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원론-아르투어 카우프만

 법철학 원론  

                                                       아르투어 카우프만 지음
許   一   泰   옮김
역자의 개정판 서문
역자가 개정판을 내는 데에는 일부를 原著者의 개정판(제5판)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종래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보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방식과 맞춤법이 틀린 곳이 적지 않아 이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비록 작은 책자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하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현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큰 역할을 한다고 역자는 믿고 싶다. 이 책으
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요즘의 법과대학생들도 법의 기능주의적 관점보다는 진정한 법, 법다운 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무가 및 법학을 가르치신 분들에게도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개정판을 내는데 큰 도움을 준 손기식 고등법원 부장판사님과 형사판례연구회를 이끌어 준 정진규 검사장님 그리고 이길안 세종출판사 사장님 및 이동균 상무님
에게도 감사드린다. 또한 이진국 박사, 박선아, 허구 동아대 조교에게도 역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2000년 2월 10일
동아대학교 법과대학 403연구실에서  허일태 드림

역자의 서문

법다운 법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무조건 아무 길이나 찾아 나설 수 없다.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는 지금까지 우리의 선현들의 지혜를 참고삼아 시행착오를 가능한 줄
이면서 올바른 길로 정의로운 법을 모색해 나아가야 한다. 바로 그러한 길을 문제의식을 갖고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는 글이 다름 아닌 아르투어 카우프만(Arthur
Kaufmann)의 “법철학의 문제사”(Problemgeschichte der Rechtsphilosophie)가 아닌가 싶다. 역자는 지난 25년간 상당수의 법학서적들을 읽어오면서, 법률초학자들이 꼭
읽어야 할 것으로 굳이 추천할만한 논문을 지적하라면, 단연코 바로 위의 글을 권하고 싶다. 이 글은 이미 역자에 의해 동아법학 제10호(1990)에 게재된 바 있다.
그간 임웅 교수님을 비롯하여 상당수 교수님들의 단행본 출판의 권유도 있고 해서 카우프만의 또 다른 글인 “법철학의 기초개념” (Rechtsphilosophie, Rechtstheorie
und Rechtsdogmatik: 이 글 역시 동아법학 9호에 실려 있음)을 포함하여 새롭게 가다듬어 “법철학 입문”이란 이름으로 동아대학교 법과대학의 강의용으로 출판하게 되
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이 번역 글이 다소나마 법학이란 학문에 기여했으면 한다.
끝으로 이 번역 글을 기꺼이 출판해 주신 세종출판사 이길안 사장님 그리고 편집에 힘써주신 조길재 실장님과 차해경 선생에게 고마움을 적고 싶다.

1996년 1월 17일
동아대학교 법과대학 제403연구실에서 허일태 드림
제Ⅰ장  법철학의 기초
(법철학, 법이론 및 법도그마틱)
제1절 法哲學과 법도그마틱 10
제2절 法哲學의 形式的 客體 14
제3절 法哲學의 올바른 물음에 관하여 18
제4절 科學主義와 哲學主義 그리고 應用主義의 誤謬 23
제5절 法哲學과 法理論 26
제6절 哲學과 法哲學의 根源 31
1. 存在論 32
2. 認識論 34
3. 實存哲學 38
4. 다양한 傾向의 綜合 41
제7절 現代 哲學課題 및 法哲學의 任務 43
주요 참고 문헌 51
제Ⅱ장  法哲學의 問題史
제1절 서  론 58
제2절 법철학의 역사적 전개 61
Ⅰ. 고대의 법철학 62
1. 선사시대 62
2. 소크라테스 이전 64
3. 소피스트의 철학 67
4. 아테네의 철학(attische Philosophie) 71
5. 스토아 학파 83
Ⅱ. 중세의 법철학 88
1. 고대로부터 중세로의 전환 88
2. 아우구스티누스 88
3. 토마스 아퀴나스 92
4. 스콜라 철학의 말기 98
Ⅲ. 근대의 법철학 103
1. 새로운 철학과 학문의 이해 103
2. 근대의 자연법 106
3. 고전적 자연법의 종말 118
1) 역사법학파 118
2) 칸트의 비판철학 120
3)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 134
4) 유물론적 역사학파 141
5) 헤겔 이후의 시대 148
4. 법학상의 실증주의 151
5. 실증주의의 붕괴 163
6. 법철학과 국가사회주의(나치스) 166
Ⅳ. 자연법과 실증주의를 넘어서 169
1. 1945년 이후 자연법적 사상의 재생 169
2. 구스타프 라드부르흐 174
3. 법인류학 188
4. 그 밖의 흐름 193
제3절 근대법학 방법론의 역사적 발전 197
Ⅰ.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98
Ⅱ. 개념법학 205
Ⅲ. 경험적 법실증주의 211
1. 비어링 212
2. 예링 214
3. 이익법학 215
4. 자유법운동 217
5. 법사회학 221
Ⅳ. 논리적 법실증주의, 특히 “순수법학” 224
1. 한스 켈젠 224
2. 분석법학, 논리학, Topik, 수사학 231
Ⅴ. 법해석학 235
1. 개방체계 235
2. 주관-객관-도식의 극복 237
3. 법실현의 해석학적 절차 247
주요 참고 문헌 253
제Ⅰ장  법철학의 기초*(법철학, 법이론 및 법도그마틱)
Arthur Kaufmann** 지음   허일태 옮김

제1절 法哲學과 법도그마틱

법철학은 철학의 한 분야이지 법학의 한 분야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一般)哲學이 類에 해당한다면, 법철학은 그것의 특별한 하나의 種에 불과하다고 할 수 없
다. 철학이란 항상 그 어떤 형식에서도 인간의 現存在의 根本問題, 즉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包括的인 것”으로 이름붙인 것을 문제삼는다. 말하자면 철학에서 문
제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법철학은 철학의 특수한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철학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적인 수법에 기해서 反省하고, 論議하고, 가능하다면 答하려는 법률학
상의 원칙문제, 근본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의 다른 분야들과 구별된다. 다소 무리한 표현이긴 하지만, 법철학에는 法律家가 묻고, 철학자가 대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법철학자라면 兩 分野, 즉 법학과 철학에 정통하여야 한다. 또한 “순수한 철학자”의 법철학과 “순수한 법률가”의 그것과에 어느 쪽이 더 좋지 못한가가 이미 빈
번히 문제되었지만, 그 문제에서는 양쪽 다같이 좋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철학은 법학이 아니며, 더구나 법도그마도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도그마틱(Dogmatik)이란 “純粹理性 그 自體의 능력에 대한 先行的 批判을 거치지 않는 純粹
理性의 독단적 절차”라고 한다. 도그마론자는 음미함이없이 진실하다고 여기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주어져 있는 것”(exdatis)에서 思考한다. 법도그마론자는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법의 認識은 어떠한 사정 아래서, 어떠한 범위에서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법도그마틱이 무비판적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도그마틱이 비판적으로 행하여지는 경우, 예컨대 法規範을 비판
적으로 검토하는 경우에도, 법도그마틱은 항상 體系內在的으로 論證하는 것이며, 現行體系의 시비를 문제삼지 않는다. 법도그마틱의 영역 안에서 이런 태도는 대체로 정당하다. 이런 태도가 언제 위험한 것으로 되느냐 하면, 법철학과 법이론이라고 하는 도그마적이 아닌 思考樣式을 불필요하고, “순이론적”이며, 심지어 비학문적이라 하여 거부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물론 철학, 즉 법철학이 철저하게 無前提로 행하여 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스칼(Pascal)이 “Port Royal 論理學”(1662)에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부른 것에 비추어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미리 一義的으로 定義되지 않는 槪念은 결코 사용되지 못하며, 그 眞實을 證明하지 못하고는 어떠한 主張을 세워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은 요청을 만족시키는 것이 不可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깊이 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 두 가지 요청은 적어도 無限遡及으로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적어도 -도그마틱과 달라서- 각종 학문과 체계의 根本問題와 根本前提의 (最近 자주 사용되는 말로 말하면) “背後를 캐묻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철학은 -환언하면- 體系超越的 입장을 지녀야만 한다. 이것은 백지상태(tabula rasa)의 입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최근의 解釋學(Hermeneutik)은 “先行判斷” 또는 “先行理解”가 모든 言語學習에 있어서 곧바로 理解의 조건인 것을 보여준다(법학도 물론 言語學問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言語文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그와 같은 先行的 判斷에 그쳐서는 안되고, 이러한 판단은 “더욱 더 깊이 파고 들어감으로써 무엇이 그 의미에 합치되는가 바로 그것을 통하여 늘 再檢討”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에서 는 문제되지 않는 것은 없고 -그 점은 법철학에 관해서도 여전히 타당하다- 自己의 本質에 대해서까지도 예외가 아니다. 원리상 철학자는 어떤 일에 관해서도 문제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한에서 철학은 個別學問보다도 사실상 근본적 문제를 다룬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렇지만 철학이 도그마적 개별학문보다도 “중요한 것”을 문제로 삼고있다고 추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의학상 癌의 연구가 正法(richtiges Recht)의 식별기준에 관한 법철학상의 연구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철학과 도그마틱과의 관계는 많으냐 적느냐의 관계, 혹은 어느 것이 중요한가 아닌가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存在의 관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互換性이 없다.

제2절 法哲學의 形式的 客體
법철학과 법도그마틱이 달리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형식적 객체의 差異에서 나타난다. 학문론에서 실질적 객체는 어떤 학문이 다루는 구체적 대상의 전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형식적 객체는, 어떤 학문이 구체적 대상의 전체를 연구하는 특유한 관점이다(때로는 “硏究客體”라고도 칭한다). 각 학문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형식적 객체에 있다. 이에 反하여 실질적 객체는 많은 학문에 공통되는 것도 있다. 예컨대 “법”은 모든 법률학분야에 공통되는 실질적 객체이다. 私法, 國家法, 行政法, 刑法 등처럼 각 분야의 차이는 그 각각의 법의 형식적 객체에 있다. 최근에 명백히 관찰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실질적 객체는 보다 많은 형식적 객체로 끊임없이 분화되어(예컨대 범죄학이 독자의 분야로서 형법학
과 병존하고 있다) 학문의 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쉼없는 분화과정은 필연적으로 자연히 한정된 “전문영역”에 시야를 좁히고 마는 위험을 초래하여, 그 결과 상호관련적이며, 전체적, 기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철학이 더욱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개별학문의 본질이 이 명칭에서 나타난 것처럼 개별학문은 항상 개별적인 것에 눈을 돌리지, 전체로서의 존재적인 것을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의 본질은 형식적 객체의 總體性에 있다. 철학에 문제되는 것은 주지한 바와 같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개별적인 것의 집합도 아니며, 전체적이거나 상호관련적, 기본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 이 점이 철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개별적 학문은 일정한 형식적 관점, 즉 형식적 客體 아래에서 탐구하는 일정한 실질적 객체, 즉 구체적 存在的인 것에 구속되는 특질이 있다. 철학의 경우에는 이미 이와 같은 형식인 실질적 객체와 형식적 객체에 二重으로 구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일정한 실질적 객체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결같이 형식적 객체인 “存在一般”에 구속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일정한 실질적 객체를 결여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에서는 형식적 객체의 普遍性이 哲學的 認識과 哲學的 方法上 많은 문제점을 낳게 한다. 철학도 항상 경험가능한 개별적인 것(예컨대 특정한 법규범)에 출발점을 둘 필요가 있지만, 그래도 각 개별적인 이것저것이 그 本來의 對象은 아니고, 개별적인 것은 항상 뭔가 그 배후에 잠재하고 있는 “超越的인 것”(예컨대 법규범이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철학이 일정한 실질적 객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형식적 객체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철학의 일정한 思辨的 特徵을 나타낸다. 철학자는 전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오성은 항상 개별적인 것에만 향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결코 存在全體 또는 法全體를 직접 일괄하여 파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철학은 그 대상을 즉각 또는 일괄하여(uno actu) 파악할 수 없고, 오히려 개별적인
것에서 그 출발점을 두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철학적 연구목표인 전체를 끊임없이 철두철미하게 살피는데 두어야 한다. 이것은 야스퍼스의 말로 표현하면 다음
과 같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전체에 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때마다 개별적인 것에 관해서만 표현된다.
個別學問에서는 個別的인 것이 문제가 되므로 원칙적으로 書齋나 실험실에서 외로이 고독하게 홀로 연구하는 사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이와 같은 것
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인식은 단지 多數의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다소나마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철학의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려면, 철학하는 다수의 사람이 협동
하여 노력하여야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의사소통, 즉 “정보교환을 통한 공동체”가 철학에서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철학의 경우 相互作用行爲, 相互
主觀性, 收斂, 對話는 개별학문 보다도 몇 배로 중요성을 갖는다. 立場이 多樣하고 相異한 學說이 複數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런 다양성은 철학에 있어서 障碍나 難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이 완전히 전개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이것으로부터 (법)철학적 상대주의의 문제에도 빛이 내린다. 다양한 철학자의 주장들을 각자 별개로 고찰하며, 마치 각자의 주장 그 자체만으로 전체를 관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者는 당연히 불치의 相對主義가 지배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몇백 몇천 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協同의 성과인 철학을 이해하고, 擴散 속에서 收斂을 볼 수 있는 者만이 相對主義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제3절 법철학상의 올바른 물음에 관하여
(도그마적) 개별학문에서 물음의 방향은 그 대상에 따라 규정된다. 왜냐하면 개별학문은 원래 개별적인 것에만 指向하고 있어, 문제의 제기는 직접적인 것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률가에게 어떠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때마다 형식적 객체에서 바로 밝혀지게 된다. 예컨대 문제가 不法行爲에 基한 損害賠償이라면, 독일민법 第823條 以下(한국민법 제750조 이하)에 해당하는가가 문제되는 것은 自明하다.
철학, 즉 법철학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 대상인 형식적 객체는 存在全體 내지 法의 全體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들의 思考는 즉각 그리고 一括하여 存在全體를 捕捉할 수 없고, 개별적인 것, 즉 全體의 一部分에서 비로소 우리들의 思考가 시작되어지기 때문에, 철학에 있어서 문제제기의 방법은 철학의 대상으로부터 결정될 수 없다. 전체로서의 존재란 무엇인가? 또는 전체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라고 물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철학 내지 법철학은 방법론적으로 그것 以上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 더 세분하여, 예컨대 法의 目的과 目標, 法實證主義의 意義, 법과 道德과의 관계, 법규범의 機能, 법의 歷史性의 動機, 存在와 當爲의 “方法二元論”, “事物의 本性”이라는 思考形式과 같은 문제들에
관하여 묻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多數의 細目을 통해서만이 -近似的 방법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통하여 哲學上의 올바른 문제가 제기되는가? 즉 올바른 물음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철학에서는 일정한 方向으로 물을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올바르게 묻고 답한다면, 어떠한 부분적인 문제로부터도 전체문제의 윤곽을 원칙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민법 제242조의 一般條項(信義誠實의 原則)이나 法人制度나 死刑 또는 責任을 둘러싸고 동일한 법철학적인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 더군다나 “우측 통행”처럼 기술적 규정까지도 “法規範 一般”의 意味, 本質을 둘러싼 법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은 최종적으로 항상 동일한 목표로부터 存在의 全體, 眞理의 全體, 법의 全體問題에 초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제기된 물음의 數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칙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개별학문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개별학문은 특정한 연구대상과의 관계에서 어느 쪽 하나의 목표에는 도달되는 것이지만, 철학에 있어서 그와 같은 것은 “사물의 본성”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일정한 시대의 철학은 전체에 눈을 뜨는 것이 아니고, 항상 전체의 개별적 측면만을 보기 때문에, 그것은 저절로 다른 측면이 그것에 의해서 무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새로운 시대의 철학은 종래에 등한시되었던 그와 같은 측면을 시야에 넣고, 이것을 파악하는 임무가 부과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은 최종적으로 항상 동일한 목표에 관계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에는 역사, 즉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킬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법에 있어서 합리적 또는 이념적인 동기는 17-18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적, 자연법주의에 의해서 일면적으로 강조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역사법학파와 궁극적으로는
법실증주의 중에서 그 구제책을 찾아야 했다. 19세기의 법실증주의는 확실히 역사적 과제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법실증주의는 법의 실재적 측면, 그 實定性(Positivitat)을 다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 극단적인 실증주의적 사고에 기하여 소름이 끼치는 법의 남용이 있게 되자, 법의 본질적, 내용적 식별기준 그리고 부당하게도 오랫동안 등한시된 정당성의 문제에 다시 눈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예로부터도 우리는 철학자가 철저히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물음을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올바른 철학적 문제제기가 아주 영향이 큰 그리고 중대한 학문상의 책임을 수반하는 문제인 것을 명백하게 하여 주었다고 본다. 또한 특정의 철학은 그 문제제기에 의해서만 이해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철학자가 어떠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 문제에 접근하였는가를 파악하지 않고, 또한 특정의 사상가를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 철학자의 어떠한 철학적 사상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철학의 학설을 아는 것은 아직 철학 자체가 아니고, 하이데거(Heidegger)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기껏해야 철학이라는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제4절 科學主義와 哲學主義 그리고 應用主義의 誤謬
“純粹한 철학자”의 법철학이 “순수한 법률가”의 법철학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었다. 우선 後者에 관해서 말한다면, 순수하게 법률학적으로만 추구하는 “법철학자”는 科學主義의 誤謬에 빠진다. 즉 (도그마적 個別)學問의 誇大評價, (法)學的 思考의 一面的 指向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그와 같은 법철학자는 철학의 근거없이 그리고 대개 철학상의 지식도 없이 법철학상의 문제에 그리고 역시 법의 근본문제에 答하려 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널리 퍼져있다. 이점에 관하여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철학상의 문제에 대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판단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개별)학문에서는 학습, 교육, 방법이 이해를 하는 데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면서도, 철학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없이 참여하여 토론할 수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한다”. 법률가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거의 모든 법률가들은 法哲學의 문제에 관하여 설령 그 사람이 哲學에 몰두하는 일에 全無하더라도 판단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法律學的
科學主義가 좀 더 확실해진 것은 今世紀에 들어와서 소위 一般法學, 요컨대 이 법률학적 과학주의에 의해서 “法哲學의 安樂死”가 되었던 때이었다. 이 때에는 법률 “專門家”가 철학한다는 일을 장악하고, 따라서 법철학을 “법률가의 철학”으로 개조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법률학적 近親相姦의 결말은 기껏해야 직관에 의해서 아마 들어맞을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철학의 본분을 모르는 통속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통상 그것은 통속적 지식(Dilettantismus)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고무되어 지향하는 “법철학자”는 逆의 誤謬, 즉 哲學主義의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은 고유한 법의 문제, 즉 법학이 현재 여기서 철학에 제기하고 있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철학자는 때로는 갖가지의 철학적 思考傾向을 법철학의 언어로 변화시키면 어떻게 되는가에 관해서 경탄할 정도로 깊은 함축성있는 연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그는 특정한 史的 상황 안에서 전혀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에 답하였고, 따라서 오늘날 여기서 전혀 물음의 가치가 없는, 즉 물을 가치조차도 없는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그러므로 應用主義라는 만연된 오류에 대하여서도 강한 경고를 하여야만 한다. 그것(응용주의)은 법철학적 문제에 답하기 위한 철학적 학설을 無批判的으로 받아들인 오류이다. 그와 같이 하여 발생된 것이 법철학에서 잘 알려진 諸 學派이다. 예컨대 토마스주의, 칸트주의,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등등이다. 우선 이들에 대하여 철학상의 학설(Aussagen)이 결코 數學上의 公式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완성된 解法 -완벽한 처방전- 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이들 학설에서는 일정한 공간적, 시간적 입장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보려고 하는 시각인 諸 觀點만이 문제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철학을 흔히 기대에 못 미친다고 비난만을 하여 왔으나, 그것은 실제로 철학
을 사려없이 무비판적으로 취급하려는데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의 학설은 적극적으로 그 思考를 따라서 음미하고, 그리고 함께 사고하는 곳, 말하자면 스스로가 함께 철학하는 곳에서만이 그 학설은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외면적으로 인계받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획득한 것을 자기의 행위 속으로 轉化해 버린다는 의미에서 攝取한다는 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上述한 것에 의하면 學派의 형성은 철학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와 같은 諸 學派는 확실히 많은 공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만간 그들과 다른 입장에 대하여 흉금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절대화, 모든 취합하기 쉽고 정확한 공식 -예컨대 “命令은 命令이다”, 또는 “法은 正義이다”란 것- 그들 모두는 그 핵심에 不眞實과 硬直만 비호되고 있다. 단지 열려있는 것, 완성되지 못한 것, 물음이 계속되는 것, 그것들만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제5절 법철학과 법이론
지금까지 법철학과 법도그마틱을 언급하였다. 그러면 법이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울리히 슈로트(Ulrich Schro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법이론이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형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론이란 개념이 논하여지고 있는 문제영역이 특히 잡다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영역을 취급하는 유형과 방법도 너무나도 잡다하기 때문이다.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를 법이론의 문제로 본다. 法秩序의 개념과 본질이란 무엇인가? 法律과 法命題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법질서와 각개 법률의 정통성은 어디서 도출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합리적 법률과 판결이 획득될 수 있는가? 어느 정도 법률은 형식화가 가능한가? 현행법질서는 어느 정도 공정한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러한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슈로트에 의해서 논하여진 문제 전체는 純粹한 법철학적 문제여서 사실에 있어 법철학과 법이론에는 어떠한 본질적 구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법이론은 법철학과 다른 형식적 객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법이론의 경우에도 문제되는 것은 법의 근본문제이며, 법이론이 체계초월적 입장을 지니고, 또한 법이론적 사고도 초월적 도그마的 思考이다. “批判的”이란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술어에도 차이는 없다. 비판은 항상 철학에 속한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에 관한 문제이다. 비판이란 ???????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구별한다”, “분리한다”라는 뜻으로, 즉 善으로부터 惡을, 眞으로부터 거짓을, 正에서 不正을 “분리한다”, “구별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善한 것, 진실한 것, 정당한 것을 파괴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비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법철학과 법이론의 구별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만약 법철학이 없다면, 도대체 법이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학문의 광범위한 전문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다. 무언가 비슷한 것은 -본래 “專門化”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철학과 법철학의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리이스 철학의 시대에서 이미 철학의 결정적인 추세가 나타났다. 즉 그리이스철학이 열어 놓았던 시야 중에서 (개별)학문
이 형성되었다. 문화인류학으로서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의 自立性, 논리계산(Logistik) 및 의미론(Seman- tik)으로서의 논리학의 역할을 지적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본래 모든 자연과학은 철학에 그 원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철학도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mutatis mutandis)- 같은 상황이다. 법철학도 역시 세월이 지나가면서 한스 뤼펠(Hans Ryffel)의 말과 같이 다양한 영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칸트는 그가 쓴 “法學(Rechts- lehre)의 形而上學的 基礎”에서 物權法, 婚姻法, 親權法,國家法, 國際法 등등을 논하고 있다. 또한 헤겔의 “법철학”이란 작품에서는 예컨대 所有權, 契約, 不法, 責任, 家族, 國家에 관한 節이 보인다. 그리고 구스타프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최후의 “고전적” 법철학자- 에 있어서도 역시 그와 같은 章이 보인다. 예컨대 私法과 公法, 所有權, 婚姻法, 相續法, 刑法, 訴訟法, 교회법, 국제법 등의 章이 있다. 결국 모든 法律問題를 철학적으로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권법, 상속법, 형법, 국제법 등이 별로 이렇다고 하는 것 없이 독립된 분야로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영역의 점진적인 複雜化 때문에 점점 더 전체의 槪觀이 어렵게 된 시대의 추세 속에서 지난 20-30년간에 법철학 중의 일정한 주제를 분리하여 그 분리된 주제를 “법이론”이라는 標題 下에서 논하였다. 예컨대 法規範學, 法律言語의 理論, 法의 學問論, 法認識論, 法論證論, 法決定理論, 그리고 더 나아가 法學方法論, 意味論, 解釋學, 그 밖의 법학적 Topik, 立法論, 기타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그것 이상으로 독립한 상속법, 형법, 국가법 및 법사회학의 경우와는 달리 “법이론”의 上述한 문제영역은 아직도 법철학에 속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법이론을 법철학으로부터 구별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법철학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법이론에 있어서도 그 사정은 동
일하다.

제6절 哲學과 法哲學의 根源
철학 내지 법철학은 본질적으로 무엇이어야 하고 또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근원에 관해서 명백히 하여야만 한다. 이때에 그 (철학의) 이념에 의하면 철학은 “불변의 哲學”(philoaophia perennis) -영원히 하나됨- 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법칙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확실히 합법칙성(Gesetzmaßigkeit)이 문제되지만, 이 경우는 결코 우연 또는 철학자들의 기분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야스퍼스는 철학에는 세 가지의 주된 根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놀라움, 의심, 비애적 충격이라는 것인데, 이것에 상응하여 철학에는 세 가지의 기본적 부문이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은 존재론, 인식론 및 실존 철학이 그것이다. 각 분야는 그에 상응한 세계에 대한 특유한 태도인 완전히 특수한 세계관을 갖는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관은 그들의 (좋은) 시절을 가졌다.

1. 存在論
존재론적이고 객관주의적 그리고 1차적으로 존재에 주목한 모든 철학은, 모든 驚異 중의 驚異에 대한 놀라움, 즉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無는 아니라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괴테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들이 창조한 것이 아닌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자연적인 놀라움이 지식욕을 생기게 하고, 의문을 제기하도록 재촉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놀란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무언가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이유, 즉 無는 아니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데 있다. 그것은 존재론의 문제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존재에의 신뢰감에 근거한 철학이다. 이 철학은 존재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고와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존재론은 객관주의적 철학이다. 이 철학은 존재에 주목하고 있으며, 인식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존재에 대한 신뢰감에 근거하여 객관적 현실에 주목한 철학은 뚜렷한 구조를 갖고 확실한 기초 위에 서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정신적, 문화적으로 最全盛期에 있어서 존재론이 철학적 사고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되어 있다. 고전시대의 성숙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최전성기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독일 관념론의 극치에 있어서 헤겔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객관주의적 법철학도 놀라움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 존재가 질서와 형성에 관한 근본원천을 그 내부에 품고 있다는 것, 사물뿐만 아니라 관계에도 “自然的”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 즉 인간이 사회에서 공동생활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처음부터 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예절(Gesittung)에는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자연법의 문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법을 인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자는 객관적으로 정당한, 존재론적으로 공정한 법에 관한 물음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을까? 법을 그 본질상 우리들의 사고와 의욕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재라고 이해하여, 법의 存在具有性이 부정되지 않는 곳에서만 진정한 자연법론이 가능하다.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 달리 자연법의 타당한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자연법론은 결국 언제나 법존재론이 된다. 따라서 자연법의 최전성기는 존재론의 최전성기와 때를 같이한다. 자연법은 원칙적으로 존재를 신뢰하는 기초 위에서만 번영한다. 스스로 세계에 신뢰를 갖는 세대만이 자연법에 주목하게 된다.
2. 認識論
모든 객관주의적 철학이 놀라움과 신뢰감에서 시작한다면, 主觀主義의 철학은 不信과 懷疑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가에 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우리들이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착각에 빠지며, 또한 너무나도 자주 우리들의 사고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경험해 왔음이 틀림없을 때, 우리들이 지각하고 인식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우선적으로 한번은 문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와 같은 철저한 회의에서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제로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가 명백하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Descarte)가 그의 “철학적 성찰”(1641)이란 작품에서 모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한 의심을 그 근원까지 했을 때, 이는 우리들의 인식의 확실성, 즉 “명석하고 분별력있는 인식”을 문제로 한 것이었다. 칸트는 또한 “純粹理性批判”(1787)의 序文에서 신앙이 안주할 장소를 열어주기 위해 예전의 형이상학의 (억측적) 지식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쓴 것도 그것을 문제로 한 것이다.
懷疑로 철학을 시작하는 곳에서의 세계관은 그렇지 않는 곳의 세계관과는 대조적이다. 전자의 경우 그 자체가 존재하는 사물에 주목하지 않고, 사고하는 주체에 향하는 것이다. 根本的인 것은 존재가 아니라 인식이며, 존재는 인식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프로타고라스(Pro- tagoras)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철학은 항상 주관주의적인 것이 되며, 인식철학이 된다. 이에 따라 “나는 어떻게 하여 나의 인식으로부터 “외계”(Außen-welt)의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가?” 다시 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인 근본문제가 그 내용이 된다. 이미 사물이나 대상, 그 存在가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식, 의식, 방법이 문제이다. 이제 第一哲學(prima philosophia)은 存在論이 아닌 認識論
이다. 그러므로 한때 괴테가 칸트의 철학에 관하여 그의 철학은 결코 대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라는 비난을 제기했던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더 이상 신뢰감으로 존재를 파악하지 않고 영원한 회의에 구속되어 있는 철학은 그 시대의 최전성기가 지나고 퇴조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히 징표하는 것이다. 괴테가 엑커만(Eckermann)에게 말하길 “나는 당신에게 뭔가를 밝히겠다.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생애에서 깊이 실감할 것이다. 퇴락하고 쇠퇴해 가는 시대는 모두 주관적인 경향으로, 반대로 진보하는 시대는 모두 객관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1826년 1월 29일).” 그리고 여기에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현대는 퇴락하는 시대인데, 그 이유는 주관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은 그대로 법철학에도 타당하다. 법철학의 시작이 존재 속에 미리 주어진 질서에 대한 놀라움에서가 아니라, 그 같은 질서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심에서 시작될 때는, 올바른 법에 대한 물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루돌프 슈탐믈러(Rudolf Stammler)가 말한 “법의 지식”에 관한 문제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법은 독립한 存在具有性이 부인되며, 법이란 단지 名目的 槪念에
지나지 않고, 입법자의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서 창조된 법률에 대한 총칭에 지나지 않는다(法律實證主義). 자연법의 이념은 전혀 이해되지 못한다. 자연법칙이라 말하는 것은 “과학적인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것처럼, 자연법이란 “이론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 같이 하여 법철학은 “일반법학”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붕괴경향이 나타난다.
3. 實存哲學
철학한다는 것의 제3의 근원은 인간이 현재의 “限界狀況”에 서 있을 때에 받게 되는 실재적인 비애적 충격이다. 한계상황이란 인간이 극복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인간(또는 사회 전인류)이 그 현재의 한계, 말하자면 매일 염려하는 세계가 최후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것을 경험하는 상황이다. 예컨대 책임, 죽음, 전쟁, 전염병, 문화의 붕괴, 민족의 몰락 등이 그것이다. 에픽테트(Epiktet)가 이미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은 한계상황의 의식, 즉 자기의 약함과 무력함을 자각하는 것이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입장의 결정을 재촉한다. 즉 인간의 현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Ernst Bloch).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이 한계상황에 어떻게 설 것인가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한계상황 앞에서 눈을 감고, 그것이 흡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리고 언젠가는 실제로 그 한계상황에 압도되고 마는 수가 있다. 그것은 一般大衆의 현존재의 비본질적 형태이며, 그들 현존재의 欠缺된 존재형태이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마주 서서, 그 상황을 의미있게 자기의 계획과 실행행위에서 고려하고 그리고 자기의식의 변혁에 의해서 완전히 그 자신이 될 때에만, 인간은 진정한 實在, 본래의 현존재를 얻게 된다. 실존철학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실존철학은 단순히 無爲徒食하며, 비본래적 자기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충동에 저항하는 것을 인간에 불러일으켜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자신을 위해 판단하고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의 실현에 도달하게 된다.
한 시대가 붕괴하고 따라서 위기에 처할 때는 항상 우선적으로 실존철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위해서 언급한 것에 의하면, 놀라울 것은 하나도 없다. 실존철학은 전환기의 전형적인 철학이다. 설령 명칭은 그렇지 않더라도 고대 벽두에 소크라테스(Socrates) 이전의 철학자들에서, 중세 벽두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us)에서, 근대 벽두에 예컨대 파스칼(Pascal)에서 그와 같은 철학으로 나아갔다. 또한 그것은 우리들의 시대, 즉 새로이 아직 명칭이 없는 제4의 과도기시대의 철학이기도 하다.
법의 영역에 있어서도 실존적 충격, 한계상황의 의식화, 절대적인 가치의 척도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 현세의 법의 피할 수 없는 좌절과 그런 법이 최근에 보여준 문제성에 대한 경험 등이 존재한다. 라드부르흐는 언젠가, 惡한 양심을 갖는 법률가도 좋은 법률가일 수 있지만 “그의 직업생활의 모든 순간에 있어서, 동시에 필연성을 갖고서 그의 직업의 심각한 문제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법률가만이 좋은 법률가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법률에만 눈을 밝히는 실증주의자의 태도이다. (법실증주의자의) 그와 같은 태도는 특히 우리가 금세기에 있어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경험하였던 것 같이, 정치권력에 대하여 무력하였다. 법실증주의는 실존철학적으로 본다면, 본래적이 아닌, 결점투성이의 법의 수단이다. 법실증주의는 일차적으로 법에 대한 태도이자 관점이며, 이론은 아니다는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법실증주의의 극복은 단지 반대이론, 즉 다른 “주의”를 성립하는 데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무엇보다도 먼저 실증주의가 법에 가하는 위험(물론 법실증주의에서만은 아니지만)을 의식하고, 그로부터 이들 위험에 대처할 각오를 획득하는 데서 성공하는 것이다.
4. 다양한 경향의 종합
앞에서 언급한 철학상의 경향은 이념상으로 본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향도 이와 같은 순수한 경향을 취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 경향에 중점을 두느냐 하는 점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특히 어느 철학의 특성을 전형적인 이념적 모습으로 집약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보다도 더욱 명백히 그 철학의 오류를 뚜렷이 볼 수 있다.
법에 대한 종래의 실체존재론적(substanzontologisch)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목재나 집과 같이 일정한 “객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은 인간 상호간이나 인간과 물건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형체(Gefuge)이다. 그러므로 실체존재론 대신에 관계의 존재론을 전개시켜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관적인 것”(Subjektives)으로 보아 결국 “기능적인 것”(Funktionale)으로 발산시켜 버리고, “존재적인 것”(처분할 수 없는 것)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도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법은 입법자의 완전한 자의에 맡겨지는 위험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분리하려는 태도는 주관-객관-도식(Subjekt-Objekt-Schema)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도식은 오늘날에 와서 자연과학에서조차도 의문시되고 있고, 그러므로 해석학적 학문(이해과학)에서는 결코 적합치 않는 것이다. 그러한 도식은 人格的 思考(personaler Denken)에 결코 어울릴 수가 없다.
이런 경우 회피해야 할 사고방식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식의 극단적 실존철학(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도덕률을 결정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식의 극단적 기능주의(이에 따르면 법은 오직 절차를 통해서 성립되고, 합법화된다고 한다)이다. 인격(Person)과 마찬가지로 법(Recht)도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포기(Aufgegeben)도 가능하며, 이 양자는 각각 객관적인 것(Objektivitat)과 주관적인 것(Subjektivitat)을 불가분적으로 하는 하나의 실체이며 그리고 인격형성과정(personaler Gestaltungsprozeß)의 “내용”(Was)과 “방법”(Wie)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격형성과정을 통해서 인격과 법은 그 구체적 현실적 실체로 나타나게 되며, 그렇다고 반드시 이와 같은 과정의 산물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 점은 실질적(인격적) 기초가 된 절차적 정의이론의 이념이다.

