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엥기쉬(Karl Engisch) 법적 사고의 입문

(본 문헌은 오로지 학문적 연구를 위해서만 사용이 허락 됩니다.)

칼 엥기쉬(Karl Engisch)

법적 사고의 입문

(Einführung in das juristische Denken)

 

-9. Aufl. Kohlhammer 1997-

 

목 차

 

제1장 글머리 1

제2장 법규의 의미와 구조에 관하여 13

제3장 법규로부터 구체적 법률판단의 획득,

특히 포섭의 문제 79

제4장 법규로부터 추상적, 법률적 판단의 획득.

법규의 해석과 이해 127

제5장 법규의 해석과 이해, 입법자 또는 법률? 183

제6장 법관법. 불확정한 법개념, 규범적 개념,

자유재량, 일반조항 231

제7장 법관법, 계속 : 흠결보충과 법의 오류정정 299

제8장 법률에서 법으로, 법학에서 법철학으로 401

 

 

 

제7판 서 문

 

“법적 사고 입문”은 통상 독자에게 법적 사고의 방법론뿐만 아니라 법 자체와 그의 개별 법역을 소개하는 “법학 입문”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법학도와 법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에게 다소 비밀스럽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한 법적 사고의 논리와 방법을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것도 법적 구성이나 체계형성과 같은 “거창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법발견의 문제에 국한하여 논리와 방법을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단지 이와 같은 목적에서만 이 책에서 언급된 실제적 법문제가 다루어졌다. 법적 논리학과 방법론이 어떠한 과제를 다루는지에 관하여서는 1959년 “Studium generale”라는 잡지의 76쪽 이하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 중에서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은 점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법적 논리학은 한편으로는 형식 논리학의 기초와 범위에 근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한 법적 방법론과 결합하여, 법적 사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진실하고” 또는 “정당하고” 또는 최소한 “대표될만한” 판단을 얻게 되는지를 제시하는 실천 논리학이다. 이와 같은 법적 논리학과 방법론은 법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제기된 사고 과제를 가능한 한 쉽게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는 그러한 기술을 가르치는 “공학”이 아니다. 또 이는 실제적 일상생활에서 법적 견해를 얻기 위하여 사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연구하는 심리학이나 사회학도 아니다. 이는 오히려 그리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물의 본성에 부합하는 법적 인식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법적 논리학과 방법론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에서 바람직한) “진리”를 발견하고 충분히 근거가 있는 판단을 얻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한다.

 

1977. 7. 칼 엥기쉬

 

제9판 서 문

 

칼 엥기쉬의 “법적 사고 입문”은 법률가의 여러 세대를 함께 해온 고전이다. 1956년 초판이 나온 이후 이 책은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거의 변경이 없다. 이 책은 1977년 이후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는데 1990년 칼 엥기쉬가 사망한 후 최근의 법률, 판례와 학설에 맞추어 이 책을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책의 중요 부분은 고전으로 분류되어 시대가 변하여도 크게 개정할 필요성은 없으므로, 제9판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법률 사정을 감안하여 몇몇 부분에 대하여서만 신중하게 내용을 수정하였다. “자유재량”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논의의 특별한 필요성이 존재한다. 특히 7판 이후 방대해진 주석에 대하여서는 크게 손 볼 필요가 있다. 주석에서 상당 부분을 빼버리고 새로운 내용을 달다보니 양이 크게 줄었다. 엥기쉬가 달아 놓은 고전 문헌을 접하려고 하는 사람은 제8판을 참고하기 바란다. 번거로움을 회피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본문 뒤에 주석을 달아놓았던 방식을 변경하여 각 쪽마다 주석을 달아놓았다. 나아가 인명 약어와 참고 문헌을 보충하였다. 그리고 엥기쉬의 생애와 저작을 후기로써 마무리하였다.

 

1996. 6. 프라이부르크, 토마스 뷔르텐버거, 딜크 오토

 

Scire leges non hoc est verba earum

tenere, sed vim ac postestatem.

(법률을 안다는 것은 그 문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힘과 권위를 지키는 것이다.)

Celsus, Digesten 1, 3, 17

제1장 글머리

법학과 법적 사고를 초보자나 일반인에게 설명하려 할 때면 늘 다른 학문과 비교하여 여러 장해와 의혹이 그대로 방치되어있음을 본다.1) 법률가가 법학이 소속된 사회, 문화과학의 영역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 대부분의 사회, 문화과학이 별로 애쓰지 않고도 바로 자신의 학문인 법학보다도 더 많은 관심, 이해와 신망을 얻고 있다는 점을 선망과 중압감을 가지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언어, 문학, 미술, 음악 및 종교에 관한 학문은 대상과 방법론에 있어 법학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법학과는 전혀 다를 정도로, 교양에 전념하는 일반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고고학 또는 문학사에 관한 서적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책으로서 주저 없이 고려하지만, 법률서적은 아무리 독자의 이해에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는 수준의 책일지라도 감히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통상적인 법학입문서는 거의 예외 없이 초학(初學)의 법률학도에게만 무엇인가를 제공할 뿐이고 일반인에게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얼마나 자주 법률가가 아닌 사람의 서가에서도 법전을 찾아볼 수 있는가?

일반인이 법과 법학에 대하여 갖는 무관심의 이유는 쉽게 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는 매우 특이한 곳에 있다. 법보다 더욱 밀접하게 인간과 관련된 문화영역은 없다. 사람은 시나 미술, 음악과 활발한 교류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아가거나 부단히 법에 관련되지 않고 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공동체에 속하여 그 안에서 성장하고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법은 공동체의 기본적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우리와 밀접 불가분한 관련을 맺게 된다. 또 법이 지향해야 하는 근본가치, 즉 정의는 미(美)나 선(善), 성(聖)과 같은 가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당한 법은 “세계의 의미에 속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법학이 그토록 일반인들로부터 무관심을 산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법과 법학은 별개이고 일반인에게 무관심한 것은 단지 법학일 뿐이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인도 법이 실천적 명령일 때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법과 법학은 결코 다른 두개가 아니다. 여하튼 법과 법학은 예를 들어 미술과 미학이 그런 것보다 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미학이 미술의 이해를 장려하면서 미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학문적 이론이 미술의 실무적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정을 한번쯤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미술의 실무적 흐름은 자기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고 미학은 미술의 실무적 흐름을 뒤쫓으며 이를 해석하고 반성하고 역사화 하면서 화가에 의해서는 철저히 거부되거나 조소받지 않으면 거의 불신되기 일쑤이다. 물론 나에게 학문적 미술관(美術觀)의 위대한 정신적 의미를 문제 삼을 의도는 추호도 없다. 빈켈만(Winckelmann)이 고전주의자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나 하인리히 뵐프린(Heinrich Wölfflin)의 평석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운 좋게 소중한 미술관을 얻게 되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것은 미술과 미학은 별개라는 점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문화과학과 그것의 현실적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비하면 법학은 법과 나란히 또는 법에 뒤져 가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 자체와 삶을 함께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법학의 유일무이한 장점이다. 법학은 그것이 존재한 이래 실천학문이다. 법학을 기초하는데 불멸의 공헌(貢獻)을 한 로마인은 법학에서 그들이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법학을 신과 인간에 관한 학문(divinarum atque humanarum rerum notitia)3)으로 찬양하고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살아있는 학문으로 평가하여 그들의 법 및 법학과 더불어 강성해졌다. 진실로 재능 있고 독창적인 법률가의 사상이나 법인식에 있어 발견은, 입법자에게 영감을 주었든 개별사례의 판결에 영향을 미쳤든, 모든 시대에 있어 법 자체를 위하여서는 하나의 은총(恩寵)이었다4). 고대 로마법학자 또는 (1250년 이후) 이탈리아 후기 주석학파(註釋學派)의 법적 지혜만으로 수세기를 살아왔다. 비아커(Wieacker)가 그의 저서 근대사법사(Privatrechtsgeschichte der Neuzeit)에서 “법률형상물 가운데 19세기 독일어권 법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산물”이라고 지칭한5) 1907년 스위스 민법전의 입법과정에 오이겐 후버(Eugen Huber)가 참여한 것처럼 법사상가가 바로 입법에 관여한 경우를 전혀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링(Ihering), 빈트샤이드(Windscheid), 빈딩(Binding), 리쯔트(Liszt), 프랑크(Frank)와 같은 근대 법률가의 법이론이 사법제도와 입법에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리 사리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도 위대한 법학자를 위대한 역사가, 언어연구가, 미학자를 능가하여 천부적 철학자, 시인, 화가, 음악가와 견주어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면 중요한 법학적 업적이 의미 있는 철학, 미술작품, 문학작품과 충분히 비교될 수 있다. 이들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제 법학에서 특별한 책임을 찾아야 할 것임이 명백해졌다.

자연과학과 비교하여 일어나는 의혹에 대한 법학의 항상 되풀이하는 자기주장은, 다른 사회, 문화과학과의 경쟁 속에서 이해와 동정을 얻으려는 노력과는 성질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자연과학과 비교를 한다는 사정은 법의 법칙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법학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법칙학(法則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연의 법칙을 일깨워 주는 사람은 우리에게 존재와 필연을 알게 해주는 것인데, 만약 법률가가 우리를 법의 존재의 세계로 이끌 때 그는 우리에게 법의 법칙에 관한 필연의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개성의 활동범위, 즉 예술의 영역에서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정신에 속하는 자유는, 규칙과 법칙이 군림해야 하는 법의 영역에서는 너무도 쉽게 우연, 자의, 월권으로 나타난다. 물론 예술인에게도 규칙과 법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인격의 내용으로 채울 수 있고 채워야만 하는 “형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다소 지속적인 것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언제나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일 수 있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보편타당하지도 않고 엄격한 구속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주인이 그 형식을 파괴할 수 있다.”6) 그러나 법으로서 보편적이고, 법이 재배수단으로 삼고 있는 법률에 대하여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나 자연법칙에 대하여 그런 것처럼 항상 보편타당성을 기대한다. 그들이 이와 같은 보편타당성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 그들은 매우 실망한다. 파스칼(Pascal)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실망감을 자주 인용되는 말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위가 변해도 그 성질이 변하지 않는 법 또는 불법은 없다. 위도 3도만 변해도 모든 법학은 와해된다. 자오선이 진리를 결정한다. 효력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기본 법률이 바뀐다. 법은 자기시대를 갖는다. 우습게도 강을 경계로 정의가 존재한다.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의 진리가 저 편에서는 오류이다.”7) 법률가의 매우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진정한 법을 찾아내어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든, 사물의 본성이든, 어떤 “본성”과 결합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의 학문을 매우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율리우스 폰 키히르만(Julius v. Kirchmann)은 그 자신 법률가이면서도 학문으로서의 법학에 대해 행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비판도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태양, 달, 별은 수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변함없이 빛나고, 장미는 낙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피지만, 법은 세월이 지나면 항상 변한다. 부부, 가족, 국가, 소유란 개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사라진다.”8)

법학의 “자의성” 및 법칙과의 괴리에 대해 일반인이 갖는 생소함은 몇 가지 간단한 실례로써 명백해질 수 있다. 첫 번째 실례는 확실히 진부하긴 하지만 그 단순성으로 인하여 앞으로의 논의에 있어 훌륭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한 의학도가 당시 효력 있던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민법 제1589조 제2항 소정의 “혼인 외의 자와 부는 친족으로서 효력이 없다”라고 한 규정에 관하여 나의 면전에서 분개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규정에서 법률적 자의, 생물학적 소여(所與)의 교만한 거부, 또는 아마도 거짓 부끄러움과 가식적 도덕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법이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 사실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두 번째 실례는 한 유명한 생물학자가 오늘날 자주 인용되는 사례, 즉 늑대는 투쟁에서 질 경우 상대방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하여 이른바 배를 보이는 “굴종의 태도”를 취하는데, 이와 같이 늑대들 사이에서 지켜지고 있는 투쟁관행을 자연법에 관한 학문적 논의 속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 생물학자에게는 진정한 자연법이란 이와 같이 생물학적 소여에 터잡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본권이나 인권 따위와 같이 법률적 측면에서의 “자연법”은 그에게 진정한 자연법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실례는 의료업에 대하여 법률가의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다는 의료계의 지적이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불가피하고 정당하게 수행된 의료행위를 “상해죄”에 해당하나 환자가 동의했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9) 한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의료업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고 법률가의 월권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률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무관심, 거부, 불신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우선 이 낯설고 불가사의한 (법적) 사고방식을 일반인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법률가의 사고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오류와 실수를 주목하면서 이를 회피하려고 노력한다면 법적 사고도 신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동이 그렇듯이 법학에도 오류가 있고 위험에 직면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토록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어 온 법학을 앞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외면할 것이라고 추단할 수는 없다.

다음의 서술이 “입문서”의 특성에 맞게 전통적인 법발견의 방법론에서 출발하여 대부분 그곳에 기초할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1956년 이 책이 처음 출간되면서 여기 방법론이 간혹 논박을 받아왔다. 금세기 초 “자유법학(Freirechtsschule)”과 “이익법학(Interessenjurisprudenz)”이 법발견과 방법론에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였듯이 오늘날에도 법획득을 위한 진보적 이론과 표어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들 이론은 끊임없이 재고(再考)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사비그니(Savigny)에 의해 집대성된 전통적인 (법학) 방법론이 아직도 만족할 만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늘날의 법률가가 사고 작업의 근거로서 이 방법론을 신뢰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제2장 법규의 의미와 구조에 관하여

민법(BGB) 제1589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자. 이는 “친족”에 관한 규정 중 제일 처음에 나오는 조문이다. 개정 전에 그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출생된 사람들을 직계친족이라 한다. 직계친족은 아니지만 같은 제3의 사람에 의해 출생된 사람들을 방계친족이라 한다. 친족의 촌수는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출생된 사람들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혼인 외의 자와 그의 부는 친족으로서 효력이 없다.”(역자 주 : 우리나라 민법도 제768조에서 직계혈족과 방계혈족을 규정하고 있고, 제770조에서 혈족의 촌수의 계산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855조에서 혼인외의 출생자에 대하여는 부모가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위 마지막 조항은 혼인 외의 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개정규정에 따라 1969. 8. 18. 법률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다음의 논의를 위하여 우선 한번은 포함시켜 두기로 한다. 우선 두드러진 것은 규정의 표현 상 변화이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들을 직계 또는 방계친족이라 한다(sind)라고 하였다가 다음에는 결정된다(bestimmt sich)라고, 맨 마지막에는 효력이 없다(gelten nicht)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 조문에서 입법자의 생각은 혼인 외의 자와 그의 부가 자연적 측면에서 혈연관계에 있음을 부인한 것이 아니고, 혼인 외의 자는 혼인중의 자와 법적으로, 보다 엄밀하게는 민법적으로 동등하지 않음을 선언한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민법적으로”란 제한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예컨대 고래로부터 형법전의 의미에 있어서 혼인 외의 부와 혼인중의 자는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의) “직계존비속”간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처벌한 형법(StGB) 제173조는 혼인 외의 부모와 그의 자(오늘날에는 “사실상의 자”로 불린다) 사이에서도 언제나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왔다. 또 1841년 프로이센 형법(제228조)에서 “부의 자녀에 대한 절도”를 면책시키고 있는데 이는 혼인 외의 자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오늘날 “친족”간의 상도례(相盜例)는 고소가 있어야 논할 수 있고 이 점은 혼인 외의 친족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민법시행법률(Einführungsgesetz zum BGB) 제51조는 “법원조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파산법에 있어 친족이나 인척에 대하여 법적 효과가 부여될 경우, 민법의 친족 또는 인척에 관한 규정이 준용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법률도, 지금은 1969. 8. 19. 법률에 의해 소용없게 되었지만, 개정 전에는 혼인 외의 부와 그의 자는 친족으로서 “효력”이 없다는 위 민법의 원칙에 따라 규제되었다.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52조 제3항에 의해 피고인의 직계친족에게 주어진 증언거부권이 혼인 외의 자에 대한 형사소송에서 혼인 외의 부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그 역도 마찬가지).10) 물론 이것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파스칼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하나의 자오선이 정의에 있어 진리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의 동일한 법질서에 있어서도 일정한 구분선을 그어 법체제를 달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효력”이라는 표현에는 고유의 의미(eigene Bewandnis)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고찰할 생각은 없고(그러나 이는 자주 충분히 고려될 것이다), 단지 여기서는 그 효력이라는 표현이 어떤 생활관계를 특별하게 법률적으로 파악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한다.

그러나 특별하게 (법률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 전에, (현재도 효력이 있는) 민법 제1589조의 첫 조문,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출생된 사람들을 직계친족이라 한다라고 한 규정에는 고유하고도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최소한 법이 자연을 존중하여 단지 존재의 사실을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제1589조는 친족을 “출생”에 의존하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세상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곧 민법전이 제1591조 이하에서 “혼인중의 출생”에 관하여 규정한 것을 보면 아마 무척 놀라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혼인 후에 출생한 자는, 부인이 혼인 전 또는 혼인기간 중에 임신하고 임신기간 동안 남편이 그 부인과 동거하였다면, 혼인중의 자로 본다. 남편이 임신기간 동안 부인과 동거하였다는 사실은 혼인기간 동안 추정된다. 임신기간으로는 일반적으로 자의 출생 전 181일에서 302일까지의 기간이 타당하다. 위와 같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 있을 때에는 “부인이 남편의 자를 임신하는 것이 명백히 불가능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만 혼인중의 자임이 부정된다(제1591조)(역자 주 : 우리나라 민법도 제844조 제1항에서 처가 혼인중에 포태한 자는 부의 자로 추정한다, 제2항에서 혼인성립의 날로부터 2백일후 또는 혼인관계 종료의 날로부터 3백일내에 출생한 자는 혼인중에 포태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친생자 부인(否認)은 남편 또는 그 부모나 자식이 제기한 소송에서 확정되어야 한다. 자가 혼인기간 중 또는 혼인해소 후 302일 전에 출생하였다면 위와 같이 소송에 의하지 않고서는 친생자 부인을 주장하지 못한다(제1593조). 요약하면, 법은 혼인기간 중 또는 혼인해소 후 일정기간 안에 출생한 자를 위하여 (부를 정하는데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로마인들이 표현한, “부는 혼인에서 말해주는 사람으로 한다”(Vater est quem nuptiae demonstrant : Digesten 2, 4, 5)라는 사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규정에서 새삼 법적 고찰은 자연적 고찰과 충돌할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민법에 의하면 – 원래의 법과는 모순되게 – 혼인 중에 태어나지도 않은, 혼인 전에 출생한 자를 혼인중의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벌써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더욱이 위의 규정에 따르면 행실이 바르지 못한 부인이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상이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경우에까지 그의 남편에게 혼인중의 자로 간주되는 아이를 낳아줄 수 있게 된다. “모는 언제나 확실하다(Mater semper certa est).” 이에 반하여 부에 대한 드물지 않은 불확실성은 “법적 안정성”이란 이익을 위해 남편이 부인과 동거하면 그 자의 부이다라는 “추정”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혼인 외의 자도 혼인 외의 부가 모와 혼인하거나(민법 제1719조), 후견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혼인중의 자임이 선고됨으로써(민법 제1723조 이하) 사후에 “혼인중의 자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취득할 수 있는데, 이점을 보태 보면, 혼인중의 출생과 그로 인한 직계친족 따위의 개념은 결코 자연적 소여와 부합할 필요 없는 법적 소여임이 분명해진다. 오늘날 입법자가 예전보다도 더욱 법적 소여를 자연적 소여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이점에는 변함이 없다. 또 혼인중의 자라는 개념에 대하여도 보다 면밀하게는 혼인중의 자이다(sind)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민법에 있어 혼인중의 자로서 효력(gelten)이 있다라고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일반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민법 제1591조 이하의 규정이 예컨대 형법 제217조 소정의 영아살해죄에 있어 비혼인성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나아가, 예컨대 자연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혼인기간 중에 출생한 자를 혼인중의 자로 취급함으로써 법적 소여를 자연적 소여와 일치시킨다 해도, 친족의 법적 개념이 “자연적” 개념과 완전히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자연적”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것이다. 생물학자에게 혼인중의 자와 혼인 외의 자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에게는 오직 자연적 출생이라는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혼인중의 출생”이란 개념과 그에 기초하고 있는 “친족”이라는 개념은 “혼인 중”이라는 표지(Merkmal)와 함께 불가분의 문화적 계기를 내포하게 되는데, 이는 종교의 세계나 도덕 또는 법의 세계로부터 연원(淵源)할 수도 있다. 심지어 혼인중의 출생과 친족에 대하여 법적인 개념과 자연적인 개념의 일치를 주장할 때도 이 친족의 자연적 개념이 반드시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진 것이다. 생물학적 의미에서가 아닌, 바로 위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혼인중의 출생에 대한 “자연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가 친족에 대한 법적 개념이 문화, 사회적 개념 및 그 의미에 있어 자연적 개념과도 구별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종교적 방식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법률상 혼인이 거행되고 있는 점을 특히 배제하여, 문화, 사회적 친족 개념과 법적 친족 개념의 적용 조건이 완전히 일치하고, 문화, 사회적 친족 개념이 존재해야만 법적 친족 개념이 인정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법적 친족 개념과 문화, 사회적 친족 개념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친족의 법적 개념에는 다른 것과 비교되지 않는 의미가 부여되어, 말하자면 특별한 효과(Tragweite)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법률가가 흔히 말하듯이 “법규(Rechtssatz)”(법규범)에 의해 “법률효과(Rechtsfolge)”가 주어지는 “구성요건(Tatbestand)”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논의의 핵심으로 들어왔다.

혼인 외의 부와 혼인 외의 자는 친족으로서 효력이 없다라고 할 때, 이는 혼인 외의 출생이라는 구성요건에 대하여는 혼인중의 출생이라는 구성요건에 부여하는 것과 같은 법률효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법률효과란 도대체 무엇인가? 민법 제1589조 제2항이 효력 있을 당시 혼인중의 직계친족에게는 혼인 외의 출생자에게 인정되지 않는 증언거부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민법 제1589조 제2항이 삭제된 오늘날에도 혼인중의 출생자와 혼인 외의 출생자 사이에는 다같이 “친족”으로 취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적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아직도 “효력” 있는 법적 차별이 여기서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즉, 혼인중의 자는 부(또는 모)의 성(姓)을 따르지만, 혼인 외의 자는 출생 시 모가 갖고 있는 성을 따른다(민법 제1616조 이하).11) 또 혼인중의 부는 모와 공동으로 자녀에 대한 친권, 다시 말해 교육, 감독, 건강의 보살핌, 직업훈련과 직업선택의 수행, 법률행위와 소송의 대리 등을 통해 자녀의 인격과 재산을 돌보아 줄 권리와 의무를 갖지만, 혼인 외의 미성년인 자는 (특정 제한은 따르지만) 일반적으로 모의 친권에 복종한다(민법 제1626조, 제1705조). 그밖에 부양청구권이나 상속권과 관련하여 혼인 외의 자의 법적 지위가 혼인중의 자의 법적 지위와 상당부분 동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다만 현재 인정되고 있는 혼인 외의 자의 상속권은 혼인중의 자 또는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공동상속을 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유류분청구권과 유사한) 상속대상청구권(Erbersatzanspruch)의 형태로서 인정되어, 혼인 외의 자는 다른 공동상속인과 함께 상속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한다(민법 제1934조a).

법에 있어 “친족”과 (혼인 중 또는 혼인 외의) “출생”이란 개념은 오로지 다음을 의미한다. 법률에 의해 이러이러하게 규정해놓은 친족 또는 출생의 “구성요건”에 터잡아 이런 또는 저런 “법률효과”를 부여하거나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친족”이란 개념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귀속감, 운명공동체, 공통의 조상과 고향에 대한 추억, 공동의 명예에 동참하는 의식, 친족에 결부된 책임감, 곤궁 시 상부상조 등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법에서는 간접적으로 고려될 뿐이고, 직접적으로는 “법률효과”로서 인정된 권리, 의무만이 의미가 있다. 같은 양친으로부터 출생한 자식들(형제자매와 사촌)은 곤궁할 때 서로 돕고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의무일 수 있다. 현행 민법에서와 같이 법이 이러한 부양의무를 규정한 바 없다면 그 한도에서 친족의 구성요건은 법률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소송법이 삼촌까지의 방계친족에 대하여서만 증언거부권을 인정함으로써 다시금 여기서 법적 규율의 상대성에 마주치게 된다.

법률의 구성요건 개념을 정하는데 있어 위와 같은 상대성은 동일한 사안에 대하여 법률효과를 달리 규정함으로써 나타나는 법적 규율의 상대성으로 인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법규에 있어 구성요건이란 즉자(卽自)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개념적으로 확정하고, (일정한 자연적 현상을 동반하는, 생물학적 의미에 있어 즉자적인 “친족” 또는 “출생”에 관하여 하는 것처럼) 이를 학문적 언급의 객체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법, 형법 또는 공법적 특성을 지닌) 특정한 법률효과를 부여하기 위한 전제로서 “법률적 구성요건”의 윤곽을 그리고 이를 어느 정도 확정(구성)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입법자는 특정한 법적 관점 하에서 구성요건의 전제사실을 상이하게 규정하고, 또한 현실의 법률효과를 결부시키기 위하여 “출생”이란 단일의 자연적 기본사실을 언제든 다르게 평가하여 파악할 자유를 가진다. 혼인중의 출생이든 혼인 외의 출생이든 자연적 기본사실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법률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방금 우리는 어떤 “구성요건”에 결합된 “법률효과”에 대하여 되풀이해서 언급했다. 그럼 “법률효과”란 무엇인가? 우리는 특정한 성(姓)을 따를 권리, 친권을 행사할 권리와 의무, 양육비를 청구할 권리와 상속권 등등, 항상 “권리와 의무”로 지칭되는 몇몇 경우를 알았다. 그런데 그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법률효과는 권리(권한부여)와 의무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권리와 의무가 법적으로 승인되어진 것이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중 후자와 관련해서는, 법적인 수단을 통해 그 효력이 유지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경우라야 권리와 의무가 법적으로 승인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한데, 이는 오늘날 법과 국가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볼 때 필요 시 사법과 행정당국에 소추를 제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법적 의미에 있어 권리, 의무와 위와 같이 국가적 강제력을 결여한 도덕적 권리, 의무의 관계에 대하여 이는 여기서 더 이상 다루기 곤란한 법철학적 문제이다).12)

위에서 우리는 법률효과가 권리와 의무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선 그렇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형벌제재와 같은 “법률효과”로 당황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나중에 (28쪽에서) 고찰하겠지만 형벌제재도 권리, 의무의 한 내용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에는 “소극적인” 양(量)으로서 (권리, 의무로 구성된) 법률효과의 부(否)란 것이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금전교부의 대가로 소송에서 위증하기로 한 소송당사자와의 합의와 같이 어떤 “법률행위”가 법률 또는 공서양속(公序良俗)에 반하는 경우에는 “무효”이다(민법 제134조, 제138조). 다시 말해 이 경우에는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구별해야 할 것이 구성요건에서 소극적 내용을 갖는 권리와 의무의 발생을 정한 경우이다. 예컨대, 시끄러운 행위의 중지를 요구할 권리 또는 그 의무와 같이 어떤 부작위를 요구할 권리 또는 그 의무를 말한다. 이러한 권리 또는 의무는, 마치 채무가 회계상으로는 부(負)로 다루어져 재산에서 공제되어도 법적으로는 적극적인 무엇, 전형적인 의무인 것처럼,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법적 의미에 있어 진정한 소극적인 양(量)은 법률과 공서양속에 반하는 법률행위의 무효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리와 의무의 부(否)를 말한다. 이는 법률효과의 배제를 뜻하는 것인데, 종종 그 자체가 “법률효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즉, 법률과 공서양속에 반하는 법률행위는 무효이고, 따라서 어떤 법률효과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법률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법률효과의) 이중의미가 숨어 있다.13) “법률효과”가 법규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될 때도 있고(법규는 “구성요건과 법률효과로 구성되어 있다”), 법규의 지시, 다시 말해 권리와 의무의 성립 또는 권리, 의무의 목적인 급부(給付) 또는 형벌 따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될 때도 있는데, 이런 (법률효과의) 이중의미가 혼란을 일으킨다. 매매계약을 근거로 매도인과 매수인에게 특정의 권리와 의무가 발생한다고 하는 법규의 규정(이는 법규의 구성요소로서 법률효과를 말한다)과, 법규가 지시하고 있는 계약당사자의 권리와 의무, 즉 매매대금을 요구할 매도인의 권리와 대금을 지불하고 물건을 양수할 매수인의 의무는 구별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법률 및 공서양속에 반하는 법률행위는 어떤 법률효과도 발생시키지 않는 의미에서 법률효과를 지닌다고 할 때, 후자의 법률효과는 법규의 구성요소로서, 전자의 법률효과는 권리와 의무로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미는 일상의 법률용어에서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없애기 곤란하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법규의 구성요소로서 법률효과를 말할 때는 법률효과규정 또는 법률효과명령 등으로 표현하는 도리 밖에 없다.

다시 우리의 본론으로 돌아가자. 법률효과란 권리와 의무로 표현된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 소극적 무엇, 즉 부작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라도 항상 적극적 권리 의무로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이 권리의 본질적 실체이다. 이에 반하여 (법률효과의) 부(否)는 제한, 즉 부차적인 것이다.14) 법의 중점은 적극적 권리를 보장하고 의무를 부과하는데 있다.

이제 민법해설서 등에서 법적으로 의미 있는 “법률효과” 또는 “법적 효과”란 법률관계의 발생, 소멸, 변경을 내용으로 한다라는 표현에 부딪치게 되는데,15) 여기서 “법률관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즉 법률관계란 “법에 의해 규율된 생활관계”, 예컨대 매도인과 매수인의 관계, 또는 혼인관계 등을 말한다. “내용적으로 법률관계는 우선 상대방의 의무에 대응하는 권능(권리)으로 나타나지만, 예컨대 친족이나 거주지 등에서와 같이, 장래 필요할 경우 다양한 형태의 권리의무가 발생되는 잠재적 연원으로서의 법률관계도 있다.”16) “법률효과”의 내용으로서 법률관계에 관하여 이러한 설명을 계속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법률관계는 법률효과로서 기능하기보다는 법률효과를 위한 구성요건으로서 기능한다는 점, 이에 반하여 법률관계 및 그 발생, 소멸 또는 변경을 현실적으로 법률효과라 한다면 이러한 논리구성은 다시금 권리 의무 및 그 발생 등의 문제에 귀착한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법률효과”의 내용으로서 권리 의무에 또 다시 이르게 되었다.

법이란 강제규범이기 때문에 법률효과의 명령은 강제, 다시 말해 형벌 또는 강제집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한눈에 보아 법률효과의 본질을 달리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이 강제규범이라면 법규범은 강제를 규정한 규범이다. 특정한 조건에 그 결과로서의 강제행위를 관련시키는 데에 그 본질적 내용이 담겨있다.” 이는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의 창시자인 한스 켈젠(Hans Kelsen)이 말한 그대로다.17) 그러나 강제의 규정이 다시금 강제를 위한 권리 의무를 만들뿐이고, 또는 한스 켈젠이 말한 것처럼 주어진 구성요건이 충족되어진 경우에는 강제가 따라야만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경우에도 법률효과는 권리 의무, 즉 특정한 성질의 권리 의무, 예컨대 특정행위의 실현을 위한 국가기관의 권리 의무에 귀착되고 만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러한 유형의 권리 의무가 지닌 의미는, 법률적 권리 의무란 국가기관에 의한 강제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법률적이다라고 일컬어지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여기에 대응하는 국가의 권리 의무가 존재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의) 권리 의무는 모든 권리 의무의 최후 근거로서 등장한다. (위와 같은 견해는) 단편적 견해로서 여기서는 자세히 논급할 겨를이 없다.

이제 여기서 일응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법규에 의해 구성요건과 결합되어 있는 법률효과는 권리 의무로 이루어져 있다. 법률효과규정은 권리의무의 성립 또는 불성립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즈음에서 의무를 권리에, 또는 권리를 의무에 귀착시킴으로써 위의 표현방식을 좀 더 단순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매도인의 대금지급청구의 권리에 매수인의 대금지급 의무와 국가의 매수인에 대한 지급판결 및 그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의 의무가 대응하듯이, 일방의 권리에 타방의 의무가 항상 대응하기 때문에 권리 없는 의무와 의무 없는 권리가 없다고 한다면, 모든 법규는 구성요건에 대한 법률효과로서 권리를 결합시키고 있다고 하든가 또는 의무를 결합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화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권리를 의무로 바꾸는 것이 보다 쉬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의무 없는 권리가 없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모든 의무에 그 실현을 구할 권리가 대응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고, 특히 대응 권리로서 개인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권리, 특히 국가의 권리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법규에 규정된 법률효과는 의무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의무란 무엇인가? 의무란 항상 행위의 당위(Sichverhaltenssollen)를 말한다. 작위 또는 부작위를 행하도록 의무가 있는 사람은 이러 이러한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논의의 새 장(章)으로 접어들었다. 법규란 당위규범(Sollenssätze)18), 특히 통용되는 말로는 가정적 당위규범이다. 이는 제한적인, 말하자면 “구성요건”에 의해 제한된 당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에 대하여 유효한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면,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매매물건을 양도하고 그 소유권을 이전해야 하며, 매수인은 매도인으로부터 그 물건을 양수하고 합의된 매매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민법 제433조 참조). 또는, 누구든지 고의, 과실로 타인의 생명, 신체, 건강, 자유, 재산 또는 그 밖의 권리를 위법하게 침해하면, 그는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민법 제823조 참조). 또는, 불법영득할 의사로 타인의 물건을 절취한 자는 절도죄로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형법 제242조 참조). 법률이 법률효과를 “의무”로 표현하였든(민법 제433조, 제823조), 아니면 달리 표현하였든(그중 가장 주목할 곳은 형법전인데 그곳에서는 “처한다(wird bestraft)”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항상 공통적인 것은 무슨 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도대체 “당위”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지 않은 당위개념은 우리에게는 부차적인 것이므로 –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또 다시 어려운 법철학적인 문제, 아니 일반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당위란 더 이상 정의될 수 없는 근본개념, 하나의 “범주” 또는 우리사고의 근본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덧붙여질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섬세한 도덕, 문화철학자인 게오르그 찜멜(Georg Simmel)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였다. “당위란 관념의 실질적 의미에 이르러서는 그것에 실천을 위한 어떤 구체적 입장을 제시해주는 범주이다……당위에 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당위는 미래 또는 과거 따위와 같이 일종의 사고방식이다…”19) 혹자는 당위란 욕망의 표현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아이슬러(Eisler)의 유명한 철학사전에는 “당위란 의지의 상관개념이고, 의지에 의한 (타인 또는 자기의) 욕망의 표현이다”라고 되어 있고,20) 그 철학 소사전에서는 “‘당위’는 의지명령이고, 상위의지에서 하위의지를 지향한다”고 되어 있다.21) 타인의 행위를 지향하는 의지의 표현을 “명령”이라 한다면, 아이슬러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질 수 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것은 명령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목적으로 한 당위규범으로서 법규는 명령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끝으로 당위개념을 가치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어떤 행위의 행함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행하지 않음이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질 때 그 행위는 하여야 한다.22) 여기서 이 부분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다.

법규란 명령이다23)라는 점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한다. 이는 법규가 법공동체, 국가 또는 입법자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러한 의지는 수범자(受範者)의 특정 행위를 지향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 행동을 요구한다. 법적 명령은 효력이 있는 한 강제력을 지닌다. 의무가 명령의 대응개념인 것이다. 이로부터 법이란 그 실체에 따르면 오직 명령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소위 법규명령설(Imperationstheorie)이 성립해왔다. 만약 이 이론을 옳게 이해하고 극단으로 치우치지만 않는다면, 이는 정당한 이론이다. 우선 이 이론을 법전의 개별규정에 관련하여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법전의 개별규정은 “입법기술상” 그 자체만으로는 거의 대부분 의미가 없다. 이들은 상호의 관련성에 의하여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 법률 기술의 상당부분이 바로 이러한 상호 관련성에 있다는 점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단지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민법 제227조와 형법 제32조는 한결같이 정당방위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즉, “정당방위란 현재의 위법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어행위”라는 것인데, 이 규정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법률의 다른 규정, 즉 정당방위로 인한 행위는 “위법”하지 않다라는 규정과 관련하여서만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그러나 위법하지 않다라는 규정도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 의미가 없고, 금지나 형벌규정과 결합하여 그것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살인, 신체상해, 강요 등 침해행위는 일반적으로 금지되고 형벌로 처벌되지만, 정당방위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하나의 완전한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 것이다”라는 법격언을 거꾸로 하여 “허용된 것은 금지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24) 법률적 개념규정 뿐만 아니라 법률적 허용규정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규정이 아니다. 이들 규정은 이를 정하고 제한하는 명령과 함께, 또 이들 명령은 법적 정의와 제한, 허용 및 예외 등에 의해 보충됨으로써만 완전한 의미를 가진다. 법질서에서 본질적 의미가 있는 부분은 법전의 문리적 규정들에서 가져와 구성된, 국가를 포함한 수범자에 대한 금지 및 명령인 것이다.25)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법률과 공서양속에 반하는 법률행위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률효과의 부(否)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민법전이 그러한 법률행위를 무효로 하고 아무런 의무도 성립되지 않음을 규정하였다고 할 때, 이는 매매계약이나 고용계약과 같은 법률행위에 의하여 성립하는 급부의 명령이 예외적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급부의 명령은 법률행위의 무효에 관한 위의 규정으로 다시금 제한을 받는 것이다

법적 명령을 명시 또는 묵시적으로 제거하는 뜻에서 법적 명령의 사후 폐지는 그 의미가 다르다.26) 예컨대, 늘 주장되어 온 낙태금지가 완전히 폐지된다면 이는 명령의 취소를 의미한다. 이로써 명령도 명령의 구성요소도 되지 못한다. 수범자의 의지는 명령에 구속되고 명령이 폐지되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임산부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의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낙태금지의 적용이 부정되는 것이라면, 이는 일반적인 낙태금지의 예외로서 다시금 상호의존적이고 제한적인 허용법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법규의 폐지가 나머지 폐지되지 않은 법규를 다른 새로운 법규로 교체하지 않고 유효한 법적 명령의 전체 내용을 다소 축소하는 기능을 갖는 것인 한, 비명령적인 폐지법규로 말미암아 법규명령설이 그 근본이론에서 흔들릴 필요는 없다. 법규의 폐지로 인하여 특정의 행동양식이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뿐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다시금 명령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본래의 주관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규에 대해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27)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가장 대표적인 실례는 기본법(GG)의 첫 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본권 보장일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 그 내용과 보장에 관한 민법규정도 역시 대표적인 권리보장이다(민법 제903조 이하, 제985조 이하). 법적 용어에서는 객관적 법(objektives Recht)과 주관적 권리(sujektives Recht)를 구별한다. 객관적 법이란 법질서, 다시 말해 위에서 우리가 그 실체를 명령이라고 파악한 법규범 또는 법규의 총체를 말한다. 주관적 권리는 권한이다. 그러나 주관적 권리가 그것을 보장해주는 법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위와 같이 보장해주는 것이 법규이기 때문에 보장 자체는 객관적 법에 속한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권리와 명령의 실체인 법규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권리의 본질을 보다 철저히 분석해보아야 한다. 주관적 권리는 우선 단순한 허용 이상의 것을 말한다. 정당방위에서 공격자에 대한 침해가 허용되는 경우와 같이 법에 있어 허용이란 여러 금지된 침해를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으로 소극적 의미를 갖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소유권과 같이 주관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무엇이다. 이 경우에는 권리자에게 그의 개인적인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권한이 주어진다. 에네케루스(Enneccerus)의 자주 인용되는 교과서에 보면 “주관적 권리는 개념적으로는 법질서에 의해 개인에게 부여된 법적인 힘을 말하고, 이는 그가 목표한 대로 개인적 이익의 만족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에네케루스는 이와 같은 주관적 권리의 “보장”을 법의 명령, 금지와 함께 나란히 두고 있다. “모든 법규는 명령뿐만 아니라 보장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법이 명령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명령이 어느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는 있어도(예컨대, 겨울에 빙판을 쓸어야 한다는 명령은 보행인에게 이익을 주고, 특정한 복지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는 명령은 국민에게 이익을 준다. 이른바 ‘반사적 이익’), 그 명령의 달성을 요구할 권리가 명령 자체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법에 의한 위 권리의 보장이 필요하다….나에게 소유권을 부여한 법규는 타인에게 나의 물건에 대한 지배를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지배가 방해받지 않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의미에서 그 물건에 대한 지배력을 나에게 인정한다.”28) 법규명령설은 이러한 법의 적극적 측면을 가리는 것처럼 보인다. 빈딩(Binding)은 법규명령설을 비판하면서 주관적 권리는 법규명령설에 의하면 “규범영역에 있어 하나의 구멍”에 불과하다고 하였다.29) 법규명령설은 일종의 법철학적 회의주의로 묘사되기도 한다. 대표적 회의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Schopenhauer)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쾌락이 불쾌감의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법규명령설에 따르면 법이 보장하는 적극적인 무엇은 명령에 의해 속박 받지 않은 상태, “부담의 강요나 엄격한 당위”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불쾌감의 순수 소극적인 자유를 잃게 될 때 비로소 그 자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젊음의 생동감, 건강, 노동력을 점차 상실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명령에 의해 점차 자유의 침해가 증대할 때 비로소 법적 보장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전체국가의 질곡(桎梏) 아래서만, 상실한 기본권과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게 이해된 법규명령설이 위와 같은 비판으로 말미암아 포기될 수는 없다. 법규명령설은 법이 무엇을 보장하고, 적극적인 이행을 가져오며, 인식될 수 있는 은혜를 부여한다는 점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주관적인 권리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적극적인 무엇이다. 그러나 법규명령설은, 명령을 의미 있게 장치하여 법이 이러한 적극적인 효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주관적 권리의 가장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소유권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물건을 향유하는 것을 침해하거나 그 물건을 절취 또는 강취하거나 점유를 부당하게 침탈하거나 사용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금지하고, 그 외에도 정당한 권원 없이 타인의 물건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는 소유자에게 그 물건을 반환하도록 명령하고, 특히 사법당국에 대하여는 필요한 경우 소유자를 도와 이와 같은 1차적인 명령 또는 금지의 실현이 달성되도록 명령함으로써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30)

위와 같은 명령이 없이는 아무리 소유권의 명백하고도 의례적인 보장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공허할 뿐이다. 이점은 모든 다른 주관적 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 권리의 보장이란 근본적으로는 명령을 특정하게 분류하여 집대성한 것을 표현한 방식(façon de parler)이기도 하다. 주관적 권리란 법이 무엇인가를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법적 명령들에서 의미합치적으로 우리가 주관적 권리라고 부르는 권능이 도출되도록 이들 명령들을 분류하고 종합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켈젠(Kelsen)은 이점을 “권리란 불법적 결과를 전제로 권리를 지향하여, 불법구성요건에 의해 이익이 침해된 자가 소송 및 소청의 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주관적 권리는 객관적 법과 독자적인 것으로서 대립되는 의미가 아니다.”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법의 이원주의(Dualismus)는 지양된다.”31) 주관적 권리가 존재하고 그것이 “보장”되는 것이라면 이는 명령의 공포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법은 승인된 명령권에 의해 주어진 권한 이외의 다른 권한은 본래 이를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를 수가 없다. 법이 항상 달성하려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명령권의 의미 있는 활용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법은 주관적 권리로 가득 찬 부대자루로서 그로부터 주관적 권리를 꺼내 개개 국민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법의 어려움은 기본적으로 법의 상대적 빈곤에서 근거한다. 권리란 다른 사람에게 부담과 의무를 – 물론 조심과 절제 수준의 의무일 뿐이다 – 부과함으로써만 보장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재화를 분배할 때보다 정의를 행사한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 어머니가 그의 자녀에게 빵을 똑같이 나누어주려고 할 때가 한 아이의 이익을 위해 다른 아이에게 부담을 부과하도록 강요받을 때 보다 훨씬 수월하다. 여기서 단순한 허용과 소위 주관적 권리의 보장 사이에 구분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된다. 허용(Erlaubnis)의 경우 금지(Verbote)는 제한되고, 명령은 그 지반을 상실한다. 이에 반하여 주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경우에는 최근 지적재산권을 보호함으로써 일어나고 있는 사정에서처럼 명령은 필연적으로 증대하기 마련이다. 허용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명령(die Impertive)은 점점 녹아 없어지지만, 주관적 권리는 금지(Verbote), 명령(Gebote)과 더불어 나란히 증가할 수 있다.32)

우리가 주저 없이 완결된 법규의 본질을 우선 명령이라고 정의한다 해서, 입법자의 명령의 의지가 무제한의 의지, 다시 말해 자의가 아니란 점을 잊고자 할 의도는 없다. 법의 명령(Gebote)과 금지(Verbote)는 소위 “평가규범”(Bewertungsnormen)에 터잡고 있다.33) 이는 간단히 말해 평가, 즉 긍정(Billigungen)과 부정(Mißbilligungen)에 기초하고 있다. 도덕이론가인 요들(Jodl)은 아주 정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명령(Imperativ)은 “명령의 상대방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란 판단을 반드시 전제한다.”34) 범죄학자 메쯔거(Mezger) 또한 아주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결정규범’(Bestimmungsnorm)으로서의 법(=명령 Imperativ)은 ‘평가규범’으로서의 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평가규범으로서의 법은 결정규범으로서의 법의 논리적 전제이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무엇을 하도록 ‘결정’하려는 사람은 우선 무엇을 하도록 결정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즉 그는 어떤 긍정적 의미에서 그 무엇을 ‘평가’해야만 한다. 평가규범으로서의 법, 다시 말해 ‘객관적 생활질서’로서의 법은 항상 결정규범으로서의 법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35) 만약 법이 자의적인 의지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위와 같은 설명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낙태는 주먹구구식으로 금지된 것이 아니라, 생성되어 가는 생명을 성스럽고 불가침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법익) 충돌의 상황에서 임산부나 제3자에 의해 닥칠지도 모를 위험으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부여할 필요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태아에 앞서 마땅히 다른 이익이 우선되어야 할 (충돌) 상황이라면 다른 평가가 내려지고 낙태금지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를 들어 임산부의 생명과 건강의 진정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 동의하에 오늘날 “임신중절”의 근거로서 의학적 처방이 인정되는 것이다(형법 제218조a 제2항)36). 낙태금지와 임신중절은 모두 사전(事前)의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법규의 기초가 되고 있는 평가의 내용을 되돌아보는 것은 법규의 올바른 이해와 의미의 확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37) 이점은 나중에 다시 살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고찰로써 법규의 본질이 명령에 있다는 이론이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평가는 명령에 의해 무장될 때만 비로소 진정한 법규가 되기 때문이다. 법은 단순한 평가규범만 가지고는 공동체에 있어 인간 생활에 대한 주어진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법에 강제력이 없다면 순수 이상론에 그칠 뿐이다. 평가규범이 의지로써 표현되고 명령으로 고양될 때만 진정한 법규범이 된다.

이제 우리가 법규의 본질적 내용이 명령(Imperative)이라는 이론에 주저 없이 안주하는 경우 칸트의 개념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이 명령은 정언적(kategorisch)인 것인지 아니면 가정적(hypothetisch)인 것인지? 법규가 가정적 당위규범(Sollenssätze)이라는 사실은 이미 (31쪽에서) 언급하였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점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우선 칸트의 개념론에 비추어 볼 때 법적 명령은 어떤 성질을 갖는지 문제된다. “모든 명령은 가정적 아니면 정언적이다. 전자는 의욕된 어떤 다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조건을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어떤 행위가 다른 목적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38) 다시 말해 가정적 명령은 만약 당신이 이런 또는 저런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이런 또는 저런 수단을 취해야만 한다는 형식의 합리적인 제안에 불과하다. 이는 어떤 목적이 ”가정적“으로 전제된 상황에서의 기술적인 지시인 것이다. 칸트는 이런 가정적 명령을 ”숙련성의 명령“(Imperative der Geschicklichkeit)이라 부르고, 예리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가정적 명령의 경우에 있어서는 목적이 이성적이고 선한 것인지 따위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고, 오로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가 문제될 뿐이다. 기본적으로 환자의 건강을 회복시켜야 할 의사에 대한 지시나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 할 독살자에 대한 지시 모두 각각 그 목적에 기여하는 한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39) N.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저 유명한 군주론에 관한 저서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가정적 명령을 집대성한 두드러진 실례의 하나이다.40) 이에 더 나아가 가정적 명령을 열거하고, 어떤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 도덕적으로 타당한지 전혀 논의할 필요조차 없이 이 수단만을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 기술공학의 특성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정언적 명령의 과제는 “어떤 다른 목적과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내가 무슨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지를 명하는 것이다.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독살자로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정언적 명령은 이 경우 “너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한다. 따라서 “형법은 하나의 정언적 명령이다.” 다시 말해 범죄자가 응분의 형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정언적 명령인 것이다. 이는 도덕적 형이상학(Metaphisik det Sitten)이란 저서 속에서 최소한 칸트의 견해이다.41) “도덕”과 “기술공학” 사이에는 분명하게 정연한 역할분담이 존재한다. 기술공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가르치고, 목적 자체의 결정은 도덕에 미룬다. 기술공학은 도덕적으로 무관심하고,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봉사하는 목적이 도덕적이다, 비도덕적이다라는 도덕적인 평가를 그대로 수용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법규는 어느 쪽에 속하는가? 법학은 기술공학쪽인가, 아니면 윤리 쪽인가? 법규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수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명령의 상당 부분이 주관적 권리라고 불리는 권능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한 행위를 금하거나 명하고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점을 제외하더라도 법은 합목적적인 규정으로 되어 있다. 법은 공동체 삶을 합목적적으로 형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규를 칸트의 개념론에서 가정적 명령으로 파악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우선 법은 법규가 지향하는 목적을 스스로 검증한다. 법은 어떤 목적을 선한 것으로 평가하고, “정당성(Richtigen)”을 추구하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도덕적 원칙에 속한다. “법이란 국민에게 유익한 것을 말한다”라는 국민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의 그 유명한 조항은 실제에 있어 법을 가정적인 명령으로 비하시키는 것으로, 이는 국민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전혀 해답을 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개념 아래 어떤 목적, 예를 들어 내부의 질서 아니면 외부로의 권력, 평화 아니면 전쟁을 통한 팽창, 문화적 진보 아니면 물질적 부의 증대, 개개인의 행복 아니면 공동체의 번영 중 어느 것을 추구해야 할지 법으로부터 아무런 해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조잡하고 이론적으로도 무용한 원칙이다. 법은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의 실현을 무조건적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도덕에서와 같이 “정언적으로” 요구한다.42) 우리가 법적 명령을 해석하고 취급함에 있어 이를 법에 의해 선한 것으로 평가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견해의 결론인 것이다. 이러한 (선한 것으로 평가된) 목적 자체가 법적 규준으로 작용해야만 한다. 이에 반해 가정적 명령의 경우에는 목적을 지지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의 결정이 자유에 맡겨져 있다. 우리가 목적을 원하고 확실하게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유용한 수단을 권고하는 가정적 명령을 따를 필요가 있다.

(위의 여러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은 개개인에게 자유스럽게 목적을 설정하게 하고 다만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이는 법규가 특정한 행위에 긍정적인 법률효과 또는 부정적인 법률효과를 결합시키고 있고, 만약 내가 이들 효과를 지향하거나 계산에 넣는다면 그에 상응한 행동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나는 한편으로 의사표시, 매매계약, 관청에의 신청 또는 유사한 다른 행위에 의해 나에게 우호적인 법률효과를 도모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해배상의 급부나 형벌의 부담을 인수할 각오만 있다면 “불법행위”나 “범죄행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뢰쉬(Ruesc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벌의 위협을 잘 인식하면서도 범죄행위를 결의하는 사람은, 범죄가 가져다주는 만족의 대가로서는 균형 있고 심지어는 유리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면서 형벌의 부담을 작정한 것이다.”43) 더욱이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 법이론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읽을 수 있다. 법규범은 “어떤 행위를 단지 제한적으로만 정당하다고 한다. 요컨대 타인의 의지와 충돌하지 않고 이러한 의지에 봉사하는 권력으로부터 해를 입지도 않기 위하여 우리가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하다고 정한다.”44) 또는 이탈리아의 위대한 법철학자인 델 베키오(Del Vecchio)45)가 – 물론 불만족스럽지만 –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강제집행에 따르기로 작정하였다면 채무를 변제하지 않는 것은 채무자의 자유이고, 더 나아가 형벌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범죄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델 베키오에 의하더라도 “법은 가정적인 성격과 정언적인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사실은 다음과 같다. 법규는 그 실체에 따르면 정언적 명령이다. 법규는 무조건적으로 요구한다. 사람이 살인과 살인하지 않는 행위, 자유와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교도소에서 복역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누구든 자신 있게 살인을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형법조문의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한다면 이는 확실히 경솔한 생각이다.46) 모세의 십계명과 같이 현대의 법은 살인을 엄정하게 금하고 있다. 금지를 위반한 사람에게 형벌이 부과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정언적 명령이다. 이점을 칸트는 옳게 보았다. 그 결과 현대 법에 있어서는 기소법정주의(Legalitätsprinzip)가 성립한다. 즉 기소권을 행사하는 검찰은 형사소송법의 규정(제152조)에 따라 사실관계에 관하여 충분한 근거가 있고 예외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소추가능한 모든 범죄행위에 대하여 공소를 제기할 의무가 있다. 법문상으로 “범죄행위”를 회피해야 한다는 엄격한 명령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법공동체에 대하여 특정한 적극적 급부를 이행하는 것, 예컨대 세금을 납부하고 토지수용을 부담하는 것도 정언적 명령이다. 또한 의사표시, 특히 계약체결에 의하여 인수하게 된 민사상 채무를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도 정언적 명령이다. 물론 우리가 의사표시나 계약체결에 의하여 구속을 선택할지 안 할지는 자유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생활관계를 합목적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규율과 규정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구속을 선택하면,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의 이행이 정언적으로 요구된다. “계약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라는 유명한 문장은 정언적 명령인 것이다. 이는 “자연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칸트의 개념론과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법적 명령은 “가정적”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목적 자체에 관하여는 아무런 제약을 받음이 없이 특정 규정을 쫓아야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떤 특정 조건,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규정된 조건에 법적 명령이 기속(覊束)된다는 의미이다. 법규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이미 (31쪽에서) 가정적 당위규범이라 부른 그런 의미에서 가정적 명령인 것이다. “모든 법규는 규정 자체에서 언급된 특정 행위상황이 있을 때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가정(Hypothese)을 의미한다.”47) 예컨대, 살인의 금지는 그 정언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규정대로의 상황이 존재할 것과 정당방위, 법적 효력 있는 사형판결, 전쟁 등과 같은 예외사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살인의 금지는 본질적으로 다음을 의미한다. 즉 정당방위, 사형판결의 집행, 전쟁의 수행 등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살인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는 가정적으로 파악된 명령이다. 이를 칸트가 의미하는 “가정적 명령”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조건적(konditional)” 명령이라 표현할 수 있다.48) 이런 의미에서 조건적이지 않은 법적 명령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논리학의 가정적 판단(만약 a이면, b이다)에서 조건문(Vordersatz)과 결과문(Nachsatz)을 구분하듯이, 조건적 법적 명령에서도 조건문과 결과문을 구별하여야 한다. 조건문은 법적 명령이 적용되는 조건을 내용으로 하고, 결과문은 명령 그 자체를 내용으로 한다.49) 법률가는 조건문을 “구성요건(Tatbestand)”, 결과문을 “법률효과(Rechtsfolge)”라 부른다. 이 경우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급부, 인용, 부작위의 당위와 같은 법률효과규정(Rechtsfolgeanordnung)을 생각할 수 있다(25쪽 참조).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 무엇이 “구성요건”이고, 무엇이 “법률효과”인지는 여전히 의문일 수 있다. 민법 제823조에서 “고의 또는 과실로 타인의 생명, 신체…… 등을 위법하게 침해한 사람은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라고 표현된 부분이 도대체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다음과 같다. 어떤 손해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이 손해가 배상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법률효과에 해당한다. 당위가 결합되는 상황에 관련된 모든 것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당위의 내용을 정한 모든 것은 법률효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구성요건”에 관하여는 여러 종류를 언급할 수 있다. 우선 구성요건은 적극적 요소뿐만 아니라 이미 명령의 예외에서 본 바와 같이 소극적 요소로 이루어질 수 있고, 외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요소뿐만 아니라 내적인 심리적, “주관적” 요소(예컨대 민법 제823조에서의 “고의”)도 이에 속할 수 있다. 또 사실적, “기술적” 요소(예컨대 “생명의 침해”)와 함께 가치관련적, “규범적” 요소(예컨대 민법 제826조에서의 “공서양속에 반하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이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몇몇은 나중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구성요건론의 정교한 이론은 형법학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법률 없이는 형벌 없다는 기본법 제103조 제2항에 명문화된 유명한 (죄형법정주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이는 형벌이라는 법률효과의 명령이 따르는 구성요건은 형법전에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50) 한편, 계약체결을 대상으로 한 모든 구성요건(예컨대, 민법 제652조 ; “계약체결의 기회를 알선하거나 계약을 중개할 목적으로 중개료를 약정한 사람은……” ; 중개계약)이 그렇듯이, 의사표시를 내용으로 한 민법의 구성요건은 그 가운데서도 매우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들 구성요건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우리의 생활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사적자치(私的自治)”를 실현하게 되고 법적 명령을 마음대로 우리 뜻에 따라 이용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결과 법적 명령의 정언적 성격이 다소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법적 명령은, 우리가 어떤 특정의 목적(예컨대 계약체결의 기회를 알선할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때에는 “의사표시”를 통해 반대급부의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의사표시에 의해 결과적으로 성립된 의무 자체는 언제나 명령적이란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의욕된 것의 사후에는 필연이 생긴다(quod initio est voluntatis, posterea fit necessitatis).”51)

논의를 앞으로 더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구성요건이나 법률효과규정은 법규의 구성요소로서 추상적, 개념적 형상물이란 점이다. 논리학의 가정적 판단이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조건적(konditional)인 법적 명령의 조건문(Vordersatz)과 결과문(Nachsatz)도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법규의 구성요소로서 “구성요건”과 “법률효과”는 법규의 구체적 적용으로 나타나는 구체적 구성요건 및 구체적 법률효과와 교체되어서는 안 된다. 구체적 구성요건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생활사태(Lebenssachverhalt)”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 법률효과를 위해서는 따로 적당하게 부르는 말이 없다. 형법전은 추상적 법률효과와 구체적 법률효과를 구별하여, 법률에서 추상적으로 규정된 형벌을 “법정형(angedrohte Strafe)”, 이에 반하여 구체적 개별사례에 있어 “처단된(zugemessene)” 형벌을 “선고형(verwirkte Strafe)”으로 각 표시하고 있다(예컨대 형법 제52조, 제53조 각 참조). 법정형은 대부분 특정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벌금형”이라고 규정되어 있을 뿐이고, 일반적 조문(형법 제40조 이하 참조)에서 최저한과 최대한을 정하고 있는 외에는 최고액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이에 반하여 “선고형”은 원칙상 상당히 특정된다(예컨대 법원이 그 한도를 “특정한” 20일분의 벌금형). 소년법에서는 제한적이긴 하나 부정기형의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예외를 두고 있다.

위와 같은 추상성과 구체성의 구별을 주목하다 보면, 매우 논의가 활발한 하나의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법적 사고의 특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여기서 간과하고 싶지 않다. 이는 구성요건과 법률효과는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 관계가 조건적이라고만 설명하였다. 구성요건은 법규의 추상적 구성요소로서 법률효과규정이 적용될 조건을 개념적으로 규정한다. 입법자 스스로가 자주 행하는 것처럼 이들 관계를 서술적인 것(Prädikation)으로 파악해도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고의 또는 과실로… 생명, 신체, 건강…을 침해한다면, 그는 타인에게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하는 대신, “고의 또는 과실로… 침해한 사람은 타인에게 그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구성요건에서 규정된 조건이 성취된 경우에 어떤 법률효과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어떤 구성요건에 대하여 어떤 법률효과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논리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의미이다. 물론 전자의 형식이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법적 명령의 조건성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해주고는 있다. 이제 법적 사고의 특성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위와 같은 조건성을 사람들은 특별한 형식의 법률적 인과성(juristische Kausalität)이라 표현하여왔다. 찌텔만(Zitelmann)은 전세기 이미 이점을 언급하고 있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사이에는 “독특하면서도 아마도 입법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필연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를 자연의 인과성에 유추하여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문제는 “자연의 인과성을 유추하여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법률적 인과성”이다.52) 입법자는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다시 말해 개개인의 당위적 존재 사이에 인과적 결합을 만들어 이를 현존하는 것으로 선언한다.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법률가 가운데서는 폰 투어(v. Tuhr)가 찌텔만의 뒤를 따르고 있다. “법의 세계는 외부의 사건경과와 마찬가지로 인과법칙에 따른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사이에는 자연질서가 아닌 법률의지에 근거한 인과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연적 사건의 인과성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인간사고의 속성에 근거한다. 권리의 변경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구성요건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이는 법률의 명령에 부합된 구성요건이 존재하면 필연적이고도 거의 자동적으로, 특히 구성요건이 충족된 바로 같은 시점에 발생한다. 법률적 원인과 효과 사이에는 물리적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간격은 없다.” “(어떤 사실에 법적 효과가 뒤따르는) 법률적 인과성은 법률의 규정에 근거하고, 따라서 법률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형성된다. 법은 임의적 사실에 임의적 법률효과를 결합시킬 수 있다.”53)

이러한 법률적 인과성의 이념으로부터는 몇 가지 실천적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법률효과는 두 번 성립하거나 두 번 무효로 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법에 있어 “이중의 효과(Doppelwirkungen)”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법률행위를 근거로 하여 소유자가 된 사람은 다시 시효취득과 같은 또 다른 구성요건에 의하여 소유자가 될 수는 없다. 또는 법률행위가 어떤 구성요건을 근거로 하여 무효라면, 기망행위에 의한 취소 등 다른 구성요건을 근거로 하여 무효로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폰 투어는 “한번 발생한 권리는 다시 발생할 수 없고, 발생하지 않은 권리나 소멸한 권리는 다시 취소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54) 하나의 예를 들어, 소송에서 매매계약의 효력에 관하여 계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어느 당사자가 위 계약은 공서양속에 반하여 무효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고 하자. 이제 위 당사자가 입증의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경우 위 계약은 기망행위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므로 이를 취소하고 무효라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까? 폰 투어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법률적 인과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은 권리는 취소에 의해 제거될 수 없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사이에 법률에 의한 인과관계의 결합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대하여는, 논리적 관계가 인과관계와 혼동되고 있다는 반론이 자주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빈더(Binder)는 “법률가가 ‘법적효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순전히 무의미하다”고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는 단순한 비유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법적 효과는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효과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서 “자연현상이나 심리현상에서 아무런 대상”도 가지지 못한다. 법률효과는 “구성요건의 법규에 대한 규범적응성(Normbetroffenheit)을 의미하는 논리적 관련”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55) 그러나 이렇게 쉽게 인과관계론을 포기할 것은 아니다. 빈더의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법관이 구체적 구성요건, 다시 말해 생활사태(Lebenssachverhalt)를 “법규에 관련시킨다”고 해서, 즉 법규의 추상적 구성요건에 “포섭시킨다”고 해서, 이러한 포섭만으로 구체적 법률효과를 얻을 수는 없다. 구체적 법률효과는 한편으로는 법률 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 사례 내에서, 구성요건의 결과로써 발생하는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전제할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인과관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법률효과가 구성요건의 결과로써 발생하는 점을 법률적 인과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56)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추상적(즉, 법규 안에서)이든, 구체적(즉, 법규에 포섭될 생활사태와의 관계에서)이든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이러한 관계를 인과성이라 표현할 수 있느냐의 점이다. 만약 빈더가 법률효과는 구체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연현상이나 심리현상에서의 변화에 대해서만 이를 적용하려는 것으로서 인과개념의 부당한 제한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인과관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으로는 정신적 형상물(geistige Gebilde)도 있다.57) 타격(打擊)이 신체상해나 정신적 충격의 원인일 수 있는 것처럼, 약속이 청구권 또는 의무의 “원인”일 수 있다고 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흄(Hume)과 칸트(Kant) 이후로 인과성 자체가 대상에 관한 것이라는 사고에서는 벗어났다고들 한다. 물론 자연적 인과성은 자연법칙에, 법률적 인과성은 인간법칙에 근거하고, 후자는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법적 사실이 스스로 법형성력을 갖지 못하고 법률이나 관습에 의해 갖게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법률적 인과성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도 스스로 자연현상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세상은 저편에서 만들어지고 규율된다.”58) 점점 말의 논쟁 속에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적 관계와 법률적 관계 사이의 위와 같은 유추적 논의와 관련, 법률가가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를 이미 관용어가 된 “법적효과”로 나타내어 인과적으로 표현한다 할 때, 이 경우 단순히 “비유표현”의 문제인지, 아니면 지배력을 상실한 영역까지 “범주”를 뜻 깊게 확장하는 것인지는 더욱 논의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자연적 인과성이 어떻게 주어지든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와는 다른 구조를 갖는다는 이론적 근거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 근거에서도 커다란 주의가 요망된다. 단순한 “비유표현”에서 더 나아가 인과범주를 법규의 구성요소와 법규에 포섭될 생활소여(Lebensgegebenheiten)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자칫 오늘날 법학의 정신에 반하여 원죄로서 표현되는 “개념법학적”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이점은 이중효과의 문제를 다루는데 바로 나타난다. 여기서 물론 이점을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예컨대 폰 투어가 법률적 인과성의 개념에서 한번 성립한 권리는 다시 성립할 수 없고, 아직 성립하지 않았거나 소멸된 권리는 무효로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를 단순히 조건적 또는 서술적 관계로 파악하는 한(즉, 구성요건이 존재하면 법률효과가 발생한다, 또는 구성요건에 대하여 법률효과가 적용된다라는 따위), 이중효과를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본적 사고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법률행위에 의한 합의와 시효취득, 또는 공서양속에 반하는 행위와 기망에 의한 취소행위와 같이 여러 구성요건이 법률효과, 즉 권리 또는 의무를 발생시키거나 소멸시키는데 동일한 “근거”로서 순차 또는 동시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유효한 계약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시효취득의 요건이 존재함으로써도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고, 매매계약이 공서양속에 반하기 때문에서뿐만 아니라 악의적 기망으로 인한 취소행위에 의해서도 무효로 될 수 있다. 여러 근거에 의해 권리 또는 불법(상태)이 생길 수 있다는 사정은 일반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추상적으로 똑 같은 법률효과를 목표로 하는 여러 구성요건이 구체적으로도 동일한 결과에 이른 경우라면, 이들 모두가 동일한 법률효과를 위한 법적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다. 이는 “법에 있어 이중효과”의 문제를 다룬 킾(Kipp)의 유명한 논문59)에서 킾이 대변한 관점이기도 하다. 법률적 구성요건을 “(정언적) 명령 또는 이를 벗어나기 위한 조건”이라 한다면, “똑 같은 법률효과가 이중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하여 이를 반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똑 같은 법적 명령을 위한 이중의 근거가 경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220쪽) “두 개의 근거에 의해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급부를 위해 여러 의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221쪽) 이 경우 근거가 순차적으로 충족되었는지, 아니면 동시적으로 충족되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법률관계가 두 개의 근거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223쪽) 따라서 “임대차관계가 양 당사자로부터 유효하게 해지되었다고 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장해가 되는 것은 없다. 특히 이 해지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든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급부가 변제되고 시효로 소멸할 수도 있다.”(223쪽) 또, “동일한 법률행위가, 예컨대 형식상 흠결과 당사자의 심신장애와 같이 두 개의 근거에 의해 무효”로 될 수도 있고(224쪽), 무효인 법률행위가 추가로 취소됨으로써 이를 근거로 무효로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구속력의 부존재에 필요한 다수의 근거가 중요할 뿐이기 때문이다.”(225쪽) 모든 반론은 “법적효과를 외부세계의 의미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가지고 사물의 진정한 본성과 혼동”한데서 비롯한다.(220쪽) 무효인 법률행위의 취소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외부적으로 현존하는 작용의 소멸이나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적을 추방하는 따위와 같은 개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225쪽) 또, 법률적 인과성의 이론을 지나치게 자연적 인과성의 이론에 유추 적용하다 보면 실천 법학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킾의 견해에 대하여는 지지자들도 많지만, 예컨대 폰 투어, 부분적으로는 제포스(Zepos), G. 훗설(Husserl) 등 반대론자들도 적지 않다. 여기서 이점을 더 이상 논의할 수는 없다. 법에 있어 비유적 표현들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의가 남아 있다.60) 비유법학(Bilderjurisprudenz)은 자주 “개념법학(Begriffsjurisprudenz)”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여러 사례군을 정교하게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중효과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페터(Peter)는 “이중근거(Doppelgründe)”와 “이중결과(Doppelfolgen)”를 구별하고 있다.61) 전자는 여러 근거에 의해 발생한 하나의 법률효과의 문제이고, 후자는 내용적으로 여러 개인 법률효과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 실정법에 의해 해결될 소위 청구권경합의 문제까지 가세하여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킾이 생각한 바와 같이 어떤 구성요건이 존재하는 경우 다른 구성요건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실정법에서 추론할 수도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단체에서 탈퇴하였다면 그는 더 이상 단체로부터 제명당할 수 없는데, 이는 논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성원이 탈퇴함으로써 단체는 그를 제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사소송법(ZPO) 제619조로부터 (당사자의) 사망에 의해 혼인관계가 해소된 미망인은 더 이상 이혼할 수 없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는데, 이 또한 논리필연적인 것은 아니고 단지 실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순수논리적 – 또는 자연사실적 – 측면에서 어떤 다른 구성요건과 함께 병존적 권리근거가 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라도 이 다른 구성요건과 함께 구성요건으로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는 바로 특별한 법적 원칙 내지 규칙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련성이란 우리 문제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제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에 관하여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법규의 추상적 구성요건은 일반적으로 법률효과, 다시 말해 당위가 부여되는 조건과 상황을 우선 규정한다. 이들 관계는 조건적 관계이지만 서술적 관계로 파악해도 무방하다. 이제 구체적으로 뒤에서 상세히 다룰 “포섭(Subsumtion)”의 과정을 통해 어떤 법률효과(당위)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 유효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정되면, 이와 더불어 법률효과의 실현 또한 확정된다. 그러면 우리는 법규의 추상적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구체적 사실의 존재가 법률효과의 실현을 판단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법률의 일반적인 규정에 의해 모살(Mord)을 무기징역형에 처한다고 할 때 만약 구체적으로 모살(행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정되면, 이와 같은 사실의 확정은 위의 법률 규정과 관련하여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법률효과를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62) 그러나 흔히 구체적 법률효과는 법률에 완전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확정적인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63) 예컨대, 구체적 살인(Totschlage)이 존재한다는 사실확정을 근거로 살인자를 징역 5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과연 징역 몇 년에 처할 것인지의 문제는 특별히 법관의 판단에 의해 확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입법자에 의한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추상적 관계를 법률적 인과성으로 표현하려는 태도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나아가 법률의 추상적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구체적인 일련의 사실을, 법률에 의해 부여된 구체적 법률효과를 위한 법적 원인으로 파악하려는 의미도 분명해졌다. 인과성이란 자연과학에서도 추상적 자연법칙에 따른 현상의 연쇄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법률효과가 흔히 엄밀하게 특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특정한 범위 안에서는 재량적 판단을 하도록 하는 권한과 명령으로 존재한다는 지적조차 따지고 보면 법률적 인과성을 비난하기에 충분하다.64) 이점을 제외하더라도, “법적 효과”와 “법률적 인과성”이라는 표현방식은 우선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양식으로서 타당할 뿐이고, 이미 발생한 법률효과는 다시 발생하지 않고 폐지된 법적 효과는 다시 무효로 될 수 없다는 식의 법률적 결론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결론은 실제 개념법학이 이끌어낸 것으로 개념법학은 오늘날 더 이상 옹호될 수 없다. 여러 일련의 사실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동일한 법률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지는 사례별로 방법론상 정당한 법률적 관점에 의하여만 결정될 수 있다. “이중근거”의 문제이든 “이중결과”의 문제이든 근본적으로 이중효과를 인정하는데 장해는 없다.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흔히 의미하고 명명하는 것처럼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는 추상적인 경우에나 구체적인 경우에나 실정법, 다시 말해 법률에 의하여 우선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해둔다. 지금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추상적으로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조건적 관계를 설정하는 “법규(Rechtssatz)”는 오늘날에는 대부분 법률화된 법규이다. 찌텔만과 폰 투어와 같이 구성요건과 법률효과 사이에 “법률적 인과성”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위 인과성은 법률, 즉 “입법자의 의지”에 기초한다는 점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가 법률이나 입법자의 의지에 근거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 등에 기초한다는 생각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신종 사고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은 멀다. 우리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이를 간략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법률에 국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독자에게 실정법에 기초하여 당위를 파악하는 것에 관하여 더욱 자세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특히 여러 차례 언급된 생활사실의 법률에의 “포섭”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인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여백 –

 

제3장 법규로부터 구체적 법률판단의 획득,

특히 포섭의 문제

 

우리는 앞장의 끝 부분에서 언급한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해보고자 한다. 앞장에서는 법규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경우 우선 떠오르는 것은 성문법전에서 파악될 수 있는 법규이다. 일반인이 법률가와 그의 “직업활동”에 대해 알게 되어 갖는 생각은 그가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법률가의 한 측면만을 보는 것이다. 일반인은 법률가의 전형이라 할 법률실무가가 “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도 이미 알고 있다. 일반인은 또 모든 사람에게 있어 법은 그의 생활에 개입하는 힘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는 이 책의 처음에서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법률실무가와 법이 도대체 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무얼 의미하는가? 우리가 법의 본질을 행위에 의하여 그 삶을 형성하는 그러한 실체로 이해한다면, 법과 실무법학은 매일 매일, 매 시간마다, 아니 매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데 수단이 되는 우리의 행위와 우리가 받는 행위를 규정하면서 우리의 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물론 단순하게 법의 지배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기 위한 행위의 범위를 단지 일상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더불어 부단히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하여도 좋다.65) 법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형식은 이제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지를 법이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법은 우리생활에서 의미를 지니기 위하여 구체적 당위규범으로 세분화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나 다른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법으로 규정한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가 하는 막연한 물음은 쉽게 그에 관련된 당위의 물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내가 해도 좋은가?”는 “내가 반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의미한다).66)

이제 우리는 구체적 법적 당위의 물음은 관습에 의하여 대답된다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생활을 규율하는 법의 원시적 모습은 이른바 관습법67), 즉 동일한 상황에서 지켜지는 법적 확신을 겸비한 관행이다. 그러나 오늘날 관습법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관습법은 무엇보다도 국제법 분야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관습법을 제쳐두기로 한다. 또 다른 가능성, 다시 말해 구체적 법적 당위의 물음은 개별적 사안마다 법감정이나 이와 유사한, 구체적 합법 또는 비합법에 대한 직접적 통찰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쳐둔다.68)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구체적 법적 당위의 물음에 대하여 규범적인 대답을 우선 제공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는 법률이란 사실을 – 그럼으로써 우리는 다시 앞장과 관계를 가지게 된다 – 기본전제로 삼고자 한다. 이로써 생활을 법률과 관계시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생활이 법률과 관계한다니, 어떻게 관계한다는 것인가? 이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법적 사고”의 문제에 이르게 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구체적 법적으로 명령되어진 것 또는 허용되어진 것에 대한 확정은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법 적용기관, 다시 말해 법원과 국가의 행정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것도 재판이나 행정행위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해질 수 있다. 재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법원의 판결로서, 이를 통하여, 예컨대 누구에게 급부를 명하고, 범죄자를 유죄로 인정하여 형을 부과하기도 하고, 또는 청구를 기각하거나 피고인을 무죄로 선고하기도 한다. 행정행위의 예로는 경찰하명, 영업허가, 조세처분 등이 있다. 법률적으로 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구체적 권위적 확정69)을 위하여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합법률성의 원칙”이 적용된다. 우리 연방공화국의 기본법 제20조 제3항은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행정권력(또는 행정)과 사법(또는 법원)은 법률과 법에 구속된다.” 이는 우리 공동체의 “법치국가성”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다. 마운쯔(Maunz)는 합법률성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국가행위는, 그것이 사법적 행위이든 국가의 행정적 행위이든, 형식적 법률에 근거가 있어야 하고, 형식적 법률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법은 행정권력작용이 단순히 불문법이나 정의, 도덕성, 공공복리 등과 같은 일반적, 사회 윤리적 원칙에 의하여 지지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70) 그렇다고 하여, 법률이 오로지 전적으로 사법과 행정의 구체적 재판과 작용을 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위와 같은 법률실증주의적 관념을 처음부터 배격하기 위하여, 행정의 임무와 부분적으로는 사법의 임무도 국가적 공동체에 있어 삶을 합목적성과 형평의 관점, 경우에 따라서는 재량에 의하여 형성하는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법과 행정의 판단에는 항상 법률이 근거로서 관여한다. 법률은 그들에게 자주 엄밀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제 법률을 구체적 생활사실에 적용하는데 있어 법적 사고를 배우고 싶다면, 법률적용의 과정이 순수하게(in Reinkultur)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이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법률이 절대적이고 배타적으로 구체적 당위를 법으로 정하여 요구하고 있는 경우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법률에서 재량행위를 규정하였거나 이와 비슷한 행위를 결부하고 있는 경우를 뒤로 미루기로 한다. 요컨대, 우리는 법률이 절대 배타적으로 구체적 당위를 확정하여 둔 경우를 우선적으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여기서 보여주는 논리적 작업은 필요한 약간의 수정(mutatis muntandis)에 의하여 법률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 중 한 가지로서 구체적 당위에 내용을 부여하는 사고과정으로 편입된다.

