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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칼럼]마키아벨리의 가능주의(possibilism)

[최장집칼럼]마키아벨리의 가능주의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이야말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거였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은 왜 좋은 정당(들)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비단 이번 선거 패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시기 집권에 성공했을 때조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민주진보파들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그 특징적인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권력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권력은 권위주의적 힘의 원천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정의이자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권력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 욕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하고자 했다. 권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목적 의지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적극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온라인상의 소통 공간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정치는 (만약 그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각성된 의식을 갖춘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기존 정치를 대체하거나 새롭게 선도하려는 ‘영구적 운동론’의 방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어 정책과정에 투입하는 것이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산출 중심의 기술합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든 이런 정치관 안에서는 정당과 리더십, 권력 수단을 통한 통치 기술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강한 한국의 지적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특히 민주진보파들에게 필요한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어떤 정치인이 바람직한 목적 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치인가를 앞세우기보다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능주의’(possibilism)의 정치 이론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시만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있어 이 가능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의 중심 아이디어로서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비르투라는 말이다. 비르투와 짝이 되는 포르투나라는 말이 운명 또는 기회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비르투는 용기, 위용, 추진력, 힘, 결단력, 에너지, 의지력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운명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비르투를 가진 리더십은 운명조차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권력을 다루는 장인, 또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자질이자 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르투는 도덕적 규범과 담론을 통해 그려진 이상적 정치 환경에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돼야 할 정치인의 능력이다. 정치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면도 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감성과 충돌하는 권력의 어두운 악마성이 꿈틀거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적의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부정적 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 좋은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 잔혹무비의 폭력을 승인하고 군주에게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통치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인함과 폭력, 교활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할 만큼 긴요한 상황에서 실현돼야 할 높은 수준의 이상이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수반되는 대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수준에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진정으로 공익에 봉사하는 목적 의지가 있다. 정치는 그 둘의 변증법 내지 대차대조표로서 저울질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인공인 체사레 보르자 이외에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한 사람은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이다. 두 사람 모두 잔혹무비의 폭력을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으로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보르자는 그의 행위가 비록 권력추구의 욕망에 의해 추동됐다 하더라도 공익의 증진을 가져왔던 반면, 아가토클레스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잔인한 폭군에 불과했다. 전자가 비르투를 가진 통치자라면, 후자는 대량학살의 범죄자 이상이 아니다. 통치자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그의 행위의 최종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결과주의적인 것이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더러운 손’(dirty hands)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가는 통상적 의미에서 명백히 부도덕한 행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갖는) 정치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한편으로 노예해방이라는 높은 비전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도덕적 술수와 반대파들과의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 정치의 교활함을 가진 정치인 링컨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신화화된 링컨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분명하겠지만, 마키아벨리를 이해한다면 그 점이야말로 링컨을 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한국현대사의 중요 테마의 하나이다. 민중은 반란을 통해 통치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기존 통치세력에 의해 수용되어 다뤄졌다. 문제제기 집단과 문제해결 집단의 괴리, 요구와 변화는 계속되지만, 돌아보면 기존 구조는 변함없이 건재한 상황을 뜻하는 수동혁명은 민주화 이후에도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은 야권의 좋아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우선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01월 15일 출간

미국의 정치 문명

372쪽 | A5 판형알림 | ISBN-10 : 8987519805 | ISBN-13 : 9788987519807

책소개

미국의 정치적 담론을 파악하고 그 세계관과 역사관을 이해하기 위한 책. 현대사의 운명적 화두일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전 지구인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현대 미국의 뿌리와 성격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 7
초판 앞머리에 붙인 글 … 12
초판 서문/ 책을 펴내면서 … 15

제1장 미국 – 초상과 자화상
‘미국 보기’와 ‘미국 읽기’ … 23
‘객관의 미국’은 존재하는가? … 35
미국 연구의 역사 … 39

제2장 이론의 바탕
‘합의’와 ‘보수’ … 46
‘보수적 아메리카니즘’ … 54
개관 … 65

제3장 미국 정치 문명의 뿌리
‘합의 콤플렉스’의 자화상 … 75
자유주의 … 83
공화주의 … 98
캘빈주의 … 125

제4장 미국 정치 문명의 형성 – 고대와 근대의 융합
조건 … 146
형성 … 155

제5장 미국 정치와 ‘보수적 아메리카니즘’
‘형성기 미국’의 보수성 … 180
우월 의식과 회귀 지향성 … 195
미국의 평등관 … 221

제6장 미국 정치의 전통과 패턴

제7장 현대 미국 정치 – ‘신보수’의 이해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 256
‘신보수’의 역사적 성격 … 264

