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아렌트 인간의 조건 정리

인간의 조건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서론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현대문명비판으로 시작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현대문명은 두 가지 급진적radical 변화 속에서 정의되어지는데, 첫 번째가 과학기술- 특히 우주과학과 생명공학 – 의 발달이다. 인간의 우주로의 진출은 지구라는 가장 핵심적인, 핵심적이었던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고,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생명공학은 주어진given 생명이라는 ‘인간의 조건’으로부터의 탈피의 시도다. 그러나 이 과학기술들의 ‘진리’는 말과 사유의 정치학을 어렵게 만든다. 두 번째 변화는 자동화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실존을 증명하는 기제였던 노동이 더 이상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현대문명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조건’의 변환기에서 이에 대해 재사유하려는 것이 아렌트의 목적이다.

  제1장 인간의 조건

1) 활동적 삶과 인간의 조건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은 vita activa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노동, 작업work, 행위이다. 노동은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삶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활동이며 작업은 세속성(세계성)을 조건으로(대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의존성)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즉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는 활동이다. 또한 행위는 다원성을 조건으로 하여 사물,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정치적’인 활동이다. 세 가지 활동과 각각의 조건들 모두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 조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본성은 다르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알 수 없으며 이 본성과 본질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을 신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예컨대 플라톤의 철인왕. 인간이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조건 지워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본성이 아니라 인간 조건에서 시작한다.

2) 활동적 삶의 개념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상에서 활동적 삶이란 용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는데, 그 역사는 철학자와 폴리스의 갈등인 소크라테스 재판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을 배제한, 즉 삶의 필연성과 자신의 생계와 관련된 모든 노예적 욕망을 배제한 ‘자유인’의 삶이라고 본다. 정치적 삶은 이런 필요와 욕구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폴리스의 삶이 아주 특별한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한 정치적 조직의 형식을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에 이르러 활동적 삶이란 용어는, 행위가 지상에서의 필연적 삶이라는 이유로, ‘관조’에 해당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행위를 포함한 다른 모든 활동보다 관조가 우월하다는 생각은 플라톤 이래 성립한 서구 정치철학의 전통이었다. 활동적 삶은 절대적 고요인 관조의 관점에서 제한을 받으며 진리는 인간의 완전한 ‘정지’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활동적 삶은 불안정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아렌트는 이 위계질서의 타당성을 의심하며, 이것이 근대까지 이어져 온- 마르크스와 니체까지- 서구 정치철학의 전통이라고 파악한다.

3) 영원성과 불멸성

폴리스의 삶을 지배했던 원리가 ‘관조’라는 더 높은 원리로 대체되는 것은 불멸성의 추구에서 영원성의 추구로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불멸성을 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삶에 투신하여 시간 속에 자신의 이름을 ‘기억’시키려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불멸성이 아닌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이데아- 가 플라톤 이래 등장한다. 영원한 것은 결코 경험될 수도 어떤 활동으로도 변형될 수 없다. 오로지 관조와 명상을 통해서만 이 영원한 것을 발견하고, 인간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 이제부터 정치는 ‘관조라는 방식의 철학’을 통해서 파악. 정의되는 ‘진리’의 영역이 된다.

제2장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4) 인간 : 사회적 동물인가 아니면 정치적 동물인가

인간의 조건은 거시적으로 분석한다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가 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번역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이다. 그리스인들에 의하면, <정치적>과 <사회적>은 다른 의미이다. 단순한 사회적 교제는 동물들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 ‘정치적’이란 의미는 인간은 가정(oikia)과 다른 정치적 조직체를 결성할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였다. 정치적인 삶이란 행위와 언어의 삶이며, 폭력적 문제해결은 전-정치적인, 가정에서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을 <사회적>으로 번역한 아퀴나스는 가정지배와 정치적 지배를 비교하면서 정치적 지배가 더 ‘절대적’이고 ‘완전’하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이 전-정치적 영역이라 지적했던 부분을 ‘더’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5) 폴리스와 가정경제

그리스인들의 전-정치적 가정 영역, 정치적 폴리스 영역 사이의 구분은 사적/공적 영역에 대한 구별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구별은 근대 이후의 ‘국민경제’의 출현, 이른바 ‘사회적’ 영역의 도래로 인해 불분명하게 된다. 가정(사적 영역)은 필요와 욕구라는 필연성의 영역으로 이곳에서는 강제와 폭력이 용인된다. 반면에 폴리스는 이러한 필연성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인들의 공론 영역이었다. 이 둘 사이의 심연은 근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라지고 모든 활동이 사적인 가정영역으로 흡수되어 사적인 의미만 지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론 영역은 부재하게 된다.

6) 사회의 발생

사회의 출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사회적인 것이란 사적인 관계가 공론 영역에 들어와 공적 관심을 획득한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근대에서 ‘사생활’(진짜 사적인 것)은 이제 정치적 영역과 대립하지 않고 사회적 영역과 대립한다. 그것을 친밀성의 영역이라 부른다. 루소는 사회적 영역의 확대가 이제 친밀성의 영역마저 침입한다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반항을 주장한다. 사회에 대한 반항은 마치 가족단위체가 확장된 형태처럼 하나의 의견과 이해만을 대변하는 사회, 즉 평준화와 평등, 순응주의적 경향을 지닌 사회를 겨냥한다.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을 표준화시켜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곳에서의 평등은 하향평준화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독특한 업적을 지니고 있는지 역설해야 했던 고대 폴리스의 아고라 광장에서의 평등과는 다른, 순응주의에 기반 하는 하향평준화이다. 근대 경제학, 통계학, 행태주의도 모두 같은 순응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근대적’ 학문이다. 그들은 법칙 정립적으로 인간의 행동유형을 연구하며, 결국 행동이 행위를 대체한다.

