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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냉전’ 영국 케임브리지대 권헌익 석좌교수

 

ㆍ여전한 내전과 정치폭력…냉전은 과연 종식된 걸까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는 이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시베리아로 현장 연구를 나갔다. 순록을 치는 퉁구스족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소련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사회주의를 실증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족사회 같은 주제가 아니면 연구 지원을 안하던 인류학계의 관행 때문에 퉁구스 사회로 주제를 바꿨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년6개월가량 살며 퉁구스 사회를 연구했다. 이곳에서 제도 공산주의가 원시 공산주의를 포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문제도 분석했다. 현장 연구를 끝낸 1991년 소련 체제가 와해됐다. 1993년 맨체스터 대학에 부임했을 때부터 ‘냉전의 종식’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17일 <또 하나의 냉전>을 출판한 서울 신사동 민음사 사무실에서 만난 권 교수는 “그때부터 ‘또 하나의 냉전’을 쓰기 위한 이론적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냉전이란 것이 한 시대성, 한 시간성만 갖고 있는 것인가, 왜 한 군데에서 냉전이 끝났는데 글로벌하게 냉전이 종식됐다고 이야기하느냐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거죠.” 흔히 냉전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강대국인 미·소 간 갈등을 가리키고, 냉전의 종식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로 여기는 학설과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권 교수는 서로 전면전 위협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냉전의 비유적 표현인 ‘상상의 전쟁’과 강대국 간의 ‘오래된 평화’는 미국과 유럽 중심의 지정학적 시각이자 ‘글로벌한 추상’이라고 말한다.

권 교수는 “냉전이 끝났다고 말할 때 누구의 냉전이며 냉전의 어떤 차원을 말하는지도 봐야 한다”면서 “냉전은 하나의 충돌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국만 해도 극히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한국전쟁을 겪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아프리카의 많은 신생국가와 라틴아메리카 여러 공동체들도 냉전 시기 잔인한 내전과 예외적 형태의 정치 폭력에 시달렸다. 권 교수는 “세계 냉전의 역사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해방공간에서 많은 공동체들이 겪었던 엄청난 불행을 포함하는 역사로 봐야 한다”면서 “냉전이라는 현혹적인 이름 아래 20세기 후반부에 활개쳤던 국가 폭력의 힘에 스러져 간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인간의 조건’을 강조하고, 가족 간, 공동체 안의 ‘관계’라는 화두를 중시했다. 그는 “양영희 감독이 조총련 가족을 소재로 만든 영화 <가족의 나라>를 봤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관계, 국제 정치의 힘이 가족의 관계 안에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일본 내 한인 사회에서 친북 그룹의 자녀들은 식민지 때 비롯된 민족 불평등과 탈식민기의 정치적 분열이라는 이중적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가 이번 책과 <학살 그 이후>에서 베트남전 때 적군(미군) 편을 들었던 친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하고 고통을 겪는 베트남 주민의 문제를 다룬 것도 그런 이유다. 책은 이처럼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인간’을 드러낸다. “유럽사 같은 경우에도 초기에는 전투원들, 국가 중심으로 담론이 되다가 비전투원, 민간인 중심으로,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전개되는데 이는 유럽의 민주화 과정과 동일합니다. 그런 과정을 수렴해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권 교수는 책의 여러 곳에서 탈식민 비평을 비판한다. “기존 탈식민지 논의는 식민시대에서 양극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전개되는, 우리가 말하는 해방공간의 역사라는 것이 전혀 없어요. 냉전이란 것을 점점 더 유럽사람들처럼 상상의 전쟁이란 패러다임으로, 지정학적인 강대국의 게임으로 이해하지요. 탈식민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양극 체제의 충돌, 내전이나 폭력을 주변화합니다. 기존 탈식민 이론은 탈식민지에 사는 사람의 공동체, 친족 문제를 관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권 교수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두고도 “초기 냉전 형성과 탈식민지 역사가 만나는 부분을 그 토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아시아의 주된 정치적 긴장을 두고 ‘냉전 정치’가 아니라 식민 치하 경험에서 비롯된 인종적·종교적인 이유로 분석한 P R 쿠마라스와미 같은 학자도 비판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안보상의 이유로 각각 소련, 미국과 긴밀하게 유대하며 글로벌 수준의 핵전쟁의 지정학을 모방했는데, 이를 냉전과 별개의 것으로 본다”는 지적이다.

권 교수는 탈식민 이론 비판의 연장선에 인종적 용인과 문화다원주의 문제도 들여다본다. 미국은 문화다원주의를 정치적 통합·변동의 수단으로 내세웠다. 소련도 문화적·언어적 다원성을 배려했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정치적인 원 안에서만 인정하고, 그 밖의 것은 배제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도 일상어가 된 다문화라는 말을 두고, “다문화나 다원주의는 문화적 포용과 정치적 배제가 양면인 개념”이라며 “다문화를 하려면 정치적인 배제가 되는 상황을 깨치려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또 하나의 냉전>이 <학살, 그 이후>(2006)와 <베트남전쟁의 영혼>(2008)을 잇는 3부작이라고 했다. 이후 작업이 정병호 한양대 교수와 함께 쓴 <극장국가 북한>(창비)이다. 권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인간의 조건’의 틀로 조명한 한국전쟁의 의미를 세계사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는 취지의 프로젝트를 끝냈다. 결과물은 내년 초 출판될 예정이다.

서울대 ‘글로벌 중견학자 초빙’ 프로그램차 한국에 머물던 권 교수는 지난 19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내년 봄에 다시 한국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212009245&code=900308

세계가 녹아내린다! – ‘투게더’ 함께 읽기

세계가 녹아내린다! 대안은 ‘어게인 박정희’?

[협동조합, 장인에게 배우자] <투게더> 함께 읽기

기사입력 2013-06-07 오후 6:52:59

 

지난 1일 사상 최초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프레시안>은, 5월 사전 조합원 신청을 받으면서 “새로운 언론을 꿈꾸는 독자, 필자, 노동자가 협동조합 프레시안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 대안을 찾기 어려운 한국 언론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우려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성역 없는 비판을 위해 언론사는 기업이나 권력은 물론이고 독자로부터도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언론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이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자. ‘함께 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과정을 보장하고 좋은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속시켜 온 개인의 고립과 단련은 어떤 의미에서는 편의와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함께하기’의 ‘기반’은 물론이고 ‘기술’까지 퇴화하고 있다면? 오랜 역사로 쌓아 올려진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개인주의와 경쟁의 영향으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면?


현대사회의 개인 속에 ‘함께하기’의 인자가 사라지고 있음을 우려한 미국 사회학계의 거장 리처드 세넷(뉴욕대·런던 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은 위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를 써냈다. 세넷은 수년 전부터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이 개인적인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탐구해 왔는데 이 가운데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두 번째 책이 <투게더>다. 이 책에서 그는 ‘협력’을 일을 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로 파악하고 중세의 길드에서 근대의 작업장, 현대의 구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파고들었다.

