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생활전선 : 소시덕후의 명동 점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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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저주 10] 소시덕후의 명동 점령기

강남좌파 프리스티는 왜 명동 재개발 투쟁에 갔나 

평범한 오덕후라고요?
아닙니다. 살아 숨 쉬고 움직이고 실천하는 진짜 오덕후, 프리스티입니다!

때는 2011년 여름. 서울 명동에는 철거민 투쟁 현장으로 유명한 ‘마리’를 지키는 한 마리 소덕(소녀시대 덕후(오타쿠))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마리를 비롯한 명동 재개발 구역에 출몰하는 건장한 철거 용역일까? 용역 알바들이 대체로 대학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온 20대 청춘 사내들이라고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카페 마리 앞에 진 치고 있었던 용역 아이들의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넌 재미 없어 매너 없어! Run Devil Devil Run Run’ 이 들리고 있었다는 목격담이 들렸다. 그러니 전설의 소덕이 철거 용역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것 아니겄’소’?

그러나 이번에 만난 명동 마리의 소덕은 그들과 대치했던 한 청년, 프리스티(김예찬, 25세).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20대 청년들이 재개발 구역 세입자 보상 투쟁의 현장에서 적으로 조우해 서로 대치한 기묘한 현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특히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청담동 소덕-그는 소녀시대 옛 숙소 옆에 살며 그녀들을 종종 엿보곤 했다!-이 명동 재개발 구역의 ‘점령자’로 거듭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프리스티는 강제 철거로부터 세입자 권익을 지키고자 카페 마리로 모인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마리의 철거민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강남좌파(?) 프리스티, 명동 카페 마리를 점령하다

-명동 재개발 현장에는 어떻게 가게 됐어요?

친구들에게 명동 카페 마리 재개발 소식을 들었어요. 마리 이전에도 홍대앞 두리반 칼국숫집에서 비슷한 투쟁이 있었어요. 두리반 세입자 보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두리반에서 함께 투쟁하던 사람들이 명동 마리 투쟁에 함께하게 됐는데, 저도 그때 소식을 들었어요. 여기에도 두리반처럼 철거용역들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내용을 트위터에서 봤고, 거기서 세입자 일을 자기 일처럼 관심 깊게 생각하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죠. 카페 마리에 가면 그렇게 알게 된 친구들을 볼 수 있었고요.

-원래 두리반이나 마리 같은 재개발 지역 세입자 권리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었어요?

두리반에는 한 번씩 왔다갔다하는 수준이었어요. 두리반에는 공연하거나 아니면 상근하는 식으로 자주 오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저는 그냥 한 번씩 가는 수준이었죠. 그러다가 마리에서는 거의 살았어요. 명동 마리가 문제가 된 게 2011년 6월 중순부터 9월 초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4개월 정도인데 저는 6월 말 잠시 농활에 다녀온 기간을 빼고는 거의 마리에 살았죠.

-명동 마리의 경험을 토대로 책을 쓰고 있다고 들었어요. 마리에서 대치했던 4개월 경험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언론에서 봤을 때는 그냥 투쟁이죠. 재개발 예정 상가의 세입자 보상 문제가 걸려있는 투쟁이요. 권리금 문제나 그런(재개발 추진 건설사 등이 부담하는 보상) 비용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니까 농성하게 된 것이죠. 명동 3구역 세입자들은그런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2, 4구역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는데 3구역에서 먼저 공사가 시작돼 그쪽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명동 마리라는 공간에 사회의 이목이나 언론 보도가 왜 집중됐을까요? 다른 여러 재개발 지역에서도 보상과 관련한 세입자 투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지금도 서울 북아현동에서 비슷한 이유로 철거민들이 농성하고 있어요. 사실 전국 어디를 가봐도 재개발을 하지 않는 데가 없잖아요. 똑같이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마리가 다른 곳과 비교해 특별한 곳이 된 까닭은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이슈로 부각되니까 언론 주목도가 높았죠. 명동이 지리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많이 참여했을 수도 있고요. 직전에 두리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두리반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서) 마리에 투쟁역량이 집결됐다는 분석도 가능하겠죠. 한편으로는 트위터 같은 SNS의 역할이 컸다고 봐요.