제8장 미국 외교와 보수적 아메리카니즘
외교와 정치 문명 … 273
도덕적 절대주의와 메시아니즘 … 279
미국 외교의 연속성 – ‘고립’과 ‘개입’ … 291

제9장 미국 외교의 ‘숙명’ – 하나의 이론
농업 제국 – 초기의 팽창 이념 … 302
팽창의 성향 … 306
‘보수적 팽창주의’ … 312
탈냉전 시대의 미국 외교 … 329

제10장 맺는 말 – 미국과 전통
참고 문헌 … 338
찾아 보기 … 362

신공화주의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필립 페팃 지음 | 곽준혁 옮김 | 나남 | 2012년 06월 25일 출간

저자소개

저자 : 필립 페팃

저자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 )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과 록펠러 석좌교수이다. 1990년대 말부터 영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이론 및 정치사상학계의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신로마 공화주의의 가장 정교한 이론가로 손꼽히는 학자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영국 브래드포드대학, 호주국립대학을 거쳐 2002년부터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미국학술원 회원, 왕립아일랜드학술원 명예회원이며, 2010년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공통의 의식》(1993),《신공화주의》(1996),《자유론》(2001) 등이 있다.

역자 : 곽준혁

역자 곽준혁(郭峻赫)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마키아벨리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숭실대 가치와 윤리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경계와 편견을 넘어서: 우리시대 정치철학자들과의 대화》(2010)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공화주의와 인권”(2009), “열망의 정치: 마키아벨리와 고전적 공화주의”(2009), “Coexistence without Principle: Reconsidering Multicultural Policies in Japan”(2009), “《로마사 논고》에 기술된 민주적 권위(autorita)”(2008), “Democratic Leadership: Machiavelli supplementing Populist Republicanism”(2007),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헌정체제의 두 가지 원칙”(2005), “Nondomination and Contestability: Machiavelli contra Neo-Roman Republicanism”(2004) 등이 있다.

목차

■ 한국어판 머리말 5
■ 옮긴이 머리말 9
■ 머리말 23
■서 론 35

제1부 공화주의적 자유

제1장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이전의 자유 63
1.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63
2. 제3의 개념: 비지배 자유 73
3. 공화주의의 자유 개념은 적극적 자유가 아니다 82
4. 공화주의적 비지배 자유의 개념: 자유 대 노예 91
5.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 개념: 법, 그리고 자유 98
6. 불간섭 자유의 부상 108
7. 불간섭 자유의 승리 114

제2장 비지배 자유 125
1. 지배 126
2. 비지배 151
3. 페일리의 반박들 162
부록: 지배와 권력의 다른 형태들 172

제3장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비지배 175
1. 개인적 선으로서의 비지배 179
2. 정치적 관심사로서의 비지배 194
3. 제약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비지배 203

제4장 자유, 평등, 공동체 223
1. 평등주의적 이상 224
2. 공동체주의적 이상 239

제2부 공화주의 정부

제5장 공화주의의 목표: 명분과 정책들 251
1. 공화주의적 명분들 254
2. 공화주의적 정책들 283

제6장 공화주의적 형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 321
1. 헌정주의와 조작불가능성 323
2. 민주주의와 견제력 341

제7장 공화정에 대한 견제 377
1. 규제라는 과제 383
2. 규제의 자원들: 제재와 선별 388
3. 일탈자 중심의 규제에 반대하며 392
4. 순응자 중심의 규제를 위해 401
5. 실천 전략 418
6. 결 론 430

