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외면하는가?

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외면하는가?

[동아시아를 묻다] ‘중화’와 ‘진보’

이병한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기사입력 2013-06-17 오전 10:02:20

 

진보의 역설

<역사비평> 2013년 여름호를 읽었다. 인화성이 강한 글이 한 편 실렸다. 김희교의 ‘<역사 비평>과 한국의중국 담론의 진로‘이다. 한국 학계는 근엄하다. 실명을 거론하여 비판하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영글지 않았다. 자칫 본인만 매장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기(士氣) 충만한 시도를 거들고 북돋고 싶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논쟁으로 확산되면 좋겠다.

김희교의 주장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진보 진영의 중국 담론은 주류 담론과 차별성이 없다. 미국에 대한 날선 입장 차이와는 달리 중국 인식과 비판은 좌우합작, 대동소이하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도 입을 맞춘다. 민주주의 결여를 비판하고, 대국주의 동향을 우려한다. 그 결과 보수 담론 강화에 일조하고 만다. 한미 동맹 체제를 고수하는 보수의 전략에 무기력하다. 어떻게 중국 담론을 진보적 실천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요체이다.

김희교는 중국의 실질적인 역할을 주목한다. 북한과 미국을 제어하며 동북아의 전쟁 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위협론과 실제 역할 사이의 간극에서 ‘진보적 중국 담론’의 활동 공간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즉 미국의 패권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 간에 존재하는 억압 강도의 차이를 간과하지 말고, 그 차이를 한층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틈새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다.

흥미가 한층 배가되는 지점은 진보 진영의 한 축, 아니 주축을 이루는 창비의 동아시아론도 겨냥하고 있음이다. 담론의 거듭된 진화에도 불구하고 ‘운동성’은 역부족이라는 진단이다. 20년이 지나도록(동아시아론 원년으로 간주되는 1993년은 북핵 위기 원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구조는 여전하다.

김희교는 진보적 실천이 미흡한 까닭을 동아시아론의 논리 자체에서 찾는다. 중국을 협력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대국화의 가능성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특유의 ‘이중 과제론’적 발상이 병통이다. 중국과의 협조란 대저 지식인과의 교류에 그친다. 창비식 ‘균형 감각’이 도리어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는 구체적 실천을 낳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 담론 지형에서도, 한중 관계에서도 실효적 변화를 거두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머문다.

가타부타는 하지 않겠다. 고수들의 응전을 기다린다. 한반도 창공을 가로질러 주요 G2(주요 2개국)가 ‘신형 대국 관계’를 논하는 비상한 시기이다. 북벌론과 북학론에 버금가는 백가쟁명이 펼쳐지길 고대한다. 나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중국과 진보’의 문제를 숙고해보고 싶다. 중국의 진보적 활용 못지않게, 나는 20세기형 진보를 성찰하고 해독하는 방편으로 중국을 주시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신중국의 역설

20세기의 신청년은 제 아비와 할아비를 부정하며 등장했다. 그들의 젖줄은 신학(新學)이었다. 한학(漢學)은 처분되고, 서학(西學)에 매진했다. 서학을 배타할 것은 없다. 널리 배우는 것은 크게 권할 일이다. 그러나 치우쳤다. 서학은 지나치고, 동학은 모자랐다. 그래서 좀체 중화제국의 환골탈태를 파악하지 못한다. 작금 놀랍도록 빠른 기세로 복원되고 있는 전통 중국의 재림도 낚아채지 못한다. 불가사의할 뿐이다. 침소봉대할 뿐이다.

‘진보적인 중국 활용’이 미진한 근본적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싶다. ‘진보’를 자임할수록 동방문명을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것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은 크게 잘못 알고 있다. 송대 이래 신분제를 일소하고 자유 경쟁 체제를 지속한 중국을 봉건 왕조, 전제 국가 운운하는 식이다. ‘최초의 근대’이자 ‘천년의 근대’가 눈에 들지 않는 것이다.

가령 ‘일당 독재’를 보자. 개혁 개방 30년, 경제 개혁에 비해 정치 개혁이 미진하다는평가가 십중팔구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지난 30년, 중국만큼 지속적으로 정치 개혁을 단행한 국가는 드물다. 나라의 골격인 헌법만 네 차례나 바뀌었다. 55년 체제의 일본과 87년 체제의 한국에 견주어도 훨씬 신속하고 폭넓은 개혁이다.

