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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

박근혜는 고종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프레시안 books] 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기사입력 2013-06-14 오후 6:43:24

 

고종의 현실 인식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그들(서양)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넘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 다시는 서양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 것이다. 각 항구의 가까운 곳에 설사 외국인이 놀러 다니는 경우에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면서 먼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 이왕 서양의 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진 이상 경외(京外)에 세워놓은 척양비(斥洋碑)는 시기가 달라진 만큼 모두 일제히 뽑아버릴 것이다. 그대 사민(士民)들은 이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고종이 내린 교서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거대한 전환기에 처한 조선조 말 고종은 여러 단계를 거쳐 대외관계의 개방적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기울인다. 부인할 수 없이 전개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기세 앞에서 국가의 생존과 새로운 내용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교서에 압축된 의식은, 당시 “조공책봉”이라는 중화 체제의 기존 질서가 근대 국제법의 번역인 <만국공법>이라는 질서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되는 바는, 고종이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조의 근대적 고뇌

▲ <조선 정치사의 발견>(강상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강상규의 <조선 정치사의 발견>(창비 펴냄)은 이러한 고종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주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무력하고 무능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달린 고종에 대해, 단지 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교정을 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19세기라는 대전환의 시기에, 문명의 틀이 바뀌는 지점에서 조선의 정치 중심에 있던 왕의 사유방식과 선택, 그리고 정치적 갈등의 현실을 보다 정밀하게 읽어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근대적 고민에 쌓여 있던 조선 정치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조선조 말 고종의 권력이 근대 체제의 도전 앞에서 무지했던 시기의 정권이라는 단순한 평가와 해석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당대의 집권 세력과 국왕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 치열하게 “전환기의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의 복원과 해석은 당연히 오늘날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분단된 한국(조선)의 역사적 명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조선의 정치 지형과 문명 전환의 위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대한 조선 정치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00년 동안 작동해온 조선 정치의 원칙과 현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근대적 변화를 기준으로 당시 조선조의 사유방식과 행동, 선택을 오해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강상규는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華夷)론적 명분론” 등에 부딪힌 고종의 현실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다시 말해 고종이 아무리 개혁 군주로서 나서고자 했어도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온 조선 정치의 전통적 운영 방식과 사고 체계가 극복되지 못한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던 고종의 역할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취약한 군주, 그러나…

그에 더해 바로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고종이 당시의 제약을 어떻게 뚫어내고자 진력을 다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임진년 7년 전쟁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17세기 조선 중화사상이 그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지만 조만간 이러한 사유 체계는 문명의 대전환기에 도리어 장애가 되고 만다. 중화 체제의 동요와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구질서 체계를 고수하는 것은 국제적 고립을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탁월한 영도력이 발휘되었던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의 정치는 외척과 붕당정치의 폐해에 빠져들었고 왕위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고종은 그 정통성이 대단히 취약했다.

사도세자로부터 시작해서 흥선대원군에 이르는 계보는 정통 왕조의 맥락에서 너무 거리가 멀었고 세자로서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출발이라는 점은 고종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랬던 그가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기 시작한 이후, 조선 중화주의라는 생각의 틀에서 점차 달라져 가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흥미롭고 의미 있다. 이 과정에서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역할을 주목한 강상규는, 박규수가 “진주 민란의 수습 책임자인 안핵사, 평양 감사 시절 대동강에서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섭과 화공작전 지휘, 양무운동을 벌이던 청에 사절단장“을 지낸 경력이 고종의 대외 관계 인식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보인 고종

▲ 고종의 초상. ⓒen.wikipedia.org

메이지 유신의 현실을 보고 돌아온 일본수신사 김기수의 고종에 대한 보고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들의 이른바 황제(메이지 천황)는 나이가 지금 바야흐로 이십오 세인데, 폐지해야 할 것 같으면 관백도 가히 폐지하고 변경해야 할 것 같으면 제도도 변경했습니다. (…)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영사관으로 와서 머물게 되므로, 그 사람들을 먹이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후대하면서 (…) 곳곳마다 화륜선, 화륜차를 만들고 또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상업을 경영케 하였으니 요는 온 힘을 다해 재화를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상하가 부지런히 이로움을 취하고 부국강병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있으니 (…) 지금은 경전문자는 무용지물로서…….”

