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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

박근혜는 고종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프레시안 books] 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기사입력 2013-06-14 오후 6:43:24

 

고종의 현실 인식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그들(서양)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넘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 다시는 서양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 것이다. 각 항구의 가까운 곳에 설사 외국인이 놀러 다니는 경우에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면서 먼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 이왕 서양의 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진 이상 경외(京外)에 세워놓은 척양비(斥洋碑)는 시기가 달라진 만큼 모두 일제히 뽑아버릴 것이다. 그대 사민(士民)들은 이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고종이 내린 교서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거대한 전환기에 처한 조선조 말 고종은 여러 단계를 거쳐 대외관계의 개방적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기울인다. 부인할 수 없이 전개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기세 앞에서 국가의 생존과 새로운 내용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교서에 압축된 의식은, 당시 “조공책봉”이라는 중화 체제의 기존 질서가 근대 국제법의 번역인 <만국공법>이라는 질서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되는 바는, 고종이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조의 근대적 고뇌

▲ <조선 정치사의 발견>(강상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창비 펴냄)은 이러한 고종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주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무력하고 무능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달린 고종에 대해, 단지 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교정을 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19세기라는 대전환의 시기에, 문명의 틀이 바뀌는 지점에서 조선의 정치 중심에 있던 왕의 사유방식과 선택, 그리고 정치적 갈등의 현실을 보다 정밀하게 읽어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근대적 고민에 쌓여 있던 조선 정치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조선조 말 고종의 권력이 근대 체제의 도전 앞에서 무지했던 시기의 정권이라는 단순한 평가와 해석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당대의 집권 세력과 국왕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 치열하게 “전환기의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의 복원과 해석은 당연히 오늘날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분단된 한국(조선)의 역사적 명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조선의 정치 지형과 문명 전환의 위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대한 조선 정치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00년 동안 작동해온 조선 정치의 원칙과 현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근대적 변화를 기준으로 당시 조선조의 사유방식과 행동, 선택을 오해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강상규는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華夷)론적 명분론” 등에 부딪힌 고종의 현실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다시 말해 고종이 아무리 개혁 군주로서 나서고자 했어도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온 조선 정치의 전통적 운영 방식과 사고 체계가 극복되지 못한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던 고종의 역할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취약한 군주, 그러나…

그에 더해 바로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고종이 당시의 제약을 어떻게 뚫어내고자 진력을 다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임진년 7년 전쟁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17세기 조선 중화사상이 그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지만 조만간 이러한 사유 체계는 문명의 대전환기에 도리어 장애가 되고 만다. 중화 체제의 동요와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구질서 체계를 고수하는 것은 국제적 고립을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탁월한 영도력이 발휘되었던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의 정치는 외척과 붕당정치의 폐해에 빠져들었고 왕위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고종은 그 정통성이 대단히 취약했다.

사도세자로부터 시작해서 흥선대원군에 이르는 계보는 정통 왕조의 맥락에서 너무 거리가 멀었고 세자로서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출발이라는 점은 고종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랬던 그가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기 시작한 이후, 조선 중화주의라는 생각의 틀에서 점차 달라져 가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흥미롭고 의미 있다. 이 과정에서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역할을 주목한 강상규는, 박규수가 “진주 민란의 수습 책임자인 안핵사, 평양 감사 시절 대동강에서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섭과 화공작전 지휘, 양무운동을 벌이던 청에 사절단장“을 지낸 경력이 고종의 대외 관계 인식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보인 고종

▲ 고종의 초상. ⓒen.wikipedia.org

메이지 유신의 현실을 보고 돌아온 일본수신사 김기수의 고종에 대한 보고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들의 이른바 황제(메이지 천황)는 나이가 지금 바야흐로 이십오 세인데, 폐지해야 할 것 같으면 관백도 가히 폐지하고 변경해야 할 것 같으면 제도도 변경했습니다. (…)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영사관으로 와서 머물게 되므로, 그 사람들을 먹이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후대하면서 (…) 곳곳마다 화륜선, 화륜차를 만들고 또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상업을 경영케 하였으니 요는 온 힘을 다해 재화를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상하가 부지런히 이로움을 취하고 부국강병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있으니 (…) 지금은 경전문자는 무용지물로서…….”

일본과 중국의 빠른 변화 앞에서 고종은 결국 대외관계의 다변화로 국제 정세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고자 노력하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 금고를 털어 해외에 사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고 유길준, 윤치호 등의 유학생을 만드는 작업에까지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종은 중화 체제의 틀에서 조선이 이탈하는 수순을 밟으려 하고, 이에 대한 청의 간섭이 보다 노골화하고 그의 폐위까지 논의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리홍장(李鴻章) 사이에 오간 서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갑신사(갑신정변)는 일본을 끌어들여 청국을 거부하고자 한데서 나온 오류였는데, 근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국을 배척하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켜버리고…….”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고종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하는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고종의 대외적 결단력이 그간 너무 가볍게 평가되었고 때로는 아예 묵살되었던 것인데, 이에 대해 강상규는 이 조불 조약 체결을 맡은 미국인 데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껏 고문의 역할을 맡았던 데니를 직접 기용하여 실질적인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조불 조약이 체결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신을 조선의 고문으로 파견한 리홍장으로부터 조불 조약 협상에 참가하지 말고 또한 동협상의 처리는 위안스카이에 위임하라는 권고를 받은 미국인 데니가, 자신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당시 미국의 대리공사 포크의 도움을 받아 협상이 결렬될 위기를 극복한 것이 이러한 고종의 결단력에 의해 비롯된 것임은 기억할 만하다.”

고종은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일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이후 벌어진 청일 전쟁은 이러한 동아시아 전체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조선이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주권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법적 관계로 진입하는 동시에 식민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고종과 조선조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점차 사라져가면서 붕괴되어가는 절차를 밟게 된다. 중화 체제로부터의 이탈과 근대 체제의 주체적 진입이라는 과제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거울, 그 눈물겨운 기록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새삼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수많은 내외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환의 시기에 위치하게 된 고종이 눈물겨울 정도로 당시의 정세에 대응하려는 여러 노력을 했다는 점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라는 사실이다. 군주와 신하 간의 만만치 않은 상호 견제와 권력 균형의 정치,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조선 정치의 전통이 수백 년의 체제 유지에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으나 그것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상황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어떤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이 근대의 역사는 그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지금 재편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한 상황 적응력 내지 주도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고종의 무력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 당시의 치열한 고뇌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각종 국가 생존의전략의 가치가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 있던 국가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국왕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지침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시기의 고통과 우여곡절을 망각하는 공동체는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있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역사의 보복”이라는 말은 허망하지 않다. ‘조선 정치사의 재발견’은 역사로부터 금맥을 캐는 일이 될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외면하는가?

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외면하는가?

[동아시아를 묻다] ‘중화’와 ‘진보’

이병한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기사입력 2013-06-17 오전 10:02:20

 

진보의 역설

<역사비평> 2013년 여름호를 읽었다. 인화성이 강한 글이 한 편 실렸다. 김희교의 ‘<역사 비평>과 한국의중국 담론의 진로‘이다. 한국 학계는 근엄하다. 실명을 거론하여 비판하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영글지 않았다. 자칫 본인만 매장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기(士氣) 충만한 시도를 거들고 북돋고 싶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논쟁으로 확산되면 좋겠다.

김희교의 주장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진보 진영의 중국 담론은 주류 담론과 차별성이 없다. 미국에 대한 날선 입장 차이와는 달리 중국 인식과 비판은 좌우합작, 대동소이하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도 입을 맞춘다. 민주주의 결여를 비판하고, 대국주의 동향을 우려한다. 그 결과 보수 담론 강화에 일조하고 만다. 한미 동맹 체제를 고수하는 보수의 전략에 무기력하다. 어떻게 중국 담론을 진보적 실천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요체이다.

김희교는 중국의 실질적인 역할을 주목한다. 북한과 미국을 제어하며 동북아의 전쟁 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위협론과 실제 역할 사이의 간극에서 ‘진보적 중국 담론’의 활동 공간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즉 미국의 패권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 간에 존재하는 억압 강도의 차이를 간과하지 말고, 그 차이를 한층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틈새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다.

흥미가 한층 배가되는 지점은 진보 진영의 한 축, 아니 주축을 이루는 창비의 동아시아론도 겨냥하고 있음이다. 담론의 거듭된 진화에도 불구하고 ‘운동성’은 역부족이라는 진단이다. 20년이 지나도록(동아시아론 원년으로 간주되는 1993년은 북핵 위기 원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구조는 여전하다.

김희교는 진보적 실천이 미흡한 까닭을 동아시아론의 논리 자체에서 찾는다. 중국을 협력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대국화의 가능성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특유의 ‘이중 과제론’적 발상이 병통이다. 중국과의 협조란 대저 지식인과의 교류에 그친다. 창비식 ‘균형 감각’이 도리어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는 구체적 실천을 낳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 담론 지형에서도, 한중 관계에서도 실효적 변화를 거두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머문다.

가타부타는 하지 않겠다. 고수들의 응전을 기다린다. 한반도 창공을 가로질러 주요 G2(주요 2개국)가 ‘신형 대국 관계’를 논하는 비상한 시기이다. 북벌론과 북학론에 버금가는 백가쟁명이 펼쳐지길 고대한다. 나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중국과 진보’의 문제를 숙고해보고 싶다. 중국의 진보적 활용 못지않게, 나는 20세기형 진보를 성찰하고 해독하는 방편으로 중국을 주시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신중국의 역설

20세기의 신청년은 제 아비와 할아비를 부정하며 등장했다. 그들의 젖줄은 신학(新學)이었다. 한학(漢學)은 처분되고, 서학(西學)에 매진했다. 서학을 배타할 것은 없다. 널리 배우는 것은 크게 권할 일이다. 그러나 치우쳤다. 서학은 지나치고, 동학은 모자랐다. 그래서 좀체 중화제국의 환골탈태를 파악하지 못한다. 작금 놀랍도록 빠른 기세로 복원되고 있는 전통 중국의 재림도 낚아채지 못한다. 불가사의할 뿐이다. 침소봉대할 뿐이다.

‘진보적인 중국 활용’이 미진한 근본적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싶다. ‘진보’를 자임할수록 동방문명을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것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은 크게 잘못 알고 있다. 송대 이래 신분제를 일소하고 자유 경쟁 체제를 지속한 중국을 봉건 왕조, 전제 국가 운운하는 식이다. ‘최초의 근대’이자 ‘천년의 근대’가 눈에 들지 않는 것이다.

가령 ‘일당 독재’를 보자. 개혁 개방 30년, 경제 개혁에 비해 정치 개혁이 미진하다는평가가 십중팔구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지난 30년, 중국만큼 지속적으로 정치 개혁을 단행한 국가는 드물다. 나라의 골격인 헌법만 네 차례나 바뀌었다. 55년 체제의 일본과 87년 체제의 한국에 견주어도 훨씬 신속하고 폭넓은 개혁이다.

민주 대 독재라는 상투적인 도식 탓에 그 일관된 진화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거제와 다당제만이 ‘유일 정치’인 마냥 맹목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우파의 선동은 반감을 표하면서도, 정작 중국을 평가하는 잣대는 그 아류를 답습하는 당착이 부지기수이다. 진보를 측정하는 불변의 잣대에 연연하는 보수적 관성이 적지 않다. 복잡다단한 현실을 단순구도로 재단한다는 점에서 가히 이데올로기적이다. 14억 문명 국가의 대모험에 지적 호기심조차 느끼지 못하니 딱한 노릇이다.

중국공산당을 ‘거대한 학습 조직’에 비유한 적이 있다. 보태고 싶다. 거대할 뿐 아니라 ‘왕성한 학습 조직’이기도 하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전 세계 정당 가운데 저토록 학습량이 많은 집단을 알지 못한다. 최고 명문 칭화대학교의 학부생은 얼추 10퍼센트가 공산당원이다. 반해 대학원생은 50퍼센트 이상이 당원이다. 그 우수한 인재를 당교(黨校)에서 또 교육시킨다. 한 번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평생 교육’을 담당한다. 즉 중국공산당은 이념 조직이 아니다. 학습 수준이 가장 높은 ‘지식 기반 정치 조직’이다. 20세기형 전위정당을 탈피하여 실력 중심의 지식인 관료 체제를 복원해 간 것이다.

‘독재’도 얼토당토않다. 집단 지도 체제 아래 주석은 대통령만도 권한이 못하다. 정치국 상임위 9인은 서열이 확정되기 전까지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진용이 갖추어지면운명 공동체이다. 묵시적인 합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에 독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최고 지도자들의 능력 또한 ‘인기투표’로 선출되는 어지간한 국가들보다 높다. 이론과 실무를 고루 익힌 백전노장들인 탓이다.

노장들이 노욕을 부릴 수도 없다. 연령 제한으로 권력 승계가 제도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30여 년이 소요되었다. 과연 정치 개혁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초창기 30년에 견주자면 ‘변혁’에 가깝다. 이를 변화로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불감증이 만연하다. 진화를 멈춘 제도는 도리어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래서 ‘CHANGE’와 ‘새 정치’에 열광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 신중국의 커다란 역설이 있다. 혁명에 혁명을 거친 중국은 점점 더 유교 국가에 근접해가고 있다. 사회주의조차도 ‘보유론'(補儒論), 즉 유교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활용해 가는 듯 보인다. 돌아보면 20세기를 연 쑨원도 ‘천하위공’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현대판 분서갱유를 단행했던 마오쩌둥도 ‘실사구시’를 표방했다.

두 사람은 공히 ‘중화’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중화민국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즉 중국 혁명은 속 깊이 복고(復古)이자 중흥(重興)이다. 이제는 ‘조화사회’, ‘화평굴기’, ‘책임대국’ 등 국책 구호 자체가 유학풍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 경영의 소프트웨어와 운영 체계는 다분히 유교적이다.

중국 제도를 편드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과제가 산적하다. 우리가 따를 모델도 아니다. 다만 저들은 저들의 논리로 부단히 ‘진화’하고 있음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고려의 태를 벗고 조선의 꼴을 갖추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미국도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을 거쳐 100년에 가까운 연마 끝에 국가의 틀을 다졌다.

신중국은 여전히 젊은 국가이다. 지금도 ‘대장정‘의 와중이다. 그래서 중국을 비판하는 잣대 또한 내재적이어야 한다. ‘조화사회’를 구현하고 있는가, ‘책임대국’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언행이 일치하는지, 명실이 상부하는지를 깐깐하고 꼼꼼하게 따질 일이다. 그래야 비판을 당하는 쪽도 따끔하고 아픈 법이다.