민주 대 독재라는 상투적인 도식 탓에 그 일관된 진화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거제와 다당제만이 ‘유일 정치’인 마냥 맹목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우파의 선동은 반감을 표하면서도, 정작 중국을 평가하는 잣대는 그 아류를 답습하는 당착이 부지기수이다. 진보를 측정하는 불변의 잣대에 연연하는 보수적 관성이 적지 않다. 복잡다단한 현실을 단순구도로 재단한다는 점에서 가히 이데올로기적이다. 14억 문명 국가의 대모험에 지적 호기심조차 느끼지 못하니 딱한 노릇이다.

중국공산당을 ‘거대한 학습 조직’에 비유한 적이 있다. 보태고 싶다. 거대할 뿐 아니라 ‘왕성한 학습 조직’이기도 하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전 세계 정당 가운데 저토록 학습량이 많은 집단을 알지 못한다. 최고 명문 칭화대학교의 학부생은 얼추 10퍼센트가 공산당원이다. 반해 대학원생은 50퍼센트 이상이 당원이다. 그 우수한 인재를 당교(黨校)에서 또 교육시킨다. 한 번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평생 교육’을 담당한다. 즉 중국공산당은 이념 조직이 아니다. 학습 수준이 가장 높은 ‘지식 기반 정치 조직’이다. 20세기형 전위정당을 탈피하여 실력 중심의 지식인 관료 체제를 복원해 간 것이다.

‘독재’도 얼토당토않다. 집단 지도 체제 아래 주석은 대통령만도 권한이 못하다. 정치국 상임위 9인은 서열이 확정되기 전까지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진용이 갖추어지면운명 공동체이다. 묵시적인 합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에 독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최고 지도자들의 능력 또한 ‘인기투표’로 선출되는 어지간한 국가들보다 높다. 이론과 실무를 고루 익힌 백전노장들인 탓이다.

노장들이 노욕을 부릴 수도 없다. 연령 제한으로 권력 승계가 제도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30여 년이 소요되었다. 과연 정치 개혁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초창기 30년에 견주자면 ‘변혁’에 가깝다. 이를 변화로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불감증이 만연하다. 진화를 멈춘 제도는 도리어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래서 ‘CHANGE’와 ‘새 정치’에 열광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 신중국의 커다란 역설이 있다. 혁명에 혁명을 거친 중국은 점점 더 유교 국가에 근접해가고 있다. 사회주의조차도 ‘보유론'(補儒論), 즉 유교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활용해 가는 듯 보인다. 돌아보면 20세기를 연 쑨원도 ‘천하위공’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현대판 분서갱유를 단행했던 마오쩌둥도 ‘실사구시’를 표방했다.

두 사람은 공히 ‘중화’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중화민국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즉 중국 혁명은 속 깊이 복고(復古)이자 중흥(重興)이다. 이제는 ‘조화사회’, ‘화평굴기’, ‘책임대국’ 등 국책 구호 자체가 유학풍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 경영의 소프트웨어와 운영 체계는 다분히 유교적이다.

중국 제도를 편드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과제가 산적하다. 우리가 따를 모델도 아니다. 다만 저들은 저들의 논리로 부단히 ‘진화’하고 있음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고려의 태를 벗고 조선의 꼴을 갖추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미국도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을 거쳐 100년에 가까운 연마 끝에 국가의 틀을 다졌다.

신중국은 여전히 젊은 국가이다. 지금도 ‘대장정‘의 와중이다. 그래서 중국을 비판하는 잣대 또한 내재적이어야 한다. ‘조화사회’를 구현하고 있는가, ‘책임대국’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언행이 일치하는지, 명실이 상부하는지를 깐깐하고 꼼꼼하게 따질 일이다. 그래야 비판을 당하는 쪽도 따끔하고 아픈 법이다.

‘중화’의 역설

유교 국가의 갱신이라는 당혹스런 현실 앞에 ‘중화주의’, ‘중화 사상’에 대한 비판이 널리 퍼져있다. 대중적 차원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만연하다. 그러나 ‘중화’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중국만의 것도, 한족만의 것도 아니다. 동방 문명의 정수를 일컫는 보편명사이다. 17세기 이래 동아시아는 저마다 중화를 자처했다. 그래서 혹자는 ‘중화 사상 공유권’이라고도 했다. 중화를 일국으로 축소시킨 것이야말로 20세기의 착각이고 착시이다.

