퀜틴 스키너의 자유론, 장세룡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

장 세 룡*영남대학교 사학

Ⅰ. 서론 Ⅱ. 마키아벨리의 자유 Ⅲ. 고전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Ⅳ. 자유국가 이념의 성쇠 Ⅴ. 결론

Ⅰ. 서 론

1997년 11월 12일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근대사 흠정강좌(Regius) 교수로 취임하며 행한 강연은, 여러모로 1958년 10월 31일 아이제어 벌린(1909-1997)경의 옥스퍼드 대학 Chichele 강좌 교수 취임 강연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 당시 벌린은 이 강연에서 많은 혼동을 유발하는 용어인 자유에 관한 개념의 본질과 범주를 명료화하기 위해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과감하게 도입하였다. 여기서 벌린은 자유를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로 구분하고, 공동체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역사적 변혁의 실천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폭압적 권위의 정당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비판하였다. 그 반면에 개인의 사생활에 몰두하는 사생활 중심주의(privatization)를 긍정하는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내면적 발전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더 진실하고 인간적인 이상이자 이 시대의 중요한 가치로서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변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내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누리는 것, 한마디로 ‘간섭의 부재’(absence of interference)가 성취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강제적인 ‘폭력 또는 지배의 부재’ 같다. 적극적 자유는 행위의 목적적 수행에 초점을 두고, 소극적 자유는 행위를 위한 기회의 부여에 의미를 둔다. 그 결과 전자는 민주적 참여와 권력의 원천에, 후자는 삶에서 간섭받지 않는 영역의 확보와 권력의 제한에 관심을 쏟는다. 그 후 과연 두 종류의 자유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바람직한지 여부와 특히 소극적 자유 개념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필자는 이를 편의상 맥캘럼으로 대표되는 분석적 비판, 맥퍼슨의 좌파적 비판, 테일러의 고전적 비판으로 구분한다. 맥캘럼은 소극적 자유를 긍정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는 이원론이 아니라 삼원론적 관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즉 누군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x가 a를 행하거나 z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자유에 관한 진술의 기초 논리로서 삼각 관계야말로 모든 자유 개념에 해당된다고 분석하였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에 관한 일관성 있는 진술을 위해서 행위자와 장애물과 목적성이라는 3변수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적 해석이다. 이에 벌린은 억압자에 대해 투쟁하는 사람과 국가의 관계를 예로 들며 이때 자유에 대한 갈망은 비물질적인 것이므로 결코 삼원적 관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맥퍼슨은 자유란 자신의 고유한 주인이 되는 능력, 이성의 제국과 결합하는 능력, 공적 권위의 행사와 통제에 참여하는 권리로 구성된다고 보고 벌린이 자유의 사회적 조건 곧 어떤 경제 체제가 개인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소홀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벌린은 자유에 대한 자연권을 정치사회에서 특정의 경제 체제를 지지하는 것과는 분석적으로 구분한다. 그 이유는 저항권과 비간섭을 추구하는 권리는 어떤 경제 체제에서든 침해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체제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테일러는 벌린이 구분한 자유의 변수가 적극적 자유의 개념에서는 급진화되어 있고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서는 온건화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즉 전자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는 것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도록 강요하는 좌파 전체주의 이론과 연결시키는 반면 후자는 물리적’법적으로 외부적 장애물의 부재로만 정의함으로서 모든 내적 장애물 ― 환상, 허위의식 또는 부조리한 공포 등 ― 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소극적 자유는 어떤 결정적 목표나 목적의 추구와는 무관하고 오직 자유로운 행위의 기회가 존재하는지 여부에만 주목하는 기회(opportunity) 개념인바 도리어 자유는 어떤 결정적 목표의 추구에 참여하는 실행(exercise) 개념으로 볼 것을 제안하였다. 이점에서 테일러는 적극적 자유에 더 호의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자율적 행위와 결합된 어떤 정전적(canonical) 규범 형식이 제공되는 사회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위의 논의들은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개념들의 확장을 위한 철학적 분석에 치중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이에 반하여 철저하게 역사적 입장에서 두 개념의 존립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구가 제기 되었다. 그것이 근대 사상사에서 마키아벨리와 홉스 등의 자유 개념을 축으로 삼아 특히 공화주의 이념의 성쇠와 자유주의 이념과의 상호 삼투 관계를 추적한 스키너의 연구들이다. 여기서 필자는 정확히 40년을 사이에 두고 한 시대의 사상사를 상징하는 인물인 벌린이 고인이 된 바로 그 달에, 한 탁월한 역사가가 자유의 개념에 관한 신중한 제안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라고 판단한다.