제7절 현대의 철학과제 및 법철학의 임무
오늘날 우리는 변화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즉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고들 말한다. 이 흔들리는 세상은 다른 세상을 창출한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징표이다: 합리성이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 우리 주위에서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온 것이지만- “포스트 모던”의 바람이 불었다. 이는 비합리성의 복고풍의 다름 아니다. 이제 비합리성은 학문임을 자인하는 철학을 위해 결코 어떤 처방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합리성과 이성에 토대를 두자마자, 현대에 대한 불쾌함 그리고 포스트 모던이 그렇게 큰 호감을 부여한 계몽에 대한 불쾌감이 어디서 도래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렇다. 즉 그것은 모든 것을 단순한 지배지식과 이용지식으로 전용하고 이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한 문제의 대답을 하는데 무력케 된 것이 입증이 된 “전체주의적 이성”, 즉 “오랫동안 지속된 계몽”이며, 바로 그것이 “현대를 완성케 하는 강제인자”이었다. 이러한 언명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철학의 과제에 대한, 또한 법철학의 과제에 대한, 계속해서 반복된 두개의 극단적 견해를 각각 대비하여 보거나, 혹은 서로 분리하여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의 방향은 철학에 대한 과제를 세계와 인간 그리고 법에 관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면서 불변적 언명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한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절대적) 자연법이론을 생각해 보라-, 그렇지만 그러한 시도는 그 때마다 좌절되었다, 특히 그와 같은 절대적이고 초시간적 내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칸트에 따르면- “순수한” 인식은 오직 형식(이 형식에 의해서 어떤 것이 인식된다)에 관해서 뿐이고, 그러나 그 내용은 인식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이성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서 온 것이고, 오직 후발현상(posteriora)에 불과한 것이어서 결코 “순수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다른 방향의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 방향은 철학하는 것의 “순수성”을 위하여 모든 내용, 특히 가치에 관한 언명을 무시했고(예를 들면 Max Weber의 “학문의 가치무관성”, Hans Kelsen의 “순수법학”) 그리고 오직 존재의 형식을 비롯한 사고의 형식과 법의 형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순수성”은 대부분 사람들이 “합리성”(Rationalitat)을 결정적 기준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내용을 문제삼는 철학 모
두를 비합리적이고 비학문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거부한다. 그러나 이처럼 그렇게 형식적 순수성으로 압축된 합리성은 실질적으로 당면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철학에서 형식주의(Kant 스스로가 대표하지 않지만)는 어느 정도 날카로운 이론구성을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그러나 내용없는 思考(Gedanken)가 공허한 것이 인정되자, 실생활에서 형식주의의 철학의 의미는 경미한 것이 되었다. 더욱이
형식주의가 합리성의 준칙에 얽매일 수록 더욱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 이것들 모두를 가질 수 없다. 즉 형식적 순수성과 내용적으로 의미있는 언명의 힘.그 점을 현대 법철학자 중에서 Gustav Radbruch보다 더 잘 인식한 철학자는 없다. Radbruch 자신은 형식주의적 일반법학의 출현 1세기 후에 다시금 법의 내용을 본질문제로 삼는 최초의 한 사람이었다. 철학에서 “사물 자체에”의 복귀가 요구되자 마자 거의 동시에 법철학에서 역시 “법이란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dmund Husserl의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에 관한 理想”(1913년)이란 책이 나온 지 1년만에 Radbruch의 “법철학 개론”(Grundzuge der Rechtsphilsophie, 1914)은 법의 내용과 법의 정당성의 문제를 다룬 책을 출판했다. 우리가 실증주의의 결정적 증인이라고 즐겨 부르는 Radbruch는 사실은 그것의 극복자이다. 그는 일찍이 주장한 존재와 당위사이의 “방법이원론”에서 이념의 素材規定性이란 사상을 거쳐, 후에 “사물의 본성”의 이론에 도달하기까지 외길을 걸었다. 법철학의 새로운 章의 이행은 라드부르흐의 이름과 결합하였다: 자연법과 실증주의의 저편에 있는 법철학으로.
물론 Radburch는 그의 법철학의 실질화를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이러한 대가가 법철학적 내지 가치이론적 상대주의이었다. Radbruch는 물론 법의 가능한 최고가치의 수를 제한하려 했으며, 유일한 정당한 가치의 물음에 대한 학문적 답변을 해보려 했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배후에 자유와 관용에 대한 열정, 즉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앞서 있었다. 독재체제 아래서는 이러한 열정이 배반된 것을 알게 되자 법철학에서 상대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즉 독재체제 아래서는 법의 내용이 독재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길은 우리에게 오늘날 소망스럽게 영구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으니까 실질적인 학문적 법철학의 이상을 포기해야만 할까?
Radbruch는 너무 일찍 포기했다. 그가 법의 최고가치 -인격적 가치, 집합가치, 작품가치- 를 일으적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처음부터 그러한 가치의 내용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모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과의 대화는 오직 정치적으로만 가능할 뿐이지, 그러나 학문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철학을 축소시킨 것이다. 라드부르흐도 인식을 오직 일의적인 “순수한” 인식으로 보려고 했다는(그도 역시 칸트주의자이기 때문에) 것을 제외하고는 철학적 인식의 전과정을 지나치게 독백하는 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철학적 인식은 협동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철학의 완성은 -그와 동시에 철학을 하는 인간의 자가완성은- 다른 철학하는 사람과 철학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미 플라톤에 의해 설립된 아태네의 아카데미에서도 이러한 인간 상호간의 철학하는 것(Miteinanderphilosophieren) 을 알았고, 이미 그 당시 신중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대화를 위한 일정한 방법적 규율이 완전하게 존재했다. 현대의 對話論(Jurgen Habermas)에서 이러한 理想, 즉 진실(정당성)은 특히 비경험적(규범적) 분야에선 오직 협동적으로만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이상은 다시금 대단한 자극이 되었다.
權威的 思考는 의사소통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상대주의는 내용에 관하여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의사소통을 하려는 대화를 너무 일찍이 단념해 버린다. 따라서 兩者는 의사소통이란 방법으로 “전달을 통한 공동체”를 서서히 실현한다는 철학하는 (본래의) 임무를 그르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전달이라는 것이 단순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철학적 논의의 목표는 개인 상호간의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합의의 무산이 대화의 무산으로 동일시 여기는 것처럼 보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대화는 대답없이 방치되었음에 틀림없던 바로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상호간의 이해와 수용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이 강제와 폭력에서 서로 자유롭게 “당면한 중요문제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서로 압제와 폭력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의사를 표명하려는 것은 그래서 제정신이 들게 한 것은 “인공두뇌학시대”에서도 또한 존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임무에 있어서 어떠한 기계, 특히 자동기계조차도 인간에 의해 지배될 뿐이지 인간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후기”(Postmoderne)는 기술적 합리성을 가지고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法制化는 합리성의 일부분이다- 결코 우리가 그것을 초월하여 인간과 인간의 기초를 잃어버릴 정도로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의미한다.

주요 참고 문헌
A. Einfuhrung in die Philosophie
Bloch, Ernst: Tubinger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2
Bde., 1963, 1964.
Heidegger, Martin: Einfuhrung in die Metaphysik.
1953.
Jaspers, Karl: Einfuhrung in die Philosophie, 1953
(Serie Piper 13, 1986).
Speck, Josef (Hrsg.): Grundprobleme der großen
Philosophen, 9 Bde., 1975ff.
Stegmuller, Wolfgang: Hauptstromungen der Gegen-
wartsphilosophie; Eine kritische Einfuhrung. 1.
Bd., 6. Aufl. 1978; 2. Bd. 8. Aufl. 1987; 3. Bd. 8.
Aufl. 1987.
B. Rechtsphilosophie
Adomeit, Klaus: Rechtstheorie fur Studenten, 2. Aufl.
1981.
Alexy, Robert: Theorie der juristischen Argumentation,
1978.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5. Buch (uber die
Gerechtigkeit). Ca. 320 v. Chr.
Bydlinski, Franz: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Rechtsbegriff. 1982.
Coing, Helmut: Grundzuge der Rechtsphilosophie. 4.
Aufl. 1985.
Dubischar, Roland: Einfuhrung in die Rechtstheorie.
1983.
Engisch, Karl: Einfuhrung in das juristische Denken. 8.
Aufl. 1983.
Engisch, Karl: Auf der Suche nach der Gerechtigkeit;
Hauptthemen der Rechtsphilosophie. 1971.
Fechner, Erich: Rechtsphilosophie; Soziologie und
Metaphysik des Rechts. 2. Aufl. 1962.
Fichte, Johann Gottlieb: Rechtslehre, 1812.
Fikentscher, Wolfgang: Methoden des Rechts in
vergleichender Darstellung, 5 Bde. 1975-1977.
Haft, Fritjof: Juristische Rhetorik, 3. Aufl. 1985.
Hart, H. L. A.: Der Begriff des Rechts. 1973.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 oder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 1821.
Henkel, H., Einfu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2.
Aufl. 1964.
Hoffe, Otfried: Politische Gerechtigkeit; Grundlegung
einer kritischen Philosophie von Recht und
Staat, 1987.
Kant, Immanuel: Metaphysik der Sitten; 1. Teil: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Rechtslehre.
1798.
Kaufmann, Arthur: Rechtsphilosophie im Wandel, 2.
Aufl. 1984.
Kaufmann, Arthur: Beitrage zur Juristischen Hermen-
eutik – sowie weitere rechtsphilosophische
Abhandlungen. 1984.
Kaufmann, Arthur: Theorie der Gerechtigkeit –
Problemgeschichtliche Betrachtungen, 1984.
Kelsen, Hans: Reine rechtslehre. 2. Aufl. 1960
(Nachdruck 1976).
Kelsen, Hans: Allgemeine Threorie der Normen, 1979.
Klenner, Hermann: Rechtsphilosophie in der Krise,
1976.
Klenner, Hermann: Vom Recht der Natur zur Natur
des Rechts, 1984.
Koch, Hans-Joachim(Hrsg.): Juristische Methoden
lehre und analytische Philosophie, 1976.
Koch, Hans-Joachim/ Helmut Rußmann: Juristische
Begrundungslehre, 1982.
Larenz, Karl: Methodenlehre der Rechtswissenschaft. 5.
Aufl. 1983.
Maihofer, Werner: Recht und Sein; Prolegomena
einer Rechtsontologie, 1954.
Marcic, Rene: Rechtsphilosophie; Eine Einfuhrung.
1969.
Muller, Friedrich: Jurisctische Methodik, 3. Aufl. 1989.
Naucke, Wolfgang: Rechtsphilosophische Grundbegriffe,
2. Aufl. 1986.
Neumann, Ulfried: Jurische Argumentationslehre, 1986.
Noll, Peter: Gesetzgebungslehre. 1973.
Pawlowski, Hans Martin: Methodenlehre fur Juristen:
Theorie der Norm und des Gesetzes, 1981.
Perelman, Chaim: Uber die Gerechtigkeit. 1967.
Perelman, Chaim: Das Reich der Rhetorik; Rhetorik
und Argumentation, 1980.
Peschka, Vilmos: Grundprobleme der modernen
Rechtsphilosophie, 1974.
Radbruch, Gustav: Rechtsphilosophie. 8. (postume)
Aufl. 1973 (besorgt von Erik Wolf und
Hans-Peter Schneider).
Radbruch, Gustav: Vorschule der Rechtsphilosophie. 3.
(pestume) Aufl. 1965 (besorgt von Arthur
Kaufmann).
Radbruch, Gustav/Konrad Zweigert: Einfuhrung in die
rechtswissenschaft, 12. Aufl. 1969.
Rawls, John: Eine Theorie der Gerechtigkeit, 1975.
Rawls, John: Gerechtigkeit als Fairneß(hrsg. von
Otfried Hoffe), 1977.
Reich, Norbert: Marxische und sozialistische
Rechtstheorie, 1972.
Rottleuthner, Hubert: Rechtstheorie und Rechts-
soziologie, 1981.
Ryffel, Hans: Grundprobleme der Rechts – und Staats-
philosophie;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des
Politischen. 1969.
Schramm, Theodor: Einfuhrung in die Rechts-
philosophie, 2. Aufl. 1982.
Seidler, Grzegorz Leopold: Rechtssystem und Gesell-
schaft, 1985.
Stranzunger, rudolf: Gerechtigkeit; Eine rationale
Analyse, 1988.
Tammelo, Ilmar: Theorie der Gerechtigkeit. 1977.
Tammelo, Ilmar: Zur Philosophie der Gerechtigkeit,
1982.
Thomas von Aquin: Recht und Gerechtigkeit; Deutsche
Thomas-Ausgabe, 18. Band, 1953 (Summa
theologica Ⅱ, Ⅱ, 57-79; entstanden 1266-1272).
Trapp, Rainer W.: “Nicht-klassischer” Utilitarismus;
Eine Theorie der Gerechtigkeit, 1988.
Vieweg, Theodor: Topik und Jurisprudenz, 5. Aufl.
1974.
Wesel, Uwe: Juristische Weltkunde; Eine Einfuhrung
in das Recht, 3. Aufl. 1986.
Zippelius, Reinhold: Rechtsphilosophie; Ein Studien-
buch. 1982.
Zippelius, Reinhold: Juristische Methodenlehre, 4. Aufl.
1985.

제Ⅱ장  法哲學의 問題史
Arthur Kaufmann 지음  허일태 옮김

1절 서  론
법철학의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올바른 법이란 무엇인가? 2. 우리는 이 올바른 법을 어떻게 인식하고 실현하는가?(이 두 문제가 결합해서 법의 효력문제가 발생한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완전히 서로 분리하여 논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다고 우리는 오랫동안 믿어왔고 또한 오늘날에도 적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는 올바른 법(그러한 법이 설사 무슨 법이라 하더라도)을 우리의 思考에 대립해 서 있는, 즉 대상을 순수하게 객관화시킨 속에서 “주체”에 의해서 파악해야 하는 “객체”, 다시 말하면 어떠한 주관적 요소가 뒤섞임이 없이 파악해야 하는 객체인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 점이 정확한 자연과학의 모범에 지향하고 있는 신시대의 학문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시대는 종말을 고하려 한다. 학문이론 중에서 새로운 인식은 이 세계는 자연과학적 척도와 범주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관찰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연과학 분야에서조차도 모든 점에서 주관성이 없는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그 점은 법학을 포함하고 있는 이해과학에서도 들어맞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음에 또 언급되겠지만, 주관-객관이라는 도식은 이미 출발점으로서 부적당하다. 법학에 있어서 어떠한 인식도 법이용자(Rechtssuchender)에 의해서 영향이 새겨져 있지 않는 그러한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 이 경우에 항상 또한 (그러나 확실히) 창조적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즉 법을 “인식한다는 것”은 또한 항시 법을 “형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다시금 더욱 명
료하게 말한다면, 구체적 현존재형식 속에서 法(즉 법관에 의해서 선언되어지고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언제나 파악된다.
이와 같이 “올바른 법”에 관해서는 “올바른 법의 방법”을 고려함이 없이, 즉 “무엇에 관해서”는 “어떻게”라는 것을 고려함이 없이는 전혀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 章에서는 다음의 두 절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적 면에서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교수방법으로서는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문제점도 점진적인 방법으로 파헤쳐야지, 단번에 모든 점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관념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여러 번 논의되었던 “해석학적 先判斷”(hermeneutischer Vorurteil)과 그 유명한 “해석학적 순환”을 간단하게 언급해 둔다. 우리는 오직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이 무엇인가는 전체를 미리 이해하고 있을 때에만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서론에서 어느 정도 결론을 암시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다음의 부분에 관한 설명이 어떠한 “전체” 중에서 어떻게 체계적으로 자리잡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問題史的” 說明이 필요할까? 철학상의, 그러나 또한 정신과학상의 인식은 그 자체 독립해서 얻어질 수 없고, 대화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역사를 통해서 부단히 이어져 내려온다(단지 짧은 시점에서는 비약이라는 인상을 준다). 또한 철학과 법철학도 그들이 순수하게 思念的으로 되지 않으려면 경험에 준거해야만 한다. 또한 여기서 어느 정도는 “구체적 사정”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 철학의 “구체적 사정”이라는 것은 그러나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 이로부터(역사로부터) 경험을 얻어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법철학의 역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철학의 問題史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즉 그것에 대해 철학적 관심을 갖지, 그러나 그 밖의 어떠한 철학사
적 관심사나 철학적 학문상의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은 아래의 설명에서 항시 주의를 해야 한다(제2절과 제3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제2절 법철학의 역사적 전개
법철학사를 서양의 법철학사에 한정하고자 한다. 그 실질적 이유의 하나는 서양의 법철학사가 독일의 법문화를 특징지웠고, 또 다른 이유는 지면상의 이유이다. 물론 유럽이 법문화의 유일한 발상지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아주 예전에 아시아-바빌로니아(함무라비 법전!),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도 고도의 법문화가 전개되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도 이점에서는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법철학과 그리고 법의 보편사는 누군가 기술해야만 할 분야다.
Ⅰ. 고대의 법철학
1. 선사시대
선사시대인 B.C. 7세기 이전에는 의식적 반성을 통하여 법의 합리적 근거를 찾으러 하지 않았다. 理性의 비판에 견딜 수 있는 “자연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법에 대한 물음이 아직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물론 古代人도 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이유에 대한 물음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성향은 끊어버릴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구성에 대한 식별에서 연원한 것이 아니고, 또한 사건에 대한 어떠한 합법칙성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자연의 세계, 생명의 흥망성쇠(Vorgange)는 오직 초자연적, 인간에 유추해서 상상한, 자의적이고 계획성이 없는 지배하는 힘(Macht)에 기인한다고 보는 환상의 결과였다. “호머와 헤시오드는 모든 것을 신에게 덮어 씌었다”고 조롱한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말은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신화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고, 신화 속에서 법도 또한 그 근거를 가졌다. 그러므로 법은 이성에 입각한 바른 질서가 아니고, 신에 의해 지배되는, 즉 운
명적 법이었다.
고대인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 때문에 자신의 외부에서 혹은 심지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자연적 사건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늘과 땅, 질병과 전쟁, 生과 死, 이 모든 것들은 그들에 있어서 신비스럽고 신화적 힘으로 보여서, 힘의 작용과 원인관계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대해서 재앙, 즉 그들의 현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하기 때문에 극도로 미워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건을 당한 자는 그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고 느꼈다. 이 현존재의 불안은 그들에게 항시 따라 다니는 동반자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현존재의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리 낯 설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시대의 전환기에 있어서 현존재의 감정이기도 한다. 시대의 전환기에 특유한 실존적 충격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상황”이기 때문에, 현존재의 의미에 대한 견해의 표명이나 물음의 제기가 쇄도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고대시대의 말기에도 운명에 맡겨 버리는 감정에서부터 이성에 의해 기초된 근거를 처음으로 더듬어서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러한 진보를 마르치츠(Marcic)는 “신화로부터 이성으로”(von Mythos zu Logos)라고 표현하였
다.
2. 소크라테스 이전
이로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이라고 부른 시대에 들어왔다. 이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특색은 양극적 사고방식이다. 즉 하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양극적 대립을 통해서만 공통적으로 파악된다고 보았다. 이미 아낙시만더(Anaximander, 기원전 600년경)는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와 질서(오늘날 표현으로는 존재와 당위)를 사념상 분리했으나, 그러나 아직도 하나의 통일체로서 파악했다: 무엇이냐고 하는 모든 것은 또한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보았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이러한 법사상은 따라서 실존철학적 견해를 내포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거기서 그렇게 존재해야하는 법도 그 자체 현존재함으로써 각자가 자기주장을 할 권리가 주어지고 그리고 그 때문에 타인이 무엇을 한 사람이든, 어떠한 행동을 한 사람이든 간섭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상이 나왔다(아주 후세에 들어와서야 그에 대하여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500년경) “어둠”(Dunklen)의 저자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에서 고대 그리이스 정신의 양극적 사고방식을 그 완전한 모습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후세 사색가들 거의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상의 세계 배후에 이데아의 세계, 즉 진실한 존재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살아 있는 생성의 원리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히”(Entelechi: 그 자체 스스로 목적을 갖는 것, 질료가 실현될 형상, 조직의 발전과 완성을 작용하는 조직내에 놓여 있는 힘)의 개념을 낳게 했다. 이 세계를 동태적인 것, 생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파악한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너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들어 갈 수 없다”. 모든 것은 흐르며 그 원천이 없다), 모든 사물
은 대립을 통해서 생성되며, 모든 현상은 세계법칙(Weltgesetz)인 세계이성(Weltvernuft), 즉 Logos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 때문에 저 유명한 그러나 다툼이 있는 단편(Fragment) 114가 절로 이해된다. “모든 인간적 법률은 신의 법을 먹고산다”.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에 의한
규약(Satzung)의 정의가 자연의 정의, 즉 실정법을 자연법에서 구별한다. 이에 따라 합리적 정의론과 자연법론의 시작이 있게 된다. 물론 확실히 법과 자연이란 양자는 아직도 본질적 통일체로 파악되었으나, 그러나 사상가들은 이것들의 구별을 알았고, 따라서 그것들의 가능한 분리를 준비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이 법에 있어서 양극적 세계관은 지배적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고대시대의 자연과 규약이라는 대립이 중세에선 신의 법과 속세법이라는 대립으로 나타났다(중세 시대에서는 물론 자연법은 神法<ius divinum>과 人間法<ius humanum>사이에서 정착되어졌다). 이러한 대립은 현대에서 이성의 질서와 강제질서라는 대립으로 대치되었다. 여기에 3개의 공통적인 근본적 원리가 기초되어 있다: 1. 자연법은 변천할 수 없으며 보편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모든 시대와 인간에게도 역시 타당하다; 2. 자연법은 이성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 3. 자연법은 실정법에 대한 단순한 척도가 아니며, 자연법이 실정법과 모순될 때에는 실정법 대신 역할을 한다(따라서 여기서 이미 “법률상의 불법”의 사상을 볼 수 있다). 물론 고대에서 자연법론 뿐만 아니라 중세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도식(Schema)을 항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3. 소피스트의 철학
소피스트들은 이미 자연법이라는 포도주에 다시금 물을 넘쳐흐르게 부었다. 그들의 가장 저명한 대표자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기원전 480-410)에게는 모든 사물의 척도가 세계이성이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이란 확실히 경험적 인간이었지, 윤리적 인격체인 인간이 아니었다. 이러한 인간을 기준으로 보는 사상(Homo-mensura-Gedanken)에 의해 객관주의 법사상으로부터 주관주의 사상으로, 또한 가치론적 상대주의로 일보 전진되었다. 프로타고라스만해도 온건한 상대주의자였다. 고르기아스(Gorgias)와 트라쉬마코스(둘다 기원전 450년부터 350년 사이에 생존)는 더욱 혁신적인 상대주의자였다. 그리고 에피쿠어(Epikur, 기원전 371년부터 270년)와 카르네아데스(Karneades, 기원전 214-129)는 마침내 회의적 입장에 빠져서 본래 아무 것도 정당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칼리클레스(Kalikles, 기원전 5세기)는 누구든 자의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울 권리를 갖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법은 강자의 법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專制政治를 정당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프로타고라스로 돌아가
보자. 이미 그는 객관적 진실을 의문시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감각으로 느껴 언급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실성은 지각하는 주체에 관계하고 따라서 상대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思考로 규범과 자연(Nomos und Physis)이 날카로운 대립으로 분리되어 나타났다. 단지 실정적, 즉 인간의 합의에 의해 확립된, 규약만이 법으로서 효력을 가졌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궤변론을 학문상의 상대주의의 원천으로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상대적 민주주의의 원천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주관주의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적 주관주의였기 때문이다: 다수를 차지한 견해가 결정권을 갖는다. 다수 견해는 공평한 것과 불공평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다룬다라는 법의 최고 원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에 의해서 자의성의 개입없는 공평성이 정해지는가? 법철학의 이 핵심적 문제는 이미 그리이스 시대인 고대에서 완전하게 파악되었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작품에서 플라톤은 히피아스(Hippias)에게 말하길, “우리는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서 친척이 되고, 공동체 구성원이 되며 국민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사한 것은 본래 유사한 것의 친척이며, 인간을 압제하는 법은 이와는 반대로 자연에 반해서 많은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의 본성을 확실히 알면서도, 그러나 그 말에 어울리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창피스런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의 본성”이고, “사물의 본성”인가? 그것은 법에 있어서 강자인가, 혹은 소피스트인 안티폰(Antiphon, 기원전 5세기)이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입과 코로 숨쉬며 손으로 먹는 것일까? 그 점에 관하여 벨첼(Hans Welzel)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인간다운 본성의 변덕스러움은, 모든 자연법 사상가들에 의하면, 그 인간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을 형성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많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자연법론의 의미에서 “자연”은 움직일 수 없는 실체가 될 수 없으며(영원할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자연은) 또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불가침의 올바른 규범을 이끌어 내게 하는 절대적 도덕법칙도 될 수 없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것이다. 물론 계속 반복하여 그와 같은 주장에 근거이유를 제시하려고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다르게 이미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법론에서 “평등”과 “자연”은 상대적인 것이며, 그것들은 物體的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적인 것이다란 점이 알려졌다. “자연” 자체가 “평등한 것”이라는 점은 일정한 법을 고려할 때만 이야기될 수 있다. 그 때문에 위에 인용한 플라톤의 말인 “유사성”에 대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문제는 결국 유추의 문제, 즉 동등성이라는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5권)에서는 그 점이 아주 명확하게 나타난다.
4. 아테네의 철학(attische Philosophie)
이로써 우리는 소피스트철학의 완성품이자 동시에 극복으로서 볼 수 있는 아테네의 철학세계에 들어왔다. 이 철학의 원조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이며, 그의 학설의 거의 대부분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지만, 그 일부는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주론적 사색에서 인류학적 사색의 전환을 했다. 그는 한편에 있어서 도덕적 세계이성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을 더 이상 신봉하
지 않고, 다른 한편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실세계를 파헤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의 길은 너 지신을 알라라는 내적 탐구에 있다고 보았다. 자연법칙은 인간의 가슴속에 살며, 영혼은 인간에게 도덕적 척도를 주며 그리고 이러한 척도는 외적 권위가 흔들린다 해도 인간에게 머물러 있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선험적 자연법론을 세웠다. 이 학설은 후세에 키케로(Cicero), 파울루스(Paulus), 아우구스티누스(Au- gustinus),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 등의 많은 추종자가 따랐다.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도덕의 객관성, 윤리적 문제, 정의, 선, 덕의 내용에 대한 문제를 열심히 다루었다. 법과 도덕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물론 그의 학설에서보다도, 그의 생활을 통해서 실정법상의 정의를 존중하는 사상을 보여 주었다. 그는 실정법을 정의의 한 종류로서 파악했으며(이 점은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다시금 주장되었다), 따라서 실정법이 비록 잘못되었거나 혹은 심지어 범죄적 법이라 하더라도 실정법에 대한 복종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처럼 그는 바로 그러한 사상 때문에 죽게 되었다. 그가 탈옥의 권유를 거절한 그의 차분한 주장은 오늘날도 여전히 현실적이다: “국가가 아직 존립해 있고 선고된 법관의 판결이 어떠한 효력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국가가 멸망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에 의해서 준수되어질 수 없는 판결이 가능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느냐”고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법적 안정성에 대한 아름다운 시다! 확실히 (법적 안정성은) 모든 법률상의 중요한 요소이나, 우리가 절대화해도 좋은 그런 요소는 아니다. 이것 또한 역사가 가르쳐 준다.
소크라테스처럼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도 -그는 아테네에 있는 아카데미의 설립자다- 단지 주관적 마음에서 그 근원을 두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 지식을 기술하는 思考內容(Denkinhalten), 즉 감각세계의 변화와 불안정성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동일하게 남아있는 사고내용을 탐구했다. 그의 스승처럼 그도 어떠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을 찾고자 했다. 그는 그러한 진실을 인간의 영혼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제 현상에 先在해 있는 절대적 이데아 속에서 보았다. 그 이데아는 참되게 존재하는 것(Das wahrhafte Seiende)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동일한, 순수 개념적인 내용을 갖고, 그래서 모든 변화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플라톤은 이데아론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객관적 관념론적인 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사조는 후세에서도 아주 자주, 그리고 물론 다양한 수정아래 나타났다. 특히 헤겔(Hegel)을 생각하면 더욱 뚜렷하다.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이데아적 자연법론에서도 사실은 극단적 권위주의 국가이론이 세워졌다. 그는 모든 국민은 근본적으로 국가의사(Staatswillen)의 형성에 동참할 자격이 있다고 하는 프로타고라스의 견해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히려 공동복지를 잘 아는 소수의 인간집단이 있으며, 이들이 무식한 사람들을 강제력에 의해서도 지배해야만 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한 것처럼 그 강제적 지배가 무식한 사람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이나 영원한 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기꺼이 그러한 지배는 자기 자신의 정신에 의해 속한 것이지, 자기의 영역을 벗어난 외부적인 것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서 플라톤은 善을 위한 강제는 의사가 환자의 치료를 위해 강제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그의 자유개념과 어떻게 합치될 수 있느냐는 물론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민주주의가 이상적 국가형태가 될   수 없고, 귀족제나 군주제를 선호했다는 점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데아 그 자체처럼 국가의 이데아도 변화될 수 없고 진정한 법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완전하고 불변의 지식의 대상이다. 그 점을 플라톤은 “정치가”에 관한 대화편의 말미에 법률과 식견(Gesetz und Einsicht)을 서로 관련시킨 곳에서 뚜렷하게 보여준다. “법제정 기술은 왕의 기술에 속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제 확실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법률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이 있는 왕이 권력을 장악할 때이다.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
이유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정의롭고 가장 잘 수긍될 수 있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 결과 실제로 최선의 것을 명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법률을 불신했으며, 이데아가 근본이 된 자연법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이미 그는 후세에 특히 신스콜라학파가 열심히 다루었던 문제, 즉 “정의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때문에 정당한 것인지”라고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에 대한 물음에) 플라톤은, 예를 들면 후세의 파울루스와는 다르게, 전자의 의미에서 대답했다: 즉 그의 이데아적 자연법의 관점에서 내린 확실한 결론은, 신이 세계의 입법자(Gesetzgeber der Welt)가 아니라는 것이
다. 그는 노년기의 저작인 “노모이”(nomoi)에서 또한 평등성의 문제를 분석비평하여, 이미 위에서 언급한 소피스트에 관해서 언급한 학설인 정의라고 하는 것은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비례적인 평등(비례성, 유추)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학설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이론의 참된 지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에 와서야 그리이스의 자연법론이 그의 꽃을 피웠다. 플라톤의 20년간 제자였던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철학을 받아 들였으나, 이 철학을 결정적인 점에서 개량하였다. 다음 두 가지 점이 특히 그랬다. 첫째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자연개념(Naturbegriff)에 결합하였고, 이를 통하여 그는 이데아적 자연법론의 참된 창시자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형상과 질료의 통일체를 보았다. 그는 이들 둘을 “자연은 항시 어떤 대상이라는 현실성의 완전한 형상이다”라는 가설에 결합시켰다. 그래서 자연합치적인 것은 언제나 사물의 가장 좋은 상태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때에 자연이라는 것은 가치평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단순히 경험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자연적 정의와 법률적 정의의 구별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의 견해와 달리 그는 법률의 완전성과 그의 불가침적 타당성에 관하여 의문시했다. 이미 그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배워야만 했던 것인) 부당한 법률 또한 사실상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 법률상의 불법”을 형평성(Billigkeit)에 의해서 교정되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절대화한 법적 안정성이 여기서 다시금 이성적 척도에 의해 제한되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처음으로 자연법과 실정법의 定義를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법(Das Recht der Polis)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분리된다.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법이 인간에게 좋게 보이든 그렇지 아니하든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효력을 갖는 그러한 법이다. 실정법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그 내용이 정해져 있지 않으나, 한번 법률에 의해서 확정되면, 일정한 내용을 갖게 되는 그러한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자연법을 국가의 법, 즉 정치적 법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폴리스, 즉 국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과 구성원 공동체의 도달목표였다. 왜냐하면 국가만이 자급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주 인용되는- 본래 국가형성적, 즉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서 오늘날 아직도 정의문제에 대한 모든 진지한 숙고의 출발점을 삼는 정의론을 전개하였다. 정의의 핵심(그것은 객관적 정의로서 법의 지도원리로 이해되는 것이지, 도덕적 주관적 정의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은 평등이다. 그러나 아주 후세에, 예를 들면 칸트에게서는 평등을 형식적 혹은 수적인 평등으로 이해된(동등한 것은 정확히 동등한 것으로 보답되어야만 한다. 목에는 목, 피에는 피, 이에는 이)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을 비례적, 기하학적 유추적 평등으로서 옳게 이해하였다. 그는 주장하길, “평등한 것은 너무 많은 것과 너무 적은 것 사이의 중간이다. ··· 평등한 것이 중간적인 것일 때, 법도 또한 중간적인 것이다. ··· 법은 그에 따라 어느 정도 비례적인 것이다. ··· 왜냐하면 비례적인 것은 중간이며, 정당한 것은 비례적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뜻을 해석한다면 살인행위의 형벌과 절도행위의 형벌사
이에는 정당한 비례관계가 있어야만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정의라는 것은 살인 : 절도 = 무기형 : 1년 징역이지, 살인자의 사형과 절도범의 절취행위 근절이 아니다). 조화로운 비례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비교 점으로서 척도, 즉 유추가 요구된다. 이러한 척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울리는 것”(Wurdigkeit)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렇게 해서 정의문제의 핵심점 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 문제점에까지 언급되어진 것은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이들 두 종류의 정의에는 두 가지 상이한 형식으로 된 평등성이 명백하게 나타나게 했다. 즉 평균적 정의(iustitia com- mutativa)와 배분적 정의(iustitia distributiva)가 그것이다. 전자는 본래 불평등한 것 아래서 정의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법률 앞에서 평등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평균적 정의를 부르길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평균적 정의는, 법에 의하여 평등하게 하는 것 아래서 급부와 반대급부(상품과 가격, 손해와 배상)에 대한 절대적 평등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평등은 양당사자간의 계약에 의해서나 교환이라는 私的 關係에서 잘 볼 수 있다(그래서 교환적 정의라고도 부른다). 이에 반하여 배분적 정의는 다수 개인을 다루는데 있어서 관계합치적 평등을 말한다. 즉 상응하는 가치, 능력, 필요성이라는 척도에 따라 권리와 의무의 분배, 예컨대 다양한 수입정도에 따라 상이한 세금부과나 혹은 근무연한과 능력이라는 관점아래서 공무원의 상이한 급료지급. 분배적 정의는 후세의 키케로의 견해에 따르면 소위 “각자에게 그의 몫을”(suum cuique tribuere)이라는 원리와 같은 뜻이다. 배분적 정의는 정의의 原形(Urform)이다. 왜냐하면 私法上의 평균적 정의는 배분적 정의라는 公的作用(offentlicher Akt), 예컨
대 법률행위능력과 같은 일정한 신분의 부여(Zuteilung)와 법률거래(Rechtsverkehr)에 참여한 법률주체의 동등한 취급(차별적 취급, 예컨대 어린이, 미성년자, 성년자를 다르게 취급하나, 그들 각각은 그 자체를 물론 다시금 동일시 취급한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 圖表 1에서 또한 합법적 정의(iustitia legalis)라는 제3의 정의가 고려되어진다. 그러한 정의를 이용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圖式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서 전체에 대한 개인의 사회적 의무가 나타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종류의 정의에 대한 아주 좋은 예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상을 독일 기본법 제14조 제2항에서 볼 수 있다: “소유권은 의무를 가진다. 그의 행사는 동시에 공공의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
정의(iustitia)
(좁은 의미에 있어서 정의: 평등원칙)
사회(societat)
배분적 정의                           법률적 정의

