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민주주의, 비합의, 소통(Démocratie, dissensus, communication)

랑시에르, 민주주의, 비합의, 소통(Démocratie, dissensus, communication)

민주주의, 비합의, 소통

Démocratie, dissensus, communication

* 이 글은 2004년 1월 24일, 오사카대학교 待兼山 회관에서 이뤄진 강연회의 원고의 완역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문부과학성 과학기술진흥조정비 정책제언 「임상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개발과 실천」의 초대로 일본을 방문했다. 소제목은 일본어판 옮긴이의 것이다.

* 이 글은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번역을 할 때 <합리적 추론>에 근거하여 많이 수정했다. http://scfdb.tokyo.jst.go.jp/pdf/20021730/2003/200217302003rr.pdf

* 옮긴이 : 중간에 번역하지 않은 구절이 있는데, 이는 원문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합의란

이 강연 제목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정식화함으로써 저는 ‘민주주의’, ‘소통’, ‘합의(consesnsus)’라는 세 용어를 동일시하는 오늘날 지배적인 경향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민주주의는 오늘날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명사입니다. 관념이나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보다도 현행의 국가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다양한 꼴의 시민참여를 보증하고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법적 구조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국가는 점점 더 공동체에 공통하는 것의 상징적 구조화 ― 합의라는 말은 이것을 나타냅니다 ― 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습니다. 합의라는 말은 얼핏 보면, 우리의 사회가 더 이상 구조화를 초래하는 분할이라는 양태로는 나타낼 수 없으며, 내전이나 사회전쟁과 같은 대립을 넘어서는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다양한 집단의 집합으로 나타납니다. 이 집단의 이해는 객관화될 수 있는 공통이해의 요구와의 관계에서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교섭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국가와 사회 사이의 어떤 종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관계에 있어서 국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에 관한 앎의 처리를 행하는 하나의 심급입니다. 국가는 공동체의 이해나, 그 공동체가 놓여 있는 세계의 상태, 또한 그 세계의 상태와 공통이해가 대립하는 이해들 사이의 교섭에 부여할 여지, 그 교섭이 보증해야 할 균형에 지식을 전념시키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합의 국가는 전문가의 앎을 사회에 집중시키고 사회의 대표자들과의 교섭을 조직합니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이 앎의 명증성이, 즉 논의 가능하고 교섭 가능한 것을 정하는 경계의 명증성이 분유되도록, 끈덕지게 의사소통의 작업에 종사해야만 합니다. 합의국가는 점점 더 학교의 교사로서, 전문가의 앎을 일반에 보급시키고, 국가가 제시하는 해결만이 현실의 데이터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된다고 설명하는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전문가에 의한 사정(査定), 협의, 의사소통, 교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이러한 합의 국가의 슬로건입니다.

이러한 슬로건은, 언어는 객관화하는 기능을 가지며 공동체의 근거에는 언어가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크게 준거하고 있습니다. 계급들의 분리와 그 사이의 투쟁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공동체관이 여럿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합의의 철학이 대립시키는 것은, 정치적 공동체를 언어의 일련의 절차에 정초시키는 견해입니다. 이 언어의 절차 자체, 정치적 공동체의 원리와 언어의 의사소통 원리 사이에 근본적 적합성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준거하고 있습니다. 합의의 철학은 정치적 공동체의 근거를 어떤 특정한 존재방식의 언어의 합리성에, 또는 인간의 본질에 의해 인간성이나 언어능력과 정치적 능력을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둡니다. 합의의 철학이란 다양한 종류의 활동영역과 결부된 이해들을 매개하고 각각의 이해에 특유한 합리성의 형식들을 보편화하는 데에 적합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하버마스적 사고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존 롤즈의 절차이론에 의한 사회계약모델의 재론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주 단순히, 설명하고 논의한다고 하는 언어능력을 부여받은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 목표는 민주주의, 합의, 의사소통 언어 사이의 이런 지배적인 관계를 다시 묻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국가의 호칭이 아니라 모든 국가의 논리의 대리보충(supplément)이라는 것, 이 대리보충에 의해 정치는 정치로서 제정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정치는 언어라는 [인간에게] 공통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언어의 실천 한복판에서 생기는 분할로부터만 연역된다는 것을 우선 보여주고자 합니다. 제가 비/불-합의(dissensus) 또는 불화(mésentente)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 분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합의는 정치의 논리 그 자체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 결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본질로서 오늘날 찬양되고 있는 합의는 사실상 정치적 민주주의의 상실이라는 사태라는 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 감성적인 것의 분유

