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이 묻고 있는 것: ‘탈-정치’와 ‘포스트-정치’ 사이에서

이집트 혁명이 묻고 있는 것: ‘탈-정치’와 ‘포스트-정치’ 사이에서 ,    2011/02/13 03:52

이집트 혁명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문제는 ‘탈(脫)-정치’가 아니라 ‘포스트(post)-정치’이다!

 

 

 

 

▷ 타흐리르 광장의 한 순간: “People demand removal of the regime.” 우리는 ‘다른’ 체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의 ‘제거’를 원하는가?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단지 정권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으로 ‘정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집트의 인민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 가장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1) E(verybody) G(reets) Y(our) P(eople’s) T(riumph)! 이것은 이집트 시민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집트 인민들을 위한 나만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장 철학적이고 정치적으로, 따라서 가장 실천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이집트 ‘시민’혁명의 성과를 칭송하고 찬양하며, 동시에 포스트-무바라크, 곧 혁명 이후 ‘권력’의 향방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주목의 방식은, “과연 다음 ‘대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라고 하는 지극히 환원적이고 협소한 정치[주의]적 질문에 결박되듯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시민혁명 이후의 ‘정치’라는 문제는 결국 ‘대권’을 잡을 ‘권력자’라는 개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여전히 그런 협소한 의미의 정치-사유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 그들의 어떤 ‘연대 의식’: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해맑게.

 

 

2) 한국에서 87년 ‘시민혁명’의 결과가 결국 ‘대권’의 차원에서(그리고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노태우 체제’라는 기이한 절충(타협)형성으로 결론[결딴]났던 과거를 돌이켜본다면, 무바라크 이후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권력-환원적인 제한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권력과 정치의 형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어떤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추동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 이후에 노태우가 [그것도 소위 ‘직선제’로] ‘권력’을 잡았던 한국의 기이한(?) 전례를 떠올리며,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이후에 [오히려 소위 ‘민중’들 혹은 ‘우민’들에 의해] 그를 계승하는 반동적인 정권이 다시 출현하게 될 상황을 걱정한다. 곧 어떤 정권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 ‘개발도상국’들이여, 그저 ‘도상’에만 있지 말고, 부디 ‘선진국’이 되거라(될 수만 있다면 어디 한 번), 그렇게 멍청히만 있지 말고, 소위 ‘녹색 성장(Green Growth)’을 해보란 말이다, 그것도 무럭무럭!

 

 

3) 하지만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걱정하고 또 사유해야 할 것은, 이집트 시민혁명 이후 권력의 형태가 다시금 환원적으로 ‘최종적 권력자’라는 개념 틀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게 되는 정치-환원주의의 현상일 것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세계시민들에게 열어젖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원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의 ‘이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러한 사유의 실험대 위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어떤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 유럽사회나 아시아의 소위 ‘개발도상국’ 일부가 겪었던 시민혁명의 뒤늦은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앞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사유되며 실험되어야 할 ‘정치’의 장소와 향방에 있을 것이다. 이 가장 미묘하면서도 절실한 문제의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집트는 서구 중심의 민주주의 개념과 헤겔주의적 정치-역사의식의 개념 아래에서 소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마치 당연히 통과해야 할 역사적 경험처럼 부과되었던 어떤 과정, 곧 ‘마땅히 가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된 ‘정치의 정도(正道)’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집트는 그들 자신의 혁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독특성(singularité)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의 길을 열며 동시에 그 가능성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 아마도 레닌을 바라보고 있을, 트로츠키의 모습: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은 여전히 가능한가?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전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하여 ‘영구’ 혁명이라고 부를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4) 우리는 어쩌면, 저 이집트 인민들이 열어놓은, ‘영구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일견 지극히 트로츠키주의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질문을,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둘러싼 현재의 모든 정치경제학적 의미나 상황들과 더불어, 다시금 재-사유하고 재-정립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문득, 저 흔하디흔한 자동차의 백미러에 각인되어 있는, 일견 무심하게만 보이는 한 ‘유명한’ 문구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참고로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집트의 상황도 우리에게 정확히 이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문구와 정확히 ‘상동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일 것이다(그리고 이는 동시에,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상상적 거울상’을 깨트려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집트가 던진 이 사유의 물음들에 답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로 환원되어 버리는 국민국가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또한, [소위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강조하는 ‘국격(國格)’에 전혀 걸맞지 않게 이 이집트 혁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고/못하고 있는 저 모든 ‘한국적’인 것을 부정하고] 가장 ‘국제적으로(internationally)’!

 

 

— 襤魂, 合掌하여 올림.

 

 

 

 

▷ “사물들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 문장이 더 이상 단순한 ‘경고문’이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하나의 깨달음을 위한 어떤 ‘격언’이 되기 위해서.

 

http://blog.naver.com/sinthome/4012327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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