A1      A2      A      B1      B2      B
교환적 정의(iustitia commutativa)
개별적 인간 。—————————–、 개별적 인간
평균적 정의(교환적 정의)
정의
법률적 정의            배분적 정의            교환적 정의
+———-+————++———+———–+
사회적 정의             개인적 정의
(公法)                    (私法)
+————+———-+
(노동법, 사회법 등등)
정의의 다한 형식을 예컨대 오늘날의 형벌이론에서도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절대적 형벌이론”의 의미에서 형벌을 응보(책임의 균등)로 파악할 때에는 평균적 정의에 관한 것이 된다. 즉 책임과 형벌사이의 절대적 균등(그래서 칸트는 특히 “살인한 자는 죽여야만 한다. 여기서는 정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떠한 것도 대신할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상대적 형벌론”의 의미에서는 그에 반하여 형벌의 본질을 소위 재사회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때에는 배분적 정의와 합법적 정의에 관한 것이 된다. 즉 의무의 부담과 이행 그리고 또한 장래의 사회적 손해를 예방하고, 범인을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한 권리의 보장이 그것이다.  두 번째 도표는, 우리가 만일 정의의 이념에서 본다면 公法과 私法사이의 순수한 구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5. 스토아 학파
우리가 순수하게 역사적 탐구만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다양한 경향과 학파들을 모두 다루어야 할 것이다. 즉 소요학파, 견유학파, 에피쿠로스파, 회의학파, 신플라톤주의, 플로틴학파, 아테네학파, 알렉산드리아학파 그리고 그 외 다수. 그 시대의 철학학파 중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오늘날 의미가 있는 학파는 스토아학파(창설자는 제논)이다. 왜냐하면 이 학파는 고대의 자연법에서 중세 그리스도적 자연법으로 넘어가게 한 가교를 놓았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학자 개개인은 물론 꽤나 상이한 학설을 주장했으면서도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 후 200년까지(에픽테트와 마륵 아우렐) 지속되었다. 그런 중에서도 스토아학파 나름의 통일적 근본사상이 존재하며 그리고 이것 자체를 스토아학파라고 부른다.
스토아학파의 융성을 통하여 철학사상은 도시국가의 영역으로부터 점차 벗어나서 世界理性으로 되었다. 즉 철학이 로마제국과 접촉하자 로마제국 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는 “노모스(Nomos)”라고 부르는 법을 神의 法으로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본래부터 성립되어 있는 법이라고 보고, 그 점에서 자연에 속하지 않고 단지 제한된 영역에서 효력있는 인위적 법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키케로(기원전 106년부터 43년까지)는 스토아학파의 이러한 포괄적 자연법사상을 웅변적으로 표현했다: 진정한 법은 올바른 理性에서 나타나며, 그 올바른 이성이라는 것은 자연과 일치하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존속한 확고한 것이고, 요구를 통해서 의무를 불러일으키고, 금지를 통해서 범죄를 범하는 것을 두렵게 한다. ···이러한 법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신의 법에 저촉되며, 그런 법을 부분적으로 해제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또한 완전히 없애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원로원이나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도 이러한 법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법은 로마나 아테네에서도 서로 다를 수 없고 오늘날이나 후세에서도 달라서는 안되며, 그러나 국민 모두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종류의 법을 영원하고 불변의 것으로 이해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공동의 교사요 지배자이다: 이러한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처벌의 두려움에 쫓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적인 자연(men-
schliches Natur)을 거역한 때에는 그에 대해 중한 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 . 이것은 아름다운 말씀일 뿐 아니라, 매우 실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예컨대 노예문제에서 매우 명백히 나타났다: 노예제도는 자연법에 반하는 것으로 비난받아야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그 본성에 따르면 자유스런 존재다(이미 Chrysippos가 그 점을 지적했다)라고 한 사상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조차도 農奴制度는 자연법적으로 정당하다고 보았던 점을 고려한다며 중세를 훨씬 뛰어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스토아철학자들(특히 키케로)도 자연법은 인간에게 “내재한 법”(lex indita)으로서 천부의 것이라는 사상을 따랐다. 세네카(Seneca, 기원 후 약1-65)는 상호연대적 자연이라는 기반 위에서 모든 인간은 서로간에 친척이며, 그 결과 이웃사랑이 뒤따른다고 강조했다. 이와 유사하게 에픽테트(Epiktet, 기원 후 50-138)도 理性의 기반 위에서 인류사랑과 세계시민을 가르쳤다. 그는 이성 안에 종교적 경건심이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오직 국가 형성적 실체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자비심이 깃든” 실체로 파악했다.
스토아학파에 의하여 그리이스 철학은 로마철학에 유입되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정의의 기본사상을 담는각자에게 그의 것이라는 공식은 키케로에 의해서 세워졌다. 키케로의 영향아래 로마에서도 만민법이 성립하였다. 이 법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국제법은 아니고, 오히려 자연법으로서, 즉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 로마시민이거나 외부인이거나 자유인이거나 노예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었다. 그 당시에 세계국가였던 로마에서는 그와 같은 포괄적인 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후기 로마법률가 울피안(Ulpian)은 스토아식의 자연법 개념을 동물의 세계로까지 확대하였다: “자연법은 모든 동물들에게 알려진 본성(natura)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연법은 인간의 특성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태어난 모든 동물들에게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Ius naturale est, quod natura omina animalia docuit, nam ius istud non humani generis proprium est, sed omnium animalium, quae in caelo, quae in Terra, quae in mari nascuntur). 아마 오늘날 우리도 생태학적 학설의 영향아래 이러한 견해에 다소간의 이해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결론을 내린다면, 스토아학파에서 “올바른 법”에 대한 물음은 그러나 명백히 주관적 경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올바른 법을 우주의 자연이라는 외부세계에서 찾는 것도 아니고, 초월적 이념의 세계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슴이라는 내부세계에서 찾고자 한다. 자연법문제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이 같은 전환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올바른 법”이 “자연” 속에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진행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원리에 대한 방법론적 반성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 수백 년이 소요되었다.
Ⅱ. 중세의 법철학
1. 고대로부터 중세로의 전환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이 점차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철학과 자연법론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고대의 유산없이는 그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主知說과 主義說사이의 해묵은 싸움은 수백 년간 토론을 지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입장에 가까웠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가까웠다. 우선 파울루스에 관해서 살펴보면, 그에게서는 스토아철학의 영향의 흔적을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법”을 주셨고, 그런 법을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조차도 그 법을 지킬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법은 그들 이방인의 가슴속에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이미 가르친 자연법은 누구에게도 인식가능하며, 그리고 누구도 착오에 기했다고 변명할 수 없다.
2. 아우구스티누스
고유한 그리스도철학, 즉 새로운 복음과 그리이스 유산과의 의식적인 결합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때에 와서야 비로소 고대와 중세사이의 제2차 전환의 철학과 신학이 시작되었다(그를 “최초의 그리스도 실존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는 플라톤으로부터 이데아설을 받아 들였으나, 플라톤에서 특유한 “세계”를 갖는 이데아(이데아 세계)를 신의 정신으로 바꾸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영원법”은 신의 이성이나 혹은 신의 의사와 일치한다(“lex vero aeterna est ratio divina vel voluntas Dei”). 그 법은 신 자체처럼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법”의 개념을 스토아철학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스토아학파의 입장과 다른 점은 스토아학파에서는 “영원법”은 “자연법”에 일치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자연법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영원한 신의 법의 복제이나 “영원법”은 밀랍 속에 복제된 거울의 상이, 그 거울 자체인 점에서 자연법과는 다르다. 이러한 像은 물론 정욕에 의해서 흐려질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점을 알다시피 자기 스스로 체험했으며, 그리고 여기서 아마도 그 자신의 체험이 그의 주의주의(플라톤)와 인간의 자유에 관한 그의 심리학적 학설을 세우는 데 깊은 뿌리가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意思만이 도덕적으로 가치있다. 왜냐하면 悟性이 아니라, 意思가 인간을 인간되게 만든 본질적 힘이기 때문이다. 意思 속에 모든 惡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 惡으로부터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고,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자유가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같은 입장을 지녔고, 그 입장에 따라서 요구(Gebote)를 충족하기 위한 자유는 신
의 순수한 은총에 의한 선물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사상은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논쟁 속에서 발전되어 갔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자유는 인간의 자연적 본질에 속하고, 그러므로 (그런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단지 보조적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에 의해서 제지당한 자유의 행사가 촉진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수백 년 후에 “법과 복음”에 관한 종파간의 다툼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자연법”은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 속에 있는 “영원법”의 모사이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다. 제3의, 즉 가장 아래의 법단계는, “일시적 법”으로 그 법에 의해서 인간인 입법자는 특정시대에 요구와 금지되는 그것을 정한다. 이러한 실정법은 그러나 그것이 “영원법”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때 한해서만 구속적이다. 정의가 없는 국가도 역시 큰 절도범단체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
법에 대한 이러한 위계질서는 다시금 “영원법”의 내용에 대한 의문을 결정적으로 낳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점을 창조질서에 돌렸고, 오랫동안 이러한 대답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믿음이 법의 내용에 대해 최근까지 결정적 역할을 하여 왔다. 중세의 上代,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적 자연법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여기서 우리는 8백년이라는 엄청난 시차를 뛰어 넘는 그에게 관심을 돌리고자 하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여타의 교부신학자(즉 Johannes Duns Scotus, Anselm v. Canterbury, Bernhard v. Clairvaux, Averroes 그리고 Albert der Große)들도 신학과 일반철학뿐만 아니라 법철학(법철학은 그 당시 그리고 오랫동안 자연법론과 거의 동일시되었다)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제사적 방향만을 추구해야 하므로, 그들에 대한 탐구는 그만두고자 한다.
3. 토마스 아퀴나스
이 책의 맨 처음 章을 읽은 독자는 초기 스콜라철학은 다시금 객관주의와 존재론을 주장하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 1225-1247)는 아주 뛰어난 그리스도인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법의 3단계구조인 “영원법”(vel divina: 신정법), “자연법” 그리고 “인정법”(vel positiva: 실정법)을 전통으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영혼의 주관적 법이 아니라, 객관적인 量(Große)이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實在論을 받아 들여, 가치와 현실성이 서로 괴리된 것이 아니고, 당위와 존재는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그 유명한 콜라 공리인 가치와 존재는 서로 호환된다(bonum et ens convertuntur). 왜냐하면 비록 인간은 물론 매우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나, 엄격히 보면 통찰력 있고 진실하여 그의 이성을 통해서 가치 있는 것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知性으로 인식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에 어긋나는 人定法이 효력이 있는 지에 대한 물음에 토마스는 “불법은 전혀 법이 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면서 부언하길, 자연법에 어긋나는 그러한 법은 “썩은 법”(legis corruptio)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와 같은 어긋난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을까? 혹은 실증적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이성은 자연법과 인정법의 차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토마스는 그 점에 관해 상술한 곳에서 대답하면서 2가지 종류의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 단순한 추론, 즉 논리적 결론의 형식에 의해 이끌어 내는 것(예를 들면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는 근본원칙으로부터 형법상 금지하는 대부분의 행위가 나온다)과 자세한 규정, 즉 결정의 형식에 의해 찾아내는 것(예를 들면 “범죄는 처벌해야 한다”라는 자연법규범은 부과할 형벌의 종류에 관하여 실정법에 의해 구체화된다)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경험적 현실성이 없어도 우리는 순수하게 연역적 방법으로 실정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당위는 항상 보다 더 높은 당위에서만 끄집어 낼 수 있다라는 주장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웅대한 착각이 없지 않지만(켈젠을 보라!). 물론 실제로는 (당위에) 경험이 첨가되어졌고, 의식되지 않는 사이에 가치와 현실의 혼합이 꽤나 깊이 이루어져 있다(20세기에도 존재와 당위의 완전한 구별을 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스콜라철학은 진리의 내용, 즉 啓示의 내용을 찾는 데 두지 않고, 교리적이고 권위적 위엄을
갖는 일정한 확립된 형식적 교리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진리는 이성의 방법에 의해서, 즉 근거와 반대근거의 비교형량을 통해서 논증적으로 확고히 세울 수 있고 또한 자세히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믿기 때문에 안다(credo ut intelligam). 전래해 온 신앙에 대한 畏敬心은 논리적 사고와 밀접히 결합됐다. 즉 학문의 방법론상의 엄격성이 중세에 넘쳐흘렀던 종교적 생활양식과 결합하였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하나의 권위에 의해서 “제정된” 추상적·보통법과 “실행되어지고” “선고되어진” 구체적·개별적 법(그는 이것을 “actio iustitiae”라 불렀다)을 아주 명확히 구별한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고의 자연법칙은 모든 보편적 기본규범을 포함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이성에 맞게 행동하고, 그밖에 인간의 자연적 성향의 질서에서 발생하는 그러한 자연법익의 요구를 행하라: 즉 자기보존의 본능으로부터 살인금지, 종족보존의 본능으로부터 결혼과 유아양육의 요구, 理性的 능력과 사교적 경향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요구가 나온다. 이런 모든 것들은 자연법칙에 관한 것이며 자연법칙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타당하다. 이에 반
해 자연법은 바로 여기 그리고 현재를 위한 법규의 구체적 형성에 의해서 비로소 성립한다. 즉 그것은 자연법이 역사적 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우리가 보충을 한다면, 구체적 본성)은 변하기 쉽다고 토마스는 말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 즉 그러한 “2차적 자연법”의 의미에서(토마스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신토마스학파의 창시자다), 아퀴나스의 자연법에서는 노예제도가 당연시되긴 하지만, 그러나 영원불변의 법의 의미에서 당연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은 옳은 말이다. 확실히 토마스는 법의 역사적 현상을 매우 불충분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구체적 자연법은 후세 계몽기 시대의 합리적 자연법의 경우처럼 결코 절대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영원법”이 理性에서 연원한 것인지, 아니면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각주 79에서 인용한 것을 참조). 토마스는 그러나 그 점에 대해 主知的 입장을 분명히 했다(그 때문에 그의 神은 어떤 의사도 없다는 그의 주장에 우리는 반대한다). 이러한 주지주의에 일치하는 것은 惡이 意志에 그 책임을 돌릴 때가 아니라, 理解에 돌릴 때이다. 즉 의지에 의한 실수는 언제나 이해의 실수에 기인한다. 인간행위에 대한 판단의 最高 審判은 두 가지 단계로 형성된 양심(Gewissen)이다: 자연법칙의 最高 命令을 理性에서 주어진 인식능력으로서 양심(Synderesis: 이것은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과 각 개별적 사안에 대한 이러한 규범을
매개하는 능력으로서 양심(Conscientia: 이 때는 실수가 가능하다). 파울루스와 키케로와는 달리 토마스에서는 행위의 요구규범과 금지규범에 관련해서 면책적 착오가 가능하다고 본 것은 최고로 중대한 결론이다(독일형법 제17조의 금지착오에 관한 규정은 토마스적 사상 덕분이다). 토마스는 심지어 책임 없는 착오에 기한 양심을 의무가 깃든 효력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양심상 실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 惡을 행하지 않는 자는 죄를 범하였다는 결론을 토마스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오늘날도 중요한 현실성을 갖고 있는, 예컨대 확신범, 전제군주살해와 저항권 등의 다양한 문제가 나타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그의 짧은 생애동안 깜짝 놀랄만한 방대한 작품 속에 모든 것을 다루었다. 여기서 더 깊은 연구를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암시로 끝을 맺고자 한다.
4. 스콜라 철학의 말기
스콜라 철학의 말기는 물론 이미 요한네스 둔스 스콧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6-1308)가 토마스주의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할 때부터 잉태하였으나, 빌헬름 폰 옥캄(Wilhelm v. Ockham, 약1300-1500)에서 시작되었다. 옥캄은 특히 唯名論을 역사상에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이 학설에 따르면 단지 개별적인 것, 특별한 것만이 존재하고, 그러나 일반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보편적인 것(“universali
a”)들은 (대체로 그 자체 존재하는 이념으로서) “논쟁 前”(ante ren)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 후”(post rem)에 단지 思考하는 정신 속에서 형성된 개념(唯名: “nomen”)으로서 남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이미 고대에서 그 뿌리를 갖고 있는 이 보편개념의 문제는 스콜라철학
후기에 강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성향이 남아 있다.
유명론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하는 보편적 자연법칙은 없다(또한 자연과학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학문상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지 주관화된 (이념상의) 자연법론만이 존재하고, 그 자연법론도 자연법을 존재하는 것 혹은 先在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이론정립”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와 같은 “자연법”이 실정법에 희망 없는 존재이고, 제정법에 대항하여 -예를 들면 썩은 법(lex corrupta)에 대항하여- (정의를) 실현할 기회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유명론은 그래도 언제나 실정법의 독자지배를 위한 학설인 실증주의의 이정표이자 반려자였다.
옥캄의 학설은 루터(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에도 길을 터 주었다. 자연법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물론 근본적으로는 스콜라적이었다. 구약의 시편의 해설서에서 “자연법”에 관해, 우리의 가슴에 쓰여져 있는 “자연의 법”을 언급하고, 모세의 십계명도 그 자연의 법과 일치될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을 구속한다고 보았다. 로마서의 주석서에서 우리의 자연에 관한 자연법은 선과 악의 끊을 수 없는 증거로서 각인 되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고, 다시 말하면 신의 계명이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쓰여져 있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슴은 악마에 의해서 흐려져 있어, 인간은 신의 계명을 보 수 없어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가슴은 “완전히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부터, 즉 루터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타락으로 완전히 썩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력으로 올바른 것을 인식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고 보았으므로, 그는 3단계법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원법”과 “인정법”사이에, 신의 제국과 인간의 제국사이에 어떠한 법적인 연결다리도 없으며, 단지 있다면 신의 동정 어린 은총에 의한 신의 배려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유한한 인식능력”(lumen naturale)은 꺼져버리고, 신의 은총에 의한 것 이외에는 인간은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eines Christen- menschen)는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복음에 근거한다. 그것은 “모든 죄와 법 그리고 계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자유이다.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俗世法이 “영원법”에 부분적 참여를 통해서 갖고 있는 신성한 효력을, 루터와 그의 정신적 후계자들이 생각한 속세법은 더 이상 갖지 못했다. 신성한 효력이 없는 단지 사실상의 “속세법”만이 존재하였다. 루터는 그의 이중제국설로, 교회법을 포함하여, 법도 또한 완전히 속세의 관청의 권한 사항으로 보았다. 물론 그는 속세의 법질서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될 세계는, 비록 우리가 살지 않는다 할 지라도, 잠정적이고 의문투성이의 세계일 뿐이고, 진실한 세계는 복음의 세계인, 사랑의 제국이라고 보았다(톨스토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속세의 관청인 국가에 법을 이양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이 법을 비평할 모든 가능성은 없어져 버렸다. 루터는 “인간이 속세의 관청에 어느 정도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느냐”하는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였고, 그의 일생동안 저항권의 문제와 씨름하였다. 이러한 그의 근본사상으로부터 그는 惡法에 대해서도 복종의무를 긍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적극적 저항권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그것(저항권의 부정)을 철저히 관철시키지 못한 것은 그의 위대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최근의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프로테스탄트적 법전통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구스타프 라드부르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종교적 태도에 중요성을 두는 것과는 반대로, 법에 대한 신성한 효력부재와 법의
실체결여 그리고 법이 보잘것없다는 점의 강조는 한편으로 절대적 영주지배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실체의 결여 결과 그 지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정치에 대한 독일인의 무관심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고도의 신성한 효력이 없는 법이 어디로 가는가를 우리 모두가 체험했다. 카톨릭(그리고 개신교 내에서, 즉 칼빈파도)이 법에 종교적인 근거를 설정하는 것을 거부하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이제 개신교 교회도 법에 종교적 근거를 설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Ⅲ. 근대의 법철학
1. 새로운 철학과 학문의 이해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 중에 위에서 언급한 사상가와 사색의 방향과는 다른 많은 사상가와 사색의 방향도 근대에 영향을 미치었다는 점을 전혀 무시하고, 우리는 근대로 들어 왔다: 스페인의 후기 스콜라 학자들, 예를 들면 프란츠 수아레즈(Franz Suarez), 형이상학적 방향에서 뛰어난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kolaus von Kues),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토마스 모루스(Thomas Morus)의 국가철학과 그 밖의 다수 학자들. 벌써 근대에 두 발로 확실히 서 있는 자는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이다.
근대초기에 자연과학의 힘찬 번영과 활활 타오른 초기 자본주의는 정신적 상황의 완전한 변혁을 의미한다. 근대 초기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 예컨대 데카르트(Descartes), 홉스(Hobbes), 그로티우스(Grotius), 푸펜도르프(Pufen- dorf), 스피노자(Spinoza), 또한 로크(Locke)와 라이프니츠(Leibniz)도 (그러나 칸트는 포함 안됨) 확실히 스콜라적으로 교육을 받았으나, 그러나 변경된 상황하에서 (그들의) 사색의 내용도 달라졌다(물론 후에 마르크스가 가정한 것처럼 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옥캄이 아니라, 홉스가 비로소 진정한 “唯名論者”였다고 지적한 벨첼(Welzel)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옥캄도 유명론자였으나, 그의 유명론은 토마스 홉스의 시대가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불리한 시대에 나왔었다.
데카르트는 학문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오늘날까지 학문의 최고원칙으로 남아 있는 명석하고 명확한 인식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기 위하여 구식의 “이론적”,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 철학을 새로운 “실용적” 철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문, 또한 철학도 지식욕의 호기심에서(토마스 아퀴나스: desiderium sciendi)가 아니라, 지배욕(프란시스 베이컨: knowledge is power)에서 우러나와야 된다. 이러한 학문의 모범은 추상화하고, 분해하고 분석하는 오성(Verstand)에, 즉 이해의 능력에 능통하는 것에로 근본적인 제한을 요구했다. 그 점에서 인식의 종합과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최상위의 인간정신의 수행방법으로써, 즉 개념파악의 능력으로서 이성(Vernunft)과는 구별된다. “이성”의 시대는 오성의 시대다. 즉 합리주의시대다. 왜냐하면 인식활동의 “합리적” 연역만이 자연의 지배를 가능케 했다(어떠한 지배가 있었는지, 우리는 그 사이에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만으로 오성은 작업을 할 수 있으나, 초경험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또한 이념, 즉 법이념도 오성의 영역밖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도대체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계몽주의시대에서는 인간의 意思, 느낌, 체험(Erleben)이 무시되고, 그것들은 심지어 사변적인 것이라고 하여 학문과 철학에서 쫓겨났다. 영국의 경험론의 영향(로크, 흄)이 아직 없었다.
합리주의적 법철학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근대의 자연법은 완전한 합리주의적 학문개념의 영역 내에 서 있다. 여기서 이성(Ratio)은 올바른 법의 인식수단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법의 원천이다. 이성은 -인간의 합리성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법규를 선물한다. 스콜라철학처럼 우주의 理法이나, 그 자체 내재해 있는 이념이나 영구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전적으로 그의 인식능력에 의존한다. 권위와 전통이 더 이상 올바른 법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명확한, 즉 “이성적인”, 것만이 효력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법철학은 신학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연법은 속세화 되어졌다.
“올바른 법”을 찾는 데에 있어서 방법론상 전적으로 타당하게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즉 경험적 자연을 문제삼았지, 형이상학적 본질을 문제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기서부터(즉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권리와 의무를 연역하기 위하여, 인간은 순수 사실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규명하였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권리와 의무는 인간의 이성이 불변인 것처럼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에게 타당한 보편적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절대적 자연법을 확립하려고 한, 모든 시도는 거의 몇 개 안 되는, 그러나 매우 추상적인 법의 근본원칙만을 제시하는데 머물고 말았던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이러한 시도 중에서 중요한 것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대의 자연법
근대 자연법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국제법의 아버지로서 우리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를 꼽는다. 그는 인간의 근본성향을 사회성, 즉 평화롭고 질서있는 공동생활에 대한 갈망,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은 것을 사랑하는 갈망 속에 있음을 보았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은 육체적 본능을 초월하여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식별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공동체는 그러한 식으로 理性(dictamen rectae rationis)에 의해 세워졌지, 본능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티우스는 이로부터 자연법의 최상위 원칙으로 “약속은 지켜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지 말라, 남에게 준 손해는 배상해야 하며,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말라, 범죄행위에 대해서 형벌에 의해 응보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 등등의 규범을 도출하였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이와 다르다. 그는 인간을 비사회적 존재, 즉 이기주의자로 보았다. 자연상태는 무제한의 자유이며, 각자는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가지며, 다른 사람 자체에 대하여도 예외가 없다”. 이로부터 물론 어떤 순수한 규범적 권리와 그리고 특히 어떤 의무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홉스 스스로 이런 자연상태에서 “정당하고” “부당하다”라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그의 합리주의적 논증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무제한의 자유를 가지면,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모든 인간의 투쟁이 일어나고, 각자는 타인에 대해 늑대가 된다. 각자는 그러므로 타인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고 인간의 본원적인 자유의 무제한의 행사가 결국 인간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능하다면, 자유를 찾는 것이 인간에게 이성적으로 보였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일차적 자연규칙이다: “각자는 평화에 대한 희망이 존속하는 한, 평화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평화를 실현시킬 수 없으면, 그것을 위해 모든 보조수단과 전쟁의 장점을 이용해도 좋다”. 이러한 일차적 법규로부터 제2차적 자연법규가 나온다: “각자는 평화와 정당방위를 위하여 그의 권리의 포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한, 타인도 역시 그럴 준비에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한 그의 권리를 임의로 포기해야만 하며, 그리고 그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양보하는 것처럼, 타인에 대해 많은 자유를 양보해야 한다”. 법은 그 근본에 있어서 공포의 산물이다. 국가권력도 이러한 기초 위에 세워졌다. 최선의 국가조직은 자연법규의 요구를 가장 확실하게 수권할 수 있는 체제다. 그러므로 국가는 시민의 산산이 분산된 힘을 진압하기 위하여 시민에 대하여 무한한 권한을 갖는다(그러므로 성서상의 바다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과 비교). 국가가 이것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 국가의 정당한 존재이유가 인정된다.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법적 안정성의 보장(auctoritas, von veritas facit legem). 그러나 홉스는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국가가 시민을 보호할 수 없을 때, (국가에) 복종을 요구하는 권리도 끝난다. 홉스에 있어서 국가는 목적 자체가 아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그로티우스와 홉스의 학설을 어느 정도 결합하려고 노력하였다. 홉스에 의해서 이미 적용된 자연과학의 수학적 인과적 방법을 스피노자는 최대한 순화시켰다. 그는 모든 합목적적 관찰(Zweckbetrachtung)을 철학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인과관계의 엄격한 효력을 인정했다; 그의 철학은 실체철학(Substanzphilosophie)이다. 이에 상응하여 법과 국가도 (경험적) 자연의 일부다. 모든 이성법주의자처럼 스피노자도 인간의 “자연적 상태”(status naturalis)를 묻고, 인간은 순수한 사교적인 성질도, 극단적 이기주의자도 아니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힘이 있는 한 그 정도의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기가 물속에서 놀고,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것이 고기의 자연적 권리다”고 했다. 법과 힘은 동일한 것이고, 힘만이 법을 창출한다. 스피노자의 기하학적으로 증명된 윤리학은 인간행위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 槪要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욕정을 분석하고 설명할 뿐이다. 어떠한 당위도 있지 않으며, 단지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힘과 법은 동일한 것이라면, 각자는 타인을 누를 수 있는 한, 그는 정당한 권한을 갖는다. 각자는 그가 주장할 수 있는 한의 소유권을 가지며, 약속에의 구속은 타인이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한에서 뿐이다. 인간에게는 그들의 이성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이 합동하여 공동체를 형성할 때만 국가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계약을 침해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권리를 포기하여 국가에 어떠한 경우에도 종속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힘은 국가만이 공공복지를 수행할 수 있다는 시민의 이성적 식견에 기초하지, 국가의 강제력에 의거하지 않는다; 국가는 무정부와 비교해서 훨씬 적은 해약을 준다. “시민의 상태”에서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주된 권리를 가지며, 그리고 국가를 통해서만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가 결정된다. 이것은 실증주의에 대단히 들어맞는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논거로 실증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자연상태에서는 이성에 따르는 것이 가장 강력한 것처럼, 국가도 이성에 의해 세워지고 이성에 의해 수행되는 국가가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된다”. 그래서 국가는 자의적 법이 아니라, 이성적 법
을 제정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에서 맨 처음 개설한 자연법과 국제법과목 담당교수인 푸펜도르프(Samuel Pufen- dorf, 1632-1694)는 홉스이래 지배해 온 일면적인 산술적 인과적 사고양식을 교정하여 “물질적 실체”와 “도덕적 실체”사이를 구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물리학은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나, 도덕과학은 현상을 善과 惡으로 평가하거나 정의와 불의로 평가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푸펜도르프는 다시금 순수한 당위와 자유를 위한 자리를 확보했다. 자연법론에서 푸펜도르프는 그로티우스와 홉스를 결합했다. 그는 이들 두 입장을 지나치게 일면적이라고 보았다. 한편으로 인간이 이기주의자이고, 대체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꾀하고 그리고 이 때문에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너무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존재여서 자연상태에서는 자기보존의 이유로 단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푸펜도르프는 자연적 의무의 체제를 발전시켰다. 영원법, 자연법 그리고 인정법이라고 하는 예전의 3형식은 그에게 있어서 아직도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그러나 자연법을 신의 법과 전히 분리하였다는 데 있다. 신에 대한 의무에서 종교만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의무에서 도덕만이 관계한다. 법적 의
무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일 뿐이며, 그 의무는 종교와 도덕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있으며,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법적 의무 아래에 3가지 기본적 의무를 푸펜도르프는 구별하였다: a) 누구도 타인을 해치지 말라(neminem laedere: 여기에는 소유권의 존중과 계약의 이행도 역시 포함된다); b) 각자는 타인을 동등한 권리자로 다루어라(suum cuique: 각자에게 그의 것을, 인간존엄의 존중); c) 각자는 가능한 한 타인에게 협조하라(타인을 돌봄).     법을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구별하는데 토마지우스(Christian Thomasius, 1655-1728)의 기여는 크다; 그는 자연법을 神의 法(ius divinum)에서 최종적으로 분리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이성의 지시에 따른 3가지 종류에 상응해서 윤리, 정치 그리고 법의 명확한 구별이었다. 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와 관계를 맺으며, 그것은 내적 명예, 즉 인간의 내적 평화에 관한 것이다(quod vis ut alii sibi faciant, tu et facias). 정치는 예의바르고 품위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의 척도는 “긍정적 황금률”로, 타인이 너에게 하기를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하라(quod vis ut alii tibi faciant, tu et ipsis facias)라는 것이다. 끝으로 정의로운 최고원리는 타인을 해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황금률”이다: 사람이 너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하지 말라(quod tibi non vis fieri, alteri ne feceris).
이전에 설명한 자연법론의 다소간 지배적인 주된 사상은 사회적 행복설과 공리주의였고, 이러한 사상은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에 의해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모든 인간은 가능한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 하며, 모두가 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이러한 순수 자연주의적·경험적으로 지향된 법철학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뛰어난 수학자의 한 사람이며, 컴퓨터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거의 절대적으로 그렇게 인정되고 있는 라이프니츠는 자연과학적 방법의 독점적 주장에 반기를 들고 싸웠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프랑스의 파스칼도 그 당시에 아주 유사한 생각을 가졌음). 그는 가르치기를 기계학(Machanik)은 목적론에 의해 보충되어져야 한다. 물리적 세계 외에 도덕적 정신의 세계가 존재한다(Monaden). 인간의 목적은 가능한 큰 행복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꽃피우는데 있으며, 그것은 또한 자연법의 주된 원리로서 인정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자연법론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가 그것을 해내어 그는 “윤리적 완전주의”에 관해 (고유한) 학설을 세워 발전시켰다. 그의 논거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다. 도덕은 인간을 완전히 꽃피우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에 의지하여 이러한 목표를 단지 제한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법질서는 인간의 완전성을 꽃피우게 하는 것을 장려해야 한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재산을 준비하고(sufficientia vitae), 불법의 공포에서 해방되고(tranquillitate civitatis) 그리고 외부적 강제로부터의 보호(securitate)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법은 윤리적 의무이행의 가능성이며, 우리는 계몽된 전제주의시대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시기는 이제 계몽적 자연법을 성문법전으로 편찬하는 것이 성숙되어진 시기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볼프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체계는 18-19세기의 자연법적 법전편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중 가장 의미 있는 법전 4개를 꼽는다면, 막시밀리안스 바이에른의 민법전(1856), 프로이센의 일반란트법(1794), 나폴레옹법전(1804), 오스트리아의 일반민법전(1811)을 들 수 있다.
이들 성문법전은 근대 자연법의 절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종결을 나타낸다. 특히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때에는 이미 그의 법이론과 그리고 특히 국가학(사회계약: contrat social)에 새로운 시대가 일어날 것을 예고했다. 그로티우스로부터 볼프까지의 합리주의시대의 자연법론은 신앙이 깊은 크리스찬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콜라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단지 그들은 이러한 신앙에 의거하여 자연법을 세운 것은 아니다. 그로티우스가 말하였듯이,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가설인) “하느님이 없다는 가정아래”(etiamsi daremus non esse Derm), 우리는 자연법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 당시의) 방법적 원리였다. 그러나 점차 신의 비존재가 확신으로 변하고, 그 결과 지금까지 항시 전제된 법의 종교적 관련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 법이성주의자는 단지 몇 개의 선험적인 상위 명제들 -예를 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 로부터 경험적인 현실을, 즉 공간적 시간적인 환경을 고려함이 없이 모든 법명제를 순수하게 연역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효력있는 자연법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경험적인 것이 선행하여, 그 결과 그 합리성으로 유명한 로마법으로부터 (법을) 빌려 왔다(법의 계수의 시대). 그렇게 함으로써 위대한 “자연법적” 법전이 편찬되어질 수 있었다.
3. 고전적 자연법의 종말
합리주의는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과 비합리주의적인 것이 점점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합리주의시대와 계몽주의는 낭만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그 낭만주의와 기이하게 평행을 이루는 비판철학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고전적 자연법의 종말이 찾아왔다.
1) 역사법학파
낭만주의라는 사조는 철학과 학문의 영역에서 역사주의로 뿌리를 내리고, 법학의 특수한 영역에서는 역사법학파로 자리를 잡았다. 역사법학파의 선구자는 구스타프 후고(Gustav Hugo, 1764-1844)였고, 그 중심인물은 사비니(Friedrich Karl v. Savigny, 1779-1861)였다. 사비니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이 있겠지만(제II장, 제3절, I), 비록 독일의 가장 중요한 민법학자는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민법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독일의 법학이 세계적 영향을 준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 법학의 방법론의 창시자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하이델베르크 법학자인 티보(Thibaut)에 대한 그의 반박논문인 “法制定과 법학에 대한 우리시대의 임무에 관하여”(1814)에 대해서만이 일차적 관심이 있다. 티보(1772-1840)는 아직 합리적 자연법에 사로잡혀 있어서 1814년에 출판된 그의 논문에 독일의 일반민법의 필요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했다. 사비니는 그에 반대하여, 법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된 민족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자연법은 사변적이라고 보고, 철
학자의 근거 없는 自慢이라고 했다. 사비니는 불변하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한 법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 이유는 각각의 민족은 그들 고유의 개성, 즉 그들 고유의 “민족정신”을 가지며, 그러한 정신으로 법도 역시 변하여, 그 결과 법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9세기의 진화론과의 관련은 극히 명백하다). 사비니가 법을 민족정신의 유출(Emanation)로 간주할 때, 즉 법을 일정한 역사적 문화의 높이에 기초하여 일정한 국가의 민족정신의 표현으로서 볼 , 그가 민족정신이 암암리에 형성된 힘에 의해서 굳어진 관습법을 법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보았다. 입법자는 새로운 법을 창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법을 규정화하고 편집만을 해야한다. 이로써 사비니는 制定法典을 반대
하는 성향을 나타냈다. 그는 근대 자연법의 합리주의를 법감정이라는 본능적 무의식에 대비하였다.
2) 칸트의 비판철학
역사법학파는 합리적 자연법을 제거하려고 사실상 노력했으나, 그러나 학문적으로 그 작업은 비판철학, 즉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칸트의 후기작품인 “도덕의 형이상학”(1797)의 제1장에서 다룬 법철학은 상당히 무비판적이고, 근본적 점에서 합리주의적 자연법의 입장을 지지하였다(후기 신칸트학파, 예를 들면 Karl Bergborm과 Hans Kelsen은 칸트의 그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비판(철학), 특히 1781년의 “순수이성비판”(2. Aufl., 1787)에서 그는 理性法(Vernunftrecht)에 극단적 반대를 취했다. 그 이성법이라는 것이, 회고해 본다면, 그의 전체 내용을 판단해 볼 때, 이성의 -오성의- 산물이어야 하며, 출발점으로서 인간의 경험적인 본성에 기여하는 환경에 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칸트는 증명해 냈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가능한가”를 알고자 했다. 형이상학(그것은 근본에 있어 비자연과학적임)에서 선험적 종합판단, 즉 “순수이성으로부터” 확실히 보편타당하고 우리의 앎을 확장하는(그러므로 단순한 분석이 아닌) 인식이 존재한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에게 문제되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와 같은 판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칸트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증명은 수학과 수학적으로 다루어진 자연과학이 하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만나게 되어 있다면, 그것은(즉 선험적 종합판단은) 이러한 (즉 수학적) 학문의 특별한 특성에 달려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문들에서 칸트는 학문일반의 전형적 모형을 보았다. 그 결과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그 문제로부터,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리고 “순수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출발근거”의 서문에 언급되어 있다: “저는 모든 특별한 자연과학 중에서 수학에 관한 것에서만 그렇게 아주 다양하고 독특한 학문에 해당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그것이 핵심사상(Quintessenz)인데, 형이상학 -또한 법학과 법철학을 포함하여- 은 그 안에 수학도 또한 포
함되지만, 학문으로서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대답은 “선험적 논리학”의 첫째 章에서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우리의 모든 인식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직관과 개념(An- schauung und Begriff). 전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상(Gegenstand)이 주어지며, 후자에 의해서 그 대상이 파악된다. “내용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직관과 개념은 이제 “순수”하거나, 아니면 “경험적”이며, 그에 상응하여 “선험적”이거나, 아니면 “경험적”이다. 전자의 경우는 어떠한 감각도 표상에 들어오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직관이 감각적이 아닌 것이 될 수 없게끔 한다.” 오성(Verstand)은 직관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지적 직관의 의미에서) 능력이 없다; 오성은 단지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오성에는 어떠한 창조적인 적극적 인식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인식의 자발적 정리능력, 즉 감각적 직관에서 주어진 다양성을 개념으로 종합하는 능력일 뿐이다. “오성은 결코 직관할 수 없으며, 감각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고 그것이 이제 결정적인 것인데- “순수직관은 단지 형식(Form)을 내포하여 그 형식에 의해서 어떤 것이 직관되어지며, 순수개념은 대상일반의 인식의 형식이다.” “순수이성비판”은 그러므로 선험적 형식론이며, 그것은 한편에 있어서 “감각적인 것 일반의 규율에 대한 학문”이며(칸트는 이를 “미학”이라 부른다), 다른 한편 “오성규칙 일반의 학문”이다(칸트는 이를 “논리학”이라 한다).
칸트는 여기서 신중하게 “이성”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오성”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는 오성에 정당한 인식능력을 부여하면서, 그러나 이 인식능력을 체험가능한 대상의 범위와 수학적 자연과학에로 제한했다. 즉 이것이 바로 전술한 “선험적 논리학”에서 요약한 결론이다: 오성은, 사물이 “그 자체” 어떤 것인지,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인식할 수 없으나, 그러나 사물이 감각의 도움으로 오성에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인식할 수 있다. 단지 대상의 “현상”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本體”(noumenon), 즉 “物 自體”에는 들어갈 수 없다(알 수 없다); 그것(물 자체를 아는 것)은, 오성이 직관의 능력이 있을 때, 즉 오성이 대상의 존재 그 자체(Gegenstand im Ansichsein)를 파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불
가능하다. 오성은 그에게 고유한 대상도, 본체도 없으며, 또한 성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성은 감각을 통해서 오성에 전달되는 것만을, 즉 현상(Erscheinungen)만을 파악하고 구성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성개념이 인식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은 본질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난 현상에만 가능하다. 즉 체험 가능한 대상뿐이다. 칸트는 그 점을 명백히 표현하여, “단지 경험 가능한 대상만을 제외하고, 결국 어떠한 선험적 인식도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선험적 분석론은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얻는다. 즉 선험적 오성은 체험 가능한 형식일반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며, 그리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모두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때, 오성은 감각의 범위 내에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감각의 한계를 결코 초월할 수가 없다. 오성의 법칙은 현상을 설명하는 단순한 원리에 불과하며 그리고 사물일반에 관하여 종합적이고 선험적 인식을 하나의 체계화된 이론으로 구성하는 것을 인정하는 本體論(Ontologie)이라는 거만한 이름은 겸손한 이름인 순수 오성의 단순한 분석론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이것으로 칸트가 무엇을 증명 혹은 반증하고, 그리고 그의 논증이 어느 정도 충분했는지가 명백해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형이상학의 -자연법의- 내용이 체험없이 단지 형식적 선험적 원리만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내용이 깃든 형이상학은 결코 보편타당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내용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고, 모든 인간과 모든 시대의 동일한 자연법의 주장은 그러므로 거부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아래서는 이러한 결론을 변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칸트는 형이상학, 자연법, 법도그마틱 등이 자연과학으로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증명하였다. 혹은 조심스럽게 보긴 하지만 적어도 “자연과학 안에 수학만은 포함된다”고 보았다. 물론 수학적으로 다루어진 학문이 정말로 학문인가의 여부가 끝없이 논하여질 수 있고 또한 끝없이 논하여졌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법학도 학문이 아니란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런 논쟁은 무용한 일이다. 수학적 분야만을 “학문”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자는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다음의 점이다: 법학과 법철학에서도 납득하게 하거나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다툼이 없다. 그 결과 “이성적” 논증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상호동의하는 터전도 존재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
로 여기 법학과 법철학에서도 “인식”과 “학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말로 깊은 의미가 있다. 물론 수학적 정확성의 의미에서 “합리성”이라는 것이 이 분야(법학과 법철학)에서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점이 법학에서 “비합리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정신활동은 합리적 분해와 분석뿐만 아니라, 예지적 이해종합이다. 물론 학문이 논리에 반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물질과 관계하는 학문은 순수 논리를 초월해야 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초합리적”(meta-ration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성은 논리를 초월해서는 안 된다. “오성”과 “이성”은 매우 명확하게 구별한 칸트가 바로 이러한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신칸트학파인 슈탐믈러(Rudolf Stammler)는 칸트의 자연법론을 “학문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그렇게 보는 한 실제에 있어서 아직도 강력하게 합리주의의 길에 서 있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그의 자연법 정의에서 명백히 보여준다. 즉 자연법이라는 것은 “입법자의 의사에 기해서 제정되는 실정법과는 반대로, 비실증주의적이며, 모든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선험적 법”이다(주의할 것은 물론 칸트가 여기서 “이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오성”에 대해서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칸트의 전체 자연법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다면 칸트는 그의 계승자(Epigonen)가 여기에서 이
미 미리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칸트는 법과 국가를 창설하는데 있어, 순수한 실증주의적 창설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오직 실증주의적 법률만을 내포하는 외적 입법제정은 생각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입법자의 권위(즉 입법자의 의지에 의해서 타인을 구속할 수 있는 권한)를 세워주는 자연적 법률이 미리 선행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이 이와 같은 “자연적 법률”인가? 그 문제는 국가와 법을 정당하게 하는 데 요구되는 실질적 윤리의 최소내용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첫눈에 보기에 칸트가 (계몽시대의 행복사상과 비교되는) 윤리의 모든 객관적 실질적 내용을 배제하려 한다. 그 이유는 윤리의 이러한 내용이 단지 경험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모든 것은 도덕의 원리를 위한 장식물로서 도덕에 전혀 쓸모 없을 뿐더러, 도덕의 순수성 자체에도 극도로 불리하다”. 칸트가 그 대신에 행한 것은 새롭다. 그는 종래의 전체 자연법론이 다룬 객관적인 실질적 문제대신에 주관적 도덕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인간의 도덕적 자율은 도덕세계의 근본 원리로 승화되었다. 도덕적 인격이 목적 그 자체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것이 경험세계(Sinnenwelt)의 일부로서 경험적 인간(homo phainomenon)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인간(homo noumenon)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덕적 행동이 “어떤 것인가”를 칸트는 그의 유명한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대답한다. “너의 주관적 행위원칙(Maxime deines Willens)이 동시에 보편적 법규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물론 이 무조건 명령도 매우 형식적이고, 게다가 의문점이 많은 원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순이 없는 결론을 수미일관 추구하는 것 모두가 도덕적으로 좋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점이 흔히 지적되고 있다. 그밖에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칸트가 인격의 도덕적 자율성의 원리로 人權의 철학적 근거에 대해 아주 근본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오늘날 독일 헌법의 기본권의 목록 속에서 불가양적 처분할 수 없는 법치국가의 최소한을 일별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칸트의 유산 때문이다. 독일 기본법 제19조 제2항에 여하한 경우에도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칸트의 사고양식을 떠오르게 한다. 기본권이 “경험적”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는 한, 법률상의 제한은 그 제한이 비록 기본권 안에서 “인간성”에 해당되더라도 유효하며, 그 반대는 아니다.