그런데 저는 언어, 정치성, 민주주의의 관계를 검토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 계약에 관한 근대의 다양한 이론들, 혹은 의사소통에 관한 현대의 여러 이론들 이전의 정식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간성, 언어능력, 정치적 능력의 관계를 둘러싸고 그 핵심을 찌르는 이론적 정식화입니다. 그 정식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유명한 정식 속에 요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정식은 <정치학> 1편에서 발견되는데, 인간이라는 동물의 정치적 본성의 근거의 보유에서 찾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 덕분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따라서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에 관한 감정을 공통의 것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부정의를 분명히 하고 그것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가능케 한 언어와,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표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 불과한 동물의 소리를 대립시킵니다. 두 번째 정식은, <정치학> 제4편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만, 정치적 주체, 즉 시민을 명령하는 것과 명령받는 것으로 관여하는(avoir part, 몫을 갖는) 주체로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정식은 정치적 관계의 수수께끼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관여하다’란 사실상 어떤 사태를 가리킬까요? 또한 어떻게 명령하는 사람의 입장과 명령받는 사람의 입장에 대등하게 관여할 수 있을까요? 보통 생각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동작주(agent)의 입장이거나 피동작주(patient)의 입장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관여하다’란 이러저러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입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통치되는 자에게는 통치자의 입장에 서는 능력을, 통치자에게는 언제나 통치되는 자의 입장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정반대의 입장을 대등하게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요? 활동을 행할 소질과 그 영향을 겪는 소질이라는, 정반대이자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소질로부터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귀결한다고 보통 생각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능력은 아무래도 그런 사고방식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즉, 정치적 상호보완성을 그 자체 위에서 정초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여기서 언어교환이라는 모델이 도움을 줍니다. 언어교환에서는 말의 수신자가 발신자와 대칭적인 입장을 차지합니다. 언어행위는 수신자에게서도 대칭적인 능력을 상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상태를 표명할 뿐인 소리가 아니라 교환의 상호성 속에서만 행사되는 분유된 능력을 함의하는 언어를 가진 인간이야말로 당연히 상반되는 두 입장에 관여하는 시민의 원칙이 됩니다. 이리하여 정치적 동물이라는 정의로부터 통치하면서 통치되는 시민이라는 정의가 쉽게 귀결합니다. 말하는 힘은 만인이 평등하게 보유하는 속성이며, 각자는 이 속성 덕분에 타인의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입장에 서는[타인을 대신한다는] 것은 첫 번째 뜻으로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타인의 언표행위와 입론이 의미를 줄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하여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뜻으로는 타인과 입장을 교환할 수 있다는 것, 주권자의 역할과 주권이 행사되는 자의 역할 둘 다를 대등하게 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언표의 의미를 이해하고, 평등한 발화자의 공동체에 참여하며, 정치적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하는 세 가지 사태 사이에서, 연역은 직선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의 이론도, 이렇게 연역은 직선적으로 이뤄진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해 있습니다. 즉, 언어교환을 한다는 것은 상호 이해(대화)라는 목적/텔로스가 지배하는 역학에 자신의 언표를 따르게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entendre) 감각기관의 능력과 타인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comprendre) 지적 능력,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 서는 능력 ― 자기 자신의 언표를, 타인의 입장에서, 마치 타인의 언표인 것처럼 판단하는 능력 ― 은 직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즉, 언어를 듣는 능력은 그것 자체, 언어능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entente)라는 목적을 갖는 것이게 됩니다. 언어를 듣는 능력은 행위수행적 모순에 빠져서 자기 자신의 담론이 정초되어야 할 언어장치(dispositif langagier)를 파괴하지 않는 한, 발화자 각자가 순응해야만 하는 보편화라는 원칙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제시되자마자 붕괴되어 버립니다. 직선[으로 생각된 연역]은 직선이 아닙니다. 글의 의미를 이해하는 적성을 평등하게 갖고 있더라도, 그것에 의해서 평등한 발화자로 이루어진 어떠한 공동체도 산출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현대인보다도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공동체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은 입장의 상호성이 아니라 분유된 어떤 것, 즉 정의와 부정의를 전하는 능력입니다. 언어를 통한/매개로 한 공동체란 [동물이 지닌] 단순한 쾌락·고통의 감각으로부터 구별되는, 이런 감정의 공동체입니다. 단순히 발화자와 수신자의 입장을 교환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발화자가 평등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노예제사회에서 사는 사람에게 사태는 명백합니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기 위해 사용하는 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령 그 자체가 행사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 [언어능력에서의] 평등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노예가 정치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으로는 물론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노예는 언어능력을 가진 자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노예가 언어에 관여한다는 것은 이해의 양태에서이며, 보유의 양태에서가 아닙니다. 노예는 언어를 이해하더라도, 언어를 보유하고 있진 않습니다. 따라서 말한다는 것은 말한다는 것과 같은 게 아니며, 듣는다(이해한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과 같은 게 아닙니다.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는 것으로는 공동체에 ‘관여한다는 것’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관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정의, 부정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말한다’란 단어나 메시지와 동시에, 일종의 감성적 정의를, 일종의 입장의 배분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성적인 차이를 사용하여 공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능력이나 무능력을 등록하는 이 입장의 배분을 ‘감성적인 것의 분할/공유(감성적인 것의 나눔, partage du sensible)’로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프랑스어의 ‘분유(partage)’는 양의적인 말이며, 공동성(communaité)과 동시에 분할(séparation)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공동성이란] 만인이 동일한 것의 몫에 관여하는 것이며, [분할이란] 각자가 몫의 배분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 고정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감성적인 것의 분유란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또한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에 따라서 순환적으로 정의하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공통세계의 구분입니다. 감성적인 것의 분유란 단순히 주인과 노예, 영주와 자유평민,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당연한 입장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적인 것의 분유에 의해서, 무엇보다 우선 감성적인 세계의 형식들 그 자체가 당연한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며, 그 형식을 통해서 입장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되며, 담론이 들려지는 것으로 되며, 능력이나 무능력이 명백한 것으로 됩니다. 감성적인 것의 분유에 의해서 공통의 대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규정되며, 합당한 말로서 들려지게 되는 것과 고통스런 신음소리로만 들려지게 되는 것이 규정됩니다. 그 규정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분유, 말과 단순한 목소리의 분유를 규정하는 것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발랑슈의 우화

