밀실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치는 국민, 공인과 유리되었고, 그 결과 국민도 정치도 다 소외되었다.117) 이제 정치를 국민의 손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광장에 복귀시켜야 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 가게 하는 것이다. 폭력과 지배를 합리로 바꾸었던 공개성과 비판적 토론을 통해 죽어 가는 정치를 소생시켜야 한다. 정치의 광장이며 정치에 활력을 불어 넣는 공론장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하버마스는 변화된 상황 속에서의 공론장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비록 위에서 기술한 공론장의 약화 경향이 존재하더라도, 현대 복지국가 사회에는 기본권의 확대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조작적인 전시 공개성은 그 공연의 대상을 필요로 하였다. 조작과 전시 또한 공개성에 의존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 축소 왜곡된 공개성을 다시 확대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개성을 침해한 부분과 조직에까지 공개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 그 참여는 사회 복지국가내의 국가에 의해 확보, 보장되는 기본권, 사회권의 활용과 확대를 통해 가능하다. 과거 자유주의 입법은 시민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소극적인 것이었다. 절대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기본권 확립이 그 목적이었다. 이제 국가가 사회질서의 보호자로 전면에 나서자마자 국가는 그 기능을 확대하였고, 정의와 질서의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국가의 많은 부분이 시민들의 이해관계와 얽히게 된다. 그 속에서 각종 사회집단과 연결되어 많은 공간을 탄생시킨다. 이 확대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민주적 참여의 공적 보장으로 확대시켜야 한다.118) 대중을 재 정치화하는 것이다. 이 재 정치화는 각 조직과 연대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비판적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사회복지국가의 정치적 공론장은 다음 두 가지 대립하는 경향들로 특징지 워진다. 그것이 시민사회의 몰락을 나타내는 한,— 전시되고 조작된 공개 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따라 공적 의사 소통이 비판적 과정을 작동 시키는 정치적 공론장의 요구에 사회복지국가는 접해 있다.119)

 

이러한 대립은 공중의 분화와 그에 따른 여론의 분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중의 의사 소통망은 쇠퇴해왔 다; 그 결과 한 때 거기서 유래된 여론은 부분적으로 공공성이 없는 사적 시민들의 비공식적 의견들로 분해(산)되었고, 일부는 공적으로 유효한 제 도들의 공식적 의견들로 집중되었다.”120)

 

그러나, 쇼나 통제를 위해 조작된 공개성에 갇힌 비조직된 사적 개인들의 공중은 공적 의사 소통보다는 공표된 의견들의 소통(communication of publicly manifested opinions)121)에 매여 있다. 공론은 이제 비판적 공개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매개는 오직 간 조직적 공론장을 통한 공식적 의사 소통의 과정 속에 사적 개인들의 참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122) 각 집단내의 의사 소통 과정의 활성화와 그 집단간의 상호 견제가 국가와 사회제도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보장될 때, 사회․ 정치권력의 합리적 재 조직화는 가능하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123)

이것은 제도화의 모순적 과정에 내포된 모순의 극복 방법이기도 하다. 입헌 국가의 성립시 이성과 합리의 제도화로서 헌법의 제정과 제도화, 물질화는 그 유지를 위해 또 다른 의미의 지배와 강제를 수반하였다.124) 이념과 그것의 제도화간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는 길은 이념과 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생기를 공급하는 것이며, 그 생기는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을 통한 공중, 시민의 참여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공론장은 문학 클럽이나 살롱, 카페 같은 자발적 결사가 만들어 낸 공간이며, 그 속에서 결사, 연대들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이 교육받은 시민층으로 이루어진 공론장은 이성의 지배를 원리로 합리적인 토론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참여와 계몽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 세계의 권력 투쟁 속에서 제도화되었을 때 이성의 지배라는 모순에 부딪친다. 폭력, 억압의 지배를 해체하고 이성의 운용을, 합리적인 지배를 내걸었을 때 무게 중심이 ‘합리’에서 ‘지배’로 이동할 위험이 상존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공론장의 내재된 긴장관계 속에서 ‘미완의 기획’으로서 공론장의 적극적, 합리적 측면을 발전시켜야 함을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그것은 각 조직, 연대, 결사 속의 적극적 참여를 통하여 정치의 장으로서 공론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곳에서 대중은 다시 정치화된 공인으로 재 탄생하는 것이다. 대중의 정치화와 생동하는 정치의 장으로서 공론장의 활성화를 통해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작은 정치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내재적 모순과 긴장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론적 정합성이 아니라 현실에 주목한다는 것이며, 철학보다 정치에 우선을 둔다는 것이다. 내재적인 관점에서 사회사(社會史)적 기술을 통해 공론장의 변화를 고찰한 하버마스에게 행정 기구의 관료화나 사기업의 사회 권력화, 정당의 사당(私黨)화 그리고 시민들의 비공식적 의견과 공식 기구들의 비공식적 여론 조작들로의 분화 등은 어느 하나의 근절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간접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간부 엘리트와 평회원 등의 대립 등도 어느 한쪽의 전일적 지배만이 최선책은 아니었다. 모순적 지배 관계의 해체는 또다른 지배 관계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된 결과가 반드시 획득되지 않는 본질적으로 열려진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그 과정의 합리성과 자율성을 보존하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적 역관계 속의 제도화와 그 속에서의 정치 투쟁을 인정하고 그 상호관계 속에서 구성원의 참여를 통해 각 영역의 독자성과 합리성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현실의 정치 경험들 속에서 이것들을 간파하고 단일성과 보편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포괄적인 시민사회의 연대, 결사와 참여에 기초한 다원주의, 특수주의의 정치를 주장한 마이클 월쩌(Michael Walzer)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제 5 장. 공론장 이론에 대한 월쩌의 해석

 

이 장에서는 월쩌의 정치평론125)을 중심으로 국가 · 정부 · 조합 권력과 시민 ·민중들 사이의 정치투쟁의 경험 속에서 드러난 시민 정치와 저항의 정치, 그리고 미국 공산당의 경우 등에서 볼 수 있는 비판과 참여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것은 결국 분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열린 공간을 중심으로 각 영역의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비판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민 정치의 문제임을 살펴볼 것이다. 월쩌의 평론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드러나고, 발생한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의 결과로서,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월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1)저항과 참여의 정치

 

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신 좌파 운동, 베트남 전쟁, 소련 사회주의와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에 대한 경험 그리고 대중사회와 개입주의 국가에 대한 경험과 참여는 시민혁명과 민주정치의 경험을 반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저항을 중심으로 하는 열린 공간에서의 참여와 연대의 정치이다.

월쩌에 의하면 기존의 정치는 혁명과 개혁, 이 양자택일의 역사였다. 혁명이 역사적으로 단일한 신념과 생활의 헌신을 요구하는 직업 혁명가들(professionals)의 몫이었다면, 개혁은 그것이 비록 공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정부만의 기능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과거 자신들의 정책 집행의 정당성을 공중들에게 인정받아야 했던 정부 관료 조직은 대중사회 속에서 시민들과 지역 공동체 조직들을 의사 결정 과정과 정치과정 속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여 왔고, 그 결과는 위임받은 정부 권력의 남용과 그 조직의 관료화였다. 또한, 공․ 사 부문의 상호 침투로 국가권력과 사회 조직, 특히 경제 권력의 상호 침투로 조합 권력(corporate authority)이 생겨났는데, 정경 유착(政經癒着)으로 대표되는 이 권력은 노조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과 시민들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고 있다.126) 이러한 공적이며 사적인 거대 권력들의 억압 상황 속에서 다시 소생한 것이 저항의 정치이다. 월쩌에 의하면 이것은 억압에 대한 반응이자 반항으로 권리나 법의 보장이라는 이상적 질서에 대한 요구와 이를 수행하는 공동의 이해를 가진 집단을 필요로 한다. 이 저항의 특징으로는127) 첫째, 상위법과 공동체의 양식에 호소하며, 정부 시책이나 사회적 관습(social convention)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며 둘째, 제한된 목적을 가진 질서 있고 훈련된 행위들이며 셋째, ‘위로’부터의 정책(policy)보다는 ‘밑’에서부터의 감정과 분위기(sentiment)를 표현하며 넷째, 전적으로 대중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능으로 다섯째, 아마츄어와 시민을 위한, 시민의 정치이다.128)

서구의 정치사에서 국가는 모든 개혁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였다.129) 그것은 지방 엘리트와 전통 엘리트의 권력을 분산시켰고, 구 조합을 파괴했고, 새 조합을 규제했으며, 또한 소수 인종, 민족과 종교를 보호했다. 이와 함께 아무리 힘있는 대중 조직조차도 따를 수 없는 기준과 표준(standards)을 확립하였다. 월쩌에 의하면 소위 국가는 근대사회의 유일한 권리부여자(licensing agency)였다. 억압받던 민중을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했고, 새로이 선거권을 획득한 모든 구성원들의 지지를 획득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정당성과 권력을 가지고 모든 쇠퇴하는 행위자(agency)의 힘을 흡수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선과 혜택 부여는 그 반대급부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행정기관의 힘의 증가이며, 이익 수혜자에 대한 통제의 증가였다. 이러한 일상의 행정 기구의 확장과 사회 통제(social control)의 정도와 그 집중도, 그리고 세부항목의 증가는 국가가 인간 욕망을 총족시켜야하며, 정치가 안정과 복지, 평등과 박애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공리주의 국가관과 결합하여 복지국가의 탄생을 가져왔다.130) 그러나, 이 복지국가131)는 정치의 상실을 낳는다고 월쩌는 말한다. 국가는 단지 행정적 중개자가 되었고, 정치는 오로지 풍부하고 즐길 수 있는 자원과 외부 조건들의 공급과 관련되었다. 국민들이 가능한 한 이 세계를 즐기게 하고, 그 수명을 연장하는 활동에 복무하게 되었다. 이제 투쟁은 소멸되었고, 행복이 최고의 선이 되었다. 모든 것은 개인과 개인적 가치에 중심을 두게 되었고, 공적 행위는 시간 낭비가 되었으며, 사적 세계가 공적 세계를 대신하였다.