순수한 법률적용의 전형적인 예는, 범죄행위로 인한 판단이 대상인 한, 형법에서 제공된다. 이는 형벌권의 주체로서 국가의 관여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엄격해야 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법치국가의 원리와 이와 관계된 합법률성의 원칙은 오늘날 현대 문명국가에서는 특히 자세히 구현되어 있다. 우리 기본법도 이러한 원칙을 특히 형법에 타당한 것으로 보장하고 있다. 기본법 제103조 제2항은 “범죄행위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법률로써 형벌이 규정된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조항을 모든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는 없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 조항의 의미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도덕 감정 또는 “건전한 국민감정”에 의하면 형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비열한 짓” 또는 “질서위반의 행위”를 하였다거나, “건달” 또는 “악한”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을 수는 없고, 형법전의 “구성요건 요소”에 의하여 정해진 형벌의 전제사실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예컨대 “불법영득할 목적으로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다던가(형법 제242조), “살의, 성적충동의 만족, 탐욕 또는 기타 비열한 동기로 사람을 (고의로) 살해”한 경우(형법 제211조)에만 처벌된다는 점에 있다. 법률 없이는 형벌 없다(Nullum crime sine lege)! 바로 이러한 원칙 때문에, 예컨대 라이히 재판소(RGSt 32, 165와 이미 그에 앞서 RGSt 29, 111)는 전선에서 전류를 몰래 끌어다가 전기를 부당 취득한 행위에 대하여 절도죄로 처벌하는데 곤란을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는 “파렴치”와 “부정직”의 문제만 있을 뿐이고, 라이히 재판소가 판시한 바처럼, 형벌을 위하여서는 “도덕적 법감정이나 거래생활상 요구되어지는 법익침해로부터의 보호”(RGSt 32, 186) 등에 부합한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절도죄로 처벌되기 위하여서는 “타인의 물건을 절취”하여야 한다. 그러나 라이히 재판소는 전기가 “물건”의 개념에 포섭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입법자는 전력을 훔치는 행위를 처벌할 목적으로 1900년에 특별법을 제정하였다(오늘날 형법 제248조c). 또 이러한 전기(처벌)법만으로는 예컨대, 두드려서 넓게 편 2페니 짜리 동전을 집어넣어 전기로 작동하는 시외전화를 부당하게 사용한 행위를, 법이 “전선을 이용한” 전기의 취득을 요건으로 정하였으므로, 전기절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라이히 재판소는 “2페니 짜리 동전을 투여한 것만으로는 전기를 전선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전화 다이얼의 회전을 방해하도록 설치된 차단막을 그 무게로 단지 제거하였을 뿐”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RGSt 68, 67 f.). 이 경우 사기죄를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시외전화가 자체연결로 작동한 것이고, 사기죄의 법률적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사람을 기망한 행위가 없었으므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제263조: “위법하게 재산상 이익을 취득할 목적으로 타인으로 하여금 허위사실로 기망하여 착오를 일으키게 하거나 착오상태가 지속되게 함으로써 그에게 재산상 손해를 가한 사람은”…; 기계가 착오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당한 무전(無錢)통화를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입법자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여야 했다. 1935년 자동기계의 기능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된 형법 제265조a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엄격한 법률적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 한 가지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좀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구체적 당위판단으로서 처벌되어져야 한다는 판단을 법률에서 획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처벌을 담당하는 법관이 하지만, 우선은 기소에 의하여 처벌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사나, – 부정적 방식으로 – 소극적 당위판결을 얻기 위하여 이러한 처벌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다투는 변호인,71) 그리고 아마도 가벌성의 법률적 문제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제3자 등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성을 위하여 우리는 가벌성에 관하여 그 판단이 갖는 의미가 특히 중요한 법관의 경우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특별한 논리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형법적 판단, 특히 형사판결(예컨대, “A는 살인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므로 무기징역에 처하고 소송비용의 부담을 명한다”)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사는 거기서 밝혀지게 될 사고의 당위요소이지, 형벌을 집행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중적 법적 명령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여 둔다. 형벌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반적 명령이 추상적 형법전에 포함되어져 있는 것처럼, 선고된 “판결”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내용의 구체적 명령이 존재함은 명백하다. 아무튼 추상적 명령으로부터 구체적 명령의 “논리적 도출”은 이론상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모리쯔(Mritz)는 이러한 “실무상의 삼단논법(praktisches Sylogismus)”에 관하여 탁월한 논문을 하나 집필하였는데,72) 거기서는 “명령의 대전제”로부터 구체적 명령을 이끌어 낸다는 것, 다시 말해 살인한 사람은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일반적 명령으로부터 살인자 M은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구체적 명령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러한 실무상의 삼단논법 또는 “의지적 추론(volitive Schlüsse)”73)의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만, H. 마이어(Maier)와 관련하여, “조건문에 어떤 결과문을 포섭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조건문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추론이 그저 결과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점이 보다 일반적이란 사실만 지적하여 둔다.74) 예컨대, 살인한 사람은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된다; M은 살인자이다; M은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75) (“전체에 대하여 타당한 것은 무엇이든 개체에 대하여도 타당하다”는) 전체에 대한 저 유명한 논리(dictum de omni)는 결과문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대전제인 명령에 있어서도 타당하고, 따라서 의지적 추론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전체”란 “모든 개개인”이라고 해석되어야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전체”라고만 해석되어서는 안 됨은 물론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요구되어졌다 하여 항상 모든 개개인에 대하여도 요구되어진 것은 아니다. 모든 다른 사람도 자기와 똑같이 요구되어진 것을 하여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모든 개개인은 수명자(受命者)로서 자신도 명령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개개인은 어느 일반적 명령이 누구나 빠짐없이 하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만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 명령은 모든 개개인이 다른 사람의 행동,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규범을 존중하는지 아니면 무시하는지 관계없이 명령되어진 것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 아래에서 위 전체에 대한 논리는 타당한 것이다.) 수학적 논리학도 또한 법적 사고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작업을 크게 비판하여왔다.76) 하지만, 법률에 의한 법적 판단을 발견하고 근거 지우는데 있어 순수 “인식론적” 추론, 다시 말해 앞서 말한 결과문에 의한 추론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거기에 논리적 특별함과 세밀함이 나름대로 있다는 점도 아울러 알게 될 것이다.77) 말하자면 법관은 우선 형법전에서 “살인한 사람은 형법 제211조에 의하여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된다”라는 하나의 판단(결과문)을 정립한다. 논리적 의미로는 (진리를 주장하는) 순수 당위판단인 이러한 “대전제”에 법관은 “M은 살인자”라는 “소전제”를 결합시키고, 그로부터 “M은 형법 제211조에 의하여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라는 추론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다시금 또 하나의 판단(결과문)인 것이다. 이러한 삼단논법은 이론적으로 엄밀하게는 간접추론이라 할 것이고, 방법론적으로 보면 (결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전제를 조건적 내용, 즉 “누구든 살인하면,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된다”라는 내용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논리학자들은 “모든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일반적 명제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의 조건적 명제 또한 이를 “일반적 명제(allgemeine Implikation)”라고 부른다.78) 당위의 내용을 이루는 이러한 일반적 명제로부터 법발견에서 문제가 되는 구체적 당위명제가 추론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다.79)

우리는 “얻어진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가? 예컨대, H. 이사이(Isay)가 그런 것처럼(“Rechtsform und Entscheidung”, 1929), 법률가, 특히 법관은 외부적으로는 법률로부터 구체적 당위판단을 근거 지우고, 따라서 외견상 사법의 합법률성의 원칙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나, 자주, 아니 대부분 그 판단을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법감정이나 실천이성 또는 건전한 인간오성으로부터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추상적 규범으로부터 판단을 근거 지우는 것은 부차적 의미를 지니고, 이는 자체적으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사후에 합리화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통제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합리적 법원(法源)이 법관의 판결 발견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든, 법관은 그의 권한과 양심에 따라 법률로부터 근거 지우고 도출할 수 있는 그런 판단만을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법을 발견하는 것이나 법을 근거 지우는 것이나 대립된 뜻은 아니다. 법관에게 부과된 과제는 법률에 의하여 근거 지울 수 있는 판결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사이의 이론은 순수 심리주의다. 이 이론은 규범논리학의 특정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80)

이제 우리는 법발견에 있어 추론의 근거지움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러한 근거지움의 중심을 이른바 소전제, 우리의 실례에서는 “A는 살인자다”라는 명제에 두기로 한다. (대전제와 그것의 엄밀한 분석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대전제가 정언적이든 가정적이든 소전제의 본질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만 강조해둔다.) 소전제에는 무엇보다도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포섭이 존재한다.81) 그러나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소전제에는 사실확정, 다시 말해 포섭되어질 사실의 확정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A는 살인자다”라는 명제는 A가 법률적 관점에서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였다는 사실확정뿐만 아니라, 이렇게 확정된 사실이 살인의 법률적 개념에 해당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형사판결에서 소전제를 획득함에 있어 논리적 작업을 예시하면 다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검사나 특별검사(Privatkläger)의 공소장에 의하여 법원에 어떤 사람이 구체적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공소가 제기된다. 공소사실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우선 문제된다. 법원이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피고인을 유죄로 처벌할 생각이라면, 한편으로는 범죄행위가 존재한다는 일련의 사실, 예컨대 A가 상속을 받기 위하여 부인을 인식, 인용 하에 독살하였다는 사실이 확정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형벌이라는 법률효과가 추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특정한 법률적 범죄 구성요건에 이와 같은 구체적 사실이 포섭되어야 한다. 우리의 실례에서는, 상속받을 목적으로 인식, 인용 하에 부인을 독살하는 행위는 형법 제211조에서 말하는 살인의 구성요건요소를 충족하는 것이고, 말하자면 저급한 동기에 의한 고의의 살인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의 확정(“거증”)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우리는 대표적으로 형사소송을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이 경우 목표는 법원에 특정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순수 논리적으로 본다면, 법적 절차에 있어 사실확정은 역사적 사실확정과 아주 비슷하다. 역사학자가 그에게 제공된 자료를 가지고 사실을 조사하는 것처럼, 법적 절차에 있어서도 자백을 포함한 피고인의 변소와 소위 증거방법, 다시 말해 증거물, 증거서류, 증언 및 감정결과의 보조를 받아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사실로 보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발생한 시, 공간 또는 단지 시간적으로만 제약된 사건, 상황, 관계, 물건 및 특성으로서 우리의 외적, 내적 인식의 세계에 속하고, 자연법칙에 따라 규율되는 것을 말한다.82) 대부분의 범죄행위는 법원에 대하여는 단지 개별적인 사후작용의 결과로서 현실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므로, 사실확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경험적 추론, 특히 논리적으로 참된 복합 추론인 것이다.

대부분의 법적 증명은 소위 “간접사실에 의한 증명”, 다시 말해 “간접증명”으로부터 우리가 확정하고자 하는 의미 있는 직접사실을 추론하는 식의 증명이 된다. “간접증명”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용이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법률적 구성요건에의 포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가 “의미 있는 직접사실”이라고 부른 그러한 사실에 대한 결과추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는 법적으로 무의미하다. 우리 독살의 예에서는 독약투여라는 사실 자체가 살인죄의 구성요건에 포섭될 “의미 있는 직접사실”인바, 예컨대 행위가 있기 이전에 남편이 독약을 구입하였다고 한 약사의 증언은 남편이 죽은 부인에게 독약을 먹였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증명이 될 수 있다. 무엇이 의미 있는 직접사실인가는 물론 그때그때의 해당 법규와 구성요건에 따라 달라진다. 약사가 남편에 대하여 약값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이라면, 약사와 남편 사이에 독약의 매매가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의미 있는 직접사실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 있는 직접사실이란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간접증명 가운데 형사소송에서는 피고인의 자백이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다(민사소송에서의 자백의 기능에 관하여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는다). 근대 법률가들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자백은 그의 유책에 대한 논리 필연적인 증명은 되지 못하고, 범죄행위를 결과 추론적으로 현실로 인식할 수 있는 간접증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바, 이는 아주 정당하다. 이러한 추론은 드물지 않게 궤변으로 흐를 수 있다. 왜냐하면, 피고인이 실제 자기가 하지 않은 행위를 자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진범을 숨기려고 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사형문제에 대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는 해결방안, 다시 말해 자백의 경우에만 사형을 집행하자는 의견은 무죄인을 돌이킬 수 없는 집행으로부터 배제할 확실한 방도가 없는 한, 근거가 박약하다. 더욱이 소위 목격자의 증언이란 것도 “간접증거”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법정에서 증인의 증언은 증언의 내용이 되는 과거에 있었던 행위를 기초로 하여 단지 제한된 범위에서 믿을 만한 추론을 허용하는 “의미 있는 간접사실”에 불과하다. 여기서 자주 되풀이되는 “추론”이란, 말하자면 법원의 입증절차에 있어 커다란 의의가 있고, 중요한 사안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감정을 통하여 법원에 제시된 경험칙에 근거한, 여러 개연성의 정도에 합치한 추론을 일컫는다.83) 우리가 경험적 추론에 직면하게 되는 무수한 형상이 모두 우리 관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특히 중요한 것은 원인으로부터 결과의 추론, 또는 결과로부터 원인의 추론을 뜻하는 이른바 인과추론이다. 모든 간접적 증명에 있어 지도원리는 소송 본래의 목표인, 의미 있는 직접사실을 입증된 간접사실로부터 실무상 유일하게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실례에서는 독약구매가 살인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독살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설명될 수만 있다면, 독살은 증명된 것이다. 입증된 간접사실에서 절대 합리적인 추론을 하여 범죄행위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제 소전제에 대하여 연구하기에 적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법원의 사실확정과 역사적 사실확정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는데, 물론 방법론상으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양자의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을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는 그에게 제공된 자료의 이용과 그 자료에 기초한 사실조사에 있어서 자유롭다. 그는 단지 학문적 방법론에 구속될 뿐이다. 이에 반하여 소송에 있어 진실발견은 법적으로 광범위한 규제를 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소송에서 특정한 증거가 있는 경우(예컨대, 자백, “전형적인” 증인 두 사람의 일치된 증언84), 특별한 요건을 갖춘 문서의 존재85)), 입증하고자 하는 요증사실(要證事實)이 간단히 입증된 것으로 간주하는, 법률적으로 정해진 이른바 증명법칙을 갖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형사소송법 제261조는 “법원은 자유롭고,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여 갖는 확신에 따라 입증의 결과에 관하여 판단한다”라고 규정하여 원칙상 “자유심증주의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증거방법의 제출과 이용에 관하여는 여러 법적 규정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증거의 효용성에 관한 경험적 근거, 부분적으로는 증명과는 무관한 이익에 대한 고려의 요청으로 정해진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250조가 구술증언 대신에 서면증언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면, 이는 법정에서 구두로 하는 증언이 시시콜콜한 서면에 의한 증언보다 훨씬 가져다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입증이익에 기여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형사소송법 제252조는 예컨대, 가까운 친족과 같이 증언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증인이 변론절차에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는 그가 과거에 한 진술을 이용한다거나, 특히 과거에 한 진술조서를 낭독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바, 이러한 “입증행위의 금지”는 진실발견이라는 이익을 넘어 증언거부권자가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이익에 대하여 인도적 고려를 하였다는데 근거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부인으로부터 어린아이에 대한 간음으로 경찰에 고발당한 남편이 나중에 법정에서 부인이 과거의 불리한 진술을 반복하지 아니하여 무죄로 석방되었던 사례를 감명 깊은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다. 과거의 실체적 진실발견은 “처분권주의원칙”이 타당한 민사소송에서 다시 한 번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당사자가 다투는지 또는 다투지 않는지, 입증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따라 법적으로 평가될 사실에 관한 자료를 결정하는 것이 – 물론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 당사자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 예컨대, 계약이 술 취한 상태에서 체결되었느냐 하는 사실은 당사자가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는데 구애받지 않는다면, 고려될 여지가 없다.86) 증명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법적 규정을 우리는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이는 소송법의 이론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구체적 사안을 두고 소송절차에 있어 진실발견의 법적 한계를 거론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이제 소전제 속에 포함된 사실확정의 문제가 제반정황을 인식하여 결과를 추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포섭의 문제 또한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부터 이점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외견상 간단한 듯한 “A가 살인했다”라는 명제조차도 해당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포섭을 위하여서는 어려움이 예정되어 있을 수도 있다. 형법 제211조는 살인에 대하여 자세히 규정함으로써 포섭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형법 제211조 제2항은 “살의, 성적 충동의 만족, 탐욕 또는 기타 저급한 동기에 의하여, 교활하게 또는 잔혹하게 또는 통상의 위험한 수단을 동원하여, 또는 다른 범죄행위를 실현하거나 은닉하기 위하여 사람을 살해한 자”를 살인자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확정된 사실관계가 과연 이러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예컨대, 경쟁자를 살해하거나 질투와 증오의 대상인 이웃 정부를 살해하는 행위가 “저급한 동기”에 의한 살인행위인지, 또는 수면 중인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가 “교활하게”에 해당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법관은 자주 의문에 빠진다. 이 경우 법률에서 사용된 “저급한”이라거나 “교활하게”라는 개념이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포섭의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법률이 그 직접적인 의미에서 가치를 요구하지 않는, 말하자면 “규범적”이 아니고 “기술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는 중(重)절도죄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행위자가 절취할 목적으로 건물, 주거 또는 밀폐된 공간을 부수고 들어가거나 침입한 때…”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승용차의 지붕을 뜯어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절취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이러한 절취행위도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의 구성요건에 포섭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포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이히 재판소는 과거 이와 같은 사례에서 포섭을 부정하였다. 라이히 재판소는, 건물이나 밀폐된 공간이라 함은 지면이나 수면의 한정된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행위자가 건물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물건을 절취하지 않았으므로, 위의 사례에서는 제243조 제1항 제1호(당시는 제2호)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지지하였다(RGSt 71, 198). 이와 달리, 연방대법원은 “새로운” 포섭을 위하여 폐쇄된 승용차도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BGHSt 2, 214 등). 이 보다 앞서 연방대법원의 형사대심원은 1951. 5. 11. 주거용 자동차는 밀폐된 공간이라고 판시하였는데(BGHSt 1, 158), 여기서는 “건물(=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고 권한 없는 자를 차단하기 위하여 담과 지붕으로 제한된, 지면에 고착된 구조물) 또는 창고(=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물건을 저장하기 위하여 포위된 공간구축물)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람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최소한의 부분에 있어 인공적인) 시설물로 둘러싸여, 권한 없는 자의 침입을 막고 있는 그러한 공간구축물”(BGHSt 1, 163 이하)도 밀폐된 공간이라는 일반적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 위와 같은 대심원의 판결에서 밀폐된 공간이 항상 지면 또는 수면의 제한된 부분이라는 라이히 재판소의 견해가 폐기되었다. 연방대법원의 나중 판결(BGHSt 2, 214)에서, “주거용 자동차”가 “사람의 주거목적에 이용되었다”는 이유에서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권한이 없는 자를 차단하기 위하여 시설물로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에 밀폐된 공간이라고 하였던 것이라면, 이전에 대심원에서 한 판결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주거용 자동차뿐만 아니라, 승용차의 경우에도 타당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위 판결은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다.87) 그러나 복켈만(Bockelmann)과 같이 밀폐된 공간의 “표준이 되는 기준”을 “사람의 집과 같은 장소”에서 찾은 사람도 있었다. 이에 따르면, 주거용 자동차는 밀폐된 공간이지만, 통상의 승용차는 물론이고, 철도차량과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야 한다.88)

위에서 언급한 구체적 사례에서 포섭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은 우리가 이제 막 살펴본 바와 같이 포섭에 있어서는 구체적 사례를 법률적 구성요건에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이고, 어떤 사례군(群) 또는 사례유형을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89) 나아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포섭이란 새롭고 일회적인 것이고, 동일한 사례에서 이미 이루어졌던 포섭을 단순히 반복 수행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사람들은 개별 구체적 사례를 개념에 귀속시킨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하였다. “단지 같은 것만이 같은 것에 포섭될 수 있다.” 개념에는 개념만이 포섭될 수 있다.90) 법적용의 논리적 구조에 관한 어느 연구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에 따른 것이다. 즉 사례를 법개념에 포섭시킨다는 것은 “개념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은 개념으로 관념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은 – 사실로서 – 인식되지 않는데 반하여, 법개념은 그 표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념적인 형상으로 관념되어져 있기 때문이다.”91) 말하자면 사실개념을 법개념에 포섭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형식논리적, 인식론적 연구를 더 이상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법률로 정해진 개별 구체적 사례를 개념에 포섭시킨다는 것은 어떤 사안, 즉 “사례”를 법률개념 또는 법규의 추상적 구성요건에 의하여 정해진 일정한 사례 유형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만을 강조해둔다. 지금 판단의 대상인, 지붕을 뜯어내고 승용차로부터 한 절도를 “밀폐된 공간”에 침입하여 한, 일반 추상적인 절도란 구성요건 개념에 포섭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승용차로부터의 절도라는 구체적 사례는 “밀폐된 공간”에 침입하여 한 절도라는 개념에 포괄되는 일련의 사례군 중 하나라는 점이다.92) 이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법논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구체적인 사례를 법개념에 의해 관념된 일반 사례군에 해당시키는가? 이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 근거는 새로운 사례를 이미 일련의 사례군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진 그러한 사례들과 똑같이 보는데 있다.93) 우리가 든 예를 통하여 본다면, 승용차로부터의 절도는 이미 의심할 여지없이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 광산갱도로부터의 절도(RGSt 3, 411 참조), 주거목적의 승용차로부터의 절도(BGHSt 1, 158) 등의 사례들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일련의 사례군이라 할 유형 그 자체를 확정하고, 비교의 소재로서 이용되는 그러한 사례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어두기로 한다. 이는 해석의 문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개념의 해석은 포섭을 위한 전제가 되고, 해석이 끝나면 그 나름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해석의 결과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BGHSt 1, 158에서 BGHSt 2, 214로 발전되어간 과정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비교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94) 그러나 우리가 (광의의 의미에서) 원칙적으로 서로 동일한 대상을 의미하는 유형에 대하여 만족할 만큼 정통하다는 점을 전제한다고 하여도, 지금까지는 그러한 유형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던 새로운 대상을 바로 그 유형에 편입시키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다시 말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동일시하는 것이 적법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새롭게 포섭되는 모든 경우에 있어 포섭될 사례가 이미 유형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사례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따라서 평등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법관에게 그와 같은 구별이 “본질적”인지 아닌지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례와 기존의 개념 유형에 속한 사례들 사이에 본질적 동일성 또는 본질적 차이점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나아가 과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도달한다. 우리의 실례에서 밀폐된 공간이란 법개념의 경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표면의 일부”인지(라이히 재판소), 아니면 사방이 –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가 인공적 시설물에 의하여 – 둘러싸여진 공간인지(연방대법원)? 또는 “사람의 집과 같은 장소”(복켈만)로 이용되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지(연방대법원)? 사방이 폐쇄되어 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에서는” 승용차는 주거용 자동차나 광산의 갱도와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의 “관점”이 바로 “중요한 관점”인 것이다. 밀폐된 공간과 같은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사례를 동일하게 보는 어떤 관점이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다시금 해석의 문제이다. 해석은 비교의 사례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비교의 관점을 제공한다. 해석은 비교사례와 비교될 포섭대상인 사례에 있어 동일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그 다음으로 어떤 정신적 수단을 가지고 비교를 할 것인지, 즉 감각적 수단인지, 아니면 사유적 수단인지, 사유적 수단의 경우라도 “직관적” 수단인지, 아니면 “감성적” 수단인지 하는 문제를 결정한다.95)

이러한 해석이 “통상의 언어사용례” 또는 “입법자의 의지”나 “법률의 합리적 목적”에서 그쳐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그쳐야 하는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다른 장에서 음미해야 할 문제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소전제를 확정하지 못할 경우 결부시킬 추론에 대하여 아직 설명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전제가 현실적으로 명백하다는 점, 다시 말해 법개념에 포섭될 수 있는 사실확정에 성공한 경우,96) 그것도 대전제와 합치한 소전제로부터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경우를 전제로 하였다. 특히 우리에게 예시되었던 형법의 경우, 우리는 법률적 범죄유형의 개별적 개념과 요소에 전체적으로97) 포섭되어질 수 있도록 사실을 확정하고, 그로부터 범죄유형의 대전제에 정해진 형벌이 구체적 사례의 경우에도 당위적이라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주요사실을 확정할 수 없다거나, 확정된 사실이 대전제에 쓰인 구성요건 개념에 포섭될 수 없는 따위와 같이 소전제를 이루는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절도의 예에서 피고인이 승용차의 지붕을 뜯어내고 안에서 물건을 훔친 바로 그 사람인지가 불분명할 때가 있다. 또한 승용차는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이라 할 수 없으므로 거기서 물건을 절취하더라도 동 조항의 구성요건요소에는 포섭되어질 수 없다는 견해를 지지할 수도 있다.

순수논리적으로는 소전제가 명백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결론도 끌어낼 수 없다. 논리학은 우리에게 원인과 함께 결과가 생기고(modus ponens), 결과와 함께 원인도 제거된다(modus tollens)고 가르치고 있다. 반면 논리학은 원인과 함께 결과도 제거된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법관이 대전제에 해당한다고 원고에 의하여 주장된 특정한 소전제가 명백하지 않는 경우에도 나름대로는 다시 대전제에 근거하는 판결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가적인 대전제를 필요로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검사가 형사소송에서 A가 K의 승용차에서 지붕을 뜯어내고 물건을 훔침으로써 제242조, 제243조 제1항 제1호에 의하여 중절도죄의 죄책을 져야하므로 징역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이 A의 행위가 입증되지 않았다거나 승용차가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검사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법원은 우선 제243조 제1항 제1호에 해당하는 대전제로부터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친다.

이제, 법원은 “판결의 거부(absolutio ab instantia)”의 형식으로(아래 참조) 모든 판결을 포기한다거나, 검사가 기소한 것과는 다른 판결, 예컨대 – 과거에 통상적으로 행하여지던 – “혐의형”이나 “법률 외의 형벌(poena extraordinaria)”을 선고한다거나, 아니면 – 오늘날과 같이 형사소송법 제265조의 요건이 충족된 경우에는 – 다른 범죄, 예컨대 그 입증을 전제로 하여 흉기소지 중절도죄(제244조 제1항 제1호) 또는 단순절도죄로 처벌한다거나, 마지막으로는 A에게 완전 무죄를 선고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사법의 합법률성의 원칙에 따라 이 모든 판결을 하기 위하여서는 법률로 미리 정해진 다른 새로운 대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결론적 판단으로서 판결을 근거지우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새로운 대전제에 당해 소전제가 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전제들 가운데에서도 특정한 법률효과를 목적으로 한 포섭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무죄선고나 소 또는 신청을 기각하도록 의무 지우는 그러한 대전제와 소위 “입증책임”에 관한 대전제 등이 흥미를 끈다. 우리가 첫 번째 유형의 대전제로서 형사소송에서의 무죄선고를 위한 예를 든다면, 피고인에 대하여 판결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는 – 절차상 장애사유가 없는 한 – 실체판단으로서 명백히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적 조항이나 그에 상응한 법적 대전제가 존재한다. 피고인이 기소되어진 범죄행위를 하였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았다거나, 입증된 행위가 법률상 처벌할 수 있는 행위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보안처분의 가능성에 대하여는 논외로 한다). “무죄선고”는 추상적 형벌법규 또는 그에 상응한 대전제의 구성요건이 구체적 사안에서 없으므로 그 법률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추론된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그것을 규정한 특정한 대전제가 존재하므로 얻어진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형사소송법 제267조 참조). 이러한 대전제가 없었다면, 내용적으로는 아주 다른 판결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판결의 거부로서, 과거 이는 후일 절차의 속개나 판단의 유보 아래 판결을 뒤로 미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같은 곳에서 언급하였던 혐의형으로서 법률 외의 형벌을 선고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오늘날 합리적, 인도적 이유에서 배제되었을 뿐이지,98) 논리적 이유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다.

한편, “입증책임”에 있어 대전제에 관하여는, 법률적 사고가 만들어 낸 가장 의미 있는 사상적 형상물 가운데 하나의 문제이다. 입증책임은 모든 입증행위에도 불구하고 사실문제에 의문점이 남는 경우에 발생한다. (법률문제 quaestio iuris, 예컨대 “밀폐된 공간”이라는 법적 개념에 의문점이 있는 경우에는 법관은 판결로서 그 의문점을 해소해야 한다. 법관은 내적으로는 여러 가능한 이론들 사이에서 심리적 동요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중 하나의 특정한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고백하여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 우리 현행법에서 채택하고 있는 관점이다. 이는 논리나 “자연”법칙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법원이 피고인이 범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범인인지, 혹은 민사적 사례를 들어본다면, 소비대차의 피고가 변제를 주장하고, 원고가 이를 다투는 경우 과연 변제가 있었는지에 관하여 의문점이 생긴다면, 다툼이 있는 양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옳다고 선언하는 것, 간단히 말해 피고인이 무죄라거나 유죄라고 판결한다거나, 대여금을 변제된 것으로 인정한다거나 변제되지 않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에 관한 의문은 법률에 관한 의문과 같이 법원이 판결로써 어느 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한편, 법원이 사실문제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판결을 거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법원은 의문을 없앨 수는 없어도, 분쟁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련당사자의 구체적 만족이라는 법원의 임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법원이 어떤 판결을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바로 입증책임, 좀 더 정확하게는 입증책임에 관한 규정이 정하고 있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에서 입증책임에 관한 규정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여기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란 원칙이 타당하다. 이는 피고인의 유, 무죄를 위하여 중요한 사실관계에 의문이 있는 경우, 법원은 이러한 사실관계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피고인의 행위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이 행위자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피고인이 침해에 대한 방어를 위해 행위를 하였는지가 의심스러울 때는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피고인이 행위 시 심신장애가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울 때는 반증이 없는 한 책임무능력의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민사소송에서는 입증책임의 분배가 이루어지므로 훨씬 더 복잡하다. 모든 사실은 원고가 입증할 사실과 피고가 입증할 사실로 구분된다. 예컨대, 원고가 대여금의 반환을 구하는 경우에는 돈을 빌려주었다는 소비대차의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투어지고 원고의 입증행위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제거되지 않을 때는 원고에게 불이익하게 판결을 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원고에게 불이익하게(In dubio contra actorem)란 원칙이 타당한 것이다. 반면, 피고가 돈을 빌린 사실은 인정하고, 다만 차용금을 변제하였다고 항변하였으나, 원고가 이를 다투고 의심이 있는 때에는 피고가 이를 입증해야 한다. 피고가 변제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원고에게 차용금을 반환하도록 판결을 받고, 소송에서 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사소송에서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에게 불이익하게(In dubio contra reum)란 원칙이 타당하기도 하다. 로마인들은 항변에 있어서는 “피고가 원고이다(reus in exceptione actor est)”라고 말한 바 있다(D 44, 1, 1). 이는 피고가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항변에 있어서는, 청구원인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소송에서 승소하지 못하는 원고와 마찬가지로, 피고도 소송에서 똑같은 위험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소송의 유형별로 입증책임에 관한 규정을 자세히 고찰할 수는 없다. 다만, 입증책임이 법이론상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 주요사실이 확신을 가지고 인정도 부정도 되지 못하는 경우 법관이 어떻게 재판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 “그리고 그러한 재판내용이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그 자체로는 재판의 합법성이 보장된다는 법원칙”이란 점을 지적해두는데 그치기로 한다.99)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어렵고도 흥미 있는 사항이므로 여기서 최소한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법관은 포섭이 정당하게 이루어지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는바, 간혹 “택일적(擇一的) 확정”의 문제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법관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으로부터 발견된 타인의 물건이 절취에 의한 것인지, 장물취득에 의한 것인지 만을 심리해야 할 경우가 있다. 피고인이 가벌적 행위를 한 것은 명백한데, 이들 두 가지 중 어느 행위를 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법관은 이런 경우에 어떤 판결을 해야 하는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란 원칙에 따라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지, 아니면 피고인이 어떻게 보더라도 유책하므로 형을 선고해야 하는지? 이론과 실무에서는 오늘날 일정한 한도에서는 보다 경한 범죄로 피고인을 처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실무의 이러한 결론은 독자들에게 법원칙상 의문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논리상으로 그리 아주 간단하게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다.100)

 

-여백-

 

제4장 법규로부터 추상적, 법률적 판단의 획득. 법규의 해석과 이해

 

앞장에서는 주로 법적 판단인 삼단논법에서 소전제를 다루었다. 소전제는 법률과 법적 대전제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법사상을 구체적 법률사례에 적용하여 법률에 합치하는 판단이 가능하도록 하게 하는 신경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소전제와 그 구성내용에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였기 때문에, 법률에서 얻어지는 일반적 법사상이란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며, 거의 고착된 형상물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법적 사고의 활동은 대부분 소전제에서만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101) 소전제에 결합하는 법적 대전제란 그 자체가 다시금 법적 사고활동의 필연적 산물인 것이다 – 이점은 우리가 최소한 법으로부터의 연역과 추론에 의한 법발견의 문제를 다루어보면 분명해진다. 심지어 “법적 방법론”이라고 불러지는 것은 법적 대전제의 획득을 우선적 과제로 삼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소전제의 내용인 포섭이란 것이 법률의 “해석”과 대전제의 사고작업을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이미 앞장에서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소전제에 결합하는 대전제가 법률에서 얻어진다고 말하였다.102) 여기서 우리는 법률이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건적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법률에 부합하는 대전제란 이에 비하여 논리적 의미에서 가정적 판단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하여 대전제를 확정하는 것이 법률의 조건적 명령을 논리적 의미에서 가정적 판단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이는 실로 아주 기본적인 사고작업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컨대, 살인한 사람은 무기징역형에 처한다라고 규정한 형법 제211조의 명령은, “누구나 살인을 하면, 그는 형법 제211조에 의하여 무기징역형으로 처벌된다”라는 추상적 법적 당위판단으로 손쉽게 그 형식을 바꿀 수 있다.

법률가가 법률에서 법적 대전제를 얻기 위하여 가장 먼저 완수해야 할 다소 복잡한 과제는 “기술적” 이유에서 법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하나의 완전한 법적 당위사상의 여러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 완성하는데, 보다 엄밀하게는 구체적 법률사례를 판단하기 위하여 필요한 이러한 법적 당위사상의 구성요소들을 끌어 모아 한데 완성하는데 있다.103) 우리가 앞의 살인의 예를 들어 말한다면, 형법 제211조는 아무리 같은 조문 제2항에 규정되어 있는 개념요소들을 끌어 모은다 하여도, 완전한 법률적 대전제를 위하여서는 필요한 본질적 구성의 한 요소를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안에는 또한 살인자로서 처벌되기 위하여서는 살인자가 책임능력이 있어야 하고(이에 관하여는 형법 제19조 이하와 소년법에 규정되어 있다), 위법성조각사유(예컨대, 형법 제32조의 정당방위)나 책임면제사유(예컨대 형법 제35조 소정의 긴급피난)와 같은 사유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이 포함되어져 있다. 따라서 완전한 대전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독일 형법에 의하면, 누구나 책임능력자로서 위법성조각사유나 책임면제사유와 같은 사유가 없이 고의로 살의, 성적충동의 만족, 탐욕 또는 저급한 동기…..를 위하여 타인을 살해하면 살인자로서 무기징역형에 처해진다. 이 경우 대전제의 완전한 완성은 사안에 따라 판결을 위하여 필요한 한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예컨대, 위법성조각사유나 책임면제사유가 구체적으로 문제될 소지만 없다면, 이들의 부존재에 관한 언급은 대전제에서 빠뜨릴 수 있다.104) 여기서 법률가에게 부과되는 문제의 어려움에 관하여 한 좋은 실례를 제공하는 것이 검사의 공소장이다. 요컨대, 형사소송법은 공소장에는 피고인과 피고인의 범죄행위 외에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법률적 구성요건”을 명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형사소송법은 이로써 어느 정도는 피고인의 가벌성의 근거가 되는 법적 대전제의 확실한 적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상당한 어려움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법역(法域)에서도 이러한 어려움은 덜하지 않다. 입법이 포괄적이고 미묘하면 할수록, 법규범의 구성요소를 법률의 지배적 정신 안에서 종합하고 유기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법철학자인 슈탐러(Stammler)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법전에서 어느 한 조항을 적용한다는 것은 곧 법전 전체를 적용하는 것이다.”105) 사람들은 이 말이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법질서의 단일성 원칙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서는 법적 대전제란 전체 법전, 나아가서는 다른 법전의 보조를 받아 설정되어야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경우 법규는 법질서 안에서 동질적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법사상의 복합물이란 사고가 전제된다. 이러한 법적 기술의 중요한 측면을 민사사례 하나를 통하여 다시 한번 논증하는 것이 여기서 허용되었으면 하는데, 이 사례는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시보생활을 하는 동안 우연히 다루게 되었던 사례로서 나에게는 이미 젊은 시절 법률규정의 법적인 상호 유기적 특성을 가장 잘 일깨워준 유용한 사례라 생각한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도 이를 소개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106)

라이히 재판소 민사판결집 104권 44(RGZ 104, 44)에는 많은 비슷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서 라이히 재판소에까지 이른 바로 그 사례가 나와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군대가 철수를 하면서 군대는 낙오하는 말을 더 이상 끌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한 말 취급 장교가 낙오된 말 한 필을 165마르크에 한 농부에게 팔았는데, 이 농부는 그 말에 사료를 먹여 키운 다음 1년 뒤 6,000마르크를 받고 다시 팔았다. 라이히(“라이히 국고”)는 이 농부에 대하여 총 4,100마르크를 “부당이득”이라 하여 청구를 하였는데, 이는 농부가 벌어들인 매각대금에서 살 때 지급한 165마르크와 사료 값에 상당한 금액을 공제한 금액이었다. 하급심에서는 청구가 기각되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바로는, 당시의 사안들에 있어서는 농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법감정에 근거를 둔 목적론이 우세하였다. 앞서 언급한 이사이의 이론과 관련시킨다면, 법적인 근거를 끌어다 맞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법률에 엄격한 라이히 재판소는 청구를 인용하여 농부에게 지급을 명하였다. 청구권이 “이유 있다”는 것이었다. 라이히 재판소가 직접 적용한 조문은 민법 제816조였다. 그에 의하면, 무권리자(우리 사안에서는 농부)가 어느 물건(말에 대한 소유권)에 대하여 권리자(라이히 국고)에게 유효한 처분행위(여기서는 6,000마르크에 재매각하는 행위)를 한 경우 그는 권리자에게 처분행위로 얻은 이익(6,000마르크)을 반환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라도 이 조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의미 있는 대전제를 얻지 못한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어떻게 농부가 무권리자이고 국고가 권리자인지 결정해줄 법적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국고가 권리자였으나 농부가 말을 취득함으로써 소유자가 되고 따라서 권리자인 것은 아닌지? 그러나 실제로는 농부는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무권리자였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말을 판 장교는 말의 소유자가 아니고 말을 처분할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유권 취득에 관한 규정(민법 제929조 이하)에 의하여 농부에게 소유권을 이전해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 취급 장교에게 처분권한이 있다고 농부가 선의로 믿었다 하여도 이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농부는 예나 지금이나 민법 제816조의 의미에서 항상 무권리자이다. 민법 제816조를 보충하고 분명하게 해주는 동산에 대한 소유권취득의 규정에 의하면, 농부는 말에 대하여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한다.107) 제3자에 대한 매각행위에 의하여 그는 이른바 무권리자로서 말에 대한 소유권을 처분한 것이다. 그러나 제816조가 덧붙여 전제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처분행위가 어떤 근거로 “권리자에 대하여 유효”한 것인가? 말 취급 장교가 농부에게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농부 또한 제3의 매수인에게 소유권을 양도할 수 없을 것이다. 농부도 말 취급 장교와 마찬가지로 말에 대하여 처분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이 경우 제3자는 처분권한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을 취득하였다고 믿지 않고 소유자로부터 말을 취득한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농부를 말 소유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소유권에 관한 선의의 믿음은 – 처분권한에 관한 선의의 믿음과는 달리 – 민법 제932조에 의하여 보호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2가지 예외가 있다. 요컨대 민법 제935조는 “점유이탈물”에 대하여는 선의취득을 배제한다. 말 취급 장교가 단순한 “점유보조자”(민법 제855조)로서 농부에게 말을 양도하는 순간 국고의 입장에서 말은 점유를 이탈한 물건이다. 그 외에도 1919. 5. 23. 무권리자로부터 군용물을 취득하는 경우 선의취득을 배제한 특별규정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농부의 제3자에 대한 매각행위가 어떻게 권리자인 국고에 대하여 유효한 처분행위로 되는지 우리는 다시금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라이히 재판소는 독창적인 법률가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런 사상에 입각하여 판단을 하였다. 라이히 재판소는 민법총칙으로부터 제185조를 끌어냈는데, 거기에는 “무권리자(농부)가 물건(말)에 대하여 한 처분행위(제3자에 대한 매각행위)라도 권리자(국고)가 이를 추인하면 유효하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고는 농부에 대하여 그가 처분행위로 얻은 이익의 반환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농부의 처분행위를 추인하였다 할 것이다. “국고는 소송으로 매각대금의 반환을 구함으로써 처분행위를 추인하였다”(RGZ 106, 45). 이로써 민법 제816조의 모든 요건이 충족되었다. 다시 말해 무권리자(농부)는 물건에 대하여, 권리자에 대하여 유효한,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매각대금의 반환을 구하는 소송과 그 속에 포함된 추인을 통하여 소급적으로(민법 제184조 참조) 유효하게 된 처분행위를 한 것이다.

법률가에게는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이러한 사고의 전개를 일반인이 완전히 이해하였는지는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다. 또한 절대 그럴 필요도 없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108) 다만 우리는 법률가가 어떻게 법전에 흩어져 있는 조문들(제816조, 929조, 932조, 935조, 855조, 185조 등등)을 의미 있는 전체로 총괄하고, 구체적 사례에서 필요한 “대전제”를 작업하는지를 분명히 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대전제에 마음에 꼭 드는 그런 언어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오히려 대전제는 결과문에 의하여서만 언어상으로 적당하게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사고구조로 이해된다. 항상 중요한 것은 소전제와 결과문으로 연결되는 모든 대전제는 논리적 이해 안에서 법사상의 내적 관련성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대전제 상호간에 이러한 “내적 관련성”이 어떻게 보다 엄밀하게 구성되는가 하는 점을 여기서 명백하게 밝힐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적 관련성을 이루는, 너무도 다양한 실질적 관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한 조문이 다른 조문을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른 방식으로 보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외로서 배척하기도 하다. 현안이 되는 대전제를 그리기 위하여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법사상의 편린을 “법질서의 단일성” 원칙에 기초하여 총괄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에 관련된 실질적 관계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벌써 아주 구체적으로 법적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법 제816조를 다른 조문을 가지고 보충하면서 위 조문의 “해석”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제816조의 개개 요건들(무권리자 등등)을, 해석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조문들을 끌어들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법률의 다른 조문을 끌어들여 어느 한 조문을 해석하는 것이 법률가에게 부과된 해석작업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별 무리 없이 해석의 일반 문제로 들어서도 괜찮다 할 수 있다. 우리는 법학방법론의 중심적 문제라 할 이 문제를 이제부터 다루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말하자면 외연적인 것에서 내재적인 것, 다시 말해 “전체적 포섭”에서 “개별적 포섭”으로 문제를 훑어보기로 한다.109)

Ⅰ.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앞장에서 다루었던 사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승용차는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인가? 포섭 그 자체는 지금 여기서 재판될 사례와 이미 의심할 여지없이 법률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정된 사례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과 그러나 이때 어떠한 사례들이 법률에 해당하는 것이고, 어떠한 관점과 어떠한 관계 하에서 새로운 사례를 이와 같이 법률에 해당하는 사례들과 동일하게 보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해 조문(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의 해석을 통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우리는 당시 언급하였다. 이제 이러한 해석에 의하여 법률에서 직접 얻어지는, 추상적 개념요소로 구성된 대전제가 구체적으로 재판될 사례와 “비슷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올바르다 하여도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이러한 비유를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법률에서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법적 대전제와 구체적 사례에 대한 판단 사이에는 단지 하나의 소전제만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개의 소전제가 관여한다고 말해야 한다.110) 따라서 결과추론의 전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만약 절도범이 밀폐된 공간을 침입하였다면, 그는 3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2. 만약 절도범이 사람이 출입하도록 되어 있고, 무권한자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인위적 시설물에 의하여 둘러싸인 공간을 침입하였다면, 그는 밀폐된 공간을 침입한 것이다.

3. 만약 절도범이 사람이 출입하도록 되어 있고, …. 방지하기 위하여 … 시설물에 의하여 둘러싸인 공간을 침입하였다면, 그는 … 이상 …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4. 만약 절도범이 승용차에 침입하였다면, 그는 사람이 출입하도록 되어 있고, … 방지하기 위하여 … 시설물에 의하여 둘러싸인 공간을 침입한 것이다.

5. 만약 절도범이 승용차에 침입하였다면, 그는 … 이상 …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6. A는 절도범으로 승용차에 침입하였다.

7. A는 … 이상 …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위의 추론과정에 있어 전제 2.와 4.는 법률에서 직접 얻어지는 일반적 대전제 1.을 재판할 구체적 사례(승용차 안에서의 절도)와 “비슷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세분화한 명제를 뜻한다. 2.와 4.는 논리적으로 보면 소전제이고 3.과 5.는 특별히 세분화된 대전제이다. 5.의 경우에서 우리는 아주 세분화된 대전제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6.으로의 궁극적인 포섭을 별 어려움 없이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특정 주어(A)를 서술문의 주어(절도범)로 대입”하는 것만이 필요하다.111) “해석”은 주로 특별히 세분화된 소전제인 2.와 4.에서 있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대전제에 다음과 같은 물음, 다시 말해 “밀폐된 공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이를 분명하게 할 수도 있다. 이 물음에 대하여는 우선 소전제 2.가 그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는 결과추론의 목적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변환만으로 우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석된 소전제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밀폐된 공간이란 사람이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 등등의 공간이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소전제 4.에서 승용차가 이러한 요건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로 해석이 이어진다.

법적 연역을 위한 해석의 논리적 의미를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법개념의 내용과 범위를 법률가에게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해석의 임무라는 점을 말할 수 있다. 내용에 관한 언급은 정의(定義), 다시 말해 개념요소의 설명(밀폐된 공간은 ….. 공간이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또 범위에 관한 언급은 법개념에 해당하거나 포섭되는 사례군 또는 개별 사례들의 예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112) 법률주석서를 보면 우리는 이점을 알 수 있다. 형법상 문서위조죄(형법 제267조)의 구성요건에서 중요한, “문서”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시 설명해보기로 한다. 우리의 대표적 형법주석서에서는 “실질적 의미에 있어 문서란 유체물과 결합되어 일반인이나 당사자가 인식할 수 있는 생각의 표현물로서, 법적 거래에서 문서 자체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작성되고 작성자가 서명하였거나 작성자를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문서개념의 정의).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판례가 소위 증명표찰…. 등을 문서로 본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범위를 특정하기 위한 사례군의 예시, 그러나 이어 증명표찰이란 개념을 위하여 특별한 정의를 추가하고 있다). 나아가 증명표찰의 사례군으로서 개별적 사례들을 예시하고 있는바, “예컨대, 자동차에 있어 차대번호, 엔진번호 및 형식표시, … 포도주병의 코르크 마개에 있는 표시…. 그림에 있는 작가의 서명 등이 증명표찰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문서”라는 것이다.113)

Ⅱ.

이상으로써 해석의 궁극적 결과, 보다 정확하게는 외적 측면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정당하다. 이제 더 나아가 해석은 보다 깊이 있게 추구되어야 하고, 법조문의 의미를 파악하여야 하며, “이해”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해로서의 해석에 의하여 비로소 법규의 내적인 실질적 내용이 명백해지고 파악되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 이론에 의하면 정신과학의 기본적 특징은 명백히 의미와 이해에 있다고 할 것이므로, 법규의 진정한 의미와 진정한 이해를 추구하여야만 법학을 정신과학이라고 믿게 만든다.114) 그렇다면 이제 의미파악과 이해는 법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기서 “의미”란 개념을 철학에서와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하다. 이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에 속한다. 몇 년 전에 출간된 “존재의 의미”에 관하여서란 연구논문은 처음부터 “의미”에 관하여 16개의 뜻을 구분하고 있다.115) 또 이해라는 일반적 철학적 개념도 다종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우리가 고전문헌에서 법률“해석학”이라고 쓰여진 것들은 상당히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이다.116) 따라서 우리는 추상적인 논의에서 시작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법규의 의미와 이해에 대한 법률가의 연구를 알아보고 그로부터 해석학의 문제영역으로 들어가 보도록 한다.

우리는 우선 법전이 확실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법전비판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법적, 논리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우리는 이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법률이 정형화된 관보를 통하여 공포되고 있는 오늘날 형식과 방식을 감안하면, 법전을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법적 해석, 의미파악과 이해의 방법론을 우선 새로운 사례 하나를 들어 예시해보기로 하는데, 이 사례는 장물죄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잡고 있는 특정 목표를 위하여서는 아주 유용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해석이 문제가 되는 조문은 형법 제259조인바,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이 되는 부분은 몇몇 단어에 불과하다. 제259조는 “타인이 절취하였거나…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취득한 물건을… 영득할 목적으로 매수하거나 기타… 알선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조문 가운데에서 우선 “…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취득한”이란 개념이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된다. 이를 해석함에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이 조문의 실용적 측면, 다시 말해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취득한”이란 개념의 내용과 범위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무엇보다도 이러한 취득이 위법한 “본범(本犯)의 행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간접적인 취득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문제제기에 관하여는 앞의 111쪽 이하, 142쪽 이하 참조). 특히 범위(적용범위)와 관련하여서는, 절취하였거나 또는 기타 범죄행위로 얻은 물건뿐만 아니라 그 물건을 가지고 취득하였거나 교환한 물건도 “…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취득한” 물건이 되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하나의 예를 든다면, 보석절도범으로부터 훔친 보석들 중 하나를 선물 받은 사람이 장물범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훔친 돈이나 훔친 물건을 팔아 만든 돈으로 보석을 사서 선물하였다면 – 그 정을 알고 – 선물을 받은 사람도 장물범인가? 사람들은 이를 “대상(代償)장물죄”로 논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물죄가 훔친 물건 그 자체(돈 등)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신하는 물건(훔친 돈으로 산 보석)에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대상장물죄도 259조의 의미에서 가벌적인 장물죄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은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취득한”이란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라이히 재판소는 아주 오래된 판결(RGSt 2, 444)에서 “제259조의 명백한 문언에 의하면… (당시 규정되어 있던)117) ‘형사상 처벌할 수 있는 행위를 수단으로 취득한 물건’에는 형사상 처벌할 수 있는 행위에 의하여 직접 취득한 개개의 구체적 물건만이 해당하고, 이러한 결함과 직접 관련이 없고 그에 대신하는 물건 등은 결코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제한적 해석에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비판을 제기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금세기 가장 중요한 형법학자 중 한 사람인 에른스트 베링(Ernst Beling)도 포함되어 있다. 베링은 “훔친 물건의 대가, 훔친 돈으로 구입한 물건, 훔친 돈으로 교환한 물건 등도 절도행위에 의하여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본범의 행위와 물건의 취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면, 그 물건은 본범의 행위를 ‘수단으로’ 본범으로부터 취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훔친 물건을 사용하는 행위는 선행 행위, 즉 “형사상으로 처벌할 수 있는 행위”와 거의 같다고 할 것이다.118) 주의할 점은 베링은 형법 제259조의 “어의(Wortsinn)”를 라이히 재판소와 다르게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문제로 삼은 것은 “문리적”해석이라 불리는 부분이다.119) 그러나 우리 사례에서는 – 다른 부분에서도 항상 그러한 것처럼 – 이러한 문리적 해석으로는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의하여”(구법에서는 “수단으로”)란 개념은 모호하고, “문언”만으로 보면 베링의 견해나 라이히 재판소의 견해나 모두 다 성립이 가능하다. 통설에 의하면 “어의”에 관하여는 처벌이 문제로 되는 한 결코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법률 없으면 형법 없다(위 84쪽 이하 참조). 그러나 법률가는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률가는 – 어의의 다양성이란 한계 안에서 – 다른 방법으로 해석을 전개한다. 여기서 장물죄의 체계적 지위가 언급된다. 이에 관하여서는 처음부터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장물죄를 “사후공범(auxilium post delitum)”의 한 유형으로 보아 공동정범, 교사범, 방조범과 같은 공범의 규정에 나란히 배열할 수도 있다. 또한 장물죄를 절도죄, 강도죄, 공갈죄 및 사기죄와 같이 본질상 독립된 범죄의 한 유형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 형법전은 그중 후자를 선택하였다. 형법은 장물죄를 범인은닉죄와 함께 형법전의 각칙(各則) 부분에서 앞서 언급한 범죄유형의 한 가운데에 편재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무언가 제259조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가? 실제로 마우라하(Maurach)는 그의 형법각론에서 “공범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 범죄로 편재된 과정”을 들어 장물죄의 범죄행위는 “본범이 그의 행위로 취득한 물건 그 자체”에 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다.120) 이에 반하여 예컨대, 메쯔거(Mezger)는 법전에서의 체제는 우리 문제를 위하여서는 아무런 해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의 결론, 다시 말해 “대상장물죄”의 가벌성이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121) 이러한 모호성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른 해석의 수단을 찾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점은 벌써 마우라하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장물죄의 역사적 연혁과 제259조의 “입법사”를 말한다. 여기서 이점을 상론(詳論)한다는 것은 물론 불필요하다. 메쯔거는 앞에서 인용한 논문에서 이점을 다루었다. 우리는 1870/71년 제259조가 성립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하여 단지 프로이센 형법전에서 장물죄 조항이 수정되어 받아들여졌다는 점만을 지적하기로 한다. 우리 형법 제259조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 형법전의 조문(제237조)은 “절도한 것이거나, 횡령한 것이거나 기타 범죄행위를 수단으로 취득한 것임을 알고 그 물건을 매수하거나… 은닉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조문은 라이히 재판소의 견해가 제시하는 방향,
다시 말해 대상장물죄의 가벌성을 반대하는 관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구체적 사례군(절도한 것이거나, 횡령한 것이거나)을 앞에 예시함으로써 “기타 범죄행위를 수단으로 취득한”이란 일반적 구성요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범죄행위로 직접 취득한 것을 상정하였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70년 형법전이 장물죄의 규정을 보다 추상적으로 제정함으로써 대상장물죄도 처벌이 가능한 것으로 확장해석을 할 여지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프로이센 형법전에는 없었으나 1870년 라이히 형법전에는 명시적으로 규정된, 장물범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야만 한다는 요건을 놓고 보면 근거가 있기도 하다.122) 따라서 제259조의 입법사와 관련하여서도 해석은 모호하게 이루어질 뿐이다. “어의”와 “체계적 지위”는 물론이고 “입법사” 또한 명백한 결론을 유도하지는 못한다. 문리적 해석도 체계적 해석도 역사적 해석도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는 실질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사실 오늘날 법률가들은 지금까지 열거한 해석방법론보다는 소위 “목적론적” 해석방법론에 어느 정도의 우위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이는 법률 규정의 목적, “이성”, “기본사상”을 탐구하여 그로부터 “의미”를 조사하려고 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이 경우 “의미”는 목적이 된다. 우리 장물죄의 예와 관련하여서는, 장물죄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 처벌되는가 하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흔히들 형벌 규정은 공공에 손해를 가하는 행위를 방지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물죄는 어느 한도에서 공공에 손해를 가한 것이고, 어떤 점에서 가증스러운 면이 있으며, 무슨 이유로 처벌되어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이런 물음에 대하여는 절대적으로 명확한 해답이 없다. 오히려 최근 어느 정도는 중요한 “이론”으로까지 발전한 두 개의 문제해결 가능성이 제시될 뿐으로, 이는 장물죄의 개념에 관한 연혁에서도 이미 다소나마 그 대립을 볼 수 있었다. 요컨대, 장물범은 본범, 예컨대 절도범이 행한 침해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므로(“영구화시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처벌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장물범이 절취된 물건을 취득하게 되면, 소유자가 그 물건을 되찾는 것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법률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장물죄의 본질은 “본범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법한 재산상태의 지속”에 있다는 것이다.123)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라이히 재판소는 대상장물죄의 처벌성을 부인하였는데, 많은 학자들도 이를 지지하였다. 그 이유는 대상장물범은 외견상 장물범일 뿐 사실은 장물범이 아니고, 그가 취득한 물건도 본범이 형사상 유책하게 취득한 물건이 아니라 본범에 의하여 침해된 물건과는 전혀 무관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장물죄의 본질이 본범에 의하여 만들어진 상태의 지속에 있다고 한다면, 장물죄는 본범이 직접 ‘취득한’ 물건과 같은 유체물에 대하여서만 성립할 수 있다”(객체동일성의 요건).124) 그러나 장물죄의 본질에 관하여는 또 다른 이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이는 앞서의 유지설 또는 영속설에 대립하여 “이익설” 또는 “이욕설”이라 하는 것이다. 장물죄의 유책성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형사상 유책한 행위를, 의식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하여 이용하는 것, 간단히 말해 흙탕물 속에서 물고기를 낚는 것과 같은데 있다고 한다. 장물범은 본범에 기생하는 범인, “절도범의 뚜쟁이”이다. 그런 이유에서 처벌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예컨대, 1794년 프로이센 일반 란트법 2권 20장 제83조에 분명하게 나와있는데, 장물범은 “범죄가 완료한 뒤 인식하고 인용하면서 범죄의 이익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형법 제259조의 문언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장물범은 영득할 의사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갈라스(Gallas) 또한 이익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장물죄의 본질은 “재산상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처벌하고 있는 바로 그 본범이 만들어 놓은 과실(果實)에 자기의 독자적 이익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메쯔거도 최소한에 있어서는 이 이론의 정당성을 인정한다.125) 이익설의 관점에서 보면, 장물죄의 경우 본범에 의하여 직접 위법한 방법으로 얻어진 물건을 취득하였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장물죄는 본범이 본죄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얻은 물건을 취득함으로써 “형사상 유책한 취득이란 잘못”을 내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어느 일정한 한도까지는 대상장물죄도 처벌되어야 한다. 훔친 돈으로 구입한 물건이나, 그 역인 훔친 물건을 팔아 번 돈, 나아가 그 돈으로 구입한 물건, 끝으로 훔친 돈과 바꾼 돈 등도 장물죄의 객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본범이 20마르크 짜리 지폐 5장을 훔쳐 그 중 1장을 준 것이나, 100마르크 짜리 지폐를 훔쳐 은행에서 20마르크 짜리 지폐 5장으로 교환한 뒤 그 중 1장을 준 것이나 현실적으로 차이가 있는지? 후자의 경우에도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령인은 형사상 처벌받아야 하지 않는지? 물론 사람들은 이익설을 도덕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보다 법률적이지 못한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장물죄의 처벌성을 도덕적 관점에 근거시킬 수는 없는지 하는 해석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제259조를 해석하는데 도덕적 형법론과 엄격한 법적 형법론 사이의 논쟁이 끼여든 셈이다.

여기서는 장물죄의 본질과 대상장물죄의 처벌성에 관한 여러 이론적 논쟁을 종식시키고,126) 이익설의 관점에서 대상장물죄의 처벌이 무한히 확대되는 것과 관련하여 그 한계를 설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해석과 이해의 방법론 및 본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야를 좁혀 지금까지 예시된 사례에서 해석과 이해에 관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슨 문제가 남아 있는지 묻기로 한다.

우리는 우선 여러 해석의 방법론과 근거를 대략 기능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바, 그것은 언어의 의미에 의한 해석(“문리적” 해석), 사상적 관련에 의한 해석(법률에서의 어느 한 조문과 그에 관련된 조문들이 다른 조문들과 갖는 “논리적”, “체계적” 해석), 역사적 관련, 특히 “입법사”에 의한 해석, 끝으로 조문의 이성, 목적, “근거”에 의한 해석(“목적론적” 해석) 등이다. 사비그니 이후 이 4가지 해석방법론은 다소의 변형이 있기는 하나 법률해석학에서 거의 불변의 진리에 속하였다.127) 에네케루스의 중요 저서인 “민법교과서”에는,128) 해석이란 “문법과 언어관용례를 고려하고” 또한 “법률기술적 표현방식”을 특별히 고려하여 밝혀지는 법률의 문언에서 출발하여, 그 문언과 함께 조문의 내적 관련성, 그것이 존재하는 위치, 다른 조문과의 관련성(이는 논리적, 체계적 해석을 칭한다), 나아가 그것이 법률 이전에 있었던 상태, 역사적 연혁 및 특히 법률 소재에서 결과하는 입법사, 끝으로 특별한 법률 목적 또는 개별조항의 목적(이는 목적론적 해석을 칭한다) 등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론에 있어서는 작품의 가치 또한 중요하고, 법은 전체문화의 한 부분일 뿐이고, 따라서 법률조항이 의심스러울 때는 우리의 사회생활이 요구하는 바와 우리의 전체문화가 발전되어 가는 방향에 가장 부합되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내 개인 생각으로는 이점은 목적론적 해석에 편입될 수도 있다). 비슷한 설명은 다른 유사한 교과서들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개념론과 목적론에 있어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법원이 대체적으로 이와 비슷한 관점에 입각하여 실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129)

논리적 해석이론으로 발전된 법률해석학에 관하여 우리는 아주 간략하게만 고찰할 수 있다. 소위 문리적 해석에 대하여는 우선 그것이 마치 의미해석과 구별하여 순수한 문자해석인 양 오해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쯔바이게르트(Zweigert)는 “해석의 첫째 단계라 불리는, 의심나는 규범의 문자해석은 대개 성과가 없다… …오히려 의혹은 규범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만 – 이점에 관하여는 견해가 일치한다 – 해소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130) 그러나, 문언의 의미에 의한 해석과 그 외 다른 의미에 의한 해석의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131) 문리적 해석의 중심과제인 문언의 의미132)에 관하여는 항상 일상생활에서 언어의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와 법률기술적인 언어의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여기서 해석의 방법론은 입법의 방법론에 따라 달라진다. 헤겔은 말하길, 법이란 불법도 마찬가지이지만 본질상 독재자 디오니시우스가 그런 것처럼 너무도 어렵게 제정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알아볼 수는 없고 그것에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133) 그러나, 빈딩은 “법률적 표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일상언어의 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음은 없다… …법개념은 내용이 명확해야 하고 한계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법은 “자기의 고유언어”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언어보다 더 분명한 한계를 지닌 “법률기술적 의미”가 항상 문제되는 것이다.134) 그러나, 우리는 법률에서 쓰고 있는 법률기술적 표현이 빈딩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입법자는 자주 동일한 단어를 같은 법률 또는 다른 법률 속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공무원”, “점유”, “소유권”, “공공성”, “과실” 등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사람들은 “법개념의 상대성”을 이야기한다(뮐러-에르쯔바흐).135) 이는 그때그때마다 서로 다른 체계와 목적론적인 관련 속에서 개념을 고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이 경우 순수한 “문언해석”은 체계적, 목적론적 해석에 의하여 뒤로 밀리게 된다.

이제 체계적, 목적론적 해석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두 방법론은 외견상 그런 것보다 더욱 다양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논리체계적 관련성136)이라 함은 그때그때마다의 구체적 사상과의 관련하에서 법개념이 지닌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예컨대, 횡령조항의 범위 안에서 점유개념이 지닌 의미), 더욱이 해석의 기반이 되기에는 충분하나 법률에서 법규가 갖는 외형적 지위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예컨대, 우리 형법전에서 위증죄 다음에 무고죄를 규정한 체제로부터 무고죄도 위증죄와 마찬가지로 사법제도에 대한 범죄행위를 주된 목적으로 한 것이지, 개인의 명예에 대한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 법체제의 다른 요소들과 다양하게 관련되어 개별 법규에 숨어있는 전체적 법사상에 관련된 것이라 할 것인바, 예컨대, 장물죄는 총칙의 공범에 관한 규정(형법 제25조 이하), 범인은닉죄(형법 제257조), 재산범죄(사기, 공갈 등), 취소불가능한 소유권취득에 관한 사법규정 등등과의 관련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133쪽 이하에서 예시한 사안에서도 민법 제816조는 무권리자의 처분행위에 관한 규정과 관련하에서 이해될 수 있었다.) 법규는 대부분 다른 규범과의 관계 하에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다른 규범을 궁극적으로 보완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규가 전체법질서와 의미관련성을 갖는다는 의미는 곧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므로, 체계적 해석은 목적론적 해석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법규의 의미관련성이란 체계적 해석임과 동시에 목적론적 해석에 속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인과응보적 정의의 관점에 서있는 형벌의 체계 안에서 형벌이 갖는 의미는 체계적 의미규정으로 이해해야지 목적론적 의미규정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 법규가 추구하는 목적이 법질서 밖에 존재한다면(예컨대, 교양 있는 사람의 배양), 우리는 이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해야지 체계론적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

그 외에도 목적론적 해석137) 그 자체는 다차원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법규가 추구하는 목적이 법규 자체 내에 존재할 수도 있고, 법규 외부에 존재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법질서의 한 부분에서 제기된 문제를 다른 부분에 의하여 해결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따라서 절도, 강도, 재물손괴죄에 관한 형법규정이 민법의 소유권규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형법은 궁극적으로 민법에 종속된 법률로 볼 수 있다. 절차법은 궁극적으로 실체법에 종속된 법률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생활 그 자체를 법에 의하여 형성하는 것이 주된 문제이다. 형벌과 행정처분은 인간을 규제하고 교육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법규범이 특정한 하나의 목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박한 사고일 것이다. 목적도 급박한 것과 급박하지 않은 것, 저급한 것과 고급의 것 등이 존재한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가변적이고 다의적이다. 그것은 내용에 따라 유책한 행위에 대한 반대동기의 형성과 같은 구체적 실제적 효과에서부터 법적 안정성의 보장, 평화의 건설, 공공질서의 유지, 사회공공복리, “생존권 보장”, 인간성, 법적 거래에 있어 신뢰의 보호, 형평감각의 만족, 사법의 신속 등등과 같은 추상적, 이념적 목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판결의 효력, 경찰의 존재, 사형의 폐지, 법률행위에 있어 착오에 관한 규정, 무권리자로부터 선의취득의 인정, 기결수에 대한 사면 등과 같은 제도는 이러한 이념적 관점에서 보장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특히 개별적인 독립된 이익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상호 충돌되는 이익도 해석의 목적론적 관점에서는 고려될 수 있는바, 이러한 복합적인 이익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반대의 이익”도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한 번 더 살펴보겠지만 이익법학에서는 – 적어도 필립 헥이 부여한 의미에 의하면 – 목적론적 해석이란 이익충돌을 법률의 기준, 가치, 우월성에 근거하여 방법론적으로 해소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확장하여 보아도 목적론적 해석의 이념은 보충이 필요한 것으로 남는다. “목적”이 언제나 해석의 궁극적 원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마지못해 이념과 권력을 목적이라 생각하고 공식화한다면, 이들 또한 법규범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윤리적 원칙(책임에 대하여는 보상(報償)을!), 정의와 평등의 요청, 정치적 세계관의 주장,138) 폭력과 증오 같은 비이성적 권력 등을 고려한다. 바로 대상장물죄의 처벌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도덕적 관점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았다. 아무튼 목적론적 해석의 개념만으로는 너무 좁다는 생각이다. 이 때문에 목적론적 해석에 갈음하여 “인과적” 법사상이 주장되기도 하였다.139) “원인을 찾아 해석하는 것”이 아마도 “목적을 찾아 해석”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이므로 더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입법사를 통한 해석에 관하여서도 몇 마디 언급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현재에서 역사적 원인을 찾아 나서는 것이므로 관점의 폭은 넓을 수밖에 없다.140) 이는 다른 법률과 관습법에서 초안(草案)이나 원형을 찾아 규정을 해석하려는 시도만은 아니고, 법률 조항의 정치적, 경제적, 세계사적 원인을 밝히려는 것만도 아니며,141) 다분히 우연한 “법률 원인(occasio legis)”을 찾아내는 것만도 더욱 아니다. 빈트샤이트(아래 191쪽 참조)와 같은 “주관주의자”도 “얻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가능한 한 완전히 입법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입법자에게 현존하였던 것으로 인정될 만한, 법률의 제정 당시 존재하였던 법적 상태”를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142) 특별히 입법자에게 존재하였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면 목적론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은 한 가지가 된다. 이외에도 법률조항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 정신사적 배경과 전통적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예컨대, 기본법 제103조에 규정되어 있는, 앞서 여러 번 언급하였던 죄형법정주의란 기본원칙도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 그 역사적 연원을 되돌아 볼 때에만 올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민법의 채권법은 로마법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하여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고, 물권법은 상당 부분 게르만법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하여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또한, 간통죄와 같이 개개의 개념들 역시 거기에 맞추어 해석되어야 할 나름대로의 전통적 모양을 갖추고 있다. 물론, 빈트샤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입법자의 역사적 동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의회입법에 있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이에 관하여는 뒷부분 참조!).

