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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출간예정작 Commonwealth(공통체)와 강좌계획

『공통체』(Commonwealth, 2009)는 『제국』(Empire, 2000), 『다중』(Multitude, 2004)으로 이어져온 현대 자본주의 및 정치 분석 3부작의 마지막 권이자 그 결론에 해당한다. 『제국』에서 현대 세계의 정치적 구성을, 『다중』에서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를 분석한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공통체』에서 마침내 다중의 혁명과 정치적 조직화(즉 다중의 군주되기)의 문제를 다룬다. 인류의 삶의 생산 및 재생산의 점증하는 공통화와 일방주의적 신자유주의 통치의 모순이 폭발한 금융위기 및 경제위기 상황,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정치공백기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재산(소유)을 관리하던 정치형식이었던 공화국(republic)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고 가난한 다중들의 삶정치적 혁명과 그 혁명을 공통화하고 제도화할 공통체(commonwealth)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Commonwealth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지를 놓고 오래 고심을 했다. 흔히 국가, 공화국, 연방, 주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에서 사용되는 Commonwealth의 의미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Commonwealth는 국가를 의미하는 State와는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또Commonwealth는 책 전체가 근대 공화국, 즉 Repulic에 대한 비판이다. Commonwealth는 federation, 즉 연방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역시 비판적 입장에서 그러하다. Commonwealth는 제국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공통재common wealth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제도화할 몸체에 네그리와 하트가 붙이는 이름이다. 그것은 풍부한 다양성이 공통의 몸으로 조직될 정치형태이다. 이것은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community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탈정체성적인 방식으로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는 몸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Commonwealth를 ‘공통체(共通體)’로 옮기기로 했다. (물론 더 좋은 번역어 제안을 환영한다). 共通이 the common을 의미한다면 體는 그 공통적인 것의 다양성, 즉 豊(풍)의 내적 연관(骨, 골)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체’는 공통적인 것을 조직할 정치적 몸을 지시한다.

이 책은 1개의 서문, 여섯 개의 장, 6개의 보론(추론), 1개의 막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장들 외에 6개의 보론(추론)들도 나름대로의 집단적 독립성을 갖는다. 아직 한글본은 물론이고 영문본조차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는 다중지성의 정원 2009년 10월 첫째 주 목요일(10월 1일)부터 이 책, 네그리/하트의 『공통체』(Commonwealth)에 대한 강의를 시작할 것이다. 저자들의 책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적 비참의 제도를 코뮤니즘적 행복의 제도로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과 그 실현 경로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표인데, [제국]과 [다중]을 읽고 그 후속작이며 마지막 작품인 [공통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국]과 [다중]의 논의가  정치적 방향성에서는 아직 추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통체]의 핵심내용을 집약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강의는 아래와 같이 9강으로 구성된다.

1강 다중의 군주되기

2강 공화국(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다중)
3강 근대성(그리고 대안근대성의 풍경들)
4강 자본(그리고 공통재를 둘러싼 투쟁들)

5강 막간 1: 사건으로서의 삶정치, 삶정치적 이성, 홀린 사랑, 악과 싸울 힘

6강 제국이 돌아오다
7강 자본을 넘어서?
8강 혁명

9강 막간 2: 메트로폴리스, 문지방을 넘어서, 행복을 제도화하기1. 텍스트

브뤼노 라투르의 물정치 -유령대중과 다중의 문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의 저자이자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수상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서 물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이해하는 물(物)정치Ding-politik는 Ding, thing을 그 어원인 모임 혹은 집회assembly로 해석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는 정독을 요하는 긴 논의 후에 자신의 물정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a)정치가 단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문제들이 서로 엮인 상태로 혼재하고 있을 때

b)객체가 물이 될 때, 즉 사실의 문제들이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에 길을 비켜주어 공동관계concern의 문제로 될 때

c)모임이 더 이상, 가상 의회를 건설하는 초기 전통에서의 기존의 구체globe나 돔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d)언어 손상, 인지적 취약성 및 온갖 종류의 장애에 의해 부과된 내적 한계들이 더 이상 부정되지 않고 인공보철물이 받아들여질 때

