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하트,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대강의 요지

4대강 문제가 개발인가 보존인가라는 문제로 한정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고 또 관리하는 유효한 방법일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마이클 하트의 최근글,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Politics of the Common, http://www.zcommunications.org/politics-of-the-common-by-michael-hardt )의 대강의 요지를 아래에 정리해 본다. -아멜라노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마이클 하트)와 생태적 사회적 투쟁의 연대의 문제

공통적인 것에는 두 개의 영역이 있다. 하나는 생태적인 공통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경제적인 공통적인 것이다. 이것을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과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정치적 관점에서 이 두 영역의 경계는 흐려진다. 이 두 영역은 동일한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가령 소유관계에 의해 이 두 영역은 모두 도전받고 악화된다. 그리고 두 영역은 전통적인 경제적 가치를 좌초시키며 삶의 가치를 가치평가의 유일하게 정당한 저울접시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 두 공통적인 것이 상반된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두 개의 본질적 측면이 있다. 우선 생태적 담론은 공통적인 것을 보존에 초점을 맞추 취급하고, 지구 및 생물형식들의 제한성에 초점을 맞춤에 반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인공적 형식들에 대한 토론은 일반적으로 창조에,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무한하게  열린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사회적 담론이 인가의 이해관계를 중심적으로 취급함에 반해 호나경담론은 인간 혹은 동물 세계보다 훨씬 넓은 이해관계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내가 괌심을 갖는 것은 공통적인 것의 이 두 영역들, 질들, 그리고 그들의 잠재적 관계에 대한 대화의 필요성이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회의를 둘러싼 행동의 준비에 포함되었던 조직적 논쟁을 생각해보면, 반자본주의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과 생태운동의 합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운동의 성공은 각각의 운동들의 일차적 목표들인 공통적인 것의 각 영역을 서로 이애하고 협상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출발점은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이다. 생태운동에서 이것은 다른 영역보다 잘 인지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사유에서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은 널리 인지되지 않고 있다.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기인 오늘 이 문제는 중요하다. 1) 산업생산의 헤게모니는 산업사회를 창출했다. 2)더 이상 산업생산은 헤게모니적이지 않다. 3)헤게모니적인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인지적 정서적 활동과 그 구조이다. 현대의 생산형식은 사회관계와 삶형식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삶정치적이다. 삶정치적 생산과 생태적 사유 사이에 근접성이 있다. 양자는 모두 삶형식의 생산/재생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그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인간과 동물의 한계 너머로 삶형식의 개념을 확장시킨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소유형식에서의 위계변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산업생산의 헤게모니 이전에는 부동산 소유가 지배적 위치를 점했다. 산업생산이 지배적으로 되면서 상품소유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오늘날은 비물질적 소유(특허권, 저작권 등)가 물질적 소유보다 지배적 위치를 점한다. 부동상품인가 이동상품인가가 문제였던 때에서 배타성과 복제가능성의 문제로 초점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물질상품의 유용성은 나눠진다고 해서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나눠짐으로써(즉 공통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더 유용하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 지배적 생산형식은 공통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 비물질적 삶정치적 재화들이다. 미래의 경제적 발전에서 그러한 재화의 생산성은 그것들이 공통적인 것으로 되는 데 있다.

생태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에서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첫 번째 논리적 특징은 그들이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퇴락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소유의 비물질적 형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관리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미래적 생산성을 감소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성을 위해 공통적일 필요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사적일 필요 사이에 강력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의 확장판이다.[‘사회적 생산에 사회적 통제양식을!’이 맑스 시대의 요구였다면,  ‘공통적 생산에 공통적 통제를!’이 우리 시대의 요구이다.-아멜라노]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은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또 퇴락된다. 환경의 유리한 혹은 해로운 결과는 항상 국경의 경계도, 소유의 한계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는 교통, 서비스, 산업의 형태로 된 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한 것처럼 우간다의 석유, 시에라레온의 다이아몬드, 볼리비아의 리튬, 아이슬란드 주민의 유전정보 등과 같은 자연적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 했다. 생산의 공통적 성격은 점점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과 충돌한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의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에 대항하는 수많은 투쟁들(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물 사유화에 대한 투쟁, 2003년 엘 알토에서 가스 사유화에 대한 투쟁) 속에서 표현되었다.

두 영역의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두 번째 특징은 그것들이 가치의 지배적 척도를 파괴하고 초과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외부효과, 무형자산 등의 개념은 이미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금융위기는 이 삶정치적 생산을 자본주의적 척도로는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삶은 척도를 초과하며 오늘날의 경제적 재화나 활동의 가치는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며 벗어난다.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파괴되는 삶형식들의 가치는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뱅글라데쉬의 침수, 에디오피아의 가뭄, 이누이트족의 생활형식의 파괴가 얼마의 달러로 계산될 수 있는가?

교토의정서나 Waxman-Markey 협정[footnote]이에 대해서는 http://www.govtrack.us/congress/bill.xpd?bill=h111-2454 참조[/footnote]에서의 탄소세 계획은 측정불가능한 것을 측정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이때 이것이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측정불가능한 상품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재앙에 이를 수 있다. 그 재앙은 금융위기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소유논리와 시장계획은 빈곤과 배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전 지구적 사회적 위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삶의 형식들은 측정불가능하며 삶/생명 가치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다른 저울눈(이것은 우리가 아직 발명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에 따른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개의 상이한 형식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에도 도전한다는 점은 자율(자치)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를 향한 정치적 행동주의의 형식들을 서로 연결시킬 기초를 제공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형식은 물론 상반된 방향으로 작동하곤 한다. 생태적 사유는 지구의 유한성과 그 생명체제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지구, 특히 그것의 야생공간은 산업발전과 다른 인간활동의 손상으로부터 방어되어야 한다. 반면 경제사회적 영역의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생산의 무한한 성격을 강조한다. 삶형식, 아이디어, 정서들, 등은 어떤 고정된 한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보존과 한계에 대한 요구가 무한한 창조적 잠재력에 대한 찬양과 상충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발전에 반대하고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사유는 발전지향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 발전이란 근본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에 포함된 발전은 산업발전과는 아주 다르다. 삶정치적 맥락에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부서진다. 한쪽에서 보존에 대한 요구가 다른 편에서의 창조에 대한 요구와 대립하기는커녕 상보적이다. 두 관점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삶의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을 지시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한 두 영역의 투쟁에서 두 번째의 갈등적 지점은 인간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로 준거틀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투쟁에서 인간의 문제는 중심에 놓여 있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위계의 극복, 계급과 소유,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성의 제거에 놓여 있다. 생태적 투쟁은 자신들의 프레임을 인간 너머로 확장하곤 한다. 생태적 담론에서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형식 및 생태계와의 상호작용 및 그것들에 대한 돌봄 속에서 조망된다. 일부의 심층생태적 담론에서는 비인간생명에게 동등한 관심이 두어지거나 인간보다 우선적인 관심이 두어진다. 이 차이는 중요한 차이지만 극복불가능하거나 파괴적인 차이는 아니다. 생태적 투쟁은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것과 싸울 수단에 좀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투쟁은 지구의 제한성과 다른 생명형식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관리할 대안수단들을 발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상상하는 기획에 근본적인 것이다. 투쟁들 사이의 분기는 절합되고 협상되어야 할 공통적인 것의 상이한 면모들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차이는 건강한 것이며 그것들과 연루/교전하는 것이 우리를 전진시킬 수 있다. 환경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적 이론적으로 노력을 함께 경주해야 할 화급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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