하나의 척도를 제공하고 이 척도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는 과거의 사적 영역(가정 영역)을 공적인 관심사로 만든 데 이어 그로 인해 생겨난 친밀성의 영역, 그리고 이전의 정치적 영역마저도 잠식하여 성장한다. 이런 순응주의는 행위의 조건인 다원성이 아닌 단수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현상이 노동 사회의 탄생이다. 노동이라는 사적 영역(과거의)이 공적 관심사가 되면서 ‘분업’이라는 노동의 조직화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 노동은 이제 인간의 진정한 사적 영역마저 잠식하기에 이른다. 그리스, 로마 시절에 ‘고통과 수고’였던 노동이 인간 활동의 중심에 등장했고, 행위 및 언어능력으로 대표되는 ‘탁월함’은 친밀한, 즉 사적인 영역으로 추방당했다.

7) 공론 영역 : 공통적인 것

‘공적’이라는 용어는 첫 째로 공중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 즉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드러나서 다른 이들이 그것을 지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공론 영역은 오직 그것에 적절한 것들만 포괄할 수 있다. 반면에 사적인 것은 인간의 직접적 필요, 욕구와 관련되기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특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사적인 것이 공론 영역에 진입하여 공적인 관심 대상이 되어버리면, 공론 영역은 그 매력에 눌려 위축되어 버린다. 즉 그 필연성의 힘이 그보다 약해보이는 공적인 문제들을 뒷전으로 물러나 앉게 하는 것이다. 자유보다 빵을!

두 번째로 공적이라는 용어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고 우리의 사적인 소유지와 구별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 세계는 탁자처럼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동시에 분리시켜준다. 그러나 현대(대중)사회에서, 즉 사적 영역이 확장하는 이 시점에서 세계는 그 결합과 분리의 힘을 상실했다. 이 세계는 개인적 삶을 극복하는 그 영속성으로 사람들을 결합시켰으나, 사회가 공적 우월성을 얻은 후부터는 이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실재성이 필요의 절박성에 의해 증명되는 시대에는 공적 찬사마저도 시간의 파괴로부터 사물을 구해주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지 못했고(무용성)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돈’에 의한 보상이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 이처럼 공동 세계가 단지 하나의 척도에 의해서 평가될 때 공동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공동세계는 오직 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서만 실존한다.

8) 사적 영역 : 소유 + 9) 사회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적’이란 용어는 원래 무엇인가를 박탈당했다는 의미였다. 사적인 가정 영역은 다른 가정과의 경계선, 법률을 통해 공론 영역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이 법의 담벽이 공론 영역을 존재케했다. 사적 영역은 필연성과 욕구, 노예적 삶의 영역이었고 궁극적으로 그곳을 벗어나 정치적 삶을 향유해야 인간은 ‘객관적’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사유 재산은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폴리스 형성 이후엔 이 재산이 공론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조건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재산이 쌓여 개인이 더 사용할 수 없고 가문, 혹은 자손의 것이 될 때 재산은 부가 되는 동시에 개인의 생명유지를 넘어선 보다 긴 수명을 획득하게 된다. 이 부가 더 증가할 때 사회적으로 부를 재창출하는 자본이 된다. 자본 소유주들이 자기 소유에 대한 보호를 공론 영역으로부터 보장받으려고 하면서 재산은 이제 공적인 관심 대상이 된다. 자본은 그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 유지를 위한 과정을 통해 항구성을 지니며 이로써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게 된다. 공적 관심이 사적인 것에 몰두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국부national wealth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동의 부, 그러나 이것은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다.

근대의 사회적 영역의 확장은 개인의 내적 주관성과 같은 고유한 사적 영역마저 해체한다. 모든 사물의 가치는 ‘상품’이 되어야만, 즉 교환‘가치’value를 통해서만 ‘가치’있는valuable 것이 된다. 그리고 가장 사적인 영역이던 인간의 신체마저, ‘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이 된다. 그것도 무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받으면서! 노동계급과 여성의 해방은 ‘숨겨져야만 하는’ 사적 영역의 그들을 보여야만 하는 ‘공론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원래는 ‘필연성’과 관련된 영역의 거대한 확장의 산물이다.

10) 인간 활동의 지위

인간의 모든 활동은 숨겨져야 할 사적 영역 혹은 반드시 드러나야 할 공론 영역에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이 대표적인데, 선은 공론 영역에 드러나는 순간 선이 아니게 된다. 선은 공론 영역 내에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에 파괴적이다. 이처럼 활동적 삶의 활동 중 어떤 것이 공론 영역에 드러나고 어떤 활동은 사적 영역에 숨겨야 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판단기준은 활동적 삶 각각의 본질과 일치한다. 아렌트는 관조적 삶의 관점에서만 활동적 삶을 다룸으로써 무시된 이 활동적 삶의 표현들, 정치적 의미를 분석하고 규정하고자 한다.

제3장 노동

11) 우리 신체의 노동과 우리 손의 작업

노동과 작업에 대한 아렌트의 구별에 해당하는 이론은 거의 없지만 어원학적으로 이 두 가지는 구별된다. 명사로서의 노동은 동명사로 분류되는 동사적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에 작업은 생산물 그 자체를 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구분은 고대에서 무시되었다. 왜냐하면 고대에서는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노예적 삶이며 노동이라고 여겼는데, 필연성의 삶이란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에 시간과 노력에 소모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고로 삶의 필수재를 공급하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들은 모두 노동의 지위와 같은 것이다. 또한 철학자들은 관조를 다른 모든 활동과 대립시키면서 활동들 간의 구별을 없애버리고 심지어 정치적 활동조차 필연성의 지위로 평준화시켰다.

