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미디어 이론

전자 미디어 신체 타자 권력, 오사와 마사치

전자 미디어 신체 타자 권력

오사와 마사치 지음 | 오석철, 이재민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3년 01월 14일 출간

전자 미디어 신체 타자 권력

책소개

오사와 마사치의『전자 미디어 신체 타자 권력』. 오사와 마사치는 전자 미디어를 문화사회학적으로 고찰하며 20세기 최고의 지성조차 개념화하지 못한 진리를 추적한다. 문자와 국가, 카프카 소설과 권력의 메커니즘, 오타쿠 현상과 전자 미디어의 관계도 폭넓게 분석하고,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소개

저자 : 오사와 마사치

저자 오사와 마사치(大澤眞幸)는 치바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교토대학교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를 역임했다. 도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전공은 사회학이다. 주요 저서로 『행위의 대수학』(1988), 『신체의 비교사회학 ⅠㆍⅡ』(1990/1992), 『자본주의의 패러독스』(1991), 『의미와 타자성』(1994), 『성애와 자본주의』(1996) 등이 있으며, 최근 저서로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2011), 『근대 일본사상의 초상』(2012) 등이 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술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2005), 『전후 일본의 사상 공간』(2010), 『내셔널리즘론의 명저 50』(2010) 등이 있다.

역자 : 오석철

역자 오석철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사회학과 미디어론이다. 번역서로 『전화의 재발견』(공역, 2005), 『도쿄 스터디즈』(2006),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2008), 『기타 잇키』(공역, 2010), 『맑스사전』(공역, 2011) 등이 있다.

역자 : 이재민

역자 이재민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학교 대학원 학제정보학부(정보학환)에서 사회정보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박사 논문을 집필하고 있다. 전공은 사회학, 미디어론, 문화 연구다.주요 논문으로 “대중문학과 사회”(2004), “베스트셀러론 재고”(2005) 등이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01 전화하는 밥의 두 가지 신념
철학적 퍼즐
엽서의 그림자
미디어 체험

02 전화의 쾌락
쾌락의 중독
유리되는 목소리
전언 다이얼과 다이얼Q2

03 메시지와 마사지
텔레비전이 나를 보고 있다
포르트∼다 놀이
매클루언

04 문자의 문화
문자가 대리한 것
문자의 신비력
문자의 기제
국어의 성립

05 들리지 않는 목소리 
내면의「목소리」
독서 혁명과 프랑스혁명

06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의식
네이션의 공간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가능 조건
화성인과 평범한 여성

07 매스컴에 대한 이유 없는 종속
한정적이지만 강력한 매스컴의 효과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와 부친의 사형선고
두 가지의 목소리

08 초패놉티콘의 기능
패놉티콘의 이상
두 가지의 ‘예스’
배신당한 ‘신의 눈’
직접민주주의의 악몽

09 권력의 변용
자본의 운동 과정
모드
권력의 변용
사형수의 영상

부록 오타쿠론
‘오타쿠’ 현상
자기동일성
‘오타쿠’라는 집합
이차적 투사
시니시즘으로부터의 변전

지은이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책속으로

전화나 컴퓨터 장치는 개인 공간이나 신체 등 원래는 외부의 타자가 가장 근접하기 어려운 사적인 핵심을 느닷없이 접속시킨다. 이러한 구성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전자 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이 지향하는 것은 원래는 직접 접속할 수 없을 터인 자신의 내면에 중간적인 통로를 경유하지 않고 타자가 직접 들어오는 형식이다. 송신자와 수신자라는 두 개의 닫힌 내면을 떼어 놓는 중간적인 경로를 생략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타자의 극한의 근접성이다.
_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전기ㆍ전자 미디어는 네이션을 가능케 한 보편적인 공간에 엄밀하게 부합하려 한다. 그러나 그 적합성은 너무나도 엄밀하고 또한 너무나도 성실하기 때문에 네이션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을 도리어 배신하고 만다. 그것은 전기ㆍ전자 미디어가 늘 ‘잘못된 배달’의 가능성을 동반한다는 것, 즉 전달하려고 의도하고 있던 타자와는 다른 타자에게 정보가 도달할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_ 《06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의식》 중에서

전자 미디어가 보장하는 직접민주주의는 평등한 개인의 주체성이 가장 강력한 형태로 실현되는 사회체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이와는 달리, 주체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순간에 자기해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주체성의 이념이나 그것에 기초한 정치체제는 실은 주체성이 제한된 범위에서만 현실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_ 《08 초패놉티콘의 기능》 중에서

