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현대정치철학

정의와 차이의 정치(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아이리스 영(Iris Marion Young)

저자: 아이리스 영(Iris Marion Young)
출제: 2008이화여대(수시)
2008/2/12(화)
조회: 930

정의와 차이의 정치(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DF [ 원본 도서 PDF 파일]

[다]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이상(理想)은 소수집단을 주류 사회로 통합하고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역사적으로 크게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소수집단은 향상된 지위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탈 집단, 즉 타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차별은 더욱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소수집단은 주류 사회로의 동화를 거부하는 대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체성을 강조하고 자신들만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류집단 중심의 사회통합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 소수집단은 경험․문화․사회적 능력에서 주류집단과 엄연히 다른데, 집단 간의 차이가 무시되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을 필연적으로 감수해야만 한다. 동화(同化, assimilation) 전략은 기존에 배제된 집단을 주류 사회에 통합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동화는 항상 게임이 이미 시작된 후에 그리고 규칙과 기준이 정해진 이후에야 소수집단을 게임에 참여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주류집단은 보편적 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특수성을 은폐한다. 집단 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주류집단의 관점과 경험을 중립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조작하여 소수집단에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주류집단의 문화제국주의는 영구화된다. 셋째, 주류집단의 “중립적” 기준을 적용하여 소수집단의 관습이나 문화를 일탈로 간주하면, 소수집단의 구성원들도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집단을 폄하하게 된다. 문화적으로 보편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예를 들어 소수집단의 자녀들은 백인의 영어식 억양과 다른 억양을 사용하는 자신들의 부모를 업신여기게 된다.

이와 달리 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의 긍정성을 옹호하게 되면, 소수집단은 자유롭게 되고 역동성을 얻게 된다. 지배문화가 경멸하도록 가르쳤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를 자신 있게 내세움으로써, 그 동안 억압 받아 왔던 소수집단은 비로소 이중적 자의식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소수집단은 자신의 문화와 특성에 대한 가치와 특수성을 옹호함으로써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지배적인 문화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 제시문 [다]는 아이리스 영(Iris Marion Young)의 『정의와 차이의 정치(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글은 급진적 다문화주의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소수집단에게 동화를 강요하는 지배(주류)집단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문화 다양성, 집단 차이(group differences)의 긍정적 측면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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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지구화 시대 도시 정의를 위한 시론 -분배 정의와 차이 인정을 중심으로-

An Essay on Urban Justice in the Age of Globalization: Focused on Distributive Justice and Recognition of Difference

– 발행기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발행정보 시대와 철학 , 22 권 , 2 호 , Startpage 349 , Endpage 377 , Totalpage 29
– 저자 이현재 ( Hyun Jae Lee )
– 가격 5,400 원
– 발행년도 2011
– 주제키워드 지구화 시대, 도시, 분배의 정의, 차이의 인정, Globalization, Urban Space, Distributive Justice, Recognition of Difference
– 초록 이 논문에서 필자는 우선 지구화 시대 도시의 정의를 바라보는 두 가지 대립된 담론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했다. 데이비드 하비는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도시를 전지구적 자본축적의의 핵심 지점으로 보고 분배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의 인정을 소홀히 했다. 반면 이주와 문화이론의 관점에서 도시를 차이의 공간으로 보고 차이 인정의 정의를 주장하는 담론은 정체성의 인정이 분배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첫 번째 대안으로서 두 가지 담론의 상호연관성을 보여주는 캐서린 깁슨의 다층적 계급과정에 대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분석에 따르면 깁슨은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이 계급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다층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주지만 착취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차이 인정의 문제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지 못한다. 이에 필자는 마지막에서 아이리스 마리온 영의 정의론이 분배 정의와 차이 인정의 두 담론이 갖는 자율성과 상호연관성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영이 제시하는 다섯 가지 억압의 형식은 문화적 차이의 인정뿐 아니라 분배의 문제 역시 정의 담론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각각의 억압 형식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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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 장동진

장동진,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 (동명사, 2001)

 

1. 정치는 개인이 속해서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떠한 근본 원칙에 입각하여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강제적 성격을 띤다. 정치가 만약 강제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면 정치에 대하여 개인이 심각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정치의 강제적 성격 때문에 언제나 정치의 규범성 문제가 거론된다. 정치철학은 이러한 정치의 규범성 탐구를 그 본질로 한다. 정치사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보다 타당성을 지니느냐 하는 문제가 정치철학 논의의 중심을 이룬다. (5면)

2. 만약 사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모든 사회적 관계를 공적 관계로 전환하게 된다면, 인간이 누릴 자유의 영역은 소멸할 것이다. 공적 관계는 통상 위에서 언급한 강제성을 내포하게 된다. 즉 공적 관계를 위반하였을 경우 이에 따른 사회적 제재가 뒤따른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를 공적화하면 사실상 강제성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적 관계를 설정할 경우에는 언제나 규범성이 대두된다. (6면)

3. 현대자유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인간의 자유는 두 가지 점이 부각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인생을 영위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이 자신의 인생의 저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영위하게 될 정치사회의 근본원칙 수립의 자유로운 저자가 되는 것이다. (6면)

4. 특히 이 책에서 중심적으로 거론되는 롤즈의 자유주의적 정의관은 정치사회의 근본원칙 수립에 있어 상이한 신념을 지닌 개인들 상호간에 중첩적 합의를 지향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는 개인적 입장만을 개진하는 합리성(the rational)을 넘어 상이한 신념을 지닌 타자 역시 수긍할 수 있는 합당성(the reasonable)에 근거하여 공적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합당성의 추구는 공적 이성(publich reason)의 활용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7면)

5. 개인의 자유로운 인생을 보장하는 정치환경을 설정함에 있어 관련 당사자가 스스로 주체적인 당사자가 된다는 것이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8면)

6.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상당한 보편성과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주의의 보편성 역시 ‘인간의 존중’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인간존중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인간존중의 생각은 인권(human rights)으로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인권의 존중이 정치적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 정치이념은 문화적 차이를 넘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또한 자유주의는 현실성을 지닌다.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갈망이다. 그리고 인간이 상이한 생각과 가치관을 지닌다는 것도 매우 현실적인 가정이다. 상이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지닌 개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공동사를 논의할 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평등한 결정권을 가지고 합의하여 결정한다는 생각도 매우 현실적이다. 이러한 해결의 현실성 역시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9면)

7. 정치철학은 ‘바람직한 정치질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궁극적 해답을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이다. 이것은 정치학 논의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정치학에서 다루는 정치의 본질에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치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전자는 경험적 연구와 관계되며, 후자는 규범적 연구와 연결된다. 이 양자의 작업은 정치본질에 관한 규명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정치철학은 물론 후자의 질문과 관련되는 규범적 연구이다. (19면)

8. ‘국가론’의 중심주제는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잘 알려져 있듯이 철인왕, 수호자, 노동자들의 3계층으로 이루어진 정치공동체에서, 이들 각 계층이 자신들의 고유한 덕목인 지혜, 용기, 절제를 수행할 때 정치공동체는 정의로운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 간략한 내용이다(Plato, Republic, Books I-IV 참조). 이것은 논어의 ‘군군신신 부부자자’의 주장과 유사하다. (23, 24면)

9.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의 분류기준을 사용하여 6개의 정치체제를 구분해 놓고 있다. 두 가지 분류기준, 즉 통치자의 수와 공익/사익의 기준에 의하여 각각의 통치자의 수에 의한 정치체제의 좋은 형태와 나쁜 형태를 구분하여 대비시켜 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바람직한 정치형태는 군주정치, 귀족정치, 민주정치이며,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는 전제정치, 과두정치, 중우정치이다. (24면)

10. 이처럼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하는 것이 정치철학의 핵심적 규명의 대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공공선(common good)과 개인적 자유(또는 권리나 이익)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26면)

11. 현대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은 다만 개인의 존재이유와 개인의 성숙 및 발전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형태를 공동선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입각하여 국가는 일정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27면)

12. 그러나 이러한 정의 논쟁을 깊이 분석하고 보면, 결국 철학적 논의에서 핵심을 이루는 존재론(ontology)과 인식론(epistemology), 그리고 윤리학(ethics)의 문제를 떠날 수 없다. (28면)

13. 윤리학에서 옳고 그름(right/wrong)의 문제와 좋고 그름(good/bad)의 문제가 중심적 논의를 이룬다.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의무론적 이론(deontological theories)과 목적론적 이론(teleological theories)이 나타나게 된다. 정치철학의 영역에서도 좋음/나쁨의 문제와 옳음/그름의 문제는 정치공동체의 운영논리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29면)

14. 특히 좋음/나쁨의 문제는 가치(value) 논의와 관계된다. 가치의 본질문제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를 가치론(axiology, theory of value)이라고 한다. 이 가치의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철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정치사회의 운영원칙의 수립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치의 문제를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가치를 인지하는 주체의 문제로 귀결시킬 것이냐 하는 것은 정치사회의 운영논리 수립에 근본적 갈림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 (30면)

15. 현대자유주의는 이러한 가치의 중립성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가치 중립성의 원칙은 각 개인의 가치관에 국가는 중립적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30면)

16. 철학적 입장에서 가치의 객관적 질서를 인정하게 되면 철학적 완전주의(philosophical perfectionism)가 되며,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구성원의 가치관에 국가가 관여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국가완전주의(state perfectionism)라 할 수 있다. (30, 31면)

17. 좋음/나쁨에 기초하는 논리로서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옳음(right)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목적론적 입장이다. 목적론적 입장의 대표적 이론으로서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들 수 있다. 공리주의의 입장이란 관련된 모두에게 최대의 효용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31면)

18. 한편, 옳음을 우선적 기초로 생각하는 정치철학적 이론의 방향은 의무론적 입장으로 규정된다. 이 입장은 좋음의 극대화에 앞서 옳음이 존재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좋음의 문제와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철학적 이론은 사회의 전체적 효용의 극대화에 앞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정치사회의 운영원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즉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한 사회운영원리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31면)

19. 정의문제를 예로 든다면, 정의의 원리나 원칙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고 이를 우리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합리적 직관주의(rational intutioionism)라 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플라톤을 들 수 있다. 정의의 이데아를 상정하고 이를 인간이성을 활용하여 알 수 있다는 플라톤의 이론은 합리적 직관주의를 대변한다. 반면에 이러한 바람직한 사회운영원리나 정의원칙의 객관적 실재 여부를 떠나서 우리 인간 이성을 활용하여 구성한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우리는 구성주의라고 한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 해결에 이러한 방법이 적용되었을 때 정치적 구성주의(political constructivism)라고 한다. 정치적 구성주의에서는 사회 운영원칙 또는 정의원칙을 특정의 진리관이나 포괄적 교리에 입각하여 해결하지 않고, 구성의 결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성주의에서 중요한 점은 구성의 절차와 인간의 개념이 중요시된다. 왜냐하면 어떠한 구성절차와 어떠한 인간유형을 상정하느냐는 구성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의의 원칙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철학적 논의의 쟁점이 된다. (32, 33면)

20. 예를 들어, 서양 정치철학에서도 고대와 현대를 비교해 보면, 현대이론에서는 개인주의적 경향과 가치중립적 성격이 보다 많이 나타나는 반면, 고대정치철학에서는 공동체 중심적이고 완전주의적 성격을 보다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34면)

21. 자유주의 형성에 기여한 로크의 핵심적인 추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한정부론이다. 즉 정부는 그 기능과 범위에 있어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정부는 공공 또는 공공선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어떠한 행위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한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두번째, 법치(rule of law)이다. 정부는 아주 엄격하게 제한된 정당한 기능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셋째, 권력분립(separation of powers)이다. 국가가 법에 의한 통치에 구속되기 위해서는 권력분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71, 72면)

22. 고전적 자유주의에서의 자유란 언제나 의도적으로 부과한 제약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로 묘사된 소극적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새로운 수정적 자유주의는 그러한 형태의 자유라는 것이 정치적 이상으로 고무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에게는 자유란 가치 있는 행동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자유란 이제 하나의 적극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즉 자유란 의미 있는 행동양식을 추구할 수 있는 힘과 능력으로 간주된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조하여 이 수정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행동에 대한 제약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의미 있는 행동에 대한 제약이라는 것은 사실상 이 제약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도 의도적으로 부과한 적이 없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것이 가난과 질병이다. 그래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란 이름으로 의미 있는 행위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이러한 장애들을 국가가 제거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통하여 국가의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역할을 주장한다. 이것이 자유주의 제2단계의 출발이다. (73면)

23. 20세기에서의 자유주의는 그의 주요 이념적, 실질적 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와 대립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 다른 한편, 자유주의의 주요 적은 나치즘(Nazism)과 파시즘(Fascism)이었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1930년대에 발전하였으며, 이들 역시 소위 경제적 자유주의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결함들의 치유를 외견상 주창하였다. … 1945년의 나치즘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1980년 후반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는 서방에서 자유주의의 전제하에 광범위한 테두리에서 주요 이념논쟁을 이루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 논쟁들은 주로 어떻게 하면 자유주의적 정치이상과 가치를 가장 잘 해석하고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때까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던 것은 보다 평등한 인생기회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적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제한해야 하는냐 하는 것이었다. (74면)

24. 1971년에 펴낸 롤즈의 ‘정의론’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기본적 자유의 평등을 주장하며, 경제/사회적 영역에서는 차등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통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그 사회의 최소수혜자 계층의 입장을 증진시키는 조건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특히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복지국가의 모델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고전적 자유주의의 현대적 부활은 프리드먼, 하이예크, 노직 등의 이론에서 나타난다. (75면)

25. 현대보수주의는 도덕적 영역에서 완전주의(perfectionism)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보수주의는 경제적 영역에서 국가개입의 최소화와 안보, 법질서 및 도덕적 판단의 문제에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또는 신우파(the new right)로 규정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리즘(Thatcherism)은 모두 현대보수주의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경제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 모두에서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있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76, 77면)

26.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 자유주의는 최근 ‘합의의 정치’ 모델을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세 번째 단계이다. 합의정치의 이론은 롤즈의 중첩적 합의 또는 토론과 이성적 숙고를 강조하는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논의를 통하여 형성되고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자유주의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근본원칙 수립의 저자가 되다는 점이다. 이 단계의 자유주의에서는 권력으로부터의 개인의 자유 보호는 부수적인 것이며, 정치체제를 운영하는 근본원칙 수립을 개인의 자유 해앗의 본질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77면)

