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고대사상

[개념] 위대성 Arete 덕 Virtus

아레테(arete)와 테크네(techne)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일반적으로 아레테(arete)는 덕, 탁월성으로 번역을 하고, 테크네(techne)는 기술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아레테와 테크네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이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레테와 테크네 개념을 고찰하여 현대 스포츠에서의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아레테와 테크네의 개념은 호메로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탁월성, 덕, 기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레테와 테크네는 각각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협력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으로 신체의 아레테를 `건강`,`미`,`강함`,`크기`,`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의 5가지로 명시하였다. 이 5가지의 신체의 아레테는 자연적인 신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아레테를 의미하며, 또한 이 신체의 아레테는 테크네의 도움 없이는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현대 스포츠에서 최첨단의 과학의 기술이 없이는 경기력 향상이나 기록단축을 가져오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운동선수의 잠재적인 신체의 아레테에 최첨단 과학기술인 테크네의 접목은 현대 스포츠에서 제외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체육철학 : 신체의 아레테(arete)와 테크네(techne)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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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이란 자신의 몸(마음도 포함)의 기능이 완벽하게 발휘된 상태, 즉 기능의 발휘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된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경지를 아레테(Arete)라고 부른다. 아레테 상태에 다다른 인간의 행위는 그 실천 행위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 마음의 여유란 결국 실천 속에서 성찰(reflection in action)할 수 있는 힘이 극대화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아레테는 이상적 경지(being)를 말하는 용어 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becoming)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완성된 전문성이라는 것은 이념형(ideal type)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화될 수 있는 완벽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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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ㅡ 뿌리를 찾아서! 소크라테스의 덕(德)

#그리스 철학에서 드러나는 덕

우리가 덕이라고 부르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의 , 라틴어의 virtus였다. 그런데 이 말의 원래 뜻은 ‘힘’ 이었다. 힘이란

것은 뛰어남과 연관된다. 그래서 이 arete개념은 힘 개념과 더불어 뛰어남과 연관된다. 그런데 이 개념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과정을 거쳐서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가지고 마침내 성립된 개념이다.

#무엇이 덕인가? 최초의 덕, 용기(andreia)

그리스 시대 사람들에게는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용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 초기의 훌륭한 사람들이라 지칭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족-전사들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가멤논의 동

생인 메넬라오스, 트로이의 헥토르, 아이아스, 디오메네스, 이런 사람들이 귀족-전사들이다. 근대의 귀족과 다르게 이 사람

들은 전사로서 남들보다 뛰어난 용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덕이라고 여겨졌다

“내게도 똑같은 운명이 마련되어 있다면 나도 또 그처럼 죽은 후 누워 있을 것입니다.

-시체가 되어서- 허나 지금은 훌륭한 명성을 얻고 싶습니다.”

– 아킬레우스 – 전쟁에 나가면 죽는다는 어머니의 말에 답하며…

“이제 운명이 나를 따라잡았구나.”
– 헥토르 –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를 버릴 수 없어서 아킬레우스와 맞붙게 되었을 때

#덕(德) 개념의 다원화

그런데 고대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기존의 귀족-전사와 평민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다양한 직업집단으로

변화하면서‘덕이 뭐냐?’라는 물음도 다원화 된다. 예전에는 ‘덕=용기’였지만, 이제는 덕들 가운데 하나가 용기가 되었다. 상

인들의 덕은 절제하는 것이고, 정치가의 덕은 지혜로운 것이고, 아버지의 덕은 인자한 것이고, 이런 식으로 덕이 다 달라지

게 된다.
그러면서 덕 개념이 상대화 된 것이다. 이후에 페르시아 전쟁을 겪으면서 그리스에서는 전통 가치를 부정하며 상대주의적

사고를 하는 소피스트들이 나타나면서 덕의 개념은 확장되고 다원화 되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뭔가 절대적인 것, 객관적

인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몸과 내 건강과의 관계는 내 마음과 덕의 관계와 같다.” –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의 덕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당위적 이야기가 아니

다. 소크라테스가 지행합일이라 할 때는 ‘지식과 덕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당신이 진정 ~을 안다면 거기에

대해서 덕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진정 용기가 뭔지 안다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을 누구나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그와 같

은 주장을 했을까? 여기에 포인트는 바로 ‘안다’라고 하는 개념에 있다.소크라테스의 ‘안다’라는 개념은 그것을 건성으로, 언

어로, 기호로 안다는 게 아니다. 또한 그의 ‘안다’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안다’거나 ‘모짜르트를 안다’라는 것

과도 구분이 된다.
진짜 앎은 몸으로, 체험으로 경험한 앎이라는 것이다.상투적으로 아는 앎을 몸 바쳐서, 체험을 했을 때 경험하는 ‘아~ 그렇구

나!’ 하는게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안다’의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았을 때 정말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아라! 네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진실로 알면 그렇게 돼. 그것이 바로 영혼을 가진 존재의 덕이야.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는 ‘너 정신 차려라!’, ‘까불지 마!’ 이런 의미가 아니다. 그 반대다. ‘네가 얼마나 대단

한지를 알라’는 뜻이다. ‘너는 인간이다. 사랑하고, 생각할 줄 알고, 책 읽을 줄 알고, 토론할 줄 아는 위대한 존재인데 왜 그렇

게 살아?’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은 결국 ‘너는 영혼을 가진 존재다. 한낱 동물이 아니야. 네 영혼을 돌아봐’라는 뜻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지덕합일을 이룰 때 훌륭한 존재, 뛰어난 존재, 즉 덕(arete)을 가진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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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교수<개념ㅡ뿌리들 1:덕, 선. 악, 국가, 정의 중 >에서

http://blog.naver.com/lavender002/7003527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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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르투스(Virtus)의 기원

고대 로마에서 포르투나(Fortuna)는 행운의 여신이자 행운 그 자체를 의미했다. 그리고 본래 행운이란 계산과 통제가 불가능한 불확정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포르투나에는 또한 우연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포르투나의 복합적 의미는 그 어원을 살펴봤을 때 더 잘 드러난다. 어원적으로 봤을 때 라틴어 ‘fortuna’는 생겨나게 한다는 의미의 ‘ferre’를 어원으로 가진 명사 ‘fors’의 형용사형이다. 같은 행운의 여신인 그리스의 티케(Tyche)역시 ‘성공하다’, ‘성취하다’, 혹은 ‘잇따라 일어나다’(to succed), ‘달성하다’(to attain)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로마시대의 포르투나는 행운이라는 뜻과 함께 우연적 요소라는 의미도 포함된,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어떤 성취나 결과를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박영철 1988, 102). 이러한 의미에 걸맞게, 여신 포르투나의 상징물들은 번영을 부르는 풍요의 뿔피리,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향타, 그리고 운명의 부침을 의미하는 수레바퀴였다.

로마인들은 이 우연적이고 불확정적인 행운인 포르투나를 효과적이고 당당하게 다뤄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역량을 ‘비르투스’(virtus)라고 불렀다. 남성을 의미하는 비르(vir)에서 비롯된 이 단어에는,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자다움’의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다. 기실 비르투스는 적과 불행에 맞서는 용맹성, 현실적 문제를 중시하는 실질성, 삶에 대한 적극성등의 의미가 포함된, 건국 초기 로마의 정치 군사적 지배계급의 에토스(ethos)였다(Pocock 2011, 97). 또한 이후에는 제국으로의 성장을 가능케 한 군사·정치적 역량의 총체(주1) 즉 로마의 힘과 역량을 의미하게 되었다(김경희 2004, 232).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비르투스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와 대비되어 예측 불가능한 삶에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남성적’ 자질로 여겨졌다. 행운의 여신은 때로는 영광을, 때로는 몰락을 가져오는 다소 변덕스러운 존재이지만, 인간은 비르투스를 갖춤으로써 그런 변덕에 일정 정도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르투스는 그리스 문물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유사한 그리스 단어였던 아레테(arete)와 의미상의 변화를 공유하게 됐다. 흔히 ‘덕’ 혹은 ‘사람됨’으로 번역되는 아레테는 본래 모든 사물이 특유의 기능과 구실을 충족하여 이를 수 있는 훌륭하고 좋은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정치적 맥락과 관련되어, 이 개념은 ‘시민적 탁월성’ 즉 다른 시민들에 의해 존경받고 그들에 대한 권위를 가지는 어떤 품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또한 플라톤 철학의 영향에 따라 훌륭한 삶을 완성하는 윤리적 기초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주2). 의미와 쓰임새가 거의 흡사한 단어인 아레테는 비르투스에 복합적 의미를 더해주었다. 이제 비르투스는 아레테와 똑같이 정치적, 윤리적 의미를 가진 개념이 되었다. 그것은 어떤 요소가 가진 특유의 능력 혹은 기능, 정치적 맥락에서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 그리고 인간을 완성시키는 윤리적 선을 의미했다(Pocock 2011, 98).

이러한 지적 토대 위에서, 로마 사상가들은 저마다 포르투나의 변덕에 대비하기 위한 비르투스의 목록을 작성했다.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저술들은 정치적이면서 또한 윤리적인 비르투스의 개념을 잘 드러낸다. <투스쿨룸의 대화>(Tusculanae Disputationes)에서 키케로는 비르투스는 남자다운 남자(vir virtutis)가 되기 위해 갖춰야할 필수적인 자질이며, 따라서 교육의 목적은 비르투스를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Skinner 1993, 53). 그가 말한 ‘남자다운 남자’는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자제력,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철학적 지혜, 그리고 지혜를 활용할 줄 아는 재주를 갖춘 존재였다. 특히 마지막의 재주 때문에, 키케로는 수사학을 매우 중시했다. 키케로는 비르투스와 포르투나의 문제를 또 다른 저서인 <의무론>(De Officiis)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뤘다. 여기서 그는 진정한 남성이 갖춰야 할 것으로 절제, 용기, 지혜, 정의의 기본적인 네 가지 비르투스와 정직, 관대함, 관후함이라는 추가적인 비르투스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르투스를 분류한 뒤 키케로는 운명의 여신의 변덕과 그 대응책의 문제를 논한다. 그는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지을 때라도 결코 자만해선 안되며, 인간사의 허망함과 행운의 여신의 변덕을 잊어도 안된다고 충고한다(Cicero 2006, 72). 나아가 그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으며,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동시에 유익하기도 한 일이라고 설명한다(Cicero 2006, 214). 여신의 은총을 사기 위해서는, 즉 영광스럽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의무론>에서 키케로가 펼치는 핵심적 주장이다. 도덕적인 것만이 유익하고, 도덕적인 방법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포르투나로 대표되는 인간사의 불확정성은 정의, 정직, 관대함 등의 윤리적 행위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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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티투스 황제(39~81)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건립된 ‘티투스 황제 개선문’(Arco di Tito)에 황제의 마차를 인도하는 ‘비르투스 여신’이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 여신이 로마의 군사·정치적 역량 자체를 상징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2)

아레테의 의미에 대해서는 김태경. “플라톤에서 사람됨과 훌륭한 삶”. 2001. 철학 Vol.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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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2004. “‘로마의 위대한 힘(Virtus romana)’ 개념을 통해 본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정치사상: 페트라르카와 살루타티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Vol.13

박영철. 1988. “마키아벨리 사상에 있어서의 ‘fortuna’ 개념”. 동국사학, Vol.22

Cicero, Marcus Tullius 저. 허승일 역. 2006. <의무론>. 파주: 서광사.

