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이론논쟁의 현황과 전망: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향방
정 진 영 (경희대학교)
http://blog.daum.net/gangseo/10708658
I. 서 론
국제정치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구미학계에서 한창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화의 진전 및 탈냉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국제정치 이론논쟁은 최근에 이르러 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국제정치이론 형성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소렌슨(Sorensen 1998, 84)은 두 가지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냉전의 종식이 국제적 어젠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탈냉전 이후 환경 인권 민주화 소수민족 국가분열 등과 같은 새롭고 다양한 이슈들이 국제정치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에 국제정치경제학의 발전과 각광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Katzenstein, Keohane & Krasner 1998). 둘째, ‘국제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냉전적 접근법인 월츠의 신현실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월츠의 신현실주의는 많은 국제정치이론가들에 의해서 실증주의, 보수주의, 변화에 대한 무관심 등과 관련하여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더욱이 다양한 탈실증주의 이론들의 등장과 더불어 국제정치학계는 마치 이론들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많은 야심찬 이론가들은 지금이 신현실주의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대안적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건설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에 매료되어 있다.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이 국내의 국제정치학계에도 서서히 그 영향을 미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신진 학자들이 그러한 이론논쟁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국내의 기성 학자들도 그러한 추세를 재빨리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김태현 정진영 1993; 하영선 1995; 이삼성 1997; 신욱희 1998; 김의곤 권경희 1999; 양준희 1999; 전재성 1999a; 윤영관 2000; 김학로 2000; Yang 1999).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시도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이 국내에서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구영록 2000; 권만학 2000; 박건영 1999; 전재성 1999b, 2000; Yongho Kim 2000).
이 글은 최근 구미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매년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관련된 논문들과 책들의 홍수 속에서 이론논쟁의 방향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정리해 보고 명확히 하는 일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론논쟁을 넘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이론적 통합의 향방을 전망해 보는 것도 이 글의 중요한 목적이다.
이론논쟁의 현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논쟁의 구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미 잘 알려진 모델은 뱅크스(Banks 1985)의 ‘패러다임 간 논쟁(inter-paradigm debate)’과 라피드(Lapid 1989)의 ‘제3논쟁(third debate)’이다. 이 두 모델은 이미 학계의 인정을 상당히 받았고, 논쟁의 중요한 측면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에서 중요하게 고려될 것이다. 그러나 각각 단독으로는 최근의 이론논쟁을 담기에 부족하다. 그 결과 최근 들어서는 보다 서술적 나열식으로 이론논쟁을 소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Smith 1995; Brecher 1999). 이들은 대개 10여 개의 논쟁축을 선정하여 최근의 이론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이론논쟁을 보다 세밀히 다룰 수 있는 이점은 있어도, 경제성이 너무 떨어져 논쟁을 정리해서 소개한다는 의미가 약화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론논쟁을 세 개의 축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패러다임 탈실증주의 구성주의가 그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세 축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상당부분 중첩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이러한 방법으로 정리하는 데는 약간의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패러다임 간 논쟁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자유주의, 현실주의, 마르크시즘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고, 최근의 철학적 방법론적 논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 또는 적응하면서 ―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 간의 논쟁은 양자가 매우 유사하게 수렴하였기 때문에 더이상 이들 사이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강력하다(Ruggie 1998b). 그러나 이 주장은 인식론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두 이론 시각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차이는 여전히 중요하다(Little 1996). 둘째, 패러다임 간 논쟁과 ‘제3논쟁’이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라피드가 말하는 ‘제3논쟁’은 실증주의-탈실증주의의 논쟁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국제정치학의 이론논쟁사를 기준으로 보면, 어느 것을 제3논쟁으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셋째, 구성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논쟁의 축으로 설정하는 것은 구성주의에 대한 지나친 호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구성주의를 자유주의의 아류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Sterling-Folker 2000). 또는 구성주의를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와 동격으로 대비시키는 방법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Walt 1998). 그러나 이 방법은 구성주의가 패러다임 간 논쟁과 탈실증주의 논쟁을 통합 또는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여섯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II절에서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역사를 간략히 제시함으로써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논쟁의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제III절은 패러다임 간 논쟁을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논쟁과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정치이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정리하고 있다. 제IV절은 탈실증주의 논쟁을 비판이론 탈근대론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제V절은 구성주의 논쟁을 웬트(Alexander Wendt)의 입장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제VI절은 기존의 이론논쟁의 성과와 최근의 연구경향을 고려하여 국제정치이론의 새로운 통합이 일어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보고 있다. 마지막 절에서는 한국적 현실에서 국제정치 이론논쟁과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경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간략히 논의하고 있다.
II. 국제정치연구와 이론논쟁: 국제정치학의 역사
국제정치학의 역사는 종종 이론논쟁의 역사로 기술되고 있다(Vasquez 1983; Banks 1984; Lapid 1989; Smith 1995; Waever 1996). 이른바 ‘대논쟁들(Great Debates)’을 통하여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분야가 규정되고, 연구주제와 방법에 있어서의 큰 흐름들이 결정된 점을 부각시켜 국제정치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국제정치연구는 ‘제3논쟁’의 시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Lapid 1989). 이 글의 중심적 과제인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성격과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깐 이 논쟁이 갖는 역사적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 ‘제1논쟁’은 1930-40년대의 이상주의-현실주의 사이의 논쟁이었다. 국제정치학이 하나의 학문분야로 독립된 1919년 이후 전간기 동안에는 이른바 ‘이상주의’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었다고 흔히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기구, 국제법, 세계평화에 관한 이상주의의 주장들은 전간기의 혼란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설득력을 잃었다. 1939년에 출간된 카(E. H. Carr 1939)의 {20년간의 위기}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등장과 이상주의에 대한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후 ‘현실주의적 전통’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치연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남게 되었다.