출판사 서평

전자 미디어, 신체ㆍ타자ㆍ권력

디지털 시대는 유토피아인가?
현대 미디어 문명에 대한 비판적 통찰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극한으로 가까워지는 체험.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염두에 두지 못한 사태다. 오사와 마사치는 전자 미디어를 문화사회학적으로 고찰하며 20세기 최고의 지성조차 개념화하지 못한 진리를 추적한다. 문자와 국가, 카프카 소설과 권력의 메커니즘, 오타쿠 현상과 전자 미디어의 관계도 폭넓게 분석한다.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 책의 특징

인간의 조건
하이데거는 대상에 다가서고 멀어지는 행위가 현존재의 아이덴티티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감성과 순수오성을 종합하는 통각이 시간적 지연에 의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일정한 거리와 시차는 인간이 자율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미디어는 시공간을 압축하는 장치이고, 전자 미디어에서 그 기능은 극한에 달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디지털 시대는 유토피아인가?
오사와 마사치는 주체성과 권력 메커니즘의 변화에 주목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은 자아를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분열시킨다. 매스 미디어의 수용자는 메시지를 거부할 수 있지만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일상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자정보로 데이터베이스화되는 현실은 초패놉티콘 사회에 대한 우려를 낳는다. 미디어의 진화를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현대 미디어 문명에 대한 비판적 통찰
이 책의 논의는 학문적, 역사적 경계를 넘나든다. 칸트ㆍ푸코ㆍ데리다ㆍ고진의 철학, 프로이트ㆍ라캉ㆍ지젝의 정신분석학, 매클루언ㆍ라자스펠드ㆍ노엘레-노이만의 커뮤니케이션학 등을 참조하며 전자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문자의 탄생과 국어의 성립에서 전자 미디어 메커니즘의 기원을 밝혀내고, 당시의 사회적 문제였던 ‘오타쿠 현상’, ‘한신-아와지 대지진’, ‘옴진리교 사건’을 미디어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 추천사

기술, 인간, 사회의 상호작용을 인문학적 통찰력을 동원해 설명한다. 매클루언과 칸트를 아우르는 필자의 식견은 전자 미디어를 바라보는 데 필요한 새로운 해석 프레임을 제공한다. 특히 현상을 압축적이고 특징 있게 개념화하는 일본 연구자의 장점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디어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다.
_ 황용석,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방송통신융합학과 부교수

역사적으로는 전자 미디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인 ‘문자의 탄생’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도 ‘네이션’이나 ‘권력’ 등 현대사회론 형태의 미디어론에서는 종종 배경으로만 다루는 문제까지 논의하고 있다. 매클루언에게 ‘미디어론’적인 문제였던 주제를 매클루언과는 다른 방식과 문체로 설명한다.
_ 와카바야시 미키오, 《도쇼신문》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이다. 오히려 난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밝은 미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라는,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시대감각을 해독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록인 ‘오타쿠론’과 한신대지진, 사린 사건, 옴진리교에 대해 논한 상당히 긴 후기가 특히 흥미롭다.
_ 와타나베 준, 《산케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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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TV, ‘미디어 협동조합’으로 닻 올린다

국민TV, ‘미디어 협동조합’으로 닻 올린다

요즘 내 생각들 2013/01/24 18:14 정운현

지난 대선 과정에서 KBS, MBC 등 거대 방송사와 보수신문사가 주도하는 종편의 보수 일변도의 편파보도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국민방송’ 설립으로 분출된 가운데 새로운 방송, 공정한 보도매체에 대한 기대와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가칭) ‘국민TV방송’은 지난해 말부터 여러 차례 준비모임을 갖고서 최근 법인의 형태와 향후 방송국 설립 일정 등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또 해직언론인들이 중심이 돼 운영해온 <뉴스타파> 역시 대선 후 폭증한 회원수에 힘입어 제2의 도약을 위해 최근 직원선발을 마쳤으며,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대안언론 협동조합 씨알’도 빠른 속도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6일 열린 국민TV준비위원회 제4차 회의 모습


(가)국민TV설립준비위원회는 24일 제6차 준비위원회 회의를 갖고 법인의 형태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설립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방송 명칭을 ‘(가칭)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로 잠정 결정했다. 이밖에도 이들은 법인 설립에 앞서 임시사무소 마련과 홈페이지 구축 등을 비롯해 내달 초순까지 사업계획서 초안을 마련키로 했다.