SNS, 명동마리, 그리고 두리반

-트위터와 같은 SNS가 마리를 더 주목받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트위터가 이런 소식을 전하는 공간으로 적당하잖아요. 2011년 초에는 트위터에서 홍대청소 노동자 문제가 많이 얘기됐고, 그 이후에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중요 화제였죠. 그해 여름에는 한진중공업 문제와 더불어 카페 마리 투쟁이 트위터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고요. 그때 많은 트위터러가 마리나 한진중공업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슈가 더 빨리 확산했다고 봐요. 그렇게 해서 카페 마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곳에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생활 자체를 SNS를 통해 지속할 수 있었어요. 쌀이나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 목록을 SNS에 올리면 시민들이 해당 물품을 자발적으로 마리로 보내주거나, 후원금을 보내줬어요.

마리 농성장에서 사람들이 누워 전화기를 만지며 놀고 있다. 마리에 오면 바로 옆 사람과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통해 트위터로 대화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실제로 연대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트위터 사용자였다는 후문.

-두리반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후 명동 마리 문제에 사람들이 더 주목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명동 마리 투쟁을 두리반의 연속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일단 두리반에서 이긴 경험이 마리 철거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니까요. 트위터나 SNS를 통해 모이게 된 시민과 연대해서 두리반처럼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 거고요. 두리반에서 싸우던 사람 중 여럿이 두리반 협상 타결 이후 마리로 옮겨왔어요. 마리로 온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그곳을 자율적으로, 주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직운동권 밖의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대했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두리반과마리는 같은 투쟁 양상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두리반보다 마리가 더 자율적인 분위기를 추구한다든가 그런 면에서 다른 점이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두리반과 마리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마리에서도 공연이 열리고 여러 가지 기획이 진행됐지만 그게 두리반에서처럼 정기적으로 ‘월요일은 무슨 공연, 화요일은 무슨 공연’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어요. 대신 마리는 외부 사람들이 와서 며칠 하고 싶어하면 공간을 빌려주는 방식이었어요. 두리반에 온 사람들이 문화나 문예 쪽, 그러니까 음악이나 다큐멘터리, 미술 같은 쪽으로 강한 성향을 띠고 모였다면 마리(에 사람들이 참여하는 방식)에서는 ‘생활’ 측면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단순히‘기성 운동권 집결지’라고 보는 건 틀린 분석이겠네요?

기성 운동권이 하던 방식과는 다르죠. 일단 SNS를 통해서 온 비조직 개인들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조직운동은 마리에서 결합하기가 어려워요. 자기들 (활동의) 싸이클이 있으니까요. 여름에는 농촌봉사활동에 가고 포럼 같은 것을 하고 그런 식으로 학생회와 연계해서 하는 흐름이 있기 때문에 마리에 일상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죠. 물론 마리에서 캠프를 하면서 참여했던 대학생사람연대(대사연) 같은 대학생 조직도 있었지만 대사연은 조금 특수한 사례로 파악돼요. 대사연이 학생회 기반으로 활동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자유스러운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거든요. 그러다 보니 마리에서는 보통 다른 농성장에서 조직들이 강한 힘을 행사한 것과 다른 양상이 펼쳐졌죠. 운동권 조직이나 진보 정당이라던가 그런 사람들이 주도하는 투쟁을 거부하고 자율적인 개인들이 모여서 연대해 보자는 분위기가 마리에 있었죠.

-조직운동권도 아닌 일반 시민, 특히 청소년이나 20대 청년들, 대학생들이 마리와 같은 세입자 투쟁 현장에 가서 투쟁에 참여했던 이유가 뭘까요?

마리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을 보면 10대, 20대가 많았는데 그들에게는 ‘공간’을 향한 투쟁이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철거민들을 위한 투쟁이라는 의미만큼이나 그런 성격이 강했다고 보거든요. 보통 생각하는 철거민 투쟁의 양상과는 조금 달랐다는 거죠. 흔히 언론에서 보도하듯 문화 기획이나 연대가 많이 이뤄졌다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모였던 (젊은) 사람들에게 마리라는 공간, 또는 두리반이라는 공간은 공간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존재했던 것이죠. 저에게도 그런 의미가 있었고요.

마리가 세입자들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공간이 되기까지

-세입자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 마리를 자신들의 공간이라고 느꼈다는 거네요. 용역이 급습해서 불시에 철거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주간반, 야간반으로 나눠서 생활했나요?

아니요. 나누지 않고 그냥 가고 싶을 때 가죠. 거기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와 같은 대학생이나 20대가 많이 왔고요.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살았어요. 탈가정 청소년들, 흔히 말하는 가출 청소년들이 적잖게 있었죠. 가면 알아서 밥을 먹고 마리를 비롯해서 상가 건물에 흩어져 있으면서 같이 생활했어요.