이제 “칸트의 윤리학이 끊임없이 사물의 객관적·도덕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벨첼(Welzel)의 지적은 매우 정당하다. 순수 주관적 윤리학은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인격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입법자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버린다. 이러한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가정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예컨대 사르트르도 그런 가정을 세웠음). 그렇다고 그것이 칸트의 기본입장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 위대한 사상가의 새로운 항변에 직면하지 않을까? 벨첼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 같다. 칸트는 “주관적인 도덕적 문제(윤리적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에 대응하여 실질적·윤리적 문제(윤리적 행위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귀속하는 독자적 의미를 간과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그 대신에 칸트는 “어떻게”(Wie)로부터 “무엇”(Was)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정언명령을 수단으로 하여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여기서 볼 때 누가 그 문제(Die Dinge)를 간과했는가? 이 章의 처음 두 번째 쪽 (위 제II장, 제1절)에서 언급한 것이 옳다면, 틀린 사람은 벨첼이다. 벨첼은 내용, 즉 “무엇인가 하는 것”은 주관적 혼합(Beimischung)없이, 즉 “어떻게 하는 것”(Wie)없이 찾아낼 수 있다고 명백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벨첼이 칸트에 대하여 제시한, “무엇”이 “어떻게”로부터 발전된다라는 공리(Zirkel)는 오류가 아니며, 좌우간 틀린 것이 아니다. 기능주의자(Der Funktionalismus)가 인정하는 것처럼(Luh- mann) 물론 “무엇이” 단순히 “어떻게”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님을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법률적인 것”(Rechtshaltiges)은 이미 법실현의 절차과정에서 주어짐에 틀림없으며, 결국 실제로 “법”은 그것으로부터 기인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칸트를 상당히 자세히 탐구했다. 그 이유는 근대의 전체 법철학과 법도그마틱이 그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아직도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법학에 있어서 보다 그의 인식비판에 더 들어맞는다. 특히 그의 正義論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의론의 문제에 있어서 칸트는 사실상 그 시대의 최고봉에 가 있지도 못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지조차까지도 한번도 근접하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돌이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배분적 정의: iustitia distributiva)을 이미 비례적 기하학적 평등으로서, 즉 관계적 평등(Verhaltnis- gleichheit)으로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그는 유추의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보았다. 이에 반해 칸트에게는 물론 그
가 선험적이고 순수하고 명확한 인식만을 인정하려 했기 때문에, 유추가 의심스럽게 보였음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유추적 인식은 애매하고 심지어 유추적이기 때문이다(유추에 대한 이러한 혐의는 오늘날까지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칸트는 평등을 수학적으로 정의하였다.
그의 형벌론은 완전히 모세의 율법식이다: “응보의 법(talionis)만이 ··· 형벌의 질과 양을 명확하게 정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이리 저리로 흔들거리며, 다른 것에 대해 혼합적 고려 때문에 순수하고 엄격한 정의를 선언하는 데 적절성을 포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명예를 손상하는 자는 그의 실추케 한 명예에 대하여 고통을 받아야만 되고, 절도하는 자는 그에 대한 소유의 권리를 상실해야 되고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가 살인했으면, 그는 죽어야만 된다. 여기서 정의를 충족하기 위한 다른 대안이 없다. 죽음과 아직 살아서 괴롭게 사는 삶 사이에는 어떠한 동등성도 없다.” 이러한 칸트적 정의론에서 윤리적 엄격주의가 어떻게 다스려지는가는 저 유명한 섬의 예에서 잘 보여준다: “시민사회가 그 구성원의 만장일치로 해산된다 할지라도(예를 들면 한 섬에 사는 전 주민이 서로 떨어져서 전 지구에 흩어질 것을 결의함), 감옥 속에 남아있는 최후의 살인자는 그 전에 처형되어져야 하며, 그 결과 모든 사람이 그의 행위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느끼게 하여야 한다. 살인을 범하고 혹은 명령하고 혹은 살인에 관여한 살인자인
한, 그 자들 모두는 죽음을 당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보편적이고 선험적으로 설정된 법률에 따른 사법권의 이념으로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의가 없으면, 인간이 지구 위에서 살 가치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는 제 아무리 신분이 높은 자에 대해서도 특별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Fiat iustitia, pereat mundus!).
3)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
칸트는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에게 타당한 합리적으로 인식 가능한 자연법, 즉 순수 이성법(Vernunftrecht)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연법의 내용은 적어도 상당히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그 경험 속에 실질적인 윤리적 내용도 포함된다고 칸트는 보았다. 그러나 칸트는 이 경험의 영역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무엇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요소, 즉 인간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의 요소와 거기에 더하여 법의 역사성의 요소를 간과했다.
역사법학파(historische Rechtsschule)는 법의 성쇠의 과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와 같은 결함을 사실적으로 보완했다. 그러나 역사법학파는 근본적으로 역사(Geschichte)만을 탐구했지, 인간(법)존재의 구조형식으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보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 입장에서는 법의 내용이 그의 시대적 장소적 조건의 결과로 우연의 산물인지 아닌지, 합법적인 것(Gesetz- maßigkeit)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법철학적 문제가 제기되지 않고, 그 결과 그에 대한 대답조차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처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법질서가 언제나 구속적인 것만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적어도 여기서 현재 구속적일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칸트가 단지 자연법의 특정한 표현, 즉 합리주의적·절대주의적 자연법을 반박했지, 자연법 이념 자체를 반박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하여 준다. 자연법 이념은 그 내용을 임의로 할 수 없는 “정당한” 법을 의미하나, 그렇다고 그것은 그와 같은 “정당한 법”이 모든 시대와 모든 환경아래 필연적으로 타당해야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법의 역사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인식한 첫 번째 사람은 헤겔(Georg Friedrich Wilhelm Hegel, 1770-1831)이다. 헤겔에서 독일의 관념론(Idealismus)은 -그리고 그와 함께 관념론적 자연법이- 최고로 꽃피워졌다. 칸트의 이원론적 철학(이원론)에서 볼 수 있는 존재와 의식, 자연과 정신, 객체와 주체, 현실과 관념, 존재와 당위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과는 반대로 헤겔의 동일성철학(Identitatsphilosophie)에서는 단지 하나의 세계, 즉 정신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그 결과 그의 철학은 종합명제를 이끌어 내기 위한 강력한 사색의 욕구와 아울러 생활형성(Lebensgestaltung)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플라톤이 관념론적 철학과 자연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플라톤에게서는 관념이 초역사적 형성체이며, 그 때문에 헤겔이 보았던 역사적 시대의 특수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다. 플라톤은 관념의 유출(Ausfluß)인 경험적 현실(Wirklichkeit)에서 무엇 때문에 생성과 변천과 쇠퇴가 존재하는지를 규명하려 하지 않았다. 헤겔 사상의 천재성은 그가 발전의 법칙을 관념 자체 속에서 이해하였다는 점에 있다. 모든 정신적인 것은 특정하고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도식인 正(These), 反(Antithese) 그리고 合(Synthese)이라는 단계에 따라 진행된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하면 유명한 헤겔의 변증법. 중요한 것은 이 변증법적 발전이 민족정신의 애매한 관리(Walten)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법칙에 따라 논리적-필연적으로 진행되어짐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헤겔에 있어서 역사는 이성의 꽃이 활짝 피는 것이지, 비합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길 철학을 동반하는 “유일한 사상”은 이성적인 단순한 사상이며, 이것의 의미는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 즉 세계역사에서도 역시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법학파가 민족을 최후의 가치로 보았던 것에 반하여, 헤겔에서는 민족대신에 전반적으로 약간 합리적인 것, 즉
국가를 최후의 가치라고 보았다. 헤겔에 있어서 국가는 가장 숭고한 개념이며, 완전한 현실, 즉 “도덕적 관념의 현실”과 또한 최고의 법적 가치이었다.
국가와 윤리적 이성, 국가와 법은 하나다. 그러므로 헤겔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법만이 존재할 뿐이지 현실의 국가 외에 또 하나의 관념적 국가란 있을 수 없고, 실정법 이외에 다른 또 하나의 자연법이 없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바로 헤겔의 법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금언이 있게 된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물론 헤겔은 존재하는 것을 단순하게 이성적이라고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그는 일반과 개별사이 그리고 다른 한편 객관적 도덕성과 주관적 심정(Gesinnung) 사이를 통일하려고 노력했다. 개별이익과 전체이익이 조정되고, 자유와 복종의 긴장관계도 없게 된다. 즉 국가는 “구체적 자유의 현실이다···. 새로운 국가의 본질은, 일반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행복과 결합되는 것이며, 따라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이익이 국가로 종합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본질로 볼 때 목적의 일반성(Allgemeinheit des Zwecks)은 고유의 법을 가져야만 하는 개인의 고유한 인식과 의사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과 역사성으로부터 나온 이와 같은 이론적 입장은 자연법에 대해 어떠한 손실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성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개인이라는 특수성(Besonderheit)은 도덕적 관념인 국가에 대하여 그들의 권리를 갖는가? 벨첼은 그 문제에 대하여 의미있는 방법으로 언급했다. 헤겔은 국가의 형성에 있어서 객관적 구속과 주관적 자유의 종합, 즉 일반성과 개별성으로부터 종합을 이끌어내려 했다. 여기서 매우 문제가 된 점은 개인적 양심의 역할이다. 헤겔은 그와 같은 문제점을 물론 정확하게 인식했으나, 그러나 “일정한 개인의 양심이 양심의 관념에 합치하는 것인지 아닌지, 좋다고 여기거나 좋다고 부르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하는 이런 문제는 단지 이와 같은 좋다고 여기는 당위의 내용으로부터 인식될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 고유한 형식에서, 다시 말하면, 주관적 인식으로서 양심
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벨첼의 비판은 이렇다. 그는 특정한 개인의 주관적 양심에 대립해 서있는 그와 같은 “객관적” 양심의 관념을 사실에 있어서 양심의 부정(Vernichtung)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관적·개인적이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일반적 양심은 그 자체 스스로 모순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구체적 도덕성문제에 옮겨가자마자, 개인의 고유한 성격(Eigenwilligkeit)과, 고유한 양심이 도덕적 실체성(Substantialitat)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놀란 만한 이 아니다. 양심과 주관적인 개별성에 관해 헤겔의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바다 속에, 즉 국가 안에 던져버렸다. 벨첼의 이러한 비판이 얼마나 정당하고 현실적이었던가는 -오늘날 양심의 이유로 문제가 된 것은 군복무의 거부문제 뿐이다(Art. 12a II GG)- 헤겔의 글을 몇 개 인용함으로써 명확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지상 위에 존재하는 신의 영상(Gottliche Idee)이다. 국가는 세계사 일반의 더욱 자세하고 특정한 대상이며, 국가 안에서 자유는 그의 객관성을 얻으며, 이러한 객관성을 누림으로써 자유는 생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법률은 정신의 객관성이며, 실제에 있어서 의지(Wille)이다: 그리고 법률에 복종하는 의지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의지는
스스로 복종하며, 자기자신에 있어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국가, 즉 조국이 현존재(Dasein)의 총체성을 나타내고, 인간의 주관적 의지가 법규에 종속될 때,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Gegensatz von Freiheit und Notwendigkeit)은 없어진다. 이성적인 것(Das Vernuftige)은 필연적으로 실체적인 것(Das Substantielle)이다. 우리가 법률을 인정하고 우리의 고유한 본질의 실재로서 법률을 따름으로써 화해하며, 하나의 동일한 순수한 전체가 된다”.
그와 같은 사상의 고리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감탄의 마음을 갖게 한다: 이성적인 것은 필연이며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 현실적이다- 국가는 그 자체 이성적인 것이다. 그 결과 자연법과 국가가 제정한 법의 통일이 있게 된다. 국가의 의지는 법의 최고의 원천이며, 국가의지를 초월한 다른 높은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 결과 보당(Jean bodin)의 주권론을 초월하여, 절대적 의미에서 국가가 최고였다.     헤겔의 가설에 동의할 수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 고통스럽게 체험했다. 국가는 결코 선험적으로 “도덕적 관념의 실재성”이 아니며, 국가의 법률은 자유와 자의식(Beisichselbstsein)의 표현이라고 할 만한 이성적 정당한 법으로 필연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실재(das Wirkliche)의 개념을 순수사실(Das reine Faktische)의 개념과 다르다 할지라도, 이성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헤겔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 즉 객관적 정신이라고 하는 관념에 근거를 두려 하였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 있어서 실재성을 결여하였다.
4) 유물론적 역사학파
그와는 반대되는 운동, 즉 칼 막스(Karl Marx, 1818- 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에 의한 유물론적 역사학파가 곧 이어 일어났다. 유물론적 역사학파는 이미 포이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의 유물론적·무신론적 철학에서 萌芽를 잉태했으며, 막스도 여러 번 포이어바하를 연구했다(특히 포이어바하에 관한 막스의 11테제는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헤겔이었다. 막스는 헤겔이 사물을 머리 속에 세워두었다고 보고, 이 사물을 되돌려서 다시금 발 위에 두어야 된다고 믿었다. 의식(관념)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의식이 존재에 의존한다고 본다. 좀 더 정확히 언급하면, 의식은 실질적인 생산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막스는 언급하길,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실질적 기초”를 형성하고 그 기초 위에 법률적 그리고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며, 특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식(Bewußtseinsformen)이 그 기초에 상응해 이루어진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법정책적 그리고 정신적 생존과정(Lebensprozeß) 일반을 제약한다.” 경제적 토대의 변경으로 “놀라울 정도로” 전체 상부구조의 변화가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일어난다”. 관념적인 것은 그러므로 인간의 두뇌 속에서 전화되어 번역된 물질적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관념적인 것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투쟁 수단으로써 모든 계급에 이용되는 사회적으로 제약된 행동방향과 행동지침이다. 법(도덕이나 종교도 포함)도 이러한 관념적 상부구조에 속하여,  전혀 독립성을 갖지 않으며, 그것은 지배계급의 의사가 승화된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법의 내용은 다시금 지배계급의 “실질적 생존조건 속”에 주어져 있다. 그리고 “자유, 정의 등과 같이 전래된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조차도 막스와 엥겔스는 타인에 의한 사회일부의 착취라고 하는, 지나간 수백 년간의 공통된 의식을 나타내는, 모든 지난날의 사회적 의식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유물론적 역사학파의 근본체제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의 연속은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방법으로 일어난다. 여기서는 단지 헤겔의 변증법과는 “반대로” 일어난다. 원초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며, 인간의 생존조건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봉건적 사회와 시민계급사이의 계급투쟁으로부터 시민계급이 승리하여 전면으로 나왔다. 시민계급은 그렇다고 무산계급(Das Proletariat)을 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그 때문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체제에 의하면, 통합체제로서, 즉 모든 계급투쟁의 종말로서 “무산계급의 독재”(Diktatur des Proletariats)가 일어난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종말로, 즉 “계급없는 사회”의 출현으로 국가도
법도 불필요하게 되고, 이것들은 저절로 “소멸하게” 된다. 그런 한에 있어서 우리는 헤겔식의 관념론으로 회귀한다. 헤겔에 있어서 국가는 완전한 실재성이며, 인간공동체는 그에 비해 전혀 가치가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이와 반대로 공동체가 전면으로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대신에 공산사회. 이 공산사회 안에서 “가난한 무산계급”(Lumpenproletariat)은 자신을 상품처럼 팔아야 하는 그와 같은 상품으로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으며, 사람은 더 이상 노동자, 의사, 법률가, 시인으로만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에서 사회(Gesell- schaft)는 일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이를 통해서 “나에게 오늘날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내가 사냥꾼도, 어부도, 목동도, 비평가도 아니면서, 내 기분 나는 대로 오전에 사냥을, 오후에 낚시질을, 밤에 목축을, 식후에 비판을 할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
막스주의의 인도주의적 기본기조(Grundton)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하게 충만 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구체적 인도주의”(realer Humanismus)에 대한 막스의 공식(Formel)은 사람을 천하고, 굴종하고,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존재로 만드는 모든 관계를 타파하는 무조건명령(kategorische Imperativ)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 사회”(menschliche Gesellschaft), 다시 말하면 “자연법의 실질적 요청”이 마침내 충족되어지는 “자유의 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초기 막스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가장 순수하게 보전하려고 하여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1961)을 위해 혁신적으로 투쟁한 者인 블로호(Ernst Bloch, 1885-1977)가 “자유의 제국”에서 머무를 장소를 찾지 못했던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일이 막스의 뜻대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이 실재성(Wirklichkeit)을 결여했다면, 막스의 유물론적 철학은 관념적인 것(Das Ideelle)을 결여했다. 관념적인 것은, “하부구조”에 의해 전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관계가 달라지면 종래의 관념은 “고사한다”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만이 문제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점을 유물론적 진영에서도 이전이든 이후이든 인정했어야만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엥겔스는 그의 생애말엽에 그 자신과 막스가 내용적 측면에 비하여 형식적 측면을 간과했다고 암시했다. 후에 레닌(Lenin)은 막스식 공산주의에서도 어느 정도 불특정 기간 법과 국가가 존속해야만 한다고 천명했다. 스탈린(Stalin)은 법과 국가의 “枯死”(Absterben)에 관한 종말론적 교리에 대한 거부를 극명하게 했다. “막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Marxismus und Fragen der Sprach- wissenschaft, 1950)라는 논문에서 그는 경제사회적 하부구조와 관념론적 상부구조라는 막스의 체제를 변경하여, 국가의 형식을 가진 상부구조는 수동적이어서 하부구조의 변경에 따라 적응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상부구조는 자기 스스로 활동적이어서 상부구조가 원하는 형식으로 하부구조의 변화에 작용을 하며, 이 때에 법률이 이용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법은 적극적이고, 사회를 변경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1920년대 후반 파슈카니스(Eugen Paschukanis)가 다시 한번 국가와 법과의 체제를 주장하자, 검찰총장이자 법무부장관인 비산스키(Andreij Wyschinski)는 그를 “민족의 적”으로 낙인찍고 그를 내쫓았다.
법은 다시금 그의 기능을 인정받았고, 결코 추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법은 이제 그러나 결코 계급없는 사회의 법이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공산당, 즉 공산당의 중앙위원회가 집합적인 오성에 기해 인식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국(Das Politburo). 그처럼
많이 언급되고 쓰여진 “사회주의적 법률이라는 것”(sozialistische Gesetzlichkeit)은 결국 黨, 다시 말하면 국가의 통제적 지도역할(Fuhrungsrolle)의 표현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양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관념적인 것에 대한 일면적 지향 때문에 국가의 절대화에 도달했
고, 막스주의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일면적인 지향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적으로 그것은 물론 20세기에서야 비로소 확인되었다.
5) 헤겔 이후의 시대
19세기에 있어서 헤겔주의와 막스주의는 하나의 에피소드이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분리된 헤겔학파는 19세기의 정신적 물결의 밖에서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방향의 철학자 중에는 라살레(Ferdinand Lasalle, 1825-1864)와 라손(Adolf Lasson, 1832-1917)외에 특히 슈탈(Friedrich Julius Stahl, 1802- 862)을 들 수 있다. 물론 그는 단지 제한적으로 헤겔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좌우간 그는 관념적 국가관(idealistische Staatsauffassung)을 가졌으며, 그에 따르면 국가의 권위는 국민주권에도 자연법에도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에게 독립적인 법규제정을 가능케 하고 동시에 조직적으로 성숙된 제도, 무엇보다 “군주원리”와 신분상의 분리를 정당화해 주는 신의 섭리(gottliche Einsetzung)에 직접적으로 기초한다. 슈탈은 특히 그의 3으로 된 “역사적 관점에서 본 법철학”에서 주장한 이러한 학설로 보수주의를 명백히 하고 20세기에 창출된 “제도법학파”(설립자: Maurice Hauriou)의 기초를 닦았다.
역사가는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나 합리적 자연법의 종말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19세기의 흐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파와 관련하여 비합리적 시대정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비합리주의는 생의 철학(Lebensphilosophie)에서 특별한 표현을 볼 수 있고, 그 철학의 대표자로 니체(Friedrich Nietsche, 1844-1900)와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를 들 수 있다. 또 프랑스 출신인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났다. 그럼에도 생의 철학 자체가 또한다수의 남용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슈미트(Carl Schmitt)와 퀼로이터(Otto Koellreuter)의 “민족주의 국가철학”(volkische Staatsphilosophie) 혹은 쳄버레인(Houston
Stewart Chamberlain)과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의 “종족철학”. 비합리주의의 또 다른 뿌리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npenhaur, 1786-1860)의 主意的 人類學(Die voluntaristische Anthropologie)이었다. 법철학과 법사상 일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눈에 띄게 사소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이 곧 그가 개별문제에 관한 토론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이러한 흐름을 더 깊이 파헤치는 것을 그만 하자. 19세기의 시대정신은 주로 (위와는) 다른 것이었다. (표어로) 우리가 나타낸다면, 불란서혁명에서 출발한 자유운동(Freiheitsbewegung); 사회적·경제적 생활을 지배한 영국의 자유주의(Liberalismus); 대학생조합의 설립(Die Grundung der Burschenschaft); 바트부르크의 축제(Das Wartburgfest); 코에체부스의 살해(Ermordung Koetze- buses); 함바허의 축제(Das Hambacher Fest); 바울성당의회(Paulskirchenparlament)와 기본권의 성문화 그리고 그밖에 19세기의 대법전편찬. 그것은 절대주의적인 자연법의 시대도 권위국가의 시대도 아니었다(“좌익”이든 “우익”이든). 그것은 실증주의와 법치국가의 시대였다.
4. 법학상의 실증주의
비악커(Franz Wieacker)에 의해서 그렇게 붙어진 “법학상의 실증주의”는 이성법적 思考에 의해서 야기된, 판결에 있어서 自意(Willkur)와 그로부터 발생된 유래 없는, 법적 불안에 대한 필연적 반작용이었다. 형법에서 특히 이러한 남용이 현저했다. 법관이 일정한 사건을 법률의 일정한 구성요건(그 법률은 1532년의 카롤리나 형법전이라 부른다)에 포섭할 수 없으면, 법관은 그의 “이성적인 재량”에 따라 판결하고, “예견할 수 없는 형벌”(poena extraordinaria)을 내린다. 게다가 어떠한 기판력(Rechtskraft)도 없어서 무죄로 선고된 자(Der Freigesprochene)도 언제라도 다시금 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다(무죄 석방된 자는 단지 “그 관할에서 석방될” 뿐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법률은 어떠한 효력도 없었다.
철학적 교육과 엄밀성을 갖고, 이 같은 잘못된 상태에 대항하여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법률가는 포이어바하(Paul Johann Anselm v. Feuerbach, 1775-1833)였다. 칸트 철학으로 교육된 비판주의자(Kritizist)로 이성에 기해서 근거를 둔 자연법 권리(naturliche subjektive Rechte)가 존재하는가는 -그는 객관적 자연법의 가능성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배제했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역사적 자연법”의 문제는 그에게선 분명하지 않다). 그의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1. 처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권리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인권(Menschenrecht)이라고 부른 것과 대체로 같다. 2. 모든 객관적 법의 본질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요소는 그것의 실정성(Posititat)이다.     특히 이 마지막의 것의 통찰은 포이어바하의 형법학설(그는 19세기 때의 가장 성공한 교과서의 저자이다)과 그의 입법활동(그에 의해 맨 처음의 현대적 법전, 즉 1813년의 바이에른법전이 유래한다)을 특색있게 만들었다. 그는 판결을 할 때에는 법률의 엄격한 구속을 요구했다. 즉 “죄형법정주의”(nulla poena sine lege). 첫째로 자유주의적 사상에 기해서 형법은 형벌권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 형벌권을 제한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정신적 후계자 리스트(Franz v. Liszt)가 정식화하여 법률은 바로 “범죄인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 des Verbrechers)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여기에는 “법의 정신”(Esprit des lois)에서 정립된 몽테스큐(Montesquieu, 1689-1755)의 권력분립론이 작용하였다. 즉 사법권은 법률을 적용할 뿐이지, 법을 창조하거나 보충해서는 안되며, “사법권은 법을 발음하고 발언하는 입”(la bouche qui prononce les paroles de la loi)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포이어바하도 이와 아주 유사하게 말했다. 법관은 법률의 문자에 엄격하고 명백하게 구속되어야 하며, “법관의 업무는 주어진 사건을 법률의 의미와 정신을 고려하지 말고 법률의 자구에 비교하여, 그 사건이 그 자구에 일치하면 유죄판결을 내리고, 그것에 불일치하면 무죄를 선고하는 일 이외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거기에 우리는 포이어바하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법관이 무조건 법률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첨부해야 할 것이다. 법관이 정의의 업무를 실현하는 마당에 정의에 배반하여 굴복하는 것은 배임행위일 때, (불의에 대하여) 법관이 순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법관의 신성한 의무라고 하였다. 따라서 법관은 “제정법상의 불법”(gesetzliches Unrecht)에 구속되지 않는다(Gustav Radbruch).
포이어바하의 “실증주의”는 그러므로 보충적인 유보조건을 갖는 그런 실증주의이다. 그것은 가치를 -즉 정의, 윤리, 합목적성에- 지향하는 “合當的 實證主義”(legitimer Positivismus)이다. 물론 그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법률의 효력이, 법률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이들 가치에 합치하느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실증주의에 있어서는 법의 제정형식에 따라 성립된 모든 법규는 효력을 가진다. 우리는 여기서 곧바로 칸트가 생각난다. 형식만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며, 내용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성(Verstand)은 “물 자체”(Stoff an sich)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법 자체(Recht an sich)인, 자연법도 그 전체 내용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올바른 법”(richtiges Recht)은 단지 우리의 오성의 범주
(Kategorie)로서, 즉 우리가 경험적으로 주어진 법소재에 적용하는 내용이 없는 사고형식(Denkform)으로서 주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형식에 기하여 우리는 실증적인 규범을 법으로서, 즉 올바른 법으로 사고한다. 완전히 이와 같은 의미로 신칸트학파인 슈탐믈러(Rudolf Stammler, 1856-1938; 그는 신칸트학파의 마부르크의 경향에 속한다)도 말하길, “어떤 법규(Rechtssatz)도 그의 내용의 특수성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정할 수 있는 그런 법규는 불가능하고”, 올바른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즉 슈탐믈러에 따르면 “올바른 법”이라는 것은 “순수한 사고형식”, 다시 말하면 “형식적 방법”(formale Methode)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법내용의 근본적 특성을 향한 물음의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슈탐믈러에 따르면 “자연법”은 단지 “변화하는 내용”을 갖고 존재할 수 있다(슈탐믈러에서는 그러나 찾아 볼 수 없는, 자주 인용된 표현).
19세기의 실증주의는 또한 다른 샘물도 마셨다: 즉 경험주의의 샘물(이에 상응하여 후에 규범논리학적 법실증주의와 사회학적 법실증주의가 발전하였다). 합리주의자가 그의 일면적으로 연역된 방법 때문에 물질적 현실의 세계를 등한시 다룬 결과, 이제 현실적 의미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칸트는 이미 인식의 두 가지 뿌리인 감각(Die Sinne)과 오성(Der Verstand)을 명백히 하고, 감각적인 것에 관련하여 그는 영국의 경험주의자와 결합하였다. 영국의 경험주의자는 모든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학문의 인식은 관찰, 실험과 인과관계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유에 대한 문제는 신비적 思辨으로 돌렸다. 경험주의에서는 “행복”(Machbare)이 문제되었다. 이러한 思辨은 “아는 것이 힘이다”고 본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후 유명론자(Nominalist)인 로크(John Locke, 1632-1704)에 계승되었다(유명론과 실증주의의 관계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흄(David Hume, 1711-1776)도 그가 비록 경험주의자임에도, 이와 같은 관련 아래에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한 두 명의 불란서인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데카르트(Rene Descartes)와 콩트(Auguste Comte, 1786-1857).콩트는 실증주의자의 창시자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러한 방향에 그 이름(실증주의)을 붙였다는 점에서 옳을 뿐이다(실증주의는 학문을, 경험할 수 있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정확한 것은 콩트가 그의 3단계법칙(Drei-Stadien-Gesetz)으
로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거쳐 수학으로) 실증주의에 효과적인 이론적 확실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있다. 실질적 확실성은 물론 수학적으로 다루어진 자연과학의 위대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모든 학문, 또한 법학도 자연과학적 방법, 즉 연역이 아니라, 귀납을 이용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일반적 자연법규범으로부터 법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사태의 관찰과 그 생활사태의 기본적 구조로부터 일반적 규칙을 얻는 방법을 이용한다는 설명보다 (실증주의를) 무엇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을까? 이러한 “자연주의적” 법철학은 그럼에도 방법론문제와 결합하여서 비로소 의미 깊게 활짝 꽃피웠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 때문에 다음(아래 제II장 제3절, III)에서 자세히 언급한다.
실증주의의 승리에 찬 돌진이 헤겔 사후에 유물론적 법철학 일반이 패배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자리에 소위 일반법학(Allgemeine Rechtslehre)이 들어왔다. 이 일반법학은 선험적 근본개념(법률관계, 법률주체, 법규범 등)과 기본구조(인과관계, 효력, 체계 등)를 구성하는 것에 제한하고, 법에 있어서 내용이 깃든 모든 철학적 근거를 사변적이라 하여 거부한다. 칸트의 정통적 계승자 모두에게는 법의 내용, 그 중에서도 특히 존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당위(“방법이원론”)는 학문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내용의 규정을 무비판적으로 입법자에게 양도했었다. 초기 라드부르흐도 “무엇이 옳은지는 누구도 확립할 수 없다면, 옳은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확립해야만 하고, 제정법(Das gesetzte Recht)은 서로 다른 법률관의 다툼을 권위 있는 명령(Machtspruch)으로 종결짓는다는 과제를 충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법의 제정권(Die Setzung des Rechts)은 모든 반대되는 법률관을 제압할 수 있는 意思(Willen)主體에게 귀속해야만 한다고 보면서, 법을 실시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그가 법을 제정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점에 힘과 법이 동일하다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 엿보인다. 라드부르흐는 물론 그 점에 대해, 정치적 힘이 법을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시행되고 있는 법이 법적 안정성을 단지 균형 있게 보장하기 때문에 법이 타당하다고 함으로써 빠져 나오려고 하였다. 정의가 아니라 법적 안정성을 법의 최고가치로 보았다. 이것에 표어를 붙인다면 법과 질서(law and order).     “법철학의 안락사”(Radbruch)인 일반법학의 창설자는 메르켈(Adolf Merkel, 1836-1896)이다. 그는 무엇보다 발전개념(Entwicklungsbegriff)을 법학에 도입함으로써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주장하길, 법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립할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의 형식으로 발전해 나가며, 이러한 합법칙적 진화로부터 미래의 법에 대한 인식도 연역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발전적 사상에 열매를 맺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리스트(Franz v. Liszt, 1854-1919)이었다. 리스트는 예링(Rudolf v. Jhering)의 목적이론(“목적이 법 전체의 창조자”)에 기초한 “현대적”(사회적) 형법학파를 창시하였다. 그는 생각하길,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을 역사적으로 생성되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생성하게 될 것을 결정함으로서 우리는 존재적 으로 있어야 할 것(Das Seinsollende)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이러한 존재적으로 있어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는 존재하고 있는 것, 즉 응보형벌 대신에 나타난 개선형벌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과 존재론적으로 있어야 할 것을 이처럼 하나로 엮어놓음(Ineinsetzung)으로써 방법이원론이 부분적으로 포기되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에 결점이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즉 여기서 말하는 발전이라는 것은 단지 달리될 수 있다는 것이지, 개선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될 수 있으며, 그리고 메르켈과 리스트의 사후에 법역사도 깜짝 놀랄만한 명확성으로 그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그 밖의 다수의 당시의 법학상의 법실증주의자를 개별적으로 자세히 고찰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 중 가장 중요한 분들의 이름만을 밝힌다; 빈딩(Karl Binding, 1841-1920; 그는 “고전” 형법학파의 대표로서 리스트의 가장 위대한 적수였다), 비어링(Ernst Rudolph Bierling, 1843-1918), 베르그봄(Karl Bergbohm, 1844-1927)과 솜로(Felix Somlo). 그밖에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아래의 방법론에 관한 章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20세기의 상반기에 중심적인 방향이었고, 무엇보다 법이론적·방법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큰 의미를 가진 학문상의 법실증주의의 방향도 또한 그 점에 있어서 같다. 우리는 그 경향을 -당위와 존재를 구분하는 방법이원론의 입장에 따라- 두 개의 진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으로 당위, 즉 규범에 향하는 규범논리적 실증주의이다. 여기서는 규범의 형식적 존재구조가 중요할 뿐이지, 그 내용을 문제삼지 않는다(Kant!): 이러한 실증주의를 가장 꽃피운 것은 켈젠(Hans Kelsen)의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적으로 규명하려는 실증주의로서, 여기서는 존재하고 있는 것, 즉 법사실(Rechtstatsache)을 대상으로 하고, 주관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법심리학(Bierling 등)과 객관적인 것에 중점을 둔 법사회학(Jhering에 그 뿌리를 둠)이 있다.
여기서 그밖에 더 언급되어야 할 것은, 실증주의가 그 후반기에서 다시금 또 다른 철학적 경향(칸트학파나 경험주의를 제외하고), 즉 물론 그 특징에서 일치하는, 실존철학(Gabriel Marcel과 Karl Jaspers에서는 전혀 그런 특색도 없다)에 의해서 부축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것(실증주의)은 대체로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존재론적 構想(ontologischer Entwurf)을 통해서 유명하게 되었고, 그것에 따르면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그 결과 우리 앞에 어떠한 도덕, 가치, 불가양의 법내용도 선재해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 지향된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도 법 일반이 어떤 “고유한” 존재양식(Seinsmodus), 즉 특정한 “자기존재”(Selbstsein)를 갖지 않고, 오히려 “비본질성”(Uneigent- l?chkeit)의 형식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법률이 자의(Willkur)의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대중의 현존재”의 포기(Preisgegebenheit an das Mas- sedasein).
5. 실증주의의 붕괴
법실증주의가 그의 가장 괄목할만한 외양상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즉 19세기 말기의 위대한 입법전인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민법, 상법 등의 편찬을 완수했을 때, 이미 법실증주의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법실증주의에 대한 비난은 우선적으로 내재적인 데 있다. 법실증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 즉 법관은 법창조적으로 활동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법(적용)을 거부해서도 안된다는 법창조금지와 법거부금지는 논리필연적으로 제3의 것, 즉 제정된 법질서는 하나의 완결되고 흠결없는 전체란 것을 전제한다. 법률에 흠결이 없다는 이러한 전제는 그러나 잘못되었음이 증명되었다. 그 동안에 법거부금지는 포기될 수 없게 되었지만, 법창조금지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법률에 흠결이 있는 경우에 법관은 부득이 법률의 저편에 놓여 있는 기준(Kriterien)에 따라 판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엄격한 법률실증주의는 그 뿌리 채 흔들리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 점을 더 깊이 논하지 않고, 다음에 다시 한번 언급한다.  물론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훨씬 더 불리한 상황이 거기(법실증주의)에 추가되었다: 법실증주의는 불법적 혹은 반도덕적 법률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약점을 갖고 있다. 다시 한번 포이어바하를 살펴보면, 그가 이와 같은 불법적 법률에 대한 하나의 유보조건, 즉 썩은 법에 대항하여 복종금지라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점에서 그는 순수한 법실증주의자가 아니다). 19세기의 말경에 그러나 이러한 제한을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법률과 법은 동일하며, 따라서 법률만이 그러므로 모든 법률도 법이다라는 법실증주의 사고양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베르그봄도 “법률이 형식적으로만 바르게 제정되면, 비록 제 아무리 극악한 제정법이라 할지라도 구속력을 인정”해야만 하고, 확실히 그와 같은 “악법”(Mißrecht)은 가능한 빨리 폐지해야 되지만,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법이기 때문에 오늘은 그 법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숙명적인 결론으로 선언하였다. 또는 솜로의 언명, 즉 “법적 힘(혹은 다른 용어로는 입법자, 국가, 주권)이 모든 법내용을 자의적으로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은 논의할 여지없는 진리이다”. 구겐하임(Paul Guggenheim)과 켈젠(Hans Kelsen)같은 분들의 유사한 등급들을 여기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할 것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반의 실증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당연한 가정인, 입법자는 결코 극악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는다란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입법자는 그러한 악법을 사실상 제정하지 않았다. 입법자 마음속에 도덕적 고차원의 의식이 아직 살아있었기에, 입법자는 실증주의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全能權(Omnipotenz)을 남용하여, 정의와는 반대되는 법률을 제정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보장, 즉 법률은 사물의 본성상 그와 같은 제약된 질서의 한 모습이며,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각각의 규정들은 정의를 향한 의지가 있음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볼 수 있어, 사회생활에 기해서 요구된 모든 합목적성에 비추어 볼 때, 법률사상은 극단적 유용성(krasse Utilitat)에 의해서 지나치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란 보장에 기초하여 “학문상의” 법실증주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이 확인시험에 올려지자, 비누방울처럼 모든 것(보장)이 헛된 꿈이 되어버렸다.      6. 법철학과 국가사회주의(나치스)
“법철학과 나치스”에 관한 章은 의심할 바 없는 독일 법철학사에서 가장 암울한 면이다. 나치스는 실제로 “극악하고”, “반윤리적이고”, “범죄적”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올바른 법”을 다루고, 그 때문에 불법에 대한 저항권을 갖는 법철학자들은 그때 어떠했는가? 아무 것도,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소수만이 몸을 돌려 국내외로 도주하였다; 켈젠(Hans Kelsen), 카우프만(Erich Kaufmann),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칸토로빗츠(Hermann Kantorowitz), 바움가르텐(Arthur Baumgarten). 다른 몇 명은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있었다; 엥기쉬(Karl Engisch). 벨첼(Hans Welzel). 거의 대부분은 독재정부를 진지하고도 열심히 협조하였다; 슈미트(Carl Schmitt), 포르스토프(Ernst Forsthoff), 쾰로이터
(Otto Koelreutter), 디이체(Hans-Helmut Dietze), 니콜라이(Helmut Nicolai), 횐(Reinhard Hohn), 후버(Ernst- Rudolf Huber), 담(Georg Dahm) 그리고 비록 그들 이름은 잊어버려도 좋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그 밖의 많은 분들.
이러한 행위는 나치스가 권력을 잡자마자 기본권의 존재에 대해 개시된 공격을 박수로 환영하였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본권을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고방식의 소산으로 보고, 이러한 것들은 “민족공동체”(Volkische Gemeinschaft) 내에서 볼 때 기껏해야 하위의 가치만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사회주의적 법철학자들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당연히 유태교, 평화주의, 사회주의와 프리메이슨비밀결사 모두를 가장 나쁜 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나치스의 반자유주의와 반개인주의의 이름으로 주관적 권리, 그 중에서 무엇보다 주관적 공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고, 급기야는 심지어 주관적 공권의 종말을 말하기조차 하였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법률관 때문에, 권리능력과 권리주체를 제한하기까지 하였다. 즉 권리능력은 단지 “동일(독일) 민족”(Volksgenossen)에만 존재하지, 유태인이나 집시와 같은 이질민족에는 있을 수 없고, 그 결과 평등의 원칙이 포기되어졌으며, 평등의 원칙을 바이마르헌법에 기인한 균등한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적인 것으로서” 이단으로 몰았다. 그 당시의 법철학자와 국가법학자는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남다른 혐오를 했다. 그들은 국가를 “권위적 국가”, 즉 “전체적 국가”, 바로 “지도자 국가”(Fuhrerstaat)를 만들려고 하였고 또 그렇게 되도록 협조했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권력분립도 없고, 권력분립
이라는 것은 순수한 指導者像을 부정하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구조라고 비난하였다. “지도자”는 최고의 행정권을 가졌으며, 또한 최고의 입법자였고 최고의 법관이었다. 심지어 그를 헌법의 수호자라고 나치스법철학은 천명했다.
그 절정은 물론 “외래민족”의 박해, 특히 유태인의 박해에 있었다. 또한 그러한 박해를 그 당시의 많은 법철학자들은 박수로 환영했으며, 심지어 선동적 언어로 부추기었다. 오늘날 대외정책(Auslanderpolitik)의 깃발아래 “외래민족”을 차별하는 중대한 징후를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 그와 같은 외래민족을 박해하는 사건을 영원히 종결된 것으로 즐겨 간주하려 한다.     법학방법론에서도 나치스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즉 법은 언제나 나치스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그에 따라 법관은 혁명전의 법에 엄격히 구속되지 않으며, 심지어 실정법에 무조건 얽매일 필요도 없었다. 나치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법률을 초월하는 판결, 심지어 법률에 반하는(contra legem)판결도 허용된 것으로 보았다. 라렌츠(Karl Larenz)는 그 때문에 이미 그 당시에 “자연법과 실증주의를 넘어서”(Jenseits von Naturrecht und Positivismus)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것은 실제로 오늘날의 우리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그 당시에 생각한 그것과는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Ⅳ. 자연법과 실증주의를 넘어서
1. 1945년 이후 자연법적 사상의 재생
1차 세계대전 후의 法危機(Rechtsnot)시에 -나치스에 의하여 “법”이라고 선포된 불법이 완성된 시기에- 흔히 “자연법사상의 재생”이란 약어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자연법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법원들이 무엇보다 자연법을 적용하여 납득할 만한 판결을 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그러나 많은 법원들이 시행되고 있는 법률도 무시하게 되자, 이와 같은 “자연법적” 판결이 불확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연방법원(Bundesgerichtshof)은 1954년까지에도 객관적이고 불변의 윤리법률(Sittengesetz)을 주술적으로 불러내어, 이런 도덕법률의 도움으로 표준적인 것으로 간주한 세계관에 제정법률을 조화시켰다.
이러한 판결은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자연법으로 간주된 것은 사실에 있어서 상당히 다채롭고, 적지 않게 모순이 많고 모호한 가치표상의 다양성에 지나지 않으나, 그 가치표상 중에서 법의 본질에 대한 확실히 하나의 주체적인 근본확신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19세기까지에도 사로잡혔던 시민적 박애정신(Humanitatsideal)과 오늘날의 독일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과 인권의 이념과 전혀 다를 바가 아니다.
이러한 시기에도 자연법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입장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무엇보다 천주교의 자연법론(신토마스주의)의 대표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연법 관념이 이미 죽었다고 믿었던 그 당시에도 자연법 관념을 고집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더욱 더 학문적으로 탐구했던 분들로, 여기에 카트라인(Victor Cathrein, 1845-1931)과 마우스바하(Josef Mausbach, 1861-1931)만을 거명한다. 천주교의 자연법론이 빈손이 아니었던 것은 새로운 법의 근본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향을 대표해서 대체로 페어드로스(Alfred Verdross, 1890-1980), 멧스너(Johannes Meßner, 1891년생), 롬멘(Heinrich Rommen, 1897-1967), 우츠(Arthur F. Utz, 1908년생), 마르치즈(Rene Marcic, 1919-1971),후푹스(Josef Fuchs, 1912년생), 빌레이(Michel Villey, 1914년생)와 아우어(Albert Auer)가 있다.
개신교의 자연법론은 법실증주의 약점에 대항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자연법적 전통이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신학자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가 1943년에 쓴 “정의”(Gerechtigkeit)라는 책은 개신교 쪽에서도 새로운 지평으로 뚫고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약간 후에(1948) 프랑스의 개신교 법철학자 엘룰(Jaques Ellul, 1912년생)의 저서인 “법의 신학적 근거”가 출판되었으며, 그 책에서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에 의해 정립된 “그리스도론적” 방향으로부터 법의 혁신(Rechtser- neuerung)을 촉구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독일에서는 특히 에른스트 볼프(Ernst Wolf, 1914년생)가 이러한 의미에서 작업을 하였고, 또한 에릭 볼프(Erik Wolf, 1902- 1977)와 연방법원의 초대 원장인 바인카우프(Germann Weinkauff, 1889년생)는 이러한 관련 때문에 언급될 만하다. 여기서는 주로 개신교 쪽에서 언급된 자연법을 살펴보면, 그들은 자연법적 규범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 예를 들면 가족, 교회, 국가, 소유권 같은 것을 “신의 창조물”(Stiftungen Gottes)로서 모든 국가권력에 선행하는 제도로 이해했다. 그것이 소위 “제도적 법률학설”로 이 학설의 본래 창설자는 프랑스의 국가법학자인 오류(Maurice Hauriou, 1856-1929)이고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주로 돔보이스(Haus Dombois, 1907년생)에 의하여 대표된다. 세세한 점에 있어서는 그 차이가 물론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법의 재생”에 대한 최종적 평가는 오늘날 물론 아직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는 확실히 확정지울 수 있다. 즉 칸트의 비판주의는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용적으로 선험적인,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법원리는 그 근거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의 재생” 다음에 변증법적 필연성으로 “법실증주의의 재생”이 오며, 신실증주의가 뒤따른다. 물론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은 자연법론이 학문상으로 유지될 수 없다(여기서는 합리주의적 절대적 자연법을 말함)는 것은 명백하게 되어, 그 결과 결국 실증주의가 틀림없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특히 켈젠(Hans Kelsen)에서 유래한 실증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우리는 회의에 근거한 체념 때문에 실증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에버스(Hans-Ulrich Evers)가 19세기 말엽의 실증주의자들의 회의에 찬 견해들(위 제II장, 제3절, V)을 다시금 파악하는 일은 의미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길 “가장 나쁜 법질서도 이행해야 할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질서도 “보호를 위해서 최소한”을 보장한 것이며, “이러한 기능을 위하여” 그러한 법질서도 내용에 관계없이 하나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가 어디선가 이해될 수 있을지라도, 발생되었거나 발생되고 있는 모든 사정을 고려해 보면,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에 전혀 해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계속해서 자연법이냐, 실증주의냐하는 양자택일을 고집한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양자택일적 사상은 곧바로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게 된다. 바로 전후에 일어난 토론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누구나 수천 번 주장한 논증이나 반대논증을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아무도 반대자에게 그의 견해를 바꾸게 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도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근거제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에 이러한 숙명적인 의견충돌을 극복하기 위한 계기가 20세기 전반기에 이미 있었고, 이름을 밝히자면 구스타프 라드부르흐의 법철학이다.
2. 구스타프 라드부르흐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는 그의 초기에 실증주의자였으나, 노년에 들면서 자연법자로 변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전기작가들에 따라서 매우 대조적으로 다루어진다. 양자 모두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단지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cum grano salis)만 타당하다. 양자의 시기에 실증주의 혹은 자연법적 입장을 초월하는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점은 특히 법개념에 대한 라드부르흐의 정의를 보면 처음부터 실증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드부르흐는 신칸트학파인 서남독일학파에 속했으며, 이러한 범위에서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와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학파에 속한 베버(Max Weber, 1864-1921)는 법철학보다 법사회학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라드부르흐는 특히 리케르트의 제자인 라스크(Emil Lask, 1875-1915)의 가치이론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라드부르흐는 19세기 중엽에 법철학이 쇠퇴한 후에 법내용과 법가치를 다시금 법철학적 완성을 시작한 첫 번째의 법철학자였다. 그것은 그의 법개념에서 잘 보여준다.
이러한 법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물론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가지 종류의 기초적 사고모델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된다. 그 중 하나는 빈델반트와 리케르트에 기인한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구분이고, 이 때에 전자는 “계산적으로”(nomothetisch), 즉 법칙과학적으로 다루어지고 일반적 (자연)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개별기술적(idiographisch) 성격을 가지며, 그렇게 함으로써 후자(문화과학)는 역사적으로 각인된 내용을 갖고 있는 개별적인 것을 기술한다(그 때문에 법칙과학과 사건과학의 구별을 논하기도 함).존재와 당위의 관계(세 가지 종류의 기본입장)
존재 당위
1. 존재와 당위는 동일하다(“방법일원론”).
고전적(관념적) 자연법론(Thomas von quin, Neuthomisten, Hegel)
2. 존재와 당위는 다르다(“방법이원론”).
Kant, 신칸트학파(Kelsen, Radbruch).
법실증주의(Bergbohm, Somlo)
분석적 법이론(Hart, Ross)
3.존재와 당위는 등가적이다; 상호관련적
(“방법양극론”).
변증법(헤겔주의자: Binder, Larenz, Schonfeld – Marx, 막스주의자: Bloch,
Klenner).
유추: 법은 존재와 당위의 일치(W.Hassemer, Arthur Kaufmann).
사물의 본성: 이념의 소재규정성 – 소재의 이념규정성(Maihofer,후기의                                                                      Radbruch, Schambeck)
감각적인간(Mundussensibilist) 지능적인간(Mundusintelligibilis)
自然的存在로서의人間 知的存在로서의人間
經驗的 先驗的
直觀 槪念
知覺可能한現象 本質
經驗 超經驗的
(“형이상학”)
體驗 思考
內在的 超越的
開放體系 閉鎖體系
問題中心(Topik) 公理論
生活事態 規範
具體的·實證的 추상적·일반적
暴力(事實的) 權力(정신적)
實效性 妥當性
他律 自律
强制 自由
因果律 목적성(목적론)
合目的性
利益法學 槪念法學
法社會學的 規範理論
“事物”(Sache) “본성”(Natur)
“下部構造” “上部構造”
動態的 情態的
······ ······
그 두 번째 점은 존재와 당위, 즉 실재와 가치의 방법이원론이다. 이것이 법철학의 가장 중심적 문제 중의 하나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가치적인 것(Das Werthafte)이 우리의 세계에서 실현되는가? 객관적이고 그 자체 존재하는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주관적 가치평가만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양자 중 어느 것도 아닌 것인가, 가치적인 것이 오히려 (단지) 가치적인 사실(Sachverhalt) 속에 존재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철학에서 유사한 문제로 오래된, 그러나 늘 다시금 새롭게 제기되면서, 결코 해결되지 않는 보편문제의 싸움에 해당된다. 이 보편문제의 싸움은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본 논문에서 존재와 당위의 관계를 거의 각각의 측면에 주제별로 세울 수 있을 때, 다음의 도표에서 하나의 이해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얼마나 많은 개별적 문제가 존재와 당위의 관계에 대한 근본문제의 대답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다음과 같은 문제들 법효력, 법인식, 체계이론, 법학적 Topik, “사물의 본성”, 이익법학과 개념법학, 그리고 또한 타율과 자율과의 관계를 비롯한 강제와 자유, 인과와 목적, 권력과 힘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
사상적 관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면, 라드부르흐는 그의 초기 시절에 엄격한 방법이원론주의자에 속하였다. 당위라는 것은 -물론 법도 또한- 이 입장에 따르면, 언제나 더 높은 그리고 결국 최고의 당위(“법률이념”)에서만 나온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당위는 당위로부터 연역되지, 결코 존재하고 있는 것, 현실적인 것, 사실적인 것으로부터 귀납적으로 당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과 문화 사이에 아주 깊고,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문화현상은 문화현상에 내재한 목적이나 목표에 의해서 정해질 뿐이지, 원인(Ursachen)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 점은 다음의 도표가 보여준다. 학문이나 도덕, 예술의 법칙과 같이 법의 규범도 당위(Sollen)를 포함하는 문화법칙이지, 필연(Mussen)을 포함하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그러한 문화법칙은 목적적으로 절대적 가치의 실현을 지향하나(그것은 “가치관계적”이다), 그렇다고 그것(문화법칙)은 현실의 제국이 아닌 관념의 제국에 거주하는 절대적 가치와 동일하지 않다. 학문에서는 진실을 찾고자하는 인식행위만을 문제삼는 한, 잘못된 판단도 학문에 속하며, 예술도 예술적인,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의 이념을 지향하는 창조라는 어쩌다 성공하는 작품활동이다. 그리고 법도 또한 공허한 정의가 아니다. 어떠한 법규범도 모든 개별사례에서 절대적 정의를 보증할 수 없다. 법규범이 일반적으로 정의에 기여한다고 정해져 있는 한, 법규범은 법규범이고 또한 법규범으로 남는다.