제8장 공화국의 교화 433
1. 시민적 교양의 필요성 440
2. 시민적 교양의 공급 449
3. 시민적 교양과 신뢰 463

■부 록 477
■옮긴이 해제 531
■참고문헌 551
■찾아보기 571

출판사 서평

필립 페팃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1990년대 말부터 영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이론 및 정치사상학계의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신로마 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의 가장 정교한 이론가로 손꼽히는 석학이다. 영국의 ?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 프랑스의 장 파비안 스피츠(Jean Fabian Spitz)와 함께 신로마 공화주의의 화두를 이끌고 있으며, 가장 정교하고 구체화된 공화주의 이론가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신공화주의》는 최근의 정치이론에서 공화주의의 부활을 이끈 핵심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 페팃은 ‘불간섭 자유 또는 소극적 자유’와 ‘정치참여를 통한 자기실현 또는 적극적 자유’라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구분과는 구별되는 제 3의 개념으로 ‘비지배 자유’를 구체화했다. 이를 통해 개인이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판단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오랜 긴장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제시한 ‘조건’으로서 비지배 자유라는 개념은 최근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개념과도 충분히 조응하고, 그가 구체화한 시민적 견제력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시민적 헌신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함과 동시에 법의 지배와 민주적 심의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비지배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비지배적 조건을 파괴하는 국가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일관된 판단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신공화주의는 한편으로는 경쟁에서 탈락한 개인에 대한 사회적 구제에 무관심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적 심의의 결과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민중주의’의 대안으로 간주된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자파테로 총리는 2000년 사회노동당의 당수로 선출되면서 페팃의 신공화주의가 자신의 정치적 문법이자 사회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를 대신해서 선택해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천명했으며, 2004년 총리가 된 이후 신공화주의의 정치적 원칙에 기초한 정책들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한편으로 영국의 블레어(Tony Blair)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과 같은 신자유주의와의 불편한 동거를 거부했기에 주목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이 강조되는 시기에 정치인이 자신의 이념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는 페팃의 신공화주의가 삶의 세계로부터 유리된 정치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도 적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 자유의 이상을 해석함에서, 그리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이상을 구체화하는 데에서, 신공화주의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길을 계획한다. 자유는 단순히 간섭의 회피와 동일시되는 지금의 관행으로부터 반드시 구제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라는 기제와 동일시되는 지금의 풍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이상은 대한민국의 헌정적 열망에도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신공화주의가 대한민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이고 공적인 토론을 촉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번역서를 통해 한국 사회의 ‘공정사회’ 논의가 한 단계 더 성숙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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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와 공공선 충돌 피할 ‘중간지대’ 있다

등록 : 2012.07.24 20:23수정 : 2012.07.25 14:07

필립 페팃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신공화주의’ 번역 출간
독립적인 개인 주목한 자유주의
전체 강조한 공화주의 뛰어넘는
사회 속 개인 자유 개념 제시한
필립 페팃, 양쪽 논쟁 새 틀 마련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논쟁은 1990년대 들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따라 몰락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다. 공동체적 연대와 적극적 정치 참여, 시민적 덕성 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한 논리 구조를 지녔다는 비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공화주의 진영에서 공동체주의와는 다른 공화주의의 새로운 면모를 제기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고, 지금까지도 공화주의는 여전히 자유주의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다.

<신공화주의>

최근 번역·출간된 필립 페팃(1945~·사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신공화주의>는 ‘자유’를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해, 자유주의·공화주의 논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핵심적인 저술로 꼽힌다. 1996년에 출간된 이 책은 200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세계 정치사상계에서 공화주의 부활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책의 원제는 그냥 ‘공화주의’(Republicanism)이지만, 옮긴이인 곽준혁 숭실대 교수(가치와윤리연구소장)가 공화주의에 대한 국내의 선입견으로부터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은이의 동의를 얻어 ‘신공화주의’로 옮겼다.

자유주의와 대립했던 공화주의는 주로 공동체와 시민의 정치 참여, 시민적 덕성 등을 강조했고,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에 닿아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며, 이런 경향을 ‘시민적 공화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페팃은 이와 달리 퀜틴 스키너, 마우리치오 비롤리 등과 함께 로마 공화국과 로마의 정치사상가 키케로로부터 공화주의의 전통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신로마 공화주의’로 구분되며, 공화주의에 자유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기에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라고도 불린다.