근대에 노동과 작업의 구별이 발생하지 못한 이유는 노동의 예찬과 그로 인한 모든 작업의 노동화 때문이다. 노동은 그것이 생산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근대에 들어 그 지위가 상승한다. 인간의 노동은 그 노동력을 통해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근대 자본주의에선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즉 생산성 있는 노동력만이 시장에서 팔릴 사용가치를 지닌다. 즉 시장에서 노동력은 즉시 소비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이 사회에선 모든 사물이 상품으로 화化하며 이 상품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 또한 (노동력 상품의 경우) 얼마나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 즉 모든 작업은 노동이 된다. 또한 노동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한 분업체제와 대량생산체제는 숙련노동을 완전 폐지하는 경향을 가진다. 대략 같은 양의 노동력을 소유한 인간들의 노동력이 ‘팔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체노동/정신노동의 구별 역시 노동/작업의 구별을 나타내기 어려운데, 고대에는 자유로운 기술과 노예적 기술의 구분이 머리를 쓰느냐 몸을 쓰느냐가 아니라 그 직업이 공적 연관성을 지니느냐 아니냐 였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정신노동(지식노동)을 하는 자들도 오히려 노동인구로 불리길 스스로 원하기에 이 구별은 더욱 무용해졌다.

12) 세계의 사물성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해당하는 이 세계의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주는 요소는 노동생산물(소비재)이 아니라 작업의 생산물(사용물품 use object)이다. 또한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다른 요소는 외부세계와 관련을 맺으며 인간관계와 인간사의 구조를 형성하는 행위와 언어, 그리고 외부세계에 반드시 드러나지는 않는 사유가 있다. 그러나 이 행위, 언어, 사유는 모두 보이고 들리고 기억될 수 있어야, 즉 사물화 되어야한다.

13) 노동과 삶

모든 구체적 사물들 중에 가장 지속성이 없는 것은 삶의 과정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 즉 노동생산물들이다. 자연적 순환운동의 일부인 인간의 출생과 죽음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자연의 순환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반복 과정에 포섭되어 있다. 자연적 유기체로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 소비함으로써 에너지를 얻어내고 그 에너지를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위한 생산 활동에 재투자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 갖는 신진대사로 생生 그 자체의 재생산이다. 또한 노동의 산물은 생산되는 순간 생명과정 내에서 이내 소모되어 세계에 지속적인 것을 남기지 않는다. 이는 매우 ‘자연적인’ 것이며, 오히려 자연의 관점에서는 물질을 취하면서 신체의 신진대사를 통해 자연에 되돌려주지 않는 작업이 더 파괴적이다.

14) 노동과 다산성

근대에 노동의 지위가 상승한 것은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발견한 로크와 애덤스미스, 그리고 노동을 생산성의 원천이자 인간성의 표현 자체로 평가한 마르크스의 공이다. 사적 소유의 제도화에 관심을 가진 로크, 부의 무한한 축적 과정에 관심을 가진 스미스와 달리 마르크스만이 노동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고, 노동이 최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능력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노동에 작업만이 가지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 예속된 노동하는 신체는 결코 소유와 같이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것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노동의 생산성은 객관적 사물세계의 건설을 전제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떤 노동의 결과도 노동하는 동물을 노동의 반복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자연이 부과하는 영원한 필연성이 된다. 이 점이 마르크스의 노동에 대한 애매한 지점인데, 마르크스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의 영역이 필연성의 영역을 대신하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정의하며 노동을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자연과의 신진대사라 말한다. 이런 정의는 근대 일반에 팽배하던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 노동은 인류의 다산성, 위대한 생산력의 근거였으며 인간이 이미 정해진 자연의 순환운동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한 근대에 있어서의 소유의 확립을 위해서는 이 끊임없이 소비되는 노동이 예찬되어야 했다.

15) 소유의 사적 성격과 부

소유권의 주창은 공론 영역과 국가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으로 근대는 국가의 방해를 받지 않는 많은 소유, 사유를 추구했다. 이 사유의 정당화를 위해서 신체기능으로부터 그 사유의 기원을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로크의 시도였다. 사유가 자연적인 것임을 밝히기 위해, 증가하는 부의 과정을 자연적인 과정으로 만들기 위해, 나누기를 원해도 결코 나눌 수 없는 ‘자연적’인 신체와 그 신체의 기능인 노동이 예찬된다.

신체 내에서 발생하는 기쁨과 고통은 공동적이지도 의사소통도 할 수 없기에 공론 영역의 가시성과 가청성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게 보호된다. 즉 이 고통은 무세계적인, 세계성을 상실한 고통이다. 이 경험에 가장 상응하는 유일한 활동이 노동이다. 그러나 로크에게 소유는 ‘공동적인 것’으로부터 울타리를 쳐서 막은 것(enclosure)으로 세계 내의 장소를 차지하는 것, 즉 여전히 공동세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소유주’의 사회에서 삶의 과정 자체가 노동을 촉구하고 추진시킬 때의 잔혹함은 소유의 획득을 통해 해결되어질 수 있었다. 소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관심사는 자연의 풍부, 삶의 단순한 필연성이 아니라 세계였다.

그러나 이 사회가 노동자나 직업인jobholder의 사회가 될 때, 즉 인간의 주된 관심이 소유가 아니라 부의 성장과 축적과정 자체가 될 때 – 이 과정 개념은 학문적으로 근대의 역사적 발전이론의 발달과도 맞물린다. – 문제는 달라진다. 이 과정은 삶의 과정만큼이나 무한하다. 마르크스의 ‘노동하는 동물’이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로크 시대와 달리 마르크스 시대의 착취당하는 ‘노동 동물’은 사적 공간 자체를 박탈당해 결코 사적일 수 없었다.

