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정치사상의 토대 정리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9
켄틴 스키너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길사 / 2004년 7월

제4장 피렌체의 르네상스

이 장에서는 15세기 초.중반의 인문주의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도덕과 정치의 문제에 관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한스 배런은 피렌체에서 꽃 피운 이러한 정치적 사유의 발전은 피렌체 사람들이 일련의 호전적인 독재자를 상대로 “시민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여야했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1402년의 피렌체-밀라노 분쟁을 포함한 독재자에게 맞선 피렌체의 고독한 처지가 피렌체의 많은 저술가들이 정치이론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어 공화주의적 자유와 시민적 참여를 역설한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런의 분석은 당시의 인문주의가 중세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며 페트라르카 식의 인문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1. 자유의 분석

실제 15세기 초 피렌체의 저술가들은 중세 딕타토르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형태의 법률 훈련을 받았으며 교회나 도시 당국 서기, 대학에서의 수사학 교수 등 비슷한 전문 분야에 종사했다.(콜루치오 살루타티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그들이 도덕적, 정치적 저술에서 다룬 주제의 범위 역시 공화주의적 자유였으며 자신들의 자유가 위기에 처한 원인과 그것을 확보할 최선의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15세기 초 저술가들은 중세 딕타토르들과 질문은 같았으나 대답은 달랐다. 인문주의자들은 파당의 위험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았다. 이는 피렌체가 1378년 치옴피의 반란을 겪은 지 4년 후에 새로운 헌법을 반포하면서 안정적인 시기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또한 사적인 부의 축적 역시 이들에게는 공화국의 축복이자 공공적 선에 도움이 되는 요소였지 자유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가 아니었다.(브루니가 대표적이다.)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바로 피렌체가 자립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상업적 활동의 발달로 대부분 부유한 시민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용병에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인문주의자들은 하나 같이 용병을 공화국의 자유에는 관심 없는 돈 밖에 모르는 자들이라 비난한다. 그렇기에 피렌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 3권에서 지적한대로 스스로 무장한 독립적인 시민이라는 이상을 달성해야만 했다.

인문주의자들과 그 선배들과의 유사점은 그들이 정치적 자유 그 자체를 분석하는 방식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인문주의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독립과 자치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외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의 자유와 공동체의 경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의 자유였다. 인문주의자들이 독립이라는 의미의 자유를 옹호한 이유는 그 때까지 살아남은 도시공화국을 시뇨레들이 더 이상 잠식하지 못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치의 의미의 자유를 옹호한 이유는 공화국의 일에 대한 참여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화국의 모든 일이 시민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며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전제정권에 의해 노예로 전락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의 개념과 관련해 인문주의자들이 딕타토르들의 견해를 이어받은 또 한 가지는 공화제가 어떤 체제보다 낫다고 하는 의견이었다. 살루타티는 군주제의 가치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격을 가했으며 브루니는 자유와 공동체의 위대함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에 대해 역설했다. 브루니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영예를 향한 희망이 열려 있을 때 자신을 자극해 스스로 고양되므로 공화국처럼 자기의 노력만으로 영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장되는 체제에서만 그 공동체는 번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유와 힘(시민의 덕, 비르투) 사이의 관계에는 전통적인 믿음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 번째는 건전한 정치생활을 위한 관건은 시민의 활력과 공공의 혼을 계발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오나코르소 다 몬테마니가 지적하듯이) 한 시민의 가치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측정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의 개념에 관해 인문주의자들이 토대로 삼은 마지막 견해는 역사철학적인 측면, 즉 로마제국 시대의 독재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자유가 더 낫다는 명시적 선호이다. 브루니는 “찬가”에서 카이사르가 아니라 공화정 말기의 술라 휘하의 고참병들에 의해 피렌체가 건설되었다면서 공화정 시기의 로마가 제일 번창했다고 주장한다. 로마가 절대 권력의 등장으로 인한 시민의 공공의 혼 상실로 쇠망했다고 파악하는 에드워드 기번 같은 이의 시각 역시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해석과 유사하다.

