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와 바디우 – “정치철학에 반해서”

알랭 바디우, “정치철학에 반해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이는 현대사상의 핵심적인 질문이다. 보편적 경험에서 정치적인 것을 분석하고 이러한 분석을 윤리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철학의 주요과제이다. 이 과제를 실행함에 있어 철학자는:

 

첫째, 정치의 실제사례들에 대한 경험적인 성격을 구성하는 객관성에 대한 분석가이며

둘째, 좋은 정치의 원리, 즉 윤리적 요구에 순응하는 정치의 원리들을 결정하는 자이며,

셋째,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도록 실제 정치과정에 개입하는 것으로부터 면제된 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철학의 핵심기능은 “궁극적으로 여론들만이 주요하게 생각되는 공적 공간 안에서 자유로운 판단의 실행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된다(10f.). 여기서 바디우가 주목하고 있는 정치철학자는 한나 아렌트와 그녀의 이념들을 해석하고 칸트의 정치철학에 대한 아렌트 강의를 ‘판단의 용기’라는 제목으로 불어로 편집한 Myriam Revault d’Allonnes이다.

왜 칸트의 정치인가? 아렌트가 발견하고 있는 그의 정치는 어떤 사상의 이름도 어떤 행위의 이름도 아니다. 정치가 “집합적인 것의 존재를 다루는 진리의 절차”도 “존재하는 것의 통제나 변형을 목적으로 하는 새롭고 단독적인 집합성의 구성 또는 활성화”도 아니라면, 정치는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철학에서 정치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는 상황의 객관성과 관련되는 한 결정적인 요소도 그리고 그 상황들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포착에 있어서 전투적인 행위자도 아니라면, 정치가 존재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바디우의 이런 이중부정이 아렌트의 칸트 해석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아렌트가 칸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타인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행동하기 위해서 어떻게 타인들과 결합할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함이라는 것이다(12f.).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의 독창성은 ‘방관자의 판단’과 ‘행위자의 금언’ 사이의 당연한 모순을 과감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행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원칙과 판단하는 것을 위한 원칙 사이에 갈등에서 칸트를 발견한다. 분명 아렌트에게서 정치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주체는 ‘세계-방관자’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저자, 배우들 그리고 감독들이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서가 아니라, 관객들과의 관계에서만 무대가 상황 지어지는 것과 유사하다. Revault가 정치적인 방식의 요소들을 체계화하는 데서 우리는 첫째, 정치의 현상적이거나 사건적인 과제라 할 수 있는 특수자(the particular), 둘째, 판단의 능력을 발견한다(13).

이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들의 다원성이나 의견의 공적 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는 판단을 행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 토대 위에서 정치라는 것은 그것이 대상없는 현상성과 관련되거나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의 영역이 되었던 “어떤 판단의 공적인 행사(exercise)”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질문은

 

“왜 정치가 어떤 사건 그 자체의 영역에 공적공간의 수정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13)

 

여기서 분명한 것은 정치가 여론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여론에서 자신의 입지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진리의 주제가 배제될 것이라는 점을 바디우는 지적한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진리의 절차가 아니라, 진리와 여론, 철학적 삶의 양식과 정치적 삶의 양식의 대립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실 진리와 여론이 환원 불가한 대립에 관한 이슈는 아렌트와 칸트 이전, 플라톤에 의해서 다루어진 바 있다. 하지만 플라톤과 다른 아렌트적 요소는 “정치가 영원히 의견에 전념하고 모든 진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있다는 점”(14)이다. 이것은 바로 “궤변”(sophistry)에 관한 것으로서 아렌트가 정치라 부르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궤변”의 이슈를 통해서 전적으로 특수한 정치를 제고하고자 한다. 이는 그녀의 의회정치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궤변의 정치가 중요성은 고대 그리스 이래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진리 주제를 단성적(univocal)이고 전제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사고의 정향에 반하는 데에 있다. 누구에게나 의견을 표현할 소중한 자유는 있지만, 진리의 자유는 그렇지가 못하다. 진리이념의 독단적이고 추상적이며 제한된 성격에 표명된 진부함 가운데에서 아렌트는 모든 진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정을 요구하며 토론이 정치생활의 본질 그 자체를 구성할 정도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진부함 속에는 첫째, “단독적인 진리”(a singular truth)는 항상 토론이 결정적으로 복잡한 과정의 결과이며, 과학 그 자체는 모든 권위의 원리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함께 시작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진리”는 아마도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된다. 따라서 진리와 토론의 이율배반은 잘못된 만남이 된다. 이처럼 토론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가정할 때, 가능한 결론은 토의와 모든 진리 사이에 어떤 대립이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문제는 토론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달려있으며, 다시금 판단과 행위의 금언 사이에 불연속성의 난국을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토론이 ‘정치적’일 수 있으려면 이는 반드시 어떤 결정을 정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가능한 정치적 진리는 토론에 입각해서 검증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토론과 결정을 연계 짓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투표도 모든 진리와 낯선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바디우는 정치적인 것과 결정의 프로토콜을 분리하고 이를 방관자의 판단으로 환원시키고 토론을 진리가 없는 의견들이 다원적인 아렌트적 대립을 주목한다. 이른바 정치적인 것을 언급함으로써 우리는 정치에 대한 어떤 철학적인 방어를 놓치게 된다. 그 방어는 “모든 철학은 실제정치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16)는 바디우의 신념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바디우는 아렌트의 정치개념에서 방관자의 주권과 토론의 절대적인 우위를 주목한다. 정치는 “결정적인 판단이 아니라 단성적인 판단에 관여하는 것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곧 정치는 “행위를 위한 금언을 수립하거나 객관적인 지형도를 찾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판단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나를 유쾌하게 하건 불쾌하게 하건 간에 그런 판단들에 대한 토론에서 행사된다. 이러한 입장은 궁극적으로 정치를 의견의 공적인 다원성, 즉 의회주의가 정당의 다원성을 통해서 국가에 연계되기를 주장하는 다원성이다. 한편 다원주의는 의회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바디우는 이를 초월론적인 정당성에 대한 문제로 파악한다. 결국 Revault와 아렌트에게 있어 정치는 의견을 복구하고 합리적인 진리의 우위보다는 여론에 특정한 권위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바디우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적인 진리보다 의견들의 무조건적인 우위를 통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7).