페팃이 <신공화주의>에서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비지배 자유’, 곧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자유”다. 원래 공화주의적 전통 속에서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켰는데, 16세기 이후 홉스와 벤담을 거쳐 자유주의가 형성되면서 그 개념이 “개인의 선택에 대해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간섭 자유’로 변질됐다는 것이 페팃의 주장이다. 페팃은 주인(도미누스)과 노예(세르부스)의 비유를 통해 지배와 간섭의 차이를 설명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의적 지배를 받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설령 주인이 노예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자유롭다고 볼 순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 지배하고 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더라도 법률이나 정부와 같이 ‘지배하지 않는 간섭자’ 역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페팃의 이런 논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했던 기존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 논쟁 구도에 균열을 낸다. 행위로 드러나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속에 개인이 처한 지위와 조건으로까지 자유의 개념을 확장시켜, 개인을 사회적 원자로만 파악해온 자유주의와 개인보다 전체를 강조해온 공동체주의 양쪽의 문제점들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페팃은 이런 비지배 자유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 자의적인 ‘사적 지배’(도미니움)들을 제거하기 위한 법의 지배와 헌정주의의 필요성, 또 이렇게 이뤄진 공화주의 국가가 ‘공적 지배’(임페리움)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시민사회의 ‘견제력’과 민주주의의 중요성 등을 차례로 논증해나간다.

페팃의 비지배 개념은 자유주의·공화주의 진영 양쪽에 큰 영향을 줬으며, 지난해에도 세계적 정치이론 잡지들이 페팃에 대한 특집을 싣는 등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곽준혁 교수는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페팃이 비지배 자유를 어떤 최상의 이상이 아니라, ‘민주적인 조정을 위한 원칙’으로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곧 비지배 자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포괄하는 ‘제1원칙’이 아니라 결코 피할 수 없는 다양한 갈등에 대해 시민들이 서로 책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심의’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한 최선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인 정치이론이라는 평가다.

또 곽 교수는 “국내에선 공화주의라고 하면 민족주의나, 전체, 통합 등에 대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며 “이 책을 통해 공화주의의 다양한 담론이 더 많이 알려지고 연구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공화주의 담론 내부의 여러 갈래들을 명확히 파악하지 않고 그저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공화주의를 찾는다면, 우리 사회가 결코 공화주의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이란 충고다.

페팃은 지난 5월 고려대의 초청으로 방한해 ‘공화주의·민주주의·사회정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다문화 환경에서 공화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가 최근 그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주요 연구 주제라고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프린스턴대 누리집

마키아벨리- 전쟁의 기술 “전술론”

[명저 새로 읽기] 마키아벨리 <전쟁의 기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시민, 곧 전사가 자유롭다

ㆍ마키아벨리 <전쟁의 기술>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전쟁의 기술>(원제 Arte della Guerra)이 올해 5월 처음 우리말로 완역되었다. 이영남이 옮긴 <마키아벨리의 전술론>(스카이)이 그것이다(비전문적 번역의 문제점들이 여전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이 저작의 번역이라면 1987년 범우사에서 <군주론>과 묶어 일부만을 간행한 것이 전부였다. 언론이든 독자든 이 책이 한국어 초역이라는 사실을 거의 몰랐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의 높은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매체도 이 역본의 간행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매년 하나씩은 새로 간행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1521년 출간된 <전쟁의 기술>은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서 가운데 그의 생존 시 간행된 유일한 작품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군주론>과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관한 논고> 등에서 무력 혹은 군대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거듭해서 강조한 바 있는데, 그러한 관점은 이 <전쟁의 기술>에서 더욱 상세히 조명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하의 사람이라면 대개 군과 정치의 관련을 싫어할 것이다. 군대를 폭압적 정치의 상징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예외없이 군대를 자신의 수단으로 삼게 마련이고, 우리에게도 그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키아벨리가 군대와 정치를 결합하려 한 이유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고전고대의 복원이라는 르네상스의 문화적 조류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연면히 전해져온 고전 공화주의자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공화주의는 시민이 곧 전사(戰士)여야 한다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삼았다. 스스로가 무장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곧, 최근 다시 점화되고 있는 공화주의 대(對) 자유주의 논쟁 속에서 전자가 지향하는 “적극적 자유”이다.

신자유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간섭만 받지 않으면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공화주의자들은 노예가 주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행운을 누린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로운 삶인가를 되물으면서, 스스로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전쟁의 기술>의 요점은 고대의 시민병 제도에 기초한 군사적 개념과 강령들을 현대의 군사조직 재편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용병제도가 이미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피렌체든 베네치아든 주요 도시국가들은 전투 시 전적으로 용병에 의존했다.