즉, 한편으로 몫은 능력으로부터 직선적으로 연역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능력 그 자체가 늘 계쟁적(litigieux)인 것이며, 늘 어떤 ‘정의’, ‘부정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말과 동물의 소리의 구별도 그것 자체로 늘 계쟁적인 것입니다. 구별의 기준이 되는 물리적인 명증을 특정하는 것은 일종의 감성적인 것의 분유입니다. 우선 물어야 할 것은 타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가 여부가 아니라,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이해해야 하는 말로서 이해하는가 여부입니다. <불화>에서 저는 이 논점을 프랑스 작가인 발랑슈로부터 빌려온 우화를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 우화는 로마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삽화 중 하나, ‘평민[군대]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의 철수/이탈’를 발랑슈가 고쳐 쓴 것입니다. 발랑슈의 이야기에서는, 대립 전체가 하나의 문제, 즉 평민들은 말을 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약을 요구했습니다. 혈통귀족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말을 부여하는[언질을 부여하는, engager sa parole)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갖고 있는 것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민들은 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귀족 중에서 평민이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고 보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의 대꾸는, 그가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평민에게는 말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민은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평민의 입에 붙어서 나오는 것은 “알 수 없는 소리 같은 것”으로, 욕구의 징표이며, 지성의 출현이 아니다. 평민은 이름도 없는 존재이며, 단순히 생식에 운명지어진 존재이다[라는 대꾸입니다]. 귀족 중 한 사람이 평민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불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을 하는 존재만이 본래적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을 하는 존재 중에서도 어떤 이름, 어떤 전통을 전하는 자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이 일화는 단순히 혈통귀족의 견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것의 분유 그 자체를, 사람들의 상호 입장을 고정하는 감취(感取) 가능한 ‘정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시키기(entendre, 들려주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들이 말을 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을 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감성적 세계를 형성해야만 합니다. 그들도 또한 말을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자신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맹세의 말을 하고, 신탁을 내려야만 합니다. 평민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 상징체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 이 사실은 말을 하는 존재라는 것, 즉 공유하고 있는 것을 상징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상징적 장면을, 위반에 의해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발랑슈의 우화는 극단적인 허구입니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허구에 의해서 정치가 입각한 대화(interlocution)의 구조가 분명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언어능력으로부터 귀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능력은 공통의 것이지만, 어떤 꼴의 공동체도 이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습니다. 언어적 평등이 작동하는 것은, 말을 하는 사람과 하지 못하는 사람, 말과 단순한 소리[의 다름]를 분명히 하는 감성적인 것의 분유, 바로 이것의 한복판에서입니다. 실제로 문제는 혈통귀족이 평민이 말하는 것을 듣기를[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혈통귀족이 평민을 말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귀족들의 지각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감성적인 것의 분유에 의해서는, 이름도 없는 존재를 말하는 존재라고 지각할 수 있는 어떤 여지도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의사소통적 이성의 도식은 기능할 수 없습니다. 혈통귀족의 입장에는 ‘행위수행적’ 모순이 없습니다. 행위수행적 모순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대화의 장면이 이미 설정되어 있는 경우뿐이며, 토론하는 쌍방이 이미 적어도 말하는 존재로서 공통의 것을 토론한다고 서로 인정하는 경우뿐입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이런 종류의 어떠한 공통성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토의의 무대도, 그 대상도, 그 주체도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거부는 행위수행적 모순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의 감성적인 이질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평민들 쪽은, 자신들의 대의를 입론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의 입론이 입론으로 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그런 무대 위에서, 귀족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대상을 보도록 하며, 귀족들이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주제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만 합니다. 하나의 공통성[공동체]을 창설하고 그러한 공통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거기에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바꿔 말하면, 평민이야말로 말과 단순한 소리 사이에, 현행 질서의 정의와 고통스런 불만을 내뱉는 동물들의 반란 사이에 순수하게 외재적 관계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분유된 말과 정의의 무대를 둔다고 하는, 행위수행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불화 또는 비/불-합의

