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사회이론

“한국 사회학자들 학술활동 – 대중화 모두 실패”

“한국 사회학자들 학술활동 – 대중화 모두 실패”

기사입력 2012-01-27 03:00:00 기사수정 2012-01-27 03:00:00

■ 지주형 서강대 연구교수 발표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왜 권위 있는 진단을 내놓지 못할까. 이는 사회학자들이 전문적인 학술활동과 지식의 대중화 모두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자성이 학계 내부에서 나왔다.

지주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사진)는 논문 ‘학술장의 정치경제와 지식체제-한국 사회학과 영국 사회학 비교’에서 한국의 사회학계가 학술적 역량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화할 지식도 없다고 진단했다. 지 교수는 이 논문을 27일 연구소와 비판사회학회, 경남발전연구원 주최로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워크숍 ‘새로운 시대정신과 진보개혁 정치’에서 발표한다.

지 교수는 사회학계가 학술적 역량을 구축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새롭게 생산된 지식에 대한 논쟁과 토론 부족’을 꼽았다. 영국 등 서구에서는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학자들이 미리 열람하고 논평함으로써 공표되기 전의 최신 지식을 습득하고 학계의 엄선된 지식을 합산하는 과정을 거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학자들이 혼자서만 연구하는 ‘독백’ 같은 논문만 생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서구 학자들의 논문이나 서적의 감사 글에는 수많은 학자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국내 학자들의 저작물엔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자, 대학원생이 등장할 뿐이라고 지 교수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논평과 토론의 부족은 학술대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지정 토론자가 없으면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한’ 학술대회 문화를 낳았다고 지 교수는 꼬집었다. 또 한국 사회학계의 이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지는 지식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된 이론을 풀어쓰는 수준에 머문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가 한국과 영국의 사회학계를 비교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사회학계가 국가나 자본에 의해 규율되는 측면이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 교수는 결론적으로 “영국에서는 학술의 장에서 전문지식, 학술적 권위 등을 성공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기초로 사회학이 대중화될 수 있었던 반면에 한국에서는 학술의 장에서 학술적 권위를 획득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대중화 또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런 현상은 비단 사회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철학이나 정치학 등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서 나타나는 학문적 병폐”라고 지적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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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녹아내린다! – ‘투게더’ 함께 읽기

세계가 녹아내린다! 대안은 ‘어게인 박정희’?

[협동조합, 장인에게 배우자] <투게더> 함께 읽기

기사입력 2013-06-07 오후 6:52:59

 

지난 1일 사상 최초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프레시안>은, 5월 사전 조합원 신청을 받으면서 “새로운 언론을 꿈꾸는 독자, 필자, 노동자가 협동조합 프레시안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 대안을 찾기 어려운 한국 언론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우려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성역 없는 비판을 위해 언론사는 기업이나 권력은 물론이고 독자로부터도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언론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이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자. ‘함께 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과정을 보장하고 좋은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속시켜 온 개인의 고립과 단련은 어떤 의미에서는 편의와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함께하기’의 ‘기반’은 물론이고 ‘기술’까지 퇴화하고 있다면? 오랜 역사로 쌓아 올려진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개인주의와 경쟁의 영향으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면?


현대사회의 개인 속에 ‘함께하기’의 인자가 사라지고 있음을 우려한 미국 사회학계의 거장 리처드 세넷(뉴욕대·런던 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은 위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를 써냈다. 세넷은 수년 전부터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이 개인적인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탐구해 왔는데 이 가운데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두 번째 책이 <투게더>다. 이 책에서 그는 ‘협력’을 일을 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로 파악하고 중세의 길드에서 근대의 작업장, 현대의 구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파고들었다.

<투게더>를 관통하는 고민은, 이미 ‘사회적인 것’을 쌓아올렸다가 무너지게 만든 역사 위에서 어떻게 다시 그것을 ‘재구성’ 하느냐다. 한때 저자를 사로잡았던 68혁명의 반문화 전통과 그 세대가 일구어낸 관료제의 해체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실현된 세계 속에서 악몽처럼 뒤틀린 채 재현되고 있는”(김홍중, <투게더> 11쪽, ‘함께 읽기’)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렇다면 21세기 우리가 교훈을 가지고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를 묻는다.

세넷이 탐구하고 있는 사례는 기본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작업장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했다면 그 역사와 결이 다르기에, 그가 찾는 결론 역시 다르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정혜윤(CBS 라디오 PD·<삶을 바꾸는 책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등의 저자)과 함께 진행하는 월례 북 토크쇼인 ‘우리 더 잘 살아요'(☞최근 행사 안내 바로 가기) 4월 행사에서 <투게더>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투게더> 한국어판의 해설을 쓴 김홍중(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마음의 사회학> 저자),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등에서 교육 활동을 해 온 장석준(현 진보신당 부대표)이 ‘함께 읽기’ 가이드에 나섰다.

다음은 지난 4월 29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진행된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협동조합이라는 형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협동조합이 원형으로 지향하는 바이자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사회적인 것’의 발명과 몰락,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거기엔 시시각각으로 발전해 가는 과학 기술과 협력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두 가지 면에서의 ‘기술’에 대한 고찰도 포함된다. <편집자>

더 이상 모여 놀지 않는 사회


정혜윤 :
 지난해 여름부터 ‘우리 더 잘 살아요’ 행사를 해 왔는데, 외국 책을 가지고 행사를 하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저자를 이 자리에 모실 수 없음에도 이 책을 꼭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일단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늘 마음 맞는 사람하고만 일할 수 없다는 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최근 쓴 <사생활의 천재들>(봄아필 펴냄)이란 책이 있는데요. 그걸 쓰면서 가진 문제의식도 비슷해요. ‘어떻게 하면 너랑 더 잘 지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책인데, 들어야 할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고 할 것이 참 많더라고요.

그 무렵에 이 책을 봤어요. 맨 앞장에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몽테뉴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라고요. 어떤 점에서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아요. <투게더>의 마지막 장(코다)의 제목도 마침 ‘몽테뉴의 고양이‘예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남은 두 가지 열쇳말이 있어요. 하나는 협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잘 듣는 능력’이라는 대목이에요. 저 같은 라디오 PD에게는 잘 듣는 것이야말로 그 날 방송의 주제이자 전부이고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요. 또 하나는 ‘움츠러들기’예요. 지난해 ‘불안‘을 주제로 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불안하니까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안전한 길로만 가려고 해요. 그런 식으로 다들 움츠러들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세넷은 ‘협력’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걸 라디오 용어로 고치면 공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울리면 나도 울리는 상황이죠. 그건 말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눈빛만으로 이뤄지기도 해요. 저는 방송할 때 입으로 ‘큐’를 주지 않고 항상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말을 하거든요. 얼마 전에 퓨전 국악 팀의 공연을 봤는데, 무대 위에서 팀원들이 계속 눈빛을 교환하더라고요. 실제로 그 팀 이름이 ‘공명’이었어요. 이런 장면만큼 절 설레게 하는 게 없어요.

이런 공명과 협력이 현재 학교나 작업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혹은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투게더>의 한국어판 서문 격인 ‘함께 읽기(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를 쓰신 김홍중 선생님이 학교에서 느끼신 것을 얘기해 주시면 어떨까요.

김홍중 : 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전 원래 누구랑 함께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이 들면서 더욱 혼자 있는 게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한 순간이라도 친구가 없는 삶, 쓸모없는 일로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기회가 없었던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서 목격하는 요즘 학생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무언가를 같이 하는 기술에 있어서 악화가 발생한 건 사실입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람들은 ‘무한도전’처럼 누군가 모여 노는 모습을 즐겨 보고는 있지만 실제로 같이 놀지는 않아요. 너무 지쳐있고 불안하다는 뜻이겠지요. 일인 것과 일이 아닌 것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고, 자기 일에서의 능력을 극대화시키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요즘 학생들에게서 대여섯 명이 무작정 춘천에 놀러가서 퍼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거겠지요.

