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정당론

‘안철수 신당’ 지지율 1위 – 신당 30.9%, 새누리당 30.7%, 민주당 15.4%

설왕설래일 뿐인데…’안철수 신당’ 지지율 1위

안철수 신당 30.9%, 새누리당 30.7%, 민주당 15.4%

여정민 기자

기사입력 2013-04-29 오전 10:17:32

4.24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안철수 의원이 신당을 만들 경우 그 지지율이 새누리당보다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28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직 창당하지도 않은 안철수 신당의 가상 지지율은 30.9%에 달했다.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30.7%, 민주통합당은 15.4%였다.

이같은 지지율은 지난 3월 2일 같은 기관의 조사에 비해 월등하게 높아진 것이다. 당시 조사에서는 새누리당이 40.1%, 안철수 신당이 29.4%, 민주통합당이 11.6%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

안철수 의원이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의견도 절반이 넘는 53.7%에 달했다. 안 의원이 민주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대답은 전체 응답자의 23.4%였다.

안철수 신당 창당을 기대하는 여론은 대구경북(62.7%)에서 가장 높았고, 그 뒤를 서울(59.8%)과 경기인천(54.2%)이 이었다. 호남에서는 신당 창당을 바라는 응답자(41.6%)보다 민주당 입당을 바라는 응답자(43.3%)가 다소 많았다.

이번 조사는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집전화와 휴대전화를 섞어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였다.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역사

 

 

 

보수주의는 이전의 것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니다

‘보수정치는 영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는 영국 보수당의 역사다. 보수주의는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어떻게 그런 ‘보수정당이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집권했는가’의 원인을 영국 보수당의 역사를 통해 드러낸 책이다. 보수주의를 이전의 것을 지켜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가르쳐 준다.

 

19세기 영국 보수주의 전통을 확립한 로버트 필,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통해 영국 보수주의의 전통, 즉 끊임없이 사회변화를 수용하고 옛 것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앞장 서서 실천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의 장기집권을 끝내고 보수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캐머런 총리를 통해 보수당이 어떻게 살아남고 강한 생명력으로 집권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 로버트 필

19세기 영국은 산업화에 따른 사회변화에 정치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였다. 중산층으로 선거인수 확대하고 선거구를 조정하는 개혁법과 외국에서 들여오는 곡물에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의 폐지 여부가 중요한 현안이었다. 로버트 필은 보수당의 지도자로서 개혁법을 받아들이고 곡물법을 폐지하였다. 1832년의 개혁법이 정치적 승리였다면, 1864년의 곡물법 폐지는 그들을 위한 경제적 승리였다. 이러한 조치는 향후 보수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필의 곡물법 폐지는 보수당이 언제나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하는 반동적인 집단이 아니라 내부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요구와 변화에 대응할 역량을 갖는 정치조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보수당은 1846년 분열 이후 집권하지 못했고 1874년이 되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보수당의 아버지 디즈데일리(Benjamin Disraeli)

 

 

시련에 빠진 보수당의 운명을 회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디즈데일리라는 지도자의 공이었다. 디즈데일이는 보수당이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1874년까지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어려움을 겪던 보수당을 구하고 이후 1906년까지 약 30년간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디즈데일리는 이런 정치적 성공 뿐만 아니라 당의 사회적 지지 기반을 넓혔고 당이 대표하는 이념적 지평도 확대시켜 오늘날의 보수당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든 초석을 닦았다. 디즈데일 리가 보수당의 아버지(founder of the Party)라는 평가를 듣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 재건에 큰 기여를 했지만 처음에 보수당은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출신 성분은 보수당 주류와는 너무 달랐다. 디즈fp일리는 농촌에 넓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 아니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작가였고 도시의 상인출신이었다. 어린 시절에 국교도로 개종했지만 영국으로 이민 온 유태인의 아들이었다.

 

디즈데일리는 보수당이 더 이상 사회개혁 법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수권정당으로의 신뢰감을 높였다. 공장과 공공위생 관련 법안, 노조의 권리에 대한 제한적인 인정, 주택과 지방정부 개편 등 사회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디즈레일리의 이러한 사회개혁에 대한 주장은 보수당이 더 이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아니며 개혁법 도입으로 변화된 유권자 층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오늘날까지 인용되는 명연설을 통해 보수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제시했다. 그는 보수당만이 현재 영국의 제도를 보존할 할 수 있고, 대영제국을 수호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당시 언론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디즈레일리가 제시한 보수당이 자임한 세 가지 역할은 이후에도 보수당의 중요한 정치적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을 사회개혁의 주창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통합과 대영 제국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디즈레일리의 뛰어난 점은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사항을 찾아내고 그 이슈를 선점하는 안목과 능력에 있었다. 1874년 총선(보수당 350석, 자유당 242석)을 통해 보수당은 이제 잉글랜드 지역과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존하는 정당이 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게 호소력을 갖는 실질적인 ‘전국정당’이 될 수 있었다. 디즈레일 리가 보수당에 남긴 가장 큰 족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 조직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선거 지지라는 측면에서 보수당이 전국적인 정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 영국수상

현재 현국수상은 데이비드 캐머런이다. 1966년생으로 2010년 43세의 나이로 보수당을 총선승리로 이끌면서 수상에 올랐다. 1997년 존 메이저가 총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후 8년동안 세 명의 당수가 기대감을 갖고 등장했지만 무기력하게 물러났고 2005년 당시 39세의 캐머런이 보수당의 당수직에 올랐다.