준비위는 신문-방송사 출신의 전·현직 언론인, 대학교수, IT분야 전문가, 변호사 등 각계 인사 18명을 비롯해 이상호 전 MBC 기자 등 몇 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사무국장은 전 국민일보 노조위원장 출신의 조상운 씨가, 대변인은 민변 소속 이재정 변호사가 맡고 있다. 준비위는 조만간 추진위로 체제를 전환해 참여자를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그간 5차에 결친 준비위원 회의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거론됐던 것은 법인 형태를 주식회사로 할 것이냐, 협동조합 형태로 할 것이냐 였다. 둘 다 장단점이 있어 준비위원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6차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협동조합’ 형태로 결정하게 됐는데 이는 ‘국민TV’ 설립 취지와 배경 등을 강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식회사’ 방식의 경우 자금조달이 용이하고 투자자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점 등이 큰 장점이나 현행법 상 제약조건이 많으며 자칫 지나친 상업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반면 ‘협동조합’ 형태의 경우 출자한도 제한 및 지속적 조합원 확보, 게다가 조합원이 아닌 경우 사업 참여가 금지돼 있는 등 단점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 형태를 취한 것은 협동조합이라는 ‘빅텐트’ 아래 수익사업이나 콘텐츠 확보를 위해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 설립이 법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반시민들도 협동조합 형태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클뿐더러 기존 방송사와는 다른 법인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대안방송으로서의 이미지 제고 의미도 있다고 하겠다.

‘국민TV’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플랫폼’ 방식이다. 다시 말해 자체적으로 뉴스 보도나 시사교양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기본이요, <뉴스타파> 등 다른 매체들과도 협의를 거쳐 콘텐츠로 확보해 내보내는 망 사업자로서의 역할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OTT 서비스’ 형태가 유력한데 이는 현 정권의 매체 인가 가능성 등을 감안한 것이다.

준비위는 지난 16일 열린 4차 회의에서 경영-기술-콘텐츠 등 3개 분과위를 꾸려 각 분야별로 사업계획서 초안 마련과 법적 문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초창기 인력과 자금사정 등을 감안해 외부의 콘텐츠 사업자(PP) 등과의 협력방안을 비롯해 본 방송을 앞두고 ‘파일럿 프로’ 제작도 논의 중이다. 정확한 방송 개시일자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한편, ‘국민TV’의 출범을 염원하는 일반시민들은 ‘다음’에 카페를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25일 현재 ‘국민주권방송협동조합’(http://cafe.daum.net/kukminbangsong) 회원수는 9100명을 돌파했다. 이들은 지난 19일 회원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오프라인 설명회를 가진데 이어 내달에는 전국 6개 도시를 돌며 추가로 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지난 19일 열린 국민 ‘국민주권방송협동조합’ 주최 설명회 모습


이날 설명회에서 카페지기 주병국 씨는 “국민방송 카페는 국민TV 설립을 후원하는 모임으로서 아이디어 뱅크이자 모니터링, 피드백에 충실할 것”이라며 “오늘 행사를 계기로 조합원 친목 도모와 신규 조합원 확대에 더욱 주력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카페’ 측은 준비위에 비품지원 등을 하고 있으며 준비위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이날 행사는 전적으로 카페 회원들이 주관한 설명회 모임이었으나 행사 중간에 준비위 조성운 사무국장과 이재정 대변인(변호사)이 회원들과 문답을 통해 준비위의 그간 활동내용과 향후 ‘국민TV’ 설립 추진 방향 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 가운데 핵심내용 몇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방송국을 유지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고 또 수입을 내기 위해서는 광고가 불가피할 텐데 광고는 할 계획인가?
“수입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수입을 내기 위해 광고를 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자본에 의해 언론의 공정성이 훼손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 법인 형태를 협동조합으로 할 경우 시민단체도 가입이 가능한가?
“협동조합은 법인도 조합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단체 가입도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단체로 가입해도 구좌는 1구좌다. 협동조합의 성격이 그렇다”

– ‘국민TV’는 보도기능도 있나?
“공정방송의 핵심은 ‘보도’다. 따라서 당연히 보도기능을 갖게 된다. 게다가 뉴스보도 이외에도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등 시사성이 강한 프로도 방송할 계획이다.”

– ‘셋톱박스’ 방식으로 추진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가장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셋톱박스’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조합원 가정에 별도의 ‘셋톱박스’를 장치해야 하는 불편함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현행법상 별도의 허가절차가 필요 없고 대안방송의 성격과도 잘 맞다고 본다.”

– 시민방송(RTV)과도 관련을 맺고 있나?
“협의할 사안이 있을 경우 적극 논의할 방침이다. 다만 RTV의 경우 설립목적 자체가 시민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의 참여 채널이라는 점에서 서로 협조하는 데 한계점은 분명히 있다.”