16) 작업도구와 노동 분업

이 시대의 노동은 오로지 삶과 삶의 유지에만 집착하여 세계를 망각하며 필요의 충족에만 사로잡혀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모든 삶은 노예이다. 필연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위해서는 죽는 수밖에 없다! 삶 그 자체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필연성이 초래하는 그 고통과 삶을 제거할 수 없다. 노동의 수고를 덜어주는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생산물이 완성됨으로써 끝이 나는 반면에 노동과정에 적합한 유일한 도구는 살아있고 말하는 도구(노동자)뿐이기에 무한 반복된다.

이 노동과정의 무한성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린다. 부는 화폐로 변형되어 축적에 그 한계가 없게 되었고, 이 부의 재투입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내며, 이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부를 쌓아 생활하기 위해 노동자는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 소비자의 ‘필요’에 의해 모든 장인의 작업은 노동으로 대체되고,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를 종적으로 통일하게 만드는 노동 분업이 실시됨으로써 대량생산체제가 도래한다. 영속성, 안정성, 지속성이라는 제작인의 이상은 노동하는 동물의 이상인 풍부함을 위해 희생되었다. 노동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며 작업은 노동으로 변화되었다.

17) 소비자의 사회

이 노동사회에서의 노예적 삶은 노동계급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계급의 해방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생산성이 극적으로 발전하여 노동자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 하면, 인간은 자유로워질 것인가? 우리는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노동과 소비는 삶의 필연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동일한 과정의 두 단계이다. 노동이 인간을 옭아매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의 무한반복성인데, 그 반복성은 노동의 지속성 없는 소모적 성격의 다름 아니다. 고통과 노력이 필요 없는 소비는 생물학적 과정의 소모적 성격을 더욱 증진시킬 것이다! 멀쩡한 핸드폰을 6개월 주기로 바꾸고 필요하지도 않은 명품가방을 사들이며 ‘필요하기에 산다. 오히려 절약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삶은 노동으로부터는 자유로울지 모르겠지만(지들이 돈 벌어서 사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자본주의의 소비 메커니즘 하에서 필연성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다. 세계성을 보장해주는 지속성과 영속성을 파괴하는 이 소모적 소비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여전히 필연성의 노예이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자유와 최신 LCD TV를 가질 자유, 수 천 만원의 시계를 살 자유를 누리며 사는 위대한 소비자들! 그들은 자유인들인가?

제4장 작업

18) 세계의 지속성

육체의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 손의 작업은 ~을 재료로 하여 작업을 한다. 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물들은 인공세계를 구성하며 지속성과 가치를 소유한다. 이 지속성은 제작물이 그 사용자인 인간에 대해 상대적 독자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게 만든다. 이 객관적 사물세계는 상당 기간 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정체self-identity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의 목적인 소모와 작업의 특징인 사용use은 사용이 소모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사용에서의 소모와 파괴는 부수적인 현상인 반면에 노동에서는 본유적이다. 또한 사용대상물은 자신의 정체를 가지며 부분적으로 인간의 욕구에서 독립적이므로 노동의 산물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19) 사물화

호모파베르의 작업인 제작은 사물화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인간 손이 재료들을 그것이 원래 있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떼놓는, 폭력적 과정이다. 자연적 순환 과정에 순종하는 노동하는 동물과 달리 호모파베르는 자연적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전지구의 군주이자 지배자가 된다. 또한 작업은 ‘관념’, 혹은 ‘형상’이라는 모델의 사물화이기 때문에 생산품이 완성된다 해도 이 모델은 아무 손상도 입지 않은 채 생산품보다 오래 지속되며 이 모델에 따라 제작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지속성 없이 반복되는 노동의 반복과 작업에 내재하는 이런 잠재적 복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제작의 생산과정은 그 생산물의 완성으로 종결되는 동시에 생산과정은 이 목적(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노동과정은 생산물이 생산될 때가 아니라 노동력이 고갈되었을 때 끝나며(그 산물이 영속성이 없기에) 생산물 그 자체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 된다.

20) 도구성과 노동의 동물

원래 인간은 ‘객관적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알맞은 도구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계에 스스로 적응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생산이 주로 소비를 위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제작인의 활동에 매우 특징적인 수단과 목적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며 노동의 동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작인이 발명한 도구들은 노동의 동물이 일단 사용하기만 하면 자신의 도구적 성격을 상실한다. 모든 작업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목적 지향적 노력도, 생산물도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의 운동이며 그것이 강요하는 노동자의 리듬이다. 기계의 운동이 육체의 운동을 강요하며, 기계는 인간 실존의 조건이 된다. 자동화가 더욱 촉진한 이러한 변화는 기계가 세계와 그 사물에 봉사하는 것(인간노동을 덜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계)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고 파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계의 세계는 실재세계의 대체물이 되었다.

21) 도구성과 제작인

작업과 제작 과정에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생산과정 자체를 조직하고 지배한다. 모든 것은 희망하는 목적에 대한 적합성과 유용성의 관점에서 판단된다. 이 공리주의적 세계에서 모든 목적은 짧게 지속되고 더 나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이는 유용성(도구적 목적in order to)과 유의미성(내재적 목적for the sake of)을 혼동한 결과이며, 여기서 유용성은 목적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 목적-수단의 연쇄에 종지부를 찍고 유용성이 유의미성의 위엄을 획득하려면 인간중심적인 사회가 되어야한다.(칸트) 인간이 제작자가 되고 목적 그 자체가 되면 모든 사물이 수단으로 전락,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한다. 프로타고라스의 명제이기도 한 이런 생각에 대해 플라톤은 인간이 사용을 위한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된다면 인간은 사용자나 도구화하는 자가 되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 말하는 자, 행위 하는 자, 그리고 사유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22) 교환시장