처음 장물죄의 예를 들어 설명한 다음 그 일반적 의미로 전개된 해석방법론에 관하여 우리는 이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언급할 수는 없고 그 의사도 없다. 쯔바이게르트는 우리 법학의 해석방법론에 있어 흠은 여러 해석방법론 가운데 “확실한 우열”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정당하다.143) 사비그니는, 문리적, 논리적, 역사적, 체계적 요소는 “사람이 자기 기호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네 가지 해석방법론이 아니라, 해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공통의 효과를 지향하는 여러 방법론들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는바,144) 이는 교묘한 방법으로 문제를 덮은 것이다. 우리는 여러 방법론의 결과들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 예컨대 어의와 체계적 관련성이나 입법의 연혁이 서로 다른 결과로 해석되는 경우를 예상해야만 한다. 개개의 사안에서 어떤 해석방법론을 끌어들인다거나 우선시킴에 있어 자의가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쇼이얼레(Scheuerle)는 “실제 사안에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 해석론이 제공하는 모든 방법론을 마음껏 이용하는 것이 바로 해석의 중추적 기능이다”라고 하였는바, 이는 법원의 실무에서 충분히 고려될 수 있을 만한 절차, 말하자면 구체적 사안마다 만족할 만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해석방법론을 선택하는 그러한 절차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145) 우리는 여기서 판결을 법감정에 충실한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임의로 생각하여 근거시켜야 한다는 자유법론자(물론 최근의 이사이)의 주장을 새삼 검토해보아야 한다.

사실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여러 해석방법론들 가운데 우열을 확정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 예컨대, 판덱텐 학자인 빈트샤이트와 레겔스버거(Regelsberger) – 어의(語義)에 우선을 두어왔다. “분명하고 명백한” 어의에 반한 시도로서의 해석은 더 이상 “해석”이라 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바로 어의를 우선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단지 “다의적인” 어의의 경우에만 그것도 부수적으로만 다른 해석방법론이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146) 소위 “해석론(Andeutungsthorie)”은 어의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해석의 한계로서 어의의 의미를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해석에 의하여 탐구된 의미는 여전히 법률의 “문언”과 일치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법률에 “표현되어 있어야” 한다.147) 이는 죄형법정주의의 기본원칙과 관련하여 특히 형법에서 통설적으로 주장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심야에 악의적으로 전화를 거는 행위는 어의에 의하면 “주거에의 침입”이 아니기 때문에 형법 제123조 소정의 주거침입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대부분의 민법학자들은 어의를 벗어나는 것은 더 이상 해석이 아니라 유추라고 생각한다.148) 물론, 목적법학과 이익법학이 득세하면서 목적론적 방법론이 “자구해석”에 우선하여 보다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고래로부터 알려져 있는 “법이 의미를 상실하면 법 자체가 효력을 상실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법률의 목적과 동기가 어의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매우 다양한 문언의 한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언의 엄격한 틀을 벗어나거나 또는 상당히 포괄적인 법률이해의 한계 안에서 “이성”이 관철되었다.149)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이를 확장(확대) 또는 축소(제한) 해석이라 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람들 중에는 매우 다양하게 주장된 소위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이란 테두리 안에서 보다 조심스럽게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는 “문언”이 다의적인 경우에만, 그리고 또 처음부터 협의의 또는 광의의 해석이 허용되는 경우에만, 해석의 대상이 된 조항이 헌법과 그 원리에 합치하는 결론에 이르도록 어의에 맞는 판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다의적 어의가 기본전제이긴 하여도, “문리적” 해석에 의하여 법률에서 직접 얻어지는 어의에 반하여 해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는 결과적으로 앞서 164쪽에서 언급하였던 “법규의 전체 법질서와의 의미관련성”이 체계적 해석으로 고려되어 순수 “문리적 해석”에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 해결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 경우 위 의미관련성은 헌법의 우월적 지위와 독점 배타적 효력에서 그 무기를 가져온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150)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해석방법론의 우열관계에 관하여 철두철미하게 다룰 필요는 없으나(이에 관하여는 171쪽 주 43 참조), 그중 하나인 역사적 해석에 관하여는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점이 있다. 한쪽에서는 해석방법론 사이에 확실한 관계를 정하기 위한 노력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위한 모든 것이 해석론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확실한 이론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므로 무의미하다고 집어치우는 부분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해석방법론에 대하여 그에 알맞은 권한과 특정한 논리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하여서는 보다 심오한 이론이 필요하다.151) 이러한 이론을 우리는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전통적 해석방법론으로는 – 대상장물죄의 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 결론에 있어 다소간 모호한 부분이 남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만이 우리에게 한층 더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 다른 방식의 논의라야 기본을 심도 있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해석의 유형과 방법을 음미해보았다. 우리는 의심스러운 법적 문제(대상장물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리적, 체계적, 목적론적, 역사적 해석을 우선 알아보았다. 그러나 범위를 국한할 필요는 없다. 엄격한 이론을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법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 입장에서 법조항을 이해하는데 유익한 점을 일깨우기 위하여서도 법률가는 해석을 함에 있어 단순히 실무가의 관심을 벗어나 순수한 정신과학에서 이해란 무엇인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법률적 일상생활에서 “해석”이라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고차원적 의미에서 진정하고 절대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는바, 이 경우 우리는 철학적 또는 문화역사적 또는 정치적 입지에까지 이를 필요가 있다.152)

이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논의의 핵심으로 들어왔다.

 

제5장 법규의 해석과 이해, 입법자 또는 법률?

근대 철학에서는 “이해(Verstehen)”의 개념을 다양하게 구별한다. 표현된 내용의 의미를 파악하는 진정한 “의미이해”와 표현자의 동기를 이해하려는 “동기이해”를 구별한다(찜멜, 막스 베버153) 등등). 비슷한 방식으로 야스퍼스는 관념된 내용의 “정신적 이해”와 동기에 의한 “심리적 이해”를 구별한다.154) 표현된 개성과의 정신적 만남을 이해의 궁극적 목표로 간주하기도 한다(로타커, 볼노프155)). 물론, 야스퍼스는 정신적, 심리적 이해를 넘어 실존적, 형이상학적 이해의 개념을 인정하고,156) 볼노프 또한 “실존과 실존과의” 교감에 관하여 언급하기도 한다.157) 여기서는 이해를 수단으로 하여 물적인 것에서 인적인 것에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에로 도달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딜타이는 “영구히 고착된 삶의 표현” 그 자체, 특히 문자로 표현된 유물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상위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문자로 남겨진 인간 실존의 해석과 설명이 이해의 기법에서 가장 중심”으로 부각한다. 여기서는 문헌학이 기초이자 이해의 가장 중요한 기법이다.158) 그러나 뵈크흐는 그의 “엔찌클로패디아(Enziklopädia)”에서 문헌적 이해를 흔히 인용되는 표현으로 “인식된 것의 인식”(보다 정확히 말해 “인간 정신에 의한 산물, 즉 인식된 것의 인식”)으로 묘사하고 있다.159) 딜타이가 “정신이 만들어낸 것만 이해한다”고 말한 그대로이다.160) 이를 근거로 문헌적 해석이 경험적 방법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라드부르흐는 그의 법철학에서 “문헌적 해석이란 주관적으로 관념된 의미, 현실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관념한 사상 등 구체적 사실의 확인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161) 그러나 나아가 그는, 근대문학에서는 위와 같은 문헌적 해석에서 점점 벗어나서 “문학작품의 객관적으로 타당한 의미탐구”에 주력하여, 칸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 다소 훈육적인 – 학풍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작가 스스로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작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162) 이러한 보다 나은 이해에 관하여 위대한 시인들 역시 때론 회화적으로, 때론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폭풍(Sturm)”에서 곤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의도한 것보다 더 진실 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바스챤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대들은 내가 그대들에게서 기대하는 것보다 더 현명하게 나의 말을 이해하였다.”163) 괴테의 “짜멘 크세니언(Zahmen Xenien)”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행시(二行時)가 알려져 있다. “해석은 언제나 신선하고 활기 넘쳐! 그대들이 해석하지 않아도 다른 뜻으로 해석된다.”164) 앙드레 지드는 늪지(Paludes)란 작품에서 아주 훌륭하게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책을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것을 설명해주길 기대한다. 나의 책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책의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것을 우리가 말했는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이것(DAS)이란 것 이상을 말한다. 내가 이것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것은 내가 깨닫지 못하고 부여하였던 것이고, 내가 신의 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무의식의 부분인 것이다. 책은 작가의 부분이 작으면 작을수록, 신을 맞이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값어치가 크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고, 대중으로부터 우리 작품이 낱낱이 전달되길 기대한다.”165) 마찬가지로 우리는 T. S. 엘리엇에게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읽을 수 있다. “‘영감(Inspiration)’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166)

이제 우리는 법률적 해석과 법률적 이해를 이러한 정신적 영역에서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우선 법사학자와 법이론가의 목적을 구별해야 한다. 법사학자에게는 연구를 통해 법원(法源)의 의미내용을 뛰어넘어 법률과 법관습의 동기에 도달하고(동기이해), 경우에 따라서는 법형성 작업에 관여한 인격체와 정신력의 실체를 설명하고(“인성이해” 등), 궁극적으로는 법이 생성된 모든 역사적 상황을 밝혀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법사적(法史的) 이해의 본질적 모습에 해당하고, 반면 라드부르흐가 “객관적 의미의 동기연구”, “작품을 통한 집단적 정신사”로서 파악하고, 처음 헤겔에 의해 – 사상체계를 그 “사물적 관련구조” 하에서 발전시키고, 그 역사적 산물을 하나의 논리적 과정으로 이해하며, 하나의 정신적 소산인 것처럼 객관적 정신의 과정을 명백히 파악하려고 함으로써167) – 선재(先在)한다고 관념된 것은 진정한 역사적 이해라기보다는 역사철학적 “의미이해(Deutung)”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법사학자가 법원(法源), 특히 법률을 대하는 것은 정치사가(政治史家)가 정치문서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엠스(Ems)의 우편속달물(역자 주: 1870년 프로이센왕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보낸 전보, 보불전쟁의 발단이 됨)이란 역사적 문서를 하나의 사례로 든다면,168) 역사가는 이 문서에서 “국왕 폐하께서는 더 이상 프랑스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당직 부관을 통하여 그에게 더 이상 전할 게 없음을 말씀하셨다”라는 문장으로부터 비스마르크가 생각하고 의도한 의미를 우선 새기려고 한다. 이 경우 역사가는 아베켄(Abeken)이 엠스에서 베를린으로 우편속달물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조사하여 위 문서의 의미와 원래 문서의 의미를 비교하고, 그렇게 하여 어떤 부분이 빠지고 어떤 부분이 변경되어 “제안 수용의 신호(Chamade)”가 “전쟁의 신호(Fanfare)”로 바뀌었는지를 인식하려고 한다(“위조”라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이고 부당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알려진 대로의 우편속달물을 그 역사적 관계에서 분석하고, 그것을 유럽문제에서 프랑스 정부를 외교적으로 굴복시킬 목적으로 계산된 (프랑스 정부의) 어떤 요구에 대한 회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적 이해는 또한 표현된 것으로부터 분명히 어떤 반응의 기대를 포함한다. 나아가 비스마르크 행위의 동기, 그의 인격에 대한 심리적 이해, 비스마르크 자신이 생각한 것과 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한 역사적 상황,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란 단순한 의미로 이해된 “시대정신”의 연구에로 이른다.

법률의 역사적 이해도 사실상 관념 되고 의도된 의미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최근의 역사적 관계를 해명하고, “동기”를 규명하고, 입법자의 목적을 문제시하고, 마지막으로 법률적 발전의 전 역사적 기반과 정신적 상황을 탐구하는 등으로 이와 동일 또는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실제 빈트샤이드는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참작하여 가능한 한 완전한 입법자의 정신 속에서 이해하라”고 해석자에게 지시할 수 있었다(Pandekten § 21).

그러나 동일한 처방을 법이론가에게도 내릴 수 있는 것인가?169) 법이론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법률 그 자체의 실질적 내용이고, 이 경우 우선은 법률의 실천적 효력, 법개념과 법규의 내용과 범위, 그 다음으로는 법률의 정치, 윤리, 문화적 의미 등이 문제된다. 모든 역사적 요인은 이러한 실질적 내용의 하위에 종속되고 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법률의 역사적, 문헌학(文獻學)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고, 법률적 해석의 목적은 오로지 “법규의 객관적으로 타당한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오히려, 법률 해석론의 중심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법률의 실질적 내용, 그와 함께 “해석의 궁극적 목표”가 일회적(一回的)인 과거의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를 통해 법이론가가 –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를 위해서 – 법사학자의 업적을 쫓아 나가는 방식으로 결정되고 확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법률의 실질적 내용은 그 자체와 그 “문자” 속에서 “법률의 의사”로서, 객관적 의미로서, 역사적 입법자의 “주관적” 관념 및 의사와는 무관하게, “객관적” 정신에 속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경우에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전개될 능력을 갖춘 그런 것인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법률적 해석론은 오늘날까지도 – 간략하게 불러 주관주의 이론과 객관주의 이론으로 – 논쟁을 벌이고 있다.

논쟁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견해의 대립에 관하여 과거에는 주관주의 이론이 통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관주의자로는, 사비그니(해석이란 “입법자의 관점에 입각한 사상 속에 이입되어 그의 활동을 기술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213쪽), 빈트샤이드(해석이란 “입법자가 그가 사용한 언어를 가지고 결합시킨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해석은 “가능한 한 완전한 입법자의 정신 속에 이입되어 생각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 21),170) 레겔스버거(“법률은 입법자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고, 법률의 내용은 입법자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의사, 즉 입법자의 의사인 것이다”; 143쪽), 에네케루스(“법률로 표현된 입법자의 의사가 법규이다”; Enneccerus/Nipperdey, I 1, § 54 II), 비어링(VI, 230쪽 이하),171) 헥(“법률해석의 정당한 방법은 역사적 명령과 이익의 탐구이다”; Gesetzesauslegung, 59쪽), 베링(법률가는 “법률을 제정한, 경험상 구체적 인간이 가졌던 가치관념, 즉 고전적 해석론의 의미에서 ‘입법자의 의사’를 추구하는 것이다”),172) 슈탐러,173) 페트라쉐크(§ 30), 그리고 나비아스키 174)등이 있다. 그러나 수 십 년 전부터는 이른바 객관주의 이론이 완전히 전면에 등장하였고, 그것도 특히 입헌주의 및 민주주의와 눈에 띌 정도로 나란히 등장하였다. 민족사회주의 하에서는 “지도자 원리”가 주관주의 해석론을 정당화한 것으로 보는 한 약간의 후퇴도 있었다.175) 이미 전세기 말 빈딩, 바흐, 콜러와 같은 위대한 법률가들이 벌써 객관주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오늘날 객관주의 이론은 – 비록 다양하게 전개되고는 있지만 – 완전히 통설이 되었다.176) 고작해야 바톨로메직, 담과 라렌쯔 같은 학자에게서 중도적 입장이 발견된다.177) 우리는 이제 객관주의 이론의 대표자 한, 두 명을 특별히 부각시킬 의도는 없고, 이 이론의 기본적 사상을 독자에게 설명하고자 한다.178)

입법행위와 함께 법률은 그 제정자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 존재로 고양된다는 것이 객관주의자들의 설명이다. 제정자는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자기가 만든 작품의 뒤로 퇴장한다. 작품은 다름 아닌 법전이고, 이는 법률의 “언어로 표현된 의사”, “법률언어의 잠재적이고도 실재적인 사상내용”인 것이다. 이 법률에 내재한 사상과 의사의 내용만이 장래 준거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합헌적으로 현실화되었고 법규화된 것이며, 반면 법률제정자의 그 주변 관념이나 기대는 어떠한 구속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입법행위에 참여한 사람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법률에 복종하게 된다. 입법자는 자기의 의사를 법률언어로 표현하고, 이렇게 법률로 표현된 의사를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당하고 효력을 갖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법률에 합체된 의미는 – 법률에 대하여 의결권을 갖는 의회 의원들의 입장을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을 일반인이 생각하였다면, – 입법자가 법률을 제정할 때 생각하였던 것 이상의 의미일 수도 있다. 법률 자체와 법률의 내용은 역사상의 모든 과거처럼 정지된 것이 아니라(“과거는 항상 정지되어 있다”), 활동적이고 가변적이며, 따라서 현실에 대하여 적응력을 지니고 있다. 법률의 의미는 법률이 전체 법질서의 구성요소이고 법질서의 통일성을 근거로 끊임없는 변화에 직면하므로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새로 개정되는 조항의 의미가 낡은 조항에 효력을 미쳐 낡은 조항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전체 법질서의 변화가 기존의 법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생활의 조류가 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도덕적 현상이 기존의 법규에 근거하여 법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법은 역사적 입법자가 전혀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현상과 상황에 대처하도록 강요받으면서 이러한 현상과 상황을 극복해간다. “법은 제정되자마자 사회의 흐름 속에 편입되어 그때부터 내용적으로 변화되어 간다.”179)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법률에 대하여 역사적 입법자가 이해하였던 것보다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현재 부닥친 문제를 위해 수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한 입법자의 정신 속에서 그 입장을 새겨 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수는 없다. 해석은 미래에 대한 것이지(interpretatio ex nunc) 과거에 소급하는 것은 아니다(nicht interpretatio ex tunc). 법률이 제정되고 우리가 법률에 의하여 규제되어야 할 여기,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법률로부터 이성적이고, 합목적적이고 타당한 것을 끌어내야 한다.180) 현실에 가깝고 시대에 부합하는 해석이야말로 법학의 과제인 것이다. 시야를 과거로 돌릴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법적용자를 입법자에 복종하는 봉사자 정도로 치부한다면, 이는 법적용자를 비하(卑下)시키는 것이다(소위 주관주의자인 헥은 “생각이 있는 복종(das denkende Gehorsam)”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우선 법관은 국가에 있어 “제3 권력”의 담당주체로서 입법자와 동등한 권한이 있다. 법관은 객관주의적 해석을 통해 법률을 그 자체로서 타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성을 지켜나간다. 결론적으로, 입법자의 “개인적” 의사가 “역사적” 해석의 이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할 때, 오늘날 입법자가 갖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현대국가에 있어 입법자는 다수의 인격과 다수의 의사합치로 구성된 무형의 존재이다.”181) 그러나 법률의 의미는 독자적이고, 자기모순이 없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객관주의자들의 주장은 대충 위와 같이 비슷하다. 라드부르흐(Radbruch)가 가장 주목할 정도로 그 주장을 요약한 바 있다. 우화, 마술, 수사학, 스콜라 철학, 종교 수식어, “성서주의”, 현대문학 등에서 객관적 해석의 유사성을 지적한 사람도 라드부르흐였다.

그렇다고 하여, 해석론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객관주의에 대하여는 이미 헥에 의해 거론된 무시 못 할 반론이 존재한다. 헥은 무엇보다도 객관론의 핵심이자 항상 되풀이 되어온 4가지 주장, 다시 말해 “의사론”(의사능력이 있는 입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론”(오로지 법률의 형태를 구비한 의사표현만이 법적 효력을 갖는다), “신뢰론”(수범자, 법복종자는 표현 그 자체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보충론”(오로지 객관적 해석만이 법의 보충과 형성의 실익에 적합하다)을 공격의 도마 위에 올렸다. 여기서 그 논쟁을 상세히 다룰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객관론의 주장에 대한 주관론의 반박으로 헥과 몇몇 다른 학자를 지적해두기로만 한다.182) 내 개인적으로 보아 문제해결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관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치기로 한다.

우선 비유와 비교법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라드부르흐는 문헌적 해석에서 법률적 해석에 이르는 과정을 선박에 비유하여, “출발직후에는 도선사(導船士)의 안내에 의해 예정된 항로를 진행하지만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이르러서는 선장의 지시에 따라 독자적 항로를 개척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183) 사람들은 또한 입법자와 법률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비유하여, 처음에는 가정에서 부모의 정신 속에 안주하였다가 점점 독립하여 자기의 생각과 결심으로 부모와 대립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유는 비록 설득력은 있을 수 있으나 확신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다른 학문과의 비교법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문학이 근자에 문헌적 해석을 뛰어넘어 “작품의 객관적 타당한 의미의 탐구”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비록 정신과학에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긴 하나, 이러한 사실은 사람이 인간 정신세계에 있어 보편타당한 법칙을 믿는 경우에만 다른 학문에서도 확신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논리적으로 신중한 사람은 개별 정신과학의 해석방법론을 검토한 뒤 보편적 법칙성이 분명한 것인지를 음미할 것이다. 신을 상실한 우리시대에 있어 아직 영적인 징표를 보여주는 문학이나 예술작품과 감정이 없고 현실지향적 작업의 산물인 법규와 사이에는 아마도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184) 따라서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 아주 문제가 없거나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법률의 영역에서보다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하는 해석이 허용될 여지가 있다. 정신세계의 다른 영역을 둘러봄으로써 “해석”이란 개념이 본래 주관적, 역사적 해석에 고착된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해석”이란 언어나 다른 상징에 의해 표현된 개인적 사상을 이를테면 “본질부합적으로” 밝혀내는 것이고, 사상의 원소유자로부터 독립된 의미파악은 본래의 뜻과는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언어에 편승하여 자기 유리한 대로 재인식하게 되는 “자기 고유한 정신”의 의미관여 내지 의미형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다른 학문을 둘러봄으로써 알게 되는 바와 같이, “해석”이란 단어나 개념은 주관적, 역사적 해석과 함께 객관적 해석을 포함할 만큼 관대하다. 따라서 해석이란 단어와 개념 및 본질이 우리의 문제에 궁극적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해석론의 논쟁에 있어서도 무엇을 선험적으로 분명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당한 해석방법론, 다시 말해 해석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물음이 전적으로 주관주의론 또는 객관주의론의 관점에서 해결될 수는 없고, 오히려 해석방법론은 부과된 그 구체적 과제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법에 관련하여 말한다면, 이는 정당한 방법론이란 해석의 법률적 기능, 해석자의 법률과의 구체적 관계, 경우에 따라서는 법질서의 구조 및 실정법의 조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믈러(Somló)는 “법해석의 기본이론”과 “법해석에 관한 법규정의 내용”을 구분하고 있다.185) “어떤 특정한 법적 내용도 해석의 필요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원칙(해석금지 불능의 원칙)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선험적으로 타당하고, 이에 반하여 후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소믈러는 바로 주관주의론과 객관주의론의 대립의 문제를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열거하여 이를 실정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사람들은 이러한 보편적인 법률적 해석규정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법사상사를 통해 입법에 대해 너무 순진한 사고의 유물 정도로 알게 된 무의미한 “해석금지”(정확하게는 주석금지)의 형식에서는 그 효과도 미미하다.186) 해석자는 입법자의 의사에 엄격히 구속되어야 한다고 어떤 법률적 해석규정이 정하고 있다면, 이는 타당하고 의미 있는 규정이긴 하나, 입법자의 진정한 의도를 이유로 또는 그 명백한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객관주의 해석론이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반대로, 해석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객관적 의미를 조사해야 한다고 어떤 해석규정이 정하고 있다 하여도, 사람들은 역사적 입법자의 의도를 조사해보아야 객관적 의미를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이유에서 역사적 입법자의 의도가 조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법률적 해석규정 자체가 해석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그 해석규정을 해석하는데 스스로의 해석규정을 다시 적용해야 하는지? 여기서 자기모순187)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입법자가 스스로 객관적 해석원칙을 지지하여 자신의 의사가 구속력을 갖지 않기를 원한다고 정한다면 어떤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론 사이의 논쟁은 법률적 해석규정 자체를 해석하는 데서부터 생긴다. 예컨대 1934. 10. 16. 조세조정법(Steueranpassungsgesetz) 제1조와 관련하여 이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조항은 “조세법은 민족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객관주의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도자원리도 민족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속하는 것이고, 이 지도자원리란 것이 주관주의적 해석방법론을 지향하였으므로(법률이란 “지도자의 의사”이다), 주관주의적 해석론이 조세조정법 제1조의 법률적 해석규정에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위 규정의 일반화가 가능한지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위 규정이 오로지 조세법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법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 추상적인 법률의 해석규정 못지않게, 사람들이 법률해석이라 하는 “유권 해석(authentische Interpretationen)”이란 것도 해석문제의 해결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는 해석으로 밝혀야 하는 구체적 규정을 위하여서만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법률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법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그 자체가 다시금 학문적 해석의
상이 될 뿐이다.”188)

법률적 해석규정이 우리에게 있어 별 의미가 없고, 한편으로 선험적 원칙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여도, 이미 언급한 해석의 법률적 기능은 정당한 해석방법론의 규준으로서 여전히 타당하다. 순수 학문적으로 지향된 해석은 모든 방법론을 이용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법이론가는 원한다면 순수 역사가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고, 여러 객관적 관점에서 법전의 가능한 내용을 묻고 “이성적”, “합목적적”, “현실부합적” 의미내용에서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고 무엇을 가르치는지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이든 객관적인 것이든 이러한 의미내용이 실무상 법적용에서 얼마나 구속력을 갖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189) 실무가와 실무에 봉사하는 이론가에게 중요한 이러한 문제는 국가권력의 관계, 한편에서는 입법, 다른 한편에서는 사법의 기능을 고려하고, 특히 사법이 법률에 대하여 가지거나 가져야 할 지위를 고려함으로써만 대답되어질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법관에 대하여서만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법관이 한 국가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법률과의 관계가 어떻게 규율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190) 절대군주에 봉사하는 자로서 법률을 다루는 법관이라면, 군주의 의사가 곧 법이므로, 법관은 “주권자인 군주의 개인적 의사를 추구해야” 하고, 따라서 주관주의 방법론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여러 번 고찰한 바 있다.191) 민족 사회주의적 나치 국가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대변되었다. 삼권분립(三權分立)과 복수정당제 하의 합헌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국가에서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192) “일반적 헌법상황이 해석학적 법률이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분명히 옳다.193) 심지어 혁명 이후에 해석방법론이 신법에 대한 것과 구법에 대한 것으로 이분화(二分化)되는 현실도 상상할 수 있다. 구법은 상황에 따라 객관적 방법론에 의해 혁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환경에 적합하도록 적용되고, 반면 신법은 권력을 장악한 혁명주의적 입법자의 의사에 완전히 일치되게 해석된다.194) 그러나 사안을 너무 그리 간단하게 두어서도 안 되고, 의회민주주의 헌법제도 하에서는 객관적 해석방법론이 유일한 방법론이라고 단순하게 주장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 조차도 의사결정적이고 정치결단적인 입법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입법자의 의사를 따라야 하고, 입법자가 국가 전체를 통합하여 세운 지시를 따라야 하는 국가의 다른 권력에게, 남용과 “분열”의 위험성이 내포된 너무 많은 독자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95) 객관주의적 해석론은 국민대표의 의사만이 정당한 법률적 형식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구속력이 있는 의사란 파악할 수 있는 실체가 못된다고 하는 소위 의사론과 형식론적 결합에 의한 비판을 무엇보다도 과소평가 한다.196) 나도 객관주의 해석론의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긴 하나, 국민대표란 법률을 심의하고 표결하면서 어떤 특별하고 독자적인 의미를 법규로서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법률제정자가 애초 그들이 작업한 법전에 대하여 부여하고, (법률제정의) “위임과정”에서 공표된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소위 “계약설”),197) 비난이 분분한 견해와 더불어 이를 지지한다. 나는 여기서 “텍스트의 문제(Materialienproblem)”를 깊게 다루지는 않겠다.198) 그러나 텍스트는 법률이 아니라는 흔히 듣게 되는 반론은 나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텍스트는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 생각되었던 것들을 인식하는데 확실한 참고 자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 주관론을 관철한다고 하여도 이것은 텍스트와 그 성립과정의 확실한 이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역사적 입법자는 확고부동하고 다만 법률에서의 표현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우리는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를 무시하여도 괜찮은 것인지?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가 파악될 수 없는 경우에는 벌써 “합리적” 의미가 등장하게 되고,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의심스러울 때는 그러한 합리적 의미가 역사적 입법자에 의해 의욕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금방 주관론이 참된 이론이 아니라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모든 진정한 다른 근본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시대에 부합하는 판단을 위하여 언제나 새로운 요구에 직면한다.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로부터 독립하여, 법전을 현실에 가깝고, 합리적이며, 목적에 적합한 의미가 되도록 법관이 보충하는 것을 정당하게 하는 관습법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될 수도 있다. 우리 “입문서”는 어떤 확정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을 과제로 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이 있는 방향을 그저 제시할 뿐이다.199)

우리는 이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해석론 사이의 논쟁에 관한 논의를 그만하고, 몇 가지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1.) 우리는 우선 앞장 끝 부분에서 분명해진 바 있고, 이 장의 논의의 시발이 되었던 논점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여보자. 우리는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이해, 본질적으로 관념되고 의욕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적 해석, 그리고 현실에 가까운 의미전개 등을 어떻게 올바른 관계 속에 가져올 수 있는가를 간략하게 제시하였다고 믿는다. 또한, 본래의 해석목적에 관한 이론적 논쟁 속에서 분명한 근거가 있는 입장만이 전통적 해석방법론(문법적 해석, 체계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과 함께 성과 있는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도 분명해졌을 것이다.200) 우리가 다시 한 번 장물의 대상취득죄에 관한 좋은 예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앞에서 기술한 방법론에 해석목표의 역사적 규정이나 객관적 규정 중 하나를 선택하여 합성함으로써 확실한 판단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보다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의 모든 단계, 다시 말해 문법적, 논리체계적, 목적론적 해석의 단계에서 형법 제259조가 장물의 대상취득죄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하여서는, 기본적으로 제259조를 입법한 “입법자의 의사”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법률 자체의 의사”가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 한, 문제는 모호하고 미해결로 남는다. 이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양자택일, 즉 입법자 또는 법률의 선택에 직면한다. 입법자가 그의 표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아니면 법률의 문언은 그 자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논리체계적 관계란 입법자의 목적에 의하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니면 법률 자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역사적 법률가는 어떤 목적을 추구하였는지, 아니면 법률에는 어떤 목적이 내재하는지? 자가당착으로 들리지 모르지만, “연혁”이란 것조차도 사람들은 이를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조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률자료를 입법자의 현실적 사상과 목적을 입증하는 방법으로서만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의미 있는 역사적 구성의 근거로 이용하면서, 객관적인 “이해”를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특정한 해석론을 결정하는 순간 어의(語義), 체계적 관계 및 목적에 관한 문제 또한 보다 확실한 형상을 갖는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 문제가 그 자체만으로는 항상 다의적이라 한다면, 어의나 관계 또는 목적의 배후에 역사적인 개인의사를 조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실에 가까운 합리적 판단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우리가 안다 할 경우 모양은 달라진다. 그 해답을 위하여서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고 의혹이 남는다 하여도, 문제는 분명하게 제기되었고, 해답의 방법론도 분명해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석목표와 해석과정을 하나로 통합하여, 주관적 문법적, 또는 주관적 목적론적, 또는 객관적 목적론적 해석방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201)

2.) 돌이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는 혼자만으로는 완전하게 해석과 이해의 방법론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예컨대, 내가 주관주의적 관점에 선다고 하여도,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역사적 입법자의 주관적인 “명령내용”(입법자는 어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를 고려하고 있는지?), 그의 “목적”(입법자는 그가 정한 규정에 의해 적게는 어떤 효과를, 많게는 어떤 효과를 목표로 하는지?)202) 및 그의 전체적 관념(입법자는 어떤 이념과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지?) 중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는 항상 남는다. 객관주의적 관점을 취하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객관론에서는 법률에 객관적으로 내재하는 의미를 구체화시킨 기준으로서 목표와 관점에 관하여 진지한 고려가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합리적이고, 정당하고, 합목적적이고, 시대에 부합하고,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법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아는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법률의 올바른 이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판단과 그를 뒷받침하는 실질적 근거에 관하여 먼저 개념을 잡고, 준비한 경우에만, 우리는 이러한 판단이 어느 정도 잠재적 의미로서 법률문언에 “내재”하는지의 문제를 법률과 함께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법규정의 실체에 관한 견해가 근대에 들어와서는 다양하고 심도 있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유용하고 치밀한 연구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가 객관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가정할 경우, 장물의 대상취득죄의 예에서 과거에는 “가벌적 행위에 의해 취득한”이란 문언이 언어의 관용례에 따르면 무엇을 관념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물취득죄에서 어떤 법익과 이익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문헌적 법학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에 있어 목적론적 법학, 다시 말해 이익보호를 중심으로 한 법학마저 극복해왔다. 법 일반, 특히 형법은 우리에게 단순히 이익을 보장하고, 이익갈등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사상을 지닌 것으로 존재한다. 위증, 음행매개와 장물의 죄 등에서 법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은 명확하게 규정된 “보호가치 있는 이익”이 침해되었다는 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범죄에 의해 법이 보장하도록 부과된 도덕질서가 훼손되었다는 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H.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범죄는 법익침해이나, 이점을 넘어 도덕질서의 참을 수 없는 침해이기도 하다.”203) 한동안 사람들은 형법에서 단순한 이익침해를 넘어 가벌적 행위의 실질적 불법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규범적 행위전형(normativer Tätertyp)”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물론이고, 형법의 입법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범죄의 구성요건에 있어서는 범죄행위와 그 배후에 있는 행위자의 유형 및 의도 등에 관하여 많든 적든 통속적 관념이 분명하게 지배하는데, “법률적 구성요건”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관념을 고수하여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살인자”, 전형적인 “사기꾼”, 전형적인 “음행매개자” 등이 존재한다. 규범적 행위전형의 대표적 지지자인 담(Dahm)은 장물의 대상취득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법 제259조를 장물의 대상취득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은 국민적 관점에서 보아 절취된 100 마르크짜리 지폐를 교부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50 마르크짜리 지폐 두 장을 교부 받은 사람도 장물아비라는 데에 근거가 있다.”204)

비록 1945년 이후로는 이러한 “규범적 행위전형”론이 쇠퇴하긴 하였으나,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올바른 핵심, 다시 말해 범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외부적 결과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행위자의 의도 또는 아버지, 공무원 등등과 같이 특별한 신분적 의무 등의 다른 요인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자주 요구되는 예외적 상황과 반대이익에 대한 고려도, 예컨대 의학적으로 처방된 임신중절의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익형량”의 단순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사회윤리적으로 필요한 범위에서 사안을 평가하는 행위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의 본질에 관하여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객관론의 관점에서 보아 해석이 취할 방향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장물의 대상취득은 – 이익보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회윤리적 평가의 관점에서 보아 – 오늘날의 관념에 따르면 장물죄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형법 제259조의 “잠재적 어의”가 그를 포함한다는 근거에서 형사상 처벌받아야 하지 않을까? 단지 주관적, 역사적 해석의 경우에만 위와 같은 도덕적 관념이 형법 제259조를 제정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를 묻게 될 것이다. “객관적 해석”이 사법의 법률적 구속과 법적 안정성에 대하여 어떤 위험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사람들이 그 형식을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분명해진다. 이는 객관적 해석의 장점과 함께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위험이기도 하다.205)

3.) 우리는 좀 더 포괄적 관련하에서 주관주의적 해석론과 객관주의적 해석론의 대립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정리해보아야 한다. 위에서 “확장적”(확대적) 해석과 “제한적”(축소적) 해석의 개념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하였던 바 있다. 이와 같이 자주 다루어지는 개념들조차도 뜻이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최소한 서, 너 개의, 물론 부분적으로는 서로 관련된 사고방식을 구분해볼 수 있다.206)

a) 먼저 언어적 의미영역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좁은”, “엄격한”, “제한된” 의미란 말과 “먼”, “넓은”, “확대된” 의미란 말을 대립시키고 있다.207) 장물죄를 예로 들어, “위법행위로 취득한”이란 개념은 “엄격한” 의미로 본범의 위법한 행위에 의하여 직접 취득된 물건만을 뜻하고, 이에 반하여 어의를 “확대”하여 말한다면, 위와 같은 물건의 대가 또한 “위법행위로 취득한” 것으로 보게 된다. 다른 예를 들어, “‘전과자’를 공직에서 배제하도록 한 규정을 회수나 종류를 불문하고 일단 형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면, ‘좁은’ 해석이 될 것이고, 이에 반하여 아주 과거의 일도 아니고, 단순한 질서위반으로 처벌된 것도 아닌 그러한 형벌로 이해한다면, ‘넓은’ 해석이 될 것이다. 전자의 해석은 문언의 언어적 의미를 보다 좁게 유지하는 것이고, 후자의 해석은 덜 좁게 유지하는 것이다.”208) 사람들은 자주 확장해석이다 축소해석이다 하는 개념을 보다 자유롭게 가지고 다루면서, 입법자 또는 법률의 진정한 의사를 위하여 어의를 배제하는데 활용하고 있다.209) 물론 이와 함께 뒤에서 다루게 될 흠결보충, 법률정정과 해석 사이의 한계 또한 흔들리게 된다(227쪽 이하 참조).

b) 다음으로, 사람들은 위와 같은 개념의 짝에서 개별 조문이 갖는 어의와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의 관계를 생각하기도 한다. 좁은(축소적) 해석은 조문을 넓은(확장적) 해석보다는 작은 사례의 범위에 관련시킨다. 우리의 법률은 자주 “원인(Verursachung)”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조건관계”란 의미로도, “전형적 관계”란 의미로도 해석된다. 전자의 의미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아주 경미한 상처를 입혔으나 다른 복합적 요인으로 사망에 이른 경우에도 사망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반면, 후자의 의미에 따르면, 전형적으로 보아 치명적이라 할 상처만이 사망과의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후자의 해석은 전자의 해석과 관련하여 본다면, 원인이란 개념을 제한하고, 그로 인하여 전체 법조문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결과, “축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부르크하르트의 설명에 따라 앞에서 든 전과자의 예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a)에서 본 것과는 달리, 공직에서 배제되는 사람을 최근에 중하게 처벌된 전과자만으로 국한시켜 해석하면 이는 축소적 해석이라 해야 하고, 반대로 모든 전과자를 공직에서 배제한다고 해석하면 이는 확장적 해석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예를 들어, 가벌적 행위에 착수한 사람이 “행위가 아직 발각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 완성으로 인하여 생길 결과 발생을 스스로 방지한 경우”에는 형을 면제한다고 구 형법 제46조 제2항에서 규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결과 방지가 절대적으로 자의에 의할 것을 요한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적용범위를 축소하는 해석일 것이고, 반면 법률에서는 “자의성”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된 바가 없으므로 문언에 비추어 보면, 위와 같은 부가적 해석은 하나의 “확장”을 뜻할 것이다.210) 라이히 재판소는, 방화범이 책상서랍 속에 있는 종이에 심호흡을 하고 불을 놓았으나, 곧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발각될 것이 두려워 서둘러 불을 끈 사안에서, 비록 행위가 문언에 따라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경우라 하나, 제46조 제2호를 적용하지 않았다. 라이히 재판소는 이렇게 함으로써 법률에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진정한 자의성을 요건으로 보아 제46조 제2항의 적용범위를 “축소” 해석한 것이다(RGSt 38, 402).

c) 위의 b)에서 전개된 개념 대립의 설명이 순수한 언어상의 설명이 아니라 내용상의 설명이라 하여도, 만약 법률조문과 그것의 적용범위의 외형적 관계만 중시한 것이라면 이는 아직도 형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해석을 시민적 자유나 주관적 권리의 향유 또는 일반원리의 현존과 법규범과의 관계에 결부시킨다면, 축소적이다 확장적이다 하는 해석의 구별은 실질적 의미를 얻게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요컨대 “의심스러울 때는 자유에 유리하게”211) 또는 “예외는 확대되지 않는다”라는 원리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형벌권, 소유권침해, 의무부과 또는 원칙에 대하여 예외를 인정하는 것 등은 가능한 한 제한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형법, 소유권의 제한(저작권의 제한과 조세부과를 포함), 의무부과행위, 원칙에 예외를 인정하는 것 등의 규정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이 좁은, 엄격한(축소적) 해석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전과자의 개념에 대하여 a)에서 확장적이라고 한 해석은 “축소적”인 것이 된다. “음행매개자” 또는 “국민위해자(Volksschädling)”로서 너무 처벌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창된 “규범적 행위전형”론을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형적으로 “축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규범적 행위전형론에서 문언의 의미는 완화되고, a)에서 설명한 의미로 보면 확장적 해석이 있는 것이다). 반면 현재의 구분에 비추어 보면, 자유를 희생하여 국가권력을 확대하거나, 주관적 권리를 침해하거나, 예외의 확대를 통해 법원칙을 과도하게 허물어뜨리는 해석은 “확장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물의 대상취득죄를 처벌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형법 제259조의 “확장해석”이고, 반대로 가공(加工)물건의 취득을 장물죄의 구성요건에서 제외하는 것은 현재의 의미에서는 (위 b)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나, a)의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축소적” 해석이다. 구 형법 제46조 제2호에 대한 라이히 재판소의 해석은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로써 가벌성이 확대되었으므로 “확장적” 해석이라 할 수 있고, 반면 위 b)의 구분에서 보면 축소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이에 반하여 a)의 의미에서는 다시 확장적 해석이 된다). 또한, 생명 또는 신체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하여 행해진 가벌적 행위는 벌하지 못한다는 원칙이 타당하다고 할 경우(긴급피난: 형법 제35조 참조), 이러한 원칙의 확장은, 비록 긴급피난 원칙의 적용범위를 확대시키기는 하나 그것이 가벌성을 제한하는 한, 축소적 해석을 의미한다. 한편, 선원으로서 누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감당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러한 (긴급피난의) 원칙의 예외를 뜻한다(선원법 제106조, 제109조 참조). 그러나 선원법(Seemannsgesetz) 제106조, 제109조와 같은 조항을 그 조항에서 직접 언급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적용한다면, 비록 위 b)의 의미에서 형식논리적으로 보아 긴급상황을 받아들일 의무를 확대하여 형법 제35조의 긴급피난 규정의 적용범위를 제한하였다 하여 제한적 해석으로 인정될 수 있는 측면은 있으나, 이는 “예외는 확대되지 않는다”라는 원리에 반하는 것으로 확장해석을 의미한다.212) 마지막 예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적용범위”란 개념의 형식적 특성뿐만 아니라 “원칙”과 “예외”의 상대성에 관해 깨우치게 된다. 선원법의 예외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외의 예외, 다시 말해 긴급피난 행위의 예외적인 불가벌성의 예외라 할 수 있으므로, 가벌성의 원칙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미 확장적 해석과 제한적 해석에 관하여 기존의 구분을 비판하는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기존의 구분은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그 자체 의문이 있다. 법률은 언어상으로 흔히 독자의 길을 걷고 법적으로 기술적인 개념들을 사용하므로, a)에서와 같은 구분법은 어떤 어의가 본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의미인가가 불확실하여 자주 실패한다. b)에서와 같은 구분법은 너무 한 조문의 범위에 매달리므로 외형적이고 형식적이다. 여러 규정이 상호 보완관계에 있기에, 어느 한 조문을 제한하거나 확장한다는 것은 반대로 다른 조문을 확장하거나 제한하는 것이다. c)의 의미에 있어 원칙과 예외의 관계도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상대적이고, 심지어 자유의 개념조차도 경찰공무원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 사이에 이익충돌이 있는 경우 시민의 자유뿐만 아니라 공무원의 행동의 자유 또한 함께 고려되어야 하므로, 상대적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자유에 유리하게”, “의심스러울 때는 국고에 불리하게”, 또는 “예외는 확대되지 않는다”라는 원칙 등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법이론가인 부르크하르트와 나비아스키도 이점을 강조하였다.213)

d) 이러한 개념의 대립에 관하여, 지금까지는 뒷전에 밀려나 있었으나 이제부터 “입법자의 의사”와 “법률의 의사”란 개념과 함께 다루고, 또한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 아마도 올바를 것이다. 이때 법률의 문언은 입법자의 의사 또는 법률의 의사를 표현한 방법으로 이해되어 그에 따라 확대 또는 제한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여 주관주의론의 관점에서 내용을 설명해보기로 한다. 이미 사비그니(231쪽)는 확대해석과 제한해석의 구분을 오로지 “표현과 사상의 논리적 관계에만 결부시켜, 표현은 사상보다 더 적거나 더 많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지적한 바 있다. “표현이 사상보다 적게 이루어진 경우에는 확장해석을 통하여 표현을 정정할 것이고, 표현이 사상보다 많게 이루어진 경우에는 제한해석을 통하여 표현을 정정할 것이다. 다만 양자 모두 표현을 현실적인 (즉, 입법자의) 사상에 합치시키는 것일 뿐이다.” 비슷한 표현을 또 다른 주관주의자, 예컨대 빈트샤이트(§ 21), 레겔스버거(152쪽 이하), 에네케루스(Enneccerus/Nipperdey, I 1, § 57)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에네케루스는 “법률문언이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나, 드러난 모든 사정을 고려하여 아직도 법률의 의사라고 해석될 수 있는 설명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위와 같은 “정정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는 한다. 이는 해석이란 언제나 “어의”의 한계에 머물러야 하고, 또 이러한 한계에 “다다를” 수는 있어도 뛰어 넘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서는 어떠한 확장 해석도 없는 것이며 “유추”만이 존재할 뿐이다. 제한 해석에 관하여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위 219쪽 이하 참조). 예컨대, 입법자의 의사와는 다르게 “남자”에만 관련된 것으로 규정된 조문이라 하여도, 확장해석을 통하여 “여자”에게까지 관련시키고, 궁극적으로 “사람 일반”에게까지 이를 확대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214)

이제 객관주의론의 입장에서 확장해석과 제한해석의 개념은 어떤가? 객관주의론은 법전을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와는 독립된, 내재적 의미를 지닌 실체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일견 확장해석 또는 제한해석이 역할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어의가 분명하다면 객관적 정신은 결국 그것으로 명백하고, 어의가 다의적이라면 “합리적” 의미에 유리하게 판단을 내리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주의자들에게서도 “확장적” 해석이다, “제한적” 해석이다 하는 개념에 마주친다. 예컨대, 바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못된 문언에 반하여 합리적 의미를 적용하기 위하여서는 법률이 잘못 제정되었다는 점을 항상 확인해야만 한다(확장, 제한해석).”215) 객관주의적 관점에서조차도 법률이 입법자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석이 법률 자체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써 해석론을 일시적으로나마 마치기로 한다. 우리는 다소 복잡하기도 한 마지막 부분의 고찰을 통하여 이미 본래의 해석방법론의 한계라 할 수 있는 영역에까지 도달하였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확장해석 또는 축소해석이란 것이 벌써 일종의 법률의 확대 형성과 같은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우리는 유추가 그 두드러진 보기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법률에 대신하는(plaeter legem)” 법발견과 좁은 의미에 있어 법률의 “정정”을 의미하는 이른바 “법률에 반하는(contra legem)” 법발견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이와 달리 진정한 해석이란 법률신뢰의 원칙에 충실하여 “법률에 복종하는(secundum legem)” 법발견을 위한 좌표로서 기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법률을 대신하고, 법률에 반하는 법발견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법률에 복종하는 법발견에 관한 지금까지의 고찰을 중요한 부분에서 보완해야만 한다(제6장).

 

제6장 법관법.216) 불확정한 법개념, 규범적 개념, 자유재량, 일반조항

지금까지 우리는 법을 적용하고 그를 위한 해석에 있어서는 본래 인식행위, 그것도 정신과학적 구조를 지닌 인식행위가 문제인 점을 암암리에 전제하였다. 우리는 여러 사안에서 당황하고 심지어 불안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예컨대 “포섭”의 수행과정에 있어서의 불확실성, 매번 해석하느라 애를 먹은 의미의 이중성, 해석방법론의 다양함과 해석의 기초와 관련한 논쟁, 마지막으로 “확장”해석과 “제한”해석의 다의성 등에서 그랬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어려움의 난관을 극복하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원칙상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의미 있고 성공을 보장하는 일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튼 법과 법을 인식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진리탐구의 원칙 자체를 문제로 남겨두고, “그림자의 윤곽(Schattenlinien)”과도 같이 순수과학적 법인식의 한계만을 찾아 나서려는 일련의 현상들도 있다.217)

한때 엄정한 규범에 의하여 절대적 법명료성과 법확실성을 가져올 수 있고, 특히 모든 법관과 행정당국의 판단 및 행동에 절대적 명확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계몽주의 시대에 있었다. 복켈만(Bockelmann)은 1952년에 그의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법관의 법적용은 자동기계와 같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 특성상 일을 수행하는 장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자동장치인 것이다.”218) 과거 자의와 관방(官房)법학의 시대(즉, 영주의 지시에 따르던 시대) 법관이 받았던 불신과 한편으로 법률에 대한 합리주의적 숭배의 정신이 법관의 법률에의 엄격한 구속을 핵심적으로 요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지지할 수 없는 해석금지 또는 주석금지의 주장까지 나오고, 법관이 재량에 의하여 형을 정하는 행위를 박탈하자는 주장(예컨대 프랑스 1791년 단죄법(Code pénal)에서 “확정형벌(peines fixes)”의 제도) 등등이 제기되었다. 법관은 “법률의 노예”라고 일컬어졌다.219) 법관과 법률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사고는 19세기가 지나면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법률을 정확하게 제정하고 공식적 주석서에서 그 해석을 엄밀하게 하여 모든 적용상의 의문을 제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사람들은 법관의 법률에의 엄격한 구속의 요구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법률의 구속력이 영원하다는 주장은 하나의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법원이 영주의 권력으로부터 점차 자유스러워지고 “독립된” 재판기관으로서 전문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자기직분을 수행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법원이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생활을 규율하는데 필요한 판결을 보다 자유스럽게 구가할 수 있도록 법률의 속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 변화의 세세한 점을 여기서 논의할 것은 못 된다.220) 아무튼 법원과 행정관청의 법률에의 구속은 금세기 초 소위 “자유법학”이 필연적이며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던 만큼 완화되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방법론적 고찰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할 만큼 완화되어진 것은 분명하다.

사법과 행정의 합법률성의 원칙 자체는 지금도 불변의 진리이다. 우리는 행정과 사법의 법과 법률에의 기속을 규정한 기본법 제20조 제3항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법률 자체는 그 내용을 해석을 통하여 명확히 하고 법관과 행정공무원은 단순히 명확한 법률개념 속에 포섭의 행위에 의하여 법을 발견하는 그 정도로 제정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자적으로 평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법자적으로 판단하고 시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점은 장래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법률에의 기속이 많고 적음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통법(ius strictum)”에 대립하는 “형평법(ius aequum)”을 다루는 것이 되는데, 이와 같이 구속이 완화된 경우에 법적 사고는 어떠한 조작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법원과 행정관청의 법률에의 기속을 완화함에 있어 입법적 방법론이 우리가 새로이 시작할 논의의 출발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법률의 적용자에게 독자적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적 표현방식에 자주 부딪친다. 우리는 이 방식으로 불확정 법개념, 규범적 개념, 재량조항과 일반조항 등을 구분한다.221) 유감스럽게도 개념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법원의 판결과 행정행위의 법적 구제에 의한 취소가능성의 문제 등 현재 우리가 관심밖에 두어야 할 문제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여기서 완화된 법률의 여러 방식이 우리의 방법론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만 설명할 수 있고 할 것이다.

1.) “불확정 개념”222)이란 그 내용과 범위가 포괄적으로 불확실한 개념을 말한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개념은 법에 있어서는 드물다. 법에서 사용된 수의 개념(특히 양, 시간, 금전개념과 관련하여)을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이다(50Km, 24시간의 기간, 100DM). 대부분의 법개념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불확실하다.223) 이점은 예컨대 “어둠”, “밤의 정적”, “소음”, “위험”, “물건” 등과 같은 자연적 개념을 법에 받아들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살인”, “위법성”, “범죄행위”, “행정행위”, “법률행위” 등과 같이 고유한 법개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불확정 개념에 있어서는 필립 헥224)과 같이 개념의 핵과 주변을 구분할 수도 있다. 개념의 내용과 범위가 명료하다면 이는 개념의 핵에 관한 것이다. 의문이 생긴다면 이는 개념의 주변에 관한 것이다. 달빛도 불빛도 없는 밤, 자정 우리가 처한 위도 상 옥외에 어둠이 재배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이 트는 시간에는 의문을 일으킨다. 토지, 가구, 생필품이 “물건”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전력 또는 공중의 연기(광고도안용)는 다르다. 태아의 출산이 다행히 성공하여 완료하였다면 법적으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만의 고통을 시작하여) 출산 중에 있을 경우는 (단순한 “태아”로서가 아닌) “사람”이 존재하는지, 언제부터 사람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는지 문제가 그리 명백하지 않다. 이 문제는 법이 다를 때마다 대답도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민법에서는 “출산이 완료”된 후에 “권리능력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반하여 형법에서는 출산 중에 있는 경우에도(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역시 의견이 분분하다)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보아 살인 또는 과실치사의 객체로 인정된다. 그리고 불확정 개념은 법규에 있어서 소위 “구성요건”에서 뿐만 아니라 “법률효과”에서도 있을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231조 제1항이 그 한 예인데, 여기서는 공판기일에 출석한 피고인에 대하여 재판장은 퇴정하지 못하도록 “적정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2.) 대부분의 불확정 개념은 “규범적” 개념225)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기술적 개념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기술적 개념은 “사람”, “죽음”, “동침”, “어둠”, “빨간”, “속도”, “목적” 등의 개념과 같이 현실적이거나 그와 유사한,226)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거나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을 “묘사적으로” 관념한 것을 말한다. 위의 예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기술적 개념에서도 많은 불확정 개념이 존재한다. 따라서 불확정 개념이 곧 “규범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범적 개념은 대부분이 불확정적이고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의 진수를 보여주며 나아가 법률의 상대적 불구속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규범적” 개념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규범적” 개념 자체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모든 법개념이 법규범의 구성요소이고 이를 통하여서만 의미와 내용을 얻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모든 법개념이 (구성요건요소를 법률적으로 정한 한도에서) “규범적”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227) 그렇게 된다면 위에서 말한 모든 기술적 개념 또한 규범적 개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죽음”, “어둠”이라고 하는 개념도 생물학적, 신학적 또는 물리학적 개념과는 다르게 법개념으로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기술적 개념에 대비하여 규범적 개념을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법규범에 속한다는 사실, 즉 구성요건요소에 해당한다는 사실 말고 다른 특별한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속성은 모든 법개념에 공통된 것이다. 그 결과 모든 법개념의 내용과 범위가 특정한 법적 사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가치관련성”이라 불리는 그 무엇이 생긴다.) 좁은 의미에 있어 “규범적” 법개념의 특수성을 (기술적 법개념과 구분하여)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의견이 분분한데, 이는 어느 정도는 개념목적론적 관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좁은 의미의 “규범적”이란 의미에 있어 어느 한쪽을 지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규범적 개념을 기술적 개념과 대립시켜 사람이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는 없어도 규범의 세계와 관련하여 관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228) “사람”, “죽음”, “어둠”과 같은 기술적 개념은 비록 가치관련이 있고 그 내용이나 범위가 법규범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라 하여도 내가 볼 때는 경험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어느 물건이 “타인”의 소유이고 절도나 횡령 또는 재물손괴의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그것이 행위자와는 다른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써 규범체계로서 민법의 소유권에 관한 규정이 전제된다. 나는 소유권에 관련한 규범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느 물건이 “타인”의 것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혼인”, “임신”, “공무원”, “미성년의”, “음란한”, “전과 없는”, “몰염치한”, “저급한” 등과 같은 법개념도 그것이 법규범에 그 의미내용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법이든 도덕이든 아니면 다른 문화영역이든 어디서 유래하였는지 상관없이 동일한 규범관련적(단순히 가치관련적인 것과는 다르다)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위와 같은 규범적 법개념이 불확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혼인”이나 “미성년의”라 개념은 그 적용요건이 상당히 엄밀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아 확정적인 개념이다.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은 기술적 요소에 의하여 정의되어질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18세 미만된 자를 “미성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기술적 요소에 의하여 정의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 개념들에 있어 “규범적” 의미는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두 번째로 규범적 개념의 진정한 의미는 개개의 사안에서 이를 적용하는데 일정한 평가가 필요한 경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바로 좁은 의미의 규범적 개념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이 기혼자인지, 미성년자인지는 기술적 요소에 의하여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성향이 “몰염치”한지, 동기가 “저급”한지, 작품이 “음란”한지, 표현이 “신성을 조롱”하는 것인지 – 마지막과 관련하여서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군화를 신은 채로 묘사된 게오르그 그로스의 십자가 예수의 그림을 생각해보라(RGSt 64, 121) – 하는 문제는 하나의 평가를 전제로 하여서만 판단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유형의 규범적 개념을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엄청난 표현과 더불어 규범적 개념을 구체적 사안마다 평가에 의하여 규범의 양을 달리 채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평가가 법적용자 개인의 주관적 평가인지 아니면 “일반성”이나 “평균적 관점”에서의 평가인지 하는 문제는 접어둔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평가”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추고(追考)하는 것과 같은 개개인의 독자적 평가를 일컫는 것으로 해두기로 한다. 그래서 평가란 대부분 불확정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이 규범적 개념을 불확정 개념의 특별유형으로 나타나게 한다.229)

3.) 우리가 법률 구속의 완화를 위하여 사용하는 “재량조항”230)과 같이 특정한 개념유형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한 개인의 주관적 평가에 있어 “독자성”이 그 특징을 이룬다. “법관의 재량”과 행정공무원의 “행정재량”231)은 법이론에서도 가장 다양하고 어려운 개념에 속한다.232) 재량이론이 절차법에 있어서도 요점 중에 하나이기에 특히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점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233)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정관청이 한 재량판단을 법원이 사후 심사하여 수정한다거나 법원이 한 재량판단을 상급법원이 역시 사후 심사하여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사법적으로 사후 심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재량판단”이란 개념을 사용하려고도 한다.234) 그러나, 우선은 재량행위의 사후심사성이란 의미를 고려함이 없이 논리적 관점에서 그 관점이 우리에게 타당한바 의미대로 재량의 개념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소위 “통제의 층(層)”의 문제, 다시 말해 재량행위도 사법적 통제의 대상이 되는지,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때 재량의 “본질”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예컨대, 취소판단과 그 시행기관의 구조 또는 상소심의 과제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별한 절차적 논의235) 등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행정관청이나 법원의 재량판단은 그것이 법률의 한계를 일탈하지 않은 한 결과를 가지고 취소될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자유재량의 특징이 있다고 흔히 강조된다. 물론 그 한계를 일탈하면 법원이 취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재량권의 남용”이 재량행위의 흠인 것이다.236)

아무튼 우리는 재량행위와 사후심사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 그 세세한 것을 제쳐두기로 하고, “법관법”이라는 관점에서 재량행위의 논리적 구조를 설명하는데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로 한다. 그렇더라도 행정공무원과 법관의 특별한 입장과 지위를 조건으로 하고 필요로 하는 앞서 1), 2)에서 다룬 불확정개념과 규범적 개념 이외에 별도로 재량개념이라는 범주를 인정할 여지가 있는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에 필요한 재량행위의 특성에 관하여는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고전주의적 재량이론에 있어서는 본래의 (“자유”)재량이 주어진 경우에는 그 재량의 권한이 있는 사람이 갖는 개인적 견해가 규범으로서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라운(Laun)은 “행정기관에게 자유재량이 주어져있는 경우에는 그 의무에 합당한 독자적인 견해와 의사에 따라 자기 행위의 가장 가깝고도 직접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권한이 행정기관에게 있다”고 주장한다.237) 옐리네크(Jellinek)도 마찬가지로 “자유재량”의 본질을 “행정공무원이 개인적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동일한 사안을 서로 다른 공무원이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결정하여도 권리침해가 되지는 않는다. “법률에 의욕되어 있는 다의성”이 “자유재량”의 본질이다.238) 그러나 이러한 형식론의 구체적 설명에 들어서면 재량의 판단요소로는 “개인적 견해” 외에도 다른 요소가 주장되기도 한다. 폴스토프(Forsthoff)는 재량이란 “행동하고 결정하는데 있어 판단여지, 다시 말해 서로 동등한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할 여지가 있는 것을 의미하고, 이 경우 실정법은 어느 하나에도 우선권을 주고 있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고 한다.239) 여기서 개인적 견해, 선택가능성, 판단여지 등 위와 같은 재량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상호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 문제가 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결과를 목표로 하는지?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브룬스(Bruns)는 그의 “양형법”에서 선택자의 주관적 견해가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가능성(“선택권한”)을 해석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일정한 형벌의 테두리 안에서 형사법관에게 주어져있는 선택의 권한이란 올바른 두 개의 해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실질적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의 올바른 해답을 찾기 위한 표면상의 선택권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상의 선택권을 인정하면서 판단의 실질적 정당성에 관하여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240) 여기서는 불필요하게도 정당성(Richtigkeit)이란 개념이 등장하고 브룬스 자신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확정하지 않았다. “정당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여러 해답(이와 같은 의미로서 “다양성”)을 배제하는 그런 분명한 “정당성”을 말하는지? 아니면 일응의 “대표성(Vertretbarkeit)”241), 다시 말해 실질상 동등한 가치를 지닌 여러 다양한 해답의 하나로서 판단의 “여지(Spielraum)”가 있는 그런 정당성을 말하는지? 그리고 도대체 판단의 “여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러한 개념을 전제로 한다면, 재량은 서로 대립하는 판단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든(예컨대 허가․승인․인가의 교부 또는 거부, 귀화의 인가 또는 불인가, 시험의 합격 또는 불합격), 아니면 여러 판단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든(예컨대 지원한 3명의 교사 중 1명을 교원으로 임용하는 행위, 여러 부관 가운데 하나를 조건으로 급부행정을 결정하는 행위), 여러 다양한 판단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 외의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고 곧이어 자세하게 다루게 될 “판단여지(Beurteilungsspielraum)”에 있어서도 여러 다양한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재량의 특성은 우선 우리가 판단의 내부적 실체인 “선택가능성”에 주목해보면 명백해진다고 생각한다. 관점이 다양한 가능성의 개념에 대하여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상세함을 추구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현재 언급하고 있는 가능성이란 개념이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법적인 가능성을 말한다고 강조할 수 있다. 규범의 어떤 요소에서 여러 사실적인 가능한 대안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법,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법률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법적 가능성의 개념은 법 – 개개 법률 – 이 정한 목적에 의하여 그 구체적 내용을 갖는다. 사실은 법에 의하여 “권한이 부여된” 행정공무원 또는 법관이 어떤 구체적 사안에서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독자적이고 가장 적합한 판단을 이끌어 내도록 하기 위하여서만 법적인 선택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사안에서는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여야만 판단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입법자는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고 행정공무원이나 법관으로 하여금 판단을 할 권한을 위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입법자가 부여한 권한이 바로 판단의 권한위임인 것이다.

행정의 법률과 헌법에의 기속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자유재량”이란 전통적 개념을 포기하고 “법에 기속된 재량”이라 할 수도 있다. 재량은 모든 법적 기준242)에 엄밀히 부합하고, “구체적 사안에서의 여러 사정”을 주의 깊게 확인하고 고려하면서 “가장 적합한” 판단목표와 결과를 지향하도록 선택권한이 행사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속적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정당한” 판단이란 개념은 항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늘 고려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법적 규정과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고서도 남게 되는, 아주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주관적 정당화(subjektives Fürrichtighalten)”의 “여백(Restraum)”이(또한 다시금 – 협의의 –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보다도 조엘(Soell)이 “침해행정에 있어 재량”이란 개념으로 다루었던 그와 같은 기속적 재량의 개념을 말한다.243) 바호프(Bachof)가 “객관적” 정당성을 목표로 개인의 가치평가를 필요로 하되,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 “판단여지”의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이를 이해할 수도 있다. 판단여지는 판단의 재량에 더 많은 주관적 자유를 부여하는 재량위임과는 구별된다.244) 사실 이와 같은 요인이 바로 우리에게 방법론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불확정 개념, 규범적 개념과는 달리 재량에만 있는 본질적 특징인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규정이라도 그 자체 불확정성의 “일부”까지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한계 안에서 책임 있는 담당자로 하여금 그의 개인적 “견해”를 반영하게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구체적 사안에서 정당하다(합법이다, 합목적적이다, 타당하다)는 궁극적 판단을 (규정상으로는 최소한도만을 “정하여두고”) 권한담당자의 개성(특히 가치평가)에 맡기고 이를 신뢰하는 것이 바로 법과 법률이 부여한 재량인 것이다. 따라서 권한담당자가 “의무에 적합한” 권한행사245)를 통하여 도달하고 “실현”시키고자 한 바로 그 견해가 재량을 한계 지우는 일반 원칙들과 함께 법적인 정당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개개의 구체적 사안에서 개성은 객관적 측면(특별한 사정)에서 뿐만 아니라 주관적 측면(판단을 한 관서)에서도 중요하다. 객관적 사정의 특성과 주관적 판단자의 개성이 서로 어우러진다. 철학자 테오도르 리트(Theodor Litt)가 말한 것처럼 “개개인의 ‘형성물’이란 개인적 방법으로 체험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또한 “개인적인 것만이 이해될 뿐만 아니라 오직 개인적 방법으로서만 이해될 뿐”이라 한다면,246) “이해(Verstehen)”가 하나의 주목할 만한 요소이기도 한 재량판단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 할 것이다. 재량판단은 개인적인 것247)에 관계된 것일 뿐만 아니라 개성의 표현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우리 법치국가적 법질서에서 그러한 재량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 또 있다면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전자의 문제에 있어서는, 앞서의 의미에서 재량이 있다거나 있을 수 있다거나 심지어 있어야 한다는 점은 그 나름으로는 입법자의 재량에 속한다거나 관습법 또는 “사물의 본성”(“행정의 본질” 등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전문그룹에서 추천한 명단에 의거) 대학교수를 임명함에 있어 소관 장관이 위대한 석학을 선발하느냐, 아니면 우수한 교사를 선발하느냐, 아니면 연구소나 병원에서 특히 재능 있는 조직원 또는 임상의사를 선발하느냐의 관점에 따라 선택권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라운248)의 이야기를 빌려 말 하면, 이 경우에는 문화부 장관이 의무에 부합하는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자기 행동의 “가장 최적절한 목표”가 무엇인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이에 반하여, 그는 “중요하지 않은 관점” – 위의 사례에서는 추천된 한, 두 사람의 종교 따위 – 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많은 행정행위나 통치행위에 있어서 정치적 동기나 정당선호도는 중요하나 다른 관계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법률과 행정 또는 사법의 관계에 있어 재량의 여지를 어디서 인정할 지, 예컨대 법관에게 양형의 재량을 인정할 것인지 또는 위자료의 수액을 정함에 있어 재량을 인정할 것인지는 협의의 의미에서 법발견, 특히 법률과 제도의 해석에 있어 본질이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법규에 재량권한이 부여된 것인지 아닌지가 의심스러울 때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법규가 어떤 확실한 규준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정당한 판단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명령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무에 부합하고 사안에 적절하면서도 구체적 사안에서 “정당성”, “합목적성”, “타당성”에 관하여 개인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고 또 그래야만 할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하는 판단의 필요성 말이다.249)

궁극적으로 재량이란 개념이 존재하고, 또 이와 함께 법관이나 행정공무원의 완전한, 독자적인 법 구체화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보다 이것이 불가피하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더 어렵다. 이점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지금 언급하지 않겠다. 아마도 이 장의 끝 부분에서 재량의 행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그보다는 재량의 순수 개념에 관하여 조금 더 논의해보기로 한다. 우선 재량을 불확정 개념 및 규범적 개념과 비교하여본다면, 이 장의 1)과 2)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량이란 이들 개념과 더불어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250) 불확정 개념(물론 불확정한 기술적 개념을 말한다)과 규범적 개념(형법 제253조 제1항 소정의 “감정상의 해악”과 같이 형법의 규범적 구성요건요소)은 그 해석이나 개별 사안에서의 적용에 있어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점이 있어 “주관적 정당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하여도 개인적 가치관에 좌우되지는 않는다.251)

행정만이 재량에 의하여 판단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선험적 근거는 없다. “입법에 있어 재량”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법적 재량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분명하다. 예컨대, 소년형법이나 어떤 절차적 처분에 있어 단순히 합목적성의 이유(관련사건 등의 이유)만으로 이점이 고려된다. 형사소송법 제4조 제1항 소정의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재량을 가능하게 한다. “할 수 있다”는 뜻은 단순한 사실적 가능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다.252)

행정이나 사법에 있어 재량의 한도 안에서 여러 가능한 대안들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적합하고 정당한지를 확정함에 있어 담당 권한자의 주관적 판단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 법치국가적 법질서 내의 법적으로 기속된 재량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판단여지”를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 가능한 일이고, 내 개인적으로는 효과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재량이 어떤 경우에 얼마만큼 허용될지 심사하는 것이 법발견의 본질에 속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파악된 재량조항에 “불확정한 개념”이나 “규범적 개념”과 대비하여 방법론적으로 다른 하나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개념논리적으로 합목적적이라 할 것이다.

4.) 불확정한 개념은 확정적 개념과, 규범적 개념은 기술적 개념과, 재량의 여지는 정당성의 객관적 규준에 대한 배타적 기속의 개념과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대립된 개념이다. 이러한 여러 개념들 중 하나와 자주 바꾸어 사용되고 있는 “일반조항”이란 다양한 의미의 개념에 어떤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면, “결의론적(kasuistisch)”인 구성요건조항과 대립하여 이를 파악하여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의론적”이란 (법률상 법적효과명령을 조건지우는 요건의 총체로서) 특정한 관점에서 특정한 사례만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법률적 구성요건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253) 결의론적 구성요건의 일반적 예가 형법 제224조인데, 여기서는 “고의에 의한 신체상해로 인하여 피해자가 신체의 중요부분, 한쪽 눈 또는 양쪽 눈의 시력, 청력, 언어 또는 생식능력을 상실하거나 상당한 정도로 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거나 폐질, 불구 또는 정신이상의 상태로 빠지게 된 경우에는……”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1930년도 법안에서 위 조항과 관련된 제260조 전단254)은 “피해자가 그의 신체 또는 건강에 중대한 훼손을 입었을 때는……”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을 “일반조항”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일반조항을 고도의 일반성과 함께 어떤 특정한 사례군을 포섭하여 법적 취급을 하는 입법기술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니퍼다이(Nipperdey)는 어느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기 귀책사유로 인한 책임만이 문제가 된다면, 불법행위법에 있어서는 두 개의 법적 규율체계가 가능하다. 손해배상의 결과를 묻는 불법행위의 개개 구성요건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방법이 그 하나이고(민법 제823조 내지 제825조에서 취한 방식), 불법행위의 통일적 구성요건을 제정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말하자면 타인의 법익을 침해하는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를 대상으로 한 일반조항이 결의론적인 입법기술에 대신하는 것이다.”255) 우리는 부정경쟁방지법(UWG)에서도 비슷한 차이를 본다. 부정경쟁방지법 제3조는 “거래행위에 있어 경쟁의 목적으로 거래관계, 특히 개별적 상품, 영업행위 또는 서비스의 특성, 원산지, 제조기법, 가격결정과 가격목록에 관하여 혼동을 야기할 표현을 사용한 자”에 대하여 그 중지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 이는 결의론적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이에 반하여 이 법의 제1조는 “거래행위에 있어 경쟁의 목적으로 공서양속에 반하여 행동을 한 자”라고 규정하여 일반조항을 설정하고 있다. 또 행정법에서 행정소송을 허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결의론적인 “열거주의”를 채택하는 것과 일반조항을 채택하는 것 사이에 구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자에 있어서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개별 구체적 사례군이 열거되어지는데 반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행정소송의 제기가 일반조항으로 허용되어 진다. 행정소송법은 “헌법해석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또 다른 법원에 명시적으로 권한이 귀속된 것으로 정해져 있지 않는 한, 모든 공법상의 쟁송에 대하여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정하여 후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행정소송법 제40조 제1항 제1문).