제가 불화 또는 비/불-합의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상태입니다. 프랑스어에서 ‘불화(mésentente)’라는 말은 서로 이해하지 않고서도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이런 상황을 나타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화’는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의 분열을 나타냅니다. 즉, 어떤 감성적인 것의 분유를 통해서만, 감각기관에 의한 이해/청취(entente)와 언어능력에 의한 지적 이해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불화는 다양한 형식을 취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형식의 동의도 없는 채, 타인의 담론을 듣는다는 상황입니다. 타인이 소리를 내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그 소리를 말이라고는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거꾸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관계를 만들었지만 상대가 당신의 말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모든 상황에서, 말한다는 것이 이중화됩니다. 이것이 비/불-합의의 상황입니다. 비/불-합의는 이해관계나 관념, 가치 사이에 생기는 대립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것 속에 반입된/들여온 이중화를, 감성적인 것들의 분유 사이에 생기는 대립을 의미합니다.

제 명제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비/불-합의라고 하는 형식에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비/불-합의가 정치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비/불-합의의 형식은, 다소나마 난폭한, 혹은 세련된 형식을 취합니다. 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못한 평민들의 사례는, 극단적인 허구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허구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며, 아주 오랜 역사를 정리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인류의 대다수에게, 즉 노동자나 여성들에게 정치적 존재로서의 자질을 거부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정이나 직장이라고 하는 어두운 세계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삶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세계이며, 공유하고 있는 것에 관한 어떠한 지각도, 어떤 담론도 생길 수 없는 세계, 배고픔이나 고통, 히스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밖에는 생기지 않는 세계입니다. 노동자운동이나 여성해방운동이라고 불렸던 것은 공공세계와 사적·가정적 세계, 생산과 재생산에 운명지어진 세계와 공공적 활동과 언동(言動)에 운명지어진 세계 사이의 분할=공유를 다시금 문제로 삼았습니다. 이런 운동들은 무엇보다 우선 감성적 세계를 고쳐 쓰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적인 것과 목소리의 세계에 갇혀진 존재는 자신들도 또한 말하는 존재자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사적 세계도 또한 하나의 공공세계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의 무대를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공장이나 노동계약에 관한 사적인 문제를 공공의 토의에 속하는 문제로서 재배치하고, 여성은 자신들도 공공의 문제에 관한 말을 지닌 사람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공통의 대상을 보려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토의의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고용주와 남성, 통치자들을 대화의 장치(dispositif)의 상대로서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비대칭성에 의해서, 정치적 대화가 모든 단순한 [말의] 주고받기의 상황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장면에서 말의 주고받음이 이뤄진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정의가 형성될 때뿐이며, 바꿔 말하면 대칭성과 비대칭성, 정의와 부정의 사이의 관계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감성적인 것의 분유가 형성될 때뿐입니다.

오늘날 시대착오적이 된 공공생활의 영웅들의 시대에서의 이러한 비/불-합의의 장면 중 상당수는 기쁘게 버립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들은,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한 능력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평등성 그 자체는 끊임없는 계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행정의 근거가 되는 자명한 사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시위대가 거리로 나올 때, 문제가 되는 정부나 그 전문가들이 시위대의 말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잘 알고 계신대로입니다. 이성적인 분석이나 토의의 대극에 있는, 불만에 찬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나 말장난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지각의 간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비/불-합의에 특유한 방식으로, 말하는 존재의 평등이 효과를 갖는 한에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는 존재의 평등이, 비/불-합의가 조직될 가능성 그 자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평등한 관계와 불평등한 관계의 균형을 취하는 비/불-합의라는 형식에서만 이 평등은 효과를 갖습니다. 정치는 공동체의 어떠한 언어적 본질도 실현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공동체 속의 또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동체에 대한 또 하나의 공동체로서 존재합니다. 정치는 보충대리라는 꼴로 산출됩니다. 즉,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을 정하는 감성적 소여에 분열을 생기게 하는, 과잉적 주체가 있는 한에서, 정치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 주체 그 자체를 규정하는 상호성의 수수께끼 같은 정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즉, 정치적 주체란 통치하는 것과 통치되는 것에 관여하는 것입니다[관여한다는 정식입니다]. 이 정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교환에 있어서의 상호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꾸로, 비대칭성입니다. 정치적 주체란 교환에 있어서 두 입장을 번갈아서 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칭성의 안에 있는 비대칭성을 문제로 삼는 사람,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 사람입니다.