2. 고전적 가치의 부활

이제부터는 15세기 초 피렌체 저술가들과 14세기의 인문주의 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4세기 초 아레초와 파도바에서 수사학 강의에 뿌리를 두고 시작해 역사, 시, 도덕철학 등에서 고전 문헌을 연구하고 모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인문주의 운동은 15세기 초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인문주의 운동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추진력을 얻는 데, 그 첫 번째는 고대 세계에 관한 일차적인 정보가 급속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수도원의 도서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고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번째는 고대 세계에 대해 새로운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와 중세 유럽 사이의 근본적 단절점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인문주의는 고대 세계의 문화를 고대 세계 자체의 시각에서 접근해보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전통적인 아르스 딕타미니스라는 기존의 틀에 키케로의 수사학 교과서를 꿰맞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14세기 말엽부터 고전적 과거는 현재와 분리되어 그 자체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로마네스크(로마 비슷한)가 아닌 진짜 로마 양식을 재생하고자 했으며 회화에서도 고전주의의 비례를 정확히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난다. 수사학과 철학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은 페트라르카였다. 그는 진짜로 역사적인 정신에 입각해 키케로 자신이 수사학과 철학을 결합한 기초 위에 구축된 교육에서 어떤 특별한 가치를 추구했을지 탐구한 결과 교육의 목적에 대한 키케로의 감각을 재발견했다. 교육의 목적은 단 하나의 덕성을 배양하는 것, 즉 비르 비르투티스(진정으로 남자다운 사람)를 계발하는 것이다. 남자는 지혜 있는 사람인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자아에 충실해야했고 이를 위해 수사학과 철학을 교육받아야했다. 수사학은 지혜를 능변과 결합함으로써 철학적 신조가 공공적 사안의 처리에 마땅히 미쳐야 할 영향을 미칠 수 있게끔 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이러한 키케로 식 이상에 대한 열광적 옹호자가 되어 교육의 올바른 목표와 내용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인간 능력의 한도와 인생의 올바른 목적 등에 관해서도 기존의 견해를 변혁하고자 했다.

3. “비르투스”라는 개념

인문주의자들은 키케로 식 비르투스 개념의 저변에 깔린 전제들을 하나하나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1) 최고 수준의 탁월성을 인간이 실제로 터득할 수 있으며 2) 이를 위해 올바른 교육과정이 필수적이고 3) 교육의 내용은 수사학과 고대 철학의 체계적 연구로 이루어져야한다. 그들은 고전 교육이 공공생활에 참여하기 위한 최고의 준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고전 자체에는 찔러서 불을 지르는 단어들이 결여되어 있기에,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하여 수사학이 필요했다. 이런 믿음으로 당대의 인문주의자들은 수사학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다.

키케로 식 비르투스의 이상을 복구한 데 따른 두 번째 효과는 젊은이가 교육과정에서 정확히 무엇, 어떤 순서에 따라 배워야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에 의하면, 비르 비르투티스를 제대로 빚어내기 위해서는 역사, 도덕철학, 수사학을 교육해야한다. 더불어 14세기 내내 북유럽에서 신봉되던 믿음, 신사에게 알맞은 교육과 교회 직분에 알맞은 교육이 서로 다르다는 믿음이 깨어지고 둘 사이의 경계선이 고의적으로 지워졌다. 베르제리오는 “예절에 관하여”에서 문무에 모두 능한 군주를 찬양하며 정치, 학문, 전쟁에 모두 뛰어난 ‘르네상스적 인간’상을 추구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우오모 우니베르살레는 인간이 모든 면에서 탁월해질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건방지고 잘못된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인간상을 완전히 버리고 전인의 이상을 채택한다.