결의론적 방식과 일반조항 방식의 구별이 상대적인 것은 물론이다. 앞서 인용한 형법 제224조가 1930년도 법안의 제260조와 비교하여볼 때 결의론적이라 하더라도, 그 전반의 구성요건(“신체의 중요부분”)은 그 뒤에 계속되는 구성요건과 관련하여서는 일반조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930년도 법안의 제260조도 “모든 혁명원칙에 반하는 행위는 처벌된다. 형벌의 종류는 법관의 자유재량에 속한다”라고 규정하였던, 1919년 초 뮌헨 협의제 정부(Münchner Räteregierung im Frühjahr 1919)에 의하여 제정되었던 조항과 비교하여보면 결의론적이라 할 수 있다.256) 가벌성에 관한 이런 유형의 일반조항은 법치국가에서는 금지되어 있다. 이는 확실한 결의성을 요구하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개별적 일반조항에 따라 우리의 법질서를 면밀히 검토하고 이들이 우리가 언급한 의미에서 일반조항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개별 구체적으로 심사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미 언급한 부정경쟁방지법 제1조, 민법 제826조(“공서양속에 반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고의로 손해를 일으킨 자는 손해배상의 의무가 있다”), 또는 형법 제226조a(“피해자의 승낙 아래 신체를 침해한 자는 그 행위가 승낙에도 불구하고 공서양속에 반하는 한도 안에서만 위법하게 행동한 것이다”)에서와 같이 “공서양속”에 반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일반조항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57)

이외에도 일반조항이나 결의론적 방법론이 법소재를 다룸에 있어 항상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앞서의 선례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부정경쟁방지법 제1조의 일반조항은 이 법의 결의론적 조항인 제3조와 병존하고, 결의론적 조항인 민법 제823조 내지 제825조는 일반조항인 민법 제826조에 의하여 보충되어진다. 결의론적 방법론과 일반조항이 결합된 가장 두드러진 경우는 소위 유형화하는 방법론(exemplifizierende Methode)이다.258) 이 방법론은 우리가 여려 차례 인용한 1930년도 형법안의 제260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조문을 일부만 인용하였다. “피해자가 그 신체 또는 건강에 중대한 훼손을 입었을 때”라는 일반조항에 뒤이어 몇 가지 결의론적인 사례들이 열거되어지고 있는바, 예컨대 “특히 심각하게 말할 능력을 상실한다거나 영구적이고도 현저하게 형태를 잃어버린다거나 또는 신체, 감각, 정신능력, 노동능력의 구사에 있어 영구적으로 또는 오랜 동안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거나” 등이 그렇다.259)

이제 우리는 “일반조항”이 불확정한 개념, 규범적 개념, 재량조항 등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일반조항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그렇다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불확정한 개념, 규범적 개념, 재량위임의 모든 개념을 일반조항이라 하지 못하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일반조항에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불확정한 개념이나 규범적 개념 또는 재량조항에는 없는 일반성이란 특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아주 결의론적 조항인 형법 제224조에 불확정한 개념이나 규범적 개념이 포함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조항이 일반성이란 특징만으로 불확정한 개념이나 규범적 개념 또는 재량조항의 주변에서 따로 분리된 개념이라 단언하기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 물론 우리는 일반조항이 논리필연적으로 불확정한 개념이라거나 규범적 개념이라거나 또는 재량을 염두에 둔 조항이라거나 또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확정적이고 기술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법적용자의 주관적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 그러한 일반조항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 예컨대, 협박의 일반조항으로서 “고의로 사람의 생명에 위험을 가한 자”.260)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일반조항이 대부분 재량조항이라 하지는 못하여도(오히려, 일반조항은 객관적인 타당한 가치평가를 목표로 추구하는 한 재량위임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부정경쟁방지법 제1조, 민법 제826조, 형법 제226조a가 그렇다), 최소한 불확정하고 규범적인 그러한 조항만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일반조항이 최소한 불확정하고 규범적인 개념과 같이 등장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재량조항과도 함께 등장한다고 해야 할 것인지? 일반조항은 사실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독자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일반조항은 불확정한 개념이나 규범적 개념, 재량조항 등에서 요구되는 사고과정 이외에 다른 독특한 사고과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일반조항에서는 예컨대, 불확정한 개념이 확정 개념에 대하여 갖는 차이를 더 크게 할뿐이다. 그러나 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질의 차이는 아니다. 일반조항의 진정한 의미는 입법기술의 영역에서 존재한다. 일반조항의 추상성으로 말미암아 광범위한 사실관계를 어느 일정한 법률효과에 포섭시킬 수 있게 된다. 결의론적 방법론은 법소재를 문제중심적이고 “일시적”으로만 다룰 위험이 있다. 이러한 위험성은 일반조항을 사용함으로써 제거된다. 물론 그로 인한 또 다른 위험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반조항의 장, 단점을 여기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 일반조항의 장, 단점이 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261) 그 경우에도 우리는 일반조항 자체에 내재하는 장, 단점과 일반조항이 통상 불확정하고, 규범적이고, 재량조항적이어서 갖게 되는 장, 단점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형평법”의 개념이나 형평조항 등과 같이 여러 유형의 “자유스런 개념(Lockerungsbegriffen)”에서 법적 사고가 취할 수 있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개념이나 조항이 법률적 한계를 준수하여야 하는 한, 그 한계를 밝히는 것은 법률해석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양형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과 같이 단순한 법률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법률에 근거하여 양형이 이루어지도록 원리원칙을 찾아내는 것도 일종의 법률해석이다. 형법 제46조는 “(범죄)행위자의 책임은 형벌을 정하는데 기초이다. 행위자가 장래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형벌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고려되어야 한다. 양형을 정함에 있어서 법원은 행위자에게 유리한 사정과 불리한 사정을 모두 비교형량하여야 한다. 이 경우 행위동기, 행위자의 목적 등등이 참작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여기서 양형의 모든 요소(말하자면 행위자의 “책임”)를 보다 상세히 밝혀내는 것도 법률해석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법률에서 나오는 규범적 개념이나 조항에 대하여 그것이 객관적 가치규준 자체인지 아니면 독자적 평가를 위한 수권조항인지를 밝히는 것도 법률해석의 일종이다. 이 경우에도 앞장에서 설명한 해석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문의 한도 안에서 보완적 판단, 특히 법적용자의 독자적 평가를 필요로 하는 그러한 사고과정에 대하여서만 특별한 분석이 필요하다. 불확정한 기술적 개념에 있어서도 우리는 해석과 그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포섭의 기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순수한 경험적 개념을 해석하는 것이 해석이다”라고 폴스토프는 이야기하였는데262) 이는 정당하다. 예컨대, “야간”이나, “어둠” 등과 같이 경험적 개념조차도 자주 불명확하기 때문에 해석과 그에 기초하는 포섭을 어렵게 하고, 법적용자로 하여금 특별한 사고를 요구하며, 그 결과 “단지 법률문언을 말하는 입으로서” 법관을 이해하는 이론이나(몽테스큐),263) 법률적용을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자판기”에 비교하는 이론(위 233쪽 참조)이 거짓임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석과 포섭은 일종의 정신적 활동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협의의 의미에 있어 규범적 개념을 다룬다면, 법적 사고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물론 이 규범적 개념에도 어느 정도의 모호함이 내재하는데 바로 이점이 현재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규범성”이란 단지 문제된 개념이 그 의미내용에 있어 규범을 전제로 함을 말하는 것인지(미성년자, 혼인, 공무원 등등), 아니면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전자의 경우라면 개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다시금 해석의 일환일 뿐이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도 포섭의 일환일 뿐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이는 법적용자의 가치평가를 의미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바로 이러한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의미에서 규범성을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물론 가치평가란, 재량이 주어지지 아니한 경우에는 법적용자의 주관적 평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았다. 오히려 “규범적” 개념에 있어서 법적용자는 “좌표적이고(führend)”, “표준적인(maßgeblich)” 계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평가를 찾아내 확인할 의무가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객관적” 가치평가라 하겠다.264) 집게손가락이 “신체의 중요한 부분”인지, 복싱경기와 그때 예상한 피해가 “공서양속”과 양립하는 것인지, 보호의무 있는 자가 “자신의 보호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하였는지, 어떤 그림(예컨대 게오르그 그로스의 방독면을 쓴 예수)이 “신성을 모독한 것”인지(구형법 제166조) 또는 최소한 교회를 “비방한 것”인지(신형법 제166조), 혼인이 “파탄”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를 법률은 법관의 주관적 가치평가에 의하여 해결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법률은 법관도 따라야 할 표준적인 도덕관념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지한다. “해당 주민들의 생각을 참작한, 구체적 사례에 있어 개별적 사정들이 표준이 된다.”265) “해당 주민들”이란 당시 국가와 법질서가 그 평가를 반영하고 있는 그런 주민들을 말한다. 법관 자신이 이들에 속해 있다면 물론 자신의 도덕적 생각을 물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가 자기만의 독자적 생각은 아닌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법관 스스로가 이러한 주민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예컨대 종교가 다르다거나,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평민들이나 갖는 천한 것쯤으로 생각하는 따위), 자신의 고결한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해당 주민들에 속해 있는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평가할 것이다. 그래서 라이히 재판소의 저 유명한 판결(RGSt 64, 121(126))에서는 게오르그 그로스의 방독면을 쓴 예수의 그림에 대하여 “지나친 쾌락이나 자유분방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교회구성원의 종교적 감정”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였는지를 문제삼았다.266) 도덕적 근본이 문제되는 경우라면 법관은 입법자가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정한 “객관적 도덕법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연방대법원은 약혼자 사이의 성교 문제를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다(BGHSt 6, 46).267) “음란”과 같이 가치평가를 필요로 하는 개념이나, 이와 관련하여 “형법 이외의 규범영역”(48쪽)에서 정해진 규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유동적인 국민 계층이 갖고 있는 변화하는 생각이나 행동양식”(50쪽)에 의존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에 있어 정숙함을 명하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나 규약의 명령”이 아니라 “도덕, 다시 말해 도덕법칙의 명령”이기 때문이다(52쪽). “도덕법칙의 규범은 본래부터 타당한 것이다. 그것의 (엄격한) 구속력은 선재하고 항상 따라 다니는 가치질서, 인간의 공동생활을 지배하는 당위법칙에 근거한다. 그것은 복종하도록 요구되어진 사람들이 이를 현실적으로 따라 지키고 승인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관계없이 타당한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관념이 바뀌었다고 하여 변경되지는 않는다”(52쪽). 연방대법원이 위와 같이 판시한 사항을 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아무런 내용이 없는 상대주의는 옮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고 사회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해하기조차 한데” 이러한 상대주의를 연방대법원이 거부함에 있어 무슨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는 그냥 두기로 한다. 객관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의 문제는 매우 분분한 도덕철학적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확실하고 분명한 도덕적 관습이 있다는 점, 법이 이러한 도덕적 관습을 “객관적 도덕법칙”이란 의미로서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위에서 다룬 바와 같이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객관적, 규범적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고정된 도덕적 관습에 의존하든, “유동적인 국민계층”의 변화하는 가치평가에 의존하든 – 가치평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규범적 개념이 갖는 장점 중 하나의 기능이다 -, 규범적 개념이 필요로 하고 있는 “가치평가”는 언제나 인식의 대상이다. 법적용자는 무엇이 사실상 효력 있는 도덕적 관념인지 확정해야 한다. 그의 독자적 평가는 평등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 중 하나일 뿐이고, 그는 이들 평가를 자신의 평가와 비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 평가에 따라 자신의 평가를 수정할 필요도 있다. 자신의 평가는 인식 소재의 하나일 뿐이지 궁극적인 인식기준은 되지 못한다. 개별 사안에서의 판단과 이러한 판단들이 모여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객관적, 규범적 개념이 “구체화”하는데 이러한 판단들 역시 객관적, 규범적 개념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고, 개별 사안에서 적용할 가치평가를 확정하는 것 또한 “포섭”과 비슷한 것이다. “복싱과 같은 정해진 결투는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는다”라든가(BGHSt 4, 24), “약혼자 사이의 성교는 음란하다”(구형법 제180조 이하 소정의 음란성 의미에서, BGHSt 6, 46)268)라든가 하는 가치판단은 기술적 개념에 있어 개념정의, 개념분류, 포섭 등과 마찬가지로 주석으로서 기능을 한다. 이들은 또한 기술적 개념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정의, 범위설정, 유형화 등과 같이 해설서나 주석서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 규범적 개념은 기술적 개념이 가지고 있지 못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가치평가란 특징으로 인하여 개별 사안의 구체적 특성이나 가치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269) 바로 이점 때문에 그것은 “형평법”의 총아(寵兒)가 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유행이 되었다. “동침한다”라는 기술적 개념은 “혼인을 침해한다”라든가, “음란하다”라는 개념과 달리 구체적 사정이나 가치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떤 구체적 사례를 객관적, 규범적 개념에 포섭시키기 위하여서는 법관이나 행정공무원은 자기의 독자적인 구체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러한 구체화는 라렌쯔(Larenz)270)의 말을 빌리자면, “종합적”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는 당대에 어울리는 가치평가를 찾아 가치충족을 필요로 하는 기본사상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개념 그 자체에서 구체적인 것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그것이 허용된 범위의 한계 안에서271) 판단할 구체적 사안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는 것이다.

객관적, 규범적 개념이 법적용을 하는데 있어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재량조항은 법관이나 행정공무원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주관적, 개인적 판단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색다르다 할 수 있다. 객관적, 규범적 개념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그 “종합적”이고 “구체화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바와 같이 어떤 “인식”, 다시 말해 현재 타당한 규범의 “확정”, 또는 목적과 이념에 따라 분명히 올바른 것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와 달리 재량조항에 있어서는 그 재량의 범위에서 주관적, 개인적 판단이 성립할 여지가 있다. 재량조항은 법규의 한계 안에서 법적용자가 개인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평가를 구속력이 있다고 보는 것을 허용한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선택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재량조항은 고착되어 있고 불확실한 “객관적” 규범을 찾는 것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믿음에서 개인적 결정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적용자를 법창조자, 다시 말해 구체적 사안에서의 입법자로 만드는 가치평가의 행위에 관하여서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개인적 판단의 범위는 명시적인 법률 규정뿐만 아니라, 법이념이나 국가이념 등에 의하여서도 한계 지워진다는 점이다.272) 궁극적으로는 “자의”나 “부당함”의 금지에 항상 주목을 요한다. 이하에서 우리는 재량행위를 함에 있어 재량권의 유월(踰越)이나 남용 같은 것은 없다고 전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 “개인적” 판단은 사안에 부합하는 것이고, 내적으로도 진정한 확신에 의하여 지지되어 행하여지는 것이란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정당하다는 판단이 아무런 제약 없이 법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초법적인 관점에 의하여서도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러한 “의지적(volitiv)인 사고행위”273)의 논리적 구조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우선 자유로운 목적선택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는 소위 행위재량의 특성이기도 하다.274) 자유로운 목적선택의 실례로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대학교수를 임명함에 있어 학문적 능력과 교사적 자질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는 목적론적 법칙에 따라 선택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보다 현실적인” 목적은 보다 이상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목적의 하위에 속한다. 이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결과와 그 부수적 효과가 고려된다. 다른 정형화된 목적과도 진정한 조화가 추구된다. 획일적 판단을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기회에 대학교수를 임명할 때는 학문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는 교사적 자질이 중시될 수도 있다. 목적론적 법률에서는 특히 목적 자체만으로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수단의 선택이 보편적이다. 말하자면 재량행위에는 목적의 선택뿐만 아니라 수단의 선택이 포함되어져 있다고 학자들은 강조하는데, 물론 양자의 구분이 어느 정도 상대적이란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는 정당한 주장이다. 공중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하여 똑 같이 선택될 수 있는 여러 경찰 행정행위가 규정되기도 하고, 또는 청소년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법률은 여러 처분을 정할 수 있는데 이들 처분에는 우열이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당히 조합하여 발령될 수도 있다. 이때 실효성, 지속성, 단순성, 경제성, “비례성”275) 등에 관한 논의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목적론적인 색채를 갖고 주장되지만 개인적 주관이 개입하여 판단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을 선택함에 있어 참고가 되는 여러 관점들은 자주 정의나 형평의 법윤리적 이념을 희생시키기도 한다.276) 이점은 대부분의 행정행위에 있어 특히 그렇다. 공무원들의 자리이동이 때로는 합목적적이어도 “불공평”하거나 “부당”할 수 있다. 반면 공무원을 어떤 직위에 임명하거나 승진시키는 것이 정당하여도 합목적적이지 아니할 때가 있다. 방금 이야기한 행정공무원의 합목적성은 정의나 형평의 문제와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인지?

여기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룰 지면이 많지 않다. 이 장에서 단편적으로 살펴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불확정한 개념, 규범적 개념과 재량조항, 일반조항에서는 형평법에 따라 법을 적용하는 사람이 종류와 정도에 있어 다양한 법을 해석과 포섭에 의하여서뿐만 아니라, 개별 구체적 사안에서의 가치평가와 의사결정에 의하여서 발견하도록 요구되어진다는 것이다.277) 이 경우 법을 적용하는 사람이 객관적 규준(관습법, 지도층의 가치평가)에 입각하기도 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에 더 많이 좌우되기도 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무절제한 자유와 자의가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 판단에 있어 법률적, 초법률적 한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여도, 목적론적, 공리론적 규칙이 존재하는바, 이는 판단의 내용을 엄밀히 정하지는 않아도 판단의 논리적 한계를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가치평가와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그 내용을 개인적 색깔로 채색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다.

재량권한을 행사하는데 있어 한계, 기준, 특성을 언급하면서 보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위와 같이 개인적으로 채색된 판단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근거로 “정당하다”고 간주되어지고. 법치국가원리 하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앞(262쪽 이하)에서 간략하게 제기하였던 의문이 조금 풀릴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재량행위를 한계 지우는 모든 구속(법적, 공리적 규칙 외에도 불편부당, 자의, 권한남용, 과잉의 금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으로부터 보아 “정당함”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기조차 한 여러 판단들의 등가성이 인정됨으로써 제기되는 조금 특별한 “정당함”인 것이다. 서로 상이한 판단들(판단 1, 2, 3, 또는 긍정적 판단과 부정적 판단)이 똑같이 법 앞에서 정당하게 주장될 수 있다는 점, 예컨대 다소 평화스럽지 못한 시위에 대하여 경찰권을 행사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처분선택의 재량), 경찰권을 발동하기로 한 경우에는 가장 유효적절한 여러 등가적 수단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내용선택의 재량),278) 또는 영업허가를 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귀화를 허용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등이 모두 똑같다는 점이 특이하면서도 조금 어색하기도 한 부분이다.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모순법칙에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일 뿐이고, 이는 가치평가가 작용하는 곳에서는 기본적으로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나 명백성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우선 여기서는 여러 관점에서 사용되어온 “대표성(Vertretbarkeit)”이란 개념이 적합하다. 재량행위에 있어 여러 대안들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들 대안들은 모두 재량의 여지가 있다는 관점에서 보아 대표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평화스럽지 못한 시위에서 경찰권을 발동하지 않고 기다릴 수도 있고 경찰권을 발동할 수도 있고, 또 귀화를 허가하는 처분을 할 수도 있고 거부하는 처분을 할 수도 있는데, 이들 모든 처분이 똑같이 대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재량의 여지 안에서 여러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법안에 있는 것이며,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물론 대표성이란 것이 이들 대안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고 더 “본질적으로” 정당한 지를 서로 비판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판단이 “현실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더라도 그 판단이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 종종 양형을 함에 있어 타당한 원칙, 다시 말해 의심스러울 때는 최소한으로(in dubio mitius)란 원칙이 유용하다. 아직 한 가지 더 문제가 남아있는데, 이는 재량권을 행사함에 있어 “대표적이다”라고 한다면 그냥 “정당하다”라는 것이 되는지, 또는 정당한 것은 언제나 대표될 수 있지만, 대표적이라고 하여 모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아니하므로(이점에 대하여는 의논이 분분하다),279) 대표적이란 개념보다는 정당하다는 개념이 더 좁은 개념은 아닌지 – 사실 나는 이편이다 – 하는 합목적적인 언어규정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재량이 주어졌다는 전제에서 대표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재량의 여지에 적합하고”,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전체적 법생활은 매우 다양한 정신세계의 하나로서 개인의 관심과 충동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한 사상을 정확하게만 이해한다면, 개인적으로 올바르다고 지지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보는데 있어 보다 깊은 근거에 도달할 수 있다.280) 입법의 영역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행정과 사법의 영역에 있어서도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법을 형성하고 준비하도록 소명되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인 선호도는 지상에 남은 고통스러운 질곡, 다시 말해 (가치를 평가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깨끗이 제거할 수 없는 그런 질곡이 아니라, 법률문화에 있어 긍정적 평가를 얻은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는 입법을 추상적 원리에 따라 “유일무이하게 정당한” 법률을 제정하는, 그러한 합리적 도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관과 정치성에 따라 대립하는 여러 다양한 개인적 관심들을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절차로서 이해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정당함의 대강만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광의의) 사법에 있어 공무원이나 행정관청, 법관이나 법원이 어느 체계 안에서만 법률을 집행하도록 권한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한 사람으로서 자기 책임 하에 “최선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때로는 창조적으로 때로는 풍부한 이념을 가지고 개별 구체적 사례에 있어 정당한 것, 합목적인 것, 적합한 것을 찾아 나서도록 선발된 것이다. 이 경우 개별 사례의 구체적 사정뿐만 아니라, 그 사안에 당사자로서 참여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해, 희망, 신청, 주장 및 심도 있는 논의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기도 하고, 또한 이들을 대표하는 서로 상반된 주장과 동일 집단에서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의 견해가 대립적으로 고찰되기도 한다. 공무원이나 법관이 판단을 함에 있어 이러한 내부적 소용돌이와 외부적 논쟁 속에 자신은 완전히 사라지고(역사학자인 랑케의 말을 따르면, 불가능한 모험일 수밖에 없는 역사연구가 그렇다), 오로지 원리와 원칙에만 매달려 해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들도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여러 요청, 여러 이익의 평가, 여러 논의의 확신(사실확정에 있어 자유심증과 같은 뜻은 물론 아니다) 등에 대하여 나름의 개인적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지? 권한담당자가 단순히 전문가, 법기술자 또는 “전문관료”로서뿐 아니라 자발적인 인격체로서 관여하여 한 판단에 대하여 우리는 추상적 법원리와 원칙에만 매달려 얻은 판단보다 더 많은 믿음으로 마주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신청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 하는 것이 판단자의 개성에 좌우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권한담당자의 개성에 따라 그때그때 형성되어지는 것은 그 결과뿐 아니라 모든 과정에 좌우되는 것이고, 나아가 보다 엄격한 것은 보다 기본적인 것이고 보다 정당한 것이며, 보다 느슨한 것은 보다 편한 것이고 책임회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행정관청이나 법원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자기 견해와 관심을 얻기 위하여 단순히 “법을 적용하는 사람”과 마주하기보다는 개성을 지난 한 사람과 마주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정당성”의 이념이 변절하지 않도록 법치국가에서는 고도의 학문인 법학과 불편부당성, 전문성 및 청렴성으로 교육받은 공무원과 법관이란 직업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 근거에 기한 판단의 의무, 동료간의 토론, 상급기관에 의한 판단의 사후심사 가능성 등에 존재하는, 자의에 대한 모든 보장책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는 수십 년 전 “자유법학 운동”이라고 명명된 법학의 움직임 속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물론 이 운동에는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한다. 이 운동은 법률의 불완전성과 오류성에 근거하여 법관으로 하여금 입법자와 같이 “창조적”으로 흠결을 보충하고 부당한 법률을 정정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 참조).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운동의 정점은 반대 의견이 비등하긴 해도, 법관을 왕처럼 통치자로 만들고, 법률의 구속을 타파하고, “자유재량”을 전체법형성의 포괄적 원리로 고양시키는데 있다.281) 이러한 자유법학파의 노력은 그들이 해안가에 이르자마자 난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역사적 뒤 안으로 사라질 것이다.282) 그러나 개별 사례에서 법을 적용하는 실무가가 법률에 너무 엄격히 구속되지 않고, 법적 분쟁이든 행정적 문제이든 사안의 특성과 실무가의 개인적 확신에 근거하여 의미 있고 합당하며 합목적적인 구체적 판단을 하도록 할 권한과 책무가 있다는 점만은 되풀이 살아날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법관은 “법률과 법”에 노예처럼 구속되어 입법자에 복종하고, 입법자 뒤에서 의문을 품는 그런 권한자가 아니며, 스스로 정치가, 사회활동가, 사회전문가 또는 최소한 특별한 사회조력가로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며 이를 공유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뷔텔터, 라제혼, 바서만, 오스터마이어 등). 이러한 경향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나 자신은 염려스럽다는 입장), 그것은 “법률적” 사고의 특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다룰 수 없다. 이 책에서처럼 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 속에서는 – 조급한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 위와 같은 생각은 주역이 될 수가 없다.283)

 

제7장 법관법, 계속 : 흠결보충과 법의 오류정정

앞장에서는 법률이 법률가에게 일정한 한계에서 입법자를 대리하고 그에 대신하여 “가치판단 및 의사결정”의 권한을 부여한 경우에 있어 그 작업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법적용자가 “흠결”을 보충하고 법질서에서의 “오류”를 정정하는 경우에는 새로운 사상적 기반에 근거한다는 점을 살피기로 한다. “흠결(Lücken)”과 “오류(Fehler)”는 “하자(Mangel)”라는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다.284) 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법의 하자를 의미한다. “흠결”이란 하자는 “법의 보충”에 의해 해소된다. 법관은 이 경우 “법률과 더불어”, “이유를 보충하여” 작업한다(“법률이 흠결된 곳에서는 법관이 보충한다(supplet praetor in eo, quod legi deest)”). 이에 반해 “오류”란 하자는 “법률의 정정”에 의해 해소되는데, 법관은 이 경우 “법률에 반하여”, “이유를 수정하여” 작업한다. 흠결보충과 법의 정정 사이의 한계는 항상 분명하고 확실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한계는 원칙상 존재하고, 각각의 경우 법적용자의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계가 대략 어떻다는 것은 개개 개념을 고찰함으로써만 분명해질 수 있다.

Ⅰ.

“법의 흠결”285)이란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자. 흠결은 법의 전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다.286) 법관뿐만 아니라 행정공무원도 흠결로 곤란을 겪을 수 있다.287) 그러나 여기서는 간명하게 하기 위해 법관에 관해서만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행정법률가에 대하여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코 쉽게 대답되어질 수 없는 문제는 “흠결”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공간적 형상물 – 예컨대 치열(齒列) 또는 울타리에 있어 흠결 등으 -로부터 법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추론한다면, 흠결이란 전체 중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불완전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법에 있어 흠결이란 개념은 결국 법의 전체 중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1958. 7. 1. 개정되기 전의 가족법이 평등대우의 원칙으로부터 발생된 총체적 흠결의 전형적 예를 보여주었다. 우리 기본법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3조 제2항에서 남녀의 평등원칙을 선언하고288) 제117조에서 이러한 평등원칙에 반하는 모든 법률은 효력이 없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에 관한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는 것이 지연되었다.289) 이에 따라 우리 혼인법과 가족법은 광범위하게 “흠결을 가지게” 되었다. 이쯤하고 다른 새로운 문제를 제기해보자.290)

1.) 흠결이 벌어지는 법의 전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법의 흠결개념이 법 자체의 개념까지 연결된다. 법을 단지 실정법률로만 생각하면 “법의 흠결”은 “법률의 흠결”과 같은 의미가 된다. “법률의 흠결”이란 개념을 우리는 반드시 제기해야 할 법적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서술된 의미에서) 해석을 통해서도 법률이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경우로 보다 엄격히 제한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법”을 실정법률과 함께 관습법을 포함하는 전체의 “실정법”으로 생각한다면, 법의 흠결은 법률이나 관습법에서 법적 문제에 관하여 법적 해답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존재하게 된다. 법률이 규정하지 않는 내용을 관습법이 규정하고 있다면, 법률의 흠결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실정법의 흠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정법이 궁극적으로 흠결된 경우라면 이러한 흠결은 초실정법적 사고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흠결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더욱이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의 단순한 “해석”으로 외관상 발생한 “법률흠결”을 “유추추론”과 기타 법률에 기초한 사고작업을 통해 해결할 기회도 없지 않다. 이렇게 해결될 수만 있다면, 과연 흠결이 있다고 해야 하는지 다시금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비록 간접적이긴 하나 바로 법률이 법적 문제에 관하여 해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입법자가 일반조항이나 묵시적 위임을 통해 법관에게 입법하는 것처럼 법을 발견할 권한을 부여하였다면 어떤가? 이러한 권한부여는 흠결이 발생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법은 법관에 의해 항상 해답이 제시되고, 특히 법관은 “재판거부금지”의 원칙에 의해 모든 법적 분쟁을 어떻게든 판단해야 할 입장이고, 나아가 이러한 법관의 판단에는 항상 어느 법사상이든 근거가 있으므로, 전체로서의 법은 결코 무능하지 않고,291) 법질서는 “완결적”이며 흠결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법전체에 있어 불완전성의 의미로서 “법 흠결”의 개념은 치워버려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법질서의 완결성(Geschlossenheit der Rechtsordnung)”을 원리로 발전시켜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흠결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이론들이 있어왔다.292) 이러한 이론들은 법철학적으로 흥미 있는 하나의 개념, 즉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란 개념에 의해 여전히 지지될 수 있다. 위 – 물론 그 자체가 매우 다양한 의미지만 – 개념293)은 다음과 같은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법전체는 특정한 영역에만 관계하고 그런 한에 있어서는 완결적이다. 물론 법이 지배하는 영역과 더불어 법에서 다루지 않는, 예컨대 순수사고나 신앙 또는 결사관계의 영역과 같은 영역도 있다. 이러한 영역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는 흠결이란 존재하지 않고 법의 영역 바깥에 있는 무엇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 하나의 경우만이 성립한다. 어떤 문제를 실정법 안에서 판단하면서 법의 흠결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와 실정법 안에서 판단하지 않으면서 “법이 없는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법이 없는 영역은 법의 외연(外延)에만 미치기 때문에 법전체 안에서는 법의 흠결이 없으므로 법의 흠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94)

이러한 개념의 덤불에서 하나의 길을 내기 위하여서는 특정한 이론적 목표를 파악하여 그 목표의 관점에서 어떤 무엇을 확정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일종의 “유명론적 정의(Nominaldefinition)”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잠정적으로는 특수한 성격인 법관의 작업과 법적 사고의 특정한 방법론을 배우는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법의 보충”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법의 보충이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는 흠결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즉, 흠결이란 특정사안에서 기대되는 법적 규정 내용이 없다고 인정할 수 있고, 법관의 법보충적인 판단에 의해 그 해결이 요구되고 허용되는 실정법(법률 또는 관습법)의 하자를 말한다.295) 요컨대, 법률이나 관습법이 법적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인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에 흠결이 존재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 또는 확장해석이라도 무방한데, 이를 통해 법률로부터 해답을 구한다면 법률이 해답을 제공한 것이다. 해석을 통해 법적 문제의 해답에 이르는 한 흠결은 법과 무관하다. 이에 반해 “유추”는 이미 법보충적 기능을 지닌다. 유추는 흠결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흠결을 인정하는 것이다.296) “일반적 법원칙”에 닻을 내리고 있는 그런 법적 논의의 경우도 이점은 마찬가지다. 또한 입법자가 법적 문제를 “학계와 실무의 재량에 맡기고”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판단을 포기한 경우(예컨대 1871년 형법제정의견서에 의하면 불능미수범의 경우가 그렇다)는 흠결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도하지 않은 흠결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흠결이 존재한다. 이에 반해 입법자가 불확정한 규범적 개념이나 일반조항과 재량조항을 이용하여 판단의 여지를 보장한 경우 나는 이를 흠결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물론 필립 헥은 반대).297)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법률적 구속의 계획적인 완화, 다시 말해 개별 사례에 있어 특별한 사정과 법공동체의 변화하는 관념에 맞추어 판결을 적응시키기 위한 법률적 구속의 완화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여기서는 법률에 의해 특정한 원칙과 한계가 재판권에 부과된다.29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을 앞장에 이어 서술하지 않고 별도의 장을 만들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법률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법의 적용과 법률을 대신하는 의미에서 흠결의 보충 사이에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아래 344쪽과 위 211쪽 주 47의 5번 참조). 결론적으로 흠결의 개념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는 개념론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2.) 위 1.)에서 법 전체와의 내적인 관련하에서 “흠결”을 논의했다면, 앞으로는 “불만족스러운”, “계획에 반하는” 불완전성이란 요인에 사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299)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규정이 법 전체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벌써 (실정)법의 흠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정의 부존재를 “흠결”이라고 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규정을 단순히 추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관계 규정의 부존재는 입법자 및 법률의 종합적 계획과 일치할 수 있고, 그런 한은 우리가 마땅히 대처해야 하는 “하자”의 의미로서 “흠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형벌을 기대한 어떤 행위가 실정법에 의해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불가벌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을 경우 이러한 계획적인 규정의 부존재가(본질적으로는 소극적 규정이) 존재한다.300) 이러한 불가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법정책적 흠결”, “비판적 흠결”, “부진정한 흠결” 등, 다시 말해 향후 더 나은 법을 위한 관점에서 보아 흠결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법정책적 측면(de lege ferenda)”), 현행법의 흠결이란 의미로서 진정한, 본래의 흠결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법해석적 측면(de lege lata)”). 법정책적 측면에서의 흠결은 입법권에 대하여 법 개정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이고, 법관에 대하여 흠결보충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법관의 흠결보충은 법해석적 측면에서의 흠결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법관의 흠결보충이란 과제에 기초하여 흠결의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므로 흠결의 개념을 법해석적 흠결에 국한한다.301)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법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영역”이란 개념도, 어떤 구성요건에 법률효과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관련시키지 않는 행위가 이런 구성요건을 법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흠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정당성이 인정된다. 개별적 사례에 있어 특정한 구성요건이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법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금 해석의 문제로서, 이 경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법으로부터의 해방행위가 입법자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지, 아니면 법률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하는 해석론의 논쟁도 새로운 현안으로 대두한다(아래 314쪽 참조). 실정법에 법률효과의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항상 그 법률효과 자체의 선고를 허용하지 않고, 따라서 예컨대 특정 유형의 손해에 관하여 손해배상의무의 조항이 명시적으로 없는 경우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해야 하는 것으로 위 “일반적인 소극적 규정의 원칙”을 체계화하여 설명한다면,302) 이는 확실히 지나친 일이다. (손해배상의무로서의) 해당되는 법률효과가 법률에 없다는 사실이 무조건 법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영역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의 부존재의 사실은 그 해당되는 법률효과의 배제가 입법자 또는 법률의 “의사”는 아니므로 법관에 의해 보충될 진정한 의미로서의 흠결이라 할 수도 있다.

흠결의 개념에서 “반계획성”이란 요인은 예외조항의 부존재 문제를 다룰 때 특히 의미 있다.303) 단지 형식적으로만 고찰하면, 규제조항에 해당하는 경우는 “흠결”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의학적 처방”에 의한 임신중절(형법 제218조a 제2항)이 오늘날 법에 의해 명백히 인정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는 임신중절을 형법 제218조 소정의 “낙태죄”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제조항에 해당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입법자 또는 법률에 의해 규제조항에 해당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계획되고 오히려 예외조항은 계획에 없다는 식으로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예시된 사안에서는 규제조항에 해당하는 것을 과거 오랫동안 계획에 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흠결보충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심사하는 것은 여기서 법관이 언제나 생각해야 할 첫걸음이다.304)

방법론상 중요한 위와 같은 관점을 하나의 판결을 들어 명백히 하고자 하는데, 이 판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오늘날 법발견을 위하여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초법률적 긴급피난”의 이론을 위하여 매우 유용한 것으로 형사법원에서 고려되었다는 측면인바, 그중 위 긴급피난의 이론에 관하여는 예나 지금이나 법의 보충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고, 그러한 한 여전히 “현안(懸案)”이라고 말할 수 있다.305) 1927. 3. 11. 라이히 재판소의 판결(RGSt 61, 242)은 의학적 처방에 의한 임신중절의 문제를 다루었다. 한 여의사가 자살경향을 보이는 임산부에 대해 심리학적 감정서에 근거하여 자살행동을 방지할 목적으로 임신중절을 시행했다. 임산부의 생명 또는 건강을 구할 목적으로 하는 임신중절에 관하여 당시에는 법적으로 특별한 규정이 없었다(오늘날에는 형법 제218조a 제2항이 적용된다; 위 48쪽 주 27 참조). 라이히 재판소는 위의 사안을 형식적으로만 고찰하여 다음과 같이 쉽게 판결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 즉 “이 경우 법적 규율은 존재한다. 하나는 임산부로부터 태아를 적출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형벌규정(형법 제218조)과 다른 하나는 예외적으로 범죄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긴급피난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나 이 사안에서는 긴급피난의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행위자 또는 그의 친족의 신체와 생명의 급박한 위험을 제거할 목적으로 귀책사유 없고 달리 회피될 수 없는 긴급상황하에서… 행위가 행해진 경우’만 형사상 처벌을 면하는 것으로 규정된 당시 효력 있던 (구)형법 제54조는 적용되지 않는다. 낙태를 시술한 여의사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니고 임산부가 위험에 처한 친족도 아니었으므로 위 조항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여의사는 현행법의 규정에 따라 낙태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위와 같이 논리적으로 외견상 불가피한 사고결과는 라이히 재판소가 낙태죄의 규정과 긴급피난에 관한 규정이 법해석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인정할 경우만 회피될 수 있었다. 이는 낙태죄의 조항에서 임산부에게 급박한 생명의 위험이 있는 경우, 말하자면 예외를 “갈망하고”, 당시의 구형법 제54조 소정의 긴급피난에 관한 규정에서 행위자 자신과 친족의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면책을 허용한 것이 실정법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였을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위 라이히 재판소의 판결은, 구형법의 긴급피난에 관한 조항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효력 있는 성문법규 또는 불문법규에 근거하여 특정한 긴급피난행위의 경우…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요지로 구성되었다(RGSt 61, 252).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관련해서 이를 표현한다면, 구형법 제54조 소정의 긴급피난에 관한 법률의 규정은 법해석적으로 낙태죄의 처벌에서 예외로 해야하는 모든 사례를 처벌하지 않기 위하여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점이 전체 법규정에서 흠결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된다. “의학적 처방”에 의한 임신중절의 사안에서 형법 제218조에 의한 처벌에 관하여 아무런 비난이 없었고, 구형법 제54의 긴급피난에 관한 조항을 아주 만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법률적 취급에 있어 하자가 있다는 점을 평가상 인정하지 않았다면, 흠결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흠결이 존재하였고, 라이히 재판소는 이를 “법익과 의무의 형량”이라는 “초법률적” 원칙을 동원하여 보충하였다. 즉 “의사의 처방에 의한 임신중절은… 임산부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가 있는 경우, 사태를 파악할 능력이 있는 제3자에 의해 행해진 경우에 한하여 그것이 생명과 중대한 신체상 훼손의 위험으로부터 임산부를 구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면 위법하지 않다”(RGSt 61, 252). 후에 1933. 7. 14.과 1935. 6. 26. “유전병자의 후손보호를 위한 법률”에 의해 비로소 당시까지 흠결되었던 규정이 보완되었다. 현재는 형법 제218조a의 “처방조항(Indikationenregelung)”이 효력 있다(1976년 이후, 12주 임신기간 이후에 관한 개정조항은 1995년 신설).

1927년의 라이히 재판소의 판결은 새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해석론의 논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의학적 처방에 의한 임신중절에 해당하는 예외조항의 부존재가 법해석적으로 하자이고 따라서 “흠결”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적 입법자의 관점에서 심사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현재의 관점에서 심사되어야 하는지 하는 논쟁이다. 법률적 규정에 흠결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과거 역사적인 입법자의 관점(우리의 사안에서는 1871년 형법제정자의 관점)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고 대부분 생각한다.306) 이에 반해 오늘날 지배적인 객관적 해석론에 의하면, 이 문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나의 개인 생각으로는 실제 “흠결”을 확정함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입법자의 관점에만 얽매일 수 없다고 본다. 세계관의 변화로 인해 과거에는 예견하지 못한 흠결이 발생할 수 있고, 이를 “법정책적인 흠결”이 아닌 현행법의 흠결로 간주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1차적 흠결”, 다시 말해 법률의 제정당시 이미 존재한 흠결 이외에 “2차적 흠결”, 다시 말해 사정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후 발생한 흠결이 있다. 이는 가치의 변화뿐만 아니라 규제대상과 관련한 사실적 상황의 변화에서도 발생한다. 즉, 법적 규정은 드물지 않게 전혀 새로운 경제현상(1923년 세계공황) 또는 기술적 진보(비행기, 영화, 음반, 라디오, 텔레비젼, 뇌과의술, 인공수정)로 말미암아 기존의 규정으로는 만족스럽게 대처하지 못하는 법적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흠결을 가지게 된다.307) 그 외 흠결 개념을 더 구분하는 행위는 여기서 그만두기로 한다.308) 이제 흠결 개념이 충분히 명확해졌으므로 어떤 법적 사고방법을 수단으로 흠결을 보충해야 하는지 하는 주된 문제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방법론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유추추론(Analogieschluß)이다. 우선 – 간략하나마 – 이를 다루어야 한다.309)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미 알려진 형법 제226조a는 피해자의 동의가 있고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는 신체상해, 예컨대 문신 또는 신체상의 의학적 수술은 위법하지 않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감금의 경우, 예컨대 학생이 아무 방해 없이 자신의 학위논문을 작업할 목적으로 스스로 밤새워가며 연구소에 갇혀 있는 경우 등에는 피해자의 동의의 의미에 관하여 아무 것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즉 226조a에 상응하는 조문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한 “흠결”이라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러한 흠결은 제226조a를 유추추론하여 다음과 같이 보충될 수 있다. 즉, 신체상해에서 피해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금의 경우에도 피해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는 행위가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는 한 적법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추론의 형식논리적 구조에 관하여 매우 골머리를 썩혀왔다.310) 여기서는 법적 유추추론의 특수한 문제가 제기되는 점만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연역적 추론이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귀납적 추론이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의 추론을 의미하는데 반해, 유추추론은 “특별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의 추론으로 일컬어진다.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의 추론을 의미하는 연역적 추론의 정당성에 관하여는 아무런 의심이 없고 근대논리학을 매개로 문제없이 입증할 수 있다.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추론하는 귀납적 추론은 고래로부터 연역적 추론에 비하여 보다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특별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추론하는 유추추론은 논리적으로 가장 문제가 많았다. 모든 특수한 것은 다른 모든 특수한 것과 구별된다. 어떤 특수한 것에 귀속된 것이 무슨 근거로 다른 특수한 것에도 귀속된다고 인정하고, 심지어 “추론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우리의 선례에서는 신체상해의 경우 동의의 정당성에 관한 효력에서 신체상해와 감금의 불법유형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감금에 있어 동의의 정당성에 관한 효력을 추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답은 한가지다. 신체상해에 정당한 것은 감금에서도 허용된다고 인정하는 것이 당연할 만큼 신체상해와 감금이 서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유사성이라는 다의적 개념이 추론의 핵심으로 들어왔다. 이와 함께 추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반성, 공통성의 의미가 주목된다. 신체상해와 감금의 경우에는 동일한 취급이 가능하기 위해 공통적인 무엇(말하자면 개인적 법익의 침해)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유추추론은 귀납과 연역을 종합한 것이라고 고래로부터 주장되었다. 추론의 대상인 특수한 현상(설례에서는 신체상해에 있어 동의에 관한 법적 규정)에서 일반적 사상의 추론이 이루어지면(설례에서는 동의가 있는 경우 개인적 법익침해의 합법성), 특수한 것으로의 추론(설례에서는 감금에 있어 동의가 있는 경우의 합법성)이 가능해진다(연역).311)

유추추론의 논리성에 관한 위의 설명에 따라 법적 사고의 분야에서 위 추론의 특수한 “공리적” 문제점에 좀더 접근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법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 유추추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적 규정의 흠결된 특별한 것(설례에서는 감금의 경우 동의)이 법적 규정의 존재하는 특별한 것(설례에서는 신체상해의 경우 동의)과 법적 규정(형법 제226조a)의 근거가 된 요소를 공유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형법 제226조a는 “동의는 위법성을 조각한다(volenti non fit iniuria)”는 전통적 “법사상”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동의자의 개인적 인격이 관계된 침해가 문제되고, 동의자가 그 개인적 법익을 처분할 능력이 있는 경우에만 타당하다.312) 거기다가 제226조a는 “공서양속”을 고려하도록 하여 처분의 자유성에 관해 특정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동의는 위법성을 조각한다”는 원칙과 그 조건이 신체상해와 마찬가지로 감금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타당하기 때문에 신체상해에 관한 제226조a의 법적 규정을 유추에 의해 감금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체상해와 감금의 경우 “유사성”은 감금의 경우에도 신체상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한도에서는 피해자에게 처분이 일임된 개인적 법익이 침해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사성이 충분하다면 유추추론은 정당하다. 유사성이 사라지고 본질적 차이가 드러나는 곳에서 유추는 한계에 부닥치고, 경우에 따라서는313) 소위 반대추론(argumentum e contrario), 다시 말해 조건의 상이함으로부터 상이한 법적 결과의 추론이 전면에 나선다. 예컨대, 제218조a(1976년, 1995년 개정)가 신설되기 전의 구형법에 의하면, 임산부의 동의로 낙태를 한 경우는, 낙태가 단순히 임산부의 신체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고, 태아는 자궁의 일부(어머니 신체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임산부가 처분할 수 없는 개인적 법익의 특성을 지니므로, 형법 제226조a의 반대추론에 따라 동의 그 자체가 위법성을 조각하지는 못한다.

법률가가 자주 유추추론 또는 반대추론이란 양자택일의 입장에 서고 그중 어느 것에 우위를 인정할지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에서 이런 유형의 법률적 논의에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14) 이 경우는 특히 자유법학파가 열심였다. 에네케루스와 바르톨로메직이 사용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315) 로마의 12표법(D, Buch IX, Titel 1)에 의하면 “네발 달린 짐승”의 소유자는 그 짐승의 야생성으로 인해 야기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오늘날에는 민법 제833조 “동물소유자”의 책임 참조). 이제 두발 달린 짐승, 예컨대 아프리카산 타조가 그 야생성으로 인해 입힌 손해에 대하여 소유자의 책임을 인정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자. “간단한 해석”으로 두발 달린 짐승을 “네발 달린 짐승”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유추추론 또는 반대추론의 양자택일에 이른다. 순수 형식논리적으로는 결론이 전혀 달라지는 이들 두 추론이 모두 정당하다. 네발 달린 짐승을 위해 규정된 것을 다른 짐승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발 달린 짐승을 위해 적용되는 것이 유사성을 이유로 위험성이 똑같은 두발 달린 짐승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로마인 스스로가 다음과 같이 유추추론을 하고 있다. 즉, “네발 달린 짐승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이 손해를 입힌 경우에도 본소를 제기할 수 있다”(Paulus, D 9 1 4). “임의로 행동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 동물적 본성으로 인해 특히 중대한 손해를 쉽게 야기할 수 있는 생물의 경우 특별책임을 인정하려는 것이 본 책임조항의 법정책적 목적이므로” 이러한 추론은 아주 정당하다.316) 유추추론과 반대추론 사이의 선택을 실제로 순수논리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논리학이 목적론과 결합되어야 한다.317)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즉, 추론과정은 논리적으로 명백히 정연해야 하지만 특정한 법률적 방법론에 의해 얻게 되는 특정의 사실적 이해와 결합되어야만 실무상으로 기능을 발휘한다. 더욱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도 무방하다. 법적 유추추론은 “법의 유사성”이란 근거 하에 그의 논리적 신뢰성과 법적 실무에 있어 유용성만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을 위하여 법률적 규정과 관습법적 규정이 직접적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효과가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철두철미 전제하면서 법의 지면에 더욱 더 그 뿌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법률과 관습법의 일반적 가치판단에 따라 직접적 관련사안뿐만 아니라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안도 함께 규율되고 지배되어야 한다.318)

흠결보충의 수단으로서 유추추론에 대해 언급될 수 있는 원칙이란 것이 너무도 많다. 법에 있어 “유추”란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개별적 문제들을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살펴볼 수 있고 상세하게는 다룰 수 없다.

1.) 유추는 모든 법규, 다시 말해 좁은 의미의 법률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규정과 관습법적 규범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외에도 유추추론은 개별 법역의 테두리 안은 물론이고 개별 법전의 테두리 안, 그리고 한 법전에서 다른 법전, 한 법역에서 다른 법역에 까지 이루어진다.319)

2.) 우리는 유추가 해석과 반대추론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유추추론과 반대추론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과 유추의 올바른 한계를 발견한다는 것도 언제나 그렇게 단순한 일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유추는 해석 뒤에, 그것도 확장해석 뒤에 개시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320) 어의로도 법적 판단을 하지 못할 때 해석의 한계가 있다고 예를 들어 원칙을 정한다면(헥: “해석명제의 한계는 가능한 ‘어의’에 있다”321)), 이러한 한계선상에서 유추추론의 탐구가 시작된다. 다시 한번 타조의 예를 상기해보면, 어의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아무리 최대한으로 노력한다 해도 타조를 “네발 달린 짐승”이란 개념에 종속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확장해석”을 수단으로 구체적 사실관계에 관련될 수 있는 경우 이를 소위 어의로 파악할 수 있는지 하는 점이 드물지 않게 문제된다. 예컨대, 구형법 제46조는 중지미수의 경우 “행위자”의 면책을 보장하고 있는데, “어의로 볼 때” “행위자”에는 교사범이나 종범과 같은 공범도 포함될 수 있는지 문제가 된다. 확실히 해석(특히 확장해석)과 유추 사이에 한계가 유동적인 면이 있다. 실무상으로 이는 모든 해석이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법적 조항을 유추하여 적용하는 것은 금지된 경우 실익이 있다(아래 5.) 참조).

3.) 해석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 특히 규준이 되는 “법사상”을 역사적 입법자 또는 “객관적” 법률 자체의 의사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탐구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 법률조항의 관련목적이 법률의 의미파악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하는 문제 등은 별 내용의 수정 없이도(mutatis mutandis) 유추에서도 되풀이된다(사람들은 목적론적 해석뿐만 아니라, 우리의 예시된 사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목적록적 유추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4.) 법률의 유추와 법의 유추에 관하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별이 존재한다. 법률의 유추는 하나의 구체적 법규(예컨대 형법 제226조a)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유사한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사상을 도출하고, 이에 반해 법의 유추는 “구체적인 법조항의 다수”로부터 출발하여 그로부터 (귀납적 추론에 의해) 일반적 원칙을 발전시키고 이를 법률조항에 해당되지 않는 사례에 적용한다(에네케루스의 입장).322) 법의 유추에 관하여 한가지 예를 더 든다면, 계약협상의 단계에서 계약상대방에 대한 유책의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한 민법의 일단의 구체적 조항(민법 제122조, 제179조, 제307조, 제309조, 제463조 제2문, 제523조 제1항, 제600조, 제663조)으로부터 계약협상을 시작할 때 이미 당사자에게 배려의무가 성립하고 이를 위반하면 손해배상의무를 진다는 원칙(소위 계약체결전의 과실책임)을 도출하는 것이다.323) 법률의 유추와 법의 유추 사이의 이러한 구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기본사상을 도출함에 있어 귀납적 근거가 기본적으로 한번은 보다 좁고, 한번은 보다 넓다는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단지 정도 차이의 문제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324) 법률의 유추와 법의 유추 사이의 구별을 다르게 정의하려는 시도에 관하여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325)

5.) 유추에도 한계가 있다. 예외는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유명한 원칙, 다시 말해 예외조항은 유추에 의하여서도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물론 문제로 될 수 있다.326) 예외적인 특정한 사례 또는 일단의 사례를 위해 어느 조항이 제정되었다면, 이 조항을 예외적 사정이 존재하지 않는 사안에 유추하여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사실 타당하다. 예컨대, 유책한 행위로 가장(家長)인 부(父)가 사망함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부양권리자인 유가족에게 부양연금청구권을 인정한 것과 같이 민법 제844조 이하에서 예외적으로 불법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도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였다고 하여,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다른 사람들, 예컨대 사망자의 임의적인 자선행위로 인해 보조를 받아온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조항을 유추적용해서는 안 된다.327) 이 경우는 반대추론이 적용된다. 즉, 특별한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법률효과를 부정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예외조항에 내재된 기본사상의 한도 안에서라면 유추는 적법하다. 예컨대 (구)형사소송법 제247조에서는 공범 또는 증인이 피고인의 면전에서 신문을 받을 경우 “사실을 진술하지 못한다”고 우려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원칙상 공판기일에 출석할 권리가 있는 피고인이지만 예외적으로 그를 퇴정시키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데, 증인이 피고인의 면전에서는 정신적으로 도대체 진술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위의 “개별” 조항을 유추적용할 수 있다. 라이히 재판소는 피고인이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증인이 공판기일에서 피고인의 면전에서는 발작을 일으켜 진술을 할 수 없었던 사안을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있었다(RGSt 73, 355 참조). 라이히 재판소는 “형사소송법 제247조 제1항에서 규정하는 기본사상은 증인신문의 경우 피고인의 출석이 불명확한 사실을 조사하는데 있어 장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있다”고 판시하였다. 증인이 피고인의 행위에 의해 유발된 신경질환으로 인해 그의 면전에서는 진술을 할 수 없다는 사정을 배려하여야 한다는 점은 “형사소송법 제247조에서 피고인의 퇴정을 정당화하는 요인으로 유일하게 명백히(!) 규정된, 증인이 사실을 진술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배려하여야 한다는 점과 동일하게 취급… 되어야 한다”(RGSt 73, 356 이하).328)

“예외조항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원칙은 매우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유추와 반대추론 사이의 한계에 관하여 이미 설명한 것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입법자에 의해 종종 제시되는 유추금지는 유추허용의 한계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그 가장 유명한 적용례가 “형법 없이는 범죄 없고, 형법 없이는 형벌 없다”는 형법상 원칙인데, 이는 통설에 의하면 위법한 행위를 이유로 한 판결과 형벌의 부과는 직접적인 적용법률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명령을 내용으로 한다(기본법 제103조 제2항, 형법 제1조 참조). 예컨대, 형법 제123조의 규정에 의하면 주거침입죄는 주거에 “침입”할 것을 전제로 하므로 밤에 악의적으로 전화하는 행위를 주거침입죄로 처벌하지는 못한다. 액화염소가 형법 제223조a 소정의 “흉기”에 해당한다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최소한 의문이다(BGHSt 1, 1).329) 허용되는 확장해석과 허용되지 않는 유추 사이에 사안별로 필요한, 그러나 자주 불확실한 한계를 설정함에 있어서는 다시금 어의가 기준이 된다.330)

유추추론 및 반대추론과 같이 비슷한 방법으로 흠결을 보충하기 위해 기존 규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제공된 다른 논의에 관하여는 여기서 다룰 수 없다. 따라서 “큰 것에서 작은 것의 추론(argumentum a maiore ad minus)”, 그 역인 “작은 것에서 큰 것의 추론(argumentum a minore ad maius)”과 유사한 논의 등은 생략한다.331) 이제 법률 또는 관습법적 규범의 논리적, 목적론적 “확장효력”으로는 추구하는 판결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 지우는 것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어떤 방식으로 흠결보충을 해야하는지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여기서 아주 간략하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예가 형법상의 금지착오에 관한 문제인데, 이는 1975. 1. 1. 제2차 형법개정법률(형법 제17조)에 의해 더 이상 “흠결”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까지는 직접적인 관련조문의 부재로 인하여 형법이론 중 가장 유쾌하지 못한 논쟁거리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1871년 형법은 가벌적 행위의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로 가벌적 불법인 “법률적 구성요건”을 충족한다는 사정 또는 결과를 알지 못한 경우(예컨대, 위증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거나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한 경우)는 고의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으로부터 면제된다고 규정하였으나, 작위 또는 부작위의 모든 사정과 결과를 인식하고도 금지를 위반하지는 않는다고 믿은 경우(예컨대, 동성연애가 일반적으로 허용된다고 생각한 경우)는 행위자의 고의가 어떻게 되는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곤혹스런 “흠결”을 보충하기 위하여 제시된 다양한 이론을 설명하고, 판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느냐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여기서 적절치 않다. 다만, 연방대법원이 업무를 개시하자마자 그 전년도까지 미해결이었던 위 논쟁을 매우 급진적인 “법의 보충”에 의해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하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다(BGHSt 2, 194). 연방대법원은, 요컨대 형벌은 책임을 전제로 한다는 형벌의 불가침적 원칙에 입각했다. 연방대법원은 책임의 “본질”(“책임은 비난가능성이다”, 200쪽)을 분석함으로써 이 원칙을 보다 상세히 다루면서 범죄행위자가 불법을 행한다고 인식하거나 최소한 “양심이 응분의 긴장을 했더라면”(194쪽) 그 인식이 가능한 경우에만 책임을 진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 이는 형법학에서는 몇몇 학자에 의해 이미 제기된 단순하면서도 만족스런 해결책이었는데, 그후 형법의 입법자에 의해 보다 더 단순하지만, “행위시 행위자에게 불법을 행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경우 이러한 착오를 회피할 수 없었던 때는 그는 책임이 없다. 행위자가 그 착오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경우는 형벌을… 감경할 수 있다”(형법 제17조)라는 형식으로 채택되었다. 연방대법원은 “책임원칙의 관철을 보장하고 책임의 본질에 부합하는… 그런 법원칙을 법발견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적용하는 것이 그의 업무에 해당한다”(204쪽)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어느 부분에 가서는 심지어 “흠결된” 법률규정을 법관이 보충하는데 있어서는 “책임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 모든 법률적 규정에 앞서 – 제기되는 법원칙”(209쪽)이 문제될 뿐이라고 판시하였다. 이는 거의 일종의 “자연법”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앞서 기술한 이중의미에서 “역사적”이라 할 위의 예에 지금 논의되고 있는, 아직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흠결의 문제를 대립시켜 본다면, 오늘날 논쟁이 분분한 안락사의 부분에서 제기된 사례 하나가 유용할 것이다. 고도의 의학적 처방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사망이 촉진될 정도로 위험성이 매우 크다면, 죽음에 괴로워하는 환자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의학적으로 몰핀 처방을 하는 행위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우리가 형법과 전통적인 그의 “해석”에 입각하여 본다면, 의식적으로 고려되었다 할 생명단축의 행위는 (상당히 고도의 개연성을 예상하였으므로) 모살의 일종이고, 다만 죽어 가는 환자의 “명시적이고도 진지한 요구”, 그것도 “의사선생님 도와주세요”와 같이 일상적 외침 속에서 전달되어서는 곤란한 그러한 요구에 근거하였을 때만 처벌이 경감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형법 제216조). 안락사에서 의사에게 금지에 대한 불가피한 착오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형법상 일견 보아 판단할 때, 불필요하고 비인간적이라 할 사례들이 너무 자주 발생한다. 그리하여 법률적 규정이 흠결되어 있고, 보충을 필요로 한다고 보면서,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근거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논점들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논점들로서 (간단하게 표어화 하자면) 죽어 가는 환자의 자기결정권, 비록 위험이 따른다 해도 의학적 처방을 통하여 환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사의 직업의무, “합리적” 이익형량(말하자면 “초법률적 긴급피난” 따위), 너무 가혹한 요구에 대한 (동정과 자비로서의) 도덕의 승리, 세계관과 종교관의 변화, “확신범”에 대한 특별 평가의 필요성, 인간으로 하여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도록 그냥 두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법에 보장된 “인간존엄”의 존중 등등이 언급된다.

방향을 돌려, 우리가 법적으로 승인된, 아니면 최소한 법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대표될 수 있는”) 여러 원칙이나 “토포이(Topoi)”로부터 어느 정도로 유추, 반대추론 및 이와 유사한 논의를 뛰어넘어, 법의 보충에 유용한 실질적 관점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일반적 규정으로서의) 입법, 사법과 이론에 있어 위에서 언급한 법의 형식이나 사고형식(책임의 본질, 초법률적 긴급피난, 제도) 외에 다음과 같은 점들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법의 일반원칙,332) 법질서의 정신,333) 지배층의 가치평가,334) “정당한 법”,335) 자연법 및 “사물의 본성”,336) “정당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아래 345쪽 주 61 참조), 그리고 (물론 자유법론에 한하기는 하지만) 자주 되풀이되는 주장인 “법관의 창조적인 고유한 가치평가”337) 등. 흠결이 관련된 사안에서 입법은 이 원칙 또는 저 원칙을 제시하는 등 일정하지가 않다. 프로이센 일반 란트법 총칙 제49조에서는 “일반원칙”에 근거하도록 하였고, 민법안 제1조에서는 “법질서의 정신”에 근거하도록 하였다. 1917년 교회법 제20장에서는 명시적으로 규범의 흠결이 있는 경우이거나 또는 유추에 의하여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의 흠결이 있는 경우에는 “모든 교회인이 따르는 한 일반적 법원칙에 의하여”(generalibus iuris principijs cum aequitate canonica servatis) 판단하여야 한다고 정하였다. 헤이그의 국제재판소 조약 제38조는 “문화민족이 승인한 일반 법원칙”의 준수를 선언하고 있다.338) 무엇보다도 저명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339)에게까지 소급되는 스위스 민법 제1조의 원칙이다. “법률에 정함이 없는 때는 법관은 관습법에 따르고, 관습법에도 정함이 없는 때는 그가 입법자라면 정하였을 내용에 따라 재판할 수 있다. 이 경우 확인된 이론이나 주장은 이를 지킨다.”340)

이러한 흠결보충의 원리들이 어디에 근거하고 그들 사이에 우열관계는 어떤지(관습법과 유추의 적용이 불가능할 때 지배층의 가치평가가 우선하고 그 다음에 일반적 법원칙이 탐구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또는 나아가 법관의 자기 나름의 가치평가가 우선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은 최후의 피난처에 불과한 것인지) 하는 문제들을 여기서 논의할 수는 없다. 이는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법철학적 문제인 것이다. 흔히 흠결보충에 대한 법관의 의무, 이런 또는 저런 흠결보충의 방법론을 법률에 의한 특별수권 또는 관습법, 특히 – 의심할 여지없이 한 문제의 실증적 해결이란 – 법관이 갖는 전통적 지위 등에서 근거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로는 앞서 언급한 유형의 법적 사고가 어떠한 과제를 갖는가 하는 문제에 국한한다. 이 문제는 매우 다양한 논의를 포함하기 때문에 간단한 지적만으로 만족을 해야한다. 논의의 다양함은 예컨대, “법질서의 원칙”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념 자체가 지닌 고도의 추상성에서 비롯한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타당한 법원칙의 문제인지, 아니면 “개개의” 법질서에 속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원칙을 염두에 둔 것인지?341) 우선 일반적 법원칙이나 더 나아가 “자연법”에 의한 흠결보충의 경우라면 절대적이고 일반적으로 타당한 법원리를 고려한 것이나, 최소한 이익과 의무의 형량 또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의 원칙과 같은 경우에는 이를 충족하는데 있어서 특정한 역사적 사정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반면에 “법질서의 정신”,342) 보다 분명하게는 “지배층의 가치평가”와 관계된 주장이라면, 이는 단지 역사적으로 타당한 원칙만을 직접 지칭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예로 든 경우를 생각한다면, 금지착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 비록 논란은 많지만 – 일반적으로 타당한 판단으로 생각될 수 있고, 반면에 고도의 위험을 수반하면서 고통감경의 조치를 취할 것인지 하는 문제의 해결은 역사적으로 가변하는 가치평가에 제한된 판단으로 생각될 수 있다. 흠결보충이 자연법사상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라 한다면, 법적 사고는 분명 법철학적 길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는 자연법의 논리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논할 수는 없다. 이와 달리 흠결보충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가치평가에 근거하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가 앞장에서 고찰하였던 법관의 (선재하는 가치평가에 근거한) “객관적” 가치평가에 관하여 설명하였던 바가 여기에 타당하다. 물론, (“공서양속에 반하여”와 같이) 구체적 가치평가를 필요로 하는 규범적 개념이나 그와 관련한 조항과 흠결보충의 원칙들 사이에 한계가 모호하고, 이와 함께 법을 보충하는 법발견과 법을 대신하는 법발견 사이에 한계가 불명확하여진다는 점이 새롭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은 정당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 또는 이익과 의무의 형량과 같은 흠결보충의 원칙, 또는 자우어(Sauer)가 제기한 “법적인 기본법률”, 다시 말해 “국가공동체를 위한 최대한의 이익, 또는 불이익보다 이익이 더 많은 것이 법적 원리가 되는” 그러한 원칙이다.343) E. 슈미트344)가 슈탐러와 그라프 쭈 도나(Graf zu Dohna)의 사상에 근거하여 흠결보충의 수단으로 제시하였던 정당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의 원칙에 있어서는, (특수한 의학 목적에 기한 임신중절의 문제에 있어서와 같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법적 규율을 적용할 것인가에 관한 단순한 목적론적인 논의뿐만 아니라, 목적 자체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법적, 도덕적 또는 문화적 가치평가를 필요로 한다. 이미 지난 세기 법학 서적에서 등장한 이익과 의무형량의 원칙345)은 의학적 목적에 기한 임신중절에 관한 판결에서 라이히 재판소(RGSt 61, 242)에 의하여 채택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죄유형으로서 외형상 구성요건을 충족시키는 어떤 행위가 법익을 보호하거나 법에 의하여 부과되고 승인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는 그러한 생활사정 하에서는, 그 행위가 합법적인지 또는 허용되는지 또는 위법한지 하는 문제는 현행법에서 끌어낼 수 있는 서로 충돌하는 법익 또는 법적 의무 사이의 가치관계에 의존하여 판단되어야 한다”(254쪽).346) 이러한 주장은 실용적인 기술적 차원의 논의(급박한 법익의 침해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법익 또는 의무의 희생은 얼마나 필요한지) 외에도 다시금 진정한 의미의 가치평가(어느 이익, 어느 의무가 보다 고차적이고 보다 중요한지)를 요구한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궁극적으로는 또 다시 어느 정도 “객관적” 가치기준에 의존하여야 한다. 라이히 재판소는 개별 법익에 대한 가치평가는 형법이 정한 형벌의 크기로부터 끌어내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현행법”과의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예컨대, 모살과 고살은 낙태보다 더 중하게 처벌됨으로써 사람의 생명이 태아의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우어에 의하여 제기된 “법적 기본법률”도 이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스위스 민법전의 규정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법관이 입법자와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이 정당하였을 입법인가에 관하여는 어느 정도로 자신의 고도의 개인적 의견에 근거할 것이며, 어느 정도로 역사적 입법자에의 구속을 준수하여야 할 것인지? 입법자 자신은 법을 제정함에 있어 도대체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지? 스위스의 법학자인 마이어-헤이오쯔(Meier-Hayoz)는 엄청난 분량의 저서(“입법자로서의 법관”)에서 스위스 민법 제1조 제1항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법자에 의한 법발견의 문제, 즉 “입법방법론”의 문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문제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지적만 할뿐이고 자세히 논할 수는 없다.347)

끝으로, 자유법학파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많은 법이론가들에 의하여 흠결보충의 수단으로서 자주 언급되온 “법관의 자기 고유한 평가”에 관하여는, 제6장에서 법관의 가치평가에 대하여 설명한 이상을 덧붙일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기 고유의 평가”란 것이 어느 정도로 자기 현실의 개인적인, 다시 말해 주관적인 평가를 의미하고, 어느 정도로 객관적 가치기준에 종속하는 평가를 의미하는지 하는 문제이다.348) 흠결보충의 경우에 의심스러울 때는 바로 객관적 판단을 얻으려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흠결보충으로서 모든 법발견의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흠결보충이 불가능한 그와 같은 사례는 없는지, 다시 말해 실정법의 흠결 외에 전체 법질서에서의 흠결은 없는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문제는 법학방법론적 문제라기보다는 법철학적 문제라 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자면, 사실상 보충이 불가능한 그러한 흠결이 존재할 수 있고, 슈탐러가 “모든 법적 문제에 대하여는 모든 법적 해답이 가능”하여야 한다고 요약해서 말한 법질서의 완결성이란 이론349)은 절대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다.350) 프랑스 민법 제4조(“Le juge qui refusera de juger, sous prétexte du silence, de l’obscurité ou de l’insuffisance de la loi, pourra être poursuivi comme coupable de déni de justice”: 법이 침묵하고 있다거나 모호하다거나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하는 법관은 재판거부의 책임으로 소추될 수 있다)에 그 고전적 형식으로 반영되어 있는 저 유명한 재판거부금지의 원칙이 타당하긴 하다. 또한 이러한 금지의 원칙이 법관으로 하여금 모든 법적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도록 의무 지우긴 한다(위 303쪽 이하 참조). 그러나 이러한 금지 원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351) 흠결의 상황에서 법관이 판단을 거부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든 법적 문제에 있어 법원이 꼭 분쟁을 해결하여야 할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적 분쟁이나 국제법적 분쟁의 경우를 생각하여 보라! 우리 헌법재판소가 갖는 광범위한 권한행사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법원이 판결을 할 임무가 있고 또 그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판결이 법원칙에 의하여 충분히 근거 지울 수 있고, 자의적 판단이 아닌 진정한 법 판단이라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법원이 자의에 따라 판단을 하거나 오로지 기회의 관점에서만 판단할 권한은 없으며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지도 않다는 것은 일반적이다. 연방대법원은 성의 평등취급에 관한 문제의 연구에서 법관이 “법률을 뛰어넘어 법을 발견하여야 할 경우 (법원칙의) 단순한 전개에 의하여 법을 발견하는 대신에 합목적성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이는 권력분립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하였다.352)

아무튼 논리적이고 법이론적으로 필연적인 법질서의 완결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질서의 완결성은 하나의 “규율적(regulativ)” 이념이라 할 수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존재하여야 할 것인지를 규율(Regel)로서 요구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그러한 이성의 한 원리”353)와 같다 할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법적 문제는 최대한 법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고, 실정법의 흠결도 가능하다면 법사상에 의하여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Ⅱ.

사람들은 법질서의 완결성이란 원칙과 함께 법질서의 단일성(Einheit der Rechtsordnung)이란 원칙을 자주 거론한다. 법질서의 단일성이란 원칙은 본 장에서 다루고자 한 두 번째 문제, 즉 법의 오류정정이란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법질서의 단일성이란 의미가 바로 위와 같은 문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긴 해도,354) 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단일성 원칙의 한 측면이 바로 법질서 내에서 모순금지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모든 하자가 오류는 아닐지라도 오류는 “하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오류에 해당하는 하자를 다루기로 한다(그 외 다른 하자에 관하여는 III.에서 언급한다).

법질서 – 논의의 단순화를 위하여 다시금 실정법을 전제로 한다 – 에 있어 오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흠결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오류가 처음부터 법규 체제 안에 존재하였는가 아니면 나중에 발생하였는가에 따라 1차적 오류와 2차적 오류로 구분된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잘 눈에 띈다. 일시에 효력을 가지게 되는 법 체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므로 좀처럼 오류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에 반하여, 새로 규범을 제정함에 있어 전체 법질서의 기존 조항들과의 관계에서 오류가 있는지 여부를 입법자가 생각하지 않는 경우는 쉽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변혁과 붕괴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기존 법상황과 새로운 법상황 사이에 완전한 불일치가 발생한다. 독일의 경우 1918년, 1933년, 1945년과 1989년 이러한 경험을 하였다. 법원과 다른 국가기관은 기존의 법조항 중 어느 것이 새로운 법 상황과 일치하고, 어느 것이 일치하지 않는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보다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야 했다. 1945년 이후 “합헌주의 이전의” 입법자가 제정하였던 법규가 1949년 기본법과 새로운 법치국가질서에 부합하는지가 언제나 심사되어야 했다.355) 이 경우 신, 구법 사이의 불일치가 기술된 법규만으로는 파악되지 않고 신, 구법의 “정신”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 특히 어려운 문제를 낳는다.

이로써 법질서 내에서의 오류란 어떤 특성을 갖는지 하는 중심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이 오류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과 – 여기서 그때그때 함께 다루게 될 – 방법론적 의의를 갖는다.356)

1.) “법률기술상의 오류”. 이는 개념이 통일되지 않은데서 존재한다. 예컨대 공법상 공무원 개념과 형법상 공무원 개념은 전혀 같지 않다. 공법상 공무원은 아니더라도 형법상 공무원에 해당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 다른 법규 안에서 “물건”, “점유”, “착오”, “공공성”, “과실”, “항변” 등의 개념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를 “법개념의 상대성”(참고문헌은 위 163쪽 주 35 참조)이라 한다. 법질서는 “구체적 법규정의 특정한 의미에 따라 개념의 개별화된 변형을 요구한다”.357) 예컨대, 형법상 과실의 개념은 민법상 과실의 개념과 다르며, 보다 구체적인 뜻을 갖는다. 왜냐하면 책임을 확정함에 있어서는 손해배상의 경우보다 형벌을 부과하는 경우에 더 고도의 구체적 사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사소송에서는 의사가 사정에 따라 다행히 책임능력의 결여에 근거하여 과실치상의 죄책으로부터 무죄가 될 수 있는 경우에도, 민사소송에서는 “일반인”이 그에게 거는 기대를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시 말해 – 민법 제276조가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 “거래상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하였기 때문에 과실치상으로 인하여 손해배상의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해석과 이해”의 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개념들은 그때그때의 관계, 특히 규범적이고 목적론적인 관계에 의하여 의미와 내용을 갖게 된다. 따라서 법적 용어의 단일성은 사물의 상대성과 비교하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법질서의 단일성과 무오류성을 이와 같이 상대화시킨다 하여”358) 법의 실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이에 반하여 다음의 고찰은 매우 중요하다.