– 지난 대선을 통해 보수-진보가 절반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칫 ‘국민TV’가 이를 더욱 고착화 시킬 우려도 있다고 보는데 전 국민을 다함께 아우를 방법은 무엇인가?
“‘국민TV’는 야권세력을 대표하는 방송이 아니다. ‘나꼼수 방송’은 더더욱 아니다. ‘국민TV’ 설립 논의의 출발점이 대선 결과로 인한 것이라면 이는 적절치 못하다. 많은 국민들은 지난 대선 때 주요 방송사들의 특정세력 편들기 등 불공정 보도에 대해 큰 실망과 불만을 나타냈다. ‘국민TV’는 정확한 보도와 공정하고도 중립적인, 제대로 된 방송을 해보려고 한다. 이것이 ‘국민TV’를 기대하는 분들의 참뜻이라고 생각한다.”

[번역] 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번역] 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와라
2008.12.19 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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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1913년에 쓴 ‘경험(Erfahrung)’이라는 글이다.

원문은 독일어이지만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관계로 영역본을 기초로 번역했다.

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Hava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이고(이 선집에서 이 글은 제일 처음 실려 있다), Lloyd Spencer와 Stefan Jost가 영역했다.

벤야민 영역본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 구분되지 않고, 둘 다 Experience로 번역되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도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만 나오고 있다. 아직 독어판과 비교해 보지 못한터라 Erlebnis도 Experience로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험과 체험이 이 글에서도 (표기는 경험으로 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를 보면)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뒷부분에서 경험으로 번역한 몇몇 부분은 체험으로 옮겨 적어야 의미가 명확해 질 듯 하다. 이 구분은 벤야민의 사상을 연구할 때 핵심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므로 개념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던지는 충격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체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침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나는 여기서 경험=상징계, 체험=실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벤야민에게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떠들어도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글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태해지려할 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어떤 것이든 전환점이 필요할 때 즐겨 읽는 글이다. 내 영어(와 번역_ 실력의 미천함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읽기 싫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니 내 책임은 아니겠지… 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직 초벌 번역이라 문장이 이상한 데가 많을테니 감안하고 읽어 보시길.

추가 : 연구소의 로아님이 벤야민 독어판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해 본 결과, 이 글에 나오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Erfahrung으로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로아님 확인 감사^^). 그리고 영어로 sprit(독어 Geist)이라고 되어 있는 용어를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보통 독어의 Geist는 영어로 spirit로 번역되는데 한글로도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들(옆에 spirit이라고 영문표기를 달아놓았습니다)은 정신(geist)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spirit을 영혼으로 옮긴 것은 without spirit과 같은 문구가 나와서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 없이’정도가 되서 어감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리라 판단해서입니다. 정신없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관영어구처럼 쓰이기 때문에 벤야민이 쓰는 맥락과 조금 다르게 다가올수 있으니까요. 어쨋든 이런 점 주의해서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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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xperience, Erfahrung, 1913) – 발터 벤야민

adami-benjamin_2.jpg   책임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가면 쓴 이들에 맞서 싸운다. 어른들의 가면은 ‘경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항상 동일하다. 어른은 항상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젊음, 이상, 희망, 여성. 그것은 모두 환상이다. – 종종 우리는 겁먹거나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는 옳다. 우리의 반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 시도해 보자. 어른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 역시 한 때 젊었었다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했었다는 것, 그 역시 그의 부모에 대한 믿음을 거절당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훌륭한 방식으로 웃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는 미리 우리가 살아갈 (진지한 삶의 기나긴 엄숙함 이전에 오는)철없는 환희의 세월들을 평가 절하한다. 이렇게 선한 것, 교화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짧은 젊음을 허용조차 하지 않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다른 선생들을 알고 있다: 진지하고 엄한, 그들은 우리들을 삶의 고역으로 바로 밀어 넣는다. 양자의 태도는 우리의 세월들을 평가절하하고 파괴한다. 게다가 감정에 엄습 당한다: 우리의 젊음은 짧은 밤이다(환희로 채워라); 그것은, 타협의 세월들, 관념의 빈곤, 그리고 활력의 결여와 같은, 거대한 ‘경험’에 뒤따라 올 것이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이 하나, 결코 다를 것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 그것은 잔인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새롭거나 진취적인 어떤 것을 장려한 적이 있던가? 아니다, 명확히도 이것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 진실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 는 그 자신 안에 지평을 수립한다. 그럼, 경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이 속에 비밀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위대한 것, 의미 있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the philistine)은 경험을 그의 복음으로 취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의 공통성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기에 경험과는 다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속물에게는 왜 삶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른 것은 모른채) 경험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sprit)의 부재와 황량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공통적인 것 그리고 항상-이미-낡은 것 외에 다른 것과 내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들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비록 아직까지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했다 해도 지속되어야 하는 충실함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든 이들은, 피곤한 몸짓과 초연한 절망으로, 모든 것에서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후회일 것이고, 초석이 되는 용기, 희망, 의미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게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영혼(spirit)은 자유로울 게다. 하지만 또 다시 삶은 쇠약해질 것이다. (경험의 총체인)삶은 위안 없는 것일 뿐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물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spirit)과 함께 그런 낯선 삶을 인도해야 하는가? 그들의 나태한 자아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삶에 의해 농락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만의 영혼으로 그것들에 값어치를 투여한다 – 경솔한 그는 착오에 만족한다. 그는 탐색자에게 “너는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 “그것이 내 경험이야.” 그러나 탐색자에게 ‘착오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스피노자). 다만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의미와 영혼이 결여된 경험이다. 아마 맞서는 자에게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든, 그는 결코 덤덤하게 포기하지도, 속물의 리듬에 마취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에게 ‘(당신은)모든 새로운 무의미함 속에서 기쁨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옳음 속에 잔존한다. 그는 스스로 재-확신 한다: 영혼(spirit)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혼’ 앞에서 위대한 경외와 가혹한 복종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비판적이 된다면, 그도 그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에 반해 그가 겪는) 영혼의 경험 조차도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에게 말하라
그가 한 사람의 남자/어른(a man)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젊음의 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실러, 돈 카를로스 중)

