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논평, 김석수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논평

김 석 수(서경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아렌트가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공적 공간의 확립과 관련하여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도입한 입장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아렌트가 근거로 하는 판단력이 합리성(도구적 합리성/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밝히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우선 필자는 인간의 삶의 두 가지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련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이 복수성, 다원성에 근거한 ‘행위’의 영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조건』(1958)에서 논의된 것으로, 인간의 삶의 조건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사물적 관계(측정하는 관계)를 넘어 말하고 행위하는 대화의 공간으로서 복수성과 다원성이 살아 있도록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 역시 아렌트가 언어를 넘어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추상적인 보편주의적 태도보다는 산파술을 통하여 끊임없이 다양한 의견과 설득 사이에 추구되는 언어적 긴장 관계를 중시한다. 즉 아렌트는 동굴을 떠난 태양중심주의 속에 담겨 있는 관조적 폭력을 비판하면서 동굴 속의 다수의 의견이 함께 하는 정치적 판단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개념의 박물관’을 해체하고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를 선포하면서 ‘오해가 이해를 낳는다’고 주장한 니체의 전략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고, ‘이해는 역사적이다’는 해석학적 전통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아렌트는 언어를 넘어선 관조적인 철학적 태도를 통하여 정치적 영역을 독식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폭력성을 간파하고 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현실의 복수성, 다원성에 관계하는 정치성과 관조의 단일성에 관계하는 철학의 통합을 부정한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에는 ‘작업’에서처럼 언어를 도구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관조’에서처럼 언어를 거부하는 세계도 부정한다. 따라서 아렌트가 주장하는 행위의 정치적 영역에서의 언어적 설득은 논리적 공통감(sensus communis logicus)이 아니라 미감적 공통감(sensus communis aestheticus)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잡아 쥔다(greifen)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Begriff)적 작업이 아니라 옆에(bei) 함께 걸어가는(treten) 참여(Beitritt)적 작업이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이성의 논리적 작업이나 합리적 작업을 통하여 진리를 주장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전체주의적 테러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료타르나 데리다가 진리와 정의를 통합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면과 일맥 상통한다.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주장되는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확장된 마음’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까지 나아가는 관찰자적 태도이다. 물론 이 때의 관찰자는 일방적으로 감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상호 대화에 참여하여 의사소통하는 관찰자다. 이런 관찰자적 태도는 행위가 유발할 수 있는 무모함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어는 고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주장되는 관조적 차원의 제어가 아니라 현실의 다수가 사회성을 근거로 상호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제어이다(*사유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 것은 근본악이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목적 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상호성과 언어적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반성적 판단력에 바탕을 둔 정치성과는 정반대 된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 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다양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점”(13쪽) 때문이다.

2. 문제 제기

이상의 필자의 이해에 대해서 평자 역시 대체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이 글 속에서 아직 도 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평자는 이 부분을 제시함으로써 필자의 글이 좀 더 선명해지기를 기대한다.

(1) 이 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즉 반성적 판단력과 합리성의 관계이다. 이 문제는 또한 현대 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던 하버마스와 리요타르의 논쟁 속에 담겨 있는 갈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 논쟁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 같이 복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성과 차이성, 공약성과 불가공약성, 합리성과 반합리성을 축으로 대립하고 있다. 전자는 결국 의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인 언어행위자의 주체적 참여를 통하여 복수성 속에 자리하고 있는 차이성, 불가공약성, 반합리성이 반사회성으로 이탈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불안의 요소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향해 있다면, 후자는 복수성에 내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기 위해 동일성, 공약성, 합리성을 도모하다보면 결국 기형적인 근대가 초래한 도구적 합리성에 다시 봉착하기 때문에 차이성을 풀어주고 열어주는 쪽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리요타르는 진리와 정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필자의 논의에 따르면 분명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기보다는 리요타르적이다. 특히 ‘탄생성’을 강조하고, ‘출현성'(현상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더 더욱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리요타르와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로 볼 수 있는가? 리요타르나 데리다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자신들의 불가공약성, 차연성 개념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들은 아렌트와는 달리 칸트의 공통감 보다는 숭고감을 더 중시한다(*물론 향수적nostelgia 숭고감이 아니라 혁신적novatio 숭고감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념이 다가갈 수 없는 차이성을 더 부각시키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주장과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라고 하기에는 리요타르적이고, 리요타르적이라고 하기에는 하버마스적이다. 도대체 아렌트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분명히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적 연대성보다는 공감적 연대성으로 향해 있다. 사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비극’을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유럽에 동화되지 않는 ‘패리아의 길’에 있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녀는 단순히 복수성과 다원성을 열어 주는 데만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실적 권력에 참여하여 결집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도 많은 관심이 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아렌트는 육체적 개체주의자도 아니고 정신적 보편주의자도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억지로 표현한다면 정신과 육체가 함께 하는 몸적 연대주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생활정치학’ ‘몸의 정치학’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런 입장은 당연히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적 계기에 흡수되어 있는 “체계의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지화”를 거부하고 상호행위를 강조하는 하버마스적 공론장 확보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공론장은 ‘이성적 합리성’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미감적 공통감’에 바탕을 둔 담론의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적인 공적 영역은 합리성만으로 필요 충분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고 충분성을 확보하려면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느낌의 보편성, 미감적 보편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차이는 보편성으로 향하느냐, 차이성으로 향하느냐라는 문제보다는 합리성과 미감성에 대한 경중에 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지 않을까? 아렌트는 베버적인 목적 추구적인 합리성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버마스가 비판하듯이 목적 초월적인 면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2) 이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든, 더 근원적인 문제는 아렌트가 하버마스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하버마스와 정반대된다라는 필자의 주장에 있다. 아렌트의 철학 체계 내에서 개념성과 탈개념성, 합리성과 미감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나아가 필자가 벨머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듯이, 아렌트의 이런 입장이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즉 공통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감적 보편성으로서의 연대성이라는 논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 외재적 접근이 논리적 보편성을 결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3)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phronesis)와 어떻게 다른가? 그러니까 평자의 질문은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동일하게 본질주의자로 규정하고 결국에는 이론지가 실천지 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비판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이 아렌트의 판단 개념과 멀리 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가? 필자의 주장처럼 “관찰자는 사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전체를 볼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위해야 한다면 더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왜 칸트의 취미판단 부분에만 집중하여 자신의 정치철학을 확립하고자 하고, 숭고함이나 목적론적 판단력 쪽으로는 넘어가지 않는가? 아렌트는 칸트의 입장과 완전히 같은가? 같지 않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가?

(4) 필자는 아렌트의 이런 정치철학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정서적 공감주의와 합리적 이기주의가 야합된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처럼 비합리성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성적 합리성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아렌트의 주장은 너무 높은 이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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