Ⅱ. 마키아벨리의 자유

스키너 역시 지금까지 사상사에서 두 가지 자유 개념의 유효성에 일단은 호응하면서 그 개념들이 근대 사상가들에게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에 주목해 왔다. 그 결과 그가 특별히 학문적 공략의 대상으로 주목한 홉스는 물론이고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도 중심적인 자유는 소극적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홉스의 자유 개념이 소극적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고 사상사의 통념이기도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자유 개념이 소극적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통상적으로 시민적 휴머니즘 나아가 공화주의 이념과 연관시키는 사상사의 해석과 결부시켜 판단할 때 이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공화주의 이념은 흔히 적극적 자유의 옹호와 강력한 친화성이 있다고 설명되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키너는 근대 사상사에서 또 다른 자유 개념의 역사 즉 공화주의의 전개와 그와 관련되는 자유의 전망이 출현하는 과정에 많은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므로 취임 강연에서 공화주의적 자유의 개념,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국가와 시민적 자유에 관한 신-로마인(neo-roman) 이론의 전개 과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은 결코 뜻밖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논쟁적인 벌린과 달리 스키너의 논리 전개는 매우 우회적이다. 그는 오직 담담하게 17세기 중반 영국혁명의 과정에서 신로마인 이론이 사상가들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되었던가를 서술 ― 스키너 본인의 말을 인용하면 고고학적 ‘발굴’(excavation) 행위를 ― 하고 있을 뿐이다.(p.112) 그리고 이런 발굴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지루한 반추(ruminate) 과정을 거쳐 마지막 부분에서 벌린의 자유 개념이 표방하는 전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과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성사가의 자세를 논하며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하고 있다.

스키너는 지금까지 자유의 개념에 대한 연구에서 자신의 목적을 현재의 사회 및 정치적 논증에서 채용하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는 데 두어 왔고, 그 전제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들에 내포된 개념들의 일관성에 관해 직관하는 능력을 요청한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거나 친숙하지 않은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검증해보면, 이들이 때로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서 상호 작용하였다는 것을 보충하는 이익을 주리라고 ‘겸손하게’ 기대한다. 사실 사회적 자유를 소극적인 기회 개념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실행 개념으로 생각할 것인가의 문제는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논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특히 인간의 번영(eudaimonia)에 관한 객관적 개념을 확립할 수 있는지, 나아가 과연 합리적인 것이 도덕적인지 묻는 도덕철학의 문제와 관련된다. 스키너는 대체로 이 문제가 적극적 자유론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함축을 선호하는 테일러나 볼드윈의 관점과 친화성을 지닌다. 사회적 자유에 관한 스키너의 전제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연유가 여기 있다. 이 전제를 따르면 첫째 자연주의적 윤리 체계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인간적 목적을 지닌 도덕적 존재이다. 둘째 스콜라 정치철학적으로 인간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본성을 지니므로 우리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이란 전제에서 스키너가 지향하는 자유는 당연히 적극적 자유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벌린과 그를 지지하는 견해가 공동체에 봉사하는 덕성을 지닌 시민의 공공 정신과 자유의 연관성을 폐기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근대 사상사의 한 전통에서 ‘공적 봉사의 덕성’과 ‘개인적 자유’는 오늘날에는 마치 비일관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스키너에게 벌린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은 그 뿌리가 자유를 ‘장애물의 부재’(absence of opposition) 상태로 본 홉스와, 자유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행하거나 금지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로크에 있다. 그리고 홉스 이후의 계약론적 자연권 이론에 나타나는 사회적 자유에 관한 독단주의를 교정하는데 정치적 자유에 관한 마키아벨리-해링턴적인 스토아적 사고방식이 유용하리라 기대한다.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T의무론U을 따라 어느 정도의 개인적 자유의 연속적 보장은 자발적인 공적 봉사에 있다고 보고 개인의 자유는 자유로운 공화정 하의 자치 공동체에서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홉스는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중적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고 주장한바 이는 그후 소극적 자유의 옹호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반복된 견해이다. 또한 홉스는 고전 역사와 철학에서 늘 명예롭게 언급된 자유와 그 영향을 받은 자들의 정치적 저술과 논문에서 언급된 자유는 특정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의 자유’라고 확언하였다.

