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권리라는 마법의 탄환
여기서 저자는 “권리개념은 권리라는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고 전제한다. 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보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역사·사회적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권리의 역사적 배경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저자는 권리의 이러한 사회적 반영성은 권리 개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논리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본다.
즉 권리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독특한 논리성은 서구 근대사회에서 백성이 시민으로 변해 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권리가 이렇듯 강렬한 개념인데 왜 권리가 불균등하게 발전했는가? 왜 어떤 권리는 신성불가침처럼 안정화되어 있는 반면 어떤 권리는 명목상의 개념으로만 남아 있을까? 예를 들어, 계약이나 소유의 영역에서는 권리가 일찍부터 발전되었지만 노동이나 환경의 영역에서는 왜 권리가 뒤늦게, 그것도 불완전하게 형성되었을까? 이 문제는 사실상 권리에 반영되는 사회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차원에 있다.
저자의 마지막 문제의식은,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과는 다른, 권리 언어 자체에 내재된 권리의 어떤 내적 논리 또는 구조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권리의 언어나 논리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저자는 권리의 ‘상대적 자율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일종의 개념실재론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즉, 어떤 보편적 개념을 객관적 실체로 보는 입장인데 이는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실념론(實念論)과 유사한 내용을 가진다. 저자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 추측이 옳다면 우리는 당대에 흔치 않은 네오 스콜라철학 유파의 권리이론을 접하고 있는 셈이 된다. 사회과학에서 인권을 다루는 방식과 차이가 나는 유장한 철학적 사유가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리의 문법』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저자는 우선 권리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작업을 시작한다. 권리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후 권리의 본질과 그 근거에 대한 논의가 따른다. 의사설(또는 자유의지설)과 이익설이 소개된다. 저자는 이익설에 바탕을 둔 권리론에 더 무게를 둔다. 여기서 권리의 독특한 기능과 힘이 한 번 더 강조되고 있다. 즉 권리라는 언어에는 ‘정당한 자기 몫’(entitlement: 자격)이라는 요소와 ‘매우 강한 도덕적 힘’(rectitude: 옳음)이라는 요소가 결부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이 독일 대륙철학에서 ‘Recht’를 보는 기본관점이다. 서구철학에 ‘옳은지 또는 그른지’를 따지는 흐름과, ‘좋은지 또는 나쁜지’를 따지는 흐름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때, ‘권리’ 개념은 이 두 흐름을 통일하는 독특한 흐름이다. 즉 ‘옳고도 좋은’ 것이 권리라는 말이다. 인권의 일반이론을 확립하려는 이론가라면 이 점에서 출발하여 권리의 사회적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권리가 다른 도덕적 주장과 다른 점은 “언제나 각각의 개인에게 귀속되고 보장되어야 할 지위”라는 데 있는 것이다. (99면) 이런 논점은 그 후 이어지는 3장에서 인권론으로 발전된다. 권리 중에서도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제일 눈에 가는 대목이다. 이 장에서 드디어 도덕적 권리와 정의, 인권의 문제가 정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리론에서 보는 인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권리주체가 모든 사람들이며(보편성), 권리 상대방은 다른 모든 개인들, 국가, 집단, 사회가 된다(일반성). 둘째, 인권은 모든 개인에게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아주 강한 의미의 권리이다. 따라서 인권은 실정법적 권리로 곧바로 전환될 수 있고 전환되어야만 하는 권리이다. 따라서 인권은 그 내용을 실정법이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가지는 ‘준-실정법적 권리’라고 한다. 이 점은 대단히 독특한 주장이라고 보인다. 즉 인권이 실정법으로 규정되어 있느냐와 상관없이 인권은 도덕적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정법을 그것을 ‘확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실정법이 인권을 ‘확인’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인권의 허약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실정법의 허술함과 책임방기를 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인권의 내용을 이루는 대상은 긴요하고도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권리내용의 ‘근본적 중요성’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인권은 실정법에 앞선다. 인권을 침해하는 실정법은 내용상으로 정당하지 못하며 이때 그런 법은 ‘법’이 아니게 된다. 즉, ‘불법적 법률’이라는 모순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나치시대의 법률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인권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법철학적으로 파악하는 인권의 논리적 위력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권리의 문법』은 인권을 역사-사회적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대별되는, 법철학의 전통 위에서 저술된 책이다. 이 저서를 읽어 보면 왜 현대 인권 담론을 법학에서 많이 다루는지 이해할 수 있다. 권리 개념의 법철학적 토대 때문이다. 저자는 국내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독일에 유학해서 현존하는 최고의 법철학자로 꼽히는 로베르트 알렉시(1945-)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지에서 『정의와 헌법』이라는 책을 내기도 하였다. 알렉시는 헌법적 권리론에서 출발하여 법해석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는 대가이다. 법해석주의는 자연법과 법실증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학파이다. 법해석주의에서 법은 자연 속에 내재하는 것도 아니고 법률의 실천관행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실체도 아니라고 본다. 더 중요한 점은 법과 도덕성 사이에 ‘차이’는 있지만 그 둘이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널드 드워킨도 법해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짐작컨대 『권리의 문법』을 쓴 저자 역시 법해석주의의 기반 위에서 법철학의 정초를 놓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명석한 법철학 논리로 인권의 이론을 개척하고 있는 법학자가 우리 곁에 있음은 하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