-밥은 누가 해요?

밥을 사올 때가 있지만, 보통은 세입자들이 했어요. 통상 여성 세입자들이 밥을 짓는 현상을 두고 그게 옳으냐 그르냐하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죠. 어쨌든 그렇게 밥이 제공되면 각자 알아서 먹고 알아서 설거지를 해요. 가위바위보를 하든지, 하여간 알아서 하죠. 수요일마다 바로 옆에 있는 향린교회에서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으면 그냥 알아서 놀아요. 원래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만화책을 볼 사람은 보고 그렇게 노는 거예요.

-연대했던 사람들이나 세입자가 같이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어떻게 마련해요?

기금 같은 것을 사회단체들에서 주기도 하는데 대부분 트위터로 조달해요. 트위터에다가 지금 마리에 쌀이 부족하다고 하면 다음날에 쌀이 와요. 물이 부족하다고 하면 다음날에 생수가 몇 통씩 와요. 지금은 그런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 모습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어요.

2011년 7월 트위터에 올라온 명동 카페 마리 후원 요청 트윗

-마리 생활 자금이 후원 계좌로 이체된 게 아니라 SNS를 통해 현물로 배달됐다는 거죠?

현물로도 배달되고 계좌로도 들어왔죠. 세입자대책위 위원장 계좌로 후원 자금을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돈 쓸 일이 별로 없는 거예요. 왜냐면 (SNS를 통해 알려져서) 김치가 들어오고 쌀이 들어오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음료수나 술, 과자 같은 것을 사오고, 굉장히 물품이 많이 들어왔거든요. 마리 상황이 끝난 다음에 보니 쌀이 굉장히 많이 남았더라고요.

-SNS를 통해서, 또는 지나가던 시민이 도와주고 그러면서 주로 갈 곳 없는 탈가정 청소년이나 사회 문제에 관심 많은 적극적인 20대 청년들이 마리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네요. 의사결정도 다 같이 참여해서 하는 식이었나요?

회의체가 있었는데 세입자들은 세입자들끼리 세입자대책위에서 논의하는 게 있었고, 주로 10대, 20대 참여자들이 결성했던 명동해방전선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끼리 활동 방향을 논의하고 그랬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세입자들과 다 같이 총회를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일이 있고 필요할 때 비정기적으로 총회를 소집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것도 자율적인 참석이었고 세입자들도 몇 명만 왔어요. 주로 그냥 앞으로 어떤 걸 하자고 이야기하면서 활동의 항상성, 동심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죠. 결국, 그냥 자기가 열심히 활동하고 싶으면 (회의 참석 등) 활동하는 거고 그렇지 않고 놀러 오고 싶다면 놀러 와도 되는 거였죠. 어떻게 활동해야 한다는 강요는 없었어요.

-세입자들은 ‘외부 세력’이 와서 공간을 차지하면서 회의에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야기하는 것을 달갑지 않아 하지는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연대한 사람들의 주장에 거의 따르는 편이었어요. 우선 이해관계가 일치한데다, 사실 이 친구들이 빠지면 (철거민들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공간을 다시 배분하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마리가 다른 재개발 지역 보상 투쟁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부담 없이 왔다갔다하거나 참여하거나 하는 그런) 자율적인 성향이 있다 보니까 그 공간을 우리가 더 잘 사용하려면 어떻게 할지 논의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입자들이 같이 생활하는 공간인데 거기에 와서 연대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간 배분을 다시 하자고 했다고요?

그게 다른 투쟁현장과는 다른 점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보통 그런 데에는 연대하러 가는 것이지 자신의 공간이라고 느끼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마리에 온 사람들은 스스로 청소하고 꾸미고 세미나도 하고 그러면서 그 공간을 자율적인 공동체 같은 것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마리가 있는 건물 1층에 세 개의 공간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군데를 세미나 공간으로 정해 같이 공부하고 회의하는 데 쓰자는 의견이 나왔죠. 카페 마리 오른쪽은 토속마을이라는 순대국밥집인데 거기도 사람들이 점령해서 생활하고 있었거든요.

-쫓겨날 처지의 세입자들 공간에서 그 공간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같이 놀고 먹고 공부하고 잘 수 있는 일종의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거네요.