<투게더>를 관통하는 고민은, 이미 ‘사회적인 것’을 쌓아올렸다가 무너지게 만든 역사 위에서 어떻게 다시 그것을 ‘재구성’ 하느냐다. 한때 저자를 사로잡았던 68혁명의 반문화 전통과 그 세대가 일구어낸 관료제의 해체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실현된 세계 속에서 악몽처럼 뒤틀린 채 재현되고 있는”(김홍중, <투게더> 11쪽, ‘함께 읽기’)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렇다면 21세기 우리가 교훈을 가지고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를 묻는다.

세넷이 탐구하고 있는 사례는 기본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작업장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했다면 그 역사와 결이 다르기에, 그가 찾는 결론 역시 다르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정혜윤(CBS 라디오 PD·<삶을 바꾸는 책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등의 저자)과 함께 진행하는 월례 북 토크쇼인 ‘우리 더 잘 살아요'(☞최근 행사 안내 바로 가기) 4월 행사에서 <투게더>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투게더> 한국어판의 해설을 쓴 김홍중(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마음의 사회학> 저자),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등에서 교육 활동을 해 온 장석준(현 진보신당 부대표)이 ‘함께 읽기’ 가이드에 나섰다.

다음은 지난 4월 29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진행된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협동조합이라는 형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협동조합이 원형으로 지향하는 바이자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사회적인 것’의 발명과 몰락,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거기엔 시시각각으로 발전해 가는 과학 기술과 협력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두 가지 면에서의 ‘기술’에 대한 고찰도 포함된다. <편집자>

더 이상 모여 놀지 않는 사회


정혜윤 :
 지난해 여름부터 ‘우리 더 잘 살아요’ 행사를 해 왔는데, 외국 책을 가지고 행사를 하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저자를 이 자리에 모실 수 없음에도 이 책을 꼭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일단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늘 마음 맞는 사람하고만 일할 수 없다는 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최근 쓴 <사생활의 천재들>(봄아필 펴냄)이란 책이 있는데요. 그걸 쓰면서 가진 문제의식도 비슷해요. ‘어떻게 하면 너랑 더 잘 지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책인데, 들어야 할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고 할 것이 참 많더라고요.

그 무렵에 이 책을 봤어요. 맨 앞장에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몽테뉴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라고요. 어떤 점에서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아요. <투게더>의 마지막 장(코다)의 제목도 마침 ‘몽테뉴의 고양이‘예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남은 두 가지 열쇳말이 있어요. 하나는 협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잘 듣는 능력’이라는 대목이에요. 저 같은 라디오 PD에게는 잘 듣는 것이야말로 그 날 방송의 주제이자 전부이고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요. 또 하나는 ‘움츠러들기’예요. 지난해 ‘불안‘을 주제로 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불안하니까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안전한 길로만 가려고 해요. 그런 식으로 다들 움츠러들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세넷은 ‘협력’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걸 라디오 용어로 고치면 공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울리면 나도 울리는 상황이죠. 그건 말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눈빛만으로 이뤄지기도 해요. 저는 방송할 때 입으로 ‘큐’를 주지 않고 항상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말을 하거든요. 얼마 전에 퓨전 국악 팀의 공연을 봤는데, 무대 위에서 팀원들이 계속 눈빛을 교환하더라고요. 실제로 그 팀 이름이 ‘공명’이었어요. 이런 장면만큼 절 설레게 하는 게 없어요.

이런 공명과 협력이 현재 학교나 작업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혹은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투게더>의 한국어판 서문 격인 ‘함께 읽기(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를 쓰신 김홍중 선생님이 학교에서 느끼신 것을 얘기해 주시면 어떨까요.

김홍중 : 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전 원래 누구랑 함께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이 들면서 더욱 혼자 있는 게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한 순간이라도 친구가 없는 삶, 쓸모없는 일로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기회가 없었던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서 목격하는 요즘 학생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무언가를 같이 하는 기술에 있어서 악화가 발생한 건 사실입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람들은 ‘무한도전’처럼 누군가 모여 노는 모습을 즐겨 보고는 있지만 실제로 같이 놀지는 않아요. 너무 지쳐있고 불안하다는 뜻이겠지요. 일인 것과 일이 아닌 것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고, 자기 일에서의 능력을 극대화시키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요즘 학생들에게서 대여섯 명이 무작정 춘천에 놀러가서 퍼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거겠지요.

또 즐거워 보이는 학생을 찾기 어렵습니다. 다른 과 학생들하고도 상담을 하는 편인데,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어 해요. 그걸 찾도록 도와줄 사회적 맥락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서클이나 과 활동도, 학교 바깥의 사회 활동도 자기 정체성이 되어주지 못해요. 어떤 경우엔 병리적인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이건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속한 학과에 130여 명 정도의 교수가 있는데, 모여서 술을 먹지를 않아요. 제게 술 먹자는 전화를 해 오는 분들도 없고요. (웃음)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거든요. 그날 안으로, 그 주 안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체제의 변동과 무관하게 100여 명 정도의 주변 사람이라든가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각각의 ‘생활 세계’를 구성하고 살잖아요. 체제가 흔들려도 그 여파가 생활 세계로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어떤 시점 체제 수준에서 일어난 변동은, 우리 모두가 다른 형식으로밖에 살 수 없도록 하는 변동이었어요. 그 변동은 궁극적으로 대처가 말한 ‘사회(Society)라는 것은 없다’였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부터였던 것 같아요. 물론 1970년대 후반 서구에서부터 마가릿 대처가 상징하는 거대한 풍파가 불어왔고 국내에서도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불거져 온 현상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제도나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큰 자기장의 변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소사이어티’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사교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런 모임도 소사이어티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모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로 접어들었고, 통치라는 것의 성격도 바뀌어 가고 있어요. 국가가 복지를 포함해 사람들의 문제를집합적으로 신경 써주면서 보완하고 책임져 주는 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향으로 통치성이 구현되어 갑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굳이 모여 놀거나 논쟁하지 않아도 돼요. 삶의 다양한 만남들이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재생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거창한 의미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술 먹는 방식,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 가족관계, 친구와 노는 방식 등 사생활의 많은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스킬’들을 파괴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력한 연줄 문화가 있는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요. 이런 스킬을 이미 익힌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시대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이 모여서 노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워 온 상태로 자라고 그 공백이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규정한다고 하면요.

혹자는 ‘투게더’를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이라 믿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단초들마저 지난 15년간 제도적 변화 속에서 훼손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일 세넷이 한국에서 두 달 정도 산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자본가와 군대 문화의 대립

정혜윤 : 이번엔 작업장에서의 협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취재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게더’가 굉장히 사치스러운 얘기에요.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에 취재를 갔는데, 신차가 나오면 조립 라인이 바뀌면서 잠시 공장을 쉬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라인이 신차 생산에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거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역시 필요 없어진다며 덜어내 버리는 거죠. 그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인품이 어땠는지, 다른 사람과 사이가 좋았는지는 전혀 변수가 되지 못해요. 말하자면 현재의 많은 노동 환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떻게 관계 맺느냐’의 문제가 무의미해지는 환경이에요.