27. 공리주의 입장과 대조하여 계약론적 전통의 이론가로 홉스, 로크, 루소 등을 들 수 있으며, 현대의 대표적 이론가로서는 롤즈를 들 수 있다. 계약론적 이론의 특징은 자연상태나 개인적 인권을 전제로 하여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82면)

28. 의무론적 입장을 옹호함에 있어 롤즈는 계약론적 전통에 입각하여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본적 권리의 보장은 결과나 목표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다고 본다. … 즉 개인의 권리가 결과나 목표에 의해 위반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83면)

29.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나타나는 칸트의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성의 기능은 독립적 실재의 본질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형성하는 경험의 영역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정의론에 도입하여 롤즈는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여 정의의 원칙을 구성해 나가려는 입장, 즉 실천이성을 통하여 실천이성을 통하여 사회정의의 원칙을 구성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83면)

30.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핵심은 정의의 합의과정에서 편파성의 배제, 즉 불평부당성(impartiality)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87면)

31. 롤즈의 제1원칙은 자유의 평등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2원칙은 차등원칙과 기회평등원칙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롤즈 정의원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차등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경제적 가치 배분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 롤즈 분배원칙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87면)

32. 롤즈 이론의 출발점으로서 원초적 입장의 정당화 문제는 이후 공동체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원초적 입장에서 상정되는 ‘추상적 자아’ 또는 ‘무연고적 자아’관은 상이한 정의관 수립을 본원적으로 차단시켜 놓는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정의원칙 도출에 있어서 원초적 입장의 정당화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89면)

33. 둘째, 원초적 입장의 이론적 정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원초적 입장으로부터 정의의 두 원치그이 도출은 필연적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의 대표적 예로는 하세이니(John C. Harsanyi)의 반론인 평균기대효용의 원칙(the expected average utility principle)을 들 수 있다. 비판의 요점은 불확실성 하의 합리적 개인은 롤즈의 맥시민 전략보다는 평균기대효용을 비교하여 선택한다는 것이다. (89, 90면)

34. 셋째,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원초적 상태로부터 정의의 두 원칙이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이 원칙이 현실적으로 파생시킬 수 있는 문제에 근거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비판의 요점은 롤즈의 차등원칙이 이론상 불평등을 통제할 이론적 장치가 결여되어 있어 무한정한 불평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차등원칙은 사회적 불평등 발생을 제어하여 사회협력의 조건을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평등주의적 성격보다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시켜 주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90면)

35. 이러한 칸트적 구성주의의 일환으로 시도하는 것이 롤즈의 순수가상적 상황인 원초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잇다. 이러한 가상적 상황의 설정은 정의의 원칙 합의과정에서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93면)

36. 롤즈는 이 논문(“Justice as Fairness: Political not Metaphysical”)을 통하여 실제적인 정치적 문제에 관해 일반적인 도덕적 개념이, 신념과 가치관이 극심히 다른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의문제에 대한 공인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즉 롤즈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또는 도덕의 독립적 질서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민주국가에 적용되는 정치적 정의관에 대하여 현실적인 공통된 기반을 제공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구성주의는 이 문제, 즉 도덕적/정치적 가치의 독립적 질서의 존재문제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계약론적 전통으로부터 공적 이성을 통하여 자유로운 합의와 조정을 도출하려고 시도하였다. (93, 94면)

37. 민주적 합의를 해야 할 당사자가 자신의 특성, 사회적 위치, 심리적 경향 및 가치관을 알았을 경우 사회적 기본원칙 합의 또는 문제 해결시 각 당사자가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여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극대화할 것은 자명하다. 이 경우 문제해결 양상은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바탕으로 한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협상결과는 협상능력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95면)

38. 민주정치의 실행과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시사점은 계약론적 전통에 선 롤즈 이론의 강조점은 무엇보다도 기본적 자유는 사회/경제적 이이을 위해서 희생되거나 교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자신의 제1원칙과 제2원칙의 계서적 관계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제1원칙의 동등한 자유의 원칙은 제2원칙의 사회/경제적 가치의 배분문제에 선행하여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공리주의의 원칙에서 사회의 총체적 공리나 평균적 개인공리의 극대화를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기본적 자유가 제한되거나 희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방지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6면)

39. 완전주의 정치관은 자유주의 정치관과 대조된다. 완전주의 정치관은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가치관의 중립성 원칙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완전주의 입장은 철학적 완전주의와 정치적 완전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철학적 완전주의는 가치관의 위계질서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입장은 보다 바람직한 삶의 형태를 상정하게 된다. 정치적 완전주의는 시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135면)

40. 자유주의자들을 겨냥하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현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즉 무기력한 시민정신, 난폭한 대중문화, 초개인주의적 환상과 도피주의, 가족제도와 같은 기본 사회제도의 취약성 증가, 현대생활에서 스케일과 기술적 복합성의 문제에 의한 시민적 자신감의 압도, 분별없는 현대소비주의, 시장중심의 개인주의로 인한 최소의 복지국가의 지탱에 필요한 시민적 연대의 약화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들은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도덕적 삶의 비정치화 또는 가치의 개인화, 또는 중립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자유주의의 핵심적 특징은 바로 가치관에 대한 중립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에서 중립성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개인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상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자유의 본질은 상이한 가치관을 가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특히 현대자유주의는 이러한 개인 상호간의 상이한 가치과니나 인생관에 대하여 중립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립성이란 상이한 가치관들에 대하여 어떤 가치관이 다른 가치관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138. 139면)

41.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의 우선성을 전제하고, 이러한 자유의 우선성은 상이한 가치관에 대한 관용으로 연결된다. 관용은 상이한 가치관의 존중과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가치 상호간의 중립성 위에 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중립성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다원주의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완전주의(anti-perfectism)의 입장에 서게 되어 완전주의적 입장을 거부하게 된다. (140면)

42. 철학적 중립성은 두 가지 입장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 철학적 중립성의 출현은 가치의 객관적 질서를 부인하는 입장에서 성립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가치실재론을 부인하고 가치주관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가치주관주의는 가치가 대상에 내재한다는 가치실재론적 견해를 부인하고 가치가 주관적 판단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의하면 가치는 각 개인의 주관적 영역에 속하므로 이 각자의 주관적 가치를 상호 비교할 수 없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바로 가치간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의 논의와도 관계된다. (141면)

43. 가치관의 불가공약성은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A와 B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없을 때 A와 B는 불가공약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Joseph Raz, The morality of Freedem, p. 322). (141면)

44. 존재론적 의미에서 가치의 객관적 질서를 상정한다 할지라도,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를 알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러한 객관적 질서를 알 수 없다는 입장, 즉 인식 이전의 객관적 질서와 인식 이후의 지식체계의 불일치를 가정한다면, 가치 상호간의 불가공약성이 도출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142면)

45.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즉 도덕의 부재, 사회질서의 문제, 공공교육의 문제 등이 발생하는 현상에 대하여 자유주의는 중립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를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자유주의에서 강조되는 가치관에 대한 중립성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좋은 삶’이 무엇이냐 하는 논의의 부재로, 공공적 차원에서는 ‘공공선’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의 부재로 연결될 위험을 안고 있다. (146, 147면)

46. 철학적 완전주의(philosophical perfectionism)는 특정 인생의 생활방법이 여타 인생의 생활방법보다 본질적으로 낫다는 것을 믿는 입장이다. 즉 어떤 인생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보다 낫다는 것을 믿는 입장이다. (149면)

47. 이러한 합리적 구성주의는 결국 절차주의(proceduralism)와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151면)

48. 개인의 자율성을 전제하였을 때 국가완전주의의 입장은 어떠한 방향으로 실천가능할 것인가? 결국 개인의 자율성을 전제하였을 경우 국가완전주의 입장의 방향은 개인의 가치관과 도덕적 판단능력, 즉 자율적 능력의 향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존스턴(David Johnston)은 완전주의적 자유주의에서 인간은 자율적 개인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구성은 그것이 그 사회의 성원들로 하여금 자율의 삶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줄 수 있는 한 좋은 것이라고 하며, 이를 ‘자율원칙(Autonomy Principle)으로 부르고 있다. (158면)

49. 이 인간관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개인의 가치관 형성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가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요점은 이러한 인간관 자체가 현실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동체나 사회와 연결되지 않은 인간관으로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167면)

50. 이러한 자율적 존재에 대한 신뢰는 원초적 입장에 놓은 개인들을 자신들의 선관을 스스로 형성하고 교정하며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게 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즈의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를 비판한다. 자율적 삶을 강조하기 위해 개인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키게 되어 개인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게 될 것이라고 공동체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상호 무관심하기보다 오히려 서로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한다고 본다. (171, 172면)

51.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즈가 공동체가 개별적으로 가지는 문화적 특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공동체주의자들에게 공동체의 개별성과 차이는 각 공동체가 가지는 공동체의 특수성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상징한다. 관용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정신이다. (174면)

52. Michael Walzer는 On Toleration(1997)에서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하고 차이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하며 각각의 공동체가 다른 전통을 유지해 왔음을 역사적인 실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74면)

53. 롤즈와 드워킨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권리중심론자들의 국가중립성은 결국 반완전주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아무리 국가라 할지라도 개인에게 특정한 형태의 삶의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시도들이 개인들의 본질적 이익을 해친다고 본다. (175면)

54.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의 중립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취한다. 국가중립은 곧 공공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공선의 포기는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공공선 또는 공공선이 전혀 형성되지 않는 사회에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인 국가중립성은 자기파괴적이라고 비판한다. (176면)

55. 만약 국가중립성이 강화된다면 복지국가에 의해 요구되는 희생을 시민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공공선의 공유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Kymlicka). (177면)

56.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롤즈는 목적과 선에 대한 자율적 판단능력을 갖춘 상호 무관심한 개인이란 자아관을 거의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178면)

57. 롤즈는 ‘정의론(1971)’에서 사회계약론의 원리를 보다 고차원적인 추상화를 통해 일반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그 결과 ‘정의론’에서는 사회계약론의 전통이 도덕철학의 일 부분으로 간주됨으로써 도덕철학과 정치철학과의 구분이 모호해졌다고 한다. (199면)

58. 이러한 입장은 민주사회의 특징으로서 다양성과 관용을 전제로 하여 출발하고 있다. 롤즈는 이를 합당한 다원주의(reasonable pluralism)로 표현하고 있다. (200면)

59.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은, 제1원칙에서 정의론에서의 자유의 평등원칙과 비교하여 정치적 자유의 공정한 가치보장이 새로이 강조되었으며, 제2원칙에서는 공정한 기회평등의 원칙이 차별원칙에 선행하여 기술되었다. (200, 201면)

60. 한편 공동체는 공유된 포괄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데 반해, 질서정연한 민주주의는 합당한 다원주의를 전제한다. (201면)

61.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정치적’이라는 어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이 어휘는 정치적인 근본문제의 해결에 국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근본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여타의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입장에 의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 의미는 정치적 근본문제를 합의나 계약을 통하여 해결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201면)

62. 정치적 자유주의의 핵심적 발상은 윤리와 정치를 분리시켜 정치적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정치사회의 근본적 운영원칙을 수립함에 있어 정치적 자유주의는 문제해결을 위한 합의의 방향을 강조하며, 이 합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성에 입각하여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이러한 개인적 특수성이 표출되는 것에 제한함으로써 합당성을 추구하여 공적 합의, 즉 중첩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이 개인이 중요시하는 인생관을 추구할 수 있는 공적인 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본적 발상이다. (202면)

63. 롤즈의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구분, 즉 정치와 윤리의 구분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정의론’보다 더 의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그리고 전 생애를 통하여 사회의 완전한 협력적 성원으로 간주되는 시민 상호간에, 세대에 걸친 사회적 협력의 공정한 조건을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정의관은 무엇인가?”에 대한 체계적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첫 번째 근본적 질문은 민주사회의 전통인 관용의 문제와 겨부되어 두 번째 근본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두 번째 근본적 질문은, “합당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들로 심각하게 분열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간에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를 상당기간 유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202, 203면)

64. 승계호 교수는 구성주의란 규범명제나 규범척도를 인간이 만든다는 입장이며, 이는 규범명제나 규범척도가 이성직관으로 알려진다는 직관주의 입장과 반대된다고 한다. 이러한 구성주의는 규범회의주의에서 비롯된다. 규범회의주의란 도덕적 실재(moral reality)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도덕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 또는 도덕언명의 비인지성(noncognitive function)을 강조하는 것이다. (206면)

65. 롤즈의 ‘정치적인 것의 영역(the domain of the political)은 사회의 기본구조를 운영하는 근본원칙에 대한 합의라고 할 수 있다. (208면)

66. 롤즈의 정치적 정의관의 특징은 우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와 구별되는 ‘정치적 영역’을 설정하고 이의 해결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방법인 ‘중첩적 합의’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롤즈의 정치적 여역은 바로 ‘윤리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공간을 확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치적 공간의 확보는 ‘공적인 정치적 정의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209면)

67.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시민의 두 가지 능력 중 가치관에 대한 능력은 합리성과, 정의감에 대한 능력은 합당성과 각각 결부되어 있다. 즉 합리성은 개인이 가치관을 형성 및 추구하고,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한 개인적인 입장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된다. 한편 합당성은 정치사회의 여러 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논리로서 정의감으로 대표되고 있다. 롤즈의 이러한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은 무지의 장막을 특징으로 하는 원초적 입장과 결부되어 공적인 정치적 정의관을 형성하게 된다. (212면)

68. 이 원초적 입장이 중첩적 합의를 가능케 한다. 중첩적 합의는 각각의 상이하고 화해 불가능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들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정치적 합의이다. 이 중첩적 합의는 상이한 교리들이 공존할 수 있는 합당한 정치적 해결을 의미한다. (215면)

69. (1) 개인은 평등한 기본권과 자유에 입각한 완전한 적정구조에 대하여 동등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 구조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동일한 구조와 양립할 수 있다. 이 구조에서는 평등한 정치적 자유, 그리고 다만 그러한 자유들이 그 공정한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17면)

70. 즉 좋음보다는 옳음이 우선하는 의무론적 입장, 그리고 원초적 입장의 장치에 의존하는 정의에 대한 구성주의 입장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도덕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의 구분시도이다. 그렇지만 정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도 원초적 입장은 고수되고 있다. 즉 원초적 입장이라는 장치를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정치적 문제 해결, 즉 사회운영 원칙을 구성하는 기능에만 국한하고 있다. 이로써 롤즈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이 형이상학적이 아닌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18면)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 윌 킴리카‎ (Will Kymlicka)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 2  

 