e)모임이 협의의 의회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고 정당한 모임을 추구하는 수많은 다른 아상블라주들로 확장될 때

f)모임이, 더 이상 신체, 리바이어던, 혹은 국가 등과 등가적이지 않은, 임시적이고 깨지기쉬운 유령대중(Phantom Public) 아래에서 이루어질 때

g)그리고 끝으로 정치가 연속의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되어 물정치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에 도입되는 등급의 리얼리즘realism이다.(p. 30;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을 포함하고 있는 한글번역문을 무시하고 다시 번역했다.-조정환)

 

 

라투르의 논의는 더 이상 신체로서의 민중이 불가능하고 의회는 물론이고 노동자들만의 평의회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며 재현과 매개의 가능성이 새로운 조건하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추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할 공통세계Common World가 무엇인가를 상상한 성급한 방식에 있다”(p. 29)는 단언은 이것을 증언한다.

 

신체, 리바이어던 방식의 모임을 통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중 개념은 라투르의 유령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하지만 다중 개념은 살을 통한 새로운 몸의 구축을 전망한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2부 참조) 이러한 다중 개념은 라투르가 인식하고 있는 시대 개념과 정치 개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라투르의 물정치 개념은 다중 개념이 빠지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선을 알려주면서 그것이 나아가야 할 침로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인간주의이다. 인간, 기계, 자연 등이 물Ding로서 서로 관계하고 얽혀드는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통찰이 필요하다. 둘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이성주의이다. 의회, 평의회의 방안은 이성에 의한 재현, 즉 이성의 궁전을 통한 재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제 물정치적 모임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언어장애, 인지장애 등 다양한 장애에 대한 승인 위에서 그것들을 배제하기는커녕, 그 장애에 인공보철물을 장착하여 보정하는 것을 정치의 본령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보정이자 치유로서의 정치) 셋째 정치가 단일한 공동체의 구축으로 구심화되지 않고 다양한 아상블라주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집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해산의 움직임까지 모으는 Commonwealth(공통체)의 구축으로 방향잡혀야 한다. 넷째 그러므로 다중은 하나로 묶인 실체적 대중이 아니라 유령 대중으로서 구성될 수 있다. 다중이 유령대중이라면, 그 주체는 진보와 연속이라는 연속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고 혁명과 대체라는 단절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는다. 라투르는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는 일련의 동시성으로서의 동거의 공간이 바로 그 유령대중의 활동공간이라고 말한다.(p. 29)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떤 진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시간의 화살이 앞으로 쏘아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적인 것이나 혁명적인 것과 같은) 매우 단순한 동거형태로부터 훨씬 더 충만한 동거형태로, 더욱더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는 동거형태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 29; 번역은 조정환)