장석준 : 
이 책에서 세넷이 젊은 시절(1970년대)에 작업장에서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확인한 것들을 썼는데, 거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작업장 내에서 협력의 분위기가 가장 왕성했을 때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세대가 일했을 때라고 해요. 이걸 거시적으로 보면 복지 국가가 2차 대전의 경험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그렇지요. 이런 사실이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노동 운동 문화를 보면 상당히 군사적입니다. 운동권 가요나 문구가 적힌 조끼, 운동가들끼리의 내부 문화도 그렇고요. 그런데 세넷의 시각을 적용해 보면 한국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어요. 한국의 노동 현장의 남성들이 세넷이 말하는 ‘협력’을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습득하는 통로는 군대거든요. 군대에서 습득한 것이 작업장에서 나타납니다.

세넷 스스로도 지적하지만 작업장이 굉장히 권위적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은 작업반장이 욕설을 써가며 일을 시키는데, 노동자들이 거기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따른다는 거예요. 권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들을 이끈다고 느끼고, 그 속에서 협력의 분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이는 자본가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겨졌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국의 작업장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비록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지만 비공식적인 협력의 문화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면서 자본가에게 반대되는, 그들이 짓밟을 수 없는 힘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계속 놔두었다가는 그들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음을 느꼈고, 그 가운데 ‘노동 유연화’라는 구호가 유효하게 등장한 것이죠. 그것은 물론 전 세계적인 맥락도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1987년 이후 등장한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와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현대자동차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연령차가 있습니다. 정규직은 보통 1987년을 경험한 40대 후반이나 50대이고, 비정규직은 보통 30대나 그 아래의 젊은 사람들이지요. 만약에 정규직/비정규직 분화가 없었더라면 세넷이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청년 노동자들에 도덕적인 권위를 행사하면서 비공식적 협력이 이뤄지고, 그것이 자본가와 대립할 때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가능성이 다 사라져가는 겁니다. 한쪽은 정규직이기에 질시의 대상이 되고, 한쪽은 비정규직이라서 그들만으로는 자본가들에 대항해 교섭력이나 협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본가에겐 모순적인 부분이죠. 비공식 협력이 작동해야 자본가들이 설계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잘 돌아갈 수 있는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면서 와해시키는 것이니까요. 결국 종국에는 그걸 주도한 자본가 입장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혜윤 : 저도 제가 일하는 현장에서 점점 더 비공식적 협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예전에는 같은 현장에서 같은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로 엮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말이죠.

사실 저와 동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이에요. 옛날엔 방송을 잘 못하면 욕을 하고 싸웠어요. 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고, 방송을 하기 위해 이 조직에 모였다는 자의식이 강했지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그걸 위해서 기꺼이 싸울 마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로 싸우지 않게 됐어요. 행여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거나 나중에 자신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될까봐 적당히 예의범절을 갖추는 사이가 된 거지요. 그렇다보니 회사에 있는 시간이 치열하게 자아를 실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무의미하지만 견뎌야 할 시간으로 변하는 거예요. 누굴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그 사람을 위해 싸울 마음도 없고 그냥 ‘웬만큼 좋은 사람’이 되어가더라고요.

이제는 술자리가 있어도 안 가게 돼요.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무릎을 꿇고 “부장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본 이후로요. 전 ‘정말 사랑하니?’라고 묻고 싶어졌어요. (웃음) 술자리마저도 다음 날 좀 더 편안하게 일하기 위한,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편리한 화해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우리가 너무 움츠러들었다는 제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예요. 방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이것이 비공식적 협력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한편, 그 각각의 내면 역시도 크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회적인 것’에 대한 향수, 그런데 우리는?


김홍중 : 
저는 회사 생활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는 끔찍하게 느껴지네요. 어쨌든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세넷이 전형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세넷을 비롯한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유럽 전통에서 ‘더 소셜’이라는 말은 원래 모여서 논다는 의미의 ‘사교’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국민국가(nation-state) 혹은 주민(population)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사회라고 하면, ‘한국 사회’, ‘미국 사회’처럼 국가 외의 무엇을 잘 떠올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런 의미와는 다른, ‘차원(Dimension)’으로서의 ‘더 소셜’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정신분석학을 거꾸로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가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꿈을 ‘당신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떤 욕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에 비해 사회학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A가 자살을 했는데 거기엔 실연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 하는 개인적 차원의 이유가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보니 사회라는 차원이 개입해 있는 겁니다. 에밀 뒤르켐은 개인의 자살에 대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결합력이 낮아서라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가 그를 자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죠. 한편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취향, 즉 트로트를 좋아하는가 클래식을 좋아하는가 같은 문제를 계급으로 설명했고요.

우리가 그 인과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의 행위나 심성이나 삶의 형식이나 미학적 취향 등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차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당시에 함께 등장한 것이파스퇴르의 미생물학이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가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만들어 주는 메커니즘이 발견된 동시에, 사회라는 것이 우리를 공통의 운명으로 엮어주고 있다는 시각이 19세기 말 등장하게 된 겁니다.

사회 보험 제도도 이때 나왔습니다. 보험이 있기 전에는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누군가 다치면 그 사람 책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때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원칙이 ‘비 프루던트(be prudent)’, 즉 ‘조심하라’였어요. 다치면 당신의 책임이니 그만큼 신중을 가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작업장에서의 사고는 우연히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건 정의롭지 않지요. 그래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끼리 일정한 돈을 내서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돕는 커다란 제도를 창출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럽인들에게 사회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이자, 박테리아처럼 보이지 않는 공통 운명이자,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때 사회란 “한국 사회는 ~~하다”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컵처럼 확실한 거였어요. 가령 제가 실업에 빠져 있다면 사회는 바로 느껴져요. 또 직업을 갖고 있는 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도 사회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죠. 왜냐하면 바로 돈, 지식, 기술 등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니까요. 이것이 절정에 올랐던 시기가 앞서 말했던 2차 대전 끝나고부터 1970년대까지입니다. 그 전통 속에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오는 도움 외에도, 정혜윤 피디가 언급했던 직업적 소명의식, 즉 직장이 개인의 삶의 근원이라는 의식 역시 강하게 존재했었어요. 이러한 유기적인 큰 그림이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창출되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이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적인 것’은 없으면 바로 지장이 생기는 겁니다. 또한 세넷이 강조한 바와 같이, 없으면 자기 삶을 서사화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내가 스무 살에 어떠한 직업을 가졌고 시간이 지나니 기계가 바뀌었고, 몇 년 후 아이가 생겼고 퇴직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고…’, 이러한 삶의 서사가 사회적인 것과 맞물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또 세넷이 문제 삼고 있는 게 바로 이러한 것들의 용해입니다.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혹은 위험 사회 등으로 표상되는 일련의 변화가 ‘사회적인 것’이란 말에 담긴 100여년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 가치, 감수성 같은 것들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세넷이 68세대라는 점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어요. 68혁명 세력은 기본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게 싫고 피곤했던 겁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모든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봤어요. 그들 중 급진적인 비전을 꿈꿨던 사람들은 복지 국가도 인간을 억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인간을 사슬에서 풀고 원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복지 국가는 ‘개량주의’의 산물이고 자신들을 사육시키는 또 다른 기제였지요.