그러나 스키너가 보기에 이는 홉스가 고전 공화주의가 표방하는 명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신중하게 왜곡하려는 시도였다. 왜냐하면 공화주의의 본질은 국가가 ‘자유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개인적 자유도 박탈당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개인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서 핵심적 요소인 이익과 권리에 바탕 둔 개인적 자유와는 의미가 크게 다르다. 도리어 그것은 시민이 전심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 곧 외부의 힘이 강요하는 굴종에 대해 공동체를 방어하는 투쟁 능력에 의존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모든 시민이 정치체(body politics)의 의결에 동등하게 참여하여, 상층 시민이 민중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러한 공적 봉사를 수행하는 데 시민에게 요청되는 세 가지 자질이 있으니 그것은 자유를 방어하는 용기와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유 정부를 유지하는 덕성 그리고 절제와 질서의 준수이다. 이는 결국 조국과 자유를 지키는데 필요한 자질이며 키케로적인 분별력과 정의, 용기와 절제가 핵심적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전시의 정의와 평화시의 정의를 구분한 것은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다. 마키아벨리의 출발점은 번영이나 인간의 진정한 이익의 문제에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다양한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하도록 촉진하는 ‘기질’에 대한 고찰이다. 스키너는 위와 같은 부분에 대한 논의를 간과한 소극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현재의 논의가 혼동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 권리에 관한 이론이라는 견해인 바 이는 실제로는 독단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고전 공화주의 이론 역시 개인적 자유에 주목하였으므로 자유가 반드시 특정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생각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자유 개념은 벌린식으로 말하면 ― 역설적으로 ― ‘소극적 자유’의 이론이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는 이익에 바탕 둔 개인적 권리의 개념에 대해 특별히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부패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이익과 의무는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비록 공동체에 참여하는 용기와 분별심을 요청받지만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그것을 흔쾌히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인간은 부패하기 쉽다.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부패의 극복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이기적인 시민들이 덕성을 실현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해답은 이기적 행동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강요하는 법률에 있다. 법과 개인적 자유를 연관시키는 계약론이나 고전 공리주의와 달리 고전 공화주의에서 법의 정당화는 개인적 자유의 보존과 무관하다. 법은 단지 자유국가의 제도를 떠받침으로써 그것이 없으면 굴종으로 전락할 일종의 개인적 자유를 창조하고 보존할 것이다. 이때 법의 메커니즘은 시민이 자유로워지도록 덕성의 계발을 강제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스키너의 자유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키너는 공화주의적 자유 이론이 홉스-벌린식의 소극적 자유의 분석과 결합할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회적 의무의 요청을 확대함으로써 진실로 벌린이 목적으로 삼은 ‘사회적 삶의 최소한의 요구와 양립하는 최대한의 비간섭의 영역의 선택’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한다. 스키너가 보기에 현대 자유주의는 이기심과 개인적 권리의 영역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공적 영역이 휩쓸려갈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이의 대안으로 이분법적인 적극적 자유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공적 영역에 책임을 지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는 자유의 실천을 제안한다. 영국혁명기 자유 이념의 대립과 삼투 관계를 설명하는 그의 취임 강연은 바로 이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Ⅲ. 고전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

신로마인 이론의 계보를 추적하며 스키너가 주목하는 상황은 내란이 발발하여 의회파와 왕당파가 주권의 본질적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하던 1642년 이후 시기이다. 이때 파커(Henry Parker)는 국가적 긴급시에 국가와 법의 문제에서 최고의 판결권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원천이며 충족 원인인 주권자 인민의 대표자 의회에 놓여져야 한다는 견해를 천명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에 왕당파는 즉각 왕은 성서에 바탕 둔 주권을 지닌 인격이라고 반격하였다. 이후 헌정 위기가 지속적으로 심화되자 왕당파들에게서 새로운 반론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그것은 주권의 담지자인 군주의 자연 인격은 신체 기관을 지닌 자연 인격이 아니라 국가의 인공 인격이라는 견해로 표현되었다. 이런 견해는 이미 로마법학자들에게 선례가 있었던 것이지만, 근세 자연법학자 특히 T자연법과 만민법U(1670)에서 국가를 복합적 도덕 인격으로 고찰한 푸펜도르프, 그리고 T리바이어던U(1651)에서 국가는 주권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 수행 또는 대표되는 인공 인격으로 규정한 홉스에게서 선명하게 나타났다. 동시에 홉스는 국가권력과 신민의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탐색하였다. 그리고 목적의 추구를 위한 능력의 행사에서 방해받지 않는 것을 자유의 첫째 조건으로 설정하였다.(p.5) 또한 국가의 주요 의무는 동료 시민의 권리침해로부터 방어해주는 것 곧 모두에게 동등하게 법의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자유가 시작하는 곳은 바로 이 법의 적용이 끝나는 곳이다. 법이 금지하지 않는 영역에서 시민은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시민적 자유가 보존된다. 이런 견해는 내란 발발 직후 왕당파 법학자들(Griffith Williams, Dudley Digges, John Bramhall, Sir Robert Filmer)이 이미 채택한 것이나, 홉스에게서 훨씬 단순하고 강고하게 제시되었다.