민주주의

이 문제화에는 고전적인 명칭이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인민의 권력을 나타내는 이 개념은 합의에 의한 거짓의 명백함으로부터 분리되며, 그 수수께끼에 싸인 빈축을 사는 것의 성격으로 되돌려지지 않습니다その謎めいた顰蹙ものの性格に引き戻されねばなりません. 민주주의는 수많은 통치의 형태 중 하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분류의 논리 그 자체를 파괴하게 되는 특이성, 또는 예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권위의 원리에 기초한 통치에서 이용되는 정치의 개념 그 자체를 파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듯이, 데모스 및 민주주의라는 말은 애초에 공공적 존재가 될 조건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이 공공의 사항에 대해 입밖에 내는 것을 비난하는 모욕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일리아스>에서 오뒤세이아는 데모스에 속하는 주제에 말하려고 하는 ‘평민’ 테르시테스를 지팡이로 칩니다. [데모스에 속한다는 것은] 즉 그가 말하듯이, 정원 외의 사람들로 이뤄진 미분화의 오합지졸에 소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역이 아니라 규정입니다. 데모스 출신자란 계산 밖의 사람, 말하는 존재라고 계산되지 않은 데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최하층민에 의한 통치, 즉 통치를 정초하는 어떠한 자격도 갖지 못한 사람들, 즉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재산도 사회적 위신도 없이, 특별한 학식도 없는 사람들의 역설적인 통치, 빈축을 사는 것의 통치를 의미하는, 아테네의 귀족이 제출했던 비웃는 말입니다. 데모스에 의한 통치란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말을 하는 사람들에 의한 통치, 통치할 자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데도 통치하는 사람들의 통치입니다. 이것은 <법률> 3권에서 플라톤이 분명하게 했던 사태입니다. 3권에서 플라톤은 통치하기 위한 모든 자격을 상세하게 검증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러한 자격 중 6개를 거론하며, 통치해야 할 소실과 통치되어야 할 소질 사이의 상보성을 보여주는 동일한 고유성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통치는 아이들에게, 노인의 통치는 젊은이에게, 주인의 통치는 노예에게, 귀족의 통치는 일반인들에게, 강자의 통치는 약자에게, 그리고 학자의 통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초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치의 일람표는 끝날 터입니다. 하지만 일곱 번째의, 플라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을 ‘신의 몫’이라고 부른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통치, 제비뽑기/추첨에 기초한 통치, 즉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통치의 셈에 들어가지 않는 통치, 통치하는 자와 통치되는 자의 입장이 그 지위를 차지하는 능력에 의해 정해지는 사물의 통상적인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통치입니다. 민주주의는 통치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의한 빈축을 사는 것의 통치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치의 원리 그 자체를, 즉 통치된다고 하는 추가적 소질을 정하는 통치할 자격의 존재를 파괴하는 통치인 것입니다. 그것은 무질서/무원리(아나키)의 역설적인 통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무질서의 통치가 통치하는 것과 통치되는 것 둘 다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정치적 주체의 정의에 의해 생겨난 의문에 대한 대답을 가져다줍니다. 이 대립하는 것들의 동일시는 자연적인 입장의 상호성으로부터 생기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이 동일시는 통치하는 자와 통치되는 자의 입장 사이의 모든 상보성의 단절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통치하거나 통치된다는 사실을, 통치하거나 통치된다고 하는 소질에 의해 정당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의 단절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정치는 [통치하는 것과 통치되는 것이라고 하는] 반대의 입장에 관여함으로써 정치로서 규정되는 것입니다만, 이 참여는 계산 밖의 사람들, 통치하기 위한 모든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통치로서의 데모스를 제외하는 것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란 통치의 한 형식이 아닌 겁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정치의 상징적 창설인 것입니다. 정치란 본질에 있어서는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란 이 통치하는 것의 자명성을 중단시키는 것이며, 어떤 집단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소질을 명목으로 삼아 통치를 행할 능력을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정치란 엄밀하게 이해한다면, 통치하는 것의 모든 정당성의 해체를 그것 자체 속에 포함하는 통치형식인 것입니다. 정치란 말하는 존재가 평등하다는 것이 명령의 불평등한 기능의 방식에 필요한 것처럼, 모든 불평등의 기능 방식에 필요한 평등의 실현인 것입니다. 말하는 존재가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공동체라는 꼴로 직접적으로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 평등은 불평등을 형성하는 조건들 속에서 행사됩니다. 평등이 무조건적인 평등으로서 스스로를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물의 통상적인 질서를 위반함으로써일 뿐입니다. 평등이 평등으로서 스스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추가라는 형식, 비/불-합의라는 형식, 위반이라는 형식에서일 뿐입니다. ‘데모스의 통치’란 이런 위반의 총칭적 명칭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치적 인민이란 주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의 공동체의 전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민 중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는 당사자[=부분, partie]도 아닙니다. 정치적 인민은 실제의 주민의 집단으로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민의 당사자들, 이 당사자들이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 이 자격에 따라서 되돌아올 공통의 것의 몫, 이러한 모든 것을 셈에 넣는 계산에 대한 보충대리인 것입니다. ‘인민’은 보충대리적 존재이며, 셈에 넣어지지 못한 사람들의 계산을, 혹은 몫 없는 자의 몫을, 요컨대 그것 없이는 불평등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말하는 존재의 평등을 편입합니다/엮어 넣습니다. ‘몫 없는 자들’이라는 개념은 포퓰리스트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노동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고 허덕거리는 주민이 아닙니다. 오늘날 제외된 자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목 없는 자’란 일반적으로 통치할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잠재적인 전체를 가리킵니다. 민주주의에 의해서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되는 것은 보충대리적인 공허한 당사자[즉 데모스]입니다. 이 당사자에 의해서 공동체는 사회체의 당사자의 합계로부터 구별되며, 통치는 통치할 특정한 자격의 구체화로부터 구별됩니다. 이 첫 번째 구별에 의해서 정치는 사회의 당사자의 총계에 대한 잉여로서 엮여지는/편입되는 보충대리적 주체의 활동으로서 정초되는 것입니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민이 인구나 인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주민 중의 불우한 당사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산업노동자의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당사자의 총계에 대한 보충대리로서, 셈에 넣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계산 또는 목 없는 자들의 몫의 특정한 형상을 엮어넣는/편입하는 주체인 한에서입니다. 이러한 몫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치의 쟁점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 계쟁의 대상입니다. 정치적 대립은 상이한 이해를 지닌 집단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당사자나 몫을 상이한 방식으로 계산하는 논리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정치적 계쟁은 목 없는 자들의 몫의 존재에 관련됩니다. 공동체의 당사자를 셈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우선 모든 보충대리를 제외하고 실재하는 당사자만, 출생이나 노동, 사회체를 구성하는 지위나 이해라는 점에서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실재의 집단만을 셈하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나아가’ 목 없는 자들의 몫도 셈에 넣습니다. 저는 첫 번째의 것을 ‘폴리스’라 부르고, ‘정치’라는 호칭을 두 번째의 것으로 간직해두자고 제안했습니다.