 

캐머런은 이튼과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1997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01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신참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정치적 경력이 그리 짧은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보수당 조사국에 들어갔으며 메이저 정부에서 재무장관이었던 마이클 하워드의 특별보좌역을 각각 거쳤다. 그리고 민간 방송회사의 부서 책임자로 7년을 보낸 후 정치에 입문했다. 의원이 된 이후에 당내에서 정치적 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2004년 마이크 하워드 당수 하에서 예비내각의 주요 당직을 맡았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가 되기 이전 11년간 의정활동을 하면서 노동당 예비내각에서 내무장관 등 보직을 다양하게 경험한 것에 비해서 캐머런은 겨우 4년의 의회 경험만을 갖고 있었고 중요 보직을 맡을 기회도 적었다. 보수당으로서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젊은 정치인을 선출하는 모험을 선택했는데 세 차례의 총선 참패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게 했다.

 

 

캐머론의 온정적 보수주의 compassionate conservatism

데이비드 캐머론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지면서 당의 개혁과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카메론은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적 색채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기조는 ‘온정적 보수주의 compassionate conservatism’로 요약할 수 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보수당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보수당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와 연두색을 넣은 새로운 당로고를 제정하기도 했고 또, 의사당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기도 했다. 환경 뿐만 아니라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블레어의 노동당이 보수당의 무기를 빼앗아 갔다면 카메론은 역으로 전통적인 노동당의 정책에 대해 공세를 편 것이다. 그 결과 결국 보수당은 노동당의 오랜 집권을 물리치고 정권을 차지했고 캐머론은 영국수상이 되어 영국을 이끌고 있다.

 

 

지지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집권하는 길

어느 길이 옳은지는 영국 정당들의 집권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전통적 지지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블레어는 제3의 길을 통해 노동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캐머론도 대처의 유산을 당내에서 제거하려 한다는 대처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당의 지지를 넓혀 집권했다. 결국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과감한 개혁을 통해 지지의 지평을 넓힌 정당이 승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지의 지평을 넓히고, 그리고 국민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정당이 될 때 국민들은 지지를 보낸다. 그래야 젊은 세대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다.

 

 

보수당이 살아남은 원인

첫째는, 보수당은 대단히 권력을 열망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집권하기 위해서 최대한 현실과 타협했다. 디즈fp일리 수상은 “빌어먹을 너의 원칙을 버려라. 그저 당에 충실해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둘째는, 유연한 때문이다. 변화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지 않았다. 자유당이나 노동당이 추진한 정책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수용하고 모방했으며, 이전 정부가 커다란 정치적 논란 뒤에 실행한 정책을 그 뒤에 보수당이 집권하더라도 되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셋째는, 보수당은 당의 외연을 넓혀왔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수호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당은 디즈레일리나 볼드윈처럼 필요하다면 사회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애국주의 정당, 제국의 정당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요소를 보수당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은 기존질서와 헌정체제의 수호라는 보수당의 전통적 가치에 사회개혁과 애국주의 정당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사회개혁을 통해 보수당을 어는 한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모두의 정당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전통은 보수당의 명분과 기반을 크게 확대시켰으며, 이것이 보수당이 이긴 원인이다.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강원택,EAI, 2008

계파 정치 청산? – 목표가 잘못됐다

‘사소한 복수극’으로 전락한 계파 정치

[박동천 칼럼] 계파 정치 청산? 민주당 목표가 잘못됐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25 오후 3:42:30

지난해 두 차례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1987년 또는 1997년 선거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들이 2:0이냐 1:1이냐 0:2이냐에 따라 장차 적어도 30년의 정치 지형이 좌우될 만큼 중요했다. 그 선거가 0:2 새누리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 후 민주통합당 안에서 반성과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 하나가 계파 정치 청산이다. 민주당의 패배 원인이 계파 정치에 있다는 진단은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진단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에는 부족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진단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지극히 막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계파 정치를 탈피한 상태의 정치라는 것이 어떤 형태의 정치를 말하는 것인지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계파 정치라는 것은 애당초 청산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계파 정치 청산”을 말로 부르짖는 맥락과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고 실천하는 맥락 사이에 아주 심각한 괴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려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당의 활로가 열린다”는 식의 발언이 누가 누구를 상대로 말하는지에 따라 함의가 달라진다는 점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아래 표를 보자.

이 표에서 D의 경우, 즉 민주당 밖에 있는 학자나 평론가 또는 일반 유권자가 민주당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민주당은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면 특별히 이의를 달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반면에 A의 경우는 어떤가? 얼핏 보면 D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당내 인물이 당 안의 사람들을 상대로 “계파 정치 청산”을 부르짖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누가 누구를 겨냥해서 하는 말인지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조선 시대 인물의 이름을 좀 빌려다 말해 본다. 민주당에 성삼문과 박팽년과 한명회가 있다고 치자. 성삼문이 자기 자신의 지난 행태 또는 같은 계파인 박팽년을 겨냥하여 “계파 정치 청산”을 말한다면,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말로만 끝날 일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또는 자신의 계파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라면 속으로 되새기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있을 때 발설할지언정, 공개적으로 광고를 먼저 할 필요는 별로 없다. 반면에 성삼문이 신숙주를 겨냥하든지,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하는 경우에는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지 않고 바깥으로 공표해야 앞뒤가 맞는 언어 수행이 된다.

바로 여기에 괴리가 있다. “계파 정치 청산”은 말의 표면만 보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신숙주를,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해서 “계파 정치 청산”을 입에 담게 되면, 이러한 언어 수행 자체가 바로 다름 아닌 계파 정치가 되고 만다.