홉스에게 법의 강제력은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반드시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국가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은 “법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하는 것이고 행위자가 소홀히 할 자유를 지닌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이 교의는 유물론자이며 결정론자인 홉스가 동작하는 물체만이 오직 현실을 형성한다고 믿은 사실에 뿌리를 둔다. 그 결과 첫째 한 인간의 자유란 신체가 그의 힘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수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행동을 외부적 방해 없이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행동에서 의지야말로 종극 원인이고 신중한 숙고의 마지막 원인이다. 홉스에게 자유에 대한 두 번째의 조건은 법에 대해 복종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복종은 강제를 전제로 하고 이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법률이 복종을 강제할 때 이것이 반드시 행위자의 의지에 반하여 행위토록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복종은 불복종의 의지를 포기하도록 이끄는 데서 나온다. 즉 복종하려는 의지를 획득하고 따라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숙고토록 이끎으로서 실현된다.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왕당파와 노선을 같이하는 신민의 자유론이지만 그러나 두 가지 대비되는 결론으로 이끈다. 첫째 시민적 자유는 법의 침묵에 의존한다. 둘째 준수해야하는 법이 없는 한, 신민으로서의 자유를 보유한다. 즉 물리적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한 신민의 자유는 보존된다. 홉스의 이런 분석은 시민적 자유는 자유국가(civitas libera)에서 실현된다는 고전 공화주의적 관념의 사상적 전통을 능가하려는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p.9)

자유국가에서 실현되는 시민적 자유의 관념은 로마의 법률적’도덕적 주장의 특징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 공화주의적 자유의 변호자들에 의해 부활하고 특히 마키아벨리의 T리비우스론U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휴머니스트적 가치가 수용됨과 더불어 후기 엘리자베드 시대에 비이컨(Richard Beacon)이나 베이컨 같은 정치적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인용되고 연극과 시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혁명기의 의회파가 이 관념을 강조한 이래 18세기까지 정부에 대한 가부장권론 및 사회계약론과 경쟁하였고, 스튜어트 왕조를 비판한 네빌(Henry Neville)과 시드니(Algernon Sidney) 같은 자들과 18세기 전반에 볼링브로크 그리고 후반에 프라이스(Richard Price)의 집단에서 표명되었다. 특히 공위기에 니덤은 신문 Mercurious Politicus의 편집자(1651.9-52.8)로서, 밀턴은 T자유국가 건설론U(The Readie and Easie Way to Establish a Free Commonwealth, 1658) 등의 신로마인적 및 공화주의적 저술의 가장 풍부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이들 신로마인 이론가의 특징은 시민적 자유를 논하면서도 엄격하게 정치적 의미에서 논한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근대 시민사회의 개념이 미흡한 반면 신민의 자유와 국가권력간의 관계에는 관심을 집중하였다.(p.17) 이들에게 자유란 곧 다수의 특수한 시민적 권리들이 억압받지 않고 향유되는 것과 동등시되었다. 그런데 이는 고전기나 르네상스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개념이다. 마키아벨리도 권리에 대한 용어는 채택하지 않았고 개인적 자유란 오직 질서 잡힌 정부로부터 파생되는 이익이라고 서술할 뿐이었다. 이들은 또한 급진적 종교 이론과 결합하여 밀턴의 T국왕 및 행정관직 보유권U(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1649)에서처럼 자유의 상태는 인류의 자연 조건으로 규정한다(해링턴은 예외). 나아가 원초적 자유는 신이 제공한 천부의 권리이며 정부가 추구해야할 목적인 자연적 권리라고 상정하였다. 이들은 자유의 보장 곧 시민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두 개의 기본 가정을 지니고 있었다.