http://amelano.net/21135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양극적 경제는 오늘날 깊은 침체에 빠져있다. 이 경제의 견인차였던 미국과 일본의 현 상태가 보여주듯이 이 경제는 지난 20년간 짧은 붐과 긴 침체를 거듭해 왔으며 2008년 이후에는 공황 상태에서 헤매고 있다. 이것은 발전의 지체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보 흐름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너무 복잡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해독하고 예측할 능력이 부족할 때, 그래서 그것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을 때 공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황의 상황에서는 욕망이 투자를 거부하게 되고 이 투자 거부가 침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침체와 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성장의 재개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것을 위해서 금융화에서 산업화로의 유턴이 필요하다는 신케인즈주의 노선과, 지금까지의 금융화와 부동산 투기에의 호소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신보수주의 노선 사이의 논쟁이 가열되곤 한다. 과연 재산업화나 금융화/투기화가 현재의 일반적 공황상태를 극복할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경제적 붕괴는 경제적 사유, 경제적 도구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지배적 경제담론에서는 성장의 재개만이 불황의 극복 방안이라고 주장되지만 성장을 재개할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은 국가의 산업적 군사적 재정지출을 통해, 다시 말해 집단적 부채를 통해 극복되었지만 오늘날 집단적 부채는 붕괴나 전복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추가로 지불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아일랜드, 그리이스,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 십 조 달러의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세계 최대의 부채대국이 된 제국의 군주국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생태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확장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대기오염, 오존층파괴, 온난화 등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자연이 제공해 주던 삶의 안전 수준을 획득하는 데에만도 거대한 비용이 들고 있다. 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는 생태보존의 요구와 부단히 상충한다. 기후정상회담이 계속 겉돌고 빈소리로 일관되고 있는 현실은 이 사실을 증언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재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 요구가 실현 가능성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한 방안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생태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의 치료제로서 탈성장을 제안해 왔다. 그런데 탈성장은 지금은 성취해야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자 통증이다. 도처에서 국민총생산이 하락하고 있고 성장이 둔화되며 수요가 주저앉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축적원천으로 삼아온 지난 30년의 귀결이 바로 탈성장이다. 그렇다면 인지의 폐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인지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궁지에 몰린 지금 지금이야말로 인지의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을 위한 인지의 사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성장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적 침체depression와 심리적 우울depression의 중첩, 노동의 불안정과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에 만연된 심리적 불안감의 중첩이라는 병리적 현실에 대한 실제적 치유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치유작업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문화와 정동들의 재특이화를, 서비스 및 재화의 탈사유화를 필요로 한다. 지성은 축적을 위한 일반지성 형태, 즉 지성의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벗어나 재특이화함으로써 자유를 위한 공통지성, 즉 다중지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동도 한편에서도 중독, 다른 한편에서는 기피라는 두 얼굴의 일반감정 형태들에서 벗어나 존재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특이한 정동들을 구성해야 한다. 일반지성과 일반감정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인지적 기념비들의 창조를 통해 중독과 기피의 무력상태를 타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복과 사적 소유를 동일시하는 편집증에서 벗어나 인간적 저항의 자율지대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테크이지만 저에너지인 모델에 기초한 생산의 자율적 형식들을 실험하고 정치적 언어보다 치유적 언어로 말하는 습관을 조성하는 영구문화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사람들이 공황과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있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의 이 탈성장 경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냉소적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혁명은 재특이화의 길로 나아가는 다중들이 지금까지의 성장경제의 진실을 직시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스스로 돌보는 가운데 생성될 일종의 “치유적 전염 지대”(therapeutic contagion)를 확대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활성화될 이 치유적 문화혁명의 정치는 현재의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공포, 불안, 우울의 정서들을 역전시키면서 개체적 집단적 기쁨을 산출하는 정치이다. 스피노자는 수동적 슬픔의 경험에서부터 기쁨의 요소들(타당한 관념들과 적합한 정념들)을 추출하고 결합하여 그것을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공통관념의 정치학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게서 기쁨은 신체와 정신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는 정동적 자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쁨의 구축은 슬픔(공황, 조울, 불안)의 인지상태를 극복하게 하는 치유과정에 다름 아닌데 이 과정은 슬픔의 수동상태에서부터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될 요소들을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의 한 예를 네그리와 하트에 의한 가난과 사랑의 개념혁신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난에서 궁핍, 불행, 혐오만을 읽는 인지적 습관에 도전하면서 가난을 생산성과 가능성의 힘으로 번역하려 한다. 이들은 가난의 개념을 통해 임금 관계 안팎에서 형성된 광범위한 생산적 주체성을 파악하고자 하며 가난을 결여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 이주자들, 불안정노동자들은 분명 세계자본주의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이들이야말로 전 지구적인 삶정치적 생산 리듬의 내부에서 공통된 세계를 생산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힘임을 인지하려 한다.

사랑은 혁신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의 힘과 생산성을 탐구하는 또 다른 경로가 사랑에 의해 주어진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사랑은 가난과 발명에서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생성의 힘이라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사랑은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여 자유화의 과정을 향하도록 만드는 풍부함의 힘에 다름 아닌데,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사랑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우정의 개념과 완전히 겹친다.