그래서 토속마을에 책을 많이 갖다 두고 세미나 공간으로 쓰자고 하면서 토속마을이라는 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자고 자꾸 무질서하게 되니까 토속위원회를 자율적으로 만들어서 그 공간을 새로 꾸미고 그랬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네들이 만들고 싶다고 해서 엄청나게 열심히 청소하고 그랬어요. (마리 투쟁에 참여한 10대, 20대에게)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매력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꼭 재개발 지역 세입자 보상 문제에 관심이 없었더라도 마리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 있는 활동을 자유롭게 해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누구나 먼저 이야기만 해두면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슬럿워크도 준비를 마리에서 했었고요. 음악 공연, 디자인 관련 세미나 등 여러 가지 기획이 마리에서 많이 이뤄졌어요.

슬럿워크 기획회의를 취재하러 마리를 방문한 한 기자(@pudXXXXX)의 트윗. 2011.8.

[좌] 카페 마리 옆 토속마을 순대국밥집에서 열렸던 즉흥극 워크숍. 마리에 있던 학생들과 세입자, 워크샵 주최 측이 함께 어울린 시간. 2011. 7. [우]대안생리대 쓰기 운동을 하는 한 시민단체가 카페 마리에서 했던 워크숍. 2011. 7. 출처 : 명동해방전선

경축! 카페 마리와 명동3구역 협상 타결!
그런데우리는… “갈 곳을 잃어버렸어요! ㅠㅠ”

-3구역 보상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는 마리에서 연대했던 사람들이 다 헤어졌나요?

다른 투쟁 장소로 가기도 했지만, 그냥 떠돌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봐요. 사실 마리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사람들이 자기들을 일컬어 “내가 철거민이 돼버렸다. 있을 곳을 잃어버렸다.”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4개월여의 투쟁이 어쨌든 시행사와 합의를 통해서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당연히 좋긴 좋았죠. 사실 그때 승리해서 좋다는 그런 것보다는 있을 곳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물론 그게 승리였느냐 아니냐가 애매하긴 하죠.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있지만, 재개발 자체에 반대하는 뜻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마리가 있는 명동 3구역 협상이 종료되고 나서도 사람들이 그 근처를 떠돌았다고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마리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시내와 별로 상관없던 사람들이 그 근처를 왔다갔다하는 게 보여요. 지나가다 보면 다 있어요. 항상 망령처럼 을지로, 종로 일대를 막 헤매고 있어요. 그러다가 시청 광장이라든가 대한문 앞, 그 근처에 있던 재능교육 농성장이라든가 그런 곳에서 종종 마주치죠. 별다른 (집회 같은) 게 없어도 그 인근 장소를 그냥 사람들이 떠도는 거예요. (웃음)

이 대목에서 필자는 대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필자는 대학에 다닐 때 대학연합철학학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특정 학교 소속이 아니어서 학내 동아리방을 구하기 어려워 학회비를 근근이 모아 저렴한 월세방을 구했다. 학회 방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쓰러져 가는 건물 2층에 있었는데, 학회 방에 가기 위해선 경사각이 45도는 족히 넘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굽이굽이 골목길에 있는 학회 방은 늦은 시간 여학우들이 홀로 다니기 부담스러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대학생의 주머니 사정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학회원들끼리 함께 공부할 수 있고, 심심할 때 그냥 놀러 갈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필자와 동료는 강의실이나 유료 세미나실을 빌리는 떠돌이 생활로 돌아가게 됐다.

-자신들만의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요? 예를 들면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수업을 듣는 공간과 생활 공간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면 강의시간의 강의실과 도서관열람실 외에는 갈 데가 없잖아요. 친구들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어도, 같이 놀고 싶어도 돈 없으면 할 수 없죠. 공간이 없는 학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커피숍이고, 그래서 시험기간에 대학 근처 카페가 만석이라는 기사가 나오죠. 마찬가지로 많은 20대 청년들에게는 카페 마리에서 투쟁도 투쟁이지만, 대학 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공간’이라는 의미가 중요하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이 크다고 생각해요. 마리에 온 사람들이 보통 10대, 20대이고 마리에 그냥 놀러 가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대학생이건 10대건 기본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할 만한 공간이 좀처럼 없잖아요. 예를 들어 대학생에게는 같이 부대끼고 놀면서 뭔가 기획하고 그럴만한 공간으로 과방 같은 곳이 있다고는 해도 군대에 다녀오고 고학번이 되면 과방에 가기가 뻘쭘해지는 게 현실이죠. 어쨌든 기를 펴고 살만한 독립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죠. 이제는 마리 같은 공간을 만들 수도 없고…

-청년 문제의 한 축으로 ‘공간’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청년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특히 ‘공간’이 없다는 점이 청년 운동이 다뤄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봤어요. 청년 운동이 무엇이냐고 할 때 보통 등록금 문제나 실업 얘기 같은 것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청년들의) 문화 문제도 심각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청년 문화라는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런 문화는 공간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공간을 제공해야 문화가 생기는 거고 확산이 되는 거니까요.