국제정치연구의 ‘제2논쟁’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어난 ‘전통주의(traditionalism)’ 대 ‘행태주의(behavioralism)’ 사이의 방법론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국제정치연구의 방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불어닥친 행태주의 논쟁이 국제정치학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논쟁에서 행태주의가 승리하였고, 이른바 과학적 방법과 증거에 기초하여 국제정치를 연구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실주의-행태주의의 결합에 기초한 국제정치연구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커졌고, 이는 새로운 이론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우선 석유위기 베트남전쟁 데탕트 상호의존의 증대와 같은 국제관계의 현실적 변화들이 이론적 반성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상호의존과 비국가행위자들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상호의존론을 발전시켰고(Keohane and Nye 1977),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제적 불평등과 착취관계를 중심으로 종속이론,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켰다(Frank 1967; Amin 1974; Wallerstein 1974, 1980). 이에 맞서 현실주의 전통과 행태주의적 국제정치연구의 결합은 월츠(Waltz 1979)의 {국제정치이론(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을 통하여 신현실주의로 집대성되었다. 이른바 패러다임 간 논쟁의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의 철학적 논쟁이 또 다시 국제정치학 연구의 이론논쟁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번의 행태주의를 다양한 방향에서 공격하는 탈실증주의의 운동이었다. 국제정치연구는 특히 이러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1980년대 국제정치학의 양대 패러다임인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가 모두 실증주의 합리주의의 기초 위에 건설된 것이었고, 이들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이데올로기적 속성들이 탈실증주의의 주요한 공격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Ruggie 1983). 최소한 미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전통이 코헤인의 합리적 제도주의를 통하여 신현실주의와 통합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유럽, 특히 영국의 국제정치학계는 탈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론적 반성, 즉 성찰(reflexivity)이 이론화의 중요한 안내자가 되었다(W. Cox & Sjplander 1994; Neufeld 1995).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코헤인(Keohane 1988)은 1980년대 말의 상황에서 국제제도에 관한 연구는 합리주의와 성찰주의로 양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신현실주의 논쟁은 상당한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자유주의 현실주의의 부활 움직임에 당면했다. 또한 탈실증주의의 공격 역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바야흐로 국제정치이론의 백가쟁명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배적인 국제정치이론이 사라진 가운데 수많은 이론적 시각들이 공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Brecher 1999).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이론인가? 실증주의-탈실증주의 논쟁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촉발시켰지만, 해결은커녕 이론논쟁의 구도만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이한 인식론적 입장에 기초한 이론들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모두가 일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탈냉전 세계화라는 국제정세의 변화 또한 이론적 다원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제공했다. 구성주의의 대두와 발전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구성주의는 국제정치학의 기초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기존의 이론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기존의 세 가지 패러다임들과 맞먹을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으로 발전되지 않고는 또 한 번의 철학적 방법론적 논쟁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III. 패러다임 간 논쟁
뱅크스는 1985년의 시점에서 세 개의 패러다임들 간의 논쟁이 국제정치연구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Banks 1985, 9). 현실주의 다원주의 구조주의가 그가 말하는 세계의 패러다임들이다(이 글에서는 이 명칭들을 각각 현실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로 사용하기로 한다). 국제정치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이러한 패러다임 또는 이념의 대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사실 그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논문은 당시의 국제정치학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 간 이론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하여 제시한 데 의의가 있었다. 그의 지적들을 중심으로 세 패러다임의 특징들을 요약하면 <표 1>과 같다.
패러다임 간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패러다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제정치연구의 대상이나 특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 중요도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패러다임 간 논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논쟁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
<표 1> 세 패러다임의 구분
생략
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은 서로 다른 국제정치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 다른 개념적 틀로써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국제정치학의 범주에 속하고, 자기들의 이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여전히 패러다임 간 논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의 이론논쟁에서 패러다임 간 논쟁은 주로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간의 논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논쟁은 매우 정교한 방법론과 경험적 검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미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이 절의 아래 부분에서는 이 논쟁을 우선 소개하고, 마르크스주의 국제정치이론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논쟁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은 미국패권의 쇠퇴와 이것의 국제적 영향에 대한 논란을 중심으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현실주의 국제정치(경제)이론에 따르면, 패권국의 존재가 국제(경제)질서의 안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른바 패권안정이론으로 불리는 이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쇠퇴는 전후에 수립된 다자적 국제(경제)질서의 붕괴를 초래하고, 전간기의 혼란상태를 재현시킬 위험이 있다고 주장되었다(Gilpin 1981).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국제제도들과 상호의존에 따른 공통의 이익이 비패권적 국제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전간기의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Keohane 1984). 이들 사이의 논쟁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층 세련되고 엄밀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날카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이 논쟁에 참여한 신현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탈실증주의자들과 구성주의자들의 지적처럼 공통적으로 개체주의적 합리주의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현실적인 국제정치이론들을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 논쟁의 주요한 논점들을 볼드윈(Baldwin 1993)이 제시한 6개의 항목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첫째, 무정부상태의 성격과 결과에 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현실주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전통에 따라 무정부상태를 국가의 안보,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데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약속이행의 불확실성 문제를 중시한다.
둘째, 상대수익과 절대수익 추구의 차이를 둘러싼 논란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안보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국력의 상대적 차이와 이를 결과하는 상대수익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상대수익의 추구와 절대수익의 추구는 궁극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스나이덜은 ‘상대수익의 추구에 관한 가설은 절대수익의 용어로 보다 잘 표현될 수 있는 주장을 잘못 규정한 것’이라고 비판한다(Snidal 1991a, 704.) 그리고 밀너는 절대수익 추구와 상호주의 전략의 결합은 상대수익 추구와 동일하기 때문에 상대수익의 추구가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Milner 1992, 471).