2.) “규범의 충돌”. 이는 추상적으로 어떤 행위 또는 구체적인 어떤 행위가 동시에 명령되어져 있기도 하고 명령되어져 있지 아니하기도 한 경우, 또는 금지되어져 있기도 하고 금지되어져 있지 아니하기도 한 경우, 또는 심지어 명령되어져 있기도 하고 금지되어져 있기도 한 경우에 존재한다. 법질서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명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범죄행위(살인, 협박 등)를 금지하고 있는 경우를 그 한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상관이 전쟁포로의 사살을 명하였다고 할 경우, 부하는 무조건 그 명령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살인행위를 중지할 것인지 하는 규범의 충돌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규범의 충돌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음은 명백하다.359)

우리가 이제 위와 같은 규범충돌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살펴보면, 대다수의 규범충돌이 단지 외형상으로만 그렇다는 점이 우선 두드러진다. 일응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규범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보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우선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데, 위와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할 수 있다. 법학은 규범의 조화와 그를 통하여 모순을 회피하기 위하여 수 백년 동안 일련의 원칙을 정립해왔다. 그 배경으로 법질서의 단일성과 무오류성의 원칙이 “요청”되었다. 이들 원칙들로는, 특별법이 일반법에 우선한다(“lex specialis derogat legi generali”), 상위법이 하위법에 우선한다(“lex superior derogat legi inferiori”), 신법이 구법에 우선한다(“lex posterior derogat legi priori”)는 것 등이다. 물론 이들 원칙들은 논리적으로 자명하지는 않다. 그 근거를 지우는데 있어 때로는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한다.360) 구법이 좋은 법이어서 신법보다 우선하였던 시기도 있었으므로 이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3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원칙의 이론적 정당성이 자명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들 원칙 사이의 내부적 관계는 어떤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하위의 신법은 상위의 구법에 우선하는지? 이 경우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 적용되는지 아니면 신법 우선의 원칙이 적용되는지? 우리는 여기서 단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뿐이고 이를 다룰 수는 없다.362) 규범의 외형상 모순을 전체 법질서 안에서 해소한다는 입장에서 규범충돌에 관한 논의는 법적 사고의 핵심적 한 부분을 구성한다. 바호프가 제기하였던 “헌법에 반하는 헌법규범”의 문제도, 헌법의 전체적 체계 안에서 각각의 규범이 지닌 효력의 우열을 인정할 수 있다고 믿고 상위규범과 특별규범에 우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부분적으로 이에 속하는 문제라 할 것이다.363) 일반적으로 우리는 해소불가능한 규범충돌의 사례는 거의 드물지만 그래도 전혀 없다고 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 서로 모순된 여러 규범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선하는” 효력,364) 다시 말해 유일하게 타당하고 규준이 되는 효력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통설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 모순된 규범을 적용하지는 못하고, 따라서 흠결보충의 일반적 원칙에 따라서 해결하여야 할 이른바 “충돌로 인한 흠결(Kollisionslücke)”이 생긴다.365) 여기서 법질서의 무오류성과 완결성의 이론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이제 살펴보기로 한다.

3.) “평가의 모순”. 이는 바로 규범충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입법자가 행한 가치평가에 모순이 있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 우리 형법은 사람을 고의로 살해한 경우를 유기죄보다 더 중하게 처벌한다. 그런데 어머니와 그의 사생아 사이의 관계에서 이와는 모순되게, “출생 중에 또는 출생의 바로 직후에” 영아를 고의로 살해하는 “영아살해죄”는 출생직후에 살해의 고의 없이 아이를 유기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보다 더 가볍게 처벌될 수 있다. 물론 양자의 경우에 법정형은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서 똑같다(형법 제217조 제1항, 제221조 제3항). 그러나, 영아살해의 경우에는 결과에 따라서는 6월의 징역형으로 형이 감경될 수도 있어(형법 제217조 제2항) 유기치사의 경우와 비교하여 “보다 덜 중한 사안”이 인정될 여지도 있다. 이점에서 “모순”이 있다는 점을 라이히 재판소(RGSt 68, 410)도 인정하였다.366) 또한 보다 더 중한 범죄인 상해죄나 협박죄에 있어서는 미수범이 처벌되지 않는데 반하여(형법 제223조, 제239조), 보다 덜 중한 범죄인 재물손괴죄에 있어서는 미수범이 처벌되고 있으므로(형법 제303조), 이를 평가모순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367)에서 우리는 입법자가 자신의 가치평가와 충돌에 이르고, 평가의 모순이 내재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입법자의 가치평가가 우리의 독자적인, 말하자면 외부에서 법률에 가해진 가치평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예컨대 명예훼손에 대한 형량이 소유권과 재산침해에 대한 형량과 비교하여 불만족스럽게 낮다고 생각하는 경우와 이를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미 처음에 밝힌 바와 같이 내재적인 평가의 모순에 관하여서만 다루기로 한다.

법적용의 기술에서 이는(=평가의 모순) 무엇을 요구하는지? 진정한 규범충돌이 거의 존재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평가의 모순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라이히 재판소는 앞서 인용한 판결(RGSt 68, 410)에서 “법률에 근거하는 이러한 모순은 판결로써 제거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368) 상해죄와 재물손괴죄의 미수범을 다루는데 있어 평가의 모순을 법관이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369) 내재적 평가의 모순은 해석에 의하지 않고서도 모순이 제거될 수 있는지를 주의 깊게 시험하는 가시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370)

4.) “목적론적 모순”. 이는 매우 드물다. 규범 사이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드러나야 할 곳에서 그렇지 않는 경우에 목적론적 모순이 존재한다. 입법자는 특정한 규범을 통하여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된 다른 규범을 통하여 이것이 거부되는 경우이다. 또한 입법자가 어떤 규범을 제정하였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규범의 제정을 게을리 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로는 구형법 제28조b의 예가 있는데, 이는 피고인으로 하여금 노역을 제공함으로써 벌금형의 납부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형 집행기관에게 권한을 부여하였지만, 정작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제2항에서 위임하고 있는 “상세한 규정”이 제정되지 않은 경우이다. 이 경우 물론 모순을 말하는 대신에 보충불가능한 법의 흠결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입법자의 전체 행위에서 보면 하나의 목적론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론적 모순은 경우에 따라 규범충돌로 이어질 수 있고, 따라서 규범충돌과 같이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평가의 모순과 같은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구형법 제28조b의 예에서는 “상세한 규정”이 제정되지 않은 한 효력이 없다는데 이론이 없다.

5.) “원칙의 충돌”.371) 이는 자주 되풀이되고,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다. 나는 이 원칙의 충돌을 법질서의 형성과정에 여러 모순되는 기본사상이 관여함으로써 법질서에 나타나게 된 부조화로 이해하고자 한다.

형법에서 다시 한 번 간단한 예를 취해보기로 한다. 근자에 책임원칙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관철하려는 움직임, 즉 범죄의 의사와 비난받을 부주의에 따라 형벌의 유무 및 양을 결정하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한쪽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형법에서 범죄행위의 외부에 나타난 결과가 처벌을 위하여서는 중요하다는 전통적인 형벌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책임원칙에 반하여 동일한 책임에 대하여 다른 결과가 발생하였다 하여 형법상 서로 다른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수범은 기수범보다 가볍게 처벌된다(형법 제23조 제2항). 또 신을 벌하는 경거망동은 “아직 다행스럽게도” 아무에게 피해를 가져다주지 않았으므로 처벌되지 않는다.

이 경우 어느 정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모순,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 기본사상들 사이의 이해할 수 있는 타협의 문제가 있다 한다면,372) 법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그때마다의 다른 원칙들의 근거가 된 여러 관점으로부터 전체 법질서가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초래되는 원칙의 충돌은 보다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다. 입법정신은 때로는 점진적인, 때로는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변화에 직면한다. 그러나 과거 정신에 의하여 지지된 법률이 새로운 법률과 함께 계속 효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자주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1930년과 1940년 독일법에 있어서는 자유법치국가의 원리와 전체주의적 지도자국가의 원리가 서로 상쇄되지 않고 충돌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경제법에 있어서는 자유시장질서의 법이 점진적으로 국가적, 법적 계획경제와 충돌해왔다. 지금도 우리는 기본법의 지배하에서 원칙에 위배하고, “다른 신체”인 것처럼 보이는 과거 규정들을 발견하곤 한다. 말하자면 위(353쪽 이하)에서 “2차적 오류”라 한 그러한 유형의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모든 법에 있어 최고의 원칙이라 할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의 원칙 사이에 충돌을 법질서에서는 항상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373) 이들 원칙 가운데 어느 것도 순수하게 그대로 관철될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원칙에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양보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정의는 철저한 “구체화”, 다시 말해 사람과 상황의 개별적 관계에 대한 고려를 요구한다. 반면 법적 안정성은 이러한 관계로부터의 철저한 추상화, 이를테면 명확한 연령한계, 확정된 기간, 정확한 봉급표 등을 요구한다. 조숙한 13살 짜리 소녀와 성행위를 한 사람은 무겁게 처벌되고, 반면 아직 성숙하지 않은 14살 짜리 소녀와 성행위를 한 사람은 처벌되지 않는다(형법 제176조) 한다면, 이는 “부당하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법적 안정성은 이 경우 입법자에게 명확한 연령한계의 설정을 요구한다. “규범을 뿌리는 자는 정의를 수확할 수 없다.”374)

정의와 법명확성 사이의 대립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정의와 실정법의 효력 사이의 대립에 있어서도 정의와 법적 안정성 사이의 “궁극적 대립”(라드부르흐)은 존재한다. “법적 안정성은 실정법이 부당하더라도 그 적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의는 경우에 따라 실정법의 거부를 요구한다. “실정법에 의하여 보장되는 법적 안정성이 실정법의 부당함과 비교하여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에 이른 경우에는 부당한 실정법은 정의에 양보하여야 한다.”375) 그러나 이러한 주장 속에는 잠재적 모순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하나의 총체적 문제가 내재한다. 이는 실정법과 초실정법 사이의 관계, 후자에 의한 전자의 수정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정의는 – 합목적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 법의 내재적 원칙이자 초월적 원칙이기도 하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단지 법을 정의에 관한 입법자의 현실로 존재하는 노력의 산물로만 이해하여, 그 결과 입법자 자신이 다른 원칙을 위하여 이 (정의의) 원칙을 거부한 것인지를 묻고자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의는 실정법이 타당한지를 항상 판단하는 “법적 이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초실정법에 의하여 실정법을 수정하는 문제영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내재적인 원칙의 충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우선 살펴야 할 것이다. 법규범이나 법제도 안에서 서로 다른 법원칙들이 충돌하여 법규범이나 법제도가 내적으로 모순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부분적으로 원칙의 충돌은 보다 고차원적인 가치평가의 충돌로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충돌은 다른 가치평가의 충돌과 마찬가지로 그냥 감수하여야 한다.376) 예컨대, 책임형법과 결과형법 사이의 충돌이 그렇다. 그러나 다른 충돌의 경우는 인간이 그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그런 유형의 것이다.377) 혁명이 있은 후 구법과 신법 사이의 충돌이 그렇다. 국민사회주의가 정권을 장악한 뒤 첫해 동안 새로운 원칙과 기본적으로 모순하는 바이말 공화국의 법이 어느 정도 효력을 갖는지 하는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 경우 기존의 법을 폐지하기 위하여 독특하면서도 방법론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378) 1945년 몰락한 후에는 – 물론 거꾸로 된 주장이긴 하지만 – 새로운 법치국가적, 인간주의적 법사상에 충돌하는 “제3 제국”의 다수 법률이 별도의 폐지 없이도 효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유사한 문제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예컨대, 벵글러(Wengler)가 비교법적 방법론으로 근본적 연구을 하였다.379) 벵글러는 법질서에서 얼마나 보편적으로 이질적인 또는 이질화된 법소재가 다루어지고, 변경되고, 부분적으로는 특별한 수권이 없이도 배제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구법과 신법 사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우선은 특정한 지역에서 속지법으로 효력이 있던 법질서가 일괄적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되는 경우”(68쪽) “상호 지역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유럽국가와 그 식민지 사이, 또는 영국과 미합중국 사이, 또는 독일과 국민사회주의시대 독일에 편입된 지역 사이의 관계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우리의 “원칙의 충돌”이란 관점을 구법과 신법 사이의 관계에 국한하여 보기로 한다면, 사실관계의 변화,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관념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논쟁의 대상이 된 법규를 둘러쌓고 있는”(70쪽) 나머지 다른 법률에 대한 입법적 태도의 변화 등으로 인하여 특별히 신법을 제정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원칙에 위반하는 법의 효력이 소멸하는 결과가 생긴다는 원칙이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타당한지를 벵글러는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입법의 정신”(70쪽)은 형식상으로만 효력이 있는 구법의 효력을 부정한다. 그래서 1945년 이후로는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사정에 맞추어 법을 적용하도록 권한이 주어지는, 대부분 민사법 질서에서나 그 특징이라 할 일반조항의 효력에 따라 국민사회주의적 법률의 적용을 제한하도록”(71쪽) 법관에게 명령되어지기도 한다. 더 이상 구체적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벵글러는 1949년 “당시의 입법자가 현안이 된 문제를 규율하기 위하여서라면 무조건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특정한 법철학적 기본사상이 국민사회주의적 입법에 대한 평가기준이 된다”(73쪽)는 사고방식을 유용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기본사상에 저촉하는 법률은 효력을 상실한다.”(74쪽)380) 이미 위(173쪽 이하)에서 언급한 “헌법합치적 해석”이 “헌법 이전의 법”에 관계하고, 협의의 의미에서 헌법 이전의 법을 “해석하고”, 현행 헌법과 그 현행 헌법에 합치한다고 해석되는 법률의 원칙과 내용적으로 충돌하지 않게 할 목적으로 헌법 이전의 법을 “형성하는” 것인 한, 이러한 헌법합치적 해석은 구법을 새로운 전체적 법상황에 적응시키려는 작은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381)

원칙의 충돌에서 비롯한 한 가지 결과를 이제 보기로 한다. 우리는 “헌법에 위반하는 헌법규범”의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다양한 논점을 지닌 문제이다(참고문헌으로는 359쪽 주 80 참조). 이미 문제의 형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헌법의 내적 모순성은 언제나 원칙의 모순일 수 있다. 기본사상이 표출되어 있는 헌법의 규정들이 바로 그 헌법에서 실정화된 원칙들과 모순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이 경우에는 신법 우선의 원칙이나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헌법에서 실정화되지 않는 일반적 원칙들과도 모순될 수 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1953. 12. 18. 판결382)에서 기본법 제117조 제1항이 법적 안정성과 삼권분립의 원칙에 합치하는지를 심사한 적이 있다. 기본법 제117조 제1항에서는 남녀 평등의 원칙에 반하는 법은 1953. 3. 31.이 지나면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입법자가 평등권의 원칙과 관련 있는 법소재(물론 가족법)에 대하여 법률을 제정하지 않을 경우(이는 1957년 남녀평등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사실이었다), 기본법 제117조는 법관으로 하여금 발생된 “흠결”을 보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법적 안정성과 권력분립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고등법원은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였다. 사실 위와 같은 원칙은 연방헌법재판소도 인정한 바와 같이 “기본법에서 마주하게 되는 근본결단”에 속하는 원칙이고, 특히 권력분립의 원칙은 기본법의 “효력 있는 조직원리”인 것이다.383) 법관이 발생된 흠결을 기본법 제117조에 의하여 보충함으로써 단순하게 보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법적 안정성과 권력분립의 원칙에 모순하게 되는 경우라면, 위 조항은 헌법에 위반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써 평등권의 원칙 자체는 아니더라도 이를 다른 헌법원칙과의 모순된 상황에서 관철하여 형식상 효력 있는 헌법(기본법 제117조 제1항)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법질서 안에서 법이 최상위 원칙에 위반되어 무효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는 많은 부분에 관심을 할애할 수 없다. 연방헌법재판소가 기본법 제117조를 무효로 보아야 할만큼 법적 안정성과 권력분립의 원칙이 침해되지 않았다는 방식으로 기본법 제117조의 무효 문제를 판단하였다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헌법에 위반하는 헌법규범의 무효 가능성을 두고 연방헌법재판소에 가해진 기본적인 비판을 우리는 다루지 않겠다.384) 원칙의 충돌로 인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결과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Ⅲ.

헌법에 반하는 헌법규범의 개별적 사례군을 논의하면서 바호프 등 몇몇 사람은 순수한 실증적 성격을 지닌 그런 헌법원칙(권력분립의 원칙, 기본법 제19조 제4항에 표현된 “재판받을 권리의 보장” 등)에 위반하는 경우와 “초법률적” 법, 일종의 “자연법”에 속하는 헌법원칙(법 앞의 평등원칙 등)에 위반하는 경우를 구별하였다. “초법률적 법”에 관하여도 그것이 헌법전에 “실정화” 되었는지(기본법 제3조 소정의 바로 위에서 언급된 평등원칙 등)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최근의 자연법적 원칙으로는 “책임 없이는 형벌 없다”는 원칙을 들 수 있다)를 다시 구별할 수 있다.385) “실정화되지” 않은 초법률적 법이 “불문(不文)헌법”으로 고려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뒤 다시 제2차적 의미를 갖는다.386) 왜냐하면, 법적용자, 특히 법관에게 어떤 규정이 초법률적 법에 위반한다고 하여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이와 다르게 수정하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헌법에 위반하는 헌법규범”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실정법 상호간의 모순을 다루었다. 우리가 위 II.에서 고찰한 모순은 법질서의 내재적 모순이었다. 다만 이와 다른 모순에도 우리는 벌써 여러 번 마주쳤는데 이제 총괄적으로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초법률적 모순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이는 실정법의 형성과 판단을 위해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지만 그 자체로는 실정법을 초월한 그런 원칙, 다시 말해 정의, 공공복리, 국가이성, 법적 안정성, “자연법”, “정당한 법”, “도덕”, “양심” 등 무어라 불러도 좋은 그런 최상위 원칙에 실정법이 모순인 경우를 말한다. 만약 우리가 실정법과 정의, 법과 국가이성, 법과 도덕 또는 법과 양심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우리의 논의에 끌어들인다면, 이는 이 책에서 설정한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 분명하다.387)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법적용론의 관점에서 생기는 측면만을 서술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법적용자의 법률에 대한 구속의 원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해석 또는 기타 방법론적으로 정당한 법률의 취급을 통해 “현행법률(lex lata)”에서 통용될 수 있는 유일한 판단으로 어떤 법적 판단이 제공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용의 소명을 받은 사람(간략하게 법관)이 이와 같이 유일하게 통용될 수 있는 판단이 자기에게는 어떤 보다 높은 관점에서 보아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경우 이를 배제할 수 있거나 또는 배제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정한 사안에서 법관은 “법률에 반하여” 판단할 수 있거나 또는 판단해야 하는지?388)

다시 한번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드는 것이 허용되었으면 한다. 법관보 시절 어느 날 나는 일요일의 근로금지에 위반하여 명망 높은 한 제과점 주인이 형사재판을 받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일요일 자기 가게의 수요는 완전히 날씨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심각한 경제적 손해를 회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위반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만약 일요일에 날씨가 나쁘면 많은 손님을 기다려야 하고, 반대로 날씨가 좋으면 많은 사람이 외출하고 물건은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로 마지막 순간에, 심지어 일요일에조차 어느 정도의 증가된 수요에 맞추어 빵을 구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피고인의 이러한 변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법률조문에 따라 형벌을 선고받아야 했다. 개별적 사안에서 합목적성이 없다고 해도 “법은 법이어야 한다.” 법관은 입법자를 정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법률에 구속된다. “초법률적 긴급피난”과 같은 개념(위 311쪽 이하 참조) 역시 흠결의 보충을 위해 사용되어야지 법률의 정정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점은 위의 단순한 제과점 사안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나 “정의는 그로 인해 세상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라는 도도한 원칙은 법률이 단지 어떤 마음에 들지 않고 합목적성을 결여한 결과를 초래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바로 공공복리를 위협하거나 정의의 최고원리를 침해하거나 또는 “자연법” 및 “도덕규범”에 위반하는 경우에도 타당한가? 법률실증주의에 보편적으로 사로잡혀 있었고 전체주의국가를 아직 경험하지 않았던 시대에 있어서조차 법관의 법률에 의한 구속은 법률이 “부당”한 경우(통틀어 이렇게 일반화하고자 한다)에는 한계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법관의 법률에 의한 노예와 같은 구속을 배격한 자유법론자들의 개개 주장을 제외하더라도,389) 매우 온건한 학자들도 예외적 사안에서는 법률에 반하는 판단이 통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이에 관하여는 아래 382쪽).

이 경우 물론 부분적으로 해석과 흠결보충의 이론적 기반에서 강제될 수 있는 그런 “정정”이 문제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실무상으로는 비록 중요하나 위험성이 없는 법률의 정정에 관하여는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할 생각이 없다.390) 또한 실수로 법률적 표현이 잘못된 경우 진정한 법률의 의사를 “해석”이라는 명목으로 관철하는 문제인 소위 편집에 있어 오류의 정정에 관한 문제도 여기서는 제외한다.391) 우리는 방법론상으로 정당하게 탐구된 법률 자체의 의미가 도덕감정에 어긋나는 경우, 그리고 모든 의미탐구의 과정을 – 제한적 또는 확장적 해석,392) 흠결의 가치평가적 확정 및 유추에 의한 보충 또는 구체적 법질서의 정신에 근거한 보충을 – 거쳤으나 결과가 불만족스런 경우를 전제로 한다. 연방대법원은 한 중요한 판결(BGHZ 4, 153)393)에서 “민법 제400조가 추구하는 목적이… 반대로 나타나는 특별한 경우에는 그 법률의 명백한 문언에 반하여 거기서 금지된 규범을 약간 완화하고(!) 목적에 부합되게(!)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가능성(일반적으로 양도가 금지된 손해배상청구권의 특정인에 대한 양도가능성)도 신중하게 인정되어야 한다”(157쪽)고 판시하면서 유감스럽게도 어느 정도까지가 의미탐구의 문제이고 어느 정도까지가 법률정정의 문제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이 경우 신중하게 인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법률의 현실적 정정인가, 아니면 단지 목적론적인 제한해석인가? 위 판결은 나아가 양도가능성의 부정을 “제400조의 의미와 목적에 반하는 문구해석”(158쪽)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는데 이는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일종의 법형성”(158쪽)이란 표현을 판결에서 명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전자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전자의 의미로 이해할 때만 위 판결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다. 따라서 명백한 자구의미가 침해되었고 편집상의 오류가 있을 경우에만 명시적인 자구에 반하더라도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위 판결이 최소한 결론에 있어서는 법률의 의미를 정정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한다.394) 법률적용과 법률정정의 한계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많은 다른 한계들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사안에서는 항상 분명하지만은 않다. 이점에 대해 바꿀 것은 거의 없다.

이제 해석 등에 의해 행해진 의미탐구로써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비합목적적이라거나 부정당하다거나 반자연법적이라거나 반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초월적” 근거에 의해 인정하기 어려운 결론에 도달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온건한 학자들조차도 법치국가적으로 확고한 사정 하에서도 법관의 법률에 의한 구속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이러한 “온건한 학자들”로는 예컨대 한스 라이헬, 에른스트 베링 등을 들 수 있다. 한스 라이헬(Hans Reichel)은 1915년 그의 저서 “법률과 법관의 판결”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기하고 있다. “법관은 법률의 규정이 보편적인 도덕감정에 위반되어 이를 무시하는 쪽보다 준수하는 쪽이 법과 법률의 권위를 현저히 위태롭게 할 경우는 의식적으로 법률의 규정을 회피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395) 베링(Beling)은 1931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입법자의 편에 속하는 법제정의 권한은 절대적으로 무제한인 것은 아니다. 국민은 어떤 가치에 관하여는 이를 기본적인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입법자도 이에 반하는 규범을 제정할 권한이 없는 경우가 있다.”396) 여기서는 말하자면 기본적인, 국민 사이에 보편적인 가치평가란 이름으로 법률에 복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한계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법관이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법관의 지위가 기본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행동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은 1924. 1. 5. 당시의 인플레이션 직후 저당권의 재평가 문제에 관하여 라이히 재판소 소속의 법관회의(Vorstand des Richtervereins der Reichsgerichtsräte)에서 행한 놀란 만한 결의에 의해 증명된다. 이는 신의와 성실에 반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법원에 의해 무효로 선언될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입법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397)

법, 정의와 도덕에 관한 기존관념에 저촉된 전체주의 국가의 입법행위는 모든 법률가를 매우 흥분시키는 가운데 법관의 부정당한 법률에 의한 구속의 문제를 특히 절실한 것으로 제기했다. 물론 법률을 부정당하고 부도덕적이라 비난하면서 법관이 국민사회주의 입법자를 헐뜯을 수는 없다. 당시 입법자가 제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입법자에게 장해가 되는 그런 법률과 마주하여서만 그 당시 입법자는 이러한 비난을 감수하고 받게 된다. 당시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에 있어서는 법원과 행정관청이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고 시대 조류에 별 다른 생각 없이 따를 것으로 기대하는 한에 있어서만 법률에 대한 구속이 완화되었을 뿐이다.398) 그러나 1945년 국민사회주의가 맞이한 것처럼 전체주의적 체제가 붕괴하면, 그 당시 제정되었던 법률이 법의 이념 또는 도덕법칙에의 위반을 이유로 전체적으로 무효였다는 점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입법자가 냉소적으로 최상위 법이념을 무시하였다면, 법관이 형식상 유효한 법률에 구속되지 않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유법”과의 논쟁에서 금세기 초 불러일으켜진 상황, 다시 말해 자유법론의 지지자 스스로가 결연하게 “법에 반하는 주장”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믿게 된 그런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399) 그러나 사라진 전체주의의 법률화된 부당한 법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국가의 등장에 의해 이들 법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일시적인 의미를 갖는데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마술빗자루로서 “법이념”의 마법적 힘을 모르는 소리다. 1945년 이후 그렇게 격렬하게 제기되었던 부당한 법률의 무효성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 기본법 제20조 제3항에서 행정과 사법의 “법률과 법”에 의한 구속을 명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본법의 위 규정은 “…과 법”이란 말을 추가함으로써 법률을 뛰어넘어 초법률적인 법을 지시하고 있다.400) 초법률적인 법에 위반됨을 이유로 헌법규범조차 무효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고, 연방대법원뿐만 아니라 연방헌법재판소도 이를 긍정하였음은 이미 본 바와 같다.401) 연방헌법재판소는 여기서 “제정권력에 의해 확정된 실정화된 법은 내용적으로 부당하고 비합목적이더라도 그것의 정의에 위반하는 정도가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법률이 ‘부당한 법’으로서 정의에 양보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여전히 우위를 갖는다”라는 라드부르흐의 “신중한 공론”402)을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 이론으로 합리화하였다. 법률이 정의와 도덕법칙의 하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이와 같이 쉬우면서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 오늘날에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보편적으로 승인된 명제로서 통하고 있다.403) 이를 옹호한다거나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는 것은 이 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명제 또는 유사한 명제에 대한 의문은 일부는 헌법에 근거하고(법관과 행정공무원이 입법자에 대해 불복종을 선언하고 비판적으로 대항한다면 권력분립의 원칙에 반한다),404) 일부는 사법의 순수성과 독립을 위한 위험(사법이 정치화할 위험), 일부는 초법률적 원리의 형성에 있어 불명확성(“정의”, “자연법”, “도덕법칙”과 기타 유사한 이념적 개념은 항상 불확실하므로 이를 다루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둔다. 한편, 입법자의 자의는 법이념의 주춧돌에서 타파되어야 한다는 기본생각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방법론적 성격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법적 사고 자체에 다시 눈을 돌린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성립한다.

우선 법률정정이 문제되는 여러 사례군을 엄밀하게 분류하는데 신경을 써야만 한다. 법률에 충실한 의미탐구(해석, 유추와 법질서 안에서의 흠결보충)와 법률에 불복종하는 법이념의 중간에는 여러 단계가 개재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를 충분히 유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편집상의 오류”에 관하여 언급하였다(380쪽). 위 편집상의 오류를 정정하는 것이 법률에 합당한 의미탐구로서 타당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다. 위 오류정정은 항상 법률에 합당한 의미탐구에 가깝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입법자가 명백히 실수로 표현상의 오류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동기의 착오”에 빠진 경우, 다시 말해 그가 의식적이고도 의도적으로 규율하려고 한 특정의 소여를 전제로 하였으나 현재 규율된 상황은 예견하지 못했고 입법자 자신이 보아도 달리 규정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는 명백한 문언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405)

연방대법원이 판단한 이미 언급된 손해배상청구권의 양도에 관한 사안(BGHZ 4, 153)이 이 경우 좋은 예를 제공한다(위 380쪽 이하 주 110과 함께 참조).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도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미망인에게 손해배상으로 정기금이 판결에 의해 인정되었다. 제3자가 판결과 그 집행을 기대하고 “호의적으로”(155쪽) 미망인에게 생계비를 우선 가불해주고 미망인의 배상의무자에 대한 정기금채권을 양도받았다. 이러한 양도가 허용되는지가 문제되었다. 민법 제400조는 채권에 질권설정이 불가능할 때는 양도가 허용될 수 없다고 규정하였는데 위의 양도는 그 자체만으로 보면 이러한 “문언”(157쪽)(보다 정확히는 어의)에 명백히 반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미망인의 정기금채권이 양도대상이었고 더욱이 정기금채권자로서의 미망인에게 “필요한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154쪽)는데 이유가 있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만약 양도행위가 미망인의 생계보장을 위해 제3자가 가불한 행위의 대가로 이루어진 경우라면 정기금채권의 양도는 유효하다고 보는데 장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연방대법원은 민법 제400조의 “의미와 목적”(158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론하였다. 즉 “질권설정이 불가능한 손해배상의 정기금채권은 배상권리자에 대해 아무런 법적 부담 없이 매기간마다 만기가 도래한 금액을 한도로 이를 보장한 제3자에게 배상권리자가 현재의 생계를 유지한다거나 양도행위가 매기간 도래하여 이행할 수 있는 금액을 한도로 이루어진 경우는 그 양도가 허용될 수 있다”(153쪽). 여기서 연방대법원이 행한 것은 무엇인가? 명백한 “문언”을 해석의 절대적 한계로 간주한다면, 위와 같은 추론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또한 여러 다양한 의미의 문언을 전제로 그중 가장 가까운 것에서부터 가장 먼 것까지를 점차 취사선택하는 의미에서 조금 느슨한 해석의 문제도 아니다.406) 그러나 “제한적” 및 “확장적” 해석의 개념을 명백한 문언에 반하여 입법자의 고유한 의사 또는 진정한 이익형량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사정은 다르다. 위의 사안에서는 법률조항(민법 제400조)의 의미와 목적에 맞추어 해석의 적용범위를 제한한 것인 한 이는 제한적, 목적론적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407) 그러나 이 경우는 아예 흠결보충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가불의 대가로 제3자에게 양도행위가 이루어진 경우는 민법 제400조에서 아무런 예외조항을 두지 않았으므로 이는 흠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하여 확정 지우는 것이다.408) 그리고 위 흠결은 연방대법원이 판시한 위의 인용문구에 의해, 그것도 특히 입법자 자신의 정신에 의해 보충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법질서 내에서의 모순이 제거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공법상의 보험인에 대하여는 질권설정이 불가능한 정기금채권의 경우에 있어서조차 채권양도가 허용되고 있는 점을 연방대법원이 원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위의 사안에서 채권양도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평가모순이라 할 수 있다(“민법 제400조의 양도금지를 수정하여 그 적용을 제한하는 것은 공법상 보험인에 대하여… 법률적으로 이를 제한 경우처럼 법현실에 대한 법의 적응을 의미할 뿐이다”, BGHZ 4, 160).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스스로 “법형성”(158쪽)에 관해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법률의 정정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또한, 위 212쪽 참조). 입법자 자신의 의사와 이익형량을 다같이 출발의 기초로 삼는다 할지라도 여러 방법론 사이의 한계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점은 다시금 분명하다.409) 바로 그 한계의 불확실성이 위의 사안에서 발견된다. 연방대법원은 입법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복종하는”(헥)410) 자세로 규범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입법자의 정신 안에서 그의 진정한 의사를 실현한다는 점을 신중하게 보여주었다.

입법자, 그의 의사 및 목표지향점을 충실한 기초로 삼고 다만 문언의 한계만을 벗어나는 위와 같은 “법률의 정정”은 초월적 법이념을 위해 입법자에 반대하는 행위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찜머만(Zimmermann) 또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기초하여 “관점의 오류”에 근거하는, 다시 말해 입법자가 “생활관계를 간과하였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잘못 파악한” 경우(그 자주 인용되는 예가 법적으로 처방된 종두를 유해한 것으로 다루는 경우이다)의 법률의 정정과 정의, 도덕법칙, 자연법에 위반한 경우의 법률의 정정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다.411) 물론 그는 두 가지 경우 모두 법률정정의 가능성 문제를 인정한다. 그는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화한 현실과 가치에 법률을 적응시키는 행위를 특수한 경우로 거론하면서도412) 원시적 불일치와 후발적 불일치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 최소한 우리의 사고전개에 있어서는 – 입법자 정신 안에서의 정정과 법이념의 정신 안에서 입법자 의사에 반하여 행하는 정정 사이의 구분이다. 이는 특히 방법론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법률의 정정이 입법자 자체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법적 사고는 우리가 해석, 이해, 의미탐구, 이익탐구, 유추, 반대추론 등 여러 각도에서 배운 그런 지반을 이탈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바로 직전에서 다룬 정기금채권에 관한 양도의 사례를 보자. 여기서 본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입법자의 진정한 의사를 위해 어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두었다. 결론적으로는 입법자의 목적과 이익형량의 강조를 통해 소위 문법적 의미탐구를 후퇴시킨 것에 그 본질이 있다. “법이 이성을 태만히 하면 효력을 상실한다(cessante ratione legis cessat lex ipsa)”라는 옛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413) 아울러 “주관적, 목적론적” 의미와 목적탐구, 다시 말해 – 최소한 앞서의 판결에서는 – 역사적 입법자의 진정한 의사와 목적을 탐구함으로써 이를 “문언”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법률 자체의 내재된 의미를 목표로 하는 객관적 해석론의 관점에서 이런 유형의 법률정정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는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일반적으로 주관주의론자보다는 객관주의론자들이 법률의 문자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나, 객관주의론자들도 법률에 명시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내재된 이성의 작용으로서 문언에 반하여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전혀 새로운 법적 사고의 문제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배운 사고방식을 그 특성에 따라 총괄하고 배합하는 문제에 서있던 것이다.

그러나 법률정정의 기준을 역사적 입법자 또는 역사적 법률 자체에 두지 않고 법이념에 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불명확한 어의에 대해 역사적 입법자가 본래 의욕한 의미에 앞서 현재에 입각한 “이성적”(즉 법이념에 가장 잘 부합되는) 의미를 강조하는 그런 객관적 해석론이 이미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여기서는 “해석”이란 것이 입법자 자신에 의해 추구되는 바를 은연중에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엽적인 문제에는 더 이상 매달릴 수가 없다. 법이념이 법률정정의 명백한 기준으로 취급되는 경우 법이념에 대한 요청은 다시 한번 보다 폭넓게 요구되어진다.

물론 우리 최고법원의 판결에서는 “법률에 반한” 이러한 명백한 판단은 이를 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미 언급한 정기금손해배상판결 또는 거기서 주로 인용된 “녹음테이프판결”(BGHZ 17, 266: 개인적 사용을 위해서는 문학과 음악작품의 복제를 인정한 당시 문학저작권법의 특례조항(제15조 제2항)이 녹음테이프에의 복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연방대법원은 이를 제한하였다; 현재는 1965. 9. 9. 저작권법 제53조 이하 참조) 또는 저 유명한 “남자승마인판결”(BGHZ 26, 349: 강장제 오카자를 선전하기 위해 남자승마인의 사진을 과실로 사용한 경우는 비록 민법 제847조가 신체, 건강과 자유 또는 여성의 정조를 침해한 경우에만 정신적 손해에 대한 금전배상을 명하고 있다 할지라도 금전으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등과 같은 혁신적 판결에서조차 최고법원의 주류적 판결은 해석 또는 유추를 수단으로 일견 보아 입법자와는 아주 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된다.414) 법의 법률에의 구속을 고수하는 보수적 관점에서도 이러한 노력은 바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은연중에 법률을 초월하고,415) 법감정에 비추어 명백한 또는 “법이념”에 상당하다고 여겨지는 판결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면, 우리는 “진보적 법발견”의 발전단계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특별한 법적 정당성을 요구하면서 법률 자체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법이념이 법률에 반하여 영향을 미칠 때는 유용한 경험의 지반을 버리고 칸트에 의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으로 표현된416) (법)형이상학의 “드높은 탑”에 다가선다는 의미에서 특히 그렇다. 우리가 과연 이점을 감행해도 좋은가? 다음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제8장 법률에서 법으로, 법학에서 법철학으로

 

이 책 제3장 처음에서 근대 법률가의 사고는 우선 법률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구체적 사안에서의 법발견이 목표였으나 그 다음 장부터는 법률과 법률의 효력, 그 한계, 흠결 및 오류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 장에서는 이러한 법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고 다만 그의 상대성과 한계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는 유럽 대륙법계에 속한 서구 중심의 법적 사고를 우리 연구의 과제로 삼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제한은 불가피했다. 보편타당한 법적 사고의 방법론이란 이 책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벗어나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론도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타당한 것이라면 법학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법 역사상 여기저기서 마주칠 수 있거나 조금은 세련되고 “법적 사실”의 정확한 이해를 근거로 많은 자유법론자에 의해 이상으로 간주된 직관적 또는 임기응변식의 개별사례에서의 법발견론은 배제된다. 소위 자유법에 관해 “자유재량”의 장에서 이미 설명한 것 이상으로 특별한 법적 방법론을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미 설명한 부분을 가르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 법발견의 방법론에 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는 새로운 유형의 법적사고를 요구한다.

그중 우선 언급되어야 할 것이 선례에 근거한 법발견론이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영미법계에서 “사례법(case law)”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라드부르흐는 위 방법론을 간략하면서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한 바 있다. 우선 그의 설명에 의존하더라도 양해하길 바란다.417) 사례법의 특징은 대륙법계에서는 법관이 법률에서 구하는 판단근거를 여기서는 동일 법원 또는 상급법원(대법원, 항소법원)의 선례에서 구하고, 특히 법률의 규정이 흠결된 경우뿐만 아니라 해석이 모호한 경우에도 그렇다는 점이다. 만약 재판의 전제가 된 사실이 이미 법원에서 판단된 사실과 동일한 경우라면 이는 동일하게 판단되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동일한 사안이라도 이것이 과연 선례와 “본질적으로” 동일한가 하는 의문은 항상 제기된다. 이외에도 선례에서 구체화된 법원칙은 “당시 재판에 필수불가결 하였던 한도 안에서만 구속력이 있다.” “당시 필요한 한도를 넘어 선언된 법원칙은 장래에도 구속력을 갖는 법관의 ‘판결이유(ratio decidendi)’가 아니라 ‘방론(obiter dictum)’에 불과하다.” 영미의 법관이 “‘명백히 비이성적(plainly unreasonable)’이라는 이유로 가끔 선례를 뛰어넘어(overrule) 재판한다”고 할 때 여기에는 “불합리한 선례의 구속력을 배제하기 위한” 여러 근거가 있다고 생각된다.418) 위의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방법론상 가치 있는 몇 가지 점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 먼저 최고법원(과거 제국법원, 오늘날에는 연방과 주의 최고법원) 사이에 선례와 다른 판단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인 만큼(법원조직법 제121조 제2항, 기본법 제95조 제3항 및 1968. 6. 19. 연방최고법원간 판결통일을 위한 법률 참조) 위 한정된 의미에서는(오로지 위와 같이 한정된 의미에서)419) 유사한 방법론이 우리에게도 성립한다. 따라서 재판의 전제가 된 사실이 최고법원에 의해 판단된 사실과 본질적인 면에서 동일한가 하는 점, 선례에서 표현된 법적 견해가 재판의 기초였는지, 아니면 단지 “방론”에 불과한 것인지 하는 점 등 비슷한 문제가 제기된다. “소위 방론으로 판결의 효력을 부정하고 이와 다른 법적 견해를 지지하려 할 경우”는 법원조직법에 의한 절차는 중단된다.420) 그러나 영미법의 방법론에 있어 선례를 현재의 사안에 적용한다고 할 때 이는 특히 선례의 기본사상을 기초로 특정 사안에서 특정 결론을 추론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추해석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선례의 구속에 있어서도 법률의 구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는 구속력을 제한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법률의 규정에서와 같이 여러 선례에서도 모순이 내포되어 법관이 그중 어느 선례를 우위로 평가할 것인지, 또는 모순된 모든 선례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언급될 수 있다. 아무튼 영미법계의 법이론에 관하여는 관련되는 문헌, 특히 르웰린(Llewellyn)과 피켄셔(Fikentscher)의 저서를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421)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대부분 법률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 대륙법계의 법적 사고로 다시 돌아와서 보건대, 법률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항상 법률 배후에 있는 무엇인가를 함께 조망한다는 점을 이 책의 여러 군데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를 우리는 통상 “법”으로 부르고자 한다. 법률이란 신의 명령처럼 절대 복종해야 하는 자기완결적(自己完結的)인 독립된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법사상을 함축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가 법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제한, 보충 및 수정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법사상에 항상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배후에 놓인 법이란 무엇인지 이제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명하는 동안 여러 차례 마주친 소위 이익법학이 이에 관하여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법률과 그 배후에 놓여진 것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석하고 방법론적인 관점에서도 해석과 흠결보충 및 오류정정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므로422)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여기서 다시 한번 이익법학을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이익법학의 기본사상은 이를 방법론으로 집대성한 필립 헥423)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처음 이해를 위해서는 1933년의 이익법학에 관한 강의안(Vortrag)이 적당한데 여기에는 “대학강의 수준의 개요”(3쪽)가 내용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이를 기초로 설명하기로 한다. 헥은 강의안의 초반에서 이익법학은 “실무법학을 위한 방법론”(7쪽)를 다루는 학문이고 법철학을 다루는 학문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특히 헥이 특정 관점까지만 법철학적 문제에 접근하여 가장 최상의 물음, 예컨대 정당한 법의 “일반규준”(7쪽)에 관한 물음에 도달하기 앞서 멈추었다 한다면 이는 타당하다. 그런데 헥의 방법론은 법의 본질과 과제에 관한 “기본인식”(8쪽)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를 법철학적인 방법론으로 표현한다 해도 무방하다.424) 그럼 이러한 기본인식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헥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법질서는 명령(정언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욕구적 삶”(10쪽)을 창출한다. 삶의 욕구를 “이익”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이익”이란 물질적, 경제적 및 사회적 이익뿐만 아니라 관념적 이익, 다시 말해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이익”도 포함된다(10쪽). 법은 물질적, 관념적 이익을 파악하고 이것이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을 때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법은 예를 들어 소득과 소유에 관한 이익, 생명, 건강, 자유와 명예, 정신적 작품의 평가와 보급, 도덕적, 종교적 감정의 소중함에 관한 이익을 보호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익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치고 같은 방향을 지향할 수도 있으며 충돌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익충돌”(13쪽)의 경우 법이 관여한다. 법에 의한 이익의 보호란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른 이익을 소홀히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법이 소유자의 권한을 보호해준다는 뜻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과 그 이익관철을 제한한다는 의미이다. 임료(賃料) 분쟁에서 법이 임차인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이는 임대인의 이익이 감소함을 의미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만약 타인의 명예와 종교적 감정을 존중하도록 법에 규정되었다면, 이는 비판과 조소를 일삼는 사람에게는 신랄한 말솜씨를 억제해야 함을 의미한다. 언제나 법은 다른 이익을 희생하고 특정 이익에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법은 이익형량을 통해 현실적 또는 잠재적 이익충돌을 해소한다(“충돌론”; 13쪽). “모든 법적 명령이 이익충돌을 해소하고 서로 다른 이익의 대립에 기초하고 있다…는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이익보호는…모든 재화가 욕망의 대상인 이익사회에서 그것도 다른 이익의 희생하에 항상(!)…이루어진다(13쪽).” 우위의 또는 최소한 참작될 이익은 법에서 중요한 것으로, 또는 표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법적 정언명령을 형성하는 동기가 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음을 의미한다. 즉, 우위의 이익은 현대국가에서는 특히 법적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법률화된 명령 안에서 효과적으로 보장되고 그 결과 “변화하고 움직이고 욕구적 삶”(10쪽)을 실현하고 창출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이 법률화된 법을 삶에 적용하고, 법률을 해석하고 흠결을 보충하고 오류를 정정하는데 있어 배후의 이익을 탐구하고 참작하고 입법자의 의사에 따라 이를 구현해야 한다. “모든 법규범에 있어서는 중심인 이익충돌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논의가 심오해지기 위해서는 이익의 분석이 필요하다”(13쪽 이하). 특히 법률국가에서는 법관은 이익형량을 자유재량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자의 결단에 기속되어 하는 것이므로 법률의 정신에 입각하여! 즉, 법률존중의 원칙이 적용된다. 법관은 구체적 이익의 충돌이 규범을 제정할 때 입법자가 상정한 이익충돌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교론적으로 확정함으로써 일반적으로 법률화된 이익충돌의 해결방안을 개별사례에서 구체화한다. 법률흠결의 보충에 있어서도 입법자의 의사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단지 예외적으로 재량위임의 경우처럼 법관에게 자기 고유의 이익형량을 판결의 기초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때만 법관은 입법자를 대신할 수 있다. 또한 입법자의 이익형량의 진정한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한도에서만 법관의 법률수정이 허용된다. 위와 같은 법률구속의 원칙을 주장함으로써 이익법학은 자유법학과는 상당히 거리를 유지한다.425) 그러나 여전히 이익법학은 자유법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개념법학(Begriffsjurisprudenz)”(11쪽) 및 구조주의(Konstruktionalismus)에 대항한다. 이익법학은 자기완결적인 법률의 개념과 구조에서 벗어나 법률을 초월한다. 이익법학은 자유법학과 마찬가지로 법률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하에 놓아두고 이들을 존중함으로써 법률의 규범적인 질서유지 기능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익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고, 개념규정의 정당성 또는 완결된 개념의 종국적 관철을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법은 역사적으로 이익의 산물이다”(12쪽). 이와 같이 부정되고 오늘날 완전히 극복된 “개념법학”이 어떤 식으로 잘못 전개되었는지는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법률적 인과성”의 문제를 논의하면서(위 62쪽 이하 참조) 개념법학의 방법론에 관하여 약간의 맛은 보았다. 다만 오해를 없애기 위해 개념법학과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멀리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법학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 “개념”을 무시하는 쪽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만 강조해두기로 한다.426)

이익법학과 개념법학의 대립을 하나의 예시를 통해 설명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매우 유익한 예는 무권리자의 소유권취득에 관한 법제도이다. A가 B에게 책 한 권을 빌려주었는데, B가 일시적인 금전궁핍을 면하기 위해 이를 고서상인 C에게 소유권을 양도했다고 하자. 고서상인 C는 B를 소유자로 알았고 알 수도 있었으므로 B로부터 책을 “선의로” 취득하였다. 일찍이 로마의 법언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리 이상을 양도할 수 없고, 무권리자는 소유권을 양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Ulpian, D 41,1,20). 이는 개념법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소유권이전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양도인이 소유자일 경우에만 양수인이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보통 소유권양도라고 하면 순전히 자구적(字句的)으로 이해하여 물건의 양도, 양수만을 생각하고 물건에 대한 권리이전의 의미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독일민법은 고대 독일법의 관념에 입각하여 이점에 관하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상정하고 있다. 즉 이익법학적으로 생각한다. 종전소유자(A)와 취득자(고서상 C)의 이익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비교형량하는 것이다. 우선 A와 C의 이익을 비교형량하기 위해 확정한다. 소유자 A는 B에 의해 횡령당한 자기 물건을 되찾는데 대해 정당한 이익이 있고, 취득자 C는 양도인인 B로부터 선의로 소유권을 취득하고 대금을 지불하였으므로 그 물건을 소유하는데 대해 이익이 있다. 위와 같은 이익충돌의 상황에서 특별히 추가하여 고려되어야 할 사정은 A가 B에게 책을 빌려줌으로써 임의적으로 점유를 이전하였다는 점이다(특히 일반인이 주의해야 할 점은 “점유”와 “소유”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유는 물건에 대한 권리를 의미하고 점유는 그의 사실적 지배를 의미한다). A는 B에게 책을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신뢰를 창출했다. 동시에 B로 하여금 소유관계에 관해 C를 기망할 수 있는 사정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물건을 사실상 점유하는 사람(B)은 그 물건의 소유자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C는 B가 물건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를 소유자로 인정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점유와 소유의 개념이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점유자를 소유자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점유에 근거한 “권리외관”이 A와 C 사이의 이익충돌이 문제된 예시의 사안에서는 종전소유자의 이익에 앞서 선의취득자인 C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근거가 된다. A는 자신이 신뢰를 제공하였고 결과적으로 횡령으로 그 신뢰를 남용한 B에게 문의해야 한다. “너 자신이 신뢰를 둔 곳에서 다시 그 신뢰를 찾아라”하고 이미 고대 독일법은 말하고 있다.427) 헥은 오늘날의 법에 맞추어 동일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있다. “외관에 의해 지탱될 수 있는 경우에만 선의취득자의 이익이 종전권리자의 이익에 앞서 우선된다.” 동산에 있어 이러한 외관은 “점유상태”에 의해 성립한다.428) 만약 소유자 A가 물건에 대한 점유를 임의로 이전하지 않고 도난 또는 유사한 방법으로 “박탈되어” 그 의사에 반하여 상실한 경우라면 결론은 달라진다. 이때는 취득자가 아무리 선의취득을 하였고 그가 도난의 사정을 전혀 몰랐거나 알 수 없었던 경우라도 그에 앞서 종전소유자인 A가 우선한다.

동산에 대한 소유권의 선의취득에 관한 조항을 “이익구조적”으로 해석하면, 위와 같다(민법 제932조 이하 참조).429) 법률의 의문을 해소하고 흠결을 보충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이익구조적 사고는 유지되어야 한다. 무권리자의 선의취득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취득자 C가 무권리자 B로부터 자동차 또는 라디오를 할부금이 완불될 때까지는 B에게 (사실은 소유권이 없으나) 소유권이 명시적으로 “유보”되는 조건하에서 할부로 구입하여 선의취득 하였다고 하자. 여기서 C가 할부금을 완불하기에 앞서 A가 진정한 소유자이고 B는 A로부터 수리를 위임받았다는 사실관계를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C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여 할부금을 완납하면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C가 계약에 따라 소유권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선의 여부를 계약체결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아니면 최종할부금을 납입할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계약체결 당시에는 B를 소유자로 생각하였으므로 C는 선의였다. 그러나 최종할부금을 지급할 당시에는 B가 아닌 A가 진정한 소유자임을 알았으므로 더 이상 선의가 아니었다. 헥은 이에 관해 “기대이익도 절대적 권리와 마찬가지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 소유권 유보(留保)부로 자동차를 취득한 사람은 할부금을 완납하기 전이라도 보호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한다.430) 다시 말해, C가 할부금을 완납할 때까지는 B의 소유권이 유보되어 “제한적으로” 소유권을 취득함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일종의 “기대권”을 취득한데 불과하더라도, 그의 기대이익은 즉시 완전한 소유권을 취득한 사람의 이익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민법 제932조의 기초가 된 이익형량은 이와 같이 법률에 의해 직접 규율되지 않는 사안에까지 확대적용된다(흠결보충).431)

이익구조적 법률적용의 사례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익법학 그 자체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무권리자로부터의 동산의 선의취득에 관한 규정에서 기초가 된 이익형량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란 점은 보았다. 서로 충돌되는 이익 중 어느 하나를 단순히 우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선시키는 법적 행위에는 어떤 “근거”가 존재하는 것이다. 위의 예시에서 위와 같은 근거는 종전소유자가 임의로 점유를 이전함으로써 신의를 배반한 양도인에게 권리외관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근거는 다시금 이익으로 표방되는 것은 아니고 이익을 형량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이익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원인적(kausal)”이라 할 것이다. 이익법학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추상적 및 구체적 법적 판단, 다시 말해 입법자의 판단뿐만 아니라 법적용자의 판단에 있어 이익 말고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다른 요소가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특히 뮐러-에르쯔바흐였다. 법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관련 이익뿐만 아니라 법의 형성에 관여한 모든 다른 요인, 예를 들어 역학관계, 위험의 지배력, 신뢰 등등을 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의 예시된 사안에 있어 이익형량을 위해 중요한 요인은 소유자가 점유를 이전하여 자신의 소유권에 관하여 위험을 형성하였다는 점, 점유를 이전 받은 사람의 성실성을 신뢰함으로 인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 및 “제3” 취득자의 선의에 대해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 등이다.432) 바로 이러한 요인이 이익충돌을 위와 같이 해결함에 있어 입법자가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는 근거이자 원인인 것이다. “인과적” 법사상은 이익을 탐구하긴 해도 그것에만 머물지 않고, 법을 형성하는데 이익 말고도 다른 원인적 요인이 있음을 안다. 이러한 인과적 법사상론의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이에 관하여는 여러 번 언급된 뮐러-에르쯔바흐의 “보수기의 법학(Rechtswissenschaft im Umbau)”을 지적해두기로 한다.433)

다만, 인과적 법사상의 개념에 내재된 의미 중 극복되어야 할 점 한가지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법을 해석, 이해, 보충 및 형성하는데 고려하게 되는 규준적인 원인적 법요소로서 이익만을 파악하든, 또는 거기에 덧붙여 다른 “삶의 요소”를 추가하여 파악하든, 입법자 또는 법적용자의 판단은 결국 이익 또는 다른 요소의 평가434)로 귀착된다. 이러한 평가와 이익 또는 법형성의 다른 요소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 보다 상위의 이익이란 힘있는 이익 외의 아무 것도 아니고, 권력사정만이 이익의 우위를 정한다는 식으로, 평가란 이익 또는 다른 요소와 함께 직접 제공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뮐러-에르쯔바흐의 특정 견해는 위와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법의 평가란 “주어진 권력상황에 의해 규준적으로 정해진다”고 말하고 있다.435) 그러나 그의 사상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력상황이 평가 시 고려되긴 해도 전부는 아니고, 오히려 자유의 요소가 평가에 반영된다는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익 그 자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이익은 그 자체로서 특정 평가를 강요하고 심지어 평가 안에서 표현되고 대부분 이념으로 분장하여 다가오지만,436) 항상 어느 정도의 자유와 함께 권한과 서열을 판단하게 되는 법적 선택의 과정에 따르게 된다.437) 따라서, 이익과 법형성의 다른 요소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보다 상위의 다른 영역에 도달하게 되고, 여기서는 정의, 공평, 도덕적 책임, 인간의 존엄, 인격의 존중 등등 새로운 개념과 이념에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일단으로 이익법학에 대항하여 이미 제기된 바 있는데, 권력 및 신뢰의 요소를 참작하는 인과적 법사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를 주장할 수 있다.438) 훗날 코잉(Coing)은 다시금 이를 강조하여, “평등, 신뢰, 인격존중 등의 도덕적 가치는 다른 것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어떤 이익은 아니고, 오히려 이는 사법(형법이나 공법의 다른 한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에 있어 본질적으로 판단기능을 담당하는 질서요소이다. 이는 판단대상인 구성요건과 동일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상위에 위치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모든 법적용의 최종적 근거는 “법질서가 기초하고 있는 가치평가에 대한 숙고(Besinnung)에서 발견된다.”439)

이러한 가치에 대한 숙고가 역사적으로 법률의 기초가 된 그런 가치를 탐구하는 선에 머문다면, 이는 실증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입법자의 직접적 의사를 넘어 법률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사상에 도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이익법학에서 보았다(예컨대 409쪽). 이익 또는 다른 원인적 법요소를 해명한 뒤에도 입법자가 어느 이익을 보호하고 다른 이익에 앞서 그것을 우선시키려고 하였다는 점과 그 경우 어느 특정 관점이 규준적 관점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 이는 일을 중도에서 그만둔 것이 된다. 입법자의 평가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법률의 배후에서 “법”을 형성하는 다른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입법자의 직접적인 판단도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440) 행정과 사법에 있어서의 일상적인 것들이 수많은 사례를 명확히 다루는 법률이 없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보수와 급료를 지급하고, 세금을 공제하고, 토지를 매매, 공증하고, 형벌을 부과하는 일 등등이 대부분 아무런 법적 의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평등권에 관한 판결에서 평등대우에 관한 법률이 발전하였다는 사실이 법률의 명확한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가?441) 그러나 법률에서 더 이상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한계와 의혹에 놓인 사례 역시 많다는 점도 절실히 인식된다. 뷜로우와 자유법론의 지지자인 이사이까지도 열심히 이점을 강조했으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층 더 법관법의 독자적 의미가 인정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환영되기조차 하였다.442) 이익법학의 철저한 법률신봉자들조차 이러한 이론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예는 없었다. 이 책 서술의 여러 군데에서도 법률은 그것이 편입된 법이란 커다란 우주(宇宙)에 속한 가치에 근거하여서만 적용되고 해석되고, 필요할 때는 보충되고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포섭(“밀폐된 공간”이라는 개념에 승용차를 포섭하는 따위)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과 그 법률의 이성으로부터 판단대상인 사례와 적용이 명백한 사례를 비교, 평가하여 동일하게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 특히 “의미가 사라진 법률은 법률이 아니다”라는 법격언(175, 395쪽)을 적용할 때 이는 법률을 초월한 평가를 필요로 하는데, 이에 의하면 법률의 자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 본래 그 법률의 이성적 목적은 달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더욱이 “형평법”을 적용할 경우는 입법자 스스로에 의해 초법률적인 평가에 의존하게 되는 점, 그리고 보충을 요하는 법률 흠결의 인식과 (유추 등에 의한) 그의 보충을 위해서는 초법률적 평가가 없을 수 없다는 점 및 끝으로 초법률적 평가를 법률적 평가에 대립시킬 필요성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다시 한번 상기해주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 초법적인 논의는 아니더라도 – 초법률적인 논의조차 해석 자체의 방법론, 특히 해석방법의 우열관계(171쪽 이하 참조) 및 해석에 있어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정당성(201쪽 이하) 등에 관하여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이제 “법률과 법”의 문제가 점점 더 법적 방법론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어디까지 법적 방법론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어디까지 법철학적 문제에 속하는지 하는 문제를 먼저 제기해야 한다. 나는 법률 저편에 놓인 법, 또는 “정당한”, “자연의”, “정의로운” 및 “공평한” 법, 한 마디로 표현해서 “법이념”에의 호소나 “도덕법칙”, “인간의 존엄”, “공공복리” 등에 의존하는 초법률적인, 심지어는 초법적인 평가의 도입이 법률가의 권한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만약 내가 그렇게 주장하였다고 한다면 272쪽 이하의 설명에서 나는 이미 법적 방법론의 한계를 일탈하였을 것이다. 지금 이 장의 제목으로부터 법률은 법률가에게, 법은 법철학자에게(!)443)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는 법률과 법의 관계가 명백히 법철학적 문제이자 주제가 된다는 점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53년 마인쯔 태생의 법철학자인 테오돌 비벡(Theodor Viehweg)에 의해 심사숙고되었고 그후 활기찬 논의의 주제가 되었던 개념 하나를 이 자리에서 다루어보기로 한다. 그 개념은 “토픽(Topik)”이라는 개념으로서 법적 방법론과 법철학적 사고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444)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유명한 논리학인 “오르가논(Organon)”에 등장하여, 근거가 분명한 “참” 전제가 아니고 단순히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반적으로 분명하다거나 최소한 ‘현자(賢者)’에게 진실로 간주되는) 전제에 기초하여 결과를 추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445) 역사적 발전 과정을 겪으면서 많이 변화되어, 때로는 수사학과 결합되고 때로는 수사학적인 변증법에 단서를 제공하였다가 비코(Vico)(1708년 저서에서)에 의해 다시금 환기되었고,446) 근대에 와서는 수리적 자연과학이 전형적인 엄격한 학문적 방법론의 영향을 받아 칸트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궤변”과 수다의 집합소로 간주되었다.447) 비벡은 이러한 토픽의 개념을 법학에 있어 적합한 “문제사고의 기법”448)으로 일깨우면서, 학문적 명제의 근거지움을 위한 아주 엄격한 방법론, 다시 말해 종(縱)적으로는 관련이 있으나 횡(橫)적으로는 독립된 제한적인 여러 적합한 (궁극적으로는 가정적으로만 근거가 세워진) 가설로부터 형식논리학의 규칙에 따라 지도원칙의 총괄적 체계를 이끌어 내는 공리주의적, 연역적 방법론은 법이론과 법실무를 위하여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449)

“토픽”의 이러한 중립적 측면과 관련해서는 물론 다음의 두 가지 점이 생각되어야 한다. 첫째는 법학에서 공리주의적 방법론의 적용을 아마도 상당한 이유로 거부한다고 하여 그 보다 더 단순한 다른 연역적 방법론, 예컨대 자주 비판되고 그 기능적 측면에서는 오해를 받는 “법률적 삼단논법”,450) 다시 말해 일반적 (특히 법률로부터 도출된) 당위명제로부터 간단한 방법론에 의해 구체적 판단을 이끌어 내는 그런 방법론을 거부하는 것과 관련 지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클룩(Klug)이 법인식에 있어 형식논리학의 임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한 말, 즉 “형식논리학은 필요하고 불가결한 것이나 충분한 의미를 지닐 필요는 없다”는 말451)이 매우 정당하다. 특히 대전제와 소전제로부터의 “일상적인” 연역이 그들 전제를 획득함에 있어 어려움이나 복잡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토픽적 방법론도 이러한 연역법과 결합될 수 있다.452) 둘째는 토픽적 방법론과 특히 공리주의적 방법론 사이의 대립이 법학을 토픽적 근거지움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체계학”(다만 공리주의적 의미는 배제하고)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 관하여는 여기서 상론(詳論)할 수 없다.453)

이제 토픽론의 긍정적 측면에 접하려고 함에 있어 어려운 점은 “이익법학”을 구체적 사례에서 논구(論究)했던 헥(요건대 채권법과 물권법 개요 참조)과는 달리 비벡은 토픽적 방법론의 실용성을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예시하였다는 점이다. 그에 뒤이어 나온 문헌에서는 몇 가지 점만이 보충되었을 뿐이다.454) 비벡과 그 추종자들이 제시한 토포이는 매우 다의적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논의”될 문제를 위해 특히 적합한 “관점(Gesichtspunkten)”(이말은 우연이 아니고 “토포이(Topoi)”에 대하여 항상 반복되어 온 독일어 표현이다)에서부터 “이익”, “비례성”, “기대가능성”, “부당성”, “정의”, “불공평”, “사물의 본성”, 심지어는 “경합원칙”(규범충돌의 경우) 및 해석원칙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와 같이 넓게 개념을 파악하면, “토픽”과 기존의 법적 방법론의 (이 “입문서”에서 다루어지는 바와 같이) 광범위한 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반해, 무권리자의 선의취득의 예에서 마주친 바와 같이 특정 관점이나 논의(아무도 그가 갖고 있는 권리 이상을 양도하지 못한다, 점유자의 권리외관, 취득자의 신뢰보호 등등), 또는 낙태 혹은 안락사의 형사상 처벌에 관한 논의에서 대립되는 관점이나 논의(형법은 “도덕의 기본”이어야 한다, 또는 이에 맞서 형법은 침해와 위험으로부터 타인의 “법익”을 보호해야 한다, 자기의 생명에 관하여는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임의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등등)에 머문다면, 토픽적 절차가 여러 규준적인 관점이나 논의를 집대성하는데는 유용할 지 몰라도, 그들 관점이나 논의의 우열을 판단하고 비교형량 시 우선의 원칙을 정하는데 있어서는 – 이러한 우선의 원칙을 다시 “토포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지 않는 한 –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다(나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 토픽론은 가치론, 예컨대 (다시금 기본인 “토포이”가 되지 않는) 우리의 기본권 목록에서 취할 수 있는 “가치체계”에 의한 보충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455)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법과 행정의 합법률성의 원칙이 지배하는 법치국가에서는 “토포이”의 해석과 평가 및 비교를 위해 여전히 법률해석의 방법론 등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로써 토픽론과 전통적 해석학의 만남이 다시금 이루어진다. 물론 개념적용과 흠결 보충 및 법의 형성을 위해 법관과 행정공무원에게 “재량”이 주어진 경우는 궁국적으로 법률을 초월한 어떤 “관점”이 문제되는데, 이를 들추어내는 것이 토픽론의 소관사항이다.

그러나, 규준적 토포이가 그 법적 준거를 어디서 발견하고, 어디에 그 구속의 근거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와 함께 “법률적” 사고가 법철학과의 관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토픽론을 신봉하는 저자들은 – 해석, 유추, 반대유추 등과 같이 순수 해석학적 작업을 “토포이”로 다루지는 않으면서(나는 이를 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 토픽적 논의의 병기고(兵器庫)를 채우는 것으로 정의, 공평성, 합목적성, 합리성, “상식(common sense)”, 도덕법규, “사물의 본성”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치적 이념 등의 관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법이념(Rechtsidee)”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제 그 안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예컨대, 법이 도덕(무엇이든?)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독자적 지반을 가져야 하는지, “상식”은 그 추종을 요구할 수 있는지, 오늘날 “다원적 사회”에서 그러한 상식이 있을 수 있는지, 정의와 합목적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가능한 한 일반화하여 평등취급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정의의 본질에 맞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화하여 사안의 특성과 관련당사자의 속성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더 정의의 본질에 맞는 것인지, “사물의 본성”이란 무엇인지(여기서 “본성”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사물”과 관련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456) 일반적으로 “법이념”이란 무엇인지, 법이념 사이에는 어떤 긴장관계가 숨어있는지, 그들은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만 타당한 것인지, 그들의 고도의 일반성(“공공복리”, 공공선(公共善)의 이념을 생각해 보라)과 특정 또는 개별적인 법문제 사이의 가교(架橋)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 하는 문제들은 말 그대로 법률가가 제기하는 문제 그 자체이고, 이러한 문제에서 법률가는 피할 수 없고, 다만 방법론적으로 올바르다면 법철학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에서가 “법 이전의 윤리적, 사회정책적 규범”을 “법적 진리”로 “전환”시키는 것이 법률가에게 부과된 과제라고 언급하고,457) 또는 호른(Horn)이 “인간은 사회질서 안에서 – 지식과 경험, 전통 및 확신에 따라 – 일반적으로 확실한 그런 원칙을 규범으로 선택한다”라고 설명하고,458) 또는 최고법원의 판결이 여러 가지로 “자연법” 또는 “도덕규범” 또는 “허무적인 상대주의”를 넘어 “선재(先在)하는 가치질서”에 근거하고,459) 또는 몇몇 사람이 이러한 가치의 목록을 “일반적 법원칙”460) 또는 보다 조심스럽게는 우리 기본법의 최상위 원칙461)에 명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몇몇 사람이 여러 번 언급된 “사물의 본성”을 현재 논의되는 생활관계(혼인, 친족, 공무, 근로관계, 병역 등등)에 “내재된” 구조 안에서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462) 이는 순수 “법률실증주의”를 극복하고 법안의 “객관적 정신”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법률가의 당면하고도 당연한 노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이론적으로 관철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법률해석학과 방법론 자체를 넘어 철학적 사고와 그의 특별한 인식론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도 법률가는 조망해야 하고 자기 생각의 기본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수단을 가지고 이를 규명하고 확정 지우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다. 법철학이 법률가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버리고, 다만 법적 방법론과 철학적 방법론 사이에는 법이론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존중해야 할 권한분배의 한계가 있다는 점만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영역의 한계에서 법적 사고의 입문서를 끝내고자 한다.463)

 

후 기(後記)

 

칼 엥기쉬의 생애와 저서

1899년 5월 15일 기센에서 태어나 1990년 9월 11일 알짜이 근처의 니더비젠에서 사망할 때까지 칼 엥기쉬는 거의 20세기 법학에 있어 지도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자원 참가하였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엥기쉬는 기센과 뮌헨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헤선 주의 사법수습생으로서 그는 몇 년 동안 자신의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였고, 1929년 기센에서 볼프강 미터마이어 교수의 지도 아래 “형법에 있어 고의와 과실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받았다. 형법과 법철학적 저서에서뿐만 아니라 방법론적, 학문적 사상 안에서도 그는 에른스트 베링과 철학자 에른스트 폰 아스터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기센,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친 다음 엥기쉬는 1934년 여름 구스타프 라드부르흐를 대신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형법, 형사소송법과 법철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라드부르흐는 1933년 4월 7일자 “직업공무원제의 재건을 위한 법률”로 인하여 해임되었었다. 이일로 인하여 라드부르흐와 엥기쉬의 좋았던 인간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았다. 라드부르흐는 1938년 엥기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당신은 내가 대학 강단에서 자리를 잃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으로 생각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만큼 마음에 드는 후임자를 생각해본 적이 없소. 옛날처럼 우리의 좋은 관계가 지속되길 바라오.”464) 민족사회주의 당시 엥기쉬는 새로운 법질서와 정치체계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였다.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그의 저서에서 유대인 저자를 인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라이프찌히, 비인 및 함부르크로부터 요구를 뿌리친 다음 그는 1953년 뮌헨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정년을 마친 다음 엥기쉬는 1971년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와 1972년부터 명예교수로서 하이델베르크 법과대학과 관계를 맺었다.

엥기쉬의 학문적 업적은 형법이론, 의료법 및 법적 방법론, 법철학에 관련된 것이다. 엥기쉬의 주요저서로는,

– 형법에 있어 고의와 과실에 관한 연구, 1930년, 추가인쇄 1964년

Untersuchungen über Vorsatz und Fährlässigkeit im Strafrecht, 1930, Nachdruck 1964

– 형법상 구성요건요소로서 인과성, 1931년

Die Kausalität als Merkmal der strafrechtlichen Tatbestände, 1931

– 법질서의 단일성, 1935년, 신판인쇄 1987년

Die Einheit der Rechtsordnung, 1935, Neudruck 1987

– 법률적용에 관한 논리적 연구, 1948년, 3판 1963년

Logische Studien zur Gesetzesanwendung, 1943, 3. Aufl. 1963

– 법률가의 세계관에 관하여, 1950년, 2판 1965년

Vom Weltbild des Juristen, 1950, 2. Aufl. 1965

– 우리시대 법과 법학에 있어 구체화의 이념, 1953년, 2판 1968년

Die Idee der Konkretisierung in Recht und Rechtswissenschaft unserer Zeit, 1953, 2. Aufl. 1968

– 법적 사고 입문, 1956년, 8판 1983년

Einführung in das juristischen Denken, 1956, 8. Aufl. 1983

– 정의를 찾아서, 1971년

Auf der Suche nach der Gerechtigkeit, 1971

 

형법학자로서 칼 엥기쉬의 지위, 그의 형법과 관련된 저서의 영향력 및 형법방법론의 논쟁에 있어 그의 관여 등에 관하여서는 누구보다도 한스 하인리히 예쉑465)과 요하힘 힐쉬466) 등이 상세하게 봉헌한 바 있다. 고의와 과실 또는 인과성에 관한 획기적 연구 및 의료법에 대한 그의 기여 등은 아직도 형법이론에 있어 기본이 되고있다. 법철학과 법이론의 저서에서 그는 전통적 법이론을 타파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법인식의 신사상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본적으로 그는 금세기 대표적인 법철학과 법이론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고, 이점은 특히 그의 “법적 사고 입문”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점에서 그의 “법적 사고 입문”은 동시에 세기를 통한 법적 방법론의 역사에 관한 입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신실증주의적 경향,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심지어 법률가에게서조차 법질서의 무시로 나타나는 그런 시대에 있어 엥기쉬가 그의 “법적 사고 입문”과 다른 방법론적 저술을 통하여 추구한 관심사는, 한편으로 법률가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만들어진 법률을 복종하여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는 어떻게 법을 “정당하게” 적용하고 책임에 맞추어 형성시킬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늘 부닥쳐왔으므로, 점점 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한마디로 “법적 사고 입문”에서는 법률적 규범의 내용을 확정하는 문제와 포섭의 절차에 우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해석방법론의 문제에 있어서 엥기쉬는 사비그니의 전통적 방법론에 의존하면서도 새로운 해석학적 주장에도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전통적인 해석론이나 (규범논리학은 물론) 새로운 해석방법론적 주장 및 (유추추론 등과 같은) 특정한 추론절차와 같은 논의는 모두 유일무이하게 타당한 결론에 이를 수 없고, 오직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많고 적음으로 대표될 수 있는 법적 해결책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엥기쉬는 법규범을 해석하는데 어떤 요소와 이념을 – 엥기쉬의 저서에서는 “법질서의 단일성”이 주요 이념으로 밀접하게 등장하곤 한다 – 고려하여야만 하는지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법규범을 해석하는데 법철학적 관심을 가지고 기본적 문제들을 다룬다는 것은 법의 근본과 한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의미 있는 것이다.