대한제국조차 그러하다. 고종은 독립문만 세운 것이 아니다. 천하의 도가 쇠하여 대륙에서 중화 문명이 퇴락하니, 반도에서라도 중화 문명을 부흥시키겠다는 포부가 역력했다. ‘근대화된 중화’를 꿈꾸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광무(光武)였다. 왕망의 찬탈에 따른 천하대란을 수습하고 한제국을 재건한 광무제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즉 대한제국은 근대 적응에 실패한 대청제국을 대신하여 중화 부흥의 보루가 되고자 했다. ‘독립’만을 강조하는 ‘진보’의 왜곡된 눈이 이러한 복합성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곡해한 것이다. 혹은 알았더라도 외면하고 침묵한 것이다. 또는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며 그 ‘낙후성’을 질타한 것이다.

중국은 20세기에도 중화주의가 여전했다는 비판 또한 곱씹어 볼 일이다. 진술 자체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근대에 미달했다는 가치 판단은 녹록치가 않다. 만약 저 거대한 대국이 중화를 방기하고 조숙하게 근대 국가로 변모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조선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본이 중화 세계의 원리를 방기함으로써 류큐도 대만도 조선도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 아닌가? 중국이 제국 일본을 능가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중국이 조선의 숨통을 쥐어온 것은 점점 ‘근대화’되면서이다. 그나마 한족 중심의 대한(大漢)제국을 표방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표방한 것이야말로 천만다행이지 않을까? 그래서 대한민국 또한 중화민국의 우산 아래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강박 관념과 고정 관념을 거두고 상상력을 일깨울 일이다.

기실 ‘중화 사상’, ‘중화주의’라는 조어 자체가 20세기의 산물이다. ‘-ism’의 번역투이다. 19세기까지의 문헌 어디에도 저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허면 언제 등장했을까? 1930년대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일본이다. 제국 일본에서 ‘발명‘된 신조어이다. 왜 생겨났을까?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항전하는 중국을 폄하하기 위해서이다.

지나 놈들은 국·공을 막론하고 중화주의, 중화 사상에 찌들어서 ‘근대’ 일본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본은 과연 ‘근대’적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나서서 부추겼다. 상부상조하던 중화 세계에서 떼어놓아 홀로 설 것을 재촉했다. 그래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500년 조선의 망국 앞에 ‘독립’이 있었음을 서늘하게 기억하자. 실로 독립협회주역들의 행보들도 석연치가 않다. ‘중화주의’라는 신생어의 탄생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는 이 심란한 사정 또한 필히 기억해 둘 일이다.

애초 역사에 ‘진보’는 없다. 최소한 동방인의 감각으로는 그렇다. 어지러운 시대와 가지런한 시대가 있을 뿐이다. 난세와 치세가 돌고 돈다(一治一亂). 20세기는 난세였다. 중화 세계의 질서와 원리가 무너졌다. 늘 그러했다. 몽골 침입, 임진왜란·병자호란 모두 중화 문명에 귀의하지 않는 오랑캐의 분탕질이었다.

20세기도 예외가 아니다. 대전(大戰)이 거듭되는 대란(大亂)기였다. 1000년에 비추어 100년을 돌아보자. 얼추 300년을 터울로 난세가 일었다. 특히 북방 제국과 남방 제국이 승하면 반도는 극히 혼란했다. 1000년만의 식민과 분단 또한 남방 제국과 북방 제국이 동시에 일어나 중원을 압도해서이다.

그 어지러웠던 100년을 근대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천만만만 아닌 듯하다. 좌우(左右)의 척도만큼이나 고금(古今)의 잣대도 중시하자. 동방인은 항상 오늘을 과거에 되비추어 성찰했다. 신(新)을 맹목하며 고(古)를 구(舊)로 타박하지 않았다. 지긋한 마음이다. 아름다운 태도이다.

그 동서/좌우/고금의 복합 좌표 안에서 20세기의 ‘진보’란 무엇이었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이병한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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