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근대정치론

홉스주의적 세계관과 로크주의적 세계관

홉스주의적 세계관과 로크주의적 세계관 (12)

by 몽실이^^   2013-06-14 6:03 pm

전에, 미국의 어떤기사에

공화당, 민주당 지지자의 성향은 어릴적 부터 결정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좌 우익은 어릴때 부터 결정된다는,, 이야기 일텐데,,

 

뭐 self defense적 성향이 강렬한  미국인들의

특성상 민주당도 좌익이 될수 없지만요..

 

개인의 심리상태에 기인한, 세상을 어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결정된다는 뜻이겠지요..

 

홉스나, 로크는 사회계약설을 주창한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인류문명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지요…

 

어떤 지나인들이 주장한,, 모택동 따위와는 비교할수 없는,,

인류 문명에 족적이 큰 사람들입니다..

 

아무튼

홉스주의적 세계관은,

세상은 stealthed hazard  보이지 않는 위험이 잠재해있는,

약육강식적 험악한 곳이라는 것이 기본일듯요..

자기방어적인 본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또 인생경험이 많아질수록,,

홉스주의적 세계관화 되지요..

 

로크주의적 세계관은,

고등한 이성을 기반으로

인간은 서로 타협하여, 조화롭게 살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점으로서,,

여성들과 그리고 좀 지적인 사람들이 이런 관점에 있는 경우가 많지요..

 

홉스주의적 세계관을 가진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우익적 성향을

본능적으로 보이게 되며,,,

로크주의적 세계관을 가진사람들이  좌익적 성향을 보이게 되지요…

 

북한이 한국을 욕할때 쓰는 사람 못살 세상이라는 것도,  홉스주의적 세계를

묘사한 것일텐데요…

 

실제 세상이 홉스주의적 세계인가, 로크 주의적 세계인가

여기 사이트의 많은 사람들의 논쟁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의 차이에

기인 하겠구요…

 

어떤 것이 실제에 더 가까울 까요…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이 어떤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홉스주의적 세계일 것이라고 봅니다만,,

 

로크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여러 정책을만들어.,,  그야말로,,

민주당의 햇볓정책이니,,  다문화 인권주의자들의 외국인유입하여 서로 조화롭게

사는것이 가능하다는둥,,,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상대가 문화가 높고,  지적이고, 여성들이라면, 로크주의적 관점에 기인한 정책도

효과적이겠습니다만요..

 

인간은,

공공지향적 본성,, 이기주의적 본성,,

평등주의적 본성,  계급주의적 본성,,

홉스주의적 본성,,  로크주의적 본성,,

공히 가지고 있지요..

 

허나,,  인간에게 있어서,,

이기주의적 본성,,  계급주의적 본성,,  홉스주의적 본성이,,

훨씬 더 강렬하다고 볼수 있을듯요..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59686

민주적 헌정국가의 역사적전개, 마르틴 크릴레

표제/책임표시사항 민주적 헌정국가의 역사적전개 / 마르틴 크릴레 지음;국순옥 옮김크릴레, 마르틴  국순옥,  Kriele, Martin
발행사항 서울: 종로서적, 1983
형태사항 438p.;23cm
주기사항 Kriele, Martin
원표제: Einfuhrung in die staatslehre
국립중앙도서관 원문정보 데이터베이스(database)로 구축됨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341.2    듀이십진분류법-> 321.8    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 -> 613
자료이용안내 원문정보는 디지털도서관 디지털열람실을 예약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목차내용

[목차]

한국어 판에 붙이는 글 = ⅰ
머리말 = ⅲ
제1부 국가는 평화 실현의 전제 조건이다 = 5
제1장 정당성 = 7
1. 주권과 정당성 = 7
2. 공직―권력 및 법 = 10
3. 법실증주의와 정당성 = 15
4. 공리주의적 개인주의 = 20
5. 정당성의 기반으로서의 “실질적 합리성” = 25
6. 규범성의 사실성에로의 해소 = 30
7. 실천 이성 = 33
제2장 주권 = 41
1. 국내의 평화 = 41
2. 종교 전쟁과 “제3당사자” = 43
3. 내전과 경찰 수단의 동원 = 48
4. 주권자와 주권 = 52
5. 주권의 정당성과 이를 담보하기 위한 제 조건 = 55
6.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주의 = 60
제3장 대외적 주권 = 65
1. 주권과 국제법의 효력 = 65
2. 국가 개념의 평화 보장 기능 = 68
3. 독일―독일 연방 공화국 및 독일 민주 공화국의 사례 = 74
4. 국가 개념의 유형 = 83
5. 국가 권력과 국가 하위의 권력 = 87
6. 국가 권력과 국가 상위의 권력 = 92
7. 영토 = 101
8. 영토 고권 = 103
9. 국법상의 개념으로서의 국민 = 106
10.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국민 = 109
제2부 헌정 국가는 자유 실현의 전제 조건이다 = 113
제1장 법의 지배 = 115
1. 헌정 국가의 제 단계 = 115
2. 재판 절차와 정치 과정 = 117
3. 법의 지배와 법치 국가 = 121
4. 주권 부재의 헌정 국가 = 124
5. 권리로서의 인권과 관용으로서의 인권 = 130
제2장 17세기의 영국과 헌정 국가의 기원 = 135
1. 영국의 절대주의와 그의 도전 = 135
2. 응전의 논리로서의 법의 지배 = 139
3. “중립적 권력”과 내전 수행의 당사자―양자 택일의 딜레마 = 144
4. 평화 확보 수단으로서의 내전 = 148
5. “인간 성악설” = 152
6. 복잡성 = 162
7. 비상 사태와 정상 사태 = 169
제3장 인권과 권력 분립 = 175
1. 미국법과 프랑스 계몽 사상을 둘러싼 인권 기원 논쟁의 실상과 허상 = 175
2. 기본권의 원형 = 178
3. 미국 연방 및 제 주 헌법의 기원 = 185
4. 평등 부재의 헌정 국가―미국의 사례 = 189
5. 헌정 국가 부재의 인권―프랑스의 사례 = 192
제4장 의회주의 = 197
1. 공개 토론을 매개로 한 진리의 탐구 = 197
2. 실천 이성의 부정 = 201
3. 이데올로기 = 206
4. 가치 대상주의와 이익 다원주의 = 212
5. 변증법적 토론 개념 = 217
6. 진보 = 222
7. 원내 다수파 = 226
8. 공개―언론 기관 및 관습률 = 230
제5장 헌정 국가와 경제적 자유 = 237
1. 헌정상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 237
2. 경제 계획과 계획 경제 = 241
3. 소유적 개인주의 = 246
4. 소유적 개인주의와 시장 경제의 부패 타락 = 250
5. 소유적 개인주의와 헌정 국가의 부패 타락―미국 연방 헌법의 사례 = 257
6. 기본권의 공동화 현상 = 262
7. 소유적 개인주의와 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응답 = 270
제3부 민주적 헌정 국가는 정의 실현의 전제 조건이다 = 277
제1장 국민 주권 = 279
1. 국민 주권과 법의 지배 = 279
2. 자유와 동일성 = 284
3. 동일성 민주주의의 자기 지양 = 290
4. 민주적 헌정 국가와 과도기 민주주의론 = 296
5. 대표와 동일성 = 299
6. 동일성 원리의 한계 = 303
7. 평의회 민주주의 = 307
8. 기속 위임 = 311
9. 평의회 제도의 실패와 그 원인 = 314
제2장 국민 주권과 동일성―역사적 사례의 고찰 = 325
1. “헌법 제정 권력(1789-1791)” = 325
2. 묵시적 동의와 정당성 = 329
3. 헌정 국가(1791) = 334
4. 용호 상박의 주권 쟁탈전 = 338
5. 헌정 국가의 붕괴(1792) = 342
6. 의회 주권(1792-1793) = 348
7. 공안 위원회 독재(1793-1794) = 352
8. 영국의 민주주의와 프랑스의 민주주의 = 358
제3장 독일에 있어서의 국가와 사회 = 365
1. 독일적 보수 반동의 태동 = 365
2. 극한적 대립 상황의 정착 = 373
3. 민주적 자유주의의 좌절 = 377
4. “국가”대 “헌정 국가” = 384
5. 권위주의 국가와 전체주의 국가 = 392
제4장 민주주의와 자유 = 397
1. 의회주의와 민주주의 = 397
2. 정당 제도 = 401
3. 보통 및 평등 선거 = 408
4. 자유와 평등 = 414
5. 기본권과 민주주의 = 418
옮기고 나서 = 427
참고 문헌 = 429

http://www.dibrary.net/search/dibrary/SearchDetail.nl?category_code=ct&service=KOLIS&vdkvgwkey=121712&colltype=DAN_HOLD&place_code_info=153&place_name_info=%EB%94%94%EC%A7%80%ED%84%B8%EC%97%B4%EB%9E%8C%EC%8B%A4&manage_code=MA&shape_code=B&refLoc=kolis&category=kolis&srchFlag=Y&h_kwd=%7C&lic_yn=Y&mat_code=GM#dummy

헌법국가의 도전, 마르틴 크릴레

헌법국가의 도전

책소개

『헌법국가의 도전』은 Koln의 헌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Martin Kriele가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0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모음집이다. Recht-Vernunfr-Wirklichkeit에 실려 있는 논문들은 헌법에, 법의 일반문제에, 법철학의 근본문제에, 그리고 인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하나의 저술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고 논평한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서평은 아니지만,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논문을 소개하고 그럼으로써 Kriele의 반평생에 걸친 학문적 업적의 단면을 살펴보고 있다.

목차

1 이성이 아니라 권위가 법을 창조한다
2 코크와 헤일
3 보통법인가 아니면 자연법인가 철학자의 견해
4 보통법인가 아니면 자연법인가? 법률가들의 견해
5 주권이론: 영국에서의 내란의 동기
6 누가 권위를 파괴하는가?
7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주권이론의 상이한 기능
8 관용전술과 억압전술: 기회와 모험
9 홉스의 이상국가와 그의 내란에 대한 공동책임
10 “인간성악설” 또는 법치국가와 무정부상태의 혼동
11 비상사태와 정상상태
12 계몽군주냐 아니면 계몽된 제도냐?

마르틴 크릴레

마르틴 크릴레(Martin Kriele, 1931년 1월 19일 ~ )는 독일의 법학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뮌스터 대학교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행정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인 한스 율리우스 볼프(Hans Julius Wolff)와 헤겔 연구의 거장 요아힘 리터(Joachim Ritter)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뮌스터 대학교에서 볼프의 조교로 있으면서 박사학위 논문 〈정의의 기준〉(독일어: Kriterien der Gerechtigkeit)을 통해 법철학의 지배적 조류가 된 상대주의를 다루었다. 그는 구체적인 판결과 결정이 그때 그때마다 ‘더욱 기본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원리와 그 결과의 형량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 법관의 판결과 입법자의 결정은 어느정도까지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를 논하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학술재단의 지원을 통해 미국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서 연구하고, 귀국해 1966년에 뮌스터 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1967년에 언스트 본 히펠(Ernst von Hippel) 교수의 후임으로 쾰른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8년부터 루돌프 게르하르트(Rudolf Gerhardt)와 함께 독일의 유일한 법정책학 전문지 《법정책학지》(독일어: Zeitschrift für Rechtspolitik)를 간행하고 있다. 1977년부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 재판관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작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독일어: Einführung in die Staatslehre, 국순옥 역, 1983년.)는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는 책이다.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국가(평화), 권력분립적 헌법 국가(자유), 민주주의(정의)의 세 단계로 나누어 그 법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제자인 대한민국의 홍성방은 《민주주의 세계혁명 : 자유는 왜 관철되는가》(독일어: Die demokratische Weltrevolution : warum sich d. Freiheit durchsetzen wird, 1988년, 역 1990년)와 《법과 실천이성》(독일어: Recht und praktische Vernunft, 1979년, 역 1992년), 《법발견론》(독일어: Theorie der Rechtsgewinnung, 1976년, 역 1995년), 《해방과 정치 계몽주의 : 인간의 존엄에 대한 변론》(독일어: Befreiung und politische Aufklärung : Plädoyer für d. Würde d. Menschen, 1986년, 역 1988년), 《헌법국가의 도전》(독일어: Die Herausforderung des Verfassungsstaates : Hobbes u. engl. Juristen, 1970년, 역 2007년) 등을 한국어로 소개한 바 있다.

해방과 정치 계몽주의 : 인간 존엄 에 대한 변론, 마르틴 크릴레

 해방과 정치 계몽주의

: 인간 존엄 에 대한 변론마르틴 크릴레 저/홍성방 역 | 새남

해방과 정치 계몽주의

책소개

이 책은 해방의 개념을 둘러싼 여러 이념들을 다양한 목으로 다루고 있으며 정치 계몽주의의 정신적 도덕적 전통을 담고 있다. 또한 교회의 정체 계몽주의가 200년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하게 된 것을 역사적, 세계 정치적인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사회적인 불의 폭력, 차별 등으로 인권을 침해당하는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저자 소개

저자 : 마르틴 클릴레

현재 쾰른 대학교의 법과대학 교수 겸 국가 철학 및 법정책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그는 1931년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소도시 올르라덴에서 출생했으며 프라이부르크, 뮌스터, 본 대학과 미국의 예일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목차

1. 법으로부터의 “해방”의 제 요소
양차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언급
목표와 폭력과의 관계
새로운 2계급 체제
진취성의 도덕
정신의 지배
인간의 존엄으로부터의 해방

2. 법을 통한 해방의 제 요소
인권.권력 분립.민주주의
중립화를 통한 자유
자유와 인간의 존엄과의 관련
인간의 존엄의 기원
자유와 평등의 관계
형제애와 사회 문제

3. 과학의 지배를 통한 해방
이른바 계몽주의의 변증법
베이컨 대 코크
진리 대 자유
진리의 합의 이론
기술 문명에 있어서의 “진·선·미”
부수 효과와 동기의 귀납적 추론

4.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한 해방
자발성에서 기술가 정치에로의 급선회
오도의 기술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이른바 시민적 자유 개념
사회주의-자본주의
소외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와 법이 고사할 수 없는 이유
마르크스주의와 계몽주의

5. 무지배 사회주의를 통한 해방
신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혐의와 논증적 대화 거부
이데올로기 비판적 순환 논법
이데올로기 혐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이익
무지배의 약속
선거인에 대한 경멸
헌법의 경제 정책적 중립성
왜 모든 계획 경제는 독재인가?
왜 모든 민주주의는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가?

6. “자유” 진보주의를 통한 해방
상대주의
서독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의 재성장
선일치
“자유” 진보주의
시대 정신과 언어 전략
대외 정치적 영향

7. 해방 신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가담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좌익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뜻이다”
“혁명가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성직으로부터의 해방
교회와 정치 계몽주의
닫기

책속으로

정치 계몽주의의 의미에서 해방은 불법의 극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방의 개념은 폭정과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이 개념은 이단자 박해, 마녀 재판, 신분적 예속, 유태인 차별, 노예 제도, 인디언 절멸, 식민주의 그리고 여성의 권리 부정 등에 대한 투쟁에서 생생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역사는 비록 불법과 폭력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또한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과 정치력으로써 그것을 극복한 역사이기도 하다. 해방의 과정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 예를 우리는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서의 일부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의 극복, 평화의 보장, 국제적 협조, 환경과 자원의 보존, 시민적·정치적 인권은 물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인권의 실현을 위한 여러 노력에서 본다.— p.11

근대정치사상 관련 책들

근대정치사상 관련 책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페르시아인의 편지}
– 현재 번역되어있는 책들은 몇권 있지만 번역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님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1,2 – 한길사 1997
영어본을 토대로 번역한터라 토크빌의 뉘앙스가 사라진 경우가 있지만 읽을만 하다.