하지만 모든 용병대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속성상 신속한 승리보다는 전투를 질질 끌며 돈만 받아 챙기려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16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피렌체의 피사 공략 실패도 다름 아닌 이런 유의 용병대 때문이었다는 것이 특히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고전 공화주의자로서의 전사-시민 개념을 갖고 있던 그가 이러한 실패를 접했을 때 용병제에 대한 회의는 더 심해졌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공화정부를 설득하여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시민병 제도를 피렌체에 부활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

<전쟁의 기술> 초역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그것에 담겨 있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고전적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

작금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운위되는 공화주의의 핵심적 강령이 피렌체의 신사 코지모 루첼라이와 용병대장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져 나가는가를 이 책에서 확인하는 것은 지적인 독자에게 분명히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청와대 앞에서 벌였던 촛불시위가 어떤 의미에서는 곧 우리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중 하나였다는 것도, 우리의 “민주” 과잉을 “공화”로 균형 잡아야 한다는 한 우익인사의 발언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재확인할 수 있다.

<곽차섭 | 부산대 교수·사학과>

경향신문 입력 : 2011-11-18 20:04:08ㅣ수정 : 2011-11-18 20:04:09

스키너의 공화주의: 자의적 권력의 부재와 자기소유권으로서 자유

V. 스키너의 공화주의: 자의적 권력의 부재와 자기소유권으로서 자유

스키너는 이러한 페팃의 주장을 받아들여 최근 자유를 ‘자의적 권력의 부재’라고 재규정했다. 언제라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인간의 선의에 의해 당장은 간섭받지 않는다고 해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인간이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열등한 인간은 늘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인간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기 스스로 검열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대하고 자비로운 전제군주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자기 아래에 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고 또 기질 상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에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스키너는 공화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발상을 거부했다고 단언한다.29) 이러한 관점에서 스키너는 공화주의 자유론은 인간의 자유를 논할 때 먼저 그 인간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적인 개인으로서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는 그 어떤 상위자도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에서 평등한 지위를 누리는 것을 자유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공화주의적 자유는 그 구성원들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자치를 실현하는 자유 공동체, 자유 국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30)
그리하여 자유주의는 자유를 개인에게 주어진 재산 같은 것으로서 정부가 간여하는 것을 삼가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공화주의는 자유를 정치적 성취로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유덕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행동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의무에 앞서 권리를 우선시 하지만 공화주의는 반대로 권리에 앞서 의무를 우선시한다고 스키너는 주장한다.31)
그러나 인간들은 의무를 소홀히 하고 권리만을 앞세우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서 공화주의자들은 공동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늘 시민들에게 공공정신으로 깨어있기를 요구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문제점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스키너는 자유주의의 그러한 낙관론이 오히려 자유를 상실하게 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고해서 스키너가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를 자기실현이라는 적극적 자유라고 보는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페팃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단지 공동선의 추구가 지유와 양립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를 비판할 뿐이다. 공동선의 추구를 통해 자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를 누리기 위한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32)
스키너는 이러한 공화주의 자유론에 기초해 영국 혁명 당시 벌어졌던 푸트니 논쟁의 핵심이었던 투표권 문제를 새롭게 해석한다.33)
그 논쟁에서 수평파의 대표들은 기본적으로는 보통선거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들은 선거권을 자연권이 아니라 사회권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하인, 임금 노동자, 그리고 구호품 생활자들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논쟁의 상대였던 크롬웰 일파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수평파들은 보통선거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동의 없이 어떤 정부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가장 가난한 잉글랜드인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논쟁에 참여한 수평파 대표들은 동료들과는 다른 주장을 한 것일까?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맥퍼슨은 수평파도 기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4)