여기서 바디우가 제기하는 질문은 사람들과 의견들의 내적인 다원성이 어떤 방식으로 판단의 행사와 결부되는가 이다. 궁극적으로 ‘절차’는 ‘다중적인 것의 객관성’이며 이렇게 다중적으로 표명된 현상성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주체성”이다. 이러한 질문은 다음 두 가지의 어려움을 제기한다.

 

첫째, 정치가 현상적인 다양성에 대해서 판단의 사례로 구성된다면, 어떤 일정한 능력이 여론을 형성하는 데 책임이 있는 것인가?

둘째, 그 어떤 것도 의견들의 공적공간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견들이 어떻게 토론으로 진입할 수 있겠는가?

 

전자는 여론형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선과 악 또는 민주적인 형용어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바디우는 지금까지 논의되어왔던 다원성 그 자체를 ‘공동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다원성에 직접적으로 구속받는 판단의 자원을 ‘공통감각’이라 부른다. 아렌트식으로 표현하면 “범주는 소통가능성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공통감각’이다”(18). 따라서 소통가능성은 의견의 다원성이 차이를 도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광범위하다는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공통감각 역시 실제 사건에 초월적인 규범으로 기능한다. 그 이유는 이 공통감각이 ‘다원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원성의 주관적인 통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8).

바디우는 Revault의 분석에 의거해서 다음 세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첫째, 인간이 정치적 존재인 이유는 인간들이 다원성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원성은 판단에 대한 장애물이 아니라 바로 “그 판단의 조건”이다. 여기서 여론은 세계를 타자들과 공유하는 본래적인 연습으로 형성된다.

둘째, 공통감각은 선과 악의 구분에 따라서 의견들의 비판적인 다원성을 준비하는 정도에 준하는 규범이다. 이러한 분별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토대이자 사고를 위한 궁극적인 조건이다. 사고의 힘은 “악으로부터 선을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의 구속을 받는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무한자원을 통해서 정치를 윤리로 지지하는 시도에 대면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의견들을 토론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하여서 선악 구분의 초월론적인 증거이다(19).

셋째, 선악을 구분함에 있어서 악에 대한 철저한 지각이 우선한다. 악이라는 것은 정확히 공통적인 것 또는 공유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Revault는 이러한 문제를 근본 악(radical evil)이라 규정한다. “정치적 판단”은 “무엇보다도 악에 대한 저항”이며 “판단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긴박하게 다가오는 악에 저항하는 시도”(20)이다. 흥미롭게도 악에 모든 실제모습은 참된 결속(authentic being-together)을 토대하고자 하는 정치로 소개된다. 그래서 어떤 공통감각도 그것을 공격할 수 없으며 오직 또 다른 정치만 이것을 해낼 수 있다.

결국 판단은 실재하는 것이 선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내재적인 권력과 부합한다. 그 권력이란 법으로 존재하고자하는 데 투신하는 사람들의 다원성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악은 “공통적인 것, 또는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부정적인 의지를 통한 존재의 결핍이나 권력의 결핍”을 의미한다. 결국 정치는 이러한 “부정의 부정을 선언하는 것”이 된다(20).