물론 페트라르카과 그 추종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고전적인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페르라르카는 고대의 도덕주의자가 찬양했던 주덕과 기독교적 근간을 이루는 덕성, 신앙과 영생을 비르투스의 덕목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고 하는 당대를 풍미한 아우구스티누스적 전제를 선명하게 거부했다. 이런 입장은 15세기 초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도 이어져, 이들은 인간이 최고의 탁월성을 획득할 권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살루타 티는 그럴 능력이 있으므로 인간은 비르투스의 추구를 자기 삶의 주목적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능력에 관한 이 같은 견해를 애국적 호소로 연결시킨다. 그들은 당대 레그눔 이탈리툼의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과거 조국의 영광(로마)을 회복하자고 호소한다. (살루타티, 브루니)

4. “비르 비르투티스”의 권능

인간이 최고의 탁월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과정에서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함축을 가진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세계를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 재편성할 수 있다. 역경이란 인간의 의지와 제 갈길을 가는 운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며 비르투스는 남성다움으로 운수의 여신 포르투나를 감동시킬 수 있다. 이런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반대하는 페라기우스적 입장으로의 선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운수 자체를 신격화하는 것은 신의 섭리라는 선한 권능을 부인하는 셈이며 세상 전체는 포르투나와 비르투스 사이의 투쟁이 아닌 오로지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 주장이 바로 중세의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대전제이다. (라티니 등)

그러나 15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 능력이 제한될 때 상황을 실제로 통제하는 요인은 섭리 같은 일관적인 힘이 아니라 운수라고 하는 변덕스러운 힘이라는 주장으로 돌아간다. 알베르티는 포르투나를 최고의 여신으로 일컫는다. 물론 운수의 변덕스러운 전횡은 인문주의자들을 극단적인 비관에 빠뜨리기도 했다. 포지오 같은 이들이 그러했는데,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비관론을 인간은 지성과 의지를 다양하게 작동시킴으로써 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긍정론으로 극복한다. 알베르티는 “가족”에서 가문들의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몰락을 무상한 변덕으로 가득 찬 운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비난이며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가문들이 자신의 비르투스를 상실할 때에만 비로소 운수가 그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권능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신조가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어서 왜 인간이 이러한 탁월성이라는 목표에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하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기대해도 좋을 보상들에 대해 서술하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의 전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지상에서의 영광과 영예의 추구, 그리고 세속적이며 찰나적인 영예의 추구를 비난한다. 그러나 1341년 비르투스를 추구해야하는 이유가 영광과 영예 때문이라는 생각이 형성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페르타르카는 시인의 자격으로 월계관을 수여받으면서, 문사의 열망은 영광을 받을 만한 인물이 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얻는데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영예 추구에 대한 열망은 16세기 말까지 하나의 이상으로 유지다가 17세기 중반부터 북유럽에서 사라진다.

5. 인문주의자들과 르네상스

지금까지는 15세기 초 피렌체 인문주의의 연원에 중세의 딕타토르들과 14세기 말의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는 인문주의자들과 스콜라주의 철학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문주의 운동이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동 및 의식적 거부로 더욱 확고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스콜라주의의 로마법 해석을 공격했다. 그들은 고대세계의 서술은 가능한 고대 세계의 시각과 개념에 입각해 연구되고 평가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바르톨루스 계열과 후기 주석학파 전체를 비판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 비판은 진정한 의미의 역사법학의 확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발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다른 문화권에서 건너온 인공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고집했다. 또한 고대의 법률책을 전혀 다른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법률 체계 사이의 비교 연구가 가능해졌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어 스콜라주의 특유의 학문관도 비판했다. 철학은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무엇인가 실제적인 쓸모를 보여주어야 했다. 첫째로 그들은 스콜라주의 강단학자들을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느라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고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소홀하다고 비판한다. 발라는 변증술사의 하잘것없는 논리 시합에 거의 일생을 바치는 ‘천사 같은 박사님의 덕목’은 대부분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두 번째로 그들은 강단학자들이 사회 정치 현안을 다루는데, 즉 정치생활에 유익한 영향을 주는데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페트라르카에 의하면 강단학자들은 덕성을 획득하는 대신 덕성의 정의를 배우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나, 진리를 아는 것보다 선을 의욕 하는 것이 낫다! 이러한 비판에서 모든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한다는 인문주의자들의 믿음과 순수한 여가나 명상(오티움)보다는 유용한 활동(네고티움)보다 가치 있다는 태도가 형성된다.