이처럼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표어는 지당한 말씀인 것 같은 공개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상대의 계파 정치를 성토하고 비난함으로써 자기편 계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은밀한 의미가 있다. 위 표에서 B와 C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미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작용한다. 당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안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에 대한 공격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당 안에서 말하는 사람이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밖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리로 들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지난 1일 오전 충남 보령 한화리조트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워크숍에서 오른쪽부터 정동영 , 정대철, 이부영 상임고문, 박병석 국회부의장, 문희상 비대위원장, 박기춘 원내대표, 김동철 비대위원이 묵념을 하고 있다. ⓒ뉴시스

당파든 패거리든 파당이든, 한 민족 차원에서든 민족 내부의 집단 차원에서든, 분파라는 것은 결코 청산될 수가 없다. “계파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를 없애자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계파 정치라는 문구는 자체로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지는 문구가 아니고, 누군가의 정치 행태를 비난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일을 추진하든, 그 과정에서 주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계파 정치”라고 시비를 걸 여지가 활짝 열려 있다. 이 문구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와 같기 때문에, 민주당이 일체의 이익을 초월한 성인들로만 구성되기 전에는 계파 정치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당쟁이 정치 세력들 사이의 건설적인 경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모적인 복수극으로 끝나고 만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파 및 당파 정치를 그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필요를 한사코 외면하다 보니, 상대파를 당파로 비난하면서 자기네 패거리는 당파가 아니라는 자기기만을 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파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가 소모적으로만 치달을 뿐 생산적인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데 있다. 생산적인 경쟁을 도모하려면, 계파 정치 자체를 청산한다는 따위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당의 의사를 결정할 때, 당내에 분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일단 최대한 파악해 보고,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최대공약수를 결집해 낼 수 있는 역량이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 특정한 목소리의 존재 자체에다가 “계파”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게 되면, 영원히 계파들 사이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계파들이 서로 경쟁하는 에너지는 자체로 귀중한 생명력이자 활력소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바로,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욕심들을 에너지원으로 인정한 위에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다가 상쇄되지 않도록 할 길을 찾는 데 있다. 이 길을 찾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단, 계파들의 이익 추구를 나쁜 짓으로 여기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난 다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 들지 말고, 계파 정치의 활력들을 재료로 삼아, 그로부터 최대공약수를 묶어내는 방향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야 소기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직업대표제 – 근대중국의 민주유산, 유용태

직업대표제 근대중국의 민주유산

유용태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1년 08월 10일 출간

직업대표제 근대중국의 민주유산

책소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유용태의 『직업대표제, 근대중국의 민주유산』. 근대중국이 민의기관을 구성하는 방안인 ‘직업대표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정당 중심의 구역대표제를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 가려서 잊혀져온 직업대표제의 경험과 유산을 재현하면서 그를 통해 20세기 중국의 민주주의 모색의 특징을 살펴본다.

저자소개

저자 : 유용태

저자 유용태(柳鏞泰)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와 대학원 동양사학과를 나와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난징대학 박사후연구원과 미국 프린스턴대학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식청년과 농민사회의 혁명: 1920년대 중국 중남부 3성의 비교연구>, <환호 속의 경종: 동아시아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성찰>,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1·2(공저), <중국의 동북공정과 중화주의>(공저), 역서로 <전원시와 광시곡>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

서론: 근대 중국의 민의기관을 보는 시각과 방법
‘진정한 민의기관’의 꿈
연구의 시각과 방법
기존 연구의 비판적 검토

제1부 각계연합에서 직업대표제로

1| 직업의 인식과 직업주의의 대두
직업의 인식과 분류: 노동주의
직업주의의 형성요인과 논리
직업주의의 확립과 정치적 적용

2| 각계연합과 각계민의의 형성
결사구국의 사회심리: 직업단체를 향하여
직업단체의 조직계통과 광역연합
각계연합의 탄생과 발전
각계연합의 민의기관 모색

3| 국민회의 소집론의 형성
의회제혁신론과 직업대표제론의 여론화
직업대표제 국민회의 소집론의 형성
직업대표제의 법제화 시도
민의기관 구성주체의 범위와 비직업단체의 배제

4| 혁명정당과 국민회의운동
중국공산당의 국민회의 소집론
국민당 개조와 쑨원의 국민혁명론
북상선언과 쑨원의 국민회의 구상
국민회의촉성회 전국대표대회

5| 국민회의운동의 재기와 분기
530운동 중의 국민외교운동
관세자주운동과 국민회의운동의 재기
광둥통일 후 광둥의 국민회의운동
북벌 이후 후난의 성민회의운동

제2부 직업대표제의 지속과 변화

1| 직업단체와 국민당의 훈정정치
직업단체의 일반적 실태
직업단체에 대한 국민당의 정책
직업단체의 참정 유형
공산당의 대응과 경쟁

2| 전국적 직업선거와 난징국민회의
난징정부 초기 각계의 국민회의 소집 여론
국민회의 선거를 위한 직업단체의 정비
국민회의 선거: 최초의 전국적 직업선거
국민회의의 주요 결의안과 제안

3| 국민회의에서 국민참정회로
민간사회의 항일민의와 통일정부 수립 요구
민간단체의 국민구국회의 소집 요구
국민당의 국민참정회 구상
국민대회의 연기와 국민참정회의 소집

4| 국민참정회와 전시민주주의
참정회의 인적 구성
참정회의 회의운영
전시민주주의의 조건과 논리
전시민주주의 촉진활동

5| 정치협상회의와 건국민의
국민참정회에서 정치협상회의로
직업단체의 동향과 각계민의의 쟁탈
국민대회를 넘어 신정치협상회의로

6| 각계인민대표회의와 그 이후
각계인민대표회의의 소집
각계인민대표회의의 대표 구성
헌정 실시와 직업대표제의 포기
개혁ㆍ개방 이후 정치개혁과 직업대표제의 부활

결론: 직업단체, 정당 그리고 대의활동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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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직업대표제는 각종 직업의 분화가 진행되고 자율적 사회단체들이 발달한 산업사회 조건에서 추구되는 제도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1920~1930년대 유럽 일부 국가에서 제도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직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20세기 전반의 반식민지 중국에서 직업대표제가 강렬하게 선호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것은 동아시아에서도 중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p.6)