 

복지국가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 머 물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복지분배의 주요 원칙들은 첫째, 이익들이 개인 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둘째, 그 사적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 다. 완벽한 복지국가에서 오락은 언제나 사적인 것이 될 것이며 행정만이 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경찰과 복지 행정 관료만이 공인이 될 것이다.132)

 

이전의 투쟁 단체는 복지 행정 체계로 통합되어 압력단체 화하였다. 또한 지역 활동(local activity)과 대중 참여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결국, 공동체 구성원들의 열의는 사라지고, 숙련된 기술을 지닌 엘리트․ 관료의 분배 행위가 대신 들어서서 통계와 인구조사 등의 새로운 지식133)을 통해 사회의 모든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국가는 시민을 부양하고, 보살피며, 일탈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도 가하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paternalism).134) 이제 복지의 수혜자가 된 시민은 자원과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제시하는 행복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체재로 만들거나, 재구성할 자유는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는 우리가 행동할 수 없는 곳이 된 채 단지 보는 곳으로 되었고, 공적 삶의 외형조차 필요 없는 곳으로 되어 버렸다.

 

복지국가의 역사는 사회에 편입 안되고(invisible) 미천하며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제된 수동성에서 시작해서, 계몽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과 공권력에 의해 인정되고 충족되어 지는 인간 욕망들로 끝나거나 끝날 것이 다.135)

 

여기서 월쩌는 정치의 역동성과 대중의 창의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보고,136) 이것을 위해서는 스스로 결정하는(self-determining) 시민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자립적인 소그룹의 정치이다. 국가를 가능한 한 투명한 행정적 외피로 축소시키고137), 그 안에서 작은 그룹들138)이 크고 번창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원과 권력의 국가 독점으로 독립을 상실하고 수동적이 된 시민들에게 자기 자원을 지닌 소그룹내에서 참여하고 활동하게 함으로써 권력을 분점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와 지역의 자기 결정, 그리고 그것을 통한 자신들의 의사와 의지의 주장, 이것이 바로 저항(insurgent)의 정치이다. 이제 문제는 국가권력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here right now) 권력이며, 항상 ‘밑에서부터’(from below) 얻어야만 하는 권력139)이다. 이것을 통해 지역적 의사 결정을 대치했던 행정적 서비스를 다시 지역의 자치를 위해 기능 하는 것으로 만들고, 복지 관료제를 대중적 저항과 자치의 새로운 정치로 가는 조력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140)

이제 이 저항의 정치는 개혁과 혁명의 양자 사이에 끼어 참여의 공간을 잃어 버리고, 정부 관료 조직의 권력 남용과 그 횡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총체적으로 무능력해진 소외된 현대 시민의 유일한 대안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보는’정치에서 직접 ‘참여’하는 정치로의 이행인 것이다. 그러나 월쩌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현실은 탄탄대로가 아님을, 잘 짜여진 설계도에 의해 멋있는 건물을 짓는 것이 정치가 아님을 월쩌는 끊임없는 현실과의 대화 속에서 인식했던 것이다. 자유로운 시민으로 가는 길에는 그 방해물과 어려움 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기존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횡포, 그리고 그들의 융합, 대중매체의 힘, 중앙 집중화된 관료 체제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이런 난관들을 자신들만이 알아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없이 그들의 이웃과 동료, 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고 하는 엘리트주의와 소영웅주의인 것이다.

 

 

2)비판의 정치

 

앞에서 보았듯이 혁명이나 개혁은 공히 직업혁명가나 관리들만이 해 나가는 엘리트만의 일들이었다. 특히, 혁명과 관련해서 마르쿠제는 이성적 엘리트의 혁명적 독재를 이성적이며 민주적으로 사고하기를 배운 소수 엘리트에 의한 민주적 교육 독재로 정식화시켰다.141) 그러나, 월쩌는 자유를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보고, 이런 점에서 엘리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할 지라도 하나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다양한 인간들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시민 정치와 참여 정치에도 내재하는 것으로 공산당의 행태와 맑스의 정치를 분석142)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동구의 자유화 운동과 봉기, 스탈린 체재와 그의 사후 후루시쵸프체제의 등장. 이러한 일련의 시대적 변화에 미국 공산주의자들과 그 당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143) 월쩌에 의하면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우선, 당시의 변화를 최소화하기를 원했던 수구 세력. 둘째로, 후루시쵸프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부류. 셋째, 주로 “일일 노동자”(Daily Worker)의 편집자(editors)들로 이루어진 독자적이며, 비판적인 노선을 견지했던 부류 등이다. 새로운 시대 변화에 따라, 그리고 과거 스탈린 체제에 대한 반성 속에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당내에 민주적 토론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주장했다. 이 비판적 그룹들은 칼럼, 편지투고 등을 통해 토론과 비판의 자유, 그리고 ‘차이’(difference)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이전에 당이 사회주의 모국의 전능성을 인정, 추종한 결과 독자성을 잃어버렸던 것을 비판하고, 당내의 민주적이고 비판적인 의사 소통의 확립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간부와 원로들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현 소련 체제에 계속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에 대한 비판과 다양한 의견 개진 그리고 그것에 대한 토론을 용납하지 않고, 출당(出黨)압력 등의 억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월쩌는 “일일 노동자(Daily Worker)로 대변되는 ‘비판’, ‘차이’의 입장을 지지하며, 민주적인 당내언로의 확립을 주장한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사회주의 상에 대한 논의는 이제까지 그 경제적 가능성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나, 그 정치적 성격, 특히 그 정치 생활의 주체인 시민들에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144) 맑스의 사회주의는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모든 부문에 시민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시민들의 사회 규제(social regulation)가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너무 많은 회합(too many evening)을 필요로 한다.145) 이것은 사회적 규제를 위해 필요한 토론, 의사 결정 등을 위한 회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주의나 혹은 참여 민주주의가 너무 많은 공적 모임을 필요로 하고, 그 결과 공적 생활만이 남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전적으로 공적 생활을 선호하는 사람,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모임에 전혀 참여 안하며, 일도 가끔가다 열심히 하는 사람 등등. 기존의 진보 정치는 급진적으로 정치 참여의 양과 강도를 높이려 했고, 그 결과 시간의 제한, 다양한 신념과 그에 따른 행위의 다원성이란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참여 민주주의는 참가자들만의 권력 독점을, 사회주의는 회합과 조직에 참여하는 이들의 지배를 뜻하였다고 월쩌는 말한다.146) 양자 공히 ‘타인’들을 배제하였고, 열성분자, 투사, 그리고 직업 혁명가들만의 권력 게임이 되었다.

그러나, 비참여자라도 그들은 권리를 지니고, 역할을 가지고 있다. 비록 현대의 정치가 단순히 ‘보는’, 소외된 정치가 되어, 이에 대한 ‘참여’의 정치가 요구된다고 하지만, 새 드라마 – 새 정치 – 가 관객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 관객이 비판적이며 연기자보다 뛰어난 점이 있고 그들도 연극의 구성원임을 잊으면 안되듯이, 정치 참여자(행위자)들도 대중, 시민을 인정하고 그들의 비판과 눈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147) 곧 비판과 참여의 정치는 대의정치, 대의 민주주의와 항상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끼리끼리의, 닫혀진 정치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바로 시민 정치의 과제이고, 이러한 열린 정치가 가능한 곳이 바로 공적 공간 (public space)148)인 것이다.