테렌스 볼, 리처드 대거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 : 민주주의의 이상과 정치이념} – 아카넷, 2006
–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ㅜ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민주주의적 이상과의 관계를 몇가지 독자적인 기준을
가지고 저걸하게 분석 비교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입문서

토크빌,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 – 일월서각, 1989
프랑스어본을 토대로 프랑스 역사 전공자가 번역한 것으로 좋은 번역임

퀜틴 스키너,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 한길사, 2004
스키너의 명저로 르네상스 시기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공화주의의 형성과 발전을 다룬 훌륭한 책이다.
말 그대로 근대 정치사의 토대를 볼수 있는 책이다.

김용민, {루소의 정치철학} – 인간사랑 2004
루소의 정치 사상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이다.

로제 샤르티에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 일월서각, 1998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 사이의 관계를 지성사적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 후마니타스, 2004
고대 이래 정치의 쟁점이 되어온 대표, 추첨, 직접민주주의 등과 관련해 역사적 맥락들을 잘 짚어주고 있는 책이다.
근대 대의제민주주의의 의미와 관련해서도 좋은 책이다.

에릭홉스봄,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 한길사 1983-1998, {극단의 시대} – 까치글방, 1997
19-20세기 역사에 대한 탁월한 저서들이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소홀히하기 쉬운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해주는 저작들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창비, 1994, {자유주의 이후} – 당대 1996
근대 사회과학이 갖는 의미, 근대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해를 돕는 책이다.

칼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루이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프랑스 내전] – 소나무 1993
조금은 뒤지지만 토크빌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마르크스의 프랑스 정치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 담겨져 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을 알수 있는 글이기도하고, 동일한 사건들에 대해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의 시각을 비교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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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도래와 세속성에 대한 책 읽기

 

포스트모던을 알려면, 사실 근대(modern)을 알아야 하고, 근대를 알려면 중세를 알아야 한다. 게다가 이 모든 논의가 서양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니, 동양을 이해하려면 이건 또 전혀 다른 경로와 다른 책을 읽어내야 한다. 어줍잖지만, 슬슬 이 질문을 갖고 책을 모아가고 읽어가려고 하는데, 도움이 될 책들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

 

기본적으로 내 관심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어떻게 근대의 사상적,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기여는 어떤 것이었으며, 사실상 개신교가 중세교회 (혹은 이후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근대성을 내장한 종교’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대략 읽어가려는 줄거리는 이렇다.

 

정치철학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잡는다. 퀜틴 스키너의 <근대정치사상의 토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부 르네상스를 다루는 1편은 번역이 나와있지만, 루터와 칼빈을 다루는 2편은 번역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미국에서 원서로 구해놓고 차차 참고하도록 한다. 한권으로 이런 흐름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이 있다. 매우 총기있는 학자란 인상이 든다.

 

친한 후배 정정훈이 마키아벨리에 대해 쓴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는 이미 읽었고, iTunesU 에서 강의들을 찾아가며 홉스, 로크, 루소, 흄, 밀턴, 영국사, 미국사, 프랑스사 등을 챙겨볼 수 있었다.

 

박상익의 <밀턴 평전>으로 청교도혁명기의 존 밀턴을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철학자로 그 면모를 일신하여 살펴보았다. 언론자유 문제를 비롯 그의 공화국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게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

 

찰스 테일러를 미국 와서 발견한다. A Secular Age는 이 분야를 다루는데 있어 필히 거쳐야 할 책이다. 이 내용을 좀더 일찍 기포드 강연에서 다룬 책이 <근대의 사회적 상상>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잘 읽고 있다. 그의 The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도 찾아서 챙겨 읽어야 하겠다.

 

종교개혁이 의도하지 않은 근대성의 도래 통로가 되었다는 주장을 다루는 Brad Gregory의 저작 The Unintended Reformation: How a Religious Revolution Secularized Society 는 챙겨놓았고, 읽을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주권개념의 동양적 기원, 존 홉슨, 2009

Provincializing Westphalia: The Eastern origins of sovereignty

John M. Hobson
Department of Politics, University of Sheffield, Elmfield, Northumberland Road, Sheffield S10 2TU, UK.
E-mail: j.m.hobson@sheffield.ac.uk

Abstract
This article critiques the ‘Westphilian narrative’ of the sovereign state.
The dominant Eurocentric account assumes that the sovereign state emerged through a series of developments that unfolded endogenously within Europe, none of which were influenced or shaped by impulses that emanated from the East or from the non-Western world. Having outlined the various Eurocentric theories of the rise of the sovereign state, the bulk of the article forwards a non-Eurocentric alternative narrative. While accepting that there were multicausal economic, discursive, political and military foundations to sovereignty, I argue that each of these was significantly enabled by Eastern influences, in the absence of which the sovereign state might not have made an appearance within Europe. In the process, I suggest that the rise of the sovereign state occurred during the era of, and through the impact of, ‘Oriental globalization’, thereby recas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sovereignty and globalization more generally.
2009-provincializing-westphalia-the-eastern-origins-of-sovereignty [PDF]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2 ,켄틴 스키너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2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변역총서 서양편:19)

켄틴 스키너 지음 | 박동천 옮김 | 한길사 | 2004년 07월 20일 출간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변역총서 서양편:19)

책소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틴 스키너 교수의 역작 중 제1권을 번역한 연구서적.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가 개막하여 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성장 및 정착하기 이전에도 자유의 이념, 공화주의의 이념, 입헌주의의 이념, 혁명의 이념 등등, 나중에 한데 모여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구성하게 될 핵심적인 재료들이 서양 사회의 정치의식 안에 존재하였다고 보며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그러한 이념이 활발하게 작용하였다고 주장, 그 근거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 제 1권은 르네상스기에 존재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모태를 살펴보고, 제 2권에서는 종교개혁에 대해 분석하였다.(제1권)

저자소개

저자 : 켄틴 스키너

-저자 ?틴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 )

영국 랭카셔의 올덤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65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학과와 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와 『의미와 컨텍스트』를 비롯해 수많은 저서가 있으며, 『철학, 정치 그리고 사회』 제4집을 비롯해 수많은 편저가 있다. 근대 초기 유럽 정치사상,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관한 전문가이자 사상사 연구 방법론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편의 논문을 쓴 결과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근대 초기 사상사와 관련하여 그가 주장하는 핵심 사항은 자유의 이념이 근대 이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과, 정의나 공익의 실현과 같이 추상적 원칙들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국가 개념이 근대의 개막과 더불어 출현했다는 점이다. 방법론적으로 그는 존 오스틴의 언어의미론을 원용하여 고전적 텍스트를 저자 당대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저자 자신의 관심이 지향한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맥락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그는 정치사상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로 유럽 전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 역자 박동천(朴東泉)

195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진도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잠시 공부했고 국민대학교에서 정치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윌라멧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지금은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소크라테스의 문제 의식, 가치 지향점, 사유 형식을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는 와중에 언어와 세계, 앎과 삶, 철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천착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 외 여러 권의 공저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시몬느 베이유ㅡ이 삶과 철학: 가담과 관조의 균형」 「사회적 규칙과 사회연대」 「지적 개방성의 동과 서: 율곡과 J.S. Mill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목차

스키너의 맥락주의 방법론-박동천
한국어판을 위한 머리말
영어본 머리말
일러두기
제1부 르네상스의 기원
1장 자유라는 이상
2장 수사학과 자유
3장 스콜라주의와 자유
제2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4장 피렌체의 르네상스
5장 군주들의 시대
6장 공화주의적 가치의 생존
제3부 북부의 르네상스
7장 인문주의 학풍의 전파
8장 인문주의 정치사상의 수용
9장 인문주의에 대한 인문주의적 비판
제4부 절대주의와 루터의 종교개혁
01 루터주의의 원리
제1절 신학적 전제
제2절 정치적 함축
02 루터주의의 선구자들
제1절 인간의 결함
제2절 교회의 결함
제3절 교회의 권력: 신학적 논쟁
제4절 교회의 권력: 평신도의 반란
03 루터주의의 확산
제1절 초기의 선전가들
제2절 급진파의 이탈
제3절 세속 권위의 역할
제4절 종교개혁의 강제

제5부 헌정주의와 대응종교개혁
04 헌정주의의 배경
제1절 공의회주의의 전통
제2절 법률적 전통
05 토머스주의의 부활
제1절 토머스주의자들과 그 적들
제2절 교회에 관한 이론
제3절 정치사회에 관한 이론
제4절 이단자들에게 대한 응수
06 헌정주의의 한계
제1절 발본적인 시각
제2절 절대주의적 시각

제6부 칼뱅주의와 혁명의 이론
07 저항의 의무
제1절 루터주의 급진파의 발전
제2절 칼뱅주의에 대한 루터주의의 영향
제3절 칼뱅주의 급진파의 발전
08 위그노 혁명의 맥락
제1절 관용의 전망
제2절 절대주의의 대두
제3절 헌정주의의 재기
제4절 몽테뉴와 스토아주의
제5절 보댕과 절대주의
09 저항의 권리
제1절 민중혁명 거부론
제2절 실정법에 대한 호소
제3절 자연법에 대한 호소
제4절 민중혁명 옹호론

결론
더 읽을거리
??틴 스키너 연보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정치사상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로 유럽 전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틴 스키너의 역작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제1권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국가라는 개념이 어떻게 현대 세계에서 근대 정치 담론의 중심 화도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다. 국가라는 개념은 매우 독특하며 이해하기도 아주 어렵지만, 저자는 그 기원을 16세기 후반 유럽의 대부분을 갈라놓았던 종교전쟁에서 찾고 있다.

슈미트와 아렌트 또는 ‘적대’와 ‘협의’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나오는 물줄기들 … 슈미트와 아렌트 또는 ‘적대’와 ‘협의’
[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3>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
2010년 05월 10일 (월) 13:54:23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ditor@kyosu.net

오늘날 인기어가 돼버린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칼 슈미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독일어인 ‘das Politische’를 불어인 ‘le politique’로 옮기고, 이것을 다시 영어로 옮긴 것이 ‘the political’이다. 이 말을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글자만 놓고 본다면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하기 모호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1932년에 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슈미트의 책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다른 사회적 영역과 구별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적과 아’라는 구체적 분별에 정치적인 것의 특이성을 위치시킨다. 윤리적 영역에서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하고, 미학적 영역에서 미와 추가 대립하고, 경제적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이 대립하듯이, 정치적인 것에서도 적과 아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객관적 본성이나 자율성으로 인해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화와 범주화가 가장 강력하게 부딪히는 그 긴장의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은 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른 영역에 비해 특권적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우선성을 갖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슈미트는 이런 정치의 특권성을 설명하기 위해 전쟁을 예로 든다. 전쟁은 사회적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극단적인 비상사태를 의미한다. 이 비상사태의 국면에서 모든 것은 ‘적과 아’라는 정치적인 것의 긴장관계로 복속된다. 기존의 공동체를 구성했던 원칙들은 돌연 ‘적대’라는 분열을 통해 해체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협소하게 정치의 영역에 묶어 놓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정치철학의 서막을 새롭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발명은 단순하게 ‘정치’라는 명사형을 ‘정치적인’이라는 형용사로 바꾼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슈미트는 특정한 제도적 장치에 정치적인 현상을 묶어놓지 않을 수 있는 방도를 제공했다. 정치적인 것을 고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편재하는 ‘장’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슈미트의 공인 것이다.
정치에 대한 슈미트의 재정식화는 리쾨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리쾨르는 정치라는 것이 위대한 ‘위기’의 순간에 오직 존재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 위기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전환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 서구 지식인 사회에 가져온 파장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중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직면해서 리쾨르가 『정치적 역설』을 집필했을 때,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현실사회주의라고 불리던 ‘국가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정치를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역사의 전환기와 새로운 정치의 개념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리쾨르는 구체적인 정치적 합리성과 정치적 악마성을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내장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는 경제로부터 정치의 영역을 분리해냈다. 경제나 정치 모두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각각의 합리성은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기획은 경제결정론에 경도돼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리쾨르는 경제적 영역과 대립하는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헝가리 사태가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지위를 복권할 기회로 비쳐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정치와 다른 것으로 개념화한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리쾨르가 말하는 ‘역설’이라는 것은 결국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 더 나아가서 갈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갈등의 원인을 리쾨르는 정치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리쾨르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계급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관계를 지칭하고, 정치는 정치적 권력의 악마성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권력의 악마성은 ‘경제적 소외’로 환원해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이런 권력의 악마성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경제적 소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었다.
리쾨르의 용어법에서 정치적인 것은 권력에 대립적인 ‘살아있는 관계’이자, 동시에 악마적인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떻게 말하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를 작동하게 만드는 엔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구분법에 따르자면, 정치적인 것은 ‘정체’(polity)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정치는 정책을 만들거나 결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은 합리적인 일치의 구현체이고, 정치는 권력의 국면이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빚어낸다.
이후에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성’을 입법의 문제로 좀 더 구체화하지만, 초기에 정립한 분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은 헌법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한 합리적이라는 것이 리쾨르의 생각이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와 대립하지만,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상대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리쾨르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역설’이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설은 서로 다른 믿음이 ‘나란히’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선구적이지만 단순한 리쾨르의 접근
이처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리쾨르의 정의는 선구적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그의 개념화에서 핵심적인 것은 경제적인 합리성에 대해 정치적인 합리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런 방식은 초기 프랑스 이론에서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리쾨르의 용어법은 한나 아렌트와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용어의 계보학에서 아렌트는 프랑스적 맥락과 다른 위치에서 정치적인 것을 정의한 이론가이다. 정치적인 것의 정의에 있어서 아렌트는 슈미트와 다르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을 자유의 공간이라고 파악했는데, 이런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권력의 공간으로 파악했던 슈미트와 일정하게 다른 관점이다.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적대와 갈등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렌트에게 이 공간은 공적인 협의를 보장하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는 이론들이 아렌트적인 관점과 슈미트적 관점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렌트와 슈미트라는 물줄기를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55

근대정치사상의 토대 정리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9
켄틴 스키너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길사 / 2004년 7월

제4장 피렌체의 르네상스

이 장에서는 15세기 초.중반의 인문주의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도덕과 정치의 문제에 관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한스 배런은 피렌체에서 꽃 피운 이러한 정치적 사유의 발전은 피렌체 사람들이 일련의 호전적인 독재자를 상대로 “시민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여야했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1402년의 피렌체-밀라노 분쟁을 포함한 독재자에게 맞선 피렌체의 고독한 처지가 피렌체의 많은 저술가들이 정치이론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어 공화주의적 자유와 시민적 참여를 역설한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런의 분석은 당시의 인문주의가 중세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며 페트라르카 식의 인문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1. 자유의 분석

실제 15세기 초 피렌체의 저술가들은 중세 딕타토르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형태의 법률 훈련을 받았으며 교회나 도시 당국 서기, 대학에서의 수사학 교수 등 비슷한 전문 분야에 종사했다.(콜루치오 살루타티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그들이 도덕적, 정치적 저술에서 다룬 주제의 범위 역시 공화주의적 자유였으며 자신들의 자유가 위기에 처한 원인과 그것을 확보할 최선의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15세기 초 저술가들은 중세 딕타토르들과 질문은 같았으나 대답은 달랐다. 인문주의자들은 파당의 위험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았다. 이는 피렌체가 1378년 치옴피의 반란을 겪은 지 4년 후에 새로운 헌법을 반포하면서 안정적인 시기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또한 사적인 부의 축적 역시 이들에게는 공화국의 축복이자 공공적 선에 도움이 되는 요소였지 자유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가 아니었다.(브루니가 대표적이다.)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바로 피렌체가 자립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상업적 활동의 발달로 대부분 부유한 시민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용병에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인문주의자들은 하나 같이 용병을 공화국의 자유에는 관심 없는 돈 밖에 모르는 자들이라 비난한다. 그렇기에 피렌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 3권에서 지적한대로 스스로 무장한 독립적인 시민이라는 이상을 달성해야만 했다.