Will Kymlicka(장동진, 장휘, 우정열, 백성욱 역),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 동명사, 2002

공동체주의의 자유주의 비판은 현대 영미 정치철학에 극적인 충격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공리주의에 대응해서 일관성있는 대안을 규정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정의(justice)와 권리(rights)가 중심 개념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공동체(community)와 맴버십(membership)이 핵심단어가 되었는데,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실현 가능한 어떠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공동체적 정서, 정체성, 경계선을 설명해 주거나 유지시키는 데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보여주려 했다. (397면)

아마도 논쟁의 그 다음 단계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에 이러한 대립을 초월해서 자유주의적 정의와 공동체적 맴버십의 요구들을 통합시키는 시도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하나의 확실한 후보가 바로 시민권(citzenship) 개념이다. 시민권은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 권리와 자격(entitlements)이라는 자유주의적 개념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공동체의 맴버십과 복속이라는 공동체주의적 개념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을 중재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한다. (397면)

많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견제와 균형을 고안해 냄으로써, 특별한 덕성을 갖춘 시민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도 자유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예를 들어, 칸트는 좋은 정부의 문제는 ‘악마들의 경영으로도 해결될 수 있을 것'(Galston 1991: 215에서 재인용)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각자의 이익들의 균형을 부여할 절차적, 제도적 기제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의 시민적 덕성과 공적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398면)

사실 내가 제2장에서 지적했듯이, 롤즈는 이러한 ‘기본 구조’가 정의론에 있어서 우선적인 주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이론가들은 이러한 제도와 절차들을 운영해 나아가는 시민들의 수준과 성격에 대해서도 그만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1990년대의 정치 이론가들은 개별 시민들의 책임감, 충성, 역할을 포함한 그들의 정체성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99면)

시민권에 대한 이와 같은 이론의 필요성은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이 이탈리아 지방 정부를 다루었던 영향력 있는 연구에 의해 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 오히려 푸트남은 그들의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명명하는 그들 시민들의 덕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해야 한다. 사회 자본이란 그들의 신뢰의 능력, 참여 의지, 정의감 등이다. (399면)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샌들이 ‘형성적 기획'(formative project) 혹은 ‘형성적 정치'(formative politics)라고 명명했던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정치 이론가들에게 인식하게 해 주었다. 즉 적절한 종류의 특성의 수준과 시민적 덕성을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정부 정책이다. (400면)

따라서 이제 시민권 이론은 광범위하게도 이전의 제도적 정의 이론에 대한 필연적인 보완물로 간주되고 있다. … 나는 민주주의 시민권 이론이 정의론을 대체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 어떤 경우에도, 나는 시민권 이론을 정의론에 대한 대체물로서가 아니라 주요한 보완물로서 논의할 것이다. (400면)

전후 시기의 권리로서의 시민권(citizenship-as-rights)의 가장 영향력 있는 표현은 1949년에 출간된 마샬(T. H. Marshall)의 ‘시민권과 시민계급'(Citizenship and Social Class)이다. (401면)

시민적 권리는 18세기 발생했다. 정치적 권리는 19세기 발생했다. 그리고 사회적 권리는 – 예를 들면, 공적 교육, 보건의료, 고용보험, 노인연금 등 – 20세기에 들어서 확립되었다. 그리고 시민권에서의 권리가 확장되면서, 시민이라는 계급의 확장 또한 발생했다고 그는 지적한다. (401면)

많은 이론가들은 우리가 경제적인 자기 절제, 정치적 참여, 그리고 심지어는 공손함까지를 포함하는 겸손함과 덕성들의 시민권을 능동적으로 행사하여 시민권에서의 권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완할(혹은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마셜의 관점 역시 현대 사회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다원주의를 적절하게 인식하고 수용하는데 실패한다고 비판받아 왔다. …) (402면)

민주주의 이론에서의 ‘심의로의 전환'(deliberative turn) (406면)

만일 민주주의가 이러한 집단들을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 혹은 다수의 무관심과 나태함)에 종속되도록 남겨두지 않고 그들의 정의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보다 심의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407면)

고대인들이 정치적 삶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적 자유를 희생하는 반면, 현대인들은 정치를 자신들의 사적인 삶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수단(어느 정도는 희생인)으로 바라본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역전시키고, 우리의 선관에 ‘고대인의 자유’의 우선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두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정치 참여의 본질적인 가치를 찬양하거나, 사적 삶의 가치를 저하시킴으로 가능하다.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자들은 두 가지 전략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411면)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를 변호하기 위해 개인들이 진정한 사회적 삶을 이끌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만 보여주어서는 불충분하다 – 자유주의자들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자들은 이것을 넘어서서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능동적이어야 할 필요를 보여주어야 한다. (412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를 찬미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적이고 사회적인 삶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기 때문이다. (414면)

그리스인들은 사적 영역을 ‘결여'(privation, 이것이 사실 ‘사'(private)라는 단어의 어원이다)의 영역으로 간주했고, 그 안에서 가치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사실 그들은 ‘사’라는 개념에 필적하는 어떤 것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은 친밀성, 사랑, 여가, 소비와 노동에서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을 발견한다. (414면)

이러한 사적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자들의 경멸은 여성에 대한 경멸과도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415면)

그러나 좋은 삶에 대한 단일한 가치관에 특권을 주려는 그와 같은 시도는 현대 사회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 ‘다원주의의 사실'(fact of pluralism)은 단지 전통적 공동체주의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의 부활 역시 무너뜨린다. (415면)

‘권리로서의 시민권'(citizenship-as-rights)의 전통적 모델은 두 가지 방향으로부터 도전을 받아왔다. 첫번째는, 앞장에서 검토되었듯이, 시민적 덕성과 적극적 정치참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권리에만 향해진 집중을 보충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읻. 두 번째 도전은, 이번 장에서 다루어질 것인데, 문화적 다원주의(cultural pluralism)와 집단 차별적 권리(group-differentiated rights)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공통의 권리에만 맞추어졌던 초점을 보강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이다. 두 번째 도전은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현실정치세계에서 일어나는 광범위한 운동 역시 반영한다. 이러한 운동은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제목으로 논의되어 왔다. (455면)

과거에는 이 다양성이 ‘정상적 시민'(‘normal’ citizen)의 모델에 의해 무시되었거나 억제되었다. 전형적인 정상적 시민모델의 개념은 장애가 없고 이성애자인 백인 남성의 특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상성 모델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배제, 주변화, 침묵화 또는 동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유색인 집단은 종종 서구민주주의로의 진입이 거부되었고, 설사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로의 동화가 기대되었다. 따라서 토착민(indigenous people)들은 자신의 고립된 보호구역으로 단절해 숨어 버리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전통적 삶의 양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455면)

이들은 좀 더 포용적인 시민의 개념을 요구하고 나선다. 이 포용적 시민 개념은 이들의 정체성을 (비난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이들의 차이를 (배제하기보다는) 수용한다. 이러한 운동의 특징은 이들 운동이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형태라고 종종 말해진다. 이러한 규정은 그 이전에 계급에 기초한 노동자나 농민의 정치운동과는 다른 것이다. 계급에 근거한 운동은 경제적 이익이 문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정치란 언제나 정체성과 이익 양자 모두가 문제가 된다. 문제는 항상 어떤 정체성과 이익이 증진되어야 하는가에 있다. (456면)

전통적인 ‘권리로서의 시민권’ 모델의 목표는 시민들 사이의 일종의 공통적인 국민 정체성을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마샬(T. H. Marshall)이 직접 강조했듯이, 시민권은 일련의 권리와 의무로 규정된 단순한 법적 지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정치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멤버십을 표현하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민권 권리(citizenship rights)의 개념을 확장하여 보건의료와 교육 같은 사회적 권리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마샬의 주장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국민의식과 국민적 정체성의 공통감(common sense)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데 기초한다. 보건의료 및 교육을 사람들에게 보장해 주는 것이 마샬에게는 단순한 인도적 이유, 즉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적 권리는 또한 이전에 소외되었던 집단들을 공통의 민족문화로 통합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적 통일성과 충성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 그는 특히 영국의 노동계급의 통합에 관심이 있었다. (456면)

그리고 사실상 복지국가의 발전은 서구민주주의의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노동계급을 민족문화로 통합하는 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457면)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서구국가들은 의료혜택을 각각의 인종집단에 따라 분리된 병원에서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분리된 병원에서 제공하는 것이 의료혜택을 효율적으로 제공해 실시하는 방법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것의 목표가 단순히 추상적 의미에서의 기본적 필요의 충족에 있지 않고, 공동의 시민의식을 창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458면)

그래서 ‘공동의 권리로서의 시민권'(citizenship-as-common-rights)의 전통적 모델은 국민통합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었다. 공동의 시민권리와 국민통합의 이러한 연결은 지금에 와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많은 집단들 – 흑인, 여성, 토착민,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 남성 및 여성 동성연애자 -은 이러한 공동의 시민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외와 사회적 냉대를 느낀다. 이러한 집단의 많은 구성원들은 이들의 사회 경제적 신분 때문이 아니라(또는 신분만이 아니라), 이들의 사회문화적 정체성 – 즉, 이들의 ‘차이'(difference)에 의해서도 사회적 소외감을 느낀다. (458면)

이들은 영(Iris Marion Young)이 명명한 ‘차등적 시민권'(differentiated citizenship)과 같은 어떤 형식을 (Young 1989) 요구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단순히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을 통해서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정치공동체에 병합하는데, 부분적으로 이들의 권리는 이들의 집단구성원들의 자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집단적으로 특수화된 형태의 시민권을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단일한 공통의 국민문화가 존재한다는 발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혹은 차등적 시민권을 통해서 이러한 집단의 사람들을 공통의 국민문화로 수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58면)

왜 이러한 집단의 사람들이 노동자 계급에 의해 요구되었던 공동의 시민권리 대신에 (또는 이러한 권리에 추가적으로), 일종의 차별적 시민권을 요구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경우들에서, 왜 공동의 사회적 권리를 통해 모든 시민을 통합하려던 마샬의 전략은 실패하게 되었는가? (460면)

과도하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모든 서구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강력한 위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위계(economic hierarchy)가 있다. … 이러한 경제적 위계구조에 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투쟁은 재분배의 정치(politics of redistribution)를 배태시키게 된다. 이것은 전통적 형태의 노동계급 동원을 반영한다. … 집단차이를 축소하는 것이 목표이다(즉, 기회와 문화에 있어 계급적 차이를 축소시키기). (461, 462면)

그러나 영국사회에는 마샬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또 다른 위계구조가 있었다. 이것은 신분 위계구조(status hierarchy)이다. … 이러한 신분 위계구조에 대한 투쟁은 ‘인정의 정치’를 낳게 한다. 인정의 정치는 최근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이민자, 소수 민족들이 동원되는 저변에 깔려 있는 정치 형태를 의미한다. … 목표는 집단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462, 463면)

우리는 비록 분석적 목적으로 재분배의 정치와 인정의 정치 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긴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이 양자는 연결되어 있다. 어떤 집단들은 이 양자의 위계구조 모두에서 최하층 또는 거의 최하층에 근접해 있어서, 재분배와 인정을 위해 운동을 결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 –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은 두 번째 위계구조는 순수하게 이차적이고 부수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 이 견해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이 제거된다면 문화적 불평등도 자동적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의 모든 노력이 재분배의 정치에 투여되어야 한다고 본다. … 놀라울 정도의 숫자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문화적 불평등이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성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를 인정해 왔다. (463면)

그렇지만 경험적 증거는 신분위계구조가 경제적 위계구조로 환원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확실히, 여성, 흑인, 원주민과 같은 일부 집단들은 취약한 경제적 위치에 있어서도 불균형적으로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도 비천하거나 침묵적 입장에 처해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문화적으로 낙인찍힌 다른 집단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동성애자들에게 이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 수준의 수입과 교육의 수준을 누리고 있지만, 극단적인 동성혐오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다. 또한 아랍계 또는 일본계 미국인처럼 일부 부유한 이민자들 혹은 종교집단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평균수준 이상의 교육과 수입을 누리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소외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카탈로니아인, 퀘벡인과 같은 소수 민족 역시 다수 민족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실상 보다 높은 수입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언어와 문화는 주류의 언어와 문화보다 열등하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모든 집단들은 경제적 평등을 달성한다고 신분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비록 경제적 평등의 성취가 의심할 바 없이 신분불평등을 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따라서 경제적 평등의 성취가 인정의 정치를 동원할 필요성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463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분 위계에서는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한 집단들도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에 있어서 전통적인 남성노동자 계급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부정의한 경제적 위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긴 하지만, 신분 위계에서는 종종 혜택을 누린다. 대부분의 남성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남성성별(male gender), 백색 피부, 기독교라는 종교, 이성애적 성향이 그들에게 여성, 흑인, 유태인 또는 동성애자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규범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464면)

복지국가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분명히, 남성 노동자 계급은 교육에 대한 접근성, 경제적 기회 및 수입의 결여로 인해 이러한 신분위계구조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노동 계급의 배제를 치유하기 위한 해결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권리를 통한 공동의 시민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신분 위계구조에 도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상 많은(백인, 남성, 기독교, 이성애자인) 노동계급의 구성원은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또는 이민자들이 신분위계질서에 도전하려는 시도에 저항해 왔다. 상층 신분집단에서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구성원들인 전통적 노동계층은 경제적 위계구조에 대한 도전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신분위계질서를 보존하려는 점에서는 이기적인 입장을 취했다. (464면)

따라서 경제적 위계와 신분적 위계 간에는 단순한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의 사회적 권리를 통한 마샬의 통합전략이 노동계급에게는 일리가 있었지만 다른 집단들은 왜 만족시키지 못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 여성 또는 흑인 같은 다른 집단들에게 있어서, 평등은 재분배의 정치와 인정의 정치 양자 모두를 요구한다. (464면)

신분 불평등이 경제적 불평등으로 완전히 환원이 될 수 없거나, 또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서만 파생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증대는 인정의 정치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가져왔다. (464면)

사실상,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차별적 시민권(group-differentiated citizenship)의 발상이 모순적인 용법이라고 간주한다.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시민권이란, 정의상 모든 사람들을 법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로 간주하는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시민들의 정치적 신분을 그들의 종교, 인종 혹은 계급적 멤버십에 의해 결정해 버리는 봉건적 그리고 여타의 전근대적 견해들로부터 민주적 시민권을 구별해 주는 점이다. 따라서 ‘집단구성원에서부터 파생되는 권리 또는 요구에 기초한 사회 구성은 시민권에 입각한 사회의 개념과는 첨예하게 상치된다'(Porter 1987; 128). 따라서 차별적 시민권 개념은 시민권 이론에서 아주 급진적 발전이라 할 수 있다. (465면)