그런데 <투게더>에서 세넷은 그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죠. 68혁명 때 외쳤고 꿈꿨던 것들이 신자유주의 속에서 악몽처럼 현실화되어 있었습니다. 소중히 만들어 낸 제도가 무너지고 가족, 직장, 소명의식, 복지가 녹아내리고 남아 있는 건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이었던 거죠. 그 개인들은 안으로는 불안에 떨고 밖으로는 경쟁 논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노동 형태가 비물질 노동으로 바뀌면서 협력할 공간(작업장)은 사라져 가는데 작업 시간만 무한히 늘어나고 있고요. 노동이라는 것이 몸을 쓴 결과가 아닌 시간의 일부들이 조합되어 자본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거죠. 즉 ‘투게더’를 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더 소셜’의 용해 현상입니다. 그리고 세넷은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용해 현상이 일어나기 전인 30년 동안(2차 대전 이후~70년대)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장인정신, 직업정신, 소명의식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더라는 것이죠. 소박한 삶이 무너져 있는 현재, 과거의 도드라진 어떤 시점이 세넷에게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대안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한국으로 가져와 보면, 우리에겐 세넷과 같은 의미에서의 돌아갈 때가 없잖아요. 그 대신 지난 선거에서 다른 의미의 노스탤지어가 작동을 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시 사회적인 것이 녹아 사라진 15년을 겪으니, 강력하고 ‘솔리드’한 무언가가 필요해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솔리드’한 체험이 무엇일까요. 역설적으로 앞서 말했던 산업화 시기의 위계적이고 군사적인 문화, 답답하지만 안정적으로 여겨졌던 질서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을 (대선에서) 뽑지 않았겠나 싶어요.

정리하자면 세넷의 문제 진단은 정확했다고 봅니다. 사람은 녹아내리고 흩어져버린 사회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솔리드’한 무엇인가를 창출해야 한다는 문제 앞에 봉착했다는 문제의식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과연 세넷처럼 돌아갈 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 거지요.

‘걸음마부터 다시!’ 거장의 낙관?

장석준 :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해 물고 늘어졌던 주요한 물음의 형태는 두 가지죠. 소시올로지(Sociology, 사회학)와 소셜리즘(Socialism), 즉 사회주의입니다. 에밀 뒤르켐이나 마르셀 모스 같은 19세기 사회학의 주요한 창시자들은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와 관련해 우리가 중요하게 가져야 할 물음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본주의의 대안 하면 ‘국가 사회주의’를 떠올립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사회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식했지만 실체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김홍중 선생 같은 사회학자들이 앞서처럼 설명해 줘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죠. 실체라는 건 세넷의 말처럼 몸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의 실체가 모호한 데 비해 자본의 실체는 기업, 은행처럼 잘 드러나 보입니다. 국가 역시 인간이 조직적인 폭력을 사용할 때부터 계속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분명해요.

사회주의자들은 자본도 국가도 아닌 사회를 주도하는 실체를 만들어 내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경우 그 역할을 국가가 대행했어요.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겪은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나 소련 같은 일당 독재 국가인 셈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커다란 실패가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전체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인류가 확인하게 됩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령 1970~80년대 영국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대처 정부의 폭력적인 추진으로 이뤄진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했어요. 그동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를 지겨워했던 것이지요.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신자유주의가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국유화, 즉 국가가 다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과연 매력이 있을까요? 스튜어트 홀은 “국가라는 늙은 수위와 결별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회주의는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이 이야기가 나올 때쯤엔 이미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하며 모호하게나마 남아 있던 사회조차도 해체되어 갔습니다.

저는 세넷의 독특한 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진단은 대부분 한 가지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복지 국가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넷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지 국가를 거부했던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복지 국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어쨌든 자본에 대항하여 사회가 주도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태 혹은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 지점에서 세넷은 연대와 협력을 구분하고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정치적 좌파가 뜻하는 것이 과거에 시도됐던 (국가) 사회주의와 관련된 거라면 앞으로 해나가야 할 것은 이와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세넷은 결론에서 노먼 토머스(1884~1968)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당에 들어가 1928~1948년까지 여섯 번이나 대선 후보로 나섰던 인물이지요. 약간 백기완 선생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표를 얼마 못 받을 걸 알면서도 대통령 선거에 나가잖아요. 그런데 세넷은 노먼 토머스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 쟁취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 게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요.

최근 세넷과도 가까운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를 봤더니 비슷한 의미에서 바우만은 ‘소시에타스’와 ‘코뮤니타스’를 구분하고 있더라고요. 소시에타스가 말하자면 국민국가 단위의 커다란 사회인 것 같고, 코뮤니타스는 가족 비슷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조금 다른 사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모태 혹은 세포가 될 수 있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사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한국에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웃음) 제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진보정치 운동, 노동조합 운동의 난관 끝에 최근 중요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민중의 집’ 운동인데요. 이 운동은 스웨덴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종교적인 맥락으로 탄생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각이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에요. 스웨덴의 국교는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 파인데, 노동자들이 루터 파 교구 모델을 하나의 세속적인 공동체를 통해서 구현하려 한 게 스웨덴 민중의 집입니다. 이 경우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사회민주당, 진보적인 교회가 결합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즉 기독교도들이 주일에만 느꼈던 공동체적 삶을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또 주일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이탈리아는 정 반대였어요. 이탈리아의 국교는 가톨릭인데 굉장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교회와 싸워야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민중의 집입니다. 교회와 싸우기 위해 교회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를 거치며 파괴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신자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그 전 단계에 케인스주의를 따랐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요. 만일 앞서 말씀드린 19세기 말의 움직임(‘사회적인 것’의 발견과 실행)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누가 제아무리 신자유주의를 원해도 이뤄낼 수 없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케인스주의 체제가 실행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성취가 분명 있었지요. 사회라는 것의 세포가 복지 국가 단위에서 정책적으로 관철되었으니까요. 소득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분명 케인스주의 체제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진 집단적 소득이 가구 단위로 나뉘면서, 2차 대전 이후 각 가정의 ‘소비 생활’은 철저하게 미국화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렇게 미국식으로 소비가 개별화되고 난 다음 단계에서 신자유주의가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세넷의 문제제기는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방금까지 약 200여 년간 진행되어 온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세넷은 그것이 시작된 19세기의 첫 번째 문제 제기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든요. 원래의 모태·세포들을 복원해야 신자유주의를 복지 국가적 질서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 명 한 명의 사회성을 재건해야 사회주의 국가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주류 좌파의 정책가들이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세넷은 ‘정치적 좌파들이 2~30년간 열심히 노력해 왔으나 그들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뭔가 커다란 부분이 비어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짚어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출하려면 지금까지 소외됐던 ‘손과 발’에서부터 어떻게 협력할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기에 세넷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대단히 낙관적이기도 합니다. 협력을 철저히 기술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술은 천성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거니까, 우리에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투게더>는 매우 파우스트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살아가는’ 시대, 협력은 가능한가?