노동하는 동물에겐 공론 영역이 없다. 그러나 제작인에게 정치적 영역은 아니라도 자신의 공론 영역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교환시장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 손의 생산품을 보여주고 그것에 합당한 존경을 받는다. 이 시장은 사회적 영역의 확대이며, 장인은 이제 ‘화려한 고립’에서부터 끌려나오게 되었다. 그는 이제 사용물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한다. 사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하기 위해 생산한다. 제작인의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공론 영역에서 교환되는 비율에 의해서만 보장받는다. 사용물은 모든 내재적 가치를 상실했으며 일반적 등가물 ‘화폐’의 유통은 그것이 결코 객관적 실존을 소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23) 세계의 영속성과 예술작품

교환될 수도 없고 유용성으로부터 분리된 채 남아 있는 유일한 제작물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예술작품은 그 영속성 때문에 가장 세계적인 사물에 속한다. 이 예술작품은 ‘사유’의 사물이다. 사유는 인식과 다른데, 인식을 대표하는 것은 과학이다. 인식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며 이 목표가 달성되면 인식과정은 끝이 난다. 하지만 사유는 목적도 자기 외부의 목표도 갖지 않는다. 사유는 두뇌력이라 불리는 논리적 추론과도 다르다. 이 논리적 추론은 세계를 건설할 수도 없으며 삶, 노동, 그리고 소비의 충동적 과정만큼이나 무세계적이다.

작업의 특수성은 바로 지속성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행위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이 행위하고 말하는 인간도 최고의 능력을 가진 제작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예술가나 시인, 역사기술가나 기념비 건립자, 기록자들이 이 인간의 행위와 업적을 사물화함으로써 불멸하게 만들어준다.

제5장 행위

24) 말과 행위에서 드러나는 인격

말과 행위의 기본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만이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고 이 차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데, 말과 행위를 통한 인간세계로의 참여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참여는 노동처럼 필연성에 의해 강요된 것도, 작업처럼 유용성 때문에 추진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의해 자극받는 것이다. 이 참여의 충동은 태어나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그 시작의 순간에 발생하며 모든 시작의 본질은 ‘예측불가능성’을 지닌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인간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 드러남은 오직 공론영역에서만 가능하다.

25) 인간사의 그물망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들

우리가 누군가를 ‘누구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어휘의 혼란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특별한 유일성, 그의 인격을 표현하는 말과 행위는 단어로 체화되지 못하며 그 흐름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이 말과 행위는 존재-사이(inter-est)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상에서 결과물과 최종적 생산물을 남길 수 없으나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영역은 사물세계만큼이나 현실적인데, 그것을 우리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 한다. 말을 통한 인격의 현시와 행위를 통한 새로운 시작의 출발은 항상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행위와 말의 직접적 결과들이 감지되는 그물망으로 귀속된다.

행위는 이 그물망을 매개로 이야기를 산출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거나 연출자일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생산품이 아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알 수 없다. 인간사는 이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고로 플라톤은 행위의 산물인 인간사 대신 ‘무대 뒤 행위자’의 개념을 도입했다. 역사철학도 마찬가지였다. 행위와 말의 구체적 내용과 일반적 의미를 물화 시키는 것이 예술작품인데, 그 중 특히 연극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이 유일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예술로 인간 삶의 정치적 영역을 예술로 전환시킨다.

26) 인간사의 연약성

행위는 결코 고립되어선 가능하지 않다. 행위는 본래적으로 그물망 속에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는 시작하는 자와 지도자, 스스로 행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동료들 간의 상호의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능은 명령/복종으로 이원화되었다. 행위의 첫 번째 특징은 모든 제한들을 개방시키고 모든 경계를 폐기하려는 내적 경향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치체제는 법률과 사적 소유, 가정의 한계 등의 다양한 제한과 한계선을 통해 행위의 내재적 무제한성에 제약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한계 설정은 행위의 두 번째 특징은 예측불가능성 앞에선 무력하다. 진정한 이야기는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만 알 수 있다.

27) 그리스인의 해결책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드러내는 자가 누구인지도 미리 헤아릴 수 없으면서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행위 주체의 본질은 이야기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만, 즉 행위 주체가 죽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아고라 광장에서의 전쟁(니체 표현대로 하자면)이 도시국가의 정치 개념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입법 제정은 정치적 활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입법과 투표로 결정한 것의 시행은 예측불가능성을 포기함으로써 행위가 아니라 생산의 결과였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구축을 통해, 행위의 연약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가장 무상한 인간 활동인 행위와 말, 그리고 가장 덧없는 인위적 생산물인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주는 것이 바로 폴리스라는 공간이다. 폴리스는 지리적인 도시국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위하고 말함으로써 발생하는 사람들의 조직체다. 고로,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너는 폴리스가 될 것이다.”

28) 권력과 현상의 공간

말과 행위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현상의 공간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이 현상의 공간은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필연적으로 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공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권력의 상실이다. 이 권력의 발생에 필요한 유일한 물질적 조건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므로, 고립된 자는 곧 권력을 상실하여 무능한 자이다.

권력(power)은 힘(strength)이나 폭력(violence)과는 다르다. 권력은 타인의 실존에 의해 한계를 받으며, 다원성의 조건에 상응하여 절제와 균형을 이루는 상호작용으로 더 많은 권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힘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타인의 현존에 의해 제지되고 균형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수의 상호작용이 개인의 힘에 명확한 한계를 부여한다. 이 힘으로 권력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폭민정치 또는 우민정치이다. 폭력은 모든 형태의 정치조직체의 조건인 다원성을 해치고, 힘보다 권력을 더 쉽게 파괴한다. 고립에 의존하는 전제정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권력은 공론 영역과 현상의 공간을 보존한다. 인간 세계는 말과 행위, 인간사와 관계들의 그물망, 이것들의 산물인 이야기의 무대가 되지 못하면 그 궁극적인 존재 근거를 갖지 못한다. 권력이 없다면 이 현상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전체주의) 고대까지만 해도 정치에 이런 위엄을 부여했고, 인간의 업적은 수단과 목적의 범주 밖에 위치하는, 순수현실태였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행위와 말은 폄하되기 시작한다.