또 즐거워 보이는 학생을 찾기 어렵습니다. 다른 과 학생들하고도 상담을 하는 편인데,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어 해요. 그걸 찾도록 도와줄 사회적 맥락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서클이나 과 활동도, 학교 바깥의 사회 활동도 자기 정체성이 되어주지 못해요. 어떤 경우엔 병리적인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이건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속한 학과에 130여 명 정도의 교수가 있는데, 모여서 술을 먹지를 않아요. 제게 술 먹자는 전화를 해 오는 분들도 없고요. (웃음)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거든요. 그날 안으로, 그 주 안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체제의 변동과 무관하게 100여 명 정도의 주변 사람이라든가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각각의 ‘생활 세계’를 구성하고 살잖아요. 체제가 흔들려도 그 여파가 생활 세계로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어떤 시점 체제 수준에서 일어난 변동은, 우리 모두가 다른 형식으로밖에 살 수 없도록 하는 변동이었어요. 그 변동은 궁극적으로 대처가 말한 ‘사회(Society)라는 것은 없다’였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부터였던 것 같아요. 물론 1970년대 후반 서구에서부터 마가릿 대처가 상징하는 거대한 풍파가 불어왔고 국내에서도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불거져 온 현상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제도나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큰 자기장의 변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소사이어티’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사교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런 모임도 소사이어티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모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로 접어들었고, 통치라는 것의 성격도 바뀌어 가고 있어요. 국가가 복지를 포함해 사람들의 문제를집합적으로 신경 써주면서 보완하고 책임져 주는 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향으로 통치성이 구현되어 갑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굳이 모여 놀거나 논쟁하지 않아도 돼요. 삶의 다양한 만남들이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재생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거창한 의미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술 먹는 방식,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 가족관계, 친구와 노는 방식 등 사생활의 많은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스킬’들을 파괴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력한 연줄 문화가 있는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요. 이런 스킬을 이미 익힌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시대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이 모여서 노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워 온 상태로 자라고 그 공백이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규정한다고 하면요.

혹자는 ‘투게더’를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이라 믿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단초들마저 지난 15년간 제도적 변화 속에서 훼손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일 세넷이 한국에서 두 달 정도 산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자본가와 군대 문화의 대립

정혜윤 : 이번엔 작업장에서의 협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취재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게더’가 굉장히 사치스러운 얘기에요.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에 취재를 갔는데, 신차가 나오면 조립 라인이 바뀌면서 잠시 공장을 쉬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라인이 신차 생산에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거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역시 필요 없어진다며 덜어내 버리는 거죠. 그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인품이 어땠는지, 다른 사람과 사이가 좋았는지는 전혀 변수가 되지 못해요. 말하자면 현재의 많은 노동 환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떻게 관계 맺느냐’의 문제가 무의미해지는 환경이에요.


장석준 : 
이 책에서 세넷이 젊은 시절(1970년대)에 작업장에서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확인한 것들을 썼는데, 거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작업장 내에서 협력의 분위기가 가장 왕성했을 때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세대가 일했을 때라고 해요. 이걸 거시적으로 보면 복지 국가가 2차 대전의 경험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그렇지요. 이런 사실이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노동 운동 문화를 보면 상당히 군사적입니다. 운동권 가요나 문구가 적힌 조끼, 운동가들끼리의 내부 문화도 그렇고요. 그런데 세넷의 시각을 적용해 보면 한국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어요. 한국의 노동 현장의 남성들이 세넷이 말하는 ‘협력’을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습득하는 통로는 군대거든요. 군대에서 습득한 것이 작업장에서 나타납니다.

세넷 스스로도 지적하지만 작업장이 굉장히 권위적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은 작업반장이 욕설을 써가며 일을 시키는데, 노동자들이 거기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따른다는 거예요. 권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들을 이끈다고 느끼고, 그 속에서 협력의 분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이는 자본가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겨졌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국의 작업장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비록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지만 비공식적인 협력의 문화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면서 자본가에게 반대되는, 그들이 짓밟을 수 없는 힘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계속 놔두었다가는 그들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음을 느꼈고, 그 가운데 ‘노동 유연화’라는 구호가 유효하게 등장한 것이죠. 그것은 물론 전 세계적인 맥락도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1987년 이후 등장한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와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현대자동차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연령차가 있습니다. 정규직은 보통 1987년을 경험한 40대 후반이나 50대이고, 비정규직은 보통 30대나 그 아래의 젊은 사람들이지요. 만약에 정규직/비정규직 분화가 없었더라면 세넷이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청년 노동자들에 도덕적인 권위를 행사하면서 비공식적 협력이 이뤄지고, 그것이 자본가와 대립할 때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가능성이 다 사라져가는 겁니다. 한쪽은 정규직이기에 질시의 대상이 되고, 한쪽은 비정규직이라서 그들만으로는 자본가들에 대항해 교섭력이나 협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본가에겐 모순적인 부분이죠. 비공식 협력이 작동해야 자본가들이 설계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잘 돌아갈 수 있는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면서 와해시키는 것이니까요. 결국 종국에는 그걸 주도한 자본가 입장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혜윤 : 저도 제가 일하는 현장에서 점점 더 비공식적 협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예전에는 같은 현장에서 같은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로 엮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말이죠.

사실 저와 동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이에요. 옛날엔 방송을 잘 못하면 욕을 하고 싸웠어요. 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고, 방송을 하기 위해 이 조직에 모였다는 자의식이 강했지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그걸 위해서 기꺼이 싸울 마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로 싸우지 않게 됐어요. 행여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거나 나중에 자신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될까봐 적당히 예의범절을 갖추는 사이가 된 거지요. 그렇다보니 회사에 있는 시간이 치열하게 자아를 실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무의미하지만 견뎌야 할 시간으로 변하는 거예요. 누굴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그 사람을 위해 싸울 마음도 없고 그냥 ‘웬만큼 좋은 사람’이 되어가더라고요.

이제는 술자리가 있어도 안 가게 돼요.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무릎을 꿇고 “부장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본 이후로요. 전 ‘정말 사랑하니?’라고 묻고 싶어졌어요. (웃음) 술자리마저도 다음 날 좀 더 편안하게 일하기 위한,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편리한 화해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우리가 너무 움츠러들었다는 제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예요. 방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이것이 비공식적 협력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한편, 그 각각의 내면 역시도 크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회적인 것’에 대한 향수, 그런데 우리는?


김홍중 : 
저는 회사 생활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는 끔찍하게 느껴지네요. 어쨌든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세넷이 전형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세넷을 비롯한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유럽 전통에서 ‘더 소셜’이라는 말은 원래 모여서 논다는 의미의 ‘사교’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국민국가(nation-state) 혹은 주민(population)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사회라고 하면, ‘한국 사회’, ‘미국 사회’처럼 국가 외의 무엇을 잘 떠올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런 의미와는 다른, ‘차원(Dimension)’으로서의 ‘더 소셜’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정신분석학을 거꾸로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가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꿈을 ‘당신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떤 욕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에 비해 사회학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A가 자살을 했는데 거기엔 실연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 하는 개인적 차원의 이유가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보니 사회라는 차원이 개입해 있는 겁니다. 에밀 뒤르켐은 개인의 자살에 대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결합력이 낮아서라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가 그를 자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죠. 한편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취향, 즉 트로트를 좋아하는가 클래식을 좋아하는가 같은 문제를 계급으로 설명했고요.

우리가 그 인과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의 행위나 심성이나 삶의 형식이나 미학적 취향 등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차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당시에 함께 등장한 것이파스퇴르의 미생물학이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가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만들어 주는 메커니즘이 발견된 동시에, 사회라는 것이 우리를 공통의 운명으로 엮어주고 있다는 시각이 19세기 말 등장하게 된 겁니다.