속물에게는 “그의 젊음의 꿈”만큼 꺼림칙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감성적임은 그의 혐오의 보호적 위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예전의 그를 부르는)영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길하게 그를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젊음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런 무서움(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비웃도록 가르친다. 특히 영혼 없이 경험하는 것이 편하다고, 만약 되찾을 수 없다면.

   다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범접할수 없고, 가장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결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개인은 방황의 끝에서만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 속물은 그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속적인 영혼없음(spiritlessness) 중의 하나이다. 젊음은 영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덜 쉽게 위대함을 얻을수록, 방황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영혼과 더 많이 대면할 것이다. – 그가 남자/어른이 되었을 때, 젊음은 측은하게 될 것이다. 속물은 불관용적이다.

 http://multitude.co.kr/193

‘트위터 정치지수'(Twitter Political Index; 트윈덱스)

‘트위터 여론지수’란 지난 11월 끝난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당선을 예측해 화제를 모은 ‘트위터 정치지수'(Twitter Political Index; 트윈덱스)를 본 딴 것이다.

캡처1

 

지난 8월 이후 트위터 여론 지수 추이를 살펴보면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 후보와 1위 자리를 다투는 사이 박근혜 후보는 큰 격차를 보이며 3위에 머물렀다. 이후 박근혜 후보가 꾸준한 상승세를 나타냈고 지난 10월~11월 단일화 국면에선 세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혼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달 24일 안철수 후보 사퇴 이후 문 후보와 박 후보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는 추세다.

애초 트위터 본사는 이번 한국 대선에서도 ‘트위터 여론지수’를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돌연 취소하기로하였다.  이는 두 후보가 오차범위에서 접전을 벌이는 대선 여론조사 결과와는 달리 너무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트위터가 결국 지수 공개를 취소한 것도 이런 일방적인 결과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3128

네트워크 정치

시민 네트워크 정치로의 가능성과 한계,  안병진 , 한국사회과학연구소, 동향과전망 85,  2012.6, 7-49

시민_네트워크_정치로의_가능성과_한계 [PDF File]

 

안병진, “네트워크 정치 시대” (중앙일보 2012.1.17)

네트워크 정치 시대

스티브 잡스는 비록 지난해 사망했지만 올해 대한민국은 그의 해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 정치에도 네트워크 정치의 패러다임이 초보적으로나마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아이패드 등을 통해 기존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수직적인 패러다임을 넘어 개방·공유·협업의 시대를 열었다. 이번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는 여의도 정당이나 지역 정당이 아니라 전국 지지자 네트워크에로의 개방을 통해 ‘스티브 잡스 모델’에 한 발 더 다가갔다.