셋째, 국제협력의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상대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록 절대적인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상호주의적 전략을 통하여 상대방을 감시하고 비협력적 태도에 대하여 처벌 ― 이른바 분권적 집행(decentralized enforcement) ― 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국제제도들의 존재로 인하여 국제협력이 용이하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슈영역에 대한 강조의 차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안보문제를 강조하고, 신자유주의들은 경제문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립슨(Lipson 1984)의 지적처럼 안보문제에서보다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국제협력이 이루어지기 쉽다.
다섯째, 의도와 능력의 차이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특정 국가의 안보문제와 상대적 수익에 대한 민감성은 상대방의 의도 선호에 대한 인식에 따라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현실주의자들은 상대방의 미래의 의도에 대해서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능력의 차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국제레짐과 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제레짐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주변적인 것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제도들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들에 따르면 국제제도가 국제협력의 어려움을 상당부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액셀로드와 코헤인은 “제도들은 행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수익구조를 바꾸고, 미래의 그림자를 길게 할 수 있고, 다수 행위자들(N-person) 사이의 게임을 소수 행위자들 간의 게임으로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국제협력이 용이해진다(Axelrod and Keohane 1986, 238-39). 이와같이 국제제도의 역할에 대한 상반된 인식이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Mearsheimer 1994/95; Keohane & Martin 1995).
신자유주의와 신현실주의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더욱이 국제정치 이론논쟁이 다원화되는 가운데 자유주의 현실주의 전통이 재구축되고 패러다임 간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경향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민주평화론, 상업적 공화적 제도적 자유주의의 재구축을 통하여 강화되고 있고(Keohane 1990; Doyle 1997; Moravcsik 1997), 신현실주의 패러다임은 고전적 현실주의의 부활과 새로운 구조적 현실주의의 체계화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Buzan, Jones & Little 1993).
2.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와 국제체계
국제정치학의 주류 패러다임들인 현실주의와 자유주의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체계이론으로 발전되었듯이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정치이론도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통하여 체계이론으로 발전되었다. 마르크시즘은 원래 일국적 자본주의를 모델로 발전했었다. 그러나 레닌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외적 팽창의 덕분에 당분간 해소될 수 있고,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제국주의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종속이론가들은 중심 주변 간의 착취구조가 중심의 발전과 주변의 저발전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정립했고, 월러스타인에 의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국제체계, 지문화(geoculture)의 구조와 과정을 하나의 이론적 틀 속으로 통합하는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켰다.
세계체제론의 시각에서 볼 때 국제체계와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세계체제는 하나의 세계적 노동분화와 다수의 정치적 문화적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 단위들이 하나로 통합된다면 더이상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대신 세계제국이나 사회주의가 등장할 것이다. 다수의 국가들과 국가 간 체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태어났다(이수훈 1993; Arrighi 1994). 둘째, 국가들과 국가 간 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을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곧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해주는 일이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주의 위계구조는 잉여의 착취구조이며,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의 위계구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위계적 착취구조의 작동을 위해서는 정치적 상부구조가 필요한데, 이것이 곧 국가와 국가 간 체계이다(Chase-Dunn 1981). 셋째, 착취의 위계구조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 체계에도 위계적 구조가 존재한다. 패권국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 간 체계는 패권국의 존재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이를 통하여 안정적인 착취구조의 작동이 보장된다. 그러나 패권국은 흥망성쇠의 순환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뀐다. 이러한 패권순환의 주기는 대개 세계경제순환의 장기주기 ― 50-60년을 주기로 하는 이른바 콘드라티예프 파동 ― 와 일치한다(Chase-Dunn 1989). 이러한 패권국의 순환 역시 자본축적 기제의 작동에 기여한다. 월러스타인의 지적처럼 “근대세계체제의 국가 간 정치에 상당한 정도의 균형을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축적의 과정이 심각한 방해 없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주기적인 패권국의 등장과 쇠퇴였다”(Wallerstein 1996, 102).
세계체제론은 국가 간 체계의 자율성을 부인하고 국가와 국가 간 체계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에 기능적으로 기여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주류 국제정치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도래에 따라 국제관계의 중요한 내용이 경제적 거래이고, 세계시장의 작동이 점차 국가와 국제관계의 중요한 환경을 형성함에 따라 세계경제와 국제체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요청되고 있다(Little 1995). 세계체제론과 주류 국제정치이론 양쪽 모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IV. 탈실증주의 논쟁
라피드(Lapid 1989)는 ‘제3논쟁’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기존의 패러다임들에 대한 비판이다(paradigmatism). 둘째, 인식론적 공격이다(perspectivism). 셋째, 방법론적 다양성을 위한 주장이다(relativism). 이러한 특성을 갖는 ‘제3논쟁’은 “역사적으로나 지적으로 다양한 반실증주의적 철학적 사회학적 흐름들의 합류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Lapid 1989, 237). 즉 ‘제3논쟁’의 참여자들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기존의 주류 이론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해체(deconstruction)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우선 이들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스미스는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의 실증주의를 4개의 가정으로 요약하고 있다(Smith 1996, 16). 첫째, 과학의 일체성이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는 동일한 방법론과 인식론이 적용된다. 둘째,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 가능하며, 사실은 이론적으로 중립적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지식이 가능하다. 셋째,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규칙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연역-법칙적(deductive-nomological), 귀납-통계적(inductive-statistical) 형태의 설명이 가능하다. 넷째, 경험적 증명이나 반증이 실질적인 연구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탈실증주의 운동의 두 축인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탈근대론(postmodernism)은 이러한 실증주의의 가정들이 안고 있는 허구를 드러내고, 이것들에 기초하고 있는 주류 이론들, 특히 신현실주의 이론을 신랄히 비판한다. 아래에서는 이들 두 이론의 주장을 국제정치이론과 관련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있다.