29) 제작인과 현상 공간

노동하는 동물은 생명이 최고의 재산이라 믿고 공적 활동이 삶을 보다 편하고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관점에서 평가하고, 호모파베르는 생산품이 인간 자신보다 오래 지속될 뿐 아니라 가치 있다고 믿고 공적 활동이 세계를 보다 유용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가에 대한 관점에서 평가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행위와 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기 정체성의 실재성도, 주변세계의 실재성도 확립할 수 없다.

세계의 실재성은 세계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라는 공동감각에서 비롯된다. 고로 공동체에서의 공동감각의 감소는 세계로부터의 인간의 소외를 의미한다. 호모파베르들의 공론 영역이었던 교한 시장에서 이 소외가 발생한다. 교환시장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상품과 상품이 만나며 그곳에서 개인들의 고유한 인격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근대의 노동사회에서 천재들의 영역이던 예술은 수공업으로 여겨지며 ‘그’는 ‘그의 작품의 아들’이 된다.

30) 노동운동

작업은 비록 고립이 선행조건이긴 하지만 호모파베르가 생산하는 사물들의 유형적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비정치적이긴 하지만 반정치적이진 않다. 그러나 노동은 스스로 생존해야한다는 적나라한 필연성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육체와만 함께한다는 점에서 반정치적이다. 물론 노동을 ‘함께’ 하긴 하지만, 이 함께함은 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함께 노동하는 것으로, 다원성을 구별해주지 못하며 이 다수가 하나로 되는 결합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인간의 활력을 노동력으로 제한하는 소외로부터 벗어나 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그 활력을 되찾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노동운동은 노동하는 동물을 공론 영역에 등장하게 함으로써, 즉 반정치적이지 않게 함으로써 노동자를 해방시켰다. 사회 전체와의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은 공적 무대에 나타났고 이 때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 말하고 행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 이해를 옹호하지 않고 정치적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운동은 고유한 정치적 창의성에 기초했고 사회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은 하층계급도, 대중도, 사회도 아닌 민중을, 민중의 정치적 기획과 사상을 대표한다. 노동운동의 인력(引力)은 노동계급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다른 이익집단과 동일한 하나의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이 되어버림으로써 그 정치적 역할을 상실했다.

31) 행위를 생산으로 대체한 전통적 시도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위의 주인이 되는 활동에서 도피처를 구하려는 시도는 전통적으로 계속되어 왔다. 행위의 핵심인 다원성을 제거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플라톤의 철인왕과 모든 전제정치는 행위의 불안정성을 지배를 통한 평안과 질서를 공고화로 대체하고자 한 시도였다. 한 사람처럼 행위 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시작 – 사유 – 지식과 행위의 구별을 통해 다원성을 해치는 지배를 옹호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행동의 기준이자 척도, 즉 동일한 정도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확실성으로 다양한 인간행위와 말을 이것에 의해 측정하고 포섭한다. 이 준거 틀에서 유토피아적 정치체제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정치체제를 제작하려는 시도이다. 제작은 늘 폭력성을 띠며, 폭력은 도구적인 것으로써 그 목적에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관조와 이성이 인간의 최고 능력인 시대에서 노골적인 폭력 예찬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만을 알 수 있으며 그의 보다 고차적 능력은 생산에 의존하고 따라서 그는 우선 제작인이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근대적 확신은 이 폭력을 노골화한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행위를 생산으로 대체하고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해 정치를 수단으로 폄하한 것은 정치철학의 전통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근대는 도구생산가와 사물의 생산으로, 제작인으로 인간을 정의함으로써 그 전통을 매우 적극적으로 계승했다.

32) 행위의 과정적 성격

불확실성 때문에 행위를 제거하고 인간사를 생산의 산물로 취급함으로써 인간사의 연약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행위를 할 수 있는 또 새롭고 자발적인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자연에 적용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자연과학과 역사학에 적용되었다. 두 학문의 중심개념은 과정인데, 그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실제의 인간경험은 행위이다. 행위에서의 과정은 생산의 그것과 명백히 다르다. 생산과정의 힘은 최종 생산품에 흡수되어 고갈되지만 행위과정의 힘은 행위의 결과가 늘어날수록 더욱 증가한다.

이 힘의 증대로 행위는 엄청난 지속능력을 가지는데, 이 행위과정에 힘을 부여하는 환원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인간이 감내하기는 매우 어렵다. 서양정치사상의 전통들은 이 이유로 행위를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행위자는 자유를 사용하는 순간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행위의 결과를 통제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주권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33) 환원불가능성과 용서하는 힘

노동하는 동물은 제작의 세계성을 통해 노동과 소비의 필연성을 극복하고 제작인은 행위와 말을 통해 목적과 수단의 범주에서 구성되는 세계의 한계로부터 벗어난다. 반면에 행위가 가지는 환원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은 행위 외부가 아닌 행위 자체의 잠재력으로부터 치유 가능하다. 환원불가능성은 용서하는 능력을 통해, 예측불가능성은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용서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로부터 해방되며 약속을 통해 우리는 의심과 모순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두 능력은 타인의 현존과 행위를 의미하는 다원성에 의존한다. 이와 반대로 플라톤에 의하면 타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고 제한하는 원리의 정당성은 자기 지배에 있다. 나와 나 자신 사이의 확립된 관계, 올바른 정신, 영혼, 육체! 관계의 그물망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한 인간은 항상 죄를 지으며, 이 죄는 항상 용서하여 잊혀야 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고 행한 것으로부터 부단히 인간을 해방해야 하기 위해서이다.

