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이사야 벌린’

악은 ‘열광’에서 시작해 ‘의심’에서 멈춘다!

[프레시안 books]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이사야 벌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21 오후 6:43:28

이사야 벌린(1909~1987년)을 철학자 또는 사상가로 심각하게 고찰하는 사람은 국내에 별로 없다. 영어권에서도 그는 인간으로서 매력이 있었다든지, 피상적으로 영리했다는 평은 받지만, 어떤 깊은 교훈을 남긴 철학자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자신이 40대에 철학에서 무슨 개척자적인 업적을 남길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사상사 연구로 전공을 삼았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의 내면에서는 비록 사회적으로 영광을 누리면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결국 피상적인 수다쟁이의 과분한 삶으로 끝나지 않았는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의 문필과 강연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 입장은 일관해서 고수했다. 이 복잡다단한 인물의 생각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는 것은 본디 무리한 일이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다원주의와 경험주의에 초점을 맞춰 본다.

벌린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선이 하나의 목표로 수렴된다는 발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보았다. 이는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벌린은 계몽적 합리주의에서 이러한 오류의 근원을 찾았고, 따라서 마르크스를 칸트의 직계 후예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바로 칸트의 글에서 찾아낸 문장을 가지고 계몽주의적 유토피아의 발상을 반박하는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삼았다.

“인간이라는 휘어진 목재로는 그 어떤 곧은 것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 <이사야 벌린>(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지음, 이화여대 통역번역연구소 옮김, 아산정책연구원 펴냄) ⓒ아산정책연구원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인용되는 ‘자유의 두 개념’에서 적극적 자유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은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이뤄진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무수히 자주 봉착한다. 이에 관해, 자아가 더 나은 상태였다면 더 좋은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생각에만 몰두하게 되면, 마치 모든 개인적 선택 상황에서 더 좋은 선택을 인도할 어떤 표준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발생한다. 판단력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의 기술인 양, 연구와 훈육을 통해 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처럼 비친다.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판단의 기술에 따라 모든 개인들의 선택을 인도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찾아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어떤 위대한 선들은 공존할 수 없다. 그것이 개념적 진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고, 모든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수반할 수 있다.” 개인적 선택이 여러 갈래로 이뤄지는 현실을 뭔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떤 단일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싶어 한 사람들을 생트뵈브는 비꼬아서 “위대한 요약꾼”이라 불렀고, 부르크하르트는 “끔찍한 요약꾼”이라 불렀다. 벌린은 바로 이들 요약꾼들의 기획 안에서 현대 전체주의의 모든 근원을 발견했다.

다원주의적 세계관은 벌린에게 있어서 경험주의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사람들은 외모와 가치와 소원과 목표에서 다양한 것이 경험적인 진실이다. 물론 삼라만상이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잡다한 현상을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면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 다양한 현상들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저변에서 작용하는 어떤 원리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이고, 이러한 지식이 있어야 문명이 가능하고, 사회의 진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지식은 어떤 개별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원리이지, 모든 삼라만상의 저변을 관통하는 원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어떤 지식을 획득했다고 한다면, 바로 그 만큼 모르는 것도 더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즉 증거 또는 근거가 확보된 만큼, 안다고 말하는 취지가 경험주의의 요체라고 벌린은 받아들였다. 이는 경험주의에 관한 가장 건강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아울러 지식인입네 하면서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해럴드 라스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 등은 유태인 선배 중에 벌린의 냉정한 시선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는 태도, 남들이 확실하다는 듯 말하는 것에 대해 확인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회의주의로 오인된다. 그는 20세기라고 하는 격동의 100년 가운데 88년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와중에서 실제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방관자처럼 지낸 적이 아주 많았다. 이 때문에 그의 다원주의를 상대주의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는 결코 상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맹목적인 상대주의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은 결정론이 성립하지 않는 이치와 완전히 닮은꼴이다. ‘역사적 불가피성’에서 벌린은 결정론에 대한 지극히 간단하고 명쾌한 반론을 제기한다.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결정론의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 논증은 그가 학창 시절에 존 L. 오스틴과의 대화 중에 들은 것이다.

“나는 살면서 결정론자를 만나본 적이 없네. (…) 자네는 본 적이 있나?”

모든 일은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동기나 소원 또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결정론이다. 따라서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결정론자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선택을 위해 고심하고, 타인의 행동에 관해 화를 내기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맹목적인 상대주의자들 역시 똑같은 괴리에 빠져 있다. 모든 일이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든지 대안에 비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생활에서는 선택을 위해 고민하고, 결과 여하에 따라서 원래 선택을 후회하거나 보람 있게 느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속을 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벌린은 그러므로 회의주의자도 아니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불확실한 일에 관해 확신할 수 없었다. 특히 20세기에 벌어진 야만의 대다수가 불확실한 일에 관해 자기네끼리 지어낸 믿음을 마치 확신인 것처럼 퍼뜨리고 우겨대는 풍토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했다. 이러한 풍토에 반대해서, 벌린은 “더 많은 신앙, 더 강한 리더십, 더 과학적인 조직이 아니”라, “구세주와 같은 열정의 감소, 더욱 개명된 회의주의, 제각각인 개성에 대한 더 많은 관용, 가까운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의 보다 빈번한 사용” 등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조주의와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논리적으로 정연하지 못한, 유연하며 심지어 모호한 타협”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거의 태생적인 자유주의자였다. ‘자유의 두 개념’에서 소극적 자유를 중시했다는 이유로 그를 하이에크와 같은 시장주의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한국에는 있지만, 그는 케인스 편의 뉴딜 자유주의자였고, 진보적 국제주의자였다. 다만 윈스턴 처칠이나 앨리스 루스벨트 같은 보수파 명사들과 친분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들에게서도 장점을 찾아내 인간적으로 존중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태인이면서도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신의 내면 때문에, 일종의 채무감 비슷한 정서에서 시온주의의 합리적 명분에 동조했다.