‘중화’의 역설

유교 국가의 갱신이라는 당혹스런 현실 앞에 ‘중화주의’, ‘중화 사상’에 대한 비판이 널리 퍼져있다. 대중적 차원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만연하다. 그러나 ‘중화’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중국만의 것도, 한족만의 것도 아니다. 동방 문명의 정수를 일컫는 보편명사이다. 17세기 이래 동아시아는 저마다 중화를 자처했다. 그래서 혹자는 ‘중화 사상 공유권’이라고도 했다. 중화를 일국으로 축소시킨 것이야말로 20세기의 착각이고 착시이다.

대한제국조차 그러하다. 고종은 독립문만 세운 것이 아니다. 천하의 도가 쇠하여 대륙에서 중화 문명이 퇴락하니, 반도에서라도 중화 문명을 부흥시키겠다는 포부가 역력했다. ‘근대화된 중화’를 꿈꾸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광무(光武)였다. 왕망의 찬탈에 따른 천하대란을 수습하고 한제국을 재건한 광무제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즉 대한제국은 근대 적응에 실패한 대청제국을 대신하여 중화 부흥의 보루가 되고자 했다. ‘독립’만을 강조하는 ‘진보’의 왜곡된 눈이 이러한 복합성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곡해한 것이다. 혹은 알았더라도 외면하고 침묵한 것이다. 또는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며 그 ‘낙후성’을 질타한 것이다.

중국은 20세기에도 중화주의가 여전했다는 비판 또한 곱씹어 볼 일이다. 진술 자체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근대에 미달했다는 가치 판단은 녹록치가 않다. 만약 저 거대한 대국이 중화를 방기하고 조숙하게 근대 국가로 변모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조선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본이 중화 세계의 원리를 방기함으로써 류큐도 대만도 조선도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 아닌가? 중국이 제국 일본을 능가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중국이 조선의 숨통을 쥐어온 것은 점점 ‘근대화’되면서이다. 그나마 한족 중심의 대한(大漢)제국을 표방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표방한 것이야말로 천만다행이지 않을까? 그래서 대한민국 또한 중화민국의 우산 아래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강박 관념과 고정 관념을 거두고 상상력을 일깨울 일이다.

기실 ‘중화 사상’, ‘중화주의’라는 조어 자체가 20세기의 산물이다. ‘-ism’의 번역투이다. 19세기까지의 문헌 어디에도 저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허면 언제 등장했을까? 1930년대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일본이다. 제국 일본에서 ‘발명‘된 신조어이다. 왜 생겨났을까?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항전하는 중국을 폄하하기 위해서이다.

지나 놈들은 국·공을 막론하고 중화주의, 중화 사상에 찌들어서 ‘근대’ 일본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본은 과연 ‘근대’적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나서서 부추겼다. 상부상조하던 중화 세계에서 떼어놓아 홀로 설 것을 재촉했다. 그래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500년 조선의 망국 앞에 ‘독립’이 있었음을 서늘하게 기억하자. 실로 독립협회주역들의 행보들도 석연치가 않다. ‘중화주의’라는 신생어의 탄생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는 이 심란한 사정 또한 필히 기억해 둘 일이다.

애초 역사에 ‘진보’는 없다. 최소한 동방인의 감각으로는 그렇다. 어지러운 시대와 가지런한 시대가 있을 뿐이다. 난세와 치세가 돌고 돈다(一治一亂). 20세기는 난세였다. 중화 세계의 질서와 원리가 무너졌다. 늘 그러했다. 몽골 침입, 임진왜란·병자호란 모두 중화 문명에 귀의하지 않는 오랑캐의 분탕질이었다.

20세기도 예외가 아니다. 대전(大戰)이 거듭되는 대란(大亂)기였다. 1000년에 비추어 100년을 돌아보자. 얼추 300년을 터울로 난세가 일었다. 특히 북방 제국과 남방 제국이 승하면 반도는 극히 혼란했다. 1000년만의 식민과 분단 또한 남방 제국과 북방 제국이 동시에 일어나 중원을 압도해서이다.

그 어지러웠던 100년을 근대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천만만만 아닌 듯하다. 좌우(左右)의 척도만큼이나 고금(古今)의 잣대도 중시하자. 동방인은 항상 오늘을 과거에 되비추어 성찰했다. 신(新)을 맹목하며 고(古)를 구(舊)로 타박하지 않았다. 지긋한 마음이다. 아름다운 태도이다.

그 동서/좌우/고금의 복합 좌표 안에서 20세기의 ‘진보’란 무엇이었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이병한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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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 전선 확대 속 양국 정상회담 앞두고 아테네·스파르타전 화두

입력시간 : 2013.06.08 03:33:16
미국 서부의 휴양지 서니랜즈에서 현지 시간으로 7, 8일 진행되는 미중 정상회담의 최대 화두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그리스 문명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충격에 빠진 기존 세력 스파르타는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전쟁을 일으킨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30년 간 지속된 이 전쟁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기록했다.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의 대립과 긴장이 불가피하게 충돌로 이어진다는 이 논리는 이후의 역사에서도 되풀이됐다. 1500년 이후에만 15회 세계 파워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11회는 전쟁을 통해서였다.

그레이엄 엘리슨 하버드대 벨퍼센터 소장은 이날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파워의 전환기에 강대국들은 충돌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며 “이번 회담에서 미중 정상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도 100년 전독일의 경제력이 기존 파워 영국을 추월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며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언급했다. 미국은 이런 점을 의식, 충돌의 불가피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미중 조기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머리를 맞대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강대국으로 급속히 부상 중인 중국이 충돌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국 갈등의 전선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오바마 정부의 핵심 전략인 아시아 중심 정책에 대해 중국은 미국이 군사ㆍ경제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며 대응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이 최근 중국의 사이버공격을 군사ㆍ경제 문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중국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에 대해 중국은 시 주석 체제 이후 신형 대국 관계란 화두로 던지며 미국과 대등한 국제적 위상을 추구하고 있다. CSM은 “양국 모두 서로에게 다양한 불신을 갖고 있다”며 “두 정상이 이런 문제를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도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이번 회담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총리와 연쇄 회담한 끝에 ‘죽의 장막’을 연 것에 비유했다.

그러나 두 정상이 대만, 인권,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등 중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북한과 이란 핵개발, 자유무역, 상호투자 등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는 문제에서는 합의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엘리슨 소장은 “미국은 중국의 부상이 필연적으로 세계 최강국 미국에게 역사적 도전인 점을 인식해야 한다”며 “양국이 충돌을 막기 위해 정상회담뿐 아니라 한 세대에 걸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정치이론의 역사적 이해

국제정치이론의 역사적 이해

 

 

 

I. 국제정치학의 기원

 

오늘날 국제정치는 서구, 특히 미국중심의 규범과 제도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국제정치의 이론 역시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이 미분화된 서구의 중세적 질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무너지고, 30년 종교전쟁(1618-1648)의 강화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은 대내적으로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고 대외적으로는 주권의 평등을 전제하는 주권국가들을 국제정치의 주체로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서구의 근대국제체제는 영토를 단위로 하는 정치단위를 근간으로 하였으며, 문명내의 정치단위들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이나 중국적 국제질서와는 상이한 것이었다. 지속적인 전쟁과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세력균형의 기제로 인해 16세기 초 약 500개에 달하던 서구의 영토국가는 일차대전 이후에는 30여개 이하만이 존재하게 된다.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틸리의 명제는 서구의 근대국제체제의 역사를 단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효과적인 정치, 경제체제, 특히 영토 내에서 합법적 폭력의 정당한 독점을 확립하고, 그에 기초한 군사적 능력을 가진 단위만이 생존하게 되는 한편, 서구의 개별 국가들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비서구지역으로 팽창하여 19세기 후반의 심화된 제국주의적 경쟁을 통해서는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비서구적인 국제질서를 붕괴시킨다. 아편전쟁에 의해 “개방”되는 중국적 국제질서가 서구의 팽창의 마지막 제물이었고, 이에 따라 중국적 천하질서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에게도 근대적 국제질서의 명분이 서구제국과 서구를 모델로 근대화를 추구하던 일본에 의해 강요되었다.

 

주권국가간의 평등이란 서구의 근대국제체제의 특징은 서구 국가들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서구의 식민지, 반식민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원칙이었다. 서구 국가들간의 전통적인 세력균형이 비서구지역에서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맞물려, 각각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적대적 동맹으로 경직화되었고, 결국에는 일차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일차대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터키와 같은 제국들이 해체되고, 독일제국은 해군과 식민지를 잃었다. 주권국가간의 평등이란 서구 국제법의 원칙은 전쟁과 비밀동맹을 통한 서구 국제정치의 권력정치적 관행을 집단안보와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윌슨주의에 의해 고양된다. 그러나, 중국에서 5.4운동의 실패, 한국에서 3.1운동의 실패에서 드러나듯이, 민족자결주의는 일차대전의 패전국들이 지배하던 지역의 민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다. 주권국가체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결정적 계기는 이차대전에 의한 서구의 식민체제의 약화와 국제연합에 의해서였고, 이 과정은 후일 제3세계라 지칭되는 지역의 탈식민화와, 적어도 명목상으로, 독립적인 주권국가의 탄생에 의한 것이었다.

 

단일한 분과학문으로서 국제정치학의 발전은 서구국제체제의 세계적 확산과 궤를 같이 하였고, 이 과정을 주도한 미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일차대전의 참화는 전쟁을 주기제로 하였던 기존의 서구지역에서의 세력균형의 부정과 평화에의 염원을 불러 일으켜, 국제법과 기구, 세계여론 및 경제적 상호의존에 기반한 이상주의 국제정치이론을 탄생시켰다. 국제연맹의 실패와 대공황으로 인한 국제무역, 금융질서의 붕괴, 그리고 경제적 민족주의의 부상과 이러한 혼란을 뒤이은 이차대전의 발발로 전간기(戰間期)의 이상주의를 비판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이 국제정치학의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국제정치학 석좌교수인 카(E. H. Carr)가 1939년 저술한 『20년의 위기(The Twenty Years’ Crisis)』는 전간기의 이상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냉전의 권력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발전되는 미국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성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I.1. 서구 주권국가체제의 역사적 변화

 

영토 내에서 폭력의 정당한 독점과 최고의 독자적인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주권국가의 등장은 중세의 보편적 정치질서와 봉건제의 지역적 경제질서에 맞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웨스트팔리아조약은 왕정, 공화정, 자유시 등 당시의 다양한 정치단위의 성격에 상관없이 영토의 실제적 지배주체에게 종교를 선택할 권한을 부여하고, 그들간의 국제법적 평등을 규정하였다. 웨스트팔리아조약에서 명문화되는 주권국간의 평등이란 큰 틀은 현재의 국제관계의 기본적 규범체계로 작동하는 것이나, 그 실제에 있어서는 서구와 비서구지역간의 관계에서는 물론 서구지역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다.

 

『민족주의와 그 이후(Nationalism and After)』에서 카는 이차대전에 이르기까지 서구지역에서의 주권국가체제의 역사적 변화를 국가의 정당성의 근원, 정치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세 단계로 고찰하였다. 1단계는 중세의 기독교질서의 붕괴에서부터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에 이르는 시기, 2단계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일차대전, 그리고 3단계는 1870년대부터 이차대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민족주의의 1단계는 “영토에 따라 종교가 있다”는 원칙에 의거한 민족국가와 민족교회의 수립을 기원으로 하며,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한 루이14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의 실체는 군주였다. 이 시기의 외교는 궁정외교였으며, 전쟁은 용병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실체적인 민족이자 주권체인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는 왕권신수설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이 시기 조약의 체결과 이해는 군주의 양심과 명예에 달린 것이었다. 이 시기의 국가경제정책은 국내외적으로 군주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중상주의였다. 무역은 국가 자체인 군주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장려되었으며, 부는 다시, 용병을 동원하는 전쟁수행능력의 기반이었다. 대내적으로 중상주의는 봉건제의 지역적 유제를 타파하고 영토전역에서 단일하고 통합적인 국가경제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무역과 제조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목적으로 했다. 절대주의 시대의 중상주의는 부의 총량을 정태적으로 제한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국의 부의 증가는 곧 타국의 부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국의 시장과 부를 확대하기 위한 전쟁은 중상주의정책의 목적이며 동시에 수단이었다.

 

나폴레옹전쟁에서 일차대전에 이르는 민족주의의 2기는 유럽대륙에서 유럽국가들 간의 전면전이 부재했던 긴 평화의 시기였다. 군주와 동일시되었던 민족은 프랑스대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인민 혹은 국민전체로 확대되었다. 왕권신수설은 주권재민설 혹은 인민주권설로 대체되었고, 군주개인의 이해와 명예에 의한 종래의 국제관계도 인민이나 국민전체의 이해에 기반한 민족주의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민족국가들간의 첨예하고 무제한적인 전쟁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전반과는 달리 19세기의 민족주의는 과거 절대주의시대보다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하였는데, 이는 민족주의의 “민주적” 성격과 산업혁명의 확산에 의한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부상에 의한 것이었다.

 

인민주권설의 혁명적 이념은 그 실제에 있어 자산가계층의 정치참여만을 허용하였으며,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천명하듯, 참정권이 거부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는 상황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 민족주의를 제한하였고, 자유민주주의의 주체인 각국의 자산가계급은 자유방임론과 재산권의 보호란 공동의 이념과 이해로 결합되어 있었다. 즉, “민주적 민족”의 실체적 주체인 각국의 자산가계급은 당시의 시장경제발전의 주역이었으며, 이들간에는 경제적 국제주의에 대한 합의가 존재했던 것이다. 카에 의하면, 이러한 합의 혹은 정치적 민족주의와 경제적 국제주의의 조화는 두 가지 착각에 의해 가능했다. 하나는 당시의 경제질서가, 실제로는 영국시장의 개방에 근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국제적이라는 믿음이었다. 다른 하나의 착각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대한 믿음이었다. 당시의 국제경제질서는 영국의 시장 뿐 아니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금융질서에 의해 운영되었고, 국제경제질서에서 영국의 구조적 힘은 해군력의 압도적 우위란 영국의 군사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영국패권이 19세기 국제질서의 근간이었으나,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제한적 정치참여, 그리고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인식되지 못했다.