즉 임금이나 구호품을 받아 생활하는 인간들은 이미 그것을 받은 것으로 그들의 권리를 이미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이 수평파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키스 토머스는 그 문제에 대한 수평파의 일관된 원리 같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했다.35)
마치 범법자에게는 투표권이 없다는 생각을 당연시 했던 것처럼, 그저 하인, 도제와 같은 부류는 투표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평파들의 저술에서 인간의 생득권이 어떤 조건에서 유보될 수 있는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스키너는 자신의 공화주의 자유론으로 맞선다. 즉 수평파와 이에 맞섰던 크롬웰 일파 모두 공통적으로 공화주의 자유론을 신봉하고 있어서 타인의 의지에 종속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이미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하인, 도제, 구호품 생활자들은 ‘자발적인 예종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미 자유라는 생득권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스키너는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투표권의 기준을 크롬웰 일파는 재산소유권에 수평파 다수는 생득권에 두었다는 데서 양편의 차이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틀렸다고 평가한다. 그는 예를 들어 크롬웰 편에서 그 논쟁에 가장 치열하게 참여했던 이레턴(Ireton)도 재산을 소유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는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으려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재산이 그 독립성의 근거일 수 있다고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해링턴과 같은 당시 공화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스키너의 이러한 주장은 포콕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포콕은 공화주의자들의 재산관이 결코 부르주아적 재산관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즉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은 도덕적 정치적 인격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 결코 물질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이다.36)
스키너는 이러한 관점에서 수평파가 반대한 것은 ‘모든 남성들에게 무조건 투표권을 주는 것’ (universal male suffrage)을 반대했지 ‘모든 남자다운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 (universal manhood suffrage)은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남자다운 남자란 타인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남자를 말한다.
따라서 수평파는 하인들뿐만 아니라 주교들마저도 남자다운 남자가 아니라고 분류했다는 것이다. 더나가 수평파 가운데는 하인들이나 구호품 생활자들도 이성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어떤 다른 재산이 없어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있었음을 말하면서, 스키너는 결코 수평파가 단순히 재산 소유 여부를 투표권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재삼 강조한다. 재산소유권이 아니라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이 투표권의 기준이었다는 것이 스키너의 지론이다. 여기서 자기소유권이란 타인의 선의에 의지해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즉 자신이 한 행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일 수 있는 남자들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즉 자유인의 지위를 가늠하는 기준이 재산이 아니라 독립적 인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세기 선거권 개정 논란 속에서 글래드스톤파의 선거권 확대론에도 영향을 미쳤다.37)
———————————————–
29) Quentin Skinner, “Freedom as the Absence of Arbitrary Power” in Cécile Laborde and John Maynor, ed. Republicanism and Political Theory (Oxford: Oxford, Blackwell, 2008), 83-101.
30) Quentin Skinner, 앞의 책, 23, 69f.
31) Quentin Skinner, “ The Republican Ideal of Political Liberty”, in Gisela Bock, Quentin Skinner and Maurizio Viroli, eds. Machiavelli and Republica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7-309,
32) Ibid., 293, 304-306, 308-309; Quentin Skinner, 앞의 책, 32 n103
33) Quentin Skinner, “Rethinking Political Liberty”. Historical Workshop Journal, 61 (2006), 160-165.
34) C. 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107-159.
35) Keith Thomas, “The Levellers and the Franchise”, in Gerald Edward Aylmer, ed. The Interregnum: The Quest for Settlement 1646-1660 (London: Macmillan ,1972), 57-78.
36) J. G. A. Pocock, “Radical Criticisms of Whig Order in the Age of between Revolutions”, in Margaret Jacob and James Jacob, ed. The Origins of Anglo-American Radicalism (London, 1984),37.
37) Kari Polanen, “Voting and Liberty: Contemporary Implications of the Skinnerian Re-thinking of Political Liberty” Contributions to the History of Concepts 3 (2007)26.

누가 자유주의를 두려워하랴? [PDF]

역사와 담론 第54輯, 273~298쪽(총26쪽)
영문제목: Who’s Afraid of Liberalism?
저자: 조승래(Cho Seung-Rae)