 

3)열린 공간의 정치 – 시민 정치

 

월쩌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인 정치, 종교행위, 상업, 스포츠 등이 행해지는 곳이 공적 공간인데, 그것은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닫혀진 공간(single-minded space)과 둘째, 열린 공간(open-minded space)이다.149) 쇼핑센터로 대표되는 닫혀진 공간, 폐쇄 공간에서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이들 -판매자, 구매자-이 활동한다. 따라서, 이 공간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계획되어 세워졌고, 그 편의만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이 한 가지 목적은 오직 개개인들의 편의를 목적으로 하는 사적 공간을 탄생시키고, 사사화(privatization)의 특징인 배타성과 은밀화(intimate)를 가져온다. 반면, 광장으로 대표되는 열린 공간은 공적, 사적 건물들로 둘러싸인 채, 어떤 것은 단일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은 다목적용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들은 한데 모여 만나고, 활동과 활발함을 창조하는 공간을 만들며, 이곳에서 시민들은 만나고, 걷고, 토론을 한다. 이것들을 통해 시민들은 배우고 익히며, 상호 일체감(solidarity)을 형성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문화, 기술, 이데올로기, 사회, 경제적 요인들로 인해 닫힌 공간의 은밀화 경향이 우세해지고 있다고 월쩌는 진단한다. 즉 복지의 개인성, 유아성(唯我性)과 개인주의적 자기 욕망의 확장과 더불어 기술의 발전은 이전에는 함께 해야만 했던 일들을 혼자서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 ‘한 곳에는 한 가지 목적’(one site/one purpose)150)이라는 표어까지 생기게 되었다. ‘중심’(center)과 계획, 기획(project)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법원은 법조인만의 장소가 되었고, 시장은 무질서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백화점은 물건을 살 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며 쇼윈도우는 그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끊임없이 낙오, 배제시키는 좌절과 욕망의 진열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월쩌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면서 위의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 속에서,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인간이 살아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전제하에서 닫힌 공간에 저항하는 열린 공간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도시들은(정치는–필자) 진정 중심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오직 이 것들이 다양한 종류의 활동과 행위들과 함께 하는 한에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다양성을 위해 탈중심화를 필요로 한다.151)

 

이러한 월쩌의 시민 정치는 그의 “시민사회의 이념” 이란 논문152)에 응축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기존의 서구 정치사상에서 나타난 ‘좋은 삶’(good life)에 대한 4가지 선호 안을 분석한다. 우선, 좌파적 입장의 공동체주의적이며, 공화주의적인 입장 하나와, 맑스를 선구자로 하는 사회주의적 입장,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본 시장 중심의 입장과 민족주의적 입장이 그것이다. 좌파적 입장 중에서 전자인 공동체 주의와 공화주의적 입장은 시민성(citizenship)과 민중(demos)을 강조하고, 후자 즉 사회주의적 입장은 노동계급과 생산의 관점을 중시한다. 세 번째인 자본주의적 입장은 시장 관계를 강조함에 따라, 소비자와 생산자를 중요시하며 국가 권한의 최소화를 주장한다. 네 번째 즉 민족주의적 입장은 피(혈통)와 역사의 끈을 강조하는 삶의 기준이 정체성(identity)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로, 나치즘이 그 극단적 형태이다. 월쩌는 이 4가지 안들의 편협성을 비판하며 인간사회의 복잡성과 거기서 오는 신념과 행동들의 필연적 대립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의 대안이 나오는데, 분화와 투쟁의 장소로서, 그리고, 상호 교통하며 사회성을 가지는 구체적이며 진정한 연대의 장소로서 시민사회에 대한 인정이다.

이것은 시민사회를 위의 4가지 안들의 기본 환경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곳에서의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생활의 실제 기반으로서 유대와 삶을 인정, 복원시켜 내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시민성과 민중의 강조와 노동계급과 생산 범주의 강조로 엘리트만을, 그 주창자, 신봉자만을 군림시켰던 앞의 두 이론과, 시장 관계의 강조 하에 그 안에서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등을 보지 못했던 세 번째 이론 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며 나아가 시민사회 속의 유대 관계, 연합망 – 연맹들, 정당들, 각종 운동들, 이익 단체 등등 – 속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작은 결정에 참여할 때,153) 이것이 자라 국가와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민주적인 국가만이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적인 시민사회만이 민주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민주정치를 가능케 하는 시민성, 시민 의식은 오직 연대(결사, 연합)의 망들(associatonal networks)속에서 배울 수 있다.154)

 

그는 어떤 하나의 선호안만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반대 속에서 단일성에 대한 거부를 발견하고, 시민사회의 세 가지 계획을 내세운다. 첫째, 국가를 탈중앙집권화하여 시민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하기. 둘째, 경제를 사회화하여 시장 행위자나 공동체, 사적 행위자들의 더 많은다양성을 보장하기. 셋째, 민족주의를 다원화하고, 교화하여 역사적 정체성을 실현하고 유지할 여러 방법을 준비하기.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원을 재분배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사, 연대 행위들을 지원하고 인정할 것을 제시한다.155)

월쩌 자신이 ‘비판적 연합주의’(critical associationalism)156)라 명명한 이 정치는 에너지가 어디로 어떻게 집중되고 있는 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적(敵)과 아(我)의 양단으로 자신을 특징 지우는 기존의 영웅주의에 대한 반대와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상의 기존 체제들을 특징 지웠던 위의 네 가지 선호 체계가 억압과 지배를 가져온 이유는 종교와 종교적인 것의 성급한 보편주의와 민족, 인종의 배타성 등으로 특징 되는 이데올로기적 폐쇄성의 영향 때문이었다.

 

월쩌에 의하면 시민사회는 다양한 시장 행위자들, 예를 들어 가족 기업, 공기업, 노동자 자치체, 소비자 조합들, 여러 종류의 비영리 조직 등을 포함하고 있다.157) 비록 그들의 기원이 다르더라도 시장 속에서 각자의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국가 속에 있으나 국가의 것은 아닌 그룹에 의해 확대 고양되어 왔듯이, 소비자 선택도 시장 속에 있으나 시장의 것은 아닌 그룹들에 의해 확장되어 왔다. 국가 속에는 시장기구들도 있으나 그것은 국가 기구가 아니며, 국가 기구는 시장 속에서 활동하나 시장 조직은 아니다.158) 현대의 분화된 세계 속에서 각각의 영역은 자신의 기능과 내적 논리를 지닌 채 사회 속에서 경쟁하고 활동한다. 자본과 화폐의 힘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식으로 한 영역이 타영역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시장이나 국가의 존재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재화의 수급을 자유롭게 유통시키는 장소로서의 시장과, 국민의 요구와 그들간의 투쟁을 흡수하여 일반적인 기준을 만들어 온 국가는 역사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역할들을 수행해 왔고 현재도 하고 있다.159) 문제는 한 영역의 원칙이 다른 영역에 침투하고 확산하여 전일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전횡과 관료의 권력 독점의 횡포 등의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시장이나 국가를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독재를 불러왔을 따름이었다. 문제는 이 영역들 사이의 관계 조절이다. 각 영역은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독자성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평등과 정의의 문제이다. 기존의 평등이 타인이 10을 가지면 나도 10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평등(simple equality)’이었다면, 이제 ‘복합 평등(complex equality)’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자가 모든 지배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 개입이라는 다른 지배 즉, 독재의 가능성을 배태시킨 것이었다면, 후자는 사회 분화가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적 재화가 그 사회적 의미와 다양성에 맞는 다양한 기준으로 분배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160) 한 영역의 타영역에 대한 우위는 사라지고 각 영역의 독자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이제 평등은 일련의 사회적 재화들이 매개된 인간들간의 복합적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차이들’과 ‘경계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161) 각 영역의 독자성은 그 영역의 내적 논리가 그 구성원들의 참여에 의해 스스로 지켜질 때 획득되고, 각 영역의 차이의 인정과 경계들의 보호 속에서 얻어질 수 있다.162)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전문가와 관료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독점과 특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교실에서는 선생님을, 군대에서는 지휘관을, 국가에서는 관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권과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다. 국가, 관료, 조합권력, 영웅주의, 닫힌 공간 등은 모두 획일성과 폐쇄성을 특징으로 한다. 자신의 논리 속에서 타자와 타인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분화된 다양한 부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는 이 폐쇄성과 획일성이란 적(敵)과의 전면적인 싸움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민중이 열린 공간 속에서 저항과 비판이란 참여를 통해 자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연합과 연대의 네트워크 속에서 참여하고 비판하는 시민 정치의 목적인 것이다.