김홍중 : 말씀하신 맥락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구 제도를 무너뜨리려 하면서 기존에 있던 길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조합들, 지방의 교회 공동체들도 함께 일소시킨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사회성’이라는 게 뿌리내리는 토대는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친족 모임이나 마을의 두레, 품앗이, 계모임 등도 있었죠.

그런데 현 시점에는 또 다른 것들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회가 한국, 일본, 대만이라는 국민국가 ‘내부’에 있었다면 지금은 서울과 타이베이, 도쿄를 가로지르는 삼각형도 존재합니다. 자본과 노동의 교류도 있고,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공간도 실재하고요. 소위 말하는 글로벌한 사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해야 할 것이 늘어났습니다. 계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는 과제와 동시에 국제적인 영역에서 새로 생겨난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고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넷은 후자에 대해서 별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넷의 휴머니즘입니다. 협력을 사람끼리의 협력에만 국한시켜서 얘기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중요한 예로 들고 있는 음악 연주 역시 지휘자나 다른 연주자들하고의 교통이기 이전에 악기를 다루는 손과 악기와의 교통이잖아요. 이를테면 저는 지금 마이크를 들고 얘기하고 있으며, 말씀드리는 생각에 크나큰 도움을 준 건 컴퓨터였습니다.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래 인간의 몸은 ‘몸’으로 따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이 장소에는 30여 명의 인격과 생각을 가진 신체만 있는 것 같지만, 각각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물질적으로 추적해 보면 여기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이 부분을 세넷이 다소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손의 소외와 사물들과의 연대-연대란 말이 다소 거창하지만-를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가 역시 현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사람들이 사물 속에서/사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으며 사람이 테크놀로지를/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지요.

청중 질문 : 제게 조카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중학교에, 다른 한 명은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평범한 10대인 이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으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을 즐깁니다. 너무 깊게 빠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 했더니, 게임 속에서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있더라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전략 게임을 하려면 방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해요. 일단 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어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면 게임이나 인터넷 속 네트워크도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인 건 아니잖아요? 이른바 가상공간에 쌓아 올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좀 걱정됩니다. 이런 것을 내재화한 아이들이 나중에 실제적 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거든요. 게임 속 인간관계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더 넓은 차원의 인간애를 보장해 줄 수는 없겠지요. 두 분은 지금 어린 친구들이 기술과 맺는 관계에 대해, 그 만남으로 발생하는 또 다른 사회의 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홍중 : 저는 갈림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분야의 용어로 말하자면 아도르노냐 벤야민이냐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할까요. 뛰어난 인문주의자였던 아도르노는 죽을 때까지 대중문화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벤야민은 아시다시피 ‘아우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아까 정혜윤 피디가 말했던 ‘눈빛 교환’이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은데,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소통의 전율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벤야민은 이 아우라를 포기합니다. 그런 소통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정치 체제에서는 구현해낼 수가 없다고요.

솔직히 털어놓으면 제 마음 속에는 “도스토예프스키도 안 읽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건방진 생각과 이와 전혀 반대되는 생각이 상존합니다. 특히 요즘 후자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전자처럼 생각하고 살면 저 혼자만 괴로워요.(웃음) 그래서 마음으로는 100퍼센트 동의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80퍼센트 이상, 제 생각을 현실에 맞추어 벼려나가야 한다고 결론 내리게 됐어요. 벤야민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까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이나 주체성을 신뢰하기 시작한 역사는 서구의 경우에도 400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물론 그리스 휴머니즘의 역사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언제나 신 밑에 있었고, 더 이전에는 거대한 자연 앞에 눌려 있었지요. 그리고 현 시점 역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동물보다 나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중 하나가 방금도 말씀드린 사물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인정을 못할 뿐이지 저와 여기 와 있는 여러분은 커다란 시스템이 사용하는 하나의 단말기에 불과할 지도 몰라요.

태어나자마자 미디어를 접하고 가상공간의 현실과 그 바깥을 오갈 수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서,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린다면 과연 상상할 수 있는 미래라는 게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벤야민의 길을 긍정하기로 했어요. ‘눈빛의 교환’이나 아우라 같은 원형만을 찾는다면 앞으로 사회성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인간의 완전한 기계화라는 상황으로 치닫기 이전에 지속되는 지금의 경향 속에서, 사회성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내는가라는 질문을 물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건 그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태어나고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본인들이 어떤 세계에 몸담고 있다면 가능성 역시 스스로 구현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일단은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80퍼센트 까지는 긍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비판적 의식을 갖고 맹렬하게 노려보고 싶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믿습니다. 아직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회성의 실마리는 언젠가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봅니다.

덧붙여 함께 물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앞바다에 떠오른 거대한 가자미 떼, 길에서 살아가는 개미들의 숫자 따위가 자연스러운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란 의식을 가져야 해요. 매미도 일종의 시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름에 매미가 울지 않으면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주주의’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물뿐 아니라 이러한 미물들 역시 우리 삶에 굉장히 깊숙하게 얽혀 들어와 있다는 인식 속에서 사회가 발생하는 거거든요. 이미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산다는 인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장석준 : 저 역시 확정적인 결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장의 권위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넷은 SNS에 부정적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부정적이다 못해 ‘대안을 찾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귀담아 들을 여지가 있지만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죠. 거장이고 위대한 사상가들이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들이고, ‘꼰대’일 수도 있어요. (웃음)

현실의 예를 들면, 요 몇 년간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양상은 SNS가 예측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준 측면이 있습니다. SNS를 통해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마드리드 광장에 모여 1~2년간 천막 농성을 펼쳤고, 경제 위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대안적 운동으로 발전했지요. 많은 분들이 ‘오큐파이 운동’하면 월스트리트를 떠올리는데, 오히려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스페인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잘 살펴봐야 할 것은 불씨는 SNS 속에서 당겨졌는데 운동은 바깥에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SNS ‘내’의 사회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바깥으로 펼쳐져 나가는 새로운 사회성 역시 존재하는 것이지요. 거장들의 시선이 놓친 지점이라고 봅니다. <투게더>가 <장인>(김홍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 이어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데, 세 번째 책에서 도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면을 써라, 사회를 이분(二分) 하라!

장석준 :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넷의 이야기를 받아들임에 있어 실수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세넷은 우리에게 옆에 있는 타인과 속을 터놓고, 솔직하고 끈끈한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협력을 재건하기 위해 오히려 가면을 쓰고 기술을 습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세계 3차 대전 이후 반대자를 다 잡아 가두는 파시즘적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를 그리고 있지요. 주인공 브이(V)는 체제의 전복을 시도하는 테러리스트인데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다녀요. 온 몸이 불에 타 흉측한 모습이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 신체를 가리는 건데, 끝까지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요. 그는 가면을 통해 소통하고 가면을 통해 혁명을 도모합니다. 브이가 죽은 뒤 혁명은 성공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등장해요.