1. 비판이론(Critical Theory)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특히 하버마스의 이론은 지식의 사회성을 밝히고 인간해방을 위한 비판적 이론의 수립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담론(또는 의사소통, discourse)의 역할을 특히 중시한다.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 비판이론의 도입은 그람시의 영향을 받은 콕스(R. Cox), 길(S. Gill) 등 이른바 ‘이탈리아 학파’의 기여가 컸다. 그리고 ‘이론화 과정 자체에 대한 이론적 반성’을 요구하는 성찰주의를 주창하는 노이펠드 등도 비판이론의 도입에 기여했다. 이들은 다같이 실증주의의 주객분리 가능성에 강력히 반대한다. 예컨대 노이펠드는 성찰주의를 “인간의 사고와 실천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기준들의 관념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규정한다(Neufeld 1995, 42). 콕스는 지식은 항상 “누구를 위한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다고 선언한다(Cox 1981). 즉 지식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익을 대변한다. 따라서 지식에는 콕스의 분류처럼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지식이 있을 수 있고, 현상변경을 위한 지식이 있을 수 있다. 콕스는 전자를 ‘문제해결지식’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비판이론이라고 부른다(Cox 1995, 53). 따라서 비판적 지식인이 해야될 일은 지식의 이러한 역할을 이해하고 인간해방을 위한 비판적 지식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이론이 국제정치연구에 대하여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비판이론을 채용한 국제정치이론가들의 업적은 주로 다음의 네 가지 공헌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지식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지적이다. 즉 국제정치이론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이 볼 때 기존의 국제질서와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국제정치이론은 극소수의 특권적 국가들을 위한 것이다.
둘째, 무정부적 국제정치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이른바 ‘변화불가능 명제(immutability thesis)’에 대한 비판이다. 구조의 변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구조를 당연히 주어진 것이고 불변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강자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기존의 국제질서의 현상유지에 봉사하는 것이다. 변화불가능의 관념은 힘과 부의 구조화된 불평등을 지지한다. 사회적 규칙성들에 대한 분석은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변화의 현실적 제약요인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신현실주의가 현상유지를 재생산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이라면, 비판이론은 현상을 비판하고 변혁을 추구하는 이론이다.
셋째,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억압기제에 대한 비판과 이로부터 나오는 사회변혁의 힘을 인정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비판이론은 생산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인간해방의 원동력을 찾는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을 비판한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경계들과 ‘포용과 배제의 체계들’을 만들고 있는데,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들, 여성, 폭력적 국가, 억압적 국제체계 등이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비판이론은 이러한 체계의 본질을 분석하고 변화의 다양한 원동력들을 찾고자 한다. 계급투쟁은 단지 그러한 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사회가 인간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생산관계 이외에 또 다른 배제의 체계들이 여전히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국제정치이론가들이 국가와 국제체계의 억압성을 부각시키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국가와 국제체계는 현상유지의 주요한 도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와 국제체계의 변화가능성이 오늘날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세계화가 그 주요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시민권 공동체 주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가 요구되고 있고, 이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콕스의 지적처럼 세계화에 따른 변화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변혁운동의 장이 국가사회에서 국제사회 세계사회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제약되지 않은 담론의 중요성은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여기에 곧 인간해방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주권국가를 비롯한 모든 경계들이 열린 대화를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담론윤리의 논리는 도덕적 행위자들이 모든 경계들과 경계지어진 공동체들을 기꺼이 문제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담론윤리는 배제의 체계로서 주권국가를 영속시키는 시민과 국가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문제시한다”(Linklater 1996, 294). 이러한 문제의식은 곧 민족국가를 초월한 세계공동체, 세계시민사회의 설립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비판이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계지어진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재조정하고 탈민족주의적 시민권 개념의 도입을 필요로 한다”(Linklater 295). 콕스는 이를 위하여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치경제연구에 적절한 존재론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Cox 1995, 34).
2. 탈근대론(Postmodernism)
탈근대론 역시 철학 문학 등에서 먼저 발전하여 국제정치이론 논쟁에 도입되었다. 탈근대론은 종종 해체주의 탈구조주의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탈근대론자들의 핵심적 작업이 곧 구조에 대한 해체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거대한 구조 진리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각 주체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해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과학과 이론이 진리의 담보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구성은 권력행사를 통하여 부과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론가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부과를 해체하고 노출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탈근대론자들은 대개 심각한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누구나 상이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따라서 보편적인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실증주의적 과학은 가능하지 않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바스케스(Vasquez 1995)는 탈근대론이 제기하고 있는 주장들 중에서 국제관계이론과 관련성이 높은 것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근대성의 자의적 성격이다. 근대성은 계몽사상에서 가르치듯이 인간을 무식과 미신으로부터 해방하여 인간성 완성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의 이념이 아니다. 근대성은 다만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산물일 따름이다. 이것은 진실도, 불가피한 것도, 모델도 아니다. 이것이 진보이고, 최선의 것이고, 우월한 것이라는 주장은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자의적인 것이다”(Vasquez 1995, 220). 근대성은 하나의 프로젝트일 따름이다.
둘째, 존재하는 것은 ‘진리를 가장한 선택’이다. 세상에 불가피한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선택일 따름이다. 물론 그러한 선택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의 산물이다. 투쟁의 결과에 따라 상이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존재하는 것도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런데 승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익과 선호, 문화적 편견과 정치적 힘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형이상학적 범주의 것으로, 진리로 합리화한다.