만약 가난과 사랑의 재개념화가 특이함과 그것들의 공통되기를 추구하는 무기일 수 있다면 무엇이 가난과 사랑을 활성화하는 요소들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첫째 요소는 스피노자가 공통관념을 구축할 이성의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성의 힘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기쁜 수동들을 발견하고 또 발명함으로써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가능성을 구축해 나가는 인지적 혁신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세계자본주의가 확산시키고 공고하게 만든 편집증적이고 광신적인 관점을 해체시키면서 이성의 혁명적 열정이 역사의 언저리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배 권력들을 정복하고 그것의 부패한 제도들을 해체하는 물리적 정치적 행동이 동시에 필요하다. 재특이화는 결코 관념적 과정일 수 없고 물리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제도들, 문화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인지양식들을 감각적 행동으로 와해시키면서 특이성들의 새로운 성좌를 구축하는 것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조직하는 이 물리적 정치적 과정은 앞의 인지적 혁신에 기초해야 한다.

공통되기는 이 두 요소의 결합의 산물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새로운 군주로 구축하는 이 공통되기의 정치과정은 새로운 총체화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지배를 지엽적인 것으로,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것들이 더 이상 지배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마음들과 신체들의 연합 및 실제적 변형의 길이며 이를 기초로 한 인지적 신체적 치유의 길이다.

사적인 것, 공적인 것, 공통적인 것

앞선 글에서 Commonwealth의 후반부 키워드로 괴물과 웃음을 이야기했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개념을 꼽는다면 역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2003년에 고대와 이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도서관 개방운동을 고민하면서 짧게나마 공통적인 것을 사유했던 흔적이다. 당시 나의 고민은 점점 더 강하게 대학사회로 침투하고 있었던 사적인 것의 논리와 그것에 맞서 공적인 것을 내세웠던 도서관 개방운동 진영 사이에서 후자를 지지하면서도 공적인 것에 기댄 운동 논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고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칼럼 지면의 한계상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 글에서 시작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생각은 이후 코뮤니즘과 맑스주의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의 지속적인 준거점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7년이 지나 하트와 네그리가 집중적이고 본격적으로 전개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사유를 접한 지금, 그때의 내가 가졌던 사유와 비교해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더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에 옛 글을 가져온다.

도서관개방운동과 공공성에 대한 단상
― THE PRIVATE, THE PUBLIC AND THE COMMON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모든 생산의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거이다. 인간이 (흔히 부르주아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그러하듯이) 권리와 의무, 능력의 독립적 원천으로, 다시 말해 ‘개인’으로 간주될 때 그는 홀로 되며, 홀로 된 인간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 인간의 힘과 기쁨은 저 가장 깊은 곳에서 ‘공통적인 것’과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의 역동적인 운동과 흐름을 ‘사적인 것’(the private)으로 절합(articulation)함으로써 작동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공통적인 것’들을 ‘사적인 것’의 회로를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기능한다(소위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작동원리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생산의 근원적 힘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사회체에서도(자본주의와 같이 ‘공통적인 것’에 대한 격렬한 적대로 규정되는 사회체에서조차도) 제거되거나 삭제될 수 없으며, 다만 억압/변형/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적인 것’이 ‘공통적인 것’을 전유한 형태, 반대 방향에서 말하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표출되는 ‘공통적인 것’의 모습(물론 이 때 ‘공통적인 것’의 모습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사적인 것’의 지배 하에서 대개 훼손되고 상처입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을 우리는 ‘공적인 것’(the public)이라고 부른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관점에서 관찰된 ‘공통적인 것’이며,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소외된 형태, 소외된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다(이것은 노동이 인간 활동의 소외된 형태인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위와 같은 고찰을 토대로, 우리는 ‘공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안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사유화에 맞서 국유화를 외칠 때, 그것은 “국가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국가가 최고다”라는 식의 국가주의적 맥락에서보다는, ‘사적인 것’의 냉혹한 공격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확히는 스스로를 보호할 공동체에 대한 욕구라는 맥락에서 더 옳게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때에 따라 혁명적으로 급진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사적인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며, 훼손되지 않고 상처입지 않은 온전한 우리의 삶을 만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옳게 나아가지 못할 때, 혹은 적어도 ‘공통적인 것’의 지평에서 고려되지 못할 때, 그것은 ‘사적인 것’을 위협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것을 더욱 공고화한다. 이것이 공론장, 공공영역, 공적기능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인 것’들의 총화로서의 국가를 주장했던(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하지 못했던(못하는) 덫이다. 모든 이분법적 틀 속의 대립항들이 그렇듯이, 이분법 자체를 문제삼지 않은 채로 양쪽 중 어느 한 항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반대편 항도 강화시킨다.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혁명적일 수 있으려면, 그 요구가 ‘사적인 것’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밀고 나가져야 하며, 그때 비로소 그것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와 다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고대와 이대에서 진행 중인 ‘도서관 개방 운동’의 핵심적 근거는 ‘대학의 공공성’이다. 운동의 주체들은 대학이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공적인’ 위치에 걸맞는 ‘공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지식 즉 ‘앎’의 공유라는 점에서 이 운동은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나아갈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앎’은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잠재력이 발현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대학외부(‘사적인 것’의 영역)에 맞서 ‘대학내부만이라도’ 공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모쪼록 이 운동이 앎과 풍요로운 삶을 갈구하는 많은 이들의 ‘공통적인 것’의 구축에 옳게 결합되기를 바라며, 글로나마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위한 에세이

