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냐 플라스푈러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교사에게 연수는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이다. 교사들은 해마다 이런저런 이름의 직무연수와 자율연수에 참여해야 한다. 요새는 연수의 압박이 조금 더 거세졌다. 대략 연간 60시간을 최소 기준 시간으로 정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성과급 등급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게끔 돼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연수는 대개 ‘교학상장(敎學相長)’, 곧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다. 사실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많은 학교가 연수 이수 시간을 성과급 산정에 주요 항목으로 활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청이 학교를 평가할 때에도 학교 전체의 연수 시간이 주요 평가 항목이 된다. 그래서 교장들은 교사들 앞에서 대놓고 형식적으로라도 연수 이수 시간을 채우라고 침을 튀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잡무와 잦은 출장에 치인 채로 살아가는 교사들에게 연수는 고된 노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울며 겨자먹기’식의 반강제적인 연수라면 더욱 그렇다. 연수라는 ‘일’을 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기는커녕 점수의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에 비애를 느낀다. 그렇게 해서 전문성이 길러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더욱 자괴스럽다.

그럼에도 많은 교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원격 연수를 ‘기꺼이’ 받고 있을 것이다. 목이 뻣뻣해지고 손목이 시큰해지는 것쯤은 상관 없다. 60시간을 넘어 100시간, 200시간도 괜찮다. 몸이 고통스럽더라도 200시간의 연수 시간을 채운 자신을 선망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향락 노동자들은 혹사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신체 활동이란 고작해야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동공을 집중하는 것에 국한되며, 두뇌만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기서 자극에 반응하며 웹 사이트를 클릭하고 이 링크 저 링크를 따라다니는 사이에 그는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것이다.”(<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12쪽 중)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 씀)의 핵심 열쇳말은 위 인용문에도 나오는 ‘향락 노동’이다. 저자는 향락 노동을 일 자체가 좋아서 자기 스스로 일을 하고, 그 일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노동으로 규정한다. 독일의 소장 철학자인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문제는 바로 그 향락 노동이 가지는 양가성(兩價性)이다. 향락 노동은 과연 약일까 독일까.

“일도 해야 하고 스포츠도 봐야 하고.. 우리는 흥분 상태”

기사 관련 사진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표지
ⓒ 로도스 관련사진보기

현대의 향락 노동이 가져온 기괴한 풍경 하나를 짚어보자. 우리는 동네 골목에서조차 적나라한 차림과 표정의 여성 모델의 그림이 박혀 있는 모텔 광고 전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기의 대상이었던 섹스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숙한’ 대상이 된 것.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성욕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성과 섹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우리는 무언가가 부재할 때 그것에 대해 욕망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이와 관련해 ‘포르노’를 현대의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포르노 배우들이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신체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처럼, 현대의 일 중독자들도 리탈린이나 모다피닐 같은 각성제를 통해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일에 몰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휴식이나 여유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벗은 분주함, 바쁨이다.

“여기서 회의를 하고, 저기서 비즈니스 런치를 먹고,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마감 일정에,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 시청까지, 우리는 언제나 지속적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문화학자 토마스 마호의 말대로 현대의 금욕주의자는 일중독과 행동주의, 스트레스와 시간 압박, 고독과 우울증의 합성물이며, 성차별과 아이에 대한 혐오, 독신주의의 임포텐스(남성의 성기 불능-기자 주)가 서글프게 뒤섞인 혼합물이다.”(본문 61~62쪽 중)

당신의 야망, 애정 결핍·열등감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주함이 진정으로 창의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말을 인용해 분주함이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기존의 것을 재생산하고 가속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상 진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육체와 정신의 여유와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가. 무작정 떠나는 여행과 같은 참된 휴식이 중요한 까닭이다.

저자는 좋은 의미의 향락 노동이 집착적인 워커홀릭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릇된 야망’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야망은 ‘커다란 희망이나 바람’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되곤 하지만, 현실 속의 야망은 한 마디로 ‘과도한 명예욕’일 뿐이다.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 야망이 잘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착취적인 경쟁 논리로 무장한 오디션 현상을 예로 든다.

지금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슈퍼스타K>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보라. 관객들이, ‘진짜 노래란 이런 거야’라며 가수의 열창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잊혀진 가수들의 주옥 같은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근본적으로 모두의 관심은 노래나 연기 그 자체보다 심사위원이 올리거나 내리는 엄지손가락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도한 야망은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과 그로 인한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단다. 그는 철학자 부흐크레머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망이 큰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실존적 동의에 대한 확신도 없다는 점, 인정의 욕구가 결국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아이처럼 그는 결핍의 체험을 증폭된 애정의 ‘강제’로 해소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을 힘줘 말한다.

그릇된 야망과 인정 욕구는 우리를 심각한 워커홀릭으로 만든다. 스마트폰과 이메일은 일이 우리를 옥죄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의 하나다. 그것들은 퇴근 후에나 휴일에도 우리들을 가상의 일터로 불러낸다. 많은 사람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즐기기까지 한다. 리비도적 집착이자 상사병 수준이다. ‘일’이라는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본문 198쪽)

덧붙이는 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로도스 | 2013. 04. 15. | 211쪽 | 1만 4000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4409&PAGE_CD=N0001&CMPT_CD=M0016

Advertisements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