포콕의 공화주의: 덕과 재산 균등의 공화국

포콕의 공화주의: 덕과 재산 균등의 공화국

오늘날 서구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것은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탁류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지적 반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그러한 사회현실을 초래한책임을 자유주의에 묻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인간들의 정치 공동체인 국가를 공화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공화국의 의미를 최초로 규정한 고대 로마 공화국의 철학자 키케로에 따르면 공화국은 공동의 이익이 구현되어야 하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이다. 그는 그것을 또한 ‘인민의 것’ (res populi)이라고도 규정했다. 그것은 국가는 공동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법체계에 동의한 다수인민의 결속체라는 뜻이다.1)
따라서 공화국에서 인간들은 공동의 일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시민(혹은 공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 이탈리아 역사가 프랑코 벤튜리가 언
명했듯이 공화주의는 이렇듯 특정한 국가체제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념이다.2)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피폐한 사회 현실에 대해 공화주의 담론이 촉구하는 것은 국가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시민들은 공동의 일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시민정신을 고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화국은 공동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의 지배가 법치를통해 실현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공동의 지배라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공의 일에 대한 참여와 심의를 통해 공동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법치는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참여한 과정에서 이성적 심의를 통해 제정된 성문법에 따라 지배하고 그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뜻한다. 따라서 공화국은 자신의 일보다 공동의 일을 더 우선시하는, 적어도 공동의 일이 중요하다고 보는, 인간들을 그 구성원으로 해야한다.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연대가 곧 공화국이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 (혹은 공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에 근거한다. 즉 인간은 시민이 될 때 비로소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에대한 지성사적 연구를 이끈 포콕은 고대 그리스 이래 르네상스와 17세기 영국 혁명을 거쳐 18세기 미국 독립혁명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공화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인간의 인간다움은 자치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으로서 공공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덕을 발휘할 때 실현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공)민 윤리였다고 강조한다.3)
또한 포콕에 의하면, 근대 부르주아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재산의 무한정한 획득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정당화한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의 기능을 시민적 독립을 보장하는 것에 한정시켰다. 시민적 평등을 위협하는 재산의 독과점은 바로 인간을 예종의 사슬로 묶는 것이며 이것은 공동체를 부패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은 가장 인간적인 공동체인 공화국은 농지법에 의해 재산의 균등한 분배가 실현된 곳이라고 규정했다.
포콕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로 17세기 영국의 해링턴을 꼽았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역사를 통해 참여라는 덕과 농지법으로 구현되는 재산 균등의 원리가 공화국의 기초임을 역설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치명적인 위기를 ‘원로원과 인민 간의 끊임없는 적대감과 증오’에서 기인했다고 보았다.4)
비참한 지경에 이른 인민들은 공화국의 두 기본원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공적 지배 과정에의 참여와 농지법을 통한 토지의 균등분배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원리가 인민들에게 적용되는 방식이 명확하지 않고 부적절했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 원리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투쟁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5)
이러한 언명을 통해 해링턴이 의도한 것은 인민들의 평등한 참여와 분배에 대한 열망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공화국’인 로마가 불가피하게 노정할 수밖에 없었던 체제적 흠결을 강조해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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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cus Tullius Cicero, De Re Publica, 김창성 옮김, 『국가론』(한길사, 2007), 130-131 쪽.
2) Franco Venturi, 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71.
3) J.G.A.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an
Tradi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4) James Harrington, The Commonwealth of Oceana (1656) in J.G.A.Pocock, ed. The Political Works of James Harringt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272.
5) Ibid., 277.
6) Ibid., 180.

누가 자유주의를 두려워하랴? [PDF]

역사와 담론 第54輯, 273~298쪽(총26쪽)
영문제목: Who’s Afraid of Liberalism?
저자: 조승래(Cho Seung-Rae)

신공화주의 :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필립 페팃 지음 곽준혁 옮김 나남 2012년 06월

신공화주의

목차

■ 한국어판 머리말 5
■ 옮긴이 머리말 9
■ 머리말 23
■서 론 35제1부 공화주의적 자유

제1장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이전의 자유 63
1.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63
2. 제3의 개념: 비지배 자유 73
3. 공화주의의 자유 개념은 적극적 자유가 아니다 82
4. 공화주의적 비지배 자유의 개념: 자유 대 노예 91
5.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 개념: 법, 그리고 자유 98
6. 불간섭 자유의 부상 108
7. 불간섭 자유의 승리 114

제2장 비지배 자유 125
1. 지배 126
2. 비지배 151
3. 페일리의 반박들 162
부록: 지배와 권력의 다른 형태들 172

제3장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비지배 175
1. 개인적 선으로서의 비지배 179
2. 정치적 관심사로서의 비지배 194
3. 제약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비지배 203

제4장 자유, 평등, 공동체 223
1. 평등주의적 이상 224
2. 공동체주의적 이상 239

제2부 공화주의 정부

제5장 공화주의의 목표: 명분과 정책들 251
1. 공화주의적 명분들 254
2. 공화주의적 정책들 283

제6장 공화주의적 형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 321
1. 헌정주의와 조작불가능성 323
2. 민주주의와 견제력 341