15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글쓰기의 형식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보다 폭넓은 계층을 상대로 말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지녔다. 또한 스콜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역사관을 택하게 되었다. 역사의 진행을 신의 목적이 점차로 현시되는 일직선적인 발전과정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역사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인간 만사의 진행경로는 돌고 도는 바퀴와 같이 흘러간다는 주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고대와 그 업적이 재현될 자기네 시대 사이에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만들어냈다. 이 암흑의 시대는 자기네 당대에서 끝나게 될 것이며, 이 변혁과 르네상스(재생)는 자신들의 책무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고대 세계의 성취를 자신들이 영광스럽게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6장 공화주의적 가치의 생존
5장에서 밝혔듯이 1454년 로디의 화약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군주제 정부형태가 승리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에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공화주의 정치사상에 관한 저술들이 등장했다.

1. 공화주의의 중심지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공화주의 이념의 중심지로서 가장 그 가치를 끈질기게 유지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공무원 대부분을 임명하는 책무를 지닌 본실리오 그란데, 외교, 재정을 담당하는 귀족원, 선출직 정부수반으로 봉사하는 도제로 구성되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헌정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결과 세레니시마, 즉 가장 조용한 공화국이라는 평판을 얻게 된다.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 등의 14세기 말 헌법 이론가들은 베네치아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파당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그 결과 가장 건전하고 가장 안전한 정부 형태는 세 가지 순수한 형태가 결합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융합된 상태라는 주장을 펼친다. 군주정의 요소인 도제와 귀족정을 대변하는 귀족원, 민주정을 대변하는 콘실리오 그란데의 세 개의 서로 다른 체제를 융합해 하나의 혼합 정치형태를 엮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16세기 무렵 메디치 가문에 의해 자유가 가로막힌 피렌체인들이 베네치아의 성공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사노티는 도제와 귀족원, 콘실리오 그란데를 결합해서 베네치아인들이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모든 관리의 선출과 모든 정책의 결정이 파당적 이익이 아닌 공동선을 극대화하는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게끔 선거와 투표 제도를 정교하게 고안해 시행했다고 생각했다.

베네치아인들 역시 자신들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지 연구했다. 콘타리니는 베네치아 헌정에 대해 누구라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모든 계층을 잘 혼합하여 모든 정부 형태가 각각 동등하게 균형을 이루고 그리하여 내부적 갈등의 위험이 효과적으로 상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16세기 말부터는 베네치아 정치이론은 이 자화자찬격 명제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공화주의 정치이론의 전통은 16세기 초반에 들어서 피렌체와 로마에서도 부활했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내내 이 도시는 점점 더 독재적인 정치체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1494년 프랑스 세력이 도래한 이후 이러한 흐름이 역류했다.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외세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었고 이런 실패를 기회로 반대자들이 정권 무능론을 펼치며 인민의 자유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했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에 피에로 데 메디치가 굴욕적으로 항복하자 도시 안에서 자생적인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일시적이었으며 메디치가는 1512년 에스파냐 군대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다시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1530년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세습 통치자가 된다. 로마의 경우도 1511년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이익만 드높여준 교황에 대한 반발로 공화파의 봉기가 일어났다. 그 봉기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교황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다시 되찾았다.