1920년부터 수용된 길드사회주의의 직업관은 관료ㆍ군인ㆍ의원을 직업자 범주에서 제외한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직업관과 일치한다. 가령 「동방잡지」의 양뚜안류(楊端六)와 「해방과 개조」의 장둥쑨(張東蓀)은 의원이 군벌ㆍ관료에게 쉽게 매수되거나 스스로 민의를 배반하는 까닭은 ‘무직업자(無職業者)’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각급 의회 의원과 총통 등은 모두 ‘직(職)’이지 ‘업(業)’이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군인ㆍ관료ㆍ의원을 ‘직업자’의 범주에서 제외하였다.(p.30)

각계 사회단체들은 신해혁명 직전부터 각계연합을 결성하여 합군구국을 위한 민의기관건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일시적 집회와 시위, 지속적 연합체, 사안별 대표회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비록 지역적 범위의 현상이었지만 이윽고 5ㆍ4운동기에 전국적 범위로 확대ㆍ발전되고 그 후에도 사회관행으로 정착되어 지속되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따라서 신해혁명과 5ㆍ4운동을 상호 연관된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 의미를 갖는다. (p.89)

직업대표제 방식의 국민대회 소집론자들 사이에 현직관료와 경찰 및 군인, 그리고 정당을 배제하자는 것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었으나 성의회와 학생회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성의회는 국회처럼 제한선거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신사나 토호의 회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진보적 신청년 사이에 확산되어갔다. 학생회의 포함 여부에 대해서는 보수적 성향의 법단들이 반대한 반면 비교적 진보적인 논자들이나 법단과 경쟁하는 공단들은 5ㆍ4운동을 통해 드러난 학생층의 역할과 혁신적 경향을 인정하고 학생회를 참여시키고자 했다. (p.117)

사회단체의 입법참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홍콩 민주화 과정에서 직업대표제가 도입된 것은 특별한 관심을 끈다. 랴오가이룽의 전인대 개혁안은 1981년 3월 홍콩의 유력잡지 「칠십년대(七十年代)」에 전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직후 홍콩의 민의기관 선거에 직업대표제가 도입되었다.(p.411)

출판사 서평

직업대표제를 통해 본 20세기 중국의 민주주의 모색
이 책은 민의기관을 구성하는 방안의 하나인 직업대표제에 관한 연구서이다. 직업대표제의 주체인 직업단체란 원래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자율적 사회단체로서 정권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20세기 중국의 직업단체는 직업상의 이해를 도모하는 한편 스스로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여 민의기관을 구성해야 비로소 진정한 민의를 대변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실천하였다. 이 책에서는 정당 중심의 구역대표제를 당연시하는 통념에 가려진 그 경험과 유산을 재현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민주주의 모색의 특징과 이것이 개혁·개방 이후 정치개혁에 시사하는 바를 음미해본다.

신해혁명 100주년,
직업대표제를 통해 중국의 민주주의의 모색과
그 유산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한다

‘직업대표제’를 통해 관찰하는 근대 중국의 정치사 
유용태 교수는 근대 중국의 정치사를 다당경쟁의 의회정치를 추구하는 세력과 일당지배의 당치체제를 추구하는 세력의 대결 양상으로 파악한다. 농민협회와 각종 직업단체는 대표를 선출하여 향-현-성의 민의기관을 세우고 그 결정에 따라 각급 정부를 세워서 대안적 정치체제로 삼으려 했음에 주목하면서, 직업대표제에 의한 민의기관 설립 노력과 그 전개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상세하게 다룬다. 그리고 이것이 개혁ㆍ개방시기 중국의 민주화와 탈냉전기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본다.

수많은 사료 발굴로 섬세하게 복원한 현대 중국 정치사의 일면들
청말 단체 결성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국민정부 수립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제1부 ‘각계연합에서 직업대표제로’에서는 ‘각계(各界)’가 형성되고 각계단체의 연합에 의해 각계민의(各界民意)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여 정당이 부재한 조건에서 누가 어떻게 민의결집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5ㆍ4운동기에 제기된 국민회의 소집론의 구조와 특징, 국민혁명시기 북벌과 결합된 국민회의운동의 전개와 지역 차원의 제도화 시도를 검토한다.

직업대표제의 민주적 경험은 어떻게 계승되고 이어지는가
이 책의 제2부 ‘직업대표제의 지속과 변화’에서는 난징국민정부 성립 이후 국민당 일당체제(훈정체제)가 성립, 변화, 붕괴하는 시기를 검토한다. 유용태 교수는 1931년 국민회의 소집의 의미와 역할, 그 경험이 국민참정회 소집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제시하면서 국민참정회를 바탕으로 한 전시민주주의와 그 속에서 훈정체제를 비판하는 광의의 민주파가 국민당 안팎으로 형성되어 여러 당파, 무당파, 각계단체와 연대하는 논리와 계기를 밝힌다. 그리고 그 연대의 경험이 정치협상회의와 연합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국민당 훈정체제가 종식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나아가 그 후 공산당 중심의 연합정부가 성립되어 존속한 시기(1949~1954)와 공산당 일당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1980년대 이래의 시기까지 포함하여 검토함으로써 민국시기의 경험과 유산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1만 사회주의자선언

최종수정일 : 2011.05.18

카페 : [일만 사회주의자 선언] 모임 (cafe.naver.com/wethesocialists.cafe)

1. 활동계획

• 취지

반-MB를 전제로 한 진보정당대통합 국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규모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선언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스스로를 인식하고, 서로의 공간을 터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차원에서 시작됨.

• 목적

– 추상적 목적

* 운동의 대상 : 사회주의에 동감하는 자, 사회주의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개인, 조직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사회주의자로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조직원 등.

* 운동의 매체 : 온라인에서 덧글과 스크랩을 통해 지지서명을 받는다. 오프라인의 경우는 메이데이를 전후로 지지서명을 받는 활동을 전개한다.

* 운동의 방향 : 1차적 목표로써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도록 하고, 2차적 목표는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고 연합하여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마련한다.

1차적 목표 (단기) 사회주의자로써 서로 인식하도록 한다
2차적 목표 (중/장기) 결집/연합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의견을 나누는 공론장을 마련

– 구체적 목적

* 구체적 목적이란 현 단계에서 1차적 목표에 한한다.

