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 / 2011년 10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우다이모니아) 폴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에 대해 대답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그의 원리이다. 바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1094a|1|)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목적이란 기능을 의미한다. 의사의 기능은 병을 고치는 것이며. 의사의 행위는 병을 고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기능’을 잘 수행할수록 ‘탁월성’이 있는 의사라 불리며, ‘덕(아레테)이 있다’고 불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목적과 기능에 걸맞은 선택과 행위를 할 때 그는 ‘좋음’을 추구하고 따른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목적) 어떤 처방을(행위, 선택) 한다면, 그는 좋음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존재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행위와 선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매우 다양한 좋음들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이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잘 삶/행복)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최선의 좋음인 이유는 이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 모든 좋음들이 좋음이게끔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좋음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다. 예컨대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명예를 얻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돈을 벌려고 하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더 이상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질문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1097a|4|)

다른 말로 하면 에우다이모니아란 ‘자족적’인 것이다. 자족성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에우다이모니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이미 앞에서 다 언급하긴 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 또한 행위의 목적이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일반화해보자. 다양한 좋음들을 뛰어넘는 최상의 좋음이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능‘들’을 뛰어넘는 어떤 기능도 있지 않을까? 바로 ‘인간의’ 기능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란 바로 ‘이성’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이다. 그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는 의미가 첫째,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둘째이다.

즉 “인간 고유의 기능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1098a|14|)을 뜻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능을 잘 수행할 때 탁월성이 있다고 말한다. 기타를 치는 연주자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기타를 잘 칠수록 그 기타 연주자는 탁월성이 있는 기타 연주자인 것이다. ‘훌륭한’ 인간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이다. 즉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1098a|15|)

그런데 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좋음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는가? 탁월성은 ‘품성상태’가 아니라 왜 ‘활동’에서 성립하는 것인가? 간단하다. 품성상태는 그저 ‘상태’일 뿐이지 실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품성상태는 현존하면서도 아무런 좋음을 성취해내지 않을 수 있는 반면 활동은 그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098a|8|)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빌리자면, 품성상태는 ‘가능태(잠재태)’일수는 있으나 ‘현실태’는 아니다. 오직 활동만이 ‘현실태’이기 때문에 탁월성은 활동에서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성을 가진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상기해보자. 인간은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공유하는 부분으로, 영양과 성장을 담당한다. 반면 이성적인 부분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데, 이 역시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과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으로(욕구적인 부분) 나뉜다. 이렇게 두 부분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탁월성 역시 이 두 가지 차이에 따라 나뉠 수 있다.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지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는 지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은 성격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자유인다움, 절제는 성격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임을 밝혔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관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조적인 것이야말로 어떤 것을 행위 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우다이모니아가 그 자체로 원인이 되는 것처럼, 관조적인 활동만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 받는다. “관조적인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반면,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의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1177b|5|) 따라서 이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인간이 관조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생겨나고, 씨족이 생겨나고 국가가 생겨난다. ‘정치’가 생겨난다.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경제활동이나 인간의 외적 유복함을 채우는 행위는 자족 이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더 유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1197a|9|) “비록 땅과 바다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귀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1197a|10|) 유복한 삶은 자족 이상은 필요 없으며, 자족성을 갖추고 관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것이니까.”(1197a|10|)

http://blog.aladin.co.kr/jobonzwa/553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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