Pocock, J. G. A. 저. 곽차섭 역. 2011. <마키아벨리언 모먼트Ⅰ>. 파주: 나남.

Skinner, Quentin 외 저. 강정인 편역. 1993. <마키아벨리의 이해>. 서울: 문학과 지성사.

http://dalwoo.egloos.com/m/5508565

희랍시대의 Arete의 개념에 관하여 -플라톤의 ‘국가’편을 중심으로, 이은진

희랍시대의 Arete의 개념에 관하여

– 플라톤의 󰡔국가󰡕편을 중심으로 –

이 은 진

Ⅰ. 머리말

‘arete’(탁월성)개념은 호메로스 이래로 희랍인들의 중심 개념이었다. 물론 arete는 희랍 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쓰이기 시작된 말이지만, 학문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새삼스레 문제삼아지는 것은 Sophistes에서 발단된 것으로, 희랍적인 사고를 가장 잘 특징지어 주는 말들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arete는 그 시대마다의 희랍인들의 이상 내지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헬라스의 정신사는 이 arete를 찾아 그것을 자신들에게 구현하고자 하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arete가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소크라테스에 있어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의 정신사에는 두개의 큰 축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자연 철학이며, 또 하나는 소피스테스들의 철학이었다. 자연 철학은 physis, 즉 실체(ousia)를 탐구하였다. 즉 탈레스가 ‘물이 만물의 arche’라고 언명한 것을 시작으로 인간 정신은 다양한 현상 세계를 넘어서서 그 배후에서 그 현상세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원리(arche)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원리는 때로는 물, 불, 흙, 공기 이기도 하고, 때로는 원자, 때로는 무한정자 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존재의 규정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눈을 돌린 소피스테스들은, 만인이 함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다만 우리들이 제정한 것에 불과하며, 오래도록 시행해 오는 과정에서 굳어진 관습에 불과할 뿐이어서,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어떤 절대성을 갖는 법이나 행위의 원칙이 없다고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들의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인간의 행위가 표준으로 삼아야 할 절대적이고 영원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그로 하여금 호메로스 시대 이후 희랍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가치 개념인 arete의 탐구에로 나아가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전통적인 arete의 개념에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arete는 ‘앎’(인식 epistetme)이었는데, 이 앎의 대상은 영혼(psyche)이었으며, 영혼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인간은 영혼의 궁극적인 선을 돌보게 된다. 그리고 이 영혼의 선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 행위의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계승 발전됨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arete의 개념, 즉 arete의 윤리적 의미를 계승한다. 그렇지만 윤리적인 의미만으로는 소피스테스들의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없음을 안 플라톤은 자연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실체의 개념을 arete개념에 끌어들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arete 개념을 뛰어 넘어 arete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가한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의 우리가 가치라고 일컫는 바의 덕론(德論)으로 나아가는데 유익하게 해 주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를 앞서간 사람들, 특히 소크라테스처럼 덕을 이해라고 하지 않고, 의지의 태도라고 한 그 순간에, 그는 도덕학을 크게 발전시키게 된다. 희랍철학에 있어서 주된 골격을 이루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라면 그것에 어떤 세련됨을 보태어 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논문의 주요한 관점은 희랍의 전 정신사를 주도한 arete개념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며, 항상 보편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그 결과를 실천적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던 희랍인들의 대표자로서 플라톤을 중심으로 arete개념을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그 저서 중 󰡔국가󰡕편에는 플라톤 당시의 대표적 소피스테스들의 arete관이 들어 있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arete에 관한 형식적‧내용적 차이점이 드러난다. 물론 arete 문제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 의구심을 자아낼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많은 부분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1장에서 2종의 arete에 관한 구분과 그 기준에 관한 언급이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 이미 제시되어 있기에 본 논문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arete 개념을 탐구하고자 한다.

Ⅱ. arete 개념의 형성과 관점

1. arete의 개념

흔히 arete를 덕(德)이라는 말로 번역하곤 하지만, arete가 바로 덕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이후에 밣혀진 것이다. arete개념은 희랍사에 있어서 일관되게 꾸준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것이 철학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소크라테스에 와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의 인간의 관심사는 physis에 관한 것이었다.

arete란 한마디로 사람이나 사물에 있어서의 그 특이성에 따른 최선의 상태를 일컫는다. 모든 사물은 각기 그들의 고유한 기능(ergon)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기능이란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또는 그것에 의해서라야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단검이나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의 것들을 가지고서도 포도 나무의 작은 가지를 잘라 낼 수는 있지만, 그 어떤 것을 가지고서도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낫을 가지고 하는 것 만큼 훌륭하게 자르지는 못한다.”{󰡔국가󰡕352e}를 말한다.

이 때, 낫의 기능이 가지를 치는 일이며, 이렇게 각기 자기의 고유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상태를 그 사물의 arete라 한다.

그런데 철학의 주된 관심이 인간에게로 돌려진 이후,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arete를 의미했다. 인간에게는 영혼(psyche)이 있으며, 보살핀다든가, 다스린다든가, 숙고‧결정한다든가 하는 것이 영혼의 기능이다. 이러한 영혼의 기능은 인간의 삶과 관계하며, 따라서 영혼의 포괄적인 기능은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의 기능이 잘 발휘된 상태, 즉 잘 사는 것이 혼의 arete이다.

arete는 인간에게 지성(nous)의 계기와 더불어서만 온다. 이 지성의 완전한 발현이 앎(episteme)이며, 모자르거나 초과하는 일체의 것은 오직 무지 떄문에 발생한다. 즉 앎이 있는 자는 지혜롭고, 지혜로운 자는 훌륭하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arete와 episteme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episteme를 인간에 있어서의 모든 arete의 발현의 근본적이고 필요‧충분한 조건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episteme의 요소를 arete의 필요한 조건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일치하지만, 충분한 조건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데,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소크라테스가 막연히 혼을 보살필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데에 기인한다.

2. arete 개념의 형성 과정

arete 개념의 형성을 알아보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physis(자연)와 nomos(이법)의 대립이다. 이 physis 또는 nomos는 각각 각자의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들의 학설과 세계관의 기반이었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의 대결은 이론 투쟁의 한 형태를 보이면서 실로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물론 도덕의 영역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 즉 arete의 근원이 physis인가 아니면 nomos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뒷날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arete를 획득하기 위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오직 습관에 의해서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평함으로써, 인간의 arete 성취에 있어서 physis적 요소와 nomos적 요소를 모두 인정하고서야 이 오랜 대결은 끝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랍 문화의 전반적 이해를 위해서 뿐만아니라 arete의 이해를 위해서도 physis와 nomos, 이 두 낱말은 열쇠어가 되는 것이다.

호메로스적인 가치에 있어서의 arete는 귀족이나 전사에게 적합한 뛰어남을 의미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용기라고 부르는 andreia이다. 즉 호메로스의 작품 속의 시대에 있어서 용기는 사람됨의 최대의 요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있어서 용기는 곧 덕이었고 최선의 가치개념이었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인간의 arete가 그의 출생, 즉 출신 성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즉 오딧세우스 같은 이상적인 영웅도 만약에 그가 노예 출신이었다면, 그는 그의 arete를 절반쯤 잃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에 있어서 arete는 자연적인 것이다.

호메로스는 이후로 이 arete의 추구는 많은 철학자들을 거쳐 오다가 마침내 소피스테스에 와서 좋은 소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나 그 외의 여러 작품 속에 나타나는 소피스테스들은 호메로스 등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때까지의 physis의 탐구를 아예 무위할 뿐인 헛수고로 보고, 그러한 탐구로부터의 결별을 강권했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의 arete는 부자연스러운 것, 혹은 인위적인 것으로 역하는 nomos였다.

이러한 소피스테스에 대한 세찬 반동으로 나온것이 소크라테스의 arete 개념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arete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episteme(앎)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사람다움을 찾는 희랍의 긴 여정 끝에, 그것을 덕에서 찾고자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뒤를 이은 플라톤은 앞선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arete 는 nomos라는 것을 부정하여 전통적인 < arete = physis >에로 복귀하는 동시에 소크라테스적인 arete의 이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arete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플라톤의 arete론을 살피기에 앞서서 또 하나의 유용한 작업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arete관의 차이를 알아보기로 하자.

3. 소크라테스의 관점

소크라테스는 arete의 탐구에 있어서 영혼을 단순한 것으로 파악한다. 즉 그는 영혼에 있어서의 무절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다. 때문에 그는 영혼에 관한 앎은 곧바로 그 앎의 실현을 보증한다고 생각한다. 영혼에 관한 이와같은 파악은, 그가 영혼을 ‘技術(techne)’과 같은 구조를 지닌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技術’이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는 구조, 즉 자기 자신의 답을 자체 속에 가지고 있는 닫힌 체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닫힌 체계는 인식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의 과정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닫힌 체계인 기술에 관한 인식은 그 기술의 최선의 상태, 즉 기술의 arete를 포착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arete는 episteme이다.’라는 명제는 원래 기술에 관한 명제이며, 그 의미는 아는 것과 그것의 실현의 일치다.

기술에 있어서도 사태는 영혼에 있어서와 동일하다. 예를 들어, 구두를 만드는 사람의 arete가 실현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구두와 구두 만드는 사람의 기능(ergon)에 대한 정확한 앏(episteme)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가로서의 arete가 실현을 보려면 治者(archon)의 기능 내지 구실에 대한 앎이 선결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혼에 관한 앎은 바로 영혼의 arete의 실현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된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의 arete는 이성적 인간의 합당한 이성적 규율이라고 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성(logos)의 표준적 모델을 생산적 기술에서 찾는데, 기술은 그 기술에 의해서 우리가 원할 수 있는 바의 생산물을 산출할 때, 정당화 되어진다. 즉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행위를 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혼이 이성적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영혼의 arete, 즉 이성적 규율은 훌륭한 행위를 산출하겠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혼의 arete에 관한 인식이 전제됨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episteme가 영혼의 arete의 실현을 위한 직접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다.