다문화주의와 소수자권리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최근 들어 그 범위나 기본 용어에 있어 모두 급진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 분야를 연구하는 정치철학자나 이론가는 매우 드물었다. 사실상 금세기의 대부분에 걸쳐서, 인종 문제는 정치철학자들에게 주변적인 문제로 간주되었다. … 그렇지만 수십 년간의 상대적인 무관심의 기간을 거친 오늘날에 이르러, 다문화주의 문제는 정치이론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를 몇 가지로 추적해 볼 수 있다. 가장 명백하게는, 공산주의의 붕괴가 동유럽에서 인종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의 파도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양상은 민주화 과정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의 잿더미로부터 자유민주주의로 수월하게 진정할 것이라고 여겼던 낙관적인 가정은 인종문제와 민족주의 문제로 인해 크게 빗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확립된 국가에서도 인종문제를 돌출시켰던 많은 요소들이 있었다. (46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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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 아이리스 M.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M. 영 지음 | 허라금, 김양희, 천수정 옮김 | 이후 | 2013년 06월 21일 출간
320쪽 | 153 * 210 mm 판형알림 | ISBN-10 : 8961570706 | ISBN-13 : 9788961570701

책소개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는 아이리스 영이 자기 이론의 실천적인 면모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낸 야심찬 기획이다. 지금껏 차이의 정치학과 급진 민주주의의 이상을 통해 구조적 밑그림을 제시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 밑그림 안에서 살아 숨쉬는 ‘행위’를 문제시하고 ‘행위자’에 직접 말을 건다. 자신의 이론적 성과를 통합하면서도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 책이 아이리스 영의 유고작이 되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저자소개

저자 : 아이리스 M. 영

저자 아이리스 M. 영(Iris Marion Young)은 2000년부터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의론과 민주주의 이론, 그리고 여성주의 이론에 헌신했다. 영은 추상적이고 정교한 철학적 논의를 현실의 정치적 쟁점, 특히 사회 부정의의 문제에 결합시키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대표작 『정의와 차이의 정치학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1990)이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이 책에서 영은 기존 정의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그해 《미국정치학회》에서 수여하는 “빅토리아 슈크 상”을 수상했으며, 분배적 정의를 넘어 지배와 억압에 문제 제기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정의론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리스 M. 영은 2006년 8월, 1년 6개월간의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츠버그 대학의 《여성학 연구소》와 공공 정책과 국제 문제 대학원은 영을 기리는 뜻으로 2008년부터 “아이리스 M. 영 상”을 공동 제정해 해마다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 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저서로 Intersecting Voices: Dilemmas of Gender, Political Philosophy and Policy, Inclusion and Democracy, On Female Body Experience 등이 있다.

역자 : 허라금

역자 허라금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교수다. 전공은 여성 철학으로, 여성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생명·사회·정의 등의 주제를 다룬다. 저서로 『원칙의 윤리에서 여성주의 윤리로』(2004) 등이 있다.

역자 : 김양희

역자 김양희는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젠더 전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역자 : 천수정

역자 천수정은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목차

감사의 글
– 데이비드 알렉산더

여는 글
– 마사 C. 누스바움

1장 개인적 책임에서 정치적 책임으로
2장 정의의 주제로서의 구조
3장 죄 대 책임 : 한나 아렌트 읽기와 부분적 비판
4장 사회적 연결 모델
5장 국경을 가로지르는 책임
6장 책임 회피하기
7장 책임과 역사적 부정의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Responsibility for Justice

“지난 20년간 사회관계를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이해가 승리를 거둬 왔다.
그동안 집단적 책임은 약화되거나 심지어 파괴됐다.”_본문 중에서

|시대의 쟁점과 함께 호흡하는 철학의 풍경|

아이리스 M. 영은 추상적인 철학 이론을 구체적인 정책 연구에 접목시키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정치철학자로, 후기 마르크스주의 비판 이론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면서도 하나의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학술 성과들을 제시했다. 특히 대표작인 『정의와 차이의 정치학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에서 사회정의란 롤스식의 자유주의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만으로 실현될 수 없으며, 그러한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의 문제를 직접 다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후속 작업에서도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질적인 공론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심화시켜 왔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는 아이리스 영이 자기 이론의 실천적인 면모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낸 야심찬 기획이다. 지금껏 차이의 정치학과 급진 민주주의의 이상을 통해 구조적 밑그림을 제시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 밑그림 안에서 살아 숨쉬는 ‘행위’를 문제시하고 ‘행위자’에 직접 말을 건다. 자신의 이론적 성과를 통합하면서도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 책이 아이리스 영의 유고작이 되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빈곤의 원인에서 과거 청산까지|

1. 복지정책의 후퇴와 개인적 책임의 승리
영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사람들이 빈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에 엄청난 전환이 있었다. 빈곤의 원인을 빈곤한 사람들 개인과 그들의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보수주의 학계와 정책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어 자유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행할 정도로 확대된 것이다. 빈곤에 대한 ‘개인적 책임’ 담론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이해는 찰스 머리와 로렌스 미드의 저작에서 그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 영은 이들 두 사람의 이론이 오직 개인적 책임만을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배경 구조를 무시하며, 부유한 사람들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은 채 오직 빈곤한 사람만이 무책임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적 책임 담론은 사람들에게 모든 선택의 책임은 개인이 홀로 져야 하며, 그로 인한 어떤 불이익에도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은 개인의 선택이나 불운의 문제로 축소할 수 없는 빈곤의 사례를 제시하며 미드와 머리의 가정을 비판한다.

2. 누가 샌디를 노숙자로 만들었나? 
아이리스 영은 살던 아파트가 용도 변경에 들어가 새 집을 구하려다 결국에는 노숙자가 된 샌디라는 한부모 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샌디는 머리와 미드가 말하는 ‘게으르고 일탈적인’ 빈곤층과는 거리가 멀다. 아파트를 팔기로 한 집주인의 결정, 대학 학위나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 여성에게는 저임금의 서비스 직종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는 성차별적인 노동시장, 그런 일자리와 주거 공간이 분리된 공간적 불일치 등의 상황이 맞물려 노숙자가 되고 말았다. 영은 이러한 샌디의 상황을 ‘사회-구조적 과정’이 야기한 부정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구조적 과정을 자기 행동을 제약하는 객관적인 사실로 경험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위치의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 그러한 구조에 참여함으로써, 특정한 결과의 지속적 재생산에 기여하게 된다. 여기서 아이리스 영은 “정의의 주제로서 사회의 기본 구조”를 제시했던 롤스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3. 아이히만의 죄 VS 독일인의 책임
3장과 4장은 이 책의 핵심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드러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책임’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3장에서 아이리스 영은 아렌트를 따라 ‘죄’와 ‘정치적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강제 호송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아이히만은 명백히 유죄다. 그리고 샌디가 단지 한부모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대를 거부한 집주인이 있었다면, 그는 그에 합당한 비난을 받아도 싸다. 그러나 유대인 대학살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수동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 혹은 더 좋은 주거 환경에 투자함으로써 소득에 따른 거주지 분리를 심화시키는 데 자신도 모르게 기여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영은 후자의 경우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도덕적ㆍ법적 책임과 구분되는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한다.
4장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책임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적 연결 모델’을 제시해 죄를 묻거나 비난을 하는 게 목적인 법적 책임 모델과 대비시킨다. 법적 책임 모델은 특정인을 고발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책임을 면제받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회적 연결 모델은 잘못을 행한 제3자를 찾았다고 해서 결과에 기여한 다른 사람들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밖에도 사회적 연결 모델은 법적 책임 모델과 달리 행위자의 행위를 이끌어 낸 배경 조건을 함께 고려한다. 또한 책임을 부여하는 목적은 과거의 죄를 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래의 변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며, 부정의를 생산하는 구조적 과정에 기여한 모든 이들이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나눈다는 특징이 있다.

4. 정치적 책임과 강한 민주주의
영은 “구조적 부정의를 생산하는 다양한 제도적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정치적 책임의 근거를 찾는다.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각자가 부정의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뀌지 않으면 부정의는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책임은 ‘공유되며’, ‘미래 지향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공유된 책임은 그 책임을 함께 나눠 진 사람들이 함께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들이 참여한 사회-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면제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책임 개념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정의의 희생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부정의를 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한 예외 없이 그 구조를 변화시킬 책임을 짊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집단적 책임과 관련해 개인이 얼마큼의 책임과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5장에서 권련과 특권, 이익과 집단 역량이라는 네 가지 추론의 매개변수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경계 없는 정치적 연대의 꿈|

같은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임금 체계를 적용받을 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미등록 노동자라서 학교에 공식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할 때, 그리고 대도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탑을 뒷마당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을 때, 우리는 무언가 세상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의 첫 번째 미덕은 이러한 ‘잘못’에 ‘구조적 부정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시화했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보여 준다. 그러면서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다는 것 또한 확신한다. 영은 사회적 연결 모델의 윤리적 근거와 정치적 이상을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에서 찾는다. 책임은 자유에 앞선 것이며 자유의 토대다. 미드와 머리의 개인적 책임 개념은 딱 그만큼, 우리의 존재론적 현실을 왜곡하고 정치적 상상력을 제약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은 자칫 딱딱하고 분석적으로 끝날 수 있는 학술서에 경계 없는 사회적 연결과 정치적 연대라는 이상을 아름답게 녹여 낸다.

세계가 녹아내린다! – ‘투게더’ 함께 읽기

세계가 녹아내린다! 대안은 ‘어게인 박정희’?

[협동조합, 장인에게 배우자] <투게더> 함께 읽기

기사입력 2013-06-07 오후 6:52:59

 

지난 1일 사상 최초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프레시안>은, 5월 사전 조합원 신청을 받으면서 “새로운 언론을 꿈꾸는 독자, 필자, 노동자가 협동조합 프레시안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 대안을 찾기 어려운 한국 언론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우려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성역 없는 비판을 위해 언론사는 기업이나 권력은 물론이고 독자로부터도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언론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이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자. ‘함께 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과정을 보장하고 좋은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속시켜 온 개인의 고립과 단련은 어떤 의미에서는 편의와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함께하기’의 ‘기반’은 물론이고 ‘기술’까지 퇴화하고 있다면? 오랜 역사로 쌓아 올려진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개인주의와 경쟁의 영향으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면?


현대사회의 개인 속에 ‘함께하기’의 인자가 사라지고 있음을 우려한 미국 사회학계의 거장 리처드 세넷(뉴욕대·런던 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은 위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를 써냈다. 세넷은 수년 전부터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이 개인적인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탐구해 왔는데 이 가운데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두 번째 책이 <투게더>다. 이 책에서 그는 ‘협력’을 일을 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로 파악하고 중세의 길드에서 근대의 작업장, 현대의 구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파고들었다.

<투게더>를 관통하는 고민은, 이미 ‘사회적인 것’을 쌓아올렸다가 무너지게 만든 역사 위에서 어떻게 다시 그것을 ‘재구성’ 하느냐다. 한때 저자를 사로잡았던 68혁명의 반문화 전통과 그 세대가 일구어낸 관료제의 해체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실현된 세계 속에서 악몽처럼 뒤틀린 채 재현되고 있는”(김홍중, <투게더> 11쪽, ‘함께 읽기’)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렇다면 21세기 우리가 교훈을 가지고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를 묻는다.

세넷이 탐구하고 있는 사례는 기본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작업장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했다면 그 역사와 결이 다르기에, 그가 찾는 결론 역시 다르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정혜윤(CBS 라디오 PD·<삶을 바꾸는 책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등의 저자)과 함께 진행하는 월례 북 토크쇼인 ‘우리 더 잘 살아요'(☞최근 행사 안내 바로 가기) 4월 행사에서 <투게더>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투게더> 한국어판의 해설을 쓴 김홍중(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마음의 사회학> 저자),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등에서 교육 활동을 해 온 장석준(현 진보신당 부대표)이 ‘함께 읽기’ 가이드에 나섰다.

다음은 지난 4월 29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진행된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협동조합이라는 형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협동조합이 원형으로 지향하는 바이자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사회적인 것’의 발명과 몰락,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거기엔 시시각각으로 발전해 가는 과학 기술과 협력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두 가지 면에서의 ‘기술’에 대한 고찰도 포함된다. <편집자>

더 이상 모여 놀지 않는 사회


정혜윤 :
 지난해 여름부터 ‘우리 더 잘 살아요’ 행사를 해 왔는데, 외국 책을 가지고 행사를 하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저자를 이 자리에 모실 수 없음에도 이 책을 꼭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일단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늘 마음 맞는 사람하고만 일할 수 없다는 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최근 쓴 <사생활의 천재들>(봄아필 펴냄)이란 책이 있는데요. 그걸 쓰면서 가진 문제의식도 비슷해요. ‘어떻게 하면 너랑 더 잘 지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책인데, 들어야 할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고 할 것이 참 많더라고요.

그 무렵에 이 책을 봤어요. 맨 앞장에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몽테뉴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라고요. 어떤 점에서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아요. <투게더>의 마지막 장(코다)의 제목도 마침 ‘몽테뉴의 고양이‘예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남은 두 가지 열쇳말이 있어요. 하나는 협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잘 듣는 능력’이라는 대목이에요. 저 같은 라디오 PD에게는 잘 듣는 것이야말로 그 날 방송의 주제이자 전부이고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요. 또 하나는 ‘움츠러들기’예요. 지난해 ‘불안‘을 주제로 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불안하니까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안전한 길로만 가려고 해요. 그런 식으로 다들 움츠러들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세넷은 ‘협력’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걸 라디오 용어로 고치면 공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울리면 나도 울리는 상황이죠. 그건 말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눈빛만으로 이뤄지기도 해요. 저는 방송할 때 입으로 ‘큐’를 주지 않고 항상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말을 하거든요. 얼마 전에 퓨전 국악 팀의 공연을 봤는데, 무대 위에서 팀원들이 계속 눈빛을 교환하더라고요. 실제로 그 팀 이름이 ‘공명’이었어요. 이런 장면만큼 절 설레게 하는 게 없어요.

이런 공명과 협력이 현재 학교나 작업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혹은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투게더>의 한국어판 서문 격인 ‘함께 읽기(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를 쓰신 김홍중 선생님이 학교에서 느끼신 것을 얘기해 주시면 어떨까요.