-청년들에게 공간이 없다는 건 카페 마리처럼 놀면서도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뭔가를 같이 기획해 본다거나 그런 공동체를 꾸릴만한 곳이 없다는 건가요?

그런 것뿐 아니라 그냥 노는 공간도 부족하다는 거죠. 사실 20대들이 친구들을 만나도 가는 곳이라는 게 카페나 노래방, PC방, 이런 데잖아요. 술 마시거나 그런 식으로 소비하면서 노는 거죠. 그런데 그런 건 사실 질리잖아요. 재미가 없을뿐더러 얼마나 주체적이지 못해요. 맨날 하는 것도 똑같고요. 그래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제대하고 나서 그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우리가 부모의 개입이 없는 우리의 집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우리가 모여서 같이 학습하고 생활하고 이야기하면서 치열하게 서로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미로요.

“청년들에게 공간을!”
강남좌파(?) 프리스티, 독립된 공간을 위해 가출하다
– 공동생활전선 실험

청담동 도련님 프쨩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게 독립된 공간에서 같이 학습하고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지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구해서 집에서 나와서 사는 거예요?

따로 나와서 산 지 아직 2년이 안 됐어요. 2010년 8월에 집을 나왔거든요. 군대에 있을 때 구상해서 처음에 열 명 정도가 모였어요. 보증금을 십시일반으로 같이 마련했고 그중에서 실제로 거기에서 주거하는 사람들이 월세를 내는 거죠. 그러면서 같이 세미나 공간으로 쓰고 그랬어요. 멤버는 한두 명 정도 바뀌었어요. 같이 사는 사람은 지금 네 명이고요. 주로 같은 대학이나 가까운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고 대학원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같이 살면서 어떤 공부를 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를 했어요. 자신이 관심 있는 영역이 정치경제학이면 정치경제학 강의를 해주고, 저는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동아시아 세미나를 했고요. 공통의 세미나로 마르크스를 했어요.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따로따로 정해서 공동생활전선 열 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세미나를 진행하고 그러다가 공통 세미나가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서 1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서 각자 글을 쓰고, 그 글을 두고 논의하고 서로의 관심 분야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죠.

-지금은 안 하고요?

2011년까지는 그렇게 했어요. 그러다가 구성원들이 각자 하는 일들이 너무 달라졌고 대학원을 준비하던 친구 중에 대학원에 간 친구가 있고, 논쟁이 있고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애매해졌어요.

-돈을 나눠내서 잠만 같이 자는 게 아니라 같이 공부하고 같이 성장할만한 활동을 생활 속에서 규칙을 정해서 추진한 거네요. 체력을 같이 단련한다거나 그런 것도 있었나요? 구보라든지…

새벽에 일어나서 구보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게는 못했고요. 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같이 운동하자고 한 건데 잘 안 됐죠. (웃음)

-군대식 무장투쟁조직을 만들려고 한 건가요?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게 알고 보니 영화 <넘버 3>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좌파 무장투쟁조직?! (웃음)

처음에 (공동생활전선에 대해) 논의한 게 군대에 있을 때라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 거예요. 그때 논의했던 사람들이 완전히 학생 정치조직에 몸담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학생 정치조직 식으로 하는 것은 어려웠고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있었죠. 군대처럼 우리에게 규율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했는데 결국 그렇게는 안됐죠. (웃음)

<쉬어가며 –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짧은 소개>

시도 초기의 프리스티 글 발췌(2010. 1. 26)

Q: 왜 꼭 지금 가출해야 하나? 사실 가출해서, 일해서 돈 벌며 공부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큰 낭비 아닌가? 차라리 일단 자신이 집에서 보조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자신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그 후에 가출한다 해도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

A: 집에서 돈을 받으며 공부한다는 것은 어쨌든 부모에게 빚지는 것이다. 그 빚은 어떤 형태로든 나중에 갚아야 한다. 아니, 부모·자식 관계가 일반적인 채무관계와 어떻게 같느냐고? 생각해 보라. 어쨌든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나중에 자식의 (경제적) 성공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식이 부족함 없는 삶을 살기 원하는 마음이 물론 크겠지만, 어느 정도는 경제적, 혹은 심적인 ‘부양’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전혀 경제적 부양을 바라지 않는 부모더라도, 자식으로서도 내가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 자체가 하나의 부담이다.