사회 보험 제도도 이때 나왔습니다. 보험이 있기 전에는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누군가 다치면 그 사람 책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때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원칙이 ‘비 프루던트(be prudent)’, 즉 ‘조심하라’였어요. 다치면 당신의 책임이니 그만큼 신중을 가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작업장에서의 사고는 우연히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건 정의롭지 않지요. 그래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끼리 일정한 돈을 내서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돕는 커다란 제도를 창출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럽인들에게 사회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이자, 박테리아처럼 보이지 않는 공통 운명이자,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때 사회란 “한국 사회는 ~~하다”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컵처럼 확실한 거였어요. 가령 제가 실업에 빠져 있다면 사회는 바로 느껴져요. 또 직업을 갖고 있는 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도 사회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죠. 왜냐하면 바로 돈, 지식, 기술 등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니까요. 이것이 절정에 올랐던 시기가 앞서 말했던 2차 대전 끝나고부터 1970년대까지입니다. 그 전통 속에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오는 도움 외에도, 정혜윤 피디가 언급했던 직업적 소명의식, 즉 직장이 개인의 삶의 근원이라는 의식 역시 강하게 존재했었어요. 이러한 유기적인 큰 그림이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창출되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이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적인 것’은 없으면 바로 지장이 생기는 겁니다. 또한 세넷이 강조한 바와 같이, 없으면 자기 삶을 서사화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내가 스무 살에 어떠한 직업을 가졌고 시간이 지나니 기계가 바뀌었고, 몇 년 후 아이가 생겼고 퇴직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고…’, 이러한 삶의 서사가 사회적인 것과 맞물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또 세넷이 문제 삼고 있는 게 바로 이러한 것들의 용해입니다.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혹은 위험 사회 등으로 표상되는 일련의 변화가 ‘사회적인 것’이란 말에 담긴 100여년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 가치, 감수성 같은 것들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세넷이 68세대라는 점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어요. 68혁명 세력은 기본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게 싫고 피곤했던 겁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모든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봤어요. 그들 중 급진적인 비전을 꿈꿨던 사람들은 복지 국가도 인간을 억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인간을 사슬에서 풀고 원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복지 국가는 ‘개량주의’의 산물이고 자신들을 사육시키는 또 다른 기제였지요.

그런데 <투게더>에서 세넷은 그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죠. 68혁명 때 외쳤고 꿈꿨던 것들이 신자유주의 속에서 악몽처럼 현실화되어 있었습니다. 소중히 만들어 낸 제도가 무너지고 가족, 직장, 소명의식, 복지가 녹아내리고 남아 있는 건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이었던 거죠. 그 개인들은 안으로는 불안에 떨고 밖으로는 경쟁 논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노동 형태가 비물질 노동으로 바뀌면서 협력할 공간(작업장)은 사라져 가는데 작업 시간만 무한히 늘어나고 있고요. 노동이라는 것이 몸을 쓴 결과가 아닌 시간의 일부들이 조합되어 자본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거죠. 즉 ‘투게더’를 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더 소셜’의 용해 현상입니다. 그리고 세넷은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용해 현상이 일어나기 전인 30년 동안(2차 대전 이후~70년대)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장인정신, 직업정신, 소명의식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더라는 것이죠. 소박한 삶이 무너져 있는 현재, 과거의 도드라진 어떤 시점이 세넷에게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대안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한국으로 가져와 보면, 우리에겐 세넷과 같은 의미에서의 돌아갈 때가 없잖아요. 그 대신 지난 선거에서 다른 의미의 노스탤지어가 작동을 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시 사회적인 것이 녹아 사라진 15년을 겪으니, 강력하고 ‘솔리드’한 무언가가 필요해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솔리드’한 체험이 무엇일까요. 역설적으로 앞서 말했던 산업화 시기의 위계적이고 군사적인 문화, 답답하지만 안정적으로 여겨졌던 질서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을 (대선에서) 뽑지 않았겠나 싶어요.

정리하자면 세넷의 문제 진단은 정확했다고 봅니다. 사람은 녹아내리고 흩어져버린 사회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솔리드’한 무엇인가를 창출해야 한다는 문제 앞에 봉착했다는 문제의식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과연 세넷처럼 돌아갈 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 거지요.

‘걸음마부터 다시!’ 거장의 낙관?

장석준 :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해 물고 늘어졌던 주요한 물음의 형태는 두 가지죠. 소시올로지(Sociology, 사회학)와 소셜리즘(Socialism), 즉 사회주의입니다. 에밀 뒤르켐이나 마르셀 모스 같은 19세기 사회학의 주요한 창시자들은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와 관련해 우리가 중요하게 가져야 할 물음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본주의의 대안 하면 ‘국가 사회주의’를 떠올립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사회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식했지만 실체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김홍중 선생 같은 사회학자들이 앞서처럼 설명해 줘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죠. 실체라는 건 세넷의 말처럼 몸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의 실체가 모호한 데 비해 자본의 실체는 기업, 은행처럼 잘 드러나 보입니다. 국가 역시 인간이 조직적인 폭력을 사용할 때부터 계속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분명해요.

사회주의자들은 자본도 국가도 아닌 사회를 주도하는 실체를 만들어 내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경우 그 역할을 국가가 대행했어요.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겪은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나 소련 같은 일당 독재 국가인 셈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커다란 실패가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전체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인류가 확인하게 됩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령 1970~80년대 영국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대처 정부의 폭력적인 추진으로 이뤄진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했어요. 그동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를 지겨워했던 것이지요.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신자유주의가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국유화, 즉 국가가 다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과연 매력이 있을까요? 스튜어트 홀은 “국가라는 늙은 수위와 결별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회주의는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이 이야기가 나올 때쯤엔 이미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하며 모호하게나마 남아 있던 사회조차도 해체되어 갔습니다.

저는 세넷의 독특한 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진단은 대부분 한 가지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복지 국가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넷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지 국가를 거부했던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복지 국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어쨌든 자본에 대항하여 사회가 주도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태 혹은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 지점에서 세넷은 연대와 협력을 구분하고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정치적 좌파가 뜻하는 것이 과거에 시도됐던 (국가) 사회주의와 관련된 거라면 앞으로 해나가야 할 것은 이와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세넷은 결론에서 노먼 토머스(1884~1968)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당에 들어가 1928~1948년까지 여섯 번이나 대선 후보로 나섰던 인물이지요. 약간 백기완 선생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표를 얼마 못 받을 걸 알면서도 대통령 선거에 나가잖아요. 그런데 세넷은 노먼 토머스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 쟁취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 게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요.

최근 세넷과도 가까운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를 봤더니 비슷한 의미에서 바우만은 ‘소시에타스’와 ‘코뮤니타스’를 구분하고 있더라고요. 소시에타스가 말하자면 국민국가 단위의 커다란 사회인 것 같고, 코뮤니타스는 가족 비슷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조금 다른 사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모태 혹은 세포가 될 수 있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사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한국에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웃음) 제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진보정치 운동, 노동조합 운동의 난관 끝에 최근 중요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민중의 집’ 운동인데요. 이 운동은 스웨덴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종교적인 맥락으로 탄생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각이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에요. 스웨덴의 국교는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 파인데, 노동자들이 루터 파 교구 모델을 하나의 세속적인 공동체를 통해서 구현하려 한 게 스웨덴 민중의 집입니다. 이 경우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사회민주당, 진보적인 교회가 결합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즉 기독교도들이 주일에만 느꼈던 공동체적 삶을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또 주일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이탈리아는 정 반대였어요. 이탈리아의 국교는 가톨릭인데 굉장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교회와 싸워야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민중의 집입니다. 교회와 싸우기 위해 교회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를 거치며 파괴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신자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그 전 단계에 케인스주의를 따랐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요. 만일 앞서 말씀드린 19세기 말의 움직임(‘사회적인 것’의 발견과 실행)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누가 제아무리 신자유주의를 원해도 이뤄낼 수 없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케인스주의 체제가 실행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성취가 분명 있었지요. 사회라는 것의 세포가 복지 국가 단위에서 정책적으로 관철되었으니까요. 소득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분명 케인스주의 체제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진 집단적 소득이 가구 단위로 나뉘면서, 2차 대전 이후 각 가정의 ‘소비 생활’은 철저하게 미국화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렇게 미국식으로 소비가 개별화되고 난 다음 단계에서 신자유주의가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세넷의 문제제기는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방금까지 약 200여 년간 진행되어 온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세넷은 그것이 시작된 19세기의 첫 번째 문제 제기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든요. 원래의 모태·세포들을 복원해야 신자유주의를 복지 국가적 질서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 명 한 명의 사회성을 재건해야 사회주의 국가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주류 좌파의 정책가들이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세넷은 ‘정치적 좌파들이 2~30년간 열심히 노력해 왔으나 그들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뭔가 커다란 부분이 비어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짚어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출하려면 지금까지 소외됐던 ‘손과 발’에서부터 어떻게 협력할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기에 세넷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대단히 낙관적이기도 합니다. 협력을 철저히 기술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술은 천성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거니까, 우리에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투게더>는 매우 파우스트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살아가는’ 시대, 협력은 가능한가?

