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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민중 권력은 곧 지방 자치 권력

중앙 정치 진출? 지방 자치 선거가 혁명의 시작!

[장석준의 ‘적록 서재’]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장석준 진보신당 부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12 오후 6:21:22

1960년대 초라면 아직 ‘환경 문제’라는 말조차 낯설 때다. 환경 오염을 고발한 선구적 저작이라고 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김은형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이 처음 나온 게 1962년이다. 산업 문명과 지구생태계 사이의 모순을 의제에 올려놓은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김병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는 그로부터 10년 더 뒤인 1972년에야 발표된다.

그런데 <침묵의 봄>이 출간되기 몇 달 전에 이미 환경 문제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산물임을 밝힌 책(<Our Synthetic Environment>)을 낸 사람이 있다. 미국의 좌파 사상가이자 운동가인 머레이 북친(1921~2006년)이 그 사람이다.

북친은 흔히 사회 생태론(social ecology)의 창시자로 기억된다. 199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도 생태주의 사상의 여러 흐름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통로 역할을 한 국역본 개론서들이 항상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소개한 인물이 북친, 이 사람이다.

그는 경제 위기는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이 되어버린 듯한 전후 자본주의에 생태 위기라는 새로운, 더욱 심각한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한 명이다. 또 그는 처음부터 이 위기의 근본 원인을 자본주의 지배 질서에서 찾고 따라서 그 해결책은 원시로의 회귀나 개인적 웰빙 따위가 아니라 사회 변혁임을 한 평생 고집스레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에 그 자신이 붙인 이름이 ‘사회 생태론’이다.

이런 북친의 사회 생태론을 개론서의 한 단락이 아니라 그 자신의 필치로 접할 수 있는 책들이 몇 권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책 <사회 생태주의란 무엇인가>(박홍규 옮김, 1998년)와 <휴머니즘의 옹호>(구승회 옮김, 2002년)와 작고한 문순홍이 옮긴 <사회 생태론의 철학>(솔 펴냄, 1997년)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 상태다.

이런 차에 작년에 북친의 글 네 편을 모은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펴냄)라는 책이 나왔다. 비록 큼지막한 활자에 200쪽 분량의 짧은 책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조우가 아닐 수 없다.

80년 좌파 여정의 결론, 코뮌주의(communalism)

▲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머레이 북친 지음, 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짤막한 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친 사상의 전모를 접하기에는 썩 괜찮은 선집이다. 선정된 글 네 편이 북친 사상의 주된 주제들을 빈 틈 없이 포괄하고 있어서 한 권의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가령 첫 글 “사회적 생태론이란 무엇인가?”는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은 다름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뿌리를 두고”(47쪽) 있으며 그러한 지배의 핵심은 “(부계 중심 사회 등장 이후의-인용자) 위계적 문화와 (자본주의의-인용자) 계급 관계”(18쪽)라는 북친 생태주의의 핵심 명제를 명쾌히 전달한다. 또 세 번째 글 “반동의 시대, 사회적 생태론의 과제“는 만년의 치열한 과제였던 ‘반계몽주의적’ 생태주의 비판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책을 꼼꼼히 살펴본 독자라면 반드시 궁금하게 여길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한글 제목에 나와 있는 ‘코뮌주의’라는 말이다. 많은 좌파 서적들에서 ‘코뮌주의’는 이제껏 ‘공산주의’로 번역되어온 ‘communism’이라는 단어의 음차 표기다. ‘공산(共産)주의’라는 전통적 번역어가 성에 안 차는 이들이 보통 이런 해결 방안을 찾곤 한다(어의를 잘 전달하기로는 차라리 ‘공생[共生]주의’가 낫지 않을까).