김홍중 : 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전 원래 누구랑 함께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이 들면서 더욱 혼자 있는 게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한 순간이라도 친구가 없는 삶, 쓸모없는 일로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기회가 없었던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서 목격하는 요즘 학생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무언가를 같이 하는 기술에 있어서 악화가 발생한 건 사실입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람들은 ‘무한도전’처럼 누군가 모여 노는 모습을 즐겨 보고는 있지만 실제로 같이 놀지는 않아요. 너무 지쳐있고 불안하다는 뜻이겠지요. 일인 것과 일이 아닌 것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고, 자기 일에서의 능력을 극대화시키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요즘 학생들에게서 대여섯 명이 무작정 춘천에 놀러가서 퍼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거겠지요.

또 즐거워 보이는 학생을 찾기 어렵습니다. 다른 과 학생들하고도 상담을 하는 편인데,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어 해요. 그걸 찾도록 도와줄 사회적 맥락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서클이나 과 활동도, 학교 바깥의 사회 활동도 자기 정체성이 되어주지 못해요. 어떤 경우엔 병리적인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이건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속한 학과에 130여 명 정도의 교수가 있는데, 모여서 술을 먹지를 않아요. 제게 술 먹자는 전화를 해 오는 분들도 없고요. (웃음)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거든요. 그날 안으로, 그 주 안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체제의 변동과 무관하게 100여 명 정도의 주변 사람이라든가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각각의 ‘생활 세계’를 구성하고 살잖아요. 체제가 흔들려도 그 여파가 생활 세계로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어떤 시점 체제 수준에서 일어난 변동은, 우리 모두가 다른 형식으로밖에 살 수 없도록 하는 변동이었어요. 그 변동은 궁극적으로 대처가 말한 ‘사회(Society)라는 것은 없다’였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부터였던 것 같아요. 물론 1970년대 후반 서구에서부터 마가릿 대처가 상징하는 거대한 풍파가 불어왔고 국내에서도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불거져 온 현상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제도나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큰 자기장의 변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소사이어티’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사교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런 모임도 소사이어티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모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로 접어들었고, 통치라는 것의 성격도 바뀌어 가고 있어요. 국가가 복지를 포함해 사람들의 문제를집합적으로 신경 써주면서 보완하고 책임져 주는 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향으로 통치성이 구현되어 갑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굳이 모여 놀거나 논쟁하지 않아도 돼요. 삶의 다양한 만남들이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재생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거창한 의미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술 먹는 방식,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 가족관계, 친구와 노는 방식 등 사생활의 많은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스킬’들을 파괴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력한 연줄 문화가 있는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요. 이런 스킬을 이미 익힌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시대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이 모여서 노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워 온 상태로 자라고 그 공백이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규정한다고 하면요.

혹자는 ‘투게더’를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이라 믿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단초들마저 지난 15년간 제도적 변화 속에서 훼손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일 세넷이 한국에서 두 달 정도 산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자본가와 군대 문화의 대립

정혜윤 : 이번엔 작업장에서의 협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취재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게더’가 굉장히 사치스러운 얘기에요.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에 취재를 갔는데, 신차가 나오면 조립 라인이 바뀌면서 잠시 공장을 쉬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라인이 신차 생산에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거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역시 필요 없어진다며 덜어내 버리는 거죠. 그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인품이 어땠는지, 다른 사람과 사이가 좋았는지는 전혀 변수가 되지 못해요. 말하자면 현재의 많은 노동 환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떻게 관계 맺느냐’의 문제가 무의미해지는 환경이에요.


장석준 : 
이 책에서 세넷이 젊은 시절(1970년대)에 작업장에서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확인한 것들을 썼는데, 거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작업장 내에서 협력의 분위기가 가장 왕성했을 때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세대가 일했을 때라고 해요. 이걸 거시적으로 보면 복지 국가가 2차 대전의 경험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그렇지요. 이런 사실이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노동 운동 문화를 보면 상당히 군사적입니다. 운동권 가요나 문구가 적힌 조끼, 운동가들끼리의 내부 문화도 그렇고요. 그런데 세넷의 시각을 적용해 보면 한국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어요. 한국의 노동 현장의 남성들이 세넷이 말하는 ‘협력’을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습득하는 통로는 군대거든요. 군대에서 습득한 것이 작업장에서 나타납니다.

세넷 스스로도 지적하지만 작업장이 굉장히 권위적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은 작업반장이 욕설을 써가며 일을 시키는데, 노동자들이 거기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따른다는 거예요. 권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들을 이끈다고 느끼고, 그 속에서 협력의 분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이는 자본가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겨졌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국의 작업장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비록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지만 비공식적인 협력의 문화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면서 자본가에게 반대되는, 그들이 짓밟을 수 없는 힘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계속 놔두었다가는 그들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음을 느꼈고, 그 가운데 ‘노동 유연화’라는 구호가 유효하게 등장한 것이죠. 그것은 물론 전 세계적인 맥락도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1987년 이후 등장한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와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현대자동차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연령차가 있습니다. 정규직은 보통 1987년을 경험한 40대 후반이나 50대이고, 비정규직은 보통 30대나 그 아래의 젊은 사람들이지요. 만약에 정규직/비정규직 분화가 없었더라면 세넷이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청년 노동자들에 도덕적인 권위를 행사하면서 비공식적 협력이 이뤄지고, 그것이 자본가와 대립할 때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가능성이 다 사라져가는 겁니다. 한쪽은 정규직이기에 질시의 대상이 되고, 한쪽은 비정규직이라서 그들만으로는 자본가들에 대항해 교섭력이나 협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본가에겐 모순적인 부분이죠. 비공식 협력이 작동해야 자본가들이 설계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잘 돌아갈 수 있는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면서 와해시키는 것이니까요. 결국 종국에는 그걸 주도한 자본가 입장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혜윤 : 저도 제가 일하는 현장에서 점점 더 비공식적 협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예전에는 같은 현장에서 같은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로 엮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말이죠.

사실 저와 동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이에요. 옛날엔 방송을 잘 못하면 욕을 하고 싸웠어요. 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고, 방송을 하기 위해 이 조직에 모였다는 자의식이 강했지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그걸 위해서 기꺼이 싸울 마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로 싸우지 않게 됐어요. 행여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거나 나중에 자신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될까봐 적당히 예의범절을 갖추는 사이가 된 거지요. 그렇다보니 회사에 있는 시간이 치열하게 자아를 실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무의미하지만 견뎌야 할 시간으로 변하는 거예요. 누굴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그 사람을 위해 싸울 마음도 없고 그냥 ‘웬만큼 좋은 사람’이 되어가더라고요.

이제는 술자리가 있어도 안 가게 돼요.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무릎을 꿇고 “부장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본 이후로요. 전 ‘정말 사랑하니?’라고 묻고 싶어졌어요. (웃음) 술자리마저도 다음 날 좀 더 편안하게 일하기 위한,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편리한 화해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우리가 너무 움츠러들었다는 제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예요. 방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이것이 비공식적 협력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한편, 그 각각의 내면 역시도 크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회적인 것’에 대한 향수, 그런데 우리는?


김홍중 : 
저는 회사 생활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는 끔찍하게 느껴지네요. 어쨌든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세넷이 전형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세넷을 비롯한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유럽 전통에서 ‘더 소셜’이라는 말은 원래 모여서 논다는 의미의 ‘사교’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국민국가(nation-state) 혹은 주민(population)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사회라고 하면, ‘한국 사회’, ‘미국 사회’처럼 국가 외의 무엇을 잘 떠올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런 의미와는 다른, ‘차원(Dimension)’으로서의 ‘더 소셜’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정신분석학을 거꾸로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가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꿈을 ‘당신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떤 욕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에 비해 사회학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A가 자살을 했는데 거기엔 실연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 하는 개인적 차원의 이유가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보니 사회라는 차원이 개입해 있는 겁니다. 에밀 뒤르켐은 개인의 자살에 대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결합력이 낮아서라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가 그를 자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죠. 한편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취향, 즉 트로트를 좋아하는가 클래식을 좋아하는가 같은 문제를 계급으로 설명했고요.

우리가 그 인과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의 행위나 심성이나 삶의 형식이나 미학적 취향 등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차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당시에 함께 등장한 것이파스퇴르의 미생물학이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가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만들어 주는 메커니즘이 발견된 동시에, 사회라는 것이 우리를 공통의 운명으로 엮어주고 있다는 시각이 19세기 말 등장하게 된 겁니다.

사회 보험 제도도 이때 나왔습니다. 보험이 있기 전에는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누군가 다치면 그 사람 책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때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원칙이 ‘비 프루던트(be prudent)’, 즉 ‘조심하라’였어요. 다치면 당신의 책임이니 그만큼 신중을 가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작업장에서의 사고는 우연히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건 정의롭지 않지요. 그래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끼리 일정한 돈을 내서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돕는 커다란 제도를 창출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럽인들에게 사회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이자, 박테리아처럼 보이지 않는 공통 운명이자,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때 사회란 “한국 사회는 ~~하다”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컵처럼 확실한 거였어요. 가령 제가 실업에 빠져 있다면 사회는 바로 느껴져요. 또 직업을 갖고 있는 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도 사회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죠. 왜냐하면 바로 돈, 지식, 기술 등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니까요. 이것이 절정에 올랐던 시기가 앞서 말했던 2차 대전 끝나고부터 1970년대까지입니다. 그 전통 속에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오는 도움 외에도, 정혜윤 피디가 언급했던 직업적 소명의식, 즉 직장이 개인의 삶의 근원이라는 의식 역시 강하게 존재했었어요. 이러한 유기적인 큰 그림이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창출되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이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적인 것’은 없으면 바로 지장이 생기는 겁니다. 또한 세넷이 강조한 바와 같이, 없으면 자기 삶을 서사화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내가 스무 살에 어떠한 직업을 가졌고 시간이 지나니 기계가 바뀌었고, 몇 년 후 아이가 생겼고 퇴직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고…’, 이러한 삶의 서사가 사회적인 것과 맞물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또 세넷이 문제 삼고 있는 게 바로 이러한 것들의 용해입니다.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혹은 위험 사회 등으로 표상되는 일련의 변화가 ‘사회적인 것’이란 말에 담긴 100여년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 가치, 감수성 같은 것들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세넷이 68세대라는 점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어요. 68혁명 세력은 기본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게 싫고 피곤했던 겁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모든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봤어요. 그들 중 급진적인 비전을 꿈꿨던 사람들은 복지 국가도 인간을 억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인간을 사슬에서 풀고 원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복지 국가는 ‘개량주의’의 산물이고 자신들을 사육시키는 또 다른 기제였지요.

그런데 <투게더>에서 세넷은 그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죠. 68혁명 때 외쳤고 꿈꿨던 것들이 신자유주의 속에서 악몽처럼 현실화되어 있었습니다. 소중히 만들어 낸 제도가 무너지고 가족, 직장, 소명의식, 복지가 녹아내리고 남아 있는 건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이었던 거죠. 그 개인들은 안으로는 불안에 떨고 밖으로는 경쟁 논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노동 형태가 비물질 노동으로 바뀌면서 협력할 공간(작업장)은 사라져 가는데 작업 시간만 무한히 늘어나고 있고요. 노동이라는 것이 몸을 쓴 결과가 아닌 시간의 일부들이 조합되어 자본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거죠. 즉 ‘투게더’를 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더 소셜’의 용해 현상입니다. 그리고 세넷은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용해 현상이 일어나기 전인 30년 동안(2차 대전 이후~70년대)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장인정신, 직업정신, 소명의식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더라는 것이죠. 소박한 삶이 무너져 있는 현재, 과거의 도드라진 어떤 시점이 세넷에게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대안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한국으로 가져와 보면, 우리에겐 세넷과 같은 의미에서의 돌아갈 때가 없잖아요. 그 대신 지난 선거에서 다른 의미의 노스탤지어가 작동을 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시 사회적인 것이 녹아 사라진 15년을 겪으니, 강력하고 ‘솔리드’한 무언가가 필요해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솔리드’한 체험이 무엇일까요. 역설적으로 앞서 말했던 산업화 시기의 위계적이고 군사적인 문화, 답답하지만 안정적으로 여겨졌던 질서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을 (대선에서) 뽑지 않았겠나 싶어요.

정리하자면 세넷의 문제 진단은 정확했다고 봅니다. 사람은 녹아내리고 흩어져버린 사회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솔리드’한 무엇인가를 창출해야 한다는 문제 앞에 봉착했다는 문제의식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과연 세넷처럼 돌아갈 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 거지요.

‘걸음마부터 다시!’ 거장의 낙관?

장석준 :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해 물고 늘어졌던 주요한 물음의 형태는 두 가지죠. 소시올로지(Sociology, 사회학)와 소셜리즘(Socialism), 즉 사회주의입니다. 에밀 뒤르켐이나 마르셀 모스 같은 19세기 사회학의 주요한 창시자들은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와 관련해 우리가 중요하게 가져야 할 물음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본주의의 대안 하면 ‘국가 사회주의’를 떠올립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사회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식했지만 실체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김홍중 선생 같은 사회학자들이 앞서처럼 설명해 줘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죠. 실체라는 건 세넷의 말처럼 몸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의 실체가 모호한 데 비해 자본의 실체는 기업, 은행처럼 잘 드러나 보입니다. 국가 역시 인간이 조직적인 폭력을 사용할 때부터 계속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분명해요.

사회주의자들은 자본도 국가도 아닌 사회를 주도하는 실체를 만들어 내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경우 그 역할을 국가가 대행했어요.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겪은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나 소련 같은 일당 독재 국가인 셈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커다란 실패가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전체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인류가 확인하게 됩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령 1970~80년대 영국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대처 정부의 폭력적인 추진으로 이뤄진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했어요. 그동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를 지겨워했던 것이지요.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신자유주의가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국유화, 즉 국가가 다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과연 매력이 있을까요? 스튜어트 홀은 “국가라는 늙은 수위와 결별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회주의는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이 이야기가 나올 때쯤엔 이미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하며 모호하게나마 남아 있던 사회조차도 해체되어 갔습니다.

저는 세넷의 독특한 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진단은 대부분 한 가지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복지 국가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넷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지 국가를 거부했던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복지 국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어쨌든 자본에 대항하여 사회가 주도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태 혹은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 지점에서 세넷은 연대와 협력을 구분하고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정치적 좌파가 뜻하는 것이 과거에 시도됐던 (국가) 사회주의와 관련된 거라면 앞으로 해나가야 할 것은 이와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세넷은 결론에서 노먼 토머스(1884~1968)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당에 들어가 1928~1948년까지 여섯 번이나 대선 후보로 나섰던 인물이지요. 약간 백기완 선생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표를 얼마 못 받을 걸 알면서도 대통령 선거에 나가잖아요. 그런데 세넷은 노먼 토머스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 쟁취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 게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요.