4. 플라톤의 관점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무절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인식(episteme)은 곧 arete’라는 주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무절제의 존재 가능성을 허용한다. 즉 혼은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부분을 가진다. 이로서 플라톤은 ‘인식은 곧 arete’라는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혼이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직접적으로는 일치하지 않음을 플라톤은 국가-유기체의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즉 국가는 “우리들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36-9b} 성립되며, 스스로에게 결핍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활동한다. 즉 국가는 자립적이지 못한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 때, 결핍 내지 욕구에 대한 충족의 개념이 바로 arete이며, 이것은 부분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플라톤은 부분들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두가지 방법을 언급한다. 첫째 “남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스스로 자신 만의 힘으로 자신의 일들을 처리”{369e-370a}하는 방법과, 둘째 “각자 저마다의 생산물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하는”{369e} 방법이 있는 데, 플라톤은 이 둘 중에서 후자의 방법이 더 낫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자는 태어날 때에 서로가 그다지 닮지 못하고 각기 성향이 달라서 사람마다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며, 어떤 이가 일을 다른 사람보다 훌륭히 해내는 것은 한 사람이 여러가지 기술들에 종사할 때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가지 기술에만 종사할 때이다. 이와 같이 각 부분들이 저마다의 기능을 잘 행하는 데에서 전체의 욕구는 충족되며, 따라서 전체의 arete는 완성되어진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의 영혼 전체는 단일한 것이었고, 더우기 그것은 기술과 같은 구조를 지녔기에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에 관한 앎은 곧바로 혼의 arete의 실현으로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서의, 영혼 전체는 각 부분들의 다양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부분들의 상호 의존성이 이상적 형태로 조화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각 부분들의 arete는 그 자체로서는 충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며, 오로지 전체의 한 계기로서 전체에 참여할 때만이 그들 각자의 의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플라톤이 사용하는 국가와 영혼과의 비유의 방법론적 측면을 살펴보자. 이 비유는 플라톤의 arete론의 중요하고 또 필수적인 한 부분이므로 여기서 이것을 명확히 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유기체와 영혼이라는 유기체의 구조적 동일성을 주장한다. 즉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와 영혼의 관계는 보다 큰 것과 작은 것의 관계이며, 이 양자는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 질적인 차이는 없다. 국가는 통치자들, 수호자들과 장인들로 구성되며 그들의 각각이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의 구성 부분들이 저마다 자기의 일을 훌륭히 수행할 때, 각각의 부분들의 arete의 지혜, 용기, 절제가 성립한다. 또한 이들 부분들을 이와 같이 이끌어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 正義(dikaiosyne)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분석을 통하여 그 구성부분들로 드러난 것들과 똑같은 성질을 지닌 것을 “개인도 자신의 혼 속에 ‧‧‧‧ 지니고 있다.”{435c}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결론은 그가, 국가는 떡갈 나무나 바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에 살고 있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내려진다. 따라서 개인의 혼도 국가와 동일한 arete들을 가진다.

플라톤이 생각한 ‘국가와 영혼의 동일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와 비판이 따르지만 플라톤 자신이 국가와 영혼과의 비유에 의한 arete의 탐구를 ‘불완전한 것’{504b}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존재론적 논의에서 완성시킨다.

󰡔국가󰡕편을 통해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들과의 이론 투쟁의 성격을 띄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arete관을 제시한다. 이는 두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즉 첫째, 국가와 혼과의 비유를 통한 arete의 탐구이며, 둘째 이데아의 관점에서의 arete의 탐구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의 단계를 살펴봄으로서 사람의 삶에 임하는 바람직한 기본적인 자세와 관련지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한다.

Ⅲ. 국가의 비유와 나타난 arete

1. 국가와 혼의 부분에 나타난 aretè들

(1) 지혜

국가의 지혜는 통치자 계급에 상응하는 arete이며, 한 국가에 지혜가 있음은 분별로 인해서인데, 분별은 인식의 일종이다. 그리고 다른 계급의 지식이 아닌 바로 통치자 계급의 지식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나라는 나라 전체가 지혜있는 나라라고 불려 진다. 왜냐하면 통치자 계급의 지식은 “이 나라에 있어서의 부분적인 것들 중의 어떤 것이 관련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와 관련한”{428c}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episteme의 계승이다. 즉 플라톤은 지혜가 어떤 arete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일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episteme와 sophia가 동일한 의미인데 반해서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sophia는 ‘여러 episteme들 중의 하나’{429a}이다. 그리고 필드(Field)는 “통치는 공동체의 많은 기능 중의 하나로서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로 간의 필요의 충족을 위한 분업의 일반 원리 아래에 포섭된다.”고 한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지혜가 있으며, 이는 이성적인 부분에 상응한다. 이 부분은 욕망과 기걔에 부분을 제시한다. 영혼의 이 부분은 “지혜로울 뿐더러 혼 전체를 위한 선견 지명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부분을 지배하는 것이 어울린다.”{441e}

이 지혜의 arete를 지니는 부분은 국가나 영혼을 전체적 관점에서 조망하여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 지적 영역의 본을 인식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2) 용기

국가에 있어서의 용기는 수호자들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들은 자기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하고 군인으로 봉사하는 자들인 데, 오직 이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비겁한 나라로 되거나 용감한 나라로 된다. 용기는 이들이 법률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들이란 무엇 무엇들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가와 관련해거 생기게 된 신념을 보전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용기는 특히 시민적 용기이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하지 않고 지니게 된 신념, 이르테면 야수나 노예가 가짐직한 생각은 용기가 아닌 것으로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에 있어서의 용기는 혼의 요소 중 기개의 부분에 상응한다. 혼 속에서 이 부분은 이성적인 부분이나 욕망의 부분과는 다른 제 3의 부분이다. 즉 기개는 “만약에 나쁜 양육으로 인해서 타락되는 일만 없다면,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부분을 보조한다.”{441a} 즉 이성적인 부분의 지배에 복종하며 협력자로 된다. 영혼의 용기는 이 기개의 부분이 두려워 할 것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으로서 이성이 지시한 바를 고통스러울 때나 즐거울 때를 막론하고 끝끝내 보전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영혼에 있어서의 이성적 부분과 기개적 부분이 참으로 제 할 일을 배우고 교육받게 되었을 때 이들을 욕망의 부분을 조종하게 된다.

(3) 절제

절제는 욕망의 부분에 해당하는 arete이다. 플라톤은 욕망을 필요한 욕망과 불필요한 욕망으로 나누는 데, 필요한 욕망이란 없어서는 안 될 욕망이다. 반면에 불필요한 욕망이란 훈련 여하에 따라 제거할 수 있는 욕망이며, 무익할 뿐 아니라 해가 되는 욕망이다. 이 중 불필요한 욕망을 억제하고 필요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전체 善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 되는 데, 이 필요한 욕망과 불필요한 욕망을 가려내는 일이 이성의 역할이다. 따라서 이성에 의해 욕망이 인도될 때, 더우기 국가나 개인에 있어서 성향 상 보다 나은 쪽과 보다 못한 쪽 중에서 어느 쪽이 지배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때 절제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절제의 arete는 지혜나 용기보다 더 ‘협화음’ 내지 ‘화성(和聲)’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국가에 있어서 용기나 지혜는 그 각각이 한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그 나라를 곧 지혜로운 나라로, 또는 용기 있는 나라로 되게 하지만, 절제는 나라 전역에 걸치는 것으로서, 협화음처럼 전 음역을 통하여 마련되기 때문이다.

(4) 부분의 arete들에 관한 종합

국가 및 영혼의 부분들은 이성적 요소, 기개적 요소, 욕망의 요소로 나뉘어지는데, 이러한 구분은 플라톤에 따르면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본성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부분들에는 각각 지혜, 용기, 절제의 arete가 상응한다. 그런데 부분들에 상응하며 성립된 이들 arete들은 각각 고유한 결점들이 있다.

지혜의 arete는 전체의 목적을 인식하고 행동이 본을 인식함으로써 전체와 관계하기는 하지만, 이 arete는 한 부분에 편중되어 있으며, 또 지배하기만 할 뿐이므로 이성의 독주에 의한 전체 善의 훼손이 가능하다. 용기의 arete 또한 특정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전체 선에 관계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지혜와 마찬가지로 한 부분에 편중된 것이며, 더우기 이것은 이성적 부분의 지도에 의존함으로서 성립되는 arete 이다. 절제의 arete는 지혜나 용기와 달리 국가 및 혼의 전 부분에 걸쳐서 성립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부분과 기개적 부분의 지도에 복종함으로써 성립하는 arete이기 때문에 자립성이 없다.

이와 같은 부분적인 arete들의 각각의 결점들은 그것들이 부분적 내지 일면적 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은 국가 내지 영혼의 전체 善, 즉 전체적인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 플라톤에 있어서는, 있어야만 할 상태에 있는 혼만이 행복하다. 이때 혼이 있어야만 할 상태란 전체 善을 가리키며, 이는 혼의 부분들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혼의 부분들을 조화시키는 것이 다음으로 살펴볼 정의이다.

(5) 정의

우리는 이제까지 국가와 혼의 부분들의 arete를 살펴봄으로써 플라톤이 국가와 영혼의 부분들과 그것들의 arete들을 동일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사정은 정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플라톤에 따르면 국가에 있어서의 정의와 개인에 있어서의 정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적어도 플라톤 자신에 있어서는 국가와 개인의 정의가 동일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의는 좋은 국가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네가지 조건 중의 한 가지이다. 즉 좋은 국가는 지혜와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를 갖추고 있다. 또한 국가의 arete를 위해 정의가 아바지하는 힘은 이 국가에 있어서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절제에 필적한다.

그러나 지혜와 용기, 절제와 국가(또는 영혼)의 각 부분들의 arete인데 반해, 정의는 어떤 부분에 상응하는 arete가 아니다. 정의는 오히려 국가 또는 영혼의 전체에 대응하는 전체의 arete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한 부분의 두드러진 행복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행복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의는 위의 세가지 부분의 arete들 이외에 다른 것을 특별히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각각의 부분들이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게든 실현되면 그것이 곧 정의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정의는 “제 것의 소유와 제 할 일을 행함”{433e}이 실현된 상태(hexis)이다. 각 부분의 실현된 상태란 다름 아니라 부분의 arete들이 성립된 상태이므로, 이 세 부분의 arete들은 정의의 조건이 된다. 즉 정의는 이 부분의 arete들을 포괄하는 총체적 arete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정의는 부분들의 arete들이 실현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정의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덧붙인다. 그것은 힘(dynamics)의 개념이다. 플라톤이 이 힘으로써 의미하는 정의의 역할은 부분들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에 대해 플라톤은 ‘정의는 부분의 행복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행복 속에 있으며, 전체를 행복되게 하기 위하여 각각의 부분들로 하여금 제 할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부분들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에 힘쓴다면 “농부는 이제 농부이지 않을 것이며, 도공 역시 도공이지 않을 것이고, 또 그 밖의 누구도 국가를 이루는 그러한 제 나름의 특성을 지니지 못한다.”{420e-421a} 이와 같이 부분들을 제한하여 저마다의 부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할 일을 행하게 하고 상호간섭 내지 참견을 하지 않게 하는 정의는 부분들의 arete인 지혜, 용기, 절제 이 세가지 모두가 이 국가 안에 생기도록 하는 그런 힘을 주고, 일단 이것들이 이 국가 안에 생기도록 한 후에는 적어도 그것이 이 국가 안에 있는 한은 그것들이 보전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플라톤의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곤란한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부분들을 조화시키는 힘(dynamics)과 이 힘의 결과인 부분이 조화된 상태를 똑같이 정의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의 성격은 “국가와 영혼에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국가와 영혼에 내재하는 정의가 바로 국가와 영혼을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정의가 내재하는 국가 또는 영혼과 정의롭게 되어야 할 국가 또는 혼의 구별을 전제한다. 이러한 구별은 플라톤에 있어서 ‘본(paradeigma)’과 ‘현실’로 나타난다. 즉 앞의 것은 본으로서의 국가 또는 혼이며, 뒤의 것은 실제의 국가 또는 혼이다. 그런데 플라톤으로서의 정의 그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여 온 것은 ‘본’ 때문이었으며, 이 ‘본’은 현실의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에 속하기 때문에 지적 영역에 대한 고유한 사고가 필요하다. 여기서 국가의 부분들의 분석에 근거한 arete 탐구의 한계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국가의 부분들은 지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본에 대해서 완전한 고찰이 불가능하겠기 때문이다. 지적인 영역의 본은 오로지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통해서만 완전히 드러난다.