김홍중 : 말씀하신 맥락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구 제도를 무너뜨리려 하면서 기존에 있던 길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조합들, 지방의 교회 공동체들도 함께 일소시킨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사회성’이라는 게 뿌리내리는 토대는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친족 모임이나 마을의 두레, 품앗이, 계모임 등도 있었죠.

그런데 현 시점에는 또 다른 것들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회가 한국, 일본, 대만이라는 국민국가 ‘내부’에 있었다면 지금은 서울과 타이베이, 도쿄를 가로지르는 삼각형도 존재합니다. 자본과 노동의 교류도 있고,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공간도 실재하고요. 소위 말하는 글로벌한 사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해야 할 것이 늘어났습니다. 계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는 과제와 동시에 국제적인 영역에서 새로 생겨난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고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넷은 후자에 대해서 별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넷의 휴머니즘입니다. 협력을 사람끼리의 협력에만 국한시켜서 얘기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중요한 예로 들고 있는 음악 연주 역시 지휘자나 다른 연주자들하고의 교통이기 이전에 악기를 다루는 손과 악기와의 교통이잖아요. 이를테면 저는 지금 마이크를 들고 얘기하고 있으며, 말씀드리는 생각에 크나큰 도움을 준 건 컴퓨터였습니다.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래 인간의 몸은 ‘몸’으로 따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이 장소에는 30여 명의 인격과 생각을 가진 신체만 있는 것 같지만, 각각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물질적으로 추적해 보면 여기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이 부분을 세넷이 다소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손의 소외와 사물들과의 연대-연대란 말이 다소 거창하지만-를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가 역시 현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사람들이 사물 속에서/사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으며 사람이 테크놀로지를/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지요.

청중 질문 : 제게 조카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중학교에, 다른 한 명은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평범한 10대인 이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으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을 즐깁니다. 너무 깊게 빠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 했더니, 게임 속에서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있더라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전략 게임을 하려면 방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해요. 일단 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어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면 게임이나 인터넷 속 네트워크도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인 건 아니잖아요? 이른바 가상공간에 쌓아 올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좀 걱정됩니다. 이런 것을 내재화한 아이들이 나중에 실제적 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거든요. 게임 속 인간관계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더 넓은 차원의 인간애를 보장해 줄 수는 없겠지요. 두 분은 지금 어린 친구들이 기술과 맺는 관계에 대해, 그 만남으로 발생하는 또 다른 사회의 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홍중 : 저는 갈림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분야의 용어로 말하자면 아도르노냐 벤야민이냐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할까요. 뛰어난 인문주의자였던 아도르노는 죽을 때까지 대중문화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벤야민은 아시다시피 ‘아우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아까 정혜윤 피디가 말했던 ‘눈빛 교환’이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은데,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소통의 전율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벤야민은 이 아우라를 포기합니다. 그런 소통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정치 체제에서는 구현해낼 수가 없다고요.

솔직히 털어놓으면 제 마음 속에는 “도스토예프스키도 안 읽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건방진 생각과 이와 전혀 반대되는 생각이 상존합니다. 특히 요즘 후자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전자처럼 생각하고 살면 저 혼자만 괴로워요.(웃음) 그래서 마음으로는 100퍼센트 동의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80퍼센트 이상, 제 생각을 현실에 맞추어 벼려나가야 한다고 결론 내리게 됐어요. 벤야민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까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이나 주체성을 신뢰하기 시작한 역사는 서구의 경우에도 400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물론 그리스 휴머니즘의 역사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언제나 신 밑에 있었고, 더 이전에는 거대한 자연 앞에 눌려 있었지요. 그리고 현 시점 역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동물보다 나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중 하나가 방금도 말씀드린 사물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인정을 못할 뿐이지 저와 여기 와 있는 여러분은 커다란 시스템이 사용하는 하나의 단말기에 불과할 지도 몰라요.

태어나자마자 미디어를 접하고 가상공간의 현실과 그 바깥을 오갈 수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서,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린다면 과연 상상할 수 있는 미래라는 게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벤야민의 길을 긍정하기로 했어요. ‘눈빛의 교환’이나 아우라 같은 원형만을 찾는다면 앞으로 사회성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인간의 완전한 기계화라는 상황으로 치닫기 이전에 지속되는 지금의 경향 속에서, 사회성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내는가라는 질문을 물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건 그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태어나고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본인들이 어떤 세계에 몸담고 있다면 가능성 역시 스스로 구현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일단은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80퍼센트 까지는 긍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비판적 의식을 갖고 맹렬하게 노려보고 싶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믿습니다. 아직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회성의 실마리는 언젠가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봅니다.

덧붙여 함께 물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앞바다에 떠오른 거대한 가자미 떼, 길에서 살아가는 개미들의 숫자 따위가 자연스러운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란 의식을 가져야 해요. 매미도 일종의 시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름에 매미가 울지 않으면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주주의’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물뿐 아니라 이러한 미물들 역시 우리 삶에 굉장히 깊숙하게 얽혀 들어와 있다는 인식 속에서 사회가 발생하는 거거든요. 이미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산다는 인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장석준 : 저 역시 확정적인 결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장의 권위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넷은 SNS에 부정적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부정적이다 못해 ‘대안을 찾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귀담아 들을 여지가 있지만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죠. 거장이고 위대한 사상가들이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들이고, ‘꼰대’일 수도 있어요. (웃음)

현실의 예를 들면, 요 몇 년간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양상은 SNS가 예측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준 측면이 있습니다. SNS를 통해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마드리드 광장에 모여 1~2년간 천막 농성을 펼쳤고, 경제 위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대안적 운동으로 발전했지요. 많은 분들이 ‘오큐파이 운동’하면 월스트리트를 떠올리는데, 오히려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스페인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잘 살펴봐야 할 것은 불씨는 SNS 속에서 당겨졌는데 운동은 바깥에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SNS ‘내’의 사회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바깥으로 펼쳐져 나가는 새로운 사회성 역시 존재하는 것이지요. 거장들의 시선이 놓친 지점이라고 봅니다. <투게더>가 <장인>(김홍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 이어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데, 세 번째 책에서 도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면을 써라, 사회를 이분(二分) 하라!

장석준 :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넷의 이야기를 받아들임에 있어 실수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세넷은 우리에게 옆에 있는 타인과 속을 터놓고, 솔직하고 끈끈한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협력을 재건하기 위해 오히려 가면을 쓰고 기술을 습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세계 3차 대전 이후 반대자를 다 잡아 가두는 파시즘적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를 그리고 있지요. 주인공 브이(V)는 체제의 전복을 시도하는 테러리스트인데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다녀요. 온 몸이 불에 타 흉측한 모습이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 신체를 가리는 건데, 끝까지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요. 그는 가면을 통해 소통하고 가면을 통해 혁명을 도모합니다. 브이가 죽은 뒤 혁명은 성공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등장해요.

이 은유가 세넷의 메시지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노력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100퍼센트의 투명한 자신을 보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 협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강박을 가질 때 협력에 실패한다고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관계 맺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선택한 가면으로 일종의 ‘놀이’에 임해야지만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이처럼 세넷의 이야기는 역설을 머금고 있고, 그 역설을 잘 파고들어야만 반대 방향의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넷이 <장인>에서 자신의 정신적 뿌리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 19세기의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중세 시대 수공업적 전통의 복권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중에 길드 사회주의로 발전했고요. <투게더>와 <장인>에서의 세넷은 그런 생각을 21세기적 맥락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세넷의 결론에 공감하느냐 아니냐의 질문을 우회하여, 제가 잠정적으로 동의하는 결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저는 20세기 후반의 노동 이론가이자 생태주의자인 앙드레 고르가 도달한 결론에 동의합니다. 고르는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계속해서 전문화되는 부분은 남겨 두고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이전의 삶의 자율성을 복원시키는 공간으로 되돌려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쉽게 말해 그는 노동 시간 단축을 중요시했습니다. 인간성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요.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것을 되살리는 사회, 공동체도 만들고 협동조합도 만드는 사회 말입니다. 두 영역을 가르는 벽을 설치하자는 이런 주장을, 그는 ‘이중 사회론’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도 여러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근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고민해 나가야겠지요.