인문주의자들과 그 선배들과의 유사점은 그들이 정치적 자유 그 자체를 분석하는 방식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인문주의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독립과 자치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외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의 자유와 공동체의 경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의 자유였다. 인문주의자들이 독립이라는 의미의 자유를 옹호한 이유는 그 때까지 살아남은 도시공화국을 시뇨레들이 더 이상 잠식하지 못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치의 의미의 자유를 옹호한 이유는 공화국의 일에 대한 참여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화국의 모든 일이 시민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며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전제정권에 의해 노예로 전락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의 개념과 관련해 인문주의자들이 딕타토르들의 견해를 이어받은 또 한 가지는 공화제가 어떤 체제보다 낫다고 하는 의견이었다. 살루타티는 군주제의 가치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격을 가했으며 브루니는 자유와 공동체의 위대함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에 대해 역설했다. 브루니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영예를 향한 희망이 열려 있을 때 자신을 자극해 스스로 고양되므로 공화국처럼 자기의 노력만으로 영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장되는 체제에서만 그 공동체는 번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유와 힘(시민의 덕, 비르투) 사이의 관계에는 전통적인 믿음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 번째는 건전한 정치생활을 위한 관건은 시민의 활력과 공공의 혼을 계발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오나코르소 다 몬테마니가 지적하듯이) 한 시민의 가치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측정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의 개념에 관해 인문주의자들이 토대로 삼은 마지막 견해는 역사철학적인 측면, 즉 로마제국 시대의 독재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자유가 더 낫다는 명시적 선호이다. 브루니는 “찬가”에서 카이사르가 아니라 공화정 말기의 술라 휘하의 고참병들에 의해 피렌체가 건설되었다면서 공화정 시기의 로마가 제일 번창했다고 주장한다. 로마가 절대 권력의 등장으로 인한 시민의 공공의 혼 상실로 쇠망했다고 파악하는 에드워드 기번 같은 이의 시각 역시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해석과 유사하다.

2. 고전적 가치의 부활

이제부터는 15세기 초 피렌체 저술가들과 14세기의 인문주의 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4세기 초 아레초와 파도바에서 수사학 강의에 뿌리를 두고 시작해 역사, 시, 도덕철학 등에서 고전 문헌을 연구하고 모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인문주의 운동은 15세기 초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인문주의 운동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추진력을 얻는 데, 그 첫 번째는 고대 세계에 관한 일차적인 정보가 급속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수도원의 도서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고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번째는 고대 세계에 대해 새로운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와 중세 유럽 사이의 근본적 단절점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인문주의는 고대 세계의 문화를 고대 세계 자체의 시각에서 접근해보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전통적인 아르스 딕타미니스라는 기존의 틀에 키케로의 수사학 교과서를 꿰맞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14세기 말엽부터 고전적 과거는 현재와 분리되어 그 자체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로마네스크(로마 비슷한)가 아닌 진짜 로마 양식을 재생하고자 했으며 회화에서도 고전주의의 비례를 정확히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난다. 수사학과 철학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은 페트라르카였다. 그는 진짜로 역사적인 정신에 입각해 키케로 자신이 수사학과 철학을 결합한 기초 위에 구축된 교육에서 어떤 특별한 가치를 추구했을지 탐구한 결과 교육의 목적에 대한 키케로의 감각을 재발견했다. 교육의 목적은 단 하나의 덕성을 배양하는 것, 즉 비르 비르투티스(진정으로 남자다운 사람)를 계발하는 것이다. 남자는 지혜 있는 사람인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자아에 충실해야했고 이를 위해 수사학과 철학을 교육받아야했다. 수사학은 지혜를 능변과 결합함으로써 철학적 신조가 공공적 사안의 처리에 마땅히 미쳐야 할 영향을 미칠 수 있게끔 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이러한 키케로 식 이상에 대한 열광적 옹호자가 되어 교육의 올바른 목표와 내용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인간 능력의 한도와 인생의 올바른 목적 등에 관해서도 기존의 견해를 변혁하고자 했다.

3. “비르투스”라는 개념

인문주의자들은 키케로 식 비르투스 개념의 저변에 깔린 전제들을 하나하나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1) 최고 수준의 탁월성을 인간이 실제로 터득할 수 있으며 2) 이를 위해 올바른 교육과정이 필수적이고 3) 교육의 내용은 수사학과 고대 철학의 체계적 연구로 이루어져야한다. 그들은 고전 교육이 공공생활에 참여하기 위한 최고의 준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고전 자체에는 찔러서 불을 지르는 단어들이 결여되어 있기에,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하여 수사학이 필요했다. 이런 믿음으로 당대의 인문주의자들은 수사학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다.

키케로 식 비르투스의 이상을 복구한 데 따른 두 번째 효과는 젊은이가 교육과정에서 정확히 무엇, 어떤 순서에 따라 배워야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에 의하면, 비르 비르투티스를 제대로 빚어내기 위해서는 역사, 도덕철학, 수사학을 교육해야한다. 더불어 14세기 내내 북유럽에서 신봉되던 믿음, 신사에게 알맞은 교육과 교회 직분에 알맞은 교육이 서로 다르다는 믿음이 깨어지고 둘 사이의 경계선이 고의적으로 지워졌다. 베르제리오는 “예절에 관하여”에서 문무에 모두 능한 군주를 찬양하며 정치, 학문, 전쟁에 모두 뛰어난 ‘르네상스적 인간’상을 추구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우오모 우니베르살레는 인간이 모든 면에서 탁월해질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건방지고 잘못된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인간상을 완전히 버리고 전인의 이상을 채택한다.

물론 페트라르카과 그 추종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고전적인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페르라르카는 고대의 도덕주의자가 찬양했던 주덕과 기독교적 근간을 이루는 덕성, 신앙과 영생을 비르투스의 덕목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고 하는 당대를 풍미한 아우구스티누스적 전제를 선명하게 거부했다. 이런 입장은 15세기 초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도 이어져, 이들은 인간이 최고의 탁월성을 획득할 권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살루타 티는 그럴 능력이 있으므로 인간은 비르투스의 추구를 자기 삶의 주목적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능력에 관한 이 같은 견해를 애국적 호소로 연결시킨다. 그들은 당대 레그눔 이탈리툼의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과거 조국의 영광(로마)을 회복하자고 호소한다. (살루타티, 브루니)

4. “비르 비르투티스”의 권능

인간이 최고의 탁월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과정에서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함축을 가진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세계를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 재편성할 수 있다. 역경이란 인간의 의지와 제 갈길을 가는 운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며 비르투스는 남성다움으로 운수의 여신 포르투나를 감동시킬 수 있다. 이런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반대하는 페라기우스적 입장으로의 선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운수 자체를 신격화하는 것은 신의 섭리라는 선한 권능을 부인하는 셈이며 세상 전체는 포르투나와 비르투스 사이의 투쟁이 아닌 오로지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 주장이 바로 중세의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대전제이다. (라티니 등)

그러나 15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 능력이 제한될 때 상황을 실제로 통제하는 요인은 섭리 같은 일관적인 힘이 아니라 운수라고 하는 변덕스러운 힘이라는 주장으로 돌아간다. 알베르티는 포르투나를 최고의 여신으로 일컫는다. 물론 운수의 변덕스러운 전횡은 인문주의자들을 극단적인 비관에 빠뜨리기도 했다. 포지오 같은 이들이 그러했는데,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비관론을 인간은 지성과 의지를 다양하게 작동시킴으로써 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긍정론으로 극복한다. 알베르티는 “가족”에서 가문들의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몰락을 무상한 변덕으로 가득 찬 운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비난이며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가문들이 자신의 비르투스를 상실할 때에만 비로소 운수가 그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권능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신조가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어서 왜 인간이 이러한 탁월성이라는 목표에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하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기대해도 좋을 보상들에 대해 서술하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의 전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지상에서의 영광과 영예의 추구, 그리고 세속적이며 찰나적인 영예의 추구를 비난한다. 그러나 1341년 비르투스를 추구해야하는 이유가 영광과 영예 때문이라는 생각이 형성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페르타르카는 시인의 자격으로 월계관을 수여받으면서, 문사의 열망은 영광을 받을 만한 인물이 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얻는데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영예 추구에 대한 열망은 16세기 말까지 하나의 이상으로 유지다가 17세기 중반부터 북유럽에서 사라진다.

5. 인문주의자들과 르네상스

지금까지는 15세기 초 피렌체 인문주의의 연원에 중세의 딕타토르들과 14세기 말의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는 인문주의자들과 스콜라주의 철학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문주의 운동이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동 및 의식적 거부로 더욱 확고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스콜라주의의 로마법 해석을 공격했다. 그들은 고대세계의 서술은 가능한 고대 세계의 시각과 개념에 입각해 연구되고 평가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바르톨루스 계열과 후기 주석학파 전체를 비판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 비판은 진정한 의미의 역사법학의 확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발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다른 문화권에서 건너온 인공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고집했다. 또한 고대의 법률책을 전혀 다른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법률 체계 사이의 비교 연구가 가능해졌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어 스콜라주의 특유의 학문관도 비판했다. 철학은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무엇인가 실제적인 쓸모를 보여주어야 했다. 첫째로 그들은 스콜라주의 강단학자들을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느라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고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소홀하다고 비판한다. 발라는 변증술사의 하잘것없는 논리 시합에 거의 일생을 바치는 ‘천사 같은 박사님의 덕목’은 대부분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두 번째로 그들은 강단학자들이 사회 정치 현안을 다루는데, 즉 정치생활에 유익한 영향을 주는데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페트라르카에 의하면 강단학자들은 덕성을 획득하는 대신 덕성의 정의를 배우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나, 진리를 아는 것보다 선을 의욕 하는 것이 낫다! 이러한 비판에서 모든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한다는 인문주의자들의 믿음과 순수한 여가나 명상(오티움)보다는 유용한 활동(네고티움)보다 가치 있다는 태도가 형성된다.

15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글쓰기의 형식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보다 폭넓은 계층을 상대로 말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지녔다. 또한 스콜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역사관을 택하게 되었다. 역사의 진행을 신의 목적이 점차로 현시되는 일직선적인 발전과정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역사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인간 만사의 진행경로는 돌고 도는 바퀴와 같이 흘러간다는 주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고대와 그 업적이 재현될 자기네 시대 사이에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만들어냈다. 이 암흑의 시대는 자기네 당대에서 끝나게 될 것이며, 이 변혁과 르네상스(재생)는 자신들의 책무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고대 세계의 성취를 자신들이 영광스럽게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6장 공화주의적 가치의 생존
5장에서 밝혔듯이 1454년 로디의 화약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군주제 정부형태가 승리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에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공화주의 정치사상에 관한 저술들이 등장했다.

1. 공화주의의 중심지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공화주의 이념의 중심지로서 가장 그 가치를 끈질기게 유지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공무원 대부분을 임명하는 책무를 지닌 본실리오 그란데, 외교, 재정을 담당하는 귀족원, 선출직 정부수반으로 봉사하는 도제로 구성되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헌정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결과 세레니시마, 즉 가장 조용한 공화국이라는 평판을 얻게 된다.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 등의 14세기 말 헌법 이론가들은 베네치아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파당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그 결과 가장 건전하고 가장 안전한 정부 형태는 세 가지 순수한 형태가 결합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융합된 상태라는 주장을 펼친다. 군주정의 요소인 도제와 귀족정을 대변하는 귀족원, 민주정을 대변하는 콘실리오 그란데의 세 개의 서로 다른 체제를 융합해 하나의 혼합 정치형태를 엮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16세기 무렵 메디치 가문에 의해 자유가 가로막힌 피렌체인들이 베네치아의 성공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사노티는 도제와 귀족원, 콘실리오 그란데를 결합해서 베네치아인들이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모든 관리의 선출과 모든 정책의 결정이 파당적 이익이 아닌 공동선을 극대화하는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게끔 선거와 투표 제도를 정교하게 고안해 시행했다고 생각했다.

베네치아인들 역시 자신들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지 연구했다. 콘타리니는 베네치아 헌정에 대해 누구라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모든 계층을 잘 혼합하여 모든 정부 형태가 각각 동등하게 균형을 이루고 그리하여 내부적 갈등의 위험이 효과적으로 상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16세기 말부터는 베네치아 정치이론은 이 자화자찬격 명제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공화주의 정치이론의 전통은 16세기 초반에 들어서 피렌체와 로마에서도 부활했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내내 이 도시는 점점 더 독재적인 정치체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1494년 프랑스 세력이 도래한 이후 이러한 흐름이 역류했다.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외세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었고 이런 실패를 기회로 반대자들이 정권 무능론을 펼치며 인민의 자유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했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에 피에로 데 메디치가 굴욕적으로 항복하자 도시 안에서 자생적인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일시적이었으며 메디치가는 1512년 에스파냐 군대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다시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1530년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세습 통치자가 된다. 로마의 경우도 1511년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이익만 드높여준 교황에 대한 반발로 공화파의 봉기가 일어났다. 그 봉기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교황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다시 되찾았다.

군주제의 확산을 막아보려던 시도는 실제로 무위로 끝났지만, 공화주의 정치사상은 매우 발전했다. 이 시기에 인민정부를 옹호한 이론가로서 활용할 수 있었던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가 사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 루카의 톨레미, 그리고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등이 대표하는 이탈리아 스콜라주의의 14세기적 전통이다. 또 하나는 살루타티, 브루니, 포지오 등이 대표하는 15세기 초의 “시민적” 인문주의이다.

