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말-기쁨’/‘말-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에 대한 사유, 양창아

한나 아렌트, ‘말-기쁨’/‘말-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에 대한 사유*,    양창아

나는 그녀를 독점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는, 우습지만, 그녀의 이름은 누군가가 “전공이 뭐에요?”라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하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문에 항상 “나의 전공은 한나 아렌트입니다”라고 답한다(물론 그녀가 남긴 많은 말들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하다는 판단도 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된 것도 몇 년간 내가 그녀의 글을 꽤 집중해서 읽었고 그 독해의 결과를 논문으로 써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가면 뭔가 미묘한 불편함에 시달리는데, 문득 그 불편함을 이루는 요소들 중 하나가 그 대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그녀에 대해 묻는 모든 질문에 내가 대답해야만 하며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요구는 어느 순간 내 속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너의 일은 그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니 너는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대답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너의 대답을 통해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다가 그녀의 이름이 나오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날카롭게 날을 세워 그녀를 보는 관점이 어떠한지 살피고 재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나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녀와 가까우며, 그러니 그녀에 대해 더 잘 알 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애인(A라고 하자)에 대해 누군가가 묻는 것과 유사한데, “A는 지금 뭐하고 있나요? A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요? A는 이러저러할 때 어떻게 하나요? 그렇게 하면 A가 싫어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B나 C나 D와는 달리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으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눈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바라보는지 짐작하고, 또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는)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러한 착각이 그 또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그것을 뒷받침하고 북돋우는 독점의 관습)과 더불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전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욕망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내가 한나 아렌트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봄이었다. 김정현 선생님의 소개를 받아 그녀를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꽤 많은데다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도대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뭔가 모를 매력에 이끌려(그러나 실제로 이 일을 지속시킨 것은 학위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한 모든 말들을 찾아 읽고 받아 적고 생각하는 일종의 스토커 짓을 시작했다. 나의 하루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일들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고, 그런 하루들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말들로 세상을 보게 되고 말하게 되며, 그녀가 보는 방식으로 말들을 읽게 되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 얻게 된 잣대를 통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니 그녀를 숭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내가 그녀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나의 위치라는 게 있어서, 그녀의 말 중에는 동의할 수 없고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올해 8년차라 콩깍지가 벗겨진 탓일까?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 나의 뜻대로 그녀의 말을 다시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나의 자리는 그녀의 자리와 다른데, 왜 내가 그녀의 말에 휘둘려야 하는가? 더 이상 그녀의 뜻대로 내가 따라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그녀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괜히 내가 억울함을 느끼고 항변하게 되는 걸 보면 아직 떠날 때는 아닌가보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항변하는 나를 보면 내 안에 그녀를 혼자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그러니까 거리라는 것을 둘 수 있을 때 그녀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꽤나 현명한 결론이 나기도 한다. 그 욕망이 강할수록 나는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다.

배수아의 장편소설 『북쪽 거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을 형상화하여, 그로 인해 무한대의 ‘나’ 중의 하나의 ‘나’를 ‘나’라고 지칭함으로써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보인다는 뜻이다.”(33쪽) 이 말에 공명하여 나는 이 글에서 보이게 될 나와 그녀의 만남의 한계(또는 조건)를 밝히고 싶다. 즉 그녀는 그 자신이 표현한 말들 속에서 일정 부분만을 드러내고(동시에 숨겨지며), 그 부분 가운데 어떤 부분이 ‘나’(이 역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곧 내가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저 그녀와 나의 관계의 한 모습을, 더 정확히 말해 그녀와 나의 만남의 기록을 일부 전달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 일부란 아렌트가 그다지도 강조했던 ‘공적 영역’이 의미하는 바를 소개하고, 그것이 결국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형식’을 문제 삼는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특히 이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느끼고 있는 어떤 긴장, 묘한 감정들이 얽히고설킨 채로 있어서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상황이 꼬여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글을 시작하게 한 문제(지금 내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 상황)이다.