군주제의 확산을 막아보려던 시도는 실제로 무위로 끝났지만, 공화주의 정치사상은 매우 발전했다. 이 시기에 인민정부를 옹호한 이론가로서 활용할 수 있었던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가 사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 루카의 톨레미, 그리고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등이 대표하는 이탈리아 스콜라주의의 14세기적 전통이다. 또 하나는 살루타티, 브루니, 포지오 등이 대표하는 15세기 초의 “시민적” 인문주의이다.

2. 스콜라주의의 공헌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공화주의 정치이념이 개화하는데 끼친 스콜라주의의 공헌은 과소평가되어온 경향이 있다. 피렌체를 살펴보면, 1494년 이후 복구된 공화정에 대해 사보나롤라 및 그 제자들은 스콜라주의적 개념들에 입각해 변론을 펼치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본인을 예언자이자 동료 시민에게 신의 말씀을 알리도록 선택된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또한 인간사를 관할하는 것은 운수가 아니라 신의 의지라고 여겼으며, 영예, 영광, 명성을 달성하기 위한 추구에 비르투스를 바친다는 인문주의자들의 이상적 인간상을 경멸하고 기독교적 겸손과 거룩함이 인생의 온당한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전망조차도 종래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여러 종류의 피렌체 판 신화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이었다. 이처럼 피렌체의 전통적인 사상과 사보나롤라의 주장과의 연관성은 헌정질서에 대한 제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피렌체 시의 헌법과 정치에 관한 논고”에서 군주제는 피렌체에 최선일 수 없고 공화제 정권의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화제가 유지되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공화정만이 시민에게 진정한 자유의 향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자유야말로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로 지나친 사적 이익의 추구, 용병의 고용, 파당과 시민적 갈등의 만연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사보나롤라는 결론적으로 이 자유가 지속적으로 지켜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책은 시민 전체를 모든 정치 사안에 있어 최고의 권위로 대우하는 것이라 여기며, 전체 인민의 권위를 향유할 수 있는 일정한 숫자의 시민들로 구성되는 평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인민은 권력을 위임할 뿐이며, 자유의 보전은 무엇보다 시민과 정부가 하나이자 동일체로 되도록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511년 로마에서 터져 나온 교황의 전횡에 대한 공격 역시 당시 공화주의 이론이 스콜라주의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 귀족의 주권”을 쓴 마리오 살라모니오는 이탈리아가 전락하게 된 주원인을 약한 군사력과 엄청난 부의 결합으로 인지했다. 이 인식에 대한 결과로 그는 신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면서 훌륭한 시민 생활은 검약의 덕목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자가 존경을 받을 때 덕과 정직을 갖춘 사람은 경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시민 생활이 붕괴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1494년 야만인들의 침략에 있다. 그렇기에 도시는 자위 능력을 향상시켜야하며 용병에 기대어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나 살라모니오의 주된 관심은 시민의 자유가 보전되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갈 시민의 역량이 극대화되도록 보장하려면 도시의 생활을 어떻게 규율해야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살라모니오는 자유롭고 행복한 시민 생활을 유지하는 관건은 효과적 시민제도를 확립하는 데 있으며 그 제도의 유지는 시민 전체가 언제나 궁극적인 권위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답한다. 이 해법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그는 모든 일이 법률의 존엄성을 매개로 결정되어야하며 그것이 로마 인민의 역사적 권리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주권을 양도했다는 주장, 즉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논란이 사기임을 밝힌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금석학적 자료들 역시 로마 인민의 주권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로마에서 어느 프린켑스도 인민의 신하일 뿐이며 도시에 대한 궁극적 주권은 어떤 경우에도 인민에게 보유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8장 인문주의 정치사상의 수용