2. 스콜라주의의 공헌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공화주의 정치이념이 개화하는데 끼친 스콜라주의의 공헌은 과소평가되어온 경향이 있다. 피렌체를 살펴보면, 1494년 이후 복구된 공화정에 대해 사보나롤라 및 그 제자들은 스콜라주의적 개념들에 입각해 변론을 펼치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본인을 예언자이자 동료 시민에게 신의 말씀을 알리도록 선택된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또한 인간사를 관할하는 것은 운수가 아니라 신의 의지라고 여겼으며, 영예, 영광, 명성을 달성하기 위한 추구에 비르투스를 바친다는 인문주의자들의 이상적 인간상을 경멸하고 기독교적 겸손과 거룩함이 인생의 온당한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전망조차도 종래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여러 종류의 피렌체 판 신화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이었다. 이처럼 피렌체의 전통적인 사상과 사보나롤라의 주장과의 연관성은 헌정질서에 대한 제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피렌체 시의 헌법과 정치에 관한 논고”에서 군주제는 피렌체에 최선일 수 없고 공화제 정권의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화제가 유지되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공화정만이 시민에게 진정한 자유의 향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자유야말로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로 지나친 사적 이익의 추구, 용병의 고용, 파당과 시민적 갈등의 만연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사보나롤라는 결론적으로 이 자유가 지속적으로 지켜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책은 시민 전체를 모든 정치 사안에 있어 최고의 권위로 대우하는 것이라 여기며, 전체 인민의 권위를 향유할 수 있는 일정한 숫자의 시민들로 구성되는 평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인민은 권력을 위임할 뿐이며, 자유의 보전은 무엇보다 시민과 정부가 하나이자 동일체로 되도록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511년 로마에서 터져 나온 교황의 전횡에 대한 공격 역시 당시 공화주의 이론이 스콜라주의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 귀족의 주권”을 쓴 마리오 살라모니오는 이탈리아가 전락하게 된 주원인을 약한 군사력과 엄청난 부의 결합으로 인지했다. 이 인식에 대한 결과로 그는 신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면서 훌륭한 시민 생활은 검약의 덕목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자가 존경을 받을 때 덕과 정직을 갖춘 사람은 경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시민 생활이 붕괴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1494년 야만인들의 침략에 있다. 그렇기에 도시는 자위 능력을 향상시켜야하며 용병에 기대어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나 살라모니오의 주된 관심은 시민의 자유가 보전되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갈 시민의 역량이 극대화되도록 보장하려면 도시의 생활을 어떻게 규율해야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살라모니오는 자유롭고 행복한 시민 생활을 유지하는 관건은 효과적 시민제도를 확립하는 데 있으며 그 제도의 유지는 시민 전체가 언제나 궁극적인 권위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답한다. 이 해법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그는 모든 일이 법률의 존엄성을 매개로 결정되어야하며 그것이 로마 인민의 역사적 권리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주권을 양도했다는 주장, 즉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논란이 사기임을 밝힌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금석학적 자료들 역시 로마 인민의 주권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로마에서 어느 프린켑스도 인민의 신하일 뿐이며 도시에 대한 궁극적 주권은 어떤 경우에도 인민에게 보유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8장 인문주의 정치사상의 수용

1. 인문주의자들의 조언자 역할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콰트로첸토(15세기)에 활약한 선배들로부터 방법론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사상에 대한 접근법도 물려받았다. 그들은 건전한 학문과 정치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과 정치에 뛰어들 젊은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인문학 교육에 대해 강조했다. 통치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와 덕스러운 정치의 원리들에 대한 논의를 결합한 수많은 논저들이 발행 되었다. 또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왕이나 군주, 정신과 귀족, 평의원, 행정관들을 대상으로 한 조언서를 저술했다. (엘리어트 경의 “치자라는 이름의 책”이 대표적) 조언서는 시민 전체 집단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대표되는 이러한 조언서들은 단순히 통치계급의 특별한 이익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개혁한다는 좀 더 일반적인 문제로 관심을 맞추어 가면서 후대에 일어난 공영사회 운동 와중에 더 발전했다.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장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생활에서 정치이론가가 수행할 역할에 관해서도 선배들을 따랐다. 그들은 철학자가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본질적 성격을 정치적 조언자로 간주했고 결국 통치자에게 봉사하는 비서 또는 외교관의 직책을 담당했다. 반면 공동체의 일반적 개혁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 조언자들은 조언의 문제를 왕과 군주를 위해 봉사하라고 요청받은 편에게 다가오는 딜레마로 다루었다. 그들은 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결코 공공적인 사안에 휩싸여 자신의 이력을 쌓기 위해 학문연구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네고티움보다는 오티움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어의 “유토피아“ 1권에 드러나듯이 공공적 사안은 전적으로 위선과 거짓에 의해 처결되며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 솔직히 조언해봤다가는 극도의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과 반문을 거쳐 인문주의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간다.

위의 설명에 대한 예외는 모어의 “유토피아”이다. 왕에 대한 봉사와 굴종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모어가 고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첫 째로 모어는 처음에는 조언의 이상을 조롱하지만 결국 삐딱하게나마 그 이상을 승인한다. 결국 그는 아무도 그 말을 경청하지 않으리라는 이유로 내놓길 거부했던 건전한 정치적 조언을 제공한다. 둘째는 자신의 인생 경로를 겨냥한 것으로 그는 조정에 들어가서 자신의 행운을 찾아보기로 내린 그 순간에 왕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어의 주장은 예외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역동적인 삶과 결부되는 가치를 옹호하는 데 주력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스타키의 “대화”에 드러나 있듯이 그들이 보기에 모든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하며 자기 공부의 달콤함에 이끌려 역동적 삶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나라와 친구들에게 악을 표출하는 것이며 이는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행동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잘 질서 잡힌 군주제가 모든 다른 정치형태보다 낫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고로 군주에 대한 조언자는 군주제의 “질서를 바르게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최고도의 공공적 중요성을 지니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가 군주에 대한 조언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고대 철학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일반적 신뢰를 공유했으며 정치적 지혜의 관건이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는 주장 역시 수용했기 때문이다. 비베스는 “교육에 관하여”에서 역사 연구의 실제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피력한다.

물론 정치에 관한 과학을 역사의 증거에 입각해 축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는 일정한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구치아르디니가 그러했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는 극단적인 피론주의를 전개했다. 그 근거는 과거로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 여부가 애당초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순전히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들의 행위에 아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진실보다 허위를 선호한다. 또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덕이 아니라 사악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부 인문주의자 대부분은 역사를 실천적 지혜의 양육자로 보았다. 뷔데는 역사를 가장 훌륭한 스승이자 정직하고 덕스러운 인생을 향한 우리의 인도자라고 선포했다.

2. 시대의 불의

인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본령을 조언자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했을 때 그들은 공통의 문제와 불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인문주의 정치사상의 전통 전반에 걸쳐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주제에 집중했는데, 그것은 정치적 건전성이 자기 자신 또는 파당적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사적 이익에서 해방된 공공의 복리는 언제나 보호, 유지되어야하며 군주의 관심사인 동시에 군주를 뽑는 인민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개혁이 심각하게 요청되는 시대로 판단했다. 공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스리는 폭군들이 넘쳐나고 시민적 책임감은 땅에 떨어졌다. 인문주의자들은 시민적 책임감이 붕괴한 책임을 왜곡을 일삼는 법률가, 게으른 수도승, 자신만을 챙기는 사제,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돌린다.(라블레)

인문주의자들 중 일부는 자기네 시대의 사회와 경제적 파탄의 원인을 설명하는데 좀 더 심각한 관심을 기울였다. “유토피아”와 “대화”로 대표되는 영국 인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먼저 귀족의 이기적인 무절제를 비난하며 다음으로 식량을 경작하는 것보다 양을 사육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지주들을 비난한다. 소수의 비양심적인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양이 사람을 먹는다! 이 같은 현실 진단이 에드워드 6세 시절에 등장해 호국경 서머세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집단 공영주의자들에게 재현되어 상세히 논의된다. 공영주의 운동 전체의 배후에서 영감의 주된 부분을 불어넣은 휴 래티머와 그의 젊은 제자들인 베콘과 레버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교육 배경과 신조에서 강한 인문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무신경한 개인주의의 침범에 맞서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이들 도덕주의자들의 기본 목표는 공공이익의 붕괴에 책임을 질 사회집단들을 비난하는 데 있다. 그들은 지주들이 지대를 올리고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목초지로 바꾸기 위해 울타리를 친다고 공격한다.(블링클로우, 베콘) 또한 두 가지 부류의 집단들이 사회적 무질서와 경제적 침체를 야기하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일찍이 모어와 스타키가 언급하지 않았던 상인과 누보 리시(졸부들)가 레버 등에 의해 비난당한다. 그들은 궁핍한 이들에게 돈을 거저주기는커녕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사악한 짓을 하며 자기네 손아귀에 들어온 물건을 계획적으로 구하기 어렵고 비싸게 만들기에 솜씨 좋은 도둑놈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상인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에서 벗어나 올라가기 위해 새로 획득한 부를 사용하여 공동체에 부여된 신성한 분수의 구조를 파괴한다.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하게 저술가들 중 일부는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는 책임을 정부에게 돌렸다. 당대 최고의 경제적 문제인 모든 물품의 보편적 품귀는 재화의 희소성과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 원인이었으며 이는 왕과 조언자들이 주화의 재질을 거듭 떨어뜨림으로써 스스로 불러드린 재난이었다. 잘못은 상인도 지주도 아니라 주화와 보석을 절하하도록 또는 재질을 떨어뜨리도록 설득해온 사악한 조언자들에게 있다.

3. 덕목들에 대한 강조

북부인문주의자들의 통치자와 행정관에 대한 조언에 있어서 정치적 성공의 열쇠가 덕의 증진에 있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15세기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제도의 개혁보다 마음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들 중 급진적인 몇몇은 시민적 인문주의자들과 질서 잡힌 공동체를 위해서는 시민 전체의 집단이 덕을 획득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네 가지 핵심적 덕목 등 군주의 덕목을 제시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엘리어트의 “치자라는 이름의 책”) 그 덕목은 관후, 자비, 언행일치 등이다. 뷔데는 “군주의 교육”에서 한 가지 속성마다 한 가지 예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 주제에 집중한다. 올바른 신념과 정직의 본보기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관후함의 사례, 폼페이우스는 모든 군주적 자질의 종합이다. 이와 더불어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모든 치자들과 주도적 시민들이 함양하기를 기대했던 추가적인 범주의 자질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사교성, 온후함, 거룩함이 그것이다. 따라서 인문주의적 메시지의 요체는 정치의 목표는 최고 수준의 덕을 달성하는 데 있으며 군주의 의무는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한 형태의 덕을 몸소 보이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왜 이러한 덕목들의 위치를 정치생활의 중심에 두었는지를 살펴보자. 에라스무스, 콜레트, 모어로 대표되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라는 명칭이 이를 설명해준다. 덕의 추구는 도덕뿐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며 이런 기독교적 덕목을 가진 자가 군주가 된다면 덕스러운 공영사회를 위해 일하는 군주와 인민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함께 일하게 된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 주민들의 제도가 현명하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들이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합리적 토론이라는 일상적 과정을 통해 윤리적, 종교적 확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룩함을 이룬 이유는 제반사들이 워낙 적절하게 질서 잡혀 덕이 보답받게 되는 사회를 그들이 구축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거룩함이란 덕에 입각한 삶을 사는 것으로 비기독교도 주민들이 기독교 주민들보다 이 목표에 있어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로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부패와 이기심이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주도적 시민들과 더 나아가 공영사회 전체의 목표, 영예, 영광, 명성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덕의 추구야말로 영예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며 고상한 명성의 가장 확실한 기반은 스스로 공공연하게 공개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덕목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들 저술가들 대부분은 정치사회 전체의 목표와 관련지어 덕목의 역할을 고찰했다. 스타키 등 일부의 저술가들이 트레첸토(14세기) 인문주의자들과 같이 정치의 주목적은 인민의 자유가 유지되도록 보장하는 데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주된 경향은 콰트로첸토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정치의 근본 목적이 올바른 질서와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공영주의 이론가들도 이와 같은 시각에 동의한다. 모어는 모든 입법의 목적을 올바른 질서의 유지로 보았고 유토피아 주민을 가장 잘 질서 잡힌 인민이라고 찬양한다. 플라톤주의적 강조에서 연유하기도 하는 이러한 견해는 모든 공동체의 목적이 다중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에 따라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4. 리더십의 자질

정치생활에서 덕목들이 지니는 중심성에 대한 강조의 저변에는 정치적 리더십을 위해 필요한 자질들에 관해 급진적인 잠재력을 지니는 이론 하나가 깔려 있다. 우리는 혈통이나 부 위에 구축되는 세습적 지배계급을 거부하고 오로지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들만을 우리의 통치자 및 행정관으로 봉사하도록 지명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이러한 일체의 전복적인 함축은 완전히 중화되고 위계적이고 전통적인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제 현실에서 그 덕목들은 언제나 전통적인 지배계급에 의해 가장 충만하게 현시되고 있다. (엘리어트의 “귀족 또는 고귀함에 대하여”, 로렌스 험프리 등) 앞에서 언급한 덕목들은 그 자체로 불변의 것이지만 한결같이 어느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서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귀족에게서 빛나고 광채를 발한다.

전통적인 지배계급을 받아들이는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의 바탕에는 더욱 더 보수적인 함의가 깔려있는데, 그것은 가장 잘 질서 잡힌 형태의 정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차등구조를 건드려서는 안되고 그 구조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에서 이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주장은 곧 강력한 공격성을 띠게 되는데 이 공격성은 사회적 서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신들의 분수를 향상시키려고 시도했던 야심에 찬 신흥세력에 맞서서 기존의 위계질서를 보호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 의해 생성되었다. 올바른 질서는 분수의 유지를 전제한다.

5. 교육의 역할

통치자들에 의한 덕의 실현이 좋은 정치의 관건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그 필수적인 덕목들을 적절한 수준까지 획득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콰트로첸토의 선배들로부터 끌어온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대답은 바로 지도자들에게 인문학 분야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건전한 강의와 건전한 정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들은 더욱 세부적으로 이상적 교과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했고 이것이 인문주의자들이 실제로 군주에 대한 조언자로 활약했다는 사실과 겹치면서 교육 이론과 실제에서 혁명을 불러오게 되었다. 후마니오레스에 관한 수련이 공공 생활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최초로 북부유럽에 도입한 이들이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지배 계급의 교육과 서기들의 교육의 구분이라는 오래된 관습 역시 이들에 의해 무너졌다.

http://blog.aladin.co.kr/jobonzwa/3919617

에드먼드 버크 :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내용정리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8
에드먼드 버크 지음, 이태숙 옮김 / 한길사 / 2008년 12월

제 1부 프랑스 사태와 일부 영국인의 경거망동

1. 프랑스 국민의회에 축하 인사를 보낸 혁명 협회

버크는 프랑스 국민 의회의 행동에 대해 일종의 공적 자격으로 축하 연설을 한 영국 혁명 협회를 비난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더불어 혁명협회에서 출판하는 출간물들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프랑스 국민의회의 행동을 모방하도록 만들어서 프랑스의 사태를 영국 상황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2. 프랑스 사태를 찬양하는 프라이스 박사의 오류

“프랑스 혁명은 이제까지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럽다.”

프랑스 사태를 버크는 ‘경박함과 잔인함이 빚어내고, 모든 종류의 죄악이 어리석은 짓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괴상한 혼란’ 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함께, 비국교도 목사인 프라이스 박사가 올드쥬리 거리에 있는 비국교도 교회당에서 한 설교를 영국 역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조목 조목 비판한다.

나는 그 설교를, 문필가 파벌 및 음모꾼 철학자들과 깊이 연계되고, 또 국내외의 정치적 신학자들 및 신학적 정치가들과 폭넓게 연루된 한 인물의 공적 선언으로 본다. (중략)그러한 행위들은 강제적인 정치적/종교적 자유의 노선에 유익할 지라도, 국가의 평온에는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프라이스 박사가 말하는 “우리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프라이스 박사는 그의 정치적 설교에서 영국 국왕이 “그 왕관을 인민의 선택에 의해 얻었으므로 세계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합법적 왕이다”라고 말했다. 즉 왕이 왕위를 신민의 선택에 따라 얻은 것이 아니라면, 합법적인 왕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는 국왕을 합법적 자격자로 만드는 기반이 인민의 세 가지 근본적인 권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서, 이는 명예혁명의 원리에서 같은 체계를 이룬다고 했다. 그 세 가지 권리는 1.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2. 부당 행위를 이유로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 3. 인민의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 이다.

버크는 프라이스 박사의 논리를 잘못된 환상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환상에 대항하여 명예혁명의 ‘진정한’ 원리를 찾기 위해 당시 혁명 때 제정되었던 법률들(권리선언=권리장전: 명예혁명 시 윌리엄과 메리가 왕과 여왕으로 즉위한 1689년에 낭독된 문서)을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법률가와 정치가가 작성한 분별 있는 권리선언에는 “우리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하고 부당 행위를 이유로 추방하고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보편적인 권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또는 암시조차도 들어있지 않다. (중략)권리선언이 보강되고 해석되었을 때에도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한 법”으로 불리었다.