경제적 성공과 상관없이, 사회를 위해서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위해서건 사랑을 위해서건 어쨌든 뭔가 하기 위해서는 젊은 나이일수록 오히려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부모에게 빚진 상태로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나아갈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인생’이 아니다. 부모의 기대를 채우기 위한 인생이지.

Q: 공동생활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개인 공간이 없으므로 사생활을 침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아무런 마찰 없이 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대의’라는 목적과 ‘규율’을 제시했는데, 만약 시작할 때는 다들 열의에 충만한 상태라 별문제가 없어 보일지라도 누군가 모임을 빠지거나 지각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A: 맨 처음부터 지속적인 규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단위로 자율적인 규율 정하기가 있을 것이다. 그 단위는 한 달이 될 수 있겠고, 한 주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함께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서로가 가진 책임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이 잠을 이겨내며 새벽기도에 나오는 정도의, 그 정도의 책임감은 적어도 갖추고 있어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반대로, 그 정도의 책임감이 있다면 누구나 같이할 수 있을 정도의 규율이 될 것이다.

Q: 공동생활 전선에서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한 것 같다. 공부하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어도, 정치적 실천이라면 뭘 말하는 건가?

A: 실천이라면 소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공동생활전선의 아지트는 분명 학교 근처에 차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 근방의 거주민들은 대부분 학생일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펼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주위에 사는 학생들을 초대해 영화를 보고 토론회를 한다든지, 주위의 하숙/자취생들을 모아 자발적으로 골목길을 쓸고, 제설작업을 해나간다든지 하는 소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또 공동생활전선의 이름을 내걸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도 공동생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알바 방안, 따로 또 같이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 공동생활 중에 지켜야 할 연애의 원칙, 기상과 취침, 세미나와 강독 시간 등을 정해놓은 공동 시간표 등에 대한 방향이 글에 담겨 있었다. 현재 프리스티는 다른 3명과 함께 살며 생활학습연대조직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대체로 20대 논객이나 저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선거의 해 2012년에<개념찬 청춘-원하는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정치적 주체>라는 책을 낸 정치학도 조본좌(필명) 씨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를 쓰고 인터넷논객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가분 씨 등이 그의 룸메이트.

불온한 군인들의 암중모색?

-군대에 있으면서 어떻게 군인들끼리 모여서 공동생활전선을 같이 구상할 수 있었나요?

공군으로 복무할 때 인트라넷 커뮤니티 ‘책마을’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얘기하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결의를 맺었죠. 육해공군이 다 들어오는 곳이었고 기본적으로는 독후감을 쓰는 곳이었어요. 그러다가 갈수록 일상적인 얘기를 많이 하게 되고 정치적인 주장을 하고 그런 분위기가 됐죠. 자체적으로 백일장 같은 것을 열기도 했고요.

-군대 인트라넷에서 정치적인 얘기를 쓸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비밀사이트였던 거죠. 공식적인 사이트가 아니라 무슨 부대 사이트 내에 만들어놓은 것이었어요. 육군 OOO이라는 부대가 있는데 거기 사이트 내에 그 부대 병사들 소모임처럼 만든 건데 그게 소문이 나면서 육해공군이 다 들어오게 됐던 거죠.

-원래 그런 군대 인트라넷 소모임들이 많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책마을 뿐 아니라 네 개 정도가 있었어요. 정보기술(IT) 정보를 공유하는 컴퓨터 덕후들이 모인 데가 하나. 자작 게임을 만들어서 올리고 그런 데였죠. 모든 게 한정된 군대에서 그런 걸 그냥 막 노가다로 만들어서 올리는 애들이 있는 거예요.

-군대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웃음) 또 어떤 군대 내 소모임이 있었어요?

음악커뮤니티가 있었고 축구 커뮤니티도 있었죠. 축구 커뮤니티는 자기들끼리 엑셀을 가지고 리그를 하고 그랬죠. 서로의 능력치 같은 것을 정해 무슨 프로그램을 만든 뒤에 심판 역할을 하는 운영자가 한 명 있어서 두 팀이 붙으면 각 팀 선수를 여기저기 배치해서 변수들을 조합하는 거죠. 그래서 쭈르륵 (엑셀 프로그램을 돌려서 게임을) 해서 점수를 내고 그런 식으로 경기하는 거예요. 되게 신기했어요. 군대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서 리그를 돌리고… (웃음)