法의 槪念
(Gustav Radbruch에 따름)
價値關係性
自然法則 文化法則?????? 理念의法則
演     繹
價値無關係 價値關係 純粹價値
事實的 現實的으로 妥當 理念的으로 妥當
必然 當爲 理想世界(utopia)
强制 自由 絶對
因果性 目的性 卽自性
········ ········
學問       ??????????  眞
道德       ??????????  善(倫理)
美學(藝術) ??????????  美
法         ??????????  正義
(法律, 慣習法, 判例法)                   (法理念)
+———–+———-+           +———-+———+
實定性               規範性       普遍性             社會性
法的安定性           法律의 目的   平等性          人間의 社會
(Gesetzestelos)  一般性          關係의 秩序
正義:”法은 正義에 奉仕하는 意味를 가진 現實이다”(Radbruch,
Rechtsphilosophie, S. 123).
혹은: 法은 “社會生活을 爲한 一般的, 實定的 規範의 總
體”이다(Radbruch, Vorschule der Rechtsphilosophie, S.
34).
法理念
(廣義의 正義)
|
+————————+————————+
|                        |                        |
平等      合目的性        法的 安定性
(狹義의 正義) (目的理念, 共同善의    (法的 安定으로서의
正義, 社會的 正義)     正義, 法的 平和)
形式: 어떻게 生活事態가 規制되어야 하는가? 恣意禁止, 法의 一般性의 原則, 각자에 그의 것을  內容: 무엇이 規制되어야 하는가? 利益, 期待, 必要. 倫理的 善理論. 手段: 무엇에 의해서 要求, 請求, 禁止가 規制되어야 恣意가 지배하지 않게 되는가?