몇 년 후 국왕을 선출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에도 (중략)의회는 권리선언에서 천명된 원리를 따라, 왕위 계승자를 더 정확하게 개신교도 가계에서 지정했다. 이 법은 또한 같은 정책에 입각하여, 동일한 법 안 에 우리 권리와 세습적 계승을 결합했다. 우리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대신에, 그들은 그 가계를 개신교도 가계에서 계승하는 것이 “왕국의 평화와 평온 그리고 안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신민이 그 보호를 위해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왕위 계승의 확실성을 유지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시급하다고 선언했다.

즉 선조의 관행에 그대로 따르기 위해 영국인들은 왕위에 속하는 모든 법적 대권을 왕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국가의 통합과 평화가 계승의 확실성을 지키는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으며 이와 같은 전통적 정책이 혁명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국가의 헌정 기구들은 서로 그리고 약속에 의해서 중대한 이해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과 공적 신뢰를 유지할 의무를 가진다. (중략)이 원리에서 왕위 계승은, 법에 따라 세습하는 현재 형태대로 행해져왔다. 이전의 왕가 계승은 보통법(혹은 자연법)에 따른 계승이었다. 이제 새 왕가 계승은 보통법의 원리에 입각하여 운용되는 제정법에 의거한다. 제정법은 내용을 변화시키지 않고 방식만을 규제했으며, 왕이 될 인물을 규정했을 뿐이다. 이 두 종류의 법은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데, 국가에 관한 공동 동의와 최소 협정, 즉 ‘국가 전체의 공통 약속’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동등한 권위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계약 조건이 지켜지는 한, 그리고 동일한 정치체를 지속하는 한, 왕과 신민을 똑같이 속박한다.

극단적 시기에도 변경은 불가피한 이탈을 초래한 문제 있는 부분에만 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변경은, 사회의 제일 요소에 근거하여 새로운 공공질서를 창조하려는 목표 아래 시민적/정치적 집합체 전체를 분해하는 일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국에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인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시기 변화(혹은 교정)가 나타났었으나, 그 때에도 영국민은 오랜 관행과 전통 속에 존재하던 전체 구조를 해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두 경우 모두에서 영국민들은 옛 헌정체제의 결함을 단순히 쇄신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세습이라는 불가침적인 원리는 일종의 영생적인 것으로 지속되었고, 이를 버크는 “(영국)헌정제도의 정신이다!‘라고 말한다.

누가 왕위에 오르든 어떤 방식으로 오르든, 왕관을 적법하게 얻든 무력으로 얻든, 세습에 따른 계승은 지속되거나 채택되었다.

반면 혁명 협회의 사람들은 명예혁명 당시의 ‘이탈’을 근본적인 원리 이탈로 간주하여 오류를 범했다. 선출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왕도 합법적이지 않다는 그러한 부당한 원칙이 세워지면, 선거 이전의 왕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제정된 어떤 법도 유효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영국인은 법에 따른 왕위 세습 계승을, 자신들이 지닌 오류가 아니라 옳은 것으로 간주하며, 예속이 아니라 자유의 보장이라고 여겨왔고 버크는 이러한 국가 구조가 다른 모든 부분의 안정과 영속성을 보증한다고 주장한다.

프라이스 박사가 말하는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

혁명협회에서 박사의 두 번째 주장은 “부당행위를 이유로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부당 행위를 이유로 추방하는’ 것에 대한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염려하여, 국왕의 압제에 분노했던 혁명의 상황에서도, 신중함을 보여 왔다. 만일 정부가 부당행위라는 것으로 붕괴될 수 있다면, 어떤 정부도 일순간 지탱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명예혁명을 지도했던 인사들도, 제임스 왕의 실질적 왕위 포기를 그처럼 불확실한 원리에서 논지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왕의 임무를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대신들(의회세력)의 책임을 강화했다.

윌리엄 왕 1년 제 2회기에 제정된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확정하는 법”에서, 그들은 대신들이 그 선언의 조항에 따라 왕을 보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들은 그 후 곧 의회의 빈번한 회합을 확보했다. 이것은 정부 전체를, 국민대표들과 왕국의 명사들의 부단한 감시와 실제적 통치 아래 두기 위해서였다. (중략)그들은 권리장전에 마련된 정부에 대한 법칙, 의회의 상시적 감시, 탄핵할 실질적 권리, 이러한 것이 그들의 헌정적 자유를 지키는 데 뿐 아니라 행정의 폐해를 방지하는 데 훨씬 더 나은 보장책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프라이스 박사는 그의 설교에서 “왕이 자신을 인민의 통치자가 아니라 좀 더 적절하게 하인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또한 혁명협회는 “왕은 인민에 의해 세워지고 인민에게 책임을 지는 인민의 제 1 하인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왕이 어떤 의미에서 인민의 하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왕이 보통 의미에서 하인은 결코 아니다. 하인은 다른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며 임의로 해고되지만, 영국의 왕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왕의 통치 아래에 있으며, 그에게 법적으로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즉 영국의 헌법은 결코 왕을 하인처럼 간주하도록 하는 어떤 규정도 마련하지 않았다.

프라이스 박사가 말하는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

그가 주장한 권리인 ‘우리(인민의)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는 앞의 두 권리처럼, 명예혁명 때 행해졌던 어떤 것에서도 선례로나 원리로서 정당화될 수 없다.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생각 자체가, 국가를 혐오와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명예혁명 때조차도 영국인은 옛 조상들의 유산을 지키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당시 시행한 모든 개혁은 옛것에 대한 참조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대헌장이 신성한 권리와 유산으로 여겨져 국가의 영속적인 방침에 대한 증거로 이어져 왔다. 권리청원을 기안했던 사람들도 대헌장을 기반으로 하여 왕위 상속 권리를 그 모호한 사변적 권리(인민의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보다 선호했다. 그 후에 제정된 모든 법에도 동일한 방침이 적용되었다.

윌리엄과 메리 치세 1년의 유명한 법, 즉 권리선언에서 귀족원과 하원은 “고래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그들의 조상이 유사한 경우에 통상적으로 했던 바와 같이” 행동하여 “선언한다”고 언명함으로써 자신들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왕과 여왕에게 “주장되고 선언된 모든 권리와 자유가, 이 왕국의 인민이 예로부터 지녔던 바이며 의심할 바 없는 권리와 자유라고 선언하고, 법으로 제정하기를”요청했다.

이 방법(지정상속)에 따라 헌법은 그 부분들에서 매우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여전히 영국(당시 영국)은 국왕과 귀족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긴 계보를 이루는 조상들로부터 특권과 권리와 자유를 상속받은 하원과 인민을 두게 된 것이다.

정치적 상속제도의 장점

혁신하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기적 성향과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다. 영국인들은, 상속 개념이 개선 원리를 전혀 배제하지 않으면서, 확실한 보수의 원리와 제공의 원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버크는 영국의 정치체제가 질서와 가변적인 양식들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한 조화로운 체계라고 말한다. 즉 이 체제는 쇠퇴, 몰락, 쇄신, 진전이라는 여러 가지 행로를 거쳐 지만 그 속에 변함없는 항구성이 내재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정/교회 등은 서로 융합하여 분리될 수 없는,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어 왔다. 또한 이로써 자칫 무질서와 과도함에 빠지기 쉬운 자유정신이 진지함에 의해 조절되어 고상한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제2부 프랑스 혁명의 실상

1. 국민의회의 과오와 의원들의 자질

국민의회는 고래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과오를 범했다.

당신들은 최선의 것에 근접한 헌법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신분제의회는 상반되고 갈등하는 이익을 숙고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고 모든 변화를 타협할 주제로 만들어 온건함을 생성하며 가혹하고 조잡하며 부적절한 개혁이 지니는 폐해를 방지하는 절제를 낳는다. 또한 자의적 권력의 모든 무모한 행사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고 구성원과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자유는 여러 계층에서 표명되는 개별 견해가 존재하는 만큼 많은 보장을 갖는다. 그러나 당신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멸시했다. 복종이 공공원리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국왕이라는 형태로 체현되었다고 생각지 않고, 충성과 명예를 유지하면서 고래의 특권을 되찾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 당신네들 스스로의 전통에서 그것을 찾기 어려웠다면 영국을 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유를 법과 조화시켜 전제정치를 사라지게 만들고, 공정하고도 많은 조세수입, 번영하는 상업, 자유로운 헌법, 인도하는 동시에 온화한 귀족과 귀족을 모방하는 자유로운 평민층, 덕을 추구하면서 근면하고 복종적인 인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네들이 품었던 잘못된 생각과 헛된 기대감은 결코 없앨 수 없는 실제 불평등을 더욱 악화하고 쓰라리게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선조와 동시대인, 자신들을 멸시하면서 당신들이 무엇을 얻었는가? 덕성을 팔아넘길 수 있도록 이익을 내던짐으로써 얻은 것은 재앙! 예절의 파괴, 반종교로 나아가는 반동, 특권을 나누어 갖는 것처럼 따로 두었던 이익을 개방하는 것처럼 재산과 권력이 걸리는 모든 불행한 타락을 모든 계층에 확산시켰다! 이것이 당신네들이 말하는 평등이다. 군주들은 신민에 대해 불신할 것이고 이를 주장하는 자들을 반역자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반역으로 인민들은 가난해지고 신분도 구제되지 못했으며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것이 불가피했는가? 이 비극은 내전에 따른 참화가 아니라 태평스러운 시기에 채택된 성급하고 무지한 기획이 초래한 결과다. 그들은 국가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왕을 감금하고 시민들을 죽이고 국가적 빈곤과 고통을 일으켰다.

국민의회 의원들의 면모

악에 가까운 이런 선택의 필연성은 국민의회의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제3신분 중 정치에 실제 경험이 있는 자들은 없으며 몇몇 빼어난 자들이 있다 해도 집단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구성원 다수이며 재능 있는 자들은 사악한 야망과 저속한 영광을 향한 다수의 열망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제3신분은 600명으로 구성된 채 세 신분이 하나의 회의체로 통합될 것을 주장했는데 이 경우 두 신분회의 권력을 제3신분회의 손에 들어갈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지식과 성실성을 조국에 바치기로 한 고위 관리도, 일류 변호사도, 교수도 아니며 대부분이 보조 역할을 하는 자들이며 평판이 매우 낮은 자들이었다. 이들에겐 애초에 평판이 없기에 이들에게 최고 권위가 부여되면 절제 있고 분별 있게 행동하는 대신 위대함에 도취되어 자신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를 희생해가며 사익을 추구한다.

게다가 그들은 좀 더 분별력 있는 자들에 압도되지도 않으며 그들을 우러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긍심을 지니지 않은 법률가, 의사, 화폐가 지닌 관념상의 재산을 토지라는 더 확실한 실체로 바꾸는 데 혈안이 된 주식과 채권 매매인들이다. 그들에게 나라 전체의 이익에 관한 고려, 제도의 안정성에 대한 배려는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국민의회는 신분 위계가 소멸된 이래 그를 규제할 어떤 법, 관습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그 헌법을 만들어내는 권력을 지녔다. 또한 그들과 연합한 일부 성직자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지방의 성직자들로, 아주 적은 배당금이라고 얻을 수 있다면 재산에 대한 어떠한 공격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자들이다. 제3신분은 이런 성직자들과 결합하여 귀족의 파멸을 추구했다.

그들이 이기적이고 사악하다는 첫 징후는 그들이 집단에 대한 사랑, 공적 애정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팔아넘길 것이다. 다른 혁명들에서 지도자들은 국가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평안을 교란한 인민들의 위엄을 드높였다. 그들은 권력 찬탈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들의 본연의 위치를 주장하려는 이들이었고 이는 세계를 밝히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크롬웰이, 리슐리외가, 앙리 4세가 그러했다. 이 혁명 중에서도 그 나라의 정신, 자각된 위엄과 귀족적 자존심, 영광과 모범에 관한 고귀한 감각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타올랐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혼란은 생명 그 자체의 기반을 공격하고 사람들의 명예를 깡그리 짓밟았다. 그들은 자연의 원리, 불평등을 강제로 전복하려는 자들에 불과하다.

통치계급의 자격

통치하기 위한 자격은 실제적 또는 추정상의 덕과 지혜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통치의 자격은 개방되어야한다. 하지만 윤번제, 추첨 등으로 모든 이에게 무차별적으로 개방되어선 안된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데 재산과 능력도 대표해야한다. 능력은 활기 있고 행동적인 원리이며 재산은 타성적, 소심한 원리이므로 재산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으면 능력의 침해에서 결코 안전할 수 없다. 또 축적한 재산이 많은 경우에만 대표가 되어야 한다. 재산의 본질은 불평등인데, 다수에 나누어질 경우 그보다 적은 수준의 낮은 여러 재산을 둘러싸는 자연의 성벽의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약탈하자고 선동하는 사람들 중 진짜 재산을 분배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재산을 가족의 수중에 영속시키는 힘은 사회 자체를 영속시킨다.

많은 수가 우월권을 가져야한다는 건 왕국의 기본법이 산수 문제라면 옳지만 실은 틀린 것이다. 다수의 의사와 이해관계는 매우 빈번하게 서로 다르며 그들이 사악한 선택을 했을 경우 차이가 크다. 자질 없는 500명으로 구성된 정부는 비록 4800만에 의해 선출되었다 해도 좋지 않다. 자질을 갖춘 자라 해도 선출되기 위해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십상이다. 프랑스의 경우 재산은 파괴되었다. 또한 공화국 체제에서 프랑스 국토가 하나의 단위로 통치되긴 불가능하다. 자치체들이 한 단체가 국왕 감금을 독점하고 지배를 독점하는 것을 참을 것인가? 그들은 몫을 가지려 할 것이다. 민주적 정부의 조직은 국가의 해체와 동일하다.

2. 영국 헌정에 대한 개혁 주장의 부당성과 자연권 이론의 오류

현재 프랑스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견해

프랑스의 사태에 축하를 보낸 혁명협회 신사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어떤 정치적 계획을 지니고 있어 당신네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에 유용하리라고 믿는다. 프라이스 박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예가 그처럼 유례없이 상서로운 것이 되는 그 자유의 대의는 무엇이며, 그를 위한 노력은 어떤 것인가? 영국 헌정이 모든 법률, 법정, 고래의 단체들과 더불어 파괴되어야하는가? 모든 지방분계선, 감독제 교회, 귀족원, 세금을 다 없애고 모든 계층과 신분, 지위를 뒤섞은 총체적 무정부 상태에서 3000~4000개의 민주적 체제를 83개로 조직하고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결합력을 지닌 그 전부를 하나로 조직해야하는가? 군대와 런던 시민들이 충성심을 갖지 않도록 강제해야하는가?

혁명협회는 우리 대표제의 불평등이 우리 헌법이 지닌 명백한 결점이며 형식과 이론에서만 우리 헌법이 탁월하고 대표제는 모든 입헌적 자유의 기초며 그것이 없는 통치는 찬탈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우리 통치기구 전체는 불법적이며 찬탈이 되고, 이 상황에서의 혁명 역시 정당화된다. 그들의 원리는 하원의원 선거제의 변경보다 훨씬 더 나아갔는데 그들의 논리대로 모든 정부의 정통성에 민중의 선택이 필수적이라면 귀족원, 국왕은 없어져야하며 명예혁명은 자격 미달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파괴해야만 한다. 오랜 경험이라는 확실한 검증과 국민의 힘, 번영의 증대로 확인된 헌정의 실제에 대해 말해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듣지 않으며 경험을 학식 없는 자들의 지혜라고 경멸한다. 그들이 추구하려는 인간의 권리는 어떠한 조정도 어떠한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정한 권리

나는 인간의 진정한 권리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거부할 생각이 없다. 공공 사회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형성 목적인 이익 전체가 인간의 권리가 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침해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할 권리를 지니며 사회가 그를 위해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을 요구할 권리를 지닌다. 하지만 국가 경영에서 개인이 가지는 권리는 인간의 본원적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협약에 의해 결정된다. 공공사회의 협약이 모든 종류의 기본법을 한정하고 조절하며, 공공 사회의 형성은 스스로 심판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권리를 상실, 즉 통치자가 될 권리를 포기하면서 이루어진다.