 

민주적인 시민사회는 단일의 자치 과정이 아니라, 수많은 다르고 일원화되 지 않은 과정을 통하여 그 구성원들에 의해 조절되는 사회이다.163)

 

월쩌의 현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치의 상을 그려 볼 수 있다. 우선, 월쩌에게 현실은 다양한 의견과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대결과 화합 속에서 생활해 나가는 장소였다. 그것은 순수한 이론의 세계도, 투명한 세계도 아니었다:

 

행동은 사회 변화의 진리 이론에 의존할 수도 없고 또한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실용적인 이론 혹은 이론 밑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의견 체 계와 논증 즉, 적어도 우리가 진리라고 믿지 않더라도 모순되지 않는 것 말 이다.164)

 

이런 불투명한 세계에서는 항상 의도와 결과가 불일치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 저변에 흐르는 현실의 긴장 관계 때문이었다. 이것을 월쩌는 미국 공산당 조직과 그 구성원간의, 국가 조직․ 관료와 시민간에 그리고 노동자 농민 대중과 직업 혁명가간의 관계 등에서 체험했던 것이다. 이 긴장관계속에서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개방성은 폐쇄성으로 흐르고 대중의 봉사자는 영웅으로 그리고 국민의 봉사자인 관료제는 폭군으로 변한 것이다. 그 의도의 선함과 도덕이 정치세계속에서 악함 또는 부도덕으로 불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월쩌는 문제를 현실과의 대화 속에서 얻은 지혜로 하나하나 풀어 나간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무엇인가? 혁명이건 개혁이건, 참여 정치건 대의 정치건 그 실제 운영이 대다수 시민 구성원들과 동떨어진 채 이루어지고 있는 큰 정치165)인 것이다. 이제 그 구성원들과 담지자들이 소외되어 있던 정치를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 일반 시민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동체와 공적 공간, 그리고 열린 공간 속에서의 정치이고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연합과 그 네트워크 속에서 참여하는 정치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다시 큰 정치로 즉, 엘리트와 전문가 그리고 참여자들만의 정치로 돌아갈 위험을 직시했고, 또한 작은 정치의 강조 하에 국가권력의 약화로 경제 권력과 같은 다른 사(私)권력이 강해질 수 있음을 간파했다. 이에 그는 억압으로 다가오지 않는 국가와 자원의 재분배에 이바지하는 국가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참여 정치는 대의정치와 항상 함께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것 또한 정치 세계의 열린 공간의 비예측성166)을 천명한 것으로, 시민의 정치와 시민을 위한 정치의 융합과, 참여의 정치와 보는 정치 그 중간의 사이의 정치를 주장한 것이다.167) 이것은 정치 세계의 복잡성과 모순, 긴장관계속에서 우리 주위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큰일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직접 자유롭게 참여하는 가운데 소아병적 영웅주의를 경계하며 비참여자들도 존중하는 참여와, 저항의, 그리고 비판의 정치가 바로 끊임없는 의사 소통과 자기성찰속에서 비판을 요구하는 ‘운동’으로서의 정치인 것이다.

 

 

 

 

 

 

 

 

 

 

 

 

제 6 장. 결론

 

우리는 아렌트의 공론장 개념을 통해, 정치는 우리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역동성과 관계성에서 오는 불명확성과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는 열려진 과정과 공간이었다.

하버마스를 통해서는 서구 정치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던 공론장의 생성,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근대 자유주의 공론장의 태동과 발전을 통하여 새로이 떠오르는 시민층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박애를 그 이념으로 하여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을 무기로 하는 공론장을 구성하고, 그곳을 통해 기존의 왕권과 봉건 권력에 대항해 근대 입헌 국가를 설립하고, 그것을 통해 공론장과 그 구성원의 자격을 확대하고 제도화하였음을 보았다. ‘의지’의 정치를 ‘이성’의 정치로 바꾼 것이었다.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여러 정치 투쟁 속에서 정당성을 지닌 국가가 제반 문제들을 흡수함으로써 개입주의 복지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정치 이념의 제도화의 결과로 자원을 독점하고 공적 부조와 복지 제공 등을 매개로 사적 부문에 침투한 국가는 거대 방송 기업 등으로 대표되는 조합 권력과 함께 공론장과 열린 공간을 사사화시켰고, 그 결과 공론의 정치를 밀실의 정치로 만들어 버렸다. 이성(ratio)의 이념이 제도화되어 의지(voluntas)의 정치로 변한 것이다. 이에 하버마스는 다시 이 의지(voluntas)를 다시 이성(ratio)으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과 동일한 과정은 아니다. 이전의 것이 전혀 다른 정치제도와 그 이념에 대한 전면적 싸움이었고 그것을 통한 새로운 이념과 제도의 건설이었다면, 이제는 이 건설과 그것의 확립 운영속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와 모순에 대처하는 것이다. 초기 자유주의 공론장과 그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제도화는 민주주의 이념과 그 가치를 확립 재생산해 내었다. 그러나 그 제도화는 시간 속에서 곧 화석화되었고, 어느덧 지배자와 폭력으로 다가왔다. 적나라한 폭력 관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제도였으나, 이 제도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적나라한 역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의 활성화168)며 그 속에서 정당 사회단체들의 참여와 활성화를 통한 권력의 분점을 꾀한 것이다.169) 이것은 또한 월쩌가 논파했던 화석화되어 그 봉사자에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복지국가 관료 체계에 저항하는 열린 공간의 정치이다. 지역 공동체와 시민사회의 기초인 여러 연합․ 단체․ 그룹들의 자치와 참여로 이루어지는 민중에 의한 권력의 두 번째 점유를 통한 비판, 저항, 자치, 참여의 정치, 시민의 정치인 것이다.170)

그들은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무엇이냐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171)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의 모순을 묻는다. 이 모순 속에서 그 해결 방안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나간다. 공동체의 성원들과 문제를 같이 숙고해 나가고, 그 해결을 찾아 나가는 곳이 공론장이며, 우리 생활 주변의 각 단체들 간의 연대인 것이다. 공론장은 자신의 권위를 최고라고 주장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지 보호되고 유지되어야 할 최소한의 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계획 속에서 모든 것을 담고자 자세한 설계도를 가지고 해나가는 것이 아닌, 조금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고쳐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과정으로서의 정치인 것이다 .

머리 속의 주관적 자유는 얻으려는 순간 현실의 구속으로 작용한다.172) 자유는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 속에서 타인과 관계하는 중에 발생하는 조그만 공간 속에서 기꺼이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소극적 정의’를 행하는 정치의 ‘적극적 행동’이 필요하다. 정치(학)는 정치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세계속에서 오류를 피하게 해주는 것이다.173) 이것이 바로 끊임없는 비판과 참여, 운동으로서의 정치인 것이다.

 

 

 

 

 

참고문헌174)

 

 

1. 한나 아렌트의 저작

 

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 Press, New York, 1973)

——–, On Violence, (Harcourt, Brace & World, New York, 1970)

——–, Between Past and Future, (Penguin Book, New York, 1993)

——–, Men in Dark Times, (Harcourt Brace Jovanovich, New York, 1968) (국역: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권영빈 역, (문학과 지성사, 1984))

 

 

2. 하버마스의 저작

 

J. Habermas, Toward rational society, (London, Heinemann educational books, 1971)

———-,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Cambridge, The MIT press, 1989)

———-, The public sphere; an encyclopedia article, In Stephen Eric Bonner and Bouglas Mackay Kellner.(eds), Critical Theory and Society; a reader, (London, Routledge, 1989)

———-, Theory and Practice, (Boston, Beacon Press, 1970) (국역: 이론과 실천, 홍윤기․ 이정원 옮김 (종로서적, 1986))

 

 

3. 월쩌의 저작174)

 

1) 단 행 본

Michael Walzer, Obligations; Essay on Disobedience, War and Citizenship, (Cambridge, Mass. 1970)

————-, Just and Unjust Wars, A Moral Argument with Historical Illustrations, (New York, Basic Books, 1977)

————-, Radical Principles; Reflections of an Unreconstructed Democrat, (New York, 1980)

————-, Spheres of Justice, A Defence of Pluralism and Equality , (New York, Basic Books, 1983)

————-, Interpretation and Social Criticism, (Cambridge, MA, Harvard Uni. Press, 1987)

————-, Regicide and Revolution, Speeches at the Trial of Louis xvi (New York, Columbia Uni. Press, 1992)

 

2) 논 문

Articles of Dissent

Michael Walzer, The Travail of the U.S Communists (Fall, 1956)

————-, Hungary and the Failure of the Left (Spring, ’57)

————-, Politics of the Angry Young Men (Spring, ’58)

————-, When The Hundred Flowers Withered. A Chronicle of Freedom and Repression (Autumn, ’58)

————-, Education for Democratic Culture (Spring, ’59)

————-, The American School (Summer, ’59)

————-, A Cup of Coffee and A Seat (Spring, ’60)

————-, A Place of a Hero (Spring, ’60)

————-, The Politics of the New Negro (Summer, ’60)

————-, Politics of Non-Violent Resistance (Fall, ’60)

————-, Classless Education in Class Society ? H. Brand. Replies; M.Walzer (Winter, ’60 )

————-, The Young Radicals; A Symposium (Spring, ’62)

————-, The Mood and The Style (Winter, ’62)

————-, A Modest Proposal; King and Reuther for ’64! (Autumn, ’63)

————-, In Defence of Spying(Autumn, ’63)

————-, The Academy. A Special Issue (Winter, ’64)

————-, The Only Revolution – Notes on the Theory of Modernization (Autumn, ’64)

————-, Labor in Britain; Victory and Beyond (Winter, ’65)