이 은유가 세넷의 메시지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노력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100퍼센트의 투명한 자신을 보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 협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강박을 가질 때 협력에 실패한다고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관계 맺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선택한 가면으로 일종의 ‘놀이’에 임해야지만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이처럼 세넷의 이야기는 역설을 머금고 있고, 그 역설을 잘 파고들어야만 반대 방향의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넷이 <장인>에서 자신의 정신적 뿌리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 19세기의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중세 시대 수공업적 전통의 복권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중에 길드 사회주의로 발전했고요. <투게더>와 <장인>에서의 세넷은 그런 생각을 21세기적 맥락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세넷의 결론에 공감하느냐 아니냐의 질문을 우회하여, 제가 잠정적으로 동의하는 결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저는 20세기 후반의 노동 이론가이자 생태주의자인 앙드레 고르가 도달한 결론에 동의합니다. 고르는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계속해서 전문화되는 부분은 남겨 두고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이전의 삶의 자율성을 복원시키는 공간으로 되돌려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쉽게 말해 그는 노동 시간 단축을 중요시했습니다. 인간성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요.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것을 되살리는 사회, 공동체도 만들고 협동조합도 만드는 사회 말입니다. 두 영역을 가르는 벽을 설치하자는 이런 주장을, 그는 ‘이중 사회론’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도 여러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근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고민해 나가야겠지요.

정혜윤 : 제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나 원래 그래”라는 말이에요. 거짓말 같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좀 더 나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네가 보는 그대로가 바로 나야’라는 게 진정성일까요? 저는 진정성이란 게 있다면 오히려 ‘너를 통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관계들의 탄생과 창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소셜’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넷 역시 ‘너와의 협력을 통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묻고 있다고 느꼈어요. 두 분 모두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안은별 기자(=정리)

스베냐 플라스푈러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교사에게 연수는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이다. 교사들은 해마다 이런저런 이름의 직무연수와 자율연수에 참여해야 한다. 요새는 연수의 압박이 조금 더 거세졌다. 대략 연간 60시간을 최소 기준 시간으로 정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성과급 등급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게끔 돼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연수는 대개 ‘교학상장(敎學相長)’, 곧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다. 사실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많은 학교가 연수 이수 시간을 성과급 산정에 주요 항목으로 활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청이 학교를 평가할 때에도 학교 전체의 연수 시간이 주요 평가 항목이 된다. 그래서 교장들은 교사들 앞에서 대놓고 형식적으로라도 연수 이수 시간을 채우라고 침을 튀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잡무와 잦은 출장에 치인 채로 살아가는 교사들에게 연수는 고된 노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울며 겨자먹기’식의 반강제적인 연수라면 더욱 그렇다. 연수라는 ‘일’을 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기는커녕 점수의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에 비애를 느낀다. 그렇게 해서 전문성이 길러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더욱 자괴스럽다.

그럼에도 많은 교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원격 연수를 ‘기꺼이’ 받고 있을 것이다. 목이 뻣뻣해지고 손목이 시큰해지는 것쯤은 상관 없다. 60시간을 넘어 100시간, 200시간도 괜찮다. 몸이 고통스럽더라도 200시간의 연수 시간을 채운 자신을 선망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향락 노동자들은 혹사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신체 활동이란 고작해야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동공을 집중하는 것에 국한되며, 두뇌만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기서 자극에 반응하며 웹 사이트를 클릭하고 이 링크 저 링크를 따라다니는 사이에 그는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것이다.”(<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12쪽 중)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 씀)의 핵심 열쇳말은 위 인용문에도 나오는 ‘향락 노동’이다. 저자는 향락 노동을 일 자체가 좋아서 자기 스스로 일을 하고, 그 일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노동으로 규정한다. 독일의 소장 철학자인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문제는 바로 그 향락 노동이 가지는 양가성(兩價性)이다. 향락 노동은 과연 약일까 독일까.

“일도 해야 하고 스포츠도 봐야 하고.. 우리는 흥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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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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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향락 노동이 가져온 기괴한 풍경 하나를 짚어보자. 우리는 동네 골목에서조차 적나라한 차림과 표정의 여성 모델의 그림이 박혀 있는 모텔 광고 전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기의 대상이었던 섹스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숙한’ 대상이 된 것.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성욕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성과 섹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우리는 무언가가 부재할 때 그것에 대해 욕망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이와 관련해 ‘포르노’를 현대의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포르노 배우들이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신체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처럼, 현대의 일 중독자들도 리탈린이나 모다피닐 같은 각성제를 통해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일에 몰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휴식이나 여유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벗은 분주함, 바쁨이다.

“여기서 회의를 하고, 저기서 비즈니스 런치를 먹고,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마감 일정에,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 시청까지, 우리는 언제나 지속적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문화학자 토마스 마호의 말대로 현대의 금욕주의자는 일중독과 행동주의, 스트레스와 시간 압박, 고독과 우울증의 합성물이며, 성차별과 아이에 대한 혐오, 독신주의의 임포텐스(남성의 성기 불능-기자 주)가 서글프게 뒤섞인 혼합물이다.”(본문 61~62쪽 중)

당신의 야망, 애정 결핍·열등감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주함이 진정으로 창의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말을 인용해 분주함이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기존의 것을 재생산하고 가속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상 진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육체와 정신의 여유와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가. 무작정 떠나는 여행과 같은 참된 휴식이 중요한 까닭이다.

저자는 좋은 의미의 향락 노동이 집착적인 워커홀릭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릇된 야망’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야망은 ‘커다란 희망이나 바람’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되곤 하지만, 현실 속의 야망은 한 마디로 ‘과도한 명예욕’일 뿐이다.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 야망이 잘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착취적인 경쟁 논리로 무장한 오디션 현상을 예로 든다.

지금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슈퍼스타K>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보라. 관객들이, ‘진짜 노래란 이런 거야’라며 가수의 열창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잊혀진 가수들의 주옥 같은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근본적으로 모두의 관심은 노래나 연기 그 자체보다 심사위원이 올리거나 내리는 엄지손가락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도한 야망은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과 그로 인한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단다. 그는 철학자 부흐크레머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망이 큰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실존적 동의에 대한 확신도 없다는 점, 인정의 욕구가 결국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아이처럼 그는 결핍의 체험을 증폭된 애정의 ‘강제’로 해소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을 힘줘 말한다.

그릇된 야망과 인정 욕구는 우리를 심각한 워커홀릭으로 만든다. 스마트폰과 이메일은 일이 우리를 옥죄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의 하나다. 그것들은 퇴근 후에나 휴일에도 우리들을 가상의 일터로 불러낸다. 많은 사람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즐기기까지 한다. 리비도적 집착이자 상사병 수준이다. ‘일’이라는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본문 198쪽)

덧붙이는 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로도스 | 2013. 04. 15. | 211쪽 | 1만 4000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4409&PAGE_CD=N0001&CMPT_CD=M0016

자본과 권력은 외부의 사악한 악마가 아니다.

자본과 권력은 외부의 사악한 악마가 아니다.

 

이미 우리의 느낌과 생각, 실천 속에 내면화돼 존재한다는 말이다.