연구공간 L 엮음,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위한 에세이>  신간소개 

2012/11/15 14:26

 

복사http://blog.naver.com/virilio73/80173729796

첨부파일 (1)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위한 에세이

연구공간 L 엮음 | 마이클 하트, 지지 로제로, 에티엔 발리바르, 안토니오 네그리, 나오미 클라인, 마테오 파스퀴넬리, 닉 다이어-위데포드, 박서현, 진성철, 이종호, 정남영 지음

인문・사회・정치철학 | 신국판 변형(140×210) | 352쪽 | 18,000원

 

 

 

책머리에: 공통적인 것과 신자유주의

 

1부. 코뮤니즘을 다시 생각하기

1. 공통적인 것과 코뮤니즘 (마이클 하트)

2. 공통적인 것에 대한 다섯 가지 테제 (지지 로제로)

3. 공통적인 것, 보편성, 코뮤니즘에 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안토니오 네그리)

2부. 자본의 코뮤니즘을 넘어서
4. 공통재를 되찾기 (나오미 클라인)

5. 묵시록의 두 얼굴: 코펜하겐에서 보내는 편지 (마이클 하트)

6. 기계적 자본주의와 네트워크 잉여가치: 튜링기계의 정치경제학 (마테오 파스퀴넬리)

7. 공통적인 것의 유통 (닉 다이어-위데포드)

3부.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위하여

8. 공통적인 것의 존재론: 주체성의 생산과 그 정치적 과제 (박서현)

9. 공통적인 것과 새로운 해방의 공간 (진성철)

10. 공통되기를 통한 예술의 확장과 변용 (이종호)

11. 맑스의 자본 분석과 공통적인 것 (정남영)

지은이 소개

기획·옮긴이 소개

찾아보기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3-9.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이번에는 소위 공통적인 것에 대한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공적 재화와 서비스들이 국민국가의 수중에 있는 근대적 주권의 바로 그 토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낡은 대립 속에 빠지지 않고 공통적인 재화와 서비스들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방법을 구상할 수 있을까?(≪다중≫, p. 253.)