자연권은 모든 것에 대해 권리를 보장하지만 이는 바꾸어 모든 것에 대한 결핍이며 이에 대한 욕구 충족을 위해 인간이 정부를 만든 것이다. 사회는 이를 위해 인간의 열정을 억제하기도 하며 이 자유와 억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변경의 여지가 무한하기에 이를 추상적 규칙으로 정해둘 수는 없다. 이런 학문은 다른 경험과학처럼 선험적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매우 풍부한 경험을 요구한다. 고로 여러 시대를 거친 건축물을 쓰러뜨리려하거나 재건축하려고 할 경우는 무한한 조심성이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 사회의 목적은 지극히 복잡하기에 권력을 단순하게 배치, 관리할 순 없다. 혁명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권리는 극단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정부 아래에서 인간의 권리는 그의 이익이며 그것은 선과 악, 악과 악 사이의 타협 속에 있는 것이다.

극단파의 폐해

내가 말한 혁명파들의 설교들은 명예혁명의 원리에서부터 많은 사람을 이탈하게 하고 그 혁명의 혜택을 박탈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만연하여 폭군 살해와 저항이 하나의 원칙이 되면 사람들은 모든 공적 원리를 가볍게 생각하고, 이 사소한 것들을 사소한 이익을 위해 포기하려 한다. 국가의 현재 구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최선의 경우에도 국가에 대해 무관심하며 공무처리가 훌륭해도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해도 과실로 보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혁명에 유리하다고 좋아할 것이다! 그들은 극한의 상황의 필사적 타격에 대비해 마음을 단련하며 결과적으로 정신은 쓸데없는 손상을 입고 이 정신의 타락이 정치적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도덕 감정이 훼손된다. 인권에 관한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인간 본성을 망각하고 이해에 이르는 한 가지 새로운 길을 열지 않으며 심정에 이르는 길들을 막고 사람들 가슴에 안온하게 자리잡은 공감을 자신과 추종자들에겐 왜곡시킨다.

올드쥬리의 연설자는 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크게 감명 받았고 그 추종자들에게 저비용에 피를 보지 않는 개혁은 진부하며 거대한 장면 변화, 장엄한 무대 효과, 그리고 무감각해진 상상력을 일깨울 대장관은 필수다! 또한 그들은 지난 세기에 있던 기억할 만한 승리를 무시한다. 그 시대 설교자들은 프라이스와 비슷한 열의로 그 시대의 승리에 참가했는데, 프라이스는 마치 하나의 발견을 이룬 것처럼 프랑스의 성과를 과대평가한다. 인권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이 산출하는 모든 영예로운 결과를 배타적으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질 않는가! 그들은 비인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환희에 사로잡혀 잔학하고 고통스러운 광경에 그 외침을 적용한다. 그들이 행한 개선행진의 선도는 문명화된 상무적인 국민이 벌이는 승리가 아니라아메리카 야만인들이 학살 이후에 행한 행진을 닮았다.

3. 프랑스 왕과 왕비의 수난: “10월 6일의 잔악한 광경”

국민의회의 위상과 프랑스의 “개선행진”

프랑스의 개선행진도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은 국왕의 권위에 의해서도 그들의 명령에 의해서도 모집된 바 없는 군대에 포위되어 있고, 의원 몇 백명은 강제로 쫓겨났으며 온건한 원리를 신봉하는 이들은 모욕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때때로 진정한, 때때로 가장된 다수파가 횃불의 공포 아래서 국왕을 강제하여 칙령으로 발포하도록 하며 모든 제안은 대담무쌍하고 폭력적이고 불성실할수록 최고라 여겨지며 인간애와 동정심은 조롱당하고 개인에 대한 친절은 공공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진다. 국민의회는 엄숙한 입법 단체의 외관과 면모조차 지니지 않고 그들에겐 무언가를 건설할 힘 대신 전복하고 파괴할 힘뿐이다. 군주정 옹호자나 공화정 옹호자나 똑같이 이 현상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국왕과 왕비, 그의 어린 자녀들은 유린당하고 끌려갔으며 궁전의 성역은 유혈이 낭자하고 학살로 더럽혀진 채 시체가 나뒹굴었다. 국왕의 호위대는 목이 잘렸다. 이것이 교회제단에서 숭배할 개선행진인가? 고요한 인내심을 지니고 신앙과 용기를 지닌 왕비는 수치를 당했다.

기사도 상실의 폐해

이제 기사도의 시대는 갔다! 여러 신분을 뒤섞지 않고 고귀한 평등을 이루며, 힘도 사용하지 않고 반대도 없이 거만과 권력의 흉포함을 억제하던, 엄격한 권위를 우아함에 복종하게 만들고 법의 정복지에게 예절에 복속되는 통치를 선사한 시대는 끝났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정복 제국에 의해 해체될 운명이다. 우습고 불합리하고 낡아빠졌다는 이유로! 저들에 의하면 국왕도 왕비도 한 남자, 한 여자에 불과하다. 그들의 법은 공포와 사적 이익에 의해서만 유지되며 어떤 확실한 지혜도 결여되어 있다. 공적 애정, 국가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다. 고래의 제도들을 타파하기 위해 고래의 원리를 파괴한 이 찬탈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게 만들 것이다. 왕은 민중을 믿지 못하고 방책에 기대하는 폭군이 될 것이다. 과거의 안정 속에서 발생한 상업, 무역, 공업 역시 붕괴할 것이고 종교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이제 종교도 명예도 남자다운 자부심도 없이 현재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그럴 희망이 없게 된 나라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왜 프라이스 박사와 그 추종자들과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이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한 광경에 대면하면 결국 죽을 운명인 인간의 번영이 지니는 불안정성과 인간의 위대함에 스며든 엄청난 불확실성에 관해 비애를 느끼도록 만들어졌다. 루이 16세가 왜 죽어야했는가? 그가 프랑스 왕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며 그는 자신의 권위를 기꺼이 완화하고 대권을 축소하고 인민에게 자유의 몫에 참여하도록 허락한 군주다. 인간성의 대의란 없다! 만약 프랑스 왕과 왕비가 냉혹하고 잔인한 폭군이었고 그들이 국민의회를 학살하려 했다는 것이 내게 명확히 제시된다면 감금은 정당하며, 그보다 더한 것이 행해졌어야하는데, 내 생각에 이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죄에 대해 복수하면서도 위엄을 고려해야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살인보다 더 잔인한 모욕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면. 그 자는 집행자가 될 자격이 없다.

4. 영국인의 대조적인 성향: 옛것과 교회의 존중

영국인은 옛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에서 우리는 그런 모략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이 한 짓과 비슷하게 자유랍시고 유대교로 개종하고 폭도를 모아 감옥을 파괴한 조지 고든은 감옥에 갇혀 있다. 프랑스인들은 특정 종류의 서적에 기대어 우리를 판단하지만, 그 책들은 영국인들의 보편적 의견과 성향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으며 당신들이 아는 영국인들이랑 시시한 도당들,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00분의 1도 혁명협회의 개선행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14세기의 관대함과 위엄을 상실하지 않았고 야만인도 아니며 루소, 볼테르, 엘베시우스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정부에 대한 원리와 자유이념은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해되었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감정을 여전히 우리 내부에서 느끼며 소중히 육성한다. 이러한 감정은 의무에 대한 충실한 보호자이며 적극적 감시자고 도덕의 지지자이다.

우리는 신을 두려워하며 왕에게 외경심을 갖고 의회에 대해 애정을, 장관에 대해선 의무감을, 성직자에게선 경외감을, 귀족에게는 존경심을 지닌다. 왜? 그러한 개념이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를 때 그런 식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 편견을 버리는 대신 소중히 여기며 편견이 오래된 것일수록 더 일반적일수록 우리는 더 소중히 여긴다. 이성을 지닌 편견은 그 행동에 이성을 부여하며 행동에 영속성을 부여한다. 편견은 정신을 미리 지혜와 덕성의 꾸준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결정의 순간에 사람들을 회의하고 당황하고 미결 상태에서 망설이도록 놔두지 않는다. 계몽된 당파는 다른 이의 지혜를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지혜를 전적으로 확신한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오래된 구조를 파괴할 뿐 새로운 것, 졸속으로 지은 것에 대해서는 그 내구성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 시대 이전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헌법에 대해선 편의 외에 어떤 애착의 원리가 필요 없으며, 통치자는 규제하지만 상호 의무는 없고 민중의 권위는 자신의 의사 이외에 어떠한 이유도 필요 없이 그 계약을 해지할 권리를 보유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프랑스 국민에게 가르친 적도 보여준 적도 없다!

종교는 문명사회의 기반이며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종교는 문명사회의 기반이며 모든 선과 안락의 기원이고, 영국인들은 이를 확신하고 있다. 무신론은 이성, 본능에 배치되며 현재 프랑스의 기독교 폐지 움직임은 걱정스럽다. 기독교는 우리의 자부심이었고 많은 국민에게 문명의 일대 원천이었다. 당신들이 기존 제도에서 자연스런 인간적 존경 수단들을 제거하여 경멸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대신 다른 것이 제시되길 바란다. 우리는 기존 제도에 열성적으로 집착한다. 현재의 국교회, 현재의 왕정, 현재의 귀족제, 현재의 민주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교회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면, 교회란 심오하고 광대한 지혜를 포함하는 편견이다. 교회는 우리의 정신의 첫째요 마지막이며 우리는 현재 보유한 종교 체제에 기반을 둠으로써 인류가 얻어서 한결 같이 지속시킨 분별에 입각하여 계속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분별력은 국가를 신성하게 만들고 이 신성화는 인간의 통치를 맡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무와 목표를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 고매한 원리들이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주어져야만 하고 이를 위한 종교 제도를 제공해야한다. 국교제도에 의한 국가의 신성화는 자유로운 시민들에게 건전한 경외심을 갖게 한다. 국가에 대한 의무와 결합된 종교는 권력을 소지한 모든 인물은 자신들이 신탁을 받아 행동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종교 없이 민중은 이기적 의사에 대한 욕망을 제거할 수 없으며 공직자 임명시 이기적 이익, 변덕, 자의적 의사에 따르지 않게 된다.

국가와 법을 소중하게 만드는 목적은 자신들이 완전한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원적 구조 전체를 멋대로 파괴함으로써 한정 상속의 제한 해체나 유산 낭비가 자신들의 권리에 속한다고 생각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경우 후손에게 거주할 장소 대신 폐허가 남으며 후계자들이 자신의 고안물도 존중하지 않게 만든다. 국가의 전 연쇄와 연속성은 파괴되고 어떠한 세대도 다른 세대와 연결될 수 없다. 또한 법학은 오류라는 이유로 연구되지 않으며 개인의 자기만족과 오만이 재판정을 찬탈할 것이다. 기준이 계속 변하는 나라에서 누구도 명예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누가 명예로워지고자 하겠는가? 결국 국가 자체가 몇 세대 지나지 않아서 붕괴되어 개인으로 분해되고 말 것이다.

영국인은 신이 국가를 마련했다고 인식 한다

우리는 그래서 국가를 신성화했다. 누구도 국가를 전복시키면서 개혁을 시작하지 않도록, 국가의 오류에 대해 경건한 외경심과 염려를 지니고 접근하도록 말이다. 사회는 계약이지만, 국가는 단순히 일시적 이익을 목표로 한 동업 합의와 다르다. 국가는 그것과는 다른 존경심을 지니고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이다. 신성함으로 국가를 대함으로써 그 고귀한 기원과 위치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 이런 생각을 지닌 공공 사회 없이 인간은 그 본성상 가능한 완성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완성은 신이 국가를 마련했다고 하는 인식, 신이 국가의 모든 완성의 근원이자 원초적 모범과 결합하길 바란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교회제도

영국사람 대다수는 국교제도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국교회가 필수적이며 헌정 전체의 기반이라 여긴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우리 교육은 이 인상을 확인하고 확고하게 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 교육과 교회제도는 14,15세기 이래 거의 변동되지 않은 것이다. 종교 정책과 헌법 정책을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약자를 위로하고 무지한 자를 교육할 방편을 마련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견해에서 영국인들은 교회 재산을 사유재산으로 간주한다. 최고 권력이 그 재산의 오용을 막기 위한 감독권을 지니고 있다. (-> 국가가 총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관습과 사유재산권 보장을 이유로 그런 것인가?)

기독교 정치가들은 대중을 먼저 배려한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설파되었고, 그들은 자선이 한 종류의 사람들에 한정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자에게 적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더 큰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과오가 초래하는 결과가 큰 고위층에게 종교적 가르침이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헌법은 대중이 부자들의 멸시를 받거나 그들의 자선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지경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부자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위한 진정한 약을 소홀히 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5. 국민의회의 교회재산 몰수

교회재산 몰수의 의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파리의 일에 동조했던 일부는 교회에 대한 강탈을 보고 실망했다. 그들은 이 엄청나고 파렴치한 강탈 행위를 공포와 경악 속에서 지켜보았다. 공공을 위한다는 어떤 구실에 의거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시민의 재물을 몰수하는 행위, 인간성의 흔적을 전부 상실한 행위이다.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자선에 의지하도록 내몬 것은 잔학한 행위이다. 그들은 성직자들이 국가의 창조물이며 성직자들이 보유한 재물은 본래 그들 것이 아니고 허구를 창조한 국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명목 아래 당신들은 사람들에 해를 끼치고 직업에서 얻는 정당한 보수를 박탈하는가? 국가가 그 직업에 종사하도록 용인하고 장려했음에도? 그들은 그 보수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생활을 설계하고 빚을 내고 많은 이들을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했는데도 그렇게 하는가?

이 재산권에 대한 폭거는 국가 신용에 대한 추락이다. 프랑스 왕들이 통치했던 이전 정부의 모든 행위는 국민의회에 의해 무효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국왕 정부가 맺은 기타 계약들은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그를 기반으로 청구권을 행사하는 행위는 범죄로 간주된다. 국가 신용에서의 이러한 해이는 이전 정부에서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처녀 국가의 대외적 신용도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화폐 소유 계급과 문필가 도당

프랑스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자 화폐 소유 계급이 성장하여 큰 권력을 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관습상 토지를 화폐로 바꾸거나 화폐를 토지로 바꾸는 것이 어려웠기에 지주 계급과 소유자 계층은 분리되어 있었다. 민중은 화폐 재산이 자신들의 고난과 관련 있을 거라 생각해 시기했고 토지 소유 계급인 귀족들 역시 화폐 재산이 지닌 과시적 사치의 찬란함으로 재산이 없는 귀족, 실속 없는 소유권을 지닌 부류의 광채를 가린다 생각하여 시기했다. 두 진영의 적의와 원한은 계속되었는데, 귀족이 아닌 부유층의 자긍심이 부의 증가와 함께 높아졌고 이에 대비되는 열등한 지위에 분개하면서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를 다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특혜로 귀족들에게 이전되던 교회 재산(귀족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했다. 화폐 소유 계급은 본성상 어떤 모험에도 준비가 잘 되어 있어 강력한 힘을 쥐게 되었는데, 그들의 재산이 변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필가 집단이 등장했다. 자신들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여 혁신에 반대하는 일이 거의 없는 그들은 루이 14세 이후 궁정에 연결되지 않음으로써 생긴 보호막을 벌충하기 위해 화폐 소유 계층과 연합했다. 이 문필가 도당은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조직적 계획을 작성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 추종자들을 만들었고 이 무신론자들은 성직자에 대해 반대 논리를 펼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당파에 합류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 대해 모든 방식으로 중상하고 실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왜 이들이 기독교에 반대했을까? 이익을 위해서? 개혁을 위해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그들에게 있어 변혁이 전제정에 의해 이루어지건 민중 소요에 의해 이루어지건 알바가 아니었다. 집단으로 행동한 그들은 민중을 선동했다. 이제야 왜 종교 단체의 모든 토지재산에 대한 공격이 그토록 난폭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회의 재정 정책과 교회재산 몰수

국가 채무를 위해 손실을 누군가 떠안아야한다면 이는 반드시 신용했던 당사자가 손해를 입어야지 그 거래와 상관없는 제3자가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성직자가 그 거래에 무슨 상관이 있었는가? 의회가 선언한 성직자들의 재산에 관한 권리는 채무를 지고 재산을 저당 잡힐 권리뿐이었다. 왜 그들은 국가를 빈곤하게 만든 원흉들, 재무 감독관, 채무에 책임 있는 대신들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았는가? 야만인 정복자도 재산에 대해 이처럼 무서운 혁명을 자행하지 않았다. 이것에는 어떤 절차도 없었고 이런 악덕을 합법화하는 데 필요한 건 오직 철학, 계몽, 자유, 인권뿐이었다. 또한 프랑스의 상황이 존속을 이외에 약탈밖에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비참했는가? 네케르 씨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수입을 지출에 맞추기 위해서 새로운 세금은 필요 없었다. 심지어 성직자들은 기부금까지 제의했으나 그들은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교회가 국가에 봉사하게 할 의향이 없었던 것이다.