정혜윤 : 제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나 원래 그래”라는 말이에요. 거짓말 같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좀 더 나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네가 보는 그대로가 바로 나야’라는 게 진정성일까요? 저는 진정성이란 게 있다면 오히려 ‘너를 통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관계들의 탄생과 창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소셜’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넷 역시 ‘너와의 협력을 통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묻고 있다고 느꼈어요. 두 분 모두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안은별 기자(=정리)

스베냐 플라스푈러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교사에게 연수는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이다. 교사들은 해마다 이런저런 이름의 직무연수와 자율연수에 참여해야 한다. 요새는 연수의 압박이 조금 더 거세졌다. 대략 연간 60시간을 최소 기준 시간으로 정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성과급 등급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게끔 돼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연수는 대개 ‘교학상장(敎學相長)’, 곧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다. 사실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많은 학교가 연수 이수 시간을 성과급 산정에 주요 항목으로 활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청이 학교를 평가할 때에도 학교 전체의 연수 시간이 주요 평가 항목이 된다. 그래서 교장들은 교사들 앞에서 대놓고 형식적으로라도 연수 이수 시간을 채우라고 침을 튀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잡무와 잦은 출장에 치인 채로 살아가는 교사들에게 연수는 고된 노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울며 겨자먹기’식의 반강제적인 연수라면 더욱 그렇다. 연수라는 ‘일’을 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기는커녕 점수의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에 비애를 느낀다. 그렇게 해서 전문성이 길러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더욱 자괴스럽다.

그럼에도 많은 교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원격 연수를 ‘기꺼이’ 받고 있을 것이다. 목이 뻣뻣해지고 손목이 시큰해지는 것쯤은 상관 없다. 60시간을 넘어 100시간, 200시간도 괜찮다. 몸이 고통스럽더라도 200시간의 연수 시간을 채운 자신을 선망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향락 노동자들은 혹사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신체 활동이란 고작해야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동공을 집중하는 것에 국한되며, 두뇌만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기서 자극에 반응하며 웹 사이트를 클릭하고 이 링크 저 링크를 따라다니는 사이에 그는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것이다.”(<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12쪽 중)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 씀)의 핵심 열쇳말은 위 인용문에도 나오는 ‘향락 노동’이다. 저자는 향락 노동을 일 자체가 좋아서 자기 스스로 일을 하고, 그 일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노동으로 규정한다. 독일의 소장 철학자인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문제는 바로 그 향락 노동이 가지는 양가성(兩價性)이다. 향락 노동은 과연 약일까 독일까.

“일도 해야 하고 스포츠도 봐야 하고.. 우리는 흥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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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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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향락 노동이 가져온 기괴한 풍경 하나를 짚어보자. 우리는 동네 골목에서조차 적나라한 차림과 표정의 여성 모델의 그림이 박혀 있는 모텔 광고 전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기의 대상이었던 섹스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숙한’ 대상이 된 것.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성욕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성과 섹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우리는 무언가가 부재할 때 그것에 대해 욕망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이와 관련해 ‘포르노’를 현대의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포르노 배우들이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신체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처럼, 현대의 일 중독자들도 리탈린이나 모다피닐 같은 각성제를 통해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일에 몰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휴식이나 여유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벗은 분주함, 바쁨이다.

“여기서 회의를 하고, 저기서 비즈니스 런치를 먹고,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마감 일정에,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 시청까지, 우리는 언제나 지속적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문화학자 토마스 마호의 말대로 현대의 금욕주의자는 일중독과 행동주의, 스트레스와 시간 압박, 고독과 우울증의 합성물이며, 성차별과 아이에 대한 혐오, 독신주의의 임포텐스(남성의 성기 불능-기자 주)가 서글프게 뒤섞인 혼합물이다.”(본문 61~62쪽 중)

당신의 야망, 애정 결핍·열등감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주함이 진정으로 창의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말을 인용해 분주함이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기존의 것을 재생산하고 가속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상 진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육체와 정신의 여유와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가. 무작정 떠나는 여행과 같은 참된 휴식이 중요한 까닭이다.

저자는 좋은 의미의 향락 노동이 집착적인 워커홀릭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릇된 야망’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야망은 ‘커다란 희망이나 바람’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되곤 하지만, 현실 속의 야망은 한 마디로 ‘과도한 명예욕’일 뿐이다.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 야망이 잘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착취적인 경쟁 논리로 무장한 오디션 현상을 예로 든다.

지금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슈퍼스타K>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보라. 관객들이, ‘진짜 노래란 이런 거야’라며 가수의 열창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잊혀진 가수들의 주옥 같은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근본적으로 모두의 관심은 노래나 연기 그 자체보다 심사위원이 올리거나 내리는 엄지손가락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도한 야망은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과 그로 인한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단다. 그는 철학자 부흐크레머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망이 큰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실존적 동의에 대한 확신도 없다는 점, 인정의 욕구가 결국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아이처럼 그는 결핍의 체험을 증폭된 애정의 ‘강제’로 해소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을 힘줘 말한다.

그릇된 야망과 인정 욕구는 우리를 심각한 워커홀릭으로 만든다. 스마트폰과 이메일은 일이 우리를 옥죄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의 하나다. 그것들은 퇴근 후에나 휴일에도 우리들을 가상의 일터로 불러낸다. 많은 사람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즐기기까지 한다. 리비도적 집착이자 상사병 수준이다. ‘일’이라는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본문 198쪽)

덧붙이는 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로도스 | 2013. 04. 15. | 211쪽 | 1만 4000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4409&PAGE_CD=N0001&CMPT_CD=M0016

집단행동의 논리(무임승차의 원인은 무엇인가?)

올슨은 집단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체계적, 논리적으로 정리하였다. 기존의 대중행동이 집단심리, 대중심리 등 주로 심리적인 원인을 중심으로 특정한 시기 대중들의 열광적인 집단행동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그 비이성적, 무정형성, 일시성, 폭발성 등을 중심으로 다루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석방법은 87년 6월 항쟁이나 올초의 촛불시위처럼 일시적으로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가두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서술할 수 있을지언정 일상적인 조직활동이나 다양한 집단행동의 원인, 조직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이를 독려하는 등 소수 열성적인 사람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대중심리를 바탕으로 한 설명방식은 대중들의 비이성적이고 몰합리적인 면만 강조할 뿐 그 대중운동을 일으킨 요인을 간과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 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파는 대중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계급의식을 강조하였다.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에게 가장 최고의 지상 가치는 자본으로부터 노동의 해방이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계급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또한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지식인을 포함한 쁘띠 부르조아들이 오히려 더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반면, 노동자들이 반혁명진영에 가입하는 등 계급모순적인 행동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물론, 이런 부분에 대해 그람시를 필두로 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교육과 허위이데올로기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등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사회 어떤 부분을 통찰해 보아도 명확하게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계급의 주 구성원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반해 올슨은 집단행동의 논리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합리적인 개인(이기적인 개인)이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식으로 개인이 엄격하게 자신의 이익과 비용을 계산해서 이익이 되는 행동만 하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개인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한다. 단, 올슨의 집단행동의 논리에서는 정량적 분석을 위해 자원봉사 활동이나 종교 활동처럼 심리적인 부분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분석을 제외했다. 물론, 논리가 명확해지면 그런 심리적인 부분까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특정 기업의 노조원이 노조 활동, 특히 파업에 참여하는 이유는 임금을 인상시키거나 일자리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조 활동은 비용을 수반한다. 개인적으로 노조 주최의 강의나 집회에 참여하는 등 시간을 할여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또한, 경영진에게 찍혀 직장을 잃거나 극단적으로는 불법파업에 대한 혐의로 감방에 갈수도 있다.

일견 노조활동은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인 행동인 것 같지만, 이와 같이 비용을 수반한다. 그리고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클수록 활동 가능성은 점차 작아지는게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다. 만약 노조에서 얻는 이익이 노조활동, 혹은 파업 등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돌아간다면 합리적인 개인은 더더욱 비용은 줄이고 수혜는 누르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면서 수혜만 누리려는 “무임승차”가 발생하게 된다.

치안이나 국방, 고속도로 등 누리는 혜택을 배제할 수 없지만(비배제성), 특정인의 재화 사용으로 전체 재화의 양이 줄어들지 않는(비경쟁성) 재화를 공공재라고 한다.