스키너는 바로 이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이들의 분석이 특정 이념의 선전자 또는 한 사상의 학파로까지 보이게 한다고 그 비중을 높이 평가한다. 이들이 공유한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자유는 시민적 결합의 자유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초점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의 자유’나 ‘자유 정부’(밀턴) ‘국가의 자유’(해링턴) ‘국민들의 자유’(시드니)에 맞추어졌고 모두 자유국가의 탁월함을 옹호하는데 일치하였다. 사실 이들이 전체 공동체의 자유를 공언한 것은 고전적 정치체에 대한 관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이들이 유기체적 국가관을 표방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이런 은유적 표현은 자유국가를 자유 인격처럼 자치의 능력에 의해 정의하거나, 자유국가란 다름 아닌 정치체의 활동이 전체 구성원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공동체를 의미하도록 만들었다.(마키아벨리, 니덤, 시드니)(p.26) 이런 가정은 한편 신로마인 이론가 대부분이 보증하는 헌정적 함축을 전달한다. 곧 국가가 자유롭다면 법률은 시민 그리고 정치체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법률이나 지배를 인민의 동의에 바탕 두는 것이 권력의 자의와 횡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란 함축이 내포되어 있다. 신로마인 이론가에게 인민의 자유는 각 개별 시민들의 의지를 합친 총계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 정부란 다름 아닌 각 개별 시민이 법의 제정과 폐지에 참여권을 행사하고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정부는 실현하기 어렵다. 대중은 걸핏하면 동요하기 쉽고 그들을 집결하기란 더욱 어렵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그것은 바로 대의제도라는데 의견이 합치되었다. 그러나 입법기관의 유형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일부는 하원 중심의 단원제(Francis Osborne, 니덤, 밀턴), 일부는 상원 우위의 양원제(해링턴, 네빌, 시드니)를 선호했고 왕정복고 이후에는 후자의 견해가 우세해졌다.(p.34)

시민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특징적 관심 가운데 주목되는 점이 또 있다. 그것은 시민 자신이나 전체 공동체 이외의 어떤 이의 의지에 의한 지배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마키아벨리가 자유로운 도시와 자유롭지 않은 도시를 구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관념은 확대되어 훌륭한 법률과 자유를 누리는 고대 로마에 대한 찬사,(John Hall) 군주정 치하는 왕권에 예속되고 노예 신분이 되는 것이란 확신,(밀턴) 자유민과 노예민의 대비(시드니)로 나타났다. 본래 노예제에 관한 전거는 T로마법 학설집U(Digest)에 있다. 여기서 굴종의 본질은 자신에 대해 판결(sui iuris)하면 주인이며 타인의 판결에 예속되면 자유의 결핍이란 명제와 연결되었다. 노예는 개인적 자유가 결여된 존재로 본질적으로 타인 곧 주인의 권력안에(in potestate domini) 있게 되는 것이다.(p.41) 이 문제는 고대 로마의 모랄리스트와 역사가들(살루스트, 세네카, 타키투스)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이기도 하다. 신로마 저술가들은 자유의 소유 또는 상실에 대한 고찰에서 주로 이들의 노예제 분석을 논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로마의 자유국가에 관한 관심을 근대로 전달한 물길은 리비우스였고 마키아벨리를 통해 해링턴에게 전달 되었다. 리비우스에게 자유는 타인의 의지에 종속됨 없이 자신의 힘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상실은 노예로의 전락과 동등시되었다. 그리고 자유 없는 공동체는 타국의 지배 또는 권력 아래서 사는 것이었다. 신로마인 작가에게 예속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선택한 목적의 추구에서 자연적 신체처럼 의지대로 행동할 능력이 박탈당한 경우, 둘째 자유 인민에 대한 의지의 박탈인 바 그것은 폭정의 분명한 표시였다. 그러므로 1642년 1월 찰스 1세의 명령으로 하원의원 5인의 체포를 시도한 것은 정당성 없는 힘의 행사로 공적 자유를 손상시킨 폭거였다. 그 이유는 전체 정치체의 대표자보다는 어떤 개인의 의지에 예속되거나 혹은 되기 쉽다면 그 자유는 박탈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적 예속의 조건은 첫째 정치체가 예속화하는 것, 둘째 한 국가 내의 헌정 체제가 지배자에게 자유재량권과 대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후자의 조건은 바로 자유의 본질에 대한 파괴와 직결된다고 인식했다. 특히 밀턴은 찰스1세를 옹호한 T국왕의 존엄한 심상U(Eikon Basilike, 1749)을 논박한 T심상 파괴자U(Eikonoklastes, 1749)에서 군주의 자유재량권은 자유국가를 노예의 상태로 만드는바 공적 자유는 대권의 현실적 행사가 아니라 대권의 존재 그 자체에 의해 위험해 진다고 강조하였다.(p.52) 따라서 그들은 인민의 동의를 받고 제정된 법에 복종하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대권에 대한 안전판이 부과되는 혼합 정부를 선호한 것이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T리비우스론U에서 공화정이든 군주정이든 모두 자치가 가능하고, 원칙상으로는 군주도 자유국가의 통치자가 될 수 있음을 긍정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를 불신하고 자유국가는 공화정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상존하고 있었다.(존 홀, 오스번)