形式上
對的-一般的

內容上
相對的(觀點에따라)

機能上
權威的

個人的 自由 社會 個別者 로서의 人間
超個人的   勸力

全體
社會的存在
로서의 人間
(?????????????)
超人格的
諸文化價値
共同體
文化價値의
創造者로서
의 人間
實定性
實踐可能性
不變性

自律的 存在
로서의 人間
(독일 기본법
제1조 제1항)

法의 具體的, 內容的
目的으로서의 人間.
不可讓의 人權에 의한
法의 相對性의 制限

他律的인 存在
로서의 人間
(法[强制]規範
의 受範者)
내용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는 양자의 정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것은 실증주의적이 아니다. 실증주의적 법개념은 말하길, 법이란 자의적인 내용을 갖더라도형식적으로 올바르게 제정된 규범의 총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라드부르흐는 강조하길, 정의에 관련되고, 정의를 지향하는 규범만이 법적 자격(Rechtsqualitat)을 갖는다고 한다. 라드부르흐의 후반기에서 이러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다시 한번 아래서 보게 될 것이다. 둘째로, 라드부르흐의 법개념은 자연법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올바른 법”은 절대적 법가치(Rechtswert)와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드부르흐에 있어서는 오직 “대체로” 正法만이 인정되었지, 악법(verwerfliches Recht)은 그에 의해서 결코 받아들인 적이 없으며, 그것은 그의 초기시절에도 그랬다.
라드부르흐는 그의 法에 대한 定義(Rechtsdefinition)로부터 正義(Gerechtigkeit)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그것을 매우 일찍이 실행하였고, 그에 의해서 구성된 모델이 오늘날까지도 법철학적 정의문제 토론의 기초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발전이 그의 사후에는 계속되지 못했다(정의의 새로운 이론이 Chaim Perelman, John Rawls와 Ilmar Tammelo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라드부르흐는 그의 정의론을 다시 한번 완전히 새롭게 개정할 생각을 가졌기에, 그는 원리의 상대주의적 성향을 다소 완화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기서 재생한 도표는 라드부르흐에 의해 작성된 것은 아니나,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해 볼 때, 그가 마지막으로 받아들인 입장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유감스럽게도 위의 모델을 자세히 설명할 여분이 없다. 라드부르흐는, 평등의 원칙(동등한 것은 동등하게, 동일하지 않는 것은 그에 상응하여 달리 대우한다는 원칙)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나, 그러나 단지 형식적 성격을 갖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는 그러므로 내용을 갖는 원칙, 즉 목적이념이 추가되어져야 한다. 이 목적이념은 물질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상대적으로만 효력을 갖는 데, 그 이유는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순위에 관계없이 법에 있어서 3개의 서로 다른 최고가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주의적, 초개인주의적 그리고 초월적 인격가치(transpersonaler Wert). 그러므로 법적 안정성을 위하여 법내용을 권위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다. 다시금 라드부르흐의 학설이 실증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 가치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문에 상대주의를 희생하게 된다. 그리고 라드부르흐의 이론은 자연법적도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올바른 법”은 법이념에서 추구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법이념”에 해당되는가에 대하여, 라드부르흐는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선험적 조건, 이성원칙, 공리(Axiom), 가설(Hypothese)이 포함되지 않을까?
우리가 라드부르흐에 관하여 잘 이해를 한다면, 도표를 통하여 법이념은 결국 그 이념에 따른 3가지 종류로 복사된 인간(자율적 존재로서 인간, 법의 목적으로서 인간, 타율적 존재로서 인간)의 인격성의 이념과 일치한다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다. 혹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법이념과 人間像(Menschenbild)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이 때에 주의할 것은 도표를 위에서 아래로 읽어, 인간의 모습은 법이념에서 유래한다고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읽어도 가능하다: 법이념은 인간의 이념의 복사(Abbild)이다. 그 결과 다시금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 빠지게 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인간의 “이념”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라드부르흐의 후기사상과 일치해서, 이 때에 개인주의, 초개인주의 그리고 초월적 인격성을 각자 독립한 법의 최고가치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전체 인간적 인격(Eine ganze menschliche Person)이 각인된 특색으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사회인(Sozialperson), 문화주체(Kulturtrager). 이러한 전체 인간만이 법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인정함으로써 법철학적 상대주의는 그 근본에서 극복되었다. 또한 법철학 내에서 법인류학이 어떠한 중요성을 갖게 된 지를 분명하게 해주었다(아래 제II장 제4절 II 참조).
라드부르흐는 그의 초기 학설에서 법적 안정성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했다(위의 제II장 제3절 IV 참조). 그 때문에 법에 있어서 실증적 요소, 즉 법의 실증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가 노년이 되어 실증주의의 타락을 체험한 후에, 그가 죽기 조금 전 “사회주의의 문화론”(1949)의 제3판 후기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그는 이전에 가졌던 사상의 근본을 변경한 필요가 없었고, 단지 중점을 다른 데로 돌려서, 지금껏 그늘진 곳에 있던 그것을 완전한 빛이 있는 곳으로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1946년에 불법의 무효와 그 불
법대신에 나타난 “초실정법”의 무효에 관한 라드부르흐의 학설은 그가 이미 초창기에 구상한 법개념의 결과일 뿐이며, 이제 법적 안정성보다 실질적 정의에 보다 더 중점을 둔 것뿐이다. 이러한 학설의 근본사상은 연방헌법재판소의 연방법원을 포함한 여러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그 사상을 기술해 보자: “정의와 법적 안정성” 사이의 갈등은 다음과 같이 해결되어져야 할 것이다. 즉 정의에 대한 實定(제정과 힘에 의해서 보장된)法의 모순이 참을 수 없을 정도에 달하여, “부당한 법”으로서 제정법이 정의에 양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정적으로 보장된 법은 그 내용이 비록 부당하고 비합목적적이라 할지라도 정의에 우선한다. 제정상의 불법과 부당한 내용을 갖긴 하였지만 효력을 지닌 법률사이에 명확한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경계설정은 아주 명확하게 정할 수 있다: 정의가 한번도 추구되지 않고, 정의의 핵심을 이루는 평등이 實定法의 제정시에 의식적으로 거부될 때, 그 때에 制定法律은 “부당한 법”일 뿐만 아니라, 법적 자격도 전혀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 그러므로 실정법을 정의에 기여하라고 정해진 질서와 制定(Satzung)이라는 것 이외에 달리 定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드부르흐는 이전보다 더 정의에 중점을 두었으나, 법적 안정성을 무시하는 자연법론의 결점을 피했다. 그 점은 1차 세계대전 후에 매우 많이 논의된 “사물의 본성”의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라드부르흐는 사물의 본성에서 단지 “思考形式”만을 보았을 뿐, 결코 새롭고 “구체적 자연법”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장은 자연법과 실증주의를 초월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정확히 읽는다면, 그에게서 “올바른 법”, 혹은 “옳지 아니한 법”이란 것도 결코 주어져 있는 상태(Vorhandener Bestand)가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그 때문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라드부르흐식의 공식은 하나의 과정(Prozeß), 즉 표준점은 있으나 어떤 보장도 없는 산마루에서의 등산객의 등산(Gratwanderung)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라드부르흐는 언제나 판결과 그에 따른 책임(Verantwortung)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3. 법인류학
라드부르흐의 정의론은 논리필연적 진행에 따라 결국 모든 법의 근거와 목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삼고, 그 결과 법인류학을 문제삼는다. 라드부르흐 스스로는 법인류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현대 법철학에서도 법인류학에 대한 몇 개의 논문이 있을 뿐이다. 법인류학은 오랫동안 학문의 의붓자식에 불과했다. 그 점에 대한 이유가 있다.
물론 철학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언제나 인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런 테마는 철학에 있어서 지배적인 중심문제가 아니었다. 고대인은 우주, 즉 자연을 문제삼고, 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 중세에도 이와 유사하여 인간은 신이 만든 창조질서의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우스 쿠에스에서는 인류학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근대의 위대한 체계론자들도 고유한 인류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주어져 있는 세계질서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는 그와 같은 주된 근거에 기해서 인간을 해방하여 인간 스스로 독립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단지 이성의 “주체”(Subjekt), 즉 인식의 주체로 파악하여, 결국은 인간을 초월적 주체 내지는 범신론적으로 이해하여 범이성적인 것으로 보았다. 칸트도 역시 인류학하고는 거리가 멀고, 그에게는 도덕적 인격으로서 인간만이 관심이 있었지, 피조물로서 인간은 관심 밖이었다. 인격에 관한 철학은 결코 인류학이 아니다.     확실히 많은 “인간상”은 언급되었으나,그럼에도 인류학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의식적으로 모든 초월적 관계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이 자기를 자기 스스로 뒤돌아보게 되자 인간 자체가 철학하는 일의 주제가 되었다. 그와 같은 전환(Durchbruch)은 쉘링(Friedrich Wilhelm Schelling, 1775-1854)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리고 나서 생의 철학(Soren Kierkegaard, Fried- rich Nietzsche)이 그것을 테마로 삼게 되었으며, 쇼펜하우어도 그 문제를 논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적 인류학은 후셀(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방법론(아래 제 II장 제4절 III)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쉘러(Max Scheler, 1874-1928)는 현상학적 방법론에서 출발하여 인류학적 테마를 맨 처음 명확하게 표현하였고, 그 결과 현
대의 철학적 인류학이 발달하게 되는 길을 닦았다. 좀 나중의 사람들, 예컨대 플레스너(Helmuth Plessner, 1892년생), 클라게스(Ludwing Klages, 1872-1956), 겔렌(Arnold Gehlen, 1904년생), 로타커(Erich Rothaker, 1888-1965)등 이들 모두는 다소간 현상학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실존철학에서 특히 사르트르(위의 제II장, 제3절 IV)는 인류학적 연구를 하였다. 이미 베르그송이 기초작업을 해놓은 프랑스에서 인류학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적 인류학자로는 Geston Bace- lard(1894-1962)와 Maurice Merleau-Ponty(1908-1961)를 들 수 있다. 최근에는 행태연구(Verhaltensforschung)가 인류학 연구의 중심과제이다. 로렌츠(Konrad Lorenz, 1903년생)가 그 문제에 있어선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껏 이야기한 것은 법인류학의 고유한 역사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쉽게 해준다. 최근까지도 이러한 이름을 가진 분야가 아직도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았다. 피켄처(Wolfgang Fikentscher)가 이런 관점에서 방법적 인식(methodisches Bewußtsein)이 아직도 발달과정 중에 있다고 한 말은 정당하다. 지금까지 아주 소수이긴 하나, 독일어로 된, 중요한 법인류학 연구문헌이 있고, 가장 중요한 논문의 저자를 들면, 뤼펠(Hans Ryffel, 1913년생), 람페(Ernst-Joachim Lampe, 1933년생), 브?만(Jan M. Broekman)과 포스피질(Leopold Pospi?sil, 1913년생)이 있다. 그밖에 짤막하지만, 부분적으로 중요한 논문들이 있다. 그 사이에 문제가 된 문헌의 수정작업은 거의 없었다. 시급한 일은 법인류학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일이다. 이 때에 좁은 의미를 갖는 철학적 문제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생물학적 그리고 특히 심리학적 관점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 즉 내면화(Internalisation), 문화화(Enkulturation)와 문화변용(Akkulturation)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밖에 민족학(Ethnologie)과 동물행동학(Etho- logie), 비정상적 행동(deviantes Verhalten) 문화적 그리고 부문화적(subkulturell) 행동방법 등등은 법인류학에 포함된다. 유행하고 있는 다수의 외래어의 이용은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의 법철학에서 우리가 법이 무엇인지를 정말 모른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해결할 수 없는 심연깊이 놓여 있는 수수께끼의 반영에 불과하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jewski)는 언젠가 말하길, “개미는 개미떼를 구성하는 일정한 양식(Formel)을 알고, 벌은 벌집(Bienenstock)의 구조를 안다(그것들은 물론 인간들에 관한 양식을 모르나, 그들 자신의 양식은 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단지 인간만이 자기들의 구성양식을 모른다”.
4. 그 밖의 흐름
후셀(Edmund Husserl, 1859-1938)에 의해서 시작된 현상학은 법철학의 부흥을 위해 또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후셀의 중요제자로서 1891년에 출생하고,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Edith Stein은 1942년 Auswitz에서 살해되었다). 현상학의 이론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하고 있는 순수본질(ansichseiende Wesen- heiten)은 순수하게 그 자체 주어져 있는(Selbstge- gebenheit) 모든 “우연적 존재계수”(Daseinskoeffizienten)를 “괄호 안에 넣어 무력하게 하거나”, 혹은 “본질적”(eidetisch)이고 “현상학적 환원”(phanomenologisch Re- duktion) 아래서 “현상학적 판단중지”(ideierenden Akten)
을 함으로써 나타나며, 그 본질은 확실히 엄격하고 명확하여, 오류가 없으며 적합하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게르하르트 후셀(Gerhart Husserl, 1894년생)과 라이나하(Adolf Reinach, 1833-1917)가 법의 선험적(칸트가 말하는 형식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님) 요소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법의 선험적 요소라는 것은, 입법자가 사리에 합당한 규정을 정하려면, 지켜야 될 요소이나, 설사 입법자가 준수하지 않았다해서 그 법률이 무효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에 관한 이와 같은 논리적·인식이론적 견해처럼, (현상학에 대한) 가치이론적 견해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이론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者(philosophischer Gewahrsmann)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쉘러(Max Scheler, 1874-1928)이다. 벨첼(Hans Welzel, 1904-1977)과 그의 제자인 슈트라텐베르트(Gunter Stra- tenwerth, 1924년생)는 그 이론에서 주된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법전체(gesamtes Recht)는 “사물논리적 구조”(sachlogische Strukturen)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행위 등이 규범화되려면, 그 사물논리적 구조가 -예컨대 인간의 행위구조를 비롯한 고의문제 그리고 정범과 공범의 관계구조- 제정법의 규정을 구속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근본적 가치결정은 사물논리적 인식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기본적 가치결정이 사물논리적 인식에 선행한다. 단지 그 때문에 사물논리적 관련은 실정법의 개별적 형성을 구속한다”.
제3의 입장인 존재론적(ontologisch) 견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콘라드-마아티우스(Hedwing Con- rad-Martius, 1888년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관심사가 관계하는 것을 두 가지 방향에서 영향을 미치었다. 첫째로 그는 해석학에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시 언급하게 된다. 둘째로 그는 존재론적으로 기초한 실존철학을 세웠다(이 둘은 물론 서로 관계를 갖는다). 현상학의 이와 같은 분야는 특히 마이호퍼(Werner Maihofer, 1918년생)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법과 존재”(Recht und Sein)에 관한 연구에서, “자기존재”(Selbstsein) 외에 또한 사회적 존재와 그 결과 법에 하나의 “고유한” 존재형식, 즉 “∼으로서 존재”(Alssein)를 인정함으로써 하이데거(위의 제II장 제3절 IV)를 극복하였다. 중요한 점은 그가 법의 연원으로서 혹은 “구체적 자연법”으로서 이해하는 “사물의 본성”의 문제를 토론에 끌어들였다는 점이다.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토론과 함께 자세한 언급은 본 문제사적 章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 다른, 현상학에 의해서가 아닌, 마부르크의 신칸트학파에서 출발한 존재론적 철학을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이 매우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 철학에서는 고유한 철학적 방향은 없으나, 그럼에도 하르트만의 인식은 매우 많은 법철학적 그리고 법학적 개별문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유사한 것을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특유하고 독자적 실존철학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또한 신헤겔학파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학파에는 빈더(Julius Binder, 1870-1939), 쇤펠트(Water Schonfeld, 1888-1958), 라렌츠(Karl Larenz, 1903년생) 등이 속한다. 한편으로 이 학파에서 주의할 것은, 신헤겔학파는 실증주의적이 아니어서, 2차 세계대전 후 법의 부흥에 기여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신헤겔학파는 (권위주의적 국가이론과) 근접하다는 이유로 나치스의 몰락과 함께 질식하였기 때문에, “구체적 질서사상”(Carl Schmitt, 1888년생)의 원용(Berufung)은 더 이상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올바른 법”에 대한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사색을 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제3절 근대법학 방법론의 역사적 발전
여기서는 법학방법론의 근대 역사에 한정하여 언급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의 관점에서 볼 때, 법학방법론은 오직 법학의 근대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나쳐서는 안될 것은 피켄쳐(Wolf- gang Fikentscher)에 의해 이전(로마)의 법과 외국(영미)의 법에 대한 방법론의 포괄적인 설명을 특히 참조하길 바란다. 그 책에서 (이들 문제에) 관심있는 독자는 아주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Ⅰ.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적어도 독일어권 내에서 볼 때, 근대법학 방법론은 사비니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에 의해 기초가 잡혀진 전통적 방법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법학방법론의 모델을 검토해 보자.     두 번째의 도표는 단지 설명상의 이유로 독립되어 있을 뿐이다. 방법론에 관한 것은 실제로 첫째 도표이다. 그리고 “해석”에 관한 것은 그 다음에 있다.
법학 방법
소위법적용 소위법발견
(생활사태를 법규범 아래에 “포섭”)     (“흠결보충”: 판결내려야 할 사태가 기존법규범에 의해  전혀 규제되지 않거나 직접 규제되지 않는 경우)
당위(SOLLEN)              존재(SEIN)