2. 실체(ousia)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arete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희랍인들이 각 시대마다에서 열망하였던 arete의 개념과 플라톤이 생각한 그것의 개념과 동일성 및 차이성의 대강을 알 수 있었다. 플라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arete론을 계승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판하며, 자기의 arete론을 제시한다. 그것이 국가와 영혼의 구조적 동일성의 관점에서 arete를 탐구하는 것이었고, 그때 국가와 영혼의 부분의 arete들 및 정의의 arete는 전체로서의 국가와 영혼의 善 내지 arete에 기여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부분의 arete들은 추구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국가의 비유를 통해서 영혼의 arete를 탐구하는 것이 “정확성에 있어서 부족한 것”{504b}이라고 자기 비판하며, 이와 같이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아무 것의 척도도 아니기 때문에”{504c} arete의 완벽한 탐구를 준비한다. 즉 플라톤은 국가에서의 arete를 윤곽 그림에 비유하여, 이제까지처럼, “arete들의 윤곽 그림을 바라보아서는 안되고 완벽하게 마무리 하여야 한다.”(504d)

플라톤에 따르면 arete를 완벽하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이 가시적 영역으로부터 지적 영역에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arete를 지적 대상인 idea 내지 eidos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idea내지 eidos는 플라톤적인 존재이다. 즉 플라톤은 실체(ousia)를 idea 내지 eidos라고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idea 내지 eidos라는 말은, 플라톤이 자기 식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부터 희랍사회에서 일상적 의미를 지니고 쓰이던 말이었다. 즉 그것은 형태, 모습, 모양, 외모 등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 예로서 고르기아스는 eidos라는 말을 수사학에 적용했는데, 그때 그것은 단지 특정한 ‘유형의 말’의 나열을 의미할 뿐이었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 말로써 ‘가하학적 모형 혹은 형태를 지칭했다’ 플라톤은 “이와 같이 감각적 대상에 대해 쓰이던 말을 지적 대상에 전용하여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대상, 즉 존재에로의 관심의 전환에서 플라톤적 arete론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즉 플라톤은 이제 소크라테스적인 arete의 윤리적 탐구의 단계를 넘어서서 존재론적 단계로 들어선다. 이를 플라톤은 “정의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들이 논의했던 것들(즉 지혜, 용기, 절제)이 최고의 것들이 아니고, 이것들보다 더 높은 단계의 것이 있다.”{504d}라고 하며, 그 바로 뒤에서 “선의 형상이야말로 가장 높은 단계에 있어서 배울 것이며, 바로 그것에 의해서 올하는 것들도 또한 그 밖에 이용되는 모든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로 된다.”{505a}고 한다. 따라서 善의 형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arete론은 완성된다. 그러나 선의 형상은 형상들 중의 한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arete와 선의 형상과의 관계를 살피기 전에 arete와 형상 일반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arete와 형상은 모두 하나와 많음 중에서 하나와 관계한다. 즉 가시적 영역에는 아름다운 것들, 올바른 것들, 그밖의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지적 영역에는 아름다움 자체, 올바름(정의) 자체 등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484b}들이 각각 하나씩만 존재한다. 즉 플라톤은 arete의 종류는 한 가지이지만 나쁨(kakia)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445c}고 하며, 또 “아름다움은 하나가 있으며, 정의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역시 그러하다.”{479a}고 하며, arete가 하나와 관계함을 밝히고 있다. 이는 형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여러 arete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형상들의 경우에도 그 각각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이지만 행위들 및 물체들과의 결합에 의해, 그리고 상호간의 결합에 의해 어디에나 나타남으로써 그 각각이 많음으로 보인다.”{476a} 따라서 하나와 많음의 관계에서 각각의 arete들과 형상들이 동일하게 하나와 관계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arete와 형상들은 그들의 종류들에 있어서, 각각 “하나인 것으로 취급됨으로써, 그 각각이 존재하는 것이라 칭하여 진다.”{507b}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arete와 idea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것, 즉 지적 대상 내지 존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 지적 대상은 “완전히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완전히 인식된다.”{477a} 또한 이것은 “개별적인 감각적 대상의 관점에서 볼 때, 개별자들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목표”, 즉 ‘본(paradeigma)’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 이론의 의의는 인식이 arete를 위하여 필수적임을 설명하는 것이며, 형상들을 인식하는 목적은 훌륭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제 arete를 형상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이것은 선의 형상이라는 그의 독특한 개념에 의해서 제시된다.

플라톤에 있어서 선은 존재 중의 가장 밝은 부분으로서 모든 존재에 편재한 존재의 본질이다. 즉 모든 존재는 존재성과 더불어 도덕성을 지니며, 이 도덕성의 기원은 arete로부터이다. 즉 플라톤에 있어서의 선의 형상은 arete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에 있어서 선의 형상이 갖는 의미는 이중적󰠏󰠏󰠏󰠏형이상학적인 동시에 도덕적󰠏󰠏󰠏󰠏이다. 이 선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플라톤은 진실로 실재하는 하나, 즉 존재의 관점에서 도덕적 행위를 일관성 있게 고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희랍의 사상사에서 선이란 처음에는 어떠한 도덕적 특질도 포함하지 않았다. 희랍의 일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선은 단지 욕구의 대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가장 가질 만한 것이며, 따라서 이들이 가장 원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선의 관념이 소크라테스에 이르러서는, 혼 속에 도덕적의 표준에 대한 앎(episteme)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플라톤의 선의 관념은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특질을 발전시킨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막연한 형태로 존재하는 도덕적 표준, 즉 어떤 것이 플라톤에 이르러서는 불변적이며 완전한 본으로서의 존재, 즉 형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플라톤은 “선이 지적 영역에 있어서 지성(nous)과 사유되는 것들(ta noemata)에 대해서 갖는 바로 그런 관계를 해(ho hios)가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시각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다.”{508b-c}라고 하면서 선과 해를 비유한다. 여기서 비유되는 관계란 “해가 보이는 것들에 보이는 힘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는 한갓 생성이 아니면서 또한 그것들에 생성과 성장, 그리고 영양을 제공해주듯, 인식되는 것들이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선에 의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존재함(to einai)과 실재성이 부여됨도 그것에 의해서인”{509b} 그러한 관계이다. 즉 선은 “인식(episteme)과 진리(aletheia)의 원인(aitia)”{508b}이다. 그리고 이 선은 최고의 학문인 “변증술(dialektike)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511b}으로서 “인식되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고심끝에 보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일체의 것들에 있어서의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517b-c}이다.

이제 플라톤의 善의 지위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주어지는데, 그 하나는 전체를 통합하는 무제약적 원리라는 것이며, ‘神性’이라는 해석도 있고, “영혼의 인식 및 갈망의 대상”이라 하는 등의 것이 그것이다. 이상의 여러 해석에서 최소한의 공통점은 선이 최고의 원리이며, 원인이라는 것이다. 선의 이같은 지위는 여타의 형상들에 대한 우월성으로 나타난다. 즉 이제 “선은 한갓 실체(ousia)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실체를 또한 넘어서 있다.”{509b} 그러나 이러한 선의 형상의 실체에 대한 초월성 내지 우월성은 완전한 대상인 형상들 사이에서 또 다시 완전성의 정도의 차이를 설정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닥친다. Field는 이 차이를 “실재하는 대상 자체 사이에 성립하는 상이한 차원이라기 보다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의 상이한 차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여타의 형상과 선의 형상 사이에 실제적으로는 완전성의 차이가 없으나, 플라톤 자신의 특정한 의욕이 그런 차이를 낳았음을 시사한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의 과업을 이어받아 인간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려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선의 형상의 여타의 형상에 대한 우월성을 요청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확립된 善은 플라톤에게 있어서도 “모든 영혼이 추구하고, 또 그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 되는 것”{505d-e}이며, 이와 같은 것을 모른다면, 올바른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가치있는 것들인지 알려지지 않은”{506a} 기준이며 본인 것이다. 즉 선의 형상의 우월성의 요청에 의하여, 인간 행위를 포함한 세계 일반에 관한 일원론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Ⅳ. 맺음말

사람으로서의 훌륭함에 관한 고찰은 호메로스(homeros) 이래로 모든 시대마다 계속되어 온 것이었다. 그러기에 희랍인들의 역사는 적어도 그 정신사적 측면에서 볼진대 다름아닌 이 사람의 사람다움에 관한 추구 과정으로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사람됨을 그들은 언제나 사람다움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했다. 참으로 사람의 사람다움이 어떤 것인가는 물론 그 시대에 따라 내용적으로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즉 그 시대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이면 그것은 용기이겠고, 정의를 필요로 하면 정의일 것이고, 기술을 필요로 하면 기술일 것이다.

이러한 arete개념에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의미를 덧붙였으며, 플라톤은 이를 계승하는 한편,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열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윤리학의 절대적 기준을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소피스테스들의 윤리적 상대주의 내지 허무주의적 도전에 대한 응답이었다.

본 논문은 arete를 끊임없이 탐구해온 희랍의 정신사에서도 유독 빛나는, 즉 “훌륭히 사는 것, 인간의 진정한 행복내지 안녕 (eu prattein)의 의미에 대한 원천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자 한 플라톤 철학의 의도가 잘 나타난 그의 󰡔국가󰡕 편을 중심으로 arete개념을 고찰해 보았다.

󰡔국가󰡕편을 통해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들과도 다르고 소크라테스와도 다른 자신의 고유한 arete관을 제시한다. 이는 두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즉 첫째, 국가와 혼과의 비유를 통한 arete의 탐구이며, 둘째, idea의 관점에서의 arete 탐구가 그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와 영혼의 구조는 똑같이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망의 부분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좋은 국가와 영혼에서 발견되어지는 arete는 이들 부분들의 arete는 이들 부분들의 arete들, 즉 지혜, 용기, 절제와 국가 또는 영혼의 부분들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지닌 정의라는 arete, 이 네가지 arete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국가의 비유를 통한 arete 탐구는 불완전한 것이며, 따라서 플라톤의 arete론은 형이상학적 관점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형이상학적인 arete의 표현은 ‘善의 형상’이며, 이를 통해서 플라톤은 세계와 인간 행위를 일관성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그는 세계와 인간(행위)을 선의 일관된 현현으로 본다. 이때 idea론은 그의 고유한 존재론으로서, arete의 개념과 선의 형상 개념의 매개자가 된다.

이상의 작업과정을 통하여 밝혀진 플라톤의 arete개념은 다음과 같다.

1. 󰡔국가󰡕편에서 밝힌 플라톤의 arete는 인간(내지 영혼)의 arete이다.

2. 플라톤 arete는 호메로스의 전통과 소크라테스의 arete의 일정 부분

을 계승하고 있으나, 그들과는 다른, 플라톤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플라톤의 arete의 체계는 도덕과 형이상학이라는 이

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플라톤의 arete 개념은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론인 idea론과 결합함

으로써 선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4. 선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국가󰡕편에서 논리적으로 선재하는 본(para-

deigma)으로서, 이 대화편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걸쳐서 일관되게 선

에 관해서 주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5. 그렇지만 선의 형상 개념은 플라톤의 의욕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즉 요청된 개념이다.