* 사회주의자로써 자신 그리고 서로를 인식하도록 하는 수준으로 기획된다.

* 이러한 방식은 서명과 지지의사표명 정도를 통해서 결합될 뿐, 조직 가입이나 정당 가입 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인식한다는 수준에서 지지하느냐는 수준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우리의 활동이 이루어짐으로 이 활동은 홍보 또는 사회주의자의 ‘매체’가 된다는 수준으로 잡도록 한다.

* 숨어있는 사회주의자들, 이에 감성적으로라도 동조하는 개인들에게 접근할 매체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활동은 그러한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다.

http://blog.jinbo.net/wethesocialists

We, the Socialists

  이 선언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조직과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혁을 갈망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인들입니다. 이 선언의 목적은, 합당국면에서 규모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고, 선언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서로의 공간을 터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상의 홍보와 활동을 통해 선언에 동의하는 이들과 함께 다듬어나가며 변혁운동의 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설 공간을 터나가고자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선언 포스팅의 블로그로의 펌글을 통해, 그리고 blog.jinbo.net/wethesocialists의 해당 선언 포스팅에 대한 댓글을 통해 참여를 받고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매주 월요일(3/28)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생활도서관에 모여 선언의 구체적 의미와 방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활동과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원칙’을 삭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 원칙이 진보세력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무엇보다 이를 삭제하는 것이 기층 당원들의 눈높이에 맞춘 처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저런 구실로 사회주의 원칙을 퇴색시키려는 시도들은 단지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현실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어느 곳에서든 우리 자신의 원칙과 노선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현실 정당 내부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유혹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호와 강령을 약간만 완화하고 약간만 타협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협박과 회유에 직면해 있다. 우리들은 변혁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현실 정당과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조직들에서조차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해 어떤 손쉬운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노회한 진보적 어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단지 겉치레에 불과했다. 지난 역사는 ‘진보’라는 저 막연한 관념이 사회주의 원칙을 얼마든지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것을 몸소 실증해 주었다. 사회주의를 말하는 여러 조직 역시도 의회정치의 의제에 끌려 다니면서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환상은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말할 것이다.

 

‘진보’니 ‘통합’이니 하는 저 막연한 이름으로 우리가 견지하는 원칙들에 더 많은 힘이 실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 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공공연하게 말하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어디에서든 가르치자. 현재 운동이나 정당의 규모가 작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것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이 진실이 어느 곳에서도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란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치적 권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우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가 시혜의 대상이나 선심성 정책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라는 사실을 무조건적으로 단언할 것이다. 복지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 행복 추구권, 그리고 사회적 국가를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복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소수 기술관료들이나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의 즉흥적인 판단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복지는 무엇보다 예산주권의 문제이다. 이제라도 사태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육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 등에 관해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들이 한다. 이에 관한 ‘정치적 책임’은 당신들, 예산을 멋대로 주무르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져야 한다.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우선 배분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 예산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각종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같은) 소꿉놀이를 하라. 무엇보다 복지의 혜택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부자이든 빈자이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돌아가게 하라. 우리는 ‘보편적’ 무상급식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제 복지에 관해서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인지에 관한 모욕적인 판단을 국가와 관료들이 내리는 시대는 끝났다. 복지는 이 사회의 시민 구성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랑스러운 권리이다. 국가와 관료의 책임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두 번째, 노동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은 여전히 명목상의 문구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다 노동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노동권이 단순히 몇몇 소외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권리라는 사실을 단언할 것이다. 우선 차별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조의 자유로운 결성을 방해하는 저 흔한 폭력적인 시도들은 그 정의상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철거민들에게 용역폭력을 동원하는 자본가들을 구속하라!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들로 하여금 임금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라. 근로조건에 관한 그들 자신의 요구는 노동의 분할(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을 강제하는 자본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허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도’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한가한 ‘걱정’을 공유하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저임금이 아닌 ‘생활임금’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가 이룩한 문명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최저한’의 임금은 바로 그러한 권리를 척도로 산정되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들은 모두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한다. 우선적으로 공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오늘날 의무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수많은 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라. 공교육 내부의 경쟁과 폭력에 시달렸던 수많은 학생들이 ‘대안학교’를 찾아 전전하는 불행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교육 자체가 그들에게 ‘대안’을 제공하도록 요구하자. 그것이 국가가 응당 져야 할 책임이다. 학력 신장을 명목으로 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흔한 사적 폭력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라. 학교는 시민 양성소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시민적 권리를 우선적으로 교육하라! 무엇보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공교육을 넘어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에 강력히 동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대학생들은 이제 ‘대학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 캠퍼스를 화려하게 꾸미고 값비싼 상점들을 학내에 들이며 등록금을 인상하는 저 술책들에 더 이상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과 자본이 상아탑 위에 쌓아올린 이윤은 우리들에게 외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대학이든 비명문 대학이든 그들이 쌓아올린 이윤은 단지 이 땅의 파행적인 학벌제도와 차별적인 노동시장 구조를 이용하여 갈취한 지대(rent)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위선적인 소수의 명문대학들은 명문대학으로서의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선전하는 저 역겨운 행위를 통해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이 단순히 시장에서 제공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반증해 주었다. 대학은 자본이 아닌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라! 그리고 대학은 그들이 갈취한 이윤을 학내 구성원들, 학생들, 노동자들 모두에게 되돌려라!

