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안철수 현상, 그리고 정상근대 열망

안철수 현상, 그리고 정상근대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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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IT 기업인 중 한 명이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다.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한국사회를 휩쓴 ‘안철수 현상’은 2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대선구도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대중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에 대한 비평에서 공히 목격되는 맹점이 있다. 안철수 ‘개인의 성향’과 안철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더구나 안철수가 정치적 대안으로 막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기 그의 가치관이나 이념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지극히 적은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안철수 현상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안철수 개인과 그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구별하는 것이다.

안철수는 신자유주의자?

안철수 개인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존재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과 탈정치 또는 반정치주의자라는 비판이다. 물론 두 가지를 섞어 논하는 경우도 있다. 안철수의 저서나 강연,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이후의 행보를 보면 그를 대중의 정치혐오 정서를 이용하는 포퓰리스트나 반정치주의자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특히 최근 그가 정치개혁 방안으로 제시한‘국회의원 수 축소’ 같은 이야기는 구조적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데로 돌려 지지를 확보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정치학자들 상당수가 지적하는 한국 정당정치의 최대 문제는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는 계층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국회 의석을 줄인다고 해서 과소대표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안철수의 주장은 이혼율이 높으니 결혼을 금지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의 국회의원은 서유럽과 비교해보더라도, 오히려 대표성을 확보하기에 너무 적다는 게 문제다. ‘안철수=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은 어떨까. 실제로 많은 좌파, 그리고 일부 중도개혁진영이 안철수를‘착한 이명박’ 또는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해왔다.

문화비평가 문강형준은 탈정치와 신자유주의를 엮어 “탈정치는 이명박의 당선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말한다(‘탈정치가 이명박의 당선과 더불어 시작됐다’는 주장부터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 질서는 대중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생존’에 대한 열망만을 남겨놓았다. 이 열망이 이명박을 통해 좌절되었다고 해서 대중은 다시 ‘정치’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안철수라는 좀 더 ‘착한 이명박’을 갈구함으로써 경제-개인-안전이라는 완벽한 탈정치의 삼위일체를 즐기려한다”는 것이다(문강형준, 「안철수, 혹은 탈정치시대의 판타지」, 『문화과학』 68호).

물론 문강형준은 안철수가 신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라는 의미에 가깝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안철수의 이념과 대중의 열망을 구분하지 않고 섣불리 동일시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시장주의≠신자유주의

결론을 미리 밝혀두자면 신자유주의는 안철수 현상을 해명해줄 적절한 개념이 아니다. 안철수 개인은 성공한 자본가에 속하지만 신자유주의자라 보기 어렵다. 신자유주의를 종종 보수주의와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변혁의 사상’이며 그만큼 그 내용과 방식 역시 놀랄 정도로 급진적이다. 자본이 축적위기에 봉착하자 과잉유동성 및 금융화의 경향이 급속히 퍼져 나갔고 기존의 사회협약과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등의 공공성에 대한 전면적이고 광범위한 파괴행위가 국민경제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그러나 안철수가 저서나 강연에서 표현한 이념은 금융자본보다는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에 가깝고, 민영화나 노동에 대한 인식 역시 신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목가적’이라거나 ‘순진하다’고 표현해야 온당한 것이었다. 안철수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쟁이 발생시키는 효과를 철저히 신봉하며 제도와 규칙이 공정하게만 적용되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길이 열려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안철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시장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런 안철수의 시장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안철수의 복고적 자유주의

안철수의 생각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것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이념은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워 보이는 이념이 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특히 안철수의 다분히 도덕주의적인 경영철학은『국부론』보다는『도덕감정론』의 애덤 스미스와 더 가까워 보인다.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인간사회를 단지 효용가치와 효율성만을 높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또는 시스템으로 파악하려는 철학체계를 비판한다.” (박순성,『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2003), 108쪽)한국의 우파들에 의해 왜곡된 것과 달리 애덤 스미스는 ‘동감(sympathy)의 윤리’를 강조한『도덕감정론』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국부론』내에서도 온전히 시장만능주의자였던 적은 없다. 안철수의 시장주의는 일본경제가 아직 잘나가던 시기에 주목을 받았던 로버트 오자키의 ‘인간적 자본주의’와도 유사성을 보이는데 인간적 자본주의란 “자본 지향을 사람 지향으로 대체한”체제로서 인적자원을 최고로 중요시하는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유명한 경영 멘토들이나 경영자들과 비교해보더라도 확연히 ‘덜 신자유주의적’이며,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그런 경향은 더 강해졌다.

자기 계발하는 주체에서 우울증적 주체로

안철수 개인과 별개로, 안철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살펴보자. 설령 안철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대중들이 안철수라는 아이콘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열망을 표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중 역시 신자유주의적 주체라 단언하기 어렵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이른바 ‘자기 계발’ 열풍의 이면에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주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이 확산하고 있었다. 푸코의 후기 연구에서 비롯한 이른바 통치성(governmentality) 담론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출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 틀을 제시했지만, 통치성 담론에서 말하는 “지배 테크놀로지와 자기 테크놀로지의 매끄러운 상호작용”만으로 온전히 포착해낼 수 없는 현상들 역시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자기 계발에 끝내 실패한 사람들은 자기 계발하는 주체에서 우울증적 주체로 침잠했다. 성공신화에 취해있다가 문득 자신이 중산층에서 밀려났음을 깨달은 이들이 다시금‘치유(healing)’의 심리학, 정의와 공정의 윤리학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체제가 근본적으로 전복되는 변혁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속하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미쳐 돌아가는 한국사회가 ‘정상화’되길 바란다. 대중이 안철수에게서 본 미덕은 강력한 정치적 추진력이나 개혁의지가 아니다.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아픈 청춘에 눈물을 글썽이며 “미안하다”고 위로를 건네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참혹한 전쟁과 분단, 군사독재세력에 의한 압축적 근대화과정은 굴곡진 민족서사와 한(恨) 많은 개인서사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파괴되거나 손상된 많은 것들을 다시금 복원하고 정상화시키려는 시도와 요구는 그래서,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고방식이자 그 자체로 공동체의 보편서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구사회가 이미 성취한 근대 민족국가를 온전히 만들어내지 못한 데 대한 대중의 강렬한 정서적 회한(“친일파를 척결․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역사”, “지긋지긋한 당파싸움과 사대주의 근성”,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허리가 끊긴 한반도”)도 이런 사고방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정상근대 열망

안철수 현상의 본질은 정상근대(正常近代) 열망이다. 이 열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열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공히 현실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이다.그러나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은 그런 종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구된 현실을 안정화하려는 정념에 가깝다. 변혁에 대한 절박한 요구, 개혁에 대한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20년에 이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피로감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안철수, 그리고 안철수 현상을 ‘솔루션(solution)’이 아닌 ‘테라피(therapy)’라 부를 수 있는 이유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소수의견』·『88만원 세대』저자

xenga@naver.com  http://gradnews.org/tc/541

논단 – 안철수 현상, 그리고 정상근대 열망 , 2012/11/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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