6. 플라톤의 arete개념은 전체의 입장을 한결같이 옹호하고 있다. 그것

은 선의 형상에서 완결되는데, 이 선의 형상이 전체를 총괄하는 기

능은 실체(ousia)를 초월하여 작용한다.

7. 플라톤이 arete 개념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옹호한 전체론적 관점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요청한 과제였다. 즉 플라톤의 작업은 소피

스테스들과의 이론 투쟁의 성격을 띈다.

※ 참고문헌

1. 박종현, 󰡔희랍사상의 이해󰡕, 종로서적, 1982

2. 박종현, 󰡔플라톤󰡕 대학고전총서 2,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3. 최민홍, 󰡔국가론󰡕, 플라톤 전집 1, 상서각, 1973

4.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上󰡕, 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1988

5. G.C.Field, 󰡔플라톤의 철학(The Philosophy of Plato)󰡕, 양문흠 역, 서광사,

1986

6. F.E.Peters, 󰡔Greek Philosophical Terms󰡕, NewYork University Press, 1967

7. Christoper Rowe, 󰡔An Introduction To Greek Ethics󰡕, The Anchor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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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남두, <플라톤의 정의 규정고>, 종로서적-󰡔희랍철학연구󰡕, 1988

9. 노양진,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론의 기본구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83

10. 이정호, <플라톤의 대화편 폴리테이아 Ⅰ의 분석>, {철학논구} 12집, 서울대

학교 철학과, 1984

http://blog.naver.com/mdpsjk/20021559641

플라톤의 국가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1. 제 1권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가서 케팔로스와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노년이 되니 어떻냐고 묻는다.

케팔로스) 노년이 되자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노년기에 겪는 문제들은 노년이라는 게 원인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이 원인이다.

소크라테스) 어르신이 노년을 수월하게 견디는 건 재산 때문이 아닌가?

케팔로스) 부유해도 수월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본격적인 “정의” 논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 어르신이 재산 덕분에 덕본 게 무엇입니까?

케팔로스) 올바름의 실천이다. 재산 덕분에 정직하게 살 수 있었고 남에게 갚을 것을 갚을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남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게 옳지 못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제 정신일 때 맡긴 것을 제 정신이 아닐 때 찾는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 때 폴레마르코스가 끼어들면서 케팔로스가 뒤로 물러난다.

폴레마르코스) (시인 시모니데스를 언급하면서)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적한테도 무엇이든 갚아야하는가?

폴레마르코스) 당연하다. 그러나 적한테 갚는 것은 나쁜 것이다.

즉,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이란 적에게 손해를 주고 친구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소크라테스) 병든 이들과 병든 적들에게 잘되고 잘못되게 하는 데 유능한 이는 의사다.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게 조타수다. 그럼 올바른 이는 무엇에 유능한가?

폴레마르코스) 싸움에 있어서 유능하다.

소크라테스) 그럼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올바른 이가 쓸모없는가?

폴레마르코스) 평화 시에는 ‘계약’에 쓸모가 있다. 또한 금전관계, 즉 금전을 안전하게 사용해야만 할 때 쓸모가 있다.

소크라테스) 돈이 소용없을 때는 올바름이 소용이 없는가? 당신의 말을 따른다면 각각의 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 올바름은 쓸모가 있다. 그렇다면 올바름은 별로 요긴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또한 올바름이 돈을 간수하는 데 능하다면 훔치는 데도 능하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친구와 적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폴레마르코스) 친구와 적이란 선량한 이, 못된 이로 판단된 사람 뿐 아니라 실제로 선량한 이가 친구이며 실제로 못된 이가 적이다.

소크라테스) 어떤 사람에게든 해롭게 하는 게 올바른 사람이 할 짓인가? 말에게 해를 가하면 말은 더 나빠진다. 인간이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덕, arete)과 관련해 더 나빠지게 된다. 올바른 이의 올바른 행동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즉, 결론적으로 누구에게든 해를 입히든 건 어떤 경우에도 올바르지 않다.

이 때 논쟁을 보고 있던 트라마시코스가 끼어든다.

트라마시코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트라마시코스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에 대해 반발하면서 논쟁에 개입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계속 남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 무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마시코스)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다! 민주정, 참주정, 귀족정 모두 강자가 법을 제정하고 이를 공통적으로 적용한다!

소크라테스)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 역시 올바른가?

트라마시코스) 그렇다.

소크라테스) 그들도 실수할 수 있지 않은가? 편익이 못되는 것도 법으로 정할 수 있는데 그럼 편익이 못되는 것도 이행해야하는가?

트라마시코스) 실수하는 자는 강한 자가 아니다. 실수하는 의사가 의사인가?

소크라테스) 실수 안하는 의사는(뛰어난 의사) 돈을 버는 자가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이다. 선장은 선원들의 통솔자이다. 즉 선장이 선장인건 그의 기술, 다스림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 선원에게도 편익이 있다. 기술이란 편익을 제공하는 것이며 의술은 의술의 편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편익을 생각한다. 기술은 그 자체의 편익이 아니라 관여하는 대상의 편익을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어떤 전문적 지식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이 아니라 더 약한 자,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고 지시한다.

트라마시코스가 다시 반론을 펼친다.

트라마시코스) 순진한 생각이다. 약자에게도 이익이 될지 몰라도 강자가 더 많이 가진다. 계약을 할 때 올바른 이가 올바르지 못한 자보다 덜 차지한다. 올바르지 못함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이처럼 올바르지 못한 일이 대규모로 일어나며 그것은 올바름보다 더 강하고 자유롭고 전횡적이다.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며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편익이다. 완벽하게 올바르지 못함이 완벽한 올바름보다 더 이익이 된다. 올바름이란 아주 고상한 순진성이며 올바르지 못함은 훌륭한 사람이고 나라, 부족을 자기 지배하에 둘 수 있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반박을 시작한다.

일단 그는 트라마시코스의 올바른 이와 올바르지 못한 이에 대한 정의를 가정한다.

소크라테스) 올바른 이는 올바른 이를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 않으나 올바르지 못한 이에 대해서는 그러고 싶어 한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올바른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이는 올바른 이를 능가하려 하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이를 능가하려 하며 올바르지 못한 이는 올바른 이, 올바르지 못한 이를 둘 다 능가하려 한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이는 분별 있고 훌륭한 이고 올바른 이는 분별도 없고 훌륭하지도 않다.

그런데, 우리는 시가에 능한 이를 분별력 있고 훌륭하다 하며 시가를 모르는 이를 분별력 없고 변변찮다고 말한다. 그럼 시가에 능한 이는 시가에 능한 이를 능가하고자 하며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그럼 시가에 능하지 못한 이에 대해서는 능가하고자 하며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다. 전문적 지식이 있는자는 또 다른 전문가를 능가하는 선택을 하는가 아니면 동일한 일처리를 두고 같은 선택을 하는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전문 지식이 없는 자는 전문가와 비전문가 둘 다 능가하려 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럼 전문지식이 있는 자, 즉 지혜로운 자는 자기와 같은 이에 대해서는 능가하지 않고자 하나 다른 이에 대해서는 능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못되고 무지한 자는 자기와 같은 이, 반대되는 이를 둘 다 능가하고자 한다! 그럼 전문지식이 있는 자, 지혜로운 자가 올바른 자이며 못되고 무지한 자가 올바르지 못한 자가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이어 다시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부당하게 다른 나라들을 예속화, 실제 속국화했는가?

트라마시코스) 그렇다. 최선의 나라가 가장 완벽하게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 다른 나라보다 강하게 될 나라가 올바름 없이도 그러한 힘을 지닐 수 있게 되는가?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한 일을 공모할 때 서로에 대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 올바르지 못함은 서로 간의 대립, 증오를 낳으며 서로 일을 못하게 된다. 올바름은 합심, 우애를 낳는다

반론을 마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 신은 올바르다. 올바르지 못한 인간은 신의 적이 된다. 이제 올바른 이들이 올바르지 못한 이들보다 더 훌륭하게 살며 더 행복한지 검토해보자.

소크라테스) 기능ergon이란 그것이야만 할 수 있는,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가 있다. 눈의 기능이 있으면, 눈의 훌륭한 상태도 있다. 나쁜 상태(눈이 먼 상태)로 제 기능을 훌륭히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혼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는 것이다. 그리고 혼에도 훌륭한 상태가 있다.

올바른 혼은 훌륭하게 살 것이며 복을 받고 행복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이는 잘 못 살게 되고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 제2권

이 때 글라우콘이 끼어든다.

글라우콘)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 자체도 좋고 그 결과도 좋은 것이 있다. 이 중 어느 게 진짜 올바른 것인가?

소크라테스) 그 자체 뿐 아니라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아하기 마련인 것이다.

글라우콘) 많은 이들은 올바름을 보수나 평판 때문에 실천한다. 그 자체만이라면 기피해야 될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마지못해서이다. 올바르지 못한 짓이 좋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하게 되는 두려움이 올바르지 못하는 일을 하는 좋음보다 월등히 커서, 즉 서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다가 법률, 계약을 만들고 이를 합법적이고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다. 올바름을 실천하는 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를 수 있는 무능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예로 든다. 모두가 자유롭다면 욕망은 똑같이 탐욕스러운 방향으로 갈 것인데 이를 법으로 강제해서 정의 쪽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능력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능히 한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안하는 것이다.

글라우콘) 올바른 이와 올바르지 못한 이를 비교해보자. 완벽하게 올바른 이와 완벽하게 올바르지 못한 이를 비교해보자. 이 때 최상의 올바르지 못함은 올바르게 보이는 척 하는 것이다. 그럼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올바른 자는 탄압받고 중요한 건 올바르게 보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올바른 자로 보임으로서 그 자는 통치를 할 수 있게 되고 사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든다.

아데이만토스)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는 올바름 그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명성을 찬양한다. 시인들은 절제, 올바름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힘들고 수고스러우며, 무절제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은 달콤하고 얻기 쉬운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대개 올바르지 못한 것이 더 이득이 된다. 신들이 내리는 운명조차도!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도 신들이 용서해준다! 그리고 또한 올바른 이는 올바르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이를 탓하지 않는다.

올바름의 예찬자들은 올바르지 못함을 비난하거나, 올바름에 대한 찬양을 명예, 평판이 아닌 그 자체로만 한 적이 없다. 올바름을 옹호하려면 올바르지 못함보다 낫다는 주장만 하지 말고 각각이 그걸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나쁘고 한 쪽은 좋다고 하는지, 올바름 그 자체를 찬양해 달라!

소크라테스) 시력이 나쁜 사람에게 작은 글씨를 멀리서 읽으라 한다면 그들은 똑같이 더 크게 써 있는 글씨를 찾은 다음 작은 글씨를 보는 게 좋다. 올바름에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다. 크게 보자! 나라에 있어서 올바름을 먼저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라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라가 생기는 이유는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주거나 나누는 것은 그게 자기를 위해 더 좋다고 생각해서, 필요해서이다. 생존을 위한 음식물과 주거, 의복 및 그와 같은 유의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인데, 이걸 마련하기 위해서는 4~5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때 개개인은 자신의 일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을 제공해야하는가?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네 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나라가 커지게 되고, 한 나라 내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수출을 하려면 더 많은 사람. 무역상, 해상운용 전문가 등이 필요하다. 나라 자체에서 시장을 통해 교환하기 위해 화폐가 생겨난다. 농부가 직접 팔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에 소매상이 생겨나고 부농이 생겨나면서 빈농이 임금노동자가 된다. 그럼 이 상황에서 이 나라 안에서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있는가? 그건 바로 상호간의 필요이다.