폴리스와 정치

제가 폴리스라고 부른 것은 관리나 억압처럼 사회의 특정한 기능이 아닙니다. 폴리스는 국가기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삶/생명의 관리의 형식도 아닙니다. 폴리스란 공동체의 상징적 구성, 감성적인 것의 분유의 형식입니다. 폴리스의 특성은 모든 공허나 보충대리를 배제하고 공동체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의 공동체는 특정한 행동양식을 취하도록 정해진 집단, 그 작업이 행해지는 장소, 그리고 그 작업이나 장소에 어울리는 존재양식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기능과 장소, 존재양식이 적합하다면, 어떠한 공허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는 것이 국가의 실천을 지배하는 폴리스의 원리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몫 없는 자의 몫을 더하여 계산함으로써 이러한 배치/장치를 교란하는 것입니다. 이 보충대리적 계산은 제가 정의했던 의미에서의 비/불-합의, 즉 감성적 소여의 분할에 의해 출현합니다. 정치는 폴리스의 세계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 말을 할 수 있는 것, 셈해질 수 있는 것의 변경으로서 출현합니다.

‘폴리스’나 ‘정치’라는 말이 통상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면, 지금 말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정치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이 투입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 ‘공공의’ 장소, 즉 도로의 소유와 사용에 관한 계쟁입니다. 폴리스에 있어서 도로는 사람이나 재화가 순환하도록 정해진 공간입니다. 정치는 이러한 용도를 교란합니다. 도로는 정치에 의해서, 그러므로 공통의 문제를 다루라고 주장하는 정원 외의 주체(‘민중’, ‘시민’, ‘노동자’ 등)가 시위를 하는 공간으로 됩니다. 폴리스에 있어서 공동체에 관한 문제가 다뤄지는 공간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즉, 그 용도가 정해진 공공시설에서, 그 직무를 맡도록 정해진 사람들에 의해서 다뤄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정치는 감성적 세계에 혼란을 도입하고, 거기서 해야 할 것, 봐야 할 것, 계산해야 할 것의 공간을 고쳐 씀으로써, 몫이나 당사자의 배분을 틀어지게 합니다. 정치는 계급이나 당사자 사이의 대립이기 전에, 감성적 세계의 배치를 둘러싼 대립입니다. 이런 대립의 행위자(actor)나 대상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 배치에서입니다.