엥기쉬는 “정의를 찾아서- 법철학의 기본주제(1971)”란 저서에서 법의 근본과 한계에 관한 그의 법철학적 사고를 정리하고 있다. 법과 도덕의 관계, 법과 권력의 상호작용 또는 실정법의 정의 이념의 지향 등과 같은 법철학적 근본문제에 관한 논의 등을 통하여 엥기쉬는 – 물론 궁극적으로는 회의적으로 평가한 – 가치상대주의로 나가고 있다. 그가 20대부터 경험해온 가치와 정의관념의 변화, 당시 유행이던 회의주의적 윤리학의 영향을 받아 엥기쉬는 그가 진정으로 지지할 수 있는 인식은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치상대주의는 학문적으로, 특히 법철학적으로 보아 ‘진리’, 그것도 아주 소름끼치는 진리이다. 우리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고르고(Gorgo)가 지녔던 시야밖에 가질 수 없다!”(286쪽).

이러한 가치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중의 평화질서”(283쪽)로서 법의 기능이 상실되고 그 결과 법의 도덕적, 규범적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엥기쉬는 –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 모든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입장과 한계를 두려한다. 여기서 도덕의 최소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법의 효력에 관한 현대적 논의에 엥기쉬가 근접하고 있음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엥기쉬는 법과 그 제도의 역사, 방법론의 역사 및 도덕 윤리적 전통 안에서 다시금 확실함을 추구한다. 엥기쉬와 같이 정치체제의 급격한 변화와 그때마다의 현실에 적응된 법질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급격하고도 근본적인 법적 “변화”는 깊은 회의로 다가오고, 하나하나 비판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과 그 제도의 긍정적 전통을 방법론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문헌목록

 

 

 

 

 

 

 

 

 

 

 

 

 

 

 

약어표

 

인명색인

 

사항색인


1) 이하의 서술과 관련하여, J. Binder, Philosophie des Rechts, 1925, S. 836 ff., 886 ff., 920 f.; C. A. Emge, Einfü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1955, S. 380 ff.; K. Engisch, Wahrheit und Richtigkeit im juristischen Deken, 1963; A. André, Was heißt rechtswissenschaftliche Forschung?, JZ 1970, 396; O. Ballweg, Rechtwissenschaft und Jurisprudenz, 1970; R. Dreier, Zum Selbstverständnis der Jurisprudenz als Wissenschaft, Rechtstheorie 2(1971), 37; W. Naucke, Rechtsphilosophische Grundbegriffe, 2. Aufl. 1986, S. 148 ff.; F. Bydlinski,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Rechtsbegriff, 2. Aufl. 1991, S. 57 ff. 76 ff.; Th. Mayer-Maly, Rechtswissenschaft, 6. Aufl. 1991, S. 1 ff.; K. Larenz, Methodenlehre der Rechtswissenschaft, 6. Aufl. 1991, S. 189 ff., 239 ff.; H.-M. Pawlowski, Methodenlehre für Juristen, 2. Aufl. 1991, Rn. 3 ff.; H. Coimg, Grundzüge der Rechtsphilosophie, 5. Aufl. 1993, S. 290 ff.; F, Müller, Strukturierende Rechtslehre, 2. Aufl. 1994, S. 13 ff.; K. F. Röhl, Allgemeine Rechtslehre, 1995, S. 69 ff.; R. Zippelius, Recht und Gerechtigkeit in der offenen Gesellschaft, 2. Aufl. 1996, S. 21 ff.

2) G. Küchenhoff, Naturrecht und Christentum, 1948, S. 6.

3) D 1,1,10. 이러한 구절이 뜻하는 바는 Corpus juris civilis Digesta(533년 12월 16일 발간), Buch 1, Titel 1, Lex 10. 또한 Vgl. D. Liebs, Römisches Recht, 4. Aufl. 1993, S. 61 f.

4) Vgl. J. Esser, Grundsatz und Norm in der richterlichen Fortbildung des Privatrechts, 2. Aufl. 1964, S. 306 ff.; L. Raiser, Rechtswissenschaft und Rechtspraxis, NJW 1964, 1201(1204 f.); L. Legaz y Lacambra, Rechtphilosophie, 1965, S. 558 ff.; Larenz, Methodenlehre, S. 234 ff., 242 f.; Pawlowski, Rn. 5.
K. Krawietz(Welche Methode lehrt die juristische Methodenlehre?, JuS 1970, 425)가 “현대의, 무엇보다도 언어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은 학문이론의 관점에서 로마법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하였다면, 이는 너무 좁은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다. 로마“법학”의 성격에 관하여는 아마도 vgl. W. Kunkel, Römische Rechtsgeschichte, 8. Aufl., 1978, S. 90 ff.; Liebs, Römiches Recht, S. 16. M. Kaser(Das Römische Privatrecht I, 2. Aufl. 1971, S. 3)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후기 공화정 시대의 로마법은 “모든 서양법학의 근원이다”. 당시 로마법이 “법발견의 실무적 과제”를 중심으로 하였음은 물론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 법학은 (광의의) 법을 함께 형성하여왔고, 그것은 “실천 법학”이었다(물론 H. Kelsen, Reine Rechtslehre, 2. Aufl. 1960, S. 75 Anm. 2는 반대). 반면, “법학은 진정으로 실천적이기 위하여서는 실무적 문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R. v. Ihering(Geist des römischen Rechts II 2, 2. Aufl. 1869, S. 369)의 말은 의문이다.

5) F. Wieacker, Privatrechtsgeschichte der Neuzeit, 2. Aufl. 1967, S. 491.

6) F. Schiller, Das Lied von der Glocke, in: ders., Sämtliche Werke, Bd. 1, hg. v. G. Fricke/H. G. Göpfert, 4. Aufl. 1965, S. 439, Vers 343.

7) B. Pascal, Gedanken, übers. u. hg. v. E. Wasmuth, 8. Aufl. 1978, S. 148(Pensées V, 294).

8) J. v. Kirchmann, Die Wertlosigkeit der Jurisprudenz als Wissenschaft, 3. Aufl. 1848, S. 10. 그 외 Binder, S. 847 f.; C. Schmitt, Die Lage der europäischen Rechtswissenschaft, 1949, S. 15; E. Wolf, Fragwürdigkeit und Notwendigkeit der Rechtswissenschaft, 1953, S. 13. 반면, 법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시간이 흘러도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고 강조되기도 한다(예컨대 G. Cohn, Existentialismus und Rechtswissenschaft, 1955, S. 88). 최근에는 법학과 자연과학의 관계 못지않게 법학과 사회과학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논란이 있다(사회과학은 “존재학문” 및 “현실학문”이란 의미에서 자연과학과 유사하다;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Larenz, Methodenlehre, S. 195 ff., 239 ff.; 또한 vgl. Naucke, Grundbegriffe, S. 153 ff.; Müller, Rechtslehre, S. 308 ff.). 그 외에도 법학의 학문적 성격은 궁극적으로 “학문”의 특성을 어떻게 보느냐, 예컨대 (논리적, 수학적, 경험적) “진리인식”을 지향하는 노력만을 “학문적”이라 볼 것인지, 아니면 방법론적으로 획득하고, 충분히 근거가 있는 (궁극적으로 “정당한”) 규범적 명제의 체계를 목적으로 하는 노력도 역시 학문적이라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정신과학(globus intellectualis)”에서의 전반적 분류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신과학”으로서의 법학의 특성에 관하여는 145쪽 주 14 참조.

9)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Die rechtliche Bedeutung der ärztlichen Operation, 1958, S. 19 f. 또한 Vgl. Eser, in: A. Schönke/H. Schröder, Kommetar zum Strafgesetzbuch, 24. Aufl. 1991, § 223 Rn. 27 ff. m. w. N.

10) 구법 시대의 상황에 대한 비판은, W. Dallinger, Aus der Rechtsprechung des BGH in Strafsachen, MDR 1956, 394(397). 또한 Vgl. E. Kern/C. Roxin, Strafverfahrensrecht, 13. Aufl. 1975, S. 124.

11) 1993년 혼인에 있어 성씨 창설에 관한 신 규정(민법 제1355조)에 따르면, 혼인 중의 자는 양친의 성을 모두 따를 수 있거나 – 이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 부 또는 모의 성을 따를 수 있다(민법 제1616조). 혼인 외의 자는 모의 성을 따라야 한다(민법 제1617조).

12)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Recht und Sittlichkeit, Schopenhauer Jahrbuch 51(1970), 107; R. Zippelius, Rechtsphilosophie, 3. Aufl. 1994, §§ 5 f.

13)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Der rechtsfreie Raum, ZgS 108(1952), 385(415ff.).

14) Vgl. K. Engisch, Über Negationen in Recht und Rechtswissenschaft, FS f. H. Henkel (1974), S. 47.

15) 예컨대, L. Enneccerus/H. C. Nipperdey, Lehrbuch des Bürgerlichen Rechts, Bd. I 2, 15. Aufl. 1960, § 136 I.

16) 이에 관하여는 Enneccerus/Nipperdey, Bd. I 1, 15. Aufl. 1959, § 71; 비판적으로는 F. W. Jerusalem, Die Zersetzung des Rechtdenkens, 1968, S. 89 f.

17) H. Kelsen, Allgemeine Staatslehre, 1925, § 10 A. 특히 그의 저서인 “Reine Rechtslehre”에 있는 켈젠 이론을 집대성한 부분 참조(zum Text v. a. S. 114 ff.). 켈젠에 대한 비판은 Latenz, Methodenlehre, S. 69 ff.(특히 명제로서의 “법규”와 명령으로서의 “법규범” 사이의 켈젠의 구분에 관하여 S. 75 f.); 또한 vgl. K. Engisch, Literaturbericht Rechtsphilosophie, ZStW 75(1963), 591(605 f.).

18) 예컨대 H. Henkel, Einfü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2. Aufl. 1977, S. 42(S. 24 ff.도 함께); R. Zippelius, Einführung in die juristische Methodenlehre, 6. Aufl. 1994, S. 2 ff.

19) G. Simmel, Einleitung in die Moralwissenschaft I, 1892, S. 8 f. H. Kelsen, Hauptprobleme der Staatsrechtslehre, 2. Aufl. 1923, S. 7 ff.는 찜멜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R. Schreiber, Die Geltung von Rechtsnormen, 1966, S. 51 ff.

20) R. Eisler, Wörterbuch der philosophischen Begriffe, Bd. 3, 3. Aufl. 1910, S. 1362.

21) R. Eisler, Handwörterbuch der Philosophie, 2. Aufl. 1922, S. 610.

22) 이와 같은 의미로는 E. 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I, 4. Aufl. 1928, S. 40 ff.

23) 이하의 서술과 관련하여, Binder, S. 173 ff.; Kelsen, Rechtslehre, S. 73 ff.; U. Klug, Bemerkungen zur logischen Analyse einiger rechtstheoretischer Begriffe und Behauptungen, in: FS f. W. Britzelmayr(1962), S. 115; I. Tammelo, Contemporary developments of the imperative theory of law: a survey and appraisal, ARSP 49(1963), 255; Th. Geiger, Vorstudien zu einer Soziologie des Rechts, 1964, S. 61 ff.; die Beiträge zur Engisch-Festschrift(1969) von W. G. Becker, K. Larenz, P. Noll und I. Tammelo; E.-J. Lampe, Juristische Semantik, 1970, S. 51 ff., 63 ff.; K. Engisch, Auf der Suche nach der Gerechtigkeit, 1971, S. 26 ff.; R. N. Hare, Die Sprache der Moral, 1972, S. 19 ff.; H. H. Keuth, Zur Logik der Normen, 1972; H. L. A. Hart, Der Begriff des Rechts, 1973, S. 34 ff.(37); Henkel, Rechtsphilosophie, S. 43 ff.; J. L. Austin, Zur Theorie der Sprachakte, dt. bearb. v. E. v. Savigny, 2. Aufl. 1981; H.-J. Koch/H. Rüßmann, Juristische Begründungslehre, 1982, S. 45 f.; Bydlinski, S. 197 ff.; Larenz, Methodenlehre, S. 253 ff. m. w. N.; Coing, S. 235 ff.; D. v. d. Pfordten, Deskription, Eval!uation, Präskription, 1993, S. 336 ff.; Röhl, S. 226 ff.

24) 이와 같이 나는 “허용된”이란 의미를 “금지되지 않은”이란 의미와 같은 것으로 보고 “금지된”이란 의미와는 반대(금지를 부정하는)의 의미로 본다. “허용”이 명시적일 필요는 없고 또 적극적 용인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용인된”이란 의미로서 “허용된” 의미와 단순한 “금지되지 않은”(무관심한) 의미를 구별한다; 예컨대, W. Sax, Die rechtliche Dogmatik der Sterbehilfe durch vorzeitigen Abbruch einer Intensivbehandlung, JZ 1975, 137(145 f. mit Anm. 74). I. Tammelo, Outlines of modern legal logic, 1969, S. 90 ff.에서는 심지어 “permissory(적극적으로 허용된)”이란 의미와 “licensory(방임된)”이란 의미와 “neutral(관여하지 않는)”이란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학적이고, 비존재론적인 논리적 사고를 위와 같은 구분에 연관시킨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Tammelo 외에도, L. Philipps, Sinn und Struktur der Normlogik, ARSP 50(1964), 317; W. Kamlah/P. Lorenzen, Logische Propädeutik, 2. Aufl. 1973, S. 202 ff.; O. Weinberger, Der Erlaubnisbegriff und der Aufbau der Normenlogik, Études de logique juridique 5(1973), 113; ders., Rechtslogik, 2. Aufl. 1989, S. 231; G. H. v. Wright, Normenlogik, in: K. Lenk(Hg.), Normenlogik, 1974, S. 25; Koch/Rüßmann, S. 43 ff. 일상 언어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여기서 언급된 개념은 다음을 의미한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 것이고, 허용된 것은 금지되지 않은 것이다. 명령된 것은 허용된 것이지만, 허용되었다 하여 명령된 것은 아니다.

25) 법질서의 비독립적 구성에 관하여는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257 ff.; 특히 Keuth, S. 72 ff.; E. Schneider, Logik für Juristen, 4. Aufl. 1995, S. 62 ff.

26) 다시 말해 (개별적인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폐지하는 경우. 이러한 법규의 폐지에 관하여는 예컨대, E. R. Bierling, Juristische Prinzipienlehre, Bd. I, 1894, S. 97 ff.

27) 우리는 이와 같은 주관적 권리의 보장을 단순한 허용(“해도 좋다”는 의미에서)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법률“효과”의 발생을 목적으로 한 특정 행위를 할 “권한”을 인정하는, 특히 민사법에서 “사적 자치”를 이루도록 “법률행위”(계약, 처분행위, 유언)에 의하여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법적인 “가능”을 의미하는 법규와도 구별한다. 이러한 법규도 역시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요건만을 규정하고 있는 한 다시금 “비독립적”이라 할 수 있고, 법규명령설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이 있다. 중요한 핵심은 (주관적) 권리의 보장이 명령(Imperativ), 다시 말해 금지와 명령(Gebot)에 의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45쪽 주 23 후반부 참조.

28) Enneccerus/Nipperdey I 1, §§ 30, 72. 본문의 설명을 위하여서는 이와 같은 개념정의가 예나 지금이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이른바 소유권과 관련하여). 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는 K. Larenz, Allgemeiner Teil des deutschen Bürgerlichen Rechts, 7. Aufl. 1989, S. 210 ff. 여기서는 인격권의 경우에는 “힘”이 아니라 “인격 자체”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되어 있다. 이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보장과 명령에 관한 기본사상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29) K. Binding, Strafrechtliche und strafprozessuale Abhandlungen I, 1915, S. 539.

30) 여기서 우리는 1차적 행위규범과 2차적 제재규정이라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구분법에 마주하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Zippelius, Methodenlehre, S. 3, 6 f.

31) H. Kelsen, Reine Rechtslehre, 1. Aufl. 1934, S. 48 f.(또한 2. Aufl., S. 130 ff. 참조).

32)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나는 Klug, Henkel, Larenz(21쪽 주 14 참조; vgl. auch Schreiber, Geltung, S. 38 ff.; Bydlinski, S. 197 ff.; v. d. Pfordten, S. 336 ff.)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법규명령설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순수 논리적으로 본다면 법규명령설의 구성은 여러 가능한 이론 가운데 하나라는 점, Klug(in: FS Britzelmayr(1962), S. 117)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법규범을 당위규범으로 해석할 필연은 없다”는 점, 인간이 “규범의 기본방식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자유스럽다”는 점, 또한 “당위적 표현” 대신에 “허용규범적 표현”(이에 의하면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당위를 규정한다) 또는 주관적 권리와 관련하여 “권한”이란 표현 방식을 채택하는 것도 특히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점 등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법질서가 명령을 의미있게 장치하여 주관적 권리를 “보장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장”은 명령의 특별한 종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주관적 권리가 명령의 실체인 객관적 법에 현실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뿐이다. Lampe(S. 65)에 의하여 제기된 법제정 권한(38쪽 주 18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사적 자치”를 가능하게 하는 채권법적, 물권법적, 가족법적 및 상속법적 계약이나 처분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 이점에 대하여는 특히 Hart, S. 45 ff.에 법규명령설을 감동 깊게 비판하면서 언급되어 있다)도, Hart가 생각한 바와 같이, 권리와 의무, 말하자면 명령의 발생을 위한 요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Engisch, Suche, S. 47, 50 참조.

33) 우리는 지금까지 “규범”이란 말을 피해왔다. 일상적으로 “법규범”이란 일반적으로 제정된 법규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간혹 개별사례에 적용되는 개별규범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규범”으로서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우선 일반 법규이다. 켈젠에게 있어 “법규”의 특이한 사용례에 관하여는 28쪽 주 8 참조. 다른 방식으로 “법규범”과 “법규”를 구분하는 경우에 관하여는 H. J. Wolff/O. Bachof/R. Stober, Verwaltungstecht, Bd. 1, 10. Aufl. 1994, § 24 Rn. 10: 여기서는 규범이란 법규에 “표현되어” 있는 “명령적” 내용을 말한다고 한다.

34) F. Jodl, Allgemeine Ethik, 1918, S. 26; vgl. auch G. E. Moore, Principia Ethica(dt.), 1970, S. 186 f.

35) E. Mezger, Die subjektiven Unrechtelemente, Gerichtssaal 89(1924), 207(240 f.); vgl. auch Arthur Kaufmann, Tatbestand, Rechtfertigungsgründe und Irrtum, JZ 1956, 353(355 f.); Henkel, Rechtsphilosophie, 1. Aufl. 1964, S. 61 f.(anders 2. Aufl.).

36) 제218조a의 개정내용, 특히 제1항의 기간규정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는 BVerfGE 88, 203 안에서 논의된 논쟁과 K. Lackner, Kommentar zum Strafgesetzbuch, 21. Aufl. 1995, vor § 218 Rn. 1 ff. m. w. N., § 218a Rn. 1 ff. 참조. 제2항의 의학적 처방에 관하여서는 물론 위 논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37) 임신중절의 문제에 있어 기본법의 가치질서와 사회적 현실 사이의 큰 모순에 대하여는 vgl. Th. Würtenberger, Zeitgeist und Recht, 2. Aufl. 1991, S. 225 ff.

38) 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Werkausgabe, Bd. VII, hg. v. W. Weischedel, 10. Aufl. 1989, S. 43(BA 39). Vgl. 최근의 문헌들 중에서는 아마도 Hare, S. 54 ff.

39) Kant, Grundlegung, S. 44(BA 41).

40) F. Blaschke(Einl. zu N. Machiavelli, Der Fürst, 3. Aufl. 1924, S. XXVI)은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경우에는 “지도자가 질서국가를 형성하려면 무엇을 해야할 지에 필요한 정치적 규정을 획득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41) I. Kant, Metaphysik der Sitten, Werkausgabe, Bd. VIII, hg. v. W. Weischedel, 8. Aufl. 1989, S. 453(A 197).

42) Vgl. L. Nelson, Rechtswissenschaft ohne Recht, 2. Aufl. 1949, S. 13.

43) A. Ruesch, Todesstrafe und Unfreiheit des Willens, 1927, S. 31.

44) P. Eltzbacher, Über Rechtsbegriffe, 1900, S. 28.

45) G. Del Vecchio, Der homo juridicus, Philosophia 2(1937), 55(61).

46) Th. Geiger에 이어, Schreiber, Geltung, v. a. S. 18 f. 참조; dazu Lampe, S. 51 ff.

47) Del Vecchio, Philosophia 2(1937), 59; vgl. auch H. Rottleuthner, Richterliches Handeln, 1973, S. 13; Zippelius, Methodenlehre, S. 25.

48) 예컨대, M. Moritz, Der praktische Syllogismus und das juridische Denken, Theoria 20(1954), 78(90 f.); vgl. auch N. Luhmann, Rechtssoziologie II, 3. Aufl. 1987, S. 227 ff.(“konditionale Programmierung” in Rechtsnormen).

49) 여기서 다시금 문장의 형식이 중요한 문제일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예컨대, 형법 제211조가 “살인자는 무기징역으로 처벌된다”라고 규정하였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다면 그는 무기징역으로 처벌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50)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Methoden der Strafrechtswissenschaft, in: J. Esser u. a.(Hg.), Methoden der Rechtswissenschaft I, 1972, S. 42 ff.; H.-H. Jescheck/Th. Weigend, Lehrbuch des Strafrechts (AT), 5. Aufl. 1996, S. 136 f., 244 ff.

51) D. Liebs, Lateinische Rechtsregeln und Rechtssprichwörter, 5. Aufl. 1991, S. 48(C 78), mit Verweis auf Codex Justinianus 4, 10, 5에서 인용.

52) E. Zitelmann, Irrtum und Rechtsgeschäft, 1879, S. 214 ff.(216, 221).

53) A. v. Tuhr, Der Allgemeine Teil des Deutschen Bürgerlichen Rechts II 1, 1914, S. 5 f. mit Anm. 10.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인과성의 문제와 나중에 언급하게 될 “이중효과”의 문제에 대하여는 따로 조그만 문헌이 발간되어 있다. 구성요건과 법률효과의 관계 일반에 관하여서는 폰 투어 외에도 W. Schulze, Tatbestand und Rechtsfolge, 1909; Binder, S. 902 ff.; R. Henle, Lehrbuch des Bürgerlichen Rechts I, 1926, S. 29 ff.; K. O. Petraschek, System der Rechtsphilosophie, 1932, S. 270 ff.; W. Sax, Das strafrechtliche “Analogieverbot”, 1953, S. 145; Schreiber, Geltung, S. 14 ff.; Koch/Rüßmann, S. 15, 18 f., 47; Zippelius, Methodenlehre, S. 25 f. 특히 이중효과의 문제에 관하여는 Th. Kipp, Über Doppelwirkungen im Recht, FS f. F. v. Martitz(1911), S. 211; m. w. N: Enneccerus/Nypperdey I 2, §§ 136 I, 203 III 7; Larenz, BGB AT, S. 406; W. Flume, Allgemeiner Teil des Bürgerlichen Rechts II, 4. Aufl. 1992, S. 566 ff.

54) v. Thur, S. 5 Anm. 7.

55) Binder, S. 904 f.

56) 예컨대, F. Sommer, Das Reale und der Gegenstand der Rechtswissenschaft, 1929, S. 111 ff.(123); Petraschek, S. 271.

57) Vgl. Petrasch다, S. 271.

58) Henle, S. 30.

59) Kipp, FS Martitz (1911), S. 211.

60) 이에 관하여는 M. Bangemann, Bilder und Fiktionen in Recht und Rechtswissenschaft, 1963(m. w. N).

61) K. Peter, Die Möglichkeit mehrerer Gründe derselben Rechtsfolge und mehrerer gleicher Rechtsfolgen, AcP 132(1930), 1(4).

62) 이와 같은 방식으로 법규와 법적용자의 구체적 판단 사이에 물리적 인과관계가 형성되어진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법률적 인과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점에 관하여는 예컨대, H. Maier, Psychologie des emotionalen Denkens, 1908, S. 681 ff. 참조.

63) 이에 관하여는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276 f.

64) 물론 위와 같은 권한과 명령 자체를 “법적 효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적 효과”를 의미하는 법률효과란 권한을 행사하여 실현된 내용 그 자체를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법률효과”의 이중의미(25쪽 참조)에 대하여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를 요한다.

65)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Engisch, ZgS 108(1952), 385.

66)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Logische Studien zur Gesetzanwendung, 3. Aufl. 1963, S. 3 f.

67) 이에 관하여는, M. Rebinder, Einführung in die Rechtswissenschaft, 8. Aufl. 1995, S. 11 ff., 194 ff., 227 f.; 덧붙여 Bydlinski, S. 214 ff. m. w. N.; Larenz, Methodenlehre, S. 356 ff.; F. Müller, Juristische Methodik, 6. Aufl. 1995, S. 125, 200 f.

68) 법관법이 법률과 관습법 이외에 부수적 “법원(法源)”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는 이와 관련이 있다. 이 문제는 점점 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점은 제6장 참조(요컨대 231쪽 주 1 참조). 이하 본문에서는 법관을 독립적으로 판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률에 따라 판결하는 사람으로 우선 이해하고자 한다. 법관법의 “근거”로서 “법감정”에 관하여는, 고전적 문헌으로 M. Rümelin, Rechtgefühl und Rechtsbewußtsein, 1925; H. Isay, Rechtsnormen und Entscheidung, 1929, S. 85 ff.; E. Riezler, Das Rechtsgefühl, 3. Aufl. 1969, S. 137 ff.; 덧붙여 Würtenberger, S. 167 ff. 182 ff.; M. Rebinder, Rechtssoziologie, 3. Aufl. 1993, S. 176 ff. m. w. N.; ders., Rechtswissenschaft, S. 153, 167;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18 ff.

69)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판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순수 사고의 산물로서 당위의 확정”이고, 그에 덧붙여진 궁극적 명령의 내용은 아니다(본문 88쪽 참조); 이에 관하여는, vgl. Engisch, Studien, S. 4; J. Rödig, Die Theorie des gerichtlichen Erkenntnisverfahtens, 1973, S. 10, 63 f., 82 ff.

70) Th. Maunz, Deutsches Staatsrecht, 23. Aufl. 1980, § 10 I d; 법률의 유보와 법률의 우위에 관하여는, Th. Maunz/R. Zippelius, Deutsches Staatsrecht, 29. Aufl. 1994, § 13 III 4 m. w. N.

71) 이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en, S. 3 f.

72) Moritz, Theoria 20(1954), 78.

73) Maier, S. 615.

74) 예컨대, F. Somló, Juristische Grundlehre, 2. Aufl. 1927, S. 218 Anm. 4; 또한 Peter, AcP 132(1930), 41 f.; Weinberger, S. 250 f.(“Abtrennungsregel”).

75) 좀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일반에서 개체로의 이중 추론을 하게 된다. 즉 살인자를 처벌하여야 한다는 당위에 관한 추론과 함께, 살인자에게 형을 선고하여야 한다는 모든 법관에 대한 명령으로부터 여기서 지금 형을 선고하여야 한다는 현재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법관에 대한 명령의 추론을 나란히 하게 된다.

76) 처음에는 “응용 미적분학”(vgl. O. Becker, Untersuchungen über den Modalkalkül, 1952, S. 40 ff.)에 의한, 그 뒤에는 “비존재론적” 논리학의 영역 안에서의 비판. 후자에 관하여서는 독자적 문헌도 간행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92쪽 주 15에서 열거하고 있는 논리학 문헌 참조.

77) 여기와 이하에 관계된 부분에 관하여는, Lampe, S. 40 ff., 특히 S. 48: “모든 법규명령은 명령되어진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확정하는 법규의 지시를 포함한다.” M. Mortz, Kann das (richterliche) Urteil deduziert werden?, in: FS f. P. O. Ekelöf(1972), S. 502에서는 법적 명령을 위한 “병렬 판단”에 관하여 언급하고, 이를 수행하면서 삼단논법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구체적 법적 판단이 법률과 일치하는지 않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하고(502쪽), “법규가 명령으로서 파악되어지는 경우”에 특히 바로 그렇다고 한다(518쪽). 이와 반대는, K. Haag, Kritische Bemerkungen zur Normlogik, in: Arthur Kaufmann (Hg.), Rechtstheorie, 1971, S. 135(139). 그러나 모리쯔와 나에게 있어 명령이 판단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속에서 명령을 언급하는 것이란 점을 주의하기 바란다.

78) 예컨대, R. Carnap, Einführung in die Symbolische Logik, 3. Aufl. 1968, S. 36.

79)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서는, Engisch, Studien, S. 6 ff.; Larenz, Methodenlehre, S. 271 ff.; 덧붙여 Kelsen, Rechtslehre, S. 76 f. 논리적 서술로는, Th. Heller, Logik und Axiologie der analogen Rechtsanwendung, 1961, S. 68 ff.; R. Schreiber, Logik des Rechts, 1962, S. 38 ff.; H. Lenk(Hg.), Normenlogik, 1974; G. H. v. Wright, Handlung, Norm und Intention, hg. und eingel. v. H. Poser, 1977; U. Klug, Juristische Logik, 4. Aufl. 1982, S. 48 ff.; Koch/Rüßmann, S. 31 ff.; Weinberger, m. w. N. im Literaturverzeichnis; R. Alexy, Theorie der juristischen Argumentation, 2. Aufl. 1991, S. 273 ff.; Röhl, S. 113 ff.

80)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Die Idee der Konkretisierung in Recht und Rechtswissenschaft unserer Zeit, 2. Aufl. 1968, S. 188 ff. m. w. N.; 이외 비판적인 견해로는 예컨대, Coing, S. 276 ff.; 이와 달리 (이사이를 찬성하는) Esser, Grundsatz, S. 19 ff., 256 m. w. N. 이사이에 대한 나의 비판은 상당한 반론에 부딪쳤다. 예컨대, P. Schwerdtner, Rechtswissenschaft und kritischer Rationalismus, Rechtstheorie 2(1971), 67(70)와 Keuth, S. 38 f.(“법관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실상의 행위에 관한 판단을 반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사이가 그의 관점에 따라 전형적이고 선례적이라 할 법관의 판단을 심리상의 감정적 사실, 다시 말해 법감정에 근거 지우고, 다른 한편 법률적 규범에서 정당한 판단의 본래 인식근거로서의 기능을 박탈하고 오히려 부차적인 통제기능만을 부여하였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점에서 나는 실제 법정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실(즉, 법관이 우선은 법감정에 기초하고, 그 다음 규범을 검토하고, 그리하여 이것이 법감정과 가능하면 조화를 이루도록 유지시키고 있는 사실)로부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잘못 추론하고 있다는 점과 더 나아가 주관주의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법관의 법률구속성의 원칙(기본법 제20조 제3항; 또한 Jarass, in: Hans D. Jarass/Bodo Pieroth, Kommentar zum Grundgesetz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3. Aufl. 1995, Art. 20 Rn. 28. m. w. N.)에 위배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만족스럽다고 생각되어지는 결과를 위하여 외견상 근거를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에 관하여는, F. Brecher, Scheinbegündungen und Methodenehrlichkeit im Zivilrecht, in: FS f. A. Nikisch (1958), S. 227; W. A. Scheuerle, Finale Subsumtionen, AcP 167(1967), 305; M. Kriele, Theorie der Rechtsgewinnung, 2. Aufl. 1976, S. 118 ff.; Müller, Methodik, S. 245 ff. “목욕탕 욕조사건”(RGSt 74, 84)에서 배울 점이 많은데 이에 관하여는 F. Hartung, JZ 1954, 430이 시사하는 바 많다. 즉, 라이히 재판소는 사형판결과 그 집행을 회피하기 위하여 주관적 공범론을 “극단적”으로 제한하여 혼인 외에서 출생한 자녀를 생모의 자매가 익사시킨 행위를 종범으로 “구성하였다”. 근거가 진정한 것인지 외견상의 것인지 구별하는 기준은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주관적 진지성에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외견상 근거”는 “외견상 근거”가 아니라고 본다. 주목할만한 것은 목욕탕 욕조사건에서 하르퉁은 자신이 제안한 판단을 “학문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법률과 대전제는 “합리적” 결과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우리가 기본적 진리로 가정한다면, 그렇게 하여 얻은 결과는 대부분 특별한 “위장”이나 “편법” 없이도 정당화될 수 있고, 법률로부터의 추론이나 대전제에 대한 관련만으로 근거가 있을 수 있다. 법관이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비합리적” 법률(또는 의심스러운 판결 등)의 적용을 의식적이고 명시적으로 배척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에 관하여는 제7장 참조.
“이성적”, “정당한”, “만족스러운” 결과의 합리적 근거지움과 함께 이론과 실천의 관계, 판단 형성에 있어 심리학과 논리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논의는 에써, 크릴레 및 뮐러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에써(Vorverständnis und Methodenwahl in der Rechtsfindung, 1970, 특히 132쪽 이하 및 175쪽)는 이사이를 지지한다. 법관은 어떤 “선(先)이해”를 가지고 사안을 접하는데 그러한 선이해는 일종의 “선판단”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당사자는 어떤 특정한 기대와 요청을 가지고 재판을 하고있다고 법관은 생각하고, 더욱이 “해석”이 법적으로 가능한 정당한 것에 대한 어떤 특정한 논의와 그런 의미에서 “선평가” 또는 “선판단”에 좌우되는 것을 방임한다고 한다. 적당한 규범을 찾아내거나 규범을 선택하는 문제, 규범을 적용한다거나 적용하지 않는 문제는 그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의도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형식”논리학은 – 에써나 크릴레는 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 충분하진 않지만 판단의 “정당성”에 관하여 나름의 필요한 근거는 이를 제공한다(Esser, Vorverständnis, S. 77; 또한 Koch/Rüßmann, S. 27 f.; C. W. Canaris, Systemdenken und Systembegriff in der Jurisprudenz, 2. Aufl. 1983, S. 22 f.; Alexy, Argumentation, S. 280 ff.; Müller, Methodik, S. 76 f. 참조). 그러나 우리 기본법(제20조 제3항) 구조하에서는 – 에써나 크릴레도 이점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 궁극의 문제는 획득되어진 “결과”가 논리적, 방법론적 및 법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경우 법관이 사실상 법발견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하는 심리적, 사회학적 문제와 같은 사실적 문제(quaestio facti)는 그때그때 취급된 대로(이사이, 에써, 크릴레 등; 에써에 대한 비판은 Larenz, Methodenlehre S. 210 f. 참조) 내버려두고, 어떤 형식적, 실질적 조건하에서 법발견의 결과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하는 논리적, 인식론적 문제와 같은 이성적 문제(quaestio iuris)를 이와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 법원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한계 안에서 효과적으로 대전제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만으로는 이러한 작업수행의 정당성에 관한 아무런 해답도 되지 못한다. 어떤 방법론적 규칙을 어떤 때는 지키고 어떤 때는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크릴레(S. 25)가 주장한 것처럼 “그 규칙의 효력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여러 해석방법론 가운데 우열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여(본문 171쪽 이하 참조) 정당한 판단을 목적으로 한 해석방법론의 논의에서 우리가 자유스럽게 되지는 못한다. 법발견에 있어 자명한 것으로 이해된 그런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의 고유법을 물론 무시할 수는 없다; 이것과 그 한계에 관하여서는, Rehbinder, Rechtssoziologie, S. 10 ff.(특히 27), 194 ff. 참조. 심지어 사실적 문제와 이성적 문제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점에 관하여서는 논리학(광의의 의미로 “사실논리학”을 포함한다)만이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처음부터 가능한 것으로 분명하다. 이 책의 이하의 서술은 법적 사고의 논리성과 방법론에 입각하고 있다.

81)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형식논리적 고찰이 관여한다. 크릴레(Kriele)(S. 51)는 “소위 정당한 포섭의 문제란 결코 문제가 아니다…아무리 그럴듯한 사안이라도 삼단논법에 의한 포섭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구성될 수 있다…차라리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에 관하여 어떤 방법론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있지 않다면 이는 태만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바, 이는 엄밀하게는 전체로서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을 언급한 것이지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소전제(즉 “A는 살인자다”)에서의 포섭을 말한 것은 아니다. 전체로서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구성될 수 있다(이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en, S. 13). 그러나 판단작용을 수반하는 소전제에서의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은 그렇지 않다(이에 관하여는 Rödig, S. 151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에써(Esser) (Vorverständnis S. 26, 60 f., 65 ff. 등에서) 역시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과 소전제에서의 포섭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몽테스큐의 법관에 의한 법창조적 기능론(이에 관하여는 본문 232, 277쪽 주 48과 함께 참조)을 포섭“이론”의 문제로 다루었는바(S. 49), 이는 크릴레와 마찬가지로 포섭 그 자체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이해한 것이다(S. 45 ff.). 그러나 이 경우 그는 포섭을 순수 논리적이고 쉽게 명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사고과정으로 오해한 것이다. 가치작용을 수반하는 포섭에 있어 이러한 오해는 유감스럽게도 예컨대 뮐러(Müller), Methodik에서조차 “논리적 포섭”(S. 73), “형식논리성을 요구하는 소전제에서의 실증주의적 포섭”(S. 98)이란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다시 한 번 발견될 수 있다. 포섭에 관한 더욱 상세한 설명은 본문 106쪽 이하 참조.
법률적 삼단논법에 있어 소전제의 개념을 다루면서 단순히 사실확정의 문제와 증명의 문제에만 국한한다거나(Esser, Vorverständnis, S. 46; Kriele S. 48; Müller, Methodik, S. 35) 또는 “사실판단”의 문제(그 나름대로는 정말 타당하다. Esser, Vorverständnis, S. 50 참조)에만 한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포섭”의 개념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W. A. Scheruerle, Rechtsanwendung, 1952, S. 38; Engisch, Studien, S. 18 ff.; Larenz, Methodenlehre, S. 278 ff. 참조.

82) 사실과 사실확정의 개념에 관하여 더욱 상세한 것은, Engisch, Studien, S. 37 ff.; Larenz, Methodenlehre, S. 304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83 ff.(je m. w. N.). 덧붙여 E. Döhring, Die Erforschung des Sachverhalts im Prozeß, 1964; J. Hruschka, Die Konstitution des Rechtsfalles, 1965; Rödig, S. 3 ff., 239 ff.; Bydlinski, S. 417 ff.

83) 이에 관하여 대표적으로는, F. Stein, Das private Wissen des Richters, 1893. 또한 Döhring, 특히 S. 256 ff.; Rödig, S. 242 ff.

84) 예컨대, die Peinliche Gerichtsordnung v. 1532, Art. 67.

85) 예컨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ZPO §§ 415 ff.

86) 이에 관하여는, Döhring, S. 9; Larenz, Methodenlehre, S. 306 f.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형식적 진실”에 관하여는 Rödig, S. 151 ff. 참조.

87) 이에 관하여는 누구보다도, E. Dreher/H. Tröndle, Kommentar zum Strafgesetzbuch, 47. Aufl. 1995, § 243 Rn. 6 m. w. N.

88) P. Bockelmann, Der Diebstahl aus Fahrzeugen, JZ 1951, 296(298).

89) 후자와 같은 포섭을 나는 E. Husserl과 관련하여 “Subordination”이라 부른다(Engisch, Studien, S. 23 f.). 이러한 포섭에서는 Larenz, Methodenlehre, S. 273이 설명한 바와 같이 좀더 좁은 범위의 개념을 (분류기준을 떼어내고) 좀더 넓은 범위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Unterordnung)의 문제인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또한, Zippelius, Methodenlehre, S. 90 f. 참조.

90) 예컨대, Sommer, S. 119 f. K. Michaelis, Über das Verhältnis von logischer und praktischer Richtigkeit bei der sogenannten Sunsumtion, FS f. das OLG Celle (1962), S. 117(13)에서 요컨대, “추상적 구성요건과 구체적 포섭판단은 – 하나는 추상적 구성요건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사안이므로 – 논리적으로 같지가 않고, 구체적 사안이 구성요건의 추상적 규정과 일치하는지가 그 추상적 규정으로부터는 논리상 연역될 수가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 없이 일치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면, 이도 비슷한 이야기다. 나는 본문 110쪽 이하에서 설명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미하엘리스가 생각한 것처럼 이는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91) Scheuerle, S. 150. 또한 Sax, S. 101 f., 135 f.

92) 이에 관하여 더 자세한 것은, Carnap, Einführung, S. 40, 109 f.; 덧붙여 Heller, S. 69; Engisch, Studien, S. 22 f.

93) 비슷한 견해는 W. Hassemer, Tatbestand und Typus, 1968, S. 17 f.; Arthur Kaufmann, Analogie und “Natur der Sache”, 2. Aufl. 1982, S. 38 ff.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또한 Esser, Vorverständnis, S. 30에서는, 법률적 규범으로부터 “지금 사안과 비교될 수 있는 일련의 비슷한 적용사례”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Larenz, Methodenlehre, S. 274에서는 포섭에 관하여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포섭이란 “법규의 구성요건에서 거론된 요소가 적용하려는 생활사례에서 실현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라렌쯔와 마찬가지로 K.-H. Strache(Das Denken in Standards, 1968)과 Zippelius는 본문에서 주어진 포섭의 범위와 관련된(“외연적”) 해석으로부터 내용과 관련된(“내재적”) 해석을 끌어내고 있다. 즉, 포섭이란 “구체적 요소들을 종합한 것”이 “추상적 개념을 정의한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정하는 것(Strache, S. 52 Anm. 132), 또는 “법문에 의하여 보편적으로 이해된 경험적 내용(자동차의 경적)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에서의 경험적 사실(이 자동차의 경적)”이 동일하다는 점을 확정하는 것(Zippelius, Methodenlehre, S. 91)을 말한다고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두 개의 외연적, 내재적 해석이 서로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94) 포섭과 해석의 관계에 관하여는, D. Jesch, Unbestimmter Rechtsbegriff und Ermessen in rechtstheoretischer und verfassungsrechtlicher Sicht, AöR 82(1957), 163(186); Engisch, Studien, S. 26 ff. 또한 Scheuerle, AcP 167(1967)에서 다루고 있는 “최종적 포섭”이란 것도 해석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최종적 해석”은 “최종적 포섭”에 유용하다, S. 329 ff.). 여기에 덧붙일 것은 포섭의 부정(예컨대, “밀폐된 자동차는 형법 제243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밀폐된 공간’이 아니다”)도 해석의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Engisch, Studien, S. 28 참조. 해석과 (법)적용의 관계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H.-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6. Aufl. 1990, S. 312 ff.

95) 소전제의 요소로서 포섭과 삼단논법으로서 포섭에 의한 결과추론의 구별에 관하여는, 97쪽 주 17 참조. 여기서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포섭 그 자체의 의의에 관하여서는 다음의 문헌을 비교해볼 수 있다. Scheuerle, S. 148 ff.; Jesch, AöR 82(1957), 178 ff., 188 ff.; H.-E. Henke, Die Tatfrage, 1966, S. 106 ff., 177 ff.; Bydlinski, S. 395 ff.; Larenz, Methodenlehre, S. 273 ff.; Pawlowski, Rn. 124 ff., 379 ff.; Coing, S. 274 ff.; Müller, Methodik, S. 79 ff. 내가 사용하고 있는 포섭의 개념에는 “비합리적 가치평가”에 근거하여 동일시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이와 비교하여 앞에서 거론한 많은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좁은, 합리적 과정에 국한된 포섭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물론 소전제 안에서 “법적 판단”이란 또 다른 개념을 통한 보충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모든 포섭이 가치평가에 의존한다고 본다면, 이와는 정반대의 오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기술적”) 개념에 있어서는 포섭을 위하여 가치평가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경험적 인식만이 필요할 뿐이다(예컨대, “A는 제한시속 50km를 초과하였다).

96) 사실확정과 포섭의 구조상 관련성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en, S. 82 ff.와 Jesch, Döhring(S. 12 ff.), Henke의 저서들 외에, W. A. Scheuerle, Beiträge zum Problem der Trennung von Tat- und Rechtsfrage, AcP 157(1957), 1 참조.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307 ff. m. w. N.에서는 “‘행위’의 문제와 ‘법의 문제’의 구별”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97) “전체적 포섭”에 관하여서는 Scheuerle, S. 152 ff.가 주목할 만 하다. 전체적 포섭은 개별적 포섭에 기초하여 성립한다.

98) 이들에 관하여는, E. Beling, Deutsches Reichsstrafprozeßrecht, 1928, S. 239.

99) Beling, Reichsstrafprozeßrecht, S. 238 f. 민사소송법에서의 입증책임에 관하여는, L. Rosenberg, Die Beweislast, 5. Aufl. 1965, 및 ders./K. H. Schwab/P. Gorrwald, Zivilprozeßrecht, 15. Aufl. 1993, § 117 참조.

100) 형사소송에서 “택일적 확정”의 문제에 관하여는, R. Maurach/H. Zipf, Strafrecht, Allgemeiner Teil, Bd. 1, 8. Aufl. 1992, § 10 Rn. 24 ff. m. w. N.

101) 이에 관하여는, Esser, Vorverständnis, 예컨대 S. 71 ff. 참조. 내가 대전제에서의 작업을 작게 평가하고 있다고 에써(75 ff.)는 생각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에써가 지적한 “Logischen Studien zur Gesetzesanwendung”에서 나는 제목이 말하여주는 것처럼 제한된 과제를 설정하였던 것임을 모르는 이야기이다(Engisch. Studien, S. 6 참조: 법적 당위판단을 근거 지우는 문제를 완벽하게 다룰 수는 없다). 이에 반하여 이 책인 법적 사고 입문에서는 내가 “해석”과 “흠결보충”을 수단으로 대전제를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에써가 “분리할 수 없다”고 한 규범적용과 규범해석의 “일체”를 내가 그 요소별로 나누고 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102) 법률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얻어진 대전제에서조차도 문자로 표현된 것(“문언”, “어의”)과 그 속에 담겨진 “의미”(“사고내용”)를 구분하여야 한다는 점은 – 이에 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지적되었으므로(예컨대, I, Ebsen, Gesetzesbindung und “Richtigkeit” der Entscheidung, 1974, S. 31 ff.) – 분명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는 해석의 대상이고 후자는 해석의 목표이다.

103)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K. Engisch, Die Einheit der Rechtsordnung, 1935, S. 26 ff.; ders., Studien, S. 14 f.; Zippelius, Methodenlehre, S. 27 ff. 우리가 얻고자 하는 법규를 선택함에 있어 특히 체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그때에는 문언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Larenz, Methodenlehre, S. 281 ff.에 의하면) 보충되어져야 한다(또한 Canaris, Systemdenken, S. 86 ff. 참조). 에써(Vorverständnis, u. a. S. 28 f.)는 “적용할 규범(maßgebende Normen)”을 선택하기 위하여 “전체적 사고(Vorüberlegunge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에써(S. 68)가 언급하였던 “도로교통에서의 자기부담”이 하나의 좋은 실례를 제공한다고 본다. 여기서 법원은 위 자기부담을 손해배상청구권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무관리의 규정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104) 여기서 등장하는 논리적인 범위의 문제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en, S. 14 f. 참조. 내가 위 책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개한, 그러나 그렇게 고심하지도 않았고 자세히 분석하지도 않았던, “대전제와 생활사태 사이를 오고 가며 조망”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Hruschka, Konstitution, S. 55; Henke, S. 139; Kriele, S. 161; Jescheck/Weigend, S. 153; Alexy, Argumentation, S. 281 f.; Bydlinski, S. 421 ff.; Larenz, Methodenlehre, S. 281 및 기타(찬성을 위하여 보다 정확하게는, A. Maschke, Gerechtigkeit und Methode: Zu Karl Engischs Theorie des juristischen Denkens, 1993, S. 255 ff.) 등으로부터는 우호적 동의를 받았으나, 애써(Vorverständnis, S. 76)는 이를 약간 빈정대고 있다.

105) R. Stammler, Theorie der Rechtwissenschaft, 1911, S. 24 f.

106) 다른 실례로는, Zippelius, Methodenlehre, S. 27 ff., 84 f.

107) 1990. 8. 20. 추가된 민법 제90조a는 동물이 물건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물건에 대한 조항이 그것에 준용된다. 이러한 준용으로 인하여 실무상 취급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시 말해 민법 제90조a가 신설되었음에도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 부분에서 물건처럼 취급된다. 이에 관하여는, Heinrichs, in: Palandt, Kommentar zum Bürgerlichen Gesetzbuch, bearb. P. Bassenge u. a., 55. Aufl. 1996, § 90a m. w. N.

108) 이와 관련된 논쟁에 관하여서는, L. Enneccerus/H. Lehmann, Lehrbuch des Bürgerlichen Rechts, Bd. II, 15. Aufl. 1958, § 225 I 3 참조; 그러나 이제는 K. Larenz/C.-W. Canaris, Lehrebuch des Schuldrechts, Bd. II 2, 13. Aufl. 1994, S. 182.

109) 법에 있어 해석과 이해에 관련된 문헌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길 바라는 법학자라면 철학적 문헌도 아울러 고려하여야 한다. 상세한 참고문헌은 K. Engisch, Einführung in das juristischen Denken, 8. Aufl. 1983, Anm. 57 (S. 218 ff.) 참조. 또한 Alexy, Argumentation, S. 219 ff., 288 ff.; Bydlinski, S. 428 ff.; Larenz, Methodenlehre, S. 204 ff., 312 ff.; Pawlowski, Rn. 453 ff.; D. Schmalz, Methodenlehre für das juristische Studium, 3. Aufl. 1992, S. 225 ff.; Zippelius, Gerechtigkeit, S. 379 ff., 393 ff.; ders., Methodenlehre, S. 16 ff.; ders., Rechtsphilosophie, §§ 39 f. 등 참조. 최고법원 판결에 있어 해석원칙에 관하여는 159쪽 주 29 참조. “헌법합치적 해석”에 관하여는 176쪽 이하 주 50의 문헌 참조.

110) 이에 관하여는, Heller, S. 67 ff.; E.-W. Hanack, Der Ausgleich divergierender Entscheidungen, 1962, S. 114 ff., 184 ff. 또한 vgl. Hassemer, S. 18 f.; Rödig, S. 180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92 f.

111) 이에 관하여는, Ch. Sigwart, Logik I, 4. Aufl. 1911, S. 50 Ziff. 4.

112) 포섭의 유형포섭(Subordination)과의 관계와 포섭의 해석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en, S. 13 ff., 23 ff.; Jesch, AöR 82(1957), 186 ff.; Hassemer, S. 98 ff.; Rödig, S. 165 ff., 181; Jescheck/Wiegend, S. 152 f.; Pawlowski, Rn. 126 f. 참조. 본문에서 나온, 해석의 내용정의와 범위정의의 구별에 관하여는, Scheuerle(S. 170 ff.)의 analoge Unterscheidung zwischen definitorischer und exemplifikativer Interpretation 참조; 덧붙여 Jesch, AöR 82(1957), 192 Anm. 109; A. Wolffers, Logische Grundformen der juristischen Interpretation, 1971, S. 11 ff.(여기서는 “definierenden” 해석과 ”exemplifizierenden” 해석 외에도 “klassifizierende” 해석이 등장하고 있는데, 내 개인적으로 이는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거기에 바로 나와 있는 바대로, ”스위스 인은 단지 남자들 만이다““라고 함은 ”스위스 인은 단지 남자들인 스위스 인들 만이다“와 같은 뜻이다) 참조.

113) 예컨대, Schönke/Schröder, 10. Aufl. 1961, III zu § 267. 최근 문헌으로는 또한 Schönke/Schröder-Cramer(24. Aufl. 1991), II und III zu § 267(ohne methodische Änderungen) 참조.

114) 정신과학의 개념역사와 본질에 관하여는, W. Dilthey, Gesammelte Schriften, Bd. I, 4. Aufl. 1959, Bd. VII, 2. Aufl. 1958; 더 나아가 예컨대, E. Rothacker, Logik und Systematik der Geisteswissenschaften, 1927, S. 6 ff.; H. Freyer, Theorie des objektiven Geistes, 3. Aufl. 1934; Gadamer, u. a. S. 9 ff., 222 ff., 287 ff.; ders., Geisteswissenschaften, in: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d. 2, hg. v. K. Galling, 3. Aufl. 1958, S. 1304; U. Diederichsen, Einführung in das wissenschaftliche Denken, 2. Aufl. 1972, S. 17 ff.; A. Diemer, Geisteswissenschaften, in: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hg. v. J. Ritter u. a., Bd. 3, 1974, S. 211; J. Ritter, Die Aufgabe der Geisteswissenschaften in der modernen Welt, in: ders., Subjektivität, 1974, S. 105(120 ff.); O. Marquard, Über die Unvermeidlichkeit der Geisteswissenschaften, in: ders., Apologie des Zufälligen, 1987, S. 98. 참조. J. G. Droysen(Grundriß der Historik, 3. Aufl. 1882, §§ 8 ff.)이 특별한 역사적 방법론으로 삼은 이해를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특징으로까지 고양시켰다: 예컨대, Bd. VII, S. 131 참조: “정신과학은 경험, 표현과 이해의 관계에 근거한다”(이와 비슷하게 S. 86 f.); 정신과학의 범위는 이해가 미치는 곳까지이다(vgl. S. 141).
정신과학으로서의 법학에 관하여는, 예컨대 Binder, S. 886 ff.; Th. Viehweg, Zur Geisteswissenschaftlichkeit der Rechtsdisziplin, Studium generale 11(1958), 334; Dreier, Rechtstheorie 2(1971), 37; H. Rottleuthner, Rechtswissenschaft als Sozialwissenschaft, 1973, S. 205 ff., 245 ff.; G. Winkler, Theorie und Methode in der Rechtswissenschaft, 1989, S. 219 ff., 233 ff.; Bydlinski, S. 65 ff., 76 ff.; Coing, u. a. S. 95 ff., 297 f. 참조.

115) R. Lauth, Die Frage nach dem Sinn des Daseins, 1953, S. 32 f. “의미”의 개념에 관하여는 덧붙여 J. E. Heyde, Vom Sinn des Wortes Sinn, in: ders., Wege zur Klarheit, 1960, S. 101; Lampe, S. 42 ff.; Hruschka, Verstehen, S. 27 ff., 42 ff.

116) 이점은 이미 F. Regesberger, Pandekten I, 1893, § 35*에서 주장되었다. 법률적 “해석학”을 고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현재 많은 사람이 노력 중에 있다.

117) 1974년 EGStGB에 의하여 개정된 제259조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의미가 있으나 내가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장물죄와 관련하여서는 아무 것도 변함이 없다. 특히 “수단으로(durch)”라는 단어는 이전의 “통하여(mittels)”란 단어와 다르지 않다.

118) E. Beling, Begünstigung und Hehlerei, in: K. v. Birkmeyer u. a. (Hg.), Vergleichende Darstellung des deutschen und ausländischen Strafrechts, BT VII, 1907, S. 1(69). 연방대법원도 라이히 재판소를 따르고 있다. 예컨대, BGHSt 9, 137(139) 참조. 또한 W. Stree, Die Ersatzheherei als Auslegungsproblem, JuS 1961, 50; 덧붙여 Lackner, § 259 Rn. 8 m. w. N.

119) 예컨대, F. C. v. Savigny, System des heutigen römischen Rechts I, 1840, S. 213 f.; E. Bierling, Juristische Prinzipienlehre, Bd. IV, 1911, S. 211 f.

120) R. Maurach/F.-Ch. Schröder, Strafrecht, Besonderer Teil, Bd. 1, 6. Aufl. 1977, § 50 I C 3.

121) 예컨대, E. Mezger, Zur Entwicklung der sogenannten Ersatzhehlerei, ZStW 59(1940), 549(570 ff.).

122) 메쯔거는 이점을 특히 중요시한다. 나중에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란 구성요건에 대신하여 “영득할 목적으로”란 구성요건으로 개정되었으나 제259조의 대상장물죄에 관련된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

123) 예컨대, Dreher/Tröndle, § 259 Rn. 1.

124) R. Maurach/F.-Ch. Schröder/M. Maiwald, Strafrecht, Besonderer Teil, Bd. 1, 8. Aufl. 1995, § 39 Rn. 9.

125) W. Gallas, Zur Kritik der Lehre vom Verbrechen als Rechtsgutsverletzung, in: FS f. W. Gleispach(1936), S. 50(59); E. Mezger, Strafrecht, Besonderer Teil, 7. Aufl. 1960, § 51 IV. 이와 달리 오늘날 통설로는, Schönke/Schröder-Stree, § 259 Rn. 1 f. m. w. N.

126) 이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는 새로 나온 형법(각칙) 교과서와 주석서 참조, 예컨대 H. Blei, Strafrecht, Besonderer Teil, 12. Aufl. 1983, § 72; Schönke/Schröder-Stree, § 259 Rn. 13 f. 그 외 제259조의 개정이유는 “유지설”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인데(Blei, § 72 II), 이는 “주관주의적, 목적론적 방법론”을 기초로 하면서 대상장물죄를 취급함에 있어 커다란 의의가 있다(본문 209-215쪽 참조).

127) Savigny, S. 213 f.에서는 해석의 4요소로 문법적, 논리적, 역사적 및 체계적 해석이 언급되어 있다. 비법률적인 고전 문헌 가운데 해석의 여러 종류를 구별한 것에 관하여는, J. Wach, Das Verstehen, 예컨대 Bd. 1, 1926, S. 46(Ast), 74 f.(F. A. Wolf), 109, 119 ff.(Schleiermachers Kritik), 195 ff.(Boeckh), Bd. 3, 1933, S. 172 ff.(Droysen). 법적 해석의 전통적 이론에 관하여 대표적으로는, Enneccerus/Nipperdey I 1, § 56. 보통법 시대에 있어 이미 이와 비슷한, B. Windscheid, Lehrbuch des Pandektenrechts I, 9. Aufl. 1906, § 21. 해석의 여러 종류를 구별하는 것과 관련하여 비판적으로는, A. Keller, Die Kritik, Korektur und Interpretation des Gesetzeswortlautes, 1960, S. 48 f.; Rödig, S. 282 ff.; Kriele, S. 81 ff., 85 ff.; Müller, Methodik, S. 81 ff.

128) 이하 Enneccerus/Nipperdey I 1, § 56에서 인용.

129) 최고법원의 해석원칙에 관하여는 예컨대, Jescheck/Weigend, S. 154 ff.; A. Gern, Die Rangfolge der Auslegungsmethoden von Rechtsnormen, VerwArch 1989, 415(426 ff.); Larenz, Methodenlehre, S. 312 ff., 320 ff.; Schönke/Schröder-Eser, § 1 Rn. 36 ff.; K. Hesse,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20. Aufl. 1995, Rn. 53 ff.; Jarass/Pieroth, Einl. Rn. 3 ff.; Müller, Methodik, S. 34 ff.; J. Wessels, Strafrecht, Allgemeiner Teil, 26. Aufl. 1996, Rn. 57; Palandt-Heinrichs, Einl. vor § 1 Rn. 248 ff.; Th. Oppermannm, Europarecht, 1991, § 7 V(m.w.N). 헌법과 유럽공동체법에 부합하는 해석에 관하여는, 아래 176쪽 이하 주 50 참조.

130) K. Zweigert, Juristische Interpretation, Studium generale 7(1954), 380(381).

131) 좀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문언에 의해 명백한 규정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컨대 BGH NJW 1951, 922 Nr. 9, NJW 1956, 1553 r.o.; BVerfGE 4, 331(351); Kaufmann, Analogie, S. 5(“해석은 더 이상 명백하지 않은데서 시작된다”); Kriele, S. 91(“의문과 견해의 대립이 있는 데서부터 해석은 시작된다”); Hesse, Rn. 49 등 참조. 라렌쯔(Methodenlehre, S. 204)는 “이해”와 “해석”을 구분하여 후자를 “생각하는” 이해라 하였는바,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언이 명백한 때”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위와 같은 이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는, 예컨대 Esser, Grundsatz, S. 179, 253 f.; Enneccerus/Nipperdey I 1, § 5514; H. u. K. Clauss, Zum Begriff “eindeutig”, JZ 1961, 660; Fikentscher III, S. 658 f.; Larenz, Methodenlehre, S. 343 참조.
그러나 위와 같이 문언이 명백한 때는 전혀 해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명백한 어의에 반하여서는 어떠한 해석론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예켠대, B. Heusinger, Rechtsfindung und Rechtsfortbildung im Spiegel richterlicher Erfahrung, 1975, S. 94 f.)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명백한 어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법률의 개념이 다양하므로 의문이다. 예컨대 Sax, S. 52 f.; Esser, Vorverständnis, S. 134 f.; Larenz, Methodenlehre, S. 312 f., 343; Zippelius, Methodenlehre, S. 18, 43 f. 등 참조. 숫자나 길이, 무게 등의 표현에서는 그 뜻이 항상 분명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해”되어져야 하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본문 174쪽 이하(주 포함) 참조. 우리가 (“어의”란 말 대신) “문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할 때도 이는 표현된 말과 뜻이 다르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언은 “해석의 대상”이고(Rödig, S. 282),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의”가 해석의 목표이며, “문법”과 “구문”은 해석의 수단인 것이다. “문언”을 말할 때는 항상 “어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132) 크릴레(S. 83)가 “어의”를 탐구하는데 소위 “문법적 해석”(그는 “입법자가 사용한 법률의 개념을 해석”하는 뜻으로 이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체계적 해석과 같은 다른 해석방법이 쓰여진다고 생각한 것처럼, 법률의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해석론이 나름대로 유용하고 종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문법적 해석이란 표현이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이미 관용화되어 있는 마당에서는 이는 (해석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에서) 단어의 뜻과 그 문장의 구조와 관련하여 의미를 탐구하는 그런 유형의 방법론으로 이해된다. “어의”란 대부분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은 이미 언급하였다. 문법적 해석에 관하여서는 이외에도 Bydlinsky, S. 437 ff.; Larenz, Methodenlehre, S. 320 ff. m. w. N.; Röhl, S. 628 ff.; Zippelius, Methdenlehre, S. 43 ff. 참조.

133) G, W, 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Werkausgabe, Bd. VII, hg. v. E. Moldenhauer u. a., 2. Aufl. 1989, § 215.

134) K. Binding, Handbuch des Strafrechts, 1885, S. 463 f. 법적 언어와 일상언어의 차이점에 관하여는, Esser, Vorverständnis, S. 103, 116 f., 135; U. Ladnar/C. v. Plottnitz(Hg.), Fachsprache der Justiz, 1976; R. Wassermann/J. Peterson(Hg.), Recht und Sprache, 1983; J. Eckert/H. Hattenhauer(Hg.), Sprache – Recht – Geschichte, 1991; Larenz, Methodenlehre, S. 320 ff.; U. Neumann, Fachsprache und Umgangssprache, in: G. Grewendorf(Hg.), Rechtskultur als Sprachkultur, 1992, S. 110.

135) R. Müller-Erzbach, Die Relativität der Begriffe und ihre Begrenzung durch den Zweck des Gesetzes, JhJ 61(1913), 343; K. Engisch, Die Relativität der Rechtsbegriffe, in: Dt. Landesrefarate zum 5. Int. Kongreß f. Rechtsvergleichung(1958), S. 59; Esser, Vorverständnis, S. 99 f.; P. K. Ryu/H. Silving, Was bedeutet die sogenannte “Relativität der Rechtsbegriffe”?, ARSP 59(1973), 57 ff., 76 ff.(비판적). 덧붙여 판례와 관련하여서는, BVerfGE 6, 32(37, “합헌적 질서”의 개념에 관하여; 이는 전체적인 합헌적 법질서로서 기본법 제2조 제1항에서 해석되나, 기본법 제9조 제2항에서 헌법의 기본원칙만을 포괄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B. Pieroth/E. Schlink, Grundrechte, 12. Aufl. 1996, Rn. 420, 815).

136) 체계적 해석에 관하여는, Engisch, Einheit, S. 70 f.(보다 고전 문헌과 함께); Fikentscher III, S. 672 ff.; Canaris, Systemdenken, S. 90 ff.; Bydlinski, S. 442 ff.; Larenz, Methodenlehre, S. 324 ff.; Röhl, S. 642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48 ff. m. w. N.; Müller, Methodik, S. 208 ff. 세분화된 여러 문헌을 보게되면, “체계적” 방법론의 두드러진 다양성(법전의 중요성, 법규의 외형적 지위, 법질서의 구성요소의 내적 관계, 규제대상인 사물과 생활관계의 의미, 일반 법원칙의 관철)이 분명해진다.

137) 이에 관하여, Keller, S. 117 ff.; O. A. Germann, Probleme und Methode der Rechtfindung, 2. Aufl. 1967, S. 80 ff.; Fikentscher III, S. 279 f., 676 ff.; Bydlinski, S. 453 ff.; Larenz, Methodenlehre, S. 328 ff., 333 ff. m. w. N.; Röhl, S. 633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19 ff., 46 ff. 연혁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으로는, J. Edelmann, Die Entwichklung der Interessenjurisprudenz, 1967, S. 15 ff. 이하의 서술과 관련하여서는, G. Warda, Dogmatische Grundlagen des richterlichen Ermessens im Strafrecht, 1962, S. 111 ff.

138) 이와 관련하여 우리 헌법의 기본권이 기초하고 있는 이념을 지적할 수도 있다. 당대의 기본권론(기본권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 가치인가?)과 헌법해석의 상관성에 관하여는, E.-W. Böckenförde, Grundrechtstheorie und Grundrechtsinterpretation, NJW 1974, 1529.

139) R. Müller-Erzbach, Die Rechtswissenschaft im Umbau, 1950. 비판적으로는, Keller, S. 128; 그보다는 입법의 정치적, 원리적 사고를 언급하는 것이 우선이다.

140) 예컨대 Müller, Methodik, 특히 S. 204 ff.에서 제안하고 있는, “발생학적” 해석과 본래의 “역사적” 해석과의 구별이 주목할 만하다: 법률규범의 “성립사”와 “자료”에 근거하여 하는 해석이 “발생학적”인 것이고, “당해 조문이 과거에는 어떻게 규율되었는가?”의 해답을 찾기 위한 것으로서 “규범의 변천사”에 근거한 해석이 본래 의미에서 “역사적”인 것이다. 그 외 역사적 해석에 관하여는 예컨대, Bydlinski, S. 449 ff.; Larenz, Methodenlehre, S. 328 ff.; Röhl, S. 632 f.; Zippelius, Methodenlehre, S. 18 ff., 46 f.

141) 이에 관하여는, 대상장물죄의 예와 Keller, S. 136 ff. 참조.

142) Windscheid, § 21.

143) Zweigert, Studium generale 7(1954), S. 385. 나아가 “우열관계” 및 (해석요소를 차이가 없는 전체로 융합시키자는) “방법론의 통합주의” 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이 방법 또는 저 방법을 사용하자는) “방법론의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에 관하여는, Sax, S. 69 ff.; W. Siebert, Die Methode der Gesetzesauslegung, 1958, S. 10 ff. 37 ff.; Esser, Vorverständnis, S. 121 ff.; Kriele, S. 85 ff.; J. Rahlf, Die Rangfolge der klassischen juristischen Interpretationsmittel in der strafrechtswissenschaftlichen Auslegungslehre, in: U. Neumann u. a. (Hg.), Juristische Dogmatik und Wissenschaftstheorie, 1976, S. 14; Gern, VerwArch 1989, 415 m. w. N.; Alexy, Argumentation, S. 303 ff.; Bydlinski, S. 553 ff.; Larenz, Methodenlehre, S. 343 ff. m. w. N.; Schönke/Schröder-Eser, § 1 Rn. 54; Coing, S. 247 ff.; Müller, Rechtslehre, S. 44 ff.; ders., Methodik, S. 38 ff., 247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55 ff. 또한 아래 210쪽 이하 주 47 참조.

144) Savigny, S. 215.

145) Scheuerle, S. 167; 마찬가지로 Sax, S. 56; W. Ecker, Gesetzesauslegung vom Ergebnis herm JZ 1967, 265(271: “가능한 결과와 부차적, 부수적 현상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배운 대로 법률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불가피한 요소이다”); Esser, Vorverständnis, S. 122 f.

146) 이점은 연방헌법재판소가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과 관련하여 아주 정밀하게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이에 관하여는 176쪽 이하 주 50 참조). 대표적으로 BVerfGE 8, 28 참조; 여기서는 “법관은 어의와 의미 상 분명한 법률에 대하여는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에 의하지 아니하고 반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이 선언되어져 있다. 덧붙여 BVerfGE 38, 41(49) 참조: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은 “법률의 문언이 명백한 때에는 금지된다.” 헌법재판소와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에 근거하는 다른 법원이 이러한 또는 다른 기준이 되는 한계를 항상 존중하였는지는 의문이다. R. Zippelius, Verfassungskonforme Auslegung von Gesetzen, in: FS f. das BVerfG, Bd. II (1976), S. 108(116)은, BVerfGE 35, 263(278 f.)에서는 “법관이 규범의 문언을 꼭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 “아무 주저 없이” 선언되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147) 이에 관하여 제시된 크릴레(S. 223)의 명제: “‘가능한 어의’의 한계기준은… 너무 애매하고.. 너무 조작이 수월하여 실무상으로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라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다. 예컨대, “부인”이 남자이고(형법 제218조), “남자”가 부인이란(구 형법 제175조) 것인가?

148) (“해석론”과 해석의 한계로서 “가능한 어의”) 이해를 위하여, Mennicken, S. 14 f.; Ebsen, S. 44 ff.; U. Neumann, Der “möglicher Wortsinn” als Auslegungsgrenze in der Rechtsprechung der Strafsenate des BGH, in; ders. u. a. (Hg.), Juristische Dogmatik und Wissenschaftstheorie, 1976, S. 42(m.w.N.); Larenz, Methodenlehre, S. 322 f., 343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43 f.; Müller, Methodik, S. 183 ff., 257 f. 필립 헥(Gesetzesausleg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14, S. 33)의 “해석명제의 한계는 ‘가능한 문언’이다”라는 유명한 공식은 위에서 언급된 견해를 올바르게 표현할 뿐이고 헥의 본래의 이론과는 모순한다(이에 관하여 209쪽 이하, 239쪽 이하 참조). 또한, 아래 210쪽 이하 주 47, 333쪽 이하 주 47 참조.

149) 이에 관하여는, Keller, S. 134 f., 143 ff.; Germann, S. 104 ff.; Heusinger, S. 94 ff.(판례에 관한 광범위한 주석과 함께); C.-W. Canaris, Die Feststellung von Lücken im Gesetz, 2. Aufl. 1983, S. 189 ff.(주의를 환기하면서); W. Löwer, Cessante ratione legis cessat ipsa lex, 1989. 그 외 아래 395쪽 주 130 참조. 실무에 있어서는 당시 법적 상황을 설명하는 새로운 입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방법론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Tonbandurteil”(BGHZ 17, 266(275 f.) 참조. 이 판결은 “법이 의미를 상실하면…”의 원칙에 입각하여 “법률의 의미와 목적에 따라” “자구상으로 명백한 문언”에 반하여 해석에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 “Fotokopieurteil”(BGHZ 18, 44(49))도 마찬가지. 위 판결에 찬성하는 견해로는, Canaris, Lücken, S. 190 ff. 문언에 반하는 해석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Larenz, Methodenlehre, S. 322 f., 343 ff.(다른 한편 S. 366 f., 397 ff.).

