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 정치 청산? – 목표가 잘못됐다

‘사소한 복수극’으로 전락한 계파 정치

[박동천 칼럼] 계파 정치 청산? 민주당 목표가 잘못됐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25 오후 3:42:30

지난해 두 차례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1987년 또는 1997년 선거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들이 2:0이냐 1:1이냐 0:2이냐에 따라 장차 적어도 30년의 정치 지형이 좌우될 만큼 중요했다. 그 선거가 0:2 새누리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 후 민주통합당 안에서 반성과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 하나가 계파 정치 청산이다. 민주당의 패배 원인이 계파 정치에 있다는 진단은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진단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에는 부족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진단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지극히 막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계파 정치를 탈피한 상태의 정치라는 것이 어떤 형태의 정치를 말하는 것인지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계파 정치라는 것은 애당초 청산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계파 정치 청산”을 말로 부르짖는 맥락과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고 실천하는 맥락 사이에 아주 심각한 괴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려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당의 활로가 열린다”는 식의 발언이 누가 누구를 상대로 말하는지에 따라 함의가 달라진다는 점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아래 표를 보자.

이 표에서 D의 경우, 즉 민주당 밖에 있는 학자나 평론가 또는 일반 유권자가 민주당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민주당은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면 특별히 이의를 달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반면에 A의 경우는 어떤가? 얼핏 보면 D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당내 인물이 당 안의 사람들을 상대로 “계파 정치 청산”을 부르짖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누가 누구를 겨냥해서 하는 말인지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조선 시대 인물의 이름을 좀 빌려다 말해 본다. 민주당에 성삼문과 박팽년과 한명회가 있다고 치자. 성삼문이 자기 자신의 지난 행태 또는 같은 계파인 박팽년을 겨냥하여 “계파 정치 청산”을 말한다면,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말로만 끝날 일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또는 자신의 계파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라면 속으로 되새기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있을 때 발설할지언정, 공개적으로 광고를 먼저 할 필요는 별로 없다. 반면에 성삼문이 신숙주를 겨냥하든지,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하는 경우에는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지 않고 바깥으로 공표해야 앞뒤가 맞는 언어 수행이 된다.

바로 여기에 괴리가 있다. “계파 정치 청산”은 말의 표면만 보면 계파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신숙주를, 또는 신숙주가 성삼문을 겨냥해서 “계파 정치 청산”을 입에 담게 되면, 이러한 언어 수행 자체가 바로 다름 아닌 계파 정치가 되고 만다.

이처럼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표어는 지당한 말씀인 것 같은 공개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상대의 계파 정치를 성토하고 비난함으로써 자기편 계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은밀한 의미가 있다. 위 표에서 B와 C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미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작용한다. 당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안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에 대한 공격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당 안에서 말하는 사람이 공개적인 의미로 하더라도 당 밖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리로 들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지난 1일 오전 충남 보령 한화리조트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워크숍에서 오른쪽부터 정동영 , 정대철, 이부영 상임고문, 박병석 국회부의장, 문희상 비대위원장, 박기춘 원내대표, 김동철 비대위원이 묵념을 하고 있다. ⓒ뉴시스

당파든 패거리든 파당이든, 한 민족 차원에서든 민족 내부의 집단 차원에서든, 분파라는 것은 결코 청산될 수가 없다. “계파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를 없애자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계파 정치라는 문구는 자체로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지는 문구가 아니고, 누군가의 정치 행태를 비난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일을 추진하든, 그 과정에서 주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계파 정치”라고 시비를 걸 여지가 활짝 열려 있다. 이 문구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와 같기 때문에, 민주당이 일체의 이익을 초월한 성인들로만 구성되기 전에는 계파 정치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당쟁이 정치 세력들 사이의 건설적인 경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모적인 복수극으로 끝나고 만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파 및 당파 정치를 그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필요를 한사코 외면하다 보니, 상대파를 당파로 비난하면서 자기네 패거리는 당파가 아니라는 자기기만을 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파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파 정치가 소모적으로만 치달을 뿐 생산적인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데 있다. 생산적인 경쟁을 도모하려면, 계파 정치 자체를 청산한다는 따위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당의 의사를 결정할 때, 당내에 분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일단 최대한 파악해 보고,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최대공약수를 결집해 낼 수 있는 역량이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 특정한 목소리의 존재 자체에다가 “계파”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게 되면, 영원히 계파들 사이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계파들이 서로 경쟁하는 에너지는 자체로 귀중한 생명력이자 활력소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바로,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욕심들을 에너지원으로 인정한 위에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다가 상쇄되지 않도록 할 길을 찾는 데 있다. 이 길을 찾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단, 계파들의 이익 추구를 나쁜 짓으로 여기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난 다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계파 정치를 청산하려 들지 말고, 계파 정치의 활력들을 재료로 삼아, 그로부터 최대공약수를 묶어내는 방향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야 소기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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