[감성적 세계의 배치를 둘러싼] 이 대립에서 바로 언어의 ‘정치성’이 출현합니다. 정치가 우선 발표나 슬로건, 주체의 이름에 의해 특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치적 주체의 이름에는] 고전적인 이름도 있다면, ‘공장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와 같이 한 시대를 긋는 이름도 있으며, ‘인민’이나 ‘시민’처럼 시대를 넘어선 이름도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 때문에 발안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68년 5월의 파리 시위대의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라든지, 인종차별이나 외국인 배척 운동에 대한 최근의 시위대의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자식이다”가 그렇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처럼 고전적 슬로건도 있으며, 그 밖에도 특수한 요구나 항의에 있어서 살포되는 슬로건적 기호표현은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름이나 슬로건은 모두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계쟁적인 언표나 이름이며, 현행의 감성적인 것의 분유를 다시 묻는 보충대리적 언표나 명사입니다. 68년 파리의 시위 참여자들은 시위 차가자 중 한 명에게 부여된 “독일인 아나키스트”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다시 채택하여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꼴로, 비한정적인 집합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변형했는데요, 그들[의 이런 방식]은 데모스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목 없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권위를 행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정치적 공동체의 이름으로 바꿨던, 저 최초의 논리를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주체의 이름은 늘, 특수한 말이나 집단행동 속에, 몫 없는 자들의 비한정적인 집합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양식입니다. 즉, 정치적 주체의 호칭은 늘 특정한 감성적인 것의 분유에 의해 정해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과 소음의 관계를 재차 문제로 삼기 위한 하나의 양식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정치적 주체의 이름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이 행했던 것입니다. 애초에 이것은 거대 산업의 노동자 집단이라고 하는, 역사적으로 한정된 사회집단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우선, “아이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로, 법률에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즉, 이름도 말도 갖지 못하고, 이름을 전하지도 못하고 재생산되는 존재인 겁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19세기의 노동자 투쟁이라는 특이성과,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의 정치적 공동체로의 잠재적 포섭을 연결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노동과 재생산의 세계를 공공적 말과 활동의 세계로부터 구별하는 폴리스의 논리를 철폐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하나의 사회적 범주의 요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말과 소음의 배치 그 자체를 고쳐 쓰고, 다양한 형식의 언표를 지시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대화는 원리상 비/불-합의적이며, 비/불-합의적인 한에서 포괄적입니다. 정치적 대화에 의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며, 시끄러운 동물로서만 들려졌던 사람들이 말하는 주체로서 들려지게 되며, 봐야 할 것도 토의해야 할 것도 없다고 선언되었던 사람들조차 대화의 상대로서 계산되게 됩니다. 그것에 의해서 정치적 대화는 계산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포섭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치에 고유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란 늘 ‘데모스의 권력’의 특수한 현실화이며, 정치적 공동체를 폴리스적 공동체로부터 구별하는 몫 없는 자의 몫의 출현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체에는 청년 맑스가 프롤레타리아에 관해 내렸던 정의, 즉 ‘사회의 한 계급이지만 사회의 한 계급이 아니다’라는 정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주체는 현세적인 주체화 장치로서만, 폴리스적 질서를 해체하는 논쟁적이고 역설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한정된 능력으로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는 늘 불안정하고 자신들의 몫의 최대화를 꾀하고자 하는 사회체의 당사자와 혼동되기 쉽습니다. 정치가 지배의 ‘정상적인’ 흐름의 특이한 일탈이라면, 늘 소멸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상실의 가장 근본적인 꼴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인 폴리스와의 혼동입니다. 정치적 주체에게서의 위협은 사회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당사자, 또는 이 사회체 그 자체와 혼동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자를 새로운 사람의 ‘영광의 신체’와 동일시했던 소비에트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현대의 합의체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우리의 국가나 사회를 조정하는 합의는 엄밀하게 이해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합의란 단순히 다양한 꼴의 적대관계보다도 토의나 교섭에 특권이 부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순히 세계의 현상황에 관한, 또한 합의에 의해 권위가 부여되는 부와 권력의 국지적인 재배분의 가능성에 관한, 정부 여당과 야당의 포괄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합의란 감성적인 것의 데이터가 유일하고 일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의의 관점에서, 경합하는 이해나 가치에 관해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수단의 효과에 관해서 토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의 데이터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상황의 데이터는 전문가의 앎에 의해 완전히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황의 데이터는 그것 자체가 다양한 절차에 의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는 주민에게, 애매함을 남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절차의 예로서, 주민의 각 당사자, 경제적 각 집단, 이데올로기상의 각 집단, 각 연령층이 각각의 문제나 제안된 해결책에 관해 지닌 생각을 고정화할 수 있는 여론조사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를 들어 문제에 의해 정해진 집단이나 이해관계의 대표자들 사이의 교섭을 들 수도 있죠. 본질적인 것은 토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데이터와 동시에, 토의의 상대를 맡을 수 있는 주체를 객관화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합의란 원리상 몫 없는 자의 목은 제외하는 감성적인 것의 분유라는 것입니다. 합의는 공통의 상황의 데이터 그 자체에 관련된 비/불-합의를 도입함으로써, 몫 없는 자의 몫을 포섭하는 보충대리적 주체의 활동을 제외해버립니다. 확실히 합의도 제외자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합의는 그 사람들을, 이중화되고 정치적 주체화에 포함된 사람들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합의는 그들을, 사회가 사회의료나 교육에 의해 사회에 재통합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외부, 사회의 최하층에서 허덕거리는 사람들, 환자나 정신박약자로서만 인정합니다.