 

1870년대 독일의 사회복지정책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민족주의의 3기는 국제주의의 파산과 민족주의의 파국적 성장으로 양차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이 시기의 민족은 기존의 자산가계급 뿐 아니라, 산업화와 도시화,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화, 보통의무교육의 확산 등으로 새로이 등장한 대중을 포함하였다. 민족의 “사회화”로 종래의 자유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로 대체되었고, 자유방임주의는 경제적 민족주의로 전환되어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사회화된 민족의 이익에 복무하는 복지국가의 등장으로 다수의 국민경제들의 관계가 이전의 단일한 국제경제질서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화된 민족과 경제적 민족주의의 결합은 외부 노동자의 유입을 막는 폐쇄적 이민정책과 징고이즘과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배태하였다. 다른 한편,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은 민족국가의 지리적 확장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전통이 아니라, 인종과 언어에 기반한 약소국들을 양산하였고, 이러한 약소국들의 대내외적 취약성은 국제관계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국제경제질서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2. 카의 국제정치이론: 20년의 위기

 

현대국제정치학의 선구적 연구인 카의 『20년의 위기』는 지식 사회학적 시각과 19세기 국제질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시각에 기초하여, 전간기의 이상주의(utopianism)를 비판하고 이의 극복을 제안하였다. 카에 의하면, 국제정치학의 발생은 국제정치의 대중화에 기인한 것이다. 일차대전 이전 국제관계는 외교관과 군인의 고유한 업무였다. 일차대전은 일반대중을 국민군으로 동원하고 대중의 정치세력화를 촉진시켰으며, 전후처리에서 비밀조약의 반대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상 유례없는 총력전의 참화는 평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카의 민족주의 단계론의 시각에서 보자면, 민족의 사회화로 인해 국제관계가 사회화되고 이에 따라 국제관계의 병폐를 치유하는 국제정치학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태생적 환경은 국제정치학을 이상주의로 경도시켰다. 이상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정치적 당위나 목적을, 현실주의는 인과관계의 결정론에 근거하여 현실의 분석을 추구한다. 양자의 차이는 이론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실제를 중시하는 관료, 이념적 전망에 복무하는 좌익과 현실에 안주하는 우익, 절대적인 도덕율에 대한 윤리적 강조와 정치적 현실의 상대주의의 대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카에 의하면, 정치는 현실과 당위의 숙명적 이중성(fatal dualism)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온전한 정치학 역시 권력정치적 현실과 당위적 전망의 이상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현실보다 목적을 앞세우는 이상주의나 전망 없이 권력정치의 결정론과 냉소주의에 함몰된 현실주의 모두 불완전한 정치학이었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함을 모두 보여준 것이 1919에서 1939년에 이르는 20년 위기의 본질이었다. 1929년 대공황의 발생을 계기로 하여 20년 위기의 전반 10년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의 시기였고, 후반 10년은 현실을 극복할 그 어떤 전망도 획득하지 못한 현실주의의 시기였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추락으로 이 시기는 더욱 더 비극적이었다. 카에 의하면, 일차대전의 전후처리를 주도한 윌슨주의는 19세기 영국의 패권논리였던 “이익조화의 원칙”의 시대착오적 적용이었다. 이익조화의 원칙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변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화란 자유방임주의의 정치적 적용은 최대다수의 행복추구란 공리주의이고, 개인적 수준에서의 공리주의가 국가간 관계에 적용되어, 각국의 이익추구는 자연적으로 공동의 이익실현에 이른다는 “이익조화의 원칙”이 탄생하였다.

 

카의 민족주의 단계론에서 보자면, “이익조화의 원칙”은 민주적 민족의 시기를 이끈 영국패권의 정당화논리였고, 그 경제적 기반은 19세기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적 경쟁으로, 이익조화의 원칙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적자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사회적 진화론으로 보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면, 국제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의한 이익조화의 원칙은 국제경제의 성장의 한계와 경제적 민족주의의 대두로 경제적 이익의 상충이란 현실에 의해 부정된다. 이익의 현저한 상충과 민족의 사회화란 현실을 무시하고, 국제법과 기구, 여론에 의해 평화를 추구한 일차대전의 전후처리는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카의 핵심적 주장이다.

 

국제관계에서 권력은 경제력, 군사력, 여론 혹은 도덕적 권위의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라고 카는 주장한다. 이러한 명제에 근거하여 그는 1920년대의 국제관계에서 경제력, 군사력, 여론의 힘이 밀접히 연관되어 작동하였음을 보여주고, 이러한 권력정치적 현실을 간과한 이상주의를 통렬히 비판한다. 『20년의 위기』는 카가 이후에 자인하듯, 이상주의의 비판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자신이 주장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종합과 극복이란 정치학의 본연적 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이 점이 이후 카가 현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 각인되는 원인이다. 하지만 카가 현실주의의 극복이란 과제를 완전히 도외시 한 것은 아니다.

 

『20년의 위기』의 결론에서 카는 현실적인 힘의 단위가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할 것이라 주장하며, 이차대전을 통한 서구의 분열과 약화, 그리고 이러한 서구에 강제될 미국패권의 부상을 예견한다. 한편, 국제질서는 힘과 함께 도덕성 혹은 권력에 대한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강조하며, 그는 경제적 민족주의 때문에 상충되는 각국의 이익을 화해(reconciliation)시킬 대안으로 복지국가간의 국제적 유대에 기초한 경제의 재건을 들고 있다.

 

대공황으로 인해, 종래 자유방임주의의 본영이었던 영국은 물론 새로운 경제적 대국 미국에서조차 뉴딜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복지국가의 혁명–경제적 이익을 실업의 해소란 사회적 목적에 종속시키는–을 국제적 차원에서 지속하고 제도화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II. 국제정치학의 학제화와 주요 패러다임

 

1939년 카가 예견한 데로, 이차대전은 분열되고 약화된 유럽에 강제되는 미국패권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비록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복구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브레튼우드체제는 무차별원칙에 근거한 자유무역과 안정적 국제통화체제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고, 이는 대공황과 양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한 유럽이 추구하고 있었던 경제적 민족주의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차대전으로 시장경제의 활력과 성장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증대된 생산력의 시장을 필요로 하였던 미국은 복지국가의 국제화란 카의 기대를 추구할 의도가 없었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다자주의적 국제경제질서의 건설과 국제연합에 의한 이차대전 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이란 미국의 패권구상은 소련의 거부로 인해 “자유세계”에서의 미국의 패권수립으로 이어지고, 소련진영과의 냉전이 전후세계를 규정하게 된다. 전세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핵무기를 독점하며, 군사동맹을 건설하는 냉전의 초기에, 윌슨주의는 물론 소련과의 협력을 기대했던 루즈벨트의 전시외교도 역시 이상주의의 이름으로 부정되기에 이른다. 미국이 행하고 있었던 권력정치의 현실을 분석하고, 그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패권국가 미국의 국제정치학이 담당하는 본연적 임무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국가간의 본연적 갈등과 권력투쟁을 강조하는 현실주의가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의 학제화를 주도하게 된다.

 

미국 국제정치학의 변천은 흔히 세 단계의 대논쟁(the great debate)을 통해 파악되는데, 이상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의 승리가 제1의 대논쟁이다. 제2의 대논쟁은 1950년대 이후의 행태주의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의 과학적 방법론의 추구로 빚어지는 전통주의 대 과학주의의 논쟁이다. 1970년대 이후 이상주의의 전후 계승자라 할 자유주의 혹은 다원주의와 현실주의가 모두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하여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 제도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실증주의적 주류이론에 대한 도전이 1980년대 이후 제3의 대논쟁이다. 대논쟁은 기본적으로 현실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의 도전이라 볼 수 있다. 국제관계의 주요 행위주체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현실주의가 국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단일하고 합리적인 국가를 중심으로 한 분석을 하는 반면, 자유주의는 국가가 단일한 행위주체가 아니라 정부와 비정부, 사회적 집단 등 국가의 구성요소가 독자적인 행위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는 외교정책과 초국가관계에서 국가내부의 , 그리고 국가간, 비국가 행위주체간의 갈등, 협상, 연합과 타협을 중요시한다. 한편, 마르크시즘,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등을 포함하는 글로벌리즘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한다. 글로벌리즘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계급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고, 국제관계는 지구적 규모에서의 계급적 지배가 문어발처럼 다양한 양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글로벌리즘의 문어이미지에 비해, 현실주의는 당구공처럼 단일한 행위주체인 국가의 서로 경쟁하며 국익을 추구하는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으며, 자유주의의 국제관계는 다원적 행위주체의 협상과 타협이 거미줄처럼 얽힌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주의의 국제관계를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한 국가간의 갈등과 경쟁이 반복되는 장으로 본다. 이런 입장은 국익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실현하는 것을 정책가의 과제로 보는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경우 다원적 이슈와 행위주체를 설정하고, 이들의 인식틀이나 역할에 의해 파악되는 이익이 국가단위의 총체적, 일반적 이익과 상이하다고 본다. 자유주의에서 보는 국제관계는 이들간의 관계에 의해 협력에 의해 갈등이 완화되는 변화, 더 나아가서는 진보가 가능한 장이다. 이에 반해, 경제적 이슈에 초점을 두는 글로벌리즘은 국제관계를 혁명적 단절 이전까지는 매우 안정적이고 일관된 계급적 지배양식이 지속되는 장으로 본다.

 

표 1. 국제정치의 주요 패러다임 비교

 

현실주의 자유주의 글로벌리즘

 

 

 

III. 국제관계이론의 전개 I: 전통적 현실주의와 그 비판

 

III.1. 모겐소의 정치적 현실주의

 

학제화가 사회과학의 다른 분과 학문에 비해 늦은 국제정치학은 이론적 선구자들은 창조하여야만 하였다. 현실주의의 이론적 선구자로는 흔히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홉스가 꼽힌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근본적 원인을 아테네와 스파르타진영의 세력균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투키디데스의 지적은 역사를 관통하는 국제관계의 법칙으로서 세력균형에 대한 고전적 논거로 해석되었다. 정치세계의 독자성과 권력정치의 모습은 르네쌍스시대 이태리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정치적 생존을 위한 군주의 독자적인 도덕율(amoral)을 강조한 마키아벨리에서 찾아졌다. 홉스의 사상에서는, 리바이어던의 창조를 정당화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자연상태가 국제관계의 본질적 특징으로 주목되었다.

 

국가이성론과 관방학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늦은 산업화와 통합된 민족국가의 형성을 추구했던 독일의 국가주의적 전통 역시, 전후 미국의 현실주의의 지적 배경이 되었다. 이는 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계 학자들에 의해 도입되었는데, 한스 모겐소가 이런 유태계 학자들 중 대표적인 현실주의 이론가이다. 1948년에 처음 출간된 모겐소의 『국제정치학 (Politics Among Nations)』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국제정치학의 대표적 교과서였다. 신현실주의와의 대조를 위해 고전적 혹은 전통적 현실주의로 불리는 모겐소의 정치적 현실주의는 정치는 동기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의 결과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베버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냉전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미국의 합리주의적 지적 전통과 국제질서에 대한 낙관주의의 부정을 특징으로 한다.

 

모겐소가 제시하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여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일반적으로 정치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에 근거하는 객관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다. 둘째, 정치적 현실주의가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핵심지표는 권력에 의해 정의되는 이익의 개념이다. 셋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권력에 의해 정의되는 이익이라는 주요 개념이 보편적으로 타당한 객관적인 범주라고 가정하지만 그 개념의 의미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넷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정치적 행위의 도덕성이 중요함을 인식하지만, 도덕적 명령과 성공적인 정치적 행위간의 불가피한 긴장 또한 인식하여, 정치적 윤리는 정치적 결과로서 판단된다고 본다. 다섯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특정한 국가의 도덕적 열망과 보편적인 도덕적 법칙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정치적 영역의 독자성에 따라 정치적 기준에 여타의 기준을 종속시키는 독특한 지적, 도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모겐소가 상정하는 인간본성은 이기적이고 권력을 추구하는 욕구(lust for power)를 특징으로 한다. 이에 따라 국제정치는 각국이 권력으로 정의되는 국익을 추구하는 권력투쟁의 장이고, 국제정치의 이러한 권력투쟁은 보편적 도덕률 또는 여타의 비정치적 기준에 의해 규율되지 않는 독자성을 갖는다. 국제정치의 객관적 법칙의 존재를 주장하면서도, 모겐소는 그의 정치적 현실주의의 핵심개념인 국익이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 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진정한 국익을 발견하고, 결과에 대한 정치적 윤리를 추구하는 정책가(statesmen)의 실천적 덕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의 발전이 미국이 처한 국제관계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란 실천적 요구와 함께 사회과학의 지위확보란 두 가지 요구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볼 수 있고, 모겐소의 정치적 현실주의는 특히 후자의 요구에 미흡한 것이었다. 인간본성이나 실천적 덕성이란 여전히 모호한 개념이고, 선험적인 규정을 필요로 하는 계량적 방법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겐소의 전통적 현실주의는 이후 수학적 모델을 도입한 핵억지이론, 실증적 자료의 계량화를 통한 외교정책의 분석 등을 통해 추구된 과학주의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월츠의 신현실주의가 국제체제의 구조적 특징을 현실주의의 근거로 제시하지 이전에는 모겐소의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나 수정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III.2. 통합이론과 복합적 상호의존론

 

이상주의는 현실주의의 이론적 패권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었지만, 이상주의의 이념적, 이론적 정향은 자유주의 혹은 다원주의란 이름을 통해 현실주의의 주요한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발전하였다. 현실주의가 국제관계에서의 국가를 주요 행위자로 보고 이들간의 본연적인 권력투쟁과, 특히 군사안보의 영역에서의 갈등을 강조하는데 반해, 자유주의는 개인이나, 다국적 기업, 국제기구와 같은 비국가 행위주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제나 문화와 같은 영역에서 이들간의 협력을 통한 국제질서의 수립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주의가 권력정치의 현실에 대한 비관적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자유주의는 국제관계를 권력투쟁의 반복이 아니라, 적어도 점진적 변화가 가능한 장으로 본다.