 

네 번째,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청년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재생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며, 그들의 사회적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느 정치적 세력도 청년들을 단순한 ‘동원’의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 청년들 사이에서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현실인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들이 청년에게 요구되는 ‘패기’와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공간을 점유해왔던 기성세대 자신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위선적인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적 참여할 것을 훈계하는 짓은 중단되어야 한다. 시위와 집회에 나가고 투표를 하는 등의 사회적 참여의 진정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결정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무한정 유예된 사회적 독립과 독자적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각자의 사적영역 속에서 자기계발과 노동에 매진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대의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라. 그들이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 등의 사회적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 이상 부모가 그들을 무한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질 때,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과 더불어 그들의 제반 권리를 위해 투쟁의 당위성이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거리에 나서는 유럽의 청년들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각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라.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진보니 뭐니 하는 공허한 정치적 미사여구에 속지 않을 것이며, 청년들을 본연의 사회적 주체로 진지하게 인정하는 정치세력들만을 진지한 연대의 상대로 고려할 것이다.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라는 대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는 ‘조직’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 양자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 동안 진보적 이념을 내세우는 각종 조직과 정치세력들은 그들을 떠받쳐 왔던 개개인들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등한시 해 왔다. 조직들이 진보적 개인들을 추수하기에 급급한 상황 속에서, 반대로 진보적 개인들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빠져들었다. 지난날 촛불시위는 과거의 조직들에 절망한 개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최후의 시도였다. 촛불시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의 자발적인 내면과 의식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반대로 각 조직들은 조직의 재생산이라는 장벽에 부딪히며 대중 동원능력을 급격히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이 하나 둘 의회전술과 진보 대연합이라는 유혹에 굴복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직들은 자신의 책임과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상황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문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과 정파를 떠나, 우리들은 진보적 이념을 내거는 각 정치세력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할 것이다. 진보대연합이나 각종 선거공학에 기초한 망상들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앞서 말한 사회주의적 원칙을 분명하게 내거는 세력들만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대중들에게 진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자. 조직들로 하여금 그들이 할 일을 하도록,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혹자는 이념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대해, 이념을 분명히 함으로써만 비로소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말로 대답할 것이다. 지금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 사회가 재생산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공통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계급 사회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공통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연한 위기의식과 당혹스러운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념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서 당당하게 선언하자. 혹자가 말했듯이,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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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자유주의와 사민주의에 대한 비판, 남종석

사민주의, 정치계급으로 재탄생!
중도좌파 정책 비판 ①

By   /   2012년 9월 27일, 3:27 PM  2개의 댓글

* 남종석씨가 기든스의 [노동의 미래]를 지렛대로 하여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민주의에 대한 비판 글을 보내왔다. 상당히 긴 글이다. 그래서 3번에 나누어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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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을 삼켜버린 ‘권력에의 의지’

언젠가 나는 레디앙을 통해 진보적 자유주의를 비판한 바가 있다(자유주의자는 망각을 먹고 사는가). 오늘날 진보적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이 이 비판의 요지였다. 앞의 글에서 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사민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 받아들인 사민주의는 이미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사민주의’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레디앙 독자들도 알겠지만 내가 굳이 최태욱 선생 등의 공저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를 비판한 이유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구별정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성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사회주의, 운동권’을 진보진영 내부에서 주변화 시키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민중운동을 자유주의에 종속시키려는 주요한 흐름이라 판단해서 비판한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책임정치’를 강조한다. 이들은 진보진영도 권력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국민에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제대로 된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중운동이 제도권 밖에 남아 있거나 고작 몇 명의 의원으로 비판만 하는 것은 신념윤리에 얽매인 퇴행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의회’ 만이 책임정치의 공간이며 그 외의 모든 장들은 의회 정치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민중운동을 자유주의에 종속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는 비단 민주당으로 들어간 진보진영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통진당의 건설과정 또한 이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통진당 구당권파가 국참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던 배경에는 민주당과의 연정구성과 집권경험을 축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후퇴시켰고, 자유주의자들의 의제를 기꺼이 수용했으며, 민주당의 어젠다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통합연대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통합연대를 하나의 흐름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통합연대를 주도한 한 축은 분명 ‘책임정치’를 가장한 진보진영의 자유주의화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권력을 잡아야만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 ‘과도한 책임의식’은 혁신이라는 명목으로 주류 문화의 가치를 수용하고,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에 목을 매며 진보의 퇴행에 앞장섰다.

물론 통진당의 파국에서 보듯이 ‘진보진영의 주류화’는 꼴사나운 형상으로 끝을 맺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로 똘똘 뭉친 책임정치의 주체들은, 상호간의 이전투구 속에 스스로 몰락해 갔으며 시계 제로인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이는 진보진영 전체의 상황이기도 하다.

권력을 잡아야만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는 비단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좌파의 몰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사민주의는 거의 모두 ‘권력장악과 책임정치’의 논리를 정당화 한다. 미국 좌파의 꿈을 단숨에 날려버린 클린턴의 배신과 오바마의 부시화, 영국 신노동당의 노선, 슈레더와 독일 녹색당의 전환은 모두 ‘책임윤리’ 속에 실현된 일련의 자유주의화였던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노동의 미래](을유문화사, 2009)에서 진보적 자유주의가 사민주의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67쪽) [제 3의 길]을 통해 블레어의 스승임을 확인시켜준 그는, [노동의 미래]에서 신노동당 집권 2기에 필요한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사민주의는 왜 미국 민주당식 진보적 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가를 솔직 담백하게 밝힌다.

물론 [노동의 미래]를 살펴보는 것은 사민주의의 현대적 변화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신노동당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성이란 무엇인가’를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동의 미래]는 정치, 경제, 행정, 복지 전 분야에 걸친 신노동당의 정책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의 미래]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중도좌파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미래]는 노동자들의 미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책의 원제목은 [신노동당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이다. 한글 제목은 번역자나 출판사에서 상업적 목적을 위해 변형해서 붙인 듯하다. [노동의 미래]에 나타난 중도좌파의 정책적 지향점은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치적으로 ‘정치계급의 일자리 안정화’임을 보이고자 한다.