이처럼 서로가 협력해서 풍요로운 나라(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반대되는 나라는 물질이 필요를 넘어선 염증 상태의 나라이다. 예술이 판치고 장신구가 지나치게 발달한 나라다. 이 나라는 물질을 위해서 규모가 더 커져야한다. 그를 위해 남의 땅에 손이 가게 되고 결국 전쟁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런 나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

그런데 전쟁도 결국 기술적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이들의 적성과 능력이 수호자들에게 적합한지 알아내야한다. 다양한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친근한 이에게는 온순하고 적에게는 거친 것이다. 즉 대립되는 이들 둘을 함께 갖추고 있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다.

개의 경우 모르는 이에게는 해를 안 입어도 적대적이지만 아는 이에게는 좋은 것을 받지 않아도 온순하다. 즉 친한 것과 낯선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느냐 마느냐의 차이이고 아느냐 마느냐는 배움과 관계된다. 아는 사람에게 온순한 이는 지혜를 사랑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이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을 어떻게 교육해내는가?

소크라테스는 이제부터 교육의 올바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지점에서 시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가란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의 시가는 허구부터 가르치고 있다. 아무 시가나 읽게 할 순 없다. 고로 설화 작가들을 감독하고 그들이 찾는 것이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거절해야한다. 그럼 안 좋은 설화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큰 규모의 설화들이 안 좋은 것에 해당한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그것들이다. 그들은 신, 영웅을 사실과 다르게 그리고 있다. 크로노스가 제우스에게 수난을 당하는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줄 것이 못된다. 극단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다. 그리고 또한 신들끼리 음모를 꾸미고 싸움질을 하는데, 시가가 훌륭함에 관해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을 듣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적절하지 못한 내용이다.

아데이만토스) 그럼 아이들이 신화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하나?

소크라테스) 우리는 시인이 아니라 국가의 수립자들이다. 그런 것을 허용하면 안 된다. 규범을 정해 놓아야한다. 신을 신으로만 언급해야한다. 신은 선하다! 선한 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며 해치지 않고 나쁜 것도 아니며 나쁜 것의 원인도 될 수 없다. 신은 선하며 고로 좋은 것들의 원인이고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아야한다.

소크라테스) 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를 속여서 그런 걸로 여기도록 하는가, 아니면 본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어떤 것이 본 모습에서 벗어난다면 이는 자신에 의해서 거나 다른 것에 의해서이다. 근데 가장 좋은 것이 다른 것에 의해서 변화할 순 없다. 바뀐다면 스스로 바뀌어야하는데, 절대적인 신이 현재의 자기보다 못한 걸로 변화할 리는 없다. 근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쁘게 바꾸겠는가? 신은 그냥 자신의 모습대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들이 온갖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왜 ‘선한 신’이 환상을 보임으로서 인간들을 속이고자 하는가?

진짜 거짓은 모든 신과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인데, 왜냐면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는 것을 속고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을 가지고 다니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고로 속은 자의 혼에 있어서 무지한 상태가 진짜 거짓이다. 그럼 말을 통한 거짓은? 어떤 때에 어떤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어서 미움을 사지 않을 만하겠는가? 예컨대 적에게나 친구의 나쁜 것을 막기 위해서라든가. 그러면 이들 중 어떤 점과 관련해서 거짓이 신에게 유익할 수 있는가? 신이 거짓말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고로 신성과 거룩한 것은 모든 면에서 거짓됨이 없다.

3. 제3권

그렇기에 들어야할 시가와 듣지 말아야할 시가를 구분해야한다. 용감한 전사를 위해 저승에 대한 험한 이야기도 삼가야하고 독립적이며 자족적이며 고통도 이겨내는 강한 자는 통곡하지 않기에 통곡에 관한 내용도 없애야한다. 강한 변화를 일으키는 웃음을 좋아하는 것도 안 되고 이런 묘사도 금지해야한다. 정직을 귀히 여겨야하고 거짓을 허용해선 안 된다. 통치자들의 나라 이익을 위한 거짓은 허용하지만 사인이 통치자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통치자에게 순종하고 쾌락을 다스리는 절제가 필요한데 이와 반대되는 인간, 신에 관한 내용의 시는 금지해야한다. 신, 신의 아들이나 영웅이 한 나쁜 짓에 대해 노래해서는 안 된다. 올바르지 못한 자가 행복하고 올바른 자가 불행한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합의는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 그 본성상 어떻게 이득이 되는지 알아내게 되는 그 때야 이루어진다.)

여기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제 ‘이야기 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메르스가 시를 노래할 때 누군가를 모방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희/비극은 전적으로 모방만 하며 티티람보스(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헌창가) 같은 것은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방과 자기 자신의 이야기 둘 다를 하는 것이 서사시이다. 셋 중에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한 사람이 하나를 모방 하는 게 더 완벽할 수 있다. (기능주의적 관점). 희극, 비극은 같은 이가 음송인/배우가 된다! 수호자는 다른 이를 모방하면 안 되고 수호의 업무와 관련된 것만, 모방해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을(여성, 노래가 아님) 모방해야한다. 훌륭한 이들이라면 다른 것(훌륭하지 않은 것)을 모방하는 데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되고 해서도 안 된다.

시, 노래에서 훌륭한 이는 훌륭한 배역만 모방하려 하고 나머지를 모방하는 데에는 소극적이다. 훌륭하지 않은 이는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하고 이야기보다 모방을 더 많이 한다. 고로 훌륭한 이의 이야기 투는 변화들이 작으며, 한 가지 선법만을 사용 하며, 비슷한 리듬이다. 즐거운 건 혼합형이지만 훌륭한 이의 이야기 투만이 우리 정체에 어울린다. 우리나라에선 각자가 각자의 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선법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비탄조와 한탄조의 선법을 써선 안 된다. 또한 유약해 보이는 선법, 주연에 알맞은 선법도 안 된다. 용감한 어조의, 참을성 있는 어조의 억양을 모방하는 절제 있는 선법을 사용한다. 훌륭한 사람의 어조를 지닌 선법만 남겨 두어야 한다! 리듬도 마찬가지다.

시인 뿐 아니라 나쁜 것을 제작하지 못하도록 다른 장인들도 감시해야한다. 그리고 이렇게 교육해야한다. 시가 교육이 곧 시민교육이다.

이어서 체육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훌륭한 혼은 몸을 훌륭하게 한다. 수호자 영웅 전사는 술에 취하는 것을 삼가고 간단한 식사를 해야 한다. 시가의 단순성은 혼에 절제를 주고 단순한 체육은 몸에 건강을 준다. 지나친 보살핌은 필요 없다.

아데이만토스) 그럼 훌륭한 의사, 훌륭한 재판관은 필요 없는가? 많은 이들을 다양하게 돌보아 본 적이 있는 이가 훌륭한 의사가 되지 않는가?

소크라테스) 훌륭한 의사, 판관은 훌륭한 혼을 가진 이다. 그리고 이런 원칙을 입법화해야한다. 나쁜 놈들은 죽게 내버려 둬야 된다!

그리고 교육이란 체육과 시가 모두 이루어져야한다. 하나가 커지면 과잉이 된다.

나라에서 그 정체가 보존되려면 감독자가 필요하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지 감시해야 한다. 그렇기에 통치에 훌륭한 이들을 뽑아야한다. 훌륭한 이들이란 이 나라에 훌륭한 일이면 온 열의를 다하려 들되 아니면 절대 안하는 이들이다. 어릴 적부터 이런 싹을 가진 이들을 보고 시험을 해야 한다. 시련을 가하고 이들을 홀리는 시험을 가해 통과한 자를 수호자로!

그리고 나머지 시민들이 이를 납득하도록 거짓말을 해야 한다. 통치자에겐 황금이 섞여 있다! 또한 통치자가 그들 임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사후 조치가 필요한데, 사유자산을 허용하지 않고 군인들처럼 공동생활을 해야 하며 필요한 만큼만 돈을 가지고 금은 만지면 안 된다.

4. 제4권

아데이만토스) 그렇게 하면 수호자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소크라테스) 어느 한 집단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방안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장인들을 타락시키는 부와 빈곤의 문제로 넘어간다. 부는 게을러짐을 유발하고 빈곤은 자기 기술과 관련된 도구 등을 마련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로 수호자들이 감시해야할 것들이 부와 빈곤이다.

아데이만토스) 부유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와 어떻게 싸우는가?

소크라테스) 전사와 부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다른 나라가 부자와 동맹을 안 맺는다.

아데이만토스) 다른 나라들의 재화가 한 나라로 몰려들면 가난한 나라에 위험하다.

소크라테스) 나라 간의 관계는 복잡하기에 그렇게 몰려들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강한 나라에 동맹군이 더 많이 몰린다.

소크라테스) 통치자에게 가장 훌륭한 기준은 적당한 크기의 나라다. 이를 위해서 한 가지 기능에 한 명이 배치되어 한 나라를 구성하면 되고. 아까 말한 교육과 양육만 지키면 된다. 이는 입법화하지 않아도 올바른 교육을 하면 알아서 잘 이루어진다. 예컨대 시장과 관련되어 입법화를 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사람들이 알아서 용이하게 할 것이다.

아데이만토스) 그럼 입법이 필요한 영역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신전 건립과 제물. 신, 영웅들에 대한 섬김, 죽은 자에 대한 예우 등은 입법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올바름을 찾아보자!

나라가 올바르게 수립되었다면 이것은 완벽하게 훌륭한 나라. 이 나라에는 지혜, 용기, 절제, 올바름이 있다. 이 4가지를 찾아보자.

1) 지혜: 분별 있음. 앎에 의해서 많은 앎, 지식이 존재.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로 불리는 이 지식은 통치자에게 있다. 이들은 최소집단으로 지혜라 불리는 지식에 어울리며 지혜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 지 알아낸다.

2) 용기: 용기란 소신의 보전이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소신의 보존이다. 이는 교육에 의해 생긴 판단이며 시민적 용기(수호자 계층)

3) 절제: 앞의 것보다 협화음, 화성과 유사. 질서이며 쾌락과 욕망의 억제다. “저 자신을 이긴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으로 내 안의 한결 나은 것이 못난 것을 이긴 경우다. 용기, 지혜는 한 부분에만 있어도 되지만 절제는 나라 전체에 있어야한다. 교육받자 지성, 바른 판단을 갖춘 헤아림에 의해 인도되어 이 나라에 있다!

4) 올바름: 이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한 때부터 준수해야한다고 했던 것. 각자는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한다. 모든 판결의 기준은 올바름이어야한다. 각자가 남의 것을 취하지도 제 것을 빼앗기지도 않아야한다.

이 3부류의 지위가 바뀌면 안 된다.