 

국제관계에서 협력과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유럽의 지역적 통합에 주목하였다. 초기의 기능주의 통합이론은 비정치적이고 기술적인 분야에서 전문가에 의한 국가간 협력이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통합으로 이전(spill over)되어 초국가적 구조를 창출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체된 서구의 경제적 통합은, 정치와 기술적 영역, 권력과 복지를 상호 독자적으로 볼 수 없고, 기술적 분야의 협력이 자동적으로 정치적 분야로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신기능주의 통합이론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신기능주의는 상호 거래와 협력을 국익으로 인식하는 정치적 세력의 존재를 통합의 핵심적 기제로 본 것이다. 유럽이란 적용 범위의 지역적 제한성 때문에 통합이론은 현실주의의 대안적인 일반 국제정치이론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현실주의의 비판과 수정을 모색하던 자유주의자들이 주목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비국가행위주체의 중요성 증가와 이차대전 후 미국의 압도적 힘의 상대적 감소였다. 일본과 서구경제의 발전, 그리고 베트남전쟁으로 가속화된 미국의 경제적 약화로 닉슨행정부는 브레튼우즈체제의 한 근간인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한편,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상호의존의 증가는,『상호의존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Interdependence)』이나 『국가주권의 위기(Sovereignty at Bay)』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서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국가중심의 국제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도래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초국가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슈의 측면에서도 비군사적 이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킨 계기는 1970년대의 석유위기와 국제연합의 기구들을 통한 제3세계국가들의 신국제경제질서에 대한 요구였다. 국제기구가 제3세계국가들의 문제를 국제관계의 의제로 설정하고 강대국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통로로 사용되었으며, 자원을 무기로 한 중동국가들의 연합은 미국을 위시한 선진산업국가들 전체의 경제적 위기를 초래하며, 군사력의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의 전통적인 국력개념의 적실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1977년에 발표되는 커헤인과 나이의 복합적 상호의존론은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변화를 배경으로 현실주의 패러다임의 비판과 수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현실주의의 기본 가정을 첫째, 국제관계의 주요한 행위자가 응집된 단위체인 국가이다, 둘째, 물리적 힘(force)이 가장 효과적인 정책수단이다, 셋째, 군사안보의 상위정치(high politics)가 경제 및 사회문제의 하위정치(low politics)에 우선하는 이슈의 서열을 상정한다는 것으로 규정하고, 여기서 도출되는 현실주의의 이념형적인 국제관계를 복합적 상호의존이란 개념을 통해 수정하고자 한다. 복합적 상호의존의 세계는 1)국가내부의, 초국가간, 비국가 행위주체간의 다중채널, 2)이슈간의 서열의 부재, 그리고 3)정책수단으로서 군사력의 부차적 역할을 그 특징으로 한다. 즉,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한 국가의 물리적 자원의 정책수단으로서의 효과가 이슈영역의 분화와 서열의 부재, 그리고 다양한 행위주체간의 다중채널의 존재로 인해 제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복합적 상호의존론은 국제관계는 단순히 군사력의 우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초국가 및 초정부적 관계와 국제기구를 활용하여 문제영역 별로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 혹은 문제영역간의 연계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국제관계의 과정에 주목한다.

 

III.3. 세계체제론

 

이차대전 이후의 국제관계를 분석함에 있어,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일종의 노동분업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가 군사력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진영의 세력균형을 분석했다면, 자유주의는 미국진영 내부의 경제적 통합과 상호의존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주류 국제정치학의 이론적 지평에서 간과된 것이 미국정치학의 비교정치나 지역연구분과에서 주로 다루어 진 제3세계의 문제이다.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종속이론은 제3세계의 문제를 선진자본주의국가와의 관계에서 총체적으로 고찰하였고, 이러한 이론적 정향을 국제관계의 전반에 대한 분석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이론이 1974년에 등장하는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이다.

 

왈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은 국가를 기본적 분석단위로 하는 근대사회과학의 토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 국가의 역사적 경험을 잣대로 하여 제3세계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근대화이론은 비교할 수 없는 부분들을 독자적인 사회체계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가 아니라, 중심과 반주변, 주변이란 경제적, 지리적 부분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19세기 이후의 유일한 사회체계이기 때문이다.

 

월러스타인은 사회체제를 자립적인 노동분업(교환관계)이란 기준에서 정의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사회체제의 유형은 단일한 문화적 틀을 갖는 원시적인 자립사회의 소체제와 복수의 문화를 갖는 세계체제뿐이다. 단일한 노동분업 구조와 복수의 문화체계를 포함하는 세계체제는 다시 단일한 정치적 구조의 세계제국과 복수의 정치적 단위로 구성되는 세계경제로 나뉜다. 16세기부터 서유럽을 중심으로, 지중해를 반주변으로 동유럽과 중남미를 주변부로 하여 성장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지리적 확장을 거듭하여 19세기 이후 전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사회체계로 변화시켰다고 월러스타인은 주장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부는 자본축적과 기술발전의 중추이고, 주변부는 자원과 값싼 노동력의 제공을 주 기능으로 한다. 반주변부는 중심과 주변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중심과 주변과의 부등가 교환에 의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양극화를 방지하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기능을 한다. 국가간의 관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부분일 뿐이며, 현실주의에서 분석의 주 대상으로 하는 강대국들은 중심부국가들로서 이들의 군사력 독점이 반주변부의 존재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의 16세기부터의 장기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장기지속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역사적 체제로 생성과 종말이라는 시간적 경계를 지님을 또한 지적한다. 중심부의 패권국가의 변화와는 구별되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의 붕괴를 가져 올 수 있는 요인으로는, 단기적인 이윤의 확보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장기적인 존속을 위한 수용의 창출에 필요한 부의 분배와의 상충,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념과 문화를 지구적으로 확산, 유지시키는 전위(cadres)의 포섭(cooptation)에 필요한 비용의 증가를 들 수 있다.

 

 

 

IV. 국제관계이론의 전개 II: 신현실주의와 그 비판

 

IV. 1. 신현실주의

 

1979년에 발표되는 월츠의 『국제정치이론(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은 국제관계의 무정부상태란 구조에 근거한 국제정치의 일반이론을 정립하여, 인간본성에 근거한 모겐소의 전통적 현실주의의 과학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 비국가행위주체에 대한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유주의의 복합적 상호의존론이나 글로벌리즘의 세계체제론을 반박한다.

 

구조적 현실주의 또는 신현실주의로 불리는 월츠의 국제정치이론은 국제관계의 정치적 구조를 경제나, 국제체체의 하부 분석 단위들 –국가나 개인, 사회집단 등–의 특성을 통해 파악하는 환원론을 배격하고, 국제정치의 일반이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일반이론의 수립이 국제관계의 실체를 구성하는 외교정책연구와 구분됨을 강조하는 월츠의 이론적 출발점은 체계는 구조와 상호작용하는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조는 단위들의 특성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일반이론의 정립을 위해 구조를 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단위는 가변적인 반면 구조는 영속적이고, 둘째, 구조의 정의는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기 때문이며, 셋째, 특정 영역에 관한 이론은 다소의 수정을 통해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구조는 하위정치의 문제영역도 규정한다는 명제가 도출되는 월츠의 이러한 전제들은 개별 문제영역의 독자성과 이들간의 서열의 부재를 주장하는 복합적 상호의존론의 반박을 위한 장치라 볼 수 있다.

 

월츠는 구조를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다. 첫째는 부분들의 배열 원리, 둘째는 단위들의 기능적 분화여부, 셋째는 단위들간 능력의 분포이다. 국내정치가 집중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갖는 반면, 국제정치는 탈집중적이고, 국가들의 행위를 규율하는 세계정부가 부재한 무정부적 질서가 그 특징이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무시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윤의 추구란 미시경제학의 전제가 경제학의 일반이론을 구축하는 데 유용함을 강조하며, 월츠는 무정부상태에서 국가의 가장 주요한 행동지침은 생존이라 주장한다. 또한 시장이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를 통제하듯, 무정부상태란 국제정치의 구조가 개별 국가들의 행위를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무정부상태의 국제관계가 개별국가들에게 생존이란 공통의 목표를 강제한다는 월츠의 주장은, 국내정치의 기능적으로 분화된 단위들과는 달리 국제정치의 단위인 국가들은 기능적으로 분명히 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로 더욱 강화된다. 국내정치에서의 행정, 사법, 입법과 같은 정부기능의 분화나, 혹은 정치적 권력, 경제적 이익, 문화적, 지적 명성의 추구와 같은 분화를, 국제정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직접적인 비유로 설명하면, 무역만 하는 국가, 문화적 활동만 하는 국가는 없다는 것이다. 자율적인 정치단위인 주권국가들의 기능은 미분화되어 있으며, 비기업 행위주체들이 결국 기업들에 의해 정의되는 시장구조의 영향을 받듯이, 국제관계도 가장 중요한 국가들에 의해 정의되는 구조에 의해 통제된다고 주장한다. 비국가적 행위자들의 영향력이 강대국에 비견할 수준이 되지 못하고, 초국가적 현상은 생존이란 동일한 과제를 추구하는 기능적으로 유사한 국가들에 의해 정의되는 국제정치의 부차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월츠의 구조적 현실주의는 무정부상태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국가들의 능력의 분포를 분석의 실질적 대상으로 설정한다. 단위간 능력의 분포는 단위의 특성과 구분된다고 주장하며, 그는 국제정치에서 구조의 다양성은 단위의 기능상의 차이가 아니라 능력의 분포의 차이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시장구조가 자유경쟁, 독점, 과점 등 단위간 능력분포의 특징으로 정의되듯이, 국제정치의 구조도 결국 양극체제나 다극체제냐 혹은 단극체제냐 하는 능력분포의 다양성에 의해 파악된다는 것이다. 월츠의 신현실주의는 모겐소의 전통적 현실주의의 근간인 인간본성을 비과학적인 환원론으로 부정한다. 하지만, 전통적 현실주의의 실천적 덕목이라 할 세력균형은 능력의 분포에 의한 구조적 다양성이란 개념을 통해 신현실주의 역시 강조하고 있다. 즉, 분석수준을 개인이나 집단에서 국제정치의 구조로 이동시킨 이론적 도식의 변화는 현실주의 패러다임의 권력정치에 대한 강조 자체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지, 이를 폐기한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IV.2. 신자유주의 제도론

 

월츠의 신현실주의가 발표되는 1979년은 1970년대 미소간의 데당뜨를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일어나는 해이다. 이후 레이건의 등장과 스타워즈의 추진으로 미소간의 관계는 신냉전으로 격화되고, 1970년대 신국제경제질서를 요구했던 제3세계국가들은 외채위기를 겪으며 상당수가 국제경제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변화는 월츠의 신현실주의가 미국 국제정치학계에서 이론적 패권의 지위를 획득하는 하나의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물론 월츠의 신현실주의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월츠의 이론이 이론적 논쟁의 기본 구도를 제공하였다.

 

월츠의 이론적 구도를 수용하며 그 내용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예가 이전의 복합적 상호의존론을 대폭 수정하여 신자유주의 제도론을 들고 나오는 케헤인이다. 복합적 상호의존론이 행위주체의 측면에서 국가의 중요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영역의 위계적 서열을 부정하고, 권력자원과 효과의 측면에서 군사력의 부차적 중요성을 강조한데 반해, 신자유주의 제도론은 단일하고 합리적인 국가가 국제관계의 가장 주요한 행위자이고 무정부상태가 국제정치의 기본 구조라는 신현실주의의 이론적 전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커헤인의 신자유주의 제도론은 국제제도에 영향에 의해 무정부상태에서도 국가간의 협력이 가능하다는, 월츠의 신현실주의와는 상반된 결론을 도출한다.

 

이전의 복합적 상호의존론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제도론도 현실주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주의가 전제하는 이념형적인 국제관계의 한계를 비판하고 수정, 포섭하는 더욱 더 적실성이 큰 이념형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월츠의 신현실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함께, 신자유주의 제도론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것은 패권안정론이다.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패전, 석유위기, 달러의 금태환 정지 등이 분명히 보여주는, 미국패권의 상대적 약화는 압도적인 물리력에 기반한 미국패권의 존재가 국제체제의 안정에 필수적이라는 패권안정론, 더 넓게 보자면, 국제정치경제란 국제정치학의 하부분과를 탄생시켰다. 패권안정론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패권의 쇠퇴는 국제체제의 불안정으로 연결된다.

 

커헤인은 무정부상태에서도,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패권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계에서 협력이 국제제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제도론에서의 제도는 공식적인 국제기구를 넘어서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특정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규칙인 국제레짐, 국제관계에서 행위자들의 기대를 형성하는 묵시적인 규칙과 이해의 비공식적인 제도로 규정되는 관례를 포함한다. 이러한 국제제도의 기능은 단순히 국제관계의 행태적 역할을 규정하고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 자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국제제도는 통제적인 기능과 함께 제정적인 (행동에 대한 기대와 규범을 설정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국제제도가 국제관계에서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세 가지이다. 첫째, 정보와 협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타국의 순응도와 자신의 공약을 수행하는 과정을 감시하는 능력을 증진시킨다. 셋째, 국제협약의 공고성에 대한 기대를 제고한다. 이와 같이 국제적 협력에 대한 국제제도의 기능이 가능한 전제조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행위자들이 교류협력할 상호이익이 존재해야만 한다. 둘째, 제도화의 정도의 변화가 국가들의 행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커헤인의 기본 주장은 상호의존의 증가에 따라 국가간 상호이익의 범주가 증가하였고, 미국패권에 의해 국제정치가 상당한 정도로 제도화되었으며 미국패권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국제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제도화의 정도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주의 패러다임–전통적, 구조적 현실주의를 모두 포함하여–이나 패권안정론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미국패권의 쇠퇴 이후에도 국제제도에 의한 협력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월츠와 마찬가지로 커헤인 역시 미시경제학에 기반한 게임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물론 그 결론은 월츠와는 상반된다. 예를 들어, 죄수의 딜레마는 정보의 부족과 이기적인 이익의 추구로 인해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게임모델로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현실주의자들은 각국의 안보증진 노력이 결과적으로 안보의 감소를 가져오는 안보딜레마를 설명하고, 더 넓게는 국제관계의 갈등과 경쟁이란 권력정치적 현실을 강조해왔다. 신자유주의 제도론은 죄수의 딜레마를 오히려 국제제도에 의한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용한다. 일회적 게임이 아니라 죄수의 딜레마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게임으로 바꾸면, 제도에 의한 정보의 제공, 공약의 준수여부에 대한 감시기능의 강화, 그리고 미래의 협력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케헤인은 자신의 신자유주의 제도론이 신현실주의가 적실성을 보존하면서–상호이익과 제도화의 부재시– 신현실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국제관계의 협력적 양상과 제도화를 동시에 포섭한다고 주장한다.

 

IV.3. 콕스의 비판이론

 

월츠의 신현실주의와 커헤인의 신자유주의 제도론 모두 미시경제학적 모델을 수용하여 국제정치학의 과학화로 모색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정향은 국가간의 상호이익이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영향은 과연 긍정적인가 등의 문제를 둘러싼 양진영의 치열한 이론적 공방을 불러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 제도론의 주된 대립점은 국가가 절대적인 상호이익을 추구하여 협력하는가 아니면 상호이익이 존재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하여 국제관계는 여전히 갈등과 경쟁의 장인가 하는 것이었다.

 

한편,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 제도론이 공유하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대한 비판도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근대의 주권논의와 근대과학의 실증주의적 전제들에 대한 탈근대론자들의 전면적인 비판이 대표적인 예이다. 현실주의의 비판과 제도의 중요성을 공유하면서도, 신자유주의 제도론이 제도의 제정적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구성주의자들의 비판이 또 다른 예이다. 케헤인은 국가이익을 선험적으로 전제하여, 관습과 제도에 의해 국가이익 자체가 새로이 정의될 가능성을 충분히 이론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국가중심적인 이론틀과 이념적 정향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그람시의 헤게모니개념을 국제정치학에 도입하는 콕스의 비판이론이다. 콕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이론의 가능성을, 모든 이론은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며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론의 유형은 지배적인 사회권력 관계와 그 관계의 조직화인 제도들을 전제하며, 이의 유지를 위해 부분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문제해결이론과 그러한 역사적 구조의 틀 자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가능한 사회체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비판이론이 있다.