셋째, 현실은 사회적 구성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의 신념과 행동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나 행동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사회구조 자체도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부과된 것이다.
넷째, 언어, 개념적 틀, 패러다임 등은 자기실현적 예측들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확산되고 사람들이 믿게 되면 그 아이디어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 실제로 실현된다. 어떤 규칙이나 규범이 강요되고 준수된다면 특정한 현실이 실현된다. 근대 경제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근대 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세상이 실현되는 정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과학은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다. “과학은 단순히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와 삶의 다른 방식들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실천이다”(Vasquez 1995, 222).
다섯째, 정체성(identity)은 사회적 구성이다. 그런데 정체성 형성의 과정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순탄하지가 않다. 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느냐는 개인 집단 국가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누가 정체성 형성을 통제하느냐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탈근대론적 시각에서 애슐리(Ashley 1986, 258)는 월츠의 신현실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신현실주의는) 기존의 질서를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고,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기보다 제한하고, 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다양성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모든 실천을 통제에 대한 이익에 복종시키며, 책임감을 넘어서는 사회적 권력의 이상에 굽신거리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사회적 학습과 창조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력을 탈취해 버린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은 범세계적 규모의 전체주의적 프로젝트인 세계정치의 합리화를 예상하게 하고, 정당화시켜주고, 지향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신현실주의가 다양성을 무시하고 변화를 위한 실천을 말살하며 기존의 권력관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해체의 작업은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탈근대론은 종종 이러한 정도를 넘어 과도한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결과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어떤 것도 영원히 진리가 아니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관, 역사관 또한 사회적 구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위한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V. 구성주의 논쟁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 합리주의와 성찰(또는 반성)주의의 대립은 극단적인 인식론적 대립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양자간의 대화와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양자 사이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어떠한 기반도 공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이론적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매우 불만족스러운 상태인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나름대로 옳다고 한다면 심각한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정확히 많은 탈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상황을 오랫동안 용인할 수 없다. 이론적 혼란상태를 극복할 새로운 통합,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바로 이러한 요청에 대한 하나의 응답을 시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구성주의가 제기하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성격이 과연 무엇인가? 먼저 구성주의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성주의의 특징은 두 가지의 중심적 가정에서 발견된다. 첫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우선적인 힘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다. 둘째, 행위자들의 정체성과 이익은 자연적으로,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관념들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진다. 웬트(Wendt 1999, 1)는 이것을 구성주의의 두 교의라고 부른다. 첫번째 교의는 구성주의가 물질주의(materialism)를 비판하고 관념주의(idealism) 시각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번째 교의는 구성주의가 개체론(individualism)에 반대하고 전체론(holism)의 입장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일종의 ‘구조적 관념론(structural idealism)’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주장이 곧 구조(structure)와 행위자(agent)가 서로를 동시에 구성(mutual construction)한다는 것이다(Wendt 1987). 이 시각에서는 어느 것도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에 우선하지 않는다. 행위자와 구조는 모두 사회적 존재이며,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구성되고 재생산된다.
왜 관념론인가? 구성주의자들은 ‘사회적 의식의 성격과 구조’, 즉 ‘관념의 배분’이 ‘사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Wendt 1999, 24). 물리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단지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물리력의 의미와 중요성은 관념을 통하여 부여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의 핵무기와 북한의 핵무기는 상이한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다. 핵무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영국과 북한에 대한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성주의자들은 “사회의 심층적인 구조는 물리력이 아니라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Wendt 1999, 25).
왜 구조론인가? 개체론과 전체론의 차이는 구조가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개체론은 구조를 개체들의 속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구조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에 비해 전체론은 “사회구조의 효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들이나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행위자들이 사회구조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구성주의는 행위자들의 속성인 정체성과 이익이 사회구조에 의해서 구성되어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로서 행위자와 구조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사회현상은 대부분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국가와 국제체제를 우리는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가 없다. 관찰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곧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실증주의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고, 주체에게 객관적인 인식의 능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관찰할 수 없는 것의 존재적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비해 탈실증주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부정하고 세상은 보는 사람의 관점, 즉 관찰자가 가지고 있는 이론 이익 이념 등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실증주의-탈실증주의 논쟁에서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들(존재론)이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들(인식론)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인식론을 존재론의 우위에 두는 실증주의-탈실증주의 사이의 이러한 논쟁구도에 반대한다. 구성주의는 관찰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하고 믿는 대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상호 주관적으로 공유될 때에만, 즉 사회적으로 구성될 때에만 존재적 지위가 부여된다. 따라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현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 구성주의, 특히 웬트의 입장이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구성주의는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 사이의 기존의 이론논쟁 구도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교묘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즉 물질론과 실증주의, 관념론과 탈실증주의의 결합을 당연시하는 기존의 철학적 선택을 벗어나 관념주의적 존재론과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결합하는 이른바 ‘중도론(via media)’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웬트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탈실증주의의 공헌을 받아들이면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는 실증주의의 편을 들고 있다.
이러한 구성주의가 국제정치의 이론논쟁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명백하다. 구성주의를 채택한 국제정치이론가들의 최대의 공격대상은 신현실주의다. 웬트의 월츠 비판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Wendt 1999, 15-18). 첫째, 월츠의 구조주의는 궁극적으로 개체주의다. 그가 미시경제이론에 대한 비유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둘째, 물질적 능력의 배분으로 구조를 정의하고 있는 물질주의자이다.
