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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물정치 -유령대중과 다중의 문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의 저자이자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수상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서 물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이해하는 물(物)정치Ding-politik는 Ding, thing을 그 어원인 모임 혹은 집회assembly로 해석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는 정독을 요하는 긴 논의 후에 자신의 물정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a)정치가 단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문제들이 서로 엮인 상태로 혼재하고 있을 때

b)객체가 물이 될 때, 즉 사실의 문제들이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에 길을 비켜주어 공동관계concern의 문제로 될 때

c)모임이 더 이상, 가상 의회를 건설하는 초기 전통에서의 기존의 구체globe나 돔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d)언어 손상, 인지적 취약성 및 온갖 종류의 장애에 의해 부과된 내적 한계들이 더 이상 부정되지 않고 인공보철물이 받아들여질 때

e)모임이 협의의 의회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고 정당한 모임을 추구하는 수많은 다른 아상블라주들로 확장될 때

f)모임이, 더 이상 신체, 리바이어던, 혹은 국가 등과 등가적이지 않은, 임시적이고 깨지기쉬운 유령대중(Phantom Public) 아래에서 이루어질 때

g)그리고 끝으로 정치가 연속의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되어 물정치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에 도입되는 등급의 리얼리즘realism이다.(p. 30;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을 포함하고 있는 한글번역문을 무시하고 다시 번역했다.-조정환)

 

 

라투르의 논의는 더 이상 신체로서의 민중이 불가능하고 의회는 물론이고 노동자들만의 평의회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며 재현과 매개의 가능성이 새로운 조건하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추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할 공통세계Common World가 무엇인가를 상상한 성급한 방식에 있다”(p. 29)는 단언은 이것을 증언한다.

 

신체, 리바이어던 방식의 모임을 통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중 개념은 라투르의 유령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하지만 다중 개념은 살을 통한 새로운 몸의 구축을 전망한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2부 참조) 이러한 다중 개념은 라투르가 인식하고 있는 시대 개념과 정치 개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라투르의 물정치 개념은 다중 개념이 빠지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선을 알려주면서 그것이 나아가야 할 침로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인간주의이다. 인간, 기계, 자연 등이 물Ding로서 서로 관계하고 얽혀드는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통찰이 필요하다. 둘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이성주의이다. 의회, 평의회의 방안은 이성에 의한 재현, 즉 이성의 궁전을 통한 재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제 물정치적 모임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언어장애, 인지장애 등 다양한 장애에 대한 승인 위에서 그것들을 배제하기는커녕, 그 장애에 인공보철물을 장착하여 보정하는 것을 정치의 본령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보정이자 치유로서의 정치) 셋째 정치가 단일한 공동체의 구축으로 구심화되지 않고 다양한 아상블라주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집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해산의 움직임까지 모으는 Commonwealth(공통체)의 구축으로 방향잡혀야 한다. 넷째 그러므로 다중은 하나로 묶인 실체적 대중이 아니라 유령 대중으로서 구성될 수 있다. 다중이 유령대중이라면, 그 주체는 진보와 연속이라는 연속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고 혁명과 대체라는 단절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는다. 라투르는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는 일련의 동시성으로서의 동거의 공간이 바로 그 유령대중의 활동공간이라고 말한다.(p. 29)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떤 진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시간의 화살이 앞으로 쏘아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적인 것이나 혁명적인 것과 같은) 매우 단순한 동거형태로부터 훨씬 더 충만한 동거형태로, 더욱더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는 동거형태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 29; 번역은 조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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