공적 영역,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사이-공간’이다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다른 제목: 활동하는 삶Vita activa oder Vom tatigen Leben)에서 아렌트는 근대 사회를 경제적인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이 잠식되어, 결국에는 정치적 영역 자체가 사라져버린 공간으로 진단․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그녀는 많은 경우 “공적 영역의 상실”로 표현하는데,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사상이 ‘사적인 것=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정치적인 것’을 확실히 구분하면서 앞의 것보다 뒤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해석하고 끝내거나, 조금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녀의 사상이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문제인 경제적 모순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틀리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결론 격 지적은 너무도 단순한데, 그 이유는 그녀가 근대의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배제의 형식을 문제 삼으면서, ‘공적인 것’, ‘사적인 것’,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다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얘기해보자. 1. 누군가가 인간 대우를 받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바로 그 상황이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확실시되고 정교화되었다. 왜냐하면 근대의 정치체야말로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과 더불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후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는’ 데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이나 개인적인 운명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아렌트는 특히 망명자로 생활하면서 인권 선언이 추상적이라는 것을 통렬하게 경험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은 근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시민의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닌 자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추상적이다. 이 추상성은 그 안에서 실제로는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데도 이 체제가 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면서 그러한 비인간화 또는 억압이나 불평등을 예외로 취급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교묘하고 기만적이다. (그런데 이 시민의 자격이라는 것이 사회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대의제’라는 정치 형태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조차 진정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특히 9장을 참고할 것].

2. 시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에게 사적 영역은 공적인 업무에서 지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자 프라이버시의 공간일지 몰라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사적 영역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자 유폐된 공간일 뿐이다. 나치 시대에 유대인이자 무국적 난민으로 살았던 그녀는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는 자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 ‘장애인’, ‘노숙인’, ‘백수’, ‘잉여’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주고 있는 가장 큰 상처는 그 스스로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 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자기 눈에도 자기가 ‘비실재(non-entity)’의 위치에 놓인 자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Hannah Arendt, “The Jew as Pariah: A Hidden Tradition,” in The Jewish Writings, eds. Jerome Kohn and Ron H. Feldman, (New York, Schocken Books, 2007), p. 289.]

3. 따라서 아렌트는 주장하길, 이 사회에서 설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도 시혜도 아니며 억압받는 그 이름으로 당당히 제 한 몸 설 수 있는 자리를 갖는 것, 기존의 삶의 형식 또는 인간관계의 형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정치(the political)는 “너희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말하지 말라, 반항하지 마라. 너희는 이곳에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좋은 사회’ 속에서 그에 대항하여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은 연약하고 금방 제압되기 쉽지만, 그 사회가 숨기거나 지우고자 하는 ‘그것들’이 나타남으로써 그 사회의 ‘정당한’(legitimate, 적법한) 말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기만적인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적인’(private)을, 그 용어의 다른 의미들 중에도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하며, 이때 박탈은 ‘타인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1) 현실성의 박탈, (2)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3)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인간의 조건』, 이정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112쪽 참고]. 그러므로 ‘공적인’(public)은 그녀의 다양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있음으로써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현실감’, ‘타인과의 관계 맺음’, ‘삶(생존)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이 절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근대 사회를 공적 영역이 상실된 곳이라고 진단했을 때, 그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다른 사람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녀가 전 저작에서 촉구하는 ‘공적 영역의 회복’은 사람들이 소유권을 가진 고립된 원자로서가 아니라, 타인(또는 타자)과 관계 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드러내는 자로서 서는 것, 그런 관계를 통해 나와 타자가 공유하는 세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해내고 (그러한 공간을 구성해냄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공적 영역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생겨난 공간,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그와 그녀가 만날 때에만 생겨나는 ‘사이-공간’(in-between)이다. 덧붙이자면, 아렌트가 ‘세계의 상실’ 또는 ‘세계로부터의 소외’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보고 듣는 공간이자 그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사이-공간’으로서의 ‘세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앞의 책, 102-6쪽].