Ⅳ. 자유국가 이념의 성쇠

이 결과 자유국가에 대한 신로마적 이론은 고도로 체제 전복적인 이념이 되었다. 당연히 신로마인 이론은 적대적인 비평의 십자포화를 맞게 되었고 그 공격의 선두에 홉스가 있었다. 자유국가의 확립과 개인적 자유 간에 연관성 설정은 단순한 혼동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나선 홉스에 따르면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오류는 시민의 자유가 아닌 국가의 자유에 관심을 가진 데 있다. 그러나 스키너가 보기엔 도리어 홉스의 비판이 오류이다. 비록 신로마인 이론이 국가의 자유에 주목한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본래는 시민적 자유는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유국가는 공동체에 영광과 위대함을 가져다준다는 이념은 적어도 살루스트에서 시작하여 마키아벨리를 이어 해링턴과 니덤과 밀턴에게 반복되었다. 그러나 살루스트는 자유국가의 위대함이 도리어 탐욕을 가져와 실패하는 사례에 주목하였고 술라는 그런 사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공위기에 많은 이들은 크롬웰을 술라와 비교하였다.(p.65) 그런데 이런 비교는 점차 자유국가 자체보다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체제의 능력에만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신로마인 이론에 대한 홉스의 비판이 나오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이에 맞서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정치적 기관과 자연적 기관의 유비를 통해서 공동체의 자유 상실은 막바로 개인의 자유를 상실하도록 이끈다고 응수하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국가나 동료 시민의 권력이 당신에게 법이 부과하거나 또는 금지하지 않는 어떤 행동의 수행 또는 금지를 강요하거나 강조할 경우이다. 곧 신민의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는데 법의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시민적 자유의 상실은 강제의 현실적 부과가 아니라 정치적 예속이나 종속에 떨어지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대권이나 자유재량권을 지닌 정부 하에 사는 것 자체가 노예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의 연속적 향유를 그들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고 행동의 권리는 언제든 삭감되고 철회되기 쉽기 때문이다.(홀, 오스번, 니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강제나 박탈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가능성의 상존에 있다. 예로서 상비군을 유지하는 자유재량권은 시민적 자유의 보존 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필요한 것은 통치자와 시민이 모두 동등하게 법의 제국에서 법에 복종하는 체제에서 사는 것이다. 자치정부에서 법의 제정에 시민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만이 만인의 자유를 보증한다.(p.74)

그러나 홉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였다. 아마도 홉스는 공적 자유와 사적 자유간의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또는 거부한 것 같다. 다수 비평가들도 역시 동등한 참여권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 비판은 첫째 개인적 자유의 정도는 우리의 힘이 물리적이나 법적으로 억압받거나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동을 수행하는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행동의 수행이 억압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자유 그 자체를 자유의 안전판과 보존자로 보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비판은 한 시민으로서 자유의 정도는 권력의 행사에서 법의 강제적 도구에 의해 억제받지 않고 남겨지는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판에 따르면 시민적 자유에서 문제는 법의 제정에 참여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법이 제정되었고 그것이 당신 행동을 사실상 억압하는가 여부에 있다. 이 말은 곧 개인적 자유와 특정 정부 형태 사이에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신로마인 이론에서도 자유의 정도는 선택한 목표의 추구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억압이 있는지 여부에서 측정되어야 함을 인정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로마 이론과 자유주의 해석간의 차이점은 전자는 종속의 조건에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억압의 원천이며 형식이라는 입장인 데 비해, 후자는 힘 또는 강제의 위협만이 개인적 자유를 간섭하는 억압의 유일한 형식이란 입장이다. 문제는 억압(constraint)의 관념이다. 이는 홉스가 T리바이어던U에서 신로마인 이론을 풍자적으로 언급한 데 대한 해링턴의 도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홉스는 루카(Lucca) 시민들이 망루에 ‘Libertas’라고 써놓고 스스로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 치하의 백성들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조롱투로 말한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유를 위해 문제가 되는 것은 법의 원천(source)이 아니라 그것의 범위(extent)란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한 데 있다.(p.85) 곧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해링턴은 술탄 치하에서는 신민의 자유가 술탄의 선의에 의존하므로 루카의 시민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응수한다. 술탄의 법과 의지는 하나이고 같다는 바로 그 사실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효과를 가지므로 국가가 민주정이든 군주정이든 마찬가지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반박한 것이다. 신로마인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고전 시대의 탁월한 인물들의 견해를 주로 원용하였다. 그리고 통치자와 정부에 대한 조언자이며 자문관으로서 공동선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양심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시민적 자유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시민적 자유가 사라지면 덕스런 시민으로서의 의무 수행은 제한을 받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p.87)