제7장 공화정에 대한 견제 377
1. 규제라는 과제 383
2. 규제의 자원들: 제재와 선별 388
3. 일탈자 중심의 규제에 반대하며 392
4. 순응자 중심의 규제를 위해 401
5. 실천 전략 418
6. 결 론 430

제8장 공화국의 교화 433
1. 시민적 교양의 필요성 440
2. 시민적 교양의 공급 449
3. 시민적 교양과 신뢰 463

■부 록 477
■옮긴이 해제 531
■참고문헌 551
■찾아보기 571

책속으로

나는 소극적/적극적 자유의 구분이 정치사상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이는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유를 이해하는 데 단지 두 가지 방법만 있다는 철학적 오해를 지속시켰다. 하나는 자유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외부의 방해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율과 자기실현을 촉진하는 기제들의 존재, 보통은 실행(Taylor, 1985: essay 8; Baldwin, 1984)과 연관된 것이다. 특히 대중의 공통된 의지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개인을 타인들과 통합하게 하는 참여적인 투표기제들의 존재 및 실행과 연관된다.
소극적/적극적 자유의 구분 속에서, 개인적 자유와 민중주의적 자유 간의 이러한 철학적 이분법을 따르는 역사적 담화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담화 속에서 근대 이전의 자유를 언급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의 경우 민주적 멤버십과 참여, 그리고 이러한 멤버십을 통해 얻게 되는 성취 등에 쏠려 있다. 예를 들어 온화하고 향수에 젖은 반계몽주의적 시각과 같이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서 완벽하게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는 성취에 대한 관심이다(Arendt, 1973; MacIntyre, 1987를 Finley, 1973; Fustel de Coulanges, 1920와 대조). 반면 근대적 자유를 언급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각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을 영위할 수 있는 행위의 사적 영역이라는 이상을 옹호하면서 공적 참여라는 이상을 거부하는, 보다 개인주의적인 사회의 산물로 보인다. 만약 민주적 참여가 이러한 자유의 철학 내에서 옹호된다면, 그 자체로 좋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보호라는 목적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필립 페팃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1990년대 말부터 영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이론 및 정치사상학계의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신로마 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의 가장 정교한 이론가로 손꼽히는 석학이다. 영국의 ?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 프랑스의 장 파비안 스피츠(Jean Fabian Spitz)와 함께 신로마 공화주의의 화두를 이끌고 있으며, 가장 정교하고 구체화된 공화주의 이론가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신공화주의》는 최근의 정치이론에서 공화주의의 부활을 이끈 핵심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 페팃은 ‘불간섭 자유 또는 소극적 자유’와 ‘정치참여를 통한 자기실현 또는 적극적 자유’라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구분과는 구별되는 제 3의 개념으로 ‘비지배 자유’를 구체화했다. 이를 통해 개인이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판단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오랜 긴장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제시한 ‘조건’으로서 비지배 자유라는 개념은 최근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개념과도 충분히 조응하고, 그가 구체화한 시민적 견제력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시민적 헌신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함과 동시에 법의 지배와 민주적 심의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비지배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비지배적 조건을 파괴하는 국가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일관된 판단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신공화주의는 한편으로는 경쟁에서 탈락한 개인에 대한 사회적 구제에 무관심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적 심의의 결과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민중주의’의 대안으로 간주된다.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자파테로 총리는 2000년 사회노동당의 당수로 선출되면서 페팃의 신공화주의가 자신의 정치적 문법이자 사회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를 대신해서 선택해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천명했으며, 2004년 총리가 된 이후 신공화주의의 정치적 원칙에 기초한 정책들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한편으로 영국의 블레어(Tony Blair)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과 같은 신자유주의와의 불편한 동거를 거부했기에 주목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이 강조되는 시기에 정치인이 자신의 이념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는 페팃의 신공화주의가 삶의 세계로부터 유리된 정치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도 적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 자유의 이상을 해석함에서, 그리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이상을 구체화하는 데에서, 신공화주의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길을 계획한다. 자유는 단순히 간섭의 회피와 동일시되는 지금의 관행으로부터 반드시 구제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라는 기제와 동일시되는 지금의 풍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이상은 대한민국의 헌정적 열망에도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신공화주의가 대한민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이고 공적인 토론을 촉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번역서를 통해 한국 사회의 ‘공정사회’ 논의가 한 단계 더 성숙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