치안의 안정으로 안전한 생활은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지만,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그에 필요한 비용은 부담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개인에게는 비용 부담은 않으면서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이 최대의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재는 항상 무임승차의 문제가 발생하고, 그 때문에 집단 전체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는 양 만큼의 공공재가 생산되지 않는다. 바로 ‘과소생산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공공재 생산을 위해서는 모든 참여 주체의 균등한(최소한 도덕적으로 정당한) 분담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은 대부분 무임승차의 유혹에 빠지기 때문에 무임승차를 막기 위해 감시와 처벌이라는 또 다른 비용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누가 감시와 처벌을 할 것이냐는 문제도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국방이나 치안, 도로 등 SOC를 건설하는 주체가 국가인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민간 자율에 맡기면 거의 항상 공공재는 과소 생산되고, 때에 따라서는 무임승차를 막기 위한 감시와 처벌 비용이 더 많이 발생한다.

노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노조 활동이 10여년이 넘은 대기업 노조의 경우 파업 등 노조의 집단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조원들에 대해 처벌을 가하는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합리적인 노조원이라면 노조의 파업시기 대체 근로 등을 통해 기업에 협조함으로써 가외 소득을 벌 수 있고, 기업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할 수 있으며 파업의 성과물인 임금인상을 함께 누리는 것이 가장 이득이 된다. 그래서 노조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노조원에 대해 집단 왕따, 괴롭힘, 벌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가하며 극단적으로는 일자리 보호 등 노조의 보호막을 제거하기도 한다.

그럼 국가가 아닌 대부분의 집단활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집단활동은 이익(정신적인 안정을 포함해서) 때문에 결성된다고 하지만, 집단활동은 많은 노력과 금전적 비용을 수반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집단 구성원도 역시 마찬가지로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려 하면서 수익은 누리려고 하는 무임승차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그로서 아무도 집단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태까지 발전할 수 있다.

특히 최초의 집단활동은 기존의 조직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더욱 힘듬에도 불구하고 많은 집단이 생성되고 융성한다.

여기에서 올슨은 경제적인 인간이 집단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를 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

즉, 어떤 개인이 집단활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공재의 수익이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보다 많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참여 여부와는 상관없이 공공재 생산을 위한 비용을 기꺼히 부담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공재의 수익을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불공평하게 나누어지듯 공공재로부터 얻는 수익도 불공평하게 분배된다. 그리고 그 불공평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집단의 성공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명으로 구성된 A라는 집단이 필요한 공공재(집단재)를 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이 100이고,

그 재화를 통해 누리는 수익이 집단 전체에게는 300이라는 가치를 갖었다고 하자.

일견 그 집단은 수익이 더 크기 때문에 비용을 기꺼히 부담해야 하겠지만,

만약 모든 집단이 1/10만큼 비용을 부담하고, 그 수혜도 1/10만큼 나누어 가진다면

그리고 비용이 적어질수록 수익도 같은 비율로 작아진다면

합리적인 개인은 10의 비용을 부담안하고,

생산되는 집단재 가치 270의 1/10인 27을 누리는 것이 10을 부담하고, 30의 수익을 얻는 것보다 7이 더 이익이기 때문에 무임승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런 집단의 경우 특정한 다른 기재(감시와 처벌, 협약 등)가 없으면 집단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공공재 산출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똑같이 10명으로 구성된 B라는 집단이

100이라는 비용으로 300의 수익을 얻는다고 가정하자.

그 집단원 중 a라는 사람은 150의 수익을, b라는 사람은 100, 나머지 사람은 1/8만큼의 수익을 얻는다고 하면, a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참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공공재(집합재) 생산을 위해 기꺼히 비용을 부담하려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비용부담을 하지 않더라도 a라는 사람은 공공재 생산을 위한 100보다 그 수익인 150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b라는 사람도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과 수익이 같기 때문에 다른 이가 그 비용의 일부만 감당하면 무조건 수익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a와 함께 공공재 생산을 위한 비용을 기꺼히 부담할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이때문에 특정집단의 성공은 나누는 수익이 불균등할수록,

참여하는 구성원의 수가 적을수록, 수익이 더 클수록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일반 대중 운동이나 노조 결성보다 소수기업의 독과점 결성이 더 쉬운 이유이기도 한다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커지는 반면 수익의 비율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이라는 기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감시와 처벌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확대하면 최초의 집단활동의 막대한 비용은 그 집단재로 인해 수익이 가장 큰, 혹은 크다고 생각되는 개인이 담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종교나 봉사단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봉사활동을 통해 얻는 심리적 위안이나 안정, 동료들의 인정 등과 같은 부분에 대해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이 결국 봉사활동을 할 집단을 조직하고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통치자를 포함한 정치인의 경우, 그 국민 성원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공정한 인사정책과 합리적인 제도 마련,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 집단에게는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권력의 독점이나 측근채우기, 특정 집단의 경제적 이익 보장 등으로 얼룩지고, 국가 전체의 공공재는 줄어들지언정 자신들의 집합재는 늘어나게 된다.

국가 전체를 위해서는 투기를 억제하는 것은 집값 안정으로 그 혜택이 전체에게 돌아가지만,

특정인에게는 투기가 전체의 이익을 줄이지만 자신의 이익은 극대화하기 때문에 중지되지 않는 것이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인가

어떻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 할 것인가,

최적의 공공재 생산을 위해 어떻게 최소의 감시와 처벌만으로, 어떻게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치의 시작과 끝이 아닌가 싶다.

http://blog.naver.com/its_reform/56805261

“이익집단은 ‘성장의 敵’…비효율·갈등 불러와 경제 둔화시켜”

“이익집단은 ‘성장의 敵’…비효율·갈등 불러와 경제 둔화시켜”

 

맨슈어 올슨

집단행동 연구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공로로 유력한 노벨경제학상 수상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미국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Mancur Olson). 노르웨이 출신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집단행동 논리 연구로 경제학에 입문했다. 정치와 경제를 이해하고, 번영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려면 이익집단의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집단행동 논리의 핵심은 이렇다. 경쟁 없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다. 공급자들이 담합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고 가격을 올려 소비자를 희생시켜서 이익을 챙긴다. 이익집단은 로비를 통해 정부를 압박, 각종 특권을 얻어낸다. 특권이란 경쟁으로부터 집단구성원들을 보호하는 면허제, 인허가제, 관세, 비관세, 시장규제들이다.

작은 그룹은 뭉치기가 쉽고 이해상관도도 높아 그룹이기심을 관철하기도 용이하다. 그러나 소비자, 납세자, 노인 등의 그룹은 규모가 커 뭉치기 어렵고 그래서 조직된 이익집단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게 올슨의 설명이다. 이익집단은 재화를 생산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미약한 그룹들을 희생시켜 이익을 챙기는 ‘분배연합’이라는 그의 개탄도 주목할 만하다.

올슨은 이런 논리로 지대추구 사회의 등장을 설명한다. 지대추구란 생산적인 경쟁 대신 국가의 보호를 받아 힘들이지 않고 돈벌이 하는 행동이다. 주목할 것은 집단행동의 논리가 경제번영에 미치는 영향이다. 분배연합의 목적은 구성원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혁신능력과 생산성 하락은 필연적이다. 분배연합이 득세하는 경제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할 능력이 둔화되고 그 결과는 경제의 ‘동맥경화’라는 것이 올슨의 설명이다.

올슨은 그룹이기심으로 무장된 이익집단은 사회전체에 피해를 주는 무리로 경제성장의 중대한 적(敵)이라고 지적한다. 올슨은 국가가 생산성을 높이고 번영을 이루기 위해선 정치와 경제가 이익단체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경쟁을 통한 생산적 이윤추구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집단행동 논리를 기초로 한 올슨의 역사해석도 주목을 끈다. 세계대전의 참패에도 독일과 일본은 연평균 8%의 고성장을 이어간 반면 전쟁에서 승리했던 영국과 미국은 연평균 2~3%의 낮은 성장을 기록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패전국들이 경이적인 성과를 이룬 배경엔 경제성장을 억제하는 분배연합들이 패전과 함께 완전히 붕괴된 것이 요인이 됐다. 이에 반해 승전국들은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분배연합이 득세해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게 올슨의 해석이다.

