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2013 1/4 정국

안철수 신당, ‘옛’ 정치의 ‘새’ 정렬 ?

안철수 신당, ‘옛’ 정치의 ‘새’ 정렬에 그칠까?

[장석준 칼럼] 금배지 획득한 안철수와 ‘새 정치’

장석준 진보신당 부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25 오전 7:07:30

나는 이 글을 재보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쓰고 있다. 그간의 여론 조사를 보면, 노원(병)에서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 그것과 연관된 주제의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안철수 후보의 국회 입성 여부가 ‘안철수 현상‘의 앞날을 좌우하며 그가 주장하는 ‘새 정치’의 실현을 판가름하리라는 시각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의 시각은 다르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의원 안철수 없이도, 아니 자연인 안철수 없이도 계속 반복될 운명이다. 그것을 낳은 구조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철수 현상’이 이 낡은 구조의 산물인 한 그것의 타파를 내용으로 하지 않는 ‘새 정치’는 이미 ‘새’ 정치가 아니다. 즉, 안철수 후보가 주장하는 ‘새 정치’는, 적어도 그 현재 버전은 진정한 ‘새 정치’와 거리가 멀다. 이런 것들이 이미 분명하기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안철수 현상의 이면에 자리한 것은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지배하는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양당제화의 강한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힘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자리 잡은 대의 제도들에서 비롯된다. 결선 투표제조차 없는 대통령 중심제 그리고 소선거구 중심의 국회의원 선출 방식이 그것이다. 이 모든 제도가 다 숨 막히는 승자 독식 게임룰로 수렴한다. 이에 따라 정당 구도는 주요 선거를 전후해 항상 한 개의 거대 여당과 한 개의 거대 야당으로 정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강력한 힘에도 한계는 있다. 한국의 양당제는 아직 불안정하다. 제도 요인들에 의해 ‘강요된’ 양당제화다. 시민 사회에 깊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린 양당 구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려면 양대 정당이 시민 사회의 여러 구성 요소들(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계급, 계층이다)을 반분하며 각 요소들과 유기적 연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두 정당 중 한 쪽은 그런 것 같다. 새누리당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 쪽은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불안정하다는 것이며, 양당제가 아니라 양당제’화’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당제화 압박에 더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강요된’ 양당 구도가 대통령제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기에 버거워한다는 점이다. 그 요구 조건이란 결선 투표제 없는 대통령 중심제가 요구하는 당선 가능성 그리고 대통령제 특유의 행정부-입법부 분립을 돌파할 통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들이 대통령 혹은 그 후보라는 개인들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상당 기간 양 김의 영향력이 살아 있을 때는 이게 충족하기 쉽지 않은 난제라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제도와 현실이 서로 어긋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경우에도 비대칭성은 존재한다. 새누리당 쪽은 2000년대에 이명박, 박근혜라는 두 인물을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랬다. 반면 그 반대쪽은 그렇지 못하다. 민주통합당을 이루는 여러 정파들은 양당제화 압박 속에 살아남는 데는 유능하지만 대통령제가 요구하는 인물 군을 형성하는 데는 무능함을 입증했다. 시민 사회와의 조직적 연계가 약하기에 당 안에서 새 인물이 성장할 경로도 부족하다. 이것이 바로, 새누리당 반대쪽의 정치 통로를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집권 가능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민주통합당의 현재 모습이다.

다름 아닌 이 두 사실의 교차점 위에 ‘안철수 현상’이 자리한다. 양당제화 압박 때문에 새누리당 반대편에 거대 정당이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이 당이 대통령제의 요구 조건에 부응하기 힘든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안철수’의무대 진입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철수’는 자연인 안철수가 아니어도 좋다. 만에 하나 안철수 후보가 이번 재보선에서 낙선하더라도 한국 정치는 반드시 제2, 제3의 ‘안철수’를 불러들이게 되어 있다. ‘안철수 없이도’ 안철수 현상은 지속될 운명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과 마주한다. 안철수 후보의 핵심 비전은 ‘새 정치’인데, 안철수 현상을 지속시키는 토대는 이 나라의 ‘낡은 정치 구조’라는 것이다. 이 구조 덕분에 안철수 현상이 있다. 그럼 안철수 후보의 ‘새 정치’ 비전에는 그 구조를 타파할 내용이 담겨 있는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다. 국회의원 정족수 축소 따위는 그런 구조의 타파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히려 안철수 후보가 당선될 경우 ‘새 정치’의 모호했던 ‘새로움’마저 빛을 잃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그가 착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와 양당제화 압박 사이의 수렴점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 정치’는 이제 새누리당 반대편을 ‘새롭게’ 통합 정렬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조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철수 신당’은 결코 ‘신당’일 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 정치 세력 ‘헤쳐 모여’의 2010년대 중반 버전, ‘옛’ 정치의 ‘새’ 정렬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새 정치’는 결코 이런 내용으로 한정될 수 없다. 안철수 바람이 분 작년 한국 대선 몇 달 전 프랑스에서도 대선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멜랑숑 바람이 있었다. 사회당 왼쪽의 좌파들을 대표해 출마한 장뤼크 멜랑숑 후보가 15퍼센트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며 기염을 토했다. 그도 ‘새 정치’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새 정치’는 많이 달랐다.