영국사에 대한 휘그적 해석에서 토마스 모어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모어는 T유토피아U에서 정부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이러한 시민적 자유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지배자는 늘 충고보다는 아첨꾼의 말만 솔깃해할 뿐이다. 이는 궁정이 부패의 온상이라는 타키투스적 견해와 연결되어 왕정복고 이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은 자문관의 지위는 군주의 전제화에 비례하여 노예의 조건으로 전락한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공적 봉사의 삶은 이제는 가장 나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p.91) 남은 것이 있다면 아첨도 추종도 억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 덕스런 행동은 중지되고 공공선을 추구할 능력은 상실된다. 신로마인 이론가들에게 자유의 결여는 물론 강제나 힘에 의한 것도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종속의 조건과 요구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평가에 바탕을 둔다. 권세가에게 아첨하며 시혜를 받아 사는 좀팽이 정치가들에 대한 혐오(시드니, George Wither)는 ‘비위에 거슬린다’(obnoxious)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궁정의 아첨배들과 대비되는 가치를 지닌 인물로서 진정한 남성이며 고결한 독립심을 지닌 지방 향신의 용기와 강건함은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영광은 너무나 빨리 덧없이 지나갔으니, 고전 공리주의의 흥기와 함께 자유국가 이론은 평판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논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유국가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사회적 가정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심지어 부조리하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부르주아들에게도 궁정 예법이 확산되고 향신은 이제 촌닭처럼 보이는 판이었다. 더욱 뼈아픈 것은 자유에 대한 기초적 이론을 혼동하였다는 지적이다.(William Paley, Sir William Blackstone, J. Bentham)

인간 행동에 대한 외적 장애물의 부재는 곧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데도 시민의 자유가 오직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은 자유라는 단어의 공통적 사용에서 비롯된 혼동의 산물이란 비판을 받게된 것이다.(p.97) 그러므로 개인적 자유는 정부의 형식과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것은 군주가 아니라 대의제도와 입법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로마인 이론은 소극적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분석에 의해 부식되고 이어서 자유주의 이론으로 간주되어 사라졌다. 벌린에 대한 스키너의 비판이 제기될 실마리는 다시 여기서 비롯된다.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오직 강제적인 간섭에 의해서만 위험하게 된다. 어떤 종류의 독재 또는 어느 정도로는 자치정부의 부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 자유와 민주정적 통치간에 필연적 연관성이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스키너에 의하면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보면 결국 핵심 문제는 어떤 권위를 행사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권위가 누구의 수중에 놓이는가에 있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것은 종속 상태와 자치정부의 결여는 자유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해석으로 이끈다. 이것은 본래는 신로마인의 이론인 것이다. 왜 이런 논리적 오류가 나타나게 된 것인가? 이것은 벌린이 지적 전통의 주류에 속하는 사고방식을 따라 자유국가에 대한 신로마인 이론을 불신한 고전 자유주의자들의 노선을 패권적으로 추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p.117)