신노동당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 ‘진보적 자유주의’

[노동의 미래]는 신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재비판 하면서 시작한다. 기든스에 따르면 좌파들은 편협함으로 인해 신노동당의 성과를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역사를 망각한다고 비판한다. 좌파들이 편협하다는 것은, 비단 영국 노동당만이 아니라 유럽 사민주의 정당 대부분이 근본적으로 신노동당과 다르지 않게 변하고 있는데 ‘왜 영국 노동당만 그렇다고 시비거냐’는 것이다.(23쪽)

맞는 말이다. 다들 변했다. 독일 사민당은 ‘기업의 자율적 결정’을 옹호한다고 선언했고, 네덜란드는 노동유연성을 통해 노동의 양보를 이끌어 냈다. 조스팽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노동일을 줄인 것이 아니라 노동년을 줄인 것이다. 노동의 신축성을 압도적으로 높이면서 실행된 노동시간 줄이기인 셈이다.(25쪽) 노동년과 노동일도 구분하지 못하고 노동시간 줄이는 게 진보라고 떠들고 있는 ‘진보신당의 논객들’이 새겨들을 이야기다.

기든스는 좌파의 지적 게으름도 지적한다. 노동비용을 줄여야만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좌파의 ‘지적 게으름’이다. 1500만명에 달하는 EU의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저임금화 말고 다른 대안이 없다.

저임금화를 통한 실업해소, 이것이야말로 클린턴식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다. 기든스는 클린턴식 경제 정책을 EU가 도입해야만 현재의 정체상태를 벗어난다고 주장한다.(30쪽) 미국 연준이 EU 중앙은행보다 진보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든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경제체제로서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평만 하고 있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33쪽) 대안을 제시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책임 있는 세력이다. 이 문제제기를 한국 정치 상황에 연결시켜 보자. 민주당과의 연정을 주장하는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운동권들은 ‘신념윤리’만 내세우지 어떤 ‘책임정치’를 실현하는가?” 책임정치를 실현하려면 권력에 참여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답도 간단하다. 중도파로의 전향이다. 그는 국민들의 의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들을 중도적이라고 본다. 미국은 42%가, 영국은 50%가 스스로를 중도라고 한다.(36쪽) 이들 표를 잡기 위해 중도로 전환하는 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는가?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라! 대중은 중도다. 좌파도 중도로 구조조정 하지 않고 무슨 집권을 하겠다는 것인가?

중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장악해야 한다. 대중의 선호를 만들 수 있는 수단은 이미지 정치 말고 없기 때문이다.

대중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파적 이해관계, 특정한 계급적 입장만이 아니라 중도 세력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신노동당은 ‘분파주의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국민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66족) 여기서 분파주의적 이해관계란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이다.

신노동당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신민주당 노선인 진보적 자유주의다. 루즈벨트 이후 미국 민주당의 노선은 케인즈주의적 관리국가 체제의 유지였다. 클린턴은 이를 효율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기든스는 신노동당은 미국 민주당의 새로운 분파인 ‘민주주의 리더십 위원회’(이 책에서는 ‘민주주의 리더십 회의’로 번역되어 있다.)의 이데올로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그대로 인용하겠다.

“주류 정당이 되기로 결심한 것; 세금과 지출에서 후퇴하는 것; 기회, 책임과 커뮤니티를 강조하는 것; 내주기보다 끌어올리는 것, 즉 복지에서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것;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할 것;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세금 감면; 구체적인 대상을 갖는 반빈곤 정책; 범죄와 처벌에 대한 강력한 대처”(71쪽)

기든스는 신민주당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새로운 사민주의가 지향해야할 지표라고 주장한다. 집권을 위한 중도전략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이 ‘주류정당이 되기 위한 자기선언’ 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이 관점에서는 권력을 잡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1980년대 후반 영국 노동당에서 좌파를 척결시킨 논리가 바로 ‘권력 장악을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신노동당의 정책방향이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도 주목하자.(80쪽) 이는 독일 녹색당도 똑같이 강조하는 것이다. 기회의 균등은 재분배를 강조하는 결과의 평등에 대한 대안이다. 우리는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이라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안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지는 것이다.

기회의 균등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83쪽) 오늘날 모든 사민주의자들은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지식-정보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스스로의 인적 자원을 길러야만 능력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교육은 블레어가 나팔을 불었던 분야이다. 오바마가 한국 교육을 칭찬하며 떠들고 있는 것도 이 부분이다. 룰라가 빈민가족들에게 공적 부조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내세운 ‘아이들 학교 출석’도 이런 논리의 연장이다.

기회균등과 교육의 강조는 국가는 개인들에게 기회균등만 제공하고 개인의 삶의 문제는 개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재확인 하는 것이다.(79쪽) 신노동당이 내세우는 새로운 사민주의는 집권을 위해 자유주의를 수용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서구 사민주의를 수용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표준적 준거가 된 것이 바로 자유주의로 전향한 서구 사민주의였던 것이다.

언젠가 미국의 생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신좌파 평론] 편집위원이기도 한 마이크 데이비스는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옹호하다]에서, 기든스가 인용하고 있는 ‘민주주의 리더십 위원회’를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 진보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화당의 트로이목마라고 했다.

미국 민주당 내부의 가장 반동적인 분파들이 모여 있는 의원단 회의가 ‘민주주의 리더십 위원회’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기든스가 옹호하는 신노동당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있다. 원래 미국 민주당이 중도좌파인데 민주주의 리더십 위원회는 더 우파 지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기든스의 주장에는 솔직함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기든스의 주장은 간단하다. 신노동당 정권은 과세의 신화에 빠져서는 안 되며, 기업 활동을 더 촉진시키기 위해 세금 감면을 단행해야 한다.(82쪽) 재정정책은 근본적으로 균형재정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지출의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42쪽) 지출구조 변화의 핵심적인 요소는 복지의 개혁이다. 복지는 특정한 타켓과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44쪽) 노동시장은 유연해야 하며, 시장 상황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일자리가 확대될 수 있다.(49쪽)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기업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해야 하고, 정부는 긴축재정을 단행해야 한다. 복지는 자조 능력이 부족한 잔여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토대를 둔 경직된 노동시장은 경쟁력이 없으며 조직 노동의 이익만 대변할 뿐 신규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 비정규직 저임금화가 현재의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는 기든스의 주장을 간단히 기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에는 솔직함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노동당이 중도파로 전향한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계급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보편적 이해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더불어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는 ‘저임금’이 필요하며, 개인 책임이 복지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그가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의 신축성을 축복하고, 금융적 축적체제를 승인하며, 균형재정의 원칙에 충직하다. 한은 독립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관리를 최고의 경제정책으로 본다는 점을 시사한다. 국가 경영의 최고 목표를 행정효율성에 두겠다는 사고도 변함이 없다. 간단하게 말해 기든스가 신노동당의 미래로 선언한 내용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반대하지 않는다.