그는 ‘시민 혁명’을 이야기했다. 그는 ‘제헌의회’를 말하고, ‘제6공화국’ 수립을 부르짖었다. 새 공화국의 최대 과제는 민주주의를 경제와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도 새 공화국은 정치 제도 일체를 바꿔야 한다. 흔히 이원 집정제라 불리는 프랑스식 대통령제는 완전한 내각 책임제로 바뀌어야 한다. 전면적 비례 대표제와 남녀 동수제를 실시해야 한다. 대중의 직접 참여 통로를 확대해야 한다. (멜랑숑의 대선 공약집인 <인간이 먼저다>(강주헌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을 참고하라.)

‘새 정치’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정치 ‘구조’를 타파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프랑스에서도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 더더욱 그 ‘구조’는 소선거구제이며 대통령제이고 그것들이 서로 부조응해 일으키는 시끄러운 소음이다.

달리 말하면, 이제는 무엇보다 전면적 비례 대표제(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로의 전환을 외칠 때이고 내각 책임제(정당 내각제) 개헌을 요구할 때이다. 그래서 부자 정당과 서민 정당이 확연히 갈리고 필요하면 정규직 정당과 비정규직 정당이라도 생겨 그들 사이에 대립하고 합작하며 충돌하고 타협하는 일이 우리들 자신의 장기판 놀음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재보선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 이 ‘새 정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장석준 진보신당 부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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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칼럼]마키아벨리의 가능주의(possibilism)

[최장집칼럼]마키아벨리의 가능주의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이야말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거였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은 왜 좋은 정당(들)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비단 이번 선거 패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시기 집권에 성공했을 때조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민주진보파들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그 특징적인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권력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권력은 권위주의적 힘의 원천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정의이자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권력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 욕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하고자 했다. 권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목적 의지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적극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온라인상의 소통 공간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정치는 (만약 그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각성된 의식을 갖춘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기존 정치를 대체하거나 새롭게 선도하려는 ‘영구적 운동론’의 방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어 정책과정에 투입하는 것이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산출 중심의 기술합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든 이런 정치관 안에서는 정당과 리더십, 권력 수단을 통한 통치 기술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강한 한국의 지적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특히 민주진보파들에게 필요한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어떤 정치인이 바람직한 목적 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치인가를 앞세우기보다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능주의’(possibilism)의 정치 이론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시만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있어 이 가능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의 중심 아이디어로서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비르투라는 말이다. 비르투와 짝이 되는 포르투나라는 말이 운명 또는 기회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비르투는 용기, 위용, 추진력, 힘, 결단력, 에너지, 의지력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운명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비르투를 가진 리더십은 운명조차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권력을 다루는 장인, 또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자질이자 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르투는 도덕적 규범과 담론을 통해 그려진 이상적 정치 환경에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돼야 할 정치인의 능력이다. 정치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면도 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감성과 충돌하는 권력의 어두운 악마성이 꿈틀거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적의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부정적 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 좋은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 잔혹무비의 폭력을 승인하고 군주에게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통치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인함과 폭력, 교활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할 만큼 긴요한 상황에서 실현돼야 할 높은 수준의 이상이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수반되는 대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수준에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진정으로 공익에 봉사하는 목적 의지가 있다. 정치는 그 둘의 변증법 내지 대차대조표로서 저울질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인공인 체사레 보르자 이외에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한 사람은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이다. 두 사람 모두 잔혹무비의 폭력을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으로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보르자는 그의 행위가 비록 권력추구의 욕망에 의해 추동됐다 하더라도 공익의 증진을 가져왔던 반면, 아가토클레스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잔인한 폭군에 불과했다. 전자가 비르투를 가진 통치자라면, 후자는 대량학살의 범죄자 이상이 아니다. 통치자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그의 행위의 최종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결과주의적인 것이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더러운 손’(dirty hands)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가는 통상적 의미에서 명백히 부도덕한 행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갖는) 정치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한편으로 노예해방이라는 높은 비전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도덕적 술수와 반대파들과의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 정치의 교활함을 가진 정치인 링컨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신화화된 링컨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분명하겠지만, 마키아벨리를 이해한다면 그 점이야말로 링컨을 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한국현대사의 중요 테마의 하나이다. 민중은 반란을 통해 통치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기존 통치세력에 의해 수용되어 다뤄졌다. 문제제기 집단과 문제해결 집단의 괴리, 요구와 변화는 계속되지만, 돌아보면 기존 구조는 변함없이 건재한 상황을 뜻하는 수동혁명은 민주화 이후에도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은 야권의 좋아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우선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계파 정치 청산? – 목표가 잘못됐다