일본과 중국의 빠른 변화 앞에서 고종은 결국 대외관계의 다변화로 국제 정세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고자 노력하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 금고를 털어 해외에 사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고 유길준, 윤치호 등의 유학생을 만드는 작업에까지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종은 중화 체제의 틀에서 조선이 이탈하는 수순을 밟으려 하고, 이에 대한 청의 간섭이 보다 노골화하고 그의 폐위까지 논의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리홍장(李鴻章) 사이에 오간 서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갑신사(갑신정변)는 일본을 끌어들여 청국을 거부하고자 한데서 나온 오류였는데, 근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국을 배척하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켜버리고…….”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고종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하는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고종의 대외적 결단력이 그간 너무 가볍게 평가되었고 때로는 아예 묵살되었던 것인데, 이에 대해 강상규는 이 조불 조약 체결을 맡은 미국인 데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껏 고문의 역할을 맡았던 데니를 직접 기용하여 실질적인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조불 조약이 체결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신을 조선의 고문으로 파견한 리홍장으로부터 조불 조약 협상에 참가하지 말고 또한 동협상의 처리는 위안스카이에 위임하라는 권고를 받은 미국인 데니가, 자신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당시 미국의 대리공사 포크의 도움을 받아 협상이 결렬될 위기를 극복한 것이 이러한 고종의 결단력에 의해 비롯된 것임은 기억할 만하다.”

고종은 계몽군주의 가능성을 일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이후 벌어진 청일 전쟁은 이러한 동아시아 전체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조선이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주권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법적 관계로 진입하는 동시에 식민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고종과 조선조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점차 사라져가면서 붕괴되어가는 절차를 밟게 된다. 중화 체제로부터의 이탈과 근대 체제의 주체적 진입이라는 과제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거울, 그 눈물겨운 기록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새삼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수많은 내외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환의 시기에 위치하게 된 고종이 눈물겨울 정도로 당시의 정세에 대응하려는 여러 노력을 했다는 점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라는 사실이다. 군주와 신하 간의 만만치 않은 상호 견제와 권력 균형의 정치,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조선 정치의 전통이 수백 년의 체제 유지에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으나 그것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상황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어떤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이 근대의 역사는 그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지금 재편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한 상황 적응력 내지 주도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고종의 무력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 당시의 치열한 고뇌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각종 국가 생존의전략의 가치가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 있던 국가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국왕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지침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시기의 고통과 우여곡절을 망각하는 공동체는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있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역사의 보복”이라는 말은 허망하지 않다. ‘조선 정치사의 재발견’은 역사로부터 금맥을 캐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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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국가의 도전, 마르틴 크릴레

헌법국가의 도전

책소개

『헌법국가의 도전』은 Koln의 헌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Martin Kriele가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0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모음집이다. Recht-Vernunfr-Wirklichkeit에 실려 있는 논문들은 헌법에, 법의 일반문제에, 법철학의 근본문제에, 그리고 인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하나의 저술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고 논평한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서평은 아니지만,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논문을 소개하고 그럼으로써 Kriele의 반평생에 걸친 학문적 업적의 단면을 살펴보고 있다.

목차

1 이성이 아니라 권위가 법을 창조한다
2 코크와 헤일
3 보통법인가 아니면 자연법인가 철학자의 견해
4 보통법인가 아니면 자연법인가? 법률가들의 견해
5 주권이론: 영국에서의 내란의 동기
6 누가 권위를 파괴하는가?
7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주권이론의 상이한 기능
8 관용전술과 억압전술: 기회와 모험
9 홉스의 이상국가와 그의 내란에 대한 공동책임
10 “인간성악설” 또는 법치국가와 무정부상태의 혼동
11 비상사태와 정상상태
12 계몽군주냐 아니면 계몽된 제도냐?