규범으로부터 。—- 일치 ──、사건으로부터
구성요건의 탐구              사안의 탐구
해석(Interpretation)               구성(Konstruktion)
表象         확정         평가         유추       역추
(Vorstellung)  (Feststellung)   (Wurdigung)      (Analogie)  (Umkehrschluß)
규범의 직접적 작용              법규범의 우회적 작용
가치결정
법관의 자유로운 법발견
법의 발전적 형성
(여기에는 소위 법규범의
성찰          논증          논의     목적론적 연역도 속함)
(Reflexion)   (Argumentation)   (Diskussion)
* 소위 法的 擬制는 그 본질상 법으로 정해진 유추이다.
법 해 석
(법규범의 내용과 적용범위의 탐구)
방법에 따른 구분                        결과에 따른 구분
문리적내지 논리적 확대해석 축소해석
문헌학적해석      체계적 해석  (법규범의 적용범위를   (법규범의 어의를
(어휘, 用語, 어휘의              語義를 넘어서 확장   넘지 않고, 그 가능
가능적 의미)                   시킴)                  한 어의를 제한함)
(목적론적 축소, 즉
형식논리적해석     목적론적 해석          법규범의 핵심영역
(개념으로부터 법률  (개별법규범의 목적, 의미  까지 축소하는 것
효과가 연역된다:   -입법이유- 내지 다수     은 더 이상 “해석”
“개념법학”)        법규범과 법질서 전체의   이 아니라 -유추
목적, 의미 -법의 이성-   와 같이- 법규범
에 대한 물음: “이익법학”)  의 보완, 법의 발
전적 형성, 즉 규
범을변화시키는
축소이다)
주관적(역사적)해석               객관적 해석
(“입법자의 의사”)               (“법률의 의미”)
우선 첫째 도표를 관찰해 보면, 법판결과정의 두 가지 종류인 “법적용”과 “법발견”을 볼수 있다. 이런 것이 전통적 방법론의 출발점이다. 대개의 경우는 “법적용”이며, 이 법적용이라는 것은 일정한 사안(Sachverhalt)을 해석이 다소 필요한, 그러면서도 그 자체 완전하게 성립되어 있는 규범아래(경우에 따라서 다수의 규범아래) “포섭”을 다루는 -“그것만”을 다루는- 일이다. 그것을 “바바리식”(modus babara)에 따라 순수한 논리적인 3단 논법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살인자는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M은 살인자다.
——————————
M은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법적용자(Der Rechtsanwende)는 수동적으로 머문다. 그는 단지 두개의 객관적 대상(Großen)인 법률과 사건을 서로 병렬할 뿐이다.
예외적으로 법률에 흠결이 있는 경우, 즉 판결해야 될 사안(Sachverhalt)에 “적용준비가 다 된”(fertige) 법규범이 아직 없는 곳에서만, 법관은 “법발견행위”(Rechtsfindungsakt)를 통해서 법창조적으로 -말하자면 입법자의 대리로서- 활동해야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명한 규정은 스위스 민법 제1조이다: “법률과 관습법이 침묵하는 경우, 법관은 그가 입법자였다면 제정했을 규정에 의하여 판결해야 한다”(이 규정의 정신적 아버지는 후버<Eugen Huber, 1849-1923>이다).
법관에게 법창조활동이 허용되는지, 혹은 허용되어야 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 허용되는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많은 법학자가 다루어왔다. 이미 위(제II장 제3절 IV)에서 본 바와 같이, 법관은 법적 안정성과 권력분립의 이유로 가능하면 법률의 字句(Wortlaut)에 엄격히 구속되어야 한다(포이어바하와 그 밖의 학자들은 심지어 해석금지를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사비니도 심사숙고를 하였다.
그의 초기시절에 나온 “법학방법론”(1802/03)에서그는 확실히 틀림없는 제정법실증주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제정법실증주의적 요소를 내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사비니는 해석(Auslegung)을 “법률에 내재하는 사상의 재구성”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그는 “고전적 해석론”이라고 불리는 (앞에 있는 도표에서 기초가 되어 있는) 법률해석의 4개 원리를 발전시켰다. 첫째가 문법적 요소이다. 문법적 해석의 대상은 “입법자의 사상에서 우리의 사상으로 전환”(Ubergang)을 매개한 “어휘”(Das Wort)이다. 두 번째는 논리적 요소이다. 논리적 해석의 대상은 사상의 체계적 분류(Gliederung)로서, 개별적 부분을 서로간에 연결하는 논리적 관계이다. 세 번째의 것이 역사적 요소이다. 그것은 “그 법률제정시에 당면한 법률관계에 관하여 법률규정에 의해 결정했던 상태”가 문제된다. 마지막인 네 번째는 체계적 요소이다. 이것은 “모든 법제도와 법규가 하나의 거대한 통일로 결합되는 중대한 내적인 관련”에 관계한다.
이러한 도식에서는 “확대”해석과 “제한”해석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비니는 그런 해석은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그러한 해석은 입법자의 생각을 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른 해석의 기준은 그러므로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사비니는 “주관적 해석론”을 신봉하였고, “법률의 의미와 목적에 기초한 객관적·목적론적 해석론”을, 법률의 목적은 법률의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것은 철두철미 실증주의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법실증주의는, 법률을 초월하여 그 법률의 의미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주관설은 그러므로 모든 시대에서 법실증주의자의 낙원이었다. 그 이론의 중요한 점은 법적 안정성이다. 객관주의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생활관계의 끊임없는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법률도 탄력을 잃어 그 결과 부당한 결과를 내게 된다는 점을 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객관설은 법관을 법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3권 분립에 저촉하게 된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안에 따라 한번은 더 객관주의설에, 다음에는 더욱 주관주의설로 왔다갔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비니의 이론도 역시 이런(그리고 이점에서 뿐만은 아니지만)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의 초기 시절에서도 그는 순수한 주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흠결을 보충하는데 유추의 사용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말하길, 유추는 실정법 자체로부터 나오는 실정법의 보충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Von Beruf unserer Zeit fur Gesetzgebung und Rechtswissenschaft와 System des heutigen Romischen Rechts)에서 사비니는 그의 “방법론”의 입장을 상당히 후퇴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제정법이 더 이상 최고위가 될 수 없고, 법의 원천은 “민족정신”(Volksgeist)이다. 법규정은 법제도나 전형적인 생활관계로부터 직관이나 추상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확대해석과 축소해석도 허용된다. 목적론적 해석도 더 이상 엄격하게 비난하지 않았다. 물론 사비니는 그 점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였지만, 법률의 “근본”으로부터, 혹은 “一般的 法的 思考”로부터의 해석은 더 이상 해석이 아니라, 법과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법의 형성(Rechtsfortbildung)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Ⅱ. 개념법학
법관의 법창조금지는 곧바로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법률은 언제나 내재하는 흠결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해석이라는 것은 이미 법률처분권한(Verfugung uber das Gesetz)을 의미하여, 법률처분시에는 해석자가 주체로서 함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랫동안 시간이 흘렀어도 성숙되지 못했다. 오히려 다양한 방법으로 주관·객관의 도식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중의
하나가 19세기에 많은 추종자를 가졌던 개념법학이다. 그 개념법학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많은 법률가가 이용하고 있다.
반드시 실증주의에만 사로잡혀져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개념법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는 단순한 개념으로부터 법규를 연역하는데 있다. 예를 들면 “법률상의 人”(juristische Person)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파생된다. 법률상의 人은 “人”(Person)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의 대상이 되는 능력이 있고, 형벌을 받을 능력이 있다. 이러한 개념은 인식의 원천으로 이용된다. 실재(Existenz)는 본질에서 나온다는 이러한 존재론
(Ontologismus)에, 저 유명한 존재론적 신의 증명(Gottesbeweis)은 기초하고 있다. 즉 “가장 완전한 존재”(vollkommenstes Wesen)의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그의 실재(Existenz)가 나온다(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할 수 없으니까).
개념법학자들은 그 개념법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법률은, 생활관계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부터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푸흐타(Georg Friedrich Puchta, 1798-1846)는 그의 저서 “Cursus der Institutionen”(1841)의 첫 권에서 전체 개념피라밋을 완성하여, 그 최상부에 최고의 개념을, 그 최고개념으로부터 그 다음의 매우 추상적 일반적 개념을, 이 일반적 개념으로부터 다시금 구체적 내용이 있는 개념을, 이와 같은 식으로 하여 개념을 연역하였다. 라렌츠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아래단계로부터 위의 단계로 갈수록 피라밋은 폭을 잃게 되나, 높이를 얻게 된다. 폭이 크면 클수록, 다시 말하면 소재가 많으면 많을수록, 높이는 낮아진다. 즉 전체의 통찰가능성은 적어진다 – 그리고 그와 반대의 경우도 일어난다. 폭은 내용에 상응하고, 높이는 “추상적” 개념의 범위(적용범위)에 상응한다. 맨 위에 가장 일반적 개념이 있고, 그 개념 아래서 그 밖의 모든 개념, 즉 屬과 種의 그러한 개념을 포섭하게 된다. 즉 기초적인 점에서 출발하여 중간단계를 거쳐 특별한 것을 탈락시켜, 가장 일반적 관념에 도달할 수 있다. 푸흐타는 그것을 바로 “개념의 계보”(Genealogie)라고 부른다. 여기서 합리주의적 자연법의 방법론과의 유사성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법과 실증주의
는 방법론상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즉 이 양자는 법은 보다 더 높은 단계 그리고 결국은 최고단계의 당위에서 연역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모든 파생된 개념의 내용을 함께 정하는 최고단계의 개념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그리고 이때에 어떻게 하여 순환논법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문제된다.
푸흐타는 최고단계의 개념에 법윤리적 내용을 받아들인다. 예링(Rudolf v. Jhering, 1818-1892)은 이에 반하여 그와 같은 전제를 파기하고, 순수하게 귀납적으로 처리한다. 그는 그의 초기작품에서 “자연역사적 방법”(naturhistorische Methode)을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 이 방법에 신랄한 조롱을 하였다. 그 때는 자연주의의 시대였다. 즉 자연과학의 사고방법으로 법학이 지향하는 시기였다. 그렇게 하여 눈에 뛸만한 꽃이 피었다. 그러기에 예링의 다음의 글이 자주 인용되었다. “모든 개념은 생산적이며, 시간을 절약케 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또는 그는 이러한 구조법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구조법학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법규를 발견하게 한다”.
예링에 대한 탐구는 그만하고, 위(제II장 제3절 IV와 V)에서 이미 언급한 “合當的”(legitimen) 제정법 실증주의를 대표하는 빈트샤이트(Bernhard Windscheid, 1817- 1892)의 개념법학을 살펴보자.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입법자는 윤리적 실체를 지닌 자로 전제되어, 단순히 하나의 大命(Machtspruch)을 발하는 입법자가 아니라, 법률 속에 “민족의 이성”이 스며들게 하는 입법자이어야 한다. 라렌츠는 이것을 “입법자의 이성을 신뢰함으로써 다소 완화된 합리적 제정법실증주의”라고 부른다. 빈트샤이트의 실증주의는 그 밖의 점에 있어서 이미 심리주의로 빠지긴 했으나, 그는 방법문제에서는 중도의 입장을 취하였다. 물론 그는 실증주의자로서 주관적 해석방법을 찬성하였으나, 그러나 입법자의 “意思”를 관념화하여 立法者意思의 “객관적 이성”에 의존하였다. 그 결과 사실상 객관주의에 가까운, 그러나 객관주의적 위험에 빠지지 않는 입장을 취하였다.
다음 시대, 즉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의 전반기에 객관적 해석론이 점점 많이 관철되어졌다: 빈딩(Karl Binding), 바하(Adolf Wach), 콜러(Josef Kohler),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자우어(Wilhelm Sauer). 이러한 전환은 주로 형식주의적 개념법학이 점점 더 의미가 공허한 법을 낳게 하였다는 점에 있다. 객관적 해석방법을 이용하여 의미가 공허한 추상적 법률개념에 다시금 의미를 풍부히 불어넣으려고 하였다. 법률의 해석이라는 것은, 라드부르흐의 말을 빌리면, “이미 인식했던 것의 인식”(Erkenntnis der Erkannten)도 아니고, 또한 “예전에 생각했던 것의 반성”(Nachdenken eines Vorgedachten)도 아니며, 오히려 “생각했던 것을 마무리짓는 생각”(Zu- endedenken des Gedachten)이다(법률의 창조자가 그 법
률을 이해하는 것보다, 해석자가 그 법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법률이 그 법률 제정자보다 더 영리할 수 있다). 법률은 심지어 그 법률의 제정자보다 더욱 영리함에 틀림없다. 법률이 중요하지, 입법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는 홉스(Hobbes)의 말로 표현하면: “입법자는, 그의 권위에 기해서 법률을 제정했기 때문에 입법자인 것이 아니라, 그의 권위에 기해서 법률의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에 입법자가 된다”.
Ⅲ. 경험적 법실증주의
객관적 해석론은 법률개념에 의미를 풍부히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어디서 오는가? 개념법학자는 그것을 법률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내재적 목적론”(immanente Teleologie)이라고 부른다. 법률개념을 “교배”(Paarung)하여 번식(Inzucht)하는 일이, 결국은 법률의 의미내용이 없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법률 밖에 놓여 있는 것을 이용하여야만 했다. 물론 자연법으로 회귀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 여기
서는 법적 사실(Rechtstatsache)을 이용하게 되었다. 여기서 법을 내부세계의 사실, 즉 심리적 사실로서 이해하거나, 아니면 외부세계의 사실, 즉 사회적 사실로 이해하는 경험적 법실증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방치된 분야가 법학의 영역 내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다음 시대에 매우 큰 결실을 맺는데 영향을 주었다. 다른 한편 법적 사실에 대한 일면적인 지향으로, 법의 고유한 문제, 즉 법의 규범성(Normativitat)이 법의 영역에서 사라져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1. 비어링
고유한 의미의 심리학적 법이론(Psychologische Rechtstheorie)은 비어링(Ernst Rudolf Bierling, 1814- 1919)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험적 실증주의자들은 법의 효력을 증명하는 데 개념적으로 어려움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효력의 근거를 가치 속에서 찾을 수 없고, 단지 사실 속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에 두 가지 사실(Fakten)이 고려된다: 승인과 힘, 즉 동의와 권력(Imperium). 비어링은 첫째의 길을 걸었다. 그에 따르면, 법이란 것은 공동체 내에서 법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곧바로 제기된다. 즉 법에 대해 승인을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비어링은, 승인이라는 것은 계속되어진 습관적 행위라고 응답한다. 그러므로 간접적 승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법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 즉 확신범에 대하여도 유효하냐의 문제에 답한 것은 아니다. 이미 헤겔은 그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법을 위배한 자는, 법을 논리필연적으로 인정하고 있기에 예를 들어 절도범은 소유권을 취득하려 하고, 그 결과 그는 필연적으로 그의 소유권의 법적 보호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승인은 심리적 현상이지, 결코 논리적일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최근에 루만(Nikolas Luhmann)은 승인을 기능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승인은 확신으로부터 나온 동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복잡한 사회에서는, 법률피적용자가 기능할 수 있을 때, 즉 법률피적용자가 가능한 한 방해없이 배워서 하나의 체계 안에 들어갈 때만, 하나의 체계는 그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법률피적용자도 전체 체계의 한 부분이어서 결국 체계자체가 승인을 낳기 때문이다. 비어링에 되돌아가서, 그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객관적 해석론의 명백한 반대자였다. 법률해석은 (법률)성립사(“입법자료”)의 도움을 얻어 입법자의 실제의 의사를 탐구하는 데 있지, 법률의 정신을 탐구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2. 예링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링(그의 책 “권리를 위한 투쟁”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은 그의 초기 시절에 주장한 구조법학을 후년에 접어들면서 포기하였다. 그 같은 일은 무엇보다 그의 두 권으로 된 저서인 “법에 있어서의 목적”(1877/1883)에서 일어났다. 그 책의 모토인 “목적은 전체 법의 창조이다”라고 한 것은 그의 새로운 방향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예링은 법학은 수학이 아니라고 하면서 “논리적인 것을 숭배”하는 데 반대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목적을 고찰하는 것(Zweckbetrachtung)이며, 목적이 법을 독자적으로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고찰은 목적주체에 대한 물음을 낳는다. 예링은 사회(Gesellschaft)를 고유한 입법자로 간주하고, 사회를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결합체로 이해하여,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각자가 타인을 위함으로써 자기도 위하고, 자기를 위함으로써 타인도 위하는 활동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 관하여 현저한 모순된 사상 속에서 예링은 그럼에도 국가의 법률제정독점이라는 제정법실증주의적 견해를 철저히 준수했다; “법은 국가 내에서 유효한 강제규범의 총체이다···”; 국가는 법의 유일한 연원이다. 그럼에도 법은 사회적 목적에 관련되며, 그러한 목적으로부터 법은 그 내용을 받아들인다. 모든 법규는 “사회의 생존조건을 보장하는 목적을 갖는다”. 예링은 더 이상 논리적이거나 심리학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사회학적·유용성으로 논증하였다. 그러나 목적의 평가(Bewertung der Zwecke)는 어디서 오는가? 그 점이 그의 법이론, 즉 그가 정신적 시조가 된 이익법학의 가장 큰 약점이다.
3. 이익법학
이익법학에 의해서 법학은 개념법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논리가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가치가 일차적인 것이다란 표어아래, 법률의 개념에 대하여 때때로 매우 의심스러울 정도의 거부가 일어났다. 그 사이에 이익법학이 -그 대표자는 헥크(Philipp Heck, 1958- 1943)이고, 그밖에 유명한 분은 슈톨(Heinrich Stoll, 1891-1937)과 뮐러-에르츠바하(Rudolf Muller-Erzbach, 1974-1959)가 있다- 법학에 생명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굉장한 열매를 맺게 해 주었다. 라렌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익법학은 응고된 법률개념(Gesetzbegriff) 아래 단지 형식적·논리적 근거에 의한 포섭의 방법대신에, 법질서에 고유한 평가척도에 따라, 복잡한 사안과 그런 사안에서 고려되는 이익을 평가하는데 요구되는 형량에 의한 판결의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이익법학은 법적용의 실재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혁이었다. 여기서 이익법학은 법관에게 선한 양심의 부탁이나 흔히 있는 피상적인 근거제시(Scheinbegrudungen)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 점은 옳다. 그러나 이익법학의 다른 측면은 법실현과정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극도로 의문투성이고, 때때로 전혀 볼품없는 근거제시를 하기도 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을 -예를 들면 생활의 필요, 갈망, 기대, 역할 등- 한편으로 법의 인과적 요소(Kausalfaktor des Rechts)로 간주하였다(“발생학적 이익법학”). 다른 한편 -경험적 사회학적 실증주의에는 매우 모순되지만- 이익이라는 것이 가치, 즉 당위로 이해되어 이익은 이익평가의 척도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이와 같은 비밀스럽고 변증법적 도약인, 양으로부터 질로, 존재로부터 당위로 전환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명백한 순환론적 절차를 어떻게 설명할까? 법이론상으로 이익법학은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방법론상으로 이익법학은, 라렌츠가 적절히 지적한대로, 지속적 효과를 주었다. 물론 이익법학은 객관적 해석론을 거부했으나, 그럼에도 이 학설은 제정법의 기초가 된 이해관계(Intressenkonstellation)와 그리고 그러한 것의 평가를 법률해석자에게 요구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그 학설은 법률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게다가 법률의 흠결시 목적론적 관점에서 법을 주관적 명령(“eigene Gebot”)에 의하여 보충할 권리가 법관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하였다(“생산적 이익법학”).
4. 자유법운동
자유법운동의 가장 저명한 학자인 칸토로비츠(Her- mann Kantorowicz, 1877-1940)가 이익법학의 가장 현저한 약점을 이미 1910년 “법학과 사회학”에 관한 한 논문에서 유리알처럼 명백하게 밝혀냈다: “어떠한 이익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느냐하는 문제는 법률의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서도 결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법률상 어떤 것을 우선 하느냐하는 문제는 법률목적의 고려 없이는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상황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법률목적을 아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한 것들은 어디서 오는가? 자유법운동은 -그 이름은 에어리히(Eugen Ehrlich, 1862-1922)가 지었고, “교리에 얽매이지 않음”이라는 것에 의식적인 유추를 의미함- (그 문제에 대한) 고유의 대답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자유법 운동에 있어서는 합리주의적 자연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합리적 자연법은 이미 죽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논리적·형식적 개념법학 그리고 “로마법적 체계”(Pandektismus)와 “스
콜라철학”의 그런 종류에 반대하는 비합리적 경향을 문제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자연법운동은 생의 철학(제II장, 제3절, III 5)의 유산을 받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정신적 시조는 소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이다. 그리고 비록 자유법운동의 철학적 방향은 아닐지라도, 비철학적 방향에서 자유법운동의 입심 좋은 대변자로는 푹스(Ernst Fuchs, 1959-1029)가 있다.     “자유법”은 근본에 있어서 법률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물론 자유법론자(Freirechtler)는 “법률은 문언에 반해도 된다는 우화”(Contra-legem-Fabel)를 항시 무시하며, 그들은 법관에게 (유효한) 법률을 무시할 권리와, 심지어 법률에 반하여 결정할 권리를 허용하려고 한다는 가정을 반박한다. 실제에 있어서 자유법률가는 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법률에 결합이 있을 때, 법관이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려할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자유법론자의 견해에 따르면, 법률이 (특정한 사건에) 해당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법률에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이 특정한 사건을 명확하고 일의적으로 정하지 않을 때에도, 그 법률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적어도 모든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칸토로비치는, “거기(법규)에 있는 단어이상으로 많은 흠결이 법규에 존재하기 때문에, 법률적 사건이 적용될 법규의 전체개념 아래 곧바로 포섭되는 것은 단지 예외적인 우연적 사건에 한정될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러나 법관은 어디서 “자유로운 법”을 찾을까? 그런 법은 어디서 나올까? 그 점에 대해 칸토로비치는 實證主義的·主義的으로 대답했다: 모든 당위적인 것은 존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당위(Sollen)는 의욕(Wollen)이기 때문이다. 이사이(Hermann Isay, 1873- 1938)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였다. 그는 법관의 판결은 법률로부터 연역한 것이라 보지 않고, 오히려 (법관의) 의지행위(Willensakt)라고 보았다. 더욱이 법감정이 판결에 선행하며, 논리적 -외관상의 논리적- 근거제시는 그 뒤에 뒤따라서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점에 올바른 생각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석학적 선행이해”(hermeneutisches Vorverstandnis)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이해가 단지 비합리적 법감정의 문제(Sache)에 해당될 뿐일까? 그리고 그것에 뒤따르는 근거제시는 피상적으로 보이는 논리에 불과할까?
5. 법사회학
意慾(Wollen)은 當爲(Sollen)가 아니다. 입법자가 어떤 것을 원한다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강요(Mussen)가 아마 일어날지 모르나, 그러나 결코 의무는 발생하지 않는다. 법적 당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답할 책임은 자유법운동에 있다. 순수히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법사회학(Rechtssoziologie)도 그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없었다. 법사회학이 사회적 사실(gesellschaftliche Tatsachen)을 탐구한 것이 자기의 목표라고 생각한 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점은 옳았을 뿐 아니라 현재도 옳기 때문이다. 법사회학의 실수는 법사회학을 도그마적인 법학에 대신하려는 데 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Eugen Ehrlich가 “추상적 개념형성과 구성이라는 웃음거리가 된 가장행렬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는 요청을 하였을 때, 그와 같은 신랄한 조소(Zynismus)는 그 때의 시대정신으로 볼 때 이해는 되나,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이라는 것의 불신과 함께 법률형식의 불신이 법을 얼마나 악용하게 할 수 있는가를 우리는 체험했기 때문이다.
사회학과 아울러 법사회학의 “위대한 선비”(Der große alte Mann)는 베버(Max Weber, 1864-1920)이다. 그의 법사회학은 엄격하게 경험주의적이다. 이에 관해 그는 가끔 “이해사회학”(verstehender Soziologie)을 언급하였어도 그가 엄격한 경험주의적이었다는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바로 우리에게 특히 관심 있는 효력문제(Geltungsfrage)에서도 그는 경험적 입장을 견지했다. 베버는 어느 하나의 법규범에 대해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있어야 되는” “규범적 의미”와 공동체 내에서 “사실적으로” 발생하는 것 사이를 아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왜냐하면 공동체 행위에 참여한 인간은 ··· 일정한 질서를 효력 있는 것으로 주관적으로 간주하고 사실적으로도 그렇게 다룬다는 것, 즉 그 참여한 인간의 고유행위가 일정한 질서에 지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공동체 내에서 사실적으로 발생한 것과 규범적인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험적 효력”이라는 것은 일정한 개인이 “경제적 재화를 그의 처분 아래에 둘 수 있는, 혹은 장래 취득할 수 있는” “계산가능한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하고, 이때에 이를 위해 이미 존재한 강제기구(Zwangsapparat)의 도움을 전제한다. 법은 그러므로 결국 힘에 의해 성립된다고 한다(Imperiums- theorie). 그 사이에, 법규범을 필요한 경우 이용할 수 있기 위하여 국가적 힘을 사용함으로써, 베버가 물론 예견했던 것 중에서 기껏해야 기대와 기회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당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중엽까지의 법사회학은 법에 관한 고유한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법사회학이 경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졌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리스트(v. Liszst)의 명예훼손에 관한 정의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명예훼손을 후두운동, 음향진동, 청각에 자극, 두뇌에 전달이라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물론 리스트는 명예훼손의 “본질”이 명예를 훼손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와 같은 규범적 내용은 “학문적 인식”을 어렵게 한다고 보았다. 이 같은 기묘한 예는, 사람들이 법도그마틱(Rechtsdogmatik: 법교리학)을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를 증명하여 준다. 예루살렘(Franz Jerusalem, 1883-1970)은, 도그마적 법학에서는 진리를 문제삼지 않고, 단지 정치적 목적설정을 문제삼는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법학은 더 이상 “올바른 법”을 위해 노력할 수 없었고 실제에 있어서 그러한 법학은 올바른 법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위의 제II장 제3절 VI 참조).
Ⅳ. 논리적 법실증주의, 특히 “순수법학”
1. 한스 켈젠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법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자, “순수법학”의 창시자인 켈젠(Hans Kelsen, 1881-1973)은 위와는 아주 반대되는 입장에서, 규범적 법도그마틱은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법정책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켈젠은 카르납(Rudolf Carnap, 1881-1970)을 위시한 논리적 실증주의 혹은 신실증주의의 빈학파(Wiener Kreis) 출신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만이 의미 있고 이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종류의 주장, 특히 가치와 규범의 내용에 대한 주장들은 의미가 없다. 가치평가는 단지 감정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이라는 것은 규범주의적 혹은 규범논리적 법실증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켈젠 스스로 그것을 “법실증주의의 이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켈젠은 실제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심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법실증주의를 전혀 법학이라고 보지 않았다. 법학은 당위, 즉 규범과 관련을 가지며, 그것은 규범과학이라고 하였다.
신칸트학파의 학자로서 켈젠은 존재와 당위를 엄격히 구분했으며(방법이원론), 그리고 이에 따라 기술적(설명적) 관찰방법과 규정적(규범적) 관찰방법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순수법학”에서는 이 후자만이 문제된다. 실증주의적 이론으로서 순수법학은 법규범의 형식적(논리
적) 구조만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의 내용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학문적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켈젠에 있어서는 정의(Gerechtig- keit)라는 것이 단지 “인간의 아름다운 꿈”에 불과하다고 보며,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그것을 결코 알지도 못할 것이라고 한다(오늘날 체계이론가인 Niklas Luhmann은 진리와 정의는 결코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음과 같은 상징적 기능을 가진다라고 함으로써 매우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을<진리와 정의>는 좋은 목적을 맹세하고 좋은 의지에 호소하고, 제약된 동의를 나타내고 그리고 이해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데 기여한다).
“순수법학”은 “당위”를 다루고, 그리고 물론 윤리적 가치가 아닌, 단지 논리적 구조인 “순수한” 법률상의 당위를 문제삼는다. 그것의 최고 공준(요청)은 그러므로 “방법상의 순수함”이다. 그래서 바로 “순수법학”의 서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순수법학을 법의 “순수한” 學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법이 지향한 인식만을 확보하고자 하고, 그것이 이러한 인식에 기해서 정확히 법으로 특정된 대상에 속하지 않는 것을 모두 배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순수법학이 법학을 법 이외의 모든 외적 요소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켈젠은 그러한 외적요소로서 특히 심리학, 사회학, 윤리학과 정치학을 지칭했다.  켈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겉으로 보기에는- 무관심한 법철학 배후에 서 있는 학문적인 정신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법학을 “절대적 가치의 선전”으로서(Max Weber),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견해의 은폐수단으로서 남용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완전히 부당하게 “순수법학” 자체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남용되어졌다.
켈젠은 당위에 관한 그의 이론을 여러 차례 상이하게 구성하였다. 그것을 여기서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만 언급해 본다. (당위에 관한) 본래의 견해의 특징은 순수법학의 제1판에 있는 다음의 문장에서 볼 수 있다: “소위 불법이 생기면, 불법의 효과(Unrechts- folge)가 발생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해야만 한다는 것”은 -법의 범주로서- 법조건(Rechtsbedingung)과 법효과를 법규 안에서 함께 종합되는, 특별한 의미만
을 나타낸다. 법의 이러한 범주는 -이를 통해서 그것을 초월적 법이념과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순수한 형식적 성격을 지닌다. 법의 범주는 그렇게 결합된 구성요건이 어떠한 내용을 갖든지, 법으로서 이해된 행위(Akt)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언제나 적용 가능하다. 순수법학은 법규 내에서 일정한 조건에 결합된 효과를 국가의 강제 하에 둔다. 그것은 형벌이나, 민사 또는 행정적 강제집행일 수 있으며, 그러한 강제를 통해서 制約한(bedingender) 구성요건만이 불법으로, 制約된(bedingter) 구성요건은 불법효과로 분류된다. 형이상학적 법규범, 즉 윤리적, 다시 말하면 實定法을 추월한 가치에 대한 어떠한 관계뿐만 아니라, 어떠한 내재적 성질도, 특정한 인간행위가 위법하고 범죄로 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특정한 인간의 행위를 법규 내에서 특별한 효과를 내는 전제로서 설정하고, 법률질서가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강제작용으로 대응할 뿐이다. 여기서 당위적인 것이 방법론상 부당하게 어느 정도 사실적인 것, 즉 국가의 강제작용에 기인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뚜렷한 것은, 이러한 “순수한” 당위가 어떠한 내용도 갖지 않으며, 그러므로 어떠한 자의적 내용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켈젠은 그러한 결론을 의식하고 있다: “어느 규범도 전혀 의미 없는 내용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제2판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법은 어떠한 자의적인 내용을 가질 수 없다”. 클렌너(Hermann Klenner)가 켈젠의 이론을 “속이 비어있는 법”(Rechtsleere)이라고 혹평한 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후에 켈젠은 규범의 효력에 관한 그의 학설을 수정했다. 그는 법규(Rechtssatz) 속에서 가설적 판단, 즉 그가 귀속이라고 부르는 원인·결과의 관계를 보았다. 이에 따라 법규는 국가기관의 장래행위에 대한 언명(Aussage)이다. 다시 말해 누가 규범의 구성요건에 합치된 행위를 하면, 일정한 국가기관이 그 자에 대하여 일정한 제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러한 언명이 단순한 기대이상으로, 다시 말하면 순수한 당위 이상으로 설득력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이 자신에 의해서 내려진 제재를 시행하지 않는 경우, 그 국가기관에게 제재를 한다는 규정을 둔 제2차적 법규를 통해서 국가기관 스스로가 “해야 될 의무”를 느낄 때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法義務를 낳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제약된 강제작용을 무한소급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통제기관의 순차가 무한으로 계속되지 않기 위해서 켈젠은 모순이 없고 의미가 충만한 질서라는 가설인 “근본규범”(Grundnorm)을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근본규범을 “자연법의 규범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결국 켈젠에 있어서 당위는 역시 윤리적 범주이다.
켈젠의 방법론에 흥미로운 것은, 그가 고대, 특히 스콜라적 법이론에서 성립된 것과 유사한 “법질서의 단계구조”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최상위에 이성(Logos)이나 객관적 이념 혹은 영원법(lex aeterna)대신, 위에서 언급한 “근본규범”을 두었다는 점뿐이다. 켈젠은 그러나 법실현을 철저히 헌법(그것의 효력은 “근본규범”에 의해 보장됨)으로부터 법률을 거쳐 법관의 판결선고행위까지 전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물론 그의 입장에서 법제도나 법규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학문으로 보지 않고, 그런 것을 법정책이라고 이해하였다. 우리가 켈젠의 그 점을 제외하면, 법(Recht)은 법률(Gesetz)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법은 법률로부터 형식논리적 절차를 통해서 간단히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옳게 보인다. 법률은 법률이해당사자들(Rechtssuchenden)에게 굉장히 넓은 활동영역을 주기 때문에, 그 영역은 형성적이고 법창조적 작업에 의해서 보충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켈젠에 따르면, 법정책이라 한다. 학문이 판결의 범위 내에서 판결의 다양한 가능성만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고, 그리고 단지 이것만이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켈젠은 말하고 있다.
2. 분석법학, 논리학, Topik, 수사학
“순수법학”은 법이론을 굉장히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실무에서는, 이해하는 바이지만,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실무는 형식과 범주만으로 많은 것을 해결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매우 유사한 상황이 오늘날 -법과 함께- 법철학의 새로운 흐름 중에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분석적 법학(Analytische Rechtstheorie)에서 일어났다. 분석적 법학은 그 뿌리를 러셀(Betrand A. W. Russel, 1872-1970),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98-1951)과 그 밖의 다른 분들에 의해 엄격히 수학적으로 지향한 분석적 철학에 두고 있다. 이러한 방향은 철학이 지각(Wahrnehmung)을 초월한 인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그 때문에 형이상학적 질문과 주장이 언어논리의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형이상학적 질문과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언어분석을 통해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
서, 하아트(H. L. A. Hart, 1907년생)와 로스(Alf Ross, 1899년생)을 대표로 한 분석적 법학은 논리적 언어분석을 통해서 법과 도덕 그리고 경험적 원리와 규범적 원리를 엄격히 구별하여, 법에 대하여 명백히 이해하기 쉬운, “자명한” 언명을 세우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적 연구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법에 대한 학문적인 몰두를 가져왔다. 그 법이론이 물론 분석하는 일에 머물러 있을 지라도, 그 이론은 법실무에 대해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분석적 사고가 다른 분야, 예를 들면 해석학에 대해서는 얼마나 상충될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좋은 예를 라이트(Georg Henrik von Wright, 1916년생)의 저서인 “설명과 이해”(1974)에서 보여준다.     라이트는 의무론적 논리학(deontische Logik)의 영역, 즉 가치와 규범논리학의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법논리학의 저명한 학자에 대해 간단히 언급만을 하고자 한다. 1943년에 출판되어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던 엥기쉬(Karl Engisch, 1899년생)의 “법률학적용을 위한 논리적 연구”란 논문은 새로운 법논리학 연구를 위한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그 논문이 기초가 되어 법해석학(juristische Hermeneutik)이 발달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엥기쉬에 고무되어 클룩(Ulrich Klug, 1913년생)과 타멜로(Ilmar Tammelo, 1917-1982)가 가장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법논리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클룩은 특히 형식논리학의 근본이론을 개괄적으로 기술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법논리학의 논증의 형식화를 이끌어 내었다. 타멜로는 다양한 기호체계(Zeichensystem)와 그리고 그것에 속한 조작규칙(Operationsregeln)을 -계산법(Kalkul)- 면밀하게 세련시켰다. 그들과는 독립하여 바인베르거(Ota Wein- berger, 1919년생)는 다수의 중요한 논문을 공표함으로써 법논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 형식논리학은 폐쇄적 법체계를 형성하게 하고, 그 때문에 그 법체계는 살아있는 생활상의 흐름에서 도외시되어 버리는 위험을 낳게 한다. 켈젠의 순수법학 뿐만 아니라, 클룩의 “공리학적”(axiomatisch) 방법도 역시 이러한 위험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그와 같은 폐쇄적 체계와는 달리 최근에 몇 명의 학자는 예전의 전통적인 것(Aristoteles, Cicero)을 되살려 총체적 관점론적(topisch) 내지 수사적 법률학(rhetorische Jurisprudenz)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개방체계”(Das offene System) 내에서 상황파악을 하기 위하여, “논증적”(aporetisch) 검증절차를 통해서 “제 관점의 총체적 목록”(Topoikataloge)을 작성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법논리학의 주된 뿌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뿌리로부터 현대 법논증론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총체적 관점론(Topik)과 수사학(Rhetorik)의 대표자들로 피벡(Theodor Viehweg, 1907년생), 코잉(Helmut Coing, 1912년생), 페렐만(Chim Perelman, 1912년생), 헨켈(Heinrich Henkel, 1903-1981)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Ⅴ. 법해석학
1. 개방체계
법학방법(Juristische Methode)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개방체계 내에서 올바른 논증을 하는 것을 말한다. 위(제II장, 제3절, I)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사비니가 말한 (입법자의) 意思(Intention)에 기초한 법률해석(Juristische Interpretation)의 모델은 해석의 형식이 한정된 수(數)에 그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법원의 판결을 분석해 보면, 그 밖의 다수의 다른 논증유형(Argumenttypen), 예를 들면 정의, 타당성, 법적 안정성, 법률효과의 평가, 실용성, 합헌성 등등을 볼 수 있다. 물론 고전적인 4개의 기준(Canones)도 그 가치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법이용자는 일차적으로 그 고전적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도식인 해석의 수단과 결과에 따른 구별은 부분적으로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면, 해석의 도구는 語義(Wortlaut), 체계성과 규범의 생성기원이며, 해석의 목표는 입법자의 의사, 그 당시의 규범의 의미 혹은 정의일 수 있다. 법 발견의 목표가 항시 “올바른 법”(그것이 무엇이든 간)뿐이다란 것은 해석의 목표에 어긋나며, 반면에 예를 들어 입법자의 의사는 이러한(올바른 법 발견의) 목표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왜냐하면 우리는 이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단지 얻어진 결론을 “옳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어떠한 지시를 따를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해석의 이러한 모든 기준이 정말 “올바른 법”의 발견에 기여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동시에 그러한 기준 중에서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는 등급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개방체계에서 어떻게 전체상황을 파악해야 할까? 많은 방법이론가들, 예를 들면 에써(Josef Esser)와 크릴레(Martin Kriele)는 그 때문에 이러한 전체목록작성은 무용지물이라고 본다. 엥기쉬는 솔직하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그와 같은 해석방법을 각 사건에서 선택하는 것은” 법원의 실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결과에 의한 법발견(Ergebnisrechtsfindung)! 아니면 달리 표현하여, 해석수단의 가치와 서열은 해석자 스스로가 정한다!
2. 주관-객관-도식의 극복
우리는 아마 이러한 문장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나, 그러나 그 말은 옳다. 쉴라이어마하(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 1768-1834)에서 기원하여,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를 거쳐, 후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서 중요한 대표자를 갖게 되고, 오늘날 특히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년생)와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년생)에 의해서 대표되는 과학적 해석학(wissenschaftliche Hermeneutik)은 모든 “이해과
학”의 본질적 성질을 밝혀냈다. 즉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항시 또한 우선 이해주체의 자기 자신의 이해인 것을 발견했다. 이해하는 자(Der Verstehnde)는 이해의 영역(Verstehenshorizont)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해해야 될) 객체에 대하여 방법적 반성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방법적 반성은 (이해하는) 주체를 함께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서 법도 또한 상태가 아니라, 작용하는 행위(Akt)이며, 그러므로 “주관”에서 독립된 인식의 “객체”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법은 해석학적 의미전개과정과 의미실현과정의 “산물”이다. 해석론적 법발견절차 밖에서 법의 “객관적 정당성”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존재할 수 없다. 어느 법관이 그의 판단기준을 단지 법률로부터 이끌어 낸다고 믿었다면, 그는 피할 수 없는 착오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자신에 의존하여 있기 때문이다. 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 자기의 인격을 함께 고려하는 법관만이 진실로 독립적일 수 있다.
법해석학(Josef Esser; Karl Larenz)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와 특히 “해석학적 선입판단”과 “해석학적 순환”의 구조에 관해서는 이 곳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단지 법철학과 법방법론의 문제사를 -잠정적- 결론으로 이끌어 내기 위하여, 그 다양한 흐름들이 어디
로 흘러 들어가는가를 나타내고자 한다(이 때에 여기서 기초가 된 법이해는 저자의 이해의 한계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간단한 하나의 사건을 들어보자. 연방법원 형사판례집 제1권 1쪽 이하에 실린 사건은 매표소 아가씨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나서 돈지갑을 빼앗아간 한 남자에 관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법적 문제인 염산이 “무기”에 해당되느냐의 여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나는 그 사건을 이미 重强度라고 하는 가능한 사례를 “미리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요컨대 이 사건을 살인미수와 다른 것으로 先理解하고 있다면, 염산이 하나의 “무기”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의미있는 “선입이해”(Vorverstandnis) 없이는 어떠한 중요한 법문제해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다. 잘 인식해야 할 것은 여기서도 이해과정의 “순환”이라는 점이다. 중강도가 무엇인가를 내가 알 때만, 나는 중강도의 한 경우로서 구체적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법률의 해석은 어느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고, 사건의 구성은 법률에 기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엥기쉬가 한 말인, 규범과 생활관계사이를 왕래하면서 통찰하는 끝없는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이 때에 결함이 있는 순환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고 하였다. 유사하면서도 많은 점에서 색다른 모델을 피켄처(Wolf- gang Fikentscher, 1928년생)가 개발했다. 그는 그것을 “사건을 규범에 대입한 思考”(“Fallnormdenken”)라고 부른다.
해석학적 문장이해라는 것(Textverstehen)은 그러므로 순수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Rezeptives)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으로 형성하는 행위(Handeln)이다. 여기서 다시금 존재와 당위의 방법이원론은 -이 방법이원론에 따르면 사안의 파악(Sachverhaltsermittlung)과 법적용은 두 가지 분리된, 시간적으로 연이어진 과정으로 된다-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방법이원론은 기만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일정한 규범적 관점이 없이는 어느 한 사태를 사안으로서 인식한다는 것이 실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규범에 맞게 구성하고 법규범을 구체화하여 한꺼번에 이루어진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사태”와 “구성요건”이 구성된다. 이것들(사안과 구성요건)이 서로 연이어 다듬어지
고, 결국은 서로가 일치하게 됨으로써(그것을 종래에는 “포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삼단논법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법이 생성된다. 그 이전에는 전혀 “법”이 거기 있지 않고, 그리고 아직도 어떤 “사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단지 “세광되지 않는 물체” 뿐이다. 한편으로 그 추상성 때문에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추상적 법규범의 다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법률적 관점에서 관련을 지울 수 없고 또한 중요하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없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사실덩어리의 혼합물인 것이다. 우리가 종래 “포섭”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전제조건이 서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판결하는 행위는 이러한 전제조건들을 그들의 서로가 일치를 이루는 속에서 세우는데 있다. 즉 사안을 고려하면서 구체적 법규를 다듬고 규범을 고려하면서 사안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해석학은 어떤 식으로든 유효하지 않거나 실제화 되지 않은 것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법해석학은 그 점을 단지 햇볕에 비추어 끄집어 올려서, 그것을 통해서 물론 많은 환상을 파괴한다. 특히 법적용은(그 자체 이해가능하고 해석가능한) 법률아래서 이루어진 정확한 삼단논법이라는 환상을 파괴한다. “단순한 법적용”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끊임없는 창조적 행위이다. 물론 일상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방법적 절차의 창조적, 형성적 요소가 거의 의식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모든 경우에 법실현에 있어 복잡하고 해석학적 과정을 의식해야 한다면, 그것은 한정 없는 지나친 것이다(일상적인 것의 찬양!). 그러나 법적용시에 창조적 요소가 의식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거기에 있다.
그 결과 대체로 법관의 주관적인 것(Subjektivismus)을 옹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언제나 존재하나, 그러나 대체로 가려져 있는, 판단활동의 주관적 요소를 의식해야만 하고 방법상 근거제시와 관련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구체적 판결절차 밖에서 법의 올바름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러한 절차 자체 내에서 찾아내야 될 것이다. 반성과 논증을 통해서, 즉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동의를 통해서.
법은 절차 “내”에서 성립되지, 파손스(Talcott Parsons, 1902-1979)와 그 밖의 다른 사림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특히 루만(Niklas Luhmann, 1927년생)에 의해서 대표되는 체계이론(Systemtheorie)이 가정하는, 절차를 통해서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단지 법의 기능성, 즉 절차가 “기능하는” 것이 문제될 뿐이지, 내용의 올바름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기초로 삼고 있는 견해에 따르면 절차의 범위 내에서 “법”, 즉 “올바른 법”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추상적 공식, 심지어 하나의 定義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올바른 법”은 단지 구체적으로 성립하고, 물론 다양한 기준의 기초 하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기준의 체계는 개방적이다. 물론 여기 개방체계에서는 “인식”을 완성하게 할 수 있는 합리적 논의가 적어도 “이상적인 대화환경”, 즉 “이상적인 토론”이 성립한다는 전제 아래서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토론이라는 것은 전문적이고 편견없이 그리고 이성적인 논의를 하는 사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모든 논쟁이 허용이 되는 그런 토론이다(Jurgen Haber- mas; 또한 Chaim Perelmann도 유사하게, “일반강당”이라 하고, Ilmar Tammelo는 “이성의 광장”이라고 함). 물론 확실한 진리가 목표일 수 없고(어디선가 그러한 것이 존재함), 오히려 납득하는 것(일치되는 것)과 그로부터 생기는 다수 사람 사이의 동의일 수 있다. 포퍼(Karl R. Popper, 1902년생)가 창시한 “비판적 합리주의”(kritischer Rationalismus)가 여기서 근본적 진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비판적 합리주의에 따르면, 적극적 순이론적 근거제시노력은 순환론에 빠지거나 무한소급에 빠진다. 우리가 그러나 비판적 검증을 통해서 제 언명(Aussagen) 그리고 특히 법에 관한 제 언명의 오류(Fallibilitat)를 가려낼 수 있다. 이것은 라드부르흐의 공식(위의 제II장, 제4절 II)을 생각나게 한다. 그 공식에 따르면 우리는 적극적 관점에 무엇이 “올바른 법”인가를 말할 수 없으나, 그러나 소극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制定法上의 不法”이고 “무효의 법”인가를 말할 수 있다.  모든 합리적 토론을 이끌 수 있는 일반적 조건은 그 토론이 동일한 대상(테마)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토론”에서는 사실상 “법”, 즉 “올바른 법” 내지 “부당한 법”을 문제삼지, 어떤 자의적인 다른 것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동일성을 보장할 법내용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즉 “존재론적인 것”을 법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격을 가진 인간(Der Mensch als Person)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인간 사이와 인간과 사물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모든 법발현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법의 문제”(Sache Recht)이다(“Sache”는 그러나 실제적인 것
을 뜻하지 않음). 법이 그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법이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속해 있는 것을 인간에게 허용하는 경우이다. “인간에게 그의 것”을 주지 않거나, 인간에게 “그의 것이 아닌” 것을 준다면(유대인의 납치, 가혹, 살해), 그 때는 법이 실현된 것이 아니다.
“법의 이념”은 그러므로 결국 “인간의 이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이 이러한 결론에는 많은 상이한 방법에 의해서 도달했고, 끝으로 또한 최근의 정의론(Rawls, Tammelo, Perelmann)도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 소위 인간의 기본적 장식(Grund- ausstattung)에 속하는 권리와 의무라고 할 때, 그것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단지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의 이념”을 우리들이 해명할까 하는 것뿐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단지 많은 논쟁당사자들의 토론 속에서만, 납득할 수 있고, 동의가능하고, 그 때문에 당사자 상호간에 효력있는 답변이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언제나 단지 잠정적이고, 끊임없이 열려진 대답일 뿐이다. 정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서로 간에 구속되어 있다. 이러한 순환은 해체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 안에 내재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의 자신 안에 “무엇”이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근본적으로 관계이지, 물체가 아닐 때, 관계적 존재론(Relationenontologie)이어야만 하지, 실체적 존재론(Substanzontologie)이 될 수 없는 해석학적 존재론의 발전은, 그 결과 인격(Peronalen)의 철학과 인류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문제사가 아니고, 그것은 현재의 문제이다.
3. 법실현의 해석학적 절차
결론적으로 다음의 도표에 있는 법실현의 해석학적 절차를 개략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當爲