하지만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의 원서 제목은 <Social Ecology and Communalism>이다. ‘communism’이 아니라 ‘communalism’이다. 사전에서 ‘communalism’을 찾아보면, “지방 자치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공동체주의”로 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이 말이 반동적인 힌두교 근본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북친은 ‘사회적 생태론’과 함께 이것을 자기 사상의 표어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말 역자는 이를 ‘코뮌주의’라 옮겼다.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용어 사용의 정치학이다. 옮긴이가 역어를 잘못 선택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미국 좌파, 아니 전 세계 좌파의 고뇌를 오롯이 안은 북친의 80 평생에 걸친 여정의 결론이다. 이 여정을 이해해야만 그가 왜 사회주의, 아나키즘 같은 전통적 용어가 아니라 굳이 ‘communalism’을, 그것도 ‘communism’을 대신해서 ‘communalism’이라는 낯선 단어를 선택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북친의 조부모는 본래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사회주의혁명당 당원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은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던 사회민주노동당(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뉜다)과는 달리 일종의 농민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이 당에서 활동하던 북친의 조부모는 1905년 혁명이 실패하자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런 가족사 때문인지 북친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회주의자 중 한 명으로 마리아 스피리도노바를 들곤 한다(114쪽). 그녀는 10월 혁명 당시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를 이끌고 볼셰비키당과 함께 연립 정부 형태의 첫 혁명 정권을 수립한 여성 혁명가다.

북친 자신의 정치 이력은 미국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 가담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막 10대에 접어들 무렵 미국은 대공황 와중에 있었고 이때는 공산당이야말로 노동 계급의 희망으로 보였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는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돌아섰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정통 트로츠키주의로부터도 벗어나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라는 소그룹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북친은 점차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한창 사회적 생태론을 개척하던 1960~70년대에 그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다.

하지만 북친은 아나키즘에서도 영원한 안식처를 찾지는 못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만큼이나 아나키즘에서도 19세기 좌파 사상이 갖는 한계와 편향들을 보았고, 더구나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득세한 ‘개인’ 중심적 아나키즘 또한 그의 실망을 부추겼다. 그래서 만년의 그가 도달한 정식이 곧 ‘communalism’이다. commune, 즉 위계제와 계급을 극복한 자치 공동체들로 이뤄진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념의 전통적인 표현은 ‘communism’이지만, 바로 이 말을 내세웠던 정당들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북친은 ‘communalism’이라는 대체어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게 이치에 맞기도 하다. ‘사회의 자기 통치 이념’이 social-ism(사회주의)이니 ‘코뮌의 이상’은 communal-ism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 역자가 이를 ‘코뮌주의’라 옮긴 것도 이해가 간다. 아무튼 이 communalism=코뮌주의는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아나키즘을 두루 거친 20세기의 한 치열한 좌파 사상가·운동가가 도달한 총결산이다.

민중 권력은 곧 지방 자치 권력

북친 자신은 ‘코뮌주의’의 두 축이 “변증법적 자연주의”와 “리버테리언 지역 자치주의”라고 정리한다(144쪽). 또 낯선 말이 나왔다, ‘리버테리언 지역 자치주의(libertarian municipalism)’. ‘libertarian’ 역시 번역하기 힘든 단어 중 하나다. 멋은 없어도 내용 위주로 풀면 ‘자유 지상주의’쯤 되겠다.

보통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시장 지상주의자들을 이런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좌파에서도 ‘리버테리언’을 자처하는 이들이 꽤 있다. 삶의 자율성 회복을 강조하는 아나키스트들이나 생태 사회주의자들 중에 이런 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북친도 그 중 한 명이다.

‘리버테리언 지방 자치’란 한 마디로 도시 단위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북친에 따르면, 민중 자치를 통해서만 뿌리 깊은 위계제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치체가 생산 수단을 통제해야 한다. 북친은 이런 자치체가 미래 사회의 세포인 코뮌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국민 국가 대신 이런 코뮌들의 연방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질서 아래서만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실현될 것이다.