34) 예측불가능성과 약속의 힘

용서는 종교적 맥락에서, 사랑과의 연관성에서 발견되기에 공론 영역에선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 간주되어 왔지만 약속의 능력에 내재하는 안정화의 힘은 전통이 늘 인식해왔다. 예측불가능성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과 모든 사람이 동일한 행위능력을 가지는 동등한 사람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행위의 결과들을 예견할 수 없다는 이중의 어둠이다. 이 어둠은 약속의 능력을 통한 자기 지배와 그에 따른 타인 지배에 의존하는 지배 형식의 성립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박살날 수 있다. 고립된 실재가 주권을 주장하고, 주권의 한계가 약속을 하고 지키는 능력 자체의 한계와 동일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할 때 그런 일이 발생한다.

행위는 인간사의 사멸성(필멸성)의 법칙을 방해한다. 행위는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 탄생성은 인간사의 영역인 세계를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황폐화로부터 구원한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제6장 활동적 삶과 근대

35) 세계소외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소외란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서론에서 밝혔듯이 지구로부터의 탈출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탈해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경향을 말한다. 지구로부터의 탈출이란 단순히 우주시대의 도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전지구적 탐험으로 인한 지구의 축소이다. 지구는 우리가 만지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됨으로써 세계에 존재하던 인간은 ‘세계와 인간’이라는 거대한 위치를 차지했다. 종교개혁은 (막스 베버가 지적한대로)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된 동시에 교회 재산 몰수를 가져옴으로써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케 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세계로부터 쫓아냈다. 사유제의 확립을 위해 사람들은 탈소유화 되어야했으며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간을 박탈당했다. 전유와 부의 축적을 위해 ‘내 것’이란 없으며 나의 것들은 끊임없는 생산과정 속에 투입되어야만 한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탈해 내면으로 숨어드는 세계소외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의 흐름이다. 자아에 대한 배타적 관심, 그리고 세계와 다른 인간존재와의 모든 경험을 그 자신 간의 경험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하려는 주체의 철학!

36) 아르키메데스 점의 발견

근대과학의 발전은 근대의 세계소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갈릴레오는 사변 수준에 머물던 우주에 대한 찬미와 지동설을 확증함으로써 근대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근대과학에 의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연 속의 인간은 외부, 즉 아르키데메스의 점으로부터 지구를 맘대로 할 수 있는 양 그 밖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아르키데메데스 점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들은 보편타당한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놀랍게도 실제로는 지구상에 머무르면서 우주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유한다!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이 지구소외는 수량물리학의 극적인 발전과 맞물린다. 대수학으로서의 수학은 공간성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모든 지상의 감각 자료와 운동을 그것으로 환원한다!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을 인간의 정신 구조와 동일한 유형으로 환원하고 번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간은 세계를, 지구를 만지작거릴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세계상像의 시대가 도래 했다!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상이다.

37) 우주과학 대 자연과학

자연과학은 자연을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러므로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다. 반면 우주과학은 자연 파괴,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위험에도 우주의 과정을 자연 안으로 끌어들였다. 근대인들은 지구물리학이 아닌 천체물리학이, 자연과학이 아닌 우주과학이 지구와 자연의 마지막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지구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며 지구 속의 시간, 공간, 운동, 속도는 우주에서의 절대적인 그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것이 된다. 이런 우주과학의 발전은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근대철학은 자신의 발생과 발전과정에서 전적으로 특수한 과학적 발견에 크게 힘입고 있다.

38) 데카르트적 회의의 발생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의 ‘회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진리나 현실은 존재하는 그대로 현상하지 않으며 현상에 대한 제거만이 참된 지식을 얻게 만든다. 존재와 현상은 완전히 분리되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떤 사상이나 경험도 회의를 비켜갈 수 없다.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것이 자신과 일치하여 현상하며 인간능력이 그것을 수용하는데 적합하다는 가정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 전통적 회의주의와 같이 단순히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가 아니라,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존재는 자신의 현상들을 창조한다!

그런데 이 현상들을 창조하는 인간만은 의심할 수 없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을 검증하고 진리를 향해 도달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없어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한 확실성이 없어도 인간만은 신뢰할 만 해야 한다. 적어도 회의한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고 실재적이다. 회의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는 확실하며, 그리하여 인간에겐 자기반성이 가능해진다.

39) 자기반성과 공동 감각의 상실

데카르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그의 “코키토에르고숨”이란 명제에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당하는 객체의 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객의 분리는 자기반성이라는 형식으로 생각하는 나와 생각당하는 나의 분리로 이어진다. 내가 나를 의심함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자기반성은 이와 같이 확실성을 산출하며, 인간은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이나 그 누구와도 직면하지 않는다. 자기 내부에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 근대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실재적인 것the real’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 있고,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악령이 없다는 논증을 통해, 라이프니치는 이 세계가 최상의 세계라는 주장을 통해 신의 선함을 증명해야 했다.

데카르트의 자기반성의 탁월함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째, 그에게 세계의 모든 대상은 의식의 대상이 되며 실재는 의식과정의 한 부분이 된다. 두 번째로 보편적 회의로부터의 확실성의 확보라는 데카르트의 방법은 새로운 물리학이 만들어낸 결론, 적어도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든 것은 알 수 있다는 그 결론과 일치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정신이 산출하는 형상들, 수학적 인식을 최고로 치켜세웠다. 1+1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2이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키데메스적 점을 인간 자신으로 옮겨놓았다.

