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것, 공적인 것, 공통적인 것

앞선 글에서 Commonwealth의 후반부 키워드로 괴물과 웃음을 이야기했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개념을 꼽는다면 역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2003년에 고대와 이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도서관 개방운동을 고민하면서 짧게나마 공통적인 것을 사유했던 흔적이다. 당시 나의 고민은 점점 더 강하게 대학사회로 침투하고 있었던 사적인 것의 논리와 그것에 맞서 공적인 것을 내세웠던 도서관 개방운동 진영 사이에서 후자를 지지하면서도 공적인 것에 기댄 운동 논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고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칼럼 지면의 한계상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 글에서 시작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생각은 이후 코뮤니즘과 맑스주의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의 지속적인 준거점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7년이 지나 하트와 네그리가 집중적이고 본격적으로 전개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사유를 접한 지금, 그때의 내가 가졌던 사유와 비교해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더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에 옛 글을 가져온다.

도서관개방운동과 공공성에 대한 단상
― THE PRIVATE, THE PUBLIC AND THE COMMON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모든 생산의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거이다. 인간이 (흔히 부르주아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그러하듯이) 권리와 의무, 능력의 독립적 원천으로, 다시 말해 ‘개인’으로 간주될 때 그는 홀로 되며, 홀로 된 인간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 인간의 힘과 기쁨은 저 가장 깊은 곳에서 ‘공통적인 것’과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의 역동적인 운동과 흐름을 ‘사적인 것’(the private)으로 절합(articulation)함으로써 작동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공통적인 것’들을 ‘사적인 것’의 회로를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기능한다(소위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작동원리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생산의 근원적 힘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사회체에서도(자본주의와 같이 ‘공통적인 것’에 대한 격렬한 적대로 규정되는 사회체에서조차도) 제거되거나 삭제될 수 없으며, 다만 억압/변형/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적인 것’이 ‘공통적인 것’을 전유한 형태, 반대 방향에서 말하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표출되는 ‘공통적인 것’의 모습(물론 이 때 ‘공통적인 것’의 모습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사적인 것’의 지배 하에서 대개 훼손되고 상처입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을 우리는 ‘공적인 것’(the public)이라고 부른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관점에서 관찰된 ‘공통적인 것’이며,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소외된 형태, 소외된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다(이것은 노동이 인간 활동의 소외된 형태인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위와 같은 고찰을 토대로, 우리는 ‘공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안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사유화에 맞서 국유화를 외칠 때, 그것은 “국가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국가가 최고다”라는 식의 국가주의적 맥락에서보다는, ‘사적인 것’의 냉혹한 공격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확히는 스스로를 보호할 공동체에 대한 욕구라는 맥락에서 더 옳게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때에 따라 혁명적으로 급진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사적인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며, 훼손되지 않고 상처입지 않은 온전한 우리의 삶을 만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옳게 나아가지 못할 때, 혹은 적어도 ‘공통적인 것’의 지평에서 고려되지 못할 때, 그것은 ‘사적인 것’을 위협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것을 더욱 공고화한다. 이것이 공론장, 공공영역, 공적기능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인 것’들의 총화로서의 국가를 주장했던(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하지 못했던(못하는) 덫이다. 모든 이분법적 틀 속의 대립항들이 그렇듯이, 이분법 자체를 문제삼지 않은 채로 양쪽 중 어느 한 항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반대편 항도 강화시킨다.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혁명적일 수 있으려면, 그 요구가 ‘사적인 것’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밀고 나가져야 하며, 그때 비로소 그것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와 다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고대와 이대에서 진행 중인 ‘도서관 개방 운동’의 핵심적 근거는 ‘대학의 공공성’이다. 운동의 주체들은 대학이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공적인’ 위치에 걸맞는 ‘공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지식 즉 ‘앎’의 공유라는 점에서 이 운동은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나아갈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앎’은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잠재력이 발현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대학외부(‘사적인 것’의 영역)에 맞서 ‘대학내부만이라도’ 공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모쪼록 이 운동이 앎과 풍요로운 삶을 갈구하는 많은 이들의 ‘공통적인 것’의 구축에 옳게 결합되기를 바라며, 글로나마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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