물론 민주당은 지난 2002년 예비경선을 통해 개방적 모델로의 실험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일회적 실험은 여전히 정당과 외부 네트워크의 경계가 고정적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등을 통한 전통적 미디어 엘리트가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면서 돈이 많이 드는 ‘청중 민주주의’ 단계에 불과했다. 반면에 이번 실험은 정당과 외부의 굳은 경계를 유동화시켜 정당이 일상적으로 시민의 온/오프 숲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역사적 시도다. 무엇보다 미디어 엘리트들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의 시민들이 다양한 책임과 기부를 동원하는 네트워크 정치 시대로 한 발 진전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여기서 ‘겨우 한 발 진전’이라는 평가는 민주통합당 관계자들에게 혹시 서운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네트워크 정치의 진정한 잠재력은 단지 개방이 아니라 공유와 협업에 있다. 필자는 2002년에 ‘리눅스의 정치’(개방적 네트워크에서의 집단지성 혁신) 패러다임을 제시한 이후 슈퍼스타K 방식의 경선, 온/오프 융합의 21세기 타운홀 미팅 등 다양한 혁신을 여야에 요구해 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시민 온/오프 네트워크와 공유·협업을 통해 더 진화된 정치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당들은 올해를 대대적인 혁신과 경쟁의 해로 삼아야 한다. 그 핵심은 소수 활동가 정당이나 청중 민주주의 시대를 넘어 네트워크 정치 시대를 둘러싼 혁신의 경쟁이다. 갤럭시탭과 아이패드가 혁신 경쟁을 하듯이 박근혜와 한명숙 대표는 이제 본격적 경쟁의 시험대에 올랐다. 총선 공천, 정책 어젠다, 대선 경선에서 누가 더 스티브 잡스의 매력적 혁신에 다가가는지가 승부의 결정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일각의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네트워크 정치의 시대는 곧 직접민주주의나 비전문가만의 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의사를 해석하고 적절히 대표하는 대의제와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열린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융합되어야 한다. 미시적 분야의 정책 전문가와 폭넓은 집단지성의 지혜는 복합적 네트워크 속에 서로 수렴되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 두 가지를 멋지게 융합한 중용의 대가다. 향후 10년은 이 균형을 이루어내는 정치인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식 개방·공유·협업의 정치와 경제를 누가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http://ipm.hallym.ac.kr/column/13051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2.0

저자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 천  번역
출판사   현실문화 | 2012-07-10 출간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 (안천), - 웹진문지 - 문학과지성사
[알라딘서재]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역자 현지 인터뷰
개인 무의식에  공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출판사 리뷰

21세기 일본 사상계를 뒤흔든 아즈마 히로키의 최신 정치사상서
“일반의지 2.0 ― 루소, 프로이트, 구글” 한국어판 발간!

정치사상가로 변신한 아즈마 히로키의 새로운 얼굴
2000년대 이후 일본 사상계와 문화 비평계에서 아사다 아키라와 가라타니 고진을 잇는 비평가로 떠오른 아즈마 히로키의 최신 정치사상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발간되었다. “일반의지 2.0″은 지난해(2011년) 일본에서 발간된 후 3만 부 이상이 팔리며 현대 정치에 관한 대중적 논의에 불을 붙인 화제작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아즈마 히로키는 ‘서브컬처 비평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차례로 번역되어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를 비평의 대열에 올려놓은 선구적인 비평가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브컬처 비평가이기 이전에, 자크 데리다에 관한 논의를 펼친 “존재론적, 우편적”으로 21세기에 주목해야 할 현대 사상가로 지목된 바 있다. “일반의지 2.0″은 그동안 서브컬처 비평에만 몰두했던 아즈마 히로키가 사상계에 귀환하며 펼쳐낸 책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서브컬처 비평가가 아닌,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그의 다채로운 변신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루소, 프로이트, 로티를 경유한 전복적 민주주의론
‘소통 없는 민주주의’란 가능한가?

아즈마는 “일반의지 2.0″에서 ‘소통 없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소통 없는 민주주의’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기묘한 민주주의이다. 우리 사회는 논의와 타협을 거쳐 대의에 도달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소통 없는 민주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봉착한 곤란을 해결할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아즈마는 ‘소통 없는 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장 자크 루소, 지그문트 프로이트, 리처드 로티에서 찾으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먼저, 아즈마는 루소의 ‘일반의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새롭게 추출하고 분열된 루소를 통합시킴으로써, 일반의지를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정립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개개인이 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들 때 추상적인 주권자로서 ‘일반의지’가 탄생하고, 이어서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 정부(국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일반의지는 토론과 타협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다. 충분한 정보를 가진 인민들이 어떤 소통도 하지 않는다면, 작은 차이가 모이게 되어 결과적으로 일반의지가 생성된다는 것. 여기에서 아즈마는 일반의지의 기본 요건으로 ‘소통의 부재’와 ‘다양성의 확보’를 도출해낸다. 즉 루소가 꿈꾼 민주주의란 소통을 통해 다양성을 감소시킨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 없는 민주주의’, ‘일반의지 2.0’의 발현은 현실 정치에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허무맹랑한 사상놀음에 불과한가? 250년 전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토론과 의견 조정을 거치지 않고 개개인의 의지가 다양한 모습 그대로 가시화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개인의 의사가 ‘데이터베이스’라는 ‘집합적 무의식’으로 집적될 수 있다는 것이 아즈마의 주된 논의이다.