이제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로 돌아가 보자. 개인에게도 이 3가지 혼의 특성이 있다. 그럼 이 세 가지 행위를 혼의 동일한 부분으로 하는 건가? 아니면 세 가지 부분이 있어 다른 부분으로 다른 행위를 하는가? 그런데,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이 있어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3가지가 어떻게 구분되는 지 알아보자. 모든 욕구에는 대상이 있으며 지식에도 대상이 있다. 예컨대 목마름(대상)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자. 그 욕구는 목마름만 추구한다.(욕구적 부분) 그런데 목말라하는데 안 마시는 사람은(반대로 끌어당기는 무언가)? 이성의 작동이다. 그런데 격정의 부분이 이성과 결합할 수도 욕구와 결합할 수도 있다. 격정적으로 욕구를 자제하는 경우, 격정에 못 이겨 욕구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 3부류가 저마다 제 할 일을 하는 게 올바른 사람이다. 헤아리는 부분과 격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시가와 체육의 혼화로 가능하다.

즉, 이성(지혜), 욕구, 기개가 조화를 이뤄야하는데, 이성이 지배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에 욕구, 기개가 반목하지 않는 것이 절제다. 이성, 욕구, 기개가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름이고 이 반대가 올바르지 못함이다. 그리고 올바름의 상태가 혼의 훌륭함이며 올바르지 못함이 혼의 질병 상태다. 올바르게 사는 이들은 혼이 훌륭한 이들로, 혼이 타락한들 몸의 본바탕이 무너진들 다른 부나 권력이 무슨 소용인가?

이제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정체와 혼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5. 제5권

소크라테스가 나쁜 정체와 혼에 대해 말하려는 데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처자 공유와 그것에 따른 혼인, 출산 문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 같은 교육, 양육을 받으면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똑같은(시가, 체육) 교육을 제공해야한다. 다른 성향은 다른 일을 종사해야한다면서 성향이 다른 남녀가 같은 일을 한다? 같은 성향, 다른 성향은 모든 면에서 고려한 게 아니라 일들 자체에 적용되는 것에만 국한된다. 여자 의사나 남자 의사나 같은 혼. 의사와 목사는 다른 혼. 그럼 나라의 조직과 관련되는 것 중에서 무슨 기술, 일과 관련해서 여자와 남자의 성향이 같지 않고 다른가? 나라 돌보는 일은 양성이 비슷하게. 여자도 성향에 따라 관여한다. 그런데 남자에겐 배정하면서 여자에게 안 할 수 있는가? 지혜, 용기, 수호자 능력을 갖춘 여자는 남자처럼 수호자가 되고 이 남자와 같이 살아야하며 이는 자연에 어긋나지 않고 이 자연에 따라 nomos를 구성해야한다. 똑같이 시가, 체육 교육을 해야 한다. 이에 뒤 따르는 노모스는 아내를 공유하고(어떤 부모 자식도 서로를 모름) 최선의 남자는 최선의 여자와 성관계를 가져 최선의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호자 집단의 분쟁을 막기 위해 통치자 자신 밖에 이 사실을 몰라야한다. 모르게 성관계를 갖게 한 다음 아이들을 따로 양육하고 이를 통해 통치자들 간에는 서로 남이 아니며 모두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이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중요. 서로 간의 명칭과 행동(아버지에 맞는 대우)도 노모스로 정한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잘하거나 잘못했을 때 내 것이 잘되고 있다, 내 것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즐거움, 고통도 공유되며 이것이 최대선. 나라의 분열을 막고 모두가 공감상태에 있다. 서로가 고소하지 않으며 재물, 친족 소유로 인한 분쟁과 폭력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한 일에 관여할 수 있다 했는데 통치 말고 다른 일에도 남녀가 공동 관여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전쟁에 함께 출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도 데려 가야한다. 아이에게 교육이 되며 어른이 더 열심히 싸우고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아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게 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는 장인, 농부로 강등시키고 용감한 자를 대접해야한다. 대접이란 예컨대 혼인의 기회를 더 주어 최선의 자식이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적들은 노예로 만들어야하는가? 관대하게, 관습으로! 시신을 건들지 마라. 헬라스 땅에서 방화나 유린은 허용되면 안 된다. 이것도 노모스이다. 헬라스 인끼리의 전쟁은 내분이고 병들어 친구와 싸우는 것이다. 이런 노모스를 통해 헬라스 인들이 헬라스를 자신의 나라로 생각하고 스스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처자공유 등에 대한 유용성은 알았으니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꼭 실현할 수 없어도 이를 증명하지 못해도 만족할 만하다. 최선의 것으로 올바른 정체로 가는 법은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 데 합쳐지는 것이다. 일단 철학에 대한 정의부터 하자.

철학자는 학문적 가림 없이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를 말한다. 모든 배움을 맛보려하고 늘 부족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할 경우 범위가 너무 넓다. 지식을 욕구하는 자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그 사람들은 닮은 자들로 진리를 구경하기 좋은 자들에 불과하다. 빛깔, 소리 등 닮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듣기 좋아하고 구경하기 좋아하는 자들에 불과하며 이들은 아직 꿈꾸는 상태에 있다.(의견:doxa) 이와 반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욕구하는 자들이 철학자들이고 이들은 깬 상태에 있다.

6. 제6권

따라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려야한다. 이들은 온 존재를 사랑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자질은 온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는 배움을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며 진실함, 진리를 좋아함, 절제 있음, 저속함이 없음 등이다. 이들은 또한 좋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억력이 좋다. 고로 이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한다.

아데이만토스) 철학을 젊었을 때 건드려보는 사람의 대다수가 아주 이상하게 되거나 나라에 쓸모없는 이들이 된다. 사람들이 이들을 싫어한다.

소크라테스) 조타수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조타수냐 아니냐는 그의 기술에 달려있지 남들이 그를 원하는지 아닌지 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서 훌륭한 사람이 쓸모없는 이유를 언급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건 철학의 탓이 아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이는 실재에 이르려하고 각각인 것 자체의 본성을 포착하기 전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이 없으며 절제가 있다. 이 성향은 소수만 타고 나는데, 이 성향이 전락할 수 있다. 이는 최선의 성향이 그것에 맞지 않는 양육 상태에 있을 경우이다. 이 때 평범한 성향보다 못할 수 있다!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타락한 젊은이들. 말로써 설득 못할 경우 시민권 박탈하고 사형에 처하니 누구도 맞서려 하지 않는다. 소피스테스들은 다중의 신념들을 가르치며 이를 sophia라 한다. 다중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는 것을 지혜로 믿는다. 다중이 이데아를 믿고 따라 지혜를 사랑하게 되는 게 가능한가? 고로 철학을 하는 이가 이들에게 비난받는 건 당연하다. 소피스테스들은 재능 있는 자를 이용하고 이들에 아첨하고 따라서 재능 있는 자들은 자만해지고 충고를 듣지 못한다. 철학으로 끌릴까봐 음모와 송사를 일으킨다.

아데이만토스) 그럼 철학에 맞는 정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없다!

나라가 철학을 어떤 식으로 대하면 파멸하지 않을까?

유년기를 갓 벗어난 이들이(가장 힘든 시기에) 철학에 손대어 그만둔다. 고로 청년, 아이들일 때 청소년기 교육, 철학을 받아들이고 자라고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시기 육신을 잘 보살피고, 나이 들면 혼을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은퇴하면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철학자가 권력을 잡아야한다. 그러나 다중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고로 다중을 잘 설득해야한다. 철학자가 권력을 잡으면 인간들의 성격을 깨끗하게 먼저하고(스스로) 정체의 형태를 윤곽으로 그린다. 그리고 신을 닮은 이를 인간들 속에 생기도록 한다. (법률 제정) 이러면 다중도 이해할 것이다.

다음주제로 넘어간다. 우리에게 이 정체(철인왕 정체)의 보존자들이 생기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무슨 교과들과 무슨 활동들, 어떤 연령에 따라 아는 자가 그 각각에 관여하는가?

무슨 교육이 필요한가? 가장 큰 배움은 좋음의 이데아다. 이것 덕분에 올바른 것, 모든 나머지 것들도 유용, 유익한 것. 그걸 알아야 이 정체는 완벽해진다. 이데아란 실재하는 것으로 지성에 의해 알려지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보임의 시작은 빛에 의해. 이 때 태양이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제공한다! 태양의 비유를 들어보자. 진리, 실재가 사물을 비추고 이를 고찰한다. 지성에 의해 인식한다. 어둠의 상태에 있는 것이 doxa. 인식되는 것에 진리를 제공하고 힘을 주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다. 인식되는 것들이 인식됨이 가능한 것도 좋음에 의해서이고 존재, 본질을 갖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다. 좋음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태양과의 유사성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한다. 그것이 선분의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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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 의해 파악(> 수리적 추론) 눈에 보이는 것

7. 제7권

교육 및 교육 부족에 관한 우리의 성향에 대해 알아보자.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비유로 이를 설명한다.

사지가 묶여있고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만 본다. 이들은 대화하면서 벽면에 보이는 걸 실재라고 지칭한다. 누군가가 풀려나 다른 걸 본다. 그러나 높이 있는 걸 보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 햇빛이 괴롭다, 처음엔.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 태양을 본다. 교육을 못 받은 자는 인생의 목표가 없으며 끝까지 교육받느라 소일하도록 허락받은 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축복받은 것으로 생각 된다.

훌륭한 성향을 지닌 자가 오르막을 올라 참된 것을 보게 되면 이들이 허용 받은 뒤 죄수들에게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라 전체를 위해서이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기게 되며 어떻게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할 것인가?

필요한 교과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기술, 모든 사고와 지식이 이용하는 공통적인 것. 수와 계산! 크고 작음의 구분을 통해 존재를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기하학!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앎이다. 천문학! 창조자에 의해 구성된 하늘. 입체기하학, 협화음(수 찾기). 또한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은 변증술. 인식(지식)과 추론적 사고는 지성에 의한 이해이며 믿음과 상상은 doxa.

이 교과들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배정하는가? 훌륭한 성향(고귀, 강건, 기억력 등)을 가진 자에게. 늙으면 안 된다. 예비교육은 아이들일 때부터 시켜야 한다. 강제면 안 되고 놀이처럼 해야 한다. 필수적 체육에서 벗어날 때 아이들을 선발해서 실재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 봄을 갖는 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논변을 맛보지 않도록 한다. 놀이처럼 남용할 수 있다. 남에게 논박당하는 경우 회의주의에 빠진다. 그리고 50세가 되었을 때 통치자로 등극한다.

8. 제8권

소크라테스는 국가 정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체에는 4가지가 있다. 명예지배정체(라코니케),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가 그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들의 성격도 이 네 가지로 나뉜다.

1. 명예욕이 지배하는 정체. 선대에는 훌륭한 인간(최선자 정체)들이 통치했으나 아비들의 권력을 승계하면서 이상한 애들이 통치자가 된다. 무사, 시가에는 무관심하고 체육에만 관심이 있다. 경쟁과 적대심이 늘어나고 내분이 발생한다. 아레테와 물질 간의 대립에서 중간선에서 합의하게 된다. 최선자와 과두의 중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합되었다. 이런 인간은 명예 지상적 청년.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의 통치 체제이다.

2. 과두정체: 부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명예정치가 과두정치로 변화한다. 한계점은 다음과 같다. 1) 돈 많은 것과 뛰어난 통치기술은 다르다. 2) 부자와 빈자가 서로 음모를 꾸민다. 3) 어떤 전쟁도 못한다. 4) 돈을 기부하지 않는다. 거지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되어. 못된 인간들이 많아진다. 명예 지상적 청년이 돈벌이에 미쳐 과두 정체적 인간으로 변한다. 이런 이들은 남들을 힘으로 제압한다.