Ⅴ. 결 론

스키너는 벌린의 견해가 공동체에 봉사하는 덕성을 지닌 시민의 공공 정신과 자유의 연관성을 폐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근대 사상사의 한 전통에서 공적 봉사의 덕성과 개인적 자유는 실제로는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그의 목표는 정치적 자유에 관한 신로마인적 또는 마키아벨리-해링턴적인 사고방식이 홉스 이후의 자연권론이 내포한 사회적 자유에 관한 독단주의를 교정하는데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개인의 자유는 자유로운 공화정 하의 자치 공동체에서만 보장될 수 있었다. 반면에 홉스 이후의 소극적 자유의 옹호자들에게는 국가가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자유는 여전히 같다. 반면에 공화주의의 본질은 국가가 ‘자유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개인적 자유도 박탈당한다는 자유국가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때 개인적 자유는 이익과 권리에 바탕 둔 소극적 자유에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도리어 시민이 전심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 곧 외부적 굴종에 대해 공동체를 방어하는 투쟁 능력과, 모든 시민이 정치적 공동체의 의결에 동등하게 참여하여 상층 시민이 민중을 강제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러한 공적 봉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질은 용기와 덕성 그리고 절제와 질서의 준수이다.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의 진정한 번영이나 이익의 문제에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다양한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하도록 촉진하는 ‘기질’에 대한 고찰이다. 나아가 그는 소극적 자유의 관념에 대한 현재의 논의가 혼동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 권리에 관한 이론이라는 견해인 바, 고전 공화주의론 역시 개인적 자유에 주목하였기에 이는 독단에 불과하다. 자유가 반드시 특정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생각할 의무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키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론은 (역설적으로) 소극적 자유의 이론이다. 그러나 비록 공동체에 참여하는 용기와 분별심을 요청받지만 우리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존재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기적인 시민들이 덕스럽게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법률이다. 법과 개인적 자유를 연관시키는 계약론이나 고전 공리주의와 달리 고전 공화주의론에서 법의 정당화는 개인적 자유의 보존과 무관하다. 단지 법은 자유국가의 제도를 떠받침으로써 일종의 개인적 자유를 창조하고 보존한다. 이때 법의 메커니즘은 시민이 자유로워지도록 덕성의 계발을 강제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스키너의 견해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샤베트는 스키너가 우선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가 귀족과 민중의 계급적 조화와 통합을 모색한 데서 나온 것임을 간파하지 못했고, 다음으로 개인주의와 계약론 대 공화주의와 시민적 의무를 설정하였으나 루소에서 보듯 양자의 혼합이 이뤄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스피츠도 첫째 스키너가 자유를 한 가치가 아니라 속성으로 곧 그 자체의 선이 아니라 한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정념 정도로 보는데 이는 스키너가 자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교에 초점을 맞추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탓이 아닌가? 둘째 좋은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른 개인들간의 공존은 가능한가? 그것을 위해 덕성의 필요성이 정당화된다면 이 경우 선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규칙만 공유하는 것 아닌가? 셋째 스키너에게 덕성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은 자유로워지도록 법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덕성스런 존재이기를 강제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넷째 스키너의 근대주의는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구조에 대한 공리주의적 개념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정확한 해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스키너는 그의 취임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첫째 그는 공화주의적 자유 이론이 홉스-벌린식의 소극적 자유의 분석과 결합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사회적 의무의 요청을 확대함으로써 진실로 벌린이 목적으로 삼은 ‘사회적 삶의 최소한의 요구와 양립하는 최대한의 비간섭의 영역의 선택’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한다. 스키너가 보기에 현대 자유주의는 이기심과 개인적 권리의 영역이 과도하여 공적 영역이 휩쓸려 떠내려갈 위험이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이 이분법적인 적극적 자유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공적 영역에 책임을 지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둘째로 스키너에게 벌린의 소극적 자유에서 문제의 핵심적 초점은 결국 어떤 권위를 행사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어느 정도의 권위가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종속 상태와 자치정부의 결여는 자유의 결핍으로 이끈다는 신로마인 이론가들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 스키너는 이런 오류가 지성사가들이 주류 사상을 패권적으로 수용한 탓에 발생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제 스키너가 원하는 지성사가, 우리의 가치와 조상들의 낯설어 보이는 가정을 더 깊은 수준에서 조화시키는 고고학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고 반드시 홀로 초연한 역사가의 모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현재의 가치와 신념에 관한 판단에 적합한 정보를 찾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성취하는 자세는 정보를 끊임없이 소처럼 반추하는 것이다. 스키너가 우회와 반추의 지성사를 옹호한다면 벌린은 직설과 도전의 지성사가란 말인가? 실제로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지성사가들이 처해져 있는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지성사가는 현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도전적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성의 역사가 별로 설자리가 없는 시대에 지성사가는 호고적인 자세로 과거의 사상을 파고들든지, 아니면 희망을 잃지 않고 과거를 반추하며 현재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직설과 도전의 지성사와 우회와 반추의 지성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타당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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