————-, Comment on Vietnam; The Costs and Lessons of Defeat (Spring, ’65)

————-, American Intervention and The Cold War (Autumn, ’65)

————-, Democracy and The Conscript (Jan-Feb, ’66)

————-, Options for Resistance Today (May-June, ’66)

————-, On the Nature of the Freedom (Nov-Dec,’66)

————-, 1. Moral Judgment in Time of War

2. Anti- Communism and The CIA (May-June, ’67)

————-, The Condition of Greece – Twenty Years after The Truman Doctrine (July-August, ’67)

————-, Civil Disobedience & “Resistance” (Jan-Feb, ’68)

————-, Politics in the Welfare State. Concerning the Role of the American Radicals (Jan-Feb, ’68)

————-, A Day in the Life of a Socialist Citizen. – Two Cheers for Participating Democracy (May-June, ’68)

————-, Students and The Draft (May-June, ’68)

————-, Corporate Authority and Civil Disobedience (Sept-Oct, ’69)

————-, A Journey to Israel. Reports from The Middle East (Nov-Dec, ’70)

————-, Violence. The Police, The Militants, and The Rest of Us (April, ’71)

————-, “Citizens’ Politics” – How to do it (June ’71)

————-, Notes for Whoever’s Left (Spring, ’72)

————-, In Defence of Equality (Fall, ’73)

————-, Watergate Without The President (Winter, ’74)

————-, Israel Policy and The West Bank (Summer, ’76)

————-, Thoughts on Democratic Schools (Winter, ’76)

————-, The Election; Lessons & Rewards ? (Winter, ’77)

————-, Vietnam and Cambodia (Fall, ’78)

————-, The Pastoral Retreat of The New Left (Fall, ’79)

————-, So whom are you going to vote for ? In a bad time (Fall, ’80)

————-, The Courts, The Elections, and The People (Spring, ’81)

————-, Socialism and The Gift Relationship (Fall, ’82)

————-, On Failed Totalitarianism (Summer, ’83)

————-, The Politics of Michel Foucault (Fall ’83)

————-, Comitment & Social Criticism; Camus’s Algerian War (Fall, ’84)

————-, Replies(To the Comment about above Article) (Fall, ’84)

————-, Dissent at Thirty (Winter ’84)

————-, Were we wrong about Vietnam ? With Irving Howe (Fall, ’85)

————-, What Terroism – And what Isn’t ? (Summer, ’86)

————-, Pleasures & Costs of Urbanity. Public Space. A Discussion on the Shape of our Cities (Fall ’86)

————-, Why not Jackson ? (Summer, ’88)

————-, Socializing the Welfare State (Summer, ’88)

————-, Ambigious Legacy of Antonio Gramsci (Fall, ’88)

————-, The Critic in Exile (Spring, ’89)

————-, The State of Political Theory. Introduction (Summer, ’89)

————-, … And with Fingers Crossed (Spring, ’90)

————-, A Credo for this Moment (Spring, ’90)

————-, The Idea of Civil Society (Spring ’91)

————-, The New Tribalism (Spring, ’92)

————-, Scenarios for possible Lefts (Fall, ’92)

————-, Replies (To J. B. Rule’s “Tribialism and the State”) (Fall, ’92)

————-, Editor’s Page (Fall, ’93)

————-, Exclusion, Injustice, and The Democratic State (Winter, ’93)

————-, Multiculturalism and indvidualism, (Spring, ’94)

 

그외의 논문

————, The Communitarian Critique of Liberalism, Political Theory, V18, N1, Feb. ’90

————, Philosophy and Democracy, Political Theory, 9, 3, August, ’81.

4. 기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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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olitical understanding of the public sphere

— Focusing on H. Arendt, J. Habermas, M. Walzer

 

 

Kim, Kyung-Hee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troduce the theory of the public sphere. Politics is thought of as a kind of great work which is foreign to the common, ordinary people(the masses) and is made by certain power groups and state institutions. In contrast to this perception, the theory of the public sphere argues that politics is a product of the interplay of speech, debate and action.

This study consists of three parts : Arendt’s public realm, Habermas’s public sphere, and Walzer’s political interpretation of the public sphere(space).

According to Arendt, the public realm is a potential space around us which can be shaped by our speech and action which in turn is the product of collective work and need, etc. If the equal action and speech of the participants is impeded, then the public sphere will collapse. The public sphere can be characterised as experiencing periodic cycles of collapse and rebirth like a living open space.

Habermas focuses upon the living public sphere in a historical context. He describes the birth, development, and disappearance of the modern liberal public sphere. He understands the public sphere as a voluntary association where the citizens interact and as the essence of the politics. It was the liberal bourgeois public sphere grounded in these voluntary associations that destroyed the feudalism and the absolutism (the secret politics) and institutionalized the idea of human freedom and equality. But in the welfare state, characterized by the monopoly of resources and the public aid, a public forum for rational and critical debate disappears and is replaced by the representative and manipulative work of bureaucracy and corporate powers. Against them Habermas contends that the revitalization of the public sphere requires active participation in assemblies and associations, including the institutions of the political realm and the economic realm.

Walzer argues that the politics in the open space resists and criticizes the bureaucratic and elitist system of the welfare state, which transforms itself from a servant of the people into their dictator. Critical, insurgent, and participatory politics can be created by the self-determination and participation of associations, groups and people that make up the foundation of the local community and civil society. The politics of the public sphere is not to be found simply in concrete policies and institutions ( a great politics), but is constantly at around us. The public sphere is always interested in actual problems . It is the place where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discuss their problems together and try to solve them.

The public sphere cannot maintain itself as an absolute power. It is a minimal and contested space that has to be defended and maintained. The public sphere concerns itself not with grand decisions shaped by select individuals acting in isolation from the people(the so-called great and big politics made by the master plan), but rather in the endless movement of ideas and actions that seek answers to the problems facing society.

 

 

 

 

 

 

 

 

Key words : public sphere, publicity, public debate, action, participation, welfare state, private sphere, public sphere in the world of letters, public sphere in the political realm, resistance, open space, revitalization of the public sphere, refeudalization of the public sphere, politics, speech, secret politics, power, civil society, mass, citizen, sa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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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유주의 전통 독립혁명 이후 미국 정치사상의 해석,루이스 하츠 ,나남, 2012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 독립혁명 이후 미국 정치사상의 해석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 339
루이스 하츠 지음 | 백창재, 정하용 옮김 | 나남 | 2012년 12월 20일 출간

책소개

이 책은 미국 독립전쟁 이후 미국 역사의 전 과정을 섭렵하면서 로크적 자유주의라는 강력한 단일의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유럽적 봉건주의, 남부의 반동, 사회주의, 그리고 일부 낭만주의적 일탈과 회의 등 어떠한 도전이나 저항도 결국은 미국 자유주의라는 강력한 신념 앞에서 어떻게 좌절되고 흡수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소개

저자 : 루이스 하츠

저자 루이스 하츠(Louis Hartz, 1919~1986)는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에서 러시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성장하였다. 1940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946년 동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6년 하버드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1974년 신경쇠약으로 퇴직하였다.

역자 : 백창재

역자 백창재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자 : 정하용

역자 정하용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경희대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ㆍ옮긴이 머리말 7
ㆍ머리말 13제1부 봉건제와 미국의 경험 
제1장 자유주의 사회의 개념 23
1. 미국과 유럽 23
2. 정신적 틀로서의 “자연적 자유주의” 26
3. 자유주의 사회의 역동성 41
4. 단일요인의 문제 48
5. 유럽에 대한 함의 51
6. 혁신주의 학풍 56

제2부 신세계의 혁명
제2장 1776년의 시각들 65
1. 헤브라이즘: 선민 65
2. 유토피아, 권력, 그리고 역사 관념 69
3. 승리한 중간계급의 정신 84
4. 유럽식 투쟁으로부터의 도피 99

제3장 미국의 “사회혁명” 103
1. 내적 갈등의 유형 103
2. 봉건잔재, 민주적 자유주의, 그리고 대니얼 셰이즈의 문제 107
3. 연방주의자들의 허구적 세계 116

제3부 민주주의의 대두
제4장 휘그의 딜레마 127
1. 잭슨 민주주의, 7월혁명, 제1차 개혁법 127
2. 휘그 진보주의의 퇴화 136
3. 귀족정의 닻을 찾아 142
4. 대중정부에 대한 공격 147
5. 민주자본주의의 개념 152

제5장 미국 민주주의자: 헤라클레스와 햄릿 155
1. 사회적 이종교배와 민주주의자의 심리 155
2. “귀족”, 농민, “노동자” 160
3. 개인주의적 공포: 다수의 문제 170
4. 자본가적 욕망: 양심과 탐욕 176
5. 일치성의 문제 182

제4부 남부의 봉건적 몽상 
제6장 반동적 계몽주의 189
1. 자유주의 사회 속의 보수주의 189
2. 헌법: 칼훈과 피츠휴 204
3. 인종, 종교, 그리고 그리스적 이상 214
4. 망각과 패배 219