 

콕스의 비판이론은 신현실주의가 카나 모겐소의 역사주의적 입장을 사상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신자유주의 제도론은 물론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주류에도 전반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콕스의 가장 주요한 이론적 원천은 국가와 사회의 융합, 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제도 및 이념의 총체적 분석을 시도한 그람시이다. 그람시의 패권개념은 경제적 지배계급의 이익을 일반이익으로 전환시키는 제도적, 이념적 장치에 주목한다. 이를 국제관계에 확대적용하여, 콕스는 물리적 힘, 이념, 제도로 구성되는 역사적 구조를 사회세력, 국가, 그리고 세계질서의 세 가지 분석수준에서 동시에 총체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한다.

 

사회세력의 측면에서 콕스는 생산의 세계화와 이에 따른 국제적 계급이익의 성립을 지적하고, 그 여파로 국가는 세계경제에 순응하는 동시에 세계경제의 편입으로 피해를 입는 국내세력을 보호해야 하는 기능을 맡게 되었으며, 생산의 국제화와 국가기능의 확장 또는 국제화를 전반적으로 조율하고 관리하는 국제제도와 이념을 패권국가의 세계질서 유지란 측면에서 분석한다. 콕스의 비판이론에서 국가간의 갈등이나 협력은 역사적, 총체적 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제도 또한 국가간의 협력이나 동의의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세력과 세계질서란 분석수준과의 연계를 중심으로 설명되어진다.

 

 

출처 : http://cafe.daum.net/eea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현황과 전망: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향방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현황과 전망: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향방

정 진 영    (경희대학교)
http://blog.daum.net/gangseo/10708658

I. 서 론

국제정치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구미학계에서 한창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화의 진전 및 탈냉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국제정치 이론논쟁은 최근에 이르러 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국제정치이론 형성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소렌슨(Sorensen 1998, 84)은 두 가지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냉전의 종식이 국제적 어젠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탈냉전 이후 환경 인권 민주화 소수민족 국가분열 등과 같은 새롭고 다양한 이슈들이 국제정치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에 국제정치경제학의 발전과 각광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Katzenstein, Keohane & Krasner 1998). 둘째, ‘국제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냉전적 접근법인 월츠의 신현실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월츠의 신현실주의는 많은 국제정치이론가들에 의해서 실증주의, 보수주의, 변화에 대한 무관심 등과 관련하여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더욱이 다양한 탈실증주의 이론들의 등장과 더불어 국제정치학계는 마치 이론들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많은 야심찬 이론가들은 지금이 신현실주의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대안적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건설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에 매료되어 있다.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이 국내의 국제정치학계에도 서서히 그 영향을 미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신진 학자들이 그러한 이론논쟁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국내의 기성 학자들도 그러한 추세를 재빨리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김태현 정진영 1993; 하영선 1995; 이삼성 1997; 신욱희 1998; 김의곤 권경희 1999; 양준희 1999; 전재성 1999a; 윤영관 2000; 김학로 2000; Yang 1999).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시도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이 국내에서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구영록 2000; 권만학 2000; 박건영 1999; 전재성 1999b, 2000; Yongho Kim 2000).

이 글은 최근 구미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매년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관련된 논문들과 책들의 홍수 속에서 이론논쟁의 방향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정리해 보고 명확히 하는 일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론논쟁을 넘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이론적 통합의 향방을 전망해 보는 것도 이 글의 중요한 목적이다.

이론논쟁의 현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논쟁의 구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미 잘 알려진 모델은 뱅크스(Banks 1985)의 ‘패러다임 간 논쟁(inter-paradigm debate)’과 라피드(Lapid 1989)의 ‘제3논쟁(third debate)’이다. 이 두 모델은 이미 학계의 인정을 상당히 받았고, 논쟁의 중요한 측면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에서 중요하게 고려될 것이다. 그러나 각각 단독으로는 최근의 이론논쟁을 담기에 부족하다. 그 결과 최근 들어서는 보다 서술적 나열식으로 이론논쟁을 소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Smith 1995; Brecher 1999). 이들은 대개 10여 개의 논쟁축을 선정하여 최근의 이론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이론논쟁을 보다 세밀히 다룰 수 있는 이점은 있어도, 경제성이 너무 떨어져 논쟁을 정리해서 소개한다는 의미가 약화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론논쟁을 세 개의 축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패러다임 탈실증주의 구성주의가 그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세 축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상당부분 중첩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이러한 방법으로 정리하는 데는 약간의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패러다임 간 논쟁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자유주의, 현실주의, 마르크시즘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고, 최근의 철학적 방법론적 논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 또는 적응하면서 ―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 간의 논쟁은 양자가 매우 유사하게 수렴하였기 때문에 더이상 이들 사이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강력하다(Ruggie 1998b). 그러나 이 주장은 인식론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두 이론 시각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차이는 여전히 중요하다(Little 1996). 둘째, 패러다임 간 논쟁과 ‘제3논쟁’이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라피드가 말하는 ‘제3논쟁’은 실증주의-탈실증주의의 논쟁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국제정치학의 이론논쟁사를 기준으로 보면, 어느 것을 제3논쟁으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셋째, 구성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논쟁의 축으로 설정하는 것은 구성주의에 대한 지나친 호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구성주의를 자유주의의 아류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Sterling-Folker 2000). 또는 구성주의를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와 동격으로 대비시키는 방법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Walt 1998). 그러나 이 방법은 구성주의가 패러다임 간 논쟁과 탈실증주의 논쟁을 통합 또는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여섯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II절에서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역사를 간략히 제시함으로써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논쟁의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제III절은 패러다임 간 논쟁을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논쟁과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정치이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정리하고 있다. 제IV절은 탈실증주의 논쟁을 비판이론 탈근대론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제V절은 구성주의 논쟁을 웬트(Alexander Wendt)의 입장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제VI절은 기존의 이론논쟁의 성과와 최근의 연구경향을 고려하여 국제정치이론의 새로운 통합이 일어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보고 있다. 마지막 절에서는 한국적 현실에서 국제정치 이론논쟁과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경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간략히 논의하고 있다.

II. 국제정치연구와 이론논쟁: 국제정치학의 역사

국제정치학의 역사는 종종 이론논쟁의 역사로 기술되고 있다(Vasquez 1983; Banks 1984; Lapid 1989; Smith 1995; Waever 1996). 이른바 ‘대논쟁들(Great Debates)’을 통하여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분야가 규정되고, 연구주제와 방법에 있어서의 큰 흐름들이 결정된 점을 부각시켜 국제정치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국제정치연구는 ‘제3논쟁’의 시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Lapid 1989). 이 글의 중심적 과제인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성격과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깐 이 논쟁이 갖는 역사적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 ‘제1논쟁’은 1930-40년대의 이상주의-현실주의 사이의 논쟁이었다. 국제정치학이 하나의 학문분야로 독립된 1919년 이후 전간기 동안에는 이른바 ‘이상주의’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었다고 흔히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기구, 국제법, 세계평화에 관한 이상주의의 주장들은 전간기의 혼란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설득력을 잃었다. 1939년에 출간된 카(E. H. Carr 1939)의 {20년간의 위기}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등장과 이상주의에 대한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후 ‘현실주의적 전통’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치연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남게 되었다.

국제정치연구의 ‘제2논쟁’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어난 ‘전통주의(traditionalism)’ 대 ‘행태주의(behavioralism)’ 사이의 방법론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국제정치연구의 방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불어닥친 행태주의 논쟁이 국제정치학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논쟁에서 행태주의가 승리하였고, 이른바 과학적 방법과 증거에 기초하여 국제정치를 연구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실주의-행태주의의 결합에 기초한 국제정치연구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커졌고, 이는 새로운 이론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우선 석유위기 베트남전쟁 데탕트 상호의존의 증대와 같은 국제관계의 현실적 변화들이 이론적 반성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상호의존과 비국가행위자들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상호의존론을 발전시켰고(Keohane and Nye 1977),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제적 불평등과 착취관계를 중심으로 종속이론,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켰다(Frank 1967; Amin 1974; Wallerstein 1974, 1980). 이에 맞서 현실주의 전통과 행태주의적 국제정치연구의 결합은 월츠(Waltz 1979)의 {국제정치이론(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을 통하여 신현실주의로 집대성되었다. 이른바 패러다임 간 논쟁의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의 철학적 논쟁이 또 다시 국제정치학 연구의 이론논쟁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번의 행태주의를 다양한 방향에서 공격하는 탈실증주의의 운동이었다. 국제정치연구는 특히 이러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1980년대 국제정치학의 양대 패러다임인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가 모두 실증주의 합리주의의 기초 위에 건설된 것이었고, 이들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이데올로기적 속성들이 탈실증주의의 주요한 공격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Ruggie 1983). 최소한 미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전통이 코헤인의 합리적 제도주의를 통하여 신현실주의와 통합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유럽, 특히 영국의 국제정치학계는 탈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론적 반성, 즉 성찰(reflexivity)이 이론화의 중요한 안내자가 되었다(W. Cox & Sjplander 1994; Neufeld 1995).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코헤인(Keohane 1988)은 1980년대 말의 상황에서 국제제도에 관한 연구는 합리주의와 성찰주의로 양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신현실주의 논쟁은 상당한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자유주의 현실주의의 부활 움직임에 당면했다. 또한 탈실증주의의 공격 역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바야흐로 국제정치이론의 백가쟁명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배적인 국제정치이론이 사라진 가운데 수많은 이론적 시각들이 공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Brecher 1999).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이론인가? 실증주의-탈실증주의 논쟁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촉발시켰지만, 해결은커녕 이론논쟁의 구도만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이한 인식론적 입장에 기초한 이론들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모두가 일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탈냉전 세계화라는 국제정세의 변화 또한 이론적 다원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제공했다. 구성주의의 대두와 발전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구성주의는 국제정치학의 기초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기존의 이론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기존의 세 가지 패러다임들과 맞먹을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으로 발전되지 않고는 또 한 번의 철학적 방법론적 논쟁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III. 패러다임 간 논쟁

뱅크스는 1985년의 시점에서 세 개의 패러다임들 간의 논쟁이 국제정치연구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Banks 1985, 9). 현실주의 다원주의 구조주의가 그가 말하는 세계의 패러다임들이다(이 글에서는 이 명칭들을 각각 현실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로 사용하기로 한다). 국제정치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이러한 패러다임 또는 이념의 대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사실 그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논문은 당시의 국제정치학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 간 이론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하여 제시한 데 의의가 있었다. 그의 지적들을 중심으로 세 패러다임의 특징들을 요약하면 <표 1>과 같다.

패러다임 간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패러다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제정치연구의 대상이나 특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 중요도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패러다임 간 논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논쟁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

<표 1> 세 패러다임의 구분

생략

 
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은 서로 다른 국제정치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 다른 개념적 틀로써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국제정치학의 범주에 속하고, 자기들의 이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여전히 패러다임 간 논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의 이론논쟁에서 패러다임 간 논쟁은 주로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간의 논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논쟁은 매우 정교한 방법론과 경험적 검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미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이 절의 아래 부분에서는 이 논쟁을 우선 소개하고, 마르크스주의 국제정치이론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신현실주의-신자유주의 논쟁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은 미국패권의 쇠퇴와 이것의 국제적 영향에 대한 논란을 중심으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현실주의 국제정치(경제)이론에 따르면, 패권국의 존재가 국제(경제)질서의 안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른바 패권안정이론으로 불리는 이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쇠퇴는 전후에 수립된 다자적 국제(경제)질서의 붕괴를 초래하고, 전간기의 혼란상태를 재현시킬 위험이 있다고 주장되었다(Gilpin 1981).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국제제도들과 상호의존에 따른 공통의 이익이 비패권적 국제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전간기의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Keohane 1984). 이들 사이의 논쟁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층 세련되고 엄밀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날카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이 논쟁에 참여한 신현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탈실증주의자들과 구성주의자들의 지적처럼 공통적으로 개체주의적 합리주의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현실적인 국제정치이론들을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 논쟁의 주요한 논점들을 볼드윈(Baldwin 1993)이 제시한 6개의 항목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첫째, 무정부상태의 성격과 결과에 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현실주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전통에 따라 무정부상태를 국가의 안보,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데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약속이행의 불확실성 문제를 중시한다.

둘째, 상대수익과 절대수익 추구의 차이를 둘러싼 논란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안보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국력의 상대적 차이와 이를 결과하는 상대수익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상대수익의 추구와 절대수익의 추구는 궁극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스나이덜은 ‘상대수익의 추구에 관한 가설은 절대수익의 용어로 보다 잘 표현될 수 있는 주장을 잘못 규정한 것’이라고 비판한다(Snidal 1991a, 704.) 그리고 밀너는 절대수익 추구와 상호주의 전략의 결합은 상대수익 추구와 동일하기 때문에 상대수익의 추구가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Milner 1992, 471).

셋째, 국제협력의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상대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록 절대적인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들이 상호주의적 전략을 통하여 상대방을 감시하고 비협력적 태도에 대하여 처벌 ― 이른바 분권적 집행(decentralized enforcement) ― 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국제제도들의 존재로 인하여 국제협력이 용이하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슈영역에 대한 강조의 차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안보문제를 강조하고, 신자유주의들은 경제문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립슨(Lipson 1984)의 지적처럼 안보문제에서보다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국제협력이 이루어지기 쉽다.

다섯째, 의도와 능력의 차이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특정 국가의 안보문제와 상대적 수익에 대한 민감성은 상대방의 의도 선호에 대한 인식에 따라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현실주의자들은 상대방의 미래의 의도에 대해서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능력의 차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국제레짐과 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국제레짐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주변적인 것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제도들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들에 따르면 국제제도가 국제협력의 어려움을 상당부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액셀로드와 코헤인은 “제도들은 행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수익구조를 바꾸고, 미래의 그림자를 길게 할 수 있고, 다수 행위자들(N-person) 사이의 게임을 소수 행위자들 간의 게임으로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국제협력이 용이해진다(Axelrod and Keohane 1986, 238-39). 이와같이 국제제도의 역할에 대한 상반된 인식이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Mearsheimer 1994/95; Keohane & Martin 1995).