예를 들어, 구글(google.com)이나 아마존(amazon.com). 이용자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할 뿐이다.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검색 패턴과 행동 이력이 축적되어 ‘검색어 완성’이나 ‘도서 검색의 경향’이라는 집단적 ‘의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별 의식 없이 행한 행동들의 축적, 무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매일 전 세계적으로 2억 개 이상의 ‘재잘거림(twit)’이 만들어지는 트위터의 데이터를 적절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된다면 이용자 전체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패턴을 추출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개개인들의 다양한 의지가 집적되는 장인 것이다.

폴리스에서 대중의 무능력과 정치 환멸을 드러내다
무의식/의식의 연대로 구상한 ‘민주주의 2.0’

아즈마는 이 소통 없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패턴을 ‘일반의지 2.0’이라 부른다. 그러나 대의제와 소통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대의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주장이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소환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토론을 통한 의식적 합의가 아니라 정념이 넘치는 집합적 무의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란 어디까지나 제어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신분석의 치료 과정은 무의식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언어화하면서 진행되는데, 언어화 혹은 가시화 과정을 거쳤을 때 욕망의 폭발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즈마는 미래의 정치를 사유할 때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의식 민주주의’는 정치가 대중의 무의식을 배제하지도 그 무의식에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으면서, 무의식을 가시화한 다음에 그것의 제어를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토의를 인민의 무의식에 노출시켜라.” 이것이 이 책에서 아즈마가 내거는 미래 정치 강령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대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정치인들만 모여서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외부에 있는 대중의 ‘무의식’과 대결하는 과정을 거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사례를 들자면 국회의사당에서 논의나 표결을 할 때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에 관한 국민들의 트윗을 스크린에 띄운다면, 국회의원들은 적어도 자신의 주장이 국민들로부터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후 의사 결정에 그 반응을 반영할지 여부는 물론 국회의원들이 결정할 일이다.

무의식 민주주의는 사실상 전통적인 정치사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정치란 ‘이성’, 즉 의식에 기초한 ‘공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즈마는 리처드 로티를 검토함으로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뒤흔든다. ‘소통을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 모델은 대중에게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닫혀 있었으며, 이 모델에서 정치는 대중의 일반의지를 반영하기는커녕 ‘밀실의 정치’로서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고 아즈마 히로키는 지적한다. 바로 여기에서 흥미로운 역전이 일어난다. 일반의지 2.0의 세계에서는 대중의 사적인 행동이 집약된 ‘집합적 무의식’이 공적이고 논리적인 정치의 장의 한계를 무너뜨린다.

환경 관리 권력으로서의 데이터베이스가 만든
미래 정치의 지형도 ‘민주주의 2.0’

이렇듯 아즈마는 구글과 트위터로 대표되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킹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토대가 될 환경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아즈마가 말하는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민주주의란 대안적 의사 전달의 창구로서의 공간이라는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 낙관론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낡은 통념 대신에 ‘데이터베이스(집합적 무의식)가 민주주의를 바꾼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민주주의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2.0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별 다른 의식 없이 입력한 검색어들, 트위터에 내뱉은 중얼거림과 불평들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한다. 여기에 토론이나 논의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정보환경은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비(`)소통의 공간이다.

이와 같은 정보환경에 대한 독특한 시각이 “일반의지 2.0″의 배후에 있다. 아즈마는 21세기 정보환경의 변화를 푸코의 ‘규율 훈련형 권력’이라는 근대사회의 원리가 아닌, 의식을 거치지 않고 개인을 물질적으로 제어하는 ‘환경 관리형 권력’으로 설명한다. 교통카드의 유무라는 물리적인 조건만으로 출입을 관리하는 지하철 개찰구 시스템은 개인을 물질적으로 제어하는 ‘환경 관리형 권력’의 대표적인 예이다. ‘환경 관리형 권력’이 점차 확산될 앞으로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정보’와 연동하게 될 것이다. 구매 이력을 통해 소비자의 취향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제품을 권하는 아마존의 ‘추천 기능’처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정보’가 네트워크상에 ‘미래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반의지2.0″의 구상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새로운 민주주의론이 만나 만들어낸 미래 정치의 지형도이다. 인터넷 미디어에 쏟아내는 사적인 재잘거림을 집적한 후 소통의 장으로 피드백함으로써, 공적이라고 여겨지는 소통의 폐쇄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즈마 히로키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유지하는 입장이다. 기존의 정당 정치와 대중매체는 다양성을 줄이고 차이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정치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개개인의 정치적 차이는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그는 민주주의 핵심적 가치인 ‘다양성’과 ‘비(`)소통’이 정보환경과 만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 즉, ‘민주주의 2.0’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유통기한이 만료되어가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디자인한 그 대담한 구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치의 미래를 다시금 사유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도시국가 시대, 지역 언론의 역할