기든스는 자신의 지향점이 친시장 노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재정 긴축을 위해서는 세금이 감면되어야 하며 보편적 복지는 ‘당연히 포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저임금 직종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최저임금을 높여 노동층이 극빈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하며 최저임금이 높아져야만 복지의존층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며 보편적 복지도 공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영미식 경제체제(금융화와 노동신축성)와 스웨덴식 복지체제(보편적 복지)가 공존할 수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재벌해체와 같은 경제민주화도 주장하고 무상복지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의 실질임금도 상승시키고, 복지도 확대하며, 균형재정도 달성하고 주식시장도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쯤 되면 한국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의 말대로만 되면, 만능엔터테이너임을 부정할 수 없겠다. 우리는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그들은 양극화로 인해 고통 받는 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를 말하며 실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 강화할 것이다. 만약 한국 진보주의자들이 진짜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이는 한국 사회에 파국만을 낳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하면서 보편적 복지를 추진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와 같이 파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평가절하를 통해 시장 경쟁력을 상승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재정적자가 유지됨으로써 정부파산으로 나아간 대표적 사례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경쟁력 개선 없이 지출만 늘인 결과이다. 한국 진보주의자들이 그들의 약속대로 한다면 정부가 더 빨리 파산할 것이다.

차라리 기든스처럼 솔직한 것이 미덕이다. 우리는 집권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념적으로 중도가 되어야 한다. 중도가 된다는 것은 자유주의화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 책임을 강조한다.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저임금화가 필요하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복지의 축소도 필요하다. 복지는 최빈층을 대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정말 깔끔하지 않은가?

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복지 포퓰리즘을 실행함으로써 국가 파산의 길로 나아가기보다 노무현식 인민주의로 퇴행할 것이라 확신한다. 왼쪽 깜박이 켜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마술을 다시 반복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과 연정을 꿈꾸는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계속>

http://www.redian.org/archive/42529

네트워크 정치

시민 네트워크 정치로의 가능성과 한계,  안병진 , 한국사회과학연구소, 동향과전망 85,  2012.6, 7-49

시민_네트워크_정치로의_가능성과_한계 [PDF File]

 

안병진, “네트워크 정치 시대” (중앙일보 2012.1.17)

네트워크 정치 시대

스티브 잡스는 비록 지난해 사망했지만 올해 대한민국은 그의 해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 정치에도 네트워크 정치의 패러다임이 초보적으로나마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아이패드 등을 통해 기존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수직적인 패러다임을 넘어 개방·공유·협업의 시대를 열었다. 이번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는 여의도 정당이나 지역 정당이 아니라 전국 지지자 네트워크에로의 개방을 통해 ‘스티브 잡스 모델’에 한 발 더 다가갔다.

물론 민주당은 지난 2002년 예비경선을 통해 개방적 모델로의 실험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일회적 실험은 여전히 정당과 외부 네트워크의 경계가 고정적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등을 통한 전통적 미디어 엘리트가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면서 돈이 많이 드는 ‘청중 민주주의’ 단계에 불과했다. 반면에 이번 실험은 정당과 외부의 굳은 경계를 유동화시켜 정당이 일상적으로 시민의 온/오프 숲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역사적 시도다. 무엇보다 미디어 엘리트들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의 시민들이 다양한 책임과 기부를 동원하는 네트워크 정치 시대로 한 발 진전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여기서 ‘겨우 한 발 진전’이라는 평가는 민주통합당 관계자들에게 혹시 서운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네트워크 정치의 진정한 잠재력은 단지 개방이 아니라 공유와 협업에 있다. 필자는 2002년에 ‘리눅스의 정치’(개방적 네트워크에서의 집단지성 혁신) 패러다임을 제시한 이후 슈퍼스타K 방식의 경선, 온/오프 융합의 21세기 타운홀 미팅 등 다양한 혁신을 여야에 요구해 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시민 온/오프 네트워크와 공유·협업을 통해 더 진화된 정치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당들은 올해를 대대적인 혁신과 경쟁의 해로 삼아야 한다. 그 핵심은 소수 활동가 정당이나 청중 민주주의 시대를 넘어 네트워크 정치 시대를 둘러싼 혁신의 경쟁이다. 갤럭시탭과 아이패드가 혁신 경쟁을 하듯이 박근혜와 한명숙 대표는 이제 본격적 경쟁의 시험대에 올랐다. 총선 공천, 정책 어젠다, 대선 경선에서 누가 더 스티브 잡스의 매력적 혁신에 다가가는지가 승부의 결정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일각의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네트워크 정치의 시대는 곧 직접민주주의나 비전문가만의 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의사를 해석하고 적절히 대표하는 대의제와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열린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융합되어야 한다. 미시적 분야의 정책 전문가와 폭넓은 집단지성의 지혜는 복합적 네트워크 속에 서로 수렴되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 두 가지를 멋지게 융합한 중용의 대가다. 향후 10년은 이 균형을 이루어내는 정치인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식 개방·공유·협업의 정치와 경제를 누가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http://ipm.hallym.ac.kr/column/1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