벌린은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유태인 목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 혁명기에 페트로그라드로 이주했다가, 볼셰비키 정권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영어를 익혀야 했고, 영국의 학계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영국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억지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국의 문화를 존경해서 동화를 선택했다. “타인에 대한 정중한 존중과 반대 의견에 대한 관대함이 자존심이나 민족적 사명보다 낫다는 생각, 자유는 효율성과 양립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나친 효율보다 자유가 낫다는 생각, 아무리 합리적이고 사심이 없다고 해도, 모든 면을 포괄하는 체계의 엄격한 적용보다, 그리고 항의의 여지가 없는 다수결의 원칙보다, 다원주의와 비체계성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낫다는 생각” 등등, “심오하고 독특한 영국다움”을 숭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여우”(타협하고 적응하는 인간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고슴도치”(자기 뜻을 고수하고 관철하는 인간형)에 대한 동경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인격화된 신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일생 동안 종교적인 회의주의자로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은 존경했으며 스스로 유태교의 기념일들은 고수했다. 아울러 자신을 겁쟁이라고 비판하는 항간의 목소리에 대해, 어쩌면 자기가 겁쟁이일지도 모른다고 끝없이 자문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영토를 나눠 줘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다가, 죽음을 3주일 앞두고 성명서를 작성해서 이스라엘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가 사망한 3일 후인 1997년 11월 7일에 이스라엘 신문에 게재되었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1987년에 전기를 쓰겠다고 벌린을 찾아가서, 10년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록했다. 전기 작가의 이러한 열정도 경탄할 만하지만, 동시에 전기 집필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는 지식인 사회의 풍토도 나는 부럽다. 더구나 이 전기는 이그나티에프 혼자의 성과가 결코 아니다. 저자 자신이 감사의 말에 일일이 열거하고 있듯이, 수많은 사람들과 기관들 그리고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편지와 자료와 기억들이 합해져서 이와 같은 전기가 나올 수 있었다.

특히 헨리 하디는 불과 20대 중반의 젊은 시절부터 벌린의 저작들을 편집하는 작업에 일생을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벌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등, 구술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 상태로 남아 있던 수많은 원고들을 교정하고 보완하고 분류해서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나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펴냄)을 번역할 때 사소한 사항들을 그에게 문의해서 친절한 답변을 들었던 고마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그나티에프도 인정하고 있듯이, 문필가로서 벌린의 위상은 하디에 의한 편집과 출간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두서없고 장황한 달변가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전반적으로 유려하고 쉽게 읽힌다. 단, 오타가 제법 많고, 고유명사의 음역이 뒤죽박죽인 대목도 적지 않으며, 명백한 오역도 눈에 띈다. 이 서평에 인용된 문구들 중에는 번역본과 다르게 내가 번역한 대목들이 있다(’20세기의 정치 사상’에서 인용한 문구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의 번역을 따랐다). 몇 가지 현저한 것들만 적시해 본다.

① 쥘 베른을 줄스 반스로 적었다. 헤르첸을 게르첸, 헤르젠 등과 섞어 쓰고, 모들린을 막달란과 섞어 쓰고, 콜더를 캘더와 섞어 쓰고 있다.

② 바론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남작, 바론 군즈베르그는 군츠부르크 남작, 바로니스 주트너는 주트너 남작부인으로 적는 편이 낫다고 본다.

③ 아르크엔젤(61쪽)은 아르한겔스크, 레트인(69쪽)은 라트비아인, 필수드스크(70쪽)는 필수드스키 또는 피우즈츠키, 졸업생(117쪽)은 대학원생을 가리킨다.

④ 221쪽, 여왕의 남동생은 왕비의 남동생(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당시 왕비였다)이고, 국왕의 만찬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만찬이다.

⑤ freedom과 liberty를 구분한 역주(374쪽)는 정확하지도 않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 freedom은 liberty에 비해 일상어인 반면에 liberty는 일상어에서보다는 학자들 사이에서 더 많이 쓰인다고 구분하는 편이 낫다.

⑥ “벌린은 시내 카페와 식당에서만 파시스트 당원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108쪽)는 “벌린 평생에 파시스트 당원을 직접 본 것은 여기 시내 카페와 식당에서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는 뜻이다.

⑦ “악마와 대항할 때는 악마의 무기로 싸워야 하기 때문”(336쪽)는 “악마의 무기로 악마와 싸우는 셈이기 때문”이 낫다.

⑧ 381쪽, “(…)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주의의 개념으로부터”는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의 개념으로부터”라고 써야 하고, “그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은 “나머지는”으로 쓰는 게 낫다.

이그나티에프의 원고는 출판 전에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읽고 의견을 보태주었다. 한국의 출판계 사정에서 이러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특히 번역을 중요한 지성적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척박한 토양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번역본이 나온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국의 지성적 토양이 조금은 더 비옥해질 수 있다고 기대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인들의 선택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에 관해서는 벌린도 백분 동의했을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1161009&Section=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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