1. 인문주의자들의 조언자 역할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콰트로첸토(15세기)에 활약한 선배들로부터 방법론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사상에 대한 접근법도 물려받았다. 그들은 건전한 학문과 정치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과 정치에 뛰어들 젊은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인문학 교육에 대해 강조했다. 통치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와 덕스러운 정치의 원리들에 대한 논의를 결합한 수많은 논저들이 발행 되었다. 또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왕이나 군주, 정신과 귀족, 평의원, 행정관들을 대상으로 한 조언서를 저술했다. (엘리어트 경의 “치자라는 이름의 책”이 대표적) 조언서는 시민 전체 집단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대표되는 이러한 조언서들은 단순히 통치계급의 특별한 이익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개혁한다는 좀 더 일반적인 문제로 관심을 맞추어 가면서 후대에 일어난 공영사회 운동 와중에 더 발전했다.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장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생활에서 정치이론가가 수행할 역할에 관해서도 선배들을 따랐다. 그들은 철학자가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본질적 성격을 정치적 조언자로 간주했고 결국 통치자에게 봉사하는 비서 또는 외교관의 직책을 담당했다. 반면 공동체의 일반적 개혁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 조언자들은 조언의 문제를 왕과 군주를 위해 봉사하라고 요청받은 편에게 다가오는 딜레마로 다루었다. 그들은 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결코 공공적인 사안에 휩싸여 자신의 이력을 쌓기 위해 학문연구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네고티움보다는 오티움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어의 “유토피아“ 1권에 드러나듯이 공공적 사안은 전적으로 위선과 거짓에 의해 처결되며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 솔직히 조언해봤다가는 극도의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과 반문을 거쳐 인문주의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간다.

위의 설명에 대한 예외는 모어의 “유토피아”이다. 왕에 대한 봉사와 굴종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모어가 고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첫 째로 모어는 처음에는 조언의 이상을 조롱하지만 결국 삐딱하게나마 그 이상을 승인한다. 결국 그는 아무도 그 말을 경청하지 않으리라는 이유로 내놓길 거부했던 건전한 정치적 조언을 제공한다. 둘째는 자신의 인생 경로를 겨냥한 것으로 그는 조정에 들어가서 자신의 행운을 찾아보기로 내린 그 순간에 왕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어의 주장은 예외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역동적인 삶과 결부되는 가치를 옹호하는 데 주력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스타키의 “대화”에 드러나 있듯이 그들이 보기에 모든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하며 자기 공부의 달콤함에 이끌려 역동적 삶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나라와 친구들에게 악을 표출하는 것이며 이는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행동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잘 질서 잡힌 군주제가 모든 다른 정치형태보다 낫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고로 군주에 대한 조언자는 군주제의 “질서를 바르게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최고도의 공공적 중요성을 지니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가 군주에 대한 조언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고대 철학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일반적 신뢰를 공유했으며 정치적 지혜의 관건이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는 주장 역시 수용했기 때문이다. 비베스는 “교육에 관하여”에서 역사 연구의 실제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피력한다.

물론 정치에 관한 과학을 역사의 증거에 입각해 축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는 일정한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구치아르디니가 그러했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는 극단적인 피론주의를 전개했다. 그 근거는 과거로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 여부가 애당초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순전히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들의 행위에 아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진실보다 허위를 선호한다. 또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덕이 아니라 사악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부 인문주의자 대부분은 역사를 실천적 지혜의 양육자로 보았다. 뷔데는 역사를 가장 훌륭한 스승이자 정직하고 덕스러운 인생을 향한 우리의 인도자라고 선포했다.