 

세계적인 도시들의 공통점은
도시발전 위한 가치를 생산하는
지역언론이 중심에 있다는 것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지금까지 도시 미디어는 관-민 갈등, 부정부패, 범죄 등 수시로 일어나는 흥미로운 사건을 보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 상대적으로 도시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정책 현안의 역사적 배경, 장기적 혁신 비전, 지역 숙원사업의 해결방법에 대한 진지한 취재나 기획 보도는 다소 소홀히 했는데, 최근 급속한 도시화 결과 도시 미디어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1950년 지구 전체에 75곳에 불과했던 인구 100만명 이상 도시는 2011년에는 447곳으로 늘었다. 25만명 이상의 도시는 전세계에 수천곳에 이른다. 2050년께엔 65억명이 도시에 거주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세계 인구의 70~75%에 해당한다. 이미 도시는 세계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와 깨끗한 물의 60~80%를 소비하고 있다. 도시 내외부의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는 지역뿐만 아니라 국가 및 세계 경제 성장의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삶의 터전인 도시에 활기를 부여하고 도시 자체의 고유한 기능을 회복하려면 지역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이 최근에 발간한 ‘디지털 미디어 지도 그리기: 미국 편’을 보면, 미국에선 도시를 기반으로 자생하는 지역 언론이 도시의 활력 증진에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미국의 지역 언론사들은 디지털 기술의 쌍방향성을 이용해 시민들에게서 직접 뉴스를 공급받으며 도시 주변 이슈에 대한 추적과 토론 기능을 극대화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집중 조명한 언론 매체를 간략히 살펴보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에브리블록’으로, 시카고에서 시작한 이 매체는 뉴욕을 비롯한 16개 대도시에 확산됐다. 도시 주변의 크고 작은 행사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식당, 부동산, 도로 상태 등 거의 모든 정보를 망라하고 있다. 에브리블록은 4개의 주요 메뉴로 구성돼 있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해주는 코너와 지역 정부가 시민에게 전하는 정보 모음, 해당 도시의 뉴스 언급 상황을 추적하고 모니터하는 미디어 멘션, 소셜미디어에서 흥미로운 유시시(UCC)를 찾아 소개하는 메뉴 등.

이밖에도 미니애폴리스에서 운영하는 <민포스트>가 있다. 이 신문은 미네소타 지역의 고품격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비영리·비당파적 매체다. 온라인으로 운영되지만 주중 매일 발행되며 텍스트 이외에 멀티미디어형 뉴스도 제공한다. 2012년 2월 현재, 이 신문의 운영을 위해 연간 3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화 10달러부터 2만달러를 기부한다. 그 밖에 2009년에 설립된 <텍사스 트리뷴>도 도시 발전을 위한 공공 미디어로서 광고를 비롯하여 민간 기업, 회원 기부자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아울러 <뉴욕타임스>의 온라인 경쟁자인 <허핑턴 포스트>도 시카고와 뉴욕 등 대도시 시민을 위한 독립 사이트를 최근 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또다른 동향은 미국의 인터넷통신사업자인 에이오엘(AOL)이 운영하는 지역 뉴스매체 <패치>다. <패치>는 에이오엘이 온라인 지역광고 촉진 등을 위해 인수했는데, 전국에 걸쳐 800여개 <패치> 사이트를 운영하며 전문 저널리스트와 시민 기자들이 협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역화된 뉴스와 정보 콘텐츠가 확산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21세기는 도시 국가의 시대다. 시공간적 경계를 넘어 도시가 외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하이퍼로컬’ 세상이 열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도시들의 공통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도시 발전을 위해 공유해야 할 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유통·확산하는 지역 언론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도시 중심의 지역 언론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지난해 5월 부산시의회가 ‘부산시 지역신문 발전 지원조례’를 제정했지만 아직 전국적 움직임은 미약하다. 조례 제정이 도시 고유의 성장 동력을 지필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438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