신자유주의와 신현실주의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더욱이 국제정치 이론논쟁이 다원화되는 가운데 자유주의 현실주의 전통이 재구축되고 패러다임 간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경향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민주평화론, 상업적 공화적 제도적 자유주의의 재구축을 통하여 강화되고 있고(Keohane 1990; Doyle 1997; Moravcsik 1997), 신현실주의 패러다임은 고전적 현실주의의 부활과 새로운 구조적 현실주의의 체계화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Buzan, Jones & Little 1993).

2.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와 국제체계

국제정치학의 주류 패러다임들인 현실주의와 자유주의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체계이론으로 발전되었듯이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정치이론도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통하여 체계이론으로 발전되었다. 마르크시즘은 원래 일국적 자본주의를 모델로 발전했었다. 그러나 레닌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외적 팽창의 덕분에 당분간 해소될 수 있고,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제국주의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종속이론가들은 중심 주변 간의 착취구조가 중심의 발전과 주변의 저발전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정립했고, 월러스타인에 의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국제체계, 지문화(geoculture)의 구조와 과정을 하나의 이론적 틀 속으로 통합하는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켰다.

세계체제론의 시각에서 볼 때 국제체계와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세계체제는 하나의 세계적 노동분화와 다수의 정치적 문화적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 단위들이 하나로 통합된다면 더이상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대신 세계제국이나 사회주의가 등장할 것이다. 다수의 국가들과 국가 간 체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태어났다(이수훈 1993; Arrighi 1994). 둘째, 국가들과 국가 간 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을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곧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해주는 일이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주의 위계구조는 잉여의 착취구조이며,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의 위계구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위계적 착취구조의 작동을 위해서는 정치적 상부구조가 필요한데, 이것이 곧 국가와 국가 간 체계이다(Chase-Dunn 1981). 셋째, 착취의 위계구조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 체계에도 위계적 구조가 존재한다. 패권국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 간 체계는 패권국의 존재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이를 통하여 안정적인 착취구조의 작동이 보장된다. 그러나 패권국은 흥망성쇠의 순환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뀐다. 이러한 패권순환의 주기는 대개 세계경제순환의 장기주기 ― 50-60년을 주기로 하는 이른바 콘드라티예프 파동 ― 와 일치한다(Chase-Dunn 1989). 이러한 패권국의 순환 역시 자본축적 기제의 작동에 기여한다. 월러스타인의 지적처럼 “근대세계체제의 국가 간 정치에 상당한 정도의 균형을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축적의 과정이 심각한 방해 없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주기적인 패권국의 등장과 쇠퇴였다”(Wallerstein 1996, 102).

세계체제론은 국가 간 체계의 자율성을 부인하고 국가와 국가 간 체계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에 기능적으로 기여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주류 국제정치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도래에 따라 국제관계의 중요한 내용이 경제적 거래이고, 세계시장의 작동이 점차 국가와 국제관계의 중요한 환경을 형성함에 따라 세계경제와 국제체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요청되고 있다(Little 1995). 세계체제론과 주류 국제정치이론 양쪽 모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IV. 탈실증주의 논쟁

라피드(Lapid 1989)는 ‘제3논쟁’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기존의 패러다임들에 대한 비판이다(paradigmatism). 둘째, 인식론적 공격이다(perspectivism). 셋째, 방법론적 다양성을 위한 주장이다(relativism). 이러한 특성을 갖는 ‘제3논쟁’은 “역사적으로나 지적으로 다양한 반실증주의적 철학적 사회학적 흐름들의 합류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Lapid 1989, 237). 즉 ‘제3논쟁’의 참여자들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기존의 주류 이론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해체(deconstruction)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우선 이들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스미스는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의 실증주의를 4개의 가정으로 요약하고 있다(Smith 1996, 16). 첫째, 과학의 일체성이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는 동일한 방법론과 인식론이 적용된다. 둘째,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 가능하며, 사실은 이론적으로 중립적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지식이 가능하다. 셋째,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규칙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연역-법칙적(deductive-nomological), 귀납-통계적(inductive-statistical) 형태의 설명이 가능하다. 넷째, 경험적 증명이나 반증이 실질적인 연구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탈실증주의 운동의 두 축인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탈근대론(postmodernism)은 이러한 실증주의의 가정들이 안고 있는 허구를 드러내고, 이것들에 기초하고 있는 주류 이론들, 특히 신현실주의 이론을 신랄히 비판한다. 아래에서는 이들 두 이론의 주장을 국제정치이론과 관련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있다.

1. 비판이론(Critical Theory)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특히 하버마스의 이론은 지식의 사회성을 밝히고 인간해방을 위한 비판적 이론의 수립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담론(또는 의사소통, discourse)의 역할을 특히 중시한다. 국제정치연구에 있어서 비판이론의 도입은 그람시의 영향을 받은 콕스(R. Cox), 길(S. Gill) 등 이른바 ‘이탈리아 학파’의 기여가 컸다. 그리고 ‘이론화 과정 자체에 대한 이론적 반성’을 요구하는 성찰주의를 주창하는 노이펠드 등도 비판이론의 도입에 기여했다. 이들은 다같이 실증주의의 주객분리 가능성에 강력히 반대한다. 예컨대 노이펠드는 성찰주의를 “인간의 사고와 실천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기준들의 관념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규정한다(Neufeld 1995, 42). 콕스는 지식은 항상 “누구를 위한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다고 선언한다(Cox 1981). 즉 지식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익을 대변한다. 따라서 지식에는 콕스의 분류처럼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지식이 있을 수 있고, 현상변경을 위한 지식이 있을 수 있다. 콕스는 전자를 ‘문제해결지식’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비판이론이라고 부른다(Cox 1995, 53). 따라서 비판적 지식인이 해야될 일은 지식의 이러한 역할을 이해하고 인간해방을 위한 비판적 지식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이론이 국제정치연구에 대하여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비판이론을 채용한 국제정치이론가들의 업적은 주로 다음의 네 가지 공헌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지식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지적이다. 즉 국제정치이론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이 볼 때 기존의 국제질서와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국제정치이론은 극소수의 특권적 국가들을 위한 것이다.

둘째, 무정부적 국제정치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이른바 ‘변화불가능 명제(immutability thesis)’에 대한 비판이다. 구조의 변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구조를 당연히 주어진 것이고 불변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강자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기존의 국제질서의 현상유지에 봉사하는 것이다. 변화불가능의 관념은 힘과 부의 구조화된 불평등을 지지한다. 사회적 규칙성들에 대한 분석은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변화의 현실적 제약요인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신현실주의가 현상유지를 재생산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이라면, 비판이론은 현상을 비판하고 변혁을 추구하는 이론이다.

셋째,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억압기제에 대한 비판과 이로부터 나오는 사회변혁의 힘을 인정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비판이론은 생산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인간해방의 원동력을 찾는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을 비판한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경계들과 ‘포용과 배제의 체계들’을 만들고 있는데,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들, 여성, 폭력적 국가, 억압적 국제체계 등이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비판이론은 이러한 체계의 본질을 분석하고 변화의 다양한 원동력들을 찾고자 한다. 계급투쟁은 단지 그러한 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사회가 인간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생산관계 이외에 또 다른 배제의 체계들이 여전히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국제정치이론가들이 국가와 국제체계의 억압성을 부각시키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국가와 국제체계는 현상유지의 주요한 도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와 국제체계의 변화가능성이 오늘날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세계화가 그 주요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시민권 공동체 주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가 요구되고 있고, 이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콕스의 지적처럼 세계화에 따른 변화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변혁운동의 장이 국가사회에서 국제사회 세계사회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제약되지 않은 담론의 중요성은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여기에 곧 인간해방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주권국가를 비롯한 모든 경계들이 열린 대화를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담론윤리의 논리는 도덕적 행위자들이 모든 경계들과 경계지어진 공동체들을 기꺼이 문제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담론윤리는 배제의 체계로서 주권국가를 영속시키는 시민과 국가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문제시한다”(Linklater 1996, 294). 이러한 문제의식은 곧 민족국가를 초월한 세계공동체, 세계시민사회의 설립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비판이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계지어진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재조정하고 탈민족주의적 시민권 개념의 도입을 필요로 한다”(Linklater 295). 콕스는 이를 위하여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치경제연구에 적절한 존재론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Cox 1995, 34).

2. 탈근대론(Postmodernism)

탈근대론 역시 철학 문학 등에서 먼저 발전하여 국제정치이론 논쟁에 도입되었다. 탈근대론은 종종 해체주의 탈구조주의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탈근대론자들의 핵심적 작업이 곧 구조에 대한 해체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거대한 구조 진리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각 주체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해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과학과 이론이 진리의 담보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구성은 권력행사를 통하여 부과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론가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부과를 해체하고 노출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탈근대론자들은 대개 심각한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누구나 상이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따라서 보편적인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실증주의적 과학은 가능하지 않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바스케스(Vasquez 1995)는 탈근대론이 제기하고 있는 주장들 중에서 국제관계이론과 관련성이 높은 것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근대성의 자의적 성격이다. 근대성은 계몽사상에서 가르치듯이 인간을 무식과 미신으로부터 해방하여 인간성 완성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의 이념이 아니다. 근대성은 다만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산물일 따름이다. 이것은 진실도, 불가피한 것도, 모델도 아니다. 이것이 진보이고, 최선의 것이고, 우월한 것이라는 주장은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자의적인 것이다”(Vasquez 1995, 220). 근대성은 하나의 프로젝트일 따름이다.

둘째, 존재하는 것은 ‘진리를 가장한 선택’이다. 세상에 불가피한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선택일 따름이다. 물론 그러한 선택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의 산물이다. 투쟁의 결과에 따라 상이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존재하는 것도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런데 승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익과 선호, 문화적 편견과 정치적 힘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형이상학적 범주의 것으로, 진리로 합리화한다.

셋째, 현실은 사회적 구성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의 신념과 행동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나 행동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사회구조 자체도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부과된 것이다.

넷째, 언어, 개념적 틀, 패러다임 등은 자기실현적 예측들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확산되고 사람들이 믿게 되면 그 아이디어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 실제로 실현된다. 어떤 규칙이나 규범이 강요되고 준수된다면 특정한 현실이 실현된다. 근대 경제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근대 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세상이 실현되는 정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과학은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다. “과학은 단순히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와 삶의 다른 방식들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실천이다”(Vasquez 1995, 222).

다섯째, 정체성(identity)은 사회적 구성이다. 그런데 정체성 형성의 과정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순탄하지가 않다. 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느냐는 개인 집단 국가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누가 정체성 형성을 통제하느냐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탈근대론적 시각에서 애슐리(Ashley 1986, 258)는 월츠의 신현실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신현실주의는) 기존의 질서를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고,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기보다 제한하고, 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다양성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모든 실천을 통제에 대한 이익에 복종시키며, 책임감을 넘어서는 사회적 권력의 이상에 굽신거리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사회적 학습과 창조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력을 탈취해 버린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은 범세계적 규모의 전체주의적 프로젝트인 세계정치의 합리화를 예상하게 하고, 정당화시켜주고, 지향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신현실주의가 다양성을 무시하고 변화를 위한 실천을 말살하며 기존의 권력관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해체의 작업은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탈근대론은 종종 이러한 정도를 넘어 과도한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결과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어떤 것도 영원히 진리가 아니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관, 역사관 또한 사회적 구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위한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V. 구성주의 논쟁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 합리주의와 성찰(또는 반성)주의의 대립은 극단적인 인식론적 대립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양자간의 대화와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양자 사이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어떠한 기반도 공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이론적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매우 불만족스러운 상태인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나름대로 옳다고 한다면 심각한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정확히 많은 탈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상황을 오랫동안 용인할 수 없다. 이론적 혼란상태를 극복할 새로운 통합,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바로 이러한 요청에 대한 하나의 응답을 시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구성주의가 제기하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성격이 과연 무엇인가? 먼저 구성주의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성주의의 특징은 두 가지의 중심적 가정에서 발견된다. 첫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우선적인 힘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다. 둘째, 행위자들의 정체성과 이익은 자연적으로,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관념들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진다. 웬트(Wendt 1999, 1)는 이것을 구성주의의 두 교의라고 부른다. 첫번째 교의는 구성주의가 물질주의(materialism)를 비판하고 관념주의(idealism) 시각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번째 교의는 구성주의가 개체론(individualism)에 반대하고 전체론(holism)의 입장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일종의 ‘구조적 관념론(structural idealism)’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주장이 곧 구조(structure)와 행위자(agent)가 서로를 동시에 구성(mutual construction)한다는 것이다(Wendt 1987). 이 시각에서는 어느 것도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에 우선하지 않는다. 행위자와 구조는 모두 사회적 존재이며,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구성되고 재생산된다.

왜 관념론인가? 구성주의자들은 ‘사회적 의식의 성격과 구조’, 즉 ‘관념의 배분’이 ‘사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Wendt 1999, 24). 물리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단지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물리력의 의미와 중요성은 관념을 통하여 부여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의 핵무기와 북한의 핵무기는 상이한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다. 핵무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영국과 북한에 대한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성주의자들은 “사회의 심층적인 구조는 물리력이 아니라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Wendt 1999, 25).

왜 구조론인가? 개체론과 전체론의 차이는 구조가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개체론은 구조를 개체들의 속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구조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에 비해 전체론은 “사회구조의 효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들이나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행위자들이 사회구조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구성주의는 행위자들의 속성인 정체성과 이익이 사회구조에 의해서 구성되어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로서 행위자와 구조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사회현상은 대부분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국가와 국제체제를 우리는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가 없다. 관찰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곧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실증주의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고, 주체에게 객관적인 인식의 능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관찰할 수 없는 것의 존재적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비해 탈실증주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부정하고 세상은 보는 사람의 관점, 즉 관찰자가 가지고 있는 이론 이익 이념 등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실증주의-탈실증주의 논쟁에서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들(존재론)이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들(인식론)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인식론을 존재론의 우위에 두는 실증주의-탈실증주의 사이의 이러한 논쟁구도에 반대한다. 구성주의는 관찰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하고 믿는 대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상호 주관적으로 공유될 때에만, 즉 사회적으로 구성될 때에만 존재적 지위가 부여된다. 따라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현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 구성주의, 특히 웬트의 입장이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구성주의는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 사이의 기존의 이론논쟁 구도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교묘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즉 물질론과 실증주의, 관념론과 탈실증주의의 결합을 당연시하는 기존의 철학적 선택을 벗어나 관념주의적 존재론과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결합하는 이른바 ‘중도론(via media)’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웬트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탈실증주의의 공헌을 받아들이면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는 실증주의의 편을 들고 있다.

이러한 구성주의가 국제정치의 이론논쟁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명백하다. 구성주의를 채택한 국제정치이론가들의 최대의 공격대상은 신현실주의다. 웬트의 월츠 비판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Wendt 1999, 15-18). 첫째, 월츠의 구조주의는 궁극적으로 개체주의다. 그가 미시경제이론에 대한 비유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둘째, 물질적 능력의 배분으로 구조를 정의하고 있는 물질주의자이다.