‘사소한 복수극’으로 전락한 계파 정치

[박동천 칼럼] 계파 정치 청산? 민주당 목표가 잘못됐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25 오후 3:42:30

지난해 두 차례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1987년 또는 1997년 선거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들이 2:0이냐 1:1이냐 0:2이냐에 따라 장차 적어도 30년의 정치 지형이 좌우될 만큼 중요했다. 그 선거가 0:2 새누리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 후 민주통합당 안에서 반성과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 하나가 계파 정치 청산이다. 민주당의 패배 원인이 계파 정치에 있다는 진단은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진단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에는 부족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진단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지극히 막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계파 정치를 탈피한 상태의 정치라는 것이 어떤 형태의 정치를 말하는 것인지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계파 정치라는 것은 애당초 청산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계파 정치 청산”을 말로 부르짖는 맥락과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고 실천하는 맥락 사이에 아주 심각한 괴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려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당의 활로가 열린다”는 식의 발언이 누가 누구를 상대로 말하는지에 따라 함의가 달라진다는 점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아래 표를 보자.

이 표에서 D의 경우, 즉 민주당 밖에 있는 학자나 평론가 또는 일반 유권자가 민주당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민주당은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면 특별히 이의를 달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반면에 A의 경우는 어떤가? 얼핏 보면 D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당내 인물이 당 안의 사람들을 상대로 “계파 정치 청산”을 부르짖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누가 누구를 겨냥해서 하는 말인지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조선 시대 인물의 이름을 좀 빌려다 말해 본다. 민주당에 성삼문과 박팽년과 한명회가 있다고 치자. 성삼문이 자기 자신의 지난 행태 또는 같은 계파인 박팽년을 겨냥하여 “계파 정치 청산”을 말한다면,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말로만 끝날 일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또는 자신의 계파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라면 속으로 되새기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있을 때 발설할지언정, 공개적으로 광고를 먼저 할 필요는 별로 없다. 반면에 성삼문이 신숙주를 겨냥하든지,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하는 경우에는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지 않고 바깥으로 공표해야 앞뒤가 맞는 언어 수행이 된다.

바로 여기에 괴리가 있다. “계파 정치 청산”은 말의 표면만 보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신숙주를,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해서 “계파 정치 청산”을 입에 담게 되면, 이러한 언어 수행 자체가 바로 다름 아닌 계파 정치가 되고 만다.

이처럼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표어는 지당한 말씀인 것 같은 공개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상대의 계파 정치를 성토하고 비난함으로써 자기편 계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은밀한 의미가 있다. 위 표에서 B와 C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미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작용한다. 당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안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에 대한 공격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당 안에서 말하는 사람이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밖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리로 들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지난 1일 오전 충남 보령 한화리조트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워크숍에서 오른쪽부터 정동영 , 정대철, 이부영 상임고문, 박병석 국회부의장, 문희상 비대위원장, 박기춘 원내대표, 김동철 비대위원이 묵념을 하고 있다. ⓒ뉴시스

당파든 패거리든 파당이든, 한 민족 차원에서든 민족 내부의 집단 차원에서든, 분파라는 것은 결코 청산될 수가 없다. “계파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를 없애자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계파 정치라는 문구는 자체로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지는 문구가 아니고, 누군가의 정치 행태를 비난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일을 추진하든, 그 과정에서 주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계파 정치”라고 시비를 걸 여지가 활짝 열려 있다. 이 문구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와 같기 때문에, 민주당이 일체의 이익을 초월한 성인들로만 구성되기 전에는 계파 정치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당쟁이 정치 세력들 사이의 건설적인 경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모적인 복수극으로 끝나고 만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파 및 당파 정치를 그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필요를 한사코 외면하다 보니, 상대파를 당파로 비난하면서 자기네 패거리는 당파가 아니라는 자기기만을 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파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가 소모적으로만 치달을 뿐 생산적인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데 있다. 생산적인 경쟁을 도모하려면, 계파 정치 자체를 청산한다는 따위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당의 의사를 결정할 때, 당내에 분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일단 최대한 파악해 보고,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최대공약수를 결집해 낼 수 있는 역량이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 특정한 목소리의 존재 자체에다가 “계파”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게 되면, 영원히 계파들 사이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계파들이 서로 경쟁하는 에너지는 자체로 귀중한 생명력이자 활력소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바로,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욕심들을 에너지원으로 인정한 위에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다가 상쇄되지 않도록 할 길을 찾는 데 있다. 이 길을 찾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단, 계파들의 이익 추구를 나쁜 짓으로 여기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난 다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 들지 말고, 계파 정치의 활력들을 재료로 삼아, 그로부터 최대공약수를 묶어내는 방향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야 소기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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