 

일반 이익, 또는 공공 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적 생산의 탈근대적 변형에 연결되어 있는 법률적 문제가 공공이익에서 후퇴하여 상이한 사회적 정체성들을 기초로 한 사적 통제를 향해가지 않고 오히려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다. 공통이익은 국민국가의 법률적 도그마를 정초한 공공이익과는 대조적으로, 사실상 다중의 생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통이익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삶정치적인 생산 속에서 협력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재전유된 일반 이익이다.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을 관리되는 일반 이익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긍정적인 외부효과들에 의해, 또는 새로운 정보네트워크들에 의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협력적이고 소통적인 노동형태들에 의해 창출된 공통성과 같은) 경제적 삶정치적 활동과 일치한다. 요컨대 공통적인 것은 주권의 새로운 형태, 즉 민주적인 주권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사회적 특이성들은 자신들의 삶정치적 활동을 통해 다중 자체의 재생산을 가능케 해주는 재화들과 서비스들을 통제한다. 이것이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에서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둔 코뮌으로의 이행을 이루어낼 것이다.(≪다중≫, p. 254.)

 

결국 네그리는 공적인 문제, 즉 교육이나 물, 전기, 의료 등등의 공적인 영역을 상품화하지 말자는 우리의 입장과는 달리,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지식이나 이익 즉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 금융자본의 이익 그리고 외부효과, 즉 도로의 신설로 주변의 주택이 얻는 이익 같은 것을 공통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주장이다. 사적소유제도 때문에 자본가가 전유하였던 소위 공통적인 것은 사적소유를 폐지하거나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의 법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것인데, 이것을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공통으로 생산하였으니 공통으로 관리하자는 주장은 자본의 권리 전반을 폐지하자는 주장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국가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성인 민중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통일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국가권력과 그에 따른 주권적 법률적 통제인 사적소유의 폐지와 부정이 아니라, 단지 자본이 전유할 권리가 없는 공통적인 생산물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예를 들어 공통적으로 생산된 종자 정보나 특허권ㆍ지적재산권을 공통적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엄청나게 혁명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의 권리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는 무관하거나 애매하게 발생한 가치만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네그리는 바로 이걸 주장하기 위해서, 즉 착취관계와 싸우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 노동가치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http://blog.jinbo.net/rnp/80

「인간의 공통된 것을 발명하기」로부터

 

다중지성 연구정원(waam.net) 불어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네그리의 최근글 「인간의 공통된 것을 발명하기」(Inventer le commun des hommes, pp.294-5) 핵심 부분의 초역이다.-아멜라노

 

 

우리는 거의 3세기 동안 민주주의를 공적인 것의 관리로,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국가적 전유의 제도화로 생각해왔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이제 급진적인 그리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술어 속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공통적 관리로서 말이다. 공통적인 것의 공통적 관리는 이제 공간을 코스모폴리티크하게 재정의하는 것을 함축하며, 시간을 구성적인(제헌적인)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을 함축한다. 모두에게 (속해) 있으면서, 모든 것이 개인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을 포착하는 계약의 형태를 정의하는 것이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아니, 모두에 의해 생산되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모두에게 속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이 <대주제>에서 (그들이 몇년 전부터 선도했던 경험에 의해서, 또, 예전에는 “틈새적”이었던 이 경험이 일반화되는 것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제기했던 자료들 속에서 우리는 이 공통적인 것을 가시화시키려고,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 전략에 대해 말하려고 노력한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는, 일반화된 생산조직이 되었다. 공통적 생산이 주어지고 조직되는 곳이 이곳이며, 공통적인 것의 축적이 실현되는 곳도 이곳이다. 이 축적의 폭력적인 전유는 사적인 것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공적인 것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메트로 폴리스 공간의 “지대(la rente)” 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는 주요한 경제적 내기로 걸려있다. 그리고 통제의 전략들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지대”의 이윤에 대한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혹은 “생산적 외부성” 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당장은 사적 전유가 아주 종종 공적 전유에 의해 보장되고 합법화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통적인 것을 되찾기, 사물이 아니라 제헌적 과정을 재정복하기. 다시 말해 제헌적 과정이 펼쳐지는 공간을 재정복하기 – 요컨대 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을 재정복하기. 통제의 직선적 공간 속에 사선을 긋기. 디아그램diagramme에 사선diagonales을 대립시키기, 바둑판형에 간극을 대립시키기, 위치에 운동을 대립시키기, 정체성에 생성을 대립시키기, 단순한 자연에 무한한 문화적 다양성을 대립시키기, 기원의 참칭에 인공물을 대립시키기. 몇 년 전, 아주 멋진 책에서 장 스타로빈스키는 계몽의 세기는 자유의 발명을 목격하였던 시대라고 말했다. 근대 민주주의가 자유의 발명이었다면, 오늘날 급진 민주주의는 공통적인 것의 발명이고자 한다.