 

이로 인하여 월츠는 국제체계의 사회적 측면과 변동의 가능성을 무시한다. 셋째, 국제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국제정치의 중요한 부분을 연구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요컨대 월츠의 개체론적 물질론적 존재론과 국제적 과정에 대한 무시는 결국 그의 이론을 삼중적 무능에 빠지게 만들었다. 개체론으로 인하여 국제정치체계에 대한 설명도 못하고, 물질론으로 인하여 변동을 설명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과정에 대한 무시로 인하여 단위수준의 행동, 즉 개별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대한 설명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주의의 신현실주의 비판은 사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을 기초로 어떠한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느냐에 있다. 신현실주의에 대한 구성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근접하고 있는 이론가가 바로 웬트 자신이다. 웬트의 최근 저서인 {국제정치의 사회이론}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수행하고 있다(Wendt 1999, 20-21).

 

첫째, 존재론적 전환이다. 국제적 구조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웬트는 이것이 물질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물질적 권력이나 이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의 의미나 중요성 자체가 체계의 사회적 구조, 즉 문화를 통하여 결정된다. “국제적 생활의 특성은 국가들이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기대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들은 물질적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주로 구성된다”(Wendt 1999, 20).

둘째,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이 국제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구성된다. 물론 국제사회의 상호작용 밀도가 아직도 국내 사회의 그것보다 낮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국내 사회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국가의 정체성이 국제사회의 다른 국가들이 그 국가에 대하여 가지는 관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사회관계와 이에 기초한 국가들의 성격과 대외적 목적은 국제적 과정을 통한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인일 수는 있지만 이것에 의해 국가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무정부적 체계는 상호작용의 과정과 관계없이 어떤 하나의 결과만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과 관련 없는 무정부적 체계의 논리는 없으며, 과정에 따라 다양한 결과들이 산출될 수 있다. 즉 ‘무정부상태의 논리’라는 것은 없으며, 국가들이 어떠한 욕망과 이익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정책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무정부상태의 효과는 달라진다. 웬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Wendt 1999, 308-9).

‘무정부상태의 논리’란 것은 없다. ‘무정부상태’라는 용어 자체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해준다. 이것은 부재(‘규칙이 없는’)를 의미하지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이 없는지를 말해주지 무엇이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빈 용기(empty vessel)이며 내재적인 의미가 없다. 무정부상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류와 그들 관계의 구조이다.

주지하다시피 국제체계의 성격에 관한 논란의 중요한 부분이 무정부적 구조의 인과적 힘에 대한 것이다(Milner 1991). 신현실주의자들에 의하면, 무정부상태는 본질적으로 자력구제체계이고, 군사경쟁 세력균형 전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제도들이 자력구제체계를 중요한 정도로 완화한다고 주장한다. 웬트는 국제관계에서 국가들의 사회적 역할들이 적(enemy), 경쟁자(rival), 친구(friend)의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무정부상태의 구조가 적어도 세 가지의 문화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Wendt 1999, 247). 적의 역할이 지배적일 때에는 홉스적(Hobbesian) 문화가, 경쟁자의 역할이 지배적인 경우에는 로크적(Lockean) 문화가, 친구의 역할이 지배적일 때에는 칸트적(Kantian) 문화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웬트는 불(Bull 1977)을 따라서 이러한 상이한 문화적 요인들이 국제체계 속에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 각기 연결된 (신)현실주의, (신)자유주의,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들이 여전히 설명할 무언가가 있다고 볼 수 있다(Wendt 1999, 310). 그러나 웬트는 국제관계가 중대한 구조적 변동, 즉 문화변동을 겪어왔으며, 지금 또 다시 그러한 변동의 와중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7세기 이전까지 국가들은 죽느냐 죽임을 당하느냐가 무정부상태의 논리인 홉스적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이 로크적 문화를 건설했고, 이것은 식민주의라는 홉스적 방법에 의해서이기는 하였지만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화 속에서는 주권의 상호인정원칙에 의해서 국제적 갈등이 제한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제체계는 또 하나의 구조적 변동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아직 서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로크적 문화에서 집단안보에 기초한 칸트적 문화로의 변동이라는 것이다(Wendt 1999, 314).

VI. 국제정치 이론화의 새로운 지평

이론논쟁은 이론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각 이론은 서로간의 비판을 통하여 각각의 약점을 발견하고 보완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론논쟁은 또한 연구대상에 대한 이해도 증진시킬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설명이 제기되고, 각 이론이 상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론논쟁은 이론과 대상 간의 관계, 이론 내부의 논리적 체계 등이 엄밀히 점검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론적 발전과 현실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논쟁이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상이한 철학적 이념적 배경에서 수립된 이론들 사이에서는 건설적인 논쟁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로를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상대주의로의 도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철학적 인식론적 논쟁이 소모전으로 그치고 말 가능성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최근의 국제정치 이론논쟁도 양면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이론 발전과 현실 인식의 증대에 기여한 면이 있는가 하면, 비판을 위한 비판, 소모적인 논쟁이 이루어진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론논쟁이 이루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신현실주의 논쟁은 한편으로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이론적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논쟁을 통하여 국제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체제론을 통하여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체계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세계화된 세계에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이론발전의 기초들을 쌓았다. 탈실증주의 논쟁은 기존의 주류 이론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통하여 이들이 기초하고 있는 인식론적 이념적 속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이론적인 ‘게릴라전’을 통하여 무차별 비판을 감행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국제정치와 국치정치학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탈근대론과 비판이론은 인간해방을 향한 규범적 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게 하는 이론형성의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구성주의는 패러다임 논쟁과 탈실증주의 논쟁의 성과를 반영하면서 둘 사이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실증주의와 탈실증주의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중도에서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적 종합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이론논쟁을 더욱 가열시킨 것은 역시 국제정치 현실의 변화였다. 탈냉전 세계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최근의 국제환경 변화는 사실 기존의 이론들에게 상당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제정치이론의 일차적인 연구대상인 국가와 국제체계의 본질과 과정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안팎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고, 국제관계는 세계경제의 통합, 세계적 이슈들의 등장, 국제제도들의 확대와 심화 등으로 그 밀도를 급속히 높여가고 있다. 권력행사의 자원과 수단에 있어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장 금융 통화 기술이 주요한 권력자원으로 등장했고, 이것들의 흐름에 대한 영향력이 권력행사의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이론논쟁의 승패는 이러한 현실적 변화들을 누가 얼마나 잘 설명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이론논쟁의 성과와 국제적 세계적 현실의 변화를 감안할 때 앞으로 국제정치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으면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이론화 작업은 제도이론과 구성주의의 통합일 것이다. 사실 구성주의의 등장과 발전은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진화과정에 나타났던 신기능주의, 레짐이론,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Ruggie 1998b; Sterling-Folker 2000). 구성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론자들이 국제제도가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일면적인 효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국제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국제제도들은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을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질서의 기초로 작동한다.

우선 크라토크빌과 러기(Kratochvil & Ruggie 1986; Ruggie 1998b)가 국제레짐에 대한 기존의 개념정의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크래스너(Krasner 1983, 2)의 개념정의에 따르면, 국제레짐이란 ‘국제관계의 특정 영역에 있어서 행위자들의 기대들이 수렴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원칙들, 규범들, 규칙들, 의사결정절차들’을 가리킨다. 레짐이론가들은 이러한 레짐이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실증적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그 결과 레짐의 형성과 존재 그 자체가 국가들 사이의 공유된 의식, 기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러기(Ruggie 1998b, 89)의 표현을 빌리면, “레짐의 구성적 기초로 수렴하는 기대(convergent expectations)를 강조하는 것은 레짐에게 불가피하게 간주관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크라토크빌과 러기는 기존의 레짐이론가들이 이러한 인식을 하지 못함으로써 ‘인식론과 존재론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웬트와 두발(Wendt & Duvall 1989)도 1980년대의 신제도주의자들이 국제제도의 개념을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제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국제제도들의 구성적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제도의 개념을 불(H. Bull)과 같은 ‘구제도주의자’들처럼 넓은 의미로 확대하여 이른바 국제사회의 ‘기본적’ 제도들을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국제제도의 역할을 이해하려는 구성주의자들의 시도는 불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제관계를 국제체계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불은 일찍이 국제체계와 국제사회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Bull 1977, 9-10, 13).

국가들의 체계(또는 국제체계)는 2개 이상의 국가들이 그들 사이에 충분한 접촉을 갖고 서로의 결정에 충분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전체의 부분들로서 행동할 때 형성된다. … 국가들의 사회(또는 국제사회)는 (이미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일단의 국가들이 공통이익과 공통의 가치들을 인식할 때 형성되는데, 이 경우 국가들은 서로의 관계에서 공통의 규칙들에 의해서 스스로 규제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공통의 제도들을 운영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국가들이 국제관계에서 수용하고 있는 공통의 규칙들과 제도들이 국제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는 지적이다. 불은 이러한 기본적인 제도들로서 세력균형, 국제법, 외교기구, 강대국 관리체계, 전쟁 등의 다섯 가지를 들고, 이들이 국제질서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는 역할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불은 이러한 기본적 제도들로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국제사회의 관계유형을 밝히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국제사회가 거꾸로 국가들의 정체성과 이익을 구성하는 측면을 무시했다(정진영 1994). 구성주의의 도전은 불의 국제사회론과 제도이론의 공헌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이 보여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기(Ruggie 1998a, 862)의 다음과 같은 말은 구성주의 도전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구성주의 프로젝트는 (국제정치학의) 비교적 좁은 이론적 영역의 개방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이익과 정체성을 다시 문제시하고, 사회적 행위와 사회질서의 간주관적 기초를 깊숙이 포용하며, 사회적 행위를 제한함과 동시에 사회적 행위에 의해서 창조, 재창조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변화되는 구조의 ‘이중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공간과 시간의 차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따라서 기존의 국제정치이론들에 대한 구성주의의 도전은 아주 본질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성주의는 국제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파악하려 한다. 기존의 주류 이론들이 국가들의 합리적 선택에 기초한 상호작용, 힘의 배분에 따른 효과를 중심으로 국제정치의 현실을 파악한다면, 구성주의는 주권국가와 국제체계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밝혀내고, 국가들의 행위를 규칙과 규범, 설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그러면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무정부적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국제사회가 발전하는가? 우선 부잔(Buzan 1993)은 국제사회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주권의 상호인정’과 ‘법적 동등성’을 제시하고 있다. 부잔은 이것이 국제관계에 있어서 ‘규칙과 제도의 발전을 위한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루스-스미트(Reus-Smit 1997)는 그러한 조건들을 기초로 하여 국제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조건들이야말로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구조(constitutional structures)’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정당한 국가이고 국가의 어떠한 행동이 정당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간주관적 신념 규범 원칙들이 바로 그러한 구조에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 가지의 규범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국가의 도덕적 목적에 관한 간주관적 신념이다. 그리고 주권의 조직원리와 절차적 정의의 규범이 포함된다. 이러한 헌법적 구조들에 기초해서 국제사회의 ‘기초적 제도들(foundational institutions)’이 형성되는데, 여기에는 ‘쌍무주의, 다자주의, 국제법, 외교, 강대국에 의한 경영’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국제사회의 가장 구체적인 제도들로는 ‘이슈별 레짐들(issue-specific regimes)’을 들 수 있는데, GATT / WTO, IMF, NPT(핵비확산조약)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무정부적 국제관계가 이러한 국제제도들의 발전을 통하여 국제사회로 전환될 수 있다는 주장은, 웬트를 비롯한 구성주의자들이 무정부상태가 권력정치라는 하나의 논리만을 양산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직결돼 있다. 무정부상태하의 국제관계는 국제제도들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웬트(Wendt 1999)는 그러한 국제관계의 모델들로 적 경쟁자 친구라는 세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불(Bull 1977)은 홉스 그로티우스 칸트적 요소에 대한 구분을 제시했다. 허드(Hurd 1999)는 사회적 질서유지의 원천으로 힘 자기이익 정당성이라는 세 모델을 제시하고, 이것을 국제사회에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구성주의는 넓은 의미의 국제제도들이 국제관계를 사회적 관계로 전환시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에 기초한 국제정치의 사회이론이 국제정치이론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에서 사회적 요소들의 밀도에 차이가 나타나고 상이한 국제사회 모델들이 적실성을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들의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구성주의와 제도주의의 접점을 더욱 넓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바로 제도주의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제도주의는 신현실주의의 비판에 맞서 국제제도들이 효력을 발휘하고 국제협력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적실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이론적 발전을 이룩했다. 코헤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도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협력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구체화하려고 함으로써 제도주의 이론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현실주의적 명제들이 유효한지를 보여준다. 제도주의가 현실주의를 포괄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Keohane 1995, 42).

그러나 제도주의자들의 국제제도에 대한 관심은 구성주의자들의 비판처럼 매우 좁은 영역에 국한돼 있었다. 따라서 제도주의자들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국제제도의 형성과 효과에 대한 연구로 그 관심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사실 코헤인(Keohane 1989, 4)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제도들의 중요성을 그들이 유인체계에 미치는 효과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제도들은 국가지도자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지도자들의 동기 및 이익의 추정에 대한 가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국제제도들은 규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구성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제도주의와 구성주의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론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국제질서의 형성과 작동을 현실주의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형성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통합이 결코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무정부상태가 권력정치의 논리만을 산출할 것이라는 가정은 논리적으로 단순하고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화는 현실에 대한 적실성의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푸찰라(Puchala 2000, 138)의 지적은 적절하다. “아마 현실주의가 국제관계의 어떤 형식을 포착할지는 모르지만 그 본질을 무시하고 있다. 현실주의는 논리적으로는 우아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와 구성주의 이론들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복잡하고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탈냉전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국제적 의제와 행위자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문제가 심각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관계를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국제제도의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론적으로 긴요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코헤인(Keohane 1998)의 지적처럼, “1990년대에 세계정치를 분석하는 것은 국제제도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역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의 국제제도들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성 결핍(democratic deficit)’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취약점은 국제질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글로벌 거버넌스의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오늘날 요청되고 있는 국제정치이론의 새로운 통합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국가 국제제도 국제질서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국제사회가 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국제적 규범과 제도들의 제약하에서 국가들의 전략적 행동과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보다 규범적 차원에서 국제관계의 제도화 민주화를 진척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VII.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구미학계에서의 국제정치 이론논쟁을 한국에서 국제정치학 및 관련 학문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해야 할까? 우선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이 우리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거의 자명하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러한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국제정치학자들이 (신)현실주의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도 다분히 미국학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추세를 연장해서 보면,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의 귀추가 우리 학계의 이론적 정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물론 한국학계에서 구미이론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영선 1995).