150) 이미 본문 173쪽 이하(주 46 포함)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연방헌법재판소는 매번 –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헌법에 합치하는 해석이란 다의적인 뜻을 가진 문언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헌법과 헌법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Larenz, Methodenlehre, S. 339 f. 참조). 이러한 성격의 해석방법은 아마도 법질서 단일성의 원칙이나 이와 관련 있는 “체계적 해석”의 적용사례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 이는 실정법률이 헌법과 합치하는지 심사하는 문제에 부닥쳐서는 절대적이진 않지만 실무상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느 특정한 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 과정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상의 관점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헌법 합치적해석이 어느 법규범(법률, 법규명령, 조약, 개정불가능한 헌법규범과 충돌하는 새로운 헌법규범)에 관한 것이든 헌법에 의하여 “정당한” 해석의 기준이 제시되는 한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경우 헌법 그 자체도 일정한 해석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Zippelius, in: FS BVerfg(1976), S. 112 참조.
방법론적으로는, 연방헌법재판소가 그 판결에서 보여온 바와 같이 위헌의 소지가 있는 법률을 무효로 선언하지 않거나 이를 제한하기 위하여 헌법합치적 해석을 도입해온 경향으로 인하여 위헌적 법률의 제한 또는 확장해석이나 심지어 흠결보충의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능한 범위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넘어서기도 한다). 찌펠리우스(Zippelius, in: FS BVerfG(1976), S. 122)는 빈민구호법을 민사소송법를 넘어서 형사소송의 소송강제절차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흠결보충(더 이상 헌법합치적 해석이 아니다)으로 보았다. BVerfGE 2, 336(340 f.) 참조. 내 생각으로는 소위 논란이 많은 “Abhörurteil”(BVerfGE 30, 1)은 제한적 해석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사생활의 영역과 관련하여) 기본법 제10조 제2항을 사후에 보충하는 것은 그러한 보충이 “의미구조”, 다시 말해 체계적 해석의 관점에서 보아 기본법의 여러 기본원칙들과 상충하지만 않는다면, 기본법 제79조 제3항(기본법 개정의 불허용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할 것이다(비판적으로는 그 판결의 소수의견 및 P. Häberle, JZ 1971, 145). 이에 반하여 연방헌법재판소 판결(BVerfGE 33, 23)에서는 기본법 제4조로부터 종교상의 이유를 근거로 한 선서거부권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이는 형사소송법 제70조(실정법적 근거조문)를 “헌법합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그러나 위 법률조항이 “다의적 문언”을 내포하고 있는지 논의해보지도 않고 헌법합치적으로 위와 같은 확장해석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또한 BGHSt 19, 325(330) 참조.
헌법합치적 해석에 관한 논저로는, H. Bogs, Die verfassungskonforme Auslegung von Gesetzen, 1966; H. Spanner, Die verfassungskonforme Auslegung in der Rechtsprechung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AöR 91(1966), 503; K. A. Bettermann, Die verfassungskonforme Auslegung, 1986; O. Depenheuer, Der Wortlaut 민 Grenze, 1988; Larenz, Methodenlehre, S. 339 ff.; Ch. Starck, Die Verfassungsauslegung, in: Handbuch des Staat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Bd. VII, hg. v. J. Isensee/P. Kirchhof, 1992, § 164(Rn. 31 f.); Maunz/Zippelius, § 7 I; Zippelius, Gerechtigkeit, S. 425 ff. m. w. N.; Hesse, Rn. 79 ff.; H. Maurer, Allgemeines Verwaltungsrecht, 10. Aufl. 1995, § 8 Rn. 11 f.; Pieroth/Schlink, Rn. 87 ff., 656 f.
헌법합치적 해석의 원리는 또한 두 가지 측면에서 EU법에 적용될 수 있다. 하나는, EU법 안에서 우선법률(예컨대 EU헌법과 같은 법률; 이에 관하여는 Bleckmann, Rn. 243 ff. 참조)과 2차법률(예컨대 규정, 기준, 판결 등) 사이의 관계에서 위 “헌법합치적 해석”의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Bleckmann, Rn. 265, Oppermann, Rn. 585 참조). 다른 하나는, EU조약 제5조에 있는 바와 같이 EU법 우선의 관점에서 자국법을 “EU법에 부합되게” 해석하는 문제이다(Bleckmann, Rn. 381 ff.(390); Zuleg, in: H. v.d. Groeben/J. Thiesing/C.-D. Ehlermann, Kommentar zum EWG-Vertrag, 2. Aufl. 1991, Art. 5 Rn. 7; R. Geiger, Grundgesetz und Völkerrecht, 2. Aufl. 1994, S. 239; H.-G. Suelmann, Die Horizontalwirkung des Art. 3 II GG, 1994, S. 122 ff. m. w. N. 참조).
더욱이 독일법은 “가능한 한” 독일의 국제법적 의무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국제법에 합치하는 해석”에 관하여서는, R. Geiger, S. 190 f.; P. Mankowsky, Preisangaben in ausändischer Währung und deutscher Werbenmarkt, GRUR 1995, 539(548 m. w. N. 참조).

151) 간략하게 이를 설명한다면(상세는 아래 210쪽 이하 참조, 특히 주 47), (과거 통설이있던)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주관주의 해석론(입법자의 의사가 법률로 표현된 한에 있어서는 그 입법자의 진정한 의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법적 해석은 해석의 가능한 범위를 제시할 뿐이고, 기타 다른 해석을 동원하여 입법자의 현실적 의사가 탐구되도록 관련된 해석방법을 활용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필립 헥이 제시한 방법론(오늘날 더 이상은 타당하지 않다; Esser, Vorverständnis, S. 129 f. 참조)은 하나의 분명한 개념을 보여준다. 그 영향을 받아 연방대법원(BGHZ 49, 221(223))은 “입법자의 객관적 의사를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법규의 문언과 그 체계 및 법률 자료와 연역사 등 여러 방법론을 종합, 보충하여 그 해석을 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어느 정도는 – 법적 인식능력이 허용될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 해석방법론의 우열에 관하여 유용하고 신뢰할 만한 이론을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일반보편적으로 타당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고 찾았더라도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할 것이다(Sax, S. 75 f. 및 다음 장 참조). 그렇다고 하여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한다면 법률문제에 대하여 신뢰할 만한 해답은 없게 된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은 법적 문제에 있어 자연법이나 정의, 이성법에 바로 직접 의존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치(정당관, 세계관)상대주의에 노출되어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만을 찾아내어 이를 고수함으로써 판결의 결단주의(Dezisionismus)에 흐를 위험이 있다. 법률이 법원과 행정당국을 기속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법을 창조하는 행위와 같은 그런 방법론은 지양하여야 한다. 물론, 법창조적 방법론에 있어 정의, 합목적성, 법적안정성 등과 같은 관점이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여러 곳에서 소개된 문헌 속에 언급되어 있다. 나름대로 강조하는 바는 다르지만, 내 생각으로는 전통적 방법론의 가치평가와 관련하여 지지하긴 하지만 그다지 옹호하지는 않는 에써나 크릴레의 입장도 나와는 그렇게 대립되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들은 사법의 법률에의 기속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를 위하여서는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138 ff., 147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76 f. 참조.

152) 이에 관하여는, Th. Mayer-Maly, Auslegen und Verstehen, (österr.) Juristische Blätter 1969, 413.

153) G. Simmel, Probleme der Geschichtsphilosophie, 5. Aufl. 1923, S. 37 f,; M.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5. Aufl. 1976, S. 3 f.

154) K. Jaspers, Allgemeine Psychopathologie, 5. Aufl. 1948, S. 253, 256.

155) Rothacker, S. 121 ff., 128; O. F. Bollnow, Die Methode der Geisteswissenschaften, 1950, S. 37 ff.

156) Jaspers, S. 256 f.

157) Bollnow, Methode, S. 37.

158) W. Dilthey, Gesammelte Schriften, Bd. V, 2. Aufl. 1957, S. 319 f.

159) A. Boeckh, Enzyklopädie und Methodologie der philologischen Wissenschaften, 1877, S. 10.

160) Dilthey, Bd. VII, S. 148.

161) G. Radbruch, Rechtsphilosophie, 8. Aufl. 1973, S. 206, 211.

162)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ft, Werkausgabe, Bd. III-IV, hg. v. W. Weischedel, 10. Aufl. 1988, S. 322(A 314). 또한 O. F. Bollnow, Das Verstehen, 1949, S. 7 ff.

163) W. Shakespeare, Der Sturm, übers. u. hg. v. G. Stratmann, 1982, Akt 2, Szene 1, Vers 19 ff.

164) J. W. v. Goethe, Zahme Xenien II, in: ders., Werke, Festausgabe, Bd. 2, hg. v. R. Petsch, 1926, S. 204(Vers 428 f.).

165) A. Gide, Paludes, übers. v. M. Schäfer-Rümelin, 1946, S. 7.

166) T. S. Eliot, Vergil und die christliche Welt, Merkur 8(1945), 617(619). 덧붙여 H. Wagner, Interpretation in Literatur- und Rechtswissenschaft, AcP 165(1965), 520(544 Anm. 75); Radbruch, Rechtsphilosophie, S. 210 Anm. 1. 이런 유형의 다른 표현으로, F. v. Schlegel은 “모든 훌륭한 작품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을 알고 있고, 그것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원하고 있다”(Über Goethes Meister, in: ders., Kritische Schriften, hg. v. W. Rasch, 2. Aufl. 1964, S. 452(466)); 노발리스(Novalis)는 “진정한 독자는 넓은 의미의 작가이다”라고 말했다(Fragmente, hg. v. E. Kamnitzer, 1929, Fragment “Der wahre Leser”, S. 645).

167) Radbruch, Rechtsphilosophie, S. 212.

168) Wortlaut in: Quellen zur neueren Geschichte 27-29, hg. v. Historischen Seminar der Universität Bern, Bern 1959, S. 16. 이에 관하여는 J. Dittrich, Bismarck, Frankreich und die spanische Thronkandidatur der Hohenzollern, 1962, S. 278 ff. 또 다른 역사적 실례로는 루터(Luther)의 종교교리에 관한 의견서(Thesenanschlag)가 이를 제공한다; 위 문서의 “이해”에 관하여는 K.-G. Faber, Theorie der Geschichtswissenschaft, 5. Aufl. 1982, S. 128 ff.

169) “자료”에 대한 법이론가와 법사학자의 입장의 차이에 관하여는, F. Wieacker, Notizen zur rechtshistorischen Hermeneutik, 1963; E. Betti, Die Problematik der Auslegung in der Rechtswissenschaft, in: FS f. K. Engisch(1969), S. 205(207 f., 214 ff.).

170) 이것과 법철학적 근거 및 약간의 제한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28 ff. 한편, 라렌쯔(S. 16)는 사비그니를 주관주의자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인용한 구절은 주관주의적 해석에 가깝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아마도 Kriele(S. 68 ff.)가 사비그니를 다루면서 개별법규를 해석하는 것과 전체로서 법원을 해석하는 것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전자는 주관주의적인 것이다).

171) 비어링의 주관주의의 심리학적 근거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39 ff.

172) E. Beling, Vom Positivismus zum Naturrecht und züruck, in: FS f. Ph. Heck u. a. (1931), S. 1(12).

173) R. Stammler, Lehrbuch der Rechtsphilosophie, 3. Aulf. 1928, § 129.

174) H. Naviasky, Allgemeine Rechtslehre, 2. Aufl. 1948, S. 126 ff. “주관적” 방법론에 관하여는, Keller, S. 88 ff.; Germann, S. 66 ff.(그러나 여기서는 “해석론(Andeutungstehorie)”(본문 173쪽 참조)이란 이름으로 결합된 주관주의 이론, 다시 말해 법률에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어 있는 한 – 궁극적으로 그 자료에서 우러나오는 – 입법자의 의사를 법규로 간주하는 주관주의 이론과, 입법자의 의사를 제쳐두고 그 결과 자료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객관주의 이론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Mennicken, S. 19 ff., 30 ff.; H. Soell, Das Ermessen der Eingriffsverwaltung, 1973, S. 16 ff., 142 ff.; Fikentscher III, S. 662 ff.(특히 665, 667 f.); Larenz, Methodenlehre, S. 28 ff., 316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18 ff., 46 ff. m. w. N.

175) 이에 관하여는, Engisch, Einheit, S. 87 Anm. 1.

176) 개별적으로는, Enneccerus/Nipperdey I 1, § 54 II Anm. 5; Larenz, Methodenlehre, S. 32 ff.(특히 S. 34), 316 ff.; 또한 Fikentscher III, S. 662 ff.(특히 664 f.); Zippelius, Methodenlehre, S. 18 ff., 46 ff. m. w. N. Mennikken, S. 24 ff., 48 ff.에는 객관주의 이론의 상세한 서술과 비판을 담고 있다. 객관주의 방법론의 여러 “유형”과 관련하여, Keller(S. 161 ff.)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는 객관주의자임을 고백하였으나 “법률의 제정 당시 존재하였던 언어관행과 현실” 그리고 “당시 효력 있던 다른 법률”을 명백히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S. 161, 225; “성립당시의 객관적 방법론”). 이 경우 “역사주의”는 언제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에 반하여 Germann(S. 74 ff., 79 ff., 96 ff.)은 법률에 내재하는 의미로서 원칙적으로는 법을 적용할 당시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러한 객관주의 방법론을 지지한다(Keller, S. 162에 따라 “효력당시의 객관적 방법론”; S. 112 Anm. 26 참조). 성립당시의 객관적 방법론과 효력당시의 객관적 방법론을 Mennicken(S. 16 ff.) 또한 날카롭게 구별하고 있는데, 그는 전자를 “객관적, 역사적”이라 하고 후자는 단순히 “객관적”이라 하고 있다.

177) 예컨대, Larenz, Methodenlehre, S. 316 ff., 그렇지만 객관적 측면과 “효력시기”를 강조하고 있다: “법률해석의 목표는 법률의 현재 법적으로 효력 있는 의미, 말하자면 규범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S. 318). 중도적 입장의 대표자로서 라렌쯔는 W. Sauer, J. Binder, G. Husserl을 들고 있다(S. 101 f., 105 f., 115 f.); 견해의 분류에 관하여는 또한 Fikentscher III, S. 662 ff. 참조. 덧붙여 중도적 입장으로는, Legaz y Lacambra, S. 515 ff.; Esser, Vorversändnis, S. 125 ff.; Mennicken도, 주관주의 이론의 배후에 있는 안정성의 이익과 법형성을 요청하여 결국 객관주의 이론의 근거로 작용하는 실질적 정의 사이에 이해관계를 “조정할” 의무가 법관에게 있다고 하여, 마찬가지로 중도적 입장이다(S. 78 ff., 106). 나의 “중도적”이라 할 입장에 관하여는, 210쪽 이하 주 47 참조. Müller, Methodik, S. 254 ff., 281 ff.은 주관주의, 객관주의의 “구분”이 실익이 없다고 보고 있다(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는 부당하다).

178) 여기서 나는 Keller가 “효력 있는 당시”로 표현한(vgl. S. 111 f. Anm. 24), 또 Germann이 기본적으로 받아들인(S. 96 ff.), 또 Mennicken이 객관주의 이론의 정수라고 간주한(S. 26, 53 ff.) 그러한 요소를 고려한다. 이에 따르면, “법발견은 법률이 효력을 발휘하는 당시마다 그 과제를 새롭게 해결해야만 하고, 그것도 특히 효력을 발휘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언어관용례와 현실, 그리고 당시의 효력 있는 기타 법을 고려하여 해결해야만 한다”(Keller, S. 162). 그러나 내가 볼 때, “현실에 가까운” 해석을 지지하는 이러한 객관주의적 방법론은 객관주의 이론에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Zippelius, Methodenlehre, S. 20 f.도 이점을 지지한다.

179) Mezger, ZStW 59(1940), 573.

180) Zippelius, Methodenlehre, S. 21 ff.; vgl. auch Würtenberger, S. 174 ff., 191 ff.

181) Zweigert, Studium generale 7 (1954), 382.

182) Heck, Gesetzesauslegung, S. 67 ff. 덧붙여 Bierling IV, S. 257 ff.; Enneccerus/Nipperdey I 1, § 54 II; 이에 관하여 W. Kallfass, Die Tübinger Schule der Interessenjurisprudenz, 1972, S. 24 ff., 95 ff. 다른 측면에서 비판은 Keller, S. 226 ff. 이러한 논쟁에 관하여 상당히 종합적으로는 Mennicken, S. 19 ff.

183) Radbruch, Rechtsphilosophie, S. 207.

184) 이에 관하여는 W. Haug, Zur verfassungsrechtlichen Bedeutung der objektiven Auslegung von Gesetzen, DÖV 1962, 329(330f.); Wagner, AcP 165(1965), 520.

185) Somló, S. 377 ff. 이하의 서술과 관련하여서는 K. Stern, Interpretation – eine existentielle Aufgabe der Jurisprudenz, NJW 1958, 695(697 f.).

186) 예컨대, 유스티니아누스 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에서 Constitutio Tanta(§ 21)나 1749/51년 Fridericiani의 이에 대한 서설(序說)에 대한 해석금지. 또한 1794년 프로이센 일반란트법의 시행에 관한 §§ 46 f. 참조. 해석에 관한 규정에 관하여는 Sax, S. 73 ff.; Legaz y Lacambra, S. 517 f.; Kriele, S. 61; R. Ogorek, Richterkönig oder Subsumtionsautonomie?, 1986, S. 39 ff.; K. Kroeschell, Deutsche Rechtsgeschichte, Bd. 3, 2. Aufl. 1993, S. 70.

187) “방법론의 논의에 있어 자기모순”에 관하여는 Kriele, S. 35 f.

188) Regelsberger, S. 142 f. 또한 Enneccerus/Nipperdey I 1, § 53 II; Keller, S. 52 ff.

189) 구속력이 있다면, 해석원칙은 법규범의 성질을 취득한 것이다(Esser, Grundsatz, S. 116 ff.). 해석방법론의 위와 같은 “법규범화(Verrechtlichung)”에 반대하는 견해로는 Hruschka, Verstehen, S. 89 ff.

190) 이에 관하여는 P. Bockelmann, Richter und Gesetz, FS f. R. Smend(1952), S. 23; Kriele, S. 60 ff.(입법자의 “법제정의 독점”이 아니라, “법제정의 우선권”; 입법자가 위 우선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법관은 본래의 법창조적 권한이 있다).

191) H. Reichel, Gesetz und Richterspruch, 1915, S. 69 f.(70). 또한 Esser, Grundsatz, S. 116, 176 m.w.N.

192) Schmitt, S. 17 f.; Zippelius, Methodenlehre, S. 20:“사람이 어떤 해석을 할 것인가는 그가 어떤 국가철학을 가지고 있는가에 좌우된다.”

193) E. Forsthoff, Recht und Sprache, 1940, S. 45. 또한 E.-W. Böckenförde, Die Methoden der Verfassungsinterpretation, NJW 1976, 2089(2097); Larenz, Methodenlehre, S. 317 f.; Müller, Methodik, S. 174 f.

194) 이에 관하여 Engisch, Einheit, S. 87 ff., 1933년 이후의 상황과 관련하여. 또한 E. Fraenkel, Die Bedeutung weltanschaulicher Überzeugung in der Gesetzesanwendung, Universität 15(1960), 1203(1205 f.). 1945년 이후의 상황에 관하여는, W. Wengler, Die Nichtanwendung nationalsozialistischen Rechts, JR 1949, 67; Bogs, S. 75 ff.

195) Schmitt, S. 20 f.에서는 입법자의 지시가 계획과 조정의 수단인 경우에는 입법자의 의사가 규준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 또한 Germann, S. 105; Esser, Vorverständnis, S. 82.

196) 예컨대, Hesse, Rn. 56: “헌법의 선재하는 객관적 의사 또는 헌법제정자의 주관적 의사를 파악하는 것을 해석의 ‘목적’으로 바라보는 것은….실제로 선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경우 모든 입법 작용에 있어 효력이 있는 의지적 행위가 과소평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같은 취지 Ebsen, S. 43; Heusinger, S. 96 f. Anm. 69.

197) 계약설에 관하여는 Enneccerus/Nipperdey I 1, § 55; Keller, S. 95; Kelsen, Rechtslehre, S. 7*. 위 이론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서는 대표적으로, A. Wach, Handbuch des deutschen Civilprozeßrecht, Bd. 1, 1885, S. 259 ff.; Bindig, Handbuch, S. 470 ff.; Mennicken, S. 34; Larenz, Methodenlehre, S. 328 f.

198) 이에 관하여는 Enneccerus/Nipperdey I 1, § 55; Keller, S. 109 ff.; K. Roth-Stielow, Das Ärgernis vom “historischen GEsetzgeber” in der Rechtsprechung, NJW 1970, 2057.

199) 내가 180쪽 주 51에서 방법론의 문제, 특히 해석방법론의 상호간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 소견을 밝혀 하나의 논제로서 토론에 붙여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 나는 주관주의 이론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인정한다. 특히 입법자가 확인 가능하도록 분명하게 금지한 것, 명한 것, 허용된 것, 의욕한 것은 규범의 내용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법률에 전혀 (입법자의) 의사가 표현되어 있지 않고 해석에 의하여서도 이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상언어이든 법적 전문용어이든) 언어의 관용적 의미(경우에 따라서는 흠결보충이나 법형성을 통하여 그 의사가 분명해질 수도 있다)와 궁극적으로는 “정의(定義)규정”에 의하여 보다 엄밀히 규정된 “어의”가 한편으로는 “좁은 의미의 해석”에 있어 한계가 된다; 예컨대, “남자”라는 범개념을 “여자”로 해석할 수 없고, “인간”이라는 법개념을 고릴라로 해석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언어의 관용적 의미는 다른 해석방법론(체계적 방법론 등)과 함께 입법자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여기 방법론들 중 어느 것이 우월한지는 과거 모든 연구가 그랬던 것처럼 합의에 의하여 결정될 문제이다. 이 경우 입법의 연혁적 자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긴 하나, (입법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보조수단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2. 입법자의 의사가 우선 명백하지 않다면 (그 “명백한 문언”에 반하지 않는 한) “확장” 또는 “제한” 해석(219쪽 이하 참조)에 의하여 법률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 경우 역사적 방법으로 입법자의 목적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입법자의 의사를 찾는데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확장적 또는 제한적) 해석을 통하여 “여자”를 “남자”, 동물을 인간으로 보기는 어려워도 “원인이다”란 법개념을 상당인과관계의 의미로 제한할 수는 있다(아래 221, 228쪽 참조).
3. 입법자의 의사를 위 1.과 2.에서 언급한 방법으로도 확인할 수 없을 때는 “어의의 가능한 의미”에 모순되지 않는 한 현실에 가장 부합하는 “이성적”, 특히 “객관적, 주관적”(말하자면 오늘날 법적용을 위하여 합목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해석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다. “현재 타당한 객관적” 해석, 특히 목적론적 또는 헌법합치적 해석에 의하여 법률의 문언에 내재하는 이성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입법자의 의사에 모순되지 않는 한 정당한 해석의 결과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이다.
4. 명백히 입법자의 의사에 반하여 법사상을 전개하는 것(위 175쪽 주 49 참조)은 더 이상 해석이 아니고 넓은 의미의 법형성이라 할 것이고, “흠결보충”, “편집상 오류의 정정”, “법률에 반하는 법발견” 등등으로서 특별한 정당성을 요한다.
5. “해석”과 법발견을 위한 위와 같은 다양한 다른 방법론들 사이에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로서 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예컨대, Esser, Vorverständnis, S. 117, 174 ff.; Mennicken, S. 100 f.: Kriele, S. 221 ff.)을 비판할 수는 없다. 의심스러울 때는 이를 대표할 수 있는 한 “해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형법 제223a조 소정 “흉기”의 개념에 있어 그 변화를 고려하여 소금통도 흉기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아래 330쪽 참조). 그러나 어딘가에 한계는 있기 마련인데 이는 방법론의 기본적 상이함과 그 정당성으로부터 귀결되어 존중받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 “법률 없이는 형벌 없다”라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이 타당한 형법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법발견을 위한 다른 방법론들을 가지고) “해석”이란 말로 결코 논의해서는 안 된다.

200) 유감스럽게도 “해석론”이란 표현은 다의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157쪽 이하에서 다루었던 해석방법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목적을 정하는 주관적 또는 객관적 해석방법론으로 사용된다. 생각되어진 것이 무엇인가는 그때그때마다의 관련하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201) 이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333 ff.; 또한 Bydlinski, S. 453 ff. “객관적, 목적론적 해석”이라는 개념 속에 Esser(Vorverständnis, S. 174 ff.)와 Kriele(S. 167 ff.)가 추천하고 있는, “이성적 결과”를 지향하는 방법론을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내 개인적 의견이다; 예컨대, Esser, S. 175는 “법률이해의 기본은 규범목적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는 모든 내용을 ‘분명하게’ 총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02) 역사적 입법자의 의사를 거의 심리적으로 파악하는 수준과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는 수준의 차이는 비어링의 “역사적 관념의 추구”와 헥의 “역사적 이익의 추구” 사이의 대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관하여는 Heck, Gesetzesauslegung, S. 207 f.

203) H. Mayer, Lehrbuch des Strafrechts(AT), 1953, S. 50.

204) G, Dahm, Duetsches Recht, 1944, S. 434. 규범적 행위전형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C. Roxin, Strafrecht, Allgemeiner Teil, Bd. 1, 2. Aufl. 1994, § 6 Rn. 6 ff. 담은 1963년도 제2개정판 48쪽 주 14에서는 요컨대 “전형론에 담겨있는 법개념과 생활실체와의 관계에 관한 논의”, 말하자면 방법론적 기본원칙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dee, S. 275 f. 행위전형의 법발견을 위한 의미 일반에 관하여는 235쪽 주 6 참조.

205) 따라서 주관주의 이론과 객관주의 이론을 올바르게 관련시키려 하는 시도(210쪽 주 47 참조)가 있다.

206) 단지 W. Burckhard, Methode und System des Rechts, 1936, S. 286 ff.; J.-M. Priester, Zum Analogieverbot im Strafrecht, in: H.-J. Koch(Hg.),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analytische Philosophie, 1976, S. 155(158 ff.) 참조.

207) 실제로 이러한 개념구분에 아주 친숙한 사람으로는 Larenz(Methodenlehre, 2. Aufl. 1969, S. 328)가 있는데, 그는 “좁은” 해석이란 표현의 의미를 관념된 핵심에 국한하는 것을 말하고, 반면 “넓은” 해석이란 표현의 의미를 “주변의 범위”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라렌쯔가 “확정적 어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정도의 변수는 존재한다. 제3 개정판(1975) 이후 342쪽(제6 개정판에서는 354쪽)에서 라렌쯔는 본문(222쪽 이하) b)의 유형으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여러 의미 가운데 다른 것과 비교하여 가능한 한 좁은 적용범위를 갖는 그런 의미가 ‘좁은’ 해석으로 불리어야 한다.”

208) 예컨대, Burkhardt, S. 287.

209) 예컨대, Heck, Gesetzesauslegung, S. 195 f., 208 f.; Enneccerus/Nipperdey I 1, § 57 II.

210) 구 형법 제46조 제2호는 형법 제24조로 대체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중지미수로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서는 자의성을 요건으로 한다. 방법론적인 전형을 위하여서는 구 형법 제46조 제2호를 끌어들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211) P. Schneider, In dubio pro liberatate, in: FS f. dt. Juristentag, Bd. II(1960), S. 263. 또한 W. Maihofer, Rechtsstaat und menschiche Würde, 1968, S. 126; W. Knies, Schranken der Kustfreiheit als verfassungsrechtliches Problem, 1972, S. 58 f. Anm. 35(m.w.N.); Müller, Methodik, S. 103 ff., 222 f.

212) R. Frank, Kommentar zum StGB, 18. Aufl. 1931, § 54 IV; H. Henkel, Der Notstand nach gegenwärtigem und künftigem Recht, 1932, S. 131 f.; BGH NJW 1964, 730.

213) Burkhard, S. 287 f.; Nawiasky, S. 135 f. 또한 Schneider, S. 10; OGHSt 1, 271 f.

214)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무엇보다도 Heck, Gesetzesauslegung, S. 138 ff. 이외 “해석론(Andeutungstheorie)”과 해석의 한계로서 “가능한 어의”에 관하여는 본문 위 173쪽 이하와 주 48, 210쪽 이하 주 47 참조.

215) A. Wach, S. 276.

216) 이곳과 제7장에서 핵심이 되고 있는 “법관법”이란 개념은, 법관(이론가 또는 실무가)이 여기서 설명하는 조건 하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법의 내용적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 다시 말해 입법자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인 곳까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사용된다. 반면, 법관법이 삼권분립의 국가질서에 적당히 편입되어, 일종의 법원인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이점은 이미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벌써 사비그니는 법학의 의미를 국민정신 속에 뿌리내린 법의 구현으로 강조하였다. 19세기 후반 O. 뷜로우(Gesetz und Richteramt, 1885)는 법관법이 입법자의 법과 동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법률과 법관의 직무가 국민에게 그의 법을 제공한다”, S. 48). “법관왕국”을 환영하는 자유법학파 또한 법관법을 법원의 한 종류로 간주하고, 심지어 라이히 재판소를 그들이 복종할 곳으로 받아들인다(이에 관하여는 E. Fuchs, Was will die Freirechtsschule?, 1929, S. 18 ff.). 최근 10년 동안에는 법률가법과 특히 법관법이 법원으로서의 위엄을 요구할 수 있다는 사고가 점차 증대하여왔다.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Esser, Vorverständnis, S. 184 ff., 189 ff.; Fiketscher III, S. 701 ff.; J. Ipsen, Richterrecht und Verfassung, 1975; F. Müller, “Richterrecht”, 1986; ders., Methodik, S. 89 ff.; Bydlinski, S. 501 ff.; Larenz, Methodenlehre, S. 366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72 ff. m.w.N.; Maurer § 4 Rn. 29 m.w.N. 또한 아래 426쪽 주 26 참조.

217) 이에 관하여는 기본적으로 Kelsen, Rechtslehre, S. 346 ff.; Engisch, Wahrheit, 특히 17쪽 이하; Hassemer, S. 127 ff.; Rödig, S. 151 ff.

218) Bockelmann, in: FS Smend(1952), S. 26.

219) Bockelmann, in: FS Smend(1952), S. 27; 또한 Engisch, Idee, S. 180 f.; Scheuerle, AcP 167(1967), 307에서는 “인과적 포섭”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위 202쪽과 주 34 참조.

220) 이에 관하여는 Bockelmann, in: FS Smend(1952), S. 28 ff.; O. Bachof, Grundgesetz und Richtermacht, 1959, S. 25 ff.; Hanack, S. 55 ff.

221) 최근 주목을 받고 등장한 “유형개념”(Typenbegriffe)은 다음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법적 개념들과 함께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위 개념은 법외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Engisch, Idee, Kap. VIII 참조). 법과 관련하여서는 유형이 신조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왔다: G. Radbruch, Klassen- und Ordnungsbegriffe im Rechtsdenken, Int. ZS f. Theorie des Rechts 12(1938), 46; H. J. Wplff, Typen im Recht und in der Rechtswissenschaft, Studium generale 5(1952), 195. “Typus und Recht”와 관련된 다른 문헌들로서는, 예컨대 Hassemer; Strache; R. Zippelius, Die Verwendung von Typen in Normen und Prognosen, in: FS f. K. Engisch (1969), S. 224; ders., Gerechtigkeit, S. 411 ff.; D. Leenen, Typus und Rechtsfindung, 1971; L. Kuhlen, Die Denkform des Typus und die juristische Methodenlehre, in: H.-J. Koch(Hg.),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analytishe Philosophie, 1976, S. 53; Kaufmann, Analogie; Bydlinski, S. 543 ff. m. w. N.; Larenz, Methodenlehre, S. 216 ff., 226 f., 461 ff. m. w. N.; Pawlowski, Rn. 146 ff.
다의적 의미를 지닌 유형(Typus)이란 개념에 독창적인 상세한 방법론적 설명을 부가한다는 것은 이 책의 입문서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이다. 유형을 법이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유형은 목적론적 법적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형론적 고찰방법”이란 제목을 가지고 시도된 많은 논의들이 또한 목적론적 법적용의 한계 안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Leenen, S. 190 ff.). 유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개념의 적용을 제한하는 것은 제한적 해석과 비슷한 것이고, 유형론적으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법개념의 적용을 확장하는 것은 유추와 비슷한 것이다(Leenen, S. 110, 162 ff., 172 ff.). 특히 유형론적 법적용에 있어서도 이익법학에서와 같이 고유한 “유형적인” 이익사정과 이익충돌에 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Leenen, S. 157 ff. zum Verkauf eines neuen Pkw unter Inzahlungsnahme eines Altwagens, der sich später 민 minderwertig herausgestellt; Larenz, Methodenlehre, S. 218 ff. zum “Typus” des “Tierhalters”). 따라서 유형적 법적 사고의 실효성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고, 다만 그의 다의성과 전통적 법적 방법론과의 조화가능성만이 강조될 수 있을 뿐이다.
본문의 다음부터 다루게 법적 개념들과 관련하여 본다면, 법적 유형개념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이들 개념과 병존할 수 있으나 많은 나름의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유형개념은 “불확정한” 개념(그 한계의 불명확성과 관련하여) 또는 “규범적” 개념의 하위개념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결사(Gesellschaft)” 또는 “재범의 위험성 있는 상습범”과 같은 유형에 있어서는 그 적용범위의 한계에 불명확성이 있다. 또 “bonus pater familias(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나 “평균적 상인”과 같은 유형에 있어서는 “규범적” 평가가 작용하는데,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일반조항”적 성격도 지닌다. “거래관행”과 같은 유형적 개념에서는 “객관적 가치평가”(278쪽 이하 참조)로서 구속력 있는 규범과 유형과의 관계를 내보이기도 한다(Larenz, Methodenlehre, S. 464). 따라서 이하 다루어질 개념들에 관하여 논의된 것들은 유형개념과도 관련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유형개념이 논리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22) 불확정 개념에 관하여는 Maurer, § 7 Rn. 26 ff.(광범위한 참고문헌의 지시, Rn. 64 f.). 형법 제1조의 명확성의 원칙에 관하여는 Schönke/Schröder-Eser, § 1 Rn. 17 ff. m. w. N.

223) 법개념의 “불확실성”은 개념의 어휘가 다의적이란 데 근거한다. 예컨대, “물건”은 (소유권, 절도, 횡령, 재물손괴의 객체로서) “실체적” 대상, 다시 말해 처분(“물건을 위한 거래”)의 대상일 수도 있고, (착오의 취소에서는) “행위의 객체”일 수도 있다(Larenz, Methodenlehre, S. 321). 이러한 다의성에 있어 흔히 체계 해석은 문제된 사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명백하게 해준다. 헥이 “개념의 주변”으로 생각한, 개념의 불명확한 경계에 근거하는 “불확실성”이 실무상으로는 보다 중요하다(본문 239쪽 주 9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수의 개념과 같이 명확한 개념조차도, 요컨대 어떤 “판단의 여지”가 고려되는 시험성적에 있어서는 불확정한 개념이 될 수가 있다(“noch eins”, eine “glatte Zwei”, eine “Vier an der oberen Grenze”).

224) 예컨대, Heck, Gesetzesauslegung, S. 173; ders., Begriffsbild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32, S. 52, 60. 지펠리우스(Methodenlehre, S. 43)는 “개념의 주변” 대신에 “의미의 여백”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H.-J. 코흐(Der unbestimmte Rechtsbegriffe im Verwaltungsrecht, in: ders.(Hg.),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analytische Philosophie, 1976, S. 186 ff.(203 ff.) 역시 헥의 비유를 반대하고, “불확실한” 또는 “모호한” 개념으로 관념된 것을 엄밀하게 범위를 정함으로써 이를 대체하고 있다.

225)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K. Engisch, Die normativen Tatbestandelemente im Strafrecht, in: FS f. E. Mezger(1954), S. 127(m.w.N.); M. Herberger, Die deskriptiven und normativen Tatbestandsmerkmale im Strafrecht, in: H.-J. Koch(Hg.),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analytische Philosophie, 1976, S. 124; Jescheck/Wiegend, S. 269 f. m.w.N.; 비판적으로는, Lampe, S. 25 ff.

226) Vgl. R. Carnap, Der logische Aufbau der Welt, 1928, S. 239 f.; Engisch, Studien, S. 41 f.

227) E. Wolf, Der Sachbegriff im Strafrecht, in: FS f. des Rechtsgericht, Bd. 5(1929), S. 44(56). 또한 Heller, S. 93; Esser, Vorverständnis, S. 54, 59.

228) 예컨대, H. Henkel, Recht und Individualität, 1958, S. 27 unten.

229) “평가(Wertung)”란 개념 자체가 다의적이라고 라렌쯔(Methodenlehre, 1. Aufl. 1960, S. 124 f.)는 강조한다. 행위로서의 평가는 평가행위가 지향하는 “가치(Wert)” 자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개념을 분명하게 한다면, “평가”란 개념은 평가의 행위와 내용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 “-ung”이 들어가는 다른 말(Emfindung, Wahrnehmung, Erfahrung)과 마찬가지로 – 이러한 전체 중에 두 측면으로서 행위와 내용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와 여기 뒤에도 “평가”란 단어를 바로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이념적” 형상물로서 “가치”(예컨대, 가치로서의 정의)는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개념인바, 여기서는 이를 자세히 다룰 수 없다(법철학적 문헌 중에 R. Zippelius, Wertungsprobleme im System der Grundrechte, 1962, Kap. 2; A. Podlech, Wertungen und Werte im Recht, AöR 95(1970), 185; Henkel, Rechtsphilosophie, S. 321 ff. m. w. N.; Coing, S. 112 ff.; Arthur Kaufmann, Problemgeschichte der Rechtsphilosophie, in: ders./W. Hassemer(Hg.), Einfü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und Rechtstheorie der Gegenwart, 6. Aufl. 1994, S. 30(109 ff.) 참조). “가치”라는 개념의 사용은 예컨대, 아래 422쪽 이하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여기서는 가치평가의 범위 안에서 사용된 개념들의 의미로서 단순하면서도, 모든 가치론보다 우선하는 의미로 이해하여도 괜찮다. 이 개념 자체는 –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 잠재적인 (가치)판단의 술어로서 이해된다.

230) 행정재량에 관하여는, Wolff/Bachof/Stober, § 31 Rn. 31 ff.; Maurer, § 7 Rn. 7 ff.(참고문헌은 Rn. 64 f.); F. O. Kopp, Kommentar zum Verwaltungsverfahrensgesetz, 6. Aufl. 1996, § 40(m.w.N.). 민사법관의 재량에 관하여는, D. Behrens, Die Nachprüfbarkeit zivilrichterlicher Ermessensentscheidung, 1979; A. Baumbach/W. Lauterbach/J. Albers/P. Hartmann, Kommentar Zur Zivilprozeßordnung, 54. Aufl. 1996, Ein. III Rn. 31 ff., 각 주도 함께. (매우 논의가 분분한) 형사법관의 재량에 관하여는, K. Engisch, Karl Peters und der Ermessensbegriff, in: FS f. K. Peters(1974), S. 15(고전 문헌에 관한 주석도 함께); R. Maurach/K. H. Gössel/H. Zipf, Strafrecht, Allgemeiner Teil, Bd. 2, 7. Aufl. 1989, § 63 Rn. 187 ff. m. w. N.; Jescheck/Weigend, S. 871 f.(부정적이다).
“재량(Ermessem)”의 요점은 행정청이 여러 행위 가운데 선택권을 갖는다는 것이다(Maurer, § 7 Rn. 24). 구체적으로 재량은 “할 수 있다는 조항(Kannvorschriften)” 또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라든가 “재량이 있다”라는 보다 명시적인 규정에 의하여 주어진다. 때로는 규정의 전체적인 관계로부터 재량이 성립되기도 한다(Wolff/Bachof/Stober, § 31 Rn. 36(예와 함께); Maurer, § 7 Rn. 9; Kopp, § 40 Rn. 12 ff. 참조). 약한 정도이긴 하나 그래도 부분적으로 재량을 인정하는 “하여야 한다는 조항(Sollvorschriften)”의 의미에 관하여는 Wolff/Bachof/Stober, § 31 Rn. 34; Kopp, § 40 Rn. 17 f.; 이와 반대로는, Baumbach, Einl. III Rn. 32; 다른 견해로는, Warda, S. 99 f.

231) 우리의 고찰을 위하여서는 그다지 의미가 없으므로 “입법적 재량” 및 “입법자의 형성의 자유”(이에 관하여는, K. Stern, Ermessen und unzulässige Ermessensausübung, 1964, S. 11; Maunz/Zippelius, § 25 II 1, § 37 IV, § 41 I 2 참조), 또한 예컨대, 민법 제315조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당사자의 재량(Parteiermessen)”(이에 관하여는, Larenz, BGB AT, S. 82 ff. 참조) 등은 제외한다.

232) 이전 판에서 엥기쉬는 “자유재량”을 “법관 또는 행정공무원의 주관적 판단”과 동일시하여 이에 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개념정의와 설명들은 오늘날의 재량이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Maurer, § 7 Rn. 17 참조). 본문의 내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함에 있어 최근의 이론을 고려하되, 엥기쉬가 생각한 개념들 중 – 양형의 경우를 제외하고 – 재량판단과 거기서의 법의 구속에 있어 의지적, 주관적 요소에 관하여는 이를 그냥 두기로 한다.
나아가 엥기쉬는 재량위임을 설명하면서 불확정한 법개념을 재량이론에 포함시키는 행위(오늘날에도 유력한 소수설로 남아있다; 이에 관하여는, Maurer, § 7 Rn. 34 참조)와 재량을 불확정한 법개념과 구분시키는 행위에 관하여 태도가 분명치 않았다(Engisch, Einführung, S. 266 Anm. 126 a 참조). 본문의 내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함에 있어 재량과 불확정한 개념의 엄밀한 구별에 중점을 두기로 한다.

233) 이에 관하여는 비판적으로, H. H. Rupp, Ermessensspielraum und Rechtsstaatlichkeit, NJW 1969, 1273; Soell, S. 97 ff.

234) 예컨대, H. Mannheim, Beiträge zur Lehre von der Revision wegen rechtlicher Verstöße im Strafverfahren, 1925, S. 148: 그는 “자유재량의 선험적 개념을 구성하여 이로부터 자유재량의 사후심사성에 관한 결론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후심사의 한계는 어디에 있고 이러한 한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자유재량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에 관하여 비판적으로는, Engisch, in: FS Peters(1974), S. 25 f.

235)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Behrens, S. 43 ff., 63 ff., 106 f.

236) 재량권의 불행사(행정기관이 법에 기속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재량에 따라 행동하였어야 할 경우), 재량권의 유월(행정기관이 재량의 위임에 의하여 주어지지 않은 법적 결과를 야기한 경우) 및 재량권의 남용(재량권을 행사함에 있어 법률적 재량준칙과 평등원칙(기본법 제3조 제1항) 등을 준수하지 않은 경우) 등이 구체적으로 재량행위의 흠에 속한다. 이에 관하여는 Wolff/Bachof/Stober, § 31 Rn. 46 ff.; Maurer, § 7 Rn. 19 ff.
행정공무원의 재량판단, 특히 목표설정의 잘못과 권한유월의 경우 사법적 심사에 관하여는 행정절차법(VwGO) § 114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행정기관이 재량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경우에도 법원은 재량의 법률적 한계를 넘어섰다거나 재량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량권을 행사한 경우에는 행정행위 또는 행정행위의 거부나 부작위의 위법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K. Redecker/H.-J. v. Oertzen, Kommentar zur Verwaltungsgerichtsordnung, 11. Aufl. 1994, § 114 Rn. 7 ff.
법관의 재량권의 행사와 상급법원에 의한 그의 통제에 관하여서도 – 기본적으로는 소송절차에 있어 – 동일한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민사에 있어 법관의 재량에 관하여서는 행정절차법 § 114가 (민사에 있어 법관의 재량에 관한 사후심사를 위하여) 유추 적용될 수 있다: Behrens, S. 31 ff., 55 ff., 93 ff.. 또한 H. Thomas/H. Putzo, Kommentar zur Zivilprozeßordnung, 19 Aufl. 1995, § 550 Rn. 12; Baumbach, Einl. III Rn. 33 (m. w. N.) zur Überprüfbarkeit der Ausübung pflichtgemäßen Ermessens 참조. 그러나 행정행위의 재량과는 달리 여기서는 – 의무합치적으로 행사된 – 재량행위는 대부분의 경우 사후심사의 대상이 될 수는 없고 하나의 종국적 판단이 된다 할 것이다. 예컨대, 구두변론을 위하여 조기에 최초변론기일을 지정할 것인지 아니면 “서면에 의한 선행절차”(민사소송법 제272조 제2항)를 진행할 것인지의 선택은 사후심사가 불가능한 법관의 판단에 속한다 할 것이다(Baumbach, § 272 Rn. 5). 마찬가지로 형사소송절차에 있어서도 다수의 가능조항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법률에 기속된 재량권한이 주어지고 완전히 사후심사의 대상이 된다(이에 관하여는, Karlsruher Kommentar zur Strafprozeßordnung , hg. v. G. Pfeiffer, 3. Aufl. 1993 § 34 Rn. 10, 16).
이에 반하여 형을 정하는 양형과 같은 특정한 영역에 있어서는 논란이 많다. 전통 문헌에서는 “자유”재량의 의미로서 법관 개개인의 판단이 지지되고 있지만(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Peters(1974), S. 20 ff. m. w. N.), – 무엇보다도 피고인의 보호를 위한 차원에서 상소 허용의 확대와 함께 – 예외를 두지 않고 “법률에 기속하는” 재량(그렇더라도 재량행위임에는 변함이 없다)으로 보려는 견해도 증가하고 있다(예컨대, Schönke/Schröder-Stree, § 46 Rn. 7; Lackner, § 46 Rn. 6; 상세한 주석과 함께 Maurach/Gossel/Zipf, § 63 Rn. 189). 물론 형의 양정을 재량행위로 보지 않고 “순수한 법적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포섭에 의하여 “올바른 형”을 정하여야 한다(H.-J. Bruns, Zum Revisionsgrund der – ohne sonstige Rechtsfehler – “ungerecht” bemessenen Strafe, in: FS f. K. Engisch (1969), S. 708(715 ff.); H. Zipf, Die Strafmaßrevision, 1969, S. 165 ff.(형의 향정은 “재량판단이 아니고, 순수한 법적용이다.” S. 166); W. Frisch, Revisionsrechtliche Probleme der Strafzumessung, 1971, S. 146, 227 f.; ders., Gegenwartiger Stand und Zukunftsperspektiven der Strafzumessungsdogmatik, ZStW 99 (1987), 751(802 f.); Jescheck-Weigend, S. 871 ff. m. w. N.). “재량”의 본질을 여러 “동등한” 대안들 가운데 선택할 가능성 또는 선택할 자유로 이해한다면(위 245쪽 주 15와 아래 253쪽 주 24와 함께 참조)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형을 정하는 양형과 같은 특정한 영역에 있어서는 여러 “동등한” 형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법관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비록 경험적 현실에 있어 평가의 어려움과 불확실함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유일하게 타당한” 형을 단계적으로 찾아나가는 작업과 같은 것이다(더욱 자세한 것은 Zipf, S. 164 ff.; Frisch, S. 175 ff.; ders., Ermessen unbestimmter Rechtsbegriff und “Beurteilungsspielraum” im Strafrecht, NJW 1973. 1345(1346 ff.),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기본법 제20조 제3항의 법치국가원리와 기본법 제3조 제1항의 지적과 관련하여). 전체적으로는 Maurach/Gossel/Zipf, § 63 Rn. 187 ff.; Lackner, § 46 Rn. 50; Jescheck-Weigend, S. 871 f.(그때그때마다의 주석도 함께) 참조.

237) R. Laun, Des freie Ermessen und seine Grenzen, 1910, S. 62.

238) W. Jellinek, Verwaltungsrecht, 3. Aufl. 1931, S. 30. 이에 관하여는 Soell, S. 76 ff.

239) E. Forsthoff, Lehrbuch des Verwaltungsrechts I, 10. Aufl. 1973, S. 84. “선택의 자유”로서 재량 개념의 정의는 F. Tezner(Das freie Ermessen der Verwaltungsbehörden, 1924, S. 69 ff.)에 소급되고, 예컨대 Warda, S. 14(“법관이 여러 행위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범위로서 판단의 여지를 준 것”) 또는 Maurer, § 7 Rn. 7(“행정청이 여러 행위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면 재량이 존재하는 것이다”)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반대하는 견해로는, Soell, S. 116 ff. m.w.N. 물론 본문에서도 밝히겠지만, “선택의 자유”란 것이 주관적인 임의나 “자의”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항상 “실체적” 관점에 의하여 (이들이 비록 개인적 확신에 따라 도입되긴 하였어도) 확인되어야 한다. 재량이론 속의 방법론적 설명으로서 “선택의 자유”란 개념을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

240) H.-J. Bruns, Strafzumessunsrecht, 1. Aufl. 1967, S. 68(1974년 2판, 92쪽에서 브룬스는 그의 개념론이 “오해되고” 있다고 교정하고 있다; 양형에 있어 “선택가능성”이란 개념의 사용에 관하여는, 또한 Frisch, S. 187 ff.).

241) 드물지 않게 사용되고 있는 이와 같은 단어와 함께 C. H. Ule(Verwaltungsprozeßrecht, 9. Aufl. 1987, § 2 I 3)는 그의 “대표성 이론”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바, 이에 의하면 “한계 사안”에서는 여러 “대표할만한” 견해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문제가 의문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분명한 해답이 불가능한 – 상대적으로 보아 드물기는 한 – 그런 사안, 즉 한계 사안에서만 법원은 행정청이 처분한 판단을 법적으로 대표할만한 것으로 존중할 수 있다.”(ders., Unbestimmte Begriffe und Ermessen im Umweltschutzrecht, DVBl. 1973, 756(758)). “대표성”에 관하여는 또한, Engisch, in: FS Peters (1974), S. 31 ff. m.w.N.; Larenz, Methodenlehre, S. 294, 353.

242) 행정조직법(VwVfG) 제40조는 “재량의 권한이 있는 행정관청은 그 권한의 목적에 부합되게 재량권을 행사하여야 하고 재량의 법률적 한계를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Kopp, § 40 Rn. 27ff.

243) Soell, u. a. S. 141 ff., 200 ff., 370 ff.(S. 180 ff., S. 372 mit der Wendung: “Restraum subjektiven Fürrichtighaltens”).

244) 다소 의미가 불분명한 판단여지의 개념을 위하여서는 O. Bachof(Beurteilungsspielraum, Ermessen und unbestimmter Rechtsbegriff im Verwaltungsrecht, JZ 1955, 97; ders., Neue Tendenzen in der Rechtsprechung zum Ermessen und zum Beurteilungsspielraum, JZ 1972, 641 u. a.)가 생각하고 시종일관 발전시켜온, 어느 정도는 확정적인 정의에 우선 의존할 필요가 있다. 바호프는 불확정한 개념에서 출발하여, 완전히 사후심사가 가능한 본래의 법개념과 사후 심사가 전혀 불가능하거나 정형화된 재량의 흠일 때에만 사후심사가 가능한 재량위임, 다시 말해 행정청이 자기의 고유한 관념과 단순히 합목적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행동할 결정의 자유가 주어진 그러한 재량위임의 전통적 구별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제3의 개념으로서 – 바로 “판단여지”의 개념으로서 – 그 적용을 위하여서는 가치평가를 필요로 하는 그런 불확정 개념이 있는데, 여기서는 가치평가가 법률에 정하여진 여백의 한계에서 이루어진 한 사법적으로 사후심사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여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법률에 근거가 있는 한, 다시 말해 사안이 법률규범의 구성요건의 측면에 해당하는 한(“도덕적으로 청소년에 유해한 환경”, “불평등한”, “매우 잘 어울리는”, 급부의 평가에 있어 “최상품의 급부”) (불확정한) 법개념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다른 모든 법개념과 마찬가지로 우선은 법률의 문언을 해석하여 그 내용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별 사례를 위와 같이 내용을 보충하여야 할 개념에 포섭시키기 위하여서는 언제나 가치평가가 수반되고, 이러한 가치평가는 주관적인 것이고 대체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유일무이하게 정당한 것”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있는 가치평가는 해석에 의하여 밝혀지는 여백의 한계만 지킨다면, 사법적으로 사후심사가 면제된다. “대표될 수 없는”, 말하자면 판단여지의 한계를 벗어나는 판단의 경우에만 사법적 통제를 받는다.
판단여지를 (협의의 의미에 있어) 불확정 개념과 구별한다면, 판단여지에서는 개별 사안에서의 여러 다양한 판단들이 동일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의미에 반하는 것은 (상급심이나 상급관청의) 다른 판단. 즉 일응 보아서는 “보다 나은” 듯하나 사실은 이들과 동등하게 논의될 수 있는 다른 판단에 의하여 대체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협의의 의미에 있어 불확정 개념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와 적용이 해석의 목표이므로 당연히 사후심사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아가 판단여지를 재량과 구별한다면, 관계되는 (비록 적용가능성의 폭이 넓긴 하나) 특정 법개념(“환경”, “형평”, “복무상 필요”)으로부터 생기는 한계를 보다 엄격히(최소한 보다 분명히) 준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하여 재량위임은 할 수 있다는 조항 또는 “재량에 따라 판단한다”는 조문에 의하여 주어지고, 모든 재량권을 행사함에 있어 지켜야 할 법치국가적 한계(자의금지, 과잉금지, 평등원칙, 정당한 이익형량)의 구속을 받을 뿐이다.
바호프가 불확정한 법개념, 판단여지와 자유재량을 구별한 것은 본질적으로 엥기쉬의 기준에 의하여 재량판단의 주관성과 일치한다(위 247쪽 주 17 참조). 오늘날 아주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통설은 법률적 구성요건(불확정한 법개념과 판단여지)과 법률효과의 측면(여기서는 단지 재량의 위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별에 관한 오늘날의 현황에 관하여는, Wolff/Bachof/Stober, § 31 Rn. 31; Maurer, § 7 Rn. 26(§ 7 RN. 47 ff. zu Problemen der Abgrenzung). 법적 보호의 관점에서 오늘날 통설에 따르면 통제의 층은 바호프(엥기쉬 또한)가 대변한 것보다도 본질적으로 넓다. 그래서 불확정 개념의 해석은 사법적으로 완전한 사후심사의 대상이 된다. 판단여지는 약간의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되는데, 이 경우 특별한 판단사정이 있다거나 사안의 특성상 사법적 심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아래 265쪽 주 36 참조). 재량판단의 경우는 제한적으로만, 요컨대 재량의 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만이 사후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위 249쪽 이하 주 21 참조).

245) 이러한 개념에 관하여 비판적으로는, Soell, S. 202 f. Anm. 19.

246) Th. Litt, Kant und Herder als Deuter der geistigen Welt, 2. Aufl. 1949, S. 158, 229. E또한 O. F. Bollnow, Die Objektivität der Geisteswissenschaften und die Frage nach dem Wesen der Wahrheit, ZphF 16(1962), 3; Engisch, Wahrheit, S. 18 ff.; Hassemer, S. 138 ff.

247) Soell(S. 200 f.)은 이를 “기속적” 재량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그 기능은 개별 사안에 적응시키는 의미에서 개별화인 것이다. 또한 M. Bullinger, Ermessen und Beurteilungsspielraum – Versuche einer Therapie, NJW 1974, 769(770): “재량의 여지와 판단여지는 부분적으로는 행정청에 개별 사안을 그 특성에 따라 다룰 가능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Bullinger는 여기에 덧붙여, 재량은 “적극적 행정청”에 판단의 계획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이 책의 견해와 일치하는 면이 있다.

248) Laun, S. 62.

249) 이 점에서 E. R. Huber, Wirtschaftsverwaltungsrecht, Bd. II, 2. Aufl. 1945, S. 654는 정확하다: “언제 자유가, 언제 구속이 요구되고, 언제 행정청의 주관적 견해가, 언제 객관적 규준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여러 목적과 이해를 비교형량하여서만 확인될 수 있고, 이와 같은 형량을 함에 있어 법률적 규범이 이용된다.” 또한 G. Schmidt-Eichstaedt, Ermessen, Beurteilungsspielraum und eigenverantwortliches Handeln der Verwaltung, AöR 98(1973), 173(186 ff.).

250) 소위 “결합조항(Koppelungsvorschriften)”의 경우(이에 관하여는 der Gemeinsame Senat der obersten Gerichtshöfe des Bundes, JZ 1972, 65f5)에는 약간의 혼합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 규범의 구성요건의 측면은 불확정한 법개념이 포함되고, 법률효과의 측면은 재량조항이 포함된다. 두 개의 개념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불확정한 법개념이 재량의 소멸로 나타난다거나(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부터 기본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나온다) 재량조항이 불확정한 법개념을 삼켜버리는(사실상으로는 재량에 포함되는) 결과에로 이르게 된다; 자세한 것은, Wolff/Bachof/Stober, § 31 Rn. 38; Maurer, § 7 RN. 48 ff. 불확정개념과 재량조항의 개념은 결합조항과 같은 한계사안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또한 Kopp, § 40 Rn. 71).

251) 광범위한 기본권보장(기본법 제19조 제4항)을 보호하기 위하여 판례는 불확정한 개념은 완전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이에 관하여는 Maurer, § 7 Rn. 35 f. m.w.N.). 행정의 판단여지(이에 관하여는 위 257쪽 이하와 함께 주 29 참조)는 “시험의 결정”(BVerfGE 84, 34 und 39), “공무원법에 있어 판단”(BVerwGE 61, 176(185 f.); BVerfG DVBl. 1981, 1053), “가치무차별적인 전문가 위원회에 의한 가치관련적 판단”(BVerwGE 77, 75: 청소년 유해 서적에 관한 연방심사위원회), “예방의 결정과 위험의 평가”(BVerwGE 79, 208(213 ff.)) 및 행정정책적 제한과 함께하는 판단(BVerwGE 39, 291(299)의 경우에 인정된다(Maurer, § 7 Rn. 37 ff.에 근거하여 종합).

252) 사법적 재량에 관한 더 많은 예와 함께 이에 관하여는, 위 249쪽 이하 주 21 참조. 할 수 있다는 조항과 하여야 한다는 조항에 관하여는, 위 245쪽 주 15 참조.

253) 재량조항과 결의론에 관하여는, 단지 J. W. Hedemann, Die Flucht in die Generalklauseln, 1933; Engisch, Idee, S. 79 f., 154 f. m.w.N.; G. Teubner, Standards und Direktiven in Generalklauseln, 1971; W. Naucke, Über Geberalklauseln und Rechtsanwendyng im Strafrecht, 1973; H. Garstka, Generalklauseln, in: H.-J. Koch(Hg.), Juristische Methodenlehre und analytische Philosophie, 1976, S. 96(123 m.w.N.); Bydlinski, S. 582 ff., 627; Larenz, Methodenlehre, S. 288 ff.; Pawlowski, Rn. 186 ff., 197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44.

254) 여기서 나는 이 구법안을 나중에 형법의 개정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용한다. 1962년 형법안 제147조에 관하여는, Alternativ-Entwurf, StGB BT(vorgelegt v. J. Baumann u. a.), 1970, § 110 및 아래 272쪽 주 44 참조.

255) H. G. Nipperdey, Die Generalklausel im künftigen Recht der unerlaubten Handlungen, in: ders.(Hg.), Grundfragen der Reform des Schadensersatzrechts, 1940, S. 36.

256) Bayerische Sondergesetzgebung, ZStW 40(1919), 511.

257) 그밖에 일반조항의 여러 유형과 종류에 관하여는, F. Werner, Zum Verhältnis von gesetzlichen Generalklauseln und Richterrecht, 1966, S. 7 ff. “수인가능성 조항(Zumutbatkeitklausel)”은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이에 관하여는 Henkel, Recht, S. 33 ff.

258) 이에 관하여는 A. Wach, Legislative Technik, in: K. v. Birkmeyer u. a.(Hg.), Vergleichende Darstellung des deutschen und ausländischen Strafrechts, AT VI, 1908, S. 1(41 ff.).

259) 이에 반하여 1962년 형법안 제147조(그중 현행 형법 제224조와 비슷하다)는 중상해죄가 언제 인정되는지를 다시 하나하나 규정하고 있는데, 물론 결의론적인 방법론 자체로서도 이는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평판을 얻었을 뿐이다. 또한 1962년도 법안이유서, 283쪽 참조. 대체법안(BT. 1970)도 이와 비슷한 방식을 따랐으나 보다 엄밀하게 하려고 하였다. “유형화하는 방법론”의 가장 실제적 예는 1974. 3. 2. 형법 제243조의 개정조항이 제시하고 있다: 절도가 “특히 중한 경우에는”(일반조항) (10년까지) 형을 가중하여 처벌한다. “중한 경우”란 일반적으로 주거침입, 차량침입, 복제열쇠의 사용, 영리의 추구 등(결의론적 방법)의 경우 존재한다.

260) 프랑스 민법전 제1382조의 전반부는 어느 정도 이러한 방식에 부합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타인에게 손해를 야기한 경우에는, 그의 귀책사유에 의하여 그와 같은 결과를 발생시킨 사람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261) 대표적으로 Hedemann; Werner, S. 20 ff.; Naucke, Generalklauseln, S. 13 ff.; Garstka, in: Koch, S. 115 ff.

262) Forsthoff, Verwaltungsrecht, 10. Aufl. 1973, S. 86.

263) Ch. de Montesquieu, Vom Geist der Gesetze, Bd. 1, eingel. u. hg. v. E. Forsthoff, 2. Aufl. 1992, S. 225: “법관은… 단순히 법률의 언어를 말하는 입이고, 법률의 정확함과 엄격함을 약화시킬 수 없는 의사(意思)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관하여 또한, Kaufmann, in: ders./Hassemer, S. 89.

264) 물론 가치평가의 “객관성”을 위하여서는 Soell(S. 190 ff.)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우선 법률의 규준이 구속력을 갖는다. 이에 관하여는 또한, 아래 307쪽 주 15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법관의 “보충적” 가치평가를 위하여 초법률적 권위에 의하여 제공되는 그러한 가치평가의 객관성을 문제로 삼는다. 또한 Zippelius, Methdenlehre, S. 12 ff. 이익법학의 이와 관련한 논의에 관하여는 Kallfass, S. 40 ff.

265) Schönke/Schröder, 16. Aufl. 1972, § 180 a.F. Rn. 4(단지 여기에 관하여서만 타당한 것은 아니다); 또한 F. Wiacker, Gesetz und Richterkunst, 1958, S. 12 f.; Bachof, Grundgesetz, S. 40; Larenz, Methodenlehre, S. 223 f., 288 ff. “법적용자의 가치관과 법적용대상자의 가치관 사이의 합리성에 관한 합의(Konsens)”는 Esser, Vorverständnis, S. 115(또 159 ff.)에 의하면 법발견의 경우에 중요하다고 한다. 거래관습에서 인정되는 규준에 있어서 에써는 “Standards”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S. 63 ff.).

266) 형법 제166조가 1969. 6. 25. 법률에 의하여 개정된 이후로 본문에서 라이히 재판소가 제기하였던 문제는 위와 같은 그림이 공공의 평온을 깨뜨릴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비방하였는지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존엄성에 관하여는, Knies, S. 21 f.; 또한 Th. Würtenberger(sen.), Rechtliche Grenzen politischer Kunst in historischer Betrachtung, in: H.-O. Mühleisen(Hg.), Grenzen politischer Kunst, 1982, S. 17(30 ff.); Schönke/Schröder-Lenckner, § 166 Rn. 9 f.

267) 이 판결(BGHSt 6, 46)은 “음란”의 개념이 문제인 한, “도덕법칙의 규범”에 관한 그 기본적인 설시만으로 폐기될 수 없다. 또한 BVerwGE 10, 164(167 f.): “도덕과 예절의 명령은 전통과 교육에 의하여 형성된… 법과 문화영역에서 보다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도덕과 예절의 모든 문제에 있어 통일된 관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어떤 한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에게서 합리성이나 공평하고 올바른 사고방식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법관도…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유아독존식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법관은 기존의 여려 견해들을 그 판단의 근거로 삼기 위하여 서로 비교하고 무엇을 우위로 두었는지를 설명하여야 한다.” 법을 “공서양속”과 그 비슷한 사례에 관련시킴에 있어 법과 도덕의 관계에 관하여는 또한, H.-M. Pawlowski, Die Aufgabe des Richters bei der Bestimmung des Verhältnisses von Recht, Sittlichkeit und Moral, ARSP 50(1964), 503; Engisch, Schopenhauer-Jahrbuch 51(1970), 107.

268) A. Baumgarten, Die Wissenschaft vom Recht und ihre Methode, Bd. I, 1920, S. 207에서는 이 경우 “실무상 지도법칙(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고, Hanack, S. 114 ff.에서는 규범과 개별 사안을 규범에 적용하는 포섭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법칙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269) 이는 모든 규범적 개념과 관련하여 Soell, S. 173 ff.에서 예리하게 강조된 점이다.

270) K. Larenz, Über Gegenstand und Methode des völkischen Rechtsdenkens, 1938, S. 19.

271) 개별화의 내용과 한계에 관하여는, Soell(“Individualisierung”이란 표제 하의 사항색인 참조) 외에 Engisch, Idee, S. 194 ff.; Henkel, Recht.

272) 재량의 구속과 한계에 관하여는 Warda, S. 111 ff.; Stern, S. 24 ff.; Maurer, § 7 Rn. 17 ff.

273) Maier, S. 782 ff.

274) Laun, S. 62(당시까지의 통설: Kopp, § 40 Rn. 9 m.w.N.에 대하여 비판적).

275) 모든 국가의 침해행위에 있어서는 비례성의 원칙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얻어왔다.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H. Schneider, Zur Verhältnismäßigkeitskontrolle insbesondere bei Gesetzen, in: FS f. das BVerfG, Bd. II(1976), S. 390; Henkel, Rechtsphilosophie, S. 430 f.; P. Lerche, Grundrechtsschranken, in: Handbuch des Staatsrecht, Bd. V, § 122 Rn. 16 f. m.w.N.’ Röhl, S. 636 ff.; Maurer, § 10 Rn. 17, § 26 Rn. 57 ff.; Pieroth/Schlink, Rn. 295 ff., 317 ff., 911 ff.

276) 이러한 이념에 관하여는, Engisch, Suche, S. 147 ff., 180 ff.; Henkel, Rechtsphilosophie, S. 391 ff., 419 ff.; O. Höffe, Politische Gerechtigkeit, 1987; Coing, S. 150 ff.; Zippelius, Gerechtigkeit, S. 31 ff., 39 ff., 110 ff.; ders., Rechtsphilosophie, §§ 11 ff., 24, 29 ff. 법의 합목적성에 관하여는, Henkel, Rechtsphilosophie, S. 427 ff.; Bydlinski, S. 330 ff.; Arthur Kaufmann, Grundprobleme der Rechtphilosophie, 1994, S. 152 ff.; ders., in: ders./Hassemer, S. 112 f.

277) 선구적인 G. Rümelin, Werturteile und Willensentscheidungen im Civilrecht, 1891.

278) 이중 후자는 예외적으로 여러 처분이 등가적으로 가능하고, 적당하고, 필요하고, 비례적일 수 있기 때문에 물론 드물게 고려된다. 이에 관하여 Th. Würtenberger/D. Heckmann/R. Riggert, Polizeirecht in Baden-Württenberg, 2. Aufl. 1994, Rn. 322 f.

279)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Peters(1974), S. 33; Larenz, Methodenlehre, S. 294.

280) “정당한” 판단에 “주관”이 관여하는 것을 나는 이 책의 초판(1956) 발행 이후 줄곧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같은 취지, Arthur Kaufmann, Richterpersönlichkeit und richterliche Unabhängigkeit, in: FS f. K. Peters(1974), S. 295 ff.(304 ff.); K. Peters, Lehrbuch des Strafprozeßrechts, 5. Aufl. 1985, S. 110 ff.; Larenz, Methodenlehre, S. 295; Zippelius, Methodenlehre, S. 15 f. 법관과 행정공무원의 법률에의 기속을 옹호하고 있는 H. H. Rupp(Die Bindung des Richters an das Gesetz, NJW 1973, 1769)조차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관이나 행정공무원의 주관은 법률에서 고려되지 않지만, 법관을 하나의 맹목적인 컴퓨터나 정치적 선동가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법치국가의 다원성 안에서 개개인의 기회나 희망으로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1774). 특히 행정에 있어 “자기책임의 여지”와 “형성의 자유” 등을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Schmidt-Eichstädte, AöR 98(1973), 192; Bullinger, NJW 1974, 770 ff.; 또한 Maurer, § 7 Rn. 63 m.w.N., § 16 Rn. 14(계획재량에 관하여).

281) Arthur Kaufmann(Freirechtsbewegung-lebendig oder tot?, JuS 1965, 1)은 이를 오해로 본다. 그러나 예컨대 Ernst Fuchs(S. 12 ff., 24 ff.)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카우프만은 자유법론자들이 본래 그래야 한 것보다 더 급격하게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생각한다(JuS 1965, 5). 본문도 자유법학자들이 명백한 어의에 반하는 법학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구속의 “완화”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법률이 아주 다의적이고, 흠결이 내재하며, 따라서 일반적 법감정이 우선 구해야 할 법원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는 법관의 자기평가야말로 진정한 방법론적 해결책으로 불려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82) 자유법학파에 관하여는, G. Boehmer, Grundlagen der bürgerlichen Rechtsfindung II 1, 1951, S. 158 ff.(참고문헌과 함께); Engisch, Idee, S. 183 ff.; Wieacker, Privatrechtsgeschichte, S. 579 ff.; K. Riebschläger, Die Freiheitsbewegung, 1968; Fikentscher III, S. 365 ff.; M. Rehbinder, Die Begründung der Rechtssoziologie durch Eugen Ehrlich, 2. Aufl. 1986, S. 88 ff.; Larenz, Methodenlehre, S. 59 ff.; K. Kroeschell, Rechtsgeschichte Deutschlands im 20. Jahrhundert, 1992, S. 22 f., 85; H. Schlosser, Grundzüge der Neueren Privatrechtsgeschichte, 8. Aufl. 1996, S. 243 f. m.w.N.

283) 이와 같은 “정치적 법학”에 관하여는, H. H. Klein, Richterrecht und Gesetzesrecht, DRiZ 1972, 333(336 f.); Fikentscher III, S. 607 ff.; Bydlinski, S. 158 ff. m.w.N.; Pawlowski, Rn. 139 ff., 755. 자유법학의 운동과 정치적 성향을 갖는 법학의 운동과의 결합을 집대성한 것으로는 또한, E. A. Kramer, Der Kampf um die Rechtswissenschaft, ZRP 1970, 82.

284) Arthur Kaufmann, Durch Naturrecht und Rechtspositivismus zur juristischen Hermeneutik, JZ 1975, 337(339)은 하자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그는 법률이란 “생활관계의 다양함과 변화무쌍함으로 인해 결코 종국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불완전함”이나 “미완성”이란 개념이 인정될 수는 있어도 “하자”라는 개념은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률이 새로운 문제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을 하지 않아 “보충” 또는 “법의 형성”이 필요한 경우 이를 “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285) 흠결의 문제를 다룬 문헌 중에서도 대표적으로는, E. Zitelmann, Lücken im Recht, 1903; K. Engisch, Der Begriff der Rechtslücke, FS f. W. Sauer(1949), S. 85(옛날 문헌에 대한 주와 함께); Fikentscher III, S. 718 ff.; Canaris, Lücken; Bydlinski, S. 472 ff.; Larenz, Methodenlehre, S. 370 ff.; Pawlowskz, Rn 453 ff.; Coing, S. 282 ff.; Röhl, S. 650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58 ff.; K. Larenz/C. W. Canaris, Methodenlehre der Rechtswissenschaft(Studienausgabe), 3.Aufl. 1995, S. 246 ff.(각 주도 함께) 등 참조.

286) 헌법에 있어 흠결에 관하여는 예컨대 Germann, S. 130 ff.; Maunz/Zippelius, § 712; Müller, Methodik, S. 259 ff. 참조. 국제법에 있어 흠결에 관하여는 G. Dahm/J. Delbrück/L. Wolfrum, Völkerrecht, Bd. I 1, 2. Aufl. 1989, S. 68, S. 79 ff. 국제사법의 분야에서도 많은 흠결이 발견된다: 이에 관하여는 J. Kropholler, Internationale Privatrecht, 2. Aufl. 1994, § 11 I 1 b, § 52 IV 2 d.

287) 행정법에 있어 흠결에 관하여는 예컨대 G. Anschütz, Lücken in den Verfassungs- und Verwaltungsgesetzen, VerwArch 14(1904), 315; Germann, S. 126 ff.; Wolff/Bachof/Stober, § 25 Rn. 14, § 28 Rn. 70 ff.

288) 1994. 10. 27. 추가된 기본법 제3조 제2항 제2문은 “평등권의 실질적 관철”과 “기존 불이익의 제거”를 목표로 한다; 이에 관하여는 Jarass/Pieroth, Art. 3 Rn. 49, 55, 60 m.w.N.

289) 이로써 제기되는 방법론상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Esser, Grundsatz, S. 72 ff. 1957년 평등대우에 관한 법률에 의한 새로운 상황에 관하여는 W. Müller-Freienfels, Kernfragen des Gleichberechtigungsgesetzes, JZ 1957, 685.

290) 이하의 상세한 내용은, Engisch, in: FS Sauer(1949), S. 85.

291) 예컨대 Zitelmann, Lücken, S. 9: 이에 의하면 법은 무흠결의 완성품이고, 다만 법률에만 흠결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가 된 재판거부금지의 원칙(이에 관하여는 E. Schumann, Das Rechtsverweigerungsverbot, ZZP 81(1968), 79)은, 예컨대 국제법에서와 같이 무조건 타당한 것만은 아니다(F. J. Berber, Zur Problematik der Rechtsquellen im internationalen Wasserrecht, FS f. P. Gieseke(1958), S. 117(122)). 본문 아래 350쪽과 주 68 참조.

292)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Sauer(1049), S. 96 ff.

293) 이에 관하여는 Engisch, ZgS 108(1952), 385; 덧붙여 Germann, S. 121 ff.; Arthur Kaufmann, Rechtsfreier Raum und eigenverantwortliche Entscheidung dargestellt am Problem des Schwangerschaftsabbruch, in: FS f. R. Maurach(1972), S. 327(331 ff.); Canaris, Lücken, S. 40 ff.

294) 예를 들어 K. Bergbohm, Jurisprudenz und Rechtsphilosophie, 1892, S. 371 ff.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Sauer(1949), S. 99 ff.

295) Larenz, Methodenlehre, S. 373: 흠결이란 “계획에 반하는 법률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덧붙여 Canaris, Lücken, S. 39: 흠결이란 “실정법(즉, 가능한 어의 안에서의 법률과 관습법) 안에서의 계획에 반하는 불완전성을 의미하고, 전체 법질서로 판단된다”(뒤의 표현과 함께 실질상 “보충을 요하는” 평가요소로서 “반계획성(Planwidrigkeit)”이란 개념에 일반적 평가기준을 부여하고 있는데, Canaris는 이 일반적 평가기준의 상세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Engisch, in: FS Sauer(1949), S. 90 ff.

296) Canaris, Lücken, S. 24 ff.에서는 위 원칙을 그 자체로는 인정하면서 개별적인 경우의 예외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Germann, S. 174 ff. 참조.