-군대 내 소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공동생활전선을 하려고 만나기도 했나요? 군인들끼리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실제로 모였어요. 되게 재미있는 경험이었던 게, 책마을 컴뮤니티 사람들이 한번 만나자고 그래서 휴가를 맞춰서 나가기로 했거든요. 사실 휴가를 맞춘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걸 또 맞췄어요. 처음에 경희대 회기 역 쪽에서 만났는데 조금 떨렸죠. (웃음)

-군인들이 휴가나와서 여자친구를 만난 게 아니라 군인들끼리 만났다고요?!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요. 인트라넷으로만 글 올리고 얘기 나누고 그러다가 진짜로 만난 거죠. 처음 만난 거니까 그때 다들 뭔가 되게 떨렸다고 그랬어요. 인트라넷으로만 만나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돼서 뭔가 떨렸다고들… (웃음)

-인트라넷에서 서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됐나 봐요. 청년 문제에서 경제적 자립이나 공간 문제 같은 것들에 대해서요.

한창 (책마을에서) 그런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거든요. 2007년에<88만원 세대>란 책이 나오고 나서 세대론이 한참 얘기되다가 어떤 문학잡지에서 좌담회 내용을 실었던 것을 가지고 한참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그 잡지를 보면 김현진, 우석훈과 몇 명이 나와서 좌담했는데 거기에서 청춘이 어떻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20대 개새끼론’ 같은 것을 얘기해요. 그걸 보고 우리는 화가 났죠.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20대가 ‘20대 개새끼론’ 같은 논리로 비판을 많이 받았죠.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10대와 달리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느라 정치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고 그래서 20대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요.

촛불시위 끝난 다음에 그런 비판이 많았죠. ‘청춘이 패기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면서요. 책마을 사람들이 그걸 보고 열을 받아서 이렇게들 얘기했죠. “그러면 청춘이 왜 그렇게 됐냐. 그렇게 된 물적 조건이 있을 것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러면 왜 청년 담론이 생겼는데 (청년) 운동이 없느냐”와 같은 이야기로 진전된 거죠. 그때가 청년 문제를 조직적으로 다루는 청년유니온이 생기기 전이었어요. 그때 책마을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문제는 집이다’라고(귀결된 거죠).

-청년 세대 담론이 활황인데 정작 청년 운동이 일천한 이유가 청년들, 특히 대학생들이 집으로부터 독립을 유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 거네요?

그렇죠. 지금 생각해보니 약간 대학생에 맞춰서 얘기하기는 했었는데 일반적으로 청년 문제의 근본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봤어요. 세대 담론이 한참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작 당사자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를 보면 사실 의식주 중에서 ‘집’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봤거든요. 등록금이 사실 되게 비싸긴 한데 보통 집에서 등골 빠지게 일해서 대주는 거고, 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공간으로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나중에 가서 그게 ‘아, 이게 나의 빚이 되는구나’라고 인지하게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사는 거죠. (그런 문제에) 우리가 별로 그렇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부모)의 도움으로 의식주나 학업이 지탱되면서 빚을 지게 되니까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고 결국 나의 선택권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

그런 것도 있고 그래서 열심히 논쟁하다가 공동생활전선을 하자고 얘기가 이어진 거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동생활전선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이 돼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들 조금씩 생각하는 게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는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던 거죠.

공동생활전선 시작!
공간 논의가 싹텄던 그때 그 ‘책마을’은…

-책마을 커뮤니티에서 나눴던 세대 담론과 공간 문제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역하고 공동생활전선 기획으로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 건가요?

저를 포함해 일단 군대에서 만난 사람 세 명과 학교 친구가 모여서 넷이서 시작하자고 결의했죠. 그런데 공동생활전선을 실행하려고 하니까 방을 처음부터 바로 구할 수는 없잖아요. 돈이 없으니까 일단 모아야 했어요. 그래서 우선 학교 생활도서관을 거점으로써 생활도서관 운영위원을 하면서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거기에서 같이 세미나 하고 그랬어요. 2010년 3월에 전역하고 생활도서관에서 준비하면서 저는 한 학기를 다닌 다음에 2학기에 휴학하고 월세 내려고 돈을 벌었어요. 저녁에는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알바를 했는데 도서관에서 일하면 시간이 조금 남았어요. 그래서 밤에 세미나를 열심히 듣고 그때 두리반에도 종종 가게 됐죠. 2010년 8월부터는 같이 살면서 본격적으로 공동생활전선을 시작했고요.

도서관 죽돌이 프리스티 현장 포착! 그의 손에 들린 책은?!