최근 세넷과도 가까운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를 봤더니 비슷한 의미에서 바우만은 ‘소시에타스’와 ‘코뮤니타스’를 구분하고 있더라고요. 소시에타스가 말하자면 국민국가 단위의 커다란 사회인 것 같고, 코뮤니타스는 가족 비슷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조금 다른 사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모태 혹은 세포가 될 수 있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사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한국에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웃음) 제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진보정치 운동, 노동조합 운동의 난관 끝에 최근 중요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민중의 집’ 운동인데요. 이 운동은 스웨덴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종교적인 맥락으로 탄생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각이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에요. 스웨덴의 국교는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 파인데, 노동자들이 루터 파 교구 모델을 하나의 세속적인 공동체를 통해서 구현하려 한 게 스웨덴 민중의 집입니다. 이 경우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사회민주당, 진보적인 교회가 결합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즉 기독교도들이 주일에만 느꼈던 공동체적 삶을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또 주일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이탈리아는 정 반대였어요. 이탈리아의 국교는 가톨릭인데 굉장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교회와 싸워야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민중의 집입니다. 교회와 싸우기 위해 교회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를 거치며 파괴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신자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그 전 단계에 케인스주의를 따랐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요. 만일 앞서 말씀드린 19세기 말의 움직임(‘사회적인 것’의 발견과 실행)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누가 제아무리 신자유주의를 원해도 이뤄낼 수 없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케인스주의 체제가 실행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성취가 분명 있었지요. 사회라는 것의 세포가 복지 국가 단위에서 정책적으로 관철되었으니까요. 소득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분명 케인스주의 체제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진 집단적 소득이 가구 단위로 나뉘면서, 2차 대전 이후 각 가정의 ‘소비 생활’은 철저하게 미국화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렇게 미국식으로 소비가 개별화되고 난 다음 단계에서 신자유주의가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세넷의 문제제기는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방금까지 약 200여 년간 진행되어 온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세넷은 그것이 시작된 19세기의 첫 번째 문제 제기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든요. 원래의 모태·세포들을 복원해야 신자유주의를 복지 국가적 질서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 명 한 명의 사회성을 재건해야 사회주의 국가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주류 좌파의 정책가들이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세넷은 ‘정치적 좌파들이 2~30년간 열심히 노력해 왔으나 그들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뭔가 커다란 부분이 비어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짚어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출하려면 지금까지 소외됐던 ‘손과 발’에서부터 어떻게 협력할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기에 세넷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대단히 낙관적이기도 합니다. 협력을 철저히 기술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술은 천성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거니까, 우리에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투게더>는 매우 파우스트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살아가는’ 시대, 협력은 가능한가?

김홍중 : 말씀하신 맥락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구 제도를 무너뜨리려 하면서 기존에 있던 길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조합들, 지방의 교회 공동체들도 함께 일소시킨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사회성’이라는 게 뿌리내리는 토대는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친족 모임이나 마을의 두레, 품앗이, 계모임 등도 있었죠.

그런데 현 시점에는 또 다른 것들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회가 한국, 일본, 대만이라는 국민국가 ‘내부’에 있었다면 지금은 서울과 타이베이, 도쿄를 가로지르는 삼각형도 존재합니다. 자본과 노동의 교류도 있고,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공간도 실재하고요. 소위 말하는 글로벌한 사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해야 할 것이 늘어났습니다. 계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는 과제와 동시에 국제적인 영역에서 새로 생겨난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고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넷은 후자에 대해서 별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넷의 휴머니즘입니다. 협력을 사람끼리의 협력에만 국한시켜서 얘기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중요한 예로 들고 있는 음악 연주 역시 지휘자나 다른 연주자들하고의 교통이기 이전에 악기를 다루는 손과 악기와의 교통이잖아요. 이를테면 저는 지금 마이크를 들고 얘기하고 있으며, 말씀드리는 생각에 크나큰 도움을 준 건 컴퓨터였습니다.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래 인간의 몸은 ‘몸’으로 따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이 장소에는 30여 명의 인격과 생각을 가진 신체만 있는 것 같지만, 각각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물질적으로 추적해 보면 여기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이 부분을 세넷이 다소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손의 소외와 사물들과의 연대-연대란 말이 다소 거창하지만-를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가 역시 현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사람들이 사물 속에서/사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으며 사람이 테크놀로지를/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지요.

청중 질문 : 제게 조카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중학교에, 다른 한 명은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평범한 10대인 이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으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을 즐깁니다. 너무 깊게 빠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 했더니, 게임 속에서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있더라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전략 게임을 하려면 방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해요. 일단 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어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면 게임이나 인터넷 속 네트워크도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인 건 아니잖아요? 이른바 가상공간에 쌓아 올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좀 걱정됩니다. 이런 것을 내재화한 아이들이 나중에 실제적 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거든요. 게임 속 인간관계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더 넓은 차원의 인간애를 보장해 줄 수는 없겠지요. 두 분은 지금 어린 친구들이 기술과 맺는 관계에 대해, 그 만남으로 발생하는 또 다른 사회의 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홍중 : 저는 갈림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분야의 용어로 말하자면 아도르노냐 벤야민이냐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할까요. 뛰어난 인문주의자였던 아도르노는 죽을 때까지 대중문화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벤야민은 아시다시피 ‘아우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아까 정혜윤 피디가 말했던 ‘눈빛 교환’이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은데,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소통의 전율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벤야민은 이 아우라를 포기합니다. 그런 소통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정치 체제에서는 구현해낼 수가 없다고요.

솔직히 털어놓으면 제 마음 속에는 “도스토예프스키도 안 읽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건방진 생각과 이와 전혀 반대되는 생각이 상존합니다. 특히 요즘 후자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전자처럼 생각하고 살면 저 혼자만 괴로워요.(웃음) 그래서 마음으로는 100퍼센트 동의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80퍼센트 이상, 제 생각을 현실에 맞추어 벼려나가야 한다고 결론 내리게 됐어요. 벤야민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까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이나 주체성을 신뢰하기 시작한 역사는 서구의 경우에도 400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물론 그리스 휴머니즘의 역사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언제나 신 밑에 있었고, 더 이전에는 거대한 자연 앞에 눌려 있었지요. 그리고 현 시점 역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동물보다 나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중 하나가 방금도 말씀드린 사물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인정을 못할 뿐이지 저와 여기 와 있는 여러분은 커다란 시스템이 사용하는 하나의 단말기에 불과할 지도 몰라요.

태어나자마자 미디어를 접하고 가상공간의 현실과 그 바깥을 오갈 수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서,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린다면 과연 상상할 수 있는 미래라는 게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벤야민의 길을 긍정하기로 했어요. ‘눈빛의 교환’이나 아우라 같은 원형만을 찾는다면 앞으로 사회성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인간의 완전한 기계화라는 상황으로 치닫기 이전에 지속되는 지금의 경향 속에서, 사회성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내는가라는 질문을 물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건 그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태어나고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본인들이 어떤 세계에 몸담고 있다면 가능성 역시 스스로 구현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일단은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80퍼센트 까지는 긍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비판적 의식을 갖고 맹렬하게 노려보고 싶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믿습니다. 아직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회성의 실마리는 언젠가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봅니다.

덧붙여 함께 물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앞바다에 떠오른 거대한 가자미 떼, 길에서 살아가는 개미들의 숫자 따위가 자연스러운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란 의식을 가져야 해요. 매미도 일종의 시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름에 매미가 울지 않으면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주주의’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물뿐 아니라 이러한 미물들 역시 우리 삶에 굉장히 깊숙하게 얽혀 들어와 있다는 인식 속에서 사회가 발생하는 거거든요. 이미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산다는 인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장석준 : 저 역시 확정적인 결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장의 권위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넷은 SNS에 부정적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부정적이다 못해 ‘대안을 찾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귀담아 들을 여지가 있지만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죠. 거장이고 위대한 사상가들이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들이고, ‘꼰대’일 수도 있어요. (웃음)

현실의 예를 들면, 요 몇 년간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양상은 SNS가 예측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준 측면이 있습니다. SNS를 통해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마드리드 광장에 모여 1~2년간 천막 농성을 펼쳤고, 경제 위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대안적 운동으로 발전했지요. 많은 분들이 ‘오큐파이 운동’하면 월스트리트를 떠올리는데, 오히려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스페인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잘 살펴봐야 할 것은 불씨는 SNS 속에서 당겨졌는데 운동은 바깥에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SNS ‘내’의 사회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바깥으로 펼쳐져 나가는 새로운 사회성 역시 존재하는 것이지요. 거장들의 시선이 놓친 지점이라고 봅니다. <투게더>가 <장인>(김홍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 이어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데, 세 번째 책에서 도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면을 써라, 사회를 이분(二分) 하라!

장석준 :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넷의 이야기를 받아들임에 있어 실수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세넷은 우리에게 옆에 있는 타인과 속을 터놓고, 솔직하고 끈끈한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협력을 재건하기 위해 오히려 가면을 쓰고 기술을 습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세계 3차 대전 이후 반대자를 다 잡아 가두는 파시즘적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를 그리고 있지요. 주인공 브이(V)는 체제의 전복을 시도하는 테러리스트인데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다녀요. 온 몸이 불에 타 흉측한 모습이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 신체를 가리는 건데, 끝까지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요. 그는 가면을 통해 소통하고 가면을 통해 혁명을 도모합니다. 브이가 죽은 뒤 혁명은 성공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등장해요.

이 은유가 세넷의 메시지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노력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100퍼센트의 투명한 자신을 보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 협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강박을 가질 때 협력에 실패한다고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관계 맺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선택한 가면으로 일종의 ‘놀이’에 임해야지만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이처럼 세넷의 이야기는 역설을 머금고 있고, 그 역설을 잘 파고들어야만 반대 방향의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넷이 <장인>에서 자신의 정신적 뿌리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 19세기의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중세 시대 수공업적 전통의 복권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중에 길드 사회주의로 발전했고요. <투게더>와 <장인>에서의 세넷은 그런 생각을 21세기적 맥락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세넷의 결론에 공감하느냐 아니냐의 질문을 우회하여, 제가 잠정적으로 동의하는 결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저는 20세기 후반의 노동 이론가이자 생태주의자인 앙드레 고르가 도달한 결론에 동의합니다. 고르는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계속해서 전문화되는 부분은 남겨 두고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이전의 삶의 자율성을 복원시키는 공간으로 되돌려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쉽게 말해 그는 노동 시간 단축을 중요시했습니다. 인간성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요.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것을 되살리는 사회, 공동체도 만들고 협동조합도 만드는 사회 말입니다. 두 영역을 가르는 벽을 설치하자는 이런 주장을, 그는 ‘이중 사회론’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도 여러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근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고민해 나가야겠지요.

정혜윤 : 제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나 원래 그래”라는 말이에요. 거짓말 같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좀 더 나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네가 보는 그대로가 바로 나야’라는 게 진정성일까요? 저는 진정성이란 게 있다면 오히려 ‘너를 통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관계들의 탄생과 창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소셜’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넷 역시 ‘너와의 협력을 통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묻고 있다고 느꼈어요. 두 분 모두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안은별 기자(=정리)

장치란 무엇인가: 푸코, 들뢰즈,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푸코, 들뢰즈, 아감벤

2008/01/23 09:26

http://blog.naver.com/sinthome/40046849615    람혼 최정우 블로그

▷ Giorgio Agamben, Che cos’è un dispositivo?, Roma: Nottetempo, 2006.

▷ Giorgio Agamben, Qu’est-ce qu’un dispositif?(traduit par Martin Rueff),

Paris: Payot & Rivages, 2007.

1) 장치(dispositif)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2006년에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1970년대에 이미 푸코(Foucault)가 먼저 제기하였고, 따라서 또한 먼저 대답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당신의 이론에서 ‘장치’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푸코는 이미 다양한 ‘정의(definition)’의 방식들로 답한 바 있지만, 아감벤은 오늘날 이 질문을 다시금 새롭게 제기한다. 이 글은 아감벤의 논의를 따라서, 그리고 또한 푸코와 들뢰즈(Deleuze)가 먼저 내놓은 길을 되짚어보면서, ‘장치’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재독(再讀)하는 데에 필요한 ‘장비’들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내가 읽은 아감벤의 책은 불어 번역본인데, 아직 이탈리아어 판본은 제대로 검토해보지 못했다. 따라서 원문의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감벤의 논의가 일차적으로 푸코의 ‘장치’ 개념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불어본을 중심 텍스트로 잡아 독해해 나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일독을 권한다. 현재 아감벤의 책들이 몇 권 번역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히나 이 책은 짧은 분량이기에 더욱 빠른 시일 내에 국역본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되는 책들 중의 하나.

2) 먼저 아감벤은 1절에서 ‘장치’에 대한 푸코의 정의를 다소 길게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이를 통한 아감벤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장치’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ㅡ제도, 기구, 법, 치안, 철학적 입장 등 담론적이거나 담론적이지 않은 거의 모든 것ㅡ의 집합이며, 이것이 ‘장치’의 첫 번째 정의를 이룬다. 그리고 ‘장치’란 언제나 구체적이고 전략적인 기능을 지니며 권력 관계 안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또한 ‘장치’는 그러한 권력의 관계와 지식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어떤 교차점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어 2절에서 아감벤은 특히 ‘헤겔(Hegel)-이폴리트(Hyppolite)-푸코’의 삼자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폴리트는 ‘청년’ 헤겔이 도입했던 실증성(Positivität/positivité)을 헤겔의 역사철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실증성(positivité)이라는 용어는 장치(dispositif)라는 용어와 같은 어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푸코의 저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의 핵심 범주를 이루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푸코의 실증성과 헤겔의 실증성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푸코가 주체화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개인과 권력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규칙들 사이의 화해를 고려하지 않는 반면에 헤겔은 바로 그러한 화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일전에 나 역시나 ‘헤겔의 자리에 선 푸코’ 혹은 ‘비변증법적 변증법’에 대해서 짧게나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naver.com/sinthome/40045527580), 칸트와 헤겔의 볕과 그늘, 그 안팎을 횡단하는 푸코에 대해서는 아감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터.

▷ Michel Foucault, L’archéologie du savoir,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69.