그런데 이미 사라진 어떤 관계의 경험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을, 많은 이들이 (그녀가 든 예시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경험했던 형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관계 형태를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회복은 타자와의 관계를 제대로 맺기 위해 지금과도 다르고 이전과도 다른 새로운 관계를 창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상실한 관계는 본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불행히도 또는 다행히도)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며, 특정한 과거의 정치체가 아니라 ‘무한한’(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과거로부터 재료를 찾아 함께 생각해야 할 과제이다[이 문단은 다음의 논문에서도 썼던 내용이다. 양창아,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의 시작: 배제된 자들의 관점과 정치적 경험의 회복」, 코기토 71, (2012, 2), 365쪽].

‘사유-행위’는 ‘말-기쁨’/‘말-고통’이 생겨나는 관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과제는 얼마나 골치 아픈가! 지금까지 내가 맺어 왔던 관계 형식을 지우개로 슥슥싹싹 지우고 백지에 상상한 것을 그리듯 새로운 관계 형식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일하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쉬는 방식, 꿈꾸는 방식까지 일정한 형태로 굳어져 있고, 그 형태를 뒷받침하는 생각들은 복잡한 말들로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우리의 갖가지 경험과 엉켜서 우리 몸에 듬성듬성, 그러나 꾹 각인되어 있다. 그 말들이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리를 괴롭히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고 느낀다면 기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이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논의조차 불필요해질 것이다. 다행히 관계의 이상 징후 또는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일이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그 단단한 말들의 힘에 저항하여 그것을 뚫어내는 일은 (그 질은 다르겠으나 그 강도强度는) 이전의 고통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며 힘들고 고단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 변화의 시작이 되는 ‘말’ 또는 그 시작을 알리는 ‘말’은 기존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정교한 대항 논리를 마련하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행위이며, 그것은 또한 기존의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고도 또는 감지했기 때문에 그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을 드러내는 사유-행위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이 사유-행위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전의 관계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불가능함은 우리의 ‘몸’이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아니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로 다른 조각들로 누덕누덕 기워진 프랑켄슈타인의 이름 없는 괴물의 몸과 유사한 데서 비롯된다. 이 몸의 조각들은 많은 부분 과거의 것인데, 그것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조각들,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미래의 조각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문제를 일으키고, 또 바깥에서 그 몸을 정리하고 조정하고 다스릴 어떤 힘(그러한 힘이 있다고 한다면)에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사회와의, 자연과의, 타인과의, 사물과의 관계)의 결과물이며,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이미 형성된 틀에 따라 만들어져 있거나 (어찌할 수 없이 또는 당연히) 나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느 순간 기존의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정답을 바라지만 그런 것은 없으며, 관계의 탐색과 실험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관계가 기존의 관계보다 완벽하지 않다거나 별 것 없다는 판단이 그러한 탐색과 실험을 멈출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계 변화의 시작이 되는 말은 그 시작과 더불어 이미 앞으로 이어질 또 다른 사유-행위의 지난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간신히 남겨진 사람들의 저항 경험은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의 감정으로 표현되는데, 그 기쁨의 내용을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사회가 억압을 통해 은폐하고 유폐시켰던 자신의 모습을 (동료들과 더불어 그들이 구성해낸 세계에) 드러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데서 어떤 힘(power)을 느낀다. 자기 현시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그 ‘드러남’(appearance)은 타인의 폭력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권력의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 그녀의 개념 구분에 따르면, ‘폭력’(violence)은 수많은 말들을 침묵시키고 단 한 사람으로도 가능하지만, ‘권력’(power)은 혼자서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많은 말들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면서 배제시키는 체제와 그 체제 내부에서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인간관계의 연속성을 끊고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고립된 한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실수투성이고 구질구질해 보이겠지만 ‘일정한 방향’(이 방향은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슴푸레하지만 버릴 수 없는 하나의 방향을 앞의 논의에 따라 정의하면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 ‘비인간화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쯤 될 것이다)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소란스럽게 의논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가능하다. 아렌트의 ‘공적 영역’은 이러한 ‘모임’, 즉 동료들과 주고받는 소란스런 말들을 통해 구성되는 일종의 관계망이며, ‘사유-행위’란 그 어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거주하고 있는 바로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와 관련하여 다른 세계의 길을 내는 일을 뜻한다. 그녀는 그러한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정조를 ‘기쁨’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고통’과 더불어 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데서 얻는 기쁨은 귀찮고 거북하고 지긋지긋한 것과 엮어져 있을 때에만, 그것을 감당하며 겪어내는 과정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소란스러운 말들이 부딪히며 생겨나는 거북스러움 없이 ‘사유-행위’는 시작되지 않는다