-그 이후로 쭉 공동생활전선 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거네요? 부모님 사시는 본가에는 안 들어가나요?

집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가죠. 그런데 마리 이후로 계속 투쟁 현장에 가면서 밖으로 싸돌아다니게 되다 보니까 공동생활전선에도 참여도가 떨어지게 됐죠. 2011년까지는 같이 공통 세미나를 하고 같이 생활했죠. 3월부터는 시청광장에서 많이 잤고요. 학교에서도 잘 데가 많으니까 학교에서 자주 자고요. 그냥 아무 데서나 내키는 대로 편하게 잡니다. 마리에 있을 때는 마리에서 자고 그런 식이다 보니까 불안정해지는 기분이 있긴 해요. (공동생활전선) 공간도 있고 (부모) 집도 있는데 오히려 계속 다른 데서 자게 되네요.

-사학과 졸업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원래는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쭉 있었어요. 운동권에 대한 것, 마르크스 같은 비판적인 학문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바꾼 거죠. 일단 지금 제가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공부보다는 지금 당장 현실에 존재하는 투쟁현장이 많은데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쪽으로 일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인데 기회가 돼서 2011년부터 진보신당 당직자로 일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은 장기적으로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공부도 하고 사회 운동도 하려고 했는데 당장은 후자를 택한 거네요.

원래는 군대에서 복무 후반부에 시간이 많아지면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는데 그때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제대하면 공부도 하고 투쟁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둘 다 잘하는 건 안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세미나를 일주일에 3개씩 했죠. 그러다가 두리반도 왔다갔다하고 2010년 8월에는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었는데 거기도 몇 번 갔어요. 그러면서 ‘그런 현장에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어요.

-군대를 기점으로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군대에서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친구들도 만나고 제대하고 공동생활전선을 하고, 공부와 운동 중에 후자를 택하게 되기까지 군대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그때 그 인트라넷 책마을은 어떻게 됐어요?

없어졌어요. 군에서 없앴거든요. 사실 책마을 얘기는 책이나 언론을 통해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상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토론하고 추억이 많은데 아깝죠. 지금도 자기 길을 찾아서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 많은데 (없어져서) 아까워요. 몇 년 동안 축적된 글이 있고 그때 활동했던 사람 중에 지금 책을 내거나 기자로 활동하면서 필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좌편향적인 내용이 많이 올라온다고 생각해서 조처를 한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어쨌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트래픽이 커지니까 나중에 걸려서 그게 없어졌죠. 사이트를 운영하던 부대였던 OOO에서 컴퓨터 관리하던 군인에게 “이게 뭐냐. 왜 자꾸 우리 홈페이지가 접속이 안 되느냐”고 그러다가 걸린 거죠. 그때 그냥 없앴어요.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걸 가장 마지막에 묻네요. (웃음) 프리스티(FReEstY)는 무슨 뜻인가요?

(멋쩍게 웃으며) 제가 한때 서태지 팬이었어요. PC통신 시절 서태지 팬클럽에 가입했는데, 서태지 노래 제목으로 다 메뉴 제목을 삼았더라고요.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나오는 ‘프리스타일'(Freestyle)이란 곡이 영어로 쓰여 있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지금 제 닉네임처럼 대문자, 소문자가 섞여서 배열이 돼 있었죠. y 앞까지 보니 순간적으로 뭔가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어서, 지금처럼 ‘프리스티’가 된 거죠. 대문자로 써놓은 F,R,E,Y는 각각 ‘자유롭게(Freedom) 저항하고(Resistance) 존중하면서(Esteem) 젊게(Youth) 살자!’는 뜻이 되는 거죠. 헤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유튜브에서 서태지의 프리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소녀시대 멤버들의 그날그날 컨디션까지 줄줄 꿰고 있다는 전설의 소덕 프리스티는 알고 보니 90년대 아이돌인 서태지의 열성 팬이었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것을 보아 프리스티의 노선은 확실히 반자본주의는 아닌 것 같다.

자유, 저항, 존중, 젊음을 외치는 프리스티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지난 2월부터 연재해온 청년저주 시리즈를 마친다. 그동안 저주무당의 보며 함께 분노 에너지를 발산해온 열혈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길고 긴 연재 글에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열독해온 독자들에게 특히 감사하다. 잘 보이지 않아도 저주와 분노가 들끓는 곳이라면 저주무당의 필봉은 또다시 바쁘게 움직일 수도 있다. 제보 환영.

저주무당 유정보살 (상담문의 sunmudang444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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