이로 인하여 월츠는 국제체계의 사회적 측면과 변동의 가능성을 무시한다. 셋째, 국제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국제정치의 중요한 부분을 연구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요컨대 월츠의 개체론적 물질론적 존재론과 국제적 과정에 대한 무시는 결국 그의 이론을 삼중적 무능에 빠지게 만들었다. 개체론으로 인하여 국제정치체계에 대한 설명도 못하고, 물질론으로 인하여 변동을 설명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과정에 대한 무시로 인하여 단위수준의 행동, 즉 개별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대한 설명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주의의 신현실주의 비판은 사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을 기초로 어떠한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느냐에 있다. 신현실주의에 대한 구성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근접하고 있는 이론가가 바로 웬트 자신이다. 웬트의 최근 저서인 {국제정치의 사회이론}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수행하고 있다(Wendt 1999, 20-21).
첫째, 존재론적 전환이다. 국제적 구조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웬트는 이것이 물질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물질적 권력이나 이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의 의미나 중요성 자체가 체계의 사회적 구조, 즉 문화를 통하여 결정된다. “국제적 생활의 특성은 국가들이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기대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들은 물질적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주로 구성된다”(Wendt 1999, 20).
둘째,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이 국제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구성된다. 물론 국제사회의 상호작용 밀도가 아직도 국내 사회의 그것보다 낮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국내 사회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국가의 정체성이 국제사회의 다른 국가들이 그 국가에 대하여 가지는 관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사회관계와 이에 기초한 국가들의 성격과 대외적 목적은 국제적 과정을 통한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인일 수는 있지만 이것에 의해 국가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무정부적 체계는 상호작용의 과정과 관계없이 어떤 하나의 결과만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과 관련 없는 무정부적 체계의 논리는 없으며, 과정에 따라 다양한 결과들이 산출될 수 있다. 즉 ‘무정부상태의 논리’라는 것은 없으며, 국가들이 어떠한 욕망과 이익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정책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무정부상태의 효과는 달라진다. 웬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Wendt 1999, 308-9).
‘무정부상태의 논리’란 것은 없다. ‘무정부상태’라는 용어 자체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해준다. 이것은 부재(‘규칙이 없는’)를 의미하지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이 없는지를 말해주지 무엇이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빈 용기(empty vessel)이며 내재적인 의미가 없다. 무정부상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류와 그들 관계의 구조이다.
주지하다시피 국제체계의 성격에 관한 논란의 중요한 부분이 무정부적 구조의 인과적 힘에 대한 것이다(Milner 1991). 신현실주의자들에 의하면, 무정부상태는 본질적으로 자력구제체계이고, 군사경쟁 세력균형 전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제도들이 자력구제체계를 중요한 정도로 완화한다고 주장한다. 웬트는 국제관계에서 국가들의 사회적 역할들이 적(enemy), 경쟁자(rival), 친구(friend)의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무정부상태의 구조가 적어도 세 가지의 문화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Wendt 1999, 247). 적의 역할이 지배적일 때에는 홉스적(Hobbesian) 문화가, 경쟁자의 역할이 지배적인 경우에는 로크적(Lockean) 문화가, 친구의 역할이 지배적일 때에는 칸트적(Kantian) 문화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웬트는 불(Bull 1977)을 따라서 이러한 상이한 문화적 요인들이 국제체계 속에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 각기 연결된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들이 여전히 설명할 무언가가 있다고 볼 수 있다(Wendt 1999, 310). 그러나 웬트는 국제관계가 중대한 구조적 변동, 즉 문화변동을 겪어왔으며, 지금 또 다시 그러한 변동의 와중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7세기 이전까지 국가들은 죽느냐 죽임을 당하느냐가 무정부상태의 논리인 홉스적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이 로크적 문화를 건설했고, 이것은 식민주의라는 홉스적 방법에 의해서이기는 하였지만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화 속에서는 주권의 상호인정원칙에 의해서 국제적 갈등이 제한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제체계는 또 하나의 구조적 변동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아직 서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로크적 문화에서 집단안보에 기초한 칸트적 문화로의 변동이라는 것이다(Wendt 1999, 314).
VI. 국제정치 이론화의 새로운 지평
이론논쟁은 이론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각 이론은 서로간의 비판을 통하여 각각의 약점을 발견하고 보완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론논쟁은 또한 연구대상에 대한 이해도 증진시킬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설명이 제기되고, 각 이론이 상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론논쟁은 이론과 대상 간의 관계, 이론 내부의 논리적 체계 등이 엄밀히 점검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론적 발전과 현실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논쟁이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상이한 철학적 이념적 배경에서 수립된 이론들 사이에서는 건설적인 논쟁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로를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상대주의로의 도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철학적 인식론적 논쟁이 소모전으로 그치고 말 가능성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도 양면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이론 발전과 현실 인식의 증대에 기여한 면이 있는가 하면, 비판을 위한 비판, 소모적인 논쟁이 이루어진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론논쟁이 이루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신현실주의 논쟁은 한편으로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이론적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논쟁을 통하여 국제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체제론을 통하여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체계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세계화된 세계에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이론발전의 기초들을 쌓았다. 탈실증주의 논쟁은 기존의 주류 이론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통하여 이들이 기초하고 있는 인식론적 이념적 속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이론적인 ‘게릴라전’을 통하여 무차별 비판을 감행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국제정치와 국치정치학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탈근대론과 비판이론은 인간해방을 향한 규범적 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게 하는 이론형성의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구성주의는 패러다임 논쟁과 탈실증주의 논쟁의 성과를 반영하면서 둘 사이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중도에서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적 종합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이론논쟁을 더욱 가열시킨 것은 역시 국제정치 현실의 변화였다. 탈냉전 세계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최근의 국제환경 변화는 사실 기존의 이론들에게 상당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제정치이론의 일차적인 연구대상인 국가와 국제체계의 본질과 과정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안팎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고, 국제관계는 세계경제의 통합, 세계적 이슈들의 등장, 국제제도들의 확대와 심화 등으로 그 밀도를 급속히 높여가고 있다. 권력행사의 자원과 수단에 있어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장 금융 통화 기술이 주요한 권력자원으로 등장했고, 이것들의 흐름에 대한 영향력이 권력행사의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이론논쟁의 승패는 이러한 현실적 변화들을 누가 얼마나 잘 설명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이론논쟁의 성과와 국제적 세계적 현실의 변화를 감안할 때 앞으로 국제정치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으면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이론화 작업은 제도이론과 구성주의의 통합일 것이다. 사실 구성주의의 등장과 발전은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진화과정에 나타났던 신기능주의, 레짐이론,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Ruggie 1998b; Sterling-Folker 2000). 구성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론자들이 국제제도가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일면적인 효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국제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국제제도들은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을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질서의 기초로 작동한다.