“외부의 특정 세력이나 인물을 정해 ‘저것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과 권력이 민중을 탄압하는 방식이에요. 우리에게 경쟁이 필요하다면 진실을 위한 경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경쟁,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지기 위한 경쟁이어야 합니다. 진짜 인간의 논리, 생명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신바람나고 보람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매순간 던질 때 정서적 프롤레타리아 상태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313824&ctg=1703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출간예정작 Commonwealth(공통체)와 강좌계획

『공통체』(Commonwealth, 2009)는 『제국』(Empire, 2000), 『다중』(Multitude, 2004)으로 이어져온 현대 자본주의 및 정치 분석 3부작의 마지막 권이자 그 결론에 해당한다. 『제국』에서 현대 세계의 정치적 구성을, 『다중』에서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를 분석한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공통체』에서 마침내 다중의 혁명과 정치적 조직화(즉 다중의 군주되기)의 문제를 다룬다. 인류의 삶의 생산 및 재생산의 점증하는 공통화와 일방주의적 신자유주의 통치의 모순이 폭발한 금융위기 및 경제위기 상황,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정치공백기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재산(소유)을 관리하던 정치형식이었던 공화국(republic)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고 가난한 다중들의 삶정치적 혁명과 그 혁명을 공통화하고 제도화할 공통체(commonwealth)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Commonwealth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지를 놓고 오래 고심을 했다. 흔히 국가, 공화국, 연방, 주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에서 사용되는 Commonwealth의 의미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Commonwealth는 국가를 의미하는 State와는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또Commonwealth는 책 전체가 근대 공화국, 즉 Repulic에 대한 비판이다. Commonwealth는 federation, 즉 연방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역시 비판적 입장에서 그러하다. Commonwealth는 제국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공통재common wealth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제도화할 몸체에 네그리와 하트가 붙이는 이름이다. 그것은 풍부한 다양성이 공통의 몸으로 조직될 정치형태이다. 이것은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community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탈정체성적인 방식으로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는 몸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Commonwealth를 ‘공통체(共通體)’로 옮기기로 했다. (물론 더 좋은 번역어 제안을 환영한다). 共通이 the common을 의미한다면 體는 그 공통적인 것의 다양성, 즉 豊(풍)의 내적 연관(骨, 골)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체’는 공통적인 것을 조직할 정치적 몸을 지시한다.

이 책은 1개의 서문, 여섯 개의 장, 6개의 보론(추론), 1개의 막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장들 외에 6개의 보론(추론)들도 나름대로의 집단적 독립성을 갖는다. 아직 한글본은 물론이고 영문본조차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는 다중지성의 정원 2009년 10월 첫째 주 목요일(10월 1일)부터 이 책, 네그리/하트의 『공통체』(Commonwealth)에 대한 강의를 시작할 것이다. 저자들의 책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적 비참의 제도를 코뮤니즘적 행복의 제도로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과 그 실현 경로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표인데, [제국]과 [다중]을 읽고 그 후속작이며 마지막 작품인 [공통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국]과 [다중]의 논의가  정치적 방향성에서는 아직 추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통체]의 핵심내용을 집약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강의는 아래와 같이 9강으로 구성된다.

1강 다중의 군주되기

2강 공화국(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다중)
3강 근대성(그리고 대안근대성의 풍경들)
4강 자본(그리고 공통재를 둘러싼 투쟁들)

5강 막간 1: 사건으로서의 삶정치, 삶정치적 이성, 홀린 사랑, 악과 싸울 힘

6강 제국이 돌아오다
7강 자본을 넘어서?
8강 혁명

9강 막간 2: 메트로폴리스, 문지방을 넘어서, 행복을 제도화하기1. 텍스트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양극적 경제는 오늘날 깊은 침체에 빠져있다. 이 경제의 견인차였던 미국과 일본의 현 상태가 보여주듯이 이 경제는 지난 20년간 짧은 붐과 긴 침체를 거듭해 왔으며 2008년 이후에는 공황 상태에서 헤매고 있다. 이것은 발전의 지체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보 흐름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너무 복잡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해독하고 예측할 능력이 부족할 때, 그래서 그것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을 때 공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황의 상황에서는 욕망이 투자를 거부하게 되고 이 투자 거부가 침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침체와 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성장의 재개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것을 위해서 금융화에서 산업화로의 유턴이 필요하다는 신케인즈주의 노선과, 지금까지의 금융화와 부동산 투기에의 호소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신보수주의 노선 사이의 논쟁이 가열되곤 한다. 과연 재산업화나 금융화/투기화가 현재의 일반적 공황상태를 극복할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경제적 붕괴는 경제적 사유, 경제적 도구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지배적 경제담론에서는 성장의 재개만이 불황의 극복 방안이라고 주장되지만 성장을 재개할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은 국가의 산업적 군사적 재정지출을 통해, 다시 말해 집단적 부채를 통해 극복되었지만 오늘날 집단적 부채는 붕괴나 전복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추가로 지불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아일랜드, 그리이스,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 십 조 달러의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세계 최대의 부채대국이 된 제국의 군주국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생태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확장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대기오염, 오존층파괴, 온난화 등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자연이 제공해 주던 삶의 안전 수준을 획득하는 데에만도 거대한 비용이 들고 있다. 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는 생태보존의 요구와 부단히 상충한다. 기후정상회담이 계속 겉돌고 빈소리로 일관되고 있는 현실은 이 사실을 증언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재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 요구가 실현 가능성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한 방안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생태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의 치료제로서 탈성장을 제안해 왔다. 그런데 탈성장은 지금은 성취해야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자 통증이다. 도처에서 국민총생산이 하락하고 있고 성장이 둔화되며 수요가 주저앉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축적원천으로 삼아온 지난 30년의 귀결이 바로 탈성장이다. 그렇다면 인지의 폐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인지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궁지에 몰린 지금 지금이야말로 인지의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을 위한 인지의 사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성장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적 침체depression와 심리적 우울depression의 중첩, 노동의 불안정과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에 만연된 심리적 불안감의 중첩이라는 병리적 현실에 대한 실제적 치유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치유작업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문화와 정동들의 재특이화를, 서비스 및 재화의 탈사유화를 필요로 한다. 지성은 축적을 위한 일반지성 형태, 즉 지성의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벗어나 재특이화함으로써 자유를 위한 공통지성, 즉 다중지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동도 한편에서도 중독, 다른 한편에서는 기피라는 두 얼굴의 일반감정 형태들에서 벗어나 존재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특이한 정동들을 구성해야 한다. 일반지성과 일반감정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인지적 기념비들의 창조를 통해 중독과 기피의 무력상태를 타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복과 사적 소유를 동일시하는 편집증에서 벗어나 인간적 저항의 자율지대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테크이지만 저에너지인 모델에 기초한 생산의 자율적 형식들을 실험하고 정치적 언어보다 치유적 언어로 말하는 습관을 조성하는 영구문화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사람들이 공황과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있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의 이 탈성장 경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냉소적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혁명은 재특이화의 길로 나아가는 다중들이 지금까지의 성장경제의 진실을 직시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스스로 돌보는 가운데 생성될 일종의 “치유적 전염 지대”(therapeutic contagion)를 확대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활성화될 이 치유적 문화혁명의 정치는 현재의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공포, 불안, 우울의 정서들을 역전시키면서 개체적 집단적 기쁨을 산출하는 정치이다. 스피노자는 수동적 슬픔의 경험에서부터 기쁨의 요소들(타당한 관념들과 적합한 정념들)을 추출하고 결합하여 그것을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공통관념의 정치학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게서 기쁨은 신체와 정신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는 정동적 자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쁨의 구축은 슬픔(공황, 조울, 불안)의 인지상태를 극복하게 하는 치유과정에 다름 아닌데 이 과정은 슬픔의 수동상태에서부터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될 요소들을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의 한 예를 네그리와 하트에 의한 가난과 사랑의 개념혁신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난에서 궁핍, 불행, 혐오만을 읽는 인지적 습관에 도전하면서 가난을 생산성과 가능성의 힘으로 번역하려 한다. 이들은 가난의 개념을 통해 임금 관계 안팎에서 형성된 광범위한 생산적 주체성을 파악하고자 하며 가난을 결여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 이주자들, 불안정노동자들은 분명 세계자본주의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이들이야말로 전 지구적인 삶정치적 생산 리듬의 내부에서 공통된 세계를 생산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힘임을 인지하려 한다.