2. 시대의 불의

인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본령을 조언자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했을 때 그들은 공통의 문제와 불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인문주의 정치사상의 전통 전반에 걸쳐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주제에 집중했는데, 그것은 정치적 건전성이 자기 자신 또는 파당적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사적 이익에서 해방된 공공의 복리는 언제나 보호, 유지되어야하며 군주의 관심사인 동시에 군주를 뽑는 인민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개혁이 심각하게 요청되는 시대로 판단했다. 공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스리는 폭군들이 넘쳐나고 시민적 책임감은 땅에 떨어졌다. 인문주의자들은 시민적 책임감이 붕괴한 책임을 왜곡을 일삼는 법률가, 게으른 수도승, 자신만을 챙기는 사제,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돌린다.(라블레)

인문주의자들 중 일부는 자기네 시대의 사회와 경제적 파탄의 원인을 설명하는데 좀 더 심각한 관심을 기울였다. “유토피아”와 “대화”로 대표되는 영국 인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먼저 귀족의 이기적인 무절제를 비난하며 다음으로 식량을 경작하는 것보다 양을 사육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지주들을 비난한다. 소수의 비양심적인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양이 사람을 먹는다! 이 같은 현실 진단이 에드워드 6세 시절에 등장해 호국경 서머세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집단 공영주의자들에게 재현되어 상세히 논의된다. 공영주의 운동 전체의 배후에서 영감의 주된 부분을 불어넣은 휴 래티머와 그의 젊은 제자들인 베콘과 레버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교육 배경과 신조에서 강한 인문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무신경한 개인주의의 침범에 맞서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이들 도덕주의자들의 기본 목표는 공공이익의 붕괴에 책임을 질 사회집단들을 비난하는 데 있다. 그들은 지주들이 지대를 올리고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목초지로 바꾸기 위해 울타리를 친다고 공격한다.(블링클로우, 베콘) 또한 두 가지 부류의 집단들이 사회적 무질서와 경제적 침체를 야기하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일찍이 모어와 스타키가 언급하지 않았던 상인과 누보 리시(졸부들)가 레버 등에 의해 비난당한다. 그들은 궁핍한 이들에게 돈을 거저주기는커녕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사악한 짓을 하며 자기네 손아귀에 들어온 물건을 계획적으로 구하기 어렵고 비싸게 만들기에 솜씨 좋은 도둑놈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상인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에서 벗어나 올라가기 위해 새로 획득한 부를 사용하여 공동체에 부여된 신성한 분수의 구조를 파괴한다.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하게 저술가들 중 일부는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는 책임을 정부에게 돌렸다. 당대 최고의 경제적 문제인 모든 물품의 보편적 품귀는 재화의 희소성과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 원인이었으며 이는 왕과 조언자들이 주화의 재질을 거듭 떨어뜨림으로써 스스로 불러드린 재난이었다. 잘못은 상인도 지주도 아니라 주화와 보석을 절하하도록 또는 재질을 떨어뜨리도록 설득해온 사악한 조언자들에게 있다.