아렌트는 때때로 ‘행위’(action)를 ‘퍼포먼스’(performance)의 은유를 통해 말하곤 했는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예술’이 작업의 과정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과정과 독립적으로 작품이 존재하게 되는 것에 비해, ‘공연예술’은 명백히 자신의 ‘기교’(virtuosity)를 보일 관객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 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5), 210쪽]. 이러한 타인 의존도를 고려하면, 어떤 공간에서 ‘나-배우’가 ‘타인-관객들’에게 어떤 ‘말-행위’를 했을 때 나의 ‘보여줌’의 행위는 이미 그들에게 해석할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며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오해할까봐,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드러나 버릴까 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동료들이 혐오하는 것이 될까봐(이는 동시에, 그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와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에 대해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 자신을 드러낼) ‘용기’라는 덕목을 제시하는 것(우리는 그러한 오해를, 즉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되는 불편한 일을 견뎌낼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이외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데, 우리는 이러한 용기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동료와 만나 누리게 되는 ‘기쁨’과 동료를 만나 겪게 되는 ‘고통’은 (비유하자면) 등을 맞댄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어져 있다. 우리는 그 이음매 위에 서서 두 감정을 모두 느낀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복잡한 욕망들을 비로소 알게 되며, 그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또 그 욕망과 더불어 사유-행위를 시작하고 이어가는 힘을 갖게 된다 [부산대학교 앞 카페 <헤세이티>의 김동균 선배와의 대화의 결과물이다. 특히 “이음매 위에 서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의 말을 빌려온 것이다. 전직 목수였던 그가 지붕 위에 올라 걸을 때 이음매 위에 서면 위험하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뜬금없이 이 문장이 생각났다.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면서 균형을 잡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의 말은 일종의 노하우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제니오 바르바는 배우들을 위한 책 『연극인류학-종이로 만든 배』[유제니오 바르바는 대략 4-5년 전에 친구 정인지가 소개해주어 알게 된 연극연출가이다. 그는 오딘 극단과 함께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며 연극을 했는데, 『연극인류학-종이로 만든 배』는 그 여정에서 배우들과 관계 맺으면서 극단을 꾸려가면서 깨달은 어떤 생각들의 모음이며, 특히 배우들을 위해 쓴 책이다. 이 책도 본문에 괄호로 쪽수를 표시한다]에서 배우들이 기본자세들을 익히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힘들지만 사치스런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것”(40쪽)이라거나 “모든 배우는 자기의 기본자세에 맞는 기울임의 정도를 찾아야 한다.”(43쪽)거나, 그러한 탐구를 위한 에너지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균형의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길항하는 힘들 사이의 긴장이다”(49쪽)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말들에서 다시금 앞서 언급했던 사유-행위의 한 형태(또는 방법)을 본다. 배우는 ‘자신만의’ 연기 방식을 찾는 과정 속에 있는데, 그 탐구는 그가 다른 동료와 맺는 어떤 관계, 기쁨과 고통을 모두 주는 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힘의 밀고 당김을, 그는 “그들은 일치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서로 떨어지려 하고, 서로를 놀라게 하고, 그들 각자의 템포를 깨뜨리려 한다. 그러나 그들을 대립하게 하는 독특한 관계와 접촉을 끊을 정도로 멀어지지는 않는다.”(49쪽)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른 곳에서 ‘거북스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물론 이 말은 “마임은 거북스러움 속에서 편안해진다.”(50쪽)에서와 같이 말 그대로 기본자세를 익히는 몸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그 거북스러움은 배우가 방향을 분간할 수 있게 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는 얘기까지 참고하게 되면,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듯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료는 나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자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 또는 사람에 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견해가 일치하지 않거나 아예 대립될 때 우리는 ‘거북스러움’을 느낀다. 부끄럽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이 거북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그냥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버리거나 그 사람이 그리 좋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며 도망가 버리는 일이 잦은데, 바르바와 아렌트의 말을 곱씹다 보면 그것은 자기 안에 틀어박혀 그저 홀로 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종류의 홀로 삶은 무엇보다 그 사람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안에 틀어박힘으로써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세계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그 거북스러움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동료들과 있을 때 서로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반응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고 그 판단들 사이에서 자신이 갈 길의 방향을 가늠한다. 동료 A와 B와 C가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어떤 일에 대면하여 보이는 태도와 일을 해나가는 방법 등을 서로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나의 생활 방식과 태도와 일의 방식이 어떠한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만남의 기회를 통해서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습관적으로 행하던) 나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나는 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자동적이고 기계적이지 않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어떤 ‘사유-행위’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나 거북스러움을 받아들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르바는 그러한 종류의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가고 있는 배움의 길이 나쁜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지표라고 말한다. “만일 그 자세가 아픔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자세인 것이다.”(50쪽)(그 문장 뒤에 “[그렇다고] 그것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그 자세가 반드시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결국 ‘세계에 대한 진리를 나누는 관계’, ‘서로의 다름을 즐길 수 있는 관계’, ‘함께-사는-방식을 다르게 고민하면서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배움의 과정을 함께 하는 관계로서, 그들 없이는 이러한 과정도 불가능한 것이다. 누군가는 배움의 길은 홀로 가는 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질척거리고 지지부진한 만남의 길을 걷지 않고서는 홀로 걷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과정에 있는 자의 ‘사유-행위’는, 바르바의 문장을 약간 변형시켜서 표현하자면, ‘습관적이지 않은, 기존의 자기 일상에서 벗어나는 긴장들이 자신의 몸 안에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동료들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으며, (너무도 잘 굳어버리는) 이미 갖고 있던 ‘생각’도 그러한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만 화석화되지 않을 수 있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껄끄럽고 거북스러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어떤 긴장. 그 긴장은 우리가 그 긴장 속에서 변화의 방향을 찾게 하고,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 이 글은 2012년 7월 27일에 공간초록에서 강연했던 것을 연구모임 aff-com의 요청에 의해 수정, 보완한 것이다.