우선 크라토크빌과 러기(Kratochvil & Ruggie 1986; Ruggie 1998b)가 국제레짐에 대한 기존의 개념정의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크래스너(Krasner 1983, 2)의 개념정의에 따르면, 국제레짐이란 ‘국제관계의 특정 영역에 있어서 행위자들의 기대들이 수렴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원칙들, 규범들, 규칙들, 의사결정절차들’을 가리킨다. 레짐이론가들은 이러한 레짐이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실증적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그 결과 레짐의 형성과 존재 그 자체가 국가들 사이의 공유된 의식, 기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러기(Ruggie 1998b, 89)의 표현을 빌리면, “레짐의 구성적 기초로 수렴하는 기대(convergent expectations)를 강조하는 것은 레짐에게 불가피하게 간주관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크라토크빌과 러기는 기존의 레짐이론가들이 이러한 인식을 하지 못함으로써 ‘인식론과 존재론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웬트와 두발(Wendt & Duvall 1989)도 1980년대의 신제도주의자들이 국제제도의 개념을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제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국제제도들의 구성적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제도의 개념을 불(H. Bull)과 같은 ‘구제도주의자’들처럼 넓은 의미로 확대하여 이른바 국제사회의 ‘기본적’ 제도들을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국제제도의 역할을 이해하려는 구성주의자들의 시도는 불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제관계를 국제체계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불은 일찍이 국제체계와 국제사회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Bull 1977, 9-10, 13).
국가들의 체계(또는 국제체계)는 2개 이상의 국가들이 그들 사이에 충분한 접촉을 갖고 서로의 결정에 충분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전체의 부분들로서 행동할 때 형성된다. … 국가들의 사회(또는 국제사회)는 (이미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일단의 국가들이 공통이익과 공통의 가치들을 인식할 때 형성되는데, 이 경우 국가들은 서로의 관계에서 공통의 규칙들에 의해서 스스로 규제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공통의 제도들을 운영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국가들이 국제관계에서 수용하고 있는 공통의 규칙들과 제도들이 국제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는 지적이다. 불은 이러한 기본적인 제도들로서 세력균형, 국제법, 외교기구, 강대국 관리체계, 전쟁 등의 다섯 가지를 들고, 이들이 국제질서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는 역할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불은 이러한 기본적 제도들로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국제사회의 관계유형을 밝히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국제사회가 거꾸로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을 구성하는 측면을 무시했다(정진영 1994). 구성주의의 도전은 불의 국제사회론과 제도이론의 공헌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이 보여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기(Ruggie 1998a, 862)의 다음과 같은 말은 구성주의 도전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구성주의 프로젝트는 (국제정치학의) 비교적 좁은 이론적 영역의 개방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이익과 정체성을 다시 문제시하고, 사회적 행위와 사회질서의 간주관적 기초를 깊숙이 포용하며, 사회적 행위를 제한함과 동시에 사회적 행위에 의해서 창조, 재창조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변화되는 구조의 ‘이중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공간과 시간의 차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따라서 기존의 국제정치이론들에 대한 구성주의의 도전은 아주 본질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성주의는 국제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파악하려 한다. 기존의 주류 이론들이 국가들의 합리적 선택에 기초한 상호작용, 힘의 배분에 따른 효과를 중심으로 국제정치의 현실을 파악한다면, 구성주의는 주권국가와 국제체계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밝혀내고, 국가들의 행위를 규칙과 규범, 설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그러면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무정부적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국제사회가 발전하는가? 우선 부잔(Buzan 1993)은 국제사회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주권의 상호인정’과 ‘법적 동등성’을 제시하고 있다. 부잔은 이것이 국제관계에 있어서 ‘규칙과 제도의 발전을 위한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루스-스미트(Reus-Smit 1997)는 그러한 조건들을 기초로 하여 국제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조건들이야말로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구조(constitutional structures)’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정당한 국가이고 국가의 어떠한 행동이 정당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간주관적 신념 규범 원칙들이 바로 그러한 구조에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 가지의 규범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국가의 도덕적 목적에 관한 간주관적 신념이다. 그리고 주권의 조직원리와 절차적 정의의 규범이 포함된다. 이러한 헌법적 구조들에 기초해서 국제사회의 ‘기초적 제도들(foundational institutions)’이 형성되는데, 여기에는 ‘쌍무주의, 다자주의, 국제법, 외교, 강대국에 의한 경영’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국제사회의 가장 구체적인 제도들로는 ‘이슈별 레짐들(issue-specific regimes)’을 들 수 있는데, GATT / WTO, IMF, NPT(핵비확산조약)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무정부적 국제관계가 이러한 국제제도들의 발전을 통하여 국제사회로 전환될 수 있다는 주장은, 웬트를 비롯한 구성주의자들이 무정부상태가 권력정치라는 하나의 논리만을 양산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직결돼 있다. 무정부상태하의 국제관계는 국제제도들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웬트(Wendt 1999)는 그러한 국제관계의 모델들로 적 경쟁자 친구라는 세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불(Bull 1977)은 홉스 그로티우스 칸트적 요소에 대한 구분을 제시했다. 허드(Hurd 1999)는 사회적 질서유지의 원천으로 힘 자기이익 정당성이라는 세 모델을 제시하고, 이것을 국제사회에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구성주의는 넓은 의미의 국제제도들이 국제관계를 사회적 관계로 전환시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에 기초한 국제정치의 사회이론이 국제정치이론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에서 사회적 요소들의 밀도에 차이가 나타나고 상이한 국제사회 모델들이 적실성을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들의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구성주의와 제도주의의 접점을 더욱 넓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바로 제도주의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제도주의는 신현실주의의 비판에 맞서 국제제도들이 효력을 발휘하고 국제협력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적실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이론적 발전을 이룩했다. 코헤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도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협력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구체화하려고 함으로써 제도주의 이론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현실주의적 명제들이 유효한지를 보여준다. 제도주의가 현실주의를 포괄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Keohane 1995, 42).