이것은 합의가, 말하는 존재의 능력과 공동체로의 귀속 사이의 단순하고 비/불-합의적이지 않은 관계를 전제로 하여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합의는 언어능력이란 공통경험의 감성적 데이터를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이나 설명 가능케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것들을 평등한 화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여 기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능력과 정치적 능력 사이에 단순한 관계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언어의 투명성과 감성적 데이터의 투명성 사이에 단순한 관계는 없습니다. 합의는 말이 공통의 유용성에 관련된 메시지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말은 늘 메시지와 동시에 어떤 정의나 부정의를 전합니다. 말은 이해를 위해 필요한 평등과, 말을 문제로 삼는 불평등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전합니다. 말은 입장과 권한의 특정한 분배 방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학교로서의 합의 국가

정치적 비/불-합의는 평등과 불평등의 특정한 관계수립입니다. 비/불-합의가 지워진 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명백한 대상과 관련된 순수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다른 형식의 평등과 불평등의 연결입니다. 이 형식은 고전적 형식, 학교의 형식입니다. 이 강연의 초반에 지적했습니다만, 합의 국가는 점점 더 국가-학교(État-École)로 되고 있습니다. 학교는 실제로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의 기능의 원형입니다. 학교는 말하는 존재의 평등을 기능시킵니다. 이 평등 없이는 교사의 말은 공허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평등이 기능하는 것은 일정한 불평등한 제도/레짐에서, 즉 지식의 불평등에서입니다. 이처럼 말하는 존재의 평등이 불평등하게 기능하는 것 자체가, 학생이 교사의 권위를 손에 넣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평등이라고 하는, 새로운 평등을 위한 준비라고 정해져 있습니다. 이 구조에 의해서 학교는 현대사회와 현대국가의 진보주의적 사회질서의 상징적 장소로 되었습니다. 즉, 불평등은 자기 소멸로, 도래할 평등의 지배에 가까워진다는 이미지입니다. 문제는 물론, 불평등이 좀처럼 자기소멸하지 않고, 평등이 그로부터 생긴다고 간주되는 불평등의 상황을 다시 만들어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불평등의 자기소멸이라고 하는 공화국 정부가 부여한 프로그램을 한 번도 완수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했던 것은 거꾸로, 합의 정부라는 새로운 통치형식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합의 정부란 세계의 상황을 이해하는 수단이나,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또한 따라서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수단을, 제한 없이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학교 정부(gouvernement-École)입니다. 정보를 제공하고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은 학교 정부의 슬로건이며, 그것은 우리를, 우리의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의 좁은 한계에 관해서, 또한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훨씬 더 좁은 한계에 관해서, 모조리 알고 있는 계몽된 시민이고자 할 기획의 슬로건인 것입니다. 합의 국가란 학교의 논리와 일체화한 국가, 즉 신민에게 그들의 무력감을 주입하고 신민에게 학식을 가져다주면 가져다줄수록 그 무력감을 주조해내는 국가인 것입니다.

1830년대에 조제프 자코토라는 프랑스인 교육학자, 혹은 반-교육학자가 진보주의적인 교육에 의한 평등이라는 논리 전체를 뒤쪽에서부터 공격하여 대학의 세계에 폭탄을 던졌습니다/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학생에게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만일 설명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게 되고, 점점 더 학생의 지적 무능력이 증명되게 된다고 자코토는 말했습니다. 불평등을 줄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평등을 강화시켜 버립니다. 평등에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평등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즉, 자코토는 인민의 교육에, 지적 해방을 대립시켰던 것입니다. 이 지적 해방은 평등과 불평등 사이의 관계의 역전에 기초하고 있으며, 식자(識者)와 무지한 자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하는 전제에서가 아니라, 지성은 평등하며 대등하게 말하는 존재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를 갖는 것은, 이 관점의 역전을 어떻게 교육에 적용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흥미를 갖는 것은 인민교육과 지적 해방의 대립에 의해 우리가 집단생활에서의 언어의 기능의 문제를 어떻게 고쳐 물을 수 있는가입니다. 집단생활에 관한 유용한 데이터만을 전달하는 중립적인 언어형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존재의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의 전달이 늘 행해지고 있습니다. 정치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평등이 지닌 유효한 특성의 의미입니다. 이 유효한 특성은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이 유효한 특성은 비/불-합의를 통해서만, 두 개의 논리의 대결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야 비로소 말하는 존재의 평등한 능력에 의해 정치의 길이 열립니다. 합의가 지배적인 때에 우리의 말의 활동에 이러한 분리가 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http://multitude.co.kr/category/%ED%83%80%EC%9D%B8%EC%9D%98%20%EC%82%AC%EC%9C%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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