제7장 “자유사회”에 대한 성전 225
1. 봉건적 후견주의와 사회과학 225
2. 미국의 콩트: 실증적 형이상학 231
3. 토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흥주의 237
4. 반동적 계몽주의, 휘그주의, 민주자본주의 이론 245

제5부 호레이쇼 앨저의 세계
제8장 새로운 휘그주의: 민주자본주의 251
1. “미국의 발견”: 매혹과 공포 251
2. 억센 개인주의와 국가권력 260
3. 성공과 실패의 이론 269
4. 동조의 문제 276

제9장 혁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279
1. 미국의 자유주의 개혁 279
2. 혁신주의의 긴장 289
3. 황야의 사회주의 296
4. 역사 분석의 문제 301

제6부 공황과 세계적 개입
제10장 뉴 딜 311
1. 자유주의 개혁의 승리와 변형 311
2. 유럽의 루스벨트 319
3. 위축된 휘그의 전략 325
4. 마르크스주의의 실패 332

제11장 미국과 세계 339
1. 외교정책과 국내적 자유 339
2. 제국주의: 브라이언과 팽창주의자들 343
3. 제1차 세계대전과 1차 적색공포 350
4. 미국과 러시아 360

ㆍ옮긴이 해제 369
ㆍ주석 403
ㆍ찾아보기 415

책속으로

미국 자유주의와 유럽 자유주의 간의 이러한 연관성들이 그간 간과되었던 이유는 찾으려고만 한다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유럽식의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작동한 유럽식의 자유주의 작동메커니즘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러한 작동메커니즘은 사회적 적대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유럽의 자유주의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들어낸 적들을 통해서이다. 자유주의자의 적들을 미국식으로 제거해버리고 나면, 자유주의자는 전혀 자유주의자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심지어 1840년 이전의 휘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 점에 관한 한 당시의 휘그들을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얼핏 보아서는 관련성을 찾기 힘들지만, 맥컬레이(Thomas Babington Macaulay)에게서 웰링턴 경(Duke of?Wellington)을 제거하면 본질적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남게 된다. 미국의 휘그들이 해밀턴식 엘리트주의를 포기하고 호레이쇼 앨저(Horatio Alger)식 정서와 “미국주의”를 발견하게 된 1840년 이후에는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과제가 보다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이 결국 정치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앨저주의와 “미국주의”는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활용할 수 없는 사회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토리주의의 부재라는 문제는 미국의 공화파를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반동적 자유주의자들이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신지롱드당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나아가 휘그주의 전통이 미국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이념적 형태로 인해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더보기

출판사 서평

이 책에서 저자가 분석한 핵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미국과 연관하여 떠올리는 자유와 자유주의가 지니는 야누스적 모습이다. 절대화된 로크, 절대화된 자유주의가 미국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즉, 절대적 자유주의의 합의가 미국 사회의 심연에 놓여 있는 이념적 합의이다. 로크의 자유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로크의 자유주의를 반대할 수 없는 자유주의가 문제이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복고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에서 진보나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적 예외성의 토양에서 성장하고 변질되어 온 미국만의 자유주의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인들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신자유주의적이든 신보수주의적이든 간에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적 일체성’, ‘자유주의적 독재’이다. 반세기도 전에 저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독재의 세계적 전개를 우려하여 미국에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주문한 바 있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자유를 희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저자의 질문은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의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울리는 외침이다

민주주의론 강의 1, 2

민주주의론 강의 1, 2

안승국 외역 지음 | 인간사랑 | 1995년 08월 01일 출간

민주주의론 강의 1

001. [민주주의의 원리와 이념의 변화]
002. 탈형이상학과 민주주의/프레드 달마이어
003.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포스트모던적 재정립/샹탈 무페
004.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적 재성찰/스티븐 루크스
005. 민주주의의 경제적 모순/사무엘 브리탄
006. [민주주의론의 새로운 방향]
007. 아렌트의 평의회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적 논의/존 시턴
008. 참여민주주의의 비교론적 고찰/조엘 웰프
009.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론과 마르크스주의적 민주주의론/데이비드
010. 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론의 전망/배리 힌데스
011. [세계화와 민주주의]
012. 범세계정치와 민주주의/앨런 길버트
013. 현실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스티븐 크라스너

민주주의론 강의 2

001. 유럽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재성찰/프랭크 윌슨
002. 국가역할의 재조명/볼프강 뮐러, 빈센트 라이트
003. 신사회운동의 제3국면/칼 베르너 브란트
004. 초국가민주주의와 시민참여/로버트 A. 다알
005. 선거형태의 변화와 정당정치/고든 스미스
006. 신정치운동과 정치 지형의 재구성/페르디난드 뮐러 롬멜
007. 정책결정과 압력단체의 역할/마틴 스미스
008. 유럽통합의 정치적 한계/헬렌 왈라스
009. 규제완화의 정치경제:범국가적 확산과 정책변화/필립써니
010. 유럽공동체의 초국가적 환경정책/안젤라 리베라토데
011. 유럽 노동정치의 새로운 분석틀/캐틀린 텔덴
012. 복지국가의 위기와 전망/리차드 패리

주권개념의 동양적 기원, 존 홉슨, 2009

Provincializing Westphalia: The Eastern origins of sovereignty

John M. Hobson
Department of Politics, University of Sheffield, Elmfield, Northumberland Road, Sheffield S10 2TU, UK.
E-mail: j.m.hobson@sheffield.ac.uk

Abstract
This article critiques the ‘Westphilian narrative’ of the sovereign state.
The dominant Eurocentric account assumes that the sovereign state emerged through a series of developments that unfolded endogenously within Europe, none of which were influenced or shaped by impulses that emanated from the East or from the non-Western world. Having outlined the various Eurocentric theories of the rise of the sovereign state, the bulk of the article forwards a non-Eurocentric alternative narrative. While accepting that there were multicausal economic, discursive, political and military foundations to sovereignty, I argue that each of these was significantly enabled by Eastern influences, in the absence of which the sovereign state might not have made an appearance within Europe. In the process, I suggest that the rise of the sovereign state occurred during the era of, and through the impact of, ‘Oriental globalization’, thereby recas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sovereignty and globalization more generally.
2009-provincializing-westphalia-the-eastern-origins-of-sovereignty [PDF]