마이클 하트,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대강의 요지

4대강 문제가 개발인가 보존인가라는 문제로 한정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고 또 관리하는 유효한 방법일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마이클 하트의 최근글,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Politics of the Common, http://www.zcommunications.org/politics-of-the-common-by-michael-hardt )의 대강의 요지를 아래에 정리해 본다. -아멜라노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마이클 하트)와 생태적 사회적 투쟁의 연대의 문제

공통적인 것에는 두 개의 영역이 있다. 하나는 생태적인 공통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경제적인 공통적인 것이다. 이것을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과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정치적 관점에서 이 두 영역의 경계는 흐려진다. 이 두 영역은 동일한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가령 소유관계에 의해 이 두 영역은 모두 도전받고 악화된다. 그리고 두 영역은 전통적인 경제적 가치를 좌초시키며 삶의 가치를 가치평가의 유일하게 정당한 저울접시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 두 공통적인 것이 상반된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두 개의 본질적 측면이 있다. 우선 생태적 담론은 공통적인 것을 보존에 초점을 맞추 취급하고, 지구 및 생물형식들의 제한성에 초점을 맞춤에 반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인공적 형식들에 대한 토론은 일반적으로 창조에,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무한하게  열린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사회적 담론이 인가의 이해관계를 중심적으로 취급함에 반해 호나경담론은 인간 혹은 동물 세계보다 훨씬 넓은 이해관계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내가 괌심을 갖는 것은 공통적인 것의 이 두 영역들, 질들, 그리고 그들의 잠재적 관계에 대한 대화의 필요성이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회의를 둘러싼 행동의 준비에 포함되었던 조직적 논쟁을 생각해보면, 반자본주의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과 생태운동의 합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운동의 성공은 각각의 운동들의 일차적 목표들인 공통적인 것의 각 영역을 서로 이애하고 협상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출발점은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이다. 생태운동에서 이것은 다른 영역보다 잘 인지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사유에서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은 널리 인지되지 않고 있다.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기인 오늘 이 문제는 중요하다. 1) 산업생산의 헤게모니는 산업사회를 창출했다. 2)더 이상 산업생산은 헤게모니적이지 않다. 3)헤게모니적인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인지적 정서적 활동과 그 구조이다. 현대의 생산형식은 사회관계와 삶형식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삶정치적이다. 삶정치적 생산과 생태적 사유 사이에 근접성이 있다. 양자는 모두 삶형식의 생산/재생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그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인간과 동물의 한계 너머로 삶형식의 개념을 확장시킨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소유형식에서의 위계변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산업생산의 헤게모니 이전에는 부동산 소유가 지배적 위치를 점했다. 산업생산이 지배적으로 되면서 상품소유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오늘날은 비물질적 소유(특허권, 저작권 등)가 물질적 소유보다 지배적 위치를 점한다. 부동상품인가 이동상품인가가 문제였던 때에서 배타성과 복제가능성의 문제로 초점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물질상품의 유용성은 나눠진다고 해서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나눠짐으로써(즉 공통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더 유용하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 지배적 생산형식은 공통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 비물질적 삶정치적 재화들이다. 미래의 경제적 발전에서 그러한 재화의 생산성은 그것들이 공통적인 것으로 되는 데 있다.

