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 ‘아시아’ 담론

근대 일본의 ‘아시아’ 담론에 대해

Posted by aniooo in CRITIQUE on 2011年11月28日

올 겨울의 『창작과 비평 (154호)』에 「전후일본의 문학담론과 아시아적 시각 ― 역사적 상상력과 자본주의적 상상력」이라는 글을 썼는데, 원고를 쓰다보니 분량이 너무 길어져 앞부분을 반 이상 줄여야 했다.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에 초점을 맞춰, 전후 일본 문학이 동아시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논하는 것이 주요 논지였기 때문에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잘라내기 전의 오리지날을 앞부분만 블로그에 게재한다.  (또한, 위의 글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해 부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하루키와 기억의 배치 – 후쿠시마 료타를 경유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

  • 1. 탈아입구와 Asia is one.

‘아시아’라는 개념은 현재 아시아라 불리는 지역 바깥에서 도래한 것으로, 이는 ‘서양=근대’와 대립되는 성격이나 특징을 체현하는 상대에게 부여된 명칭이었다. 다시 말해 아시아는 ‘서양=근대’를 통해 재발견되는, ‘서양=근대’를 정의하기 위한 대립개념이었다. 현재 ‘동아시아’라 불리는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서양과 충돌하기 전까지 조선, 중국, 일본에 스스로가 ‘동아시아’에 속한다는 인식은 없었다. 서양과 현재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 간에 오래 전부터 교류는 있었으나, 각자의 권역에서는 각기 다른 성격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각자 상이한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근대 이전에는 이러한 이질적인 시간과 역사가 전면적인 충돌을 거쳐 다른 한편에 포섭되는 일 또한 없었다. ‘우리’는 서양과의 충돌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이 ‘동아시아’라는 자기인식을 갖게 된다. 서양이라는 타자를 경유해 동아시아는 전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새로이 발견함과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됐다. 이는 ‘세계사’라는 서양 중심의 독특한 역사 체계 속에 조선, 중국, 일본이 편입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애초에 ‘세계사’라는 지적 장치가 근대화에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 필연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내면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아시아’라는 자기인식의 수용은 위계적인 세계사의 주변부에 마련된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다. 고로, 서양에 대한 공포가 커질수록 이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자기긍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지양하기 위한 기제로서 기능했다. 근대화를 도모하던 시기의 슬로건이 ‘탈아입구(脱亜入欧)’였던 일본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는 『포스트콜로니얼』에서 이러한 일본 근대화의 특징을 ‘자기식민지화’라고 불렀다.[1] 이때 아시아는 구미의 선진성(문명)과 대립되는 후진성(야만), 그것도 자기 내부에 자리잡은 후진성을 뜻했다. 일본이 근대 서양의 가치체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후진적 요소를 ‘아시아’라는 개념에 응축시켜, 스스로를 ‘아시아적 가치를 부정하고 이를 서양 중심의 근대적 질서로 재편하는 운동체’로 정의내렸을 때, 논리 상으로는 이미 아시아에 속하는 다른 주변국을 근대화=식민화하는 주체로서의 일본, 세계사적 주체로서의 일본, 즉 제국으로서의 일본을 긍정하는 기본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시아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갱신하려는 시도 또한 있었다. 1903년, “아시아는 하나다(Asia is one).”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동양의 이상』을 쓴 오까꾸라 뗀신(岡倉天心)은 “오늘날 아시아가 해야 할 일은 아시아적 양식을 옹호하고 회복하는 것”[2]이라며, 서양이 아닌 아시아에서 고유한 적극적 가치를 도출해 아시아 각국의 단결과 각성을 호소했다. 물론, 이는 가라타니가 말한 바와 같이 아시아 내에서 일본이 지닌 특수성을 강조하는 논리와 표리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미술작품에서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읽어낸 서양의 미적 시선(인상파), 즉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에 의존한 가치전환이라는 일정한 한계 또한 지녔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적・도덕적으로 열등한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3]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와 ‘탈아입구’가 지배적 담론이던 시기에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서양과 정신적, 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아시아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나마 아시아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는 점은 평가할 부분이 있다.

  • 2. 대동아 공영권과 동아시아 담론의 재편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는 아시아를 둘러싸고 배제와 동일화의 역학이 동시에 성립했는데, 일본이 서양을 전범으로 삼아 아시아를 근대화=식민화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한, 사회 내에서의 아시아 담론 또한 배제와 침략이 우세했다. 신흥 근대 국가를 자임하던 일본과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 간에 벌어진 청일전쟁,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실질적인 근대국가로 승인받는 계기가 된 러일전쟁, 조선・대만・류큐의 식민지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꾸준히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해 갔고, 동시에 세계사의 중심부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세계사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갈등이 격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식민지 확대로 인해 민족을 초월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이 증대됐다. 또한, 1차대전 이후 서양에서 유행한 ‘서양 문명의 몰락’이라는 화두는 아시아 관련 담론을 활성화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새로운 맥락 속에 재소환한 일본은, 한계에 다다른 ‘서양 근대 문명’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띤 ‘동아시아적 주체’를 확립한다는 미명 하에 ‘동아시아 협동체’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게 된다.

예를 들면 태평양 전쟁 당시, 교오또(京都)학파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은 이 전쟁을‘근대의 종언’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 아시아가 근대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 저항해 새로운 차원의 세계사를 열기 위한 전쟁으로 위치지어, 아시아의 이름으로 이 전쟁을 정당화했다.[4]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애초에 침략적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오까꾸라의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주장 등 다양한 방향성을 지녔던 일본 사회 내의 여러 아시아주의는 ‘대동아공영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용돼, 결국 아시아에 관한 제담론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하위 담론으로 재편되고 만다.

문학 담론의 경우,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대표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 계열의 작가 및 비평가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모든 인민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식민지 해방과 아시아 내 국제적 연대를 내세웠지만, 당국의 혹독한 탄압으로 1930년대에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은 괴멸한다. 그 후, —일본 문예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를 중심으로 한 ‘문학계(文學界)’ 계열과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로 대표되는 ‘일본낭만파(日本浪曼派)’가 문학 담론을 이끌어 가는데, 표현의 자유가 금지된 상황에서 전개된 이들 문학 담론에는 정치적 패배주의가 짙게 베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 붕괴 이후, 문학과 사회의 접점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회화된 나’ 등을 논하던 고바야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거의 침묵하게 되고, 야스다는 모든 현상을 탈정치화해 미적 경험으로 환원하는 ‘낭만적 아이러니’ 전략을 구사했다. 야스다는 “낭만주의라는 지점에 입각해 ‘근대적 군국주의’를 비판”[5] 했다는 점에서 반체제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로 당국에 의해 위험 인물로 분류됐다. 하지만, 그는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긍정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러한 죽음을 탈정치화된 미적인 행위로 묘사해 낭만파 특유의 아이러니로 현실을 긍정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정치의 미학화’의 변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낭만파적 사유의 계보를 패전 후에 계승하게 되는 작가가, 『금각사』와 같은 완성도 높은 심미적 소설을 써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는 한편, 자위대 쿠테타를 호소하고 할복 자살을 하게 되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이다.


[1] 고모리 요이치, 『포스트 콜로니얼』, 삼인, 2002.

[2] Kazuo Okakura, The Ideals of the East with special reffernce to the art of Japan, London, John Murray, 1903.p.240.

[3] 柄谷行人, 『定本 柄谷行人集 ネーションと美学』, 岩波書店, 2004, p.152.

[4] 廣松渉, 『<近代の超克>論』, 講談社, 1989.

[5] 松本健一, 『竹内好論』, 岩波書店, 2005,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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