“‘자유로운 자연’이 확보되려면 도시들이 탈중심화되어 주변 자연 환경에 최적화된 공동체들의 연방으로 바뀌어야 한다. 상보성의 윤리에 따라, 각종 친환경 기술은 물론이고, 태양, 풍력메탄과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들, 유기농 그리고 인간적 규모로 설계되고 연방 공동체들의 지역적 수요에 맞게 설계된 다용도 산업 시설 등, 이런 여러 가지가 생태적으로 건강한 세계를 형성하는 데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 그러면 비정한 노동은 창조적 노동으로 바뀔 것이다. 기계화된 생산보다는 예술공예가의 정신과 작업이 활성화될 것이고, 자유 시간이 확보되어 누구나 예술 활동을 할 여유, 공동체의 일에 족히 참여할 여유가 생길 것이다.” (60~61쪽)

너무 이상적인가? 하지만 북친은 역사 속에 이미 선례들이 있다고 한다. 아테네 민주주의도 있고, 미국 독립 혁명의 기반이던 마을 회의(town meetings)도 있으며,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리 민중의 자치 조직이던 구(區, ‘섹시옹(sections)’) 위원회도 있다.

북친은 더 나아가 근대 초기 유럽 역사를 재해석한다. 이 무렵 자치 도시의 전통이 국민 국가 건설 흐름과 경합하다가 후자가 승리해 현재의 정치 질서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북친은 이제 전자가 다시 부활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구상이다. 북친의 자치 도시는 표트르 크로포트킨이나 윌리엄 모리스가 이상으로 생각한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한 전원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직접 민주주의의 강조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하다. 또 불평등을 줄이고 생태 문제를 해결하려면 생활을 영위하는 기본 단위들을 축소해야 한다는 에른스트 슈마허의 문제 의식(“작은 것이 아름답다”)과도 만나는 데가 있다.

그런가 하면 길드 민주주의(산업 현장)와 코뮌 민주주의(지역 현장)의 이원 체계를 주장한 G. D. H. 콜의 길드 사회주의 구상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북친의 경우는 길드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코뮌 민주주의 쪽을 보다 강조했다고 하겠다. 비슷하게 마이클 앨버트의 참여 경제 구상과 견주어 봐도 생각이 통하는 데가 많다.

이러한 북친의 대안은 곧 그의 독특한 변혁 전략으로 이어진다. 그는 지방자치단체 단위의 정치적 실천과 대중 운동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새로운 주 무대라고 말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프롤레타리아 급진주의의 중심지가 공장이었다면, 생태 운동의 중심지는 마을, 타운, 자치체 등의 공동체다.” (76쪽)

그러면서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이밀기보다는 지방의 정치적 반란에 앞장설 것을 제안한다.

“코뮌주의자들은 지방 자치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당선되고 나면 그 직위가 허용하는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합법적으로 민회를 만들어내고, 민회들로 하여금 결국 효과적 형태의 마을회의 정부를 만들 수 있는 권력을 갖도록 한다. (…) 이러한 의식을 갖고 지방 자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역자치에 기초한 연방의 건설이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리버테리언의 전망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국가 기구의 대표로 선출되려는 수정 사회주의자들의 시도와는 다르다.” (173쪽)

지방으로부터 중앙을 포위한다? 너무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북친만의 생각은 아니다. 북친보다 더 도발적인 어조로 지역발(發)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반란의 조짐>(성귀수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라는 혁명 선언을 낸 프랑스 아나키스트 그룹 ‘보이지 않는 위원회’가 그들이다. 이들은 국민 국가뿐만 아니라 혁명 역시 이제 더는 중앙 집권화될 수 없다며, 지방의 봉기들로부터 출발해 중앙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혁명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뭔가 시대정신의 풍향을 알리는 공통점이 감지된다. 결코 쉽게 무시해버릴 수 없는 불온한 바람의 조짐. 반자본주의적 생태주의의 선구자 머레이 북친은 21세기의 우리에게 폭탄 같은 한 무더기의 메시지들을 던지고 간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들을 해독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