그러나 제도주의자들의 국제제도에 대한 관심은 구성주의자들의 비판처럼 매우 좁은 영역에 국한돼 있었다. 따라서 제도주의자들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국제제도의 형성과 효과에 대한 연구로 그 관심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사실 코헤인(Keohane 1989, 4)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제도들의 중요성을 그들이 유인체계에 미치는 효과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제도들은 국가지도자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지도자들의 동기 및 이익의 추정에 대한 가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국제제도들은 규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구성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제도주의와 구성주의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론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국제질서의 형성과 작동을 현실주의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형성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통합이 결코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무정부상태가 권력정치의 논리만을 산출할 것이라는 가정은 논리적으로 단순하고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화는 현실에 대한 적실성의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푸찰라(Puchala 2000, 138)의 지적은 적절하다. “아마 현실주의가 국제관계의 어떤 형식을 포착할지는 모르지만 그 본질을 무시하고 있다. 현실주의는 논리적으로는 우아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와 구성주의 이론들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복잡하고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탈냉전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국제적 의제와 행위자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문제가 심각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관계를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국제제도의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론적으로 긴요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코헤인(Keohane 1998)의 지적처럼, “1990년대에 세계정치를 분석하는 것은 국제제도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역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의 국제제도들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성 결핍(democratic deficit)’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취약점은 국제질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글로벌 거버넌스의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오늘날 요청되고 있는 국제정치이론의 새로운 통합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국가 국제제도 국제질서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국제사회가 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국제적 규범과 제도들의 제약하에서 국가들의 전략적 행동과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보다 규범적 차원에서 국제관계의 제도화 민주화를 진척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VII.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구미학계에서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한국에서 국제정치학 및 관련 학문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해야 할까? 우선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이 우리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거의 자명하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러한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국제정치학자들이 (신)현실주의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도 다분히 미국학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추세를 연장해서 보면,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의 귀추가 우리 학계의 이론적 정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물론 한국학계에서 구미이론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영선 1995).
그러면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에서 최근 나타나고 있는 제도주의와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우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현실적 차원과 규범적 차원의 구분이 필요하다. 먼저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국제관계 현실은 남북관계와 동북아 지역정세를 고려할 때 여전히 냉전적 상황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그만큼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이론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역시 구미이론에 대한 의존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서구적 국제사회의 확산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규범적 차원에서, 제도주의-구성주의 이론의 통합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이론발전이라고 판단되며, 우리 학계가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국제관계 속에 다양하고도 깊숙이 개입돼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관계가 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적 규범에 기초한 협상과 정당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국제사회의 규범이나 제도들이 ‘민주성 결핍’의 문제를 안고 있고 강대국들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타당하다. 그러나 물리력의 차이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주의의 세계보다 공통의 규범과 제도가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국제사회적 관계가 중소국가들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다.
마지막으로, 제도주의와 구성주의 이론의 수용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들이 남북관계의 현실과 변화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적실성과 유용성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을 외부세계로 이끌어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정책의 논리적 기반은 비교적 명백하다. 북한과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증대하면 북한이 국제적 규범체계 속으로 편입될 것이고, 이에 맞추어 북한 내부의 변화도 촉진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한은 결국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변화될 것이며, 이는 남 북한 간의 평화공존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이 체제붕괴의 위험 때문에 개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개방이 체제에 위험을 주기보다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게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에는 북한의 대외 개방노력에 대하여 한국이 일방적으로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렇게 파악할 때 제도주의 이론이나 구성주의 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우선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북한과의 교류증대가 남 북한 간의 제도설립이나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하여 북한의 행동이 규율되는 측면을 중요한 변화로 주목할 것이다. 따라서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북한과의 접촉과 교류를 다양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국제협력의 실현방안으로 상호주의(reciprocity)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력하다. 일방적 시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임승차전략을 택하게 만들고, 국내적 비판을 불러일으켜 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정진영 1997).
구성주의 이론가들은 북한의 국제사회 참여와 국내적 변화를 통하여 북한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중시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구성적 규칙들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이 과연 책임이 있는 주권국가인가, 그리고 북한의 정체성과 이익이 다른 국가들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 포용정책이 성공하려면, 북한이 지속적으로 대외관계를 넓혀 나가고 북한 내부의 개방과 개혁을 통하여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북한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북한이 스스로 이러한 길을 택하지 않을 경우에 한국이 과연 북한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제도주의 구성주의가 한국의 일반적 국제관계나 대북관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얼마나 적실성 유용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제정치학계가 여전히 (신)현실주의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구미학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방향으로 떠오르고 있는 제도주의-구성주의에 대한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질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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