297) Heck, Gesetzeauslegung, S. 161 f, S. 173 f.; 또한 Keller, S. 60; Germann, S. 120 f.; A. Meier-Hayoz, Lücken intra legem, in: FS f. O. A. Germann(1969), S. 149; Rebinder, Rechtswissenschaft, S. 225 f.; 또한 U. Klug, Rechtlücke und Rechtsgeltung, in: FS f. H. C. Nipperdey(1965), S. 71(74 f.: “기술적 흠결”). 일반조항을 “법률적 흠결”로 보는 경우는 Soell, S. 160 ff., S. 170 ff.; 이에 대한 반대는 내 생각으로는 정당하다고 보는데, Canaris, Lücken, S. 26 ff., 130 m. w. N.

298) 같은 취지 Esser, Grundsatz, S. 51.

299) “반계획성”이란 요인에 관하여 개괄적 고찰로는 Canaris, Lücken, S. 31 ff.

300) Legaz y Lacambra, S. 497 f.

301) 같은 취지 Canaris, Lücken, S. 39; Larenz, Methodenlehre, S. 373 f.

302) 예컨대 Zietelmann, Lücken, S. 19; 이에 대한 비판은, Engisch, in: FS Sauer(1949), S. 94 ff.; Legaz y Lacambra, S. 499 ff.; Canaris, Lücken, S. 49 ff.; Larenz, Methodenlehre, S. 378.

303) Canaris, Lücken, S. 136 f.; Larenz, Methodenlehre, S. 377(“숨은 흠결”) 참조. “숨은 흠결”은 “목적론적 귀납”과 일치한다.

304)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Sauer(1949), S. 91; 또한 Canaris, Lücken, S. 109, 161 ff.

305) 이런 의미에서의 “현안”을 H. Otto(Int. Jahrbuch f. interdisziplinäre Forschung 2(1975), 116(123 주 24)) 또한 법학의 과제로서 강조한다. 또한 Wessels, Rn. 301 참조.

306)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n: FS Sauer(1949), S. 92 Anm. 26; Canaris, Lücken, S. 32 ff.(39쪽과 주 100도 아울러) 참조.

307) 이점에서 정확하다 할 Kaufmann, Analogie, S. 42: “법률문언은 그대로 있는데 어찌하여 ‘법률의 의미’는 변하는가? 이는 ‘법률의 의미’가 법률에만 내재한 것이 아니라 법률이 규정한 구체적 생활사태에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Esser, Vorverständnis, S. 175 참조: “규정이 ‘흠결이다’라는 확정은… 법률의 ‘계획’에 관한 무제한의 주장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해결필요성에 관한 기본인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308) 이에 관하여는 Engisch, FS Sauer(1949), S. 89 f.; Klug, in: FS Nirrerdey(1965), S. 71; Canaris, Lücken, S. 59 ff., 129 ff., 140 ff.; Larenz, Methodenlehre, S. 377 ff.

309) 이에 관하여 일반적으로는, Enneccerus/Nipperdey I 1, § 58; Heller; Kaufmann, Analogie; Klug, S. 109 ff.; Bydlinsky, S. 475 f.; Larenz, Methodenlehre, S. 381 ff.; Pawlovsky, Rn. 476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61 ff.; E. Schneider, S. 134 ff. 역사학에 있어 유추에 관하여는, R. Wittram, Das Interesse an der Geschichte, 1958, S. 50 ff.;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Kaufmann, Analogie, S. 20 ff. m.w.N.; 신학에 있어서는: G. Schöngen, Analogie, in: Handbuch theologischer Grundbegriffe, Bd. 1, hg. v. H. Fries, 1962, S. 49 ff. m.w.N. 유추적 사고가 법적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명백하다(Kaufmann, Analogie, S. 21). 법적 분야에서 유추적 사고가 흠결보충에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Heller, S. 76 Anm. 208, S. 82 f., 86 f. 참조); Canaris는 흠결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벌써 그 의미를 강조한다(Lücken, S. 71 ff.). 그러나, 법률가에게 있어 유추는 주로 흠결보충을 위해 유용하다.

310) Klug, S. 115 ff.에서는 전통적 논리학의 중심과제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논리적 근거에 입각하여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유추추론의 형식론적, 특히 논리적 분석에 관하여는 덧붙여 Sax, S. 97 ff.; Heller; Kaufmann, Analogie, S. 33 ff. Schreiber(Logik, S. 47 ff.)는 유추추론 및 반대추론, argumenta a maiore, a minore und a fortiori(본문 335쪽 이하와 주 48 참조) 등이 논리적 또는 “구문론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311) 따라서, 유추추론의 논리적 구조는 다음과 같이 완성될 수 있다(als “modus ponens”):
대전제 : 두 개의 사실 S와 S’가 하나의 특정한 법적 규범의 관점에서 유사하다면, 다시 말해 본질적 관계에서 일치한다면, 이들은 동일한 법적 결과를 가져야 한다.
소전제 : 사실 F(=S’)가 법적 규범 N에 규정되어 있는 사실 K(=S)와 본질적 관계에서 일치한다(이 경우 F라는 글자는 자유의 박탈, K라는 글자는 신체상해를 의미한다고 해두자).
결론 : F는 K와 동일한 법적 결과를 가져야 한다.
Heller(S. 118)도 (앞서 다룬 순수논리적 유추추론과는 반대로) “공리적(axiologisch)” 유추추론을 위하여 동일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분명히,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아니한 것으로의” 추론(Heller, S. 19)으로서 논리적 유추추론은 전통적 삼단논법으로서 법적 추론에 의한 우리의 해석으로는 그 특수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법의 영역에 있어 “유추”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 성질상 소전제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성의 판단(본질적 관계에서 일치한다는 확인)을, 본질적 관계에서 일치하는 것은 똑같이 다루어져야 한다는 평등원칙에 부합하는 대전제에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Heller, S. 83, 110; Alexy, Argumentation, S. 344; Larenz, Methodenlehre, S. 381). 법적인 유추추론의 “모험”은 유사성 판단의 모험이기도 하고, 이는 Sax, S. 141 ff.; Klug, S. 136 f.; Esser, Vorverständnis, S. 107; Zippelius, Gerechtigkeit, S. 385 ff.에서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초논리적”, “공리론적” 또는 우리가 본문에서 – 아마도 좁은 의미로서 – “목적론적”이라 한 것과 같은 그런 의미의 모험인 것이다(Heller, S. 55, 78 ff., 109 ff.; Alexy, Argumentation, S. 344 ff.). Kaufmann(Analogie, S. 44 ff.)이 유추적 사고를 “사물의 본성”과 “유형(Typus)”에 결부시켰다 한다면, 이는 특히 넓게 파악된 유추의 개념(이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381 Anm. 31)을 다룬 것이다:“‘사물의 본성’은 유추추론의 요점이다”(S. 44); 나아가, “구체적 법발견에 있어서는 항상 법률에 의하여 관념된 유형까지 소급하여 보아야 한다”(S. 51).

312) 자세한 것은 Jescheck/Weigend, S. 376 ff.

313)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니다! Klug, S. 143 ff. 반대추론에 관하여는 Heller, S. 132 ff.; Canaris, Lücken, S. 44 ff., 48 f.; Bydlinski, S. 476 f.; Larenz, Methodenlehre, S. 390 f.; Pawlowski, Rn. 488 f.; E. Schneider, S. 141 ff.

314)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Isay, S. 149; Cohn, S. 109 f.; Kelsen, Rechtslehre, S. 346 ff.; Esser, Vorverstädnis, S. 107; Coing, S. 273 ff.

315) L. Enneccerus, Lehrbuch des Bürgerlichen Rechts, Bd. I, 12. Aufl. 1928, § 53 II 1 a; H. Bartholomeyczik, Die Kunst der Gesetzesauslegung, 1951, S. 84 ff. 본문의 기초가 된 사례를 Süddeutsche Zeitung 1967. 3. 4.과 3. 5.자 지면에 소개된 사례로 뒷받침할 수도 있다. 요컨대, 영국군 공군 장교인 아더 해리슨 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에 폭격을 가한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전쟁당시 “가스가 가득 찬 기구로부터 폭발물질”을 투하하는 것을 금지한 1870/71년 공중전에 관한 협약에 기초하여, 아주 도발적인 반대추론에 의하여 그가 위 협약을 준수하였다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었다.

316) Bartholomeyczik, S. 86.

317) 319쪽 이하 주 28과 Nawiasky, S. 147 f. 참조.

318) 유추추론의 이와 같은 정당화에 관하여는 예컨대, Bierling IV, S. 407 f.; H. Herrfahrdt, Lücken im Recht, 1915, S. 38 ff.

319)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Engisch, Einheit, S. 76 f.; Heller, S. 122 ff. 여러 법역 사이에서의 유추적 법적용, 예컨대 민법의 조문을 공법에 적용하는 것 등의 경우에는 물론 실질적 근거가 장애로 될수 있다. J. Burmeister, Die Verfassungsorientierung der Gesetzesauslegung, 1966, S. 44 Anm. 155; Maurer, § 3 Rn. 28 ff. m.w.N.

320) 이에 대하여 회의적으로는(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Heller, S. 135 ff. 이와 같이 해석에서 유추에 이르는 단계와 관련하여 “점진적”(“다차원적”) 법발견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예컨대, Th. Zimmermann, Mehrstufige Rechtsfindung 민 Verbindung subjektiver und objektiver Auslegungsmethode, NJW 1954, 1628; B. Bender, Zur Methode der Rechtsfindung bei der Auslegung und Fortbildung gesetzen Rechts, JZ 1957, 593(597 f.); Siebert, S. 45; Priester, in: Koch, S. 155; Larenz, Methodenlehre, S. 366 ff.

321) Heck, Gesetzesauslegung, S. 33.

322) Enneccerus/Nipperdey I 1, § 58 II 1. 법률의 유추와 법의 유추의 구분에 관하여는 덧붙여 Nawiasky, S. 146; Sax S. 102 ff.(비판적이다); Esser, Vorverständnis, S. 182; Canaris, Lücken, S. 97 f.(m.w.N. in Anm. 135); Bydlinski, S. 477 ff.; Larenz, Methodenlehre, S. 383 f. 라렌쯔는 “법의 유추”란 표현을 삼가고 그 대신 “전체의 유추”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카나리스는 “법의 유추”란 특별한 것에서 특별한 것의 추론이 문제가 아니라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의 추론, 말하자면 “불특정한 다수의 사례”(S. 98)에 타당한 일반적 효력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귀납적 추론의 문제란 이유에서 위 표현이 부적당하다고 주장한다. 유추(법률의 유추에서도 마찬가지)에는 귀납적 추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본문 319쪽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귀납적으로 추론된 일반적 원칙을 법률상 직접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아니한 사례에 적용한다는 것은 특별한 것과 특별한 것 사이의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법률의 유추에서뿐만 아니라 법의 유추에 있어서도 “유추”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383 ff. 참조.

323) 이에 관하여는 Esser, Grundsatz, S. 162 ff.; K. Larenz, Lehrbuch des Schuldrechts, Bd. I, 14. Aufl. 1987, S. 104 ff.; ders., Methodenlehre, S. 421 ff. 라렌쯔(Methodenleher, S. 421 ff.)가 계약체결전 과실책임론의 근거는 법윤리적 원리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이는 소위 “법의 유추”도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324) Nawiasly, S. 147.

325) 예컨대, Bierling IV, S. 411 f.; Sauer, Juristische Methodenlehre, 1940, S. 310 ff.

326) 이에 관하여는 Heck, Gesetzesauslegung, S. 186 ff.; Enneccerus/Nipperdey I 1, § 48 Anm. 6; Klug, S. 112 ff.; Larenz, Methodenlehre, S. 355 f.; E. Schneider, S. 10, 141. Müller, Mothodik, S. 210에서는 “예외조항”의 존재가 해석론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

327) Vgl. BGHZ 7, 30. 반면 노무계약에 있어 민법 제618조 제3항과 이와 더불어 민법 제844조 이하의 유추적용에 관하여는, Canaris, Lücken, S. 181 f.; Palandt-Putzo, § 618 Rn. 1 m. w. N.

328) 현재 효력이 있는 형사소송법 제247조 S. 2, 2. Alt.에서는 증인에게 “건강을 해칠만한 심각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 피고인의 퇴정이 허용된다.

329) 이에 관하여는 G. u. D. Reinicke, Die Auslegungsgrundsätze des Bundesgerichtshofes, NJW 1951, 681(633 Nr. 5).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객관주의적” 해석관점(오늘날 언어용례를 중심으로 함)을 인정한 것이다; Larenz, Methodenlehre, S. 324. 아무튼 이 판결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다.

330) 극단적인 확장해석에 원칙상 반대의견으로는, J. Baumann, Strafrecht, Allgemeiner Teil, 9. Aufl. 1985, § 13 I 3. 그는 “자연적” 언어의 의미, 언어의 관계의미와 표현의 의미를 “해석의 한계”로 보았다. 그러나 포태와 수태능력이 일반적으로 그런 바와 같이 형법 제224조 소정의 의미에서 “생산능력”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형법상 유추금지에 관하여는 예컨대, Sax; Kaufmann, Analogie, S. 4 ff., 52 f., 60 ff.; Priester, in: Koch, S. 155 ff. m. w. N.; Schönke/Schröder-Eser, § 1 Rn. 24 ff.(m. w. N. vor Rn. 1). 작스와 카우프만은 전통적 의미에 있어 유추금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스(S. 152)는 “‘유추금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카우프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형법에서 엄격한 유추금지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S. 53). 형법에서의 유추는 “법률적 구성요건을 기초한 불법유형”에서 그 한계를 발견한다(S. 52). 이중 후자의 설명은, 유추적 사고가 “사물의 본성”과 “유형”에 근거하고(S. 47), 유형은 정의될 수는 없고 “다소나마 완전하게 묘사될 수 있다”(S. 52)는 카우프만 특유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는 해석과 유추의 구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Hassemer, S. 160 ff.; Hruschka, Verstehen, S. 102; G. Stratenwerth, Strafrecht, Allgemeiner Teil I, 3. Aufl. 1981, Rn. 98 ff.는 카우프만과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나는, 범죄행위의 법률적 구성요건은 정형화된 “불법유형”의 의미를 가르킬 뿐만 아니라, “어의”가 (허용된) 해석과 (금지된) 유추의 한계로 작용하도록 이를 구성하고 규정하는 것이라는 통설을 지지하고자 한다. 논쟁의 상황에 관하여는 Schönke/Schröder-Eser, § 1 Rn. 55.
형법의 유추금지에 대응되는 조문이 민법에서는 제253조이다: “재산적 손해가 아닌 손해의 경우에는 법률에 의하여 규정된 경우에 한하여 금전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E. Bötticher, Die Einschränkung des Ersatzes immateriellen Schadens und der Genugtuungsanspruch wegen Persönlichkeitsminderung, MDR 1963, 353(360)에서는 특히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비재산적 손해배상의 영역에 있어 민법 제253조는 기본법 제103조 제2항의 대응물이다”; “양 규정은 법관이 행위자를 판단하기 위하여서는 법률에 근거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 외 허용된 유추에 근거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일반적 인격권이 침해당한 경우의 비재산적 손해배상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유추금지를 무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399쪽 주 132 참조. 그러나 연방헌법재판소도 “소라야 사건(Sorayafall)”에서 “일반적 인격권”이 침해당한 경우 금전배상을 인정하는 것이 유추금지를 명한 헌법을 침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BVerfGE 34, 269, 특히 unter IV u. V); 이를 지지하는 견해로는, Larenz/Canaris, Methodenlehre, S. 249 f.; 반면 비판하는 견해로는, Larenz, Methdoenlehre, S. 425 f.

331) 이의 논리적 구조와 정확성에 관하여는 대표적으로, Nawiasky, S. 148(그는 이러한 논의를 “유추추론의 특별한 경우”로서 파악한다); Kriele, S. 151(그는 이를 단순히 “토포이”로 바라본다); Klug, S. 146 ff.(“상당히 올바르다”는 표현을 붙여 이러한 논의의 “강력한 내적 관련성”을 강조한다, S. 146 f.); Bydlinski, S. 479 f.; Larenz, Methodenlehre, S. 389 ff.; E. Schneider, S. 144 ff. 또한 Canaris, Lücken, S. 78 ff.에서는 큰 것으로부터의 추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조문의 근거가 그에 의하여 직접 파악될 수 있는 사안보다도 더 강력한 정도로, 규정되지 않은 사안에 들어맞는 경우로서, 그 좋은 실례로는 민법 제904조 제2문(긴급피난의 경우 소유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있어 “선례로부터의 추론(argumentum a fortiori)”의 경우인바, 여기서는 “합법적 침해의 근거로 이미 배상책임이 인정된 것이라면, … “이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비용 하에 법익이 구조된 경우”에도 “위법하나 (형사상) 책임이 없는 경우”로 보는 것이 “아마 옳을 것이다”(S. 78 f.). 나는 형법에서도 이러한 실례를 지지하여, 자살에 있어 고의적 방조의 불가벌성으로부터의 과실적 방조의 불가벌성의 추론(BGHSt 24, 342가 그렇다), 말하자면 유추의 하위단계로 파악될 수 있는, “아마도 옳을 것이다”라는 식의 선례로부터의 추론을 지지하고 싶다. 적극적 작위의 불가벌성으로부터의 동일한 부작위(결과발생의 방지)의 불가벌의 추론도 그 한 예일 것이다.
Canaris, Lücken, S. 82 ff., 136 f.와 Larenz, Methodenlehre, S. 391 ff.에서는 유추추론과 기타 논의를 소위 “숨겨진” 흠결을 보충하기 위한 절차로 지지하며 “목적론적 연역”을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위와 같은 목적론적 연역을 어느 한 조문에 의미합치적으로 요구되어지는 한계를 덧붙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동일한 것은 동일하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것은 목적론적 연역에 의하면 합리적 근거가 있는 경우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카나리스와 라렌쯔의 실례를 참조; 또한 Bydlinski, S. 480 f.; Pawlowski, Rn. 493 ff. 및 아래 391쪽 이하와 주 125 참조).

332) 예컨대, H. J. Wolff, Rechtsgrundsätze und verfassungsgestaltende Grundentscheidungen als Rechtsquellen, in: FS f. W. Jellinek(1955), S. 33; ders./Bachof/Stober, § 25 Rn. 2 f., § 28 Rn. 74; Germann, S. 151 ff., 181 ff.; Esser, Grundsatz, S. 242 ff.; Larenz, Methodenlehre, S. 336 ff., 421 f., 474 ff. 또한 민법 초안 제1조(유추에 의하여서만 적용될 수 있는 법률조항의 흠결의 경우에는 “법질서의 정신으로부터 생기는 일반원칙들이 타당하다”) 참조.

333) 예컨대, Bierling IV, S. 411 ff.; Keller, S. 122 ff. 여기서 또한 Canaris, Systemdenken, S. 95 ff.가 이해한 바와 같이, 법질서의 “내적 체계”로부터 흠결보충을 끌어낼 수도 있다.

334) 예컨대, Beling, in: FS Heck u.a. (1931), S. 13.

335) Stammler, Theorie, S. 647 ff.; ders., Rechtphilosophie, § 132. 또한 Keller, S. 126; K. Larenz, Richtiges Recht, 1979; ders., Methodenlehre, S. 90 ff.; Pawlowski, Rn. 588 ff.

336) 흠결보충의 수단으로서 (“사물의 본성”을 포함한) 자연법에 관하여는, Reichel, S. 106; G. Radbruch, Die Natur der Sache als juristische Denkform, in: FS f. R. Laun(1948), S. 157(162 f.); Kaufmann, Analogie; Larenz, Methodenlehre, S. 417 ff.; Müller, Rechtslehre, S. 102; 또한 Bydlinski, S. 51 ff. 자연법과 “사물의 본성” 일반에 관하여는, 386쪽 이하 주 120과 435쪽 주 40 문헌 참조.

337) 자유법학파의 관점에서 이에 관하여는, H. U. Kantorowiz(Gnäus Flavius), Der Kampf um die Rechtswissenschaft, 1906, S. 14 f., 20, 41; Isay, S. 223 f.(흠결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법관은 그의 법감정에 따라 판결을 할 자유가 있다”). 비판적으로는 예컨대, Boehmer, S. 158 ff. 자유법학파 이외에서 법관 등의 “고유평가”에 관련하여서는, Heck, Gesetzesauslegung, S. 238; E. Huber, Recht und Rechtsverwirklichung, 2. Aufl. 1925, S. 354; Petrasch다, S. 308; R. Zippelius, Rechtsnorm und richterliche Entscheidungsfreiheit, JZ 1970, 241; Bydlinski, S. 19 ff.

338) 이에 관하여는, R. Laun, Allgemeine Rechtsgrundsätze, in: FS f. G. Radbruch(1948), S. 117; Dahm/Delbrück/Wolfrum, S. 62 ff.

339)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übers. v. O. Gigon, Zürich 1951, V 14.

340) 이에 관하여는, A. Meier-Hayoz, Der Richter als Gesetzgeber, 1951; ders., in: Berner Kommentar zum schweizerischen Zivilrecht, Bd. 1, hg. v. H. Becker, 1962, Art. 1; Germann, S. 159 ff. 또한 BGH-Gutachten v. 6. 9. 1953, JZ 1954, 152(153 f.).

341) 이하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으로는, Wieacker, Gesetz, S. 12 ff. 및 Larenz, Methodenlehre, S. 336 ff., 474.: 이러한 “법윤리적 원칙들”은 법적 진리 내지 “실질적 법사상”으로, 이들은 일반적 법의식 안에서 그 승인을 발견하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발전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규준성을 얻게 된다. 법윤리적 원칙들은 선재하는 규범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고” “발견되는” 것이다.

342) 이에 관하여 Esser, Grundsatz, S. 172 ff.

343) Sauer, S. 255. 여기서는 또한 비례의 원칙도 관여한다.

344) F. v. Liszt/E. Schmidt, Lehrbuch des Deutschen Strafrechts, 26. Aufl. 1932, § 32 B(Anm. 20 m.w.N.). 이에 관하여 Schönke/Schröder-Lenckner, vor § 32 Rn. 6.

345) 예컨대, Binding, Handbuch, S. 760.

346)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인다면, 이익형량의 원칙은 처음 형법에서 발전하여 개정된 형법 제34조에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민법에서도 법발견의 방법론으로 점차 효과를 얻게 되었다. 예컨대, “Constanze-Fall”(BGHZ 3, 270), “Tonbandurteil”(BGHZ 17, 266) 또는 “Gisengurteil”(BGHZ 35, 363; 언론자유의 원칙에 대한 인격권의 비교형량). 이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409 f. 이와 함께 “Lüthurteil”(BVerfGE 7, 198) 이후로는 이익형량의 원칙이 헌법(요컨대 기본권의 한계와 관련하여)으로도 도입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P. Häberle, Die Wesensgehalsgarantie des Art. 19 Abs. 2 Grundgesetz, 2. Aufl. 1972, S. 31 ff.; Larenz, Methodenlehre, S. 404 ff.; Maunz/Zippelius, § 24 IV 2 f.; 비판적으로는, Hesse, Rn. 72, 423; Müller, Methodik, S. 62 ff. “이익형량”과 관련하여 기본권의 기초가 된 “가치질서”의 이념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347) 이에 관하여는, E. Zitelmann, Die Kunst der Gesetzgebung, 1904; A. Wach, in: v. Birkmeyer u. a., AT VI, S. 1; E. Beling, Methodik der Gesetzgebung, 1922; P. Noll, Gesetzgebungslehre, 1973(m.w.N.); J. Rödig(Hg.), Studien zu einer Theorie der Gesetzgebung, 1976; H. Kindermann(Hg.), Theorie der Gesetzgebung, 1982; Bydlinski, S. 625 ff.; H. Schneider, Gesetzgebung, 2. Aufl. 1991.

348) “이익법학”론의 관점에서 “자기 고유의 평가”에 관하여는, Kallfass, S. 40 ff., 57 f., 103 f.

349) Stammler, Theorie, S. 643.

350)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Engisch, in: FS Sauer(1949), S. 96 ff. 찬성하는 견해로는, Larenz, Methodenlehre, S. 402; “보충이 불가능한 흠결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로는, Canaris, Lücken, S. 172 ff.

351) Canaris, Lücken, S. 174. 또한 위 303쪽 주 8 참조.

352) BGH-Gutachten, JZ 1954, 155; 또한 OLG Freiburg, NJW 1952, 886(887). 덧붙여 Engisch, in: FS Sauer(1949), S. 98; H. J. Hirsch, Richterrecht und Gesetzesrecht, JR 1966, 334(339).

353) Kant, KdRV, S. 472(A 509).

354) 예컨대, 위 129쪽 이하 참조. 법질서의 단일성에 관하여는 Engisch, Einheit 참조. 덧붙여 Sauer, S. 280 ff.; Hanack, S. 104 ff., 154 ff.; D. C. Göldner, Verfassungsprinzip und Privatrechtsnorm in der verfassungskonformen Auslegung und Rechtsfortbildung, 1969, S. 52 ff., 125 ff.; Canaris, Systemdenken, S. 13 ff.; Larenz, Methodenlehre, S. 166 f.; Röhl, S. 458 ff.; Müller, S. 215 ff.

355) 이에 관하여 기본법 제123조 제1항: “(최초) 연방의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는 법은 기본법에 반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갖는다”; 또한 기본법 제143조(신주와 동 베를린을 위한 경과규정). 이에 관하여는 아마도, Wegler, JR 1949, 67; K. Stern, Zur Fortgeltung vorkonstitutionellen Rechts, JuS 1961, 350; Maunz/Zippelius, § 37 VII; Jarass/Pieroth, Art. 123, 143(m.w.N., 특히 1990. 8. 31. 통일조약에 관하여). 또한 본문 372쪽 이하 및 주 98 참조.

356) 이하의 서술에 관하여는, Schreiber, Logik, S. 57 ff.; Ch. Perelman(Hg.), Les Antinomies en droit, 1965; Canaris, Systemdenken, S. 53 ff., 112 ff. 쉬라이버는 이하에서 다룰 모순이 부분적으로는 논리적 모순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한다(S. 59 ff.). 무엇보다도 나 또한 그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리적 모순과 함께 다른 유형의 모순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예컨대, 어떤 행동이 법규범에 “모순한다”고 하여 논리적 모순인지? Engisch, Einheit, S. 41 ff.에서 집대성되어 있는 모순들은 그 상호의 관련성에 따르면 법질서의 단일성에 대한 장해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수 백년간에 걸쳐 완성된 어느 한 교회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식들이 건축학적 단일성에서 보면 장해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나는 법기술적인 모순은 특히 논리적 모순이 아니란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점은 Engisch, Einheit, S. 45 f.에서도 분명히 하였는데, 거기서는 실질적인 부조화를 회피하기 위하여 일종의 개념론적 모순을 고려해두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더욱이 동일한 이름의 개념들에 있어 그 의미내용의 변화는 법질서의 단일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일종의 모순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예컨대, BGHSt 6, 41(42 f.)와 BGHZ 39, 333(335 f.)에서 지적된 바와 같은바, 거기서는 여러 조항에 있는 어떤 개념을 통일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때마다 법질서의 단일성의 의미에 안주한다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BVerfGE 33, 52(66 ff.) 및 Hanack, S. 156 f.; 덧붙여 Canaris, Systemdenken, S. 120 Anm. 30.

357) M. Grünhut, Methodische Grundlagen der heutigen Strafrechtswissenschaft, in: FS f. R. v. Frank(1930), Bd. I, S. 1(19).

358) Grünhut, in: FS v. Frank(1930), Bd. I, S. 19.

359) 같은 취지 Schreiber, Logik, S. 60: “법질서에 위와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모순은 법체계를 파괴한다”. 쉬라이버에 의하면, 규범의 충돌 상황에서는 “어떤 규범이 우선하는지를 정한 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S. 60). 예컨대, 본문의 사례에서는 군인법(Soldatengesetz) 제11조와 방위형법(Wehrstrafgesetz) 제5조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충돌 상황에서 어떤 규범이 우선하는지 정한 규정도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할 법적 방도도 없어 자의적으로 어느 한 조문에 우위를 인정하여야 할 경우라면, 자의금지의 원칙상 두 조문 모두 효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종의 “충돌의 흠결”(Canaris, Systemdenken, S. 124 참조). 이에 관하여는 아래 360쪽 및 주 82 참조. 규범의 충돌에 관하여는 또한, Kelsen, Rechtlehre, S. 209 ff.; Weinberger, S. 235 ff.; Larenz, Methodenlehre, S. 266 ff., 313.

360) 이에 관하여 Engisch, Einheit, S. 47 ff. 또한 Rödig, S. 211 ff.; Bydlinski, S. 573 f.; Larenz, Methodenlehre, S. 266 ff.; Zippelius, Methodenlehre, S. 33 ff.

361) F. Kern, Recht und Verfassung im Mittelalter, 2. Aufl. 1958, S. 15 ff.; Coing, Grundformen des Rechts, Universitas 15(1960), 249(251 f.); Rebinder, Rechtswissenschaft, S. 21 ff.; 비판적으로는 K. Kroeschell, Deutsche Rechtsgeschichte, Bd. 1, 10. Aufl. 1992, S. 151. 오늘날 영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구법을 높이 평가할 때도 있다; 이에 관하여는 C. M. Schmitthoff, Systemdenken und Fallrecht in der Entwicklung des englischen Privatrechts, JZ 1967, 1(3 f.).

362) 이에 관하여는 Engsich, Einheit, S. 28 f., 47 ff.; Bydlinski, S. 572 f.; Röhl, S. 601 f.; Zippelius, Methodenlehre, S. 36 f.; Th. Schilling, Rang und Geltung von Normen in gestuften Rechtsordnungen, 1995, S. 399 ff.

363) 보다 자세한 내용은, O. Bachof, Verfassungswidrige Verfassungsnormen?, 1951; P. Großkruez, Normwidersprüche im Verfassungsrecht, 1966; Dürig, in: Th. Maunz/G. Dürig, Kommentar zum Grundgesetz, 1994, Art. 1 Anm. 82 f.; Maunz/Zippelius, § 41 IV 4 a; Zippelius, Methodenlehre, S. 36(기본법 제79조 제3항의 지적과 관련하여).

364) 또한 Kant, Metaphysik der Sitten, S. 330(AB 23 f.).

365) (규범)충돌로 인한 흠결에 관하여는, Kallfass, S. 55 ff.; Canaris, Lücken, S. 65 ff.; ders., Systemdenken, S. 121 ff.

366) 이에 관하여는 Schreiber, Logik, S. 60: “논리적 의미에서의 모순은 이 경우 존재하지 않는다”(나도 이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법질서의 가치체계에서 모순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체계는 법질서에 의하여 비로소 정하여지기 때문이다. 가치체계는 그가 종속하는 법질서를 떠나 존재하지 못한다. 엥기쉬가 우리 형법전에서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유기에 의한 생명의 위협보다 더 중하게 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순이라고 한 예외적 상황이 바로 그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법률적 규정이 불만족스럽더라도 이를 모순이라 하지는 못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자 한다: 1. 가치체계에 종속하는 법질서를 떠나 존재하는 가치체계가 없다는 점에 관하여 이는 분명 긍정적 명제로서 논박을 벌일 수는 있지만 여기서 나는 이를 피한다; 2. 현행 형법전에서 고의에 의한 살인이 형법 제221조에서 처벌하고 있는, 유기에 의한 생명위협보다 더 중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형법 제211조, 제212조, 제217조의 형을 형법 제221조의 형과 비교하여 얻은 결론으로, 이 경우 유기의 형벌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위협의 형벌에 있다라는 해석에 물론 기초한 것인바, 이는 통설이다(예컨대, RGSt 68, 407(409 f.); Schönke/Schröder-Eser, § 221 Rn. 1); 3. 형법 제221조 제3항이 형법 제217조의 “예외”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나도 이를 인정한다. 즉, 입법자가 신중히 고려하여 형법 제221조 제3항에서 중한 형벌을 선택하였고, 형법 제217조 제2항과는 반대로 덜 중한 사안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경우라면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므로, 가치평가와 형벌 사이에 편차가 생기고, 이는 외부적으로 보아도 불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부의(!), 형법전의 “가치체계”에 비추어 보아도 모순이다. 따라서 라이히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가치의)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다.

367) 시사하는 바가 많은 민사적 사례로는 Larenz, Methodenlehre, S. 335 f.

368) 이에 반대하여 Canaris(Systemdenken, S. 118)는 형법 제217조와 제221조에 내재하는 평가모순이 (argumentum a fortiori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는바, 이는 사실상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라 본다. 같은 취지로 Schönke/Schröder-Eser, § 221 Rn. 13.

369) 위와 같은 의미에서 찬성하는 견해로는 또한, Canaris, Systemdenken, S. 120. 그는 평가모순을 제거함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일반적으로 긍정한다(S. 119 ff., 126 ff.). 그러면서도 가치(원칙의) 모순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나의 견해에는 반대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평등원칙의 침해가 문제로 된다면, 법률가는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방법론적인 무기”를 동원하여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S. 116; 또한 S. 125 ff.). 덧붙여 Ch. Degenhart, Systemgerechtigkeit und Selbstbindung des Gesetzgebers als Verfassungspostulat, 1976.

370) 해석을 통한 평가모순의 제거에 관하여는 또한, Canaris, Systemdenken, S. 116 ff.; Larenz, Methodenlehre, S. 335 f.

371) 또한 Esser, Grundsatz, S. 80f., 158 f.; Keller, S. 123 ff.; R. Alexy, Theorie der Grundrechte, 2. Aufl. 1994, S. 77 ff.; Rehbinder, Rechtswissenschaft, S. 178 ff. 참조. Canaris(Systemdenken, S. 115 f.)는 법질서의 단일성을 훼손하는 진정한 원칙의 충돌과 위 단일성의 의미 안에서 “타협”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는 “원칙의 충돌”을 구분하려고 한다. 원칙의 대립의 실례로서 그는 우리 상속법에 내재하는, 유언자유의 원칙과 최근친자는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족법의 원칙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유류분청구권으로 조정되고 있다(S. 53). 양자의 구별에서 중요한 것은, 입법자가 스스로 원칙의 충돌을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고자 하였는지 하는 점이고, 반면 진정한 원칙의 충돌에 있어서는 충돌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법률가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살펴보아야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을 제거할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이다. 개별 사례에서 “대립” 또는 “충돌”이 존재하는지는 쉽게 판단될 수 없다. “원칙의 충돌”에 있어 다양함을 이 책에서도 인정한다.

372) 이에 관하여 1958년 형법 총칙안 이유서, 4쪽 이하. 또한 1962년 형법안, 96쪽 이하, 142쪽; Arthur Kaufmann, Das Schuldpribzip, 2. Aufl. 1976, S. 212 ff.

373) 이에 관하여 G. Radbruch, Vorschule der Rechtsphilosophie, 3. Aufl. 1965, S. 24 ff.(32 f.).

374) M. E. Mayer, Rechtsphilosophie, 1922, S. 82. 개별적 정의의 문제에 관하여는 Engisch, Idee, S. 199 ff.; Henkel, Recht.

375) 예컨대 Radbruch, Vorschule, S. 32 f.

376) Canaris는 내가 특별히 지적한 원칙의 충돌을 일반적으로 가치평가의 충돌로 이해하고 있는바, 이에 대하여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가치평가와 원칙의 충돌을 회피하고 배제할 가능성을 하나로 다루고 있다. 거기서 그는 내가 여기서 취하는 입장보다 더 모순제거를 위한 노력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이에 관하여는 위 363쪽 주 87 이하 참조.

377) 그 좋은 예가 W. Stimpel, Richterliche Rechtsfortbildung im Personengesellschaftsrecht, in: R. Pehle/W. Stimpel, Richterliche Rechtsfortbildung, 1969, S. 15(22 ff.).

378) 이에 관하여는, Engisch, Einheit, S. 84 ff.; Fraenkel, Universitas 15(1960), 1205 f.

379) Wengler, JR 1949, 67. 또한 예컨대, Sax, S. 86 f. Anm. 1. 여기서 우리는 비교법의 특별한 방법론적 문제에 관하여 살펴볼 수 없으므로, 벵글러의 논문은 비교법이 어떻게 이론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그 유형과 방식을 위한 참고자료로서 거론될 수 있다. 이중 후자에 관하여는 또한, Binder, S. 935 ff.; H.-H. Jescheck, Entwicklung, Aufgaben und Methodik der Strafrechtsvergleichung, 1955; Esser, Grundsatz, S. 28 ff., 346 ff.; W. Fikentscher, Methoden des Rechts in vergleichender Darstellung, Bd. I-IV, 1975-1977; K. Zweigert/H. Kötz, Einführung in die Rechtsvergleichung auf dem Gebiete des Privatrechts, 3. Aufl. 1996; Wolff/Bachof/Stober, § 28 Rn. 59(“비교론적 해석”).

380) 이에 관하여 판결사례로는 Wengler, JR 1949, 74 Anm. 54 ff.

381) 이에 관한 문헌으로는 176쪽 이하 주 50. 또한 J. Schmidt-Salzer, Vorkonstitutionelle Gesetze, verfassungskonforme Auslegung und ungeschriebene unbestimmte Rechtsbegriffe, DÖV 1969, 97(그 좋은 사례와 함께), 및 BGHSt 13, 102(117),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과 함께: “해석은 법률의 전체적 규정이 가능하면 하나의 모순 없는 전부로서 종합되어지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종전 조문이 입법자가 결부시킨 것으로 알려진 종래의 의미로는 새로운 상위 규정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 문언에서 새로운 규정과 모순하지 않는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에는 그 의미에서 이를 해석하는 것이 허용된다.” 최소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 경우 해석 이상이 작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법을 새로운 전체 법질서(신헌법)에 적응시키기 위한 법형성작용.

382) BVerfGE 3, 225. 또한 BGH-Gutachten, JZ 1954, 152.

383) BVerfGE 3, 225(237, 247). 또한 BGH-Gutachten, JZ 1954, 152. 사법권의 한계로서 권력분립의 원칙에 관하여는 또한 Hirsch, JR 1966, 339가 감명 깊게 지적하고 있다.

384) W. Apelt, Verfassung und richterliches Prüfungsrecht, JZ 1954, 401; H. Nawiasky, Positives und überpositives Recht, JZ 1954, 717.

385) Bachof, Verfassungsnormen, S. 27 ff., 42 ff., 45 ff.

386) 이에 관하여는 Bachof, Verfassungsnormen, S. 45.

387) 여기서 제기된 문제에 관하여 상세한 것은 Engisch, Suche(m.w.N.). 또한 Henkel, Rechtsphilosophie; Zippelius, Gerechtigkeit; ders., Rechtsphiosophie(m.w.N.).

388) 이하 서술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극단적인 충돌의 사례에 국한한다. Larenz, Methodenlehre, S. 413 ff.에서는 “초법률적 법형성”, “법률을 초월하는(extra legem)”, 또한 “법률에 반하여” 하는 그러한 방법론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389) 이에 관한 지적으로는 Heck, Gesetzesauslegung, S. 198 Anm. 305; M. Rümelin, Erlebte Wandlungen in Wissenschaft und Lehre, 1930, S. 42 Anm. 2; Enneccerus/Nypperdey I 1, § 59 I 1. 또한 위 296쪽 주 66이하와 함께.

390)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Heck, Gesetzesauslegung, S. 196 ff.

391) 무엇보다도 Heck, Gesetzesauslegung, S. 141 f., 145 f.(m.w.N.), 211; 덧붙여 (개개의 사례와 더불어) Keller, S. 34, 37; K. Roth-Stielow, Die Auflehnung des Richters gegen das Gesetz, 1963, S. 81 f.

392) 예컨대 프라이부르크 고등법원은 이러한 단계에서 움직였다, NJW 1952, 887. 이는 법률에 반하는 정정의 문제 이전에 위치한다.

393) 이외에도 BGHZ 13, 360 참조. 이와 같은 판결에 관하여는 Roth-Stielow, S. 125 ff.; Larenz, Methodenlehre, S. 393 f.

394) Th. Zimmermann, Die höchstrichterliche Rechtsprechung zur Berichtung der Gesetze, NJW 1952, 959(그는 부분적으로는 정정하는 법발견을, 부분적으로는 흠결의 보충에 관하여 언급한다); Larenz, Schuldrecht I, S. 585 Anm. 30(“‘목적론적 연역’에 의한 법형성”). 또한 본문 아래 391쪽 이하 참조. Esser(Vorverständnis, S. 117 Anm. 2)는 심지어 해석, 흠결보충과 법의 형성의 구별이 “정의될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또한 같은 곳 S. 174 ff.).

395) Reichel, S. 142(이에 관하여 아주 감명 깊은 정당화는 S. 139 ff., 이 원칙의 한계는 S. 144).

396) Belling, in: FS Heck u. a. (1931), S. 14. 또한 Rümelin, S. 44 ff., 물론 그는 낡은 법률과 새로운(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결이 있는) 법률 사이에 구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전자와 관련하여서만 필요한 경우 법관에게 법률과 달리 판결할 권한이 있다고 한다.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427에서는 “법적 긴급상황”을 언급한다.

397) 이에 관하여 Bockelmann, in: FS Smend(1952), S. 30 f.

398) 국민사회주의 하에서 이러한 전개에 관하여는 Bockelmann, in: FS Smend(1952), S. 34 f. 또한 국민사회주의 하에서 법실무에 관하여는 B. Rüthers, Die unbegrenzte Auslegung, 4. Aufl. 1994. 당시의 정치적 국가 지도이념에 마주하여 그저 별 생각 없이 복종하는 자세로 형법조항을 적용하였던 가장 극명한 실례로는 – 문자 그대로 “문언”과 심지어 근본 목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 “방위군을 동요시키는” 발언과 관련하여 “공개성”이란 개념을 확대 적용한 경우이다. 이에 관하여는 아마도 BGHSt 3, 110(117 f.): “행위자가 자기 발언을 한 (개개의) 상대방이 침묵할 것이란 점에 대하여 확실한 보장을 하지 못하고 이를 전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자가 그러한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를 인용하였는지를 확정할 필요 없이 공개성의 요건이 충족된 것이라 하여 전쟁시 특별 형법규정(KSSVO) 제5조 제1항을 적용하는 것은 모든 대표될 만한 법률해석에 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언”을 무시하는 “동적인” 법적용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본다.

399) Reichel, S. 129.

400) 이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다소 신중한) 예컨대, S. 48 ff.; Larenz, Methodenlehre, S. 368 f.; Maunz/Dürig-Herzog, Art. 20 Rn. 49 ff. m.w.N.; Maunz/Zippelius, § 13 III 4 b; Hesse, Rn. 195(“‘법’에 근거하여 ‘법률’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거부하고, BVerfGE 34, 269에 반대한다).

401) 대표적으로는 BVerfGE 3, 225(“명백한 정의의 한계를 침해”한 경우); BGH-Gutachten, JZ 1954, 152. 또한 BVerfGE 23, 98.

402) Radbruch, Rechtsphilosophie, S. 345; 또한 BVerfGE 3, 225(232 f.).

403) 이러한 명제와 관련하여 보다 상세한 논의로는, E. Schmidt, Gesetz und Richter, 1952, S. 12 ff.; Roth-Stielow, S. 36 ff.; G. Grünwald, Zur Kritik der Lehre vom überpositiven Recht, 1971; Ebsen, S. 55 ff.(비판적임); Heusinger, S. 105 ff.; Henkel, Rechtsphilosophie, S. 563 ff.; Larenz, Methodenlehre, S. 426 ff.(“법적 긴급상황”이란 사고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라렌쯔는 부정당한, 부도덕한, 자연법에 반하는 법률 외에 다른 경우도 포함하여 “초법률적인” 법관에 의한 법형성의 분야에서 이를 함께 다루고 있다); Coing, S. 231 ff.(m. w. N.);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6 IV-VI; 또한 (라드부르흐와 관련하여서는) Kaufmann, Grundprobleme, S. 41 ff., 153 ff.; H. Lecheler, Unrecht im Gesetzesform?, 1994; F. Salinger, Radbruchsche Formel und Rechtsstaat, 1995 등 참조. 판결로는, BGHSt 2, 234(237) 참조; 특히 BVerfGE 23, 98(106): “법과 정의는 입법자가 전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방헌법재판소는 국민사회주의적 법조항이 정의의 근본적 원칙들에 명백히 반하여 이를 적용하는 법관이 법 대신에 불법을 선언해야 할 경우에는 그 효력을 부정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오늘날 자연법의 논의와 관련하여서는, 예컨대 Schmidt, Gesetz, S. 14 ff.; H. Weinkauff, Der Naturrechtsgedanke in der Rechtsprechung des Bundesgerichtshofs, NJW 1960, 1689; E. Linsmayer, Das Naturrecht in der deutschen Rechtsprechung der Nachkriegszeit, 1963; W. Maihofer (Hg.), Naturrecht oder Rechtspositivismus?, 1966; Fikentscher III, S. 332 ff. m. w. N.; Henkel, Rechtsphilosophie, S. 502 ff. m. w. N.; Höffe, S. 88 ff.; Coing, S. 31 ff., 198 ff., 231 ff.; G. Ellscheid, Das Naturrechtsprobleme, in: Arthur Kaufmann/W.Hassemer (Hg.), Einfü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und Rechtstheorie der Gegenwart, 6. Aufl. 1994, S. 179; Kaufmann, Grundprobleme, S. 22 ff.;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6 VI, 12 m. w. N. 법관이 어떤 법률 조항의 적용을 배제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예컨대 낙태조항과 같이 그 법률적 규정이 단순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404) 예컨대, Hirsch, JZ 1966, 334.

405) 입법자의 동기착오의 개념에 관하여는 Zimmermann, NJW 1952, 959; Bender, JZ 1957, 595, 600.

406) 이에 관하여는 위 221쪽 이하. 이런 의미에서 Enneccerus/Nypperdey I 1, § 59 II u. Anm. 10(“제한”, 그러나 제한적 해석은 아님, “사고를 낫게 하는 것이지 표현을 낫게 하는 것은 아님”)는 옳다.

407) 이는 아마도 헥의 입장인 듯하다(Gesetzesauslegung, S. 138 ff., 156 f., 195 ff., 208 ff.). 이에 관하여는 Kallfass, S. 95 ff. 덧붙여 G. u. D. Reinicke, Die Ausfüllung primärer und sekundärer Gesetzeslücken nach der Rechtsprechung des Bundesgerichtshofs, NJW 1952, 1153(1156); 부정적으로는 Enneccerus/Nypperdey I 1, § 59 II.

408) Zimmermann, NJW 1952, 959에서는 “입법자에 의하여 명백히 간과된 경우”라 하고, 판결의 의미를 가장 가까운 것을 적용한 흠결보충이라 보고 있다. 결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Larenz도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목적론적 연역”의 경우로, 다시 말해, “내재적인 법률의 목적에 맞추어” 법률의 규율을 위하여 “의미합치적으로 요구되는 한계”를 부가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Methodenlehre, S. 391, 393 f.; 또한 위 335쪽 주 48 참조).

409) 흠결보충과 법률정정의 불가분성에 관하여는 예컨대, Heck, Gesetzesauslegung, S. 205 f. 덧붙여 “점진적 법발견”(위 326쪽 주 37 참조)에서의 여러 “단계” 사이에 한계의 유동성에 관하여는 210쪽 주 47 제5항 및 Larenz, Methodenlehre, S. 366 ff.(367 Anm. 1 m.w.N.).

410) Heck, Gesetzesauslegung, S. 51.

411) Zimmermann, NJW 1952, 960. 또한 Engisch, Einheit, S. 86 f. Anm. 2 m. w. N.; Enneccerus-Nipperdey I 1, § 59 I 2; 최근 문헌으로는, 본문 386쪽 이하 주 120 참조.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과 비슷하게 카나리스(Canaris)(Systemdenken, S. 106 ff.)는 “쳬제에 부합하는” 법발견과 초월적인 “실질적 정의”의 관점에 입각한 법발견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고 본다. 그는 노동법에 있어 소위 (피용자에 대한) “구상행위(schadensgeneigter Tätigkeit)”의 문제를 다루면서(S. 107) 위와 같은 구분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분에 있어서는 “법창조”라는 흔히 쓰이는 개념의 광의성 및 다양성과 관련하여(카나리스는 “창조적” 해석에서부터 일반조항의 구체화 및 흠결보충을 거쳐 모든 유형의 법의 오류정정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항상 주의를 요한다. 법률의 어떤 조항이 부정당하다거나 도덕에 반한다거나 자연법에 반한다는 이유로 법원이 그 적용을 거부하는 문제는 언제나 “법형성”의 특별한 경우라 할 것이다.

412) Zimmermann, NJW 1952, 960. 또한 Bender, JZ 1957, 601.

413) 이미 175쪽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위 법원칙과 관련하여 연혁적, 비판적으로는, H. Krause, Gessante causa cessat lex, ZS der Savigny-Stiftung f. Rechtsgeschichte, Kanonist. Abt. 46 (1960), 81. 크라우제는 위 법원칙이 로마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교회법(Kanonistik)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 그는 19세기 위 원칙이 폐기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승인 받기 시작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관하여는 또한 H. Hagg, Die Stellung des 19. Jahrhuderts zum Wegfall des Gesetzesgrundes, 1966 참조. J. Kohler와 L. Kuhlenbeck에 의해 위 법원칙이 다시금 “고시(告示)(Vorbote)”(Hagg, S. 76 ff.)로 승인되면서부터, 예컨대 Reichel(S. 135 ff.) 등도 사실관계의 변화로 법률의 근본적 이성목적이 더 이상 달성될 수 없을 때는 그 법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그러나 근본적인 관점에 오류가 있는 경우일지라도 효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위 법원칙의 최근 문헌으로는 Löwer 참조. “Tonbandurteil”(BGHZ 17, 266)이 위 법원칙에 입각하였다 함은 위 175쪽 주 49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 뒤 여러 판결, 예컨대 “Fotokopieurteil”(BGHZ 18, 44) 등이 위 판결을 인용하였다; 위의 사례는 1965. 9. 9. 저작권법에 규율되었다. 위 법원칙의 적용의 한계에 관하여는 Canaris, Lücken, S. 189 ff. 참조; 카나리스는 여기서(S. 89 ff.) (법의) 이성을 법률조항의 적용을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를 확대적용하기 위한 것으로서 소위 “목적론적 확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397 ff.; Pawlowski, Rn. 497 ff.; 부정적으로는 Bydlinski, S. 475 참조. 위와 같은 목적론적 확장은 어의의 가능한 뜻을 존중하는 해석과 유추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다.

414) 그 각각의 근거와 관련하여: Unfallrentenurteil(BGHZ 4, 153)에서는 목적론적, 제한적 해석을(391쪽 주 124와 함께 Bender, JZ 1957, 594 참조), Tonbandurteil(BGHZ 17, 276)에서는 “법률의 의미와 목적에 따른 해석”을 각 수단으로 정당화하고 있고, Fotokopieurteil(BGHZ 18, 49, 53)에서는 “법률의 의미와 목적”에 부합하는 제한적 해석을 언급하고 있으며, Herrenreiterfall(BGHZ 26, 355 f.)에서는 민법 제847조 소정 (영업 활동의) 자유의 개념을 “유추의 방법으로” 자신의 초상을 “자신의 결정에 따라 처분할” 자유에까지 확장하고 있다.

415) 예컨대 Tonbandurteil과 관련하여 Larenz, Methodenlehre, S. 380(연방대법원이 주장한 것처럼 “제한적 해석”이 아니라 “목적론적 연혁”에 의해 “사후에 드러난 숨겨진 흠”을 보완하는 것이다) 참조; 또한 Herrenreiterurteil은 그 뒤 나온 Kukidenturteil(BGHZ 30, 7)이나 Ginsengurteil(BGHZ 35, 363) 등 다수 판결에서는 다소 주춤하였는바, 이와 관련하여 Larenz, Methodenlehre, S. 425 f.(Herrenreiterurteil에서 연방대법원은 “당시 입법자의 가치평가를 부당한 방법으로 뛰어넘으려” 시도하였다; 이는 “법률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법률을 초월한 법형성”이다); 또한 예컨대 M. Löffler, Die Grenzen richterlicher Rechtsfindung beim immateriellen Schadensersatz, NJW 1962, 225; P. Hartmann, Persönlichkeitsrecht und Schmerzengeld, NJW 1964, 793(796 ff.) 참조.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 뒤의 판결들(NJW 1963, 902 f., 904 f.)에서는 낡은 조문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법형성의 의도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만 연방헌법재판소가 Soraya 판결(BVerfGE 34, 269)에서 민사적 판결에서도 합헌성의 원칙을 강조한 이래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소 가라앉았다 할 수 있다; Larenz(Methodenlehre, S. 426)는 단념한 듯 “관습법의 효력”을 인정하고 있다.

416) I. Kant, Prolegomena, Werkausgabe, Bd. V, hg. v. W. Weischedel, 7. Aufl. 1988, S. 252(A 204).

417) G. Radbruch, Der Geist des englischen Rechts, 1946, S. 43 ff. 이외에도 K. N. Llewellyn, Präjudizienrecht und Rechtsprechung in Amerika, 1932; W. Fikentscher, Methoden des Rechts in vergleichender Darstellung, Bd.II, 1975, S. 58 ff.; G. Williams, Learning the Law, 10. Aufl. 1978, S. 62 ff.; Zweigert/Kötz, S. 250 ff. m. w. N.; Will, in: R. David/G. Grasmann, Einführung in die großen Rechtssysteme der Gegenwart, 2. Aufl. 1988, Rn. 352 ; D. Heinrich, Einführung in das englische Privatrecht, 2. Aufl. 1993, 15 ff.

418) Radbruch, Geist, S. 34 f. Schmitthoff, JZ 1967, 1(3)에서는 1966년 이후 “최고법원(House of Lords)”은 장래 “일반적으로 선례의 구속을 받지만 이와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선례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419)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우에는 법원의 판결은 오로지 구체적 사례에 대하여서만 구속력이 있다. 여기서 판결은 판단된 사안에서 관련 소송당자자에 대하여서만 “기판력”을 지닌다. 이와 달리 판결은 동일한 다른 사안에서는 그 판단으로 법원을 구속하지 못한다. 이점은 특히 특별한 구속력을 갖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을 제정하는 효력까지 있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헌법재판소법 제31조 참조. 또한 예컨대, Alex, Grundrechte, S. 5404 ff.; Maunz/Zippelius, § 41 VIII 3). 반면, 우리 법원이 선례,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법원의 판례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 Schneider, Logik für Juristen, 1. Aufl. 1965, S. 349에서는, 최고법원의 판례를 간과한 변호사의 손해배상책임,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최고법원의 판례에 따라야 할 책무, 그리고 최고법원의 기존 판례를 무시하였을 때 상급심에서 판결이 취소될 위험성 등을 지적하면서 “선례의 독재성(Diktatur des Präjudizes)”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크릴레는 “판례의 선례적 구속력“을 인정하면서” “영미법계와 대륙법계의 법률실무에 있어 차이점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인정하여왔던 만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S. 245). 사람들은 점차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실무가 선례를 존중한다는 것은 단지 주목할 만한 법사회학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최고법원으로서 권위가 있기 때문이고, 이는 “법원의 관행”이 관습법으로 고양된 데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Germann, S. 227 ff.(244 ff.); Esser, Vorverständnis, S. 184 ff.(선례는 “본래의 법원(法源)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법적 견해의 안정과 통일을 위하여 보다 분명한 가치” 내지는 “유익한 논의에서의 합리성과 사회적 상당성을 위한 확실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S. 184 f.); H. W. Kruse, Das Richterrecht als Rechtsquelle des innerstaatlichen Rechts, 1971; Fikentscher, Methoden III, S. 728 ff.; Bydlinski, S. 501 ff.(선례의 “부차적 구속력”; 마찬가지로 Larenz/Canaris, Methodenlehre, S. 257 ff.); Larenz, Methodenlehre, S. 429 ff. m. w. N.(“올바르다”는 것을 전제로 “법인식의 연원”으로서 선례; 정당성은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 S. 432); R. Riggert, Die Selbstbindung der Rechtsprechung durch den allgemeinen Gleichheitssatz(Art. 3 I GG), 1993, S. 23 f. m. w. N.; Ch. E. Ziegler, Selbstbindung der Dritten Gewalt, 1993, m. w. N.; Zippelius, Methodenlehre, S. 74 ff.

420) 예컨대, E. Schmidt, Lehrkommentar zur StPO und zum GVG, Teil 3, 1960, § 121 Anm. 33. 이에 관한 실례로는, BGHSt 7, 314.

421) 본문의 부족한 설명을 보완하기 위하여, Fikentscher(Bd. II)의 영미법에서 사례법의 방법론에 관한 구절이 참고될 만하다. “영미법의 방법론의 요점”은 “엄격 구속(stare decisis)”의 원칙, 요컨대 “선례에 합리적 근거가 있을 때에는 항상 선례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에 있다(S. 83). “영미법에서 선례(precedent fall)라 함은 앞으로 계속될 사안에서도 판단의 규준이 되는 그러한 사례를 말한다”(S. 81). “모든 하급법원이 다른 하급법원의 모든 판단에 구속된다고 말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오히려 원칙적으로는 같은 법원과 상급법원과의 관계에서 엄격 구속의 의무가 존재한다”(S. 83). 선례는 “그 자체 속에 일정한 원칙이 있는”, 다시 말해 합리적 근거가 있는 그런 법적 판결이다(S. 81). 이러한 합리성을 조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렵다”(S. 82). 바로 이러한 합리성이 “선례가 실질적 법에 기여하는 부분을 설명하는 부분이다”(S. 86). 이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하나는 사안이 그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규칙이다(그렇지 않으면 사안은 다르게 판단되어야 한다; 소위 “고전적” 공식). 다른 하나는 그것이 “선례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규범”이란 것이다(S. 86 f.). “합리적 이유란 법관이 법적 판단을 함에 있어 본질적 근거가 된다고 본 것을 말한다”(S. 90). “방론”은 이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법적 사고를 전개함에 있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덧붙임”을 말하지만(S. 91), “장래의 사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S. 92). 만약 법원이 어느 특정한, 비슷한 사례에서 “선례”와 다르게 판단을 하고자 한다면, 앞서의 판결이유가 틀렸다거나 새로운 사례의 사안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두 사례의 법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구별이 된다는 점”, S. 95). “사례의 차이점”으로서 “구별이 된다는 것(distinguishing)”은 “선례를 단숨에 거절하는 것”으로서 “거부하는 것(overruling)”과는 다르다(S. 96). 후자는 특별한 경우에만 고려된다(S. 106, 110 f.). 반면, 새로운 사례를 앞서 판단한 사례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두 사례 사이에 사실상 차이점이 없다거나 차이가 있더라도 “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 근거한다(S. 97). “구별이 된다는 것”과 “거부하는 것”의 자세한 점은, S. 98 ff., 105 ff.
“판결이유”와 “방론”의 기본개념을 독일 판례 중 한 예를 들어 분류해보기 위하여, 본문 336쪽 이하에서 취급한 금지착오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판례(BGHSt 2, 194)를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 “행위자가… 불법을 한다고… 인식하였거나 양심에 응분의 주의를 기울였다면 인식할 수 있을”(S. 194) 결과에 이른 경우에 있어 판결이유는, 형벌은 책임과 함께 “비난가능성”(S. 200)을 전제로 한다라는 원칙이다. 이에 반하여 연방대법원(S. 211)이 그 “사안에서 행위자가 착오로 정당화 사유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므로(예컨대, 수술에 대하여 환자의 동의가 있었다고 잘못 믿었으므로) 자신의 행위가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부연하여 설명한 부분은 “방론”에 불과하다. 요컨대, 이 경우 “사실의 착오”(또는 정당화사유의 착오) 또는 (대부분이 믿는 것처럼) “금지착오”가 인정되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표명한다는 것은 연방대법원의 분명한 설시에 의하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행위자가 “사태”의 발생에 관하여(법적 상황 그 자체에 관하여서가 아니다) 착오를 일으켰으므로, 본래의 “금지착오”의 경우와는 “다른” 입장에 처해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방론”은 – 영미법에서 사례법의 관점으로 보아 – 나중의 판단에서 위와 같이 부연하여 언급된 착오사례의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떤 구속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422) 역시 “Tonbandurteil”(BGHZ 17, 266(275 f.))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23) 헥의 주요저서로는, Das Problem der Rechtsgewinnung, 2. Aufl. 1932; Gesetzesausleg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14; Begriffsbild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32; Interessenjurisprudenz, 1933; Die Interessenjurisprudenz und ihre neuen Gegner, 1936; Rechtserneuerung und juristische Methodenlehre, 1936; Rechtsphilosophie und Interessenjurisprudenz, AcP 143(1937), 129. 이외에도 헥이 자기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Grundrisse des Schuldrechts, 1929, und des Sachenrechts, 1930 참조.
이익법학의 발전과 의미에 관하여는, K. Engisch, Interessenjurisprudenz und Strafrecht, Monatschrift f. Kriminalpsychologie 25(1934), 65; H. Hubmann, Grundsätze der Interessenabwägung, AcP 155(1956), 85; Edelmann; Wieacker, Privatrechtsgeschichte, S. 574 ff.; Kallfass; G. Ellscheid/W. Hassemer(Hg.) Interessenjurisprudenz, 1974; Fikentscher III, S. 3783 ff.; Henkel, Rechtsphilosophie, S. 309 ff.; P. Speiger, Interessenjurisprudenz in der deutschen Rechtsprechung, 1984; Larenz, Methodenlehre, S. 49 ff.; Coing, S. 48 ff.;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9.

424) 실증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헥의 이익법학을 독립시킨 것에 관하여는, Larenz, Methodenlehre, S. 51 f. 참조.

425) 이에 관하여는 Kallfass, S. 87 ff.

426) 이에 관하여는 무엇보다도 Heck, Begriffsbildung, 1932; 또한 H. Stoll, Begriff und Konstruktion in der Lehre der Interessenjurisprudenz, in: FS f. Ph. Heck u. a. (1931), S. 60; Kallfass, S. 79 ff. Esser, Grundsatz, S. 236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독일 개념법학의 자기성토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반대하는 (이익법학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개념법학”은 무엇보다도 헥이 설명한 특정한 의미(“Inversionsmethode”; Heck, Begriffsbildung, S. 92 ff.)에서의 개념법학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기 바란다. 다른 유형의 개념법학에 관하여는, Engisch, in: Dt. Landesreferate, 5. Int. Kongreß f. Rechtsvergleichung(1958), S. 62 f.; Larenz, Methodenlehre, S. 53 ff., 165 ff. 19세기 개념법학의 의미변화에 관하여는, Edelmann, S. 26 ff.

427) J. H. Hillebrand, Deutsche Rechtsprichwörter, 1858, S. 74(Nr. 101)에서 인용. 고대 독일법이 당시 –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않았더라도 – 이익사정을 평가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관하여는, Heck, Sachenrecht, § 58 I 3 참조.

428) Heck, Sachenrecht, § 59. 근대에 있어 선의취득의 정당성에 관하여는, 예컨대 F. Baur/R. Stürner, Lehrbuch des Sachenrechts, 16. Aufl. 1992, § 52 I 2.

429)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앞서 133쪽 이하에서 언급된 사례와 방금 여기서 언급된 사례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앞에서 언급된 사례에서는 국고가 “점유를 상실한” 물건의 문제였고, 취득자의 선의도 처분한 사람(말 취급장교)의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고 소유의 물건을 처분할 수 있다는 권한(“처분권한”)에 관한 문제였다.

430) Heck, Sachenrecht, § 58 III 3. 또한 BGHZ 10, 69 및 Baur/Stürner, § 52 III 1 c 참조.

431) 튀빙거 학파에 있어 흠결취급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Kallfass, S. 37 ff.

432) 이에 관하여는 Müller-Erzbach, S. 64 f., S. 87 f.

433) 이전의 저서를 총괄함과 함께 Müller-Erzbach, S. 137. 또한 Hubmann, AcP 155(1956), 91 ff.; Edelmann, S. 88 ff.; K. Knauthe, Kausales Rechtsdenken und Rechtssoziologie, 1968. Hubmann은 이익평가와 “충돌의 해결”을 위하여 규준이 되는 관점들(이익의 힘과 범위, 권리외관, 우월성, 책임 등등)을 근본적으로 다루면서 이익법학의 “토픽” 요소들을 제공하였다.

434) 평가의 개념에 관하여는 244쪽 이하 주 14 참조.

435) Müller-Erzbach, S. 75(또한 S. 84 ff.).

436) 여기서는 또한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관여한다. 초반의 소개서로서는, H. Henkel, Ideologie und Recht, 1973; ders., Rechtsphilosophie, S. 142 ff.(m. w. N.); Coing, S. 55, 102 ff.;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17 I. 마찬가지로 “정치적 유토피아”란 것이 이념으로서 등장하기도 한다. 이상적 공동체의 가상계획안으로서 정치적 유토피아는 기존 사회에서 비판적으로 소외된 이익을 고려하고 공동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다. 유토피아의 개념과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이 갖는 기능에 관하여는, R. Saage, Das Ende der politischen Utopia?, 1990, S. 13 ff.; D. Otto, Das utopische Staatsmodell von Platons Politetia aus der Sicht von Orwells Nineteen Eighty-Four, 1994, S. 139 ff., 292 f. m. n. W.

437) 이에 관하여는, Müller-Erzbach, S. 79 ff.; Engisch, Idee, S. 105 ff. 헥에 있어서 이익과 평가의 관계와 그에게서 마주치는, 평가의 대상, 규준 및 인과적 요소로서 “이익”의 다의성에 관하여는, Henkel, Rechtsphilosophie, S. 318 f.; Larenz, Methodenlehre, S. 52 f., 119 ff.

438) 이에 관하여는, Engisch, Monatsschrift f. Kriminalpsychologie 25(1934), 70 ff.(m. w. N.); Hubmann, AcP 155(1956), 90.

439) H. Coing, System, Geschichte und Interesse in der Privatrechtswissenschaft, JZ 1951, 481(485). 또한 Henkel, Rechtsphilosophie, S. 318 ff. 그러나 또한 Kallfass, S. 16 ff. Anm. 56, S. 93.

440) 이점을 강조한 것으로는 Jesch, AöR 82(1957), 176 f., 182 f. 또한 Hanack, S. 114 ff.

441) 이에 관하여는, Müller-Freienfels, JZ 1957, 685. 구체적 법률을 적용하기 위한 거의 모든 사례가 나름의 사실적, 법률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법관 또는 행정공무원이 본래는 창조적으로 구체적 법을 발견하고 형성하는 것과 같다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합법률성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사법의 실무는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법률 적용의 대부분은 별 의심 없이 완수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컴퓨터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442) 이에 관하여는, Engisch, Idee, 1953, S. 181 ff.(Anm. 18 m. w. N.). 또한 예컨대, Schmidt, Gesetz; G, Less, Vom Wesen und Wert des Richterrechts, 1954; Wieacker, Gesetz; Bachof, Grundgesetz. 그외 법관법과 관련하여 (특히 새로운) 문헌으로는, 231쪽 주 1. 참조.

443) J. Llompart, Gesetz dem Juristen, Recht dem Rechtsphilosophen?, JZ 1970, 273.

444) 토픽에 관하여는, Th. Viehweg, Topik und Jurisprudenz, 5. Aufl. 1974. 또한 G. Otte, Zwanzig Jahre Topikdiskussion, Rechtstheorie I(1970), 183; G. Struck, Topische Jurisprudenz, 1971; Fikentscher III, S. 349 ff. m. w. N.; Kriele, S. 114 ff.; Canaris, Systemdenken, S. 135 ff.; Alexy, Argumentation, S. 39 ff.; Bydlinski, S. 141 ff.; Larenz, Methodenlerhre, S. 145 ff. m. w. N.; Mayer-Maly, S. 69 ff.; Pawlowski, Rn. 143 ff.; ders., Rechtsphilosophie, § 39 II m. w. N.

445) Aristoteles, Topica, übers. v. E. S. Forster, 1966, Top. 100 b. Viehweg, S. 19 ff. 참조.

446) G. B. Vico, De nostri temporis studiorum ratione, hg. v. G. Gentile/F. Nicolini, 1914, Kap. III(S. 81 ff.). Viehweg, S. 15 ff. 참조.

447) Kant, KdRV, S. 104 ff.(A 61 ff.), S. 291(A 268 f.). Viehweg, S.. 40 f.

448) Viehweg, S. 14.

449) 이에 관하여는, K. Engisch, Sinn und Tragweite juristischer Systematik, Studium generale 10(1975), 173(175 f.).

450) 이에 관하여는 예컨대, D. Simon, Die Unabhängigkeit des Richters, 1975, S. 68 f.

451) Klug, Vorwort zur 1. Aufl. 한편에서는 법적 논의의 논리적 구조를 철저히 해부하여 밝히려는 측면이 있고(수리의 적용), 다른 한편에서는 법적 논리학이 법인식의 전체적 이론을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다룬다고 하여, 소위 완전히 무기력한 “수학적” 삼단논법의 기법이라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 오늘날 법이론에 있어 가장 커다란 자기모순이다.

452) 예컨대, O. Weinberger, Topik und Plausibilitätsargumentation, ARSP 59(1973), 17(무엇보다도 32 ff.)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정당하다: “논리적, 연역적 사고는 공리적 체계 안에서 기본명제를 이끌어 내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토픽적, 수사학적 사고는 그 자체가 연역적 단계를 포함한다”(S. 33 f.).

453) 이에 관하여는, Engisch, Studium generale 10(1957), 177; Diederichsen, Topisches und systematisches Denken in der Jurisprudenz, NJW 1966, 697; Canaris, Systemdenken, S. 135 ff., 151 ff.

454) (60년대 이후) 법학적 토포이를 종합한 아주 좋은 문헌으로는 Struck, S. 20 ff.가 있는데, 여기서는 토픽 논의를 설명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논문이 함께 붙어 있다. 이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비벡 자신(보정된 제5판에서)의 111쪽 참조.

455) 예컨대 Larenz, Methodenlehre, S. 341 f.; Maunz/Zippelius, § 18 II 2.

456)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Engsich, Suche, S. 232 m. w. N. 또한 예컨대, R. Dreier, Zum Begriff der “Natur der Sache”, 1965; G. Sprenger, Naturrecht un Natur der Sache, 1976; Henkel, Rechtsphilosophie, S. 371 ff.; Kaufmann, Analogie; Naucke, Grundbegriffe, S. 146 ff.; Bydlinski, S. 51 ff.; Larenz, Methodenlehre, S. 417 ff. m. w. N.; Coing, S. 181 ff.; Ellphie, in: Kaufmann/Hassemer, S. 226 ff.; Zippelius, Rechtsphilosophie, §§ 7, 12 V. 판례에 관하여는, Linsmayer, S. 89 ff. 연방대법원은 “Tonbandurteil”(BGHZ 17, 266)에서도 “사물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예컨대, BGH NJW 1963, 902(903); BVerfGE 39, 334(369) 참조.

457) Esser, Grundsatz und Norm, S. 59.

458) N. Horn, Zur Bedeutung der Topiklehre Theodor Viehweg für eine einheitliche Theorie des juristischen Denkens, NJW 1967, 601(607).

459) BGHSt 6, 46. 앞의 281쪽 이하 참조. 이에 관하여 W. Weischedel, Recht und Ethik, 1956, S. 20 ff.; Th. Würtenberger(sen.), Die geistige Situation der deutschen Strafrechswissenschaft, 2. Aufl. 1959, S. 20; Linsmayer, S. 18 ff.
도덕, 법철학적 “상대주의”의 문제에 관하여 항상 기본적으로는, C. A. Emge, Über das Grunddogma des rechtsphilosophischen Relativismus, 1916. 또한 예컨대, Arthur Kaufmann, Gedanken zur Überwindung des rechtsphilosophischen Relativismus, ARSP 46(1960), 553; Kelsen, Rechtslehre, S. 65 ff., 357 ff.(무엇보다도 S. 366), 402 ff.; A. Brecht, Politische Theorie, 2. Aufl. 1976(가치상대주의의 의미있는 항변); Zippelius, Wertungsprobleme; ders., Rechtsphilosophi, §§ 11, 20 II, 21 III; Radbruch, Rechtsphilosophie, S. 98 ff.; Coing, S. 79 ff.

460) 대표적으로 H. J. Wolff, in: FS Jellinek(1955), S. 43 f.; Canaris, Lücken, S. 93 ff.

461) 예컨대, Göldner, S. 23 ff., 26 ff.

462) 이에 관하여 비판적으로는 Engisch, Suche, S. 237 f.

463) 동조하는 의견으로 또한, Larenz, Methodenlehre, S. 245 참조.

464) A. Maschke, Gerechtigkeit durch Methode: Zu Karl Engischs Theorie des juristischen Denken, 1993, S. 2에서 인용; 위 책에서는 칼 엥기쉬의 법이론적 및 법철학적 저서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설명되어져있다.

465) H.-H. Jescheck, Karl Engisch zum 80. Geburtstag, ZStW 91 (1979), 247.

466) H. J. Hirsch, Karl Engisch ✝, ZStW 103 (1991), 623.

 

 

http://blog.daum.net/ichwaringo1977/7106933

 

Advertisements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