40) 사유와 근대의 세계관

데카르트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인간 정신 안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지만, 이는 데카르트적 회의보다 더 심각한 회의를 불러온다. 우리가 발견한 것이 거시계나 미시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 자신의 정신유형일 뿐 아닌가? 우린 자연에 자신의 법칙을 부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모델은 우리의 감각 경험에 의해 만들어져만 한다! 즉, 실험의 세계는 항상 인위적 현실이 아닌가? 감각적 세계를 지워버림으로써 초월적 세계도 사라졌고 물질적 세계를 개념과 사유를 통해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졌다. 우주는 접근불가능은 물론 사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41) 관조와 행위의 전도

데카르트적 회의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의 전도를 가져왔다.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그의 손을 재간을 신뢰한 후에만 진정될 수 있었다. 즉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은 획득될 수 있었고 이것들을 찾는데 수동적으로 관찰하거나 단순히 관조하는 것은 신뢰하지 못할 것이 되었다. 지식은 우리가 스스로 행한 것에만 관계하기에 스스로 만든 정신의 실체를 다루는 곳에서는 수학적 지식이 지식의 이상이 되었고 지식은 보다 많은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는 본질을 가진다. 근대의 이러한 전도는 사유를 대하는 방식에도 잘 드러난다. 존재의 진리를 관조하기 위한 시녀였던 사유가 이제 행위의 시녀가 된다. 관조 그 자체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자.”이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은 인식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아르키메데스점의 인간 정신으로의 이동과 실재를 보증하는 인간 의식의 발견! 이제 인간은 이 세계로부터 영원한 진리의 세계(고대)로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반대로 두 세계 모두로부터 등을 돌려 자기 자신으로 잠입함으로써 세계를 상실한다. 그리하여 근대철학은 인지이론이자 심리학이 된다.

42) 활동적 삶 내에서의 전도와 제작인의 승리

관조가 차지하던 위치를 대신한 활동은 만들고 제작하는 활동이었다. 근대과학을 상징하는 ‘실험’에는 이 생산과 제작의 요소가 담겨 있다. 실험은 관찰해야할 현상을 스스로 생산하며 그래서 애초부터 인간의 생산능력에 의존하며, 제작자의 관점에서 자연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창조성과 생산성에는 과정 개념이 첨가된다. 본질과 이유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다. 과학의 대상은 더 이상 자연이나 우주가 아니라 역사, 즉 자연이나 생명 또는 우주가 존재하게 된 역사이다. 모든 학문이 역사학으로 탈바꿈하면서, 역사학의 핵심 개념인 발전이 과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자연은 실험을 통해 반복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기에 자연은 과정이 되었다.

결국 제작의 주체는 인간인데, 이는 근대철학의 자기 속으로의 도피와 맞물려 인간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역사학의 발전이 그러하고, 새로운 정치철학을 서술하려는 17세기의 시도들이 그러하다. 홉스는 코멘웰스commonwealth 또는 국가라고 불리는 인공물을 제작하려 한다. 이는 제작의 영역을 인간사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이제 제작은 활동적 삶 내에서 정치적 행위의 지위를 차지한다!

43) 제작인의 패배와 행복의 원리

제작인의 승리는 세계의 도구화, 수단-목적 범주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져왔다. 자연과학의 질서를 창조하려는 욕구, 생산성을 최고 기준으로 삼는 고전경제학, 유용성의 원리를 따르는 17세기 이후 영국철학과 18세기 프랑스철학이 모두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제작인의 승리는 자연스럽게 노동의 지위 상승을 가져왔다. 제작인의 승리를 가져온 과정 개념은 인간 자신을 초인간적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두 과정인 자연과 역사의 부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즉 인간은 자신이 가진 고정되고 영속적인 기준과 척도들을 박탈당했다.

이 제작인의 패배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의 도래가 잘 말해준다. 제작인의 가치는 그들이 도구를 만드는 자로 고려됨으로써, 즉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사물의 유용성에 의해 보장되는데, 이 사물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의 부산물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그 사물의 가치는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준다는 의미의, ‘행복’을 척도로 결정된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행복이란, 계산가능성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벤담의 쾌락 계산법이다.

44) 최고선인 삶

근대에서 노동하는 동물이 승리하고 삶이 궁극적인 준거점이자 최고선이 된 이유는 이 전도가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지닌 기독교 사회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의해 불멸성을 보장해주던 정치적 활동은 필연성에 예속된 저급한 수준의 활동이 되었고 인간은 죄를 치유하기 위해 지상의 삶에서 필요한 정당한 이해와 욕구들을 충족시켜야하는 필연성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동에 대한 예찬을 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교리와 유대 법률은 생명 보존을 그 토대로 삼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는 태어남(새로운 시작)에 불멸성을 부여하면서 지상의 삶을 최고선으로 만들 뿐이다. 노동은 오히려 형벌의 의미였거나 아니면 게으름을 방지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는 기독교가 모든 인간 활동보다 관조적 삶이 최우선시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론이었다. 근대는 기독교가 강조한 생명의 불멸성보다 삶이 최고선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삶 자체에 예속된 노동을 예찬했다.

45)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는 근대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초기의 이기적인 삶의 강조가 사회화된 인간에 대한 강조로 변화하면서 행위의 마지막 흔적이던 자기 이해관계 속에 함축되어 있던 동기마저 사라지고 남겨진 것은 예속되어 있는 삶의 과정 자체의 힘뿐이게 되었다. 근대인은 만들고 제작하는 일만을 고집하여 세계성의 경험은 일상적 인간경험의 영역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이 행위의 부활을 위하여, ‘사유’하라.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http://blog.aladin.co.kr/jobonzwa/392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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