** 나는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이하 ‘비상’)에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대략 2009년부터 부산교대 근처 <공간초록>에서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2006년 지율스님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천성산 도롱뇽 소송의 끝에 새로운 생태문화공간을 꿈꾸며 만든 장소이다.(http://www.spacechorok.com/home/introduce) 이곳은 비어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주인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또 누구나 주인이다. 그 덕분에 이곳은,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모양과 색깔이 달라진다. ‘비상’은 서로 다른 전공(철학, 사학, 문화비평)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만나 함께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모임으로, 처음에는 이 대학 저 대학 돌아다니며 공부하다가 이광욱 선생님이 <공간초록>을 알게 되어 머물게 되었다. 이 고마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강연이라든지 ‘독서모임 산책’(http://cafe.daum.net/choroksancheck/)이라든지 ‘초록영화제’(http://cafe.naver.com/shootinggreen/)와 같은 일들을 함께 하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위태롭게’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필자소개

양창아 :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에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이래저래 부딪히며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다. 한때 많은 시간을 혼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과 여성학을 공부하는 데 보내고 있다가, 이 동료들을 만나 <공간초록>에 드나들게 되고 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만남(또는 관계맺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홀로 공부할 때도 갖고 있던 이 질문, ‘우리는 누구와(무엇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관계맺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지금은 전혀 다른 질(質)로 나를 괴롭히고 움직이게 한다(부산대학교 철학과 박사수료).

http://aff-com.net/category/af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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