지금까지 아렌트 정치철학의 논의에 대해서 바디우는 다음 다섯 가지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첫째, 다원성의 토대에 입각해서 정치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다. 바디우의 견해에 의하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 확장은 여기서 반드시 숙고되어야할 것의 단독성을 파괴시킨다고 한다. 다원성은 바로 존재일반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다원성이라는 것은 유형과 무관하게 모든 사고절차에 관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과학 그 자체도 처음부터 공통적인 것, 그리고 토론에 노출되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역으로 떨어지기 쉬운 정치는 “공통적인 것 또는 타자의 권위로부터 훨씬 더 아래쪽에서 단독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결부된 최소한의 다원성은 1. 상황의 무한성; 2. 국가의 초권력; 3. 사건적 단절; 4. 전투적 처방, 선언 및 실천이다. 이러한 순환의 복잡성을 통해서만이 “단순한 의견과 반대되는 진리의 판단으로서 정치적 판단이 존재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이러한 판단의 주체는 “아렌트식 공통감각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초월론적인 주체”와 달리 “정치 과정 그 자체를 통해서 구성되며 이러한 구성은 의견의 체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22).

둘째, 바디우는 사건발생의 순수현상으로서 특수자(the particular)에 주목한다. 특히 그는 Revault를 따라서 이러한 특수성 안에서 “점진적이며 초월론적인 환원”을 논의한다. 악의 구별을 위한 일반적인 능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판단의 모태가 궁극적으로 상수라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상적 특수성은 그 금언이 고정되어있는 판단을 위한 유일한 물질적 기반이 된다. 여기서 가능한 정식은 ‘공통적인 것의 공유를 지속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늘 당신 자신을 선언하라.’ 이러한 이유로 바디우는 아렌트의 정치적 비전이 궁극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근본악의 위협이 없다면 판단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단독적인 것을 확고히 붙들기 위해서

 

먼저 정치의 출발점이 항상 어떤 사건의 절대적인 단독성 안에 위치해야하며,

둘째, 정치는 사건이 가능한 정도에 따라서 진리의 행위 안에 배치되는 연속선상에

서 존재해야하며,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규범에 의해서 규제를 받는 의견의 다원성은 결

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공통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치의 사례들에 대한

다원성이 있을 뿐이다(22f.).

 

셋째, 모든 합의적인 정치비전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디우에 의하면, 우리가 끌어 모으는 진리가 보편적일지라도 하나의 사건은 결코 공유되지 않는다. 사건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단지 정치적 결정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정치는 유일하게 자기권위적인 처방 아래에서 사건적 단독성에 대한 위험하고도 전투적이며 항상 부분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충실성” 된다(23). 그러한 충실성의 결과물인 정치적 진리의 보편성은 “모든 진리처럼 지식의 형태로 소급될 때만이 판독이 가능하다”고 그는 본다. 물론 정치가 고려될 수 있는 지점은 심지어 사건 이후에도 그리고 진리를 포착한 이후에도 “그 행위자들의 지점이지 방관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디우는 “단독적인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23).

넷째, 의견들은 어떤 토대가 되는 초월론적인 모습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여론형성과 토론의 문제는 전적으로 미제의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디우는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의견은 실제로 정치, 즉 정치의 양식에 순응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적인 다원성은 정치사례들의 특징이며 반면에 의견들의 다원성은 특수한 정치 (의회정치)의 기준일 따름이다(24).

다섯째, 바디우에 의하면 “정치의 본질은 의견의 다원성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있어서 어떤 가능성에 대한 처방이다. 물론 이러한 처방과 그것이 명령하고 있는 주장의 실행 또는 시험은 토론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더욱 중요한 것은 “선언, 개입 및 조직(declarations, interventions, and organizations)”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처방이 명확하지 않다면, 의견들과 토론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거나 다면적인 처방의 보이지 않는 구속에 얽매이게 되며 이러한 처방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국가”이자 “그 주변에 표출되는 정치의 사례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식 정치에서 바디우는 의회주의 국가의 처방에 적합한 신칸트주의를 발견한다. 결국, 바디우는 해방정치의 조건 하에 철학을 붙잡아둠으로써 아렌트적인 의미에서 정치철학과의 단절을 꾀하며, 이러한 시도는 정치 그 자체가 그 존재와 행위 안에서 하나의 사고가 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Badiou, “Against ‘Political Philosophy'” In: Metapolitics (Verso, 2005), pp. 10-25

http://cafe.daum.net/9876/3J6g/57?docid=DUr3J6g57200909200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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