3. 덕목들에 대한 강조

북부인문주의자들의 통치자와 행정관에 대한 조언에 있어서 정치적 성공의 열쇠가 덕의 증진에 있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15세기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제도의 개혁보다 마음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들 중 급진적인 몇몇은 시민적 인문주의자들과 질서 잡힌 공동체를 위해서는 시민 전체의 집단이 덕을 획득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네 가지 핵심적 덕목 등 군주의 덕목을 제시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엘리어트의 “치자라는 이름의 책”) 그 덕목은 관후, 자비, 언행일치 등이다. 뷔데는 “군주의 교육”에서 한 가지 속성마다 한 가지 예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 주제에 집중한다. 올바른 신념과 정직의 본보기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관후함의 사례, 폼페이우스는 모든 군주적 자질의 종합이다. 이와 더불어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모든 치자들과 주도적 시민들이 함양하기를 기대했던 추가적인 범주의 자질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사교성, 온후함, 거룩함이 그것이다. 따라서 인문주의적 메시지의 요체는 정치의 목표는 최고 수준의 덕을 달성하는 데 있으며 군주의 의무는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한 형태의 덕을 몸소 보이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왜 이러한 덕목들의 위치를 정치생활의 중심에 두었는지를 살펴보자. 에라스무스, 콜레트, 모어로 대표되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라는 명칭이 이를 설명해준다. 덕의 추구는 도덕뿐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며 이런 기독교적 덕목을 가진 자가 군주가 된다면 덕스러운 공영사회를 위해 일하는 군주와 인민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함께 일하게 된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 주민들의 제도가 현명하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들이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합리적 토론이라는 일상적 과정을 통해 윤리적, 종교적 확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룩함을 이룬 이유는 제반사들이 워낙 적절하게 질서 잡혀 덕이 보답받게 되는 사회를 그들이 구축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거룩함이란 덕에 입각한 삶을 사는 것으로 비기독교도 주민들이 기독교 주민들보다 이 목표에 있어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로 북부 인문주의자들은 부패와 이기심이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주도적 시민들과 더 나아가 공영사회 전체의 목표, 영예, 영광, 명성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덕의 추구야말로 영예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며 고상한 명성의 가장 확실한 기반은 스스로 공공연하게 공개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덕목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들 저술가들 대부분은 정치사회 전체의 목표와 관련지어 덕목의 역할을 고찰했다. 스타키 등 일부의 저술가들이 트레첸토(14세기) 인문주의자들과 같이 정치의 주목적은 인민의 자유가 유지되도록 보장하는 데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주된 경향은 콰트로첸토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정치의 근본 목적이 올바른 질서와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공영주의 이론가들도 이와 같은 시각에 동의한다. 모어는 모든 입법의 목적을 올바른 질서의 유지로 보았고 유토피아 주민을 가장 잘 질서 잡힌 인민이라고 찬양한다. 플라톤주의적 강조에서 연유하기도 하는 이러한 견해는 모든 공동체의 목적이 다중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에 따라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4. 리더십의 자질

정치생활에서 덕목들이 지니는 중심성에 대한 강조의 저변에는 정치적 리더십을 위해 필요한 자질들에 관해 급진적인 잠재력을 지니는 이론 하나가 깔려 있다. 우리는 혈통이나 부 위에 구축되는 세습적 지배계급을 거부하고 오로지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들만을 우리의 통치자 및 행정관으로 봉사하도록 지명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이러한 일체의 전복적인 함축은 완전히 중화되고 위계적이고 전통적인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제 현실에서 그 덕목들은 언제나 전통적인 지배계급에 의해 가장 충만하게 현시되고 있다. (엘리어트의 “귀족 또는 고귀함에 대하여”, 로렌스 험프리 등) 앞에서 언급한 덕목들은 그 자체로 불변의 것이지만 한결같이 어느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서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귀족에게서 빛나고 광채를 발한다.

전통적인 지배계급을 받아들이는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의 바탕에는 더욱 더 보수적인 함의가 깔려있는데, 그것은 가장 잘 질서 잡힌 형태의 정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차등구조를 건드려서는 안되고 그 구조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에서 이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주장은 곧 강력한 공격성을 띠게 되는데 이 공격성은 사회적 서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신들의 분수를 향상시키려고 시도했던 야심에 찬 신흥세력에 맞서서 기존의 위계질서를 보호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 의해 생성되었다. 올바른 질서는 분수의 유지를 전제한다.

5. 교육의 역할

통치자들에 의한 덕의 실현이 좋은 정치의 관건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그 필수적인 덕목들을 적절한 수준까지 획득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콰트로첸토의 선배들로부터 끌어온 북부 인문주의자들의 대답은 바로 지도자들에게 인문학 분야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건전한 강의와 건전한 정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들은 더욱 세부적으로 이상적 교과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했고 이것이 인문주의자들이 실제로 군주에 대한 조언자로 활약했다는 사실과 겹치면서 교육 이론과 실제에서 혁명을 불러오게 되었다. 후마니오레스에 관한 수련이 공공 생활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최초로 북부유럽에 도입한 이들이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지배 계급의 교육과 서기들의 교육의 구분이라는 오래된 관습 역시 이들에 의해 무너졌다.

http://blog.aladin.co.kr/jobonzwa/391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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