교회 토지 몰수 후의 조치들

이 기획이 무모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량의 토지재산이 시장에 나와 프랑스 전체 토지재산의 가치가 하락했고 이로 인해 이익 챙기기는 실패했다. 유통 화폐가 전부 상업에서 토지로 몰림에 따라 폐해가 더해졌다. 교회 토지의 대가로 공채증서를 제시했는데, 교환될 대상들을 등가로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겨나 결국 다시 판매 기획으로 선회했으며 그러자 지방 자치체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왕국의 약탈물 전부가 파리의 채권 보유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지방자치체는 심각한 빈곤 상태였고 화폐는 없었으며 그들은 고사하는 산업을 재생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통화도 갈망하게 되었고 그때가 돼서야 약탈의 몫을 얻도록 허용되었는데 그로써 최초의 기획은 전부 실행 불능 상태가 되었다. 재무장관은 자금 공급 요청을 반복했고 결국 새 지폐가 발행되었다. 교회 약탈물이 지금 그들의 재정 조치를 시행하는 데 유일한 자원이 되었고 이 약탈에 강제로 모두를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발행한 지폐를 모든 거래에서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민중이 법원에 호소하고 법의 기치에 집결할 수 없도록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법률가들에게 이로 인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 교회지폐를 나누어주었고, 성직자들에게도 가치가 떨어진 지폐로 근소한 수당을 주었다.(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했다.) 사실상 교회 토지가 실제로 전혀 판매되지 않았다. 교회 토지는 최고 입찰자에게 넘겨질 것인데, 구입 금액의 일정 부분만 지불되고 12년 동안 나머지를 지불하도록 했다. 새 체제에 대한 열성에 입각한 봉건적 토지 보유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돈 없는 자들을 구입자 대열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 결과 구입자들은 산출되는 지대에서 대금을 지불해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짜낼 수 있는 모든 돈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새로운 악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체제 당파라는 비난을 받아야했다.

6. 혁명 전의 프랑스: 경제, 상황, 귀족, 성직자

민주정의 폐단

프랑스의 현재 지배 권력을 순수 민주정으로 가장하고 있으나 곧 해롭게 저열한 과두제로 흐르게 될 듯하다.(-> 로베스피에르 통치, 5인 정부, 나폴레옹 통령과 황제) 순수 민주정이 바람직한 상황도 있으나 프랑스는 그러한 상황이 아니다. 민주정의 예를 본 고대인들은 절대적 민주정은 절대적 왕정과 마찬가지로 합법적 정부 형태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가장 잔인한 압제를 행사할 수 있다. 설사 민주정이 다른 정체와 결합하면 지닐 장점들을 그 자체가 결합하지 않고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왕정의 경우 그를 추천할 사항이 아무것도 없는가? 볼링브룩은 왕정을 선호하는 이유가 공화정 형태에 왕정 요소를 접목하는 것보다 왕정에 어떤 종류든 공화정을 더 잘 접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내 생각에 이 의견이 타당하다.

프랑스 왕정

나는 프랑스 왕정의 결점을 인정한다. 문제는 왕정의 폐단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개혁할 여지가 전혀 없을 정도였는가? 왕국 각지에서 신분제의회 대표자들에게 제출된 지시서는 정부 개혁을 위한 기획으로 가득했고 붕괴에 관한 제안은 없었다. 왕정에는 그 자체로 장점이 있고 프랑스 왕정에는 그 폐단에 대한 교정력이 분명히 있었다.

프랑스의 인구 및 경제 상황: 왕정과 현재

그 나라 정부의 성과를 판정하는 기준 중 하나는 인구 상태이다.(-> 루소!) 17세기 말 1800만명이던 프랑스 인구는 1780년에(네케르 씨에 의하면) 2,467만명이 되었다. 이 인구 증가는 물론 정부의 공적이 아니다. 하지만 단지 난 인구 증가에 유익한 원리를 지녔다고 (적어도 방해하지 않은) 경험상 밝혀진 국가의 구조가 모든 정부 제도에서 최악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두 번째는 국가의 부유함인데, 프랑스의 부는 상당하다. 네케르 씨는 1726년부터 1784년까지 프랑스 조폐국에서 1억 파운드의 금은 정화를 주조했다고 밝혔으며 프랑스에 존재하던 뉘메레르, 정화가 영국 돈으로 8,800만 파운드나 된다고 말했다. 또한 조폐국에서 주조된 정화가 그 왕국에 전부 유입된 이유는, 즉 정화를 강력하게 획득하고 보유하게 만드는 원인은 방해받는 산업, 불안정한 재산, 적극적으로 파괴적인 정부에서는 찾을 수 없다.

또한 군주의 무한한 권력도 그 행사가 날마다 완화되어 갔으며(루이 14세 이후 왕권 하락) 정부는 개혁에 관한 여러 종류의 기획을 용인했다. 현재 프랑스가 과거의 프랑스의 위치로 돌아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주화는 모습을 감추었고 인구는 크게 감소했고 생계 식품은 5분의 1로 감소했고 1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자유를 얻고자 혁명을 일으켰지만 지혜와 정의를 동반하지 않은 자유는 그 출현이 매우 미심쩍으며 번영과 풍요로 이끌어가지도 않는다.

프랑스의 귀족

혁명의 옹호자들은 자기 나라 자체의 명성에 타격을 입히며 귀족과 성직자를 공포의 대상인 것처럼 묘사한다. 1789년 베르사유에 모인 특권귀족들은 남의 재산을 빼앗지도 약탈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왜 망명하고, 난도질당하고 쫓기고 고문당하고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집은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는가? 귀족은 다른 신분들 못지않게 자유정신을 열렬하게 표명하며 개혁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과세 부담과 자신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물론 앙리 4세 이후 프랑스 귀족들은 타락했으나, 그 진술은 내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범위를 넘는다. 하층 계급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선의에 차 있었고 학대하지도 않았으며 법률이 건재 하는 한 신민에 대한 폭정도 용인되지 않았다. 토지에 관한 계약도 억압적이지 않았다. 폐지와는 거리가 먼 한 번의 개혁에 의해 제거될 수 없는 정도의 폐단은 프랑스 귀족들에 없었다.

프랑스의 성직자들

성직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중에게 약탈하도록 부추긴 무신론적 비방자들은 현재 성직자들의 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넘어서 억압과 박해의 모든 사례를 끌어내 자신들의 박해를 정당화했다. 혈통상 선조가 저지른 범죄를 이유 삼아 징벌했다. 집합단체는 그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불멸성을 지니지만 구성원 처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상호 적대한 시기의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을 해쳤다고 지금 전쟁을 벌일까? 왜 역사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는가? 이 국가적 규모의 해악의 원인은 악덕이다. 종교, 도덕, 법률, 대권, 특권, 자유, 인간은 구실에 불과하다. 오늘날 파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시대에 벌어졌던 가증할 행위와 참사에 대해 복수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성직자들의 완고함, 열정의 과도함, 자기 지위와 직위에 대한 편향성, 자기 단체 이익에 대한 집착을 인정한다. 이것이 악덕으로 진전하는 것에 대해 방지해야한다. 그러나 성직자 집단이 과연 정당하게 허용된 한계를 넘어섰는가? 그들이 국내 평온을 교란하고 정부의 작동을 방해했으며 철권으로 세속인들을 억누르고 야만적으로 박해했으며, 악덕을 잔뜩 지녔는가? 그들이 다른 종파의 사제들을 학살하고 제단을 파괴했는가? 그들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며 오히려 귀족보다 더 나았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고위 성직자 일부는 모든 근거에서 폭넓게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들이다. 루이 16세는 고위 성직자 임명시에 선왕보다 인품을 더 중시했다.

7. 국민의회의 교회 정책

새로운 교회 제도

현재 통치 권력은 교회를 약탈하려는 경향만을 드러내면서 모든 고위 성직자를 처벌했다. 그들의 모욕적인 연금 제도로, 이제 자유로운 생각을 지녔거나 형편이 넉넉한 이들은 아무도 자녀들을 성직자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이 만든 성직자 선출제도로 인해 형편이 안좋은 이들, 그래서 교묘하고 분파적이며 아첨하는 철면피 무리들이 성직자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 종교 제도는 또한 기독교를 완전히 폐기하려는 기획으로 보인다. 영국에서의 종교 개혁자들은 당신네들의 개혁 박사들과는 달리 진지한 신앙인이며 고상한 경건함을 지닌, 기독교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16세기 뮌스터의 재침례파들이 재산에 관한 평준화 주장과 난폭한 견해로 독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유럽 전체가 경악했다. 그 이유는 지혜가 대항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가 광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보인 무신론적 광신주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음흉하고 야만스런 잔혹성을 채워 넣으며 사람들 마음에서 도덕과 종교의 모든 감정과 더불어 보편적인 자연적 감정을 대신한다. 프랑스의 예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나라 교회재산이 몰수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몰수로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국가정책으로 고려된다던지 어떤 부류의 국민이 다른 사람들을 누구라도 자신의 먹이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국가 부채는 이제 정부의 전복 수단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수도원 제도의 이점

프랑스에서 추구된 노선으로부터 기대된 공공 이익이 어떠한지 밝혀보자. 국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개혁 없이 존속하거나 아예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중도의 길이 있다. 어떤 자가 감히 자신의 나라를 백지에 불과하다고 보고 자신이 좋을 대로 그 위에 갈겨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위대한 정신적 노력을 기울여 개선을 행하려 할 때 이를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은 수도원 제도에서 발견될 수 있다. 현명한 자비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큰 힘이 수도원 제도에 있다. 공적 지시를 받는 수입과 공적 목적을 위해 헌신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 말이다. 당신네는 이 인재를 쓸 방도가 성직자를 연금수령자로 바꾸는 것 외에 없다고 생각했는가? 당신들은 자신들의 연장을 팔아버린 것이다.

재산 이전 정책으로서 수도원 재산 몰수

나는 재산 몰수를 공공 이익이 아니라 재산 이전의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모든 번영하는 사회에서 재산은 생계유지보다 더 많이 생산된다. 이 잉여분이 토지 자본가의 소득을 형성하고 그 소득은 노동하지 않는 재산 소유자에 의해 소비된다. 그러나 무노동 자체가 노동의 원천이며 이 휴식이 노동에 대한 박차다. 국가는 토지에서 나온 지대로 수취된 자본이 다시 그것이 나온 근면에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몰수시에 몰수재산의 구입자들이 옛 소유자들(수도사들)보다 더 근면하고 유덕하고 분별력하다고 확신해야하며 몰수재산 구입자들이 잉여를 더욱 견실하고 평등한 방식으로 지출할 자질이 있는지 고려해야한다.

수도사들은 예속적이며 굴욕적이고 꼴사납고 남자답지 못하며 건강에 해롭고 위험한 일들을 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비참한 노동에서 강제적으로 구해주고 싶을 정도다. 사치에 땀을 쏟는 것보다 신성한 제작물을 복구하는 데 땀을 흘리는 데 더 명예롭고 이익이 아닌가? 잉여 산물이 타락한 자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보다 신에 대한 봉사의 검소한 생계에 사용되는 것이 나쁜 것인가? 과잉을 유희로 없애는 것보다 성당을 장식하는 것이 덜 가치 있는 것인가? 왜 사용 방법을 더 나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 이동시키는가?

제3부 국민의회의 새 국가 건설 사업

1. 국민의회 정책의 기본 성격과 그 오류

이 의회는 상황을 이용하여 국가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임의 단체일 뿐이다. 이들은 어떤 기본법에 의거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선출한 인민의 지침에서도 이탈했다. 쫓겨난 폭정에 필요한 대체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울 때엔 시효에 필요한 시간이 있어야한다. 이 시효는 오랜 관행을 통해 난폭한 정부를 합법적인 것으로 바꾼다. 그러나 사회적 결합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이 권력, 법에 의해서도 필요성에 의해서도 탄생하지 않은 이 권력을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1년간의 시효도 갖지 못했다. 그들은 고래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을 택했는데 혁명 같은 난폭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는 통상적이지 않은 이유가 요구되며 확립되고 승인받은 권위에 부여하는 것보다 적은 경외심과 존경만이 필요하다. 이들은 폭정과 찬탈의 정식 방식을 따랐으며 전체를 시험해보지 않은 사변의 처분에 맡겼으며 공공 이익은 전부 우연에 맡겨 버렸다. 종합적이며 적절한 정신 작업, 통속적인 신중함은 어디에도 없고 곤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곤란을 회피하려는 목적만 지녔다. 그들은 보아왔던 것 전부를 반대로 하는 것 외에 한 것이 없다. 개혁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파리의 입법자들의 유일한 자질은 무감각한 가슴과 의심 없는 확신 뿐이다.

2. 입법부 계획

오래된 제도는 그 효과에 비추어 판단된다. 제도는 이론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여러 필요성과 편의의 산물이다. 경험에서 얻은 수단이 목적에 더 잘 부합할 수 있다. 프랑스는 지방과 중앙의 입법부를 기하학적, 산술적, 재정적 기초에 세우려 한다. 첫째가 지역적 기초이고 둘째가 인구적 기초, 셋째가 분배적 기초이다. 첫 번째를 위해 그들은 자기 나라 영토를 가로세로 18리그씩 정사각형 83조각으로 분할했고 큰 지역을 데파르트망이라고 부르며 이를 720지구의 코뮌으로 나누고 또 캉통이라는 지역으로 나누어 모두 6400개의 분할 구역을 만들었다. 이 같은 계획을 위해서 측량기사, 측쇄, 조준기, 경위의를 지닌 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기존 경계선을 변경시킴으로써 익숙하지 않은 지역적 불편이 생겨났다. 토지의 비옥도, 주민 수, 주민의 부, 조세 부담의 크기가 정사각형마다 다양하기에 기하학적 평등은 주민을 배분하는 측량 가운데 가장 불평등한 것이다.