3) 장치 개념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범주 그 자체를 대체하고 치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3절에서 제기된 ‘어원’에 관한 물음은 바로 4절에서 희랍어 ‘oikonomia’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러한 분석이 ‘장치’라는 개념의 파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아감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은 기독교 성립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체인 신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가지’ 모습을 띨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 속에서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이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적 도그마의 성립을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장치가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 안에서 존재와 행위를 분리해내는, 곧 존재론과 실천론을 분리해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러한 분리는 곧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재-전유가 서구 문화 안에 불러일으킨 하나의 분열증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번역’의 층위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는 문제는ㅡ이어 5절을 통해서 상세히 논파되고 있는바ㅡ,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바로 이 희랍어 ‘oikonomia’의 개념을 다시 라틴어 ‘dispositio’로 옮겼다는 사실에 있다. 이 라틴어 개념ㅡ그리고 그 ‘번역’ㅡ이 가져온 것은 존재와 실천, 자연(본질)과 작용을 가르는 어떤 하나의 균열이다. 여기서 작용이란 곧 피조물들의 세상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신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치의 개념은 언제나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며ㅡ아감벤이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나 그의 어원 분석을 ‘패러디’해서 말해보자면ㅡ, 여기서 우리는 또한 ‘subjectivation’이 항상 ‘sub-jectivation’으로 ‘분절’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미리 앞서ㅡ하지만 시기상으로는 ‘선행(先行)하는’ㅡ들뢰즈의 논의를 차용하자면, 바로 이러한 ‘주체화’는 고고학적 분석의 대상인 지층들(strates)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지층들을 초과하여 감행하는 도주의 선(ligne de fuite), 그것을 위한 조건이기도 한 것.

4) 아감벤은 6절에서 이러한 분리 혹은 균열의 결과로 제기되는 두 개의 대립적 개념들, 곧 살아 있는 존재자들(실체들)과 그들을 포획하는 장치들을 설정하고 있다. 그가 푸코적 ‘장치’의 ‘사례’들을 확장하면서 첨가하고 있는 ‘현대적’ 예시들의 범위는 글쓰기와 문학으로부터 담배와 컴퓨터 또는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이 대목에서 불역본의 표지에 왜 휴대전화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지를 알게 되는 약간의 허탈함이 동반된다). 이러한 장치와 살아 있는 존재 사이의 구분, 바로 그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주체이다.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생체’와 ‘장치’ 사이의 관계가 빚어낸 결과로서 주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을 통한 아감벤의 진단은 곧,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무한한 장치의 발전에는 또한 그와 같은 정도로 무한한 주체화의 과정들이 대응하고 있다는 것. 이어 7절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장치의 ‘불가피성’, 곧 장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문제가 지닌 어려움이다. 이에 아감벤이 8절을 통해 진입하고 있는 곳은 일종의 모스(Mauss)-바타이유(Bataille)적인 이론 지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여기서 첨예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성스러움(le sacré)의 개념과 대립하는 신성모독/세속화(profanation)의 문제이다. 곧, 장치의 개념은 일종의 희생제의(sacrifice)로 이해되며, 따라서 신성모독/세속화는 그러한 희생제의가 분리하고 구분해놓은 것을 다시금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역(逆)-장치(contre-dispositif)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9절과 10절에서 아감벤은 ‘탈주체화(désubjectivation)’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어떤 실제적인 주체화도 수반하지 않는 이러한 탈주체화의 정치적 ‘부작용’들에 대한 아감벤의 비판으로부터 우파도 좌파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장치의 광범위한 일반화는 혁명의 요소와 조건으로서 기능하기보다는ㅡ우리가 ‘oikonomia’ 개념과 그 번역어로서의 ‘dispositio’ 개념을 통해 이미 살펴보았듯이ㅡ오히려 묵시록적 혼돈을 동반하는 일종의 유사-신학적 체제에 근접하고 있다. 개인적인 견지에서 볼 때, 아감벤의 이러한 접근법은ㅡ또한 개인적으로 이미 그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통해 확인했던 것이지만ㅡ바타이유적 ‘정치학’이 내놓은 여러 물길들 중의 한 계보를 잘 정식화해주고 있다는 느낌이다(『호모 사케르』에 대한 글은 차후에 다른 자리를 통해 시도해보기로 하겠다).

▷ Gilles Deleuze, Deux régimes de fous.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Minuit(coll. “Paradoxe”), 2003.

▷ 질 들뢰즈,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편역), 이학사, 2007.

▷ Gilles Deleuze, Foucault, Paris: Minuit(coll. “Critique”), 1986.

5) 앞서 아감벤이 푸코의 장치 개념이 지닌 직접적 특징을 ‘보편적인 것의 거부’라고 보았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푸코 해석’을 가장 먼저 피력하고 정교화한 공(功)은 아마도 들뢰즈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이미 푸코의 장치 개념에 대해서 아감벤과 같은 제목의 글(「장치란 무엇인가(Qu’est-ce qu’un dispositif)?」)을 남긴 바 있다(아마도 아감벤의 저 제목은 바로 이 들뢰즈의 제목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는 것일 터). 이 글은 들뢰즈 사후에 출간된 두 번째 저작/대담집(2003년)에 다시 수록되었는데, 박정태 편역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도 국역되어 실려 있다(박정태 편역 책의 표지를 잘 들여다보면, 여러 철학자들의 그림 중에서 플라톤과 헤겔의 그림만이 거꾸로 뒤집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내가 ‘거꾸로 뒤집힌’ 바젤리츠의 그림들이 지닌 ‘어떤 의미’를 언급한 일전의 글에 비추어 볼 때(http://blog.naver.com/sinthome/40039529808), 어쩌면 다분히 유치한 수준의 ‘뒤집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들뢰즈의 이 글은 푸코의 장치가 지닌 차원을 크게 가시성과 언표행위, 힘, 주체화로 정리하며 이러한 장치 개념의 도입이 산출하는 결과를 보편성과 영원성의 포기로 요약하고 있다. 또한 이 글은, 푸코 이론이 지닌 ‘역사성’과 ‘현재성’을 각각 푸코의 저작과 인터뷰에 할당함으로써, 푸코의 저작과 이론적 기획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줌과 동시에 또한 우리가 ‘어떻게’ 그의 인터뷰를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을 명쾌히 제시해줬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일독과 재독을 권한다. 또한 이 글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글로서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Sur les principaux concepts de Michel Foucault)」를 꼽을 수 있을 텐데(또한 이 글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 『푸코』 또한 ‘필독(必讀) 목록’에 함께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장치 개념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푸코 사상의 전체적 풍경을 아주 뛰어나게 정리하고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 역시 위의 저작/대담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박정태 편역의 책에 국역되어 있기도 하다. 이 글은 비교적 가독성 있게 말끔히 번역되었지만 몇 가지 유의할 점들도 눈에 띈다.

▷ Louis Hjelmslev, Prolégomènes à une théorie du langage,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71.

▷ 루이 옐름슬레우, 『 랑가쥬 이론 서설 』(김용숙, 김혜련 옮김), 동문선, 2000.

6) 첫 번째 유의점은 옐름슬레우(Hjelmslev)의 언어학적 개념들과 관련된 ‘오역’이다.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층들은 역사적 형성들이며, 따라서 지층들은 실증성이요 경험성이다. 지층들은 사물과 말, 보기와 말하기, 가시적인 것과 진술 가능한 것, 가시성의 구역과 독해 가능성의 장, 내용과 표현으로 형성된다.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을 엘름슬레브로부터 빌려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거론되는 내용[가시적인 것]을 [언어학적] 기의와 혼동하지 않으며, 여기에서 거론되는 표현[진술 가능한 것]을 [언어학적] 기표와 혼동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러하다.”(『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437쪽) 일단 ‘옐름슬레우’를 ‘엘름슬레브’로 표기한 것이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더 중요한 문제는 내가 진한 글씨로 강조한 부분에 있는데, 먼저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여기에서 거론되는”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 표현은 본래 원문에는 없는 구절이다(Deux régimes de fous, p.227 참조). 그렇다면 번역자는 왜 이 문장들을 번역하면서 이런 구절들을 첨가할 수밖에 없었을까? 많은 이들이 주지하다시피, 저 ‘내용(contenu)’과 ‘표현(expression)’이란 개념은 옐름슬레우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호 개념인 기의(signifié)와 기표(signifiant)를 ‘발전적으로’ 대체한 개념의 짝이다. 내용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내용’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형식(forme)’의 측면과 ‘실질(substance)’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내용의 형식/실질’, ‘표현의 형식/실질’이라는 구분법은 옐름슬레우 언어학이 수행한 가장 뛰어난 분석 중 하나이다. 물론 역자가 친절히 ‘[ ]’ 안에 부연해주고 있듯이, 들뢰즈의 이 글 안에서 ‘내용’과 ‘표현’이 각각 문맥적으로 ‘가시적인 것’과 ‘진술 가능한 것’에 연결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보다 구조적인 것이다. 들뢰즈의 논의 속에서 푸코가 옐름슬레우로부터 차용한 용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내용’과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거론되는”이라는 ‘첨가된’ 번역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거론되는 어떤 특정한 내용’이 ‘가시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거론되는 어떤 특정한 표현’이 ‘진술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번역에서는 ‘내용’과 ‘표현’이라는 말이 옐름슬레우의 이론 체계에 속한 고유의 개념어가 아닌 단순한 ‘일반명사’처럼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다. 문제는, 옐름슬레우를 따라서, ‘내용’을 단순한 ‘기의’와 구분해야 할 필요성, 또한 ‘표현’을 단순한 ‘기표’와 구분해야 할 필요성에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일 터. 그렇게 본다면 내가 진한 글씨로 강조한 다른 부분, 곧 “이러한 용어들”이라는 번역이야말로 사실 이러한 ‘오역’에 대한 ‘최초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어떤 ‘착각’ 때문에 역자는 “여기에서 거론되는”이라는 사족을 두 번씩이나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자가 “이러한 용어들”이라고 옮긴 부분은 본래 원문에서 “이 마지막 용어들(ces derniers termes)”, 곧 앞서 열거한 모든 개념의 짝들이 아니라 오직 그 열거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옐름슬레우적 개념들만을, 곧 ‘내용’과 ‘표현’이라는 개념의 짝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Deux régimes de fous, p.227 참조).

▷ Ferdinand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édition critique par Tullio de Mauro), Paris: Payot & Rivages, 1972.

▷ Ferdinand de Saussure, Écrits de linguistique générale,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philosophie”), 2002.

▷ 페르디낭 드 소쉬르, 『 일반언어학 강의 』(최승언 옮김), 민음사, 1990.

7) 주지하다시피, 옐름슬레우가 내용의 형식/실질과 표현의 형식/실질이라는 구분법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소쉬르의 언어학 덕분이었다. 옐름슬레우도 직접 인용하고 있는바,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 2부 4장에서 사고(pensée)와 음성(son)이라는 “두 가지 질서의 요소들이 결합하는 접경 지역(terrain limitrophe)”에 대한 학문이 바로 자신이 이해하는 언어학임을 밝히고 있다(마우로 비평판, p.157). 곧 소쉬르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러한 [사고와 음성의] 결합은 실질이 아니라 형식을 생산한다(cette combinaison produit une forme, non une substance)”는 것(마우로 비평판, p.157). 옐름슬레우가 ‘내용’과 ‘표현’의 개념을 통해 보다 더 정치하고 첨예하게 정식화시키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소쉬르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번역으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위의 민음사 판본이 통용되어 왔으나, 이 국역본이야말로 ‘뭔가 부족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옐름슬레우의 국역본 역시나 완벽한 번역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특히나 1972년에 나온 마우로 편집본의 주석들과 함께 어서 빨리 새롭게 번역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되는 책이다(이런 소망을 품은 지도 정말 오래되었다는 느낌이지만, 사실 저 국역본이 1990년에 간행될 때만 해도 ‘일러두기’에서 마우로 주석본이 곧 번역되리라는 예고까지 있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번역의 ‘부족(不足)’과 ‘지각(遲刻)’ 탓만을 해야 하는가). 더불어 시몽 부케(Simon Bouquet)와 루돌프 엥글러(Rudolf Engler)의 편집으로 2002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된 소쉬르의 수고집(Écrits de linguistique générale) 또한 일독을 요하는 책인데, 특히나 이 책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많은 『일반언어학 강의』의 해석에 있어 여러 유용한 시사점들을 던져 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책이다.

8)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의 국역을 읽을 때 두 번째로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외성(extériorité)’과 ‘내성(intériorité)’이라는 번역어들이다(예를 들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445쪽, 454쪽). 이와 더불어 반드시 함께 검토해야 할 문제는 바로 ‘immanence’의 번역어인 ‘내재성’일 터. 나의 일천한 독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extériorité’가 가끔씩 다른 책들에서 ‘외재성’으로 번역되곤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따라서 내게는 이러한 개념어들의 번역에 대한 일종의 ‘일괄적’ 정리가 필수적이고 시급한 사항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immanence와 대립되는 개념은 당연히 ‘extériorité가 아니라 ‘transcendance’이다. 곧 ‘내재[성]’의 대립어는 ‘초월[성]’인 것이다. 하지만 ‘extériorité’가 ‘외재성’으로 옮겨질 경우, 그것이 마치 ‘내재성’의 대립어로 여겨지게 되는 부당하고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편역자가 취하고 있는 ‘외성’과 ‘내성’이라는 번역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이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개인적인 기준ㅡ그리고 취향(?)ㅡ에서 볼 때, ‘외성’과 ‘내성’보다는 ‘외부성’과 ‘내부성’이라는 번역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점만을 밝혀둔다(이러한 ‘개인적인’ 선호의 이유들 중 한 가지를 ‘귀류법적’인 반문(反問)의 형식을 통해 밝혀보자면, 예를 들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454쪽에서 역자는 ‘intériorisation’이라는 단어를 ‘내화’라는 번역어로 옮기고 있는데, 하지만 한국어의 ‘상용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그 반대어인 ‘외화’를 우리는 바로 저러한 ‘내화’의 대립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덧붙이자면, 이러한 번역어 ‘정리’의 문제는, 좁게는 레비나스(Levinas) 전공자들과 들뢰즈 전공자들 사이에서 모종의 ‘합의’를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ㅡ도대체 『전체와 무한(Totalité et infini)』의 국역본은 언제, 또 누가 내줄 것인가ㅡ, 또한 동시에 더 넓게는 ‘차이’와 ‘타자’ 혹은 ‘내재’와 ‘초월’을 둘러싸고 서양 현대 철학의 전체 맥락 안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개념어들의 ‘한국적 전유’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후자의 문제가 전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임은, 또한 후자의 문제가 이미 전자의 문제를 포함하고 해소하고 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명약관화(明若觀火)이다.