스키너의 공화주의: 자의적 권력의 부재와 자기소유권으로서 자유

V. 스키너의 공화주의: 자의적 권력의 부재와 자기소유권으로서 자유

스키너는 이러한 페팃의 주장을 받아들여 최근 자유를 ‘자의적 권력의 부재’라고 재규정했다. 언제라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인간의 선의에 의해 당장은 간섭받지 않는다고 해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인간이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열등한 인간은 늘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인간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기 스스로 검열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대하고 자비로운 전제군주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자기 아래에 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고 또 기질 상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에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스키너는 공화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발상을 거부했다고 단언한다.29) 이러한 관점에서 스키너는 공화주의 자유론은 인간의 자유를 논할 때 먼저 그 인간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적인 개인으로서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는 그 어떤 상위자도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에서 평등한 지위를 누리는 것을 자유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공화주의적 자유는 그 구성원들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자치를 실현하는 자유 공동체, 자유 국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30)
그리하여 자유주의는 자유를 개인에게 주어진 재산 같은 것으로서 정부가 간여하는 것을 삼가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공화주의는 자유를 정치적 성취로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유덕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행동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의무에 앞서 권리를 우선시 하지만 공화주의는 반대로 권리에 앞서 의무를 우선시한다고 스키너는 주장한다.31)
그러나 인간들은 의무를 소홀히 하고 권리만을 앞세우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서 공화주의자들은 공동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늘 시민들에게 공공정신으로 깨어있기를 요구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문제점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스키너는 자유주의의 그러한 낙관론이 오히려 자유를 상실하게 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고해서 스키너가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를 자기실현이라는 적극적 자유라고 보는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페팃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단지 공동선의 추구가 지유와 양립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를 비판할 뿐이다. 공동선의 추구를 통해 자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를 누리기 위한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32)
스키너는 이러한 공화주의 자유론에 기초해 영국 혁명 당시 벌어졌던 푸트니 논쟁의 핵심이었던 투표권 문제를 새롭게 해석한다.33)
그 논쟁에서 수평파의 대표들은 기본적으로는 보통선거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들은 선거권을 자연권이 아니라 사회권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하인, 임금 노동자, 그리고 구호품 생활자들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논쟁의 상대였던 크롬웰 일파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수평파들은 보통선거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동의 없이 어떤 정부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가장 가난한 잉글랜드인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논쟁에 참여한 수평파 대표들은 동료들과는 다른 주장을 한 것일까?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맥퍼슨은 수평파도 기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4)
즉 임금이나 구호품을 받아 생활하는 인간들은 이미 그것을 받은 것으로 그들의 권리를 이미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이 수평파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키스 토머스는 그 문제에 대한 수평파의 일관된 원리 같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했다.35)
마치 범법자에게는 투표권이 없다는 생각을 당연시 했던 것처럼, 그저 하인, 도제와 같은 부류는 투표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평파들의 저술에서 인간의 생득권이 어떤 조건에서 유보될 수 있는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스키너는 자신의 공화주의 자유론으로 맞선다. 즉 수평파와 이에 맞섰던 크롬웰 일파 모두 공통적으로 공화주의 자유론을 신봉하고 있어서 타인의 의지에 종속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이미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하인, 도제, 구호품 생활자들은 ‘자발적인 예종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미 자유라는 생득권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스키너는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투표권의 기준을 크롬웰 일파는 재산소유권에 수평파 다수는 생득권에 두었다는 데서 양편의 차이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틀렸다고 평가한다. 그는 예를 들어 크롬웰 편에서 그 논쟁에 가장 치열하게 참여했던 이레턴(Ireton)도 재산을 소유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는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으려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재산이 그 독립성의 근거일 수 있다고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해링턴과 같은 당시 공화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스키너의 이러한 주장은 포콕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포콕은 공화주의자들의 재산관이 결코 부르주아적 재산관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즉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은 도덕적 정치적 인격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 결코 물질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이다.36)
스키너는 이러한 관점에서 수평파가 반대한 것은 ‘모든 남성들에게 무조건 투표권을 주는 것’ (universal male suffrage)을 반대했지 ‘모든 남자다운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 (universal manhood suffrage)은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남자다운 남자란 타인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남자를 말한다.
따라서 수평파는 하인들뿐만 아니라 주교들마저도 남자다운 남자가 아니라고 분류했다는 것이다. 더나가 수평파 가운데는 하인들이나 구호품 생활자들도 이성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어떤 다른 재산이 없어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있었음을 말하면서, 스키너는 결코 수평파가 단순히 재산 소유 여부를 투표권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재삼 강조한다. 재산소유권이 아니라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이 투표권의 기준이었다는 것이 스키너의 지론이다. 여기서 자기소유권이란 타인의 선의에 의지해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즉 자신이 한 행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일 수 있는 남자들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즉 자유인의 지위를 가늠하는 기준이 재산이 아니라 독립적 인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세기 선거권 개정 논란 속에서 글래드스톤파의 선거권 확대론에도 영향을 미쳤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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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Quentin Skinner, “Freedom as the Absence of Arbitrary Power” in Cécile Laborde and John Maynor, ed. Republicanism and Political Theory (Oxford: Oxford, Blackwell, 2008), 83-101.
30) Quentin Skinner, 앞의 책, 23, 69f.
31) Quentin Skinner, “ The Republican Ideal of Political Liberty”, in Gisela Bock, Quentin Skinner and Maurizio Viroli, eds. Machiavelli and Republica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7-309,
32) Ibid., 293, 304-306, 308-309; Quentin Skinner, 앞의 책, 32 n103
33) Quentin Skinner, “Rethinking Political Liberty”. Historical Workshop Journal, 61 (2006), 160-165.
34) C. 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107-159.
35) Keith Thomas, “The Levellers and the Franchise”, in Gerald Edward Aylmer, ed. The Interregnum: The Quest for Settlement 1646-1660 (London: Macmillan ,1972), 57-78.
36) J. G. A. Pocock, “Radical Criticisms of Whig Order in the Age of between Revolutions”, in Margaret Jacob and James Jacob, ed. The Origins of Anglo-American Radicalism (London, 1984),37.
37) Kari Polanen, “Voting and Liberty: Contemporary Implications of the Skinnerian Re-thinking of Political Liberty” Contributions to the History of Concepts 3 (2007)26.

누가 자유주의를 두려워하랴? [PDF]

역사와 담론 第54輯, 273~298쪽(총26쪽)
영문제목: Who’s Afraid of Liberalism?
저자: 조승래(Cho Seung-Rae)

포콕의 공화주의: 덕과 재산 균등의 공화국

포콕의 공화주의: 덕과 재산 균등의 공화국

오늘날 서구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것은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탁류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지적 반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그러한 사회현실을 초래한책임을 자유주의에 묻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인간들의 정치 공동체인 국가를 공화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공화국의 의미를 최초로 규정한 고대 로마 공화국의 철학자 키케로에 따르면 공화국은 공동의 이익이 구현되어야 하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이다. 그는 그것을 또한 ‘인민의 것’ (res populi)이라고도 규정했다. 그것은 국가는 공동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법체계에 동의한 다수인민의 결속체라는 뜻이다.1)
따라서 공화국에서 인간들은 공동의 일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시민(혹은 공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 이탈리아 역사가 프랑코 벤튜리가 언
명했듯이 공화주의는 이렇듯 특정한 국가체제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념이다.2)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피폐한 사회 현실에 대해 공화주의 담론이 촉구하는 것은 국가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시민들은 공동의 일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시민정신을 고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화국은 공동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의 지배가 법치를통해 실현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공동의 지배라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공의 일에 대한 참여와 심의를 통해 공동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법치는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참여한 과정에서 이성적 심의를 통해 제정된 성문법에 따라 지배하고 그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뜻한다. 따라서 공화국은 자신의 일보다 공동의 일을 더 우선시하는, 적어도 공동의 일이 중요하다고 보는, 인간들을 그 구성원으로 해야한다.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연대가 곧 공화국이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 (혹은 공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에 근거한다. 즉 인간은 시민이 될 때 비로소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에대한 지성사적 연구를 이끈 포콕은 고대 그리스 이래 르네상스와 17세기 영국 혁명을 거쳐 18세기 미국 독립혁명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공화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인간의 인간다움은 자치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으로서 공공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덕을 발휘할 때 실현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공)민 윤리였다고 강조한다.3)
또한 포콕에 의하면, 근대 부르주아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재산의 무한정한 획득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정당화한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의 기능을 시민적 독립을 보장하는 것에 한정시켰다. 시민적 평등을 위협하는 재산의 독과점은 바로 인간을 예종의 사슬로 묶는 것이며 이것은 공동체를 부패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은 가장 인간적인 공동체인 공화국은 농지법에 의해 재산의 균등한 분배가 실현된 곳이라고 규정했다.
포콕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로 17세기 영국의 해링턴을 꼽았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역사를 통해 참여라는 덕과 농지법으로 구현되는 재산 균등의 원리가 공화국의 기초임을 역설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치명적인 위기를 ‘원로원과 인민 간의 끊임없는 적대감과 증오’에서 기인했다고 보았다.4)
비참한 지경에 이른 인민들은 공화국의 두 기본원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공적 지배 과정에의 참여와 농지법을 통한 토지의 균등분배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원리가 인민들에게 적용되는 방식이 명확하지 않고 부적절했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 원리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투쟁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5)
이러한 언명을 통해 해링턴이 의도한 것은 인민들의 평등한 참여와 분배에 대한 열망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공화국’인 로마가 불가피하게 노정할 수밖에 없었던 체제적 흠결을 강조해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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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cus Tullius Cicero, De Re Publica, 김창성 옮김, 『국가론』(한길사, 2007), 130-131 쪽.
2) Franco Venturi, 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71.
3) J.G.A.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an
Tradi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4) James Harrington, The Commonwealth of Oceana (1656) in J.G.A.Pocock, ed. The Political Works of James Harringt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272.
5) Ibid., 277.
6) Ibid., 180.

누가 자유주의를 두려워하랴? [PDF]

역사와 담론 第54輯, 273~298쪽(총26쪽)
영문제목: Who’s Afraid of Liberalism?
저자: 조승래(Cho Seung-Rae)