그들의 이상에 따르면 인간은 완전히 평등하며 각 개인은 한 사람마다 투표권을 지니며 각자는 입법부에서 그를 대표할 사람을 직접 선거한다. 그런데 “기초의회”를 구성하는 캉통의 선거인은 3일간의 노동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납부하는 자격 요건을 갖춰야한다. 이는 자연적 평등성이 가장 보호되고 방어되어야 할 사람들을 선거에서 배제한다. 캉통의 기초의회는 코뮌에 보내는 대표자를 선출하는데, 코뮌의 대표자로 선출되고자 하는 자는 10일간의 노동 임금액을 지불해야한다. 코뮌 대표들이 데파르트망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이 국민의회의 대표를 선출하는데 국민의회에 선출되는 모든 대표들은 은 1마르크 상당을 직접세로 지불해야한다. 이러한 자격 요건은 인간의 권리를 파괴할 뿐이다.

세 번째 기초인 세금납부의 기초를 보면 이들이 인간의 권리를 완전히 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지막 기초는 전적으로 재산에 기반을 둔다. 헌법위원회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세금납부의 원리는 무효이고 평등에 파괴적이며 부자의 귀족정을 설립하게 하므로 해롭지만 그것을 폐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 데파르트망 안에서 모든 개인을 정확히 대등하게 하면서 데파르트망 간의 사이에 불평등을 설치한다. 지역별로 세금 납부에 차등을 두고, 이에 따라 대표자 비율을 차등 설정한 것이다. 이 세 가지 기초를 국민의회가 기반하는 이념에 입각하여 비교해보면 인구 기초라 불리는 원리는 지역 기초와 세금 납부 기초와 동일한 지점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뒤의 두 원리는 귀족 정치적 성격을 지니며 전자가 후자의 두 원리에 적용하여 매우 불합리한 불평등이 생겨난다. 이 계획은 프랑스를 여러 공화국으로 절단하여 상호 완전히 독립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이며 결합의 끈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캉통, 코뮌, 데파르트망은 서로에 대해 외지인이다.

고대의 공화국들을 조형한 입법자들은 인간을 다루어야만 했고 고로 인간의 본성을 연구했다. 시민을 다루고 이들의 습관에 대해 연구했다. 출생, 교육, 직업, 나이, 도시나 농촌 거주, 재산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에 따라서 재산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많은 다양성이 생겨났고 이 때문에 입법자들은 시민들을 독특한 습관에 따라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계급들로 배치하였다. 또한 이해의 다양성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그들을 보호할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적절한 특권을 배당하면서 시민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그러나 프랑스 입법가들은 형이상학적이며 측량기사 같은 방식으로 모든 종류의 시민을 연결되지 않은 다수의 공화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국의 경우는 통합이 중심이다. 우리 정부는 전체를 위한 수탁자이다. 그러나 당신네 헌법은 중앙의 의회의원과 기초 선거인 사이에 연결이 전혀 없다. 전국의회 의원은 인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그들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의회 의원들이 선출되기까지 선거가 세 번 치러지며 그와 기초의회 사이에서 2개 층위의 지역적 권위가 사로잡고 있어서 의원은 한 국가의 인민의 대표가 아니다. 기초 선거인들은 그들에게 봉사할 의원들의 자질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의원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책임감이란 없다.

3. 프랑스를 당분간 결속시키는 접착제의 실체

프랑스가 어떤 외부적 요소를 가지고 공화국들을 위한 접착제를 마련했는지 고찰해보자. 강제적 지폐 통용이 결부된 몰수, 파리 시의 최고 권력, 국가의 정규군이 그 세 가지이다. 먼저 몰수의 경우 약간의 통합력과 지속성이 있다. 그러나 몰수물이 지폐를 지탱하기에 충분치 않을 경우 접착이 아닌 분열과 불화, 혼란이 무한정 증가되고 몰수가 지폐를 상환할 정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접착력은 지폐와 더불어 사라진다.

이 몰수의 효과는 과두지배를 만들어낸다. 지폐 유통은 남아 있는 모든 권력, 권위, 영향력을 이 유통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한다. 화폐 조작과 투기 정신이 토지에 투입되고 가치가 극도로 불확실해지는 일이 토지에 퍼진다. 사람들은 돈놀이를 하고 프랑스 전체는 거대한 도박판으로, 주민은 도박꾼이 되며 사람들은 운에 의존하려 한다. 문제는 그 도박을 이해할 수 있는 자, 그 지식을 이용할 처지에 있는 자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소수의 봉이 된다는 것이다. 회계를 할 수 없는 농촌 주민들은 곡물을 팔 때 가치가 갑자기 하락했음을 알고 시장에 다시 안 나서려 하고 도시민들은 곡식을 팔 것을 강제하고 농민은 이에 저항한다. 선동자들은 나라를 통치하고 왕과 교회, 인민의 파멸을 기반으로 비열한 과두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접착제는 파리 시의 우월이다. 파리시는 불균형적으로 거대한 힘을 지니며 이 힘은 좁은 범위에 결집되고 응축되어 있다. 다른 지역들은 산산이 찢어졌기에 파리에 대항하여 연합할 가능성이 없다. 파리의 권력과 압도가 지속되는 한 공화국들은 억누르고 결합한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은 자신을 프랑스의 일원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이런 억지 결합은 오래갈 수 없다. 또한 국민의회는 모든 권력을 쥔 채 외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다. 그들은 원로원이나 무언가 그러한 본질과 성격의 것을 구성하는 것을 잊었다. 자문회의가 없는 공화국 통치는 최고도의 무능력을 보인다.

4. 행정부 계획

당신들은 행정부를 형성하기 위해 강등된 왕을 선택했다. 그는 재량권이 없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그는 독점적이지도 않은 정보관에 불과하다. 사법부의 고위직은 공인적. 정치적 두 계통의 어느 쪽도 왕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판사 선정에 대해 공증인으로서 인증하는 역할, 관리들을 통해 판사들의 판결을 집행할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사형집행인의 우두머리와 다를 게 없다. 사법 임무 중에 존경받는 것, 위무하는 것은 모두 박탈당하고 기소권도 없으며 법을 정지하거나 형을 경감하고 사면을 행할 권한도 없다.

집행권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집행 업무를 명령하면서 그에 대해 보상할 수단을 갖지 못한 왕이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보상과 특혜는 다른 사람들 손에 있으며 왕의 국내적 강제력은 전혀 없고 거부권도 없으며 권위만 이용당할 뿐이다. 왕으로서 최소한의 명예조차 없고 이처럼 경멸당하는 처지는 군주에게 맞는 지위가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국무 회의에 참여할 수 없으면서 책임은 지는 장관이 어디 있는가! 공포에서 비롯된 정신의 고양으로서는 국가를 결코 명예롭게 만들 수 없다. 자신의 지위를 혐오할 이들에게 전쟁 지휘를 맡길 수 있는가? 다른 나라들이 전쟁과 강화의 대권을 지니지 않는 사람과 진지하게 교섭할 것인가? (-> 작전통제권이 없는 한국과 북한. 중국이 마주할 것인가?) 프랑스 혁명가들은 최고 권력과 적절한 조응이나 균형, 우호관계를 조금도 만들려 하지 않았다.
-> 입법자들에게 의해 거의 꼭두각시가 된 행정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사법부 계획

당신들은 고등법원을 모두 폐지했다. 물론 변혁이 필요했으나 고등법원의 구조는 독립성이라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등법원은 자의적 군주들의 통치 기간과 방자한 도당들의 투쟁 시기에 국가의 신성한 비축물들을 지켜냈고 왕정의 과도함과 해악에 교정책을 제공했다. 이 독립적 사법부는 민주주의가 국가의 절대 권력이 되었을 때 10배나 더 필요했다. 고등법원이 존속되고 왕정시대 법령이 했던 것처럼 국민의회의 모든 법령에 대해 등록하고 적어도 항의하는 옛 권한을 유지하도록 했다면 민주주의의 우발적 법령들을 몇 가지 보편적 법률 원리에 적합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 항의권이 수석 행정관에게 부여된 것은 불합리의 극치이다. 또한 행정부의 기관들이 새 법정의 관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은 법률에 종속되어야할 사람들을 법률의 권력에서 면제해준 꼴이다. (cf 면책특권) 이들은 결국 과두정으로 나갈 속셈으로 이리한 것이다.

6. 군대 관련 조치들

당신네 공화국 결속시키는 세 번째 접착원리, 군대에 관한 조치에 있어 당신들은 현명하게 대처했는가? 전쟁부장관 드라 투르 뒤 팡은 군대의 난폭한 무질서 상태를 우려했다. 국왕의 법령, 명령, 서약 등을 연대 전체가 위반했고 대장들은 권위를 잃었으며 이는 군대 민주주의로 이어질 경향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폭성, 군대가 충성과 명예라는 오랜 원칙에서 이탈한 것은 10월 6일의 일 때문이다. 군대의 폭거, 지역 사령관들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조사는 없었고 국민의회는 유린당한 의회 결의 대신 다른 선서들을 반포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각 연대가 각 지연의 클럽과 협회에 참가하여 그들의 연회와 시민 축제에 참여하라는 직접적 재가와 장려를 선언했다. 이것이 그들을 현재 성향보다 더 장교에 복종하게 만들 것인가? 엄격한 규칙에 복종하도록 만들 것인가? 프랑스식 훌륭한 시민은 될지언정 좋은 병사는 안 될 것이다. 잘 차린 식탁들에서의 자유로운 대화는 병사들이 단순히 도구일 뿐이라는 성격에 더 적합하게 만들지 못한다.

또한 뒤 팡에 의하면 군대를 교정하는 주체는 지방자치체인데, 이들이 국민의회의 명령을 대신하며 군대가 지방자치체의 명령을 대신한다. 지역 자치체는 일종의 주권을 멋대로 자임하므로 그들의 보호에 필요한 명령을 군대에 내릴 것이고 상황의 필요에 따라 주인도 하인도 동맹자도 될 수 있다. 병사들이 잠시라도 지역의 클럽, 파벌, 협회와 섞인다면 선거의 매력에 의해 그들은 가장 저급하고 악착스러운 부류에게로 이끌리게 된다. 반란 소지가 있는 병사들과 불온한 시민들이 혼합되고 병사들과 장교들의 군사적 연결은 점점 약화되며 소란스런 상인들과 농민들에게 군사적이고 반역적인 대담성은 더해질 것이다.

장교들은 자신들의 인사에 있어 왕보다 국민의회의 승인, 거부권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승진을 위한 유일하게 확실한 길은 의회에서 계책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승진에서 탈락한 장교들은 자신들을 거부했던 의회의 당파에 반대하는 당파를 형성하고 지배 권력에 대항하여 군대 안에 불만을 키운다. 의회에서 세력을 통해 목적을 이룬 장교들은 자신들이 의회의 호의에서는 첫 번째일지라도 왕의 호의에서는 두 번째 밖에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승진을 저지할 수는 없으면서 추진하려고도 하지 않는 권위를 무시한다. 이 해악을 방지하기 위해 지휘권과 승진 규칙으로 연령 서열만을 고려한다면 당신네는 인습주의적 군대를 갖게 될 것이며 군대는 어느 곳의 통제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군대의 감사 대상도 공포 대상도 아닌 인물이 군대의 수장일 때, 그 권력의 효력은 무엇이고 이런 사람이 최고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당신네 의회 같은 의회는 군대의 복종과 기율을 증진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군대는 원로원, 민중적 권위 기관에 대해 위태롭고 불확실하게만 복종했다.(-> 카이사르) 군대는 2년 동안만 지속되는 의회에 거의 복종하지 않는다. 취약한 권위와 권위의 부침 속에서 어느 민중적 장군이 출현하여 모든 사람들의 복종을 받는다면 그가 곧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나폴레옹) 의회는 병사들을 유혹하여 장교에게 이탈하는 방법을 통해서 군대를 제압했고 이는 장교와 병사 사이의 복종 원리를 파괴했다. 병사들은 그가 시민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지닌다는 말을 들었고 복종에 선택권을 부여한 채 장교 선출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든다. 당신네 같은 정부는 정부를 지탱하는 모든 견해, 편견, 본능을 파괴했기에 다른 부류와 이견이 생길 경우 무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로베스피에르) 결국 당신네는 모든 것을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신들은 모든 세금, 봉건제도, 신분을 부정했기에 인민은 빈번하게 들고 일어날 것이며 이 경우 당신들은 발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왕이 아니고 우리가 선출한 신분제의회도 아니며 우리가 당신들을 선출한 원리에 입각하여 회의를 진행하지도 않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이런 상황에서 군대와 민중이 결탁하면 어찌 되겠는가?

7. 재정 조치들

프랑스가 유지되느냐 추락하느냐가 재정 조치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개혁이든 유지든 재정에 달려 있고 국민의 번영과 개선이 재정수입의 증가와 더불어 증진된다. 그렇기에 재정학의 발전과 국가의 성장은 비례관계에 있다. 재무장관의 목표는 풍부한 세입을 확보하고 판단력과 공평성을 가지고 부과하며 세입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국채에 의존할 경우 투명성과 정직성, 계산의 정확성, 기금의 견실성에 의해 그 기초를 확실히 만들어야한다. 그런데 베르니에 씨의 보고서를 보자. 국가 재정수입은 혁명 전과 비교하여 3분의 1 수준, 800만 파운드가 감소했다. 혁명가들은 조세 수입의 옛 구조, 예컨대 소금의 국가 전매 등을 비난했다. 소금 생산지 주민들은 부담 전체를 벗어던지려 했고 자체 의견에 따라 교정책을 판단하면서 다른 세금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어 이 세금 부족분에 대한 대체 세금, 공평한 세금, 지방에 대한 벌충이나 면제될 다른 지구와의 조정 기획에 대한 지휘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 그들이 평등한 과세를 인출했는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복종적이며 질서가 잘 잡히고 공동체에 대해 애정을 가장 많이 지닌 지역이 국가 전체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납부가 성향에 따라 결정되었다. 국민의회는 모든 시민의 소득의 4분의 1을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요청했으나 이는 취약하고 실효성 없으며 불공정한 세금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국왕에게선 장식품들을 교회에선 은그릇을 보통사람들에게선 장식품을 약탈했는데 이는 루이 14세 때나 하던 짓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절약으로 세금 영수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메우려고 노력하기라도 했는가? 낭비했던 예전 정부와 비교해도 더 비난받아야만 한다. 프랑스 경영자들이 신용에 의해 경비를 조달할 때 드러날 재정 능력에 대해 검토해보자. 이전 정부는 유럽 나라 대부분에서 어떤 조건으로든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신용도는 점점 개선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정부, 모든 제도와 관습과 약속을 파괴하고 무시한 이 정부에게 누가 금전적 거래 관계를 맺으려 하겠는가? 그들은 돈 찍어내는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그들은 약탈을 한 뒤 은행을 신용기관으로 만들려고, 즉 토지은행에 기반 하여 신용 유통을 확립하려 시도했으나 이런 시도는 파산 밖에 보여준 적이 없다. 그들은 재산의 순수 가치, 매각 시기, 조건, 장소를 공개적으로 진술하지도 못했고 인민의 재산의 몰수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인민을 구제하려 하지도 않았다.

8. 국민의회의 무능과 모범적 영국 헌정

프랑스 지도자들의 무능력은 모든 것을 속죄시키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덮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모든 해악 중 최악이다.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정신은 국민의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들에 의해 몇몇 관례들은 정당한 이유로 폐지되었고 긍정적인 개혁의 측면도 있으나, 그것들은 그대로 존속 되었다 해도 어떤 신분의 행복과 번영도 거의 손상시키지 않을 것들이었다. 국민의회가 이룩한 개선은 피상적이며 그들의 과오는 본질적이다. 그러니 영국인들이여, 영국 헌정에 담긴 조상들의 조심성을 본받자. 우리가 원하자면 덧붙이나, 남긴 것을 지키자.(-> 진정한 보수의 정신. ex) 미국 수정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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