▷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3,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age].

▷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니체 전집 10권)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2: 1970-1975,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94.

9) 세 번째 유의점은 니체(Nietzsche)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는 어쩌면 ‘중역(重譯)에 의한 오역’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 푸코가 인용한 니체의 문장(불어로 번역된 것)에 대한 들뢰즈의 재인용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잉여-번역’이 그것이다(아, 번역의 과정 안에서도 ‘G-W-G´’라는 자본의 일반 공식이 적용되고 있었음을!(Das Kapital, Band 1, p.170 참조)). 역자는 니체의 『아침놀(Morgenröthe)』에 나오는 저 유명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우연의 나팔을 흔드는 필연성이라는 완강한 손(la main de fer de la nécessité qui secoue le cornet du hasard).”(『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455쪽) 이는 푸코가 자신의 글 「니체, 계보학, 역사(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에서 인용하고 있는 니체 번역을 그대로 다시 인용한 것이다(이 글은 푸코의 『말과 글(Dits et écrits)』 2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해당되는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jene eisernen Hände der Nothwendigkeit, welche den Würfelbecher des Zufalls schütteln […]”(KSA, Band 3, p.122(§130) 참조). 곧, 내가 진한 글씨로 강조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불어 번역은 독일어 “rfelbecher”를 “cornet”로 옮긴 것인데,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를 다시 “나팔”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어 ‘rfelbecher’는 ‘주사위를 넣고 흔들어 던지는 통’을 의미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불어 번역에서는 ‘[원뿔 형태의] 주머니’ 또는 ‘[나팔 모양의] 통’이라는 뜻의 ‘cornet’라는 단어를 번역어로 채택한 것인데, ‘중역된’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 불어 단어의 일차적인 뜻에 주목하여 이를 단순히 ‘나팔’로 옮기고 있는 형국이랄까. 참고로 박찬국의 국역본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우연의 주사위 통을 흔드는 필연성의 저 철(鐵)로 된 손[…]”(덧붙이자면, 여기서 독일어 단어 ‘eisern’과 불어 단어 ‘de fer’가 지닌 의미의 범위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는데ㅡ곧 이 둘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철로 된’, ‘쇠로 된’이라는 뜻을 갖고 이차적으로는 ‘무쇠 같은’, ‘불굴의’, ‘냉혹한’ 등의 뜻을 갖는 단어들인데ㅡ옐름슬레우의 용어를 차용해보자면, 이 두 단어는 ‘내용의 형식’이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팔’과 ‘주사위 통’의 차이, 이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할 이도 물론 있겠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니체의 저 ‘주사위 던지기’ 개념의 함의와 중요성을 망각하고 지나갈 위험을 내포하는 국역이기에 다소 ‘부족한’ 번역이라는 점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 Friedrich Nietzsche, Aurore(traduit par Henri Albert),

Paris: Hachette(coll. “Pluriel”), 2005.

▷ 프리드리히 니체, 『 서광(니체 전집 4권) 』(이필렬, 임수길 옮김), 청하, 1983.

10) 독일어와 불어와 한국어 사이의 번역이 빚어내는 어떤 ‘간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된 개인적인 소회를 하나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나는 책세상에서 새로 간행된 니체 전집 국역본이 ‘Morgenröthe’의 번역 제목으로 채택한 저 ‘아침놀’이라는 단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물론 이는 저 독일어의 ‘직역’에 가장 가깝긴 할 것이다). 예전에 청하에서 간행되었던 국역본은 그 번역에 있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는 해도ㅡ그렇다고 해서 책세상 판본의 번역이 결코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ㅡ저 ‘서광’이라는 제목만큼은 니체의 사유가 선사하는 숨 가쁜 박력과 저돌적 힘을 잘 표현해줬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불어 번역본은 이를 ‘aurore’라는 단어로 옮기고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의미에서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표제라는 고백 한 자락 남겨본다. 여담 삼아, 위에서 내가 문제 삼았던 부분을 청하 국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우연의 주사위 통을 흔드는 필연성의 저 쇠로 된 손[…]”. 책세상 국역본과 비교했을 때, 정말 말 그대로 ‘한 끗 차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11)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의 국역 독해에 있어 네 번째로 유의할 점은,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오역’들에 관한 문제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짧은 언급만을 하고 지나가도록 하겠다. 첫째, ‘désir’를 모두 ‘욕망’이 아닌 ‘욕구’로 옮기고 있다는 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457쪽 이하). 이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역자가 지닌 일종의 ‘신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데, 현재 ‘욕망’이라는 번역어가 지니고 있는 적절성과 상용도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신념’이 앞으로도 계속 통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둘째, ‘topologie’를 모두 ‘위상학’이 아닌 ‘유형학’으로 옮기고 있다는 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467, 469쪽). 이는 분명한 오역의 경우라고 하겠는데, 아마도 역자가 ‘topologie’를 ‘typologie’로 오독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특히나 역자가 「장치란 무엇인가?」의 번역에서는 ‘typologie’를 ‘유형학’으로 제대로 잘 번역하고 있음에야).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3: 1976-1979,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94.

▷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tome 2: l’usage des plaisirs,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histoires”), 1984.

12) 푸코에게 있어 ‘장치’란 무엇인가. 결국 나는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장치 개념의 검토에 있어서 무엇보다 푸코의 목소리, 그 육성 자체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검토의 대상이 되는 가장 일차적인 인터뷰 텍스트는 바로 푸코의 『말과 글』 3권에 수록된 대담(pp.298-329)이다. 앞서 아감벤이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푸코의 ‘말’도 바로 이 텍스트에 속한 것이다. 아감벤이 인용한 부분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싶은 푸코의 ‘말’, 곧 장치에 관한 그의 여러 정의들 중 가장 주목하고 싶은 두 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장치라고 부르는 것이 에피스테메(épistémè)가 지닌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말해서, 에피스테메란, 담론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인 장치와는 다르게, 특별히 담론적인 의미에서의 장치를 뜻한다는 것입니다.”(『말과 글』, 3권, pp.300-301, 번역: 람혼) 둘째, “거짓으로부터 참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는 일,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장치입니다.”(『말과 글』, 3권, p.301, 번역: 람혼) 이 두 가지 ‘정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장치’의 개념은 푸코의 저 ‘에피스테메’ 개념을 대체하고 또한 확장하고 있다는 것. 둘째, 그러나 또한, 들뢰즈가 이미 예리하게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장치’의 개념에 의해 가능하게 된, 주체화 과정에 대한 ‘후기’ 푸코의 연구는 어떤 ‘단절’이나 ‘방향 전환’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연속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확인이, 푸코 개인의 이론적 발전사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사상사의 맥락에서 ‘장치’ 개념을 사유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하리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독해를 통해 내가 개인적으로 다시금 계획하게 되는 일은ㅡ이는 어떤 이에게는 일종의 ‘비약’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이에게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텐데ㅡ푸코의 저 『성의 역사』 2권, 곧 『쾌락의 활용』에 대한 재독(再讀)에 다름 아니다.

13) 개인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천착해 오고 있는 ‘사상사’라는 지평에서 생각해볼 때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점은, 아감벤과 랑시에르(Rancière), 그리고 ‘후기’ 푸코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어떤 ‘희랍적’ 지향성이다. 예를 들자면, 아감벤의 ‘zōē’와 ‘bios’ 사이의 구분, 랑시에르의 ‘logos’, ‘démos’, ‘politeia’ 등에 관한 논의, 또는 푸코의 ‘enkrateia’와 ‘parrhêsia’ 개념에 관한 연구 등등에서 포착할 수 있는 어떤 ‘방향성’이 내게는 매우 첨예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서양 철학사라는 ‘제도’가 지닌 일반적 의미 안에서 저 ‘희랍적’ 지향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론적이고도 회고적인 태도가 언제 문제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겠느냐마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이러한 지향성의 ‘특수하고도 현대적인’ 경우는 별도의 연구와 검토를 필요로 하는 이론적 지평이라는 생각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곧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관계되는 문제이기에, 또한 바로 저 ‘장치’라는 개념과 직결되고 있는 문제이기에. 고래의 개념들과 그것이 낳은 분류법을 발굴, 검토하고 그로부터 어떤 새로운 의미와 분류법의 체계를 그려냄과 동시에 여러 가능한 실천의 지도들을 작성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사상사적’ 문제가 아니었던가

 

[번역] 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번역] 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와라
2008.12.19 18:10:02
646

벤야민이 1913년에 쓴 ‘경험(Erfahrung)’이라는 글이다.

원문은 독일어이지만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관계로 영역본을 기초로 번역했다.

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Hava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이고(이 선집에서 이 글은 제일 처음 실려 있다), Lloyd Spencer와 Stefan Jost가 영역했다.

벤야민 영역본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 구분되지 않고, 둘 다 Experience로 번역되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도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만 나오고 있다. 아직 독어판과 비교해 보지 못한터라 Erlebnis도 Experience로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험과 체험이 이 글에서도 (표기는 경험으로 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를 보면)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뒷부분에서 경험으로 번역한 몇몇 부분은 체험으로 옮겨 적어야 의미가 명확해 질 듯 하다. 이 구분은 벤야민의 사상을 연구할 때 핵심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므로 개념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던지는 충격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체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침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나는 여기서 경험=상징계, 체험=실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벤야민에게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떠들어도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글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태해지려할 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어떤 것이든 전환점이 필요할 때 즐겨 읽는 글이다. 내 영어(와 번역_ 실력의 미천함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읽기 싫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니 내 책임은 아니겠지… 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직 초벌 번역이라 문장이 이상한 데가 많을테니 감안하고 읽어 보시길.

추가 : 연구소의 로아님이 벤야민 독어판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해 본 결과, 이 글에 나오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Erfahrung으로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로아님 확인 감사^^). 그리고 영어로 sprit(독어 Geist)이라고 되어 있는 용어를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보통 독어의 Geist는 영어로 spirit로 번역되는데 한글로도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들(옆에 spirit이라고 영문표기를 달아놓았습니다)은 정신(geist)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spirit을 영혼으로 옮긴 것은 without spirit과 같은 문구가 나와서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 없이’정도가 되서 어감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리라 판단해서입니다. 정신없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관영어구처럼 쓰이기 때문에 벤야민이 쓰는 맥락과 조금 다르게 다가올수 있으니까요. 어쨋든 이런 점 주의해서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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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xperience, Erfahrung, 1913) – 발터 벤야민

adami-benjamin_2.jpg   책임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가면 쓴 이들에 맞서 싸운다. 어른들의 가면은 ‘경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항상 동일하다. 어른은 항상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젊음, 이상, 희망, 여성. 그것은 모두 환상이다. – 종종 우리는 겁먹거나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는 옳다. 우리의 반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 시도해 보자. 어른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 역시 한 때 젊었었다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했었다는 것, 그 역시 그의 부모에 대한 믿음을 거절당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훌륭한 방식으로 웃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는 미리 우리가 살아갈 (진지한 삶의 기나긴 엄숙함 이전에 오는)철없는 환희의 세월들을 평가 절하한다. 이렇게 선한 것, 교화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짧은 젊음을 허용조차 하지 않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다른 선생들을 알고 있다: 진지하고 엄한, 그들은 우리들을 삶의 고역으로 바로 밀어 넣는다. 양자의 태도는 우리의 세월들을 평가절하하고 파괴한다. 게다가 감정에 엄습 당한다: 우리의 젊음은 짧은 밤이다(환희로 채워라); 그것은, 타협의 세월들, 관념의 빈곤, 그리고 활력의 결여와 같은, 거대한 ‘경험’에 뒤따라 올 것이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이 하나, 결코 다를 것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 그것은 잔인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새롭거나 진취적인 어떤 것을 장려한 적이 있던가? 아니다, 명확히도 이것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 진실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 는 그 자신 안에 지평을 수립한다. 그럼, 경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이 속에 비밀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위대한 것, 의미 있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the philistine)은 경험을 그의 복음으로 취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의 공통성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기에 경험과는 다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속물에게는 왜 삶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른 것은 모른채) 경험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sprit)의 부재와 황량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공통적인 것 그리고 항상-이미-낡은 것 외에 다른 것과 내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들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비록 아직까지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했다 해도 지속되어야 하는 충실함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든 이들은, 피곤한 몸짓과 초연한 절망으로, 모든 것에서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후회일 것이고, 초석이 되는 용기, 희망, 의미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게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영혼(spirit)은 자유로울 게다. 하지만 또 다시 삶은 쇠약해질 것이다. (경험의 총체인)삶은 위안 없는 것일 뿐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물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spirit)과 함께 그런 낯선 삶을 인도해야 하는가? 그들의 나태한 자아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삶에 의해 농락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만의 영혼으로 그것들에 값어치를 투여한다 – 경솔한 그는 착오에 만족한다. 그는 탐색자에게 “너는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 “그것이 내 경험이야.” 그러나 탐색자에게 ‘착오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스피노자). 다만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의미와 영혼이 결여된 경험이다. 아마 맞서는 자에게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든, 그는 결코 덤덤하게 포기하지도, 속물의 리듬에 마취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에게 ‘(당신은)모든 새로운 무의미함 속에서 기쁨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옳음 속에 잔존한다. 그는 스스로 재-확신 한다: 영혼(spirit)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혼’ 앞에서 위대한 경외와 가혹한 복종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비판적이 된다면, 그도 그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에 반해 그가 겪는) 영혼의 경험 조차도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에게 말하라
그가 한 사람의 남자/어른(a man)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젊음의 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실러, 돈 카를로스 중)

속물에게는 “그의 젊음의 꿈”만큼 꺼림칙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감성적임은 그의 혐오의 보호적 위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예전의 그를 부르는)영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길하게 그를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젊음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런 무서움(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비웃도록 가르친다. 특히 영혼 없이 경험하는 것이 편하다고, 만약 되찾을 수 없다면.

   다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범접할수 없고, 가장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결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개인은 방황의 끝에서만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 속물은 그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속적인 영혼없음(spiritlessness) 중의 하나이다. 젊음은 영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덜 쉽게 위대함을 얻을수록, 방황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영혼과 더 많이 대면할 것이다. – 그가 남자/어른이 되었을 때, 젊음은 측은하게 될 것이다. 속물은 불관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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