3. 민주정체: 과두정체에서는 많은 이들이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무절제함이 생겨난다. 빈자들이 혁명을 열망하고 부자들을 죽이고 추방한다. 그들은 나머지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시민권, 관직을 배정하고 추첨한다. 민주 정체적 인간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며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무정부 상태의 다채로운 정체. 평등하다! 민주 정체적 사람이란 무엇인가? 교육도 못 받은 자가 온갖 종류의 쾌락의 제공을 맛보게 된다. 평등한 권리란 맘대로 행동하는 자이다.

4. 참주정체 : 민주정체가 참주정체가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부(과두) -> 욕망 -> 민주(자유) -> 참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정체에서 생겨난다. 이는 아무 질서도 없는 자유이다. 이 정체 하에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굴종을 요구해도 참지 못한다. 지나친 자유는 예속으로 이어진다. 대중은 앞장서는 부류로 민주정을 조정하고, 알뜰한 이는 가장 부유한 자이며 민중은 정치에 관여안하고 재산도 없고 꿀이 없으면 집회에 오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대중이 알뜰한 이들 것을 빼앗아 민중에게 준다. 대부분은 자기네가 가지고. 알뜰한 이들이 음모를 꾸민다고 고발한다. 이 때 참주는 군중의 관심을 끄는 정책을 제시한다. 참주는 자산을 가진 자들에 대해 분쟁을 일으킨다. 이들은 전쟁을 유발하여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고 세금으로 자기한테 신경을 못 쓰게 한다. 비판자들은 제거당하고 쓸모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게 되는 ‘훌륭한 숙청’이 진행된다. 이들은 아름답고 크며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을 고용해 참주정을 유지한다. 재원은 참주정을 낳은 민중에게서 온다.

9. 제9권

참주정체를 닮은 사람은 누구인가? 무법한 욕구를 지닌 자이며, 이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꿈꾸는 동안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민주적 인간은 돈벌이 욕구만 있고 다른 욕구를 멸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다른 욕구를 배운다. 절제가 있다. 이 사람의 아들이 나이를 먹게 자라게 되면서 제약이 없는 유혹들에 부딪친다. 술꾼에 욕정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이 되어 쾌락이 넘쳐난다.(doxa가 지배하여 꿈에서 깨어나도 마찬가지 짓을 한다.) 그리하여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다. 참주는 가장 극단적인 인간이며 최대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비참한 자(자유도 우정도 없고 주인 노릇을 못하고 노예 노릇만 한다.)이다. 이와 반대로 최선자의 정체는 가장 행복한 나라이다. 참주적 인간은 혼이 노예 상태에 있는데,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가? 가난이 필연적이다. 두려움이 가득하다. 제일 비참한 자는 참주 정체적 인간이 실제 참주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라를 세 부류로 나누고 혼도 세 부분, 즐거움도 3부분으로 나눈다. 배우는 부분은 진리이며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이다. 격하게 되는 부분은 지배, 승리, 명성을 지향하고 욕구적인 부분은 돈 같은 利를 추구한다. 배우는 이가 가장 훌륭한 판단을 한다. 이는 이들만이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수단 역시 logos를 이용하는 것으로 훌륭하다.

결국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좋다. 분별 있는 자의 즐거움 말고는 온전한 것이 없고 나머지는 환영적인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짓은 안 좋은 혼을 지니게 된다. 이득의 문제가 아니다.

10. 제10권

소크라테스는 다시 시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처음으로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를 보고 물질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만들 순 있으나 있는 것 자체를 만들 순 없다.

3가지의 침상이 있다. 1. 본질, 침상의 이데아(본질 창조자인 신에 의해 만들어진) 2. 목수가 만든 침상, 3. 침상을 그린 화가(모방자.) 비극 작가도 마찬가지는 모방자에 불과하다. 보이는 것을 모방한 자는 훌륭한 시인인가? 실재에서 3단계나 떨어져 있다. 실재로 이롭게 하지 못하는 자에 불과하다. 이들은 마력을 가지고 있다.(선법, 운율, 리듬 등)

사용자는 아는 자이며 사용자가 제작자가 함께 있으면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고 그것의 훌륭함을 알게 되나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는 것에 대한 아레테와 나쁨을 알지 못한다.

또한, 훌륭한 이들은 슬픔을 견디어 낸다. 그런데 전혀 괴로워하지 않는가 아니면 괴로움에 대해 절도를 지키는가? 괴로움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누군가 지켜볼 때 더 잘할 수 있다. 괴로움에 저항하도록 하는 것은 이성, 법이고 그 쪽으로 이끄는 건 감정. 이성, 법은 자기동일성의 유지이며 이게 더 어렵다. 반면에 화내기는 다채로운 성격을 띠며 모방이 쉽다. 고로 시 중에서 신들에 대한 찬가, 훌륭한 사람에 대한 찬양만이 받아 들여져야한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철학과 시의 불화와 영혼 불멸설에 대해 말한다.

파멸하고 몰락하는 건 나쁜 것이며 보존하고 이롭게 해주는 것은 좋은 것이다. 혼의 나쁜 점이 혼 그 자체를 파멸시키는가? 그것은 육신의 탓이다. 고로 육체가 파멸된다고 혼이 파멸되진 않는다. 고로 혼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올바름이란 혼의 문제이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좋다! 신들의 사랑을 얻는다.

http://blog.aladin.co.kr/jobonzwa/5294718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 / 2011년 10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우다이모니아) 폴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에 대해 대답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그의 원리이다. 바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1094a|1|)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목적이란 기능을 의미한다. 의사의 기능은 병을 고치는 것이며. 의사의 행위는 병을 고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기능’을 잘 수행할수록 ‘탁월성’이 있는 의사라 불리며, ‘덕(아레테)이 있다’고 불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목적과 기능에 걸맞은 선택과 행위를 할 때 그는 ‘좋음’을 추구하고 따른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목적) 어떤 처방을(행위, 선택) 한다면, 그는 좋음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존재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행위와 선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매우 다양한 좋음들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이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잘 삶/행복)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최선의 좋음인 이유는 이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 모든 좋음들이 좋음이게끔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좋음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다. 예컨대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명예를 얻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돈을 벌려고 하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더 이상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질문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1097a|4|)

다른 말로 하면 에우다이모니아란 ‘자족적’인 것이다. 자족성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에우다이모니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이미 앞에서 다 언급하긴 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 또한 행위의 목적이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일반화해보자. 다양한 좋음들을 뛰어넘는 최상의 좋음이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능‘들’을 뛰어넘는 어떤 기능도 있지 않을까? 바로 ‘인간의’ 기능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란 바로 ‘이성’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이다. 그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는 의미가 첫째,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둘째이다.

즉 “인간 고유의 기능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1098a|14|)을 뜻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능을 잘 수행할 때 탁월성이 있다고 말한다. 기타를 치는 연주자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기타를 잘 칠수록 그 기타 연주자는 탁월성이 있는 기타 연주자인 것이다. ‘훌륭한’ 인간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이다. 즉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1098a|15|)

그런데 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좋음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는가? 탁월성은 ‘품성상태’가 아니라 왜 ‘활동’에서 성립하는 것인가? 간단하다. 품성상태는 그저 ‘상태’일 뿐이지 실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품성상태는 현존하면서도 아무런 좋음을 성취해내지 않을 수 있는 반면 활동은 그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098a|8|)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빌리자면, 품성상태는 ‘가능태(잠재태)’일수는 있으나 ‘현실태’는 아니다. 오직 활동만이 ‘현실태’이기 때문에 탁월성은 활동에서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성을 가진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상기해보자. 인간은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공유하는 부분으로, 영양과 성장을 담당한다. 반면 이성적인 부분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데, 이 역시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과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으로(욕구적인 부분) 나뉜다. 이렇게 두 부분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탁월성 역시 이 두 가지 차이에 따라 나뉠 수 있다.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지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는 지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은 성격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자유인다움, 절제는 성격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임을 밝혔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관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조적인 것이야말로 어떤 것을 행위 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우다이모니아가 그 자체로 원인이 되는 것처럼, 관조적인 활동만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 받는다. “관조적인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반면,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의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1177b|5|) 따라서 이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인간이 관조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생겨나고, 씨족이 생겨나고 국가가 생겨난다. ‘정치’가 생겨난다.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경제활동이나 인간의 외적 유복함을 채우는 행위는 자족 이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더 유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1197a|9|) “비록 땅과 바다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귀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1197a|10|) 유복한 삶은 자족 이상은 필요 없으며, 자족성을 갖추고 관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것이니까.”(1197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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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자유)와 아리스토텔레스(예속)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박홍규 지음 / 필맥 / 2011년 4월

기원전 서양의 철학자는 지금의 우리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식과 학문의 상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생애와 사상은 오롯이 박제된 철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철학자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모든 철학의 근간이 되어 수많은 해석과 분석을 낳았다. 동양의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처럼 문제적 철학자들의 사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의 역할을 했으며 인류 역사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세계의 철학사는 그들의 재해석에 머물러있다는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런가? 인류의 지난한 역사, 과학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가져왔고 그것을 해명하는데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아직도 왜곡되고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명한 현재적 삶이 되었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은 여전히 미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사상적 은사 중 한 사람이 되어 준 박홍규의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또다시 기존의 질서와 관성적 사고에 제동을 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며 서양철학의 중심축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디오게네스와 견준다는 사실 자체를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게네스를 ‘자유’의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속’의 철학자로 선언하며 그들의 철학을 비판적 시선으로 꼼꼼하게 분석한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필요한 것을 묻자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키라고 말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에 비유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정의,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자다. 두 사람은 삶의 방식과 후대에 미친 영향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저자의 비교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대표적 저작을 통해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흔적을 남긴 철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목소리는 선명하고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대의 ‘정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한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합의되지 않은 채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고 경쟁하고 오로지 ‘돈’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의 비애는 단순히 감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행복을 추구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근본적인 고민은 윤리 시간에 외운 철학자들의 사상을 암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여전히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시민의 슬픔이 묻어 있다. 포스터에 쥐, 불온한(?) 사상이 적힌 책, 나와 다른 생각과 주장들 때문에 잡혀가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아픔으로부터 이 책의 고민은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원류로 이해되는 폴리스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그 시대의 사상가들을 살펴보고 디오게네스의 삶과 사상을 복원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탐구하고 그의 국가, 정의, 정치에 관한 사상적 근원을 탐구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당대를 비판하고 당대의 사상으로 현재를 고찰한다. 하나의 사상은 특별한 엘리트의 창조적 산물이 아니다. 사회와 역사적 존재로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세계 해석 방법이다.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아테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달랐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비교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철학자가 비교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보여주는 간극만큼이나 현실세계의 비극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서양철학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디오게네스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저자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오해와 숨겨진 그의 철학사상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플라톤 다시보기』, 『그리스 귀신 죽이기』 등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우리 굳게 믿고 있는 지식과 사상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것들이 과연 모두 진실일까?

2,500여 년을 거슬러 저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하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돌아보게 된다. 짐작도 가지 않는 시간동안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양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의무는 아닐는지.

110327-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