페팃의 (신)공화주의: ‘지배의 부재’로서 자유

IV. 페팃의 공화주의: ‘지배의 부재’로서 자유

지난 세기 공화주의 연구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필립 페팃이었다. 1997년에 간행된 페팃의 『공화주의: 자유와 정부에 관한 한 이론』(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는 1970-80년대를 풍미하던 존 포콕의 공화주의 연구의 맥을 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화주의를 규정함으로써 오늘날의 공화주의 연구와 담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포콕과 마찬가지로 페팃은 서양 정치 사상사에 19세기 이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더 나가 민주주의의 구현에 자유주의보다 더 공헌할 수 있는, 공화주의라는 이념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계보를 고대 그
리스 로마의 고전적 지식인들에서부터 시작해 르네상스 시기의 마키아벨리를 거쳐 17세기 영국 혁명기의 밀턴, 해링턴, 시드니와 같은 의회파 지식인들과 뒤를 이은 18세기 영국의 재야 반정부 지식인들과 미국 독립 혁명기의 제퍼슨과 같은 혁명가들에게 이어지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포콕이 공화주의의 핵심을 정치적 참여를 통한 인간의 자아실현이라고 규정한 것과는 달리, 페팃은 그것을 자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구현이라고 단언한다. 포콕이 그 원형을 아리스텔레스의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에 대한 논의에서 찾는다면, 페팃은 로마의 정치사상과 역사 서술 그리고 법에서 나
타나는 자유인 대 노예의 구분에서 찾는다. 굳이 명칭을 붙인다면 포콕의 공화주의를 아테네적 공화주의라고 한다면, 페팃의 그것은 로마적 공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페팃은 공화주의자들의 화두는 포콕이 말하는 덕이 아니라 자유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자유론의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화주의자들이 자유를 단순히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자의적 권력 혹은 자의적 지배와 그 가능성의 부재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자유는 오직 공동의 동의를 얻어 제정된 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유 국가 안에
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고 주장한다. 페팃은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를 ‘지배의 부재’ (non-domination)라고 규정하여 그것을 ‘간섭의 부재’ (non-interference)로서 자유주의적 자유와 극명하게 대립시킴으로써 학계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17)
또한 그는 공화주의적 자유가 일찍이 벌린이 규정했듯이 자아실현이라는 의미의 적극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그것을 적극적 자유라고 생각하는 포콕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18)
덕을 강조하는 포콕의 공화주의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참여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 개인적 선을 초월해 공동선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같은 공화주의의 핵심적 요소들은 오늘날 현대 사회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누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이 존재하며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만 인간이 인간다워진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거나 전제적 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19)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 위에서 페팃도 포콕의 생각과는 달리 공화주의자들이 자유를 논할 때 그것을 곧 정치적 참여를 통한 자아실현과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공화주의자들은 정치적 참여는 단지 자유를 누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페팃의 공화주의론은 공화주의를 현대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20)
즉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 공화주의에서 도구론적 공화주의로 공화주의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21)
페팃은 또한 자신과 같이 공화주의의 본질이 덕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논의였다고 주장하는 스키너와도 일정한 선을 긋는다.22)
스키너는 자유를 지배의 부재와 함께 간섭의 부재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지만, 자신은 단지 지배의 부재로만 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스키너는
간섭의 부재가 자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보는 반면, 페팃은 그것이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모두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는 공화주의 자유론의 핵심은 간섭의 부재 여부가 아니라 오로지 지배의 부재 여부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간섭받는다고 해서 언제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보아서도 안 되고, 또한 오직 간섭만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정당하게 제정된 법에 의해 간섭받는 것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는 지배자 혹은 지배 집단이 피지배자들에게 온정과 자비를 베풀어 간섭하거나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3)
그는 공화주의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주장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자유는 바로 이러한 지배의 부재로서 자유였다고 주장한다. 이 때 지배는 자의적 간섭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다시 한 번 공화주의적 자유가 벌린이 말하는 적극적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화주의자들은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남이 내 지배자가 되지 못하도록 어떤 체제와 제도를 갖추는 데 참여하는 것 그 자체가 자유라고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러한 체제와 제도를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이 그 입법 과정에 참여한 공동체의 법에 의해서만 지배받을 때 그리하여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다는 루소 식의 자유론을 배격한다. 페팃은 그러한 성격의 자유론을 공화주의 자유론이 아니라 공동체주의 자유론이라고 구별한다. 그는 이러한 공동체주의가 공화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공동체주의 철학자인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와 마이
클 샌들의 예를 들어 그들의 주장은 도덕의 과잉을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즉 덕과 자유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4)
그는 오히려 소위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사상가로 분류하는 로크의 자유에 대한 규정을 공화주의적 자유론의 대표적인 예라고 제시한다. 로크는 ‘자유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변덕스럽고, 불분명하고, 알 수 없는 자의적 의지에 예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로크가 비록 공화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자유에 대한 생각에서 만큼은 그 전통에 충실했다고 평가한다.25)
이러한 그의 언급은 벌린과 하이예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주의를 20세기의 전체주의와 연결시키려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페팃의 태도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26)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공화주의 자유론은 사회 민주적 기획의 일환이라고 맞선다. 즉 자신은 자유를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의 부재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정당한 민주적 입법을 통한 간섭마저도 자유의 이름으로 배격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은 간섭만이 그리고 간섭은 언제나 자유를 침해한다는 부을 공화주의자들이 어떻게 배격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옹호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
적한다. 17세기 공화주의자인 해링턴은 인민의 의지에 일치하는 것이고 지을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간섭도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부함으로써 잉글랜드 혁명을 정당화하였다. 18세기 공화주의자인 프라이스는 간섭만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적 지위에 처해 있으면 간섭을 받지 않아도 자유롭지 못 하다고 부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영국에 대한 저항을 옹호하였다. 노예는 아무리 인자한 주
인을 만나도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공화주의 법학자인 블랙스톤은 로크가 이미 언급했듯이 이렇게 제정된 법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견고하게 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러한 주장은 자의적 지배를 행사하거나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즉 자유 국가에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 혁명과 아메리카 혁명은 단지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 국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 인민들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홉스, 벤담, 린드, 펠리와 같은 사상가, 법학자들은 잉글랜드 혁명과 아메리카 혁명의 이와 같은 대의를 부정하면서 자유란 간섭의 부재일뿐이요 법도 그 어떤 행위들을 못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소위 민주 국가, 자유 국가에서 살던 전제 정부 하에서 살던 법이 금지하지 않는 것만큼만 자유롭다는 데서 매한가지라고 주장한다. 페팃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렇게 할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그러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상대적 무관심’으로 인해 자유주의자들은 지배에 근거한 ‘관계에 관대하다.’27)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빈곤을 해소하는 일, 안전을 제공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자유에 대한 관심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평등, 혹은 복지, 혹은 공리성’과 같은 가치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배의 부재로서 자유’는 여러 가치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다른 가치들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최고의 정치적 가치’라고 페팃은 주장한다.28)
이러한 논의를 통해 페팃은 왜 지배의 부재로서 공화주의 자유론이 오늘날 더 중요한 것인지 역설한다. 그는 노동자와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의 부재라는 것이다. 고용주나 남성 배우자들의 자비에 의해 그들은 간섭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얻어진 벌린 식의 소극적 자유는 언제라도 회수당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자유는 그들이 자유인의 지위를 구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는 정당한 입법 행위 등을 통해서 제도를 만듦으로써 자의적 지배 행위에 간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가 간섭의 부재만을 자유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의 도전을 피해 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폭로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러한 자유주의 자유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간섭의 부재를 자유의 충분조건은 물론 필요조건으로도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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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ichael Walzer, Spheres of Justice: A Defence of Pluralism and Equality (New York: Basic Books, 1983), 21-22.
17) 이하 페팃의 주장은 다음을 보라. Philip Pettit, 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Oxford: Oxford Univer읳하 페팃Pres Pett97, Rvi-50.
18) Isaiah Berlin, “Two Concepts of Liberty” in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118-172; J,G.A. Pocock, 같은 책 1993년 판, 553-583.
19) Richard H. Fallon, Jr., “What is Republicanism and is it Worth Reviving?” Harvard Law Review, 52 (1989), 1698-1699.
20) Melvin L. Rogers, “Republican Confusion and Liberal Clarification”,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34 n.7 (2008), p.800.
21) Shelly Burtt, “The Politics of Virtue Today: A Critique and a Proposal”,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1993), p.360.
22) 스키너의 자유론에 대해서는 Quentine Skinner, Liberty before Liberal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졸역,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 참조.
23) Philip Pettit, “Keeping Republican Freedom Simple, On a Difference with Quentin Skinner”, Political Theory, 30, 3 (2002), 339-356.
24) Philip Pettit, “Liberal/Communitarian : MacIntyre’s Mesmeric Dichotomy”, in John Horton and Susan
Mendus, ed. After MacIntyre, Critical Perspectives on the Work of Alasdair MacIntre (Cambridge:
Polity, 1994),176-204; “Reworking Sandel’s Republicanism”, Journal of Philosophy, 95, 2 (1998),
73-96.
25) Philip Pettit and Frank Lovett, “Neorepublicanism: A Normative and Institutional Research Program”,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12 (2009), 15.
26) 대표적으로 마이클 샌들은 페팃의 공화주의를 ‘길들여진’(tame) 공화주의라고 비꼬면서 그것으로는 자유주의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Michael Sandel, “Reply to Critics” in Anita L. Allen and
Milton C. Regan, Jr., ed. Debating Democracy’s Discontent, Essays on American Politics, Law, and Public Philoso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325-327.
27) Philip Pettit, 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1997), p.9.
28) Ibid., pp.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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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유주의를 두려워하랴?  [PDF]

역사와 담론 第54輯, 273~298쪽(총26쪽)
영문제목: Who’s Afraid of Liberalism?
저자: 조승래(Cho Seung-Rae)

목차

1. 포콕의 공화주의: 덕과 재산 균등의 공화국
2. 자유주의: 개인적 권리와 간섭의 부재로서 자유
3. 공동체주의: 덕과 공동선
4. 페팃의 공화주의: ‘지배의 부재’로서 자유
5. 스키너의 공화주의: 자의적 권력의 부재와 자기소유권으로서 자유
6. 어떤 공화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