存在

一般化 : 合致
“演繹”     “歸納”

立法 (내지는 慣習法 또는 判例法의 形成)

關聯性(類推)
意味關係의 同一性
“事物의 本性”
法理念
(法一般原則, 法原理) 判決을 내릴 수 없는 抽象的, 一般的(“超實定的”) 비교적 오랜 시간에걸쳐 타당(“超歷史的”)

槪念構成   理念型的 構成

可能的 生活事態

一般化 : 合致
“演繹”     “歸納”

現實的 生活事態

解釋
類型의 領域內에서의 論議(“包攝”)

具體化-一般的 形式的-實定的一定한 時間에 妥當

關聯性(類推)
意味關係의 同一性
“事物의 本性”

法  發見
法規範(法律, 慣習法, 判例法)

法決定(實質的 意味의 法 : 存在와 當爲의 一致) 具體的 實質的-實證的 하나의 狀況에 妥當(“歷史的”)

이 도표는 당위와 존재의 접근과정, 즉 법이념과 아직은 순전히 사념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생활사태로부터 형식적·실증적 법규범과 실제적인 생활사태를 거쳐 구체적 실질적·실증법에 이르기까지의 접근과정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법실현의 단계, 즉 법의 구체화, 법의 실정화, 법의 역사적 생성의 단계이다(전통적인 방법론이 지나치게 태만히 한 법률의 제정문제도 이러한 방법론적 연관을 맺고 있다). 도표에서 각 “화살표”는, 법실현의 과정이 여러 상이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법이념으로부터 규범을 거쳐 법에 이르는 “직선적” 길로 진행되지도 않고, 또한 사념세계의 생활사태로부터, 사건을 거쳐 법에 이르는 “직선적” 길도 아니고, 오히려 단지 “나선형”의 길로 진행된다. 법은 단지 규범으로부터도, 특정한 사건만으로도 얻어질 수 없다. 규범과 사건이 서로가 “일치”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의미”로 볼 때 동일하다는 것, 즉 열심히 찾고 있던 “의미”가 양자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이해된다. 그
것은 法源도, 단순한 思考形式도 아니고, 오히려 “본성”(규범)과 “사물”(사건) 사이에 있는 하나의 “매개물”(Mittler)이고, 동시에 규범과 사건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Katalysator)이다.
물론 그것이 이와 같은 개략적 도표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또한 법이해의 “先判斷의 구조”는 다만 이미 정통한 사람에게나 이해될 수 있다. 즉 법이념은 규율이 가능한 생활사태를 고려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이념의 소재규정성”), 생활사태는 그러나 법적으로 중요한 생활사태로서 다시금 법이념, 즉 일반적 법의 근본원칙을 고려할 때만 알 수 있다(“소재의 이념규정성”). 또한 역시 법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구체적 생활사태는 법규범을 고려해야만 이해될 수 있고(“사태의 규범관계성”), 법규범의 의미는 그러나 생활사태를 이해해야 설명된다(“법규범의 사건관계성”). 이러한 관찰방법은 당위와 존재의 변증법적 내지 발췌적(analektisch) 관계의 입장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므로 방법이원적 내지 방법일원적으로 지향한 자는(위의 제II장, 제4절, II 참조) 지금껏 말한 것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위 도표로부터 법은 단지 법이념이나 법규범(당위)으로부터 순전히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상상된 또는 현실적 생활사태(존재)에서 순전히 귀납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게 될 것이다. 법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규범과 사태, 즉 당위와 존재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법은 그 구체화되는 경우에도 결코 단일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고, 오히려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규범적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법의 일반적 특성). 그러므로 법률(법규범)도 항상 필연적으로 일반적 법기본원칙(평등원리, 황금률, 정언명령, 사회국가원리, 신의와 성실 등등)에 의해서 결정되지, 결코 단지 사실적인 것에 의해서(예를 들면 이해관계, 사회적 역할, 필요, 갈등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일반법 기본원칙이 이미 주어져 있는가? (있다면 누구에 의해서) 아니면 이런 법원칙이 요청이나 가설로서 설정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오래된 쟁점이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이 모든 입법 및 법발견과정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끝으로 법은 이해의 해석학적 행위 속에서 구성된다. 이해는 이것이 타인에게 전달되고자 할 때에는 언어 속에서 명료화되어야 한다. 언어의 이론(Die Theorie der Sprache)이 오늘날 법이론적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들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는 언어학(Linguistik), 의미론(Semantik), 기호학(Semiotik), 구조주의(Strukturalismus), 일상적 언어철학(Ordinary Language Philosophy), 구성주의(Konstruktivismus)이다. 법이 장래에도 인간의 사무에 속하게 될지 아니면, 기계가 법문제를 처리하게 될지는 언어의 이용(Verwendung)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환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주요 참고 문헌
Emage, Carl August: Geschichte der Rechtsphilosophie,
1931 (Nachdruck 1967)
Engisch, Karl: Einfuhrung in das juristische Denken. 8.
Aufl. 1983.
Fikentscher, Wolfgang: Methoden des Rechts,  5 Bde.,
1975-1977.
Fluckiger, Felix: Geschichte des Naturrechts, 1. Bd.
Altertum und Fruhmittelalter. 1954
Friedrich, Carl J.: Die Philosophie des Rechts in
historischer Perspektive, 1955.
Larenz, Karl: Methodenlehre der Rechtswissenschaft, 5.
Aufl, 1983.
Marcic, Rene: Geschichte der Rechtsphilosophie;
Schwerpunkte-Kontrapunkte, 1971.
Verdross, Alfred: Abendlandische Rechtsphilosophie:
Ihre Grundlagen und Hauptprobleme in
geschichtlicher Schau, 2. Aufl. 1963.
Welzel, Hans: Naturrecht und materiale Gerechtigkeit,
4. Aufl, 1962 (Nachdruck 1980).
Wieacker, Franz: Privatrechtsgeschichte der Neuzeit –
unter besonderer Berucksichtigung der deut-
schen Entwicklung, 2. Aufl. 1967.
Wolf, Erik: das Problem der Naturrechtslehre; Versuch
einer Orientierung, 3. Aufl, 1964.
Wolf, Erik: Große Rechtsdenker der deutschen
Geistesgeschichte, 4. Aufl, 1963.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dpsjk&logNo=20023160798&beginTime=0&jumpingVid=&from=search&redirect=Log&widgetTypeCall=tru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