사랑은 혁신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의 힘과 생산성을 탐구하는 또 다른 경로가 사랑에 의해 주어진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사랑은 가난과 발명에서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생성의 힘이라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사랑은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여 자유화의 과정을 향하도록 만드는 풍부함의 힘에 다름 아닌데,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사랑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우정의 개념과 완전히 겹친다.

만약 가난과 사랑의 재개념화가 특이함과 그것들의 공통되기를 추구하는 무기일 수 있다면 무엇이 가난과 사랑을 활성화하는 요소들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첫째 요소는 스피노자가 공통관념을 구축할 이성의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성의 힘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기쁜 수동들을 발견하고 또 발명함으로써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가능성을 구축해 나가는 인지적 혁신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세계자본주의가 확산시키고 공고하게 만든 편집증적이고 광신적인 관점을 해체시키면서 이성의 혁명적 열정이 역사의 언저리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배 권력들을 정복하고 그것의 부패한 제도들을 해체하는 물리적 정치적 행동이 동시에 필요하다. 재특이화는 결코 관념적 과정일 수 없고 물리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제도들, 문화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인지양식들을 감각적 행동으로 와해시키면서 특이성들의 새로운 성좌를 구축하는 것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조직하는 이 물리적 정치적 과정은 앞의 인지적 혁신에 기초해야 한다.

공통되기는 이 두 요소의 결합의 산물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새로운 군주로 구축하는 이 공통되기의 정치과정은 새로운 총체화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지배를 지엽적인 것으로,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것들이 더 이상 지배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마음들과 신체들의 연합 및 실제적 변형의 길이며 이를 기초로 한 인지적 신체적 치유의 길이다.

사적인 것, 공적인 것, 공통적인 것

앞선 글에서 Commonwealth의 후반부 키워드로 괴물과 웃음을 이야기했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개념을 꼽는다면 역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2003년에 고대와 이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도서관 개방운동을 고민하면서 짧게나마 공통적인 것을 사유했던 흔적이다. 당시 나의 고민은 점점 더 강하게 대학사회로 침투하고 있었던 사적인 것의 논리와 그것에 맞서 공적인 것을 내세웠던 도서관 개방운동 진영 사이에서 후자를 지지하면서도 공적인 것에 기댄 운동 논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고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칼럼 지면의 한계상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 글에서 시작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생각은 이후 코뮤니즘과 맑스주의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의 지속적인 준거점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7년이 지나 하트와 네그리가 집중적이고 본격적으로 전개한 ‘공통적인 것’에 관한 사유를 접한 지금, 그때의 내가 가졌던 사유와 비교해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더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에 옛 글을 가져온다.

도서관개방운동과 공공성에 대한 단상
― THE PRIVATE, THE PUBLIC AND THE COMMON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모든 생산의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거이다. 인간이 (흔히 부르주아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그러하듯이) 권리와 의무, 능력의 독립적 원천으로, 다시 말해 ‘개인’으로 간주될 때 그는 홀로 되며, 홀로 된 인간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 인간의 힘과 기쁨은 저 가장 깊은 곳에서 ‘공통적인 것’과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의 역동적인 운동과 흐름을 ‘사적인 것’(the private)으로 절합(articulation)함으로써 작동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공통적인 것’들을 ‘사적인 것’의 회로를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기능한다(소위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작동원리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생산의 근원적 힘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사회체에서도(자본주의와 같이 ‘공통적인 것’에 대한 격렬한 적대로 규정되는 사회체에서조차도) 제거되거나 삭제될 수 없으며, 다만 억압/변형/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적인 것’이 ‘공통적인 것’을 전유한 형태, 반대 방향에서 말하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표출되는 ‘공통적인 것’의 모습(물론 이 때 ‘공통적인 것’의 모습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사적인 것’의 지배 하에서 대개 훼손되고 상처입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을 우리는 ‘공적인 것’(the public)이라고 부른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관점에서 관찰된 ‘공통적인 것’이며,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소외된 형태, 소외된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다(이것은 노동이 인간 활동의 소외된 형태인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위와 같은 고찰을 토대로, 우리는 ‘공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안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사유화에 맞서 국유화를 외칠 때, 그것은 “국가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국가가 최고다”라는 식의 국가주의적 맥락에서보다는, ‘사적인 것’의 냉혹한 공격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확히는 스스로를 보호할 공동체에 대한 욕구라는 맥락에서 더 옳게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때에 따라 혁명적으로 급진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사적인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며, 훼손되지 않고 상처입지 않은 온전한 우리의 삶을 만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옳게 나아가지 못할 때, 혹은 적어도 ‘공통적인 것’의 지평에서 고려되지 못할 때, 그것은 ‘사적인 것’을 위협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것을 더욱 공고화한다. 이것이 공론장, 공공영역, 공적기능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인 것’들의 총화로서의 국가를 주장했던(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하지 못했던(못하는) 덫이다. 모든 이분법적 틀 속의 대립항들이 그렇듯이, 이분법 자체를 문제삼지 않은 채로 양쪽 중 어느 한 항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반대편 항도 강화시킨다.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혁명적일 수 있으려면, 그 요구가 ‘사적인 것’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밀고 나가져야 하며, 그때 비로소 그것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와 다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고대와 이대에서 진행 중인 ‘도서관 개방 운동’의 핵심적 근거는 ‘대학의 공공성’이다. 운동의 주체들은 대학이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공적인’ 위치에 걸맞는 ‘공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지식 즉 ‘앎’의 공유라는 점에서 이 운동은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로 나아갈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앎’은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잠재력이 발현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대학외부(‘사적인 것’의 영역)에 맞서 ‘대학내부만이라도’ 공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모쪼록 이 운동이 앎과 풍요로운 삶을 갈구하는 많은 이들의 ‘공통적인 것’의 구축에 옳게 결합되기를 바라며, 글로나마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