그러면 구미학계에서의 이론논쟁에서 최근 나타나고 있는 제도주의와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우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현실적 차원과 규범적 차원의 구분이 필요하다. 먼저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국제관계 현실은 남북관계와 동북아 지역정세를 고려할 때 여전히 냉전적 상황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그만큼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이론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역시 구미이론에 대한 의존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서구적 국제사회의 확산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규범적 차원에서, 제도주의-구성주의 이론의 통합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이론발전이라고 판단되며, 우리 학계가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국제관계 속에 다양하고도 깊숙이 개입돼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관계가 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적 규범에 기초한 협상과 정당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국제사회의 규범이나 제도들이 ‘민주성 결핍’의 문제를 안고 있고 강대국들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타당하다. 그러나 물리력의 차이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주의의 세계보다 공통의 규범과 제도가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국제사회적 관계가 중소국가들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다.

마지막으로, 제도주의와 구성주의 이론의 수용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들이 남북관계의 현실과 변화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적실성과 유용성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을 외부세계로 이끌어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정책의 논리적 기반은 비교적 명백하다. 북한과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증대하면 북한이 국제적 규범체계 속으로 편입될 것이고, 이에 맞추어 북한 내부의 변화도 촉진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한은 결국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변화될 것이며, 이는 남 북한 간의 평화공존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이 체제붕괴의 위험 때문에 개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개방이 체제에 위험을 주기보다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게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에는 북한의 대외 개방노력에 대하여 한국이 일방적으로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렇게 파악할 때 제도주의 이론이나 구성주의 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우선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북한과의 교류증대가 남 북한 간의 제도설립이나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하여 북한의 행동이 규율되는 측면을 중요한 변화로 주목할 것이다. 따라서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북한과의 접촉과 교류를 다양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주의 이론가들은 국제협력의 실현방안으로 상호주의(reciprocity)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력하다. 일방적 시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임승차전략을 택하게 만들고, 국내적 비판을 불러일으켜 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정진영 1997).

구성주의 이론가들은 북한의 국제사회 참여와 국내적 변화를 통하여 북한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중시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구성적 규칙들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이 과연 책임이 있는 주권국가인가, 그리고 북한의 정체성과 이익이 다른 국가들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 포용정책이 성공하려면, 북한이 지속적으로 대외관계를 넓혀 나가고 북한 내부의 개방과 개혁을 통하여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북한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북한이 스스로 이러한 길을 택하지 않을 경우에 한국이 과연 북한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제도주의 구성주의가 한국의 일반적 국제관계나 대북관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얼마나 적실성 유용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제정치학계가 여전히 (신)현실주의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구미학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치 이론논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이론적 통합의 방향으로 떠오르고 있는 제도주의-구성주의에 대한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질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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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딜레마? 동아시아의 브뤼셀 지향해야

한국의 딜레마? 동아시아의 브뤼셀 지향해야

[동아시아와의 인터뷰]<4> 중국 인민대 팡종잉 교수

평화네트워크  ,  기사입력 2013-01-03 오전 8:14:52
평화네트워크와 <프레시안>이 함께 하는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네 번째 순서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이제영 간사가 중국 인민대 국제관계학 팡종잉(庞中英) 교수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12월 11~12일 아산정책연구원이 주최한 중국포럼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팡 교수는 한국이 전략적 딜레마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외교관 출신인 팡종잉 교수는 국제경제와 국제기구, 그리고 소프트파워를 중심으로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 구축을 핵심적인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10여 년간 한중 학술교류에도 깊숙이 관여해왔다. 또한 싱가포르 국립대,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 영국의 워릭대, 뉴질랜드의 빅토리아대 등을 두루 거쳤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주로 세계 질서의 미래, 동아시아 영토 분쟁에 대한 중국의 시각, 중국의 부상과 소프트파워, 미중관계에서 한국의 딜레마와 선택 등이 다뤄졌다. 지한파를 자처한 팡 교수는 한국이 미·중 관계나 중·일 관계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할 기회도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팡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린다. 국제 문제 전문가로서 세계 질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매우 어려운 주제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되고 있는 세계의 미래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질서 있고 평화로운 세계가 될 것으로 희망하지만, 많은 도전과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기후 변화 문제가 대표적인예일 것이다.

나는 한국이 유엔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고 또 유엔 사무총장도 배출한 것을 알고 있다. 한국은 분명 보다 조직화된 세계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고, 또 기후 변화나 핵무기 등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 나는 세계 질서의 미래가 평화적이고 협력적이며 여러 문제들이 질서정연하게 다뤄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많은 위험과 도전, 그리고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이를 근거로 세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유엔이나 비정부기구(NGO)와 같은 기구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이 일하고 있는 평화네트워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 미국과 한국과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세계가 아직 이상적이지 못하며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과 도전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갈수록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이것이 곧 세계가 완벽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줄곧 더 나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원하는 세계 질서는 무엇인가? 중국은 현 체제의 이익상관자(stakeholder)인가 아니면 수정주의자(revisionist)인가?

‘중국이 수정주의자(revisionist)인가 아니면 현상 유지(status quo) 세력인가’라는 당신의 질문은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다. 중국과 같은 신흥 강대국이 부상할 때 적용되는 전형적인 서구식의 분석 틀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분법적인 관점은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적용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중국은 현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현상 유지 세력이 될 것이다. 중국은 아시아의 이웃국가들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연합과 같은 서방 국가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계속 모색할 것이다.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은 제18차 당 대회를 베이징에서 개최했다.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당 대회에 최종 정치보고서를 제출·발표했는데, 이 보고서는 중국의 현 정책이 시진핑(習近平)과 리커창(李克强) 등 새로운 지도부에서도 계승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시진핑은 칭화(淸華)대에서, 리커창은 베이징(北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이들 지도자들의 교육 수준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왔고, 또한 1950년 이후 출생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중국을 보다 잘 통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대외정책도 연속성이 강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점을 국내외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는 곧 중국은 현상 유지 세력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세계 질서가 보다 공정하고 조화로우며 다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곧 중국이 현재의 세계질서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일각에서는 중국이 외교정책과 세계에서의 역할이 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말한다. 서방, 특히 미국이 지배해온 현존 세계 질서를 전복하려고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중국은 현존 질서를 개혁하고 개선하길 원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G8의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G20의 회원국이고 G20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중심에 있다. 중국은 또한 다른 기구들의 회원국이면서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에서 지분과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중국이 현존 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존 질서를 전복시킨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나는 서구식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중국이 현상 유지 세력이냐 수정주의 세력이냐’고 접근하는 것은 좋은 분석 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지만, 중국은 본질적으로 현존 질서의 개선을 추구하고 있고 상호 간에 도움이 되는 방식의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결코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나 나치독일과 같은 수정주의 세력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중국이 공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여긴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을 보면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근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과 일본,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사이의 분쟁도 있지만, 동아시아 영토 분쟁의 중심에는 일본이 있다. 일본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및 러시아와도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영토 분쟁에 대한 중국의 정책과 행동은 아직까진 공격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오위-센카쿠 열도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중국은 이들 섬이 전통적으로 중국의 주권 하에 있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적으로 분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다오위-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 인민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으며 중국이 보다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먼저 조치를 취한 쪽은 일본이고 중국은 이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모습이 공세적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누가 먼저 위기를 야기했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또한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일본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취했고 중국과 한국은 약한 나라들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희생양이었다. 한국도 그렇듯이 중국도 일본과의 영토 분쟁을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일정책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고 이후에도 미국은 영토 분쟁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이 영토 분쟁에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시각은 결코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중국이 1세기 전에 제국주의 세력이었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고 이를 간과한 채 영토 분쟁에서 중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인들 역시 중·일 간의 영토 분쟁에 역사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태도가 너무 강경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갖고 있다. 중국은 방어적이라고 하지만 외부의 시선으론 공격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양국 간 학술교류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다. 양국의 학자들은 1990년대 초반 중한 국교 수립에 기여했다. 나 역시 한국의 친구라고 자부하고 있고 또한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우려도 이해한다. 그러나 솔직히 한국의 중국에 대한 관점은 서구 매체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에 있어서나, 한국과 중국은 상당한 상호의존성을 갖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살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많은 도시들은 비행기와 선박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국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고 공동의 이익과 기반도 갖고 있다. 이는 양국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미래에도 한국의 친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두 나라는 1950년대 초 한국전쟁에서 서로 피를 흘린 비극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긴 역사를 볼 때 이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러한 비극은 완전히 극복되었다.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아직 후진국 수준”

최근 중국의 연성권력(soft power)에 대한 논의가 많다. 소프트파워는 중국의 외교전략에서 어떤 비중과 의미를 갖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11월 하순에 핀란드 헬싱키에 가서 중국의 소프트파워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발표 요지는 이랬다. 먼저 중국은 최근 세계와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연성(soft) 수단과 자원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긍정적인 발전이다. 세계도 이러한 발전을 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여전히 약하다. 수십 년이 지나서 중국이 소프트파워에서 주도적인 국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현재까지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후진적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지도부는 지속적으로 소프트파워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전통문화, 전통적인 생활방식, 전통적인 사상 등을 재조명하면서 말이다.

두 번째로 중국은 경제 개혁은 물론이고 정치 개혁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데, 이러한 중국식 개혁의 성공 여부가 소프트파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이 경제적, 정치적 개혁에 성공한다면 이것 자체가 중국식 소프트파워의 근원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중국은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와 소프트파워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중 간에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중국의 소프트파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사람들은 소프트파워를 경쟁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소프트파워는 본질적으로 상호 협력적이다. 경쟁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협력이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류(韓流)가 한중간의 소프트파워 경쟁과 협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는가?

물론이다. 중국은 이른바 ‘한류’와 경쟁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중국 내에서 엄청난 힘과 인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를 따라잡고자 한다. 이를 놓고 보면 경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 자체는 협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동시에 중국은 한국과 소프트파워의 협력도 추구하고 있다. 서구식 모델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미래의 세계는 보편적인 발전과 거버넌스의 모델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과 한국은 거버넌스의 미래 모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한중 양국의 소프트파워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소프트파워의 성공은 경제 발전, 정치 발전, 문화 혁신, 문명의 부흥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의 문화가 부흥에 성공한다면, 그리고 발전과 거버넌스, 평화와 조화에 있어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한다면, 양국의 소프트파워도 더욱 강력해지고 매력적이게 될 것이다. 중국의 개혁과 현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국은 현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첨단 기술과 더 많은 자유가 어우러진 국가가 되기 위해서 완수하고 개혁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다. 만약 중국이 이러한 과업에 성공한다면, 중국 문명과 번영의 오랜 역사를 고려할 때, 중국의 소프트파워뿐만 아니라 글로벌 소프트파워에서 크게 기여할 것이다. 소프트파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면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더 많은 고민과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이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 가능”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이어도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는 이어도와 관련해 중국은 최근 관할권 주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은 중국의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어도 문제는 협상과 같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어도 분쟁은 다오위-센카쿠 문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내가 알기엔 한중 정부가 평화적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국제법에 따라 협상을 진행하면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해결될 수 있고 관리될 수 있는 문제로 양국의 우호 관계를 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은 이어도를 매우 중요한 이슈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실제로 모든 영토 분쟁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이는 한중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두 나라는 상당한 상호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이에 비춰볼 때 이어도 문제는 매우 사소한 사안이다.

우리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중국의 시장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이는 중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나라의 경제는 이미 통합되어 있고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어도 문제는 관리될 수 있으며 두 나라의 지혜와 협상가들의 기술, 그리고 학자와 NGO가 협력한다면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다. 평화가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유지되는 한, 이어도 문제는 성공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미·중 관계에서 한국의 선택에 대해 묻고 싶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고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이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이 중국 견제와 봉쇄와 관련해 더 많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고 거꾸로 중국은 이를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이 딜레마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내 친구이자 서울대의 미·중 관계 전문가인 정재호 교수는 한국의 선택은 매우 어렵고 그래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한국이 한쪽 편을 든다면,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나는 정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에 비춰볼 때 세 가지 선택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필리핀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필리핀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까지 환영하고 있다.

두 번째로 미국과 중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면서 어떤 편도 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나라들이 있다. 호주와 싱가포르가 그 예가 될 것이다. 호주의 자유주의적 정부는 미·중 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담은 백서를 2012년에 발표했다. 호주 정부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재균형 전략과 관련해 미국과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싱가포르의 리센룽(李顯龍) 총통과 그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耀) 역시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에게 보낸 축하 서한을 통해 분명하게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미·중 사이에서 어떤 편에도 서지 않을 것이며, 미·중 관계의 협력과 조율, 그리고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다.

끝으로 이 두 가지 선택에서 망설이는 나라가 있다. 아마도 한국이 예가 될 것 같다. 한국은 대외정책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을 아직 꺼리고 있다. 그만큼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도 대단히 많다. 호주나 싱가포르는 상대적으로 한국보단 지정학적 고려를 크게 할 필요가 없다. 이들 나라는 한국만큼 긴박한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없다.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한국이 미·중 갈등을 완화하고 협력을 증진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아시아의 중견국가로서의 한국이 이른바 ‘G2’ 시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

중국과 한국은 떠오르는 신흥강국이자 중견국이다. 그래서 한국은 글로벌 영향력을 둘러싼 중국과의 경쟁을 우려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한국 대선을 보더라도 나는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한국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협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이러한 차이와 논쟁에 주목해왔다. 그리고 한국의 차기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새롭고도 창의적인 외교 전략을 찾아내길 희망한다. 이는 한국에 딜레마이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딜레마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아마도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 모두와 우호 관계를 맺길 원하는 호주나 싱가포르 모델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혁신의 문제라고 본다.

미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한국의 차기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이 있다. 한국의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자유주의적이든, 이명박 정부처럼 보수적이든 중국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경향이다. 이는 곧 한국의 차기 정부도 중국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신의 문제’라고 했는데,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이 추진할 수 있는 혁신이 있는가?

원론적으로는 한국은 더 많은 분야에서 중국과 더욱 긴밀한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 양국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양국 관계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도 가져야 한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한중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장기적 방법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으로 지역 통합을 증진하고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한 투자도 늘리기 위해 양국 정부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아세안+3(한-중-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한·중·일 FTA도 지속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이 장차 한·중·일 등 지역 협력 구도에서 사무국의 위상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강대국 사이에 있지만, 이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또한 한국이 한·중·일 3자 협력의 사무국이 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한국과 중국이 인식을 함께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미래는 벨기에의 수도이자 유럽연합의 수도인 브뤼셀처럼 될 수 있다. 동아시아 협력의 수도 말이다. 한국이 이러한 선택을 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