생태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에서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첫 번째 논리적 특징은 그들이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퇴락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소유의 비물질적 형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관리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미래적 생산성을 감소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성을 위해 공통적일 필요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사적일 필요 사이에 강력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의 확장판이다.[‘사회적 생산에 사회적 통제양식을!’이 맑스 시대의 요구였다면,  ‘공통적 생산에 공통적 통제를!’이 우리 시대의 요구이다.-아멜라노]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은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또 퇴락된다. 환경의 유리한 혹은 해로운 결과는 항상 국경의 경계도, 소유의 한계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는 교통, 서비스, 산업의 형태로 된 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한 것처럼 우간다의 석유, 시에라레온의 다이아몬드, 볼리비아의 리튬, 아이슬란드 주민의 유전정보 등과 같은 자연적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 했다. 생산의 공통적 성격은 점점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과 충돌한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의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에 대항하는 수많은 투쟁들(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물 사유화에 대한 투쟁, 2003년 엘 알토에서 가스 사유화에 대한 투쟁) 속에서 표현되었다.

두 영역의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두 번째 특징은 그것들이 가치의 지배적 척도를 파괴하고 초과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외부효과, 무형자산 등의 개념은 이미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금융위기는 이 삶정치적 생산을 자본주의적 척도로는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삶은 척도를 초과하며 오늘날의 경제적 재화나 활동의 가치는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며 벗어난다.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파괴되는 삶형식들의 가치는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뱅글라데쉬의 침수, 에디오피아의 가뭄, 이누이트족의 생활형식의 파괴가 얼마의 달러로 계산될 수 있는가?

교토의정서나 Waxman-Markey 협정[footnote]이에 대해서는 http://www.govtrack.us/congress/bill.xpd?bill=h111-2454 참조[/footnote]에서의 탄소세 계획은 측정불가능한 것을 측정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이때 이것이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측정불가능한 상품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재앙에 이를 수 있다. 그 재앙은 금융위기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소유논리와 시장계획은 빈곤과 배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전 지구적 사회적 위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삶의 형식들은 측정불가능하며 삶/생명 가치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다른 저울눈(이것은 우리가 아직 발명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에 따른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개의 상이한 형식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에도 도전한다는 점은 자율(자치)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를 향한 정치적 행동주의의 형식들을 서로 연결시킬 기초를 제공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형식은 물론 상반된 방향으로 작동하곤 한다. 생태적 사유는 지구의 유한성과 그 생명체제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지구, 특히 그것의 야생공간은 산업발전과 다른 인간활동의 손상으로부터 방어되어야 한다. 반면 경제사회적 영역의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생산의 무한한 성격을 강조한다. 삶형식, 아이디어, 정서들, 등은 어떤 고정된 한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보존과 한계에 대한 요구가 무한한 창조적 잠재력에 대한 찬양과 상충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발전에 반대하고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사유는 발전지향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 발전이란 근본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에 포함된 발전은 산업발전과는 아주 다르다. 삶정치적 맥락에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부서진다. 한쪽에서 보존에 대한 요구가 다른 편에서의 창조에 대한 요구와 대립하기는커녕 상보적이다. 두 관점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삶의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을 지시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한 두 영역의 투쟁에서 두 번째의 갈등적 지점은 인간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로 준거틀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투쟁에서 인간의 문제는 중심에 놓여 있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위계의 극복, 계급과 소유,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성의 제거에 놓여 있다. 생태적 투쟁은 자신들의 프레임을 인간 너머로 확장하곤 한다. 생태적 담론에서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형식 및 생태계와의 상호작용 및 그것들에 대한 돌봄 속에서 조망된다. 일부의 심층생태적 담론에서는 비인간생명에게 동등한 관심이 두어지거나 인간보다 우선적인 관심이 두어진다. 이 차이는 중요한 차이지만 극복불가능하거나 파괴적인 차이는 아니다. 생태적 투쟁은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것과 싸울 수단에 좀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투쟁은 지구의 제한성과 다른 생명형식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관리할 대안수단들을 발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상상하는 기획에 근본적인 것이다. 투쟁들 사이의 분기는 절합되고 협상되어야 할 공통적인 것의 상이한 면모들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차이는 건강한 것이며 그것들과 연루/교전하는 것이 우리를 전진시킬 수 있다. 환경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적 이론적으로 노력을 함께 경주해야 할 화급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