올슨의 그런 역사해석에는 그만의 독특한 이론적 인식이 깔려 있다. 혁명 전쟁 파국 등과 같이 안정된 사회를 파괴하는 요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분배연합을 해체시키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활력소로 작용하지만 그런 위기가 없는 안정된 사회는 분배연합의 득세로 큰 정부를 불러와 경제를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올슨은 이익집단의 논리로 옛 소련의 흥망성쇠도 설명한다. 스탈린의 계획경제가 처음에 성공한 것은 혁명과 함께 강력한 철권통치로 분배연합의 특권층(노멘클라투라)이 득세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유산업에서 번성한 귀족층이 정부관료와 담합해 최고지도부의 권력과 권위를 무너뜨리고 이것이 결국 공산당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의 체제 전환이 어려웠던 점도 그런 분배연합의 존속 때문이라고 올슨은 설명한다. 이와 달리 중국이 개혁에 성공한 것은 기득권 세력인 분배연합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 근절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련 계획경제의 흥망에 대한 올슨의 해석은 분배연합이 창궐하지 않았더라면 소련 경제는 성공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시장경제가 ‘번영의 길’이라는 올슨 자신의 주장과 상충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계획경제는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없고 그래서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가와 같은 경제계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멘클라투라가 번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련경제는 무너졌을 것이라는 게 오스트리아학파의 인식이다.

올슨은 정치형태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했다. 번영을 위해 독재정부보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중국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경제자유를 중시하는 독재라면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 듯하다. 더구나 올슨이 지적했듯이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익집단이 판을 칠 경우 경제적 번영에 미치는 치명적인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올슨은 집단행동 결정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시하고 이념과 신념 등은 무시해 1989년 동유럽 공산체제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반해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사회 변동의 추진력은 이념이며 그래서 이념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올슨의 사상은 비판의 여지를 남기긴 했지만 그는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집단행동 이론을 개척해 이익집단의 본질과 문제점을 꿰뚫어 보고 지속적인 경제번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명쾌하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맨슈어 올슨 사상의 힘 – 이익집단 견제…헌법장치 마련 주장한 하이에크에 영향

올슨의 사상은 번영을 보장하는 것은 재산권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라는 것, 그러나 그 기반을 해치고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이익집단이라는 것, 그리고 재산권을 확립해 시장을 확장하는 정치제도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번영의 지름길은 자본, 자원, 인구가 아니라 시장경제임을 강조하고 이익단체가 번영의 적이라고 개탄하는 올슨의 사상은 매우 소중하다. 일본 미국 등 오늘날 선진국들의 경기침체도 기득권 수호의 그룹이기주의에서 나온, 올슨의 제도적 동맥경화증 탓이라는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 없이는 재산권의 확립도, 경제번영도 가능하지 않다는 올슨의 주장도 흥미를 끈다. 그러나 자생적 질서로서 시장과 법은 정부 이전에도 왕성하게 성장했다는 진화 사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올슨의 사상은 ‘다원주의’ 이론의 결함을 밝혀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집단을 조직하고, 집단들은 서로 대칭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쟁은 사회 전체에 보편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규모가 클수록 뭉치기가 어렵다는 논리로 그 대칭성을 부인하고 있다.

공동의 계급이익을 가진 노동자는 모두 혁명에 가담한다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도 잘못이라는 것이 올슨의 생각이다. 그 이론은 혁명에 기여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달성된 결과를 향유하는 무임승차 행동의 가능성을 간과했다는 것이 올슨의 비판이다.

올슨의 사상은 이익집단의 힘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정부가 취약한 집단의 대항력을 키워야 한다는 케네스 갤브레이스 사상도 잘못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올슨의 사상이 탁월함을 인정한 인물은 누구보다도 하이에크다. 그는 현대사회의 진정한 착취자는 그룹 충성심으로부터 권력을 도출해 민주주의를 부패시킨 이익집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헌법을 개정해 이익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는 헌법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올슨의 사상은 수많은 논점들을 촉발해 정치학과 사회학 그리고 공공선택론의 연구 분야를 확대했고 이로써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 전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사상은 하나의 학문적 성장산업이 됐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개국 언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국가의 흥망성쇠》는 경제사학계를 휩쓸었고 또 국가정책에 관한 최우수 저서로 미국 정치학회의 유명한 캠머러 상을 받았다.

민경국 교수

M.올슨, “집단행동의 논리” – 인간, 사회,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

 

M.올슨, “집단행동의 논리” – 인간, 사회,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  전기 

2011/09/0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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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슨은 조직의 목적을 구성원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익은 조직 전체가 갖는 공통적인 이익이 증대됨으로써 한 개인이 나누어 얻게 되는 이익이 있고, 그 개인만의 개인적 이익이 있다. 일단은 경제학적 논리를 받아들여 조직의 목적이자 조직을 살게 만드는 것은 공통적 이익의 증대라고 받아들이자. 이 이익이 개인의 이익으로 이어질 때만이 조직이 유지되게 된다.

 

24페이지 각주 11번에서의 올슨의 태도는 대단히 분명하다. “조직 내에는 파벌과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사실이 공통적 이익의 존재를 부정해야 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통적 이익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구성원은 조직에 남아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떠한 개인도 그 조직에 남아 있을 때 얻는 이익이 손해보다 작다면 조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양자택일하게 만드는 상황을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한 구성원이 조직에 남아있다고 하여 그 상황이 ‘유의미한’ 공통의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만약 한 조직에 소속되는 것 이외에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조직이 우선적으로 성취하고 있는 이익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경우에도 공통적 이익은 보장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두 가지 문제가 추가적으로 나타난다. 공통적 이익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같아야 공통적 이익이라 할 수 있고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분명’한 정도로는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둘째로는, 불평등한 지배구조를 지니고 있는 조직에서도 구성원들이 조직 내에 남을 정도의 최소한의 이익을 남겨 주는 것은 조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이로운 일이며 그들에 의해서 꼭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에도 이익이 양의 값을 지니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도 이익이라고 보는 것은 유의미한 개념의 사용이 아닌 듯 싶다. 맑스가 자본주의 기업이 점차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한 최저수준의 임금만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되는 경향이 있음을 논하였을 때 그것을 어쨌든 노동자들에게도 공통적 이익이 주어지고 있음 – 왜냐하면 그 임금을 거부하며 조직을 나갈 경우 죽을 것이기 때문에 – 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듯이 말이다. 오히려 이처럼 조직을 나가는 것에 대한 부담을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직 내에서의 여러 통제와 조절을 위한 제도들이 구성원들을 균질화 시킬 때 조직의 최초 건설 차원에서부터 있는 것이 아닌 만들어진 ‘공통적 이익’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험적 조직 또는 조직현상들을 주로 관찰하는가에 따라서 중심적인 명제나 가정들의 종류가 달라지는 듯 싶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전체적인 조직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올슨의 입장은 전반적으로 개인의 이성과 능력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들을 집합적인 차원에서 이성과 능력의 강화를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목적으로 조직을 수립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허버트 사이먼의 집합적 합리성의 사유와 유사한 측면을 가진다. 이것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정부, 국가라는 거대한 한 인간과도 같은 것으로 신체, 팔다리, 관절 등을 한명 한명의 역할 담당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드는데 이 역시 개인 한 명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즉 먼저 있는 것은 수많은 개인들의 비조직화된 상태, 비결합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여러 개인들이 그 특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여러 조직들을 건설하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하면서 목적들을 달성해나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분화의 이론은 그림을 거꾸로 그리고 있다. 루만에게 있어서 조직화가 발생하지 않은 이른바 ‘자연 상태’는 서로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상호작용들이 서로 경계를 갖지 않은 채 무작위로 섞이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인 거대한 덩어리이다. 이 상태에서 특수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의사소통들이 계열에 따라 체계를 건설하고 자신을 여타의 환경들과 분리시키는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이 조직들은 단순해진다. 더 복잡한 조직 차원에서 더 단순한 세부 조직으로의 분화가 계속되어 나간다. 만약 여기서 한 개인이 어떤 조직을 나간다는 것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조직 (체계)의 복잡함 속으로 던져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올슨, 제2장 1절에서는 소집단의 응집성과 효율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막스 베버 및 여러 조직이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주의를 끌고 있는 속성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살피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의 지점이다.

 

올슨의 저술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중요한 하나의 법칙은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함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타인들이 집합재 생산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면서 한 사람이 집합재 생산에 노력을 기울이려는 유인은 점차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조직들은 일반적으로 그 각각 해당하는 집합재를 생산해내는 데 기여하는 구성원을 매우 적은 비율로만 가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짐멜이 논하였듯, 대규모의 조직은 언제나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잠재적으로만 가지게 되고, 소규모의 집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확립시키는 내용의 집합재를 생산하는 조직 – 사회주의에서도 그러하다. 85페이지 각주 5번에 의하면 짐멜은 오늘날까지 사회주의 또는 그와 유사한 사회가 언제나 소규모 집단에서만 가능했었다고 밝히는데, 이는 심지어 맑스 자신이 공산주의 사회의 조건들에 대해서 밝히는 초기 저술들에서도 말하였던 내용이다.