마르틴 크릴레

마르틴 크릴레(Martin Kriele, 1931년 1월 19일 ~ )는 독일의 법학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뮌스터 대학교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행정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인 한스 율리우스 볼프(Hans Julius Wolff)와 헤겔 연구의 거장 요아힘 리터(Joachim Ritter)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뮌스터 대학교에서 볼프의 조교로 있으면서 박사학위 논문 〈정의의 기준〉(독일어: Kriterien der Gerechtigkeit)을 통해 법철학의 지배적 조류가 된 상대주의를 다루었다. 그는 구체적인 판결과 결정이 그때 그때마다 ‘더욱 기본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원리와 그 결과의 형량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 법관의 판결과 입법자의 결정은 어느정도까지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를 논하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학술재단의 지원을 통해 미국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서 연구하고, 귀국해 1966년에 뮌스터 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1967년에 언스트 본 히펠(Ernst von Hippel) 교수의 후임으로 쾰른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8년부터 루돌프 게르하르트(Rudolf Gerhardt)와 함께 독일의 유일한 법정책학 전문지 《법정책학지》(독일어: Zeitschrift für Rechtspolitik)를 간행하고 있다. 1977년부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 재판관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작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독일어: Einführung in die Staatslehre, 국순옥 역, 1983년.)는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는 책이다.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국가(평화), 권력분립적 헌법 국가(자유), 민주주의(정의)의 세 단계로 나누어 그 법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제자인 대한민국의 홍성방은 《민주주의 세계혁명 : 자유는 왜 관철되는가》(독일어: Die demokratische Weltrevolution : warum sich d. Freiheit durchsetzen wird, 1988년, 역 1990년)와 《법과 실천이성》(독일어: Recht und praktische Vernunft, 1979년, 역 1992년), 《법발견론》(독일어: Theorie der Rechtsgewinnung, 1976년, 역 1995년), 《해방과 정치 계몽주의 : 인간의 존엄에 대한 변론》(독일어: Befreiung und politische Aufklärung : Plädoyer für d. Würde d. Menschen, 1986년, 역 1988년), 《헌법국가의 도전》(독일어: Die Herausforderung des Verfassungsstaates : Hobbes u. engl. Juristen, 1970년, 역 2007년) 등을 한국어로 소개한 바 있다.

정치 질서의 기원- 불안정성을 극복할 정치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 프랜시스 후쿠야마

정치 질서의 기원 불안정성을 극복할 정치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 함규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08월 20일 출간

목차

역자 해제 7 l 서문 131부. 국가 이전l 인간의 출현부터 국가의 등장까지
01 정치는 왜 필요한가 24
02 정치의 생물학적 기반 50
03 무리 수준의 정치 74
04 부족사회-재산권, 정의, 전쟁 89
05 리바이어던이 등장하다 107

2부. 국가 만들기l 종교와 사상이 국가 건설의 경로를 가르다
06 국가 건설 이전의 중국 126
07 전쟁과 국가의 탄생 140
08 위대했던 한(漢)나라의 체제 160
09 가산제로 돌아간 중국의 정치 쇠퇴 171
10 인도, 멀리 우회하다 184
11 종교에 기반한 인도 사회 196
12 허약했던 인도 정치체들 209
13 무슬림 사회, 노예를 활용해 부족사회에서 벗어나다 223
14 맘루크, 이슬람을 구하다 237
15 오스만 국가의 전성기와 쇠퇴기 249
16 기독교가 가족주의를 타파하다 265

3부. 법치주의l 법은 어떻게 종교의 자리를 대신했는가
17 법치주의의 기원 280
18 국가가 된 교회 297
19 교회가 된 국가 312
20 동양적 전제주의 327
21 붙박이 산적 341

4부. 책임정부l 통치자에게 책임을 묻다
22 국가 건설의 네 가지 유형 358
23 약한 절대주의와 가산제 국가 체제: 프랑스 373
24 대서양을 건넌 가산제 국가 체제: 라틴아메리카 392
25 국가에 대한 제약과 강력한 국가 사이: 헝가리 411
26 보다 완벽한 절대주의: 러시아 425
27 조세와 대표: 영국 442
28 책임정부와 절대주의의 갈림길 463
5부. 정치 발전 이론의 발전을 위하여
29 정치 발전과 쇠퇴의 조건 478
30 달라진 정치 발전의 조건 500

감사의 말 527 l 주석 529 l 참고문헌 572 l 찾아보기 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