 

4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올슨의 맑스의 계급행위이론에 대한 섬세한 비판에서는 맑스가 합리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 개인의 행위에 기초한 이론임을 밝히면서 그 경우 계급행위라는 집합재 생산에 있어서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에 결국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적극적으로 계급행위로 나아가지 않음을 논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지점을 미리 깨닫고 ‘소수의 음모적 엘리트’에 의한 시대의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방식의 혁명 이론을 제시한 자들, 즉 집합행동 이론에 더욱 밝은 자들로 레닌과 트로츠키를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문제가 제시된다. 즉 거대한 규모의 조직이 있을 경우 이 조직의 목적을 위한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소수만이 결집한다는 것은 그 소수가 조직 내의 조직이 되고, 이 내부조직이 자신이 속해있는 거대한 외부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 된다. 설령 이 통제라는 것이 집합재 생산을 통해 공통의 이익을 달성시켜준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질적인 조직의 권력과 통제력도, 집합재를 생산해낼 수 있는 기술과 능력도 이 소규모 내부 집단에게 옮겨가게 된다. 이것은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구조로 귀결된다. 집합재의 성공적 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소규모 내부집단의 형태로 수행력을 결집시켜야 한다는 측면으로 접근할 때에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논평, 김석수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논평

김 석 수(서경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아렌트가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공적 공간의 확립과 관련하여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도입한 입장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아렌트가 근거로 하는 판단력이 합리성(도구적 합리성/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밝히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우선 필자는 인간의 삶의 두 가지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련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이 복수성, 다원성에 근거한 ‘행위’의 영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조건』(1958)에서 논의된 것으로, 인간의 삶의 조건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사물적 관계(측정하는 관계)를 넘어 말하고 행위하는 대화의 공간으로서 복수성과 다원성이 살아 있도록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 역시 아렌트가 언어를 넘어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추상적인 보편주의적 태도보다는 산파술을 통하여 끊임없이 다양한 의견과 설득 사이에 추구되는 언어적 긴장 관계를 중시한다. 즉 아렌트는 동굴을 떠난 태양중심주의 속에 담겨 있는 관조적 폭력을 비판하면서 동굴 속의 다수의 의견이 함께 하는 정치적 판단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개념의 박물관’을 해체하고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를 선포하면서 ‘오해가 이해를 낳는다’고 주장한 니체의 전략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고, ‘이해는 역사적이다’는 해석학적 전통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아렌트는 언어를 넘어선 관조적인 철학적 태도를 통하여 정치적 영역을 독식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폭력성을 간파하고 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현실의 복수성, 다원성에 관계하는 정치성과 관조의 단일성에 관계하는 철학의 통합을 부정한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에는 ‘작업’에서처럼 언어를 도구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관조’에서처럼 언어를 거부하는 세계도 부정한다. 따라서 아렌트가 주장하는 행위의 정치적 영역에서의 언어적 설득은 논리적 공통감(sensus communis logicus)이 아니라 미감적 공통감(sensus communis aestheticus)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잡아 쥔다(greifen)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Begriff)적 작업이 아니라 옆에(bei) 함께 걸어가는(treten) 참여(Beitritt)적 작업이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이성의 논리적 작업이나 합리적 작업을 통하여 진리를 주장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전체주의적 테러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료타르나 데리다가 진리와 정의를 통합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면과 일맥 상통한다.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주장되는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확장된 마음’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까지 나아가는 관찰자적 태도이다. 물론 이 때의 관찰자는 일방적으로 감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상호 대화에 참여하여 의사소통하는 관찰자다. 이런 관찰자적 태도는 행위가 유발할 수 있는 무모함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어는 고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주장되는 관조적 차원의 제어가 아니라 현실의 다수가 사회성을 근거로 상호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제어이다(*사유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 것은 근본악이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목적 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상호성과 언어적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반성적 판단력에 바탕을 둔 정치성과는 정반대 된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 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다양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점”(13쪽) 때문이다.

2. 문제 제기

이상의 필자의 이해에 대해서 평자 역시 대체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이 글 속에서 아직 도 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평자는 이 부분을 제시함으로써 필자의 글이 좀 더 선명해지기를 기대한다.

(1) 이 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즉 반성적 판단력과 합리성의 관계이다. 이 문제는 또한 현대 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던 하버마스와 리요타르의 논쟁 속에 담겨 있는 갈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 논쟁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 같이 복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성과 차이성, 공약성과 불가공약성, 합리성과 반합리성을 축으로 대립하고 있다. 전자는 결국 의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인 언어행위자의 주체적 참여를 통하여 복수성 속에 자리하고 있는 차이성, 불가공약성, 반합리성이 반사회성으로 이탈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불안의 요소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향해 있다면, 후자는 복수성에 내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기 위해 동일성, 공약성, 합리성을 도모하다보면 결국 기형적인 근대가 초래한 도구적 합리성에 다시 봉착하기 때문에 차이성을 풀어주고 열어주는 쪽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리요타르는 진리와 정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필자의 논의에 따르면 분명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기보다는 리요타르적이다. 특히 ‘탄생성’을 강조하고, ‘출현성'(현상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더 더욱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리요타르와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로 볼 수 있는가? 리요타르나 데리다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자신들의 불가공약성, 차연성 개념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들은 아렌트와는 달리 칸트의 공통감 보다는 숭고감을 더 중시한다(*물론 향수적nostelgia 숭고감이 아니라 혁신적novatio 숭고감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념이 다가갈 수 없는 차이성을 더 부각시키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주장과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라고 하기에는 리요타르적이고, 리요타르적이라고 하기에는 하버마스적이다. 도대체 아렌트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분명히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적 연대성보다는 공감적 연대성으로 향해 있다. 사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비극’을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유럽에 동화되지 않는 ‘패리아의 길’에 있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녀는 단순히 복수성과 다원성을 열어 주는 데만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실적 권력에 참여하여 결집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도 많은 관심이 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아렌트는 육체적 개체주의자도 아니고 정신적 보편주의자도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억지로 표현한다면 정신과 육체가 함께 하는 몸적 연대주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생활정치학’ ‘몸의 정치학’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런 입장은 당연히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적 계기에 흡수되어 있는 “체계의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지화”를 거부하고 상호행위를 강조하는 하버마스적 공론장 확보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공론장은 ‘이성적 합리성’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미감적 공통감’에 바탕을 둔 담론의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적인 공적 영역은 합리성만으로 필요 충분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고 충분성을 확보하려면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느낌의 보편성, 미감적 보편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차이는 보편성으로 향하느냐, 차이성으로 향하느냐라는 문제보다는 합리성과 미감성에 대한 경중에 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지 않을까? 아렌트는 베버적인 목적 추구적인 합리성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버마스가 비판하듯이 목적 초월적인 면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2) 이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든, 더 근원적인 문제는 아렌트가 하버마스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하버마스와 정반대된다라는 필자의 주장에 있다. 아렌트의 철학 체계 내에서 개념성과 탈개념성, 합리성과 미감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나아가 필자가 벨머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듯이, 아렌트의 이런 입장이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즉 공통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감적 보편성으로서의 연대성이라는 논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 외재적 접근이 논리적 보편성을 결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3)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phronesis)와 어떻게 다른가? 그러니까 평자의 질문은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동일하게 본질주의자로 규정하고 결국에는 이론지가 실천지 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비판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이 아렌트의 판단 개념과 멀리 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가? 필자의 주장처럼 “관찰자는 사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전체를 볼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위해야 한다면 더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왜 칸트의 취미판단 부분에만 집중하여 자신의 정치철학을 확립하고자 하고, 숭고함이나 목적론적 판단력 쪽으로는 넘어가지 않는가? 아렌트는 칸트의 입장과 완전히 같은가? 같지 않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가?

(4) 필자는 아렌트의 이런 정치철학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정서적 공감주의와 합리적 이기주의가 야합된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